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권 제65장 반격 (66/84)

제65장 반격

1

글로텐 산맥 서부 지류의 하나인 반티아 산.

산맥과 평야의 경계인 이 반티아 산기슭에 한 거대한 석조 요새가 서 있다. 진군한 제국군이 만든 전진기지 중 하나로, 평야와 산악 지대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세워져 산악전을 치르는 삼국 동맹군의 훌륭한 거점이 되어 주는 곳이었다.

글로텐 산맥 안쪽에 요새를 세우려는 바슈탈론 제국군의 시도는 모두 차단되었다. 지리적 우위를 지니고 있고 빠른 기동력을 지닌 안타레스 유격대는 결코 적이 자신의 안뜰에 거점을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맥 외곽, 자신의 안뜰 바깥쪽에 울타리를 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제국은 비교적 지형이 험하지 않은 글로텐 산맥 외곽의 요충지에 열두 개의 전진기지를 세워 긴 방어선을 형성하고 안타레스의 게릴라전에 맞섰다.

이것이 전쟁이 장기화된 이유였다. 안타레스 입장에선 안뜰로 쳐들어오는 적은 막되, 적이 쳐 놓은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것이다.

두껍고 높은 성벽, 대량의 물자와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제국의 전진기지는 그동안 안타레스군을 계속 괴롭혀 왔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의 이야기지.”

빽빽한 수풀 사이로 한 비치는 요새 일부를 보며 한 오크가 미소를 지었다. 거대한 검은 다이어울프를 타고 대들보만 한 참마도를 등에 멘 그 오크 전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준비되었습니까, 사타콴, 드미트릴?”

전신에 알록달록한 주술적 문양을 그린 트롤 주술사와 새하얀 법복을 입은 인간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뒤에는 스무 명 정도의 트롤 사내들이 서 있었다. 주술력을 증명하는 긴 어금니도 없고 전신에 아무 문양도 그려지지 않은, 구루가 아닌 평범한 트롤들이었다.

오크 전사, 타시드가 손짓을 했다.

“그럼 시작하지요.”

필라넨스 교단의 안타레스 지부 소속, 신관 드미트릴이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분홍빛 성광을 전신에 머금은 채 스무 명의 트롤들이 숲을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숲을 빠져나가 요새의 경계병 눈에까지 그 모습이 비친다.

“기습이다!”

“안타레스 트롤들이다!”

공격을 알아챈 요새의 제국군이 바로 반응했다. 이내 화살을 쏘아 오며 응전한다. 화살 비 속에서 스무 명의 트롤들이 순식간에 고슴도치 신세가 되었다.

“크윽!”

“으으윽!”

그러나 트롤들은 죽지 않았다. 대신 수십 대의 화살을 맞은, 죽음의 위기에 닥친 트롤이 응당 겪는 변화를 보였다.

“크아아아!”

“으아아아!”

광폭화하며 트롤들이 괴성을 터트린다. 모든 재생력이 폭주하며 전신이 오우거만큼이나 거대해진다. 때를 놓치지 않고 트롤 주술사, 사타콴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라라라라라…….”

넓게 퍼진 흑주술에 의해 광전사가 된 스무 명의 트롤이 명확한 목표를 잡았다. 이제 그들의 시야에 비치는 것은 눈앞의 돌무더기 안쪽, 인간의 모습뿐이다.

“크라라라!”

포효를 터트리며 광폭화한 트롤들이 일직선으로 요새를 향해 치달렸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타시드가 자신의 애랑, 흑왕의 옆구리를 툭 치며 외쳤다.

“전원! 공격하라!”

함성과 함께 수백의 병력이 숲에서 뛰쳐나와 요새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 ☆ ☆

수백의 병력이 진군한다.

그 앞에 선 것은 스물의 거대한 괴물 트롤들.

포효하며 광전사 트롤들이 일제히 성벽으로 매달렸다. 마치 도마뱀처럼 손톱을 세워 벽을 타고 오른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막아라!”

“끓는 물을 부어!”

트롤들은 위에서 화살이 날아오건 끓는 물이 쏟아지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이성이 날아간 이들에게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 틈을 타 안타레스군 본진도 요새 코앞까지 도달했다. 요새 곳곳에 갈고리를 던지고 사다리를 놓으며 공세를 시작한다.

요새 안쪽에서 당황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서쪽으로 놈들이 기어 올라옵니다!”

“남쪽도!”

“방어 태세를 갖춰라!”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불구하고 제국군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훈련받은 대로 움직여 훈련받은 대로 전투에 임한다. 이들이 안타레스의 기습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이다.

이 강력한 요새의 힘은 안타레스의 최정예들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전략적 우위를 제국군에 제공해 주었다. 그 우위를 바탕으로 제국군은 몇 번이나 안타레스군을 물리쳐 왔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놈들이 성벽을 넘었다!”

“서쪽 방어선이 붕괴되었습니다!”

딱히 안타레스군이 신묘한 전략이나 전술을 펼쳐서가 아니었다.

그냥, 기본적인 전력 자체가 월등히 올라갔다!

“이 괴물 놈들!”

“크아아!”

광폭화한 트롤은 일개 병사들의 창칼로 어찌할 존재가 아니다. 그런 괴물이 무려 스물이다.

한번 손을 휘두르면 병사 서너 명이 박살 나 죽어 간다. 방패로 막아도 방패째 날아가 버린다. 이쪽에서 창을 찔러 상처를 입혀도 전혀 움직임이 둔해지지 않는다.

“아으으으…….”

제국병 하나가 절망으로 신음을 흘렸다.

마치 오러 유저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사실 광폭화한 트롤이 아무리 강해도 오러 유저에 비하면 상당히 떨어진다. 하지만 일개 병사 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손쓸 도리가 없다는 점은 똑같으니까!

“으아아악!”

“사람 살려!”

처절한 비명이 성벽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트롤 광전사의 가공할 능력 앞에 제국군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안타레스의 본진이 마음껏 유린한다.

“모두 죽여라! 저들의 피로 죽어 간 이들의 넋을 달래리라!”

검은 늑대, 흑왕을 몰고 타시드는 맹렬히 전장을 달렸다. 다이어울프의 포효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가 대지를 찢어발긴다.

“오러 유저다!”

“오크 대전사 타시드다!”

오러의 파도에 휩쓸린 제국병들이 공포의 절규를 터트리며 죽어 갔다. 마구 학살의 검을 휘두르던 타시드의 눈이 문득 빛났다.

요새 위쪽에서 한 인간 노인이 로브를 휘날리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이 미천한 것들이 감히! 라이트닝 체인!”

수십 줄기의 전격이 전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제국과 안타레스가 얽혀 싸우고 있는데도 거침없이 광역 마법을 날린 것이다. 아군의 피해를 고려치 않는 잔인한 술수다.

“어림없다! 울어라, 다카르!”

호통을 치며 타시드가 참마도를 허공에 날렸다.

파아아앗!

오러가 깃든 참마도가 청록색 섬광을 흩뿌리며 전장 위에 거대한 빛의 장막을 드리웠다. 수십 줄기의 전격이 오러의 장막에 가로막혀 그 위세를 잃었다.

돌아온 다카르를 재차 쥐며 타시드가 공중을 향해 소리쳤다.

“그대는 내가 상대한다! 마법사 론타리온!”

허공에 뜬 노인, 태양탑의 대마법사이며 9서클의 종사자인 론타리온이 타시드를 내려다보며 눈을 부라렸다.

“오크 대전사 타시드! 또 네놈이로구나!”

☆ ☆ ☆

타시드가 고함을 질렀다.

“흑왕!”

검은 다이어울프가 말귀를 알아들은 듯, 이내 몸을 움츠리고 공중으로 크게 뛰어오른다.

“크어어엉!”

순식간에 10여 미터 이상 떠오른 흑왕이 그대로 머리를 흔들어 등에 태운 타시드를 하늘로 띄웠다.

“타앗!”

기합을 터뜨리며 타시드가 두 발로 오러를 분출시켰다. 재차 허공을 밟으며 순식간에 론타리온이 떠 있는 공중에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그대로 참격의 일격.

“굉천월광!”

원래는 할라인 왕국의 오러 유저 카메룬 경의 고유 오러 스킬, 굉천월광.

그러나 요샌 러스가 하도 자신의 주력 기술로 써 대는 바람에 다들 그냥 배신의 기사가 원조인 줄 알게 되어 버린 서글픈 오러 스킬이 론타리온을 향해 쏘아졌다.

출처야 어찌 되었건 그 위력은 실로 발군!

론타리온이 허겁지겁 마법 방어장을 펼쳤다.

“포스 배리어!”

오러와 마법이 충돌해 굉음을 토한다. 공중제비를 넘으며 타시드가 다시 허공을 밟고 뛰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타시드를 향해 론타리온이 이를 갈았다.

“오늘에야말로 모스 경과 파킨스의 영혼을 위로하겠노라!”

타시드에게 죽은 제국의 오러 유저 모스와 대마법사 파킨스를 떠올리며 론타리온이 전격을 피워 냈다.

“내가 할 소리다! 킨지르의 원수를 갚아 주마!”

론타리온에 의해 재가 된 오크 오러 유저, 소중한 친우 킨지르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타시드가 살기를 불태웠다.

전쟁이 심화된 지 반년째, 가혹한 전쟁의 겁화는 안타레스의 수뇌부라도 피할 수 없었다. 엘프의 수장 중 하나인 렐하드가 죽었고 강력한 투사였던 킨지르가 조상들을 향해 떠났다. 아틸카와 함께 대구루의 위계에 있던 트롤 구루들도 둘이나 자연으로 돌아갔다.

“죽어라, 론타리온!”

“죽여 주마, 타시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동료를 잃은 처지다. 증오와 분노로 무장한 채 블레이드 오러와 마법이 허공에 교차해 폭발했다.

난무하는 마법을 절묘하게 피하며 계속 타시드가 허공을 밟고 뛰어다닌다. 벌써 몇 번이나 겪어 본 상황, 론타리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저놈의 능력은…….’

오크 대전사 타시드의 능력이 전투 예지란 걸 들었을 때, 론타리온은 처음엔 믿지 않았다. 위대한 인간의 검성, 아인츠발트조차도 감당하지 못한 초월적인 능력을 멍청한 오크 따위가 터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선더 트랩! 일렉트로닉 웨이브! 라이트닝 스피어!”

드레자의 특기가 폭열 주문이듯 론타리온도 각별히 자신 있는 분야가 있었다. 뇌격 주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온갖 종류의 전격이 절묘한 시간 차를 두고 타시드를 향해 날아갔다.

“타아앗!”

그러나 타시드는 간단한 동작 몇 번으로 그 모두를 막거나 피해 냈다. 공격이 모두 보이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내 반격.

“날벼락 떨구기!”

지금은 죽어 버린 소중한 그의 대부, 칼켄의 비기가 타시드의 손에서 완벽히 펼쳐졌다. 론타리온과 함께 9서클의 위계를 지닌 태양탑의 대마법사, 파킨스를 죽인 가공할 일격이 상대를 정확히 가격했다.

“크윽!”

신음을 흘리면서도 론타리온은 마력 방어장으로 날벼락 떨구기를 흘려 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흥! 감히 내 앞에서 전격을 쓰느냐!”

타시드가 입맛을 다셨다.

“제길…….”

전격 마법이 전문인 론타리온이 날벼락 떨구기에 깃든 전격 속성의 오러, 그 대부분을 반발시켜 해소해 버렸다. 이미 몇 번이나 겪은 일이었다.

최강의 일격이 하필 상대와 상성이 좋질 않다. 여태 몇 번이나 두 사람이 붙으면서도 승부를 내지 못한 이유다.

“굉천월광!”

수법을 바꿔 타시드가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론타리온의 마력장에 막혔다. 아무래도 굉천월광은 인간의 기술이라 아무리 익혀도 타시드는 러스만큼의 위력을 내지 못했다. 디스트로이나 다크 노아라면 충분히 위력이 있겠지만, 대신 딜레이가 있어 명중시키기가 힘들다.

“진정한 마법의 힘 앞에 무릎 꿇을지어다!”

론타리온이 마법의 숫자를 더욱 늘려 공세를 강화했다. 강력한 일격은 전투 예지를 지닌 타시드가 쉽게 피할 수 있으니 연격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아버지 칼켄이여! 당신의 대자代子를 지켜봐 주소서!”

타시드도 칼켄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블레이드 오러를 퍼부었다.

둘 다 인간과 오크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들, 청록색으로 물든 하늘이 연신 뇌성을 토해 냈다. 한낱 사람의 손에 의해 신들의 사투가 이어졌다.

그 팽팽한 대결에 이변이 생겼다.

하늘이 아니라 지상 쪽이었다.

“윽?”

순간 론타리온이 당황하며 발밑을 곁눈질했다. 사정없이 밀리던 제국의 요새, 그 성문에서 굉음이 들렸다.

“성문이?”

대 마법적 처리를 해 어지간한 마법에도 버틸 수 있고 대물리적 처리를 해 블레이드 오러의 위력도 감소시키며, 예전과 달리 이제는 엘프의 정령술조차도 막을 수 있는 성문이었다. 엘프의 정령술이 세상에 알려진 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으니 제국의 태양탑도 이제 정령술에 대한 대책을 상당히 연구 결과를 내놓은 후였다.

그런 성문이 부서지고 있었다.

“크아아아!”

광폭화한 트롤 몇 명이 성문을 향해 연신 몸통 박치기를 날린다. 대물리적 처리가 되어 있어 한 번에 부서지진 않았지만 충격은 계속 쌓이는 법이다. 결국 굳건한 성문도 버티지 못했다.

성문이 무너지며 안타레스군이 물밀듯이 요새로 밀려들어 갔다. 방어선이 무너지며 제국군의 피해가 눈에 띠게 커졌다.

론타리온은 이 요새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요새가 점령당한다는 생각을 하자 강철 같던 대마법사의 집중력도 일순 흔들린다.

‘어, 어찌해야 하지?’

그리고 그 틈을 타시드는 놓치지 않았다.

“타아아앗!”

순식간에 접근해 청록색의 번개를 내려친다. 타시드가 지닌 최강의 일격, 날벼락 떨구기다. 정신이 든 론타리온이 다급하게 방어장을 펼쳐 막는 순간이었다.

“어림없다! 오크 놈!”

반 이상 파고든 타시드의 번개가 아슬아슬하게 마력장을 부수지 못하고 멈췄다. 론타리온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막았…….”

타시드가 그대로 검을 올려 쳤다.

“쌍벼락 떨구기!”

늙은 마법사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야! 그건 떨구기가 아니라 올려 베기잖……!’

미처 상념을 잇지도 못한 채 론타리온의 가슴이 크게 찢어지며 핏물이 솟구쳤다.

“으아아악!”

☆ ☆ ☆

대마법사 론타리온의 죽음과 함께 제국의 요새도 무너졌다.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안타레스군은 잔혹하게 제국병들을 유린했다. 대부분의 제국군이 죽음을 당하거나 사방으로 도주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야말로 일패도지란 표현 자체였다.

그리고 그 상황은 비단 반티아 요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산맥 남서부의 제국 전진기지, 드라탕 요새.

드워프 오러 유저 말로이드가 수백의 군세 앞에서 호통을 치고 있었다.

“공격! 총공격이다!”

흥분한 안타레스군이 요새 곳곳에 침투해 사투를 벌인다. 그들의 앞에 선 것은 역시나 서른 명의 광전사 트롤들이었다.

산맥 북서부의 제국 전진기지, 갈락 요새.

오크 대모 스탈라의 날카로운 외침이 인간의 비명 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저들의 뒤를 따라라! 제국의 이름이 붙은 모든 것에 복수의 피를 뿌려라!”

날뛰는 광전사 트롤들 뒤로 오크 전사들이 흉흉한 살기를 뿌리며 돌진한다. 지아비를 잃은 아내의 분노가 가공할 철퇴가 되어 제국군의 머리 위로 내리쳐진다. 위대한 대족장을 잃은 일족의 분노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적의 내장을 헤집는다.

산맥 중서부의 제국 전진기지, 글라피아 요새.

코끼리처럼 긴 어금니를 드러낸 장신의 트롤이 연신 양손을 휘저으며 노래를 부른다.

“호수는 울부짖고 뇌성은 고요하니 여울목이 돌고 돌아 핏빛 홍수 되어 내리리…….”

피처럼 붉은 안개가 해일처럼 사방에서 밀려와 요새를 두들겨 댄다. 그 진한 혈향에 제국군 병사들은 공포에 질렸다.

“혈신 아틸카다!”

가공할 주술의 힘으로 수많은 제국군의 피를 이 땅에 뿌린 아틸카는 이제 더 이상 상아어금니라는 초라한 별칭으로 불리지 않았다. 지금 그들의 눈에 아틸카의 신위는 그야말로 피 자체를 지배하는 악신을 연상케 한다.

“아아아아아!”

허스키한 아틸카의 허밍과 함께 핏빛 안개 속을 수십의 괴물이 돌진했다.

거대한 트롤들이 붉은 눈을 번득이며 붉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붉은 손톱을 휘두른다. 피에 물든 거대한 손톱이 휘둘러질 때마다 붉은 핏물이 대지를 적신다.

“크라라라라!”

포효가 터지면 비명이 뒤를 잇고 이내 혼란의 소음 속에 묻혀 버린다.

모든 것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글로텐 산맥을 에워싸고 안타레스를 압박하던 열두 전진기지, 제국이 자랑하던 굳건한 방어선이 채 사흘도 되지 않아 순서대로 무너져 버렸다. 광폭화한 트롤의 힘은 그토록 엄청났다.

판세가 흔들린 지 사흘째.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안타레스군의 공세는 결국 제국군 최대의 거점 중 하나인 아스탈 가드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2

때아닌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섬뜩한 한기가 사방을 적시고 휘몰아치며 육신뿐 아니라 마음마저 얼어붙게 만든다.

아스탈 가드의 요새 사령관, 제국군 3연대 대대장 가스탄 경은 공포와 절망 속에서 눈보라 너머를 응시했다.

“으으, 저 괴물…….”

이 광대한 눈보라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한 명의 여인에 의해 인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보랏빛 머리를 휘날리며 요새의 정면에 우뚝 선 엘프 미녀.

“북해의 숨결…….”

미녀가 허공에 검무를 수놓을 때마다 새하얀 냉기의 안개가 사방으로 자욱하게 퍼져 간다. 그 안개에 닿는 모든 것이 얼어붙고 바스라진다.

그야말로 전설 속의 존재, 겨울의 마녀를 연상케 하는 무시무시한 신위다.

“눈의 여왕 이니야!”

안타레스의 현 여왕인 그녀를 보며 가스탄 경이 소리를 질렀다.

“마법사 제간트! 어찌 방도가 없습니까?”

가스탄 경 곁에 서 있던 중년 마법사가 식은땀을 흘렸다.

“계, 계속 저지하려고는 하고 있소만…….”

태양탑 소속이며 제3마법병단의 부단장이기도 한 그는 7서클의 위계를 지닌 고위 마법사다. 아까부터 평생 수련한 마법을 써 저 냉기의 안개를 막으려 노력하고 있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다.

가스탄 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엘프의 정령술은 이미 태양탑에서 파악한 것 아니었습니까? 분명 저것도 정령술의 일종 아닙니까?”

“뭔가, 뭔가 다르오. 뭔가 우리가 파악한 것과는 달라…….”

냉기의 안개가 전장을 가득 메우자 이니야가 소리쳤다.

“트롤병! 출격하라!”

수십 명의 광폭화한 트롤들이 요새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니야의 외침이 이어졌다.

“안타레스의 용사들이여! 저들의 뒤를 따르라!”

천 명이 넘는 이종족 혼합 병사들이 용맹하게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전장 가득 깔린 냉기의 안개를 뚫고 예리한 창칼을 들이댄다.

제국병들도 어떻게든 맞서 싸웠지만…….

“으으으…….”

“젠장, 몸이 제대로 안 움직여…….”

“어떻게 저놈들은 이 눈보라 속에서 저렇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거지?”

냉기로 인해 얼어붙은 몸은 제국군의 전투력을 한껏 떨어트려 놓았다. 반면 안타레스 측은 냉기 따윈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듯 저돌적으로 날뛰고 있다.

가스탄 경과 함께 탑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던 60대의 노기사가 치를 떨었다.

“언제 봐도 저 오러 스킬은 너무 치사하군.”

단순히 눈보라를 일으키고 한기의 안개를 광범위하게 펼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저 오러 스킬은 무시무시한 정밀도로 적과 아군을 가리며 공격한다. 수백의 병력이 뒤죽박죽 얽힌 전장 속에서 오직 적만을 노리고 얼리는 기술이라니?

“어떻게 저런 사기적인 기술이 있을 수 있지?”

노기사, 그라타스 경은 경외의 시선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평생 제국의 오러 유저로 살아오며 수많은 경험을 쌓았다. 온갖 신기한 오러 스킬도 자주 접해 보았다. 하지만 저건 도무지 어떤 원리인지를 모르겠다.

뭐, 그동안 저 기술을 한두 번 접한 게 아니라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은 있지만.

“단순한 정령술이 아니라 분명 오러의 힘이 느껴져.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두 힘을 융합해 쓰는 듯한데…….”

하여튼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 그라타스 경이 허리춤의 검을 쥐었다.

“내가 나서야겠소, 가스탄 경.”

저 오러 스킬 하나만으로도 이니야는 족히 제국군 일개 연대급 전력이었다. 저토록 전장에 특화된 이는 제국 내에서도 거의 없는 것이다. 딱히 대처법조차 없으니 평소처럼 그라타스 자신이 나서서 북해의 숨결을 펼치지 못하도록 견제를 해 아군의 피해를 막아야 한다.

요새 사령관 가스탄 경이 걱정하며 그라타스 경을 돌아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라타스 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상황이 이러니 선택의 여지가 없잖소?”

그라타스의 전신이 군청색으로 물들었다. 오러를 끌어 올린 채 그가 발을 굴려 몸을 띄웠다.

수십 미터의 거리를 뛰어넘어 이니야를 향해 날아오르며 그라타스가 우렁찬 외침을 터트렸다.

“눈의 여왕 이니야! 제국의 기사 그라타스가 그대를 상대한다!”

☆ ☆ ☆

걸리적거리는 것을 모두 베며 그라타스는 성난 황소처럼 전장을 질주했다. 그라타스의 접근을 느끼고 이니야도 북해의 숨결을 거두었다.

북해의 숨결은 그 초월적인 위력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집중력과 오러양을 소모하는 기술이다. 그런 북해의 숨결을 계속 지속시키며 오러 유저를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검을 쥐고 자세를 잡은 채 이니야가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군, 제국 기사 그라타스.”

검을 겨눈 채 그라타스도 인사를 받았다.

“한 달 만인가? 눈의 여왕이여.”

이니야가 냉소하며 그라타스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꽤 외로워 보이는군?”

뜬금없는 말이지만 그라타스는 바로 이해했다. 그가 이를 갈았다.

“잘도 그런 수작을 벌였더군.”

그동안 그라타스는 단신으로 이니야와 싸우지 않았다. 항시 대오러 유저 대응법을 익힌 기사단을 대동하고 합공을 하곤 했다.

기사도에 어긋나는 불명예스러운 행위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니야와 그라타스의 무력엔 상당한 격차가 있으니 일대일로 붙으면 결과는 필패다. 그리고 그라타스는 노인답지 않게 꽤 융통성이 있는 성격이었다.

윗줄에 선 무인과 싸우다 목숨을 잃어 제국 병사들이 죽어 갈 위험을 감수하느니, 부끄럽더라도 그라타스는 아군을 확실히 지킬 수 있는 길을 택해 왔다.

그러나 현재 그 보조 기사단은 이 자리에 없다.

“누군가는 저 괴물들을 막아야 할 테니까.”

대오러 유저 대응법을 익혔다는 것은 곧 던전 탐사 시의 대악마 대응법을 익혔다는 의미. 현재 아스탈 가드엔 던전의 수호자급 악마 정도는 아니더라도 족히 오우거에 맞먹을 가공할 괴물들이 무려 수십이나 덤벼들고 있다.

평소 그라타스 경을 보조하던 병력은 지금 전원 광폭화한 트롤을 막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덕분에 그는 가스탄 경의 근심대로, 그리고 카를의 계략대로 홀로 이니야를 상대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긴장 속에서 그라타스는 투지를 일깨웠다. 군청색 오러를 불꽃처럼 일렁이며 검을 곧게 세운다.

“그대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제국의 명예를 짊어진 기사!”

각오를 다진 채 제국의 기사가 땅을 박찼다.

“타아아앗!”

노인의 그것답지 않은 광포한 일격이 이니야를 노렸다.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그라타스는 원래 파워를 추구하는 강검사 계열이었다. 육체는 노쇠했으나 평생 갈고닦은 오러의 힘은 여전히 건재하다.

“브레이크 마운틴!”

파산검破山劍이라고도 불리는 그라타스의 오러 스킬이 거대한 해머가 되어 내리쳐졌다.

“제법이구나.”

이니야가 감탄을 흘렸다. 그리고 동시에 내려치는 검세도 흘렸다.

교묘히 검을 비틀어 상대의 타점을 어긋나게 하며 공세를 빗나가게 만든다. 그리고 이내 화려한 연무를 추며 반격한다.

날카로운 검격이 연달아 그라타스의 급소를 파고들었다. 공격을 막는 대신 그라타스가 오히려 한발 더 나서며 후속타를 날렸다.

공격에 맞서 어설프게 방어를 하느니, 마주 공격해 상대의 공세를 멈추게 하는 것도 훌륭한 방어 수법의 하나다. 그러나 지금의 그라타스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 늙은 목숨 따윈 아깝지 않도다!”

이대로라면 이니야는 그라타스의 일격에 팔 하나쯤 잃을 터, 대신 그라타스는 확실하게 죽게 된다. ‘너 죽고 나 죽자’가 아니라 ‘너는 좀 다치고 난 죽자’ 식이다.

이니야가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멍청한 수법이구나!”

그러나 그라타스도 할 말이 있었다.

“그대의 팔 하나라면 내 목숨도 가치가 있겠지!”

아무리 마켈린이나 실란이라도 잘린 팔을 완전히 재생하진 못한다. 이니야의 무위가 대폭 깎일뿐더러 당장 전장에서도 물러나야 할 판이니, 전황을 볼 때 확실히 가치가 없다곤 할 수 없다.

그래도 예순 먹은 노인이 외치기엔 너무 안쓰러운 대사다.

“쯧, 나이에 비해 좀스러운 사내로다.”

이니야는 혀를 찼다. 그라타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군. 하지만 실제로 통하지 않는가?”

분명 이니야는 그라타스의 목을 따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거두었다. 그라타스 하나 죽이자고 팔을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 투지가 올라 그라타스가 더욱 맹렬히 블레이드 오러를 휘둘러 댔다.

“타아아앗!”

정신없이 공방을 계속하며 이니야는 식은땀을 흘렸다.

“쉽지 않겠구나.”

목숨을 버리면서 덤벼드는 상대는 실력에 상관없이 까다로운 존재다. 광폭화한 트롤이 대표적인 예다.

“으아아아!”

포효하며 그라타스는 연신 파산검을 퍼부었다. 정말 산을 부술 순 없겠지만 터널 정도는 족히 낼 법한 파괴적인 일격이 전장 이곳저곳을 두들겨 댔다. 무수한 폭발과 함께 땅이 파헤쳐지며 연신 흙무더기가 날아오른다.

“……흐음.”

이니야는 침착하게 그라타스를 바라보았다. 제 목숨을 도외시하는 그라타스를 해치우려면 그녀도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럴 필요는 없지?’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이니야는 오히려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익!”

이해할 수 없어 그라타스가 경계심을 보였다. 이내 이니야의 등 뒤로 한 무리의 거인들이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거인을 본 순간 그라타스가 놀랐다.

“광전사 트롤?”

이니야의 신호에 따라, 이들을 제어하던 트롤 구루가 그라타스를 목표물로 설정한 것이다. 광전사 트롤들이 맹렬하게 그라타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윽!”

당황하면서도 그라타스는 블레이드 오러를 뿌려 트롤 광전사들을 베려 했다. 아무리 광폭화한 트롤이 강하다 해도 오러 유저에 비하면 많이 떨어진다.

“흥! 이까짓 놈들이 내 상대가 될 것 같으냐!”

그때였다. 이니야가 틈을 파고들어 그라타스의 공세를 막았다.

“상대는 안 되겠지만 도움은 충분히 되느니.”

광전사 트롤들이 그라타스를 미친 듯이 공격한다. 그라타스의 반격은 사이에 낀 이니야가 교묘히 막아 준다. 그뿐 아니라 교묘히 트롤의 공격에 연계해 그라타스의 틈마저 노린다.

순식간에 그라타스의 움직임이 어지러워졌다.

트롤 광전사는 이성을 잃고 날뛰는 존재, 보통의 경우라면 광전사와 손을 맞춰 합공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기교의 극에 달한 이니야는 엉망진창인 트롤의 공격조차도 합을 맞출 수 있다!

몰리게 된 그라타스가 당황해 소리쳤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그대는 분명 나보다 윗줄의 무인일 터! 그 사실은 인정하고 있었는데!”

비록 자신은 실력이 떨어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니야를 상대로 합공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독으로도 충분히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데 조력자를 쓸 줄이야?

“비록 엘프지만 존경할 만한 무인이라 여겼거늘!”

기가 막힌다는 듯 그라타스가 비난을 던졌다.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비난이었다. 자기는 합공해도 되고 이니야는 안 된다니, 세상에 그런 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기사도에 따르면 저게 옳은 논리다.

“강자라면 그에 걸맞은 명예를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이니야는 반박하지 않았다. 눈앞의 노기사는 안타레스의 백성을 해하려는 적이었다. 그런 적의 비난 따윈 그녀에겐 한 줌의 의미조차 없다.

그저, 그라타스가 평생 갈고닦은 무위를 존중해 짧게 답해 줄 뿐.

“명예 따윈 중요치 않다.”

이니야의 애검이 번뜩였다. 그라타스의 목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굴러떨어지는 제국 기사의 머리를 보며 안타레스의 여왕은 무감정하게 뇌까렸다.

“내게 중요한 것은 승리다.”

☆ ☆ ☆

광전사 트롤의 힘을 앞세워 전진기지들을 함락시킨 안타레스군은 요새를 허무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제국 입장에서는 저 요새가 글로텐 산맥을 도모할 중요 거점이지만 안타레스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 이들에겐 산맥 자체가 이미 자신들의 근거지, 굳이 인간의 거점에 들어가 상대의 공격 목표를 좁혀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인간의 거점을 못 쓰게 만들기만 해도 전황은 크게 변한다.

안심하고 돌아올 요새가 사라지니 삼국 동맹군 역시 함부로 글로텐 산맥 깊숙이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팽팽하던 전선이 평야 지역까지 크게 후퇴했다.

더 큰 문제는 대량의 식량이 안타레스 측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점이었다.

항시 굶주리던 안타레스군은 수시로 제국의 보급대를 노렸다. 물론 보급선의 중요성은 제국도 익히 아는 것인지라 그때마다 제대로 된 대처를 했다.

적에게 빼앗기느니 식량을 통째로 태우는 것은 전쟁의 상식이다. 제국의 보급대치고 군량 근처에 기름 항아리를 두어 만일의 경우 빠르게 없앨 수 있게 대비하지 않은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전진기지는 이야기가 달랐다.

제국군 입장에서 저 요새는 안타레스가 감히 범접치 못할 철옹성이었다. 결코 함락될 리 없는 안전한 장소였다.

아무리 제국의 군대 운영이 합리적이더라도 운영하는 이 자체는 분명 인간.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전혀 문제가 없었다 보니 요새 보급병 대부분이 준비를 게을리했다. 수시로 점검해야 할 기름 항아리들이 대부분 못쓰게 되어 버려 제때 식량을 태우지도 못했다.

열두 요새 중 절반이 맥없이 식량을 내주었다.

애초에 안타레스 측도 이것을 노리고 미처 대비할 시간이 없도록 한꺼번에 몰아친 것이다. 상황의 다급함을 생각하면 저 와중에도 절반이나 되는 요새가 제대로 대처했으니 오히려 제국의 군 기량을 칭찬할 일이다.

물론 한창 작전 회의 중인 삼국 동맹군 총사령관, 바슈탈론의 크라작 공작은 칭찬할 마음 따위 전혀 들지 않았지만.

“어이가 없군. 하루아침에 이렇게 꼬여 버리나?”

크라작 공작은 거칠게 보고서를 구겼다. 그리고 거칠게 인상도 구겼다.

“이 모든 것이 저 트롤 광전사의 존재 때문인가…….”

광폭화한 트롤을 전력으로 쓰는 발상.

이 발상 하나만으로 안타레스의 전력은 무시무시하게 급증했다.

원래 안타레스 내에서 트롤의 전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단 인구부터가 제일 적은 것이다.

안타레스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이종족은 오크였다.

이전부터 대량의 노동력으로 대륙 전체에 퍼져 있던 오크다. 남녀 성비가 맞지 않긴 하지만 기본 숫자부터가 월등히 많다.

오지의 오크들이 모두 모였고 대륙 서부에서 자발적으로 해방한 오크도 안타레스로 흘러들어 왔으며 프레지안 해방단이 꾸준히 구출 작업을 펼치기도 했으니, 한때 안타레스의 오크 인구는 백만을 넘긴 적도 있었다. 오크라트의 참사 때문에 현재는 구십만 이하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이종족 중 월등한 인구수를 지니고 있다.

두 번째는 드워프였다.

노예 생활이라지만 특성상 드워프만의 마을을 꾸리고 살아야 했던 그들은 인간의 노예로 살아갈 때에도 상당히 많은 인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륙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오지 출신 엘프나 오크와 달리 드워프에겐 그랜드 포지라는 굳건한 중심점이 있었다. 그 숫자를 모두 합치니 거의 육십만에 달하는 인구가 나왔다.

엘프와 트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드워프처럼 자신들만의 마을을 꾸리지 않고 인간들 틈에서 산 엘프는 출산율이 높지 않았다. 엘프와 인간 사이에선 아이가 나오지 않으니, 아무리 성노로 사용되어 봤자 엘프의 수가 늘지를 않는 것이다. 가격이 떨어질 것을 대비해 차탄 공국에서 인위적으로 출산율을 조절하기도 했고.

그래도 오지 출신과 구출된 노예 출신 엘프를 다 합치면 이십만 명은 넘었다.

반면, 트롤은 엘프보다도 인구가 적었다.

전 대륙에 숨어 살던 대부분의 트롤 일족들이 아틸카의 명 아래 안타레스로 모였지만 그 숫자는 간신히 십만을 넘는 정도였다.

깊은 숲 속에서 조용히 인간들의 눈을 피해 살아왔던 트롤들. 그들은 특유의 재생력 때문에 아이를 낳기가 힘들다. 엘프나 드워프만은 못해도 인간이나 오크보단 수명도 월등히 길다. 그렇다 보니 인간이나 오크처럼 마구 수가 늘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간의 손에 키워진 트롤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들의 인구는 오지에서 살아가던 다른 이종족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십만이란 숫자도 트롤이 워낙 강인하기에 이만큼이나마 살아남았다는 쪽이 옳다.

트롤의 문화 특성상 열의 하나만이 주술에 입문할 수 있으며 또 열의 하나만이 구루의 이름을 받아 제대로 된 주술사가 될 수 있다. 십만의 인구 중 실제 전력이 될 만한 트롤 구루의 숫자는 천 정도. 거기에 이종족으로 치면 전사나 마법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구루는 다시 열의 하나였고 오러 유저나 대마법사급의 경지에까지 오른 이는 그중에서도 고르고 또 골라진다.

열 명도 되지 않는 오러 유저나 대마법사급 주술사와 백 명의 기사나 마법사급, 천 명의 정예군급 전력이 트롤이 가진 힘의 전부였다.

대단해 보이지만 이는 다른 종족과 비교하면 상당히 부족했다. 인간이나 오크는 고사하고 엘프나 드워프만도 못한 전력이었다. 비록 오러 유저는 적지만 엘프에겐 강력한 정령술사가 다수 존재하고 드워프 역시 일개 전사도 어지간한 인간 기사를 능가한다. 최강자의 수는 떨어지는 대신 전체적인 평균 실력이 높달까?

그러나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트롤이라면 누구나 재생력을 가지고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춘기를 지나기만 하면 무조건 재생력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 재생력이 바로 트롤의 광폭화를 유도하는 힘이다.

저들에겐 광폭화할 트롤이 십만이나 있단 소리다!

“으음…….”

크라작 경은 이마를 짚고 신음을 흘렸다.

후방에 머물러 있던 그는 아직 트롤이 광폭화한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위력이 실로 오우거에 맞먹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우거는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상상해 보라.

십만의 오우거가, 명확한 살의를 지니고 오직 제국군만을 노린 채 달려오는 광경을.

“지옥의 광경이로다…….”

절로 공포에 질려 크라작 경은 중얼거렸다.

더 이상 저들은 약자가 아니었다. 삼국 동맹군이 아무리 많아도 십만의 오우거를 감당할 정도는 못 되었다.

더 이상 저들은 굶주리고 있지도 않았다. 여섯이나 되는 요새에서 훔쳐 간 군량은 족히 사국 동맹군 전원이 석 달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인간과 살쾡이가 싸우는 형국이 단번에 인간과 호랑이가 싸우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숲 속에서 호랑이는 손쉽게 인간을 죽일 수 있다. 저 한 수로 글로텐 산맥은 인간의 사지死地가 되어 버렸다.

평야라고 호랑이가 만만한 상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덫을 놓고 온갖 준비를 해도 사냥에 성공한다는 확신은 할 수 없다. 더 이상 평지전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두통을 느끼며 크라작 경은 참모진에게 손짓을 했다.

“……참모진은 이 상황을 타개할 의견들을 내놓아 보라.”

참모 중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단, 안타레스의 저 수법은 최근에 개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 그러면 전쟁 초반에 그토록 밀리던 것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딱히 현 상황에 대한 타개책은 아니지만 일단 크로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타개책은 명확한 상황 판단으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저들이 모든 트롤을 모조리 광폭화시킬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근거로 하는 말이지?”

매서운 크로작의 말에 참모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요새 점거 시 그들은 두 자릿수의 트롤만을 광폭화시켜 전력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세이어의 성기사단이 전멸했을 때처럼 수백 단위의 트롤 광전사가 나타났다면 안타레스 본군의 피해는 전무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군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스물에서 삼십 정도 수를 유지했습니다. 트롤의 총 인구수를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희망적인 의견이기도 했다.

크라작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다른 참모도 의견을 냈다.

“할라인 쪽 연금술사로부터 트롤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트롤의 광폭화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행위로 생명력을 극심히 소모한다고 합니다. 트롤들에게 그 힘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 여겨질 정도로요. 그러니 저들이라고 마음껏 저 힘을 발휘하진 못할 것이라 판단됩니다만…….”

크라작의 표정이 도로 안 좋아졌다.

“연금술사 놈들은 광폭화한 트롤은 적아를 구별할 수도 없고 원상태로 돌아가지도 못한다고도 하지 않았나? 그 정보를 얼마나 믿을 수 있다는 건가?”

“그, 그렇긴 하지만 적어도 광폭화가 트롤들에게 있어 상당히 부담스러운 행위인 것은 맞는 듯합니다. 실제로 패잔병들 몇몇은 광폭화가 풀린 트롤들이 그 자리에서 신음하며 쓰러져, 안타레스군이 들것에 실어 후송하는 광경을 보기도 했습니다.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에겐 보기 힘든 광경이지요.”

저 추측이 사실이라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좋아할 수도 없었다. 십만의 오우거가 일만으로 준다고 해도 어차피 무시무시한 전력이긴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더 이상 상황이 녹록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크로작 경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두통을 다스렸다. 계속 근심이 쌓이니 이놈의 두통도 통 멎지를 않았다.

문득 걱정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슈탈론 황궁의 반응이.

“폐하께서 크게 진노하시겠군.”

3

바슈탈론의 현 황제, 레어폴 프라임 바슈탈론 1세는 분노를 터트리지 않았다.

그저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옥좌에 앉아 신하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신하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보통 전쟁이라면 패전 소식이 들릴 경우 신하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린다. 주전파는 황제의 진노를 두려워할 것이고 반전파는 오히려 패전의 책임을 주전파에 떠넘겨 정쟁 상대를 거꾸러뜨릴 절호의 기회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신하들이 한마음이 되어 있었다.

현 전쟁은 세이어께서 명한 성전, 인간의 의지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반전파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이 패배는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책임이다.

“패전 소식을 들은 황제라면 응당 여기서 분노를 터트려야겠지만…….”

옥좌에 턱을 괸 채 레어폴 1세는 시큰둥하게 뇌까렸다.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으니 화도 나지 않는구나.”

황제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광폭화한 트롤이라고? 그놈들을 병력으로 썼다고?”

신하 하나가 두려움에 떨며 대답했다.

“예.”

황제의 질문이 이어졌다.

“분명 트롤은 아무나 광폭화할 수 있다고 했지?”

“예, 폐하.”

“저놈들 트롤 숫자가 십만이라 했더냐?”

신하는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 결과가 너무 무시무시했다. 대신 변명처럼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첩보부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합니다. 상황을 볼 때 안타레스도 저런 힘을 마구 휘두를 수는 없을 것이기에…….”

“허허허…….”

신하의 보고를 끊으며 레어폴 1세는 허탈하게 웃었다. 실제로 지금 그는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화를 내지 않고 있었다.

‘화를 낼 부분이 있어야 화를 내지?’

제국 황제이면서 동시에 은의 수호자이기도 한 그다. 트롤의 광폭화에 대해 다른 이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있을 수 없는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분명 제국군은 실수하지 않았다. 참모부는 전략 전술에 충실히 짰고 군 수뇌부는 엄정한 군기로 병사를 다스려 군대를 운용했으며 첩보부는 최선을 다해 상대의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 이들 중 잘못한 이들은 아무도 없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들에게 무슨 잘못을 타박하란 말인가?

지금 황제의 심정은, 승승장구하던 제국군이 갑자기 화산이 터져 몰살했다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오히려 그 와중에 그만큼 살아남아 무사히 후퇴한 이들을 치하해야 할 판이로다.”

진심으로 말하는 듯한 레어폴 1세의 발언에 신하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과연 제국 황제다운 통찰이었다. 황제는 엄하지만 동시에 공정해야 한다. 이 패전이 결코 제국군의 잘못이 아님을 이해해 준 것이다.

“이는 천재지변에 의한 것, 제국군의 실책이 아니로다. 패한 이들에게 어떤 벌도 내리지 않겠다.”

동시에 황제의 표정이 엄격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허락지 않는다. 아무리 오우거와 맞먹는 괴물이 수만이라지만 제국의 힘 역시 깊고도 넓도다. 분명 방법이 있을 터.”

엄중한 목소리로 황제가 선언했다.

“명하노라! 저들을 모조리 벌하고 세이어의 참 뜻을 이 땅에 세우라!”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신하들이 감격해 허리를 넙죽 숙였다. 특히 제국 참모부의 반응은 더욱 격했다.

“기필코 이 죄를 씻겠나이다!”

황제는 관대하게 그들의 패배를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이 패배를 설욕할 기회도 주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역할은 하나다.

평생의 지식과 지혜를 모두 그러모아, 이 상황을 타개할 전략을 짜서 바쳐야 한다!

☆ ☆ ☆

옥좌를 떠난 레어폴 1세는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중앙궁을 벗어나 황궁 서쪽에 위치한 별궁, ‘순백의 탑’으로 향했다.

제국 황제 레어폴 1세에서 은의 수호자 바슈탈이 된 황제가 고대의 아티팩트, 세이어 템플을 작동시켰다.

순백의 세계 속에 세워진 새하얀 신전, 그곳에선 이미 한 소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요, 수호자 바슈탈?”

“수호자 세렐라인.”

황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대도 이 소식을 접했겠지. 그분께서 어떤 말씀이 없으셨나?”

세렐라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분의 은총을 바라시나요?”

황제가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그분의 뜻은 너무도 거대하여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기 힘들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자녀의 도리가 아닌가?”

세렐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성견聖見을 청해 보지요.”

대화를 마치고 두 은의 수호자는 세이어 템플의 작동을 중단했다. 세렐라인의 주위가 평범한 귀족가 저택으로 바뀌었다.

바슈탈온 제국 남부의 유서 깊은 귀족가, 로스펠란 공작가의 별장이었다. 원래 거하던 아스티노플 별장 저택이 레펜하르트에 의해 침탈당한 후 옮겨 온 곳이었다.

세렐라인은 저택을 나서 뒷산으로 올랐다.

평소 그녀를 따르던 하녀들은 없었다. 아스티노플의 별장처럼 이곳에도 시종인이 접근할 수 없는 금지 구역이 있었다.

금지에 들어선 그녀는 조용히 마법진을 작동시켰다. 대륙 전역에 깔려 있는, 은의 시대부터 내려오는 공간 이동 마법진이었다. 아스티노플 별장과 연결되어 있던 북쪽 라인은 모조리 망가졌지만 은의 현자가 지닌 공간 이동 라인은 하나가 아니다.

품속에서 푸른 보석을 꺼내 마법진을 겨누며 세렐라인이 뇌까렸다.

“권한 발동. 직책, 수호자. 코드 네임, 세렐라인.”

그녀의 모습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 ☆ ☆

공간 이동 마법진이 위대한 고대의 힘에 의해 아득한 두 공간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세렐라인의 눈에 비친 것은 거대한 홀이었다.

족히 반경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가공할 넓이의 공간, 강철의 천장과 금속의 바닥 사이에 설치된 수많은 아티팩트들이 저마다 빛과 영상을 토한다. 네모난 크리스털이며 허공에 응집된 빛의 화면이 온갖 알아볼 수 없는 수치를 비추고 있다.

그 가운데 우뚝 솟은 철제 좌석, 그곳에 인류의 신이 앉아 있었다.

강철의 옥좌를 향해 세렐라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버지시여, 성견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반쯤 걸터앉은 방만한 자세로 세이어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가까이 오너라, 세렐라인. 네가 왜 나를 찾았는지를 안다.”

그녀의 몸이 절로 떠올라 옥좌 오른편에 안착했다.

살며시 세이어에게 다가가며 세렐라인이 죄송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저들의 마성이 극에 달해 불필요한 인류의 피가 흘렀나이다.”

“알고 있다.”

세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이 아이의 기억으로 그자의 대부분을 안다 여겼다. 그리하여 그자만 없으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테스론의 기억에 따르면, 전생의 안타레스 제국은 순전히 레펜하르트 하나의 힘으로 돌아가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전 대륙이 그를 압박해 손발을 묶으니 결국 무한한 힘을 지닌 마왕조차도 패하고 말았다. 마왕이 패하니 그만을 믿고 있던 이종족들도 지리멸렬해 버렸다.

“하나, 세상은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렸구나.”

레펜하르트는 죽었다. 하지만 전생과 달리 그가 없어도 이종족들은 스스로 일어나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계속 싸웠다. 스스로 궁리하며 스스로 노력해 결국 인류의 힘을 타파할 방법마저 손에 넣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저 힘을 준 이 또한 인류라는 점이다. 필라넨스의 신관, 인간의 신성 주문이 없다면 트롤은 결코 저 힘을 다루지 못한다.

“예전엔 인간과 이종족의 패권 다툼이었으되 지금은 그저 사람과 사람의 전쟁이 되었다. 인간이 저들과 한마음으로 손을 잡으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세렐라인이 눈치를 보았다. 세이어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예전 그자는 지키는 자였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적을 죽이고 가족을 수호하는 자였지. 그래서 수호자를 잃은 이들은 결국 죽음당했다.”

세이어가 혼잣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생의 그는 땅을 일구는 자가 되었구나. 씨를 뿌리고 싹을 돌보며 밭을 만들었으니, 씨 뿌린 자가 사라졌어도 새싹이 자라나 거목이 되어 열매를 맺을 수밖에.”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눈을 깜빡거리다 세렐라인이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용서하소서, 제가 어리석어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세이어가 웃었다.

“아이야, 네가 어리석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귀엽다는 듯 세렐라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하게 말을 잇는다.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다. 제아무리 현자라도 상황도 모른 채 앞뒤도 없는 혼잣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실제로 세이어는 세렐라인이 듣길 바라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억겁의 시간을 살아오며 고독에 익숙한 자가 흔히 가질 수 있는 습관인 혼잣말을 한 것뿐이다.

눈치를 보던 세렐라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또 있어요, 아버지시여.”

“무엇이냐?”

주저하다 세렐라인이 대답했다.

“……위대한 신의 모체母體를 잃었나이다.”

“신의 모체? 아, 성배 계획 말이냐?”

잠깐 의아해하다 세이어가 바로 이해하고 되물었다. 세렐라인이 대답했다.

“예, 2차 성배 계획의 일원이었던 크리스틴 경이…….”

원래 은의 현자들은 항시 크리스틴과 실란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비밀결사의 특징상 대놓고 움직일 순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 항시 기회를 노려 왔다. 레펜하르트의 존재 때문에 통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세이어가 부활하며 성배의 중요성이 상당히 떨어져 버렸다. 부활한 신을 담을 육체에서, 만일을 대비한 스페어 역할로.

방심한 은의 현자는 잠시 크리스틴에 대한 감시를 허술히 했다. 그리고 그 틈에 그녀는 전장 깊숙이 개입해 죽음을 당해 버렸다.

아무리 중요도가 떨어졌다 해도 세이어의 신체神體를 잃은 사건이다.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용서를…… 아버지시여…….”

세이어는 개의치 않았다.

“신경 쓸 것 없다. 그 계획은 어차피 실패할 테니.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노라.”

세이어는 이미 저 결과를 알고 있었다. 테스론의 기억을 통해서.

미래의 성배 계획, 그 결과물은 완전치 못했다. 고작해야 미약한 신성에 닿아 어느 정도 힘을 발휘했을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인류에겐 엄청난 힘으로 여겨져 성녀라 불리며 칭송받았지만, 세이어의 자아를 깨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적어도 테스론의 기억이 담은 성녀 엘린의 20년 인생 동안 그녀 안에 존재하던 신의 의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눈앞의 소녀, 1차 성배 계획으로 인해 신을 담을 그릇으로 탄생한 세렐라인이 결국 세이어를 깨우지 못하고 그저 담고 있을 뿐이었던 것처럼.

‘세렐라인과 달리 어느 정도 신성에 닿았던 걸 보면 몇십 년 뒤엔 결국 깨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실패는 실패지.’

상념에 접어든 세이어를 향해 세렐라인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실패였……던가요?”

세이어가 어찌 일어나지 않은 사실에 대해 확신하는지는 의아해하지 않았다. 원래 신앙자는 신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저 은의 현자가 행한 노력,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의미가 부정당한 듯하여 씁쓸할 뿐.

그녀를 달래며 세이어가 미소를 지었다.

“세렐라인, 네가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 네가 나를 담았고, 또 날 담을 육신을 찾지 않았느냐? 이제 더 이상은 근심할 필요가 없다. 난 이미 완벽한 육신을 손에 넣었으니.”

세렐라인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마치 주인의 표정에 따라 울고 웃는 강아지 같다.

“생각해 보니 웃기는군.”

문득 세이어가 실소했다.

“열화되는 육체의 대체품을 만들기 위해 그토록 노력을 했는데…….”

금단의 지식을 통해 R.X 시리즈를 부활시키고 성배 계획도 창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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