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장 마왕을 물리치는 법
1
애초에 레펜하르트는 자신과 이니야, 시리스만으로 세이어를 해치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세이어와 자신의 전력 차가 많이 나는 것은 이미 겸허하게 인정한 그였다.
그래, 마치 전생의 레펜하르트와 용사 알렉스 일행처럼.
당시의 그는 결국 기량이 모자라지만 함께 힘을 합치는 이에게 당했었다.
“하지만 덕분에 배운 것도 있었지.”
기량이 모자라는 이들이 어떤 식으로 힘을 합쳐, 어떤 식으로 전술을 펼치면 절대적인 힘을 지닌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배웠다.
그리고…….
‘신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저거, 마법사잖아?’
레펜하르트가 고함을 터트렸다.
“러스! 타시드!”
기다렸다는 듯이 러스와 타시드가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세이어에게 돌진했다. 레펜하르트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니야! 시리스!”
두 여인도 각자 오러와 엘리멘트로 전신을 무장하고 세이어의 후방을 노렸다. 네 방향에서 네 명의 강력한 오러 유저가 파괴의 빛을 찔러 왔다.
세이어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 참.”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
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네 줄기 검광이 세이어를 직격했다. 그리고 가공할 방어막에 모조리 가로막혔다.
그렇다. 아무 짓도 안 해도, 그저 전신에 두르고 있는 마법 방어장만으로도 이들의 블레이드 오러 따윈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세이어가 비웃었다.
“뭐 하자는 거냐? 이 정도 힘으로 감히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가?”
파리라도 쫒듯, 가볍게 손을 휘젓는다.
“가라. 샤이닝 스톰.”
마력의 빛이 광풍이 되어 회오리쳤다. 빛의 회오리가 주위 수십 미터를 모조리 갈아 버리며 맹렬히 불어 닥친다. 달려든 네 사람이 잽싸게 뒤로 몸을 빼 공세를 피했다.
“엿차!”
“하압!”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빠른 반응이었다. 덕분에 넷 모두 마법에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도주에 성공했다. 그들을 보며 세이어가 살짝 의아해했다.
‘어쩐지 당연해하는 표정이군?’
자신의 공격이 완벽하게 가로막힌 데다 아무것도 못해 보고 물러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응당 무인의 자존심에 금 간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들 태연하다. 아니, 오히려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네 사람이 다시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그리고 다시 오러며 엘리멘트를 길게 뻗어 세이어를 노렸다. 물론 이번에도 세이어의 방어장은 굳건할 뿐이었다.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거냐?”
기막혀하며 세이어가 다시 손짓을 했다. 귀찮음을 털어 내는 듯한 단순한 손짓에 수십의 아케인 블래스터가 뒤를 따른다. 가공할 섬광의 폭우가 대지를 두들기는 가운데 네 사람은 다시 교묘히 몸을 빼냈다. 그리고 절묘한 움직임으로 섬광을 피했다.
“으랏차!”
“이 정도쯤이야!”
러스와 타시드가 차분히 공세를 블레이드 오러로 흘려 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너무도 익숙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이니야와 시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저 자연스러움은 기량이나 재능만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이어가 불러낸 마법의 섬광을 연신 피하며 러스가 웃었다.
‘형님과 연습해 두길 잘했네.’
살아가며 이런 고위 주문의 융단 폭격을 겪어 볼 일이 얼마나 될까? 평생 한 번도 사실 드문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안타레스의 강자들은 달랐다. 이들은 이미 세이어의 습격에 대비해 레펜하르트와 온갖 가상 전투를 연습해 뒀다.
“굉천월광!”
“벼락 떨구기!”
세이어의 마법이 뜸해지자 또 러스와 타시드가 달려들어 오러 스킬을 날렸다. 이니야와 시리스도 뒤를 따랐다. 물론 아무리 그래 봤자 세이어의 방어장은 철벽, 조금의 흠집도 가지 않을 뿐이다.
“귀찮구나! 데스 그라운드!”
세이어가 발을 내리찍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마력의 빛이 장벽이 되어 파문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노리고 날린 마법은 자꾸 피하니, 아예 피하지도 못하게 전방위 마법을 날린 것이다.
콰콰콰콰!
말하자면 성벽이 통째로 밀려오는 형국이다. 피할 장소 자체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도 네 사람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엔 이런 식이냐!”
시리스가 투덜대며 바로 등을 돌렸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내빼 버린다.
“뭐야, 이놈들?”
세이어가 인상을 찡그러트렸다.
적 앞에서 등을 돌리다니, 상식을 지닌 전사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이다. 하지만 세이어는 등 돌린 그들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저들과 세이어 사이에, 방금 날린 데스 그라운드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폭발 속에서도 넷 모두 상처 하나 없이 도주에 성공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레펜하르트가 씩 웃었다.
‘역시,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은 다 똑같다니까?’
☆ ☆ ☆
아무리 천하의 레펜하르트라도, 전투에 임한 세이어가 어떤 마법을 쓸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파악한 것은 세이어의 마법이 아니라 절대자의 심리였다.
세이어와 러스나 타시드 등의 기량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정말 인간과 파리와 비유해도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상대로 처음부터 신경을 써서 하나하나 노린다?
‘그럴 리가 있나?’
파리가 앵앵대며 귀찮게 굴면 인간은 먼저 대충 손으로 휘저어 쫓게 마련이다. 당연히 첫 시작은 광역 마법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라도 이미 대비하고 있으면 러스 들의 기량으로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 몰라 그간 연습도 충분히 했다. 과연, 다들 무리 없이 피하고 있었다.
마법이 날아오면 전력 도주, 그리고 세이어가 한숨 돌리려 하면 다시 달라붙어서 파리처럼 앵앵대기!
“오러 크로스!”
“전갈의 습격!”
“동토의 칼날!”
“가라, 우다르 묠니르!”
각자 손에 맞는 오러 스킬을 열심히 날려 댄다. 물론 아무리 날려 봤자 세이어의 가공할 방어장 앞에선 그저 산들바람일 뿐이다. 쓸데없이 들판만 작살내며 폭발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리고 세이어가 마법을 쓰려 하면 잽싸게 도망, 도망, 도망!
“가소롭구나!”
비웃으며 세이어가 수법을 바꿨다. 직격타를 피할 수 있다고? 마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케인 스트라이크, 트레이서.”
이번에는 마법의 섬광이 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크게 호선을 그리며 네 사람을 뒤쫓았다. 직선이 아닌 유도형으로 마법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러스 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것도 이미 예측 범위 내였다.
파리가 앵앵대는데 자꾸 손을 휘저어도 안 날아간다? 그럼 그다음엔 하나하나 노리고 파리채를 휘두르기 마련.
“뭉쳐!”
타시드의 신호에 기다렸다는 듯이 네 사람이 한자리로 모였다. 그들을 쫓던 아케인 스트라이크도 뒤를 따랐다. 순간 세이어가 당황했다.
‘어라?’
저마다 날아가던 마법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럼 저 마법들이 서로 합쳐져 더 강한 마법이 될까?
레펜하르트가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렇게 된다면 굳이 마법 집약술이니 융합 술식 따위를 만들 필요가 왜 있을까? 그냥 같은 마법 같은 자리에 계속 쏘면 되는데.
쾅! 쾅! 콰콰쾅!
수십 발의 아케인 스트라이크가 허공에서 저들끼리 충돌했다. 대부분의 위력이 서로 충돌하며 산화한다. 그 속에서 네 사람이 서로 오러 방어를 끌어 올려 남은 여파를 막아 냈다. 그리고 다시 사방으로 흩어진다.
“굉천월광!”
“벼락 떨구기!”
또다시 별 먹히지도 않는 오러 스킬을 열심히 세이어에게 날린다.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니 세이어의 표정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그가 문득 손을 내렸다. 더 이상 마법으로 반격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 틈에 네 사람이 근접해서 열심히 검광을 내뻗었다. 물론 그래 봤자 세이어의 방어장은 흔들리지조차 않았다.
세이어가 혀를 찼다.
“용케 피하긴 한다만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
아무 짓하지 않고 서 있어도 저들은 세이어의 옷자락 하나 스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바보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죽자고 두드리면 내 방어장에 금이라도 갈 것 같으냐?”
세이어는 비웃었다. 그러나 네 사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니야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진짜 레펜하르트 님 말씀대로네. 처음엔 광역. 이어서 유도형. 그리고는 무시라?’
속이라도 들여다본 것처럼 레펜하르트의 추측대로 움직이는 세이어였다. 애초에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으니 동요할 일도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네 사람이 죽어라 두들기는 와중에도 세이어는 태연히 서 있었다. 그가 방어장 너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잘도 피하고, 잘도 공격하고 있다. 솔직히 저들의 기량으로는 놀라운 성과다. 그것은 제법 인정할 만하다.
그럼에도 세이어는 어이가 없었다.
“혹시 이걸로 내 마력이라도 깎을 셈이냐?”
이 짓을 아무리 해 봤자 세이어에겐 조금의 타격도 없다. 마력은 물론이고 체력도 전혀 손상이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허공에 칼질하는, 스스로의 체력만 소모하는 무의미한 짓거리에 불과하다.
더욱 어이없는 점은 그 사실을 레펜하르트가 모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대 정도 마법사라면 이미 알 텐데? 이런 짓 아무리 해 봤자 내 마력은 한 톨도 깎을 수 없다는 걸?”
레펜하르트가 비아냥댔다.
“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냥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낫잖나?”
오히려 재차 명령을 내린다.
“계속 두들겨! 다들!”
“네! 형님!”
아주 신 났다는 듯 대답까지 해 가며 블레이드 오러를 날리는 러스였다. 세이어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원래대로라면 압도적인, 전혀 공격이 들어가지 않는 상대에게 절망하고 있어야 할 놈들이다.
그런데 저런 표정이라니?
이래서야 세이어가 무슨 수련용 허수아비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하하하…….”
기가 차 세이어가 웃었다.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지만 기분이 매우 더럽다.
그가 두 눈을 치켜떴다.
“꺼져라! 미천한 놈들!”
분노하며 그가 전신으로 가공할 마력을 터트렸다. 압도적인 폭발이 세이어를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네 사람이 허겁지겁 다시 뒤로 피하는 순간이었다.
“타앗!”
계속 상황을 보고만 있던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몸을 날렸다. 전신에 황금빛 오러를 감싼 채 유성처럼 마력의 폭발을 뚫고 나간다.
“권마합신!”
순식간에 세이어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레펜하르트가 이내 주먹을 내찔렀다.
“캘러미티 혼!”
콰앙!
일곱 파문의 빛이 한 점으로 뭉쳐 재앙의 뿔이 되었다. 세이어의 방어장이 깨지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 ☆ ☆
레펜하르트도 알고 있었다. 세이어의 마력장을 아무리 두들겨 봐야 체력도 마력도 깎을 수 없다는 것을. 전생의 자신도 그랬다.
그럼에도 알렉스 일행은 열심히 자신의 방어장을 두들겼다.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력이나 체력은 안 깎이겠지만, 정신력이나 집중력은 깎이거든?’
파리가 앵앵댄다 해서 사람 체력이 깎일 리는 없다. 하지만 뭔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 파리가 앵앵댄다고 방해가 되지 않는가? 분명 집중력은 깨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진짜 원한 것은, 세이어의 집중력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가공할 캘러미티 혼의 일격이 세이어의 방어장을 뚫고 그 육체에까지 닿았다. 물론 세이어는 방어장뿐 아니라 육체 자체에도 마력 방어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캘러미티 혼의 일격으로도 큰 부상을 입힐 순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육체 자체에 충격을 준 것은 분명했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세이어가 가슴을 어루만졌다. 바로 방어장을 재생성하며 그가 말했다.
“운이 좋았구나!”
‘이걸 운이라고 생각하는 한, 넌 계속 휘말릴 수밖에 없을 거다!’
속으로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계속 공세를 이었다.
“으랏차차차차!”
우렁찬 기합과 함께 황금의 오러가 깃든 펀치와 킥을 계속 날린다. 한번 깨진 방어장, 긴급하게 덧씌우긴 했어도 아까만큼의 방어도는 없다. 세이어의 무심이 한번 흔들려 방어장 연계에도 조금씩 딜레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놈이…….”
세이어의 표정에 여유가 사라지고 분노가 떠올랐다. 그가 제대로 마법을 준비했다.
“임페리얼 버스터!”
9서클 궁극 주문 중 하나인 가공할 폭렬 마법이 레펜하르트를 정통으로 노리고 날아들었다. 파괴력만큼은 전생의 레펜하르트보다도 위다. 도저히 방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레펜하르트는 후퇴는커녕 오히려 맞서 마법을 준비했다.
“임페리얼 버스터!”
같은 폭렬 주문으로 응수한다. 세이어가 어처구니없어 외쳤다.
“가소롭구나! 감히 마법으로 상대할 수 있을 성 싶으냐!”
레펜하르트와 세이어의 마력 차이는 극심하다. 게다가 파괴력은 분명 세이어가 높다. 그런데 감히 같은 마법을 써?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두고 보면 알 거다!”
두 폭렬 주문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과연, 세이어의 마법이 순식간에 레펜하르트의 그것을 뒤덮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바로 레펜하르트의 마법이 소멸하지도 않았다.
거대한 장벽에 밀리면서도 꿋꿋이 전진을 계속하며, 마치 거대한 천에 던진 공처럼 세이어의 마법을 밀어낸다. 결국 두 폭렬 주문이 동시에 허공에서 폭발했다.
“이건 어떻게?”
당황해 세이어는 눈을 껌뻑였다. 분명 마법의 위력은 자신이 위였는데?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뇌까렸다.
“애초에 네놈과 나는 마법의 용도가 다르거든?”
☆ ☆ ☆
예전 세이어를 상대했을 때, 레펜하르트는 기묘한 점을 느꼈다. 세이어의 마법이 자신의 것에 비해 파괴 범위가 너무 넓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세이어가 레펜하르트보다 훨씬 높은 기량의 마법사란 의미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법 술식의 발전 방식이 달랐다.
‘저놈의 마법은, 아무리 봐도 대인對人용으로 발전한 것이 아냐.’
현 시대에 있어 공격 마법이란 고하위를 막론하고 누군가를 해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부터 마법 수련을 대인 공격용으로 출발한다는 의미다. 그 위력이 높아지면 종국엔 성이나 거대 구조물을 파괴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고, 따로 대물對物용 마법도 생겨나고 하지만, 적어도 토대가 되는 마법 발동의 개념은 여전하다.
반면 세이어의 마법은 달랐다. 7서클 이하의 하위 마법은 현 시대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 이상은 용도가 전혀 틀렸다.
‘아무리 봐도 무슨 거대한 배나 요새, 괴물 등을 상대하기 위한 용도로 발전한 것 같단 말이지?’
즉, 세이어의 고위 마법은 처음부터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마법이 아닌 것이다. 그 차이가 바로 폭격과 관통의 차이가 되었다.
넓은 범위에 가공할 파괴를 낳는 세이어의 마법은 분명 레펜하르트도 따라갈 수 없는 강력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관통력, 한 점에 집중되는 힘은 아무래도 레펜하르트만 못하다. 그러기에 제라드도 세이어의 마법을 뚫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세이어 역시 관통력이 강한 마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케인 퍼니시먼트 맥시멈.”
제라드에게도 구사했던 9서클 최강의 관통 마법이 날아든다. 레펜하르트도 빠르게 수인을 맺으며 반격했다.
“아케인 퍼니시먼트 맥시멈!”
똑같은 주문이 또다시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리고 조금 전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콰콰쾅!
폭발과 함께 서로의 마법이 아슬아슬하게 힘겨루기를 하다, 결국 동시에 소멸한다.
세이어의 안색이 굳었다.
“저자가…….”
그제야 세이어도 자신과 레펜하르트의 마법 차이를 알아챘다.
같은 관통력 위주 마법이라도, 세이어의 마법은 거대한 과녁을 관통하려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은의 시대엔 하늘을 나는 전함이나 이동 요새 등의 거대한 과녁을 상대해야 할 일이 많았고, 그래서 고위 마법도 그런 식으로 발전했다.
그렇다 보니 같은 마법이라면, 적어도 8서클 이상의 고위 주문은 아무래도 레펜하르트 쪽이 관통력이 더 강하다. 이쪽의 파괴력에 밀려 마법을 뚫을 정도는 아니지만 밀리지도 않는다!
‘아니, 그걸 감안해도 전보다 위력이 너무 강해졌는데?’
의아해하며 세이어는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저 차이만으로는 이 상황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둘의 마력 차가 극심한 이상,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힘을 집중시켜도 세이어의 마법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예전엔 이렇게 동일한 위력을 보이지 못하지 않았던가?
쿵!
두 주먹을 붙이며 레펜하르트가 다시 한 번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진짜 사부에겐 감사해야겠어.’
전신의 마력을 끌어 올리고 그것을 구상 공간에 흘린다.
그리고 충돌, 충돌, 충돌.
연달아 폭발해 마력의 힘이 증폭되며 더더욱 강렬한 출력으로 화한다.
“초월자의 권세!”
새롭게 개발한 9서클 주문, 그것을 발동시키며 레펜하르트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2
세이어를 상대하기 위해 레펜하르트는 과거의 경험을 열심히 연구했다. 그리고 꽤나 성과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부족했다.
상대의 집중력이 흩어졌다 해도 그 약해진 방어장조차 뚫지 못하면 이 전법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를 상대할 때 그 역할은 테스론이 맡았다. 7중첩 캘러미티 혼은 충분히 집중력이 깨진 자신의 방어장을 흔들 수 있었고, 그래서 전술대로 전투를 이끌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레펜하르트의 경지는 6중첩, 권마합신을 쓴다 해도 어중간한 7중첩이었다. 처음 한 방 정도야 먹히겠지만 연타로 효과를 보긴 살짝 파괴력이 모자랐다.
뭐, 제라드를 대신 내세워도 되긴 하겠지만 애초에 제라드는 토종(?) 짐 언브레이커블, 남과 손 맞춰 싸운다는 걸 크나큰 모욕으로 여기는 영감이다. 절대 레펜하르트의 전술대로 싸울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합격술을 구상할 때도 아예 계획에서 빼 버렸다.
원래 레펜하르트의 계획은 먼저 제라드가 세이어와 마음껏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
-사부가 먼저 붙으세요. 이기시면 좋고, 패하시면 그땐 제자가 배턴 터치하죠.
늙은 사부를 강적 앞에 먼저 내세우다니, 남들이 보면 참으로 불효막심의 끝을 봤다 하겠다. 물론 짐 언브레어커블 기준에서는 훌륭한 효도 선물이었지만.
-당연하지! 찬물도 위아래가 있느니라!
그렇게 제라드가 세이어를 상대해 진을 빼 놓으면―아무리 그래도 이길 가능성은 없으니까― 그다음에 자신들이 일제히 달려드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덕분에 예상 밖에 바나텔이 등장해 제라드의 발이 묶였음에도 합격술을 펼치는 것 자체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세이어의 방어장을 깰 수 있는 위력적인 일격은 반드시 필요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레펜하르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카탈란 가드, 그 토대가 된 거대한 직경 200미터의 크레이터였다.
검성 바나텔과 권황 제라드의 격돌, 그것은 어지간한 10서클 마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가공할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최종기가 10서클과 맞먹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거의 동급의 두 기술이 서로 충돌하며 몇 배나 되는 증폭 효과를 얻어 저런 결과를 낳았지.’
오러건 마력이건, 동일한 위력이 충돌하면 몇 배나 되는 파괴력을 낳는다. 이것은 사실 마법학에서 그리 신기할 게 없는 상식이다. 실제로 연구도 거의 끝난 상태다. 드레자의 ‘천신의 회랑’이나 레펜하르트의 ‘초월자의 축복’ 같은 마법 출력 증폭술의 원리가 바로 저것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눈여겨본 것은 두 괴물 노인네의 충돌로 몇 배나 증폭된 파괴력이 아니라…….
‘저러고도 둘 다 용케 살아남았단 말이지.’
아무리 마법사라도 육체는 평범한 인간, 그래서 마력 증폭술은 온갖 다양한 방어 술식이 곁들여진다. 증폭시키는 마력도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나 마법사 본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충돌의 여파를 제어할 수 있는 범위까지만 증폭시켜야 하는 것이다.
마학 역사상 최고의 마력 증폭술을 지닌 레펜하르트라도 그 증폭도는 네 배 정도, 그 이상이라면 제어를 벗어난 마력에 의해 전신에 파이어볼을 처맞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짐 언브레이커블은 원래 전신에 파이어볼 처맞아도 되잖아?’
방어 술식 다 빼 버렸다. 제어 술식도 대폭 간략화했다. 충돌의 마력 한계도 가뿐히 무시했다.
전신으로 시험해 가며 과연 이놈의 몸뚱아리가 어디까지 버티나 봤다.
결과는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증폭도가 높아질수록 반발력도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네 배일 때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다섯 배가 되면 전신을 불로 지지는 수준이고 여섯 배가 되면 폭발이 체내에서 연달아 터지는 경지까지 간다.
무려, 열 배까지 올리고도 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는 버텨 냈다!
‘진짜 내 몸뚱어리지만 어마어마한 육체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한계까지 올리면 마법 대신 무술을 쓸 수 없으니 여덟 배 정도를 한계로 잡았다. 덕분에 지금 레펜하르트는 전신에 5, 6서클 급 마법을 강타당하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말한다.
감각이다. 충격이나 통증 같은 게 아니라.
‘견딜 만하네, 정말.’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레페하르트가 마법을 연사했다.
“헬 블레이즈!”
몇 배나 증폭된 불길이 대기를 달구며 날아갔다. 이 정도면 전생의 위력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세이어도 경시할 수 없어 진지하게 맞섰다.
“포스 필드!”
몇 차례나 가공할 마법이 오갔다. 무수한 폭발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속을 레펜하르트는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다.
단순히 마법사로서, 서서 마법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육체도 날려 권왕으로서 권격을 날린다.
“질풍기격탄!”
증폭된 마법이 오러와 융합되어 쏟아진다. 폭음이 울리며 계속 방어장이 흔들린다. 그리고 그때마다 세이어의 마력도 조금씩 깎여 간다.
세이어도 마법으로 응수했다.
“앱솔루트 파이널 스트라이크!”
정신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관통력과 파괴력, 양쪽 모두 손색이 있다 보니 마법만으로 상대를 압도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속성을 이용해 전술적인 공세를 퍼붓자니, 둘 다 마법의 극에 달한 자, 어지간한 눈속임이 통할 경지가 아니다.
어느새 세이어의 표정에 오만함이 사라졌다.
“제법이다. 아니, 이건 정말 대단하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가 밀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결과가 변하진 않을 것이다.”
끝도 없이 고위 주문을 쏟아 내면서도 세이어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평소보다 몇 배나 마력 소모가 심할 텐데, 과연 언제까지 그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세이어와 레펜하르트의 마력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마력 증폭술은 분명 마법 출력은 높여 주지만, 그렇다고 마력 총량까지 높여 주진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세이어의 전신에서 빛이 났다.
“신의 힘은 무한하노라.”
아무리 세이어라도 그동안 엄청나게 고위 마법을 난사한 덕분에 상당히 마력이 소모된 상태였다. 그것이 모두 없던 일이 되었다. 모든 체력과 마력이 완전히 최고조로 돌아왔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저거로군!’
예전 한 번 접했던 초월적인 권능, 신성神性이었다.
‘역시 A.M.P 쇼크웨이브로도 저건 못 막았나?’
만약 세이어의 저 수법도 다른 은의 현자와 같다면 이 순간 저런 이적을 보이진 못했을 터. 아무래도 그는 아티팩트가 아닌 다른 수법으로 신성을 다루는 것 같다.
‘하긴 명색이 신인데 그놈들이랑 같을 리는 없겠지.’
완전히 모든 힘을 회복한 세이어가 거만하게 뇌까렸다.
“과연 한낱 인간 하나가 이 무한의 힘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아까부터 말했잖나?”
공중제비를 넘어 거리를 벌리며 레펜하르트가 호흡을 골랐다.
“나 혼자가 아니라고.”
갑자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허공검, 호라이즌!”
요지부동이던 세이어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
“커억!”
비명까지 지르며 세이어가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뭔가가 공간을 뛰어넘어 그의 본체를 가격한 것이다. 마력 방어가 깎이며 육체에도 상당히 타격이 왔다.
“뭐냐?”
놀라 세이어가 고개를 돌렸다. 오히려 레펜하르트에게 당했던 캘러미티 혼보다도 이쪽이 더 타격이 크다?
“잘했다, 러스!”
러스가 다시금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공간을 뛰어넘어 뭔가가 날아든다. 세이어가 인상을 썼다.
“이건…….”
뭔지 알겠다. 공간을 이용한 공격이다. 차분하게 대응하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겠지만…….
“아까였다면 이걸 맞을 리가 없겠지. 집중력이 흩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레펜하르트 말대로였다. 여전히 공간의 움직임도 느낄 수 있고 반응도 할 수 있지만 지금 세이어는 꽤 흥분한 상태, 덕분에 반응 역시 미묘하게 느리다.
그리고 러스는 그 딜레이를 교묘히 노리고 있었다.
“허공검, 호라이즌!”
일단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세이어가 비행 마법을 구사했다. 그때였다.
“북해의 숨결!”
어느새 이니야도 가세해 냉기의 영역을 크게 깔고 있었다. 덕분에 비행 속도가 크게 떨어진다. 세이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
아까까지 지쳐 허덕이던 놈들이 어느새 쌩쌩해져 다시 덤벼 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있었다.
“알 포트여, 이들을 축복하소서!”
“필라넨스여! 이들에게 지치지 않는 힘을 주소서!”
마켈린과 실란이 신성 주문으로 지친 네 사람에게 활력을 불어 넣는 중이었다. 체력을 회복한 시리스와 타시드도 재빨리 전투에 참가한다.
레펜하르트의 강렬한 일격이 세이어의 방어장을 흔든다. 그러면 네 사람이 사방에서 공세를 퍼붓는다.
“음…….”
세이어는 신음을 흘렸다.
마력도 체력도 복구되었지만 신의 힘으로도 깎인 정신력과 집중력마저 되돌리진 못했다. 한번 흔들린 방어장은 아까처럼 완벽히 모든 충격을 차단하지 못했다. 이제 네 사람의 공격도 육체와 마력에 직접적인 타격이 오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이젠 저 네 사람도 무시 못 할 전력이 되었다!
“벼락 떨구기!”
타시드의 일격이 방어장을 내리쳤다. 방어장이 번득이며 충격 일부는 해소하고, 일부는 그대로 통과시킨다. 다시 육체에 타격이 왔다.
“이런 식으로 나설 작정이었나?”
어쩔 수 없이 세이어는 전신의 마력 방어 출력을 높였다. 마력 소모가 심한 방식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다.
“잘도 이런 방식을 찾아냈군.”
세이어는 솔직하게 감탄을 건넸다.
“날파리나 다름없는 것들을 전력으로 쓰게 하다니. 그대가 제법 고심했음을 알 수 있겠구나.”
‘사실 내가 고심한 건 없지.’
레펜하르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고심한 쪽은 알렉스나 제이드 쪽이려나?’
☆ ☆ ☆
레펜하르트와 러스, 타시드, 시리스, 이니야.
이들이 정면에서 세이어와 맞선다. 뒤에선 실란과 마켈린이 계속 신성 주문으로 이들을 보좌한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어 세이어도 후방을 노려 봤지만…….
“에잇! 포스 필드!”
그때마다 철탑 같은 황금 갑옷의 거인이 신관들을 보호했다. 엘드릴 기간투스를 걸친 카를이었다. 자잘한 마법은 마갑으로 막고, 고위 마법은 신관 둘을 통째로 들고 도망가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엘드릴 기간투스는 방어력 하나는 최고의 기물, 아무리 세이어의 마법이라도 직격을 피하는 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허, 거참…….”
세이어는 혀를 찼다. 확실히 이리 나오니 이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조금씩 피로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아까부터 영 거슬리는 것도 있었다.
‘저 트롤은 대체 뭘 할 작정이지?’
트롤 대구루, 아틸카는 아까부터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멀찌감치 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제법 한 수 하게 생긴 놈인데 아무 짓도 안 하는군?’
조금 전까진 하찮은 벌레였으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저 ‘하찮은’ 벌레들도 ‘하찮지 않은’ 공격을 퍼붓는 상황이 되었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신경 쓰이는 놈이 있으니 아무래도 집중이 안 된다.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공격을 막아 내며 세이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마법만 난사할 뿐이었다.
‘암, 신경 쓰이겠지.’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준비했던 것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히고 있었다. 전생 때 알렉스 일행도 이렇게까지 레펜하르트를 쉽게 상대하진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전생 때 알렉스 일행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레펜하르트에게 통할 만한 전술을 하나하나 개발했다. 어떤 것은 먹혔고, 어떤 것은 오히려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기도 했다.
반면, 레펜하르트는 그런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가 없다.
‘내가 당했던 수법만 고르면 그만이니까!’
자기 몸으로 검증된, 10서클 마법사를 제대로 잡는 수법만 쏙쏙 골라 써먹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효과도 좋을 수밖에!
“캘러미티 혼!”
시리스며 이니야의 도움을 받아 레펜하르트가 다시 캘러미티 혼을 갈겼다.
다른 건 몰라도 레펜하르트의 캘러미티 혼만큼은 세이어도 무시할 위력이 아니다. 특히나 권마합신, 그리고 ‘초월자의 권세’로 마력 출력이 대폭 증폭된 후에는 마력 방어장 부수는 것만 놓고 보면 테스론의 7중첩이나 제라드의 8중첩보다도 더 효과가 좋다.
콰쾅!
폭음과 함께 세이어의 마력장이 박살 났다. 잽싸게 세이어가 다시 마력 가호를 전신에 둘렀다.
이제껏 몇 번이나 해 왔던 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마력장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박살 나고 다시 마력장을 생성하는 것은 상당한 마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아까와 달리, 착실히 마력과 체력이 깎여 나간다!
“이 천한 것들이…….”
이를 갈며 세이어가 마법의 전격을 흩뿌렸다. 수십 줄기 굵은 번개가 그를 중심으로 용처럼 뻗어 나갔다. 레펜하르트 일행이 저마다 몸을 날려 번개를 피해 냈다.
‘또 피했나?’
이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세이어의 실력으로 이놈들을 이렇게까지 못 맞힐 리가 없었다.
아까와 달리 제대로 타겟팅 술식을 써 가면서 날리는 마법인데도 조금씩 타이밍이 안 맞아 아슬아슬하게 자꾸 놓친다.
‘저놈들이 운이 좋은 건가?’
의아해하는 세이어와 달리 레펜하르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마법은 정신 상태에 크게 좌우되는 법.’
짜증과 분노로 인한 심리적인 동요, 그로 인해 틈을 한번 찔리기까지 한 세이어의 부동심은 크게 흔들렸다. 마력이나 체력은 건재하지만 공격을 허용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크게 부채가 되어 남는다.
또 러스며 이니야 등의 공격은 무시하기엔 너무 ‘시끄럽고’ 너무 ‘번쩍번쩍’한다. 위력 자체야 무시할 수준이라지만 눈앞에서 적이 뭔가를 하는데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다. 본인은 평소처럼 마법을 구사한다고 여기지만 무의식에서 저걸 의식해 조금씩 생각이며 연산 속도가 느려진다.
그 미세한 딜레이가 이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걸 인정하기에 우린 너무 오만하지.’
전생의 자신과 세이어를 겹쳐 보며 레펜하르트는 조소를 흘렸다.
뭔가 이상은 느끼지만, 그 이상이 저런 ‘날벌레’ 때문일 것이란 생각은 안 한다. 그것이 절대자의 심리다.
그러니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원인을 모르니 고칠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
“내가 이따위 것들에게 이런…….”
세이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압도적인 권능으로, 하찮은 것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영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 가랑비에 옷이 젓듯 조금씩 조금씩, 마력과 체력이 깎여 나간다.
“부서져라!”
일단 하나라도 제대로 처리하자 싶어 세이어가 방식을 바꿨다. 방어장을 굳건히 굳힌 뒤 광역 마법 대신 한 과녁에 집중해 섬광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셀레스티얼 레이!”
목표는 넷 중 가장 움직임이 느린 이, 시리스였다. 가장 체력이 떨어지는지 이미 꽤 지쳐 보이기도 했다.
섬광이 시리스의 사방을 감쌌다. 레펜하르트가 고함을 터트렸다.
“시리스!”
순간, 그녀 앞을 커다란 그림자가 가로막았다.
“내 몸이 크게 자라 노간주나무 삼림을 발로 찼도다!”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던 아틸카가 주술력으로 전신을 강화한 채 대신 섬광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커다란 물의 거울을 만들어 내 섬광을 가로막았다.
퍼퍼펑!
수증기가 들끓으며 섬광이 모조리 튕겨 나갔다. 빛의 속성이라 거울 형태로 막은 것인데 워낙 파괴력이 엄청나다 보니 물의 거울이 모조리 증발한다. 게다가 아틸카의 전신에도 피가 튀었다.
“크으윽!”
한 방에 도로 퇴장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아틸카가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또 순식간에 전신이 아물어 버린다.
“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말끔히 재생한 아틸카가 주술력으로 폭풍 망치를 생성해 연신 던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신이여! 자연의 위대함을 맛보라!”
레펜하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다행히 아틸카가 테스론 역할을 잘해 주었군.’
피하지 못할 공격을 대신 막아 내는 것은 전생 때 테스론의 역할이었다. 아틸카는 짐 언브레이커블만큼 강인한 육체는 없지만 대신 가공할 재생력이 있다. 충분히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틈에 피한 시리스는 다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후방으로 물러섰다. 거의 도망에 가깝게 세이어로부터 멀어진 뒤, 호흡을 가다듬으며 체력 회복에 열중한다. 실란과 마켈린이 그녀에게 또다시 신성 주문을 퍼부었다.
“알 포트시여! 힘을 주소서!”
“필라넨스여! 애프터!”
지친 동료와 교대해 가며 체력을 회복하는 것 역시 알렉스 일행이 주로 써먹던 방법이었다.
물론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그걸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세이어도 시리스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눈앞에서 적이 회복하고 있는데 그걸 그냥 멀뚱히 볼 이유는 전혀 없다.
“누가 그렇게 내버려 둘 것 같으냐?”
그러나 그는 채 마법을 발동하지 못했다. 그 순간 러스의 허공검과 타시드의 벼락 떨구기가 동시에 세이어를 작렬한 것이다.
“등 돌릴 때가!”
“찬스라 하셨지, 아마?”
다시 집중력이 깨진 세이어가 바드득 이를 갈았다.
“감히 이 비천한 것들이!”
분노해 그가 손을 돌렸다.
“휘몰아쳐라! 프로미넌스 스톰!”
불꽃의 소용돌이, 너무도 열기가 강렬히 응집해 불꽃이라기 보단 순수한 붉은 빛처럼 보이는 회오리가 러스와 타시드를 덮쳤다.
러스가 허겁지겁 일루미네이터로 허공을 휘저었다.
“허공검, 블루 홀!”
불길이 푸른 구멍 안으로 들어가 러스 등 뒤로 그냥 흘러갔다. 타시드도 눈을 빛내며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으랏차!”
타시드에게 러스처럼 폼 나게 공격을 흘릴 기술은 없다. 하지만 그가 지닌 전투 예지는 세이어의 마법이 ‘어디로 날아올지’ 파악할 수 있다. 조금 그을리긴 했지만 훌륭히 공세를 피해 냈다.
뒤를 이어 이니야와 아틸카가 손을 합쳐 기술을 펼쳤다.
“북해의 숨결!”
“흐르는 뇌성과 여울진 핏빛 홍수가 쏟아져 내리리!”
냉기의 오러와 붉은 빛의 주술력이 혼탁하게 뒤섞여 사방을 덮어 갔다. 위력은 딱히 세이어를 해할 수준이 아니지만, 시야는 충분히 어지럽힐 수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마력 감지 능력을 지니고 있어도, 등 뒤도 파악할 수 있는 가공할 공간 감지 능력이 있다 해도 인간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절반 이상은 시각이 차지한다. 인간의 육신을 입은 이상 세이어도 눈앞을 어지럽히는 수법엔 꽤 영향을 받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그냥 눈을 감아 버리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지만…….
‘거기서 눈을 안 감는 게 바로 오만한 절대자라는 거지.’
과연 레펜하르트의 예상대로 세이어는 두 눈 또렷이 뜨고 버럭 화내고 있었다.
“가소롭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이어가 광풍을 떨쳐 냈다. 수백 미터나 되는 거대한 반경에 태풍이 몰아쳐 이니야와 아틸카가 펼친 냉기, 그리고 붉은 안개가 말끔히 날아가 버렸다.
“이 정도로 내 눈을 어지럽힐 수 있을 것 같으냐?”
당당히 소리 지른 세이어의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응.”
“……!”
경악하며 세이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레펜하르트의 목소리였다.
‘언제 저자가 여기까지?’
미처 상념을 잇기도 전이었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레펜하르트가 정권을 웅장하게 뻗어 냈다.
“캘러미티 혼!”
3
끝없이 굉음이 울려 온다.
미칠 듯한 폭음이 대지를 흔든다.
카탈란 가드의 많은 이들이 대피소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우우…….”
“어찌 되는 거지…….”
이들의 대피소는, 평범한 대피소와는 조금 형태가 달랐다. 분명 날아드는 공격을 막기 위해 튼튼한 강철과 석조 천장이 있긴 한데, 벽은 전혀 없고 오직 기둥만 세워져 있다.
보통 대피소의 상식이라는, 지하에 위치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 지형보다 조금 솟은 장소다. 대피소라기보단 오히려 돌로 만든 비가림막 같은 느낌이랄까? 넓은 연병장, 사방이 확 트인 그곳에 그런 대피소가 수십 개가 넘게 세워져 있었다.
이는 적들의 힘을 감안해 카를이 친히 설계한 것이었다.
아무리 튼튼한 지하실을 만들어 봤자 오러 유저쯤 되면 충분히 부술 수 있다. 대마법사쯤 되면 아예 지하실째로 매장시켜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의 적은 오러 유저나 대마법사를 아득히 능가하는 괴물이었다.
애초에 적의 공격은 막을 수가 없다. 무조건 피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 광범위한 공격을 다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렇게 가림막 형태로 대피소를 만든 것이다.
직격 맞으면 별 수 없지만 적어도 여파에 휘말려 죽는 사태는 면하게 한다. 만일의 경우 최대한 빨리 대피소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할 수 있게 사방도 뻥 뚫려 있어야 한다.
물론 이 경우 적이 대피소에 침입하기도 너무 쉬워지지만 카를은 한마디로 무시했다.
-인류의 신쯤 되는 존재가 일일이 대피소 안으로 기어들어 올 리가 없잖소?
애초에 저기까지 가면 벽이 있건 지하건 이미 모두 죽은 목숨이다. 최선을 바랄 수 없다면 차선이라도 완벽하게 대비하자는 것이 카를의 모토였다.
덕분에, 현재 카탈란 가드는 바나텔의 1차 습격이 있었음에도 크게 피해 입지 않았다. 부서진 건물은 많아도 죽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저 가공할 전투의 여파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도 없다. 한쪽에선 바나텔과 제라드가 지형을 바꿔 가며 싸우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레펜하르트 일행과 세이어가 아예 지형을 녹여 가며 전투 중이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신의 분노인 게야…….”
숨은 병사들이 공포 속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그럼에도 흔들리는 대지와 가공할 파공음은 여전히 전신을 때리고 심장을 움켜쥔다.
함께 대피소에 피신해 병력을 지키던 아스레일이 저 멀리, 전장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폐하…….”
저 하늘 아래 자신의 왕이, 선택받은 여덟 명과 함께 인류의 신을 대항하고 있을 터였다.
곁에서 한 오크 여인이 중얼거렸다.
“나도 저기로 달려가고 싶군.”
아스레일이 오크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
“안 된다는 걸 알잖습니까, 스탈라?”
“그야 그렇지만…….”
불만스러운 얼굴로 스탈라는 저 멀리, 뇌성이 터져 나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카탈란 가드를 박차고 나서고 싶다.
‘저기에 그놈이…… 남편을 죽인 그놈이…….’
하지만 그녀는 선택받지 못했다.
안타레스엔 많은 강자들이 있다. 지금 싸우는 여덟 말고도 스탈라며 하다툼, 유스테아 등 오러 유저는 충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이들까지 세이어와 싸우게 하진 않았다.
-잔혹한 말이 되겠지만, 그들은 도움이 안 돼.
단순히 이들이 약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전투력으로만 따지면 스탈라가 시리스나 카를보다는 더 강하다.
그러나 레펜하르트의 전술엔 반드시 강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마켈린이나 실란도 필요 없지.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상황에 필요한 기술을 지닌 자여야 했다. 시리스는 총 전력은 스탈라보다 낮지만 정령술과 마법, 검술을 모두 겸비하고 있다. 다양한 상황 대응력이 있는 것이다. 카를은 다른 건 몰라도 방어력만큼은 아틸카나 레펜하르트급이다.
더구나 숫자가 많다면 오히려 연계를 해칠 위험이 컸다. 모든 것을 고려해 저 여덟이 뽑혔다.
“알아, 알고는 있지만…… 으으으…….”
머리론 이해해도, 눈앞에 원수가 있으니 몸이 달아오른다. 흥분한 스탈라를 아스레일이 다시 달랬다.
“진정하세요, 당장이라도 왕께 달려가고 싶은 건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대부분 출격했지만 카탈란 가드엔 상당수의 실베릭 나이츠와 브론즈 나이츠가 상주 중이다. 트롤 구루 중에서도 강한 이들이 꽤 있다. 경지에 오른 엘프 정령사도 그 강함은 무시 못 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세이어와의 전투에서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설프게 숫자로 밀어붙여 봐야 피해만 커질 뿐이다.
일격에 다수를 쓸어버릴 수 있는 세이어에게 수적인 물량 공세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다른 걱정도 하고 있었다.
-내가 했던 짓을 저놈이 못하리란 법도 없고.
브론즈 나이츠의 저 강력한 마갑은 레펜하르트의 마법으로 몽땅 기능 정지시키고 빼앗은 것이다. 만약 세이어가 비슷한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상황은 역전된다. 기껏 빼앗은 수백의 무구를 도로 뺏길 수도 있다.
카를의 엘드릴 기간투스는 너무도 월등한 방어력 때문에 도무지 포기할 수가 없어, 위험을 감수하고 연계에 끼웠지만 나머지는 요새에 대기시켰다. 사실 세이어는 A.M.P 쇼크웨이브 보고 경악하고 있었으니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레펜하르트로서는 당연한 대응이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현재 요새에 남은 이들이 임무였다. 머리론 납득했지만 역시 울분이 끓는다.
“제기랄!”
욕설을 내뱉는 스탈라를 아스레일은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이 자리에 남은 것에 별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내 실력으로 저기 끼긴 무리지.’
오러 유저도 아니고, 그렇다고 초월적인 마갑을 받지도 않았다. 그저 뛰어난 기량을 지닌, 그러나 엄연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현재의 자신이다. 그런데도 함께 싸우게 해 달라고 설칠 만큼 아스레일은 주제 파악 못 하는 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따로 그에게 주어진 임무만큼은 역시 불만이었다.
‘아, 폐하는 대체…….’
오크의 호전성은 익히 알려진 것, 아무리 명령을 내렸다 해도 언제 거역하고 제 성질대로 뛰쳐나올지 모른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따로 아스레일을 불러 특명을 내렸다.
-자네가 오크들의 움직임을 억제해 주게! 쟤들 제때 설득할 수 있는 이가 자네밖에 없어!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오크 대하는 방식은 스스로도 나름 자신이 있는 아스레일이었다. 이 임무가 막중하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일국의 기사단장이 맡을 임무는 아니잖아.’
어쩌면 폐하는 자신의 검보다 자신의 혀에 더 기대를 걸고 있는 게 아닐까? 무인으로서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기량이 별 볼 일 없으니 불만을 터트릴 자격도 없고.
“휴우…….”
한숨을 쉬며 아스레일은 검 자루를 꾹 쥐었다.
‘아직은 모자라지만 반드시…….’
아직은 약하다. 아직은 왕의 곁에 설 수 없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진 않을 것이다.
기필코 힘을 길러 저분의 곁에 서겠다!
각오를 다지며 아스레일은 투지를 불태웠다. 매서운 눈빛이 저 멀리, 전장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이제까지와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수천 번의 우레가 동시에 떨어진 것 같은 가공할 폭음이었다. 기겁하며 아스레일이 스탈라를 돌아보았다.
“이건 뭐죠?”
스탈라가 납작코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뭔가…… 결판이 난 것 같군.”
☆ ☆ ☆
주먹을 뻗은 채, 레펜하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크으윽!”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강철 같던 피부가 쩍쩍 갈라져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바위 같던 근육은 뒤틀려 형태가 일그러져 보일 정도다. 마치 거대한 통 안에 사람을 넣고 마구 뒤흔든 것 같은 참상이었다.
불굴의 육체, 언브레이커블이라고 불리는 육신이 저토록 망가진 것이다. 그것도 공격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한 입장에서!
그가 날린 권마합신, 7중첩 캘러미티 혼의 반발력 때문이었다.
‘아, 역시 열두 배는 오버였나?’
이니야와 아틸카의 안개를 날리는 순간, 세이어는 마력을 크게 방출해 넓게 퍼트렸다. 그의 의식이 안개를 날리는 것에 완전히 쏠리며 유지하고 있던 방어장이 최대로 약화되었다.
그 순간야말로 레펜하르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이었다.
캘러미티 혼에 깃든 오러의 힘은 당장 파괴력을 높이지 못한다. 그러나 거기에 깃든 마력 출력은 높일 수 있다.
바로 ‘초월자의 권세’를 발동시켰다. 평소 유지하던 여덟 배에서 한계인 열 배를 넘어, 육체 파괴를 각오하고 열두 배까지 폭주시켰다. 마법사이던 시절이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 그러나 제라드의 가르침은 달랐다.
-반격당할까 봐 힘 남기고 때리느니, 기회 왔을 때 전력으로 날려서 한 방에 눕혀라. 깨작깨작 뒷생각하면서 싸워서야 싸움이 끝나겠냐? 뒤를 걱정하는 이에게 끝은 오지 않는 법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크으, 역시 아파 죽겠네…….’
전신을 사로잡는 고통에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모든 것을 건 보람이 있었다.
“으으…….”
잔뜩 일그러진 세이어의 얼굴이 보였다. 그 아래 연결된 목과 가슴도 보였다. 피투성이가 된 두 팔도 보였다.
그 이후는 보이지 않았다. 허리 아래쪽, 하반신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또 이런 꼴을 당하다니…….”
극심한 분노와 굴욕으로 세이어는 마치 악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육체의 절반을 잃고 대부분의 마력조차 사라졌다. 간신히 남은 마력으로 생명줄을 잇고 있었지만 오래 가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세이어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육체 통증 대부분을 차단해 고통을 대폭 완화시키고 있는 덕이었다. 물론, 그 완화시킨 고통조차도 전신을 칼로 쑤시는 격통이겠지만.
“크으으으…….”
신음 속에서 세이어가 러스 일행에게 눈을 돌렸다.
“잘도 이런 짓을 했구나, 고작 저따위 것들을 이용해서…….”
분명 자신과 비교도 안 되는 약한 이들이었다. 레펜하르트는 제법 인정할 만했지만 역시 세이어에 비하면 상당한 약자였다.
그런데 휘말리고 휘말리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 꼴이다…….
“……이건 방심했다고 할 수도 없겠군.”
갑자기 세이어가 레펜하르트를 빤히 보았다.
“그런데 궁금하구나. 그대는 이미 알 것이다.”
순간 그의 전신에 희미한 빛이 맴돌았다.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세이어는 레펜하르트에게 똑같은 꼴을 한 번 당했다. 그리고 당시 이미 레펜하르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자신은 신. 불멸의 존재다.
세이어가 흉악하게 웃었다.
“이래 봤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일 뿐이거늘.”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시작 따윈 없다.”
세이어의 눈에 의문의 빛이 맴돌았다. 레펜하르트가 고함을 터트렸다.
“마켈린! 실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이 가공할 성광을 내뿜었다.
“알 포트시여! 권세를 내려 주소서! 축복을 내려 주소서! 앞날을 예비하시고 은혜의 가호를 내려 주소서!”
“필라넨스여!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소서! 그대에게 닿게 하소서! 우리의 미욱함을 돌보시며 우리 앞날을 밝히소서!”
쉴 새 없이 기도를 올리며 신성력의 빛을 사방에 퍼트린다. 가공할 성광이 세이어와 레펜하르트 일행을 모조리 덮으며 반경 수십 미터를 에워쌌다.
세이어가 눈을 깜빡였다.
‘뭘 하자는 거지?’
두 사람의 기도는…… 그냥 기도였다.
딱히 무슨 신성 주문을 골라 발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저 강렬한 신성력으로 자신이 믿는 신과 여신에게 끝없이, 계속 쉬지 않고 기도를 올리고 또 올린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
세이어는 무시하고 마저 신성을 끌어 올렸다. 뭔 짓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육체를 복구해야 한다.
그때였다.
‘응?’
세이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신성과 연결이 되질 않아?’
☆ ☆ ☆
처음으로 세이어가, 진심으로 경악해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인류의 신이, 진심으로 공포에 질려 하찮은 인간을 바라보았다.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