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권 제75장 흩어진 알의 조각 (76/84)

20권

제75장 흩어진 알의 조각

1

세계는 변해 버렸다.

단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변혁의 바람은 점점 거세게 불어 대륙 전역을 휩쓸었다.

저 변혁을 막기 위해 많은 시도가 있었다. 사회가, 종교가, 국가가, 심지어 신의 존재가 직접 개입해 바람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변화는 멈추지 않았다. 어떤 압박에도 한번 불어닥친 바람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더더욱 거대한 폭풍이 되어 세상을 흔들고 또 흔들 뿐.

쾌속 진격을 계속하던 안타레스군은 결국 모든 영토를 수복했다. 또한 크로방스와 바실리의 조력을 얻어 강대한 군세를 국경 지대에 배치했다. 할라인 왕국, 그리고 바슈탈론 제국과 인접한 지역이었다.

삼국 연합은 기겁했다. 이대로라면 오히려 삼국 연합이 안타레스에 의해 역침공을 당할 판이었다. 그나마 차탄 공국이라는 완충 지역이 있는 그라임 왕국은 좀 상황이 나았지만, 할라인 왕국과 바슈탈론 제국의 분위기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수십의 오러 유저와 수백의 마검사, 수천의 광폭화한 트롤병과 금단의 아티팩트를 든 이종족 군세, 그리고 그 뒤를 받쳐 주는 수만의 크로방스, 바실리, 안타레스의 삼국 연합군!

대륙 역사상 이토록 강력한 군대가 과연 존재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군사력이 국경을 가득 메우고 피의 복수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눈앞의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오직 신의 말씀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이들에게 차가운 현실이 끼얹어졌다.

신이 약속한 승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믿어 의심치 않던 신의 말씀은 모조리 어긋나 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하며, 완전하기에 신이다. 그러니 신의 말씀은 틀릴 수가 없다.

틀린 것은 인간이다. 세이어 교단이 신의 뜻을 곡해하였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

세이어 교단과 제국에 대한 불신이 점점 커졌다. 당황 속에서 세이어 교단은 어떻게든 신도들을 달래고 또 달랬다.

-기다려라.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세이어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세이어께서 분노의 잔을 부으사, 저 간악한 자들의 머리 위에 진노의 철퇴가 내려지리라!

그렇게 안타레스 연합군이 국경 일대를 모조리 장악한 뒤 사흘이 지났을 때다.

하란 강 남쪽의 한 불모지, 케하진 황야.

인적은 고사하고 동물조차도 살 수 없는 거친 광야에서 신의 권능이 강림했다. 강대한 빛과 폭발이 대지를 밝히고 하늘 높이 버섯구름을 피워 올렸다. 아라난 그라드에 임했던 세이어의 신벌, 그것과 같은 빛이었다.

그러나 세이어 교단은 환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포와 절망에 빠져야 했다.

저 버섯구름은 세이어의 신벌이 아니었다.

하루 뒤, 안타레스 공국 휘하의 알 포트 교단이 정식으로 대륙 전역에 선포했다.

-알 포트의 이름으로 고한다. 이는 인류의 신을 칭하는 자에게 보내는 경고이니, 또다시 세상에 거짓된 신벌이 나타난다면 나의 분노가 제국에 임할 것이다!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만약 다시 한 번 세이어가 신벌을 내리려 한다면, 이번엔 이쪽도 똑같이 대응해 주겠다는 것이다.

허풍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류에게 알 포트는 사악한 악신으로 믿어지니, 충분히 저런 참상을 벌일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심지어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걸 이미 증명해 보이지 않았는가? 천년 제국 바슈탈론과 세이어 교단조차도 저 엄청난 파괴의 빛 앞에선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알 포트는 저 참혹한 신벌을 바로 사람들에게 내리진 않았다. 그저 경고의 의미를 보였을 뿐.

악신이라는 알 포트가 인류를 가호한다는 세이어보다 더 자비로워 보이는 상황이었다. 세이어 교단 내에서도, 심지어 고위 신관들 사이에서도 의문을 품은 자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말 이것이 세이어의 뜻인가?’

‘혹시 어리석은 우리가 세이어의 뜻을 곡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신앙이 흔들린다. 사회적 분위기 전체가 상식을 의심한다. 대륙의 남은 절반, 그곳의 많은 이들조차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래, 엘프도 드워프도 오크도 트롤도…….’

‘그들도 사람인 게지…….’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이 이렇게 될 수 있겠나?’

이제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세계는 변해 버렸다.

☆ ☆ ☆

안타레스 공국 임시 수도, 카탈란 가드.

그곳의 집무실에서 카를 재상이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차탄과 라스틸이 굴복했습니다.”

제2차 성전, 바슈탈론 제국과 그라임, 할라인의 삼국이 참가한 전쟁에서 차탄과 라스틸 공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다.

하지만 이것이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건 식자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전쟁 내내 그들은 삼국 연합에 물자를 공급하며 후방 노릇을 톡톡히 했으니까.

카를은 그런 두 공국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미 휘하의 외교단이 두 공국에 계속 외교적 압박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전투를 기대하던 이들에겐 좀 실망스러운 소식이겠군.”

원래 때리는 놈보다 뒤에서 편드는 놈이 더 미운 법이다. 삼국 연합 못지않게 안타레스군은 차탄과 라스틸에도 분노하고 있었다. 카를이 만류하지 않았다면 벌써 진작 쳐들어가도 갔을 것이다.

“우리가 저쪽마저 적대시해서 굳이 적을 늘릴 필요도 없잖습니까?”

현재 안타레스의 군사력은 역대 최강이다. 마음만 먹으면 차탄이나 라스틸 공국쯤은 단숨에 밀어붙일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차탄이나 라스틸을 밀어붙이면 확실하게 대륙이 둘로 갈라져 세계 대전이 일어나겠지요.”

차탄과 라스틸마저 넘어가면 제국도 가만있을 수가 없다. 차탄과 라스틸은 모두 제국의 영향력하에 있는 공국, 그런 국가를 보살피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제국의 위신 문제를 넘어서서 실질적으로 국가 존립의 위협이 된다. 당연히 총력을 다해 전쟁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안타레스가 저 세계 대전을 감당할 여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쟁 안 해도 실리를 챙길 수 있는데 굳이 전쟁을 벌여야 할 이유도 없죠. 어차피 폐하는 대륙 전역을 지배하실 생각은 없으시잖습니까?”

“그렇지. 내가 원하는 건 이종족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장소일 뿐이다. 그 장소의 지배자가 반드시 내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

복잡한 외교 수식을 빼면, 안타레스의 주장은 간단했다.

-안타레스가 흘린 피에 차탄과 라스틸은 책임이 있다. 이제 그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라.

책임 유무 자체에 대해선 차탄도 라스틸도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부정하는 순간 분노에 찬 안타레스군이 국경을 밀고 올 테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쪽이 옳겠다.

여기서 언제나 나오던 안타레스의 조건이 나온다.

-책임을 지겠다면, 그 증거로 양국의 이종족 노예를 모두 해방하고 정식으로 공국민의 지위를 주어라. 그것을 맹약의 증표로 삼겠다.

이에 대해선 두 공국 모두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거액의 배상금을 치르라고 했다면 승낙했겠지. 하지만 저것은 사회의 기틀을 흔드는 것이며 동시에 바슈탈론 제국, 그리고 세이어 교단과 확실하게 척을 지게 되는 행위다.

“하지만 결국 받아들였지요.”

카를이 차갑게 웃었다.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제국이 등 뒤에서 눈 부라리고 있는 형국이라면, 안타레스는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판인 것이다. 미래도 당장 살아 있어야 찾아오는 것 아닌가?

눈앞의 안타레스군의 침략을 감당하느니 일단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요구를 들어준다. 이후 제국이 불쾌함을 표하면 ‘안타레스를 정리해 달라. 그럼 당장 다시 원래 제도로 돌아가겠다.’라고 할 셈인 것이다.

“이쪽에서 저런 식으로 유도한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대외적으론 분명 이종족 노예 해방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보고서를 정리하며 카를이 말을 맺었다.

“이걸로 안타레스, 크로방스, 바실리, 차탄, 라스틸 5국이 이종족을 해방시켰습니다. 대륙 국가의 과반수가 폐하의 뜻에 동참하게 된 겁니다. 또한 제국과 할라인, 그라임의 여론도 상당히 이쪽에 긍정적입니다. 이 변화는 점점 더 커질 뿐,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겁니다.”

놀라운 결과였다.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눈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당연히 가슴 벅찬 일이어야 할 터.

그러나 보고하는 카를도, 보고받는 레펜하르트도 그리 기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카를이 문득 한숨을 쉬었다.

“이걸로 인세의 일은 대충 처리되었습니다.”

인간의 일, 사람의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 처리할 자신이 있는 카를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제껏 잘 처리해 왔다.

“하지만 인외의 일에 대해선 전 여전히 무력하군요.”

카를이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레펜하르트가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딱딱한 음성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세이어.”

둘 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카를이 이루어 놓은 저 모든 외교적 우위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연약한 모래성이라는 것을.

어느 날 불현듯, 세이어가 모습을 드러내 아라난 그라드와 오크라트의 참상을 되풀이하기만 해도 전황은 순식간에 바뀌리라.

물론 카를도 나름대로 대비책은 세웠다. 레펜하르트로 하여금 뉴클리어 버스트를 발동시켜 알 포트의 이름으로 협박도 날렸다.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충분히 먹힐 협박이다.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지.”

드림 다이브를 통해 레펜하르트는 세이어의 과거를 보았다. 그때 본 세이어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희생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존재였다.

‘하긴 전생의 나도 비슷했지만.’

인류를 하나의 거대한 개체로만 인식할 뿐 그 속에 수많은 ‘개인’이 있다는 걸 전생의 자신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이어 역시 마찬가지다.

그와 세이어의 차이점은 살아온 세월의 스케일이었다.

아무리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신과 같은 힘을 지녔다고는 해도, 그는 고작 50년 남짓 살아온 자였다. 수천, 수만의 희생까진 감당할 수 있어도 수백, 수천만의 희생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정도 희생이 일어나면 남은 평생을 다 바쳐도 돌이킬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세이어는 영원을 걷는 자. 이미 일만 이천 년을 살아왔다. 그에게는 수백, 수천만의 희생조차도 ‘충분히 복구 가능한 수준’인 것이다.

“그런 존재에게 저런 협박이 먹힐 리가 없지.”

현재 세이어가 침묵하고 있다는 건 협박이 먹혔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폭풍이 다가오기 전 잠시간의 고요일 뿐.

카를이 심각한 어조로 대꾸했다.

“결국 결론은 하나지요.”

세이어가 존재하는 한, 안타레스에 미래는 없다.

“준비하고 계신 건 어찌 되었습니까, 폐하?”

“일단 완성되긴 했소. 좀 더 완벽을 기하고 싶긴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쉽게도 더 이상은 시간이 없는 듯하군.”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가 대륙 전역을 뒤덮는 기이한 힘에 대해 감지한 것은.

그것은 너무도 희미하고 아득해, 마치 차원 너머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미약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흐릿하게 들려도 천둥은 천둥인 법, 귀 밝은 이라면 저 멀리서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레펜하르트가 느낀 것이 이와 같았다.

희미한, 그러나 너무도 불길하고 거대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이 확실한 느낌.

“예상대로 세이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순백의 신전.

아득한 고대엔 우주의 알이라 불렸고 현재는 위대한 인류의 신이 거하는 곳, 세이어 템플이라 불리는 권능의 장소.

그 중추부에서 세이어는 오늘도 수십 개의 화면을 동시에 바라보는 중이었다. 화면마다 시공융합포, 니르바나의 발동 술식이 아카식 드라이브와 연동하고, 그 결과를 영상화하여 계속 비추어 준다.

그 옆에 멍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 보는 은발의 소녀가 있었다.

‘아직 바쁘신가…….’

세렐라인이 접견을 청하고 이곳에 온 지 벌써 30분째, 그러나 아직도 그녀는 뒤에서 대기 중이었다. 세이어가 워낙 술식 조정에 집중하고 있어 감히 방해할 수가 없던 탓이다.

대신 화면을 힐끔거리며 세렐라인이 생각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래도 고작 반 정도 진행되었나?’

세렐라인에게 무슨 뛰어난 마법적 소양이 있어 저 술식 진행 상태를 이해했다는 소린 아니다. 그녀는 신의 그릇이란 점을 제외하면 전사로서도, 마법사로서도 무능하다.

단지 화면 귀퉁이에 대놓고 작대기가 올라가고 있고 ‘48% 진행 중’이란 문구가 당당히 적혀 있어 알아볼 수 있었을 뿐이다.

“오래 걸리네…….”

사실 고대, 은의 시대엔 시공융합포 발동이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쏘는 데 보름 걸리는 병기라니, 병기로써의 가치가 전혀 없지 않은가? 알하트란 시대엔 그냥 허가만 떨어지면 바로 발사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것이 지금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는 발동 술식 대부분이 대폭주 때 날아간 탓이었다. 당시의 아카식 폭주 중 잃어버린 수많은 정보들, 그중엔 니르바나 발동 술식도 상당히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모자란 부분은 이렇듯 세이어가 옆에 붙어서 실시간으로 조정을 해야 제대로 발동할 수가 있다.

혼잣말이었는데 용케 세이어가 들은 모양이다. 술식에 집중한 채 그가 뇌까렸다.

“지루하더냐?”

흠칫 놀란 세렐라인이 송구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 용서하소서…….”

상대가 인간이라면 지루하지 않다고 선의의 거짓을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상대는 신이었다. 신 앞에서 거짓은 용납되지 않는다.

“제가 어리석어 감히…….”

세이어가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내게 지루함이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니.”

일만 이천 년을 산 세이어다. 지루함이나 권태 따위를 느꼈다면 벌써 자살이라도 했겠지. 세렐라인 입장에선 일주일 내내 하나에만 매달리는 걸 어찌 견디나 싶겠지만, 아카식과 연결되어 영원을 살아가는 세이어에겐 그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행위일 뿐이다.

그걸 감안해도 세렐라인에겐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꼭 니르바나를 쓰셔야 했나요?”

그냥 그 기간 동안 아토믹 버스터를 하루에 한 번씩 날리기만 해도 어차피 결과는 같을 것 같았다. 이해 못 할 표정을 짓는 세렐라인을 보며 세이어가 웃었다.

“이쪽이 제일 깔끔하다.”

아토믹 버스터는 후폭풍에 의한 재앙이 너무 크다. 잔여 마법독이 너무 오래 잔류하기에 한번 날리면 대지가 재생하는 데 막대한 시간이 걸린다.

미티어 같은 경우는 운석과의 충돌로 인해 대지의 정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둔기로 맞을 경우, 아픔은 금방 가라앉지만 멍든 흔적은 오래 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반면 니르바나는 시공 융합을 통해 발동 지역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식이다. 스케일이 어마어마하게 커서 그렇지, 행위 자체는 곰팡이 핀 빵의 표면을 스푼으로 삭삭 긁는 것과 비슷하다.

“미래에 인류가 살아야 할 대지니라. 최대한 깨끗하게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세렐라인이 보기엔 지나치게 과한 신벌을 준비하는 것 같지만, 세이어 기준으로는 니르바나가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병기인 것이다.

“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인류의 신께서 가장 인류에게 이롭게 판단을 내리셨다 하니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술식에 매달리던 세이어가 그제야 데스크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용무로 나를 찾았느냐, 세렐라인?”

그 음성에 상대를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 스스로의 시간을 귀히 여기지 않는 이가, 다른 이의 시간에 신경을 쓸 리 없으니까.

세렐라인도 감히 따지지 않았다. 그저 정중히 머리를 조아릴 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무관심한 말투로 세이어가 재차 물었다. 세렐라인이 대답했다.

“그자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세이어의 눈에 호기심의 빛이 떠올랐다.

“그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라…… 어찌 그것을 알았느냐?”

레펜하르트와 안타레스 공국을 상대함에 있어 은의 현자가 제일 고생했던 부분은 바로 상대방에 대한 탐색이었다. 세이어의 눈도, 첩자 투입도 불가능한 안타레스 공국은 그야말로 정보의 무풍지대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자기 목숨마저 버려 가며 렐시아가 단편적인 정보를 얻어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권능을 지닌 세이어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자는 10서클의 영역에 든 자, 전지의 눈으로도 파악이 힘들거늘.”

시공의 힘을 지닌 알 포트의 아카식 드라이브. 그 강력한 현세 파악 능력은 현재 대부분 유실된 상태다. 남은 것은 드워프들의 진실의 소리를 듣는 능력, 그리고 애매모호한 형태로 전해지는 신탁 정도가 전부다.

반면 알 포트의 아카식 일부를 흡수한 세이어는 좀 더 상황이 나았다.

알 포트 아카식의 전지 영역을 사용하면 그는 자신의 옥좌에 앉아서도 전 세계를 눈앞의 일처럼 파악할 수 있다. 아무래도 오리지널만은 못하다 보니 일어날 일, 즉 생각이나 계획까진 알 수 없지만 일어난 일, 즉 내뱉은 말이나 취한 행동은 모두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능력으로 초대 권왕 발켄슈트를 대번에 찾은 것이기도 하다.

유일한 예외는 바로 레펜하르트였다.

지금이야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만, 세이어도 초반엔 레펜하르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자주 전지의 눈을 사용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10서클의 경지에 든 마법사는 법칙의 일부조차도 왜곡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은의 시대에서도 10서클 마법사만큼은 알 포트의 전지 영역이 파악할 수가 없었다. 세이어가 10서클을 갈구한 것도 메테우스 박사의 추적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흥미롭구나. 무슨 수를 썼느냐?”

레펜하르트에 대한 관심은 이미 없어졌지만, 세렐라인의 수법엔 흥미가 생긴다. 세이어의 질문에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수법이라고 칭하기도 부끄러운 하찮은 방법인지라…….”

정말 하찮은 수법이었다.

“그냥, 안타레스와 교류하는 상인들에게 따로 돈을 쥐여 주고 물어봤을 뿐이라서…….”

첩자를 투입할 순 없다. 진실의 소리를 듣는 드워프들이 바로 알아차리니까.

하지만 평범하게 안타레스를 들락거리는 상인들, 그들에게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물어보는 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드워프를 대하던 시점에선 그들은 전혀 첩보를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일반적인 상인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라 봐야 그리 대단할 게 없으니 상인들이 푼돈 좀 받고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하는 데 거부감이 있을 리 없다.

“한두 명 정도론 그리 대단한 것이 없었습니다만, 규모가 커지니 제법 쓸 만한 정보가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해한 세이어가 껄껄 웃었다.

“그렇군. 그야말로 아무 힘도 없는 아이들의 현명함이로구나.”

세이어 딴엔 칭찬한 것이지만 듣는 세렐라인 입장에선 더더욱 얼굴이 붉어진다.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여튼 그래서…… 얼마 전 중요한 소식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세렐라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자의 동료들이 모두 카탈란 가드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 ☆ ☆

카탈란 가드의 안타레스 임시 왕궁.

중앙궁의 한 복도에서 보랏빛 머리의 엘프 미녀가 빠르게 걷고 있었다.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복도를 주파한 그녀가 문을 열고 웃었다.

“부르셨나요, 레펜하르트 님?”

문 안쪽에 위치한 근육질 거구의 장한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니야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불렀습니다.”

이니야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웬일로 레펜하르트가 먼저 자신을 부르기에 내심 두근두근하며 달려온 그녀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냥 공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하긴, 저이가 그럴 성격은 아니지.’

실망은 곧 사라졌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렀다는 소리는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야 그놈,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인류의 신인지 뭔지를 상대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인으로서는 실망스러운 상황이지만, 전사로서는 흥분되는 일이다. 눈을 빛내며 이니야가 레펜하르트 곁에 앉았다.

“드디어 그자를 상대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사실은 좀 더 준비를 해 두고 싶었지만, 더 이상 여유가 없군요.”

레펜하르트는 힐끔 하늘을 보았다. 전부터 느껴지던 그 감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저대로라면 앞으로 며칠 안에 뭔가가 터져도 터질 것 같았다.

이니야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그녀가 물었다.

“준비해 두셨다는 것, 며칠이나 남았나요?”

“나흘 정도 남았군요. 정확히는 나흘하고도 열세 시간 38분 남았나?”

드림 다이브에서 깨어난 지 석 달이 지났다. 그동안 레펜하르트는 바쁘게 움직였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처를 찾고 뉴클리어 버스트를 이용해 국가적 협박을 하는 것 말고도 따로 세이어를 상대하기 위한 여러 방책을 준비해 두었다.

날짜를 따져 보더니, 이니야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흘에서 닷새 사이인가요? 아슬아슬하네요. 그 안에 저쪽이 먼저 움직일 가능성이 있을까요?”

“모릅니다.”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준비한 계획엔 아직도 며칠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 안에 세이어가 먼저 움직인다면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저 행운이 우리 손을 들어 주길 기대하는 수밖에요.”

손을 뻗어 레펜하르트의 흑갈색 머리칼을 매만지며 이니야가 위로를 건넨다.

“잘될 거예요. 레펜하르트 님은 운이 좋은 편이니까.”

“……제가 운이 좋은 편이라고요?”

그토록 강력한 힘을 지니고도 실패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고 결국 죽음까지 당했는데?

이니야가 배시시 웃었다.

“실패했고, 죽음을 당했는데도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으셨잖아요. 자신의 실패를 되돌리고 자신의 후회를 지울 기회를 얻을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운이 좋은 경우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그렇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나…….”

레펜하르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긴장이 좀 수그러지는 기분이다.

그러던 중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다른 한 명이 더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붉은 장발을 나부끼는 아름다운 미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소년, 아니, 실제로는 20대 청년인 실란 대주교였다.

“레펜 씨! 다들 불렀다면서요? 아? 이니야 왕비 전하도 계시네.”

실소하며 레펜하르트가 말을 건넸다.

“난 그냥 레펜 씨고 이니야는 왕비 전하냐? 나도 일단은 왕이거든?”

“그렇게 따지면 저도 대주교예요, 대주교. 우리 서로 극존칭 쓰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해 볼까요? 위대한 안타레스의 영도자이자 존귀하고 영명하신 레펜하르트 국왕 폐하?”

“됐소이다, 실란 대주교.”

역시 너무 오래 알고 지냈다. 이제 와서 호칭 바꾸기엔 늦은 것이다. 덕분에 긴장감은 확실히 사라져 버렸다.

테이블에 앉으며 실란이 물었다.

“드디어 그 작자 위치 찾았나 보죠?”

레펜하르트가 피식거리며 대꾸했다.

“위치 자체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

아토믹 버스터를 피해 이차원으로 뛰어든 뒤 귀환할 때,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의 영혼이 깃든 세이어의 육체를 기점으로 원세계의 좌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때 이미 세이어의 위치는 파악했다.

실란이 눈을 깜빡거렸다.

“엥? 그럼 여태 준비한 건 뭐였어요? 난 아직 위치를 못 찾아서 계속 탐색 중인 줄 알았는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동안은 알면서도 갈 방법이 없었거든.”

☆ ☆ ☆

권왕 레펜하르트의 동료들은 단순히 전투를 함께 치르는 이들이 아니다.

“혈신 아틸카, 눈의 여왕 이니야, 악신의 교황 마켈린, 오크 대전사 타시드, 광기의 발렌시아.”

모두가 자신의 종족을 이끄는 이종족 수장들이며…….

“권황 제라드, 배신의 기사 사이러스, 타락 여신 실란, 이단의 현자 카를.”

모두가 안타레스의 군사적, 행정적 중추를 담당하는 이들이다.

“안타레스 전역에 흩어져 있던 이들이 모두 카탈란 가드로 모였습니다.”

세렐라인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외쳤다.

“현재 저들 전원이 자기 자리를 비우고 움직일 만큼 큰일은 안타레스에 없습니다. 분명 무엄하고 무도한 행위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세이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그런 결론을 내린 게냐?”

뭔가 대단한 정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냥 수뇌부가 오랜만에 수도로 모였다는 게 전부? 솔직히 세이어 입장에선 좀 어이없는 소리였다.

“그자가 결혼이라도 하는 걸지도 모르잖느냐? 아니면 오랜만에 회합이라도 가지든가.”

“그건 절대 아닙니다.”

세렐라인이 강하게 부인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권황 제라드가 자기 입으로 대놓고 떠들어 댔으니까요.”

그렇다. 분명 레펜하르트는 자기 수하들의 입을 잘 단속시켰다. 레펜하르트에게 충성하는 모두가 그의 명대로 비밀을 잘 지켰다.

하지만 제라드는 애초에 비밀을 지킨다는 개념이 별로 없는 인간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거늘, 사내대장부가 가슴에 숨길 것이 무엇 있단 말이냐!

이것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고방식이다 보니, 레펜하르트의 호출에 응답하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대놓고 질러 버렸다.

-인류의 신인지 뭔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조지러 간다!

“……라던데요?”

세이어조차도 어이가 없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참으로 도움 안 되는 사부로다. 그자도 고생이군.”

대적자인 세이어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다니,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짐 언브레이커블이 참 유니크한 무문인 건 분명한 것 같다.

너털웃음을 흘리며 세이어가 말했다.

“네 뜻은 알겠구나. 하지만 그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현재 그가 거하는 세이어 템플은 대륙 최북단, 이 행성의 극지에 위치해 있다. 극한의 추위와 아득한 거리가 있으니 현 인류의 문명 수준으론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강력한 마법과 오러의 힘을 지닌 자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자에겐 결코 이곳에 도달할 방도가 없을 터인데.”

신성, 아카식을 품은 우주의 알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극지 일부에 강대한 공간 왜곡 결계를 설치해 놓았다. 세이어가 프로즌 랜드 내에서만큼은 마음껏 거리와 방위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다.

무한에 가깝게 꼬여 버린 이 공간 미궁 속이라면 궁극의 마법사가 평생을 날아서 이동한다 해도, 세이어 템플의 근처에조차 다가올 수 없다.

“설령 기적이 일어나 도달한다 한들 방도가 없긴 마찬가지일 테지.”

그야말로 행운과 우연이 겹치고 겹쳐 세이어 템플에 도달했다 치자.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신기루 너머의 순백의 신전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일만 이천 년 동안 우주의 알, 세이어 템플의 주위는 공간 왜곡 결계 이상으로 강력한 절대 방어 결계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는 공간 왜곡 결계와 달리 순수한 힘의 집합체라 술식이나 기책으로 파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동등한 힘의 충돌이 아니고서는 절대 깨지지 않는 무적의 결계다.

“심지어 나조차도 권한 코드 없이는 대처할 방법이 없거늘.”

이 공간 왜곡 결계와 절대 방어 결계는 은의 시대 아카식 드라이브에 내장된 기본 술식이 자동으로 행하는 것이어서 세이어 자신도 제어하지 못했다. 그저 권한을 지니고 드나들 뿐.

그러나 세렐라인은 여전히 근심을 거두지 못한 듯했다.

“정녕 그 결계는 어떤 방법으로도 뚫리지 않나요?”

세이어가 헛웃음을 흘렸다.

“글쎄다? 미티어를 동시에 한 30방쯤 날리면 뚫리기야 하겠지.”

10서클 궁극 파괴 주문을 동시에 30방을 날려? 이건 전생에 마왕이라 불리었던 레펜하르트도, 신성을 손에 넣은 세이어도, 심지어 은의 시대 최강의 마법사였던 메테우스 박사조차도 터무니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 특이한 마법이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모든 아티팩트를 정지시키는 사기성 10서클 마법, A.M.P 쇼크웨이브.

이것만큼은 세이어도 꽤 신경을 썼다.

아카식 드라이브도 어쨌거나 고대로부터 내려온 ‘도구로써의 시스템’이다. 혹시 저 마법이 아카식 드라이브에도 통용될까 걱정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전지 영역을 통해 A.M.P 쇼크웨이브의 여파와 효과 정보를 수집, 해석한 뒤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그의 걱정은 기우로 그쳤다. 마법이 아닌 신성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라 그런지, 아카식 드라이브는 A.M.P 쇼크웨이브의 파동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확실하다. 그자는 내게 도달할 어떤 방법도 없다.”

세이어 자신이 우주의 알에 존재하는 한, 레펜하르트는 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이어는 레펜하르트의 존재를 무시했다. 무시하고 그저 세상 전체를 보고 움직여 왔다.

시공융합포 니르바나, 저 강력한 신벌 앞에 모든 이종족들의 터전은 사라질 것이다. 변화의 바람은 대기 채 날아갈 것이고 모든 것은 세월 속에 잊히리라.

“그러니 나의 딸아, 너는 근심하지 마라.”

절대적인 신의 말씀에 세렐라인은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동의의 대답을 하진 않았다.

사실 지금 그녀는 상당히 무엄한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까.

‘……절대적이라기엔 그동안 그자에 대한 세이어 님의 말씀이 그리 적중률이 좋지 않아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더니 살아남았다.

절대 돌아올 수 없다더니 돌아왔다.

절대 패배할 수 없다더니 패배했다.

신에 대한 경외와 신앙은 무조건적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맹목적으로 믿기엔 그동안 세이어께서 날린 부도수표가 한둘이어야지?

물론 아무리 그녀라도 세이어 앞에서 감히 저런 소릴 할 순 없다. 그래서 적당히 돌려 말했다.

“하오나 전 하찮은 인간이라 근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헛수고일 줄 알면서도 준비를 꾀하는 것을 허락하소서.”

의외로 세이어가 순순히 승낙했다.

“그리하거라.”

세렐라인의 요구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그녀가 취하는 모든 준비는 헛수고일 뿐일 터다. 그러니 찬성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다.

“세렐라인, 네가 있기에 나는 지상에 재림했노라. 네겐 내게 청을 넣을 자격이 있으니.”

레펜하르트에 대해 대비할 필요는 없다. 이는 쓸데없는 일이다.

“허나 이걸로 네 마음이 평온해진다면 가치가 있겠지. 네가 원하니, 허락하노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렐라인이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세이어시여.”

그대로 그녀는 세이어의 처소를 물러났다. 그리고 세이어 템플의 외곽, 외부와 소통하는 외별궁으로 향했다.

거대한 백색 기둥 앞에 서서 콘솔을 조작한다. 고대 아티팩트 ‘신탁’, 은의 시대엔 초공간 통신기라 불렸던 저 마도구를 통해 세렐라인이 은의 현자에게 전언을 날렸다.

신의 오른 편에 앉은 이가 은의 현자에게 고한다.

현명하고 강인한 신의 아들, 딸들이여.

강자를 고르고 골라 북으로 향하게 하라.

이곳은 신께서 강림하신 곳.

성역을 지키는 신성한 의무를 그들에게 내리겠노라!

2

전국에 흩어져 있던 안타레스의 중진 모두가 카탈란 가드로 모였다.

요새에 머물러 있던 이니야와 실란, 카를은 물론이고 트로리아드에 가 있던 아틸카와 마켈린, 엘븐 포레스트의 시리스, 안타레스 전방의 러스며 타시드, 제라드 등의 전력도 하루 만에 요새로 집결했다. 애초에 언제든 호출 떨어질 걸 염두에 두고 움직이던 터라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다들 준비 태세를 갖췄다. 실란이나 마켈린처럼 명상에 임하는 이들도 있었고 아틸카나 시리스처럼 만일의 경우를 대비, 각 종족의 업무 인수인계를 행해 두는 이들도 보였다.

그 와중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늦은 오후의 카탈란 가드 임시 왕궁 총회의실.

그곳에서 레펜하르트며 카를, 아틸카, 시리스, 마켈린 등 안타레스의 중진이 모두 모여 고뇌 중이었다.

“저걸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잖습니까?”

카를의 말에 시리스가 전적으로 동의를 표한다.

“그럼요, 전력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시기인데.”

그러자 마켈린이며 이니야가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쓸 사람이 없잖소?”

“그러니까요. 취약한 부분 메우겠다고 자기 장점을 버리면 그야말로 본말전도죠.”

레펜하르트가 턱을 괸 채 한숨을 쉬었다. 뚱한 시선이 총회의실 중앙, 그곳에 안치된 거대한 갑주로 향했다.

“에휴, 거참 애물단지로세.”

2미터가 넘는 크기에 악마를 연상케 하는 형상, 은의 현자에게서 강탈한 금단의 아티팩트인 바포메트 슈트였다.

이 강력한 고대 기물은 오러 유저의 오러양, 체력, 신체 능력, 방어력 등을 놀라운 수준으로 증폭시켜 준다. 평범한 오러 유저였던 브렉티스가 이 슈트를 사용한 뒤 러스와 타시드의 합공을 이겨 낼 정도로.

연구 끝에 레펜하르트는 결국 바포메트 슈트의 블랙박스를 해독했다. 이제 이 갑주는 확실히 그의 제어하에 놓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아니, 이 좋은 물건을 쓸 사람이 이렇게 없나?”

일단 제라드와 레펜하르트는 열외.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상 도구 사용이 불가할뿐더러 애초에 사이즈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

이니야나 러스는 세밀한 기교파 오러 유저라 바포메트 슈트를 걸치면 섬세한 오러 운영이 불가능해진다. 오러를 증폭하는 과정에서 흐름이 뒤섞이는 것이다. 타시드도 오크라서 파워 위주로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기교파, 저런 거 입고 전투 예지나 시간 동결을 쓸 자신은 절대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타시드도 사이즈 안 맞기는 마찬가지다!

“그래, 문제는 사이즈지…….”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저들이 아니더라도 안타레스엔 아직 오러 유저가 많다. 오크 투사인 스탈라나 하다툼 등.

문제는 대부분의 남성 오크 투사들은 타시드급 덩치라는 것이다. 오크치고 근육 만세를 외치지 않는 종자가 없다 보니 갑주에 비해 몸이 너무 두꺼웠다. 길이는 맞는데 두께가 안 맞는달까?

뭐, 여성 오크 투사는 그럭저럭 사이즈가 맞았다. 스탈라나 아란타 등은 무난히 바포메트 슈트를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슈트를 입고 나니 기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다.

-아우, 이거 불편한데…….

-이런 걸 입고 어떻게 싸우라고…….

스탈라나 아란타 역시 기교 위주이긴 하지만, 사실 이니야나 러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지라 딱히 오러 흐름이 방해될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갑옷을 걸치는 행위 자체였다.

전통적으로 가죽 갑옷을 선호하는 오크들은 인간이나 드워프처럼 금속 갑옷에 익숙하지 않다. 날렵한 검사에게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혀 놓은 꼴이랄까? 아무래도 어색하다.

뭐, 연습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평생 몸에 익은 습관을 바꾸는 것이 쉬울 리 없다. 무술가를 데려다가 힘을 열 배로 늘리는 대신 기술을 다 죽여 버리면 그걸 과연 전력 상승이라 할 수 있을까?

“……개성이 너무 강해서 소용이 없구먼.”

결국 레펜하르트는 오크 투사에게 바포메트 슈트 입히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드워프 쪽으로 눈을 돌렸다.

파워 타입인 데다 금속 갑주 사용이 익숙한 드워프들은 바포메트 슈트와 상성이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드워프 오러 유저 유스테아와 슬로이틀, 말로이드가 실험대에 올랐다.

그러나…….

-짜, 짧아!

-손이 안 닿아!

-발도 안 닿아!

-가, 가랑이가! 남자의 소중한 곳이!

애초에 상성이고 나발이고 머리 크고 팔다리 짧은 드워프에게 인간 위주 갑옷이 맞을 리가?

-……벗겨.

아틸카나 시리스 등은 실험할 필요도 없었다. 오러를 증폭시키는 방식의 무구이니 주술력이나 엘리멘트를 사용하는 이들에겐 무용지물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저 절세 무구 바포메트 슈트는 절세의 애물단지가 되어 안타레스 총회의실까지 올라오는 신세가 되었다. 늠름하게 서 있는 거대한 갑주를 보며 카를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저거 정말 사이즈 조절 좀 안 되는 겁니까, 폐하? 엘드라드 시리즈는 되었잖습니까?”

“엘드라드 시리즈는 파츠 변환 합체형이니까 그렇지. 바포메트 슈트는 슈트 일체형이라 어느 한계 이상으로 사이즈 조절이 안 돼. 기껏해야 팔다리 조금 줄이거나 늘리는 게 전부지.”

“끙, 대체 고대엔 무엇하러 저런 불편한 슈트를…….”

“그야 인간만을 기준으로 잡으면 저 정도 조절로도 충분할 테니까. 단련된 무인의 신체라는 게 사실 그렇게 크게 차이 나진 않거든. 게다가 고대엔 달랑 저거 하나 있었을 리가 없지 않나? 아마 사이즈별로 구별되어 있었을 걸세.”

여하튼 골치였다. 절세 마도구 손에 넣고 신나서 연구한 것까진 좋았는데, 막상 써먹으려고 하니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

인간, 그것도 파워형, 거기에 평소 풀 플레이트 메일에 익숙한 기사 출신 정도나 저 슈트의 성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카를이 은근슬쩍 물었다.

“다른 나라에서 오러 유저를 초빙하는 건 어떨까요? 바실리나 크로방스라면…….”

이니야가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나라, 대륙에서 제일 오러 유저 많이 보유한 나라 아니었어요? 그런데 딴 나라에서 오러 유저를 수입하기까지 해야 하나?”

카를이 피식거렸다.

“오러 유저는 많은데, 인간 오러 유저가 러스 경뿐이지요.”

“어이, 잠깐?”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지금 자신과 사부는 인간으로 안 친다는 소린가, 저거?

아틸카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이즈만 보면 인간 규격에서 아득히 벗어나 있긴 하잖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요.”

어쨌거나 딴 나라에서 오러 유저 수입(?)하잔 의견은 기각되었다. 당장 내일 출발해야 할 판이니 시간도 없을뿐더러…….

“무려 상대는 인류의 신이다. 그런 자를 상대하며 신뢰할 수 없는 동료를 옆에 두고 싶진 않군.”

레펜하르트의 말대로, 아무리 바실리나 크로방스가 우방이더라도 그 휘하 오러 유저까지 우방이란 보장은 없었다. 은의 현자는 대륙 곳곳에 침투해 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포메트 슈트의 방어력은 탐나지만, 카를 재상의 엘드릴 기간투스가 있는 이상 전법엔 크게 문제가 없을 거요. 아쉽지만 예비용 고기 방패는 포기하기로 하지.”

“……폐하? 고기 방패라뇨?”

카를의 반문에 레펜하르트가 딴청을 피웠다. 아무래도 아까 인간 취급 못 받은 것에 살짝 앙심을 품은 것 같다. 편들어 준답시고 실란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게요, 레펜 씨! 고기 방패라뇨? 최소한 황금 방패라고 해 줘요!”

“……아니, 황금 방패도 좀…….”

“엥? 역시 황금재상이 좋은 거예요? 카를 씨?”

“……마음대로 부르시오.”

그렇게 바포메트 슈트의 처분에 대한 결론이 났다.

“그냥 창고에 처박아 둡시다.”

끝내 아쉬워하며 시리스가 혀를 찼다.

“쩝, 그래도 묵혀 두기엔 너무 좋은 무구인데…… 오늘 갑자기 어디서 인간 오러 유저가 안 나타나 주려나요?”

모두가 실소를 흘렸다. 그녀를 달래며 레펜하르트가 웃음을 지었다.

“세상일이 그렇게 편의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않니, 시리스?”

☆ ☆ ☆

같은 시각, 카탈란 가드의 한 대련장.

근육질 거구의 노인이 대련장 한쪽 벤치에 앉아 서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나이에 머리 쓰려니 죽겠구먼. 이게 뭔 소리야?”

한참 학구열에 불타고 있는 그는 레펜하르트의 사부, 권황 제라드였다. 단순 무식전설로 대륙을 진동시키는 짐 언브레이커블이 저런 학구적인 모습을 보이다니? 대륙의 무인들이 알면 기겁할 일이었다. 실제로 지나가던 시종들도 잠시 발을 멈추고 신기하다는 눈으로 제라드를 보는 중이었다.

“제라드 님이 책도 보시네?”

“저분, 글자도 읽을 수 있었어?”

“원래는 귀족가 자제셨다잖아. 당연히 글자 정도는 읽으시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원체 평소 이미지가…….”

주위에서 수군대건 말건 제라드는 열심히 독서에 열중했다. 제자가 그를 위해 특별히 집필해 준 『기초 마법 총론서』를 연신 넘기면서.

초대 권왕 발켄슈트의 심득이 마법이란 걸 알게 된 뒤, 제라드는 자신만의 길을 걸어 9중첩에 도달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대 권왕의 심득을 아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오러로 나만의 길을 가려고 해도, 일단 저게 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 눈으로 보았으면 좋겠지만 그건 무리고.

그래서 제라드는 시중의 마법서들을 사 모았다. 마법을 익히겠다는 건 아니고, 초대 권왕의 심득을 읽고 내용을 유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문제는 그 마법서란 것이 『당신도 마법사가 될 수 있다!』라거나 『쉽고 빠른 마법 입문서』, 혹은 『누구나 가슴에 1서클 정도는 있는 것 아닌가요?』, 『내가, 내가 마법사라니!』 같은 해괴한 물건들뿐이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시장 바닥에서 살 수 있을 정도면 제대로 된 마법서일 리가 없지 않은가? 보다 못한 레펜하르트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따로 제라드 전용 마법 이론서를 만들어 준 것이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준에 ‘철저히’ 맞춘 그 마법서는 제라드조차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3대 마법 학회가 보았다면 경악하며 천금을 들여서라도 이 마법 이론서를 구입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기초를 다지는데 이보다 더 뛰어난 서적은 없을 테니까.

제라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서적의 귀함을 익히 느끼고 있었다.

“역시 내가 제자 하난 잘 두었단 말이야? 나중에 이것도 우리 무문의 가보로 내려 줘야겠구만.”

너무 늦은 나이라 제라드는 무리겠지만, 어쩌면 다음 대의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마법과 무술을 동시에 구사하는 마권왕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아니, 레펜하르트 녀석이 따지고 보면 그런 거지? 이미 나왔구먼.’

투덜거리면서도 제라드는 대련장 구석에서 열심히 학구열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선 러스와 타시드가 한창 대련 중이었다.

“간다, 타시드! 허공검, 인피니티!”

새롭게 손에 넣은 기술, 실검의 공간 절단을 노리는 러스의 궁극 비검이었다. 오러 스킬은 기술 이름을 명확히 정하고 이미지 메이킹을 함으로써 숙련도를 높이는 것이 전통적 방식이다. 인피니티란 이름을 붙인 러스의 공간 절단검이 타시드에게 쇄도해 갔다.

타시드도 바로 반응했다.

“와라, 러스!”

그가 새롭게 손에 넣은 시간 동결의 검이 전투 예지와 맞물려 공간 절단의 검을 가로막는다.

“제라드 소드!”

……상당히 미묘한 기술명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기술 이름을 들은 레펜하르트나 러스도 황당해했다.

‘그보단 이터널 소드라던가 하는 쪽이 더 어울리지 않겠나?’

‘그러게, 타시드. 그런 기술명으로 이미지 메이킹이 돼?’

하지만 타시드 입장에선 매우 타당한 기술명이었다. 원래 오크 투사는 강렬한 자연현상이나 위력적인 몬스터를 본 따 기술명을 짓는 게 전통이었다. 칼켄의 벼락 떨구기라던가 타시드의 푸른 전갈의 꼬리 같은.

그리고 타시드가 손에 넣은 비검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자신만의 검을 만들어 내는 오러 스킬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몬스터(?)의 이름이 붙어야 한다.

‘그럼 당연히 제라드 님이지!’

뭐, 타시드 본인은 아주 훌륭히 이미지 메이킹이 되는 듯하니 딱히 문제는 없지 싶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신 나게 오러를 여기저기 뿌려 대며 대련에 열중했다. 당장 내일 출발해야 하는 판이니 둘 다 대련보다는 좀 더 중요한 일이 있을 법도 한데―업무 인수인계라든가, 인류의 신을 상대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다든가― 둘 다 그런 쪽엔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무엇보다 이 단순한 두 작자는 안타레스 중진들의 총회의조차도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머리 좋은 양반들 많은데 알아서 잘하겠지.”

“그럼, 우리가 거기 껴서 뭐하겠어? 차라리 그 시간에 칼질이나 더 해 두는 게 낫지.”

단순 무식한 놈이 단순 무식한 친우와 어울리니 이 어찌 아니 행복할쏜가? 신바람 난 두 사람은 계속 칼질을 해 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대련장 반대편에서 아스레일 경이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러스 경이 저렇게 단순한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름 빠릿빠릿하게 머리 돌아가는 양반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보니 이건 뭐 반은 오크스럽고 반은 짐 언브레이커블스럽게 변해 버렸다. 역시 가정환경(?)은 중요한 것이다.

어쨌거나 아스레일 경은 오늘도 두 사람의 블레이드 오러를 보고 있었다.

“으음.”

역시 언제 봐도 부럽다.

저 찬란한 빛, 저 놀라운 위력.

‘처음에는 저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지.’

인간 오러 유저는 워낙 자신의 힘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수행도 비밀스러운 곳에서 한다. 사람들 앞에서 오러를 발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끽해야 거대한 전장에서 아군의 사기를 위해 일대일 승부를 할 때 정도?

일반인은 물론 어지간한 무인이나 기사들에게조차도, 저 찬란한 빛은 평생 한번 볼까 말까 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지겹네.’

문득 아스레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그렇게도 신기하고 놀라운 빛이었는데 이젠 뭐, 무덤덤하다. 블레이드 오러를 하루 이틀 봤어야지? 오러 유저 남아도는 안타레스 왕궁에서 저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붙고 붙고 또 붙어 대는데, 이젠 시종들조차 오러 파편 날아오면 자연스럽게 피하고 그냥 자기 볼일 보는 지경이었다. (애초에 그 정도 실력은 있는 인간들만이 안타레스 왕궁의 시종이 될 수 있다.)

여전히 부러운 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놀랍거나 신기하진 않은 것이다. 워낙 익숙해지니 별거 아니게 느껴진달까?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지. 내가 오러의 빛을 보고 지겹다는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혀를 차며 아스레일은 허리에 찬 장검을 슥 뽑았다.

“하도 자주 보니 왠지…….”

평생 수련한 일검을 가볍게 허공에 찌르며 키득거린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드는데?”

부우웅!

공기를 찢는 굉음이 울리며 칼날을 따라 보랏빛 섬광이 솟구쳤다. 강렬한 블레이드 오러가 아스레일의 검을 찬란히 빛냈다.

검을 쥔 채 아스레일이 멍하니 굳어 버렸다.

“……에?”

☆ ☆ ☆

다시 안타레스의 중진들이 총회의실로 모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스레일이 머리를 긁적이다 검을 뽑아 휘둘렀다.

부우웅!

굉음과 함께 보랏빛 블레이드 오러가 칼날을 타고 흘렀다. 찬란한 섬광을 보고 회의실에 모인 모든 이들이 축하했다.

“오오!”

“드디어 아스레일 경도 오러를 각성했군!”

“그동안의 수행이 보답을 받았군요!”

“보라색? 때깔 좋구먼.”

다른 나라 같았으면 국경일로 지정하고 사흘간 축제를 벌일 정도로 큰일인데, 이 동네는 오러 유저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아서인지 그냥 축하 인사 건네고 땡이었다. 뭐, 어쨌거나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고 있었다.

모두의 축하 속에서도 아스레일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거 오러 맞습니까?”

딱히 별 느낌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 순간 아스레일은 느꼈다. 세상과 자신이 하나가 되며 새롭게 태어나는 감각, 말로만 듣던 오러 각성임엔 분명했다. 하지만…….

“전투에 임한 것도 아니고 맹렬히 수행 중이었던 것도 아니고 무아지경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러스와 타시드 대련 구경하면서 구시렁대다 대충 찔러 본 건데 오러가 터져 나왔다. 그래, 터져 나왔다는 표현이 제일 정확할 것 같다. 적어도 아스레일 자신이 오러를 끌어냈다는 느낌은 전혀 안 든다.

“이게 원래 이렇게도 되는 겁니까?”

제라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별로 신기할 거 없다. 나나 제자 놈도 처음 오러 각성할 땐 그런 느낌이었으니.”

다른 오러 유저와 달리, 짐 언브레이커블의 문도에겐 저런 식의 오러 각성이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다. 스스로가 끌어낸다기보다는 죽도록 맞고 맞고 또 맞다가 ‘강제로 오러를 끌어내지는’ 감각으로 각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무아지경이나 극한의 상태는 아니었어도, 그 순간은 분명 자연체에 잠시 들어가지 않았느냐? 이상할 것 없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자연체란 게 하도 처맞아서 전신이 낙지처럼 풀어지는 걸 말하는 거라면 사부 말이 맞긴 하네요.”

“원래 자연체란 게 흐느적거리는 거지, 뭘.”

레펜하르트와 제라드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아스레일은 여전히 애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기쁘긴 기쁘지만 느낌이 묘하다. 남들은 대륙 최강, 대륙 최연소 같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대체 뭐라고 해야 하나? 대륙에서 가장 시시하게 각성한 오러 유저?

“허, 이거 참…….”

한편, 카를은 이니야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왕비 전하?”

“아스레일 경이라면 충분히 오러를 각성할 기량을 지니고는 있었지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이르다. 평범한 오러 유저와 비교해 볼 때 아스레일은 아직도 각성의 경지를 앞두고 좀 더 헤맬 시기였다. 보통 저 벽을 넘어서는 데도 몇 년이 걸리고, 못 넘어서고 좌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아스레일은 너무 쉽게 벽을 넘어 버렸다.

“역시 환경적 요인의 영향이 있는 걸까요?”

카를의 질문에 이니야가 답했다.

“오러는 생명기, 자신의 오러로 다른 이의 생명기를 자극해 각성을 촉발시키는 방식은 이미 짐 언브레이커블에서도 하고 있잖아요? 상당히 영향이 있었을 거예요.”

평소 러스며 타시드 등, 안타레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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