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장 역습은 너희만 하는 것이 아니다!
1
카를과 마흔 명의 실베릭 나이츠는 사흘간 지옥을 노닐었다.
나흘째 되는 날, 그들은 비로소 천국의 문을 열었다.
“으어어어…….”
쾌감과 한탄과 신음과 열락(?)마저 뒤섞인 표정으로 카를은 볼일 끝난 천국의 문을 닫았다. 화장실 앞에 서서 기다리던 틸라가 안심하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좀 사람 같네요, 당신.”
솔직히 지난 사흘간은 땀 흘리는 시체를 보는 것 같았다.
카를이 희극 배우처럼 뇌까렸다.
“아아, 틸라. 폐하가 살아 돌아오신 것과 안타레스가 승리한 것을 다 합쳐도 지금 이 순간이 더 기쁘구려.”
“농담처럼 말하지만 진담이죠, 지금?”
피식거리는 틸라를 보며 카를은 이를 갈았다.
“하여튼 폐하는 정말 못 말리겠단 말이야. 아니, 미리 언급이라도 좀 해 주었으면 오죽 좋은가?”
지난 사흘은 실로 카를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만약 A.M.P 쇼크웨이브의 효과가 하루만 더 지속되었다면 레펜하르트는 충성스러운 재상과 마흔 명의 기사 대신 분노에 불타는 마흔한 명의 반역자를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그리 힘들어? 잠깐 마갑 해제하라고 말해 주는 게 그리 힘드냐고?”
구시렁대는 연인의 등을 떠밀며 틸라가 말했다.
“자 자, 어쨌거나 다시 업무로 돌아가셔야죠, 재상 나리.”
“그래야지. 폐하께선 어디 계시오?”
“물론 폐하께선 오늘도 집무실에 계시죠.”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사랑하는 왕·비·님이랑.”
☆ ☆ ☆
누군가가 아티팩트 안에 갇혀 전전긍긍하는 동안, 이니야 역시 두문불출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돌아왔다지만 현재 안타레스의 여왕은 분명 이니야다. 전후 처리며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이니야는 그 모든 책임을 방기한 채 사흘 내내 벽만 보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멍하니 주저앉아 넋 나간 목소리로 뇌까린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그러다가 정신없이 얼굴을 감싼다.
“아웅, 내가 거기서 왜 그런 짓을…….”
스무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백쉰 살 가까이 된 주제에 벌건 대낮에 주저앉아 사람들 앞에서 펑펑 울어 젖혀 버렸다.
“나잇살 처먹고 무슨 주책이래…….”
생각하면 할수록 낯 뜨거워 견딜 수가 없다.
“미쳤지, 미쳤어…….”
나오느니 한숨이요, 떠올리니 부끄러움뿐이다.
자기혐오라는 망망대해에 빠져 이니야는 사흘째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걱정이 된 플로라며 틸라가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려 했지만 워낙 조난 구역이 깊어 쉽게 구조가 되질 않았다.
결국, 한때 그녀의 부관이었던 세르펠까지 나섰다.
“이니야 님.”
허락도 받지 않고 대뜸 방안으로 들어온 저 엘프 사내를 향해 이니야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나가, 세르펠.”
눈빛만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살벌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세르펠은 태연했다.
“나갈 겁니다. 할 말만 하면요.”
“듣기 싫어, 나가.”
“별로 길지도 않습니다. 그냥 흘려들으세요.”
맹수의 살기를 풀풀 풍기는 이니야를 눈앞에 두고도 세르펠은 천연덕스럽게 서 있었다. 미간을 찡그리다 이니야는 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옛 부관은 원래 저런 놈이었다. 분명 충성스럽긴 충성스러운데 기어오르기도 잘 기어오르는…….
‘그렇게 패고 또 패도 안 바뀌던 놈이 이제 와서 바뀔 리가 없지.’
포기하고 이니야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말해. 그리고 나가.”
세르펠이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뭐가 문제인 겁니까?”
“뭐가 문제냐니!”
독 오른 고양이처럼 이니야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질질 짜는 창피한 모습을 동네방네 대놓고 보여 버렸는데?
회상하고 나니 또다시 눈앞이 암담해진다.
“아우, 이제 무슨 낯으로 레펜하르트 님을 뵙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일족의 수장을 보며 세르펠은 온화하게 웃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습니다, 이니야 님.”
“괜찮다고?”
“네, 아무 문제 없어요.”
“아무 문제가 없어? 그렇게 부끄러운 꼴을 보였는데도?”
세르펠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니야 님은 원래 부끄러웠어요. 예전 폐하 쫓아다닐 때부터 이미 스티리아 일족은 남들 보기 창피해서 머리도 못 들고 살았습니다. 뭘 이제 와서…….”
“…….”
이니야는 부관을 노려보았다. 평소에도 세르펠이 말을 고르지 않는 버릇이 있긴 했지만 오늘은 좀 도가 지나치다.
하지만 세르펠이 저따위 말투로도 수십 년간 이니야를 보필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남들 보기엔 부끄러워도 이니야 님은 솔직하게 레펜하르트 님을 대했지요. 레펜하르트 님도 그런 순수한 이니야 님의 모습을 계속 봐 왔습니다. 그런 폐하께서 이제 와서 이니야 님을 창피하게 여길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세르펠이 단언했다.
“폐하의 눈엔, 이니야 님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을 텐데요.”
“…….”
이니야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듣고 보니 묘하게 그럴듯했다.
“아니면, 지난 반년간의 모습을 보이는 쪽이 나았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차가운 피가 흐르는 철혈의 여왕이라 불리시던 그 모습을요?”
이니야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솔직히 그녀도 그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이니 했을 뿐이지.
세르펠이 부드럽게 웃었다.
“자, 일어나세요. 그리고 폐하를 뵈러 가세요.”
이니야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세르펠이 오빠처럼 그녀를 다독였다.
“사실은 그분이 보고 싶지요?”
“……응.”
못 이기는 척 이니야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물론 본인 딴에 천천히지, 세르펠이 보기엔 참으로 오러 유저다운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그, 그럼 나 레펜하르트 님 뵙고 올게.”
“예, 다녀오세요.”
어느새 환한 표정이 된 이니야가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에 세르펠은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문득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멀쩡하던 분이 어쩌다 저렇게 망가졌을까, 쯔쯔.”
그러나, 한숨과 동시에 아빠 같은 미소도 지어 보인다.
“그래도 저게 더 낫지? 예전의 모습보다는…….”
☆ ☆ ☆
반년 전, 여왕이 된 이니야를 보며 카를은 생각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돌변할 수가?’
반년 후, 카를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대사를 읊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돌변할 수가!”
카탈란 가드를 되찾은 뒤, 안타레스의 수뇌부 대부분은 요새에 기거한 채 전후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역시 지난 사흘간 자신의 집무실에서 먹고 자며 이런저런 업무에 열중이었다. 반년이나 자리를 비운 데다 이니야가 공국 행정을 한차례 싹 개편한 터라 파악해 두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흘간 방에 틀어박혀 있던 이니야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녀가 레펜하르트 곁에서 업무 인수인계를 도우니 한결 일이 편해졌다.
뭐, 그것까진 좋은데…….
“레펜하르트 님, 아……!”
“아…….”
집무실 한구석에서 서류를 작성하다 말고, 카를은 문득 눈앞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서류를 들여다보는 거구의 근육질 사내 곁에 보랏빛 머리의 엘프 미녀가 찰싹 달라붙어 과일을 먹여 주고 있었다.
“맛있으세요?”
“……맛있네요.”
“하나 더 깎을게요!”
사과 하나를 뚝딱 해치운 레펜하르트를 마냥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니야가 다른 사과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과도 대신 손가락 하나를 세우더니 블레이드 오러를 발동한다.
파앗!
은빛 오러 위로 사과가 맹렬히 회전했다. 사과 하나가 껍질을 홀랑 벗는 데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벗긴 껍질이 무슨 유리처럼 투명하기 그지없어, 남은 속살이 전혀 없다. 블레이드 오러를 정밀 제어해 사과 표면 곡율에 정확히 맞춰 깎은 것이다. 실로 사람의 솜씨가 아니었다.
질린 카를이 혀를 내둘렀다.
‘……진짜 고수는 고수다.’
하지도 못하는 요리로 사기 치느니 자신 있는 분야로 밀어붙이는 이니야였다. 정작 레펜하르트는 별생각 없이 받아먹고 있는 듯했지만.
사과를 아작아작 씹다가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기, 이니야.”
방긋방긋 웃으며 이니야가 대답했다.
“네, 레펜하르트 님.”
어색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여기서도 연극을 계속할 필요가 있습니까?”
현재 이니야가 이렇게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니야가 안타레스의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레펜하르트의 차기 왕비였다는 공국의 발표 덕분이다. 그렇기에 안타레스의 모든 이들이 그녀를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실 그것은 거짓이며 단지 레펜하르트의 부재를 메우기 위한 것임이 밝혀진다면?
일국의 왕이라면 무릇 그 행실과 발언에 일국의 무게가 실리는 법이다. 국민들에게 왕비의 존재를 공표해 버린 이상, 거짓임이 알려지면 국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것이다. 작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큰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의심암귀를 심게 되니까.
안타레스를 구하기 위해 이니야가 왕비인 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레펜하르트는 화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까지 안타레스를 보호한 그녀에게 그저 미안하고 또 감사했을 뿐이다.
그러니 당분간 이니야를 진짜 왕비처럼 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처녀의 몸으로 오명을 각오하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했는데 어떻게 레펜하르트가 이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감사하고, 또 미안해할 뿐이었다.
그래서 현재 이니야는 대외적으로 레펜하르트의 아내이며, 안타레스의 왕비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왕비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 그것까지는 좋은데…….
“남들 시선 없을 땐 편하게 있어도 됩니다만…….”
“어머? 없다뇨? 카를 재상이 있잖아요?”
“재상은 이미 속사정 다 알잖습니까? 그런데 굳이…….”
뭐, 레펜하르트 딴에는 그녀를 배려하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이니야는 화내지 않았다.
‘낮에는 현모양처, 낮에는 현모양처.’
그저 예전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응답할 뿐.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을 아시나요?”
“알죠.”
“그런 거랍니다. 언제라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려면 이렇게 안 보이는 곳에서도 상황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건 알지만 이니야가 너무 불편할 것 같아서…….”
“전 괜찮아요. 혹시 레펜하르트 님이 불편하신가요?”
“아뇨! 그럴 리가!”
레펜하르트도 엄연한 사내놈인데 이니야 같은 절세 미녀가 입안의 혀처럼 달라붙어 귀엽게 구는 게 싫을 리가 있나?
이니야가 빙그레 웃었다.
“염려 마세요.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레펜하르트도 멋쩍게 마주 웃었다.
“아, 예.”
왠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 들어 카를이 헛기침을 했다.
“험, 허험.”
“아, 재상? 다음 서류가 끝났나?”
“예, 여기까지 검토하시면 됩니다.”
“고맙네.”
서류를 받아 들고 레펜하르트가 진지하게 종잇장을 넘긴다. 다른 서류철을 들고 카를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니야 씨.”
현재 카를이 보는 업무는 레펜하르트의 부활을 알리고 다시 그가 왕이 되었음을 안타레스 전역에 알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그 계획을 위해선 왕비로써 곁에 설 이니야 역시 필요하다.
그래서 그녀를 불렀는데…….
“이니야 씨?”
“…….”
“이니야 씨?”
어디서 개가 짖냐~는 투로 들은 척도 안 하는 이니야였다. 카를이 당황하다가 설마 싶어 다시 불렀다.
“……이니야 왕비님?”
실로 우아한 태도로 고개를 돌리며 이니야가 대꾸했다.
“무슨 일이죠, 카를 재상?”
카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소리 없이 이니야가 눈웃음을 쳤다. 카를이 속으로 외쳤다.
‘이참에 확실하게 기정사실로 굳히겠다는 속셈이로구나!’
그런데 생각해 보면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다. 아니, 오히려 카를로서는 굉장히 지지해야 할 판이다.
‘저 개념 없는 인간, 왕비라도 제대로 맞아야 멀쩡하게 왕 노릇 하겠지?’
이니야의 왕비로서의 능력은 이미 차고도 넘치도록 검증되었다. 카를이 뜨거운 시선으로 응원을 보냈다.
‘Good luck!’
물론 이니야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수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정 모르는 레펜하르트만 멍하니 눈알을 굴릴 뿐이었다.
“……?”
하여튼, 이니야에게 서류를 건넨 뒤 카를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카탈란 가드를 되찾았고 폐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시기도 상황도 좋아요. 슬슬 때가 왔습니다.”
지난 반년간을 떠올리며 카를은 복수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역습해 주어야지요. 저 빌어먹을 제국과 은의 현자 놈들에게.”
2
카탈란 가드를 되찾은 안타레스 공국은 공식적으로 왕의 부활을 알렸다. 여왕이었던 이니야는 다시 왕비의 자리로 돌아가고, 레펜하르트가 안타레스의 유일한 국왕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만방에 선포했다.
그 소식은 빠르게 전 대륙을 강타했다.
워낙 엄청난 뉴스였다. 무려 인류의 신, 세이어의 목소리에 의해 단언된 일인 것이다. 이단자 레펜하르트가 신벌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당혹과 놀라움 속에서 대륙의 눈과 귀가 일제히 안타레스로 쏠렸다.
왕좌를 되찾은 레펜하르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삼국 동맹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바슈탈론, 그라임, 할라인 삼국에 안타레스의 이름으로 전쟁을 선포한다.
전쟁 시작된 지 반년이 넘어서야 선전포고를 하다니, 뭔가 좀 웃기는 상황인 것도 같지만 사실 안타레스 공국은 여태 공식적으로 삼국 동맹을 적대한 적이 없다. 그저 쳐들어오는 공격에 대해 반격했을 뿐이지.
그러나 이젠 명확하게 바슈탈론, 할라인, 그리고 그라임 왕국을 적대 국가로 인정했다. 그들의 무도한 침략을 맹렬히 비난하며, 이 전쟁을 멈추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만약 거부할 경우 어떤 무력시위도 불사할 것임을 확고히 단언했다.
-이 전쟁은 삼국의 진솔한 사과와 배상 없이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전까지 안타레스는 저들의 피가 흐르는 것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을 터이니!
예전 같았다면 그리 큰 반향은 일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 안타레스와 삼국 동맹의 전쟁은 상당히 세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전쟁이었다. 산맥 속에 숨어 간신히 게릴라전으로 연명하고 있던 안타레스군은 그저 망국亡國의 잔당일 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카탈란 가드를 중심으로 반격에 나선 안타레스군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전쟁 초기, 밀리던 시절보다 오히려 더 빠르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바슈탈론 제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구 안타레스 중부 지방.
중부 곳곳에서 안타레스군은 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승승장구하는 안타레스군의 선두엔 수백의 마검사들이 있었다.
“울부짖어라, 트라이어!”
“내뿜어라, 폭염의 숨결이여!”
2미터에 달하는 대검을 휘두르며 적을 참살한다. 가공할 마법이 난무하며 제국군을 죽이고 또 죽인다. 수적으로 우세한 수만의 제국군이 늑대에게 습격당한 양 떼처럼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죽어 간다.
“후퇴! 모두 후퇴하라!”
압도적인 무력을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인간으로 이루어진 안타레스의 새 기사단, 브론즈 나이츠였다.
카를이 사용하는 황금의 갑옷 엘드라드, 실베릭 나이츠의 은빛 갑옷와 마찬가지로 은의 암살자들이 쓰던 마법 갑옷 역시 사흘이 지나자 다시 원 기능을 되찾았다. 원 주인이야 광폭화된 트롤에 의해 싹 몰살당했지만, 자동 수복 기능이 있는 마갑 자체는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원상태로 복귀되었다.
물론 전투 중 망가진 것도 상당했지만 워낙 수가 많았다. 최소 수백에 달하는 가공할 아티팩트가 안타레스의 손에 들어갔다.
마갑들을 손에 넣은 레펜하르트는 그것에 새로운 마법 코드를 입력해 원주인의 정보를 싹 지웠다. 이미 엘드라드나 실베릭 아머를 입수할 때도 한 짓이니 전혀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저, 수백 개나 되다 보니 단순 반복 작업이 하염없이 지루했을 뿐.
브론즈 아머라 명명된 이 고대의 기물은 이후 안타레스 기사단이며 주로 전공을 세운 인간 병사들 위주로 주어졌다. 오크나 트롤은 마갑의 사용을 거부하고, 엘프나 드워프는 정령술과 대지 증폭 등의 고유 기술이 있으니 아무래도 인간이 사용하는 것이 제일 효율이 좋았다.
한때는 인간을 믿지 못해 그들에게 힘을 주는 것을 꺼려하던 레펜하르트다. 그러나 이제는 그도 달라졌다.
지난 반년간 안타레스를 위해 싸워 온 것은 이종족뿐만이 아니었다. 안타레스의 인간들 역시 국가를 위해, 소중한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들에게 종족에 대한 차별 따윈 없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안타레스의 일원이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꾸며, 희망 없는 전투 속에서도 결코 배신하지 않았던 인간들.
살아남은 그들을 보았을 때, 레펜하르트는 솔직히 감격했다.
인간은, 자신의 동족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훌륭한 종족이었다. 엘프나 드워프, 오크나 트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자랑스러운 이들이었다.
그들 중 뛰어난 이들을 가려 뽑아 브론즈 아머를 수여했다.
브론즈 아머는 왕년 차탄 공국의 자랑이었던 제플린 나이츠와도 맞먹는 강력한 아티팩트, 그런 마갑이 무려 수백이다. 단순 계산으로만 치면 오러 유저가 백 명이 넘게 생겨난 것이나 다름없단 소리다.
그 강력하던 바슈탈론 제국군은 처참한 패배 속에서 그저 끝없이 후퇴만을 해야 했다.
안타레스 남부와 북부를 제압하고 있던 할라인과 그라임 왕국군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안타레스가 새롭게 손에 넣은 전력, 광폭화된 트롤병.
수백의 트롤 광전사를 앞세워 안타레스군이 돌진한다. 전투라면 이골이 난 안타레스의 정예 중 정예들, 그 사이사이에 특이한 창을 든 드워프들이 있다. 은의 암살자가 쓰던 마탄창을 든 드워프들이다.
“마탄 발사!”
“발사!”
기동성은 없지만 한자리에 주저앉아 버티는 것은 전문인 드워프들, 그들의 전법은 마탄병대가 쓰던 전법과 유사점이 있었다. 손쉽게 새로운 병기에 적응하고 전장 요소요소에 투입되어 극대화된 효율을 보였다.
탕! 타타타탕!
폭음과 함께 갑옷도 방패도 버티지 못하는 가공할 마탄이 쏟아지면 그 사이로 강력한 파괴의 섬광을 쏘아 내는 엘프 전사들이 돌진한다.
“섬광의 검!”
몸이 날래고 민첩한 엘프 전사들의 유일한 약점은 파괴력, 은의 암살자들이 쓰던 고대 아티팩트는 그 부족한 부분을 메워 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반격에 나선 안타레스의 강력함은 전투 중에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었다.
“블링크.”
짧은 시동어와 함께 어둠 속에서 다수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엘프 중에서도 암살에 특화된 스티리아 일족, 그들 중 최정예가 블링크 부츠를 이용해 야간의 진지를 기습한다. 간단히 진지의 중심까지 들어가 지휘관의 목을 따고 다시 허공 속에서 모습을 감춘다.
광전사 트롤병, 현세에 있을 수 없는 가공할 수백의 아티팩트, 거기에 전쟁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안타레스의 병사들까지.
현재 안타레스군의 전력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반면 삼국 동맹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카탈란 가드라는 지리적 이점을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걸포드와 키린트, 폴스타 후작이며 태양탑의 마법사 제이드 등 상당수의 강자들도 전사했다.
승리를 확신하고 투입한 수많은 인재를 대부분 잃은 삼국 동맹은 심각하게 전력이 떨어져 있었다. 사기는 바닥을 기고 세이어의 가르침은 의심받으니 군기 역시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상태다.
역습에 나선 지 채 며칠 되지도 않아 안타레스는 빼앗긴 영토를 절반 이상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전략을 짠 카를조차도 기가 막힐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카탈란 가드를 되찾으면 반격할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보고서를 훑어보며 카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수월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무리 트롤병의 힘이 있어도 최소 석 달은 걸릴 거라 봤는데…….”
레펜하르트가 실실 웃었다.
“다 은의 현자 놈들 덕이지. 하필 내 앞에 저런 엄청난 아티팩트들을 수백 개씩 던져 주다니, 쯧쯧.”
은의 현자가 괜히 잘난 척 고대 기물 바리바리 싸 들고 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밀리진 않았을 터다.
“딱히 그들을 어리석다고 할 수도 없죠. 까놓고 말해서 그 마법은 진짜 반칙입니다.”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카를은 혀를 찼다.
천지창조 때도 느낀 것이지만, 정말이지 레펜하르트가 개입하면 전쟁이 너무 괴상해진다. 솔직히 전략가 입장에선 좋게만 느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있는 전력을 쓰지 않을 수도 없지 않나?”
“뭐, 그건 그렇죠.”
카를이 보고서를 정리하며 화제를 바꿨다.
“여하튼 이걸로 전력적인 우위는 확고히 다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외교적 부분이군요.”
레펜하르트가 근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크로방스와 바실리를 설득할 수 있을까? 누가 뭐라 해도 세이어는 인류의 신이며, 저 두 나라 역시 인류의 왕국일세.”
지금도 크로방스와 바실리 왕국은 갑론을박을 계속하고 있다. 안타레스와의 동맹을 중시할지, 아니면 세이어의 뜻에 따를지. 레펜하르트가 부활하며 다시 친안타레스 파가 득세하긴 했지만 여전히 국론을 하나로 모으진 못하는 중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를이 음흉하게 웃었다.
“믿고 싶어 하는 이에게, 듣고 싶어 하는 소릴 들려줄 생각입니다.”
☆ ☆ ☆
카를은 크로방스 왕국에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안타레스의 뜻을 전달했다.
“동맹의 이름을 걸고, 형제국 크로방스에게 안타레스가 원조를 요청합니다.”
당연히 크로방스 정부는 애매한 답변을 내놓았다.
“인류의 신께서 내린 말씀이 있으니 쉽게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사신의 입을 빌어, 카를이 크로방스의 국왕과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진정 세이어께서, 위대한 인류의 신께서 한낱 평범한 인간일 뿐인 우리들의 머릿속에 하나하나 일일이 임하시어 그 뜻을 전달했다고요?”
친안타레스 파도 반안타레스 파도 다들 조금씩은 의심해 보았던 그것, 카를은 그 부분을 교묘히 파고들었다.
“정말 당신들은 그것이 세이어의 말씀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겁니까?”
전 대륙에 울려 퍼진 세이어의 목소리, 세이어의 신관이나 신도뿐 아니라 각국의 중추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었던 꿈결 같던 신의 말씀.
그것은 분명 성스러운 경험이었다.
만약 소수의 몇몇만이 그 음성을 들었다면 선택받았다는 감동 속에 세이어의 이름을 찬양했으리라.
그러나 너무 많은 인간이, 너무 흔하게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위대한 신의 목소리가 그리도 쉽게 들린다면 대체 신관은 왜 있으며 교황은 왜 있는 겁니까? 신의 말씀이 그렇게 아무나 접할 수 있을 정도로 하찮은 것이었습니까?”
카를은 정확하게 그 부분을 꼬집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그렇게 신의 말씀이 대량생산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만?”
모두가 입 밖으로는 내지 않지만 한 번씩은 떠올려 보았던 그 부분을.
“신께선 굽어살피시는 분이지, 직접 떠드는 분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귀에 대고, 은밀히 속삭이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 유혹하는 악마. 세이어의 교전에도 이리 나와 있지 않던가요?”
너무도 그럴듯해 차마 무시할 수가 없는 의문이었다.
“신의 음성이 싸구려처럼 마구 퍼졌다는 것과, 세이어 교단이 신의 뜻을 거역하고 기묘한 술수를 썼다는 것.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그럴듯하다고 보십니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문에 크로방스의 귀족들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멀리, 카탈란 가드에 앉아 카를은 키득키득 웃었다.
세이어라 자칭한 그자가 진짜 인류의 신인지 아닌지는 사실 카를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쪽이건 상관도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저렇게 믿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리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원래 기적이란 건 함부로 남발하는 게 아니거든?”
안타레스의 사신은 크로방스뿐 아니라 바실리 왕국에도 향했다. 그곳에서도 카를은 사신의 입을 빌어 말했다.
“여러분은 여신의 기적을 보셨지요?”
바실리 왕국은 전통적으로 필라넨스 교단이 득세한 곳, 그리고 안타레스에 임한 여신의 기적에 가장 찬동한 국가이기도 하다.
“그 아름다운 이적을 어찌 잊을 수 있겠소?”
바실리 국왕은 힘없이 대꾸했다. 그 여신의 기적 때문에 바실리 왕국은 아직도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다.
“예,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었지요.”
실은 레펜하르트 짓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카를은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그렇다면, 아라난 그라드와 오크라트에 임한 세이어의 기적도 보셨겠지요?”
천연덕스럽게, 현재 바실리 왕국이 느끼는 모순을 정확히 짚는다.
“그 끔찍한 참사가 정말 신의 기적이라는 겁니까?”
필라넨스 여신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아름다운 기적을 선보였다.
반면, 인류의 신이라 주장하는 저 정체불명의 존재는 기적을 내린 게 아니었다. 그저 끔찍하고 압도적인 파괴만을 보였다.
“여러분은 정녕 그것이 신께서 행하신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저 자비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참혹하기 그지없는 순수한 파괴 행위가?”
단 한 방에 도시를 지우고 수십만의 생명을 불태워 버리는 존재를 사람들은 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보통 악마라 부르지요.”
크로방스와 바실리, 양국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쉽게도 들려온 신의 목소리.
자비심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신의 기적.
일단 피어오른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갈 뿐이다.
저게 정말 신의 목소리인가?
저게 정말 신이 할 법한 일인가?
☆ ☆ ☆
“진짜…… 기적은 함부로 남발하는 것이 아니로군.”
상황을 보고받은 레펜하르트는 씁쓸해하며 중얼거렸다. 전생 때 카르사스 대왕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마왕으로 몰고 갔는지 절실히 이해가 갔다.
뭐, 카를이야 전혀 사정을 모르니 태연하게 보고를 이어 가고 있었다.
“크로방스와 바실리 두 왕국이 공식적으로 삼국 동맹군의 행위를 비난하고 안타레스와의 동맹을 되살렸습니다.”
카를은 세이어를 믿는 인류 전부를 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은의 현자, 그리고 세이어의 가르침 중에서도 안타레스를 적대하는 부분만을 교묘히 도려내 공격 범위를 좁혔다.
안타레스의 적은 인류의 신이 아니다.
나쁜 것은 그저 그릇된 가르침을 믿는 이들뿐이다.
위대한 신의 뜻을 곡해한 제국과 세이어 교단만이 안타레스의 적일 뿐, 어디까지나 대륙의 왕국과 공존할 것이다.
카를의, 안타레스의 주장은 곧 대륙 전역에 퍼졌다. 상당한 숫자가 그 뜻에 동조했다. 세이어 교단이 기가 막혀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리 효과는 없었다.
확실히, 저 주장은 너무 그럴듯했으니까.
모든 상황을 손 안에서 쥐락펴락하며 카를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군요.”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어 레펜하르트로선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군, 카를 재상. 세 치 혀만으로 수십, 수백만의 적을 없애 버리다니. 그 어떤 대마법사도 따르지 못할 무시무시한 위력일세.”
겸양하며 카를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니 가능한 일이었지요.”
레펜하르트의 귀환으로 세이어 교단의 권위는 크게 흔들렸다. 그래서 이런 식의 설득이 가능했던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쓸 수 없는 수법이었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 그자가 세이어라면 어찌할 셈인가?”
카를의 저 태도는 모두 그자, 아라난 그라드를 불태운 그자를 인류의 신으로 인정치 않기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정말 인류의 신이, 진짜로 안타레스의 존재를 용납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카를은 어찌 나올 것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그러나 의외로 카를은 태연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태연한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반문까지 한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응?”
“정말 인류의 신이었고, 정녕 세이어께서 임하신 것이었다 해도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는 이미 저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은 상태였으니까.
“자신의 조물주라고 해서, 그렇게 치졸한 신을 섬겨야 할 만큼 인간은 비참한 존재가 아니니까요.”
3
안타레스와의 동맹 체계를 되살린 크로방스 왕국의 움직임은 실로 빨랐다. 대흉년을 딛고 다시 풍요로워진 크로방스는 바로 엄청난 물량의 식료품으로 안타레스군을 지원했다.
바실리 왕국 역시 방대한 분량의 피복과 건축 자재, 각종 생필품 등의 구호물자를 준비해 안타레스로 보냈다.
막강한 전력을 앞에 둔 안타레스는 이제 든든한 후방 원조도 받게 되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삼국 동맹군은 지리멸렬, 패배만을 거듭한 채 안타레스의 영토 근처까지 후퇴해야만 했다.
한결 상황이 나아지자 안타레스의 수뇌부는 모두 카탈란 가드로 집결했다. 더 이상 험한 글로텐 산맥을 오가며 엘븐 포레스트와 트로리아드를 중심으로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랜드 포지를 잃은 드워프가 마켈린의 인도 하에 카탈란 가드로 모였고, 오크라트를 잃은 오크들도 타시드의 지휘 아래 동참했다.
제국이 막대한 금액을 들여 증축한 카탈란 가드는 이 모두를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당장이라도 안타레스의 임시 수도로 쓰기에 손색이 없는 규모였다.
그리고 카탈란 가드를 찾은 이는 또 있었다.
“제자야!”
소문을 들은 레펜하르트의 사부, 권황 제라드였다.
“어, 사부…….”
우락부락한 근육질 거구의 노인이 감동의 눈물을 흩날리는 광경은, 솔직히 별로 아름답진 않았다. 어색해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제라드는 눈물을 글썽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이놈의 자식아! 그럼 그렇지!”
감격에 겨워 제라드가 레펜하르트를 마구 두들긴다.
“이거 봐! 얼마나 튼튼해? 그럼! 우리 무문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덕분에 보고 있던 시녀들은 ‘저러다 우리 국왕님 또 죽어요!’라며 공포로 벌벌 떨고 있었지만 짐 언브레이커블 기준에서 이 정도 주먹질은 진짜로 ‘감동의 재회’ 수준이었다. 소중한 제자가 살아 돌아왔는데 다시 패 죽일 리가 없지 않은가? 기껏해야 폭발 좀 일어나고 굉음 좀 울리고 탑 두어 채가 살짝 흔들리는 정도에서 끝났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도 웃으며 넘어갔다.
“하하,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부.”
“그나저나 제자야.”
“예?”
감동의 재회가 끝나자마자 제라드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터트렸다.
“세이언가 뭔가, 그놈 찾았냐? 이 빚을 갚아 줘야지!”
패배의 설욕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신성한 의무 중 하나다.
“괜찮으십니까? 진짜로 인류의 신일지도 모르는데요?”
제자의 의문을 제라드는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그 역시 세이어가 그냥 평범한 대마법사는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느꼈던 그 엄청난 힘과 권능, 그걸 떠올리면 솔직히 진짜 인류의 신이라 해도 반박할 수가 없다.
……딱히 반박할 생각도 없었고.
“알게 뭐냐? 패 버린다!”
덕분에 안타레스는 실로 든든한 아군을 얻게 되었다.
어느 정도나 든든하냐면…….
“제라드 님, 그럼 계약을 갱신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안타레스의 상황으론 급료를 제때 챙겨 드리기가 좀…….”
은근히 속삭이는 카를의 제안을 제라드가 단칼에 잘랐다.
“지금 돈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일단 그놈부터 조지고 생각하자!”
무려 보수마저 마다할 정도로 제라드는 분노한 상태였다. 이 와중에도 안 받겠다는 소린 안 하는 점이 실로 짐 언브레이커블답다 하겠다.
“그놈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그럼 여기서 기다리다 보면 다시 나타나겠지?”
낮이고 밤이고 카탈란 가드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살기를 풀풀 풍기는 권황 제라드는 참으로 든든한 경비견이었다. 당대의 권황을 집 지키는 개 취급하는 것이 어색하긴 하지만 상황이 딱 그랬다.
안전해진 카탈란 가드를 중심으로 시리스며 타시드, 아틸카 등 각 종족의 수장들은 열심히 일족을 안정시켰다. 스탈라며 하다툼, 유스테아 등도 정신없이 전후 처리에 열중했다.
모두의 노력과 열정으로 안타레스는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이들 중 유일하게 손 딱 털고 무위도식으로 돌아간 이가 한 명 있었다.
☆ ☆ ☆
투박한 사내의 손가락이 매끄러운 여인의 피부를 매만진다. 사내의 손길을 느끼며 여인이 희미한 신음을 흘린다.
“흐응, 하앙~.”
침대에 엎드린 채 이니야는 양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사랑하는 이가 그녀의 전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우응…….”
마찬가지로 얼굴이 붉어진 채,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저기, 이니야…… 그냥 마사지하는 건데 분위기가 좀…….”
“시원해서 그래요.”
천연덕스럽게 이니야가 말을 이었다.
“저기 어깨, 어깨도.”
“아, 예.”
순순히 레펜하르트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가르릉거리는 고양이처럼 이니야가 한껏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다.
“……허벅지도.”
“아니, 거긴 좀…… 만지기가…….”
“남편이 아내의 몸을 만지는 게 뭐가 부끄러우신가요?”
“남들 앞도 아닌데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보통은 실제 부부지간이라도 남들 앞에서 더더욱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뭔가 괴상한 상황이지만 어쨌건 레펜하르트는 열심히 이니야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녀가 그를 위해 해 온 것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것을 요구해도 거부할 수 없었다.
“에헤헤…….”
마냥 즐거워 이니야는 생글생글 웃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함께 웃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가 여태 겪어 온 고난이 손에 잡힐 듯 보여 죄책감만 들 뿐이었다.
“……정말 고생이 많았군요, 이니야.”
그동안 한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이니야의 육체는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아무리 실란이나 마켈린의 신성 주문이 강력해도 헝클어진 그녀의 생명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원래 신성력은 오러와 상성이 좋지 않다. 신성 주문으로 오러 유저를 치유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비유하자면 독으로 독을 치료하는 셈이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는 달랐다.
무려 120년 동안 골병 들어 가며 오러를 익히고, 또 골병 입혀 가며 오러를 운용해 제자를 키운 무문이다. 흐트러진 생체 기운을 다스리는 수법에서 짐 언브레이커블은 천하제일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황금빛 기운이 이니야의 전신을 휘감으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져 버린 균형을 바로잡는다. 폭주하던 오러가 제어하에 들어오고 폭풍처럼 들끓던 기운이 고요한 바다처럼 잠잠해진다.
즉, 지금 레펜하르트는 어디까지나 이니야를 치유하는 중이었다. 무작정 야시시한 분위기 잡고 있는 게 아니란 소리다. 뭐, 적어도 레펜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니야는 마냥 즐거울 뿐이지만.
‘아, 좋다.’
열심히 그녀의 전신을 주무르다 말고 레펜하르트가 옆을 돌아보았다.
이니야가 누운 침상 곁에는 커다란 약탕기가 끓고 있었다. 그가 만든 일종의 보약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오러 말고도 육체를 치유하는 탕약이며 목욕수 등을 만드는 데 오랜 노하우가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슬슬 약이 다 된 것 같다. 레펜하르트가 잔에 약을 따라 이니야에게 건넸다.
“마셔요.”
“네.”
얌전히 잔을 받고 이니야가 홀짝홀짝 약을 들이켰다. 레펜하르트는 새삼 신기하단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청나게 쓸 텐데 잘도 마시네.’
실제로 잔 속에 담긴 액체는 거무튀튀하고 왠지 기포도 퐁퐁 솟는 데다가 냄새는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라, 도저히 사람이 마실 물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니야는 벌써 며칠째 저 약을 잘도 들이켠다.
“맛있어요.”
“그, 그래요?”
레펜하르트가 준비해 주었다는 점에서 이미 맛 따윈 문제가 아닌 이니야였다. 게다가 실제로 몸으로 느낄 만큼 효과도 좋았다.
감탄하며 그녀가 잔을 내려다보았다.
“인간 세상 제법 떠돌아 봤지만 이렇게 효과 좋은 약은 처음 봤어요. 할라인의 연금술사들도 이런 약은 못 만들 것 같은데.”
“그야 아무래도 짐 언브레이커블은 절실함부터가 다르니…….”
보약 효과에 따라 무문의 맥이 끊기냐 마느냐가 오가는 판국이다. 실제로 짐 언브레이커블 초기엔 막대한 돈을 들여 연금술사도 초빙했었다고 한다.
“덕분에 이제 이런 것도 간단하네요.”
이니야가 오러를 운용, 영기염동으로 잔에 남은 약 방울을 긁어내 허공에 띄웠다. 그야말로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보약을 갈무리해 마저 마신다.
“레펜하르트 님이 만들어 준 귀한 약인데, 남길 순 없죠.”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사과 깎을 때도 느낀 거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오러 제어력이다.
‘오러 운용만 치면 러스도 못 따라가겠군.’
안 그래도 러스가 자기도 사과 비슷하게 깎아 보겠다며 열심히 연습 중인데, 여전히 희미하게 속살이 남는다며 투덜거리던 것이 생각났다. 레펜하르트? 따라 해 봤는데 사과 주스가 되더라.
“이제 거의 나은 것 같군요, 이니야. 그래도 아직은 안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괜히 무리해서 일하는 건 절대 금물…….”
안심하라며 이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안 해요, 일 같은 거.”
‘하긴, 정말 일 안 하긴 하더만.’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왕위에서 내려오자마자 이니야는 모든 것에서 손을 놔 버렸다.
애초에 그녀가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스스로를 혹사시킨 것은 그저 안타레스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중엔 분명 ‘레펜하르트 님도 안 계신데 오래 살아서 뭐해?’라는 심보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레펜하르트 님도 계신데! 반드시 오래 살아야지!’로 바뀌었다. 내내 철저히 휴식을 취하며 오직 육체를 회복시키는 데만 전력을 다했다.
덕분에 이니야는 거의 완치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전생 때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참으로 다행이지.’
이니야가 다시 침상에 누웠다. 레펜하르트도 다시 오러를 운용해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마사지를 받다 말고 문득 이니야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왠지 레펜하르트 님이 훨씬 다정해지신 것 같아요.”
“미안해서 그러죠…….”
시무룩한 그를 보며 이니야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안타레스를 위해 그녀가 치른 희생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니야는 이를 레펜하르트에게 미룰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제가 선택한 일, 제가 스스로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레펜하르트 님이 책임을 느낄 일은 아니랍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레펜하르트가 이니야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비단 왕의 책무를 맡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실은 그것 말고도 미안한 일이 있어서…….’
이 세계로 돌아올 때의 일이다. 레펜하르트는 분명 이니야의 목소리로 인해 시공 좌표를 확인해 귀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왜 시리스가 아닌 이니야의 음성이 들렸는가?
호기심은 마법사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호기심 해결을 미루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쁜 와중에도 레펜하르트는 세계수를 찾아 코드를 분석하며 연구에 열중했다.
그리고 실마리를 잡았다.
‘원래 엘프의 수호자로 내정된 것은 시리스가 아니라 이니야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세계수는 엘프 중 가장 뛰어난 이를 골라 수장으로서의 책임과 권능을 내려 준다. 그리고 현생이나 전생이나, 그녀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엘프였다.
즉, 레펜하르트가 뒤집어씌운 시리스라는 정보 아래 세계수는 이니야라는 정보 역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 때 이 사실을 눈치 못 챈 이유는 레펜하르트가 지나치게 강력한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마왕이라고까지 불리던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일곱 그루 세계수 링크를 완벽하게 자신의 제어하에 놓았다. 그리고 그 가호 아래 시리스는 별문제 없이 엘프의 수호자로 힘을 키웠으며 이니야는 세계수에게 무시당했다.
하지만 현재는 레펜하르트의 마법이 그만큼 뛰어나지 않다.
세계수도 셋밖에 안 되는데, 그 제어 술식도 워낙 머리가 부실해졌다 보니 꼭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상당히 간략화시켰다. 술식 자체에 여기저기 허점이 있다 보니 이니야의 영향력 역시 어느 정도 세계수에 반영이 되어, 결국 극단적인 순간 목소리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까지 파악한 뒤 레펜하르트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으, 내가 뭔 짓을 한 거냐…….’
전생 때 그는 시리스를 완벽하게 엘프의 수호자로 각인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가 완벽하게 다룬 부분은 어디까지나 시리스에게 주어지는 세계수의 가호뿐이었다. 그 외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엘프의 수호자로 선택된 이는 그저 가호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엘프의 수호자는 세계수의 축복만큼이나 큰 의무도 짊어진다. 엘프의 존속을 유지해야 할 크나큰 의무를.
하지만 시리스는 딱히 그 의무를 짊어진 적이 없었다. 전생의 그녀가 엘프를 방관했다는 소린 아니지만, 그녀가 느낀 책임감은 어디까지나 시리스 개인의 감정에 한해서였다. 세계수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수가 내린 책임의 무게, 그것은 여전히 이니야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전생의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면서까지 엘프를 지키며 죽어 갔다.
간단히 말해서, 실제 이득은 시리스가 쏙 빼먹고 정작 이니야는 스트레스에만 시달렸단 소리다!
‘어우, 진짜 그녀에겐 못 할 짓을 했네…….’
문제는 알아도 당장 손쓸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미 시리스는 세계수의 가호 아래 엘리멘트까지 터득해 버렸다. 이제 와서 수호자의 각인을 지웠다간 어떤 반동이 돌아갈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부작용 없이 문제를 해결하자니 아직 레펜하르트의 기량이 모자란다.
‘다행히 지금의 이니야는 전생과 달라. 세계수의 의무에 크게 시달리진 않는다. 지금도 확실히 휴식을 취하고 있고.’
더욱 마사지하는 손에 정성이 들어가는 레펜하르트였다. 전생의 이니야가 폐인이 되어 죽어 간 데는 분명 그의 책임이 있었다. 현생의 이니야가 그런 길을 걷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 이니야가 안마를 받던 중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레펜하르트가 놀라 물었다.
“왜, 왜 그럽니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흘겨보며 작게 뇌까렸다.
“이상하네…….”
“……?”
어리둥절한 레펜하르트를 뒤로한 채 이니야는 매섭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요 며칠간, 행복한 가운데서도 계속 찜찜하게 느껴지던 부분이 있었다.
‘슬슬 훼방이 들어올 때가 됐는데? 시리스, 요것이 요새 왜 이렇게 잠잠하지?’
☆ ☆ ☆
시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의 방에서 이니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러나 그녀는 예전처럼 뛰어들지 않았다. 그저 멀리 떨어진 요새 다른 곳에서 자기 업무에만 열중할 뿐.
‘당신은 자격이 있어요.’
이미 알아 버렸다.
자신은 남자로서 레펜하르트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전생의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시리스는 그 여인이 자신이라고 실감할 수 없었다. 레펜하르트와 자신이 지극히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소릴 들어도 그녀는 이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이런 식으로 들렸다.
-엄마와 아빠는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사랑했단다.
시리스에게 있어 레펜하르트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보호자였다. 그녀를 구해 주고, 그녀를 아껴 주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해 준 부모 같은 존재.
그래서 이니야를 질투했다. 그리고 그 질투는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긴 여인의 질투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버지를 빼앗긴 딸의 질투에 가까웠다. 홀로 된 아버지가 새엄마를 맞이하는 걸 본 딸의 심정이 그녀가 느낀 감정의 진실이었다.
오열하는 이니야를 본 순간 시리스는 그 사실을 실감해 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 이니야를 방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격이 있었으니까.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신의 ‘아버지’ 곁에 있을 자격이.
‘그래, 자격은 있는데…….’
문득 시리스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알았다 해서 질투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열받아!’
새엄마에게 아버지를 빼앗긴 딸의 질투도 엄연히 질투다. 머리론 이해해도 당연히 열은 받지!
신경질이 나 시리스는 멋대로 책상 다리를 걷어찼다.
“쳇!”
테이블이 잠시 흔들리다 이내 멈췄다. 옆에서 업무를 돕던 플로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플로라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중뿔난 오러 유저가 업무 보다 말고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수없이 보아 오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시리스 근처에 깨질 만한 것, 부술 만한 것 다 철수시키고 기본 가재도구도 각별히 튼튼한 것만 놓았다.
덕분에 성질부리는 수장을 모시면서도 엘프 행정부는 별 지장 없이 업무를 치루고 있었다.
“시리스 님, 다음 일이에요.”
사무적인 태도로 플로라는 서류를 건넸다. 잠깐 흥분했던 시리스도 이내 서류 쪽에 집중하며 딴생각을 잊었다.
속으로 플로라가 중얼거렸다.
‘시리스님께는 죄송하지만, 저도 이젠 이니야 님을 응원할 수밖에 없네요.’
예전엔 시리스에게 굴러온 돌에 지지 말라고까지 했지만, 이제 와선 플로라도 생각이 바뀌었다.
지난 반년간의 이니야, 그리고 그녀의 눈물을 본 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나라의 왕비가 될 자격이 있는 이는 오직 한 명뿐이라고.
☆ ☆ ☆
마사지가 끝나자 이니야는 침상에서 일어나 의관을 정돈했다. 겉옷을 걸치며 그녀가 레펜하르트에게 말했다.
“곧 만찬이네요?”
“예, 모든 이들이 모이는 자리지요.”
얼마 전 레펜하르트는 각 종족의 수장이며 안타레스의 수뇌부에 연락을 취했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앞으로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만찬을 열겠다는 소식이었다. 다들 기쁘게 받아들이며 만찬에 참가하겠다고 전언을 보냈다.
들뜬 얼굴로 이니야가 말했다.
“오랜만에 모두의 얼굴을 보겠네요.”
물론 정확히 말하면 모두는 아니다. 렐하드며 킨지르 등, 지난 반년간 생사를 달리한 이들도 제법 있다.
아련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들을 추억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어째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죽은 이들 때문인가 싶어 이니야가 아차 했는데, 그렇다고 보기엔 좀 표정이 달랐다.
“레펜하르트 님?”
슬프다거나 그리워한다기보다는, 뭔가 굉장히 긴장한 얼굴이다.
진지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보았다.
“이니야.”
“예.”
“전 이제 그곳에서 중대한 발표를 할 생각입니다.”
이니야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펜하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과연, 그들이 어찌 받아들여 줄지는 모르겠지만…….”
전생부터 알아 왔던 이들.
그리고 이 시대에 새롭게 만난 이들.
이미 오랜 시간 그들과 함께했다. 이미 많은 일들을 그들과 함께했다.
레펜하르트의 뜻에 따라 안타레스를 세우고, 레펜하르트가 죽었다 믿었음에도 스스로 일어서 스스로의 의지로 안타레스를 지킨 이들이었다.
모두에게 진실을 알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이미 그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려 주었다.
“그동안 너무 미뤄 왔지요.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습니다.”
레펜하르트는 각오를 다졌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4
전시 중이라 만찬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히 풍성했다.
크로방스 왕국의 원조 덕에 안타레스는 혹독했던 식량난에서 벗어났다. 테이블 가득 술과 요리를 쌓아 두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생긴 상태다.
푸짐한 만찬을 앞에 두고 안타레스의 수뇌부가 모두 모였다. 상석에 앉아 레펜하르트는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전생의 사천왕이었던 시리스, 마켈린, 아틸카, 타시드가 보였다.
전생의 검성 사이러스와 카르사스 대왕, 그 누구보다 강력한 적이었던 그들이 러스와 카를로서 동료가 되어 이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