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장 Silence & Peace
1
은의 수호자, 인류를 비호하는 가장 위대한 단체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세렐라인은 현재 수호자 업무에서 거의 손을 뗀 상태였다.
그녀에겐 은의 수호자보다도 더욱 중요한 책무가 있었다. 지상에 재림한 인류의 신, 그분을 곁에서 보좌하는 영광된 일이었다.
은의 수호자 중에서도 오직 그녀만이 위대한 신의 오른편에 올랐다. 모든 은의 수호자들이 그녀를 경외하고 부러워했다.
……그래서 지금 세렐라인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아, 다 말랐나? 어서 널어야겠다.”
세이어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신이자, 사람의 아들이다.
또 이렇게도 말했었다.
-그렇다. 나는 신이지만 밥도 먹고 똥도 싸지.
아무리 신이라도 사람의 육신을 가진 이상 의식주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것이다. 덕분에 위대한 신의 오른편에 올라 그녀가 내내 한 일은 요리, 빨래, 청소 등이었다.
‘이건 신의 보좌라기보단 그냥 식순이…….’
살짝 우울해져 세렐라인이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폈다.
이건 그냥 빨래가 아니다. 위대한 인류의 신께서 걸치실 의복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
‘그래, 이건 성스러운 일이야. 성스러운 임무…….’
세이어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으로도 쉽지 않은 자기 세뇌였다. 어쨌거나, 빨래가 다 되었으니 꺼내긴 해야지.
“영차!”
은의 시대 고대 기물, ‘때가 쏙! 코인 빨래방!’이라 적힌 정체불명의 아티팩트에서 세렐라인이 열심히 옷가지를 꺼냈다. 버튼만 누르면 척척 빨래가 되는 이 신기한 상자는 실로 고대 문명의 위대함을 보여 주는 산 증거였다.
빨래를 가지고 밖에 나오자 하얀 날개를 단 수십의 남녀가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세이어가 창조한 천사들이다.
“자, 이것들 갖다 널어.”
세렐라인의 명에 따라 천사들이 날아오른다. 수십의 천사들이 날개를 펼치고 허공을 나는 그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비록 그 천사들이 빨랫감을 들고 있다 해도.
허리에 손을 얹고 세렐라인이 웃었다.
“그래, 이것도 나쁘진 않지.”
식순이라며 투덜거리긴 했지만 실제 그녀의 업무가 노동을 많이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다. 인류의 신이 머무는 세이어 템플은 모든 것이 고대 아티팩트로 인해 자동화되어 있다. 사람의 손이 필요한 부분은 천사들을 시키면 되었다.
말하자면 식순이라기보단 하녀장 정도?
‘……신의 하녀장이라면 나름 괜찮잖아?’
어깨를 으쓱인 뒤 세렐라인은 걸음을 옮겼다. 빨래가 끝났으니 세이어에게 오후의 차를 가져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복잡한 기계 장치가 가득한 거대한 방, 수많은 수정 화면과 입체 영상이 가득한 그곳의 중심부에 강철로 만들어진 의자가 있었다. 세이어는 그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수치와 영상을 내보내는 눈앞의 화면을 정신없이 보는 중이었다.
“전지 영역이여, 내게 답을 구해 다오.”
벌써 몇 번이나 던졌던 질문이다.
“그자는 어떻게 죽음을 피해 다시 나타났는가?”
우주의 알, 아카식 제어 시스템은 저 질문에 대해 이미 예전에 답을 내놓았다.
불가능.
모든 정보를 동원해도 저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 일이라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이어는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입력했다.
“그리고 저 A.M.P 쇼크웨이브라는 마법은 대체 어떤 원리로 발동되는 것이지?”
이 역시 아카식 시스템은 답을 알 수 없었다. 같은 결론을 내놓는다.
-마법으론 불가능, 존재할 수 없는 현상.
“그럼, 마법으로 불가능하다면……”
세이어가 질문을 바꾸었다.
“신성이 개입되면 가능한가?”
-불가능.
세이어는 납득했다. 아카식을 다루는 그라도, A.M.P 쇼크웨이브에 대해선 감도 잡을 수 없었으니까.
“그럼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한가? 저게 가능한 경우는 없는 거냐?”
이번에 전지 영역이 색다른 해답을 내놓았다.
-특정 상황하에서 전자의 가능성이 존재함.
세이어가 눈을 빛냈다. 해답이 이어졌다.
-개체적 타 차원 탐지 및 이동 능력을 가진 자가 존재한다면 일어날 수 있는 현상.
“뭐?”
세이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개체적 타 차원 탐지, 이동 능력이라고?”
마법사 개인이 아득한 고대에 존재한, 다차원 항행용 장거리 이민선 엘디아처럼 차원을 해석하고 뛰어넘을 수 있다면 저 현상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아카식 시스템의 추론이었다.
그리고 이는 실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인간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세이어 역시 차원문을 여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이차원 환경 속에서도 육신과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절대 마법 역시 지니고 있다. 아토믹 버스터를 피하는 방법 중 하나로 차원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뛰어드는 상황도 안 떠올려 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가설은 스스로의 비웃음과 함께 폐기되었다.
차원문을 열고 뛰어드는 건 10서클 마법사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거기서 다시 원차원으로 돌아오는 건 설사 은의 시대 최강의 마법사, 메테우스 박사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원을 넘었다 돌아오는 건, 그냥 온 길을 되돌아가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다.
차원계면은 무한한 차원 격류로 인해 끝없이 변화하는 유동적인 상태다. 차원문을 통과해 뒤돌아보는 순간, 이미 그곳은 자신이 떠난 차원이 아닌 전혀 다른 별차원이 존재한다.
여기서 원하는 차원을 콕 집어 특정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확률 연산과 원 차원에 대한 이정표가 되는 특정 마력체, 그리고 차원 너머로까지 뻗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마력 감지 능력이 요구된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인간인 이상 그 정도로 엄청난 마력 감지 능력이 있을 리가…….”
확률 연산이야 워낙 천재라 가능하다 치자. 원 차원의 이정표도 뭐, 엄청난 마력을 때려 부어 어떻게든 마련해 놓았다 치자.
솔직히 여기까지는 세이어 자신이나 고대 10서클 마법사들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차원을 넘어설 정도로 강력한 마력 감지 능력이라고?
“무슨 행성 반대편에서 개미 기어가는 거 느낀다는 소리도 아니고…….”
저 감지 능력은 심지어 아카식 드라이브조차도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신의 힘이라도 차원을 넘을 순 있을지언정, 무한의 거리를 지닌 무한의 차원 속에서 원하는 것만을 고르진 못한다.
차원 항행용 이민 선단 엘디아는 1400년이란 세월 동안 차원을 넘고 또 넘으며 쌓아 올린 정보를 통해서 다음 차원의 정보를 확률적으로 유추했을 뿐이다. 실제로 같은 아카식 드라이브인 알 포트라도 타 차원 파악 능력은 없다. 뭐, 그쪽은 차원 대신 시공 이동을 통해 정보를 쌓아 올렸기 때문일 뿐이지만.
압도적인 마력도, 신의 힘도 소용없다. 오직 인간이 세월을 통해 쌓고 쌓은 기록의 힘만이 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자에게 그 정도로 방대한 기록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세이어 자신에게조차도 더 이상 저 기록이 없다. 아카식 폭주 때 대부분 날아가 버렸으니까.
그러나 저 전제하에서라면 레펜하르트가 살아 돌아온 걸 설명할 수 있다. 황당해하는 세이어에게 아카식이 첨언을 덧붙인다.
-또한, 저 전제를 토대로 후자의 질문 역시 현실 가능한 가설이 나옴.
타 차원 탐지 능력을 최대한으로 넓히면, 곧 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차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아카식의 전지 영역은 또 다른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었다.
-다른 세계, 다른 법칙이 존재하는 타 우주와의 접촉 능력이 있다면 A.M.P 쇼크웨이브의 존재가 설명됨.
차원과 시공조차 다루는 신의 힘, 아카식조차도 그 한계가 있다. 바로 법칙이 존재하는 세계 자체다. 법칙을 다루는 힘이기에 오히려 법칙에 얽매인다.
그러나 같은 세계, 같은 우주에서도 차원이 하나가 아니고 공간이 하나가 아니며 시간이 하나가 아니다. 이렇듯 세계 역시 하나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법칙이 다르고 전혀 다른 차원과 시공간을 지닌 세계가 현 우주와 함께 존재한다.
어느 세계에선 마법이 존재하지만 어느 세계에선 마법이 허황된 미신이며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일 수도 있다.
어떤 세계에선 유령이 실재하지만 어느 세계에선 죽음은 곧 끝이며 영혼은 허구이고 인간의 인격은 그저 전기 신호의 집합체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세계에선 도구로써의 마법은 존재해도 인간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아, 마법을 과학이라 부르는 법칙이 존재할 수도 있다.
A.M.P 쇼크웨이브.
이는 다른 세계의 법칙을 띤 파동이었다. 바로 인간의 마법은 존재해도 도구로써의 마법은 존재치 않는 법칙을 지닌 세계의 파동.
차원을 넘어서 세상의 문을 열고, 다른 법칙이 존재하는 그 세계가 현실을 잠식한다면 도구로 기능하는 모든 마법은 정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아카식 시스템이 추론한 A.M.P 쇼크웨이브의 정체였다.
-그렇다면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이 A.M.P 쇼크웨이브에 대해 어떤 지식도 정보도 없는 것이 설명이 됨.
신의 힘을 손에 넣었기에, 세상의 법칙을 주무르게 되었기에 저 두 문명은 오히려 한계에 갇혔다. 현 세계의 법칙에 얽매인다는 한계를. 아무리 은의 시대라도 이 세상을 넘어서 다른 세상에 손을 뻗은 적은 없다.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세이어가 비유를 들었다.
“그러니까…… 중세풍 액션 온라인 게임 유저가 딴 게임 해킹해서 건 슈팅 온라인 게임 폭탄을 들고 온 격이다 이건가?”
-비슷한 비유라 사료됨.
“허, 거참…….”
오랜만에 모순이라는 감정이 느껴진다.
“설명은 되지만 말은 안 되네.”
이해는 되지만 납득은 안 간다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이구나 싶다.
“저게 가능하긴 한 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의외로 아카식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모성의 기록 속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음.
“저 미친 소리가, 심지어 사례도 있다고?”
-모성 고대의 대륙 동반구에 성행하던 도술, 선술과 비슷한 맥락으로 추정됨.
분명히, 멸망의 시대에 다다라서야 인류는 신의 힘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전에도 아카식 레코드에 접촉한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의 아들, 깨달음을 얻은 자, 첫 번째 사도…….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은 오직 영혼의 지혜만으로 아카식 레코드의 일부를 접했다. 그 힘으로 기적을 행하고 제자를 거두고 널리 가르침을 펼쳤다. 그들은 분명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신에 닿은 이들이었다.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위해서 수행하는 이들도 있었다. 세상 자체를 유상무상의 존재로 보고 또 다른 경지를 넘보기 위해 끝없이 나아가던 이들 중엔 아카식 레코드조차 무시하고 바로 다른 세계를 엿보는 자들도 존재했다.
-모성의 역사 속엔, 극히 제한적으로 특정 상황하에서만 비슷한 행위가 가능하던 이들이 있었음.
지식도 정보도 기술도 없이, 오직 감각과 지혜만으로 신의 경지에 손 뻗은 모성의 고대인들.
-제대로 된 지식도 정보도 없이 스스로 10서클을 개척한 그자는 고대 모성의 구도자와 수행 과정이 흡사함.
애매하긴 하지만 조금씩 이해가 된다.
세이어는 마법을 익힌 자였다. 은의 시대가 가진 모든 마법의 정보를 습득하고 연습해 구사하는 자다.
레펜하르트는 마법을 깨달은 자였다. 비슷해 보이지만 이는 전혀 달랐다.
말하자면 이는 러스가 공간을 다루는 것과 비슷했다. 러스가 공간에 대해 뭘 알고 공간 절단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다.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뿐.
레펜하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이론적, 학문적 토대로 마력을 감지하는 게 아니다. 그냥 느껴지니까 느끼는 것뿐이다. 만날 러스니 타시드 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런 짓 잘도 한다고 투덜거렸지만, 알고 보면 본인도 똑같은 놈이었다.
-그의 마력 감지 능력은 깨달음의 영역, 기奇와 술術로 존재하는 엘드라스, 알하트란의 마법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함.
너무 고도로 발달했기에 오히려 은의 시대 마법사들은 잃어버린 것.
언어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레펜하르트를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게 했고, 이해할 수 없는 저 절대적인 마법을 구사하게 했다.
이것이 아카식 시스템이 내놓은 결론이었다.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며 세이어는 생각에 잠겼다.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딱히 두려운 일인 것도 아니었다.
이론과 학문이 아닌 지혜와 감각으로 경지에 든 이들은 항상 공통된 문제를 안고 있다.
바로 융통성이 없다는 것.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물질 변환의 기적이 가능해도 칼을 가루로 만들 순 없다. 물 위를 걸을 순 있지만 물속에서 숨을 쉴 수는 없다. 신의 이적을 행해도 그 힘이 너무 제한적이라 한계가 명확하다.
“결국 아카식을 다루는 건 아니란 소리잖아? 그럼 별로 걱정할 일도 없겠군.”
이로서 아주 조금 남아 있던 모든 근심도 사라졌다. 세이어는 표정을 폈다.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쉬고 있다 문득 재차 질문을 던진다.
“그럼, 그자의 엄청난 재능은 어찌 된 것이지? 그것도 혹시 이유가 있나?”
천재가 천재로 태어나는 데 대체 뭔 이유가 필요하겠냐마는, 그걸 감안해도 레펜하르트의 재능은 지나치게 뛰어나다. 무엇보다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차지한 세이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한 종족의 궁극 진화체, 모든 재능 인자를 최대한 발현한 내 원육신조차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이것도 뭔가 이유가 있으려나?”
-그것은…….
막 전지 영역이 해답을 내놓으려던 차였다. 조심스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기, 세이어시여? 오후의 차를 가져왔습니다만…….”
2
우아한 다기에 향기로운 차를 담아 살며시 강철 왕좌 곁에 놓는다.
“세이어 님, 차 드세요.”
“거기 놓아 두거라.”
별로 안 끌리는지 세이어가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 세렐라인이 눈을 흘겼다.
“지금 드시면 안 돼요? 식으면 떫어지는데…….”
“……너, 요새 묘하게 잔소리가 늘었다?”
역시 인간의 적응력은 무서운 것이다. 예전엔 신의 위엄 앞에 감히 고개도 못 들던 세렐라인이다. 그러나 요 근래 같이 살면서 하도 가깝게 보다 보니 슬슬 익숙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말도 많아졌다.
세이어 님, 늦게 주무시면 몸 상해요.
세이어 님,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셔야죠.
세이어 님, 당근도 버리지 말고 꼬박꼬박 드세요.
세이어 님, 제발 오줌 눌 때 정조준 좀…….
마지막쯤 되면 신에 대한 경외고 나발이고 다 버린 것 같다만, 하여튼 그녀의 모든 행동은 오직 세이어를 위한 것일 뿐이다. 사실 잔소리도 애정이 있어야 하지, 없으면 하겠나? 잔소리가 얼마나 귀찮고 정신력 소모하는 행위인데.
그래서 세이어도 딱히 화를 내지 않았다.
그냥 귀엽다는 듯 웃으며 찻잔을 든다.
“그래, 지금 마시지, 뭐.”
차를 마시며 재차 콘솔을 조작한다. 화면 전체에 온갖 술식과 고대 문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걸 힐끔거리다 갑자기 세렐라인의 표정이 굳었다.
“세, 세이어 님, 저거?”
그것은 한 무시무시한 병기 시스템의 제어 술식이었다.
은의 시대를 양분하던 두 문명, 엘드라스와 알하트란.
그중 알하트란의 최종 병기, 시공융합포 니르바나Nirvana를 가동하는 제어 코드가 화면 가득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저건…….”
지도가 펼쳐진다. 대륙 전역이 그려진 입체 지도다.
시공융합포는 그 지도의 절반을 노리고 있었다.
서쪽 하란 강부터 동쪽 페틀랜드 해안선, 북쪽의 프로즌 랜드로부터 남쪽의 페펠 군도까지, 바실리 왕국과 안타레스, 크로방스는 물론 페틀랜드와 글로텐 산맥 전역이 시공융합포의 범위 안에 들어 있다.
기겁해 세렐라인이 세이어를 돌아보았다.
“……세이어시여, 설마?”
태연자약하게 세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벌을 내릴 것이다.”
세렐라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시공융합포 니르바나, 열반涅槃이라는 비아냥 섞인 명칭을 지닌 이 병기는 은의 시대에조차도 너무 지나친 위력 탓에 사용이 금기시된 것이었다. 실제로 두 문명이 전쟁을 벌일 때도 감히 시공융합포를 꺼내 들지는 못했을 정도다.
그 끔찍한 파괴의 권능이 지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순한 지도일 뿐인데도 면적이 어찌나 넓은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저 술식이 가동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짐작도 할 수가 없다.
오크라트와 아라난 그라드의 참상 따위완 비교도 되지 않는다.
1차, 2차 성전조차도 이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뿐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질지, 대체 얼마나 드넓은 대지가 황폐화될지, 대체 얼마나 많은 숲과 산, 호수와 동물, 그 외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멸하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떨린다. 공포의 시선으로 그녀는 세이어를 돌아보았다.
“……세, 세이어시여…….”
인류의 신은 웃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여왕벌이 죽어도 벌 떼가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고. 이미 그자를 처리하는 걸로 끝나기엔 너무 많이 왔다고.”
그래, 그는 분명 말했었다.
“그럼 벌통을 떼 버리는 수밖에.”
“꼭…… 그리하셔야 하겠나이까?”
세이어의 신벌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시공융합포가 동원된 적은 없었다.
이제껏, 이토록 거대한 신벌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공융합포 니르바나는 세이어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맹목적인 사랑, 한없는 경외를 지닌 세렐라인조차도 의문을 품을 정도로 끔찍한 위력의 병기였다.
“세월이 흘렀고, 사태가 커졌다. 그러니 그에 걸맞은 것을 준비할밖에.”
대꾸하며 세이어가 교단의 경전에도 나오는 한 구절을 읊었다.
“알지 않느냐? 나는 질투하는 신이다.”
문득 그가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은색 머리칼을 매만진다.
“네 근심을 안다. 네 두려움을 안다.”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신의 말씀을 건넨다.
“나의 딸아,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세렐라인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떨리는 몸이 가라앉았다.
“이는 전혀 큰일이 아니다.”
“하지만…….”
떨림은 가라앉았지만,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흔들리는 세렐라인의 눈동자를 지긋이 응시하며 세이어가 입을 열었다.
“대지가 녹음을 되찾는 데 500년이면 충분하다. 산악이 제 모습을 찾는 데 800년이면 충분하다.”
인류를 위한 일이다. 결코 황폐화된 대지를 그냥 내버려 둘 생각 따윈 없다.
대지의 정을 건드리지 않고 자연스러운 테라포밍을 시도해도, 시공융합포의 자취를 지우고 새로이 산과 들을 생성하는 데 몇백 년이면 충분하다.
“천 년이면 인류는 손상된 인구를 복구하고 오히려 더 크게 번성할 것이다.”
고작 천 년, 앞으로 펼쳐질 인류의 미래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
“남은 것은 대륙 동부에 거하던 착실한 엘프, 드워프, 오크, 트롤의 후예뿐이겠지. 그들은 조용히 살아가며 인류를 위해 봉사하리라.”
새로운 대지 위를 인류는 마음껏 활개 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 어떤 엘프, 오크, 트롤, 드워프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하게 만물의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으리라.
“인류는 더욱 번성하리라.”
아, 이 얼마나 아름답고 보기 좋은 세상이란 말인가?
이 얼마나 올바르고 바람직한 미래란 말인가?
“이는 처음도 아니요, 마지막도 아니니 그저 내 뜻이 다시 한 번 세상에 펼쳐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의 딸아, 너는 근심하지 마라.”
인류의 신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리라.”
사람의 딸이 떨며 고개를 숙였다.
“예, 세상의 주인이시여…….”
<20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