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권 제64장 광전사의 노래 (65/84)

제64장 광전사의 노래

1

인류의 주신, 세이어의 의지에 따라 성전을 일으킨 바슈탈론 제국은 당당히 선포했다.

위대한 세이어의 이름으로, 이 전쟁은 한 달 안에 끝날 것이라고.

그러나 백 일이 지나도록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제국의 예측과 달리 글로텐 산맥까지 몰린 안타레스 공국군의 저항이 의외로 거셌던 것이다.

잃어버린 왕 대신 새로운 여왕을 옹립하고 안타레스군은 굳건히 단결했다. 그리고 엘프와 트롤의 도시, 엘븐 포레스트와 트로리아드를 기점으로 방어선을 재정비해 유격전으로 맞섰다.

가벼운 몸놀림을 지녀 원숭이처럼 나무를 탈수 있는 엘프며 타고난 사냥꾼인 오크, 아예 자연 그 자체인 트롤의 종족적 특성은 산악 유격전에서 심히 빛을 발했다. 여기에 앉은 자리에서 사흘이면 석조 요새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내는 드워프들의 건축술이 붙어 산맥 곳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게릴라전을 펼치니, 압도적인 군세와 물량을 지닌 삼국 동맹이라도 딱히 대처할 방법이 없다.

이는 마치, 온갖 넝쿨이 복잡하게 얽힌 숲속에서 인간과 살쾡이가 싸우는 형국이었다.

숨을 곳이 없는 들판이라면 살쾡이는 감히 인간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하겠지. 그러나 숲 속이라면 나무를 타거나 수풀로 숨으며 얼마든지 인간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반면 인간은 아무리 그물을 던지고 창칼을 휘둘러도 살쾡이를 잡을 수 없다. 주변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너무 많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살쾡이가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발톱을 세워 휘둘러 봐야 그것은 찰과상일 뿐, 살쾡이의 발톱으로 숨통을 끊어 버리기에 인간은 너무도 큰 존재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타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 지 어언 반년째.

아직도 바슈탈론과 그라임, 할라인의 삼국 동맹군은 산맥을 넘지 못했다.

☆ ☆ ☆

글로텐 산맥 동부, 페틀랜드와 가까운 지리의 한 산등성이.

한 무리의 화려한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젠장…….”

하나같이 건장한 체구를 지닌 그들은 열심히 나무를 베는 중이었다. 아마 지나가던 인간이 있어 이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장을 보았다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이들은 전원 세이어의 성기사, 신의 축복을 받은 고귀한 이들이었다. 결코 이런 산속에서 나무나 하고 있을 신분이 아니었다.

“넘어간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자 기사들이 화들짝 자리를 피했다. 그 자리로 아름드리 거목이 쓰러지며 숲속에 굉음을 남겼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벤 나무를 요새로 옮겨라!”

기다리고 있던 열 명여의 기사들이 쓰러진 거목을 어깨에 짊어졌다.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어째서 우리가 이런 천한 일을…….”

위대한 세이어의 성기사, 어느 나라에 가도 귀족급의 대우를 받는 존귀한 신분인 자신들이 이런 막노동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성기사들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자신들이 걸친 화려한 갑주는 고작 이런 막노동을 하기 위해 지급받은 것이 아니다.

나무를 짊어진 채 이동하며 또 다른 성기사 하나가 구시렁댔다.

“……차라리 이 갑옷이라도 벗을 수 있음 좀 편하겠네.”

“그렇다고 벗을 수도 없지 않은가?”

투덜거리는 기사들 머리 위로 또다시 날카로운 호통이 떨어졌다.

“세이어의 성기사라면 전시에 임해 그에 합당한 무장을 하는 것이 교법이다!”

틀린 말도 아닌지라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없이 호통의 주인공, 그들의 지휘자인 저 장신의 여기사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기사들을 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 불만을 토하는가? 그대들 역시 이 임무가 함당함을 알고 있지 않은가?”

현재 성기사들에게 내려진 임무는 이것이다.

글로텐 산맥을 빠르게 주파해 적진의 후방으로 침투, 그곳에 진지를 구축해 침공선을 연장시키는 것.

지난 반년간, 글로텐 산맥을 기점으로 삼은 안타레스의 전략은 동일했다. 산맥 동부의 엘븐 포레스트와 트로리아드에 본진을 두고 산맥 서부 전역에 소수 정예의 별동대를 보내며 침공하는 제국군의 발을 묶는다.

험준한 글로텐 산맥에서 인간의 군대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길목을 모조리 가로막고 치고 빠지기를 계속하니, 이는 유격전의 형태를 취했지만 동시에 철저한 방어전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입구 막고 버티기인 것이다. 산맥을 통째로 사용하는 농성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제국 측에서는 별도의 전략을 짰다.

안타레스의 소수 정예 유격전 앞에 대량의 군세는 그리 의미가 없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군세를 소모할 뿐.

그렇다고 제국도 똑같은 방식을 쓸 수는 없었다.

소수 정예의 질이나 양은 사실 삼국 동맹이나 안타레스가 크게 차이가 없다. 게다가 같은 기량을 지닌 같은 숫자의 정예라도, 이종족의 특성상 산속의 전투는 저쪽이 더 유리하다.

제국군의 장점은 어디까지나 대규모 군대와 그 군대를 하나의 생물체처럼 운용하는 정밀한 전술. 자신의 장점을 버리면서까지 전략을 운용하는 바보 지휘관은 제국에 없다.

그래서 제국이 취한 것은 거점 점거 전략이었다.

소수 정예를 안타레스의 유격대와 맞붙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예들의 기동성으로 자체적으로 산맥을 돌파, 적들의 본진 근처에 새로운 거점을 만든다.

현재 제국의 침공이 전부 가로막히는 것은 안타레스 유격대에 비해 덩치가 큰 제국군의 이동이 너무 느리고 위치 파악이 쉬워 며칠 전진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기동성을 지닌 소수 정예만으로 군세를 꾸린다면 안타레스의 눈을 피해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글로텐 산맥 너머에 아군의 거점이 생긴다면 그곳을 중심으로 텅 빈 안타레스의 본진, 엘븐 포레스트나 트로리아드를 도모할 수 있다. 본진이 위험해지면 마음껏 날뛰던 안타레스 측도 그쪽으로 병력을 뺄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럼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힘의 균형도 깨지게 된다.

쉽게 말해, ‘입구 막고 버티기’에 ‘빈집 털이’로 대항한다는 소리였다.

“이는 이 성전을 끝낼 수 있는 쐐기가 되는 작전. 그만큼 승리의 영광 역시 클 터인데 어째서 다들 불만을 가지는 거지?”

요새를 건설할 목책용 나무를 짊어지고 가는 수하 기사들을 보던 이들의 지휘관, 크리스틴 경은 이해 못 하겠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지난 사흘간 계속 건설 중이었던 그녀의 요새를 향해.

☆ ☆ ☆

좌우로 깊이 파인 협곡 한구석, 그곳에 커다란 목제 요새가 건설되고 있었다.

정면으론 넓은 공터가 숲과 연결되어 있고 삼면이 절벽인 그곳은 방어 요새라고 하기엔 좀 지나치게 구석에 몰린 느낌이었다.

삼면이 절벽이면 당연히 방어에야 좋겠지만, 대신 도망갈 곳도 없다. 지대가 부실할 경우 낙석 등의 피해도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정통 전술 교본에선 이렇게 극단적인 지형은 그리 선호되지 않는다. 보통은 침공로를 제한하고 다른 쪽은 험준한 산세, 가파른 산비탈이나 군대가 이동할 수 없는 빽빽한 숲을 두는 정도다.

그러나 이종족을 상대하는 제국군은 상황이 달랐다.

가파른 산길은 인간의 기마는 지나갈 수 없지만 오크의 다이어울프는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다.

빽빽한 숲은 인간의 군대는 지나갈 수 없지만 엘프 입장에선 평소 살던 앞마당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트롤쯤 되면 숲과 평지의 차이를 느끼지도 못한다.

어지간한 장애물은 이종족들에겐 장애물이 아닌 것이다. 어설픈 위치에 요새를 세워 봤자 사면에 모두 침공을 허용할 뿐이다. 여태 삼국 동맹이 유격전에서 연신 밀린 이유도 저것이었고.

그런 면에서 이 요새의 위치는 참으로 확실했다.

아무리 몸이 가벼운 엘프나 강인한 오크, 재생력이 강한 트롤이라도 저 깎아지른 절벽에서 뛰어 내려오진 못한다. 방어가 전문인 드워프는 유격전을 한다 해도 임시 진지 구축이나 퇴로 확보, 추격대 차단 등을 맡고 있으니 먼저 쳐들어올 일은 없다.

“과연 제국의 참모진은 뛰어나군요. 좋은 지형입니다.”

크리스틴 경의 부관, 성기사 말톤이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틴은 아무 대꾸 없이 한창 건설 중인 요새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진행이 너무 늦지 않소? 목책을 이용한 단순 요새는 보통 사흘이면 완성된다고 알고 있는데.”

부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야 제대로 된 공병대라면 그렇겠지요.”

요새 곳곳에선, 베어온 거목들을 다듬어 목책을 박고 진지를 세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냥 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그런데 이색적인 부분이 보였다.

그 모든 작업을, 화려한 갑주를 걸친 성기사들이 행하고 있었다.

“잡아당겨!”

“끙차!”

목책 위에서 기사 한 명이 소리를 지른다. 밑에서 다른 기사 두 명이 기합을 터트리며 밧줄을 잡아당겨 목책을 세운다. 마침 바람이 불어 그들이 걸친 망토가 참 멋지게도 나부낀다.

그리고 바로 흙탕물이 퍽!

“제길, 더럽게…….”

아무리 화려한 색상의 망토라도 더러워지면 걸레랑 다를 게 없다. 기사들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일하던 기사 하나가 하소연을 흘렸다.

“공병이라도 몇 놈 데리고 왔으면, 아니 하다못해 시종이라도 몇 데려 왔으면…….”

조금 나이든 다른 기사가 힘없이 대꾸했다.

“알고 있잖은가? 그런 이들을 대동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걸세…….”

제국의 거점 점거 전략, 소수 정예만을 꾸려 빠르게 산맥을 돌파해 버린다는 그 전략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실제로 크리스틴과 이 오백의 성기사들은 안타레스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하고, 요새를 건축하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충분히 전략대로 진행된 상황이다.

문제는 글로텐 산맥을 주파할 정도인 소수 정예의 기준이 너무 높다는 것이었다.

초기 안타레스 기사단, 나름 전장에서 뼈가 굵은 그들조차도 넘지 못한 것이 이 글로텐 산맥이었다. 오죽하면 오크라트로 향하는 전령을 단장인 아스레일이 직접 갔을까? 이 산맥을 넘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강해졌음을 증명한다는 농담을 남겼을 정도로 험준하고 몬스터도 득실거리는 지역이다.

이러니 일개 병사는 고사하고 어지간히 단련된 기사라도 저 기준의 ‘소수 정예’엔 미치지 못했다. 세이어의 성기사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실력자만이 작전에 투입될 자격이 있다.

그렇다 보니 현재 그들은 평소와 달리 어떤 병사도, 시종도 데리고 오지 못했다. 성기사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오백을 겨우 채웠을 정도였다.

“이봐! 목책 세웠으니 못질 좀 하라고!”

“어, 젠장. 이놈의 망치가 왜 자꾸 빗나가지?”

입에 못 몇 개를 문 기사가 서툰 솜씨로 망치질을 한다. 깡깡 소리가 날 때마다 못 머리가 엉뚱하게 비틀려 제멋대로 박힌다.

“식사는 아직 멀었나?”

“어, 좀 태운 것 같은데? 탄내 난다.”

반대쪽에선 취사 준비가 한창이다. 세 명의 여기사가 근사한 갑주에 허리춤에 칼까지 찬 채 커다란 솥에 국자를 젓고 있다. 원래는 스튜였던 것 같은데, 너무 졸인 탓인지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 변해 있는 것이 보인다.

“물 부어, 물.”

“그럼 도로 불겠지.”

“……어머? 뭔가 더 이상해지고 있는데?”

배고픈 다른 기사들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여자라고, 여기사들에게 취사 준비를 시켜 놨는데 결과가 저 모양이다.

“어휴, 차라리 생으로 먹는 게 나을지도.”

애초에 성기사쯤 되는 이들이다 보니 다들 이런 허드렛일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진지는 하룻밤 자고 나면 아랫것들이 뚝딱 지어 놓는 것이고 식사란 배고플 때쯤 되면 시종이 뚝딱 만들어 놓는 것이란 게 이들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그 ‘아랫것’들이 없으니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

부관이 한숨을 쉬었다.

“총체적 난국이군요.”

다행인 것은 다들 단련된 이들이다 보니 솜씨는 없어도 근력 자체는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병사 열댓 명이 달려들어야 할 목재도 서너 명이면 들고, 수십 분 동안 파야 할 구덩이도 금방 팔 수 있다. 덕분에 허술할지언정 요새 외부 형태만큼은 빠르게 잡히고 있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작업 중인 성기사들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문득 부관이 중얼거렸다.

“요새야 어찌 되겠는데, 성기사들의 사기가 문제군요. 저들의 지위에 이런 천한 일을 하게 되었으니 심기가 좋지는 않을 터인데…….”

크리스틴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 같군. 도저히 모를 일이야.”

진지하게, 정말 모르겠다며 말을 잇는다.

“우리는 세이어께 모든 것을 바친 성기사, 그리고 이 임무는 이 성전을 끝마칠 가장 위대한 영광의 전투로 우릴 이끌어 줄 터. 대체 왜 저리들 불만인 거지?”

“…….”

순간 부관은 기가 막혀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얘가 제정신인가? 정말 몰라서 저러나?’

뭐, 크리스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그에 대한 대가가 크면 불만을 안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세이어께 모든 것을 바친 성기사, 그분이 명하신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천한 일이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 그렇기는 한데…….

‘당신도 성기사잖아! 우리와 똑같이 세이어께 모든 것을 바친!’

정작 저따위 말을 하는 크리스틴 본인은 지난 사흘 내내 손발 하나 꼼짝 안 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다. 지휘관이랍시고 부관이 챙겨 주는 밥 먹고 챙겨 주는 잠자리에서 그냥 자기만 했다. 부관인 말튼 경은 시종처럼 크리스틴 챙기면서도 틈틈이 다른 기사들 도와 나무 베고 요새 구축하는 데 손을 보탰거늘!

‘가식이라도 좋으니 앞장서서 하는 모습 조금만 보여 줬어 봐라! 그럼 이렇게까지 불만이 생겼겠나!’

속으로 치를 떨면서도 부관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가 크리스틴과 함께 싸운 것은 이번 전쟁이 처음이 아니었다. 1차 제국 침공 전쟁 때부터 함께 한 인연,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는 충분히 봐 왔다.

세상 만물을 자기 기준으로만 해석하는 저 거구의 여인에게 타인의 말 따위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는다!

‘말해서 무엇하리? 내 임무에나 충실할 수밖에.’

부관이 크리스틴을 막사로 안내했다.

“벌써 사흘, 안타레스 측에서 움직임이 있을 시기입니다. 작전 회의를 하시지요.”

“알겠다, 말튼 경.”

순순히 크리스틴은 부관의 의견에 따랐다. 그리고 부관 말튼은 안도했다.

어쨌든, 이걸로 기사들 눈에서 크리스틴을 잠시 치우는 데는 성공했다.

‘눈앞에서 꼴 보기 싫은 것만 사라져도 좀 낫겠지, 뭐.’

☆ ☆ ☆

막사 안, 전략 테이블.

“사흘 뒤면 요새가 완성됩니다. 현 요새에서 트로리아드까지의 거리는 채 하루도 되지 않으니, 아침 먹고 출발해 전투를 벌인 뒤 다시 요새로 돌아와 늦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지도를 가리키며 부관이 보고했다. 크리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직후에 트로리아드로 진군하면 되겠구나. 분명 현재 트로이아드엔 방어 전력이 없다고 했지, 말튼 경?”

“예, 제국의 첩보부는 이미 안타레스 잔당의 전력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현재 저들의 본진에는 최소한의 병력조차 없습니다. 민간인과 행정 인력, 그리고 부상자를 치유하기 위한 신관단이 전부입니다.”

전쟁이 진행된 지 벌써 반년째, 제국의 첩보부도 슬슬 안타레스군에 대해 상당히 파악했다. 비록 신출귀몰한 안타레스 유격대의 행적은 여전히 알아낼 순 없지만, 적들의 출몰 시기와 규모를 보고받아 조합하면 총 전력이나 포진 위치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마법 전령을 사용한 실시간 통신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이 작전도 가능해진 것이지요.”

현재 안타레스는 거의 모든 전력을 글로텐 산맥 서부 방어선에 집결하고 총력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트로리아드나 엘븐 포레스트에 남겨 둘 전력이 있을 리 없었다.

“좋아.”

크리스틴은 요염하게 웃었다.

“호호, 이제 저 천한 것들에게 신벌을 내리는 일만 남았구나.”

오백의 세이어의 성기사, 신성검의 경지에 든 이가 백에 노련한 기사급 전력이 사백이었다. 이 정도면 방어 병력이 없는 도시 하나를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문득 크리스틴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 전력 차이면 그냥 가서 모조리 죽여 버려도 되는데 왜 굳이 요새를 지어야 하는 거지?”

‘……벌써 몇 번이나 설명했는데, 저거. 정말 남의 말은 귓전으로도 안 듣는구나.’

내심 한탄하면서도 부관은 착실하게 자신의 임무에 임했다.

“현재 우리들의 전력으로 트로리아드를 휩쓸어 버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병력의 숫자 자체가 부족하니 도시를 점거하는 건 무리입니다.”

“어째서? 저항하는 자를 모조리 베어 버리면 말 잘 듣는 순한 놈들만 남을 것 아닌가?”

“그야, 트로리아드를 점령하는 걸로 끝이라면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이후 돌아올 안타레스 군세와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오백의 병력으로 넓은 도시 전역을 방어할 순 없습니다.”

애초에 이 전략의 목적은 트로리아드를 함락시키는 것이 아니다.

트로리아드를 압박해 방어선으로부터 안타레스 군세를 돌려 전방에 구멍이 생기게 하는 것, 그리고 그 구멍으로 제국군 본대가 침공할 길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즉, 성기사단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계속 돌아온 안타레스 군세와 맞서 버티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산적들이 마을 점령할 힘이 없어서 굳이 산채 세우고 수시로 마을 오락가락하면서 약탈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마을에 눌러앉아 있으면 이후 닥칠 영지군의 본대를 당할 수 없으니, 후딱 챙길 것만 챙기고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자신들의 산채로 돌아가는 것이지.

성기사가 아무리 강해도 그 숫자는 고작 오백, 이 숫자로 방어하려면 적국의 넓은 도시보다는 비록 허름하더라도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세운 어울리는 규모의 요새가 필요하다.

“음, 그렇군. 이해했노라.”

크리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래 놓고 내일 또 물어보겠지.’

하지만 어쩌랴? 누가 뭐래도 현재 그의 상관은 이 귓구멍 막힌 아가씨인데? 그저 맡은 바 임무나 열심히 할밖에.

“경험이 없어 진행이 더디긴 하지만 토대만큼은 튼튼한 요새입니다. 다들 힘 하나는 좋으니…… 완공되고 나면 충분히 본대가 진군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이후 복귀한 안타레스 군세가 요새로 덤벼오건 트로리아드 방어에 나서건 그건 상관없다. 전방에서 전력을 뺀다는 목표는 이미 달성한 후니까. 본진 코앞에 적의 전력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안타레스 방어선은 흔들리는 것이다.

‘참으로 절묘한 한 수란 말이지.’

새삼 부관 말튼 경이 제국 참모부의 작전에 감탄할 때였다. 갑자기 크리스틴이 인상을 썼다.

“가만, 그렇다는 건 요새가 완공되기 전이라면 위험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말튼 경, 지금 저들이 우리를 습격하면 어떻게 되지?”

말튼 경이 잠시 흠칫했다.

“그야, 현 상황에서 안타레스 유격군의 기습을 받게 되면 꽤 위험하겠지요. 우리 측은 방어진도 구축되기 전인 데다 해 보지 않은 막노동으로 상당히 체력도 사기도 떨어진 상태니…….”

“그렇다면 역습을 받기 전, 오히려 전력이 무사한 지금 당장 트로리아드로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칫하면 고립된 곳에서 원호도 없이 불리한 전투를 감행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 당장 트로리아드를 점거하는 쪽이…….”

새삼 말튼은 크리스틴을 다시 보았다.

저런 걸 보면 절대 머리가 나쁜 아가씨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요새 짓기에 대해서만은 자꾸 흰소리를 한다는 건…….

‘그냥 요새 짓는 게 싫다 이거지?’

세상만사를 자기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니 아무리 납득할 만한 소릴 들어도 뇌리에서 알아서 지우는 것이다. 그리고 불만, 불만, 불만.

‘이번 전쟁만 끝나면 반드시 전출 서류 낸다. 암, 반드시 내고말고.’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말튼이 애써 대꾸했다.

“그럴 걱정은 없습니다. 우리의 움직임은 그만큼 은밀했으니까요. 아무리 안타레스라도 우리 위치를 파악했을 리가 없지요.”

애초에 안 들켰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러나 크리스틴의 질문은 집요했다.

“그래도 혹시나 파악이 되었다면? 우리가 이곳에서 요새 건설에 착수한 지 벌써 사흘째다. 벌채도 꽤 했고 소음도 상당히 냈으니 파악되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동 중에야 최대한 은밀히 움직일 수 있었지만 자리 잡고 짓 짓는 데 안 들키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분명 예리한 지적이었지만, 부관은 오히려 한심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도 말했잖아?’

워낙 답답하다 보니 살짝 언성이 올라간다.

“그러니까, 현재 트로리아드엔 우릴 습격하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다니까요? 현재 트로리아드에 남은 전력은 기껏해야 이단의 현자나 광기의 발렌시아 정도입니다.”

유능한 제국 참모부는 이미 저 상황에 대해서도 파악해 두었다. 크리스틴 따위도 파악할 수 있는 문제를 저들이 모를 리가 있나?

“눈의 여왕 이니야를 비롯한 혈신血神 아틸카며 오크 대모 스탈라, 배신의 기사 사이러스나 오크 대전사 타시드는 전부 수하 오러 유저며 정예들을 이끌고 최전방에서 유격전 중입니다. 그렇기에 삼국 동맹이 압도적인 전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어찌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덕분에 현재 트로리아드 방어 전력은 재상으로서 행정에 임하고 있지만 마갑 덕에 어지간한 오러 유저에 육박하는 무위를 지닌 카를과, 전선과 본진을 오가며 부상자를 운송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시리스의 호송부대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 시리스가 운 좋게 이 시기에 트로리아드 근처에 머물고 있다는 전제하에 저 정도다.

“부상자 호송부대는 전력이라기엔 미흡한 신병들, 이단의 현자와 광기의 발렌시아는 분명 위협적인 존재지만 이끌 병력이 없으니 큰 문제는 아니지요.”

그 외엔 전부 민간인. 부상자 치유를 위해 프리스트들이 대거 머무르고는 있지만 프리스트는 그 특성상 병력의 보조 역할이지 전력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이단의 현자나 광기의 발렌시아가 어설픈 병력을 이끌고 우릴 기습한다면 오히려 환영할 일입니다. 손쉽게 그 목을 벨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몰래 도달하는 것이 힘들었지, 일단 도착해 요새 건설에 착수한 이상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

설명하면서도 말튼 경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정말이지 절묘한 한 수야.’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적의 약점을 교묘히 찔러 아군의 피해를 가장 최소화하며 적의 피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역시 천년제국 바슈탈론다운 저력이란 생각이 새삼 들었다.

뭐, 크리스틴은 이번에도 자기 기준으로만 받아들였지만.

“그렇군, 그럼 요새는 계속 지어야겠네.”

귀찮아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여전히 어떻게든 귀찮은 요새 건설 따위 때려치우고 얼른 싸우러 나갈 궁리만 찾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인다.

‘거참…….’

속으로 혀를 차다 말고 문득 말튼 경은 의아해했다.

이번 임무의 후보는 여럿 있었다. 제국의 강력한 기사단이나 그라임, 할라인의 여러 기사들도 궂은일을 각오하며 이번 임무를 원했다. 그만큼 영광도 대가도 큰 임무니까.

그런데도 세이어의 성기사단이 이 영광을 얻은 것은 크리스틴이 워낙 강력하게 의지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저런 성격의 여자가 어째서 이 일을 자원한 거지?’

의아해하며 말튼은 목례를 한 뒤 막사를 나섰다. 요새 건설 진행 사항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의문은 의문이고 어쨌거나 할 일을 해야 하니까.

“쳇!”

부관이 막사를 나서자 크리스틴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퍽 걷어찼다.

퍽!

가벼운 일격에 테이블 다리가 똑 하고 분질러졌다. 귀퉁이가 기운 테이블을 뒤로한 채 그녀가 툴툴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코앞인데…… 그이가 코앞에 있는데.”

원래 크리스틴은 이번 임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무리 영광이 크다지만 여인의 몸으로 더럽고 궂은일을 자처하고 싶은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생각이 바뀐 것은 현재 안타레스의 본진 상황을 들은 후였다.

현재 안타레스의 본진은 두 곳, 엘븐 포레스트과 트로리아드. 그곳에서 두 교단의 신관들이 각자 도시 하나씩을 맡아 밀려오는 부상자를 처리하고 있었다.

엘븐 포레스트는 알 포트 교단과 그 교황인 ‘악신의 사제’ 마켈린이.

그리고 트로리아드는 필라넨스 교단 안타레스 지부와 그곳의 대주교인 ‘타락 여신’ 실란이.

“아, 실란……!”

가슴에 손을 모으며 크리스틴이 얌전히 눈을 감았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말을 달리면 하루도 걸리지 않을 거리에 그이가 있다.

그이의 사랑을 빼앗았던 근육질 괴물(?)도 신벌을 받아 죽어 버렸으니 더 이상 방해물도 없다.

‘어서 저 천한 것들로부터 그이를 구해야 하는데!

마치 성녀의 그것처럼 다소곳하고 우아한 표정으로, 크리스틴은 오래도록 보지 못한 사랑하는 이를 떠올렸다.

“조금만 참아요, 내 사랑. 곧 제가 당신을 구하러 갈게요!”

2

“으으으!”

갑자기 오한이 닥쳐와 실란은 부르르 떨었다. 곁을 걷던 시리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실란?”

“가,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응?”

바들바들 떠는 실란을 보며 트롤 구루, 티티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길 잘 걷다 말고 왜 이러나?

실란이 정색을 하고 중얼거렸다.

“이 떨림은…… 크리스틴이 헛소리할 때의 떨림이로구나!”

오한도 자주 닥치면 패턴이 생기는 법이다. 슬슬 실란은 오한만으로도 그것이 기온 변화에 의한 것인지 여인의 한(?)에 의한 것인지 구별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참으로 슬픈 능력이었다.

“크리스틴? 아, 그때 제플리에서 만난 떡대 여자?”

티티마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무섭긴 했지. 실력이 아니라 성격이.”

실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참, 살다 살다 내가 크리스틴에게 먼저 가까이 가는 일이 생길 줄이야.”

이미 상대 병력이 세이어의 성기사라는 것은 확인했다. 갑옷만으로도 알아보기 참 쉬운 놈들이었으니까.

그 지휘관이 크리스틴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성기사 갑옷을 입었고, 놀라운 미녀인데, 무식하게 키만 큰 여자가 세상에 둘씩이나 있지는 않다.

평생 도망만 다닌 상대를 이쪽에서 찾아가야 하다니, 참으로 운명을 원망하고 싶은 실란이었다.

시리스가 나직하게 실란을 달랬다.

“어쩔 수 없잖아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그건 그렇지.”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실란도 상념을 지우며 계속 짙은 밤의 숲 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슬슬 목적지가 보이고 있었다.

가파른 절벽 아래 굳건히 세워진 목책 요새.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몇몇 불빛이 요새 내를 비추고 있다. 하나같이 화려한 갑주를 걸친 강해 보이는 기사들, 세이어의 오백 성기사단이었다.

엘프의 야간 시야를 써 지형을 살피며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확실히 저 지형이면 배후로 기습하는 건 무리겠네요.”

엘프 정도는 아니지만 트롤 역시 상당히 밤눈이 밝은 편이다. 티티마도 요새 방어 형태를 살피며 말했다.

“이제까지의 인간들 요새와는 달라. 정말 인간은 빨리 배우네.”

티티마가 혀를 내둘렀다. 유격전 시작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인간 군대는 자신들의 요새 취약점을 파악하고 보완해 버렸다.

실란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아직 완성되진 않았어. 정면으로 침공할 루트가 상당히 남아 있다. 카를 씨 예상대로야.”

크리스틴의 걱정대로, 트로리아드는 이미 성기사들의 침투를 파악하고 있었다.

현재 안타레스는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다. 트로리아드의 시민들도 모자라는 식량을 메우기 위해 인근 숲과 산을 뒤져 사냥과 채집에 열중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저 요새가 발견되는 것은 필연이다.

이 보고는 바로 실란에게 들어갔다.

-끄응, 하필 카를 씨도 없을 때…….

보고를 받은 실란은 당혹했다.

현재 카를은 엘븐 포레스트 쪽 행정을 처리하기 위해 잠시 트로리아드를 비운 상태였다. 윗대가리 다 없어진 현 트로리아드의 최고위 명령권자는 바로 실란, 그리고 비록 아틸카의 후계자지만 아직 어려 본진에 남아 있던 티티마 정도였다.

실란은 급히 마법 전령을 날려 카를에게 연락을 취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카를도 바로 대책을 세웠다.

-아직 요새가 완공되지 않았을 때 격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제국 참모부의 수작쯤은 한눈에 꿰뚫은 카를이었다. 만사 제쳐 놓고 기습 작전부터 세워 실란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카를이라도 한 가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카를 씨, 대체 무슨 병력으로 기습을 해요?

카를의 작전은 훌륭했다. 세이어의 오백 성기사단을 상대로 해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그 작전을 시행할 병력만 있었다면.

-그, 그건…….

천하의 카를이라도 없는 병력을 만들 재주는 없었다. 고민하던 카를은 결국 책사로서 극히 수치스러운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든 만들어 보십시오, 실란 대주교. 어쨌거나 그 요새가 완성되면 안타레스는 끝장입니다.

-어떻게든 만들어 보라니 그 무슨…….

그나마 다행인 일은, 다음날 시리스가 부상자를 이끌고 트로리아드로 돌아왔다는 점이었다.

소식을 들은 시리스도 안색이 변했다. 실란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찌해야 할지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병력이 없었다.

현재 트로리아드 인구의 절대 다수는 민간인, 그것도 노약자와 아녀자들이었다. 병력이 될 만한 한창 나이의 사내들은 부상자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종족을 막론하고 현재 모든 안타레스의 사내들은 징집되어 전방에 투입된 것이다.

전투 자체는 여전히 이니야며 각 종족의 초인들이 이끄는 안타레스의 최정예들이 행한다. 하지만 직접 전투에 나서지 않아도 전장에서는 일손이 필요한 곳이 수두룩하다. 물자를 옮기거나 부상자를 호송하거나 거점을 짓거나 하는 등등.

저들의 보조가 없으면 아무리 안타레스의 최정예라도 이리 쉴 틈 없이 산맥을 오가며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여기서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데…….

-하지만 노약자들을 아무리 모아 봐야 전력이 될 리가 없잖아, 시리스.

-그건 그렇죠, 하아.

오백의 성기사라면 단순한 노약자 따위 몇 천이건 학살할 수 있는 전력이다. 그것도 피는 고사하고 땀조차도 흘리지 않은 채!

-최소 각 종족의 정예 정도는 되어야 승부가 날 텐데…….

-그 정예들을 전방에서 빼 오게 만드는 것 자체가 이쪽의 패배잖아요, 실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티티마가 한껏 굳은 얼굴로 의견을 낸 것은.

-실란, 사실은 방법이 있어. 하지만 그건…….

순간 시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티티마의 의견은 실로 비인도적이고 비열하고 무도하고 참혹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잖아. 저들도 이해해 줄 거야. 물론 나도…….

절망의 미소를 지으며 내민 그 제안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실란은 받아들였다.

절망 대신 희망의 미소를 지으며.

-아니, 잠깐? 가능할 수 있을 것도 같아. 그래, 조금만 방식을 달리하면 말이지.

☆ ☆ ☆

조용한 밤하늘 위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습이다!”

막사에서 잠들어 있던 크리스틴이 매서운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뭣이?”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요새 너머로 요란한 소음이 들려온다. 상당한 수의 병력이 움직이는 소리다.

허겁지겁 무장하며 그녀는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절대 기습은 있을 수 없다며?’

메사이어를 쥔 채 크리스틴은 쏘아진 화살처럼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사방이 화광으로 충천해 있고, 나무로 만든 요새 곳곳에 불이 붙어 있었다.

“말튼 경!”

부관의 이름을 외쳐 보지만 답은 없었다. 그녀는 허겁지겁 목책 위로 몸을 날렸다.

이미 수많은 성기사들이 어둠 속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팔백 정도로 보이는 병력이 횃불을 던지고 창칼을 휘두르며 성기사들과 맞서 싸우고 있다.

‘말도 안 돼! 지금 트로리아드에 저 정도 병력이 있을 리가!’

습격한 이들은 무장한 수백의 트롤들이었다.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갑옷을 걸친 수백의 트롤들이 창칼을 휘두르며 성기사에게 달려든다. 사방에서 트롤의 고함과 욕설이 들려왔다.

“죽어라, 비열한 인간 놈아!”

“찢어 죽여 주마! 이 썩을 것들!”

안타레스 제국이 생긴 지도 꽤 시간이 지난 덕인지 트롤이면서도 공용어 욕설을 잘도 구사한다. 그 모습에 크리스틴은 위화감을 느꼈다.

‘트롤이 저런 모습을 보여?’

몇 번이나 트롤들과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크리스틴이었다.

구루라 불리는 트롤 주술사들은 절대 쇠를 벼린 창칼을 쓰지 않았다. 쇠로 된 갑옷을 입는 일도 없다. 저토록 단순 무식하게 엉망진창으로 무기를 휘두르지도 않는다. 하물며 흥분해서 욕설 따위를 내뱉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트롤은 원래 사악하고 무심하여 감정을 모르는 존재가 아니었나?’

차분과 냉정, 무심과 무감은 보는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크리스틴도 평범한 인간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어쨌건 이들이 평소 보던 트롤과 전혀 다른 것만은 명백했다.

“죽어! 죽어! 죽어!”

“모조리 뒈져 버려!”

잘 보니 확실히 뭔가 달랐다.

‘뭐야? 제대로 된 사내놈은 하나도 없잖아?’

트롤은 남녀의 외모가 판이하게 다르다. 험상궂고 살벌하게 생긴 남성와 달리 트롤 여성은 푸른 피부색을 제외하곤 비교적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다. 인간이 봐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는 소리다.

쳐들어온 트롤의 절반은 여자였다. 뭐, 구루 중엔 강력한 여주술사도 흔하니 여성이라고 무시할 것은 사실 못 되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전투에 불리하다는 점은 트롤이라고 딱히 다르지 않다.

거기에 나머지 절반은 너무 늙어 뼈마디가 앙상한 노인 트롤이거나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이제 갓 재생력을 일깨운 어린 트롤들이었다.

척 봐도 전투를 수행할 법한 인원들이 아니다.

비록 부관의 속을 팍팍 썩이고 있지만, 그것은 크리스틴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그저 사고방식이 괴상하기 때문이다. 명색이 성기사답게 기본적인 전략, 전술은 당연히 익히고 있다.

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멍청한 것들, 병력이 없으니 그냥 닥치는 대로 모아 기습을 해 왔구나!”

이들은 모두 주술사가 아닌 평범한 일반 트롤인 것이다. 전장에서 보아 왔던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니라 그저 마을을 꾸리고 살아갈 뿐인 소시민 트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따위가 먹힐 거라 생각했나?”

일개 기사 하나를 상대하려 해도 일반 징집 병사 수십 명은 필요하다. 전문적으로 전투 기술을 익힌 자와 아닌 자의 차이는 그만큼 크다.

하물며 세이어의 성기사라면?

“죽어라! 인간 여자!”

마침 늙어 빠진 트롤 하나가 크리스틴을 발견하고 돌격해 왔다.

“크아아!”

험악한 고함과 함께 곡괭이질이라도 하듯 칼을 내리친다. 검술이라고 이름붙일 생각조차 안 들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가소롭다.”

가볍게 공격을 걷어 내며 크리스틴은 검격을 뿌렸다.

장난치듯 대충 휘둘렀을 뿐인데 단숨에 검 든 트롤의 팔이 날아가고 복부에 구멍이 뚫렸다. 늙은 트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으아아악!”

그래도 바로 절명하진 않았다. 아무리 늙었어도 트롤은 트롤, 강력한 재생력을 지닌 이 종족은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뒤로 구르면서 늙은 트롤이 허겁지겁 잘린 팔을 집어 도로 붙였다. 상처가 삽시간에 아물며 팔이 도로 움직인다. 내장을 헤집은 복부의 부상도 어느새 아물어 있다.

“어쭈?”

크리스틴이 혀를 찼다.

“하긴, 재생력이 있으니 그냥 민간인보단 좀 낫다 이거지.”

굳이 다른 이종족은 놔두고 트롤만으로 기습 부대를 꾸린 이유를 알겠다. 어차피 똑같이 힘없는 노약자라면 그나마 트롤이 엘프나 드워프, 오크보단 전투에 유리한 것이다. 칼 맞고 한 방에 죽진 않으니까.

“뭐, 그래 봤자…….”

크리스틴은 재차 검광을 뿌렸다. 덤비던 늙은 트롤이 팔이 또 뎅겅 잘려 비명을 토했다.

“끄아악!”

악랄하게도 일부러 잘랐던 곳을 또 노렸다. 트롤이 끙끙대며 다시 팔을 집어 붙이려 했지만 아까보다 상처가 아무는 것이 더뎠다. 이미 재생력을 상당히 소모한 후라 쉽게 부상이 낫질 않았다.

크리스틴이 피식 웃었다.

“트롤의 재생력은 만능이 아니지.”

트롤의 재생력은 물론 놀랍다. 전장의 트롤 주술사 중엔 심장이 꿰뚫리고도 되살아나는 괴물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사는 아니다. 재생력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부상을 입으면 트롤도 죽는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번쩍!

크리스틴이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강력한 신성검의 힘이 늙은 트롤의 두꺼운 갑옷과 목을 동시에 잘라 냈다.

“한 방에 목을 잘라 버려도 죽지.”

과연 머리 잃은 육신이 비척거리다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즉사한 것이다.

혈신 아틸카쯤 되는 괴물이면 모를까, 보통 트롤이라면 설사 강력한 주술사라 할지라도 잘린 목을 도로 붙일 수는 없다. 그래서 트롤 주술사를 상대할 때는 일격에 목을 날려야 한다는 것이 삼국 동맹군의 상식이었다.

다른 트롤병들의 무장을 보며 크리스틴이 입술을 삐죽였다.

“하기야, 그 정도는 저놈들도 대비한 것 같지만.”

현재 기습한 트롤병 전원은 유달리 목 부위에 두꺼운 철판을 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신성검을 익힌 크리스틴 앞에서야 종잇장 같은 갑옷이지만 보통 성기사에겐 저 철판을 베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덕분에 대부분의 트롤병들이 미천한 실력임에도 용케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시간문제였다.

즉사를 피한다 해서 트롤병이 성기사들에게 반격을 할 수 있단 소리는 아니다. 실제로 현재 전투 중인 기사들 중 부상을 입은 이는 아무도 없다. 그저 베고 또 베어도 자꾸 일어서는 트롤들을 보며 귀찮아할 뿐.

‘실력도 없이 맷집만 좋은 게 뭐가 유리한데? 남들보다 더 오래 처맞기밖에 더해?’

정 저 트롤들을 전투에 내세우려면 트로리아드 내에서 방어전을 펼치게 해야 했다. 높은 성벽 위에서 농성을 벌이는 것이라면 이들의 재생력이 꽤 힘을 발했을 터였다. 공성하는 입장에서, 버티고 선 적병이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악몽 같은 일이니까.

“그런데 주제에 먼저 기습을 하다니, 전술도 모르는 어리석은 놈들.”

비웃으며 크리스틴은 몸을 날렸다. 메사이어의 검광이 어둠을 가르며 다른 트롤병들을 뒤덮으려는 순간이었다.

타앙!

두 자루 시미터가 검격을 가로막았다.

흠칫해 크리스틴이 뒤로 물러섰다.

“윽?”

어느새, 섬뜩할 살기를 띤 엘프 여검사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두 눈동자를 붉게 일렁이며 기이한 미소를 짓는다.

“그 전술은 물론 인간의 것이겠지?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싸늘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며 크리스틴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얼굴에서 비웃음이 싹 사라지고 딱딱한 긴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크리스틴의 전신에서 흥분과 살기가 뒤섞여 피어올랐다.

“광기의 발렌시아! 그렇군! 네년이 이 허접한 부대를 끌고 온 거였나?”

벌써 몇 번이나 굴욕을 당한 바로 그 상대가 눈앞에 서 있었다.

☆ ☆ ☆

“하앗!”

예리한 검광이 수직으로 내리꽂힌다.

“흐읍!”

짧은 기합과 함께 두 자루 시미터가 잔상을 남기며 검격을 걷어 낸다.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세 자루 칼날이 어지러이 허공에 얽혔다. 검격을 나누며 크리스틴이 소리쳤다.

“세이어시여, 당신의 종을 가호하소서!”

가공할 신성 가호의 힘이 그녀의 전신에 깃든다. 그대로 검을 내리치며 낭랑한 기도문이 이어졌다.

“세이어시여, 당신의 빛을 허락하소서!”

눈부신 빛이 검에 맺혀 어둠을 살랐다. 세이어의 성기사가 자랑하는 비기, 신성검이다. 이 모든 것이 메사이어의 힘에 의해 증폭되어 가공할 기운을 사방에 떨쳤다.

전투 중이던 성기사들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오오!”

“크리스틴 경이다!”

“실로 놀라운 광채로다!”

부단한 수행을 통해 이제 크리스틴은 메사이어의 힘을 온전히, 100퍼센트 끌어내고 있었다. 그 위력은 실로 발군, 역대 세이어의 성기사 중 그 누구도 이 같은 무위를 보이지는 못했으리라.

흥분한 성기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저 천한 놈들에게 세이어의 신벌을!”

이것이 바로 크리스틴이 이들의 지휘관인 이유였다. 여인의 몸으로, 심지어 성격조차 엉망진창이고 사람을 이끌 인망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기사들은 크리스틴을 자신들의 지휘관으로 인정했다.

저 압도적인 빛이야말로 그녀가 세이어께 가장 사랑받는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세이어께서 우리를 지켜보신다!”

그러나 정작 크리스틴 본인은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도대체 저 엘프 년은?’

부단히 수행했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가끔 찾아오는 쉬고 싶다는 욕망은 사랑하는 그이, 실란을 떠올리며 꾹꾹 눌렀다.

그렇게 해 메사이어의 힘을 완전히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크리스틴은 웬만한 오러 유저와 붙어도 승패를 장담 못 할 정도의 강자였다. 성기사를 은연중 무시하는 제국의 오러 유저조차도 그녀의 힘만큼은 오러에 맞먹는다며 인정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아직도 저 계집을 베지 못하는 거야!”

시리스는 여전히 그녀보다 위에 있었다.

“조금 더 강해지긴 했네. 그래 봤자 넌 여전히 별거 없어.”

비웃음을 날리며 시미터를 교차로 휘두른다. 백색의 십자광이 메사이어의 칼날을 두들긴다.

“크윽!”

폭음과 함께 크리스틴의 신형이 몇 미터나 뒤로 날려 갔다. 엄청난 힘이었다. 마치 블레이드 오러와 맞붙었을 때를 연상케 하는 거력이다.

“아하하하!”

폭소하며 시리스가 날아올랐다. 예의 그 알 수 없는 기이한 수법으로 허공을 연신 밟으며 크리스틴의 머리 위로 참격을 퍼붓는다.

“여전히 땅강아지처럼 기어 다니는구나, 크리스틴!”

갑옷 여기저기가 깨져 나가며 육중한 통증이 전달된다. 크리스틴이 이를 악물었다.

“닥쳐라! 이 요망한 계집!”

밀리는 크리스틴을 보고 몇몇 성기사들이 협공을 취했다.

“크리스틴 경!”

“이 사악한 마녀 같으니!”

신성검의 빛이 시리스의 배후를 노리고 쏟아진다. 순간 시리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훗.”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는 몸을 비틀어 공세를 피했다. 그리고 바로 몸을 날리며 검을 교차해 날린다.

파앗!

참격이 성기사들의 칼날을 두들겼다. 검이 깨지며 기습한 두 명의 기사가 오히려 뒤로 날아갔다. 그러나 워낙 좋은 갑옷을 걸치고 있어 땅을 구르는 정도론 딱히 상처를 입진 않았다.

“크윽!”

“이 정도로 쓰러질 것 같으냐!”

갑옷 위로 성스러운 가호의 빛을 발하며 기사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성기사들의 갑옷은 모두 질 좋은 강철에 소량의 미스릴과 오리하르콘을 섞어 만든 것으로 신성력에 반응하기 쉽게 제작된 것이었다. 자체의 강도도 상당한데 거기에 신성 가호까지 깃들었으니 블레이드 오러면 모를까, 단순한 충격 정도로는 전혀 손상을 줄 수가 없다.

“세이어께서 우리를 가호하신다!”

의기양양하게 성기사들이 다시 시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시리스가 비웃음을 흘렸다.

“좋겠다, 갑옷 비싼 거 입어서.”

그래 봤자 블레이드 오러까지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현재 시리스의 엘레멘트 소드는 충분히 오러에 필적하는 힘을 지녔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엘레멘트 소드를 펼치지 않았다.

“굳이 갑옷 부수지 않아도 인간은 쉽게 죽잖아?”

키득거리며 시리스가 요사스러운 검무를 추었다. 눈앞 가득 검광이 번득이며 성기사들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쉽사리 허점을 만든 시리스가 이내 양손의 검으로 동시 찌르기를 날렸다.

“헙!”

기사들의 얼굴 위로 피 분수가 솟구쳤다. 그녀의 검날이 정확히 갑옷의 빈틈, 두 눈과 미간을 찌른 것이다.

원래 시미터는 찌르기에 지극히 취약한 검, 그러나 시리스 정도 실력이면 시미터의 찌르기로도 갑주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인간의 두개골쯤은 부술 수 있다.

“끄아악!”

“어억!

비명과 함께 두 기사가 그대로 절명했다.

“눈깔까지 막아 주는 갑옷이 있단 소린 못 들었거든?”

검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 내며 시리스가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다 문득 순진한 미소를 짓는다.

“아, 그러고 보니 카를 씨 마갑은 눈깔도 막아 주는구나. 뭐, 어쨌든 상관없는 이야기인가.”

크리스틴이며 성기사들은 치를 떨었다. 안면 가득 피를 흘리며 비척거리다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이 무슨 잔인한!”

분노한 크리스틴이 메사이어를 휘두르며 시리스에게 돌진한다. 다른 성기사들도 삼면에서 협공했다.

“전원 포위해 공격하라!”

물론 시리스는 가볍게 피했다.

“나와, 사라나.”

그녀는 허공을 밟고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칼 들고 사람 죽이려는 놈들이 뭔 얼어 죽을 잔인함 타령이야?”

성기사의 머리 위를 뛰어넘으며 간단히 포위망에서 벗어난 뒤 시리스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원한다면 진짜 잔인한 걸 보여 주지!”

섬뜩한 웃음을 머금으며 중얼거린다.

“나와, 님피아.”

허공의 수증기가 맺히며 순진무구한 처녀의 형상으로 화한다. 슬픈 표정을 지으며 물의 정령 님피아가 산산이 분산, 한 성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윽?”

놀란 성기사가 방패를 들어 막았다. 수백의 물방울이 방패를 타고 갑옷의 틈새를 노려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성기사의 눈과 코, 입이며 귀 등 모든 구멍을 파고들어 간다.

“꺽! 꺼억!”

순식간에 물의 정령이 성기사의 체내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폭발.

퍼엉!

인간이었던 한 형체가 수백 조각의 혈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튼튼한 갑옷 위로 붉은 선혈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성기사들은 경악했다.

“저, 저 사악한 년!”

사람을 내부에서 터뜨려 죽이다니?

“아무리 도리를 모르는 엘프라지만 어찌 심성이 이리도 잔악하단 말이냐!”

공포와 분노 속에 성기사들의 이성이 날아갔다. 본능에 몸을 맡긴 채 마구 돌진한다.

물론 그래 봤자 시리스 입장에선 기대했던 반응일 뿐.

“아, 또 정신줄 놨다, 등신들.”

시리스가 바로 돌진한 성기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혈화가 피어오르며 세 성기사의 목이 뎅겅 잘려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깔깔깔깔!”

광소를 터트리며 시리스는 성기사들 사이를 마구 휘저었다. 세이어의 성기사라면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 그러나 공포와 분노로 위축된 지금은 양 떼나 다름이 없다. 그야말로 양 떼를 습격하는 늑대처럼 유린하고 또 유린한다.

그 모습에 성기사 하나가 신음을 흘렸다.

“과, 광전사…….”

보다 못한 크리스틴이 병력을 물렸다.

“모두 물러서라! 저년은 나 혼자 상대한다!”

신성력을 모조리 끌어 올리며 크리스틴이 메사이어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신성검의 빛이 3미터 가까이 거대해졌다. 거기에 특유의 호흡으로 얻은 괴력을 싣는다!

“타아앗!”

단순하지만 강렬한 일격이 시리스를 노려 왔다. 채 무시할 수 없어 시리스도 일단 몸을 날려 피했다. 그 틈에 성기사들이 물러나고 일대일 대결의 양상이 되었다.

크리스틴이 연달아 연격을 날렸다. 시리스도 바로 반응해 계속 반격했다.

스피드에서 우위에 있는 시리스는 쉽게 공세를 피해 몇 번이나 크리스틴의 전신을 두들겼다.

탕! 타탕!

갑옷 위로 금속음이 울리며 튼튼한 갑주 여기저기가 찌그러진다. 피륙의 상처가 없어도 충격은 착실히 쌓여 부상이 된다. 깨진 갑옷 사이로 조금씩 붉은 피도 배어 나온다.

그러나 몰리면서도 크리스틴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몇 번 공방을 교차한 시리스가 뒤로 물러서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법이네? 그동안 놀지는 않았나 봐?”

크리스틴의 갑옷은 세이어 교단에서 각별히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 다른 성기사의 것보다 훨씬 뛰어난 강도를 지닌 물건이었다. 그러나 시리스의 엘레멘트로 부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그 갑옷에 깃든 크리스틴의 신성 가호였다. 예전에 붙었을 때보다 신성 가호의 힘이 훨씬 올라가 있는 것이다. 이래서야 성기사들과 합공할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까다롭다.

“하지만 나도 놀고 있진 않았거든?”

크리스틴이 강해졌다지만 시리스 역시 강해졌다. 이들 사이의 격차는 여전하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죽여 줄게, 크리스틴!”

시리스가 다시 공세로 나섰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연참을 애써 막아 내며 크리스틴이 마주 외쳤다.

“내가 쉽게 당할 것 같으냐!”

“쉽게 당하건 어렵게 당하건 결국은 당한다는 소리잖아? 그게 뭐 자랑이라고 떠드는 거야?”

시리스의 조롱에 크리스틴은 발끈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주 웃었다.

“적어도 네년의 발은 묶을 수 있지, 광기의 발렌시아!”

“발을 묶으면 뭐가 변하는데?”

시리스의 비웃음에 크리스틴도 비웃음으로 답했다.

“전황.”

크리스틴이 힐끔 전장을 곁눈질했다.

수백의 성기사와 트롤들이 얽혀 싸우고 이는 전장을.

“네년은 분명 강하다. 하지만 네년이 이끌고 온 천한 것들은? 전투에 문외한인 저 트롤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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