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권 제72장 Catastrophy (73/84)

제72장 Catastr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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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하임 소장은 약속을 지켰다. 흔쾌히 세이어에게 연구소 내 제3네트워크 접속 허가를 내주었다. 이후 세이어는 정해진 훈련 시간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새까만 큐브만을 붙잡고 살았다.

마법장을 펼쳐 시전자의 감각과 신경계에 직접 작용해 리얼한 환상과 환각을 부여해 주는 이 ‘가상현실 구현화 큐브’는 엘디아와 알 포트, 양쪽에서 널리 퍼진 마학 하드웨어였다. 수많은 소프트들이 이 큐브에 맞춰 제작되어 흥행했고, 세이어도 어릴 적 그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메테우스 박사가 직접 만든 마법 교육용 게임, ‘맞혀라! 패널!’이 그것이다. 마력 증폭 및 뇌 발달 가속 능력이 있는 이 소프트는 재미와 교육,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며 박사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으로 시전자에게 보다 빠른 마법 습득력을 길러 주는 놀라운 물건이었다.

‘나중에 특허 내고 팔아먹어 짭짤한 부수입을 건지기도 하셨지, 아마?’

어쨌거나, 지금 세이어가 접속한 것은 저 ‘맞혀라! 패널!’이 아니다. 헤븐 프로그램, 명칭만 보면 묘하게 성스럽고 거룩한 듯하지만 사실은 사용자가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조정한 뒤 그 속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살 수 있게 만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다.

다른 가상현실과 다른 점은 한계가 없는 점이랄까?

대부분의 가상현실은 엄연히 도덕적 제어 아래, 엄밀한 규제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이 헤븐 프로그램은 음지에서 개발되어 정규 루트가 아닌 뒷세계 쪽으로 퍼진 게임이다. 쉽게 말해 불법이란 소리다.

살인, 강간, 강도질, 고문, 학대 등 법과 도덕의 굴레 아래 있는 건전한 시민은 결코 행하지 못할 일을 헤븐 프로그램은 여과 없이 허용한다. 마음만 먹으면 그 안에서 얼마든지 음란방탕, 잔혹무비한 짓도 해 버릴 수 있다.

그 세계는 분명 지옥이지만 사용자 본인에게는 천국, 그래서 헤븐 프로그램이라는 이중적인 이름이 붙었다.

큐브를 쥐고 세이어가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스위치 온.”

메테우스 연구소의 한 룸일 뿐인 주위가 삽시간에 울창한 자연 속의 다른 세계로 바뀐다. 중세풍 도시가 펼쳐지고 수많은 NPC가 거리를 오간다. 인간도 있고 엘프, 드워프도 있다. 가상의 종족이지만 현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종족이기도 하니 그런 캐릭터를 안 넣을 이유가 없다. 팔아먹긴 해야 하니까.

헤븐 프로그램에 접속한 세이어는 어느새 주변과 어울리는 중세풍 복장을 하고 있었다. 도시를 둘러보며 그가 씨익 웃었다.

“좋아, 가 볼까!”

그리고 도시 사이로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세이어 관점에서나 걷는 것이지, 외부에서 볼 땐 그저 침대에 누워 큐브가 내뿜는 검푸른 마력장에 폭 감싸인 걸로밖에 안 보인다.

지나가던 연구원 몇몇이 창 너머로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저거 완전 빠져 있구먼. 대체 며칠째야?”

“역시 게임 중독 무섭다니까. 저 녀석이라고 뭐, 별수 있나?”

“그래도 세이어 저 녀석, 요새 너무 저거에만 빠져 사는데?”

“좀 자제시켜야 하지 않을까?”

“훈련 일정엔 지장 없잖나? 그냥 내버려 두지? 우리도 신경 쓸 필요 없어서 편한데.”

“그건 그렇군.”

“솔직히 헤븐 프로그램이 재밌긴 재밌잖소?”

“그건 그렇지. 재밌긴 하지.”

이들 역시 시간 날 때마다 종종 제3네트워크에 접속, 헤븐 프로그램으로 ‘사나이의 유희’를 즐긴 경험이 있는 것이다. 연구원 중 하나가 세이어를 보며 농을 던졌다.

“이 녀석아! 작작 좀 해! 그러다 밤중에 몰래 팬티 빨 일 생긴다?”

물론 가상현실에 접속 중인 세이어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연구원들은 키득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역시 저놈도 남자는 남자야.”

“사내놈은 다 똑같구먼. 끌끌.”

하지만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세이어는 이 저열한 프로그램 속에서, 정작 저열한 행위 따윈 조금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 ☆ ☆

도시를 걷는다. 주위로 온갖 풍경이 펼쳐진다. 아리따운 여인이 요염한 옷을 입고 유혹하는 창녀촌이 나온다.

엘드라스인, 알하트란인, 엘프, 드워프 등은 물론 모성의 여러 인종조차도 철저히 구현되어 있다. 입맛대로 골라 드시라는(?) 친절한 배려다. 물론 그 속에도 선주종이나 오크, 트롤 등은 없다. 아무리 가상현실이어도 사람이 아닌 짐승과의 관계를 꿈꾸는 이는 없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있긴 있는데 그런 놈들은 굳이 가상현실에서 욕구를 채우는 게 아니라 그냥 현실에서 저질러 버린다. 그쪽이 훨씬 싸고 편하거든!

하여튼, 세이어는 창녀촌을 지나 계속 걸었다. 점점 골목이 으슥해져 꽤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가 되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는 바로 세이어 자신이 창조한 세계, 이곳에서 그는 신이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모든 이들을 학살할 수도 있고, 다정하게 살고 있던 여염집에 침입해 아낙과 어린 딸을 동시에 강간할 수도 있으며, 성자라 추앙받는 이를 납치해 끔찍한 비인도적인 고문을 행할 수도 있다.

애초에 그런 변태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이 헤븐 프로그램인 것이다.

그런 만큼 이 프로그램의 보안은 실로 철저했다.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해야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상현실 환경 구축을 위한 소스 제공을 받는 용도고, 게임을 실행할 때는 철저하게 큐브 자체만으로 구현된다. 온라인 게임이 아니라 콘솔 게임인 격이랄까?

‘그래서, 박사가 이 게임을 선택한 거지.’

미소를 머금은 채 세이어는 골목길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한 건물로 들어갔다. 허름한 펍 지하로 걸어 내려가자 갑자기 주위 환경이 바뀌었다. 1층은 분명 퀴퀴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와 거미줄이 군데군데 보이는 중세풍 술집이었는데, 지하는 사방이 최첨단인 실내 공간이다.

그렇게, 세이어 현 시대의 연구실로 변한 건물 지하를 내려오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발로 세수를 하며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내뱉었다.

“어서 오세요, 메테우스 박사님.”

세이어는 현실 도피를 위해 제3네트워크 접속 허가를 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현실을 보게 되었기에 이를 원했다.

그가 진짜 원한 것은 이 네트워크 속 데이터 공간, 저 고양이의 모습으로 대변되는 이곳의 정보였다.

메테우스 박사는 뛰어난 연구자이자 동시에 엘드라스 최강의 마법사이며 마학자다. 대부분의 편집증적인 연구자며 마학자가 그렇듯, 그도 철저하게 자신의 연구 결과 및 마법 술식 등을 전부 백업해 놓았다. 이곳은 메테우스 박사가 1500년이란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쌓아 놓은 지식과 지혜의 저장고인 것이다.

고양이가 세이어의 외모를 보고 잠깐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녀가 아는 박사의 모습이 아닌 탓이었다.

“본인 인증을 위해 패스워드를 입력해 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세이어가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새 땅은, 대체, 언제쯤, 발견되는, 거냐?”

“패스워드 확인. 개체 확인을 위한 마력장 패턴과 영자 구조 패턴 검색에 들어가겠습니다.”

“어서 해.”

손짓을 하며 세이어가 허공에 빛의 콘솔을 띄우고 뭔가를 조작했다. 미리 준비한 박사의 마력 패턴과 영자 패턴 카피 파장이 자연스레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온다. 이미 몇 번이나 해 온 일이라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고양이가 다시 한 번 야옹 하고 세수를 했다.

“본인 확인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이어는 오늘도 연구소 제3네트워크에 위치한, 백업용 정보 저장고의 시크릿 도어로 들어섰다.

이는 메테우스 박사가 철저하게 숨겨 온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 당연히 박사는 그 누구에게도, 당연히 세이어에게도 이 가상 정보 창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당연히 접속 코드라든가 접속 방법도 말해 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세이어는 몇 년 전부터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평소 박사가 무의식적으로 내비치는 언행을 통해서.

그가 메테우스 박사와 같이 산 지도 벌써 100년이다. 부부도 그 정도로 오래 함께 살진 않는다. 아무리 철저히 숨기려 해도, 100년이란 시간은 비밀을 감추기엔 너무 긴 세월이다.

하찮은 단어, 손짓, 행동 하나하나가 세월이 쌓이며 의미가 되고 정보가 된다. 물론 그동안 세이어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은 신경 쓸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다르다.

‘박사가 자리를 비운 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네.’

박사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면 이런 굴욕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이런 각오를 다질 일도 없었겠지.

모든 관문을 통과한 세이어가 빠르게 지하실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급했다. 저녁 먹을 때가 되면 도로 접속을 끊어야 하니 유예 시간은 네 시간 정도밖에 없다. 어서 어제 익히다 만 9서클 주문을 마저 습득해야 한다.

이내 메테우스 박사가 감춰 놓은 9, 10서클 마법 이론이 세이어의 눈앞 가득 펼쳐졌다.

☆ ☆ ☆

신세력 107년.

메테우스 박사가 연구소를 비운 지 4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세이어는 계속 가상현실 속을 헤맸다. 단하임 소장도, 다른 연구자들도 그런 세이어를 딱히 괴이쩍게 여기지는 않았다.

원래 게임 폐인 한번 되면 몇 년씩 붙잡고 사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하물며 세이어는 이주 인류보다 수명도 네 배나 길지 않은가? 16년을 붙잡고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지.

모두가 무시하는 가운데, 세이어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게걸스럽게 지식과 지혜를 빨아들였다. 새로운 걸 창조하는 재능은 그리 없을지 몰라도 이미 존재하는 것을 숙달하는 측면에선 그가 메테우스 박사보다도 뛰어나다. 고작 4년 만에 9서클을 통과하고 10서클의 영역에 들어섰다.

그렇게 힘을 키우며, 세이어는 조금씩 원래 계획을 수정했다.

사실 그가 제3네트워크를 원한 건, 메테우스 박사의 지식과 지혜를 노린 목적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단순하고 보편적인 이유였다.

‘이 연구소를 탈출하겠어!’

갇혀 사는 실험체라면 누구나 생각할 법한 빤한 이유로 세이어는 힘을, 보다 고도의 마법을 원했다. 세이어의 연구적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리고 메테우스 박사의 영향력을 떠올리면 그가 도망칠 경우 군대가 총출동해도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둘 다 그 정도 가치와 힘은 있다.

적어도 10서클에 들어, 박사의 시야를 피할 정도는 되어야 겨우 탈출할 자격이 생긴다.

그러나 연구소를 성공적으로 탈출한다 한들 동족에게 돌아갈 순 없다. 아무리 동족이라지만, 세이어와 선주종 사이엔 인간과 원숭이만큼의 영적 차이가 있다. 그 속에 끼어 그들의 무리가 될 바엔 차라리 실험체로 남는 게 낫지.

‘그리고, 짐승이 아닌 사람의 일원이 되겠어!’

육체 개조나 외모 변환은 마학적으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며, 엘드라스나 알하트란에 그 정도 성형 기술은 흔해 빠졌다. 동부인 중엔 성형을 통해 서부인과 외모적으로 흡사해진 경우도 제법 존재한다.

그래서 세이어도 그걸 노렸다.

골격 재구성을 통해 특유의 인상을 바꾸고, 뾰족한 귓바퀴를 둥글게 만들고, 눈동자와 체모 색을 변환시키면 선주종이나 이주 인류나 겉보기엔 전혀 구별이 가지 않는다. 실제로 선주종을 육체 개조해 이주 인류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든 뒤 여자 친구 생겼다며 좋아하는 우울한 변태도 세상엔 간혹 있었다.

우선 연구소를 탈출한다. 평생을 익힌 마법의 힘으로 추적대를 따돌리고 자취를 감춘다. 이후 외모를 바꾸어 이름 없는 엘드라스의 시민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원래 세이어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정보를 접하며 그 야심은 깨졌다.

그가 제3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건 박사의 지식과 지혜뿐만이 아니었다. 박사의 아이디 코드는 엘디아에서도 최고위급이다. 언론에 의해 통제된 이면의 진실에도 접속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다.

그제야 알 게 되었다. 단순히 외모를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엘드라스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걸.

전 시민을 총괄, 관리하는 두 문명의 중앙 제어 시스템 엘디아와 알 포트.

이들은 지문이나 홍채 등의 생체 요소로 각 시민을 확인하지 않는다. 이미 두 문명은 종족조차 바꿔 버릴 정도로 육체 개조 기술이 극에 달했다. 그까짓 지문이나 홍채 따윈 간단히 바꿔 버릴 수 있다.

엘디아와 알 포트는 시민의 특유 영적 인자를 기준으로 그들을 판별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그 영혼에 자신만의 특유 영적 인자를 지니고 있다. 개성, 혹은 인격을 발현시키는 이 인자는 쌍둥이조차도 전혀 다른 패턴을 지니는, 그야말로 영혼의 지문이라 할 만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이어는 좌절했다. 아무리 외모를 바꾸어 봤자 이 세계는 속일 수 없었다. 단순한 검문 한 번만 걸려도 바로 선주 종족이란 게 들통이 난다.

그의 영혼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엘드라스의 일원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바꾼다는 건, 곧 자살을 의미한다.

“제기랄!”

세이어는 욕설을 내뱉었다.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닌데, 감히 세상을 바꾸겠다는 오만을 떤 것도 아닌데, 그저 소박하게 자신이 변화하고 이 세상에 조용히 묻어 들기만을 원한 것뿐인데…….

이 굳건한 세상은 그 작은 소망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하늘을 가르고 땅을 쪼개는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어도, 이 거대한 사회의 아주 작은 주춧돌 하나 뽑을 수가 없다!

이후, 세이어가 제3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일은 점점 뜸해졌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으니 의욕도 꺾인 것이다. 메테우스 박사가 연구소를 비운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단하임 소장이며 연구원들은 이번에도 그 광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한 게임 6년 했으면 질릴 때도 됐지.”

“새거 하지 않을라나? 헬 프로그램이라고 신작 나왔던데.”

“그건 무슨 내용이오?”

“자신이 마왕이 되어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게임이라던데?”

“……그게 헤븐 프로그램이랑 뭔 차이가 있는데?”

“후속작이란 게 다 그렇지, 뭘.”

주위의 시선을 무시한 채 세이어는 다시 허송세월로 돌아갔다. 그래도 워낙 심심하다 보니 간간히 헤븐 프로그램에는 접속을 했다. 단지,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박사의 아이디 코드로 자질구레한 정보를 구경하려는 의미에서.

그러던 중이었다.

평소처럼 화면을 멍하니 넘기던 세이어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정보와 정보 사이에 무의미하게 나열된 쓰레기 정보, 그 속에 또 다른 정보가 숨어 있었다.

‘이건 대체?’

이 정보 저장고 자체가 이미 메테우스 박사가 극도로 비밀스럽게 숨겨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또 비밀이 있다고?

호기심에 세이어는 그 코드를 해독했다. 천재 중의 천재인 그도 무려 한 달이 걸릴 정도로 복잡한 암호였다. 하지만 어차피 시간은 남아돌았고, 그는 할 일이 없었다.

결국 해독에 성공했다. 숨겨진 정보가 화면에 여실히 비치게 되었다.

“뭐지, 이건?”

그것은 보석처럼 빛나는 마학 회로 집적형 결정체였다. 보통 인간이 다루기엔 너무나 복잡하고 큰 마법을 구현시킬 때 중추 회로로 쓰이는 부품이다.

그 부품에 붙은 명칭을 보며 세이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공의 눈물?”

☆ ☆ ☆

세이어의 꿈을 관조하던 레펜하르트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건?”

저 부품의 형태가 낯익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시공의 눈이잖아?”

자신을 이 시대로 회귀 전생시킨 시공 회귀 주문. 시공을 뒤틀어 시전자의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보내 주는 마법이 담겨 있던 바로 그 고대의 아티팩트다!

‘심지어 이름도 비슷하네? 그냥 내가 대충 붙인 이름이었는데.’

당연한 이야기였다. 원래 좀 잘나가는 보석이면 제일 흔하게 붙은 별명이 눈이나 눈물이다. 거기에 시공과 관련된 마법이 담겨 있으니 결과물도 비슷할 밖에.

어쨌거나, 상황을 보니 세이어는 저 시공의 눈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 말은 세이어 역시 시공 회귀 주문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

“이런…….”

긴장하며 레펜하르트는 눈을 부릅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

모성의 인류는 팽창하는 태양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탐구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결과물 중에선 실로 인류의 상식을 초월하는 강력한 테크놀로지도 제법 개발되었다.

시공의 눈물.

이 역시 그런 결과물 중 하나였다. 결정체에 입력된 시공 제어 주문을 아카식 드라이브를 통해 발동, 수명이 다해 가는 태양 자체를 시공 회귀시켜 젊고 활기찬 항성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의 중추핵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자료를 검색하던 세이어는 혀를 내둘렀다. 모성의 인류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였는지 보면 볼수록 실감이 난다. 저 시공 제어 주문은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워, 10서클에 든 세이어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난해한 부분은 일단 무시하고 세이어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시공의 눈물과 그 속에 담긴 시공 제어 주문, 이 난해한 마학 이론을 실험하기 위해 모성에서 450광년 떨어진 적색 거성이 시험대에 올랐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모성은 적색 거성에 시공 회귀 마법을 발동했다.

실험은 성공이었다. 시공 회귀 마법이 발동된 항성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 모성에도 도망친 거지? 실험은 성공했다며?’

과연, 이내 그 이유가 나왔다.

분명 항성은 과거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한 4초쯤 과거로.

“…….”

시공 제어 주문 자체는 완성되었다. 문제는 거기에 드는 에너지였다.

한 개인이라면 수만 년의 시공도 넘나들 수 있고 행성이라도 수십 년 단위로 되돌릴 수 있는 에너지지만 저 거대한 태양이란 존재 앞에선 그야말로 조족지혈인 것이다. 아카식 드라이브로 신의 힘마저 손에 넣은 인류지만, 모성의 모든 에너지를 써 봐야 현재의 태양을 고작 230년 전으로 돌리는 게 전부라는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이 주문엔 무시무시한 부작용도 있었다.

행성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시공 제어 주문을 쓸 경우에 대해서였다. 시전자 개인이 미래로 갈 땐 별 상관이 없지만 시공 회귀, 즉 과거로 돌아간다는 건 현재의 모든 시간이 부정된다는 의미였다. 악의를 가진 자의 손에 들어갈 경우 행성 규모의 시공간을 소멸시키는 가공한 시간 폭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계획은 폐기되었고, 제작된 시공의 눈물도 모두 파기되었다. 관련 정보는 모두 소멸되고 프로젝트 자체가 없던 것이 되었다.

‘그런데 박사가 빼돌려 놨다는 거구먼.’

데이터를 살펴보며 세이어는 피식 웃었다.

과거의 메테우스 박사는 저 놀라운 위업이 사라지는 걸 아까워한 모양이었다. 지금 이 비밀의 데이터 저장고엔, 시공 회귀 주문 술식과 결정체 제조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몰래 빼돌려 데이터화해 숨겨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 양반도 은근 음흉한 구석이 있긴 하지.’

박사의 다른 면을 봤다고 생각하며 세이어가 별생각 없이 데이터 창을 닫으려 할 때였다.

‘가만?’

순간 섬광처럼 무엇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전자 개인이라면…….’

세이어가 다시 데이터창에 달라붙었다. 순간 떠오른 아이디어가 희망이 되어 그의 뇌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수만 년 단위로 시공을 넘나들 수 있다고?’

세이어는 유심히 결정체 제조법을 살폈다.

시공의 눈물을 다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시공의 눈물은 마법 술식을 담기 위한 기록 매체일 뿐이다. 버튼 누르면 자동 녹화되는 식의 흔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귀한 소재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애당초 안에 든 술식이 기밀인 거지, 데이터 용기가 기밀은 아닌 것이다.

‘이 정도면 나도 만들 수 있겠는데?’

엘디아에서도 손꼽히는 최고위 마학 연구소인 이곳에는 온갖 희귀 소재와 제조 장비가 널려 있다. 남들 눈을 피해 몰래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는 게 좀 문제긴 하지만…….

‘일급 기밀도 아니고 그냥 부품 제조실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갈 방법이 있고.’

연구소에서만 100년 넘게 살아온 세이어에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정체에 시공 제어 술식을 카피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10서클의 종사자 정도 되어야 가능한 고도의 작업이지만, 이젠 세이어도 10서클의 마법사다.

두근거리며 세이어는 데이터 창을 따로 저장했다.

희망이 보였다.

현 시대의 선주종은 너무도 원시적이다. 그래서 세이어는 그들과 도저히 어울릴 수가 없다. 마그림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연적이라면 수만 년, 적어도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야 겨우 선주종이 문명인으로서의 영적 진화를 이룰 것이라고.

‘하지만, 만약 내 자신이 수천, 수만 년 뒤의 미래로 넘어간다면?’

그 시대엔 모든 선주종이 문명을 구가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문명 수준이 어찌 될지는 모른다. 고도로 발달했을 수도,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지고 원시적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처지가 되었건 그들의 영혼은 충분히 진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사람답게 생각하고, 사람답게 행동하는 이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성 따윈 없이 본능만으로 행동하는 지금의 선주종은 아닐 것이다.

희망에 차 세이어는 눈을 빛냈다.

‘나도 사람 속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어!’

☆ ☆ ☆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몰래 연구실에 들어가, 몰래 결정체를 제조하고, 시공 제어 술식을 카피하는 한편, 시공 회귀에 맞춰져 있는 마법의 방향성을 미래로 바꾸기 위해 술식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세이어의 모습이 빠르게 돌린 필름처럼 레펜하르트의 눈앞을 정신없이 스쳐 지나간다.

“흐음…….”

문득 레펜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공 제어 술식을 개조하는 세이어를 보던 중이었다.

‘저거, 틀렸는데…….’

아무래도 세이어는 레펜하르트보다 마법적 이해도가 떨어지는 듯했다. 대충대충 흘려 넘기듯 보는데도 술식 여기저기서 오류가 보인다.

“어이, 거기서 그걸 그 술식에 갖다 붙이면 안 되지?”

물론 이건 과거의 기억일 뿐이니 레펜하르트가 아무리 훈수를 놓는다고 뭐가 변하지는 않는다. 들릴 리도 없고. 레펜하르트도 모르는 건 아닌데, 보다 보니 답답해서 마법사의 습성이 나온 거랄까?

술식 여기저기 오류를 만드는 세이어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그 오류 술식들이 낯이 익었다.

“어쩐지 주문이 앞뒤가 안 맞더라. 저 자식이 도중에 왕창 망쳐 놓았구먼.”

시공의 눈에 담겨 있던 시공 회귀 주문, 반의반도 이해가 안 가서 나머지는 직접 채워 넣었는데 알고 보니 채워 넣은 쪽이 오리지널에 가까운 것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이어 저거, 한 종족의 궁극 진화체라며? 그런데 어째 그렇게까지 뛰어나 보이진 않는데? 왜 저리 실수가 많지?’

솔직히 레펜하르트가 보기엔 세이어나 자신이나 별 차이 없어 보인다. 아니, 마학자로서의 측면은 레펜하르트가 더 낫다.

‘……그냥 내가 그만큼 잘난 건가, 아니면 다른 뭔가가 또 있는 건가?’

스스로도 재수 없다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은 뒤 레펜하르트는 계속 상황을 지켜보았다.

2년여 뒤, 결국 세이어는 시공의 눈물을 완성시켰다. 그 속에 미래로 방향성을 바꾼 시공 제어 주문도 입력했다.

“겨우 시간을 맞췄다.”

시공의 눈물을 든 채 세이어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건 아카식 드라이브뿐인가?”

2

신세력 112년.

세이어는 바이크를 타고 엘디아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민 선단의 모함, 엘디아는 이제 대지에 완전히 안착해 엘드라스의 수도가 되었다. 이미 많은 도시가 대지 곳곳에 세워졌지만 여전히 엘디아는 그들의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였다.

그렇게 달리고 있는데 웬 피켓을 든 한 무리의 데모대가 보인다.

-선주종은 짐승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과거의 악습을 철폐하자!

선주종 동물 등록법에 반대하는 이들의 시위였다. 아무리 사회적, 문화적으로 고정되었다지만 여전히 세상엔 올바른 시각을 지닌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데모대는 멀쩡한 옷을 입힌 선주종을 앞으로 내세우며 목청을 높였다.

“보십시오! 이들이 과연 우리와 다릅니까?”

앞장선 선주종이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봐도 지금 뭘 하고 있는지조차 이해 못 하는 얼굴이다.

지나가던 다른 선주종이 그 모습을 힐끔거린다. 이주 인류의 애완용 펫으로 길러지는 선주 종족이다. 그들 역시 똑같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관심을 끊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쳐 버린다. 이들에겐 저 ‘이해할 수 없는 시위’보다는 주인이 명한 ‘보드카 한 병 사 오너라’ 심부름이 훨씬 중요한 지상 과제다.

헬멧 속의 세이어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르잖아.’

저 모습, 저 광경이 바로 그의 절망이었다.

차라리 자신의 종족이 노예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학대받는 동족을 이끌고 분기탱천해 일어나 혁명을 꿈꾼다면, 실패해 참수당해도 웃으며 죽을 수 있으리라.

소나 말이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긴 해도, 도축이 두려워 작당을 하고 우리를 뛰쳐나가진 않는다. 그의 동족들은 자신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저 눈앞의 고통을 피해 먹이를 받아먹으면 하루가 행복할 뿐.

그의 동족은 너무도 미개했다. 그들에게 이주 인류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정말 신이긴 하지. 신의 힘을 다루고 있으니.’

마법을 손에 넣은 모성의 인류는 이미 시간과 공간, 물질의 일부를 제한적으로나마 다루는 것이 가능했다. 궁극의 마법, 10서클은 인류에게 ‘신의 힘’이나 다름없는 이적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멸망을 앞에 둔 인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끝없는 연구와 탐구로 마법을 초월해 그 너머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 세상을 하나의 가상현실 게임으로 본다면, 물리 법칙은 곧 프로그램이 허용하는 물리 엔진 범위 내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마법은 프로그램 속에 숨은 코드를 찾아내 버그 플레이를 하는 격이다.

그렇다면, 아예 프로그램 자체를 조작하는 힘이 있다면 어떨까? 가상현실의 신인 프로그래머처럼.

놀랍게도 프로그램이나 네트워크조차 없던 모성의 아득한 고대엔 이미 저 개념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은 정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정보를 다루는 것이 곧 신의 존재에 다가간다는 종교적 개념.

우주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허공록, 아카식 레코드.

마법의 끝에 달한 인류는 결국 저 법칙 자체를 조작하는 힘까지 손을 뻗쳤다. 원소로 구성되는 물질, 영자로 구성되는 영혼을 넘어서 무상유상無上有相의 정보 그 자체로 이루어진, 법칙을 지탱하고 새롭게 지우거나 쓰는 초월적인 에너지원이 발견되었다.

제한 없이 시간과 공간, 물질을 다룰 수 있는 이 강력한 에너지원은 고대 전설에서 따와 아카식이라 이름 붙여졌고, 그 에너지원을 다루는 시스템은 아카식 드라이브라 명명되었다.

인류는 결국 신의 힘을 손에 넣었다.

비록 그 신의 힘으로도 멸망을 막을 순 없었지만, 대신 인류는 아카식 드라이브로 시공과 차원을 뛰어넘어 우주로 나갈 수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원이 있기에 수십억의 인류가 새로운 세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 그 아카식 드라이브가 필요해.’

바이크 속도를 높이며 세이어는 품에 숨겨 둔 시공의 눈물을 떠올렸다. 이 결정체를 작동시키려면 시공 제어 술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카식 드라이브의 확률 연산력과 법칙 재조정 능력이 있어야 비로소 마법이 발동될 수 있다.

그렇게 계속 세이어는 도로를 달렸다. 일반 거리를 지나, 연구 거리를 통해, 엘디아 내에서도 출입이 통제된 주요 기밀 지역까지 달린다.

이윽고 거대한 돔이 보였다.

높이 850미터에 1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직경을 지닌, 수많은 거대한 건물이 산재한 엘디아 내에서도 유독 웅장한 사이즈를 자랑하는 저 건물은 멀리서 보면 마치 커다란 알처럼도 보인다. 실제로 저 돔은 ‘우주의 알’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저 돔이야말로 이민 선단 엘디아의 모든 것을 통괄하는 아카식 드라이브 시스템 제어 플랜트인 것이다.

플랜트로 들어서는 출입 통제 검문소에는 잘 단련된 거한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세이어가 바이크를 멈추자 정중하게 용건을 묻는다.

“이곳은 통제 구역입니다. 미리 허가를 받으셨습니까?”

“예, 아마 연락이 갔을 건데요.”

세이어가 주섬주섬 품을 뒤졌다.

“여기 I.D 카드. 뭐, 이런 게 없어도 어차피 스캔하면 통과되겠지만.”

동시에 헬멧을 벗는다. 푸른 머리칼과 뾰족한 귀, 선주종 특유의 인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경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게 그거구나.”

“오늘 온다던…….”

신분을 확인한 경비가 흔쾌히 안으로 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거라.”

얌전히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세이어는 바이크를 몰고 연구소 안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경비 두 사람이 떠들어 댔다.

“허, 진짜 사람 같네. 세상에, 운전도 할 줄 알아?”

“이미 듣긴 했지만 그래도 신기하네.”

☆ ☆ ☆

평화 협정을 맺은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엘디아와 알 포트의 아카식 드라이브 시스템의 중추는 통합되었다.

딱히 이들이 서로를 신뢰해서는 아니었다. 거꾸로, 서로를 불신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궁극 병기를 감시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심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통합 방식 역시 물리적으로 두 기관을 합치는 것이 아닌, 시스템 제어 라인의 공유 형식을 띠게 되었다. 수틀리면 바로 연락 끊어 버리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겠다.

하여튼 덕분에 엘디아에서도 알 포트의, 알 포트에서도 엘디아의 아카식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메테우스 박사는 이 제어 플랜트 내에서 10년째 불로불사화 시술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1,2년 정도면 되었었는데 말이지.”

온갖 연구용 자료를 비추는 단말 화면을 보며 메테우스 박사는 툴툴거렸다.

불로불사화 시술, 다른 말로 영혼 전이술이라 불리는 이 시술은 오직 아카식 드라이브를 통해서만 구현이 된다.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자아를 옮기는 것은 이미 모성에서도 너무나 오래된, 케케묵은 낡은 개념이었지만 실제로 가능하게 된 것은 멸망의 시대가 되어서였다.

한때, 전기 신호를 이용해 기억을 카피함으로써 인격을 옮기려는 연구가 있었다.

한때, 클론 육체를 만들고 두뇌를 동일하게 복제해 완벽히 같은 인간을 만들려는 실험도 있었다.

그러나 개중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의 인격이 두뇌에 저장된다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탓이었다.

머리에 사고를 당한 뒤 기억을 잃거나, 성격이 바뀌거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다. 또 사람이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낄 때마다 두뇌 각 부위가 활발히 반응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 인류는 뇌야말로 사고와 지성, 감정을 담당하는 영역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뇌 일부가 망가진 이가 갑자기 멀쩡한 의식을 되찾는다거나, 수두증에 걸려 뇌 대부분이 존재치 않고 물에 둥둥 떠 있는 경우에도 비교적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이들의 경우 해명이 되지 않는다.

모든 건 영자학, 영혼에 대한 구체적인 학문이 발달한 후에야 밝혀졌다.

인간의 지성, 즉 정보는 영혼에 저장되며 그 육체를 지탱하는 본능은 두뇌에 저장된다. 그리고 두뇌는 영혼의 정보를 받아들여 현실에 인격을 구현한다.

뇌가 손상되어 인격이 변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두뇌가 저장하는 본능의 정보가 훼손되거나 혹은 영혼에서 수신되는 정보 처리 부분이 망가져 오류가 일어난 탓이었다. 강제로 뇌에 전기 정보를 주입해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실제로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뇌가 영혼으로 그 정보를 송신해 영혼의 오염이 일어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인격을 진정으로 정의하는 것은 두뇌가 아닌 영혼이다. 영혼이 두뇌와 결합될 때만이 비로소 인격은 인간으로 세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뇌와 영혼을 결합하는 힘이야말로 신의 권능, 아카식이었다.

신의 존재는 의외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성을 지닌 이라면 누구나 신의 권능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엘디아와 알 포트는 아카식을 이용해 진정한 의미의 불로불사를 완성시켰다. 불로화 시술만으로는 결국 육체의 열화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동일한 육체의 젊은 클론을 제조한 뒤, 아카식 드라이브로 영혼을 고정시킨다면 이론상 인간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이 불로불사의 영광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

불로불사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퍼진다면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온다. 소수의, 진정 인류를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증명이 된 자만이 불로불사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메테우스 박사 역시 그 영광을 입은 이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1,2년 기다리는 것 가지고는 불평하지 않는다고.”

아카식을 이용한 영혼 전이술, 이는 그냥 단순히 기구 안에 들어가 버튼 누르면 ‘짠! 어머나? 새 몸이 생겼네?’란 식으로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단 자신의 현 육체와 완벽히 동일한 새 육체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육체 정보를 추출해 클론을 만든다고 쉽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육체는 영혼을, 영혼은 육체를 따라가는 법.

육체가 바뀌면 성격, 감정, 사상 등에도 영향이 온다. 영혼이 바뀌면 외모, 체질, 육체 인자에도 변화가 온다.

클론이란 건 엄밀히 말해서 자신의 일란성 쌍둥이 형제다. 쌍둥이라고 서로가 동일인은 아니지 않은가? 육체 정보가 동일하다 해도 인간이란 생활환경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법이다. 심지어 자궁 위쪽이냐, 아래쪽이냐, 만으로도 쌍둥이의 신체 조건은 의외로 차이가 커진다.

이런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막기 위해선 실로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 수시로 시술 당사자의 육체와 영자 상태를 체크해 천천히 클론 육체를 키우며 몇 년에 걸쳐 조정 작업을 해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메테우스 박사는 벌써 영혼 전이술을 여덟 번째 받고 있었다. 몇 번이나 겪은 일이니 1,2년 대기하는 것쯤은 이젠 예사다.

“하지만 인간들의 바보짓 때문에 10년이나 기다리는 건 좀 너무하잖아?”

손가락을 튀겨 박사는 연구 자료를 허공으로 날렸다. 빛의 화면이 입자가 되어 사방으로 비산해 사라졌다.

“그놈의 아카식 통합 정책 때문에 서로 다른 시스템을 강제로 규격화시켰으니 관련 작업이 지지부진해질밖에…….”

고개를 돌리며 박사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10년이나 널 안 찾은 건 다 이유가 있단 소리다, 세이어. 혹시 서운한 건 아니지?”

박사가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 푸른 머리의 청년이 마주 웃으며 대꾸했다.

“여기가 감방도 아니고, 박사님이 중병 걸려 입원한 것도 아니고, 육체 스캐닝을 24시간 내리 하는 것도 아닐 텐데요? 듣자하니 그동안에도 여기저기 잘도 싸돌아다니셨던데 대체 뭐가 그리 바빠서 연구소 한번 안 들르셨대요?”

“아, 그게 그냥 한가해진 김에 여행도 좀 하고, 취미 생활도 즐기고 하다 보니…….”

박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솔직히 세이어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마음먹었으면 연구소 한 번쯤은 찾을 시간은 충분했다. 그런데 잊고 산 이유는…….

“너도 1500년쯤 살아 봐라. 10년쯤 안 보고 살아도 별로 오래 안 본 것 같은 느낌이 안 든다니까? 아니, 너도 벌써 백 살 넘었지? 그럼 좀 이해가 가지 않냐?”

“그래서 제가 그냥 웃으며 구박하는 거예요. 이해가 안 갔으면 지금 웃고나 있을 줄 알아요?”

“하하하…….”

웃으며 박사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세이어도 팔을 벌리며 다가갔다.

“오랜만이구나, 반갑다. 세이어.”

“네, 메테우스 박사님.”

둘은 그렇게 서로를 껴안았다. 10년 만의 재회였다.

☆ ☆ ☆

“이제 사흘 남은 거예요?”

“그렇단다. 이미 아카식 드라이브엔 모든 술식이 입력되었고, 클론 육체도 최적화가 끝났으니까. 시술할 일만 남았지.”

깎아 놓은 과일을 먹으며 세이어와 메테우스 박사는 대화를 나눴다. 문득 세이어가 궁금해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왜 사흘이나 더 기다리는 건데요?”

“그날이 길일吉日이라더라.”

“우와, 세상의 모든 과학과 마학이 집결된 이곳에서도 그런 미신을 믿는 거예요?”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지.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것은 다르지 않니? 그리고, 아무리 문명이 발전해도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거니까, 이왕이면 운수 좋은 날을 고르는 거지.”

“그걸 왜 몰라요? 알 포트의 시공 관찰 시스템으로 그냥 알아보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시공 예지조차도 현재를 기점으로 미래를 확률 연산하는 것이지 않느냐? 예측한 행위 자체도 변수가 되고. 결국 시공을 볼 수 있어도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지.”

“그것도 그런가?”

그렇게 좀 더 대화를 나누다 세이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일단 숙소로 돌아가 볼게요. 면회 시간도 끝나 가고.”

“그래, 내일 보자꾸나.”

문밖으로 향하며 세이어가 빙긋 웃었다.

“내일이라…… 그러고 보니, 내일 꼭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은 아니라죠?”

“응? 무슨 소리니?”

“아뇨, 아무것도. 그냥 어제 본 드라마 대사가 생각나서.”

“녀석, 싱겁긴.”

웃으며 둘은 헤어졌다. 박사의 방을 떠난 세이어는 미리 배정된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마저 짐을 풀었다. 정리를 끝낸 뒤 그가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후우…….”

오랜만에, 10년 만에 본 박사의 얼굴은 역시 반가웠다. 오래 사는 그에게도 10년이란 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 미소는 순식간에 차가운 조소로 바뀌었다.

“좋아, 들어오는 데 성공했어.”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세이어는 연구소 윗선에 특별 요청을 넣었다.

-10년이나 못 만난 메테우스 박사가 너무 그립다. 곧 불로불사화 시술이라는 큰일을 겪을 박사를 꼭 한번 만나고 싶다.

세이어가 신청한 이 요구는, 사실 본인도 그리 받아들여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카식 드라이브는 엘드라스와 알 포트, 양 문명의 중추이며 잘못 다룰 경우 세상을 깔끔히 소멸시킬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물건이다. 만약 악의를 가진 10서클 마법사가 있어 멋대로 아카식 드라이브를 폭주시키기라도 하면 그땐 세상 정도가 아니라 이 항성계는 물론 인근 우주까지 송두리째 말아먹을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아카식 드라이브 제어 플랜트의 출입은 엄중히 통제되었다. 세이어 스스로가 생각해도, 고작 실험체인 자신을 저 금단의 구역에 넣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야말로 밑져 봐야 본전, 시도해서 손해 볼 것이 없기에 행한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너무 간단히 통과되었단 말이지? 역시 대외적으로는 내가 8서클일 뿐이라서인가?”

8서클의 마법사 정도면 설사 아카식 드라이브에 접근하더라도 손을 쓸 실력이 안 되니, 딱히 윗선에서 경계하지 않을 법하다.

‘하긴,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직원들도 제법 들락거리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실은 이 사회에서 선주종이 받는 취급이 진짜 이유였다.

집에서 키우는 개가 하나 있다 치자. 그리고 그 주인이 원자력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대형 프로젝트가 생겨 한 달쯤 집을 비웠다 치자.

주인이 걱정된 개가 시름시름 앓고 밥도 안 먹으며 마냥 주인만 기다린다. 그래서 동료 몇몇이 그 개를 주인이 있는 원자력 연구소로 몰래 데려다 주었다. 주인을 만난 개가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 날뛴다.

이 얼마나 훈훈한 미담인가? 설마 저 상황에서, 개가 원자로를 폭주시켜 핵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선입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말을 하고, 지성이 있고, 심지어 강력한 마법의 힘을 지녔다는 걸 알면서도 윗선은 세이어를 그저 선주종 실험체로만 보았던 것이다.

뭐, 세이어 입장에선 확실히 행운이긴 하다. 그가 세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감시 장치 따위 있을 리 없나?’

감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면, 애초에 들여보내지도 않았겠지.

세이어는 품에서 작은 보석을 꺼냈다. 시공의 눈물을 매만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예상대로 알 포트는 이걸 파악하지 못했어.”

알 포트의 시공 관찰 시스템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 그 정보로 인해 확률 연산으로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물론 그 미래는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일 뿐이니 100퍼센트 들어맞는다곤 할 수 없다.

하지만 알 포트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과거, 그리고 현재.

이미 고정된 시간축의 사건에 한해서 알 포트는 정말 신처럼 전지全知의 힘을 발휘한다. 이는 빅 브라더 따윈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능력이라 알하트란에선 설사 국왕이라도 알 포트의 전지 영역을 보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저 확률 계산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보는 것만이 허용되어 있다.

‘하지만 그 알 포트조차도 보지 못하는 분야가 있지. 바로 10서클의 종사자들.’

10서클의 종사자들은 스스로 세상을 뒤바꿀 힘이 있는 괴물들뿐이다. 또한 극히 일부긴 하지만 시간과 공간, 물질을 다루는 자이기도 하다. 이는 아카식의 하위 개념이기도 하기에 알 포트로서도 저들에 대해서만큼은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이 일으킨 현상을 통해 유추할 뿐.

예전의 세이어가 그렇게 10서클을 익히려 노력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적어도 10서클은 되어야 알 포트의 눈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쓸데없는 목표가 되어 버렸지만, 어쨌거나 손해 본 건 없지. 안 익혔으면 이것도 시도하지 못했을 테니.’

세이어는 가볍게 시공의 눈물을 허공에 던졌다. 그리고 낚아채며 두 눈을 이글거렸다.

‘오늘 밤. 오늘 밤에 모든 걸 끝낸다!’

3

어둠이 깔린 금속질의 복도, 그 사이에 굳게 닫힌 방어벽이 소리 없이 열린다. 원칙대로라면 방어벽이 해제된 순간 경고음이 울리며 중앙 시스템에 바로 연락이 가야 하지만 사방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I.D 제어 카드를 든 채 세이어가 싱긋 웃었다.

“역시 이 양반 음흉해.”

그는 메테우스 박사의 총괄 관리자 코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민 선단 엘디아의 모든 생태계를 창조한 메테우스 박사는 이곳, 아카식 드라이브 플랜트 역시 제작에 참여했었고 그 과정에서 남 몰래 백도어용 코드를 시스템에 숨겨 놓았다. 연구자라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사실 이는 엘드라스 국법상 사형에 해당하는 엄청난 중죄다.

이미 박사의 기밀 데이터를 접한 세이어로서는 딱히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평소엔 점잖은 척, 선량한 시민인 척 굴면서 뒤로는 이런 걸 준비해 놓았단 말이지?’

그렇다고 메테우스 박사가 실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였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일종의 보험이었다.

1500년이나 살아오며 엘디아 최고위층으로 온갖 일 다 겪은 메테우스 박사다. 국민의 대표인 의회 정부가 반드시 현명한 선택만을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만큼 오래 살기도 했다.

물론 엘디아의 문명은 극도로 발달했으니 뭔 짓을 저지르건 어지간해선 다 복구가 된다. 하지만 아카식 드라이브쯤 되면 다르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닥치기 전에 제어할 방법은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박사 본인은 순수한 선의로 행한 일이겠지만…….

‘애초에 수많은 시민들에게 뽑힌 수많은 의원들보다 개인일 뿐인 자신이 더 바른 선택을 할 거라 확신하는 이유는 뭔데? 역시 사람은 너무 오래 살면 오만해질 수밖에 없나?’

세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오만이라기보다는, 저게 바로 너무 잘난 인간이 너무 오래 살았을 때 보이는 일종의 겸손일 터였다. 박사 입장에선 나름대로 ‘아무리 나라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막지 못해!’라며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은 결과일 테니까.

‘어쨌거나 덕분에 나야 편하게 됐지.’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문명,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방어 시스템 안을 세이어는 자기 안방처럼 돌아다녔다. 아무 문제없이 외곽 구역을 통과해 감시 장치를 속이고 특급 기밀 구역, 아카식 접속 플랜트까지 접근한다.

여기서부터는 아무리 박사의 코드라도 만능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며 코드 자체는 여전히 만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경비 체제가 갖추어 있다는 쪽이 옳다.

그 어떤 문명, 그 어떤 시대에서도 결국 최고로 뛰어난 경비 체제는 훈련된 인간인 법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나 감시 시스템도 순간 판단력과 임기응변에 있어선 잘 훈련된 인간을 따라오지 못한다.

‘두 명인가?’

복도의 코너에 숨어 세이어는 방어벽 앞을 살폈다. 두 명의 제복 차림 사내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사내지만 둘 다 기이한 기운이 느껴진다.

‘기공술사로군.’

엘디아와 알 포트에는 마법사 외에도 또 다른 특이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었다. 인간을 구축하는 세 요소, 심心, 기氣, 체體 중 생명력에 해당하는 기를 다루는 기공술사들이 그것이다. 먼 훗날 오러 능력이라 불리게 되는, 알하트란의 오랜 전통 문화에서 비롯된 이 기공술은 한때 미신 취급을 받았지만 후기 영자학의 발달로 인해 지금은 마법과 함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세이어는 긴장했다.

‘만만찮은데…….’

심에 해당하는 마법처럼 기에 해당하는 기공술 역시 놀라운 능력을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경지에 다다른 기공술사는 마법사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무서운 상대다. 역시 최고의 기밀 구역답게 일개 경비조차도 초인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젠 물러설 수도 없다.

각오하며 세이어가 코너를 뛰쳐나와 바로 마법을 날렸다.

“업그레이드 라이트닝 체인!”

강화된 전격 주문이 두 기공술사를 단숨에 휘감는다. 당황하면서 두 경비가 붉고 푸른 기운을 전신에 둘렀다.

“윽?”

“누구냐!”

강렬한 기공의 힘이 전격을 튕겨 낸다. 동시에 경비들이 비호처럼 바닥을 박차고 반격에 나선다. 세이어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먹히지 않을 거란 건 이미 각오했다.

“술식 연환! 화火! 천天! 뢰雷! 트리플 부스트!”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의 술식을 섞어 만든 세이어 특유의 조합 마법이 뒤를 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두 경비의 기공보다 세이어의 마법이 한발 앞섰다. 강력한 기운이 정확히 두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폭발을 일으킨다. 어찌나 정밀한 제어인지 폭음이 복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도 않았다.

“컥!”

짧은 단말마와 함께 두 경비는 그대로 혼절했다. 세이어가 숨을 고르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순식간에 전투가 끝난 것이다. 첫 실전이란 걸 감안하면, 압승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내가 강해지긴 강해졌구나. 하긴 유명한 기공술사라도 8서클 마법사 수준이랬지.’

애초에 10서클 마법사를 감당할 정도로 강력한 기공술사면 여기서 경비나 서고 있겠냐? 자기 도장 차리고 제자 수만 명 키우며 호의호식하지.

‘하지만 이걸로 시간이 촉박해졌어. 저들의 정기 연락이 없다면 중앙 시스템도 의문을 품겠지.’

더욱 빨리 움직여야 한다. 세이어는 서둘러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방을 경계하며 미리 파악한 대로 아카식 드라이브의 중추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한다. 그 와중에 계속 경비와 마주쳤지만 이미 자신감이 붙은 세이어는 그들 역시 깔끔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20여 분 정도 더 지났을 때였다.

세이어가 한 커다란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내부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아…….”

그것은 거대한 원통처럼 생긴 공간이었다. 높이는 거의 600미터에 달하고 지름도 200미터가 넘어 보였다.

곡면을 이루는 재질은 전부 현 문명에서도 희귀한 마법 금속뿐이다.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내구성과 물성을 지닌 진철眞鐵 아다만티움이 벽 전체의 토대를 지탱한다. 마력 전도율이 제로에 달하는 최고의 마력 회로 소재, 진동眞銅 오리하르콘이 벽면 전체에 빼곡하게 문양을 그리고 있다. 그 원형의 벽면에서 진은眞銀 미스릴이 석순처럼 뻗어 중앙으로 향한다. 그 끝에는 진금眞金 엘드릴로 만들어진 다섯 개의 거대한 타원형 링이 천구의처럼 3차원적으로 얽혀 천천히 돌아간다.

그 천구天球의 중심에 그것이 있었다.

허공에 떠 푸르게 빛나는 수십 미터 크기의 거대한 빛의 문양, 마치 눈의 결정처럼 아름다운 기하학적 모양을 지닌 그것은 그 끝에 수많은 작은 결정을 연결해 외벽과 연결되어 있었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세이어는 오히려 두려움에 떨었다.

10서클의 마법사인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빛의 결정에 얼마나 엄청난 초월의 힘이 집약되어 있는지를.

저 빛나는 거대한 결정은 물질이면서, 동시에 물질이 아니다.

물질화될 때까지 압축된 빛이 고도의 에너지체가 되어 결정의 토대를 형성하고, 물질화될 때까지 압축한 영자가 결정의 면을 뒤덮는다. 그 속에 깃든 것은 그야말로 세상 자체를 존재케 하는 무상 유상의 정보 에너지.

경이와 희열,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세이어가 중얼거렸다.

“저것이…….”

저것이 바로 아카식 드라이브.

신이 창조한 인류, 그 인류가 창조한 신이었다.

☆ ☆ ☆

‘조, 좋아. 이제부터 시작이야.

각오를 다지며 세이어는 빠르게 빛의 결정 하부의 제어 데스크로 다가갔다.

아카식 드라이브에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휩쓸릴 것만 같은 끔찍한 공포가 느껴진다. 아니, 그냥 기분상이 아니라 진짜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약해지고 있다. 철저히 제어되는 아카식, 그 아주 사소한 여파만으로도 한낱 사람 수천쯤은 가볍게 소멸시킬 수 있다.

“크윽!”

이를 악물며 세이어는 전신에 마력을 둘렀다. 이것이 10서클 마법사가 아니곤 아카식 드라이브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적어도 10서클은 되어야 저 무시무시한 아카식 파동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어 데스크로 다가간 뒤 중추 회로를 찾는다. 이 아카식 드라이브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모든 마력과 에너지가 오가는 핵심 부품.

‘여기 있구나, 사신수四神獸 시스템.’

원래는 알하트란의 전설에서 비롯된 네 방향을 지킨다는 사신수, 그러나 문화는 교류되는 것이고 사방의 수호자는 이제 엘디아에서도 전통적으로 믿는 설화가 되었다. 그 사신수의 이름이 붙은 네모난 패널을 향해 세이어는 손을 뻗었다.

이제 이 패널에 정해진 마력 술식을 입력한 뒤 그 마력을 시공의 눈물을 통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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