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권 제67장 왕의 귀환 (68/84)

18권

제67장 왕의 귀환

1

왕!

우리의 왕이여!

궁지에 몰린 안타레스의 백성들은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그들의 왕을 향해, 지금은 사라진 진정한 왕의 이름을.

그들의 음성이 기적을 불렀다. 수많은 사념이 혼돈의 도가니가 되어 한 자루 창과도 같이 차원을 뚫고 이름의 주인에게 닿았다.

간절한 바람이 기적을 낳았다!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도통 모르겠네.”

수많은 안타레스군의 외침과 갈망이 하늘을 흔들었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뭐, 와 닿는 게 있어야 신경을 쓰건 말건 하지?

“진짜 나 찾는 사람 하나도 없나 보네?”

수천, 수만 명이 그를 찾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의미 없는 공기의 흔들림과 정신적 외침일 뿐이었다. 간절한 바람이 기적을 낳는다? 그딴 게 정말 현실에 일어날 수 있다면 이 험한 세상 얼마나 살기 편했을까?

여전히 레펜하르트가 세계의 바깥에서 안 돌아가는 머리 억지로 굴리며 술식을 연산하던 중이었다.

목소리가 들렸다.

-죽은 이에게 매달리지 마라!

희미한, 너무도 희미하지만 세계의 틀 너머까지 들리는 음성.

-그는 죽었다. 죽은 자의 이름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그것은 레펜하르트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아는 이의 음성이었다.

“……이니야?”

처음엔 환청인가 의심했다. 이 세계의 바깥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 것이다.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목소리의 근원을 좇아갔다.

“아, 이건…….”

마력 감지를 통해 음성 파장을 분석한 레펜하르트는 잠시 후 이유를 알아냈다.

그가 아까부터 좌표 고정을 위해 지표로 삼고 있던 세계수, 그곳을 통해 이니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어째서?”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거렸다.

대충 가설은 끼워 맞출 수 있었다.

세계수의 코어에 각인된 엘프, 일족의 수호자로 선택된 이는 무의식의 심연 속에서 세계수와 소울 링크 상태로 존재한다. 너무나도 강렬한 영혼의 울림이 흐름을 역행해 오히려 세계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이 정도면 대충 가설은 끼워 맞추겠는데…….

‘……그럼 들려도 시리스 목소리가 들려야지, 왜 이니야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분명 세계수의 코어에 각인되어 일족의 수호자로 선택된 이는 시리스였다. 그런 그녀이기에 엘리멘트라는 특별한 기술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혹시 자신이 사라진 틈에 이니야가 무슨 수를 쓴 걸까? 하지만 엘프 정령술에 세계수를 다루는 용법은 없다. 만약 있었다면 레펜하르트 전에 이미 엘프는 세계수를 복원했을 것이다. 엘프에게 있어 세계수의 부활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종족의 숙원이었을 테니.

황당해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잽싸게 연산을 시작했다.

‘어쨌거나 겨우 찾아온 기회다. 놓칠 순 없지.’

지금 이유나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꺼질 듯 가냘프기 짝이 없는 외침.

그것이 사라지기 전 어서 시공의 좌표를 찾아야 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기준 삼아 레펜하르트는 시공의 문을 열었다.

“게이트 오브 디멘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 유일하게 레펜하르트를 부르지 않은 이의 목소리만이 그에게 닿았다.

☆ ☆ ☆

제일 먼저 레펜하르트의 눈에 띈 것은, 분명 감옥에 붙잡아 두었던 현자 브렉티스가 아군을 향해 블레이드 오러를 내려치려는 광경이었다.

뒷생각 할 것 없이 일단 한 방 날리고 보았다.

“권마합신, 아케인 반전反轉, 다크 사이드.”

아케인 마력을 역회전시켜 수증기를 고정시킴으로써 대기의 진동을 막고, 어둠의 마력을 오러에 실어 생명기의 기운을 감춘다. 이니야의 스티리아 일족이 물과 어둠의 정령을 응용해 자신의 기척을 감추는 수법을 응용한 것이다.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

대놓고 날아가는 그 은밀한 한 방은 오러 유저의 감각을 지닌 현자 브렉티스에게도 통했다. 하늘 위에서 죽음이 떨어지는데 전혀 눈치 못 채고 한 방에 죽어 버렸다.

“으음…….”

반으로 갈라진 하늘 아래, 빛의 구멍을 등진 채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저 소리만을 따라왔을 뿐인데 눈앞에 잔혹한 전장이 펼쳐져 있다.

그것도 소중한 동료, 백성, 병사들이 죽어 가는 전장이!

“간신히 돌아왔더니만……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허공에 뜬 거인을 향해 제이드가 고함을 질렀다.

“요, 요격하라! 언제까지 멍하니 구경만 할 셈이냐! 저자는 적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은의 현자 중 마탄병대가 허공으로 창대를 겨누었다.

“마탄병대, 전탄 발사!”

퍼퍼퍼펑!

수십 줄기의 마탄이 공중으로 쏘아졌다. 순식간에 허공에 뜬 레펜하르트가 폭연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내 눈부신 황금빛 회오리를 전신에 감싼 채 다시 나타났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명함이나 다름없는 최강의 방어형 오러 스킬.

스파이럴 가드였다.

제국 측과 안타레스 측에서 동시에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젠장! 멀쩡하잖아!”

“진짜다! 진짜 레펜하르트 님이셔!”

멍하니 고개를 들고 있던 카를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어떻게 저곳에 레펜하르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건지, 어떻게 이 순간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제국군이 흔들리고 있다!’

혼란 속에서도 카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떠오른 의문은 뒤로하고 일단 해야 할 것을 한다.

“우리의 왕이 돌아오셨다! 안타레스의 용사들이여! 저들을 물리쳐라!”

황금빛 대검을 들고 카를이 무식하리만치 용맹하게 적진의 중앙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왕이시다! 불패의 왕이 돌아왔다! 우리가 이겼다!”

사실 레펜하르트가 돌아왔다고 딱히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카를은 뻔뻔하게도 이미 승리한 것처럼 소리쳐 댔다. 과연, 놀람과 당혹 속에서 안타레스군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

“왕이시다!”

“우리의 왕이 돌아오셨다!”

이성도 논리도 필요 없다. 그저 뜨거운 가슴의 외침으로 믿는 것이다.

우리의 왕이 돌아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긴다라고.

“이, 이것들이!”

은의 현자 측은 당황했다. 카를의 저 무모한 돌진은 효과가 없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좋았다.

“궈, 권왕이다!”

“말도 안 돼! 어찌 신벌을 받은 자가?”

“분명 세이어께서 저자를 벌했다 들었는데…….”

이만의 제국군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삽시간에 명령 체계가 흔들리고 질서 정연하던 대열이 붕괴된다.

세이어의 음성이 전 대륙에 퍼진 것이 화근이었다.

즉물적인 믿음은 보다 즉물적인 상황 앞에서 더욱 쉽게 깨진다. 차라리 간접적으로 권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되살아난 레펜하르트를 보고도 ‘역시 헛소문이었어. 짐 언브레이커블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있나?’라며 바로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신의 이름, 신의 목소리로 선포해 버렸다.

지금 이들이 느끼는 당혹은 단순히 권왕의 부활 때문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믿었던 신의 말씀이 틀렸다는 충격 때문이다.

“왕이여!”

“왕이시여!”

패색에 몰려 있던 안타레스군이 기세등등하게 제국군에 역습을 가했다.

“제길, 놈들을 막아!”

은의 현자 몇몇이 애써 제국군을 지휘하며 안타레스군의 진격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 선두에 선 할라인의 오러 유저, 지금은 은의 현자로 참전하고 있는 폴스타 후작이 매섭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라, 위대한 세이어의 아들딸들아! 저것은 가짜다!”

세이어로부터 직접 언급받은 폴스타 후작은 진심으로 믿었다.

그분께서 저자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저것은 진짜일 리가 없다고.

‘저게 진짜 권왕일 리가 없잖아!’

그때, 레펜하르트가 무서운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황금빛 오러를 전신에 감싸고 유성처럼 대지로 내리꽂히며 정해진 술식대로 마력을 운용한다. 오러와 마력이 뒤섞여 또 다른 파괴의 힘으로 바뀐다.

“권마합신.”

이제 막 돌아온 레펜하르트는 사실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도대체 저 새하얀 로브를 입은 자들은 누구이며, 제국군 앞을 가로막은 수백의 가공할 마검사는 누구인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상태다.

하지만…….

“아케인 스트라이크 캐논!”

상황이 애매할 땐 거하게 선빵!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랜 가르침은 이제 레펜하르트의 심신에 충분히 각인된 상태였다.

콰아아아앙!

십여 줄기의 황금빛 기둥이 전장을 싸악 훑었다. 방어하려던 제국군 선두가 쓸리며 안타레스군이 파고들 구멍이 생긴다. 각 종족의 혼합 병사들이 흥분해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죽여라!”

“왕께서 길을 여셨다!”

“우리의 왕께서 지켜보신다!”

제국군 대열이 크게 무너지며 전황이 뒤바뀐다. 그러나 그 구멍을 다시 막고 전열을 정비해야 할 폴스타 본인은 오히려 제자리에 멈춰선 상태였다.

“서, 설마…….”

아까는 너무 당황해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엔 더 이상 부인할 수가 없다.

오러 유저인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방금 내리꽂힌 황금빛 오러에 대해서.

‘정말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다!’

그 가공할 힘,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오러의 기운은 분명 대륙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무문의 것이었다.

“정녕 권왕이 살아 있었단 말인가? 세이어께서 틀리셨다는 건가?”

잠깐 정신을 놓은 대가는 컸다.

어느새 제국군과 안타레스군이 혼란스럽게 뒤얽혀 있었다. 적아가 뒤섞여 있으면 은의 현자가 지닌 고대 아티팩트도 상당수 제한받게 된다.

세이어의 이름하에 얻은 힘이다. 그것을 제국 병사에게 쓸 수는 없는 것이다.

“크윽! 일단 물러나라! 후퇴하여 재정비한다!”

폴스타 후작이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병사들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한번 뒤섞인 양군은 쉽게 분리되지 않았다. 일단 진형이 무너지자 제국의 피해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 틈에 레펜하르트는 일단 안타레스 쪽 진영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안타레스군 중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거대한 황금 갑옷의 기사에게로.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으로 카를이 외쳤다.

“폐하! 진정 폐하시군요!”

사실은 조금 전까지도 스스로를 의심했다.

너무나, 너무나 바란 나머지 정신 이상을 일으킨 게 아닐까? 그래서 현실을 부인하고 환각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나 저 거대한 육체, 강렬한 오러, 그 누구보다도 확실한 존재감은 눈앞의 레페하르트가 현실임을 너무도 명확히 일깨워 준다.

“아, 카를 재상.”

카를에게 다가간 레펜하르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말했다.

“상황 좀 설명해 주게. 왜 트롤들이 단체로 광폭화한 거지? 그리고 저 허연 것들은 뭐지? 아는 얼굴도 상당히 많이 보이는데? 어디서 단체로 유니폼이라도 맞췄나?”

☆ ☆ ☆

전쟁 중이다. 느긋하게 자리 깔고 설명할 여유 따윈 없다.

그래서 카를은 간략하게 지난 반년을 요약했다.

“폐하 죽고 전쟁 났습니다.”

“그쯤은 나도 척 보면 알아. 지금 상황이 뭐냐고.”

카를이 광폭화한 트롤과 백색 로브 무리들을 번갈아 가리켰다.

“트롤 광폭화 제어법을 찾아서 반격하려다 고대 아티팩트를 물처럼 써 대는 백색 로브 무리를 만나 역습당했습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저들 중 오러 유저급 강자는 불사신이 되었고요. 일단 저는 은의 현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를은 불사신이 된 은의 현자며, 밀리고 있는 안타레스의 강자들 상황을 집약해 보고를 마쳤다. 간략하긴 해도 현재 레펜하르트가 알아야 할 부분은 정확히 짚어 주는 상황 보고였다.

“자세한 보고는 이후에 들어야겠군.”

레펜하르트가 등을 돌렸다. 카를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폐하.”

“재회의 기쁨은 나중으로 미루자고, 재상.”

그대로 레펜하르트는 전장으로 돌진했다. 2미터가 넘는 거인이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내던지며 멧돼지처럼 눈앞의 제국군을 가로질렀다.

“권왕이다!”

“권왕이 온다!”

안 그래도 현제 제국군의 진영은 안타레스의 반격에 한차례 무너진 차였다. 거기에 창도 칼도 통하지 않는 강철의 거인이 덮쳤다. 도미노라도 된 듯 연쇄적으로 대열이 붕괴된다.

“으아, 저 괴물!”

제국군의 비명을 흘려들으며 레펜하르트는 매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겉보기엔 그야말로 투신 아레스의 강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뛰는 그였지만,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상태를 냉철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거,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구먼.’

허차원에서 사흘, 세계의 바깥에서 일주일.

이미 열흘 가까이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은 몸이었다. 게다가 허차원에서 상당히 한계까지 버텼는지라 육신도 오러도 꽤나 축난 상태다.

‘평소의 20퍼센트 정도?’

다행히 마력은 충분했다.

허차원과 달리 ‘세계의 바깥’은 이 세계의 일부, 사방신의 유물이 마력을 재충전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시공의 문을 여는 마법, 게이트 오브 디멘션은 술식이 보다 복잡하고 어려울 뿐이지 효과 자체는 인피니티 게이트와 똑같다. 들어가는 마력도 비슷하단 의미다.

아직 그에겐 인피니티 게이트급 10서클 마법을 두어 번 더 쓸 수 있을 정도로 마력에는 여유가 있는 상태.

“아케인 스트라이크 파이널 디시전!”

양손을 크게 떨치며 레펜하르트는 수십의 섬광을 동시에 쏘아 냈다. 광포한 마법의 힘이 제국군 곳곳을 두들기며 폭발을 일궜다.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이라나드 공작이 몸을 날렸다.

“이단자 레펜하르트!”

그와 상대하고 있던 유스테아와 하다툼은 굳이 이라나드 공작을 쫓지 않았다. 둘이 공작을 견제하는 사이 두 사람의 부대는 궤멸 직전이었다. 지휘관으로서 부대를 수습해야 하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지만, 지금은 눈앞의 사실을 믿어야겠지.”

레펜하르트를 믿고 유스테아가 자신의 부대로 몸을 날렸고.

“거봐! 왕이 죽을 리가 없잖아! 왕은 안 죽으니까 왕이라고!”

쾌재를 터트리며 하다툼도 수하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고위 서클은 배제하고 수준은 낮아도 상대적으로 파괴력이 높은 마법을 쉴 새 없이 구사한다.

“파이어볼! 플레임 애로우! 에어 봄! 라이트닝 볼트!”

하위 마법이라 해도 평범한 육신에 평범한 경갑만을 걸친 일개 병사에겐 죽음의 선고였다. 사방에서 제국군의 비명이 아우성을 쳤다.

“으아악!”

“으악!”

“권왕이 아티팩트를 쓴다!”

“뭐야! 짐 언브레이커블은 도구 안 쓴다며!”

억울함 가득한 외침 위로 번뜩이는 전격의 창이 내리꽂힌다. 달려가며 이라나드 공작이 길게 검을 떨쳤다.

“제왕의 가호!”

제국군의 머리 위 풍경이 일그러지며 전격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이라나드 공작의 무형화된 오러가 대기를 일그러뜨리며 투명한 장막을 펼쳐 전격을 막은 것이다.

간신히 레펜하르트 앞에 도달한 이라나드 공작이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더 이상 인간을 죽게 할 순 없다, 권왕!”

여전히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저자가 살아 있는지, 어째서 세이어의 말씀이 틀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만은 분명했다.

“인간이면서 인간을 배반하다니! 그 죗값을 치르게 해 주마!”

인간의 분노가 담긴 공작의 음성에 레펜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난 사람이고, 그렇기에 사람을 배반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 차이를 모르는 그대에겐 결코 이해 못 할 소리겠지만.”

☆ ☆ ☆

이라나드 공작이 블레이드 오러를 내려쳤다.

“제왕의 일격!”

단순한 내려치기지만 그 안에 담긴 기류는 심상치 않았다. 검풍 속에 은밀한 오러의 기운이 끈적끈적하게 새어 나와 마치 늪처럼 레펜하르트의 사지를 얽맨다.

‘특이한 수법일세.’

빠져나와 보려 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현재 레펜하르트의 육체론 저 기운을 떨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동작이 느려져 채 참격을 허용해 버렸다.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가 가슴을 펼쳤다.

“스파이럴 가드!”

황금빛 회오리가 맹렬하게 일어나 공작의 블레이드 오러를 그대로 분쇄했다. 검을 거두며 공작이 치를 떨었다.

“제길, 이 정도는 피할 필요도 없다는 거냐!”

자기가 꼼짝 못하게 얽매놓고 도리어 분노하다니 실로 적반하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공작 입장에선 또 다르다. 저 ‘짐 언브레이커블’이 제왕검의 무형 기류 ‘따위’를 힘으로 못 누를 거라곤 채 생각지 않는 것이다.

분노한 공작이 연타를 이었다. 양 팔뚝에 스파이럴 가드를 펼친 채 레펜하르트도 맞서 싸웠다. 오러와 오러가 연신 충돌하며 조금씩 레펜하르트의 상체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공작의 블레이드 오러가 스쳐 지나간 부분이었다.

오러의 칼날에 베였음에도 피는커녕 흔적 조금 나고 마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에 이라나드 공작이 기가 차 외쳤다.

“정말 미친 듯이 단단한 몸이구나!”

그의 제왕검은 강검류 검술, 기교파에 비해 한 점에 집중되는 공격력이 상당하다. 제대로 일격을 날린다면 아무리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라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강력한 검격을 몇 번이나 찔러 넣었지만…….

“스파이럴 가드!”

비껴 맞는 것은 몰라도 정타만큼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위협적인 공격만큼은 반드시 스파이럴 가드로 방어하는데, 저 방어법은 그야말로 전신을 차곡차곡 휘감는 것이라 허점 자체가 없다. 아무리 파고들려 해도 파고들 틈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장기전으로 가면 저 무한한 지구력을 가진 짐 언브레이커블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고…….’

결국 공작도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과 붙었던 대다수 오러 유저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아무리 잘게 두들겨 봐야 상대는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방어 자체를 뚫을 일격을 넣는 수밖에!’

이라나드 공작이 최강의 일격을 준비했다. 사방을 감도는 제왕검의 기운이 모두 거두어지고, 검 끝에 맺혀 성을 부술 일격이 되었다.

“제왕의 참수!”

다음 공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세가 흐트러지는 걸 감수하며 날린 가공할 일격이 레펜하르트의 명치를 정확히 찔러 왔다.

레펜하르트는 웃었다.

‘아이고, 고마우셔라.’

굳건하던 산악이 대지를 흐르는 강이 되었다. 물 흐르듯 유려한 움직임으로 레펜하르트가 검격을 피한다. 몸을 틀며 피한 자세 그대로 땅을 박차며 강렬한 일격을 뻗는다.

“데스 카운터!”

포탄 같은 주먹이 공작의 심장을 정확히 강타했다. 오러 방어가 종잇장처럼 깨지고 로브에 걸려 있던 방어 마법마저 산산조각 나며 공작의 갈비뼈가 으깨져 일격에 심장이 파열했다.

“크어어어…….”

공작은 뒤로 날려 가지도 않았다. 모든 충격이 완벽하게 집중된 것이다. 일격에 절명하고 이내 눈동자에 생의 빛이 사라졌다.

주먹을 거두며 레펜하르트가 숨을 골랐다.

‘후우, 다행이군. 빨리 끝나서.’

공작의 예상과 달리, 만약 장기전으로 갔다면 아마 레펜하르트가 패배했을 것이다. 지금 그는 상당히 탈진 상태인 것이다. 뛰어난 정신력으로 멀쩡한 척 위장하고 있었을 뿐이지.

‘슬슬 스파이럴 가드 쓸 오러도 안 남아 있었는데. 천만다행이구먼.’

레펜하르트는 죽은 이라나드 공작을 힐끔거렸다. 정확히는 공작이 입은 새하얀 로브와, 가슴에 달린 은빛 엠블렘을.

‘카를 말대로인 것 같군.’

쓰러진 공작에게서 막 레페하르트가 발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이거……였군. 짐 언브레이커블의 숨은 한 수라는 것이…….”

“응?”

어느새 죽은 공작이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움푹 파인 가슴도 도로 원상태로 돌아가고 안색 또한 다시 혈색이 좋아진다. 심지어 상당히 소모되었던 오러조차도 팔팔하게 되살아난다?

“미리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순간 당해 버렸군. 정말 짐 언브레이커블의 전투 유도는 악랄하구나.”

긴장하며 레펜하르트는 재차 전투 자세를 갖췄다. 동시에 예리하게 공작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저들 중 불사신이 된 자가 있다더니…….’

공작이 다시 검을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날 해할 수 없다! 이 몸은 세이어의 가호를 입고 있나니!”

광소를 터트리며 공작이 공세를 취했다.

“세이어의 이름으로, 이단자를 벌하겠다!”

☆ ☆ ☆

이라나드 공작의 제왕검이 연신 레펜하르트의 급소를 노려 온다. 슬슬 스파이럴 가드를 펼칠 여력도 남지 않아 레펜하르트는 연신 피하기만 했다.

물론 레펜하르트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 만큼 모든 공격을 전부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레펜하르트의 방어법엔 스파이럴 가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핀 포인트 포스 필드.”

거대한 마법 방어장을 펼치는 대신, 작은 마력의 방패를 만든 뒤 미처 놓친 공세를 교묘히 메운다. 오러 유저의 감각으로 펼치는 마법사의 방어법이다. 과연 공작의 공격이 죄다 차단되어 버린다.

그렇게 공방을 이어 가며 레펜하르트는 유심히 상대를 살폈다.

‘저 부활 방식, 낯이 익단 말이지.’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바로 열흘 전―그러니까 레펜하르트 입장에서― 세이어가 구사한 신성의 일부가 아닌가?

하지만 이라나드 공작이 신성을 다룰 리는 없다. 뭔가 다른 것이 있다.

“타앗!”

레펜하르트의 주먹이 공작의 어깨를 스쳤다. 그야말로 옷깃 스친 정도의 가벼운 타격이지만 마력이 깃들어 있어 파괴력이 심상치 않았다. 공작의 어깨가 탈골되었다.

“크윽!”

공작의 탈골된 어깨는 이내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 순간 레펜하르트는 눈을 반짝였다. 뭔가가 느껴졌다.

‘저놈, 가슴에 뭘 박아 놓은 거지?’

심장의 반대쪽, 그 체내에 기이한 마력의 흐름이 있었다. 실로 미세한, 레펜하르트의 마력 감지 능력으로도 간신히 느낄 은밀한 흐름이.

‘저 불사 능력과 관계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기운이 약한데.’

공작의 블레이드 오러가 춤을 추며 레펜하르트의 시야를 희롱했다. 잠시 레펜하르트가 공세를 놓쳤다. 역시 스파이럴 가드와 달리 마법만으로는 오러 유저를 막기가 쉽지 않다.

“윽!”

급한 김에 레펜하르트가 왼발로 땅을 찍었다.

쿵!

“아케인 배리어!”

체술 수인법을 이용해 전신에 마법 방어장을 건다. 결국 이라나드 공작의 오러가 마력장에 가로막히고 반대로 레펜하르트가 기회를 얻었다.

“질풍기격탄!”

예리한 바람의 칼날을 동반해 레펜하르트가 기격탄을 쏘아 댔다. 대다수는 막았지만 몇몇을 놓쳐 공작의 옆구리가 길게 베였다.

“흥! 이 정도로 신의 가호를 입은 날 어찌할 수 있을 성 싶으냐!”

바로 상처가 사라지며 공작이 더욱 의기양양하게 덤벼들었다. 뒤로 물러서는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저거, 분명 관계가 있긴 있어.’

상처가 낫는 순간 분명히 보았다. 저 가슴속에 이식된 ‘뭔가’로부터 이질적인 기운이 생겨나 이라나드 공작의 전신에 감도는 것을.

‘아무래도 순수하게 저 아티팩트만의 힘은 아닌 것 같고.’

저런 이적을 낳기엔 감지되는 마력이 너무 미약했다. 어디선가 불사의 힘을 퍼다 쓰는 매개체일 가능성이 높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수신기?’

문득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다.

‘아? 그래서 브렉티스는 그냥 한 방에 죽은 건가?’

카를의 말에 따르면 저들 중 강자에 속하는 이들은 불사의 힘을 지녔다 했다. 현자 브렉티스 역시 그중 하나이기에 아틸카가 그리 고전했다 했다.

‘그런데 어째 한 방에 훅 가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심장 반대편이란 위치는 상당히 애매한 곳이다. 급소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부위.

무릇 무인이라면 상대의 목이나 심장을 노리는 것이 본능이고 그것을 위해 상대의 외곽에서부터 차근차근 공세를 쌓는다. 그렇기에 급소가 아니더라도 어깨나 옆구리, 팔뚝, 허벅지 등은 꽤나 자주 부상을 입는다.

그런데 심장 반대편이 찔리는 경우는 의외로 없다.

상대의 몸통이 비면 그냥 심장을 찌르고 말지 왜 굳이 반대편을 노릴까? 공격하기 쉽지 않은 몸통이면서도 간이나 심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부위가 바로 심장 반대편이다.

이것이 안타레스의 강자들이 몇 번이고 필살기를 먹였음에도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한 이유였다. 확실히 죽이기 위해 심장을 터트리고 목을 베고 심지어 머리를 통째로 박살 내기까지 했지만 정작 심장 반대편을 정확히 노린 이는 없었던 것이다.

현자 브렉티스가 한 방에 죽은 건, 워낙 레펜하르트가 장거리에서 공격을 했다 보니 우연히 심장 반대편까지 싹 도려내진 덕분일 뿐이다.

‘알고 한 건 아닌데, 운이 좋았구나.’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심장 반대편이라니, 의외의 한 수인데?’

차라리 하수끼리의 대결이라면 막칼질을 하다가 우연히 노리기라도 하는데 워낙 다들 달인급이다 보니 그런 막칼질 따윈 하질 않는다. 그야말로 고수의 심리적 허점을 노렸달까?

그러는 와중에도 둘의 사투는 이어지고 있었다. 공작의 공격을 계속 마법으로 막고 틈틈이 공세를 취한다. 레펜하르트의 마법 운용은 실로 경지에 다다라 오러 유저인 이라나드 공작조차도 마땅히 파고들 틈이 없었다.

분노한 와중에도 공작이 숨길 수 없는 감탄을 보였다.

“정말 대단하군,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이면서 동시에 대마법사라니…….”

레펜하르트는 조금 놀랐다.

“……날 마법사로 보는 건가? 특이하군.”

여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법을 써 댔지만 마법사 취급은 처음 받은 것 같다. 9서클의 마스터, 드레자조차도 꿋꿋이 ‘저거 아티팩트 쓰는 거야!’라며 자신을 세뇌했거늘.

‘아, 처음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시대의 제이드도 믿긴 믿었던 것 같다. 상당히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이라나드 공작이 안색을 굳혔다.

“세이어의 눈은 모든 것을 굽어살핀다. 그분 앞에서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느냐!”

“아니, 뭐 굳이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닌데.”

갑자기 공작의 기세가 강해졌다. 공격이 더더욱 맹렬해졌다.

“그런데 무예 쪽은 듣던 것만 못하군, 권왕 레펜하르트!”

제왕검의 기운으로 사방을 뒤덮으며 이라나드 공작이 검격을 퍼부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눈의 여왕이 훨씬 강력했다.”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재차 마법 방어장으로 방어하며 레페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딴 데서 워낙 혹사당하다 온 처지라…….’

확실히 현재 그는 지닌 기량의 반의반도 채 발휘하기 힘든 신세다.

‘그런데 난 사실 마법사로서 오러 유저랑 싸우는 쪽이 더 전공이거든?’

이왕 들킨 것, 레펜하르트는 전법을 바꿨다.

무술을 기반으로 틈틈이 마법을 쓰는 것에서 아예 작정하고 아낌없이 마법을 구사하는 쪽으로.

섬세한 마력 운용으로 블레이드 오러를 막아 내고 마법 방어장으로 몸을 감싼 채 각종 속성 마법으로 예리하게 반격한다.

도로 공작이 밀리기 시작했다.

“크윽, 그래 봤자 넌 인간일 뿐이다! 그 육체는 몰라도 그 마력은 한계가 있을 터!”

공작의 전신에 성광이 흐르며 다시 체력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난무하는 폭염과 광풍을 베어 가며 이라나드 공작이 외쳤다.

“나는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

레펜하르트가 공작의 등 너머를 힐끔거렸다.

난전 속에서 여전히 제국과 안타레스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안타레스의 강자들은 불사신을 상대로 여전히 고전 중이다. 병사들 쪽은 상황이 나았지만, 역시 백색 로브를 걸친 이들의 사용하는 가공할 아티팩트의 힘 앞에 크게 전황을 뒤엎지 못하고 있다.

그래, 저게 이 모든 사태의 문제다.

백색 로브 차림의 은의 현자.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현 시대에 있을 수 없는 고대 기물들.

“그럼 일단 그 신의 가호란 걸 걷어 내 볼까.”

차갑게 뇌까리며 레펜하르트가 뒤로 펄쩍 뛰었다. 마법사 상대로 거리를 주는 것은 자살행위, 공작이 바로 뒤쫓았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발차기를 크게 날렸다.

“타이푼 킥!”

계속 마법사로서만 행세하다 갑자기 무인의 공격을 잇는다. 당황해 공작이 전신을 방어하며 거리를 벌렸다.

기회를 잡은 레펜하르트가 양손을 가슴에 모으며 수인을 맺었다.

“이는 드리워지는 베일, 흐름을 막은 둑이자 기세를 꺾는 방패며 은은히 날려 고요히 잠드는 소요小搖의 이적이라…….”

“어림없다!”

마법 발동을 방해하기 위해 공작이 바로 오러를 떨쳤다. 강력한 블레이드 오러가 뻗어 나가 레펜하르트의 정면에서 박살 났다.

“윽!”

공작은 당황했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으로서 자신의 공격을 막은 것이 아니었다. 오러 방어도 스파이럴 가드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법 방어장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빠르게 주문을 외우고 있을 뿐인데 그 여파만으로 오러도 막을 강대한 기운이 솟구친다. 현존하는 마법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지?’

레펜하르트가 오른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딱 소리를 내며 튀겼다.

“대이적 마법, A.M.P 쇼크웨이브.”

2

푸른 광풍이 불었다.

거대한 빛의 파문이 전장을 덮으며 유유히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청광淸光의 파도가 수십, 수백 미터나 되는 광활한 면적을 질주했다. 마치 극지의 오로라를 연상케 하는 이 빛의 파도는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수천의 안타레스군도, 수만의 제국군도 모두 파도에 휩쓸려 버렸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

“윽?”

“뭐지?”

안타레스군도 제국군도 모두 당황해 멀어져 가는 파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엄청난 게 왔다 간 것 같긴 한데, 어째 달라진 게 없다?

“뭐야?”

“뭐였어, 방금?”

평범한 갑주를 걸치고 평범한 창칼을 든 일반 병사들은 계속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로브를 걸치고 평범하지 않은 무구를 든 이들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이, 이럴 수가!”

“서, 섬광의 검!”

“섬광의 검!”

경악 속에서 은의 암살자들은 오른손을 내민 채 연신 약속된 발동어를 외쳤다. 그러나 파괴의 빛을 뿜어야 할 그들의 장갑, 위대한 고대 기물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완전히 평범한 장갑으로 돌아간 듯했다.

“왜 이래, 이거!”

냉정하던 암살자의 표정이 깨지고 혼돈에 빠진 얼굴이 드러난다. 그들을 보며 러스는 싱긋 웃었다.

“형님이 손을 쓰셨군.”

그는 이미 이 푸른빛을 한번 접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키린트를 뒤로한 채 러스가 슬쩍 몸을 뺐다. 그리고 은의 암살자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레인지 오브 블레이드!”

허공에 검광이 빛의 궤적을 그렸다. 그 자취를 따라 오러로 구현된 청색 칼날의 형상이 떠올랐다. 예전 안타레스 백국을 쳐들어온 오러 유저, 나스단의 오러 스킬을 러스가 입맛에 맞게 개조한 것이다.

열두 개의 오러 칼날이 은의 암살자들에게 쏘아졌다. 암살자들이 당황해 소리쳤다.

“블링크!”

그들의 아티팩트는 작동하지 않았다.

뎅겅.

목이 날아갔다.

오러 칼날이 계속 허공을 가르며 남은 암살자들을 쫓았다. 남은 이들도 당황해 소리쳤다.

“브, 블링크!”

“블링크!”

뎅겅뎅겅.

계속 목이 날아갔다.

“으아아악!”

단련된 은의 암살자라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한 몸, 블링크 부츠가 작동 정지되니 러스의 공격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순식간에 열 명여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피분수를 뿜으며 쓰러지는 저들의 시체를 보며 러스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형님은 신비한 양반이야.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예상을 했음에도 여전히 신기한 결과다. 조금 전까지 잘만 쓰던 아티팩트가 바로 동작을 멈춰 버리다니?

“배신의 기사!”

그제야 뒤를 쫓은 키린트가 치를 떨며 참격을 날렸다. 교묘히 검세를 흘리며 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가만, 그럼 이쪽도 효과가 사라졌을라나?’

키린트의 체내에 이식된 아티팩트의 존재도, 저 부활의 힘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러스다. 그냥 단순하게 ‘쟤들이 멈췄으니, 얘도?’ 정도에 불과한 추측이었다.

“반월참!”

러스의 칼날이 호선을 그렸다. 굳이 허공검이 아닌 반월참을 쓴 이유가 있었다.

과연, 섬뜩한 예기가 어깨를 노리는 걸 알면서도 키린트는 무시했다. 만약 허공검이었다면 피했을 것이다.

키린트의 어깻죽지가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흥, 내겐 세이어의 가호가…….”

태연하게 부상을 무시하고 계속 돌진하던 키린트의 안색이 일순 굳었다.

“……가호가?”

붉은 피가 계속 흐르며 사라져야 할 통증이 계속 느껴진다.

걸음을 멈춘 채 키린트가 경악해 러스를 바라보았다.

“효과가 사라졌군.”

러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동시에 허리춤에서 또 다른 검을 뽑았다.

완전한 빛의 검, 일루미네이터였다.

“그럼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키린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 ☆

현자 브렉티스가 레펜하르트에 의해 죽은 후, 아틸카의 목표는 폴스타 후작으로 옮겨졌다. 선두에 서서 유독 지휘에 열중인 적을 그냥 놔둘 수는 없으니까.

“붉은 하늘, 모래와 먼지 되어 풍상을 사르는도다!”

폭풍 망치의 주술이 폴스타의 블레이드 오러를 두들겼다. 폴스타 후작도 사력을 다해 반격에 나섰다. 아틸카 정도 상대가 자신을 공격하는데 지휘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검을 십자로 크게 그으니 청색의 오러가 산탄 형태로 쏟아졌다.

“코발트 스트림!”

주술의 기운과 청색의 오러를 서로에게 작렬했다. 아틸카 정도의 괴물을 상대로 폴스타 후작 혼자서는 짐이 너무 무거웠다. 테이칸 왕국의 오러 유저, 체르벨 경이 가세했다.

“내가 돕겠소, 현자 렌시크!”

원래 할라인 왕국과 테이칸 왕국은 대대로 앙숙이라 오러 유저끼리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러나 현재 이 두 사람은 왕국을 초월해 은의 현자 렌시크와 그의 협력자로서 싸우고 있었다. 두 중년 검사가 몇 번이나 손을 맞춰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합격술을 펼쳤다.

두 오러 유저를 상대로 아틸카도 진지하게 전투에 임했다. 명정광폭화를 쓰지 못하는 현재의 아틸카에게 이 둘의 합공은 상당한 위협이었다.

맹렬한 사투가 벌어졌다. 끔찍한 폭발과 굉음이 이어졌다.

1 대 2의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며 점점 폴스타 후작과 체르벨 경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들 역시 다른 은의 현자처럼 위대한 세이어의 가호를 입은 몸이다. 결코 지치지도 상처 입지도 않는 육신을 믿고 마음껏 날뛰었던 이들이다.

그러나…….

“부상이…….”

어느새 이들의 전신엔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아틸카의 공격에 의해서다.

부상 자체는 찰과상일 뿐이고 오러 유저쯤 되면 크게 전투력에 지장이 있을 수준이 아니지만, 현재 이들이 진정 상처 입은 부위는 육체가 아니다.

‘부상이 낫지 않아!

‘맙소사, 신의 가호가!’

반대편 전장에선 걸포드 경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으으, 세이어시여…….”

상처가 낫지 않는다.

지친 육신에 활력이 돌아오지 않는다.

“크랄타! 랄카 라파스!”

스탈라가 오크어로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하며 열두 비검을 날렸다. 오러를 머금은 빛살 같은 공세 앞에 걸포드는 정신없이 방어 일변도로 움직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연신 물러설 뿐, 그는 감히 스탈라에게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분명 더 지친 것도, 더 상처 입은 것도 스탈라 쪽인데 오히려 걸포드 경의 움직임이 둔하다. 지금 그를 얽매고 있는 것은 상처도 피로도 아니었으니까.

‘왜냐! 어째서 세이어의 가호가 사라진 것이냐!’

신의 가호가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한 부상 이상의 공포였다. 절로 움직임이 위축되고 공세가 소심해진다. 전장 여기저기, 세이어의 가호 아래 불사를 자랑했던 모든 은의 현자들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똑같이 부상입고 똑같이 지쳤지만…….

“더 이상 되살아나지 못하겠지!”

“더 이상 되살아나지 못한단 말인가!”

한쪽은 희망이 생겼고, 반대쪽은 공포가 생겼다.

그 차이는 실로 컸다.

“헉, 헉…….”

제이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시리스의 공세가 더욱 매서워졌다.

“가라, 우다르 묠니르!”

거대한 전격의 정령 거인이 우레의 망치를 휘두른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뇌성이 작렬하며 번개가 사방으로 몰아쳤다. 그 전격의 폭풍 속에서 제이드가 다시금 마력을 끌어 올렸다.

“포스 필드!”

마력장과 전격이 충돌해 대기를 찢었다. 굉음 속에서 시리스가 몸을 날렸다.

“하앗!”

더 이상 공간 이동을 할 수는 없었다. 저 푸른빛은 그녀의 블링크 부츠마저도 정지시켜 버렸다.

하지만 시리스의 부츠가 정지되었다는 소리는 곧, 제이드의 그것도 정지되었다는 의미다. 코앞까지 다가온 시리스의 공세를 더 이상 피할 수가 없다.

쌔애액!

엘리멘트 소드가 파공음과 함께 약해진 포스 필드를 갈랐다. 이내 메사이어의 검날이 소용돌이치는 화염에 휩싸여 제이드를 강타했다.

“샐러맨더!”

폭음과 함께 제이드의 왼팔이 폭염에 휩싸였다.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악!”

땀범벅이 되어 제이드가 간신히 바람 걸음의 마법을 발동했다. 겨우 직격은 피했지만 왼팔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자신의 마법에 불타 버린 시리스의 왼팔과 마찬가지로!

“아하하하!”

시리스가 미친 듯이 웃었다.

“둘 다 똑같이 병신 됐네? 그럼 어느 병신이 더 빨리 죽나 볼까?”

쌍검을 휘두르며 시리스가 광기에 휩싸여 돌진해 갔다. 제이드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크, 크윽!”

똑같이 지쳤고, 똑같이 부상을 입었고 똑같이 블링크 부츠를 잃었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생생한 반면 자신은 숨 쉬기도 힘들다. 호흡이 가빠 오니 집중력도 떨어지고 통증이 심하니 마법 발동도 자꾸 늦어진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제이드가 불타 버린 왼팔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대체 왜? 왜 갑자기 부상이 낫지 않는 거냐? 분명 세이어께서 가호를 내리셨거늘!’

위축된 제이드를 시리스가 매섭게 몰아쳤다. 일곱 정령을 연달아 부르고 엘리멘트의 힘을 사방에 뻗어 내며 마법의 언령을 퍼붓는다.

“아쿠아 애로우, 블러드 드론, 에어 봄!”

다양한 마법으로 운신을 막고 정령술로 마법을 상쇄시키며 시리스는 쉴 새 없이 엘리멘트 소드를 휘둘렀다. 누가 봐도 명확할 정도로 제이드의 패색이 짙어졌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칼날 앞에 제이드가 이를 갈았다.

“제기랄!”

차라리 처음부터 같은 조건으로 싸웠다면 오히려 대등한 승부를 벌였을 것이다.

메사이어를 얻고 시리스의 실력이 월등히 강해졌다지만 제이드 역시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랐다. 둘의 기량은 거의 동등, 이렇게 일방적으로 몰릴 만큼 실력 차가 나질 않는다. 게다가 시리스의 메사이어 역시 현재 작동이 정지된 상태, 솔직히 실력만 따지면 오히려 제이드가 위였다.

불사의 육체, 무한의 마력을 믿고 마구 날뛰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장거리 경주를 할 때는 페이스 조절이 필수인 법, 의지하던 권능이 사라지니 정신적으로 흔들려 페이스마저 깨지며 본 실력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원래 마법사는 전사보다 훨씬 정신력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다.

“일어 오르는 포, 폭염…….”

결국 마법을 발동하던 제이드가 집중력이 깨지며 실책을 보였다.

그리고 시리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죽어 버려!”

메사이어가 아닌 평범한 롱 소드가 제이드의 복부를 깊숙이 관통했다.

“……!”

비명조차 터트리지 못한 채 제이드가 눈을 부릅떴다. 시리스가 예리한 시선으로 상대를 훑어보았다.

조금 전이었다면 이대로도 그 ‘괴상한 빛’과 함께 도로 부활해 쌩쌩한 모습으로 반격했겠지만…….

‘역시!’

내장이 헤집어진 쇼크로 인해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죽어 버린다. 환하게 웃으며 시리스는 마저 손을 휘저었다. 일단 죽은 걸로 보이긴 하지만, 언제 또 부활할지는 모르는 것.

‘혹시 모르니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죽여야지.’

마력에 보호받지 않는 마법사의 육체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시리스는 쉽게도 제이드의 목을 베고 두 팔을 베고 두 다리를 자르고 몸통마저 세 조각으로 동강 내 버렸다.

“아, 속이 다 시원하네!”

박살 난 제이드의 시체가 뿌리는 피의 비를 맞으며 그녀는 후련하게 웃었다.

☆ ☆ ☆

불사를 자랑하던 은의 현자 소속 오러 유저들은 불사성을 잃자 그 반동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타레스의 강자들이 취한 역공에 하나 둘 밀리기 시작했다.

발휘할 실력 자체가 없어 아티팩트에만 의지하던 은의 암살자들은 더더욱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했던 은의 현자 소속 마탄술사들.

그러나 가공할 위력의 마탄을 쏘아 대던 그들의 마창은 작동을 멈췄다. 평범한 일개 창이 되었다.

더 이상 그들은 마탄병대가 아니었다. 그냥 창술도 제대로 모르는 떠버리 창병대에 불과했다.

“으아악!”

“커억!”

흥분한 타시드와 오크 전사들은 너무도 손쉽게 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강력한 정령 소환으로 엘프들을 괴롭히던 은의 암살자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소, 소환! 샐러맨더!”

“궁극 소환! 우다르 묠니르!”

아무리 애타게 불러 보아도 정령은 전혀 소환되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수많은 정령과 화살이 날아들었다.

“나와 줘요, 샐러맨더. 나와 함께 춤춰요.”

우아한 손짓으로 샤일렌은 연신 불도마뱀을 불러 전장을 불태웠다.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 보랏빛 머리칼의 엘프들이 달려갔다. 구슬을 든 은의 암살자들이 당황해 소리쳤다.

“마, 막아라!”

“저들을 막아!”

그렇지만 무슨 수로?

더 이상 정령을 소환할 수 없는 이들은…….

“그냥 유리구슬 든 멍청이들일 뿐이지!”

달려가는 엘프들의 선두에 선 사내, 한때 이니야의 부관이었으며 지금은 엘프 궁병대장인 세르펠이 시위를 강하게 당겼다.

“내 친구 사라나, 내 시위에 깃들어 주오.”

청량한 음성과 함께 시위를 놓는다.

섬광 같은 화살이 허공을 꿰뚫었다.

“으아아악!”

은의 암살자가 터트린 처절한 비명이 제국군 전역에 퍼져 나갔다. 제국군의 사기가 떨어지다 못해 바닥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세이어의 사도들께서…….”

가공할 아티팩트로 무장한 백색 로브의 전사들.

그들은 제국군을 승리로 이끄는 절대 주역이었다.

그런 이들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지녔던 이들이, 일개 병사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

전황은 일거에 뒤집어졌다. 수적으로 열세인 안타레스군이 오히려 세 배에 달하는 제국군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다시 부활한 수천의 광전사 트롤이 있었다.

“크아아아!”

“카오오오!”

광포한 포효를 터트리는 광전사 트롤들, 사실 이들은 전투 내내 전혀 변한 것이 없다. 전황이 어찌 되었건, 동료가 죽어가고 자신의 팔다리가 날아가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그 순간마저 이들은 광기에 차 달려들고 또 달려들 뿐이다.

변한 것은 이들을 막고 있던 천 명의 마검사 쪽이었다.

“으악!”

“몸이 안 움직여! 빌어먹을!”

“거, 검이 너무 무거워!”

그들이 입고 있던 것은 두께가 손가락 마디를 넘어서는 중갑 중의 중갑.

그들이 휘두르고 있던 것은 2미터 길이의 거대하기 짝이 없는 대검.

신체 체중보다도 몇 배나 무거운 갑옷과 검이었다. 이걸 입고도 자유롭게 날뛸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마갑에 깃든 마법의 힘 덕분, 평범한 인간이라면 저딴 걸 입고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마갑째로 쓰러진 마검사들이 애써 해제 시동어를 외친다.

“리무브! 리무브!”

“젠장, 이거 왜 안 벗겨지는 거야!”

천 명의 마검사가, 천 개의 족쇄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노리고 덤벼 오는 것은 두 눈을 붉게 물든 광기의 괴물들.

“카카카카!”

효력을 잃은 마갑은 그저 단단한 갑옷일 뿐. 아무리 단단한 갑옷이라도 그 연결부는 연약한 법이다.

광폭화한 트롤들이 쓰러진 마검사들을 붙잡아 사지를 잡아 뜯었다.

“켈켈켈켈!”

“크히히히!”

팔을 잡고 다리를 잡고, 그대로 뽑아 버린다. 근육이 찢어지며 핏물이 터져 나오고 끊어진 힘줄이 허공에 덜렁거린다. 모가지를 통째로 비틀어 뽑으니 피범벅이 된 척추가 딸려 나와 섬뜩한 외관을 드러낸다.

비명과 절규 속에 천 명의 마검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갔다. 그리고 그 피에 물든 광기의 해일은 이내 제국군을 덮쳤다.

굳건한 둑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진다는 격언이 있다.

지금 형국은, 굳건한 둑이 구멍이 뚫린 정도가 아니라 통째로 허물어진 격이었다. 그리고 밀려오는 것은 자비심 없는 수천의 광기의 괴물들이다. 승기를 잡은 안타레스군이 한껏 흥분해 그 뒤를 쫒았다.

처참한 지옥도가 전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 ☆ ☆

“이럴 수가…….”

전장을 바라본 이라나드 공작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은의 현자 중에서도 고위급인 그는 ‘세이어의 가호’가 어떤 원리로 구동되는지 알고 있었다. 대부분 아무것도 모른 채 마취 상태에서 시술을 받았지만 그는 미리 계획을 알고 심장 반대편에 고대 아티팩트 ‘신 내림’을 이식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는 덜 당황할 수 있었다. 정말 ‘신의 기적’이 사라진 게 아니라 단순히 아티팩트의 작동이 멈췄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덜 당황했다 해서 당황하지 않았단 소리는 아니다.

“어떻게 저 많은 아티팩트를 단 한 방에…….”

똑똑히 보았다.

레펜하르트가 발한 청색 빛의 해일, 그것이 전장을 뒤덮는 순간 모든 아티팩트가 멈춰 버리는 광경을.

현세의 마법사가 만든 평범한 마법기가 아니다. 고대 기물 중에서도 금기에 속하는 강력한 유물들이다. 그걸 작동 정지시키는 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운데 하나도 아니고 수십, 수백에 달하는 아티팩트를 동시에 멈춰 버려?

솔직히 이쪽도 신의 위업에 맞먹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망연자실한 이라나드 공작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말했다.

“어찌할 텐가?”

공작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잠시 사고가 마비되어서인지 레펜하르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속 싸울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대들은 패했다. 하지만 아까운 목숨을 저대로 죽게 할 순 없지 않은가?”

턱 끝으로 전장을 가리키며 레펜하르트는 말을 이었다.

“지휘관이라면 무릇 수하 병력을 무사히 후퇴시켜야 할 의무도 있겠지? 물러난다면 뒤쫓지 않겠다.”

그리고 주먹을 들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아니면, 여기서 내 손에 죽어 버리고 수하들도 모두 죽게 내버려 둘 텐가? 사실 안타레스 입장에선 그쪽이 더 낫다. 그쪽을 선택한다면 나도 반대할 생각은 없군.”

투지를 보이며 씨익 웃는 권왕의 모습에 공작은 흠칫 떨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자신들은 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모두 죽을 수는 없다.

슬쩍 뒤로 물러서며 공작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여기선 상대의 오만함을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권왕이여, 그대의 배려, 승리자의 아량에 감사하오.”

공작이 등을 돌렸다. 제국군 쪽으로 몸을 던지며 그가 한마디를 더 남겼다.

“오늘의 은혜, 그리고 이 수모까지! 모두 갚을 것이오!”

“빨리 후퇴나 시키시지. 곧 요새까지 쳐들어갈 셈이니.”

멀어지는 공작의 뒷모습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한 소리를 던졌다. 공작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잔존 병력을 지휘하고 요새에 주둔 중인 제국군까지 무사히 후퇴시키려면 한시가 촉박한 것이다.

이라나드 공작이 완전히 시야 너머로 사라지자 그제야 레펜하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와, 허세 먹혔다. 죽다 살았네.”

가슴까지 쓸어내리며 혀를 내두른다.

“저대로 덤볐으면 진짜 위험할 뻔했는데.”

겉으론 태연자약, 방약무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사실 현재의 레펜하르트는 모든 밑천이 탈탈 털린 상태였다.

체력이며 오러는 열흘간 쫄쫄 굶고 시달린 탓에 바닥을 기고 있다. 거기에 10서클 마법, A.M.P 쇼크웨이브를 한계 범위까지 발동시키다 보니 마력도 싹 다 날아간 것이다. 마력을 남기고 발동시키기엔 저들이 가진 아티팩트 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수틀리면 당장 튈 생각으로 슬쩍 발끝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저 양반이 순진해서 다행이지.’

용케 허세가 먹혀 주었다. 눈치를 보며 레펜하르트도 등을 돌렸다. 눈앞의 위기를 넘겼으니 일단 전장에서 이탈할 생각이었다.

‘뭐라도 좀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이대론 도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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