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권 제66장 총력전 (67/84)

제66장 총력전

1

세렐라인이 고했다.

“아버지여, 준비가 끝났나이다.”

세이어가 답했다.

“준비되었다면 행하라.”

그녀가 두려워하며 되물었다.

“정녕 이것은 괜찮은 일입니까? 정녕 분노치 않으시나요?”

“이미 허락한 일이다. 개의치 않노라.”

세이어가 은발의 소녀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유쾌하진 않으나 불쾌하지도 않다. 필요한 일임을 알고 있고 그 결과를 알며 돌이킬 방법을 안다. 그러니 분노치 않는다.”

“그럼, 움직이라 명하겠습니다.”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세렐라인을 향해 세이어는 손가락을 튀겼다. 그녀가 다시 속세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세이어는 미간을 짚었다.

두통은 사라졌다.

더 이상 그를 이곳에 가둬 둔 그 기이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이어는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두통은 사라졌지만 기이한 기분이 떠나질 않는다. 뇌리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이 기묘한 불안감이.

그는 신음했다.

“으음, 대체 이 느낌은 무엇이지?”

☆ ☆ ☆

“아! 돌겠다!”

레펜하르트는 고함을 터트렸다. 황금빛 오러가 폭풍처럼 일어 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니, 힘 빼지 말아야지. 먹은 것도 없는데.”

한숨을 쉬며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기름 위에 비친 무지개를 연상케 했다. 끝없이 일그러지고 이지러진 무엇인가의 형상.

바로 그가 돌아가야 할 원세계의 모습이다.

“아, 잘되고 있었는데…….”

투덜대며 레펜하르트는 다시 연산을 시작했다. 지금 떠도는 이 세계의 외곽. 차원 계면으로부터 시공의 특이점을 찾아야 했다.

테스론과의 공명을 통해 현 세계의 시공 좌표를 찾는 것은 훌륭히 성공했다. 명확한 좌표를 바탕으로 시공의 문을 열고 원세계의 코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거기서 이변이 일어났다.

테스론의 육체를 담은 세이어의 현 신체.

그것은 알 수 없는 강력한 결계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어떠한 시공간의 간섭도 배제하는, 레펜하르트조차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초월적인 결계였다.

현관 앞까지 왔는데 대문이 잠겨 있는 셈이다.

결국 레펜하르트는 원세계를 코앞에 두고 세계의 ‘바깥’을 떠돌고 있었다. 그러길 벌써 사흘째, 세계의 바깥은 허차원처럼 존재 붕괴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하위 생존 주문만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벌써 일주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신세였다.

뭐, 그 정도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신은 일주일 정도의 단식으론 끄덕도 하지 않으며, 수분 추출 주문을 응용하면 빠져나간 수분의 대부분도 다시 육체로 환원할 수 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수분이 빠져나간다는 것은 다른 것도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크고 굵은 갈색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에 올리길 천하게 여기지만 세상 그 누구도 만들지 않는 이가 없는 그것!

천하의 권왕이자 전설의 마왕이라도 인간인 이상, 생리 현상은 어쩔 수 없다.

‘윽, 또 마렵다.’

레펜하르트는 슬쩍 바지를 까고 생존 주문 장벽 일부를 열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슥 배설물 투척…….

“……그래도 이 짓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는군.”

사흘 전, 결국 참다 참다 못 참은 그때는 진짜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는데 두 번째쯤 되니 그러려니 하는 심정이다.

‘이게 마지막이겠지? 설마 더 나올 게 있을라고? 이젠 뱃속에 든 것도 없구먼.’

저 멀리 차원 계류에 실려 동동 떠내려가는 ‘그것’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인류 역사상 세계의 바깥에 똥 싼 인간은 내가 최초이지 않을까?’

위업은 위업인데, 정말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위업이다.

“흑흑…… 아, 비참하다.”

궁상을 떨면서도 레펜하르트는 다시 술식 연산을 시작했다.

세이어의 육체 좌표가 거부된 이상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 좌표를 역산해 세계의 다른 공간 좌표를 찾고 있는 중인데, 이것이 영 쉽지 않은 것이다.

수식 자체는 안다. 문제는 연산력이 못 따라 준다.

“그래서 론의 위치가 할론으로 변하면, 여기서 위치가 역순하니까 제타를 제곱해 경으로 바꾸고…… 윽! 그새 또 바뀌었냐?”

혼탁한 마력의 폭풍이 끝없이 세계의 바깥을 타고 흐르니 방금 계산한 술식도 몇 분 지나지 않아 현 상황에 맞지 않게 된다. 그러니 몇 번이나 좌표를 잡아도 금방 무용지물이 된다.

이따위 술식 따위 몇 초 안에 연산할 수 있었던 전생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치겠네…….”

아쉬웠다. 뭔가 지표가 될 것이 하나만 더 있어도 해결책이 되겠는데, 그게 없다.

답답해 레펜하르트가 성질을 냈다.

“진짜 나 찾는 사람 하나도 없나? 수색 주문 같은 거 거는 인간도 없어? 그런 거라도 하나 있으면 어떻게든 될 텐데…….”

말은 저리 했지만 레펜하르트는 저게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살아남은 게 용했다. 아마도 안타레스의 다른 이들은 전원 그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으리라.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처음부터 술식을 전개한다.

“할 수 없지, 죽이 되건 빵이 되건 알아서 해 봐야지, 끙!”

세계의 바깥.

아직 레펜하르트는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고 있었다.

☆ ☆ ☆

일단 결정이 떨어지자 카를은 빠르게 움직였다.

제국의 전진기지를 함락시키면서 산맥 내의 안타레스군도 숨통이 트였다. 제국의 반격에 대비할 최소한의 병력만 놔두고 대부분을 산맥 어귀로 집결시키니 그 숫자가 일만이 넘었다.

일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이니야는 카탈란 가드로 진군했다. 진군 도중에 조우한 제국군 대부분은 안타레스군을 상대하지 않고 조용히 후퇴했다.

현재 이니야의 군세에는 산맥 곳곳에 흩어져 유격전을 벌이던 안타레스의 강자들도 대부분 합류해 있었다. 그야말로 안타레스가 지닌 모든 힘이나 다름없으니 제국군 일개 부대가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이다.

큰 저항 없이 안타레스군은 산맥을 넘어 카탈란 가드까지 진군했다. 그리고 요새가 보이는 들판, 작은 숲을 낀 지형에 진지를 구축했다.

일만의 병력이 도열한 대군의 선두, 새하얀 오러의 순록을 탄 채 이니야는 들판 저편을 바라봤다.

협곡을 낀 채 굳건히 서 있는 거대한 요새가 시야에 들어온다. 어찌나 거대한지 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카탈란 가드.”

공략해야 할 입장에서 볼 때, 저 요새의 굳건함은 정신이 아득해질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니야는 침착하게 요새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 어디에도 근심이나 흔들림은 보이지 않았다.

“병력은 이만 정도인가? 첩보의 말대로군.”

요새 전방엔 이미 제국의 대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많은 병력이 빠졌음에도 아직 저 요새엔 이만의 제국군 병력이 남은 상태다. 일만 오천의 본대로 요새 앞을 사수하고 오천의 군세가 농성전을 준비한다. 숫자상으로는 여전히 안타레스군이 불리한 셈이다.

하지만 현재 안타레스군의 사기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두 배나 되는 전력 앞에서도 사기충천한 상태다. 병사들 대부분이 눈앞의 제국군을 보며 겁먹기는커녕 되레 흥분을 흘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들은 이제껏 한 번도 불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싸워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언제나 몇 배나 되는 대군을 상대로 죽어라 싸워 왔다. 이 정도 전력 차는 이미 익숙하다.

“뭐야? 두 배밖에 안 돼?”

“좋아, 진짜 할 만하겠어!”

“이번에야말로 놈들의 피를 흘려 주지!”

오크는 그렇다 치고, 엘프나 드워프마저 살기등등하게 중얼거리는데 사실 꽤 어색한 광경이었다. 엘프나 드워프는 그리 전투를 즐기지 않는 성품이라 알려져 있으니까.

그러나 이곳에 남은 이들은 그 수많은 가혹한 전투를 겪고 또 겪어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반년이란 시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전장을 전전하게 되면 설사 천하의 호인이라도 호전적인 전사가 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자신의 가족, 동포를 위협하는 적 앞에서야 오죽하랴?

게다가 그들 앞에는 너무도 믿음직스러운, 절대적인 전투력을 지닌 존재들이 있는 것이다.

일만의 안타레스군, 그 대열의 선두에 서서 두려움과 흥분으로 명령을 기다리는 수천의 트롤병이었다.

이 전투는 안타레스의 국운이 담긴 중요한 전투. 아틸카가 이끄는 트롤 구루들 역시 그들이 제어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광전사 트롤들을 동원했다. 그 수가 무려 이천이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여신의 은총을 허락하소서…….”

실란이 이끄는 필라넨스 신관단이 트롤병 사이를 오가며 신성 주문을 건다. 트롤병의 광폭화를 이후 해제할 수 있도록 미리 밑 작업을 해 두는 것이었다.

작업이 끝나자 신관단은 빠르게 대열을 벗어났다. 신관단의 임무는 전투 전 신성 가호를 가는 것과 전투가 끝난 후 트롤병의 광폭화를 해제하는 것, 전투 도중에는 할 일이 없다.

신관단을 이끄는 실란이 이니야에게 정중히 목례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여왕 폐하, 부디 무운武運을.”

“실란 대주교, 그리고 필라넨스의 거룩한 종들이여. 안타레스는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하노라.”

여왕의 치하를 뒤로한 채 실란과 필라넨스 신관단은 숲 속의 진지로 돌아갔다. 이제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들의 임무는 부상자 수습과 치유 쪽이다.

멀어지는 필라넨스 신관단을 보며 이니야가 입을 열었다.

“말로이드, 슬로이틀, 저들의 안위를 부탁하오. 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피해는 실로 막심할 테니.”

그녀 곁에서 말을 타고 있던 두 드워프 오러 유저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맡겨 주십시오, 폐하.”

“이 목숨을 걸고, 절대 저들에겐 칼끝 하나 닿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말로이드와 슬로이틀,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오백의 드워프 병력에게 주어진 임무는 필라넨스 신관단의 수호였다.

보통 인간들의 전투에서, 부상자 치유를 맡은 신관단이 공격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기사도뿐 아니라 인간의 도리마저 저버리는 불명예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경우가 좀 다르다. 필라넨스의 신관은 단순한 부상자 치유가 아니라 트롤병의 운용 역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제국이 과연 관례를 인정할 지 확신할 수 없으니 최선의 대책을 마련해 놓아야 했다.

드워프들마저 물러나자 이니야가 눈을 빛냈다.

“안타레스의 전사들이여!”

그녀가 검을 뽑아 들고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뿜어냈다.

“드디어 때가 왔도다!”

찬란한 은빛 검광 아래, 오러로 증폭된 여왕의 외침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비열한 침략자들에게 그대들의 분노를 보여 주어라!”

부우우웅!

전장의 뿔피리가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 ☆ ☆

진격하는 안타레스군의 선두에 선 것은 세 부대였다.

아스레일 경이 이끄는 인간의 군세, 실베릭 나이츠와 안타레스 기사단.

스탈라가 이끄는 오크의 군세, 푸른 곰 부족과 강인한 오크 전사들.

그리고 그들보다도 앞장선 이천의 트롤병.

“으아아아!”

“와아아아!”

달려가는 트롤병들이 일제히 손에 쥔 단검으로 자해를 시도한다.

피가 튀고, 그 피가 도로 상처로 스며들고, 상처가 사라지며 대신 흉악한 이천의 거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지축을 뒤흔들며 무자비한 기세로 돌진하는 이천의 광전사들, 그 선두에 혈신 아틸카와 그 후계자 티티마, 그리고 스물의 트롤 구루가 있었다.

“흑암을 떠도는 가슴속에 한 줌 씨앗 있어 대지를 떠받들 거목의 시작을 노래하리라…….”

아틸카의 주술가에 리듬을 맞춰 티티마와 다른 구루들도 소리 높여 노래 부른다. 이천의 트롤병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크라라라!”

“크아아!”

트롤병을 카탈란 가드의 제국군으로 이끌며 아틸카는 상대 진영을 살펴보았다. 강력한 주술력을 지닌 그는 수많은 제국군의 감정이 허공 위로 어우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긴장과 공포.

두려움과 흥분.

다가올 죽음과 삶 사이의 갈등.

전투를 앞둔 병사들의 다양한 감정이 혼탁한 기류가 되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틸카는 잠시 표정을 굳혔다.

인세에 펼쳐진 지옥도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제국군은 그리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틸카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들을 믿는 것인가.’

포진한 제국군의 선두, 그곳에 천 명에 달하는 중장보병의 대군이 길게 대열을 짜고 있었다. 아마도 트롤 광전사의 돌격력에 대응하기 위한 편제로 보였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기사의 것 못지않은 훌륭한 풀 플레이트 아머다. 아무리 중장보병이라지만, 기사도 아닌 병사에게 입히기엔 지나치게 좋은 무장이다.

새삼 바슈탈론 제국의 저력이 느껴져 아틸카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 제국은 제국이로군.’

괜히 기사가 귀한 존재가 아니다. 원래 전신을 감싸는 금속 갑옷과 전마戰馬 한 마리는 일반 평민이 수십 년을 벌어도 사기 힘든 고가의 물건이다.

인류가 드워프를 노예로 부려 채광 밑 주물 산업이 월등히 발달한 현 시대는 예전만큼 갑옷의 가격이 높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천 명이 넘는 병사에게 전원 풀 플레이트 아머를 제공하는 것은 어지간한 대국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면 아무리 무리한 일처럼 보여도 주저 않고 행한다. 역시 천년이란 세월은 무시할 것이 못 돼.’

감탄하면서도 아틸카는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천 명의 중장보병은 어지간한 돌격 부대쯤은 쉽게 격퇴할 굳건한 성벽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우리의 저주스러운 힘을 막을 수는 없다!”

순식간에 들판을 가로지른 이천의 트롤병이 제국군과 충돌했다. 거대한 망치가 방패를 두들기듯 전장 곳곳에 요란한 금속음이 울린다.

탕! 타탕! 타타탕!

선두에 선 아틸카도 짧은 기합성과 함께 자신의 애병, ‘어머니 은혜’를 휘둘렀다.

“헙!”

둔탁한 나무 몽둥이지만 그 어떤 명검보다도 굳건한 주술적 병기가 한 중장보병의 머리를 노리고 내려찍혔다.

그때였다.

중장보병이 늘어뜨리고 있던 거대한, 2미터에 달하는 대검을 휘둘러 아틸카의 공격을 막은 것은.

“타앗!”

콰앙!

나무 몽둥이와 2미터짜리 거검이 부딪혀 폭음을 냈다. 중장보병이 비틀거리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쓰러지진 않았다.

아틸카가 놀라 신음을 흘렸다.

“음?”

비록 가볍게 휘두른 일격이지만 그 속에 담긴 주술력은 범상치 않았다. 어지간한 기사조차도 한 방에 날릴 위력이었다. 적어도 일개 중장보병이 감당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막아 냈다?

게다가 고작 몇 발자국 물러서는 것에 그쳤다?

“어림없다! 이 더러운 악마의 종자들!”

중장보병이 재차 대검을 휘두르며 공격해 온다. 타시드가 사용하는 참마도만큼이나 거대한 검을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휘두른다. 도저히 평범한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당황하며 아틸카가 주술력을 끌어 올렸다.

“내 몸이 크게 자라 노간주 삼림을 발로 찼도다!”

신체 능력을 증폭시켜 다시금 아틸카가 공격을 시도했다. 예리하게 꺾여 파고드는 나무 몽둥이의 끝이 대검의 궤도를 피해 중장보병의 가슴을 강타했다.

“커어억!”

갑옷이 찌그러지며 중장보병이 나가떨어졌다. 한 방에 상대를 쓰러뜨렸음에도 아틸카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지금 날린 일격은 아틸카로서도 상당히 힘을 쓴 것이었다. 이 정도면 갑옷과 사람이 통째로 박살 나야 했다. 그런데 고작 찌그러지는 정도에 그쳤다?

한낱 중장보병이, 무슨 차탄의 마검사나 신성검을 익힌 성기사급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틸카가 속으로 당황을 토했다.

‘이놈들, 그냥 보병이 아니야!’

과연, 나가떨어진 중장보병의 전신 갑옷 표면에 마법적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복잡하게 얽혀 마치 미술적 무늬처럼도 보이는 저 기하학적인 문양이 왠지 눈에 익었다.

‘실베릭 나이츠가 쓰던 마갑?’

주위를 둘러보니 그런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아닌 놈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아틸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건 천 명의 중장보병이 아니다!’

천 명의 가공할 마검사가, 마법적 문양을 빛내는 갑주를 걸친 채, 천 개의 대검을 휘두르며 매섭게 반격한다.

인간의 함성이 광포한 트롤의 포효를 묻으며 들판 가득 울려 퍼졌다.

“보아라! 이것이 인류의 힘이다!

“세이어께서 우리를 가호하신다!”

☆ ☆ ☆

돌진하던 트롤병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제국군의 진영 앞을 막은 천千의 방패 앞에서.

그저 방어용으로만 입혀 놓은 것이라 여겼던 천 개의 갑주, 그것이 전부 마법적 문양을 발하며 가공할 기운을 전장에 펼치고 있었다.

“폭염의 불꽃, 플레임 스트라이크!”

“뇌전의 혀, 내리꽂혀 적을 친다! 라이트닝 쇼크!”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며 수많은 마검사들이 강력한 마법을 트롤병에게 날려 댔다.

아무리 광폭화한 트롤이 오우거와 맞먹는 괴물이라지만, 저들의 마법은 오우거조차도 죽일 수 있는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다. 전장 곳곳에서 수많은 트롤병들이 불타 쓰러지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뒤를 따른 아스레일과 스탈라 입장에선 실로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작전대로라면 돌진한 트롤병이 적진을 뚫고 중앙 돌파를 노려야 했다.

아스레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가로막히는 경우에 대해선 들은 적이 없는데?”

모든 상황을 고려하는 카를조차도, 설마 트롤병의 돌진 자체가 막힐 거란 예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카를이 대비한 작전은 저들이 돌진을 피해 부대를 좌우로 갈라 포위 공격으로 전환하는 상황, 그때 아스레일과 스탈라가 그 양익을 담당해 적을 분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뚫리지 않으면 전혀 상황이 달라진다.

“으아아!”

“적을 쳐라!”

굳건한 마검사의 방어를 바탕으로 제국군이 역습을 취했다. 마검사들 뒤로 제국의 기사와 보병들이 안타레스 기사단과 오크 전사들을 덮쳐 갔다. 딱히 특이한 마갑을 쓴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지휘관들이 평범하지 않았다.

“대열을 넓혀라! 모조리 포위해 섬멸하는 것이다!”

제국의 양익, 그 좌측을 맡은 선두에서 블레이드 오러가 솟구쳤다. 제국의 오러 유저 중 하나인 휘스턴 경이었다. 그 가공할 힘 앞에선 달인의 경지에 든 안타레스 기사단의 랜스 차징도 무용지물이었다. 블레이드 오러가 공간을 가를 때마다 거창과 기마, 기사가 동시에 일도양단되어 피와 파편을 뿌려 댔다.

“크으윽!”

“으악!”

비명 속에서 휘스턴 경은 파죽지세로 안타레스 기사단의 진형을 갈라 버렸다. 순식간에 아스레일의 코앞까지 도달한 휘스턴이 차갑게 웃었다.

“배신의 기사를 기대했는데 고작 안타레스의 기사단장인가? 아쉽구나!”

가차 없이 날아오는 오러의 참격에 아스레일이 사색이 되어 몸을 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블레이드 오러가 그를 비껴 지나갔다. 휘스턴이 살짝 감탄사를 흘렸다.

“호? 이걸 피해? 젊은 녀석이 제법 경지에 올랐구나.”

저 정도면 오러 각성을 코앞에 두었다고 해도 좋을 실력이었다. 별일 없다면 몇 년 안에 각성을 이루리라.

“하지만 아직 틀을 벗지 못했다!”

코웃음을 치며 휘스턴이 후속타를 날렸다. 오러 각성을 코앞에 둔 것과 실제로 각성한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운 좋게 한 번 피할 순 있지만 두 번은 허용할 수 없다!

그때 아스레일 좌우의 은빛 갑주 기사들이 그 사이를 끼어들었다.

“막아!

“단장님을 지켜라!”

아스레일과 함께 출진한 실베릭 나이츠였다. 세 명의 실베릭 나이츠가 모든 마력을 끌어 올려 검에 실어 휘둘렀다. 한 줄기 블레이드 오러와 세 개의 대검이 허공에 충돌했다.

가공할 폭음과 함께 세 개의 대검이 동시에 박살 났다. 막아섰던 실베릭 나이츠 역시 일격에 나가떨어졌다.

“크윽!”

“으윽!”

역시 실베릭 아머와 진짜 오러 유저 사이엔 상당한 격차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휘스턴 경은 오히려 감탄했다.

“이 일격을 막다니, 보통 마갑이 아니군!”

뒤이어 다른 실베릭 나이츠도 가세해 휘스턴 경을 공격했다. 제국 측도 아군의 장수가 홀로 싸우는 걸 두고 보지 않았다. 트롤병을 막던 천 명의 마검사, 그중 20기 정도가 떨어져 나와 합세했다.

실베릭 나이츠와 제국의 마검사들이 뒤섞여 전장 가운데서 사투를 시작했다.

유리한 건 제국 측이었다. 마검사들의 원호를 받으며 휘스턴 경이 절묘하게 실베릭 나이츠를 농락하기 시작했다. 숫자는 제국 측이 더 적었지만 피는 안타레스 쪽이 더 흘리고 있다.

뒤로 물러선 아스레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좋지 않은 흐름이었다.

적진을 유린해야 할 실베릭 나이츠 전원이 발이 묶여 버렸다. 선두가 막히며 흐름이 끊기니 안타레스 기사단이 자랑하는 랜스 차징을 쓸 ‘거리’가 나오질 않는다. 난전으로 돌입해 혼탁한 진흙탕 싸움이 되어 버렸다.

제국의 우익이 공격한 스탈라가 이끄는 오크 전사대 쪽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오크 대모 스탈라! 제국의 세랄이 그대를 상대한다!”

“죽여 주마, 이놈!”

스탈라와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이 제국의 오러 유저 세랄과 예의 그 ‘마검사’들에 가로막혀 버린 것이다. 이쪽 역시 난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초반 기세가 완전히 꺾인 안타레스군을 제국군은 무섭게 몰아쳤다. 예측했던 것과 전혀 다른 전개였다. 본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를로서는 실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뭐지, 저 병력은? 어떻게 저런 병력이 있을 수 있는 거야?’

실베릭 나이츠와 맞상대하는 제국 마검사의 모습이 보인다. 적어도 저 마갑 역시 실베릭 아머급이란 소리다.

‘그런 마갑이 무려 천 개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때 차탄의 마검사가 천 명이 넘는다곤 했지만, 그중 대부분은 그저 단순한 마검을 들었거나 경량화된 갑주를 걸치고 단순한 공격 마법 마도구 몇 개를 지닌 것이 전부였다. 진정한 마검사, 다섯이 모이면 오러 유저도 상대한다는 제플린 나이츠는 차탄 공국에서도 수십 명에 불과했다.

‘함정이 있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악하면서도 카를은 바로 다음 전략을 떠올렸다. 미리 준비해 둔 것은 아니지만 희대의 지략가인 카를은 이 짧은 순간에도 훌륭히 대응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일단 선봉대를 물린 뒤 본진을 전진시키며 러스 경과 타시드 경으로 하여금 제국의 양익에 협공을…….’

여기까지 생각하던 카를은 문득 소름 끼치게 놀랐다.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너무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잠깐! 광폭화한 트롤병을 무슨 수로 후퇴시키지?’

2

광폭화한 트롤을 제어하는 방법은 그들의 이성을 다시 깨우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광증을 유도해 시야를 좁게 하는 것일 뿐이다. 이제 와서 아틸카나 티티마가 명령을 내린다고 트롤병들을 물릴 수가 없다.

그렇다고 트롤병들의 광폭화를 해제시킬 수도 없다. 저 혼탁한 전장에 필라넨스 신관들을 진입시킬 수도 없을뿐더러, 그래 봤자 결과는 이천 명의 민간인이 살기등등한 천 명의 마검사 앞에 맨몸으로 서 있게 되는 꼴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실책,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책이었다.

광폭화한 트롤병의 괴력, 그 가공할 전력에 취해 버린 것이 원인이다. 절대적인 힘을 손에 넣었다 생각해 방심해 버렸다.

‘세상에 ‘절대’ 따윈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통탄하며 카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는 동안도 전황은 계속 기울고 있었다. 수많은 마검사가 안타레스 선봉대, 수천의 광폭화한 트롤을 학살하며 잔혹하게 밀어붙인다.

“크라라라!”

“크아아아!”

광폭화한 트롤이 가공할 위세로 계속 공세를 취하지만…….

“흥, 어리석은 짐승 같으니!”

“일단 대응할 힘만 있으면 생각 없는 막주먹 따위 누가 맞겠냐!”

마검사들은 비웃음까지 흘리며 간단히 물리친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트롤병은 전멸해 버린다.

“카를?”

“카를 재상?”

전황이 다급해지자 본진의 장수들이 카를을 바라보았다. 빨리 명령이 하달되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카를은 깃발을 들지 못했다.

그가 떠올린 이 상황의 대응 전술은 수십 개, 그 모두가 트롤병의 후퇴를 전제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 전제부터가 부정당했으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안타레스에 몸담은 이래 최초로, 카를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침묵했다. 순간 뇌리가 마비되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떠오르는 것은 끝없는 스스로에 대한 회한과 분노뿐.

‘젠장, 이러고도 무슨 얼어 죽을 현자냐!’

수뇌부의 명령이 없다. 눈앞에서 동료가 죽어 가는데 아무런 지시가 없다.

불안감이 장수들뿐 아니라 병사들에게까지 퍼져 나간다.

그때였다.

“안타레스의 전군은 들어라!”

이니야가 증폭된 음성을 전군에 퍼뜨렸다.

“모두 진격하라! 모든 장수들에게 현장의 상황에 따라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움직일 것을 명한다!”

당황한 카를을 기다리지 않고 이니야가 직접 움직인 것이었다.

검을 뽑고 영수의 순록을 몰며 안타레스의 여왕이 무작정 군세를 이끌고 앞장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안타레스의 용사들이여! 그대들의 장수를 믿어라! 그동안의 전투를 믿어라! 그대들의 장수는 현명하고 그대들은 강하다! 우리는 이미 이런 전장을 수없이 이겨 오지 않았느냐!”

불안감 대신 다시 한 번 사기가 올랐다.

“짐을 따르라! 안타레스의 깃발을 따르라! 그러면 이길 수 있다!”

그렇다.

여왕의 말 대로였다.

어차피 이런 불리한 싸움은 지난 반년 내내 이어 오던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이들은 그 가혹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전사 중의 전사뿐이었다.

안타레스 전군이 움직였다.

“가자아아!”

“모조리 죽여 버려!”

“전군 돌격!”

잠시 패색이 보였던 전황이 다시 변했다. 안타레스의 군세가 하나하나 투입되며 제국군과 맞붙는다. 그 기점이 되는 것은 냉기의 안개를 사방으로 퍼뜨리는 이니야였다.

“북해의 숨결!”

냉기로 전장을 제어하며 제국군 좌측에 뛰어들어 단숨에 전투의 양상을 제압한다. 멍하니 정신을 놓았던 카를이 그 광경에 감탄사를 흘렸다.

“아아…….”

전략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실로 불합리한 광경이었다.

대책 없이 전군을 움직이고 가장 방어가 뛰어난 곳에 일국의 우두머리가 직접 뛰어들다니? 이것이 장기판 위였다면 실로 자살행위라 평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먹혔다.

그야말로 시기적절하게,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 일보 직전에 맥을 끊으니 파도처럼 몰려오던 제국군의 진격이 주춤해졌다.

또한, 아무 작전도 하달받지 못했음에도 안타레스의 장수들은 실로 유기적으로 연동해 움직였다. 그들에겐 이미 그동안 수없이 힘을 합쳐 온 경험이 있고 목숨을 건 신뢰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여왕은 실로 대단하시군. 저건 머리로 생각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전략과 전술 대신 분위기와 기세를 읽고 병력을 움직였다. 아군을 유리하게 이끄는 대신 여왕의 목소리로 상황의 불리함을 극복하게 만들었다.

스스로의 기세로, 그동안 쌓아 온 신뢰로 전략적 불리를 뒤집은 것이다.

‘그야말로 달인의 경지에 이른 무인의 감感인가?’

상황이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전략 지휘는 필요 없다. 어차피 모든 장수들이 현장에서 상황에 맞게 움직이는, 개인의 기량과 운에 맡기는 작전이니까.

그러니 이단의 현자 카를도 필요 없다. 이 전장에 필요한 것은 강력한 마검을 휘두르는 황금재상뿐!

카를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전신을 감싼 황금 갑옷, 그 가슴께를 어루만지며 시동어를 외쳤다.

“오라, 엘드릴 기간투스!”

거대한 마갑이 아공간을 초월해 나타나 카를의 전신을 감쌌다. 황금의 거인이 되어 카를이 대검을 높이 쳐들었다.

“안타레스 1대대, 출격하라!”

인간 병사로 이루어진 카를 직속의 부대 역시 전장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울부짖어라, 엘드란!”

엘드릴의 빛을 뿜어내며 카를은 길게 대검을 떨쳤다. 2미터나 되는 대검끼리 서로 부딪치며 굉음을 터트렸다.

콰아앙!

제플린 나이츠와도 맞먹을 가공할 마갑이라지만 카를이 걸친 마갑은 차원이 다르다. 예전부터 대륙 전역에 명성이 자자했던 최강의 아티팩트, 마갑 엘드라드에 그것을 더욱 증폭시켜 주는 엘드릴 기간투스의 힘마저 더해졌다. 오러 유저인 러스조차도 허공검을 써서야 겨우 물리쳤던 그 가공할 힘 앞에는 제국의 마검사도 별수 없었다.

“크어억!”

검이 박살 나며 파편과 함께 제국 마검사가 두 동강이 났다. 그렇게 상대를 베어 넘긴 뒤 카를은 전황을 살펴보았다.

이니야의 시기적절한 대책으로 안타레스군은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다. 그렇지만 딱히 승기를 잡은 것도 아니었다.

감으로 때려잡아 전쟁을 이길 수 있으면 전략은 왜 있고 전술은 왜 생겼겠는가?

이니야의 대처는 실로 훌륭했지만, 전황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안타레스의 장수들이 저마다 분투하곤 있었지만 제국군은 바위처럼 굳건히 진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기틀이 된 천 명의 마검사를 보며 카를은 치를 떨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게 튀어나온 거지?’

☆ ☆ ☆

“나와, 우다르 묠니르!”

뇌격의 정령을 불러내 적진을 가로지른다. 번개가 튀어 오르며 제국군의 비명이 아우성친다.

허공을 밟고 뛰어넘으며 시리스는 연신 양손의 검을 휘둘렀다.

“타아앗!”

예전과 달리 그녀는 두 자루의 롱 소드를 쌍검으로 쓰고 있었다. 크리스틴을 죽이고 손에 넣는 성광검 메사이어의 형태가 롱 소드였던 탓이다.

파아아앗!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평소 쓰던 시미터는 아니지만 그녀는 롱 소드를 다루는 수법 역시 충분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현재 시리스의 실력이면 어지간한 장검 계열은 자신의 수족처럼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나와, 샐러맨더!”

제국군 열 명여를 일격에 베어 넘기며 이내 불의 정령을 부른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불도마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전장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성광검 메사이어가 그녀의 정령술을 몇 배로 증폭시킨 것이다.

주위를 시체의 산으로 뒤덮은 뒤 시리스는 미친 듯이 깔깔 웃었다.

“아하하하! 노릇노릇하게 구워 주마! 비열한 인간들아!”

광소를 터트리는 시리스를 보며 수하 엘프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리스 님,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닌데요.”

“좀 더 빨리 뒤를 흔들어야 하는데…….”

지금 그녀는 휘하의 엘프 부대를 이끌고 포진한 제국군의 후위를 덮친 상태였다. 제국의 마검사를 피해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전방에서 싸우는 아군의 숨통을 트여 줄 속셈이었다.

하지만 역시 초반 중앙 돌파가 먹히지 않아 제국군 후방 쪽도 방어가 단단했다. 쉽게 무너지질 않고 팽팽하게 맞서는 것이다. 진땀이 나는 판국인데 지휘관이란 작자가 살육에 미쳐 마구 날뛰고 있으니……

“흥! 그럼 모조리 죽여 버리면 되잖아!”

수하들의 발언을 무시하고 시리스가 다시 눈앞의 인간들에게 달려들려던 때였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어 그녀가 몸을 틀었다.

“윽!”

번쩍!

아슬아슬하게, 백색 섬광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공할 열기가 피어오르며 대지가 녹아내려 들큼한 향을 냈다. 광기로 붉게 물든 그녀의 눈동자 위로 잠시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이건?”

마법은 아니었다. 오러도 아니었다.

한 번 본 적 있는 파괴의 빛이다. 용케 묻어 두었던 기억 저편에서 그 명칭이 떠오른다.

“……단절의 검?”

놀란 그녀가 빛이 날아온 쪽으로 돌아보았다. 한 잘생긴 금발 청년이 오른손을 내밀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엘프 계집!”

체타스 영지전 시 만났던 그 마법사였다.

“제이드!”

성전 내내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저자가 어째서 이곳에? 놀랍다기보다는 느닷없다는 느낌이다. 새하얀 로브를 휘날리며 제이드가 이를 갈았다.

“네년을 다시 만나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전신에 마력을 피어 올리며 제이드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홀드 슬로우.”

예전처럼 시리스의 움직임을 막을 셈인 듯하다. 그녀가 깔깔 웃었다.

“병신 짓 하네. 이게 또 먹힐 거 같아?”

예전과 달리 홀드 슬로우가 먹히기도 전에 파훼된다. 현재 시리스는 6서클의 마법사이기도 한 몸, 이 정도 하위 주문은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불의 정령을 쏘아 반격하며 시리스가 조롱을 던졌다.

“잘린 발목은 안녕하신가? 어머? 신발은 신었네? 어디서 좋은 의족 제작자라도 만났나 봐?”

“저년이…….”

샐러맨더를 단절의 검으로 상쇄하며 제이드의 인상이 더더욱 구겨졌다.

그날의 굴욕 때문에 그는 몇 달씩이나 수조에 동동 떠서 숨만 붙어 있는 비참한 신세를 겪어야 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혈압이 오른다.

게다가, 정작 제이드가 패한 것은 레펜하르트에게지, 시리스가 아닌 것이다. 그런 주제에 저딴 식으로 말을 해?

오른손의 장갑을 겨누며 제이드가 흥분해 소리쳤다.

“그자만 없었다면 네년이 살아 있을 것 같으냐? 단절의 검!”

시리스가 엘리멘트 소드를 휘둘러 단절의 검을 살짝 쳐 냈다. 정면으로 막기엔 여전히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빛이었다. 그러나 빛의 정령을 이용해 궤도를 흘리는 정도는 그녀도 간신히 가능하다.

겨우 공세를 피한 시리스의 눈동자도 더욱 일그러졌다.

“……그래, 네놈에겐 빚이 있었지?”

양쪽 모두 그날의 굴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다. 시리스가 메사이어의 힘을 끌어내며 7대 정령을 모두 불렀다.

“빚을 갚아 주마!”

지, 수, 화, 풍, 명, 암, 뢰.

거대한 일곱 정령이 온갖 속성으로 무장해 제이드에게 쏟아진다. 아무리 제이드라도 동시에 일곱 개나 되는 속성 마법을 다룰 수는 없다.

제이드가 양손을 떨쳐 올렸다.

“포스 필드!”

강력한 마법 방어장이 정령들의 돌진을 모조리 가로막았다. 시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8서클에 들어섰나?”

“그렇다! 나도 이제 대마법사다!”

그날의 패배 이후, 제이드는 평소의 태만함을 버리고 용맹정진 마법에만 매달렸다. 원래부터 재능은 충분했고 은의 현자가 대거 지원해 주기도 했으니, 결국 몇 달 전 8서클의 벽을 깬 제이드였다.

“아케인 스트라이크!”

파괴의 섬광이 시리스를 향해 쏘아졌다. 위력 자체는 단절의 검만 못하지만 아케인 스트라이크는 빛이 아니라 순수한 마력의 응집체, 아까처럼 빛의 정령으로 흘릴 수가 없다.

시리스가 달리 대처했다.

“나와, 테라투스!”

거대한 흙거인이 전장의 대지를 헤치고 일어서 아케인 스트라이크를 대신 맞았다. 워낙 강력한 마법이라 일격에 흙거인이 박살이 났다.

그리고, 그 뒤를 바로 단절의 검이 쫓고 있었다. 제이드가 낄낄거렸다.

“숨은 칼이다!”

아케인 스트라이크가 막힐 거란 건 제이드도 예상했다. 그래서 시간 차를 두고 연속 공격을 날린 것이다.

과연, 미처 피할 틈이 없이 단절의 검이 시리스를 그대로 적중한다!

“블링크.”

그녀가 사라졌다.

‘속았지, 바보!’

어느새 제이드의 등 뒤로 돌아간 시리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제이드의 속셈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에 속는 인간 참 많단 말이지.’

제이드의 가녀린 목을 성광검 메사이어의 칼날이 주저 없이 파고들려는 찰나였다.

“블링크.”

제이드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당황하며 시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제이드가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노려다보고 있었다. 이 현상이 일어난 이유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신고 있는 부츠, 그곳에서 희미한 마력이 느껴진다. 바로 시리스, 자신이 지금 신고 있는 부츠와 동일한 파장의 마력이.

“뭐야? 블링크 부츠는 하나뿐인 것 아니었어?”

☆ ☆ ☆

세상에 로브를 주로 입는 직종은 둘이다.

마법사, 그리고 암살자.

마법사가 로브를 입는 이유는 일종의 상징이다.

지금은 마탑이며 마법학계가 발달했지만 예전에는 마법사라면 세상을 방랑하며 고대 유적으로부터 힘과 지식을 얻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통으로 이루어져 있고 자질구레한 촉매 등을 담기도 쉬우며 오랜 기간 여행 시 이불이나 침상의 대용도 되는 로브는 방랑 마법사에게 딱 맞는 의복이었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편의를 위해 로브를 입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그것이 어느새 전통이 되어 지금은 방랑하지 않는 마법사라도 일종의 유니폼처럼 로브를 걸친다.

암살자가 로브를 입는 이유는 철저히 편의성을 위해서다.

암살자는 무릇 도망갈 때 잽싸게 의복을 갈아입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야 쫒기는 도중에 사라지는 것처럼 모습을 감출 수 있으니까. 그리고 순식간에 입고 벗는 데 로브만큼 편한 옷도 별로 없다.

하지만 러스는 지금, 눈앞의 저 로브 차림 인간들이 대체 뭐 하는 작자들인지 통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섬광의 검!”

한 명의 외침에 따라 다른 이들도 똑같은 단어를 반복해 외친다. 그에 따라 수십 줄기의 빛이 전장 곳곳에 내리꽂힌다.

콰콰콰쾅!

폭음 속에서 러스가 이끄는 이종족 연합군도 반격을 한다. 동료의 죽음을 뒤로하고 저돌적으로 뛰어가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두른다. 일단 마법사라면 거리가 좁아진 상태에선 승산이 없을 터.

“입만 놀리는 비열한 놈들!”

“마법 따위 쓰기도 전에 죽여 버리겠어!”

그런데 저들은 오히려 덤벼 오며 근접전을 자청했다. 마주 돌격하며 품속에서 두 자루 대거를 꺼내 맹렬히 맞서는데 그 솜씨가 어지간한 전사를 능가한다. 최정예인 이종족 전사들과도 맞먹을 실력이었다.

황당과 당황 속에서 러스가 중얼거렸다.

“대체 저놈들은 뭐야?”

하는 짓만 보면 딱 암살자다. 그런데 좀 전에 날아온 것은 마법이다. 뭐, 마법이야 무슨 마도구의 힘이라 쳐도…….

‘뭔 놈의 암살자가 보란 듯이 새하얀 로브로 전신을 덮었냐?’

저들은 전원 백색 로브 차림이었다. 암살자라는 단어부터가 암살暗殺, 어두울 때 죽이는 작자란 의미다. 야밤에 흰옷 입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눈에 잘 띄겠는가?

설사 야밤이 아니더라도 평소 습관상 흰 로브를 걸치는 암살자 따윈 있을 수 없다.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황당해하며 러스가 롱 소드를 휘둘렀다. 아직 휘두를 기량이 안 되는 일루미네이터 대신 드워프들에게 받은 명검이었다. 창공의 블레이드 오러가 채찍처럼 길게 늘어져 저들을 후려갈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들이 모조리 공세를 피했다.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전원 공간을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시리스의 부츠 덕에 저 수법에 대해 익히 아는 러스가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 이번엔 보다 집중해 전력으로 검을 떨쳤다.

“허공검, 호라이즌!”

공간을 뛰어넘는 참격이 작렬했다. 그러나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두 명은 목이 잘렸지만 대부분은 다시 공간 이동으로 공격을 피해 버린다.

러스가 혀를 찼다.

‘타시드 녀석이라면 이런 놈들 쉽게 상대할 텐데…….’

전투 예지를 지닌 타시드라면 저들이 이동하는 도착점을 파악해 베어 버릴 테니 별로 상대하는 것이 힘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재능이 넘치는 러스라도 타시드의 전투 예지만큼은 훔치지 못했다. 아니, 아예 파악도 못 할 정도였다.

타시드가 예전에 ‘내 기술이 전투 예지라더라? 제국 애들이 그러던데?’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정도로 고도의 오러 스킬이었다.

‘그걸 보면 진짜 천재는 타시드 녀석이지. 그런 괴물 같은 놈이 왜 그리 궁상을 떤대?’

☆ ☆ ☆

친우의 예상대로, 타시드는 궁상을 떨고 있었다.

‘아, 러스 녀석이라면 이거 되게 쉽게 해치웠을 텐데!’

그런 타시드 앞에 한 무리의 창병이 도열해 있었다.

창병의 지휘관이 명령을 내린다.

“전원 준비!”

두 줄의 창병들이 일제히 명에 따른다. 첫 줄의 창병이 무릎 꿇고 창을 겨눈다. 둘째 줄 창병이 선 채 창을 겨눈다.

기이한 일이었다. 황당한 광경이기도 했다.

지금 저들과 타시드의 부대 사이엔 수십 미터의 거리가 있는 것이다. 거기서 저런 괴상한 포즈를 취해서 어쩌라고?

이들이 이내 답을 주었다.

“전원, 마탄 발사!”

콰콰콰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수십, 수백 번 울렸다. 수많은 마탄이 창끝에서 쏘아져 타시드가 이끄는 오크 전사들을 휩쓴다. 수십 명의 전사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탄에 의해 죽어 간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흥분해 타시드가 참마도를 크게 휘둘렀다.

“타아앗!”

청록색 오러의 장막이 넓게 퍼져 제국병과 오크 부대 사이를 가로막았다. 마탄이 장막에 부딪쳐 폭발했다. 장막이 이내 찢어지며 다시 오크 부대 위로 마탄이 쏘아졌다.

콰콰쾅!

“크으윽!”

“저 새끼들, 뭔 짓 하는 거야?”

“방패도 소용이 없잖아!”

예전과 달리 이젠 오크들도 방패 하나쯤은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영혼이 소통한 무기만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오크 문화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역시나 오크들 구슬리는 데는 달인이 된 아스레일 경의 업적이었다.

-이건 방패가 아닙니다. 방패처럼 생긴 칼집이에요. 여러분의 영혼의 친우는 가장 편한 곳에서 쉴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급하면 방패처럼 쓸 수도 있으니 편하기도 하고.

이쯤 되니 단순한 오크들도 뭔가 찜찜하단 기분 정도는 느꼈지만, 말발에서 인간을 당할 순 없었다.

-그리고 설사 방패면 어떻단 말입니까? 무기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도구지요? 방패는 자신을 보호하는 도구지요? 그럼 방패는 무기가 아니잖습니까? 그런 식이면 갑옷도 입지 말아야죠?

듣다 보니 그럴듯해 오크들도 전장에서 방패를 착용하는 것은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실제로 편하긴 했으니까.

하여튼, 그 칼집-이라 쓰고 방패라 읽는 물건으로 아까부터 저 마탄을 막고 있었는데, 도저히 방패가 버텨 주질 못한다. 위력이 너무 강한 것이다.

덕분에 타시드만 고역이었다.

쉴 새 없이 오러의 장막을 펼쳐 마탄의 위력을 약화시키지 않았다면 귀한 푸른 곰의 정예들이 칼질 한번 못 하고 죽어 나갈 판이었다.

“크으, 이것들이 진짜!”

흥분해 타시드가 검을 크게 휘둘러 오러탄으로 마주 응수했다. 청록색 오러탄이 제국군 마탄병대를 노리고 폭격을 가한다.

“전원 대피!”

그 순간 마탄병들이 흩어져 참호로 숨었다. 대부분의 위력이 땅거죽에 가로막혔다.

아까부터 이런 식이었다.

타시드가 아무리 원거리 공격을 해도 저들은 미리 마련된 참호로 피해를 최소화했다. 반면 저들이 쏜 마탄 앞에 푸른 곰 전사들은 속수무책, 타시드의 오러 방어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서 저놈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하지만 정작 타시드가 돌진하려 하면 저들은 잽싸게 창머리를 돌려 푸른 곰 부족을 노렸다. 타시드가 오러 방어를 무시하면, 저들은 모두 죽일 수 있겠지만 대신 귀한 일족의 전사도 전멸하는 것이다.

‘칼질 한번 못 하고 죽어 버리는 비참함을 일족의 전사들에게 안겨 줄 순 없지.’

덕분에 타시드 부대와 제국군은 계속 교착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러탄을 쏘아도 참호 속에 숨어 피해 버리는 상대를 보며 타시드는 이를 갈았다.

‘아, 러스 녀석 허공검이면 저놈들이 땅속에 숨어 있건 말건 싹 벨 수 있었을 텐데!’

☆ ☆ ☆

엘프 정령사 샤일렌은 절망하고 있었다.

‘저것들은 대체 뭐야!’

렐하드가 죽은 이후 그녀는 단하임 일족을 이끄는 새로운 수장이 되었다. 그녀보다 나이도 경험도 많은 이가 꽤 있었지만 일족 누구도 그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명실공히 이니야와 시리스를 제외하곤 엘프 최강의 정령술사로 그 전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 최강의 정령술로 아까부터 샤일렌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나와 줘요, 샐러맨더!”

수십 마리의 불도마뱀이 그녀의 부름에 답해 현세에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엘프들도 모두 정령을 불러 자신의 전투를 돕길 청한다. 우아한 목소리가 비명 가득한 전장 사이로 어색하게 흘러나온다.

“나와 주세요, 로시아.”

“샤이드, 저들의 눈을 가려 줘요.”

“내 활에 깃들어 줘요, 실프.”

정령을 운용하고 화살을 쏘며 원거리에서 빠르게 기동하는 엘프 부대는 그동안 제국군의 큰 위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통하지 않았다.

새하얀 로브를 걸친 한 무리의 부대가 저마다 오른손에 백색 구슬을 들고 낮게 중얼거린다.

“소환, 로시아.”

“소환, 샤이드.”

“일제 소환, 샐러맨더.”

고위 마법사에게나 가능했던 정령 제어술. 엘프처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소환시켜 노예로 다루는 마법으로써의 정령술.

그것을 저들 모두가 사용하고 있었다. 더 이상 정령술은 엘프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궁극 소환, 우다르 묠니르!”

백색 로브의 사내가 외침을 터트린다. 거대한 전격의 거인이 엘프들을 덮쳐 간다. 엘프 중에서도 오로지 시리스만 사용할 수 있었던 강력한 뇌격의 정령, 그걸 보며 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위험한데!”

싸우는 와중에도 러스는 용케 허공검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전격의 거인이 엘프들을 덮치기 전 허공검이 작렬했다. 과연 허공검의 위력은 발군이라 단 한 방에 전격의 거인이 박살나 현세에서 사라졌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러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저런 거엔 참 잘 먹히는데…….”

반면, 눈앞의 블링크 부츠 부대는 전혀 허공검이 통하지 않는다.

“허공검, 호라이즌!”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아주 메아리까지 쳐대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데 러스로서는 딱히 방법이 없다.

“뭐 저런 블링블링한 놈들이 다 있냐?”

기가 막혀 헛소리마저 나오는 러스였다.

‘정말 더럽게 안 맞네.’

꼭 그때를 연상케 한다.

중압뢰, 스틸 에리어를 쓰는 제국의 기사, 키린트 경을 상대하던 그때를.

“중압뢰, 스틸 에리어!”

한 기사가 허공을 뛰어넘어 검을 찔러 온다.

‘그래, 이 기술. 이건 허공검으로도 대책이 없어서 그냥 피해야 했지.’

“허공검, 블루 홀!”

그때의 습관이 남아 러스가 무심코 공간 전이검을 이용해 공세를 흘렸다. 그리고 이내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틸 에리어로 다시 거리를 벌린 잘생긴 청년이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서 기쁘오, 배신의 기사여.”

분명 자신의 손으로, 그의 애검으로 목을 잘랐던 자였다. 그가 생생한 모습으로 새하얀 로브를 걸친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키, 키린트 경?”

☆ ☆ ☆

전황은 기울고 있었다. 초반 이니야의 기세로 잠시 팽팽했던 승부는 이내 제국의 우위로 넘어갔다.

전부 저 정체 모를 이들의 등장 때문이었다.

백색 로브 차림에 온갖 듣도 보도 못한 아티팩트로 무장해 안타레스군 요소 요소를 괴롭히는 일련의 무리들.

그 모습에 카를은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선가 한 번 본 형태의 로브다. 그래, 특히나 저 목에 건 은빛 엠블렘은…….

‘그럼 이들도?’

허겁지겁 제국의 마검사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전투의 흥분으로 미처 못 느꼈는데 머리를 식히니 저들의 전투 모습이 상당히 익숙했다.

거대한 대검에 전신을 휘감은 듯한 형태의 마갑.

카를 자신이 입고 있는 엘드라드나 실베릭 아머와 형태가 흡사하지 않은가?

‘아무리 봐도 같은 계통의 아티팩트잖아!’

그러고 보니 색상도 어느 정도 통일성이 있다. 카를의 마갑이 황금색이고 실베릭 아머가 은색인 반면, 저들의 마갑은 브론즈 색상을 바탕으로 한다.

마치 왕을 위한 마갑과 그 수하 장수를 위한 마갑, 그리고 병사들을 위한 마갑을 세트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카를의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광경도 있었다.

실베릭 나이츠의 전투를 보면 그들은 저 제국 마검사를 홀로 둘 셋씩 상대하는 중이다. 저들이 원래는 경험이 많은 나이 든 자들, 쉽게 말해 한물 간 전사들이란 걸 감안하면 결코 제국 마검사의 기량 탓은 아닐 터였다.

실베릭 아머가 제국의 마갑보다 한 단계 위라는 증명이었다.

“그렇다면…….”

엘드라드는 그렇다 쳐도 엘드릴 기간투스나 실베릭 아머는 카를도 그 출처를 알고 있다.

만약 저 마갑이 같은 계통이라면 출처 역시 같을 가능성이 높다.

카를이 인상을 찡그렸다.

“……은의 현자?”

3

정신없이 열 두 자루 단검을 날리며 스탈라가 소리쳤다.

“오늘은 요상한 옷을 입고 나타났구나! 제국 기사 걸포드!”

전장이라는 특수 상황에서조차 상대 패션에 신경 쓰는 것은 스탈라가 여성이기 때문일까?

걸포드 경이 마주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의 난 제국 기사가 아니다.”

평소엔 두껍기 그지없는 전신 갑주를 걸치고 싸우는 걸포드였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좀 달랐다.

가벼운 경장갑 위로 그는 순백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오크 대모 스탈라여, 그대의 무위에 경의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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