소설리스트

20권 제76장 준비하는 자 (77/84)

제76장 준비하는 자

1

새하얀 설풍이 불어닥치는 극지의 하늘.

그곳에 갑자기 푸른 파문이 퍼졌다.

콰아아앙!

오로라가 사방으로 펼쳐지며 대기가 진동한다. 수십 줄기의 토네이도가 일제히 형성된다. 설원을 뒤덮은 눈더미가 일제히 말아 올라 허공 가득 안개처럼 흩뿌려진다.

대지가 미칠 듯이 요동치며 빙판 여기저기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 하나하나만도 그 크기가 물경 수십 미터, 그야말로 북지 전체가 과자조각처럼 깨져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천재지변 속에서도 한 곳만큼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사방이 새하얀 백색 설원 속에서 비현실적인 녹음을 품고 있는 기화요초의 대지, 그리고 그곳의 중앙에 위치한 순백의 신전만큼은 저 파괴의 행위에 눈곱만큼도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윽고, 거대한 구조물이 공간을 뛰어넘어 강림했다.

둥근 돔의 파편으로 보이는 그것은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족히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깨진 알의 파편처럼 보이는 거대한 부유체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은빛 설원 가득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닿을 듯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어둠이 북의 태양을 가리고 공간을 일그러뜨린다.

구름을 헤치며 알의 파편이 상공을 미끄러졌다. 녹음의 대지, 순백의 신전을 향해 그 거체를 들이댄다. 저 신전과 구조물은 원래 한 몸,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응당 자신이 존재해야 할 공간 좌표를 향해 돌진한다.

하지만 우주의 알, 그 파편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녹음의 대지 상공에 도달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장벽이 부유체를 가로막고 있었다.

순백의 신전을 뒤덮은 절대 방어 결계, 그곳에 충돌해 알의 파편은 계속 요동쳤다. 해변에 떠밀려 온 고래가 고통에 몸부림을 치듯, 한 공간에 고정되지 못하고 나타났다 사라짐을 반복한다. 공간이 생성되고 소멸되며 대기를 압박한다.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 ☆ ☆

순백의 신전, 세이어 템플의 한 복도.

“크으!”

플로팅 디스크를 탄 채 복도를 달리며 세렐라인은 치를 떨었다. 저 거대한 알의 파편이 무엇인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디스크가 제어실 앞에 도달했다. 그녀가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있는 이곳, 세이어 템플에선 사람이 스스로 문을 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어실 안을 뛰어들며 세렐라인이 소리쳤다.

“세이어시여!”

“알고 있다.”

이미 세이어도 굳은 얼굴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바깥 상황을 투사한 그 영상에 직경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조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광경을 비친다.

세렐라인이 물었다.

“이건 설마?”

세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옳다.”

그자다.

대륙 전체를 혼돈으로 밀어 넣은 자.

기존의 질서를 모두 파괴하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 자.

“마왕 레펜하르트!”

은의 현자들은 더 이상 레펜하르트를 권왕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가 보인 놀라운 이적, 그가 지닌 무시무시한 마법적 권능을 보면 도저히 그를 권왕이란 단순 무식한 칭호로 부를 수가 없었다. 레펜하르트의 전생에 대해 아는 세이어가 무심코 마왕이라 부른 이후, 모든 은의 현자도 자연스레 마왕이라 칭하게 되었다.

세렐라인의 외침을 뒤로한 채 세이어는 계속 영상을 바라보았다. 굳은 그의 표정은 내심을 읽기가 힘들었다. 분노한 것처럼도, 혹은 감탄한 것처럼도 보인다.

“……그렇군. 이런 방법이 있었어.”

깨진 알의 파편, 아카식 드라이브 제어 플랜트의 공간 일부였던 저 구조물을 보자마자 세이어는 바로 레펜하르트가 한 짓을 깨달았다.

‘확실히 이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이군.’

세이어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했다. 아카식의 전지 영역이라면 저 상황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었을 터였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이었으니까.

‘질문이 틀렸어.’

그는 아카식의 전지 영역에 ‘모든 상황’에서 공간 왜곡 결계가 파훼되는 상황을 묻지 않았다. 그저 ‘레펜하르트’가 공간 왜곡 결계를 파훼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물었다.

그 답은 ‘없다.’였다.

‘그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자가 고대에서부터 살아온 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저 시대의 지식과 정보를…….’

여기까지 생각하던 세이어가 갑자기 인상을 썼다. 세렐라인이 의아해했다.

“……세이어시여?”

다음 순간, 세이어는 어둠의 공간 안에 서 있었다. 그의 의식 속, 온갖 고대의 정보와 상념이 혼탁하게 뒤섞인 꿈의 세계다.

어둠을 향해 세이어가 물었다.

“네놈 짓이더냐?”

어둠이 한 청년이 되었다. 세이어와 쌍둥이처럼 닮은, 그러나 세이어에 비해 월등히 굴강한 육체를 지닌 청년이었다.

테스론이 히죽 웃었다.

“물어볼 필요가 있나?”

“그렇지. 네놈 짓이군.”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세이어는 단정을 내렸다. 이 의식 세계 안에서 그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궁금해하는 것만으로 모든 해답이 떠오른다.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 세이어는 테스론의 존재를 무시했다. 아예 존재 자체를 잊고 지냈다. 그 망각의 무의식 속에서 테스론이 한 짓, 레펜하르트가 한 짓, 그가 전한 모든 지식에 대한 정보가 순식간에 뇌리에 틀어박힌다.

세이어의 표정에 분노가 떠올랐다.

“……이런…….”

그것은 테스론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도록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다.

테스론이 비실거리며 웃었다.

“대단하더군, 그대는. 과연 신이라 칭할 만해. 오만해도 보통 오만한 게 아니야.”

육신을 빼앗기고 영혼의 죄수가 된 테스론은 세이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소멸되는 정신적 기생충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속에서 세이어의 기억을 뒤진다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목숨을, 아니 영혼을 걸고 도박을 행했다. 세이어의 기억을,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며 항시 공포에 떨었다. 이미 한번 들통 나기까지 한 일이었다. 그 당시는 정보를 수집한다기보단 엿봤다 수준이라 그냥 넘어갔지만 두 번은 용납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 번도 그대는 발밑을 내려다보지 않더군?”

잠시, 아주 잠시만이라도 세이어가 테스론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를 돌아본다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일이었다.

“한 번만 내 존재를 의식했다면 모든 것이 날아갔을 위태로운 짓이었는데도 말이지.”

통쾌한 듯 테스론이 광소를 터트린다.

“크크큭! 크하하하!”

굳은 세이어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도리어 희미한 미소마저 떠오른다.

“제법이로구나, 테스론.”

여유를 보이는 세이어의 모습에도 테스론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 아직도 신답게 굴겠다 이거지? 그 오만함이 결국 너를 죽일 것이다, 세이어!”

“그럴지도 모르지.”

의외로 세이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오만함이 일만 이천 년 동안 나를 살게 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일만 이천 년을 더 살게 해 주겠지.”

세이어의 얼굴에 분노가 사라졌다. 너무도 빠른 변화라 테스론이 되레 당황할 지경이었다.

세이어가 손을 들었다.

“벌을 내리진 않겠다. 하지만 다른 정보가 또 빠져나가는 건 탐탁지 않구나.”

그리고 가볍게 손가락을 튀긴다.

“눈을 감고 귀를 닫아라. 입을 다물고 숨을 멈춰라.”

테스론의 영혼이 비명을 터트렸다.

“크아아아악!”

지독한 암흑, 끔찍한 고독, 절대적 무감각이 그를 덮쳤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조차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비명조차 서서히 사그러진다.

테스론은 치를 떨었다. 이 지독한 고통이 벌이 아니란 말인가?!

절대적 고요 속에서 세이어의 목소리가 소리가 아닌 의지로서 전달된다.

“그대를 소멸시키진 않는다. 필레나와 약속한 것이 있으니. 그 아이는 약속을 지킬 가치가 있는 존재지.”

순간 테스론은 의아해했다. 말투가 어째, 필레나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잖아?

‘뭐지? 대체 그 애가 뭘 한 거야?’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어느새 어둠이 그의 의식마저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침묵하도록.”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테스론의 모든 것이 어둠 속에 파묻혀 버렸다.

☆ ☆ ☆

“세이어시여?”

세렐라인의 목소리에 세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의아해하던 그녀가 의문을 접었다.

의식 공간에서 일어난 모든 것, 그것은 현실에선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다. 세렐라인이 보기엔 그저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걸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세이어가 다시 영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물 밖으로 나온 고래처럼 요동을 치던 거대한 구조물은 어느새 잠잠해진 상태였다. 끝없이 명멸을 거듭하던 공간 진동이 사라지고 어느새 세이어 템플로부터 수 킬로미터쯤 떨어진 설원 위에 착지해 있다.

세이어가 중얼거렸다.

“개별 공간의 확정화가 이루어졌나 보군.”

☆ ☆ ☆

“우에에엑!”

“점심 때 절인 청어를 드셨군요, 실란 대주교.”

“……같이 먹어 놓고 뭔 말이에요, 카를 재상님? 그나저나 이거 대체 뭐예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실란은 고개를 들었다.

현재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낯빛은 창백하고 곱던 붉은 머리칼은 엉망으로 뒤엉켜 산발이 되어 있다. 뱃속도 왕창 뒤집혀 이미 한바탕 토했는데도 또 구토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만큼 괴상한 현상이었다. 분명 발밑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런 요동도 없었다.

그런데 천지가 요동친다. 굳이 느낌대로만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뒤틀리고 흔들리는 느낌?

“공간 고정이 불안정해서 그런 거야. 따지고 보면 존재가 흔들린다는 말도 틀린 건 아니군.”

태연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얄밉게도, 이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레펜하르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실란 말고 다른 이들은 전부 멀쩡했다.

“……나만 이런 거야?”

억울해 실란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하기야 여기 모인 이들치고 최소 오러 유저 아닌 이가 없다. 뭐, 카를은 아니지만 몸만 보면 오러 유저도 울고 갈 수준이고.

“아, 몸 약해서 서럽다. 그런데 마켈린 님은 같은 프리스트인데 왜?”

“나이 먹으면 인내심이 많아진다네, 실란 대주교.”

이게 인내심으로 버텨질 문제던가? 황당해하며 실란은 입가의 오물을 닦았다. 그러다 힐끔 일행 중 하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분명 오러 유저이긴 한데, 묘하게 인간미가 느껴지는 표정이 하나 보였다.

“시원하게 토하고 저랑 동지애를 느껴 보시는 건 어때요, 아스레일 경?”

“괘, 괜찮습니다. 이까짓 것쯤이야…… 우욱!”

“저런, 아스레일 경도 절인 청어를 드셨군요.”

“그야 점심 다 같이 모여 먹었으니 당연하지. 어쨌거나…….”

레펜하르트가 콘솔을 조작해 커다란 입체 영상을 허공에 띄웠다. 눈 덮인 설원과 그 너머의 녹음의 대지, 그리고 그 속에 보석처럼 빛나는 순백의 신전이 보인다.

이니야가 근심하며 물었다.

“……혹시 실패한 건가요?”

원래대로라면 저 순백의 신전과 이곳, 마스테라다 던전이 공간 결합을 통해 원상태로 돌아갔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저 절대 방어 결계를 뚫진 못한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모든 것이 예측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행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 밖으로 나가 볼까요?”

☆ ☆ ☆

“저들이 공간 왜곡 결계를 통과했습니다. 세이어시여.”

“그렇구나.”

담담하게 대꾸하는 세이어를 세렐라인이 살짝 흘겨보았다. 뭐래? 절대 못 온다며? 절대 뚫을 방법 없다며? 그럼 저기 떡하니 버티고 있는 수 킬로미터짜리 구조물은 대체 뭔데?

온갖 상념을 담은 세렐라인의 말없는 얼굴을 보며 세이어가 피식 웃었다.

“네가 나를 담았던 이가 아니라면 불경죄에 처해질 법한 표정이로구나.”

흠칫하며 세렐라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어찌하오리까?”

“모르겠구나.”

다시 세렐라인이 ‘불경죄에 처해질 법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제 와서 모르겠다니?

“혹시 절대 방어 결계도 위험한가요?”

“……역시 모르겠다.”

이미 세이어는 아카식 드라이브의 전지 영역에 질문을 던졌다. 이번엔 실수를 반복치 않고 확실하게 질문을 입력했다.

-모든 상황에서, 절대 방어 결계를 깰 방법을 찾으라.

대답은 바로 나왔다.

-3억 8천만 amw의 에너지가 동원된다면 결계 파괴가 가능함.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설사 세이어 자신이더라도, 제어 권한 코드를 지닌 그라도 저 절대 방어 결계를 해제하거나 부술 순 없었다. 그저 일부를 열고 닫아 드나들 수만 있을 뿐이다. 해제 시스템이 망가져 있기 때문에 권한 코드가 있어도 해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보다 확실한 질문을 더 던졌다.

-그만한 에너지가 동원될 요소를 나열하라.

-상전이 마력 폭축로 라그나로크, 시공융합포 니르바나, 공간전이탄 발할라, 차원 붕괴 시스템 제우스의 천둥…….

순식간에 몇십 개나 되는 고대의 파괴 병기가 줄줄이 나열되었다. 아무리 절대 방어 결계라지만 고대 기준에선 부술 수 있는 병기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한 번 거르기로 했다.

-개중 현 시점에서 가능한 모든 조합을 나열하라.

-시공융합포 니르바나, 위성 궤도 티아논 시스템 하강 및 자폭, 아토믹 버스터 열네 발 동시 발동, 미티어 스물아홉 발 동시 발동, 프로미넌스 템페스트 이만 삼천 발 동시 발동…….

‘응?’

잠시 세이어는 눈을 깜빡였다. 티아논 시스템이라면 아카식이 주입된 채 이 행성 북쪽을 돌고 있는 무인 위성 스테이션이다. 인간들로부터 사방의 수호신으로 섬김받으며 얼어붙은 티아논이라 불리는 무인격武人格의 신성神聖.

‘그 티아논 시스템 자폭으로도 이 결계가 부서지던가?’

뭐,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아득한 외공간 너머에서 떠돌고 있는 무인 위성 시스템을 레펜하르트가 무슨 수로 조작하겠는가? 그냥 스테이션도 아니고 아카식이 주입되어 완전히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지.’

잽싸게 전지 영역으로 티아논 시스템의 상태를 파악했다. 예상대로였다. 외부의 어떤 접근도 거부한 채 여전히 이 항성 주위를 고고하게 돌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티아논 시스템 자폭은 아니고.’

남은 건 아토믹 버스터 열네 발 동시 발동이니 미티어 스물아홉 발 동시 발동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것밖에 없다.

그래, 이번에는 확실하다. 레펜하르트에겐 이 절대 방어 결계를 뚫을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이.

“하지만…….”

그럼에도 세이어는 세렐라인에게 모르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공간 왜곡 결계를 파훼한 자가, 설마 절대 방어 결계에 대해 아무런 대책 없이 이 자리에 나타났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레펜하르트가 뭔 짓을 했는지 들은 세렐라인이 추측을 내놓았다.

“혹시 제어 플랜트의 파편을 조작해 공간 왜곡 결계와 절대 방어 결계를 한꺼번에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요?”

“그 정도로 마학에 무지한 자는 아니다.”

고개를 저으며 세이어가 흥미어린 눈동자를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난 저자가 절대 방어 결계를 부수었으면 하는 기대도 좀 있구나.”

“예?”

황당해하며 세렐라인이 세이어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어째 진심이었다.

“궁금하구나. 대체 무슨 수를 쓸지.”

눈앞의 대적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인간을 벗어난 저자는 계속 그의 예상을 벗어나왔다. 분노할 법도 하지만 그보단 호기심이 먼저 일어난다.

이윽고 영상 속 알의 파편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걸어 나왔다.

예상대로 그들은 레펜하르트와 그 수하들이었다. 온갖 이종족이 모여 있는데다 하나같이 개성이 확실하니 척 보기만 해도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다.

맨 앞에 선 거구의 사내, 레펜하르트가 하늘을 바라보더니 뭐라 말을 했다. 워낙 눈폭풍이 거세게 불고 거리가 멀어 음성까진 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명령에 따라 일행이 뭔가를 준비하는 것이 보인다.

세이어가 눈을 빛냈다.

“뭔가 시작하려는가?”

어금니 큰 트롤이 주술력으로 불을 피운다. 세 개의 모닥불이 삼각 형태로 놓였다.

“트롤의 주술력이 가미되는 수법인가? 트롤 주술은 은의 시대에 없었으니 정보망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겠군.”

그러자 오크 전사와 인간 전사가 불꽃 주위로 철제 삼각대를 설치한다. 세이어의 눈빛이 더더욱 심오해졌다.

“세로로 설치하다니, 3차원적인 마법진을 구축하는 건가?”

다른 이들도 빠르게 움직인다.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불꽃 주위에 둥글게 배치한다. 금속질의 둥근 원판이었다. 술식 구성을 위한 촉매인가 싶어 세이어는 더더욱 눈을 부라린다.

잠시 후 엘프 여인이 냄비를 꺼내 불 위에 올렸다. 뭔가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남방 군도의 마녀 주술 같은 건가? 하지만 저건 그냥 미신일 뿐인데?’

트롤 주술과 달리 남방 군도의 마녀들이 사용하는 수법은 진짜 주술이 아니다. 단순한 허세와 약학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점점 세이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어째 보면 볼수록 뭔가 이상했다.

“으음…….”

그때 세렐라인이 현실을 꿰뚫었다.

“저거 그냥 밥 짓는 거 같은데요?”

☆ ☆ ☆

돼지고기 스튜가 고소한 냄새를 피우며 보글보글 끓는다. 질 좋은 돼지고기에 순무, 당근, 양파, 감자 등을 넣고 끓인 이 스튜는 시리스의 자신작 중 하나였다.

이미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지 오래지만, 원래 그녀는 슬레이어로 교육받은 엘프 노예다. 주인을 섬기는 여검사 미녀라는 콘셉트상 슬레이어들은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고, 특히나 이렇게 길바닥에서 차리는 요리를 집중적으로 교육받는다. 어차피 슬레이어 구매할 정도 귀족이면 자기 집에는 따로 전용 요리사가 있기 마련이니까.

간을 본 시리스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식사하세요!”

사방에 설풍이 몰아치는 극한의 대지에서 뜨끈한 스튜 한 그릇은 실로 고마운 존재, 다들 감사하며 스튜를 뜨고 빵을 씹기 시작했다. 뭐, 일행이 자리 잡은 모닥불 주위엔 레펜하르트가 쳐 놓은 냉기 저항 결계가 있어 실제론 하나도 춥지 않지만 어쨌건 분위기란 게 있는 법이다.

그렇게 식사를 하다 말고 실란이 불안한 듯 물었다.

“적지를 눈앞에 두고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화기애애한 캠핑 분위기긴 한데, 지금 그들은 인류의 신과 최후의 전투를 하러 가는 몸인 것이다. 목적지가 먼 것도 아니고 코 앞, 고개 들면 뻔히 적의 본거지가 보이는 판이다. 이런데 이렇게 느긋하게 밥이나 먹고 있어도 되나?

“배 속이 든든해야 제 힘을 내지.”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대꾸해도 실란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저쪽에서 먼저 공격하는 거 아녜요?”

“그러려면 저 절대 방어 결계 일부를 열어야 하는데, 굳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난공불락의 철옹성에 문 잠그고 들어가 있는데, 왜 굳이 성문을 열고 적이 침입할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뭐, 명예욕에 불타는 장수라면 그런 바보짓을 할 수도 있겠다만…….

‘세이어가 그런 타입은 아니지.’

세이어의 성격이라면 절대 방어 결계 앞에서 온갖 짓 다 하다 좌절하고 돌아가는 레펜하르트 일행을 보고 음흉하게 웃을 것이다. 전생의 자신도 비슷한 종자였는지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어.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고. 그러니 이참에 배도 채우고 기력도 회복해 놔야지.”

과연, 식사 다 끝내고 설거지까지 하고 짐 정리까지 다 마친 후에도 세이어 템플 쪽은 고요하기만 했다. 슬슬 출발하려나 싶어 러스가 물었다.

“그럼 이제 움직입니까, 형님?”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본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좀 더 기다려야 한다.”

다들 몸을 풀고 기력을 충전하기 위해 휴식을 취했다. 오러 유저나 주술사나 마법사나 성직자나, 심지어 엘리멘트를 사용하는 정령사라 할지라도 힘을 충전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바로 명상이다.

저마다 정신을 집중하고 전투에 앞서 최적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게 40여 분 정도가 또 흘러갔다.

그런데도 레펜하르트의 대답은 같았다.

“아직이다. 좀 더 기다려야 해.”

답답해진 실란이 기가 차 중얼거렸다.

“아직도요?”

이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실제로 세이어와 세렐라인도 똑같은 소릴 하고 있었다.

“아직인가? 저놈들 대체 무슨 수작이지?”

“그러게요,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순백의 신전을 바라보며 이니야가 슬그머니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슬슬 움직이셔야 하지 않나요? 아무리 시간이 남았다 해도 미리 준비는 해 두시는 게…….”

“필요 없습니다. 전 아무 짓도 안 하니까요.”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이니야가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그녀였지만, 저 성격에는 역시 불만이 있었다. 뭔가를 준비하면 주변에 절대 말 안 해 주고 혼자만 알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펑펑 터트린다.

‘마법사라 그런가? 꼭 저렇게 연출을 하려고 한다니까?’

얼마나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문득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군!”

2

어느새 폭풍이 가라앉았다.

공간 폭주를 일으키던 마스테라다 던전이 지표에 내려앉은 지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당연히 그 여파로 일어난 대기의 흔들림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꽃이 흩날리는 고요한 설원의 하늘, 레펜하르트가 미소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두가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레펜하르트의 일행은 물론이고, 세이어 템플에서 영상으로 지켜보던 세렐라인과 세이어 역시.

문득 레펜하르트가 뇌까렸다.

“열려라, 공허의 문이여.”

그것은 마법의 발동어가 아니었다. 어떠한 마력도, 언령의 힘도 담겨 있지 않은 평범한 혼잣말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열렸다.

우르릉!

희미한 굉음과 함께 푸른 하늘에 검은 구멍이 뚫린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 곳곳에서 검은 구멍이 생성되고 또 생성된다.

“……이건?”

“뭐야? 뭔가가 온다?”

기감을 느낀 러스와 타시드가 흠칫 놀랐다. 아득한 상공에 생성된 검은 구멍은 대략 2, 3미터 정도의 직경을 지니고 있었다. 드넓은 하늘에 비하면 점이나 다름없는 작은 구멍들.

그 너머로 거대한 공간이 느껴진다. 그 공간을 통해 강렬한 기운이 설원의 대지에까지 손을 뻗친다.

이윽고, 구멍이 불길을 토했다. 그리고 하늘이 깨졌다.

불타는 구멍을 중심으로 상공에 금이 생기며 이내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박살 나 직경 수십 미터의 거대한 공허를 연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구체, 한때는 외공간을 떠돌아다닐 뿐이던 차갑게 식은 암석 덩어리였지만 이 항성의 대기권에 접한 지금은 가공할 마찰열로 인해 지옥보다도 더 뜨겁게 타오르는 존재.

“미티어?”

이글거리는 파멸의 불덩이가 지표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 ☆ ☆

콰아아아아아!

대기를 찢으며 운석이 낙하한다. 가공할 파괴의 철퇴가 순백의 설원을 향해 성난 황소처럼 돌진한다.

이니야가 기겁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아직 허공에 떠오른 다른 검은 구멍을 향해 있었다.

“……설마?”

지금 설원의 하늘에 열린 검은 구멍은 하나가 아니었다. 모두 서른 개였다.

콰아아아아아!

모든 허공의 구멍이 깨져 가며 순차적으로 불타는 운석을 토한다. 단 한 개만으로도 지상 최대의 도시 중 하나인 제클린을 반파하고 오크라트를 지상에서 지웠던 가공할 존재가 무려 서른 개나 모습을 드러낸다. 드넓은 하늘 위로 시뻘건 불길이 기나긴 빗금을 긋고 또 그어 댄다.

불과 몇 초, 그러나 보는 이의 망막에 강렬히 아로새겨지는 낙하의 순간이 끝났다.

운석 하나가 세이어 템플에 충돌했다.

파앙!

파문이 일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세이어 템플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장벽이 일순 드러나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요동을 쳤다.

그러나 장벽은 깨지지 않았다. 은의 시대, 신의 힘조차 다루던 아득한 고대 문명에는 아무리 강력한 운석 소환 마법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힘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스물아홉 개의 운석이 남았다.

팡! 팡! 파앙!

하늘을 질주하며 운석들이 연달아 세이어 템플의 절대 방어 결계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대기가 찢어지고 돌풍이 불고 장벽이 뒤흔들려 빛의 파문을 터트리고 또 터트린다.

영상을 지켜보던 세렐라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결계를 부술 조건으로 세이어가 한 말을.

‘글쎄다? 미티어를 동시에 한 서른 방쯤 날리면 뚫리기야 하겠지.’

지금 그 서른 발의 미티어가 세이어 템플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운석이 결계를 두들길 때마다 착실히 방어장이 흔들리고 그 속에 깃든 권능이 소모되어 간다.

절대 불가능하다던,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던 현실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세이어시여?”

어느새 세이어는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였다. 영상을 지켜보는 그의 표정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호기심을 채우고자 하는 흥미는 사라지고 당황과 당혹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맙소사.”

인간의 신이 인간의 감정을 입에 담고 경악한다.

“뭘 어떻게 한 거야?”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무심코 아카식의 전지 영역에 묻는다.

‘답을, 이 현상의 답을 구하라.’

전지 영역은 빠르게도 해답을 내놓았다.

-불명.

☆ ☆ ☆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웃고 있었다.

‘지난 두 달간 고생한 보람이 있군.’

이차원에서 현세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레펜하르트는 세이어 템플을 둘러싼 결계 정보를 입수했다. 거리를 속이는 공간 왜곡 결계와, 모든 것을 가로막는 무적의 방패인 절대 방어 결계를.

공간 왜곡 결계는 마스테라다 던전과 시공의 눈, 우주의 알에 속했던 원천 공간을 이용해 우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절대 방어 결계는 우회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연구하고 또 고민해도, 저 방어 결계를 깨는 방법은 같은 수준의 어마어마한 파괴력으로 맞받아치는 것뿐이었다. 뉴클리어 버스트나 미티어를 수십 발씩 때려 박는 것 외엔 도무지 답이 없었다.

현세는 물론이고 전생의 그가 수백 년을 더 마법을 연구한다 해도 저 정도 수준의 마법을 연사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세이어 템플의 위치를 알고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수동적으로만 반응하고 있었던 차다.

그러던 중, 평소처럼 마법 연구를 하다 잠시 머리라도 식힐 겸 대련장에 나섰던 날이었다.

제라드가 러스와 타시드를 데리고 훈련을 시키는 중이었다.

“허공검, 인피니티!”

러스의 공간 절단의 비검이 제라드를 노린다. 아무리 짐 언브레이커블이더라도,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벨 수 있는 절대 무적의 칼날이 제라드의 어깨를 향해 쏘아진다.

제라드는 간단히 피했다.

“쯧, 여전히 선행 동작이 크다!”

러스의 허공검, 인피니티는 굉장한 기술이지만 약점도 명확했다. 일격에 모든 걸 거는 방식이라 단발성인 데다 사정거리도 5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타시드처럼 전투 예지가 아니더라도 제라드 수준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면 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명검을 들어 봐야 그걸 휘둘러 적을 베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호되게 꾸짖으며 러스의 전신을 가볍게 만져 준다. 제라드 기준에서나 만져 주는 거지 일반인 기준에서 일격, 일격이 피를 토하고 내장이 박살 나고 뼈가 부서지는 위력이었다. 당연히 러스가 작신작신 두들겨 맞고 대련장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뒤이어 타시드도 돌진했다.

“제 차례입니다!”

전투 예지를 지닌 타시드는 제라드로써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제라드도 타시드를 붙잡긴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타시드가 유리하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자신의 통찰력을 너무 믿지 마라. 통찰력이 뛰어난 적이라도 상대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제 건 전투 예지라던데요?”

“그게 그거지.”

타시드의 사방에서 폭풍 같은 권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사방을 점유한 융단 폭격, 알아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한 펀치의 폭우다.

“그냥 알아도 못 피하는 외통수로 몰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타시드의 전신에 멍이 늘어 간다. 처맞다 못해 타시드가 또 하나의 비기를 꺼내 들었다.

“크윽! 제라드 소드!”

아무리 제라드의 일권이 강렬해도 시간 동결의 힘을 지닌 이 검을 부술 순 없다. 하지만…….

“그건 제법 쓸 만한 기술이지만 그래 봤자다.”

제라드는 가뿐히 손목에 스냅을 줘 변형 훅을 날렸다. 타시드의 검을 피해 관자놀이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결국 타시드도 대련장을 데굴데굴 구르며 친우의 곁에 자빠지게 되었다.

“아이고고…….”

“아우, 좀 살살 하시지.”

인상을 쓰며 어깨며 허리를 주무르는 러스와 타시드를 보며 제라드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두 놈 다 크게 늘었구나. 역시 젊은 놈들은 진도가 빨라.”

어느새 그도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러스와 타시드의 수준이 크게 올라 그도 상당히 집중해야 했다.

“네 녀석들이 기술이 단발성이었기에 망정이지, 연타로 들어왔으면 위험했을 게다. 그런데 왜 그 좋은 기술을 단발로만 쓰는 게냐? 한 번 때려서 안 되면 두 번, 두 번 때려서 안 되면 세 번 때려야지!”

괜히 스파이럴 가드의 발전형이 더블 스파이럴 가드, 트리플 스파이럴 가드인 게 아니다.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리가 저런 식인 것이다.

듣던 러스와 타시드가 억울해했다.

“아니, 이게 이래 봬도 공간을 베는 건데 이걸 어떻게 연타로 씁니까? 한 번 날리는 것도 벅찬데.”

“그러게요. 은인 말이 난 시간을 얼린다던데, 시간이란 게 막 여러 번 얼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잖습니까?”

두 사람이 공간이나 시간에 대해 뭘 알아서 저러는 건 아니지만, 어쨌건 타당한 반문이긴 했다. 하지만 제라드는 코웃음을 쳤다.

“누가 안 된다고 하더냐?”

태산처럼 우뚝 서서 귀여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린다.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지 마라. 못한다고? 무리라고? 세상에 그런 건 없다. 공간이 문제라면 공간을 뛰어넘고, 시간이 문제라면 시간을 뛰어넘어라.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라. 그렇지 못하면 무인으로서 죽은 것과 같다.”

뭐, 제라드도 시간이나 공간에 대해 뭘 알고 저런 소릴 하는 건 아니다. 당연히 스스로의 한계를 짓지 말라는 교훈이다. 러스와 타시드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투지를 다진다.

“네!”

“좋습니다, 해보면 되는 거 아니유?”

반면, 보고 있던 레펜하르트에겐 그 외침은 다른 깨달음으로 와 닿았다.

“……가만?”

한계를 규정하지 말라느니 하는 제라드의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다. 비록 궤는 다르지만 레펜하르트는 마법에 있어서 제라드 이상의 경지에 다다른 자다. 저런 간단한 경구 따위는 이미 젊을 때 통과했다.

그가 깨달은 건 다른 쪽이었다.

“……공간을 뛰어넘고, 시간을 뛰어넘으라고?”

‘사부가 참, 좋은 말씀을 해 주셨단 말이지. 뭐, 본인은 알고 한 소리가 아니겠지만.’

당시 레펜하르트의 뇌리에 스쳐 지나간 것은 한계 돌파니 뭐니 하는 근성론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차원으로 튕겨 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이차원을 두 번 다녀왔다. 한 번은 전생에 러스의 허공검에 마법이 꼬였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세이어의 아토믹 버스터를 피하느라 스스로 몸을 던졌을 때.

그리고 귀환했을 때 분명 그는 의아해했다. ‘뭐야? 벌써 반년이나 지났다고?’라고.

이 행성의 외곽을 맴도는 차원 계면과 이차원의 접점을 타고 흐르는 시간의 강은 같은 방향이면서도 저마다 속도가 다르다. 그 사실을 깨닫고 이차원 탐사용 오브를 이용해 시간 흐름의 차이를 연구해 보려는 생각도 했었다. 뭐, 이후 워낙 바빠서 시작도 못 하긴 했지만.

그것이 단초가 되었다.

‘이차원은 현실과 시간 흐름이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흐름은 분명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금방 돌아온 것에 비해 현생의 레펜하르트가 반년이나 걸린 것처럼.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다.

‘내가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면, 내가 날린 마법도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소리잖아?’

저건, 이차원에서 동시에 마법을 날려도 어떤 것은 금방 돌아오는 것에 비해 어떤 것은 반년 뒤에나 돌아오게 된다는 소리다. 한마디로 마법의 현세 강림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레펜하르트는 치밀하게 이차원 시간 흐름을 연구했다. 어느 흐름에서 얼마나 시간이 흐르는지, 어느 흐름이 시간이 느리게, 혹은 빨리 가는지 철저히 분석하고 파악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시간 흐름의 방향이 일정하니 과거로 돌아가거나 같은 존재가 같은 시간대에 중첩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가 서로 다른 시공 격류를 타고 동시에 같은 시간에 중첩되는 건 가능해!’

이는 마치 수하 여러 명을 시간 차를 두고 이동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하루, 이틀 차이로 이동을 시켜도 한 명은 말을 타고 한 명은 마차를, 다른 한 명은 도보로 움직인다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동시일 터.

‘그래, 동시에 서른 발을 미티어를 날릴 수 없다면…….’

서른 발의 미티어를 시간 차를 두고 따로 따로 날린 다음 동시에 도착하게 만들면 된다!

☆ ☆ ☆

이후 레펜하르트는 틈나는 대로 이차원에 미티어를 쏘아 넣었다. 현세로 돌아오는 데 5주가 걸리는 미티어, 4주가 걸리는 미티어, 3주가 걸리는 미티어 등등을 계속 날리며 세밀하게 시간과 공간 좌표를 지정했다.

그가 이차원을 통해 날린 미티어의 숫자는 총 서른 발.

그 압도적인 파괴력이 지금 동시에 세이어 템플을 두들기고 있었다.

“떨어져라, 파괴의 별이여! 시간의 모래를 속여 이곳에 강림하라!”

콰콰콰쾅!

연달아 운석이 절대 방어 결계에 충돌하고 또 충돌한다. 그때마다 결계가 흔들리고 우석이 바스라지며 충격파가 되어 백색의 대지를 질주한다.

“으윽!”

밀려오는 폭풍에 얼굴을 가리며 거구의 트롤, 아틸카가 사색이 되었다.

강력한 주술사인 아틸카는 그만큼 자연의 흐름에 정통해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저 운석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을지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거 괜찮은 겁니까, 인간의 왕이여?”

서른 발의 미티어라니, 저것만으로도 프로즌 랜드 전체가 붕괴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다! 그리고 그들은 저 목적지로부터 고작 수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도 피신해야 하는 건…….”

광풍 속에서 흑갈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레펜하르트가 태연히 답했다.

“대부분의 위력은 저 결계가 받아 주오. 결계의 방어력과 운석의 충돌력이 서로 상쇄되며 파괴력은 사라지고 결계는 점점 약화되겠지. 지금의 여파는 그저 너무 많은 운석이 한꺼번에 대기권에 돌입되어 일어나는 기류 현상일 뿐이라네.”

확실히 저 운석이 대지를 강타했다면 지금 레펜하르트 일행이 이렇게 태연히 서 있을 리가 없었다. 저 정도 위력이면 크레이터만도 족히 수십 킬로미터에 후폭풍 범위는 더욱 엄청나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란 표현 그대로, 대지가 뒤엎어지고 용암이 끓어오르며 사방이 깨지고 부서졌겠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다. 처음부터 그는 세밀하게 결계의 방어력을 계산했던 것이다.

차갑게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총 서른 발의 미티어라면 저 절대 방어 결계를 부수기에 적합한 위력이 나와 줄 것이다.”

신전 내의 세이어도 같은 소릴 하고 있었다.

“과연 뛰어난 자로다. 정확히 위력을 계산하여 딱 서른 발만 준비했는가? 하긴,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날린 마법에 자신도 피해를 입을 테니…….”

“에, 그런데 세이어 님?”

세렐라인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전지 영역 시스템 쪽에서는 스물아홉 발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분명 세이어는 서른 발의 미티어를 날려야 이 절대 방어 결계가 부서진다고 보았다. 레펜하르트 역시 계산을 통해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아카식 드라이브는 분명 열네 발의 아토믹 버스터, 혹은 스물아홉 발의 미티어 정도 위력이면 부술 수 있다는 결과를 내놓지 않았나?

“그러니까 대략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무리 술식을 세밀히 계산해도 한두 발 정도 오차는 있는 법이지.”

피식거리는 세이어를 향해 세렐라인이 겁먹은 채 다시 물었다.

“그럼 한 발은 그냥 떨어진다는 건가요?”

세이어의 표정이 굳었다.

“……음?”

☆ ☆ ☆

같은 시각, 세이어 템플 외곽의 마스테라다 던전.

냉기의 장막으로 일행을 보호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니야가 레펜하르트를 불렀다.

“……레펜하르트 님?”

“네, 이니야.”

그녀가 세이어 템플을 손가락질했다.

“절대 방어 결계가 부서진 것 같아요.”

과연, 세이어 템플을 가로막던 그 강대한 기운은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토록 강력한 고대의 힘조차도 수십 발의 운석 낙하는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연구가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음을 확인하는 건 마법사에게 있어 지고의 쾌감이다. 레펜하르트가 살짝 잘난 척을 했다.

“당연하지요.”

아, 역시 난 천재야. 으쓱으쓱.

이니야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운석 하나가 남아 있나요?”

“네?”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 말대로였다. 최후의 미티어 하나가 불길을 휘감고 허공을 질주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라?”

순간 그의 사고가 빠르게 움직였다.

‘저게 왜 남았지? 아니지, 한 발 남았는데 왜 벌써 절대 방어 결계가 깨졌지? 분명 계산상으로는 딱 서른 발의 미티어가 합산한 위력이 정확히 방어 결계를 파괴할 만큼일 텐데? 아, 그렇지. 원래 마법의 위력은 소수점 이하까진 합산하지 않으니까 보통 반올림해서 수정 후 계산을 내놓지? 그런데 미티어쯤 되면 소수점 이하 오차 위력도 전부 합산할 시 충분히 파괴력이 나오겠구나…….’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이내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케엑!”

지금 술식 검토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미티어 한 발이 아무 제지 없이 그냥 떨어진다는 소리잖아?

허겁지겁 전신의 오러를 끌어올리며 땅을 향해 일격을 날린다.

“스트레이트 캐논!”

구덩이를 깊게 파며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일행을 불렀다.

“다들 대피! 대피!”

갑작스러운 변화에 다들 당황해 레펜하르트를 돌아본다. 기다릴 틈이 없어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몸을 놀렸다. 실란이며 마켈린, 카를, 아스레일 등을 닥치는 대로 집어 구덩이로 던져 넣는다.

“에엑! 갑자기 왜 이래요?”

“뭐, 뭡니까, 폐하?”

이내 동작 빠른 다른 이들도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일행을 돌아보며 레펜하르트가 겸연쩍게 뇌까렸다.

“미안! 계산이 조금 틀렸어! 한 발 남았다!”

“……조금 틀린 게 아니잖아요!”

기가 막혀 실란이 소리쳤다. 허겁지겁 오러를 응용, 주위의 눈을 굳혀 방어벽을 형성하며 레펜하르트가 애써 변명했다.

“원래 이 정도 대규모 마법에 2, 3퍼센트 정도 오차는 있는 법이야!”

“저기서 오차 3퍼센트면 그것만으로도 도시 하나가 날아가거든요!”

고작 한 발 차이지만, 미티어 한 발이면 인류의 도시 하나가 잘 끓인 죽 상태로 변할 수 있는 수준이다. 무시하기엔 좀 파괴력이 크지.

“그럼 그렇지. 어째 잘 풀린다 했다.”

입을 삐죽이며 실란이 눈을 흘겼다. 레펜하르트도 마주 인상을 썼다.

“지금 나 타박할 때냐? 빨리 전원 몸을 보호해!”

불타는 운석이 세이어 템플을 직격한다. 다들 오러며 주술력, 정령력 등을 끌어 올려 몸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실란과 마켈린도 빠르게 성호를 그었다.

“필라넨스시여! 이들을 가호할 빛을 내려 주소서!”

“알 포트시여! 당신의 종을 보호하소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앙!

☆ ☆ ☆

잠시 후, 눈을 파헤치고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무사히 넘어간 건가?”

이내 다른 곳에서도 머리들이 쑥쑥 올라온다. 두더지처럼 땅을 파헤치고 나온 레펜하르트 일행이었다.

주위를 보니 사방이 새하얗다. 딱히 초토화된 것 같진 않았다. 여전히 사방이 새하얀, 눈 더미 설원이었다. 뭐,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얼음이 부서져보았자 눈이 될 뿐이니 이 상황이 초토화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힘들긴 하다.

이니야가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파괴력이 낮았던 걸까요?”

아무리 땅속으로 숨고 몸을 보호했다지만 명색이 미티어였다. 대지를 타고 흐르는 진동만으로도 그 위력은 무시 못 할 수준, 그런데 예상보다 충격이 적었다.

시리스가 세이어 템플 쪽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아름다운 순백의 신전이 지금은 꽤나 처량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깨져 나가 파편이 녹음의 대지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녹음의 대지 역시 멀쩡하지 않다. 봄에 보리밭 일구는 것처럼 왕창 파헤쳐져 여기저기 갈색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확실히 타격은 준 것 같은데…….”

그렇다 해도 미티어에 직격한 것치곤 지나치게 멀쩡한 광경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세이어가 제때 손을 쓴 모양이군.”

3

미티어가 세이어 템플을 직격하려는 순간, 세이어는 아카식과 연동해 10서클 궁극 주문 중 하나인 ‘혼돈의 안개’를 시전했다. 이는 차원문을 여는 마법 암천이계를 동시에 수십 개 형성해 서로 연동함으로써 차원 간 전이 능력을 지닌 안개 공간을 여는 주문이었다.

수십 개의 연동된 암천 이계가 운석 낙하의 질량과 파괴력을 또다시 이차원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렇게 해도 모든 파괴력을 전부 소화할 수 없어 신전 곳곳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뭐, 떨어지는 운석이 통째로 들어갈 거대한 차원 구멍을 열고 거기에 미티어 쏙 넣어 버리면 아무런 피해 없이 넘어갔겠지. 하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크기의 차원 구멍을 여는 행위는 세이어라도, 아니 은의 시대에서도 불가능하다.

수백, 수천 미터 크기의 구조물을 차원 이동시키는 것과 수백, 수천 미터 크기의 차원 게이트를 여는 것은 난이도가 천양지차다.

차원 이동이 배를 타고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라면,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은 그 폭풍우 속에서 돛을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태풍이 몰아쳐도 2, 3미터 정도의 돛을 거는 건 나무 기둥으로 충분. 하지만 돛의 크기가 수십, 수백 미터라면? 마스트가 설사 강철로 되어 있더라도 뿌리째 뽑혀 버리리라.

레펜하르트 역시 인티니티 게이트를 통해 미티어를 소환하긴 했지만, 그 게이트의 크기는 2, 3미터에 불과했다. 미티어를 강림시킨 거대한 하늘의 균열은 순전히 운석 자체의 힘이다. 구멍이 뚫린 댐이 수압으로 부서지는 것처럼, 게이트를 주축으로 미티어의 질량과 파괴력이 공간 자체를 부수며 떨어진 것이다.

“그나마 남은 게 한 발이라 어떻게든 방어가 되었다. 자칫했으면 신전 지상부 부분을 전부 잃을 뻔했군.”

물론 세이어 템플의 주요 시스템은 전부 지하에, 또 다른 방어 시스템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니 딱히 저 운석을 내버려 두었다 해도 별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 의해 신의 신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피해액의 문제가 아니다.

반파된 세이어 템플을 보며 세렐라인이 치를 떨었다.

“저자들이 감히 이 아름다운 성역을 더럽히다니!”

반면 세이어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렇군, 그런 식인가?”

드디어 아카식 전지 영역이 해답을 내놓았다. 레펜하르트의 능력, 저 별개의 특정 조건을 입력하고 나서야 겨우 해답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레펜하르트가 행한 수법 그대로였다.

“이차원을 통한 시간 차 폭격이라? 확실히 은의 시대 기술로는 불가능하겠군.”

저 수법은 철저히 레펜하르트의 차원 간 마력 감지 능력에 기반을 둔 수법이다. 시간의 흐름을 계산해 시간 차 마법을 날리는 것이야 은의 시대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저 마력 감지 능력 없이는 이차원으로 날린 마법이 정확히 원하는 현실의 좌표로 돌아올 수가 없다.

그래서 은의 시대에서도 시공 터널을 이용해 시간 차 공격을 하는 수법은 있었으되 차원 간 시간 차 공격은 발달하지 않았다. 어차피 효과는 똑같으니 굳이 발달시킬 필요가 없기도 했고.

“하여튼 저 마력 감지 능력은 골치 아프군. 별것 아닌 능력이라 생각했는데.”

그저 마력 좀 잘 느끼는 것이 뭐 대단하냐 싶었는데, 레펜하르트는 저 깨달음의 영역만으로 벌써 세이어의 예상을 몇 번이나 깨뜨렸다.

“곤란하군.”

문득 세이어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더 이상 저자를 무시할 수가 없겠구나.”

☆ ☆ ☆

“……진입로가 뻥 뚫렸군. 잘됐잖아? 세이어 놈의 힘도 깎았고 입구를 뚫을 노력도 줄였고.”

반파된 세이어 템플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애써 웃었다. 확실히 절대 방어 결계가 사라진 그곳은 벽이며 기둥이 왕창 무너져 내부로의 길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적어도 저곳을 돌파하느라 힘을 쓸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당연히 방금 죽을 뻔한 다른 일행들이 저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해 줄 리는 없다. 다들 레펜하르트를 흘겨봤다.

‘……와, 저래서…….’

‘실란 대주교가 폐하만 보면 그토록 구시렁대는구나.’

‘저런 엄청난 능력을 보고도 왜 그리 투덜대나 했더니…….’

물론 그들 중에서도 ‘한 인간’만은 좋다고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좋구나! 아주 좋아! 그럼! 우리 무문이라면 이 정도는 화끈하게 해 줘야지!”

주먹을 말아 쥐며 제라드가 희희낙락 세이어 템플로 향한다. 고개를 저으며 다른 이들도 뒤를 따랐다.

걷다 말고 카를이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가며 질문했다.

“폐하, 이거 나중에 또 구사하실 수 있는 마법입니까?”

“음? 못할 거야 없겠지만…….”

대꾸하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문득 실소를 흘렸다. 천지창조 마법을 썼던 당시 카를의 반응이 떠올랐던 탓이다.

“왜? 또 내 목을 노리고 싶어지시나, 카를 재상?”

“예? 아, 그런 게 아니라…….”

겸연쩍어하며 카를이 머리를 긁었다.

당시엔 너무 놀라 저런 소릴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레펜하르트를 위협적으로 느끼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위협적인 건 맞는데, 세이어니 은의 현자니 하는 놈들이 너무 위험한 종자들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봐줄 만해졌다는 쪽이 옳겠다.

“이 마법을 이용해 세이어를 상대하시려나 해서요.”

“그건 무릴세.”

지금 이 수법은 어디까지나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에만 마법을 퍼부을 수 있다. 게다가 상대가 최소 수 킬로미터의 거대한 과녁일 때나 효과가 나온다. 아무리 세밀히 계산해도 오차 범위가 수백 미터 단위로 나오니까.

“그러니 개인에겐 사용할 수 없지. 그냥 피해 버리면 될 테니.”

“그럼 혹시 세이어에게도 저 수법이 가능할까요?”

레펜하르트가 한 것처럼, 세이어도 안타레스에 수십 발의 미티어를 때려 넣을까 싶어 근심하는 것이다.

확실히 이 수법이라면 행성의 모든 곳이 공격 범위 내다. 그리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모두 그 파괴를 피할 수 없다. 성을 들고 달아나는 것이 아닌 한.

안타깝게도 레펜하르트는 그 걱정을 기우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같은 수법은 몰라도,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이라면 가능할 걸세.”

지금도 설원의 허공 너머로 가공할 권능의 기류가 아련히 느껴진다.

“아무리 봐도 저거, 나랑 비슷한 짓을 하려는 것 같으니까.”

카를이 흠칫 떨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곳에 있는 동안, 안타레스가 멸망할 수도 있겠군요.”

“……그 전에 세이어를 막아야겠지.”

이미 여기까지 와 버렸다.

이제 와서 안타레스를 걱정해 뒤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는 동안 레펜하르트 일행이 녹음의 대지를 지나 파괴된 순백의 신전 앞까지 도달했다.

부서진 신전의 빈틈, 내부로 이어지는 공간을 바라보며 전투 준비를 갖춘다. 검을 뽑고 주술력과 정령력과 오러를 끌어내고 투지로 전신을 두른다.

그들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와 준 모두를 향해 진지하게 입을 연다.

“내가 준비한 건 여기까지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은 자신 있었다. 명확한 계산과 연구를 통해, 상대의 정보와 자신의 기량을 파악해 해법을 내고 그것을 시행했다. 그로 인해 공간을 뛰어넘고 시간의 눈금을 속여 상대에게 다가가 두꺼운 성벽을 해제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나 역시 그대들과 똑같이 무지합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상대의 품안에 뛰어들어 사방의 적과 싸워야겠지요.”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것은 인류의 신,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신의 힘을 다루는 자.

“이제 우리는 신을 죽여야 합니다.”

타시드가 참마도를 든 채 히죽 웃었다.

“난 두렵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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