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장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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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엘프 여인이 유리 쟁반을 들고 어두운 통로를 걷고 있었다. 석벽으로 이루어진 이 좁은 통로는 길목마다 한기가 흐르고 기이한 기분이 들어 다들 기피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이 두 엘프 여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은 안타레스 왕궁의 시녀였고, 안타레스의 왕을 위해 심부름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리고 이 통로의 끝에 그들의 왕이 있었다.
두꺼운 철문을 열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온갖 액체가 끓고 있는 플라스크가 놓인 십수 개의 테이블과 형형색색의 광석들, 괴상한 형태의 식물들과 벽 여기저기 걸린 마물의 시체까지.
무슨 연쇄살인마의 도축장을 보는 듯한 그 섬뜩한 광경 속에서 한 거구의 남자가 뭔가를 작업 중이었다.
“폐하, 나머지를 가져왔습니다.”
그녀들이 들고 온 유리 쟁반에는 붉게 물든 금속 구슬 두 개가 담겨 있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그 구슬은 표면 여기저기에 피가 묻고 살점이 달라붙어 흉측하게 보였다.
거구의 남자, 레펜하르트가 테이블 한쪽에 손가락질을 했다.
“아, 거기 놓도록.”
“예, 폐하.”
구슬을 살펴보며 그가 물었다.
“그건 누구 거지?”
전후 처리를 하며 레펜하르트는 불사의 힘을 지녔던 은의 현자들, 그 시체로부터 심장 반대편을 해부하도록 따로 명령을 내렸다. 저 구슬들은 그 시체 속에서 나온 물건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상당히 끔찍한 일인데, 의외로 일개 시녀인 이 엘프 여인들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국 기사 걸포드와 폴스타 후작의 것이라 들었습니다.”
안타레스의 일개 시녀는 다른 왕궁 시녀와는 뽑는 기준이 전혀 다르다. 왕실 예법이라든가 손재주, 혈통 따윈 아무 의미 없다. 안타레스에선, 최소 두 자릿수의 전장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왕궁의 시녀’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군사 국가다운 면모라 하겠다.
“그렇군. 알았다.”
대꾸하고 이내 레펜하르트가 등을 돌렸다.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아 작업에 열중한다. 덩치에 안 맞게 뭔가를 열심히 조물락거리며 가끔 등을 움찔거린다. 그때마다 뚜렷한 등 근육이 씰룩대며 존재감을 발한다.
그 모습에 엘프 시녀 하나가 한숨을 쉬었다.
“폐하, 웬만하면 외투 정도는 걸치심이…….”
개탄할 일이었다.
아아, 자신들의 왕은 어째서 공식적인 자리 외엔 바지만 입고 사는 건가? 저 무문에게 상의上衣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정녕 짐 언브레이커블은 가슴 못 보여 줘서 안달이 난 변태 무문이란 말인가?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시리스가 잔소리 열심히 한 덕에 나름 외투 잘 챙겨 입고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니야가 왕비가 되며 상황은 변했다. 시리스는 더 이상 레펜하르트의 옷 취향에 관여하지 않았고 이니야는 레펜하르트의 근육만 보면 해롱해롱 녹아 버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더 벗기지 못해 안달인 판이었으니 제대로 옷을 입힐 리가 있나!
‘아, 왕비님은 다 훌륭하신데 남자 취향이 좀…….’
‘아니, 남자 취향 자체는 훌륭하시지. 그렇지만 심미관이 좀…….’
물론 레펜하르트에겐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에이, 시약 잘못 튀면 옷 버려. 어지간한 가죽옷도 단번에 녹여 버리는 것들뿐이라고, 이거.”
그가 현재 다루는 마법 시약 대부분은 상당히 독성이 강한 것들이다. 한 방울만 잘못 튀어도 어지간한 옷은 구멍이 송송 나는 것이다. 엘프 시녀가 기가 막혀 말을 이었다.
“그럼 옥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외투를 걸쳐야…….”
말하다 말고 시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옥체라는 표현이 맞나?’
눈앞의 사내는 바로 권왕이다. 아무리 독한 마법 시약도 몸에 튈 경우 슥 닦으면 그만인 몸뚱어리를 지닌 작자다. 옥체보단 금강체에 가깝지.
‘……어떻게 보면 검소하신 걸지도.’
뭔가 좀 이상하단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건 아까운 옷 버리지 않겠다는데 뭐라 할 순 없었다. 그저 흉한 꼴 안 보도록 외면하는 수밖에.
시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아, 수고했다.”
볼일 끝난 시녀들이 허둥지둥 도망치듯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전장에서 온갖 흉한 꼴 다 본 그녀들이라지만, 온갖 흉물스러운 것들이 걸려 있는 마법사의 연구실에선 정체 모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녀들이 나가자 레펜하르트가 구슬을 챙겨 들고 유심히 살폈다.
“역시 모든 구슬이 기능이 동일하군. 똑같은 물품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어.”
은의 현자들로부터 불사의 아티팩트를 회수한 후, 레펜하르트는 시간이 허할 때마다 이를 연구해 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확도 있었다.
“일단 수신기 역할을 한다는 건 틀림없고.”
아티팩트 자체의 능력은 거의 없다. 내재된 기운만 보면 아티팩트란 이름을 붙이기 부끄러울 정도로 하찮다.
이 아티팩트의 기능은 하나뿐이었다. 이식된 사용자의 생체 반응을 읽어 낸 뒤 어딘가로 보고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어딘가에서 불사의 힘이 주어진다는 거지.”
은의 현자가 죽어 간 것은 레펜하르트의 A.M.P 쇼크웨이브 때문에 수신기가 정지되어 신호가 가지 않아 더 이상 불사의 육체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특이한 점은 그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 마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는 쪽이었다.
“조금 파장이 다르긴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마력보다는 신성력에 가까워 보이는데…….”
스스로의 기운, 생명기를 키워 물리적 힘으로 바꾸는 것이 오러.
세상을 구축하는 기운을 체내로 받아들여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힘으로 바꾸는 것이 마력.
신성력은 이 둘과도 다른 궤를 지닌 힘이다.
사람들은 신관이 기도를 올려 신과 소통함으로써 기적을 행사한다고 믿고 있다. 이 믿음은 분명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간 과정이 대폭 생략된 믿음인 것이기도 하다.
아무나 신과 소통해 기적을 행사할 수 없다. 신관, 신성력이라 불리는 권능을 지닌 이만이 저것이 가능하다.
신이라 불리는 고차원적인 존재까지 닿을 수 있는 소통력, 스스로의 정신력과 집중력을 갈고닦아 그 전달력을 키우는 것이 바로 신성력이었다. 단순히 기원만 애절하게 하면 장땡인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에너지로서 존재하는 힘이었다.
저 관점으로 접근하면 신성력도 마력처럼 저장이 가능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신성력을 아티팩트로 발동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테고.’
그런 의미에서 이 아티팩트의 기본 메커니즘은 신관이 신에게 기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보통 신성 주문은 기도에 응답한 신이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2차 산물, 현실적인 영향력을 보여 주는 것인 데 비해 이건 신성 그 자체로 응답한다는 것 정도군.”
고민하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연구 자체는 꽤 잘 진행되고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신성神性, 그 자체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쩝, 진짜 파악해야 하는 건 사실 그쪽인데…….”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웬일로 여기까지 왔나, 재상?”
이내 문이 열리며 근육질 거구의 수염남이 안으로 들어섰다. 연구실을 둘러보더니 카를 재상이 놀랍단 표정을 지었다.
“이야, 많이 산뜻해졌네요?”
온갖 흉물스러운 물건들이 잔뜩 널린 이 광경을 보고 산뜻하다니? 조금 전의 시녀들이 보았다면 어이없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물품이 많이 모자라니까.”
현재 레펜하르트의 마법 연구실은 카탈란 가드의 탑 하나를 비우고 신설한 것이었다. 아라난 그라드에 있던 원래 연구실에 비하면 시설도 설비도 물품도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시녀들은 지금의 광경만으로도 치를 떨었을지 모르겠는데, 아라난 그라드의 원조 연구실에 비하면 이곳은 아늑한 동산 수준이었다.
“아라난 그라드의 마탑은 무슨 ‘인세에 펼쳐진 지옥’쯤으로 보였는데 말이죠.”
카를 재상의 말에 레펜하르트가 피식거렸다.
“사실 전생 땐 더했었다네.”
그땐 인세에 펼쳐진 지옥 정도가 아니라 그냥 오리지널 지옥으로 보였었다.
어쨌거나, 손을 멈추고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어쩐 일인가, 재상?”
카를이 가볍게 대꾸했다.
“아, 별일 있어서 일부러 온 건 아닙니다. 그냥 가볍게 보고할 일인데, 굳이 연구에 바쁜 폐하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카를이 연구실 한쪽으로 걸어갔다. 구석에 세워진 거대한 동상을 보며 그가 물었다.
“이 마법 갑옷에 대한 연구는 잘되고 계십니까?”
“바포메트 슈트 말인가?”
은의 현자가 소유했던 초월적인 고대 아티팩트, 장착형 골렘 바포메트 슈트는 아라난 그라드가 아토믹 버스트에 휩싸일 때 그대로 매장되었다. 이후 카를은 특별히 브론즈 나이츠를 보내 저 바포메트 슈트를 발굴시켰다. 브론즈 나이츠의 마갑은 아라난 그라드 인근에 남아 있던 마법 독의 여파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기에, 무리 없이 바포메트 슈트를 회수해 올 수 있었다.
“이 마갑을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엄청난 전력이 될 테니까요. 앞으로의 전략 방향성이 달라지니 여쭙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일단 발동 조건과 사용자 권환 위임 재변경 조건까진 알아냈다네. 그렇지만 아직도 주요 기능은 블랙 박스에 싸여 있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군.”
“그렇군요. 되도록 정확한 기능을 알았으면 좋겠는데…….”
“꼭 그래야 할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이 마갑은 오러 유저밖에 쓸 수 없으니까요. 폐하나 제라드 님, 그리고 오크 오러 유저들은 사이즈 때문에 못 쓰니 누가 써야 가장 효율적인 전력이 될지 파악해야 합니다.”
말을 잇다 말고 카를이 혀를 찼다.
“전 원래 왕비님을 떠올렸는데, 의외로 거절하시더군요?”
레펜하르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니야의 강점은 정교한 오러 제어술이니까. 아무리 바포메트 슈트가 대단해도 원래의 육체에 비하면 아무래도 오러 흐름에 허점이 생겨. 이 마갑은 기교파보다는 파워 중시형 오러 유저에게 더욱 어울릴 걸세.”
“예, 같은 이유로 러스 경에게도 거부당했습니다. 이런 것 입고 허공검 날릴 자신은 없다더군요. 제어가 너무 힘들어진다던데…… 오러 유저가 아닌 제겐 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만.”
“오러 유저인 내게도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지, 그건. 하여튼 이니야나 러스나 대체 똑같은 오러로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는 건지…….”
카를이 바포메트 슈트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보고드릴 것도 있습니다. 전에 명하신 불사 아티팩트 회수 건에 대해서입니다.”
“음, 전부 회수되지 않았던가?”
불사를 자랑하며 싸워 댔던 은의 현자는 전원 그 신원이 파악되었다. 맞서 싸운 상대가 바로 안타레스의 고위층이니까. 당시 전투에 임했던 이들에게 물어 가며 카를은 확실한 명단을 작성하고 며칠이나 시체를 뒤져 가며 그들을 찾았었다.
“두 명이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둘?”
“예, 제국 기사 키린트와 태양탑의 마법사 제이드. 이 둘은 시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A.M.P 쇼크웨이브의 유효 기간은 사흘이다.
“그렇다면 혹시 사흘이 지나 두 놈만 다시 살아난 걸까?”
“하지만 키린트도 제이드도 모두 오체 분시되어 난자당해 죽었습니다. 상대한 러스 경과 시리스 양이 직접 손을 썼으니 확실하지요. 설마 그 상태에서 살아났을까요? 더구나 사흘이나 지났으니 이미 시신에 부패가 진행되었을 텐데…….”
“나도 그리 가능성은 없다고 보네만…… 그러면 시체가 발견되어야 하지 않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박살을 내 놓았다고 들었으니 말이죠.”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문득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고작 이거 보고하러 굳이 여기까지 올라온 건가?”
카를이 한가한 처지도 아니고, 어차피 접견 시간도 따로 있는데 굳이 자기 업무 시간 비워 가며 마탑까지 온 이유가 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역시나, 카를의 볼일은 따로 있었다.
“사실은 따로 여쭤 볼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래도 꺼내기 힘든 말이어서요.”
“무엇이기에?”
주위에 둘밖에 없는데도 카를이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는 시간을 거슬러 이 시대로 오셨다 하셨지요?”
“그렇지. 그 이론에 대해 알고 싶은 건가? 솔직히 자네 마법 수준으론 좀 이해하기 힘들 텐데?”
천하의 레펜하르트조차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한 주문, 그야말로 운에 운이 겹쳐 간신히 성공한 주문이었다. 사실 지금도 자신이 왜 성공했는지 잘 모를 정도다. 그런데 카를이 아무리 천재라지만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이젠 저도 마법사지만 아무래도 그쪽이 전공은 아니죠. 그건 관심 없습니다.”
“그럼?”
“시공 회귀 주문의 이론은 알 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주문의 효과에 대해선 간과할 수가 없더군요.”
다른 이들은 레펜하르트가 시간을 되돌아 이 시대에 왔다는 소릴 듣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카를은 달랐다. 그는 저 진실에 담긴 이면의 의미를 읽어 냈다.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남들 앞에서, 심지어 시공 회귀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 앞에서도 감히 언급하기 두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바로 묻지 못했다.
순간 카를이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분명 그 시대에서 이 시대로 옮겨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폐하가 계시던 원래 시대, 그 세계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 ☆ ☆
카를이 물었다.
“그냥 레펜하르트 님이 사라지고 안타레스 제국이 망하는, 인류가 승리한 역사가 이어지는 것입니까?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표현해 왔다. 그러나 이 표현은 사실 틀린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은 세계의 시간을 되돌려 이 시대로 돌아왔다. 그래서 무심코 다른 표현도 써 오지 않았던가?
모든 것은 없던 일이 되었다고.
“아니. 그 시간대는 사라졌다. 역사는 지워졌고 지금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고 있지.”
시공 회귀 주문은 실패할 경우 그 여파로 차원이 붕괴되어 세계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위태로운 마법이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만으로 고대에서 시공 회귀 주문을 경계한 것은 아니다.
30여 년이란 시간 동안 태어나고 살아간 무수한 생명, 그들이 쌓아 온 무수한 인생, 그 사이에서 벌어진 무수한 사건.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고 그 시대를 만든다.
그리고, 시공을 되돌리면 그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어 버린다.
즉, 시공 회귀 주문은 성공한다 해도 똑같이 세계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카를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찌 보면…… 폐하는 이미 세계 하나를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없군요.”
레펜하르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는 저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일부러 외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자신이 이 시간대로 왔으며, 그로 인해 새롭게 인생을 살아간다고 애써 생각해 왔다.
하지만 사실은 전생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래. 알고 있었지.’
그럼에도 시간을 되돌렸다.
사랑하는 이를 모두 잃고, 보호하던 이를 모두 잃고, 쌓아 온 모든 것을 잃었기에. 더 이상 그 시간대에 남은 미련이 없었기에 감히 저질러 버렸다.
‘뭐, 테스론 놈이 사람 열받게 만들기도 했었고.’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마왕이 할 법한 짓은 골고루 다 저질렀구나, 나.’
굳은 얼굴로 카를에게 묻는다.
“날 비난하고자 하는가?”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자기 일도 아니고 자신의 시간대, 자기 세계의 일도 아니다. 그런 ‘쓸데없는’ 문제에까지 도리 따질 만큼 카를이 감수성 넘치는 성격도 아니다.
그는 현실적인 인간이었고,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카를이 그 고민을 입에 담았다.
“세이어도 그 마법을 쓸 수 있습니까?”
순간 레펜하르트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군…….”
시간을 되돌린다.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든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 두려움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 레펜하르트가 없앤 것은 이 시간대가 아니며,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카를은 그 사실이 주는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세이어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레펜하르트와 똑같이 10서클을 다루는 데다 신의 힘조차 지니고 있다. 과연 레페하르트에게 가능한 일이 세이어에겐 불가능할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잖습니까? 사라진다는 인식조차 못 한 채.”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불가능할 걸세.”
카를이 살짝 놀랐다. 그가 아는 자신의 왕은, 마법사답게 어지간히 확신이 있지 않고서는 저런 식으로 단언하지 않는다.
“확신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확신까진 아니지만…….”
표현과 달리 레펜하르트는 꽤나 자신 있게 설명을 이었다.
비록 시공 회귀 주문이 해독하지 못한 부분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공통되게 나온 문구들이 있었다.
-이는 신에게조차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법이니…….
-신에게도 불가능한 일, 그러니 인간도 건드려선 안 될 영역…….
“그리고 그자는 신이지.”
단순히 경계를 위한 관용구라 칭하기엔, 저 문구는 보다 직설적인 설명조로 쓰여 있었다.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을 적어 둔 것이 확실했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신성神性으로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은의 시대에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더군.”
“하지만 그건, 그자가 정말 신이라는 가정하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자가 진짜 신이 아니라면, 그리 쉽게 시공 회귀 주문을 쓸 수 있을 리도 없지.”
물론 자신이 못한다고 세이어도 못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이 부분만큼은 레펜하르트도 꽤 근거가 있었다.
“그놈이 분명 대단하긴 한데, 그렇다고 전생의 나보다 그렇게 뛰어난 마법사도 아니거든?”
술식 처리력이나 연산력, 마력 허용량 등엔 큰 차이가 없다. 지닌 마법의 수준도 엇비슷하다. 세이어가 전생의 레펜하르트에 비해 월등한 것은 마법의 파괴력이나 출력 정도?
“그리고 마력 감지 능력은 확실히 나보다 밑이야.”
그런데 시공 회귀 주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마력 감지였다. 미크론 단위로 변화하는 마력 흐름을 그때그때 변화에 맞게 제어해야 하는…….
‘정말 더럽게 짜증 나는 술식이었지.’
전생의 레펜하르트조차 절반도 감지하지 못해 그냥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죽으면 되는 거지’란 심보로 발동시켜 버린 마법이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를 테니 비유로 설명해 주겠네, 카를. 시공 회귀 주문이란 건, 수천의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어노는 자리에 눈 감고 돌을 던져 정확히 한 아이만을 맞추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라네. 더구나…….”
순간 레펜하르트가 피식거렸다.
“문제는 제대로 술식을 발동한다고 확실히 효과가 보장되는 마법조차도 아니라는 거지.”
“엥?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비유로 말하자면, 과녁인 아이가 돌을 맞았을 때 정확히 ‘으악!’이란 소리를 낼 때만 제대로 발동이 되는 방식이라네. ‘아야!’라든가 ‘엄마야!’ 같은 소리가 나오면 실패야.”
카를이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뭡니까, 그거? 그럼 아무리 돌을 잘 던져도 실패할 가능성이 엄청 높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개인의 기량도 기량이지만 천문학적인 우연이 따라 주어야 가능한 방법이다. 나도 절대 두 번은 못해.”
마법의 극에 달한 자로서, 레펜하르트는 단언했다.
“신성이란 예측 불가능한 부분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확신할 수 있지. 마법사라면, 결코 그런 위험한 다리를 건너지 못할 것이다.”
그제야 카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건 다행이군요.”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그렇다고 딱히 우리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야 그렇지?”
레펜하르트가 심각한 어조로 뇌까렸다.
“그딴 것 없이도 인류의 신이란 작자는 충분히 무서운 존재니까.”
아무리 안타레스가 승승장구해도, 아무리 대륙을 제패하고 강력한 힘을 떨쳐도 그자 앞에선 의미가 없다. 실제로 그자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안타레스는 최고의 국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현재 레펜하르트를 비롯, 안타레스의 강자들은 잠까지 줄여 가며 힘을 키우는 데 매진하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지금, 좀 쉬어도 되지 않겠냐는 주변의 만류도 있었지만 여전히 안타레스의 수뇌부는 긴장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마친 카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연구에 성과가 있으시길, 폐하.”
“물러가시게, 재상.”
카를이 연구실을 떠났다. 바포메트 슈트 앞으로 걸어가 마력 감지를 펼치며 문득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했다.
‘그런데 그자는 대체 왜 여태껏 움직이지 않는 거지? 사태가 여기까지 왔는데?’
☆ ☆ ☆
가상 현실 창조 아티팩트, 세이어 템플.
은의 수호자가 대륙 어디에 있건 자유롭게 의사를 전달하고 회의할 수 있게 해 주는 이 고대의 아티팩트는 사실 실존하는 장소가 모델이었다.
아무리 신이라도 인간의 육신을 입고 현세에 존재하는 이상 인간처럼 거할 장소가 필요하다. 인류의 신, 세이어는 그 강대한 권능으로 지상 일부에 자신의 성역을 창조했다.
대륙의 최북단. 아득한 추위만이 존재하는 얼어붙은 대지, 프로즌 랜드.
오로지 백색만이 존재하는 이 동토 끝에는 전혀 다른 풍경을 지닌 비현실적인 풍경이 존재했다. 몰아치는 눈보라와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사시사철 따듯한 봄바람이 불고 기화요초가 만발한 곳이었다.
녹음이 감도는 대지 가운데 우뚝 솟은 순백의 신전,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세이어 템플이었다.
신전 안쪽 중앙 홀에선 열셋의 은의 수호자가 모여 주변을 감동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 이곳이…….”
“진정한 세이어의 신전…….”
신전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신이 거하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면, 이곳이야말로 대륙에 존재하는 유일하고 진정한 신전일 터였다. 실제로 신께서 거하시는 곳이니까!
수호자 타세랄, 속세에서 세이어의 교황 타세라드라 불리는 그가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내 살아생전 이곳에 올 수 있다니, 실로 광영이로다…….”
은의 수호자라는 막중한 직책을 지닌 이들조차도 이 거룩한 성역에 발 디뎌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직 세렐라인, 한때 인류의 신을 그 속에 품었던 이에게만 감히 허용된 장소였다. 감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감격을 대놓고 표현할 처지가 아니었다. 현재 이들에게 이런 영광이 주어진 이유는, 바로 은의 현자가 저지른 커다란 실패 때문인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군. 이런 일로 성역을 찾게 되다니…….”
“동감이오. 그런데 세이어께선 아직이신가?”
“수호자 세렐라인이 사라진 지 시간이 꽤 된 것 같은데…….”
수호자들이 이곳에 모인지 벌써 세 시간째였다. 세렐라인이 세이어께 전갈을 알리러 간 지도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세이어는 통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분께서 많이 진노하신 것이 아닌지…….”
뭐, 이들은 감히 신을 닦달할 처지가 못 된다. 그저 두려움 속에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끝났다.
“나의 아이들아.”
수호자들이 모여 있는 중앙 홀, 그 상좌에서 빛과 함께 강철의 왕좌가 나타났다.
복잡한 금속 형태로 만들어진 그 왕좌는 사실, 신의 옥좌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기계적인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수호자들에겐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형태, 충분히 신성함을 느낄 수 있었다.
수호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우리의 신이시여.”
강철의 왕좌에 앉아 세이어가 은의 수호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표정들이 좋지 않구나.”
좋을 리가 없었다.
엄청난 수의 금단의 아티팩트를 빼앗겼지, 대륙의 절반이 세이어의 가르침에서 등 돌렸지, 그 많던 강력한 협력자들도 잃었고 전쟁에선 연패 중이며 안타레스의 영토 대부분을 다시 빼앗겼다. 심지어 이대로라면 안타레스가 바슈탈론 제국으로 쳐들어올 가능성마저 있었다.
무엇보다 제일 큰 문제는, 정말 안타레스가 쳐들어올 경우 딱히 대책이 없다는 점이었다.
전생에서 무수히 투덜거렸던 소리를, 수호자 타세랄이 현생에서도 똑같이 했다.
“아니, 그 마법은 도대체 정체가 뭐기에…….”
레펜하르트의 A.M.P 쇼크 웨이브, 저 정체불명의 마법이 있는 한 은의 현자는 어떤 아티팩트도 동원할 수 없다. 은의 현자의 존재까지 드러내고도 이렇게까지 몰린 것이다. 은의 현자 역사상 최대의 위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세이어 곁에 무릎 꿇은 세렐라인이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희가 어리석고 미흡하여 이런 사태를…….”
세이어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이들아, 너희는 원래 어리석고 미흡하다. 그것이 어찌 죄이겠느냐? 사태가 여기까지 온 것은 오롯이 나의 책임. 너희들은 잘못이 없으니 내 진노를 두려워 할 이유도 없도다.”
수호자들이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사실 세이어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정말 은의 현자들이 뭐 잘못한 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서 패한 것은 분명 죽었다던 레펜하르트가 살아 돌아온 탓이고, 대륙의 절반이 세이어의 가르침에 등 돌린 것은 그가 저질렀던 가공할 파괴의 기적과 전 대륙에 신의 말씀을 남발한 탓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수호자들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수호자 아크라이트가 조심스레 의문을 표했다.
“그럼, 어찌하여 저희를 모두 모으셨나이까?”
“움직여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수호자 아크라이트의 눈빛이 빛났다. 기대 어린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자를 다시 한 번 벌하실 것입니까?”
세이어가 반대로 질문했다.
“다시 한 번 신의 위엄을 보이길 원하느냐? 그럼으로써 그 자에게 죽음의 벌을 내리길 원하느냐?”
수호자들은 당황했다. 그자가 죽길 원하냐고? 당연한 것 아닌가!
세이어가 질문을 이었다.
“그럼 그자가 죽은 채로 계속 있겠느냐?”
순간 수호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는 이미 한 번 신에 의해 죽음당한 자였다. 그럼에도 죽음 가운데 홀로 부활한 이였다.
세이어가 무심히, 그러나 희미한 고뇌의 빛을 띤 채 중얼거렸다.
“그자에 대해 알고 있다 생각했다. 변한 후에도 파악했다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여전히 알 수 없구나.”
신의 목소리가 홀 가득 고요히 울려 퍼졌다.
“그는 죽음이 피해 가는 자이냐? 아니면 죽음 속에서 부활하는 자일까? 혹은, 처음부터 죽을 수 없는 자이더냐?”
수호자 중 하나가 경악해 대꾸했다.
“그런 인간이 세상에 있을 리 없습니다.”
“하나 그는 죽음을 속이고 내 눈을 속이고 전지全知의 눈을 속였다. 엄연히 그자는 지금 살아 있지 않느냐?”
이것이 세이어가 그동안 움직이지 않은 이유였다. 그자를 벌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 불확정 요소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시 꺼림칙하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지. 그 두통, 지금은 멎은 듯하지만…….’
관자놀이를 누르며 세이어는 인상을 썼다.
갑자기 그가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너희들을 불렀다.”
단상을 내려오며 세이어가 모인 수호자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내가 잠들어 있을 때부터 그자를 보아 왔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
수호자 아크라이트가 겁먹으며 말했다.
“세이어시여, 저희 모두는 아는 것을 모두 고했나이다. 신 앞에서 거짓으로 숨기는 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알고 있다. 너희들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무릇 인간은 스스로 알고 있는 것조차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 알면서도 눈치채지 못한 무의식 속의 정보가 있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보고자 한다.”
무의식의 흐름까지 파악하려면 역시 환영幻影으로 조우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직접 물질 공간에서 대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수호자들은 성역에 발 디딘 것을 심히 감격했겠지만, 세이어 입장에선 그저 필요해서 행한 일일 뿐이었다.
세이어의 시선이 수호자들을 훑었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어 수호자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윽고, 세이어가 말했다.
“이제 알겠다.”
수호자들이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세이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수치를 느끼며 수호자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고민하던 세이어가 다시 옥좌로 돌아갔다. 강철의 왕좌에 앉으며 인류의 신이 말했다.
“어쨌거나, 한 번 더 그자를 만나 보아야겠구나.”
수호자 타세랄이 황급히 물었다.
“누가 보필하오리까?”
예전 움직였을 때 세이어가 대동한 이는 세렐라인과 필레나라는 무명의 여마법사였다. 평생 세이어를 섬겨 온 은의 현자 입장에선 실로 치욕스러운 일, 이번에야말로 신의 보좌 역을 맡길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이어는 그의 기대를 깼다.
“최강의 검사로 족하다. 수호자 바슈탈, 그를 준비시켜라.”
“알겠습니다, 세이어시여.”
속세의 황제가 노예처럼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세이어가 손을 내저었다.
“이제 물러가라. 그대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미처 뭐라 할 틈도 없이 수호자들의 모습이 중앙 홀에서 사라졌다. 강제로 공간 전이를 당한 것이다. 남은 수호자는 오직 세렐라인 한 명뿐.
그녀가 세이어를 향해 물었다.
“아버지여, 이번에야말로 그자가 온당한 죽음을 맞이하겠습니까?”
세이어가 귀엽다는 표정으로 세렐라인을 바라보았다.
“나의 딸아,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은 그자의 죽음이더냐? 아니면 세상의 질서를 되찾는 것이냐?”
세이어가 턱을 괸 채 왕좌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확인’이다. 그자의 생사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2
깊은 밤,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한창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지만 그는 잠을 청하지 못했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바포메트 슈트의 연구도 진행 중이고 불사의 아티팩트에 대해서도 여전히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신성, 세이어가 사용한 그 정체불명의 권능을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역시 그자에 대해 알려면 직접 뛰어드는 게 최고인데…….”
실마리는 있다. 허차원에서 이 세계로 돌아올 때 일어났던 기현상, 차원문을 여는 마법에 우연히 발견된 드림 다이브의 부작용, 그것으로 그는 잠시나마 세이어의 기억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초장거리, 특정 대상 한정, 드림 다이브 주문이라? 10서클의 차원 결계 술식을 응용하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사실 술식은 대충 완성이 되었다.
문제는 마력이었다.
언제 세이어가 나타날지 모르는 만큼 레펜하르트는 현재 함부로 10서클 마법을 써 사방신의 유물 마력을 낭비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시험해 볼 수 없으니 마냥 뇌내 시뮬레이션으로 술식 연동만 시키는데, 이걸로는 역시 불확정요소가 너무 많다.
“쩝, 그렇다고 10서클 마법을 예비 실험도 없이 대뜸 발동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머릿속이 복잡해 잠만 못 이룰 뿐이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는 중이었다.
문득 그의 기감에 뭔가가 잡혔다.
‘어? 이니야? 이 야밤에 웬일이지?’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레펜하르트 님? 들어가도 될까요?”
별생각 없이 레펜하르트가 대답했다.
“네, 들어와요.”
이니야가 방 안에 들어섰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복잡한 머릿속이 싹 날아가 버렸다!
‘허억!’
전신에 얇은 비단옷만 걸친 이니야가 눈앞에 있었다. 은은히 속이 비치는 비단옷 사이로 매끄러운 육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심지어 검은 속옷마저 아련히 보일 정도다.
굴곡 있는 가슴을 부끄러운 듯 한 손으로 가리며 그녀가 살짝 입술을 혀로 핥았다. 달빛 아래 붉은 입술이 더더욱 붉게 물든다.
“이, 이니야?”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 의도가 확연히 보이는 노골적인 복장이다!
뭐, 저 복장을 한 이니야도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닌 듯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란의 조언을 되새기며 재차 각오를 다진다.
‘밤에는 요부! 밤에는 요부!’
애써 뻔뻔하게 이니야가 레펜하르트에게 다가갔다.
“잠이 오지 않으신 듯해서요. 이야기나 나눠 볼까 해서 왔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복장이 아닌데? 아무리 봐도 이야기보다는 다른 것(?)을 나누고 싶어 하는 복장이다.
그러나 이니야에겐 실망스럽게도 이 요염한 모습에도 불구, 레펜하르트는 침착하게 반응했다.
“아, 예. 그렇군요…….”
비록 팔팔한 20대 후반의 모습이라지만 그의 머릿속은 50대 중늙은이인 것이다. 아리따운 여인이 저런 모습으로 있어도 흥분하기엔 나이를 너무 먹었다…….
……일 리가 있나! 원래 사내란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그 짓(?)을 하고 싶어 하는 종자들이다! 당연히 심장이 벌렁벌렁 뛰지!
여기서 레펜하르트가 눈 돌아가지 않은 것은 그저 상황이 너무 뜬금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솔직히 좀 무섭기는 하지.
이니야가 침상 한쪽에 걸터앉았다. 자리를 마련해 주며 레펜하르트가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은 복장이 좀 유별나군요.”
온갖 표현을 고르다 겨우 나온 단어가 저 ‘유별’이었다. 이 정도는 각오했는지라 이니야도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일국의 왕비가 왕의 침실로 향하는데, 자연스러운 복장이 아니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시녀들이 골라 줬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시녀들이 골라 주긴 했다.
나란히 침상에 앉아, 레펜하르트와 이니야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문득 궁금해져서요. 레펜하르트 님은 전생 때 그분과 아이가 있었나요?”
일부러 시리스란 단어를 피하는 이니야였다. 물론 둔한 레펜하르트는 아무것도 못 느끼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실지 모르겠는데, 원래 인간과 엘프는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전생 때 시리스와의 사랑의 결실을 남기고 싶어 한동안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엘프와 인간은 성장 속도가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애당초 수정이 되질 않으며 마법으로 어떻게 수정까지 성공시키더라도 자궁에서 아기가 성장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이의 성장 속도까지 마법으로 해결해 보려는 시도도 했지만, 거기까지 태아를 개조해 버리면 이미 둘의 아이가 아니라 호문클루스 수준이 되어 버린다. 결국 레펜하르트도 포기한 일이었다.
이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평범한 경우엔 그렇죠. 그래도 레펜하르트 님 정도라면…….”
순간 말을 끊고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잠깐? 평범한 경우요? 그럼 평범하지 않을 경우엔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두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다급하게 질문을 잇는다.
“혹시 이니야는 방법을 안다는 뜻인가요?”
이니야는 잠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슬쩍 분위기나 좀 잡아 보려고 한 소리인데 어째 이 사내, 눈동자가 완전히 학구열에 불타고 있다?
‘어? 이게 아닌데?’
어쨌거나 물었으니 대답은 해야지.
“에, 혹시 모르세요? 전 인간에게 들은 이야기였는데, 이거?”
인간인 레펜하르트가 모를 줄은 몰랐다. 당황한 이니야를 레펜하르트가 채근했다.
“어떤 방식입니까?”
‘아아, 마법사 모드로 돌아가 버렸다아~.’
속으로 실망하며 이니야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내를 유혹하는 요부에서 무武를 추구하는 오러 유저로 돌아간다.
“원래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아이가 안 생기는 건 서로의 자궁이 수명이 다른 상대의 아기를 임신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애초에 잉태되지도 않는 거고.”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이게 여성 쪽이 오러를 다룰 수 있으면 방법이 있어요.”
임신을 담당하는 여성이 오러 유저일 경우, 자궁을 오러로 감싸서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미의 생명기가 아이와 소통되며 별문제 없이 잉태가 되고, 자연스럽게 자궁 내에서 발육이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임신 기간 내내 여성 쪽에서 오러 운용을 유지해야 한다는 문제는 있지요. 깨어 있을 때는 물론 자고 있을 때도.”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듣고 보니 꽤 그럴듯했다. 아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전생 때 왜 못 알아차렸는지도 알 것 같았다.
‘저 방식이면 마법으로는 구현이 불가능하겠군. 온전히 오러라는 생명기의 특성에 기대는 방식이니.’
이니야가 배시시 웃었다.
“하긴, 저도 우연히 들은 이야기였으니까요.”
사실 이니야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예전, 인간 세상을 떠돌 때 만난 한 오러 유저 덕이었다.
테이칸 왕국 출신인 그는 특별히 괴상한 성벽이 있었다. 인간뿐 아니라 전 종족에 자신의 씨를 뿌리겠다는 희한한 변태 망상을 지닌 이였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 말고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하필 또 테이칸 왕국 출신이냐?’
그 유명한 소아성애자 변태 오러 유저 란타스도 테이칸 왕국 출신이었다.
‘혹시 테이칸 왕국이 터가 안 좋은가?’
어쨌거나 그 사내는 결국 연구 끝에 방법을 알아낸 모양이었다.
“남자 쪽이 아니라 여자 쪽이 오러 유저여야 가능하다는 걸 알아채고 절 노렸었죠. 강간한 다음 세뇌해서 임신을 시키겠다며…….”
분노해 레펜하르트가 두 눈을 치켜떴다.
“그런 썩을 놈이! 그놈을 그냥 놔두었습니까?”
“죽여서 묻었는데요? 묻은 장소는 기억 안 나지만.”
“…….”
너무 태연하게 대꾸해서 레펜하르트는 순간 ‘저런! 그런 놈을 용서하다니!’라고 대꾸할 뻔했다.
‘저런 섬뜩한 말을 잘도 자연스럽게 하네.’
하긴, 생각해 보니 위니스도 그랬다. 이니야와 위니스가 겹쳐 보이며 묘한 그리움이 가슴 한편을 차지한다.
“으음…….”
표정이 바뀐 레펜하르트를 보며 이니야가 눈을 빛냈다.
‘어머?’
이유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일변했다?
기회는 잡으라고 있는 것. 몸을 꼬며 이니야가 교태 어린 음성을 흘렸다.
“그럼 어디, 실험해 보시겠어요, 레펜하르트 님?”
당황한 레펜하르트가 더욱 세차게 눈을 껌벅였다.
실험? 무슨 실험?
“……예?”
당황하며 레펜하르트가 말을 주워 넘겼다.
“아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방법도 문제점이 꽤 있군요. 여성 쪽에서 자나 깨나 오러를 유지하며 운용해 자궁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로 고도의 오러 운용이라면 어지간히 강한 오러 유저라도 힘들 텐데요?”
이니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어머나, 저 그거 돼요.”
“…….”
레펜하르트는 침묵했다. 떠올려 보니 이니야는 위니스이던 시절, 겨울 내내 오러로 얼굴 형태를 고정시킨 채 살았었다. 잠들 때도 그 형태가 풀린 적이 없을 정도다. 그녀에겐 저 정도 오러 유지도 별로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아니, 그렇지만 그래도 이건…….”
“……레펜하르트 님?”
이니야가 침상 위를 살살 기어 레펜하르트 곁으로 향했다.
살금살금,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허리를 쭉 펴고 그녀가 다가온다. 야릇한 눈빛이 밤하늘의 샛별처럼 빛난다.
산 같은 거구의 사내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아니, 저기…….”
레펜하르트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뭔가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동시에 이래서 안 될 이유가 뭐 있냐는 생각도 고개를 쳐든다.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마주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레펜하르트 님!”
문이 벌컥 열리며 시리스가 티 세트를 들고 쳐들어왔다.
‘어마나!’
이니야가 화들짝 놀라 잽싸게 침상 저편으로 폴짝 뛰었다.
“아, 시리스?”
레펜하르트는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리스가 다가오는 것조차 못 느낄 정도로 긴장한 것이다.
“무슨 일이야?”
“잠을 못 청하시는 것 같아서 차를 타 왔어요. 머리를 맑게 해 주는 차래요.”
생글생글 미소 짓는데 어째 눈은 웃고 있지 않다. 차를 따르는 시리스를 보며 이니야가 눈을 매섭게 떴다.
‘요년이 요 며칠 잠잠하더니 크리티컬을 날리려고 이랬구나!’
우아하게 차를 따라 레펜하르트에게 가져가며 시리스가 콧방귀를 켰다.
‘자격이 있는 것도 알고, 인정도 하겠지만…….’
이미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시리스였다.
이미 이니야를 인정하기도 한 시리스였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직 여기까지는 인정 못 해!’
잠깐 풀어 줬더니 그새 저런 옷 입고 침상까지 기어올라 갔어? 시리스는 두 눈에 불을 켰다. 적어도 아직, 저기까지 허락할 생각은 결단코 없다!
“흥!”
“흥흥!”
아리따운 두 미녀 엘프가 서로를 노려보더니, 이내 외면하고 입술을 삐죽인다.
그 모습에 레펜하르트는 눈을 벅벅 긁었다.
‘기분 탓인가? 왜 시누이가 며느리 구박하는 걸로 보이지?’
둔한 사람이라고 정말 아무것도 눈치 못 채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기가 뭘 눈치 챈 건지 못 알아챌 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리스가 태연하게 찻잔을 건넸다.
“레펜하르트 님, 차 드세요.”
“아, 고마워.”
어쨌거나 덕분에 미묘하던 분위기가 싹 가라앉았다. 안도하며 레펜하르트는 찻잔을 들었다.
“잘 마실게, 시리스.”
한 모금 마시며 아쉬움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쩝…….”
그리고 새삼 당황했다.
‘가만, 내가 뭘 아쉬워하는 거야?’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흔들며 상념을 털어 냈다. 모르겠다. 차나 마시고 후딱 자자.
그렇게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건?’
공간 저편이 일렁인다. 카탈라 가드 서남쪽이다.
‘거리는…… 4킬로미터 정도인가?’
조금 늦게 이니야와 시리스도 표정이 굳었다.
“어?”
“레펜하르트 님?”
갑작스레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존재를 숨기지도 않았다. 오러 유저나 대마법사급이라면 누구나 저 기운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시리스가 혀를 내둘렀다.
“아예 정체를 숨기지도 않네요?”
진지한 얼굴로 이니야가 물었다.
“이게 그자인가요?”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세이어!”
☆ ☆ ☆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역시나, 밤이고 낮이고 이만 득득 갈고 있던 근육 노인장이셨다.
“나-타-났-구-나- 이- 썩-을- 놈!”
카탈란 가드 전역에 광포한 음성이 떨쳐 울린다. 황금빛 유성이 수 킬로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가로지른다.
밤하늘을 꿰뚫고 제라드의 거구가 단숨에 대지를 직격했다. 폭음과 함께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착지한 제라드의 눈앞에, 잘생긴 미청년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또 그대인가?”
오러를 극도로 끌어 올리며 제라드가 전투 자세를 잡았다.
“한 번 더 붙어 보자, 이노옴!”
주먹을 겨눈 제라드를 향해 미청년, 세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대처럼 전투를 즐기지 않는다. 이 자리에 온 것은 그저 확인을 위함이니…….”
세이어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귀찮은 전투는 미루어야겠구나.”
그들이 서 있는 대지 위 상공, 그곳에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구멍이 이내 한 사람을 토해 냈다. 고집 센 인상의 검 쥔 노인, 검성 바나텔이었다.
“허허, 정녕 신의 이적이로다.”
주위를 둘러보며 바나텔이 중얼거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 그는 제국 수도, 그것도 황궁 안에 있었다. 그런데 한 발자국 움직이니 어느새 대륙 반대편에 와 있는 것이다.
제라드의 안색이 굳었다.
“바나텔?”
검을 뽑아 들며 바나텔이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지, 제라드?”
세이어와 바나텔을 번갈아 보며 제라드는 인상을 썼다. 하필 이 자리에 숙적이 나타나다니? 아니, 상황을 보면 애초에 세이어가 일부러 데려온 것으로 보인다.
“죄악의 후손이여, 그대의 존재는 내게도 제법 위협이 되더구나. 그리하여 이 자리를 마련했다.”
태연하게 세이어가 손짓했다.
“바나텔. 내 귀찮음을 털어 내도록.”
“명하신대로 행하겠나이다, 세이어시여.”
정중히 목례한 뒤 바로 바나텔이 제라드 앞에 섰다. 가공할 붉은 오러가 바나텔의 전신을 휘감았다. 제라드의 눈동자가 더더욱 흥분으로 불타올랐다.
“좋아, 이것도 나쁘지 않지! 여기서 붙을까?”
바나텔은 고개를 저었다.
“위대한 신의 어전이다. 자리를 옮기고 싶군.”
“누가 입맛대로 장소 고르게 해 준대냐?”
제라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세이어를 피해 다른 장소로 향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 바나텔이 시큰둥하게 손가락질을 했다.
“싫다면 저기서 싸울까? 부술 것이 참 많아 보이는군.”
그가 가리킨 곳은 카탈란 가드, 그것도 건물과 탑이 빽빽이 세워진 중심부였다. 수많은 병력과 민간인이 모여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제라드가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윽…….”
제라드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바나텔이 몸을 날렸다.
“와라! 제라드!”
붉은 궤적을 남기며 바나텔이 카탈란 가드 쪽으로 날아갔다. 정확히 말하면 오러를 분출해 그 추진력으로 점프한 것이지만, 발 안 딛고 수백 미터를 갈 수 있으면 그건 이미 비행이다. 요새 쪽으로 향하는 바나텔을 보며 제라드가 당황했다.
“저, 저 자식이!”
세이어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가거라. 아니면 숙적을 등 뒤에 놓고 나와 겨루겠느냐?”
카탈라 가드와 세이어를 번갈아 본 제라드가 바드득 이를 갈았다.
“제길, 그런 바보짓을 할 순 없지.”
카탈란 가드의 다른 이들에게 바나텔을 맡기고 제라드 자신이 세이어를 상대하는 선택지도 있기는 하다. 현재 카탈란 가드엔 안타레스의 최정예가 대부분 집결되어 있다. 아틸카나 러스, 스탈라 등이 손을 잡으면 설사 제라드 자신이라도 승리를 확신할 순 없다. 충분히 저들끼리도 바나텔을 상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상대는 할 수 있겠지. 상대는…….’
하지만 그 경우, 바나텔은 일부러 카탈란 가드 곳곳을 헤집으며 최대한 요새 파괴를 시도할 게 뻔했다. 바나텔이 기다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라드인 것이다.
여기선 제라드가 직접 가야, 부수적인 피해 없이 둘이서 싸울 수 있다.
결론을 내린 제라드가 아쉬워하며 등을 돌렸다.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설욕을 할 이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마침 저 하늘 위에서 또 하나의 황금빛 유성이 날아오고 있었다.
“사부!”
레펜하르트가 양팔에 이니야와 시리스를 안은 채 비행 주문으로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제라드가 호통을 쳤다.
“제자야, 후딱 처리하고 오마. 잘 붙잡고 있어라!”
제라드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두 줄기 황금빛 유성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멀어지는 제라드 대신 레펜하르트가 두 여인을 안고 사뿐히 착지했다.
땅에 내려서자마자 이내 이니야와 시리스가 검을 뽑아 세이어를 겨누었다. 오러와 엘리멘트를 끌어 올리며 두 여인이 레펜하르트의 좌우를 호위하듯 섰다.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며 세이어가 싸늘하게 웃었다.
“역시 살아 있었군, 시공 회귀자여.”
☆ ☆ ☆
수만의 병력이 충돌해 무수한 사상자를 낸 카탈란 가드 전방의 광활한 들판.
깊은 밤이지만 만월이라 제법 밝았다. 들판 여기저기에 아직 미처 처리 못 한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 죽음의 공간 속에서 세이어와 레펜하르트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힐끔 제라드가 날아간 곳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검성을 끌고 왔나? 그래도 사부는 두려운가 보군?”
의외로 세이어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틀림없는 강자다. 그의 강함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움이라면, 두려워하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내용과 달리 말투에선 ‘귀찮다’ 이상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오만한 태도, 하지만 그에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에서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세이어를 처음 접한 이니야가 자기도 모르게 치를 떨 정도였다.
‘맙소사, 이런 괴물이 세상에 있을 수가 있나?’
유심히 레펜하르트를 보던 세이어가 문득 물었다.
“어떻게 살아난 거지?”
레펜하르트가 대충 대꾸했다.
“아, 쉽게 죽을 팔자가 못 되어서 말이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상대에게 정보를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니야도 시리스도 굳게 입을 다물었다.
두 엘프 여인을 바라본 세이어가 인상을 썼다. 역시 세이어에 대한 신앙이 없는 이는 실제로 대면한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