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권 제63장 기억의 도시 (64/84)

17권

제63장 기억의 도시

1

심장이 거칠게 맥동한다.

통증이 뇌리를 두들긴다.

그것은 상당한 고통이었다.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이 두통만으로도 집중력이 흩어져 감히 마법을 쓸 엄두를 못 낼 정도로.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어지간한 마법사가 아니다.

‘일단 두통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고.’

이 정도 통증으로 집중력이 흩어지는 경지는 이미 스무 살 때 넘어섰다.

‘게다가 이 정도 아픈 거야 하루 이틀 겪은 것도 아니니까.’

그는 마법사이면서 동시에 짐 언브레이커블의 당대 권왕. 세상에서 가장 고통에 익숙한 무문의 후계자다. 제라드 밑에서 하루 종일 처맞은 기간이 몇 년인데 이제 와서 두통 정도에 신경을 쓸까?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고통 속에서도 차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두통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건데.’

이 두통은 단순한 육체의 통증이 아니다. 그보다 오히려 영적인 통증, 그의 영혼이 무엇인가의 조건 탓에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쪽에 가깝다. 마법사로 살다 보면 의외로 흔하게 겪기도 하는 부류의 통증이다.

‘마력에 의해 영혼이 충격을 받으면 육체적인 고통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지.’

레펜하르트는 두통을 일으키는 영적 부위를 침착하게 감지해 나갔다. 방금 느꼈던 그 본능의 깨달음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분명 그는 무심코 깨달았다.

이 통증의 근원은 다른 곳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가까우면서 너무나도 먼 곳. 자신의 내면이자 아득히 먼 차원 너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라는 것을.

그렇다.

레펜하르트의 영혼은 그 순간 느꼈다. 이 두통은 저 머나먼 곳, 그가 원래 속했던 세계로부터 전해지고 있음을.

마법사의 본능은 의외로 무시할 것이 못 된다. 특히나 재능 하나는 흘러넘치도록 타고난 레펜하르트의 영혼, 그것이 가져온 본능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이러다 알고 보니 착각이었다면 시간을 거스른 걸로 모자라 엉뚱한 차원 이동까지 하게 될 판이지? 서두를 필요는 없어.”

본능의 외침을 일단 무시하고 레펜하르트는 두통을 느끼는 자신의 영혼, 그 자체에 침잠해 관조하기 시작했다. 의식을 가라앉히고 마력의 흐름을 전신에 돌리며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다본다.

‘일단 착각은 아니다.’

분명 이 두통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발현되고 있었다. 이것은 확실했다.

‘마력에 의한 영혼의 흐름 족쇄, 그 영향에 의한 육체적 신경계 자극. 분명히 그냥 몸 어디가 안 좋아서 생긴 두통은 아냐.’

그리고 그 원인이 되는 마력을 파악한다.

‘특수 마력의 링크 타입? 아니. 애초에 내 마력이 그런 식으로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어.’

다른 것은 다 부실해졌어도 신의 경지에 다다른 마력 감지 능력만큼은 여전히 건재한 레펜하르트다.

확실했다.

이것은 ‘연결’이라기보다는 ‘공명’에 가까웠다. 동일한 특수 마력의 형태가 차원 저 너머에서 레펜하르트 자신의 영혼과 공명하기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대체 차원 저 너머의 무엇이 레펜하르트의 영혼과 공명하고 있는 것일까?

‘……이 경우 답은 하나밖에 없다.’

레펜하르트가 원래 세계에서 구사한 마법의 잔재, 그것이 차원이 단절된 지금 원 주인의 영혼과 공명하고 있었다.

“마력 공명 현상이라면 설명이 돼.”

같은 세계, 같은 시공간에 존재할 땐 마력 공명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으로야 이 세계는 넓고 광활하겠지만 마력이란 에너지 기준으로 볼 때 이 세계는 그저 하나의 시공간, 거대한 백지에 점 하나 찍은 것에 불과하다.

저 기준으로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라 할지라도 찰싹 붙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공명을 할 일도 없다. 서로의 마력이 ‘멀어진’ 적이 없으니까.

같은 시공간에서 서로의 마력이 ‘멀어지는 경우’는 하나뿐이다. 죽음, 혹은 소멸이라 불리는 ‘시공간을 떠나는 행위’만이 저 조건에 부합된다.

그래서 보통 마력 공명 현상은 상대가 소멸하는 아주 잠깐의 찰나 동안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난 허차원에 와 있단 말이지.’

분명 레펜하르트의 존재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시공간을 떠나 ‘멀어진’ 것도 사실이다.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 이 괴상한 상태 때문에 원래라면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을 마력 공명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흘이 지난 지금, 차원을 넘어서까지 공명파가 닿을 정도로 꾸준하게 말이지.’

이것이 이제야 공명이 느껴진 이유.

적어도 레펜하르트가 알고 있는 지식 내에서는 유일한 답이었다.

‘그렇다는 건 저 공명이 원래 차원에서 오고 있다는 것이렷다?’

이 상황에서 차원 전이 공명이 일어난다면 이것저것 많이도 남겨 놓은 레펜하르트의 원래 차원이어야겠지, 설마 발길 한번 디뎌본 적 없는 새로운 차원일 리는 없지 않은가?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잠시 밝아졌다.

‘잘하면 원세계로 돌아갈 좌표를 찾을 수 있을지도…….’

그리고 이내 굳어졌다.

‘잠깐? 그런데 지금의 난 차원을 넘을 정도로 엄청난 걸 원세계에 남겨 놓은 게 없는데?’

시공 회귀 전이나 후나, 레펜하르트가 세상에 남긴 가장 강대한 마력 시스템은 세계수다. 그렇지만 현생의 세계수는 고작 세 그루, 그 정도 마력으로는 절대 차원 너머까지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걸 레펜하르트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럼 이건 대체 뭐야?’

원조 세계수 엘븐하임이나 레펜하르트의 세계수 링크만큼 강대 무비한 마력, 혹은 그 정도 영향을 끼치는 초월적인 마법의 여파만이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현생에서 구사한 가장 강력한 10서클 마법은 바로 대이적 주문 천지창조, 그 정도론 결코 무리다.

“애초에 세계수 세 그루의 연동으로 간신히 해낸 마법의 여파가, 세 그루 세계수보다 더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지.”

심지어 지금의 이 마력 공명은 단순히 감지되는 정도가 아니라 통증이란 명확한 형태로 느껴질 정도로 강하다.

원래 마력 공명 현상이란 것은 굉장히 미미한 반응일 뿐이라 어지간히 예민한 마법사라도 감지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현재 마법학에선 마력 공명 현상 자체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상대가 소멸하는 아주 잠깐만 일어나는 현상인 데다가, 마력의 흐름과 달리 감지하는 마법사 당사자는 엄연히 시공간 내의 존재다. 마력의 흐름을 기준으로 하면 이 시공간은 하나의 좁쌀만 한 점이겠지만, 그 공간 내에서는 엄연히 막대한 거리가 있다.

마력 공명 현상 자체와 달리 그 결과물인 공명파는 현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거리가 멀어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그 힘도 약해지니, 같은 시공간 내에서 인간의 감각으로 이를 감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애초에 레펜하르트가 마력 공명 현상을 알아낸 것도 전생 때 허차원으로 추방되었다 원래 차원으로 돌아가는 도중 운 좋게 발견한 것이었다. 일곱 그루 세계수의 링크를 찾아 공간 좌표를 지정하던 중, 원래 세계에서는 찰나의 순간인 그 현상이 지속되기에 겨우 알아챈 것에 불과했다.

‘그래, 예전의 세계수 링크 정도의 마력으로도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미약한 감각일 뿐이었어. 원래 마력 공명 현상이란 그런 거니까.’

세계수의 마력이 광활한 백사장이라면, 마력 공명은 그중 모래알 한두 알갱이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한 현상이다. 대부분의 여파가 시공과 차원의 벽 앞에 가로막힐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대놓고 아프지? 말도 안 되는데, 이거?’

아예 전 세계를 수백 그루의 세계수로 뒤덮든가, 아니면 뉴클리어 버스트를 몇천 발쯤 날려 대륙을 통째로 지도에서 지우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공명이 전달될 리가 없다.

‘그렇지만 분명 머리는 아프거든?’

머리를 부여잡고 레펜하르트는 혼란에 빠졌다. 그의 지식을 넘어서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끄응…….”

그는 고민했다. 자신이 세운 이론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무릇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이런 모순된 이론을 바탕으로 마법을 전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이상 이론을 점검할 여유는 없었다. 이미 허차원을 떠돈 지도 사흘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다다랐다. 언제 소멸할지 모를 위태로운 상황이다.

“에잇! 일단 저질러 보자!”

이를 악물며 레펜하르트는 대뜸 마력을 끌어 올렸다.

“천의 자리를 정 위치에, 타의 자리를 역위치에, 내 육체를 우주로 설정해 세상에 비추어 도표로 삼는다…….”

차원의 문을 여는 대이적 마법, 게이트 오브 디멘션을 준비하며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짓을 또 하게 될 줄이야.’

마법사라면 불확실한 이론을 토대로 마법을 전개하지 않는 법,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이미 경험이 있다.

이 시대로 그를 이끈 시공 회귀 마법, 그 또한 불확실한 이론일 뿐이지 않았나?

‘나, 사실은 원래부터 마법사답지 않게 막가는 경향이 있었던 걸지도?’

게다가 그 경향은 현생에 와서 더 두드러지기도 했고.

“그래, 사부님도 말씀하셨지! 문제가 생기면 잡생각 말고 들이대고 보라고!”

난관이 눈앞에 있다면 일단 감으로 때려잡고 나중에 고민하는 것이 바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위대한 전통 아니던가?

최후의 마력을 술식화해 시동하며 레펜하르트는 외쳤다. 그의 스승, 제라드가 들었다면 크게 기뻐하며 껄껄 웃을 만한 외침을.

“쓰벌! 남자라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다!”

☆ ☆ ☆

눈부신 빛이 의식을 뒤덮었다.

동시에 두통도 사라졌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당황했다.

“이건…….”

지금 레펜하르트의 눈에 비친 것은 거대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산보다 높은 건물이 묘비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수많은 인간들이 거리를 걷고 강철의 마차가 말이 끌지도 않는데 제 스스로 길 위를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간다. 심지어 개중엔 바퀴조차 없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마차조차 보인다.

어안이 벙벙해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비석같이 매끈한 건물 표면 위로 수많은 창문이 끝없이 나열되어 있다. 단련된 마법사의 버릇이 무심코 건물의 층수를 셌다.

“……135층?”

숫자에 자신 있는 레펜하르트조차도 스스로를 의심하며 한 번 더 세어 봤을 만큼 비정상적인 층수다. 물론 다시 세어 본들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 층수는 틀릴지 몰라도 저 까마득한 높이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고층 건물이 사방에 널려 있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아니, 이것을 도시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의문이다. 레펜하르트가 알고 있던 도시의 인구 정도는 저 건물 두 세 개면 다 수용할 수 있을 지경이다.

심지어 자연조차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숲 속에 건물이 있는 것은 레펜하르트도 자주 봤다.

하지만 건물 속에 숲이 있는 건 처음 본다.

얼마나 건물이 거대한지, 그 높은 건물 중간이며 옥상에 아예 숲까지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문명의 도시였다. 레펜하르트 시대의 인간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당황할지언정 놀라진 않았다.

그는 이미 이런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한 적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 숲과 마력만으로 달리는 탈것, 새보다 빠르게 하늘을 나는 날틀, 왕족보다도 좋은 옷을 갖춘 수많은 평범한 행인들의 모습.

“이건…….”

이 모든 것은 한 시대를 의미한다.

수많은 던전을 탐사하며 벽화로, 부조로, 글귀로 보았던 위대하고 초월적인 문명의 시대를.

“은의 시대 도시로군.”

☆ ☆ ☆

‘이건 또 어떻게 된 경우야?’

레펜하르트는 분명 자신의 마력 공명을 느끼고 그것을 좌표 삼아 게이트 오브 디멘션을 발동했다. 허차원으로 대피할 때야 도착 좌표가 필요 없으니 아무렇게나 차원만 찢으면 그만인 간단한(?) 인피니티 게이트로 충분했지만, 돌아갈 땐 좀 상황이 다르니까.

그의 이론대로라면 자신은 공명하는 원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은 뜬금없는 은의 시대다.

‘은의 시대의 무엇인가가 내 영혼과 공명한 것?’

그렇다면 레펜하르트는 지금 차원을 넘은 걸로 모자라 다시 한 번 시공을 초월했단 말인가? 아득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무려 은의 시대에까지 도달했다는 소리?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무슨 힘으로 그런 짓을 해?’

아무리 그가 천재 중의 천재라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게이트 오브 디멘션으로 연결한 허차원은 엄연한 레펜하르트 현 시대 시공간의 외곽이다. 비록 시간의 흐름은 다르지만 그 방향성은 같은, 동일한 시간의 강을 공유하는 차원이란 의미다.

거기서 차원문을 열어 봤자 시간을 역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유속의 흐름이 느린 곳을 찾아 종이배를 띄워 봐야, 배가 강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처럼.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벌써 시공 초월 마법을 만들었게?’

예전에 연구해 본 분야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광경은 대체 무엇인가?

당혹 속에서 멍하니 서 있는 레펜하르트 곁을 계속 행인들이 지나갔다. 저마다 자신의 갈 길을 주저 없이 걷는 모습들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멍하니 서 있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문득 그 모습에 위화감이 들었다.

‘어째 사람들 태도가 너무 태연한데?’

지나가는 행인들은 모두 은의 시대 고대인들이었다. 훤칠한 장신에 눈부신 은발을 지닌, 잘빠진 체형과 건강한 몸매를 지닌 전형적인 벽화 속 고대인들이다.

그렇다 해도 레펜하르트에 비하면 결코 장신이 아니었다.

현재 그의 신장은 결국 2.2미터를 돌파해 버렸으며, 그의 어깨 넓이는 슬슬 열사병에 시달리는 노인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이런 근육 거인이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도 안 되지.’

은의 시대 고대인이 그 정도로 대범한 성격이란 기록은 어디에도 본 바가 없다.

레펜하르트가 슬쩍 몸을 움직였다.

바로 지나가는 행인 한 명의 앞을 막는다. 우락부락한 거인이 그 덩치로 앞을 막는데도 행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

그 순간, 행인이 그를 통과해 버렸다.

“……!”

자연스럽게 돌아갔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망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뚫고 그대로 등 뒤로 나와 제 갈 길을 가 버린다.

뒤를 돌아본 레펜하르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이!”

역시 행인은 전혀 듣지 못한 태도다. 레펜하르트는 웃었다.

이제야 이 사태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되는 것 같았다.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꿈이나 기억인가, 이것은.”

마법 중에도 이런 것이 있다.

드림 다이브.

타인의 꿈에 들어가 기억을 엿보는 정신계 고위 마법.

다른 사람 머릿속 헤집는 사악한 수법이라 금단의 마법으로 분류되어 있긴 하지만 대마법사쯤 되면 누구나 은근슬쩍 익혀는 두는 마법이다.

“어쩐지 느낌이 낯설지 않더라니.”

주변 행인들의 태도도 이해가 갔다. 지금 저들에게 레펜하르트는 허깨비나 망령 같은 것, 저들의 인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겠지. 이 광경은 누군가의 기억이나 꿈의 일부일 뿐일 테니.’

그렇다면 이 기억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현 시대에 은의 시대 기억을 지닌 인간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은의 시대 기록 영상을 지닌 이들뿐.”

은의 현자라는 비밀 집단은 분명 은의 시대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내가 기억에 다이브할 정도로 인연이 있는 이라면 한 명뿐이다. 그런데 왜 그와 내가 마력 공명을……?”

여기까지 상념을 전개하고 나니, 그제야 막혀 있던 의문의 일부도 풀렸다.

‘아, 그런 거였나?’

분명 현생의 레펜하르트는 원 세계에 초월적인 마법적 영향력을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전생의 레펜하르트라 할지라도 이 정도로 확실하게 차원을 넘어 공명하는 수준의 마법은 구사한 적이 없었다.

그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하나 있긴 있었어.’

전생의 힘이면서 동시에 현생까지 미치는 권능.

차원을 넘어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시공과 차원의 벽 자체를 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마법.

“……시공 회귀 마법이 있었지.”

현재 레펜하르트의 영혼이 바로 저 절대적인 마법의 결과물이다. 시공을 뒤틀 정도로 어마어마한 그 권능이 지금도 레펜하르트의 영혼을 이 시공간에 굳건히 고정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미 시전이 끝난 마법의 결과일 뿐이고, 그 결과 자체는 그리 강한 여파를 남기지 않지만…….

‘시공을 뒤트는 힘, 마력의 속성이 시공간에 가로막히지 않으니 당연히 온전한 형태로 차원 너머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겠지.’

백사장처럼 방대한 마력이라도 시공과 차원을 넘어서면 모래알 한두 알갱이일 뿐.

그러나 시공 회귀 마법의 잔해는 모래성이다. 백사장에 비하면 극히 미미할 뿐이지만 시공과 차원을 넘어서도 전혀 그 여파가 소실되지 않고 그대로 전달되는 모래성.

“모래알과 모래성의 차이가 바로 이 감각의 차이로군.”

이걸 깨달은 이유는 바로 레펜하르트가 자신의 공명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시공 회귀 마법으로 시대를 거슬러 온 것은 그의 영혼뿐이 아니다.

“테스론의 영혼.”

마침내 해답을 찾은 레펜하르트는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진리를 또 하나 발견한 마법사의 지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마법사답게 또 다른 의문으로 사고를 전개했다.

‘하지만 테스론은 죽었다. 내 손으로 분명히 죽였어.’

테스론이 죽고 나서 느낀 극심한 두통이 기억난다. 그 이후로도 그를 떠올릴 때마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두통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테스론의 영혼이 육체를 잃고 세상의 흐름 속으로 환원되어 흩어지는 과정에서 발하는 마지막 존재감일 터였다. 영혼의 단말마가 공명해 레펜하르트 자신에게도 느껴진 것이었겠지.

‘그런데 다시 공명을 시작했다면…….’

공명이 가능하다는 것은 적어도 시공 회귀 마법이 테스론의 영혼을 ‘이 시공간에 고정시킬 마법적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

그러므로 테스론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았다. 적어도 스스로의 자아와 기억이 확고해 시공 회귀 마법이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으음…….”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했다.

일단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상황부터 나열한다.

첫 번째, 이 공명은 테스론의 영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두 번째, 테스론의 영혼은 분명히 소멸하지 않고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리고 세 번째…….

“테스론의 영혼이 담겨 있던 원래 내 육체는 지금 세이어란 작자가 쓰고 있지.”

그 괴물 같은 작자가 진짜 인류의 신, 세이어인지 솔직히 레펜하르트도 미심쩍었다. 하지만 지닌 권능을 보면 아니라고 부인할 수만도 없는 수준이었으니…….

‘일단 세이어라 치고, 하여튼 분명 그자가 내 육체를 빼앗았단 말이지. 그렇다는 것은 지금 테스론의 영혼이 존재하려면 두 가지 방법 정도가 있는데…….’

일단 레펜하르트의 원육신을 빼앗은 세이어가 새로운 인간의 육체에 테스론의 영혼을 주입시켰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무슨 수를 써야 그것이 가능한지는 레펜하르트도 짐작이 가지 않지만, 어쨌거나 상황만 보면 세이어가 육체와 영혼은 분리하고, 또 타인의 육체에 강제로 영혼을 주입시키는 형태의 권능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니면 그 육체에 테스론의 영혼이 그대로 머무른 채, 육체의 주도권을 세이어가 잡아 버렸다든가.’

세이어가 레펜하르트를 대할 때, 테스론만이 알 수 있던 정보도 알고 있던 것을 보면 이쪽도 충분히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양쪽 모두 가능성이 있었으며, 양쪽 모두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이다.

‘과연 어느 쪽일까…….’

고민하던 레펜하르트는 일단 상념을 거두었다.

‘아니, 이건 지금 당장 고민할 부분은 아니지.’

어느 쪽이 진실이건 간에 현재 그가 취해야 할 행동은 달라지지 않는다.

현재 그는 드림 다이브의 형식으로 타인의 기억에 접속해 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도 짐작이 간다.

게이트 오브 디멘션은 일단 마력을 운용해 시공간 너머로 영향을 끼친 뒤, 명확한 시공 좌표축을 입력하고 시공의 구멍을 여는 마법. 애초에 인피니티 게이트도 이 마법을 간략화해 발동 시간을 줄여 전투용으로 만든 10서클 주문이다.

문제는 차원문을 열기 전, 시공 좌표축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저 와중에 확실한 원세계의 물질이 아닌 영혼이라는 정신체를 지표로 삼으려니 명확한 공간 좌표축이 안 나오는 거야. 그래서 공명 좌표 인식 과정에서 마법적 우회로가 생성, 드림 다이브를 통해 영혼과 연결된 물질인 육체의 정위치를 간접 확인하려는 거다.’

비유하자면, 어둠 속에서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일단 이름을 불러 대략적인 방향과 거리를 확인한 뒤 손으로 더듬어 가며 상대를 붙잡아 결국 위치를 파악하는 식이랄까?

아마 현재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여전히 허차원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며 게이트 오브 디멘션 역시 아직 발동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중간 과정에서 그의 의식이 먼저 날아와 버렸으니까.

‘뭐, 의식의 움직임은 현 시간대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이곳에서 며칠을 보내건 허차원에서는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겠지만.’

문득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거참, 게이트 오브 디멘션은 내가 직접 만든 마법인데 좌표 인식 과정에 이런 부가 기능이 있는 줄은 또 처음 알았네.’

마법을 창조한 마법사 본인도 몰랐던 새로운 용도가 발견된다니? 마법사가 아닌 이에겐 이해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법학에서 이런 엉뚱한 경우는 의외로 드물지 않다.

‘하긴, 멀리 보게 해 주는 원견 마법도 원래는 정신 지배 마법의 하위 술식이었다지?’

어지간한 견습 마법사라도 쓸 수 있는 장거리 시야 확보 마법, 와치.

이는 원래 정신계 지배 마법의 부산물로 태어난 것이다.

옛날의 한 마법사가 동물을 정신 지배하는 테이밍 마법을 수행하던 중 허공의 독수리에 정신 지배를 걸어 그 시야를 공유한 적이 있다. 와치 마법이 생기기 전만 해도 독수리의 가공할 시력을 빌려 전장을 살피거나 멀리 보거나 했으니까.

그런데 그 와중 갑자기 독수리가 화살에 맞아 죽어 버리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아마도 엉뚱한 사냥꾼의 짓이지 싶은데, 보통 이 경우 그냥 정신 지배 마법이 깨지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저 당시 정신 지배를 걸었던 마법사는 상당한 재능을 지닌 자였고,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어떻게든 마법을 유지하려 시도했다.

그 와중에 정신 지배 마법의 하위 술식끼리 서로 연동, 독수리는 땅으로 떨어졌지만 그 시야는 여전히 마법사와 공유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독수리가 없음에도 여전히 독수리의 시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새로운 술식의 단초를 잡은 마법사는 당연히 놀랐고, 또 희열에 빠졌다. 결국 그는 연계 술식을 더욱 연구해 결국 정신계와는 전혀 상관없는 광학계 원견 마법을 만들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의 와치 계열 마법이 되었다. 마법 역사학에서 제법 유명한 이야기다.

‘게이트 오브 디멘션도 만들 때 들어간 기존 술식만 수백 개가 넘으니 뭐, 이런 엉뚱한 효과가 나올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이는 상당한 발견이었다.

원래 드림 다이브는 대상의 의식을 잠재운 뒤 신체 접촉을 통해 직접 행해야 하는 마법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이라면 대상의 깨어 있건 말건, 대상과의 거리가 얼마나 멀건 드림 다이브를 할 수 있는 새로운 마법이 되는 것이다!

‘이거, 10서클 하나 더 만들 수 있겠는데?’

잠시 창조자의 기쁨에 젖어 레펜하르트는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굳혔다.

‘아니, 일단은 이 상황을 타파한 다음 이야기지, 저건.’

현재 레펜하르트는 드림 다이브 상태다. 테스론의 영혼이 어떤 상태이건 간에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이 테스론의 꿈, 혹은 기억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

‘일단 이 기억의 주체인 테스론의 잠재의식을 찾아야 해.’

그리고 그 잠재의식을 토대로 표층 의식으로 올라가고 거기서 테스론의 육체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테스론의 현 육체가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육체가 원세계에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테니까.”

결론을 내린 레펜하르트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2

레펜하르트는 느긋하게 도시를 거닐었다. 은의 시대 문명이 끝없이 시야에 펼쳐지고 있으니 이는 고대를 연구하는 마법사에겐 그야말로 기연이나 다름없는 광경이리라.

레펜하르트 역시 마법사답게 주변 광경을 음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야, 글귀나 벽화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역시.”

온갖 날틀이며 자동 마차, 건물 숲이야 벽화로도 접해 봤다. 하지만 이 압도적인 스케일은 글귀나 벽화로 아무리 상상해 봐야 와 닿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문명 자체가 세계를 뒤덮은 듯한 풍경, 사소한 돌멩이 하나조차도 사람의 손길이 깃들어 있고 자연조차도 사람의 문명에 지배당한 압도적인 경치.

촌구석에서 갓 올라온 사람의 심정으로 레펜하르트는 연신 이 기억의 도시를 훑어보고 있었다. 표정만 보면 어서 테스론의 잠재의식을 찾아 이 사태를 해결해야 된다는 다급함 따윈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현재 레펜하르트는 다급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테스론의 잠재의식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찾는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실제로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인간의 의식은 그 자체로 무한대의 우주다. 그 무한한 의식의 공간에서 특정한 무엇인가를 노리고 찾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가 노리는 것은 정반대였다.

“이러다 보면 분명 테스론의 잠재의식이 날 찾아낼 테지?”

자신의 머릿속에 타인이 들어온다는 것은 심각한 자아의 위협이다. 인간의 육체가 맹독이나 이물질을 자연스레 밖으로 배출하려 하는 것처럼, 타인의 의식이 자아를 침범할 때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진다. 지금 테스론의 잠재의식은 레펜하르트라는 무도한 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해 맹렬히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드림 다이브 마법을 쓸 때는 어떻게든 대상의 잠재의식을 피하며 필요한 정보를 캐내는 요령이 필수지. 오래 피하면 피할수록 숙달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하지만 현재 레펜하르트는 오히려 발견되어야 하는 처지다. 그래야 어서 이 기억의 도시에서 쫓겨나 표층 의식으로 올라갈 테니까.

레펜하르트는 느긋하게 걸음을 계속 옮겼다.

이 도시가 실존하는 공간이라면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발견될 확률이 높겠지만 의식의 흐름에선 다르다. 보다 많은 움직임으로 보다 많은 기억의 침략을 벌여야 더욱 발견될 확률이 높다.

‘자 자, 어서 찾아라.’

☆ ☆ ☆

생각보다 테스론의 자아는 그리 굳건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레펜하르트가 느린 발걸음으로 이것저것 구경까지 하면서 도시를 두 블록쯤 지날 때까지도 전혀 나타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늦네, 테스론 놈.’

슬슬 나타나야 할 때가 지났는데도 영 소식이 없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원래 드림 다이브를 시도하면 쫓아오는 잠재의식을 피해 초 단위로 피 말리는 추격전을 벌이는 것이 정상이다.

‘이놈은 뇌뿐 아니라 영혼까지 근육으로 뒤덮였나? 뭐 이리 의식의 흐름이 느려?’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기억의 도시를 거닐었다. 어차피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걸음을 옮기고 또 옮겨도 계속 사람들의 모습이 끊이질 않았다. 왠지 바빠 보이고 여유가 없어 보이는 표정들이었다.

의외로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 레펜하르트는 조금 당황했다. 이토록 놀라운 문명, 이토록 편리한 시대 속에서도 결국 사람 사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의미일까?

대부분 장신의 은발 고대인들이었지만 개중엔 가끔 눈에 띄는 이들도 있었다. 흑발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은발 고대인들에 비해 키가 작고 머리가 크며 팔다리가 짧은 이들이었다.

그리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저 흑발 고대인들도 은발 고대인들 사이에서 별 위화감 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펜하르트가 실소를 흘렸다.

“왜 은의 현자란 놈들이 굳이 저들을 엘프와 드워프라 했는지 알겠군.”

물론 진짜 드워프에 비하면 월등히 큰 키에 긴 팔다리지만 역시 상대평가란 무서운 법이다. 확실히 저 흑발인들이 은발인들 사이를 걷고 있으니, 정말 드워프 같기는 했다.

‘그래도 저걸 드워프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하네. 그냥 체형이 좀 짧을 뿐이잖아.’

현생 인류 중에서도 저 정도 체격은 흔하다.

‘귀가 뾰족한 것도 아니고, 드워프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수염은 박박 깎고 머리도 짧게 깎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머리칼 색이 단조롭다는 걸 제외하면 현생 인류와 크게 생김새 차이도 없는데 대체 왜…….’

직접 보고 나니 대체 왜 은의 현자가 이들을 엘프와 드워프라 불렀는지 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이들은 그냥 고대인들이었다. 현 시대의 엘프나 드워프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프나 드워프가 없긴? 저기 당당히 있구먼.”

레펜하르트는 한 높은 건물 벽면을 보며 혀를 찼다. 커다란 건물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벽화가 걸려 있었는데, 그 그림의 구성원들이 상당히 낯이 익었다.

뾰족한 귀에 늘씬한 체구, 아름다운 미모의 엘프들과 오동통하고 덥수룩한 수염에 근육질의 드워프들.

그가 아는 바로 그 엘프와 드워프의 모습들이었다.

벽화 밑에는 영상을 틀어 놓은 네모난 거대 수정체도 있었다. 갑주를 입은 드워프와 화살을 쏘는 엘프, 고대인의 모습도 보이고 그 외 처음 보는 인간형 이종족도 몇 있다.

‘그런데 뭐지, 저 영상은?’

나름 고대어에 자신 있는 레펜하르트였지만 저런 문자는 본 적이 없었다. 고대 엘프어와 관련이 있는 듯해 즉석에서 해독을 해 보려 했지만…….

‘해독할 시간을 안 주는구먼.’

말이 너무 빠르고 글자도 후다닥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니 도저히 해독이 불가능한 것이다.

알고 있는 고대어의 모르는 부분을 읽는 것이라면 모를까, 모르는 문자를 알고 있는 고대 엘프어와 하나하나 비교해 머릿속에 정보로 저장한 뒤 나오는 음성과 화면의 행동을 연계해 확률적으로 높은 의미와 발음을 유추해야 하는데, 이건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천재라도 몇 초 내에 행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그나마 영상 하단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박혀 있는 고대 문자가 있어, 그것은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로드 오브 더 엠블렘. 더 무비. 버추얼.

“……?”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였다. 분명 읽기는 읽었는데…….

“무비가 뭐여?”

도저히 뜻은 모르겠다.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영상이 바뀌었다.

묘하게 분홍빛으로 물든 화면 속에서 웬 아리따운 아가씨 하나가 나타나더니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떠들어 댄다. 이번에도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다행히 몇몇 단어는 레펜하르트가 알고 있는 고대 엘프어로 나와 주었다.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인연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영상 속 아가씨의 목소리와 함께 한 문구도 고대 엘프어로 박혀 나온다.

-여러분을 진정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필라넨스.

“호오!”

레펜하르트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아는 것 하나 나왔다!

“필라넨스 교단의 포교 영상인가?”

아무래도 필라넨스 교단은 은의 시대에서도 건재했던 모양이다.

‘하긴, 신의 존재는 처음이자 끝이니 고대라고 없었을 리는 없겠지.’

그런데 어째 영상을 계속 보다 보니 좀 이상했다. 남녀가 나와서 뭔가 떠들고 손잡고 깔깔 웃더니 사람들에게 막 박수를 받고 방실방실 웃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뭔가 결혼식이란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어째 교단의 포교 활동이라고 보기엔 상당히 성스러움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그렇지만 딱히 어색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현 시대에서도 각 교단에서 수입을 올리기 위해 이런저런 짓을 하는 것이다.

레단티 교단의 레스토랑 사업이라든가 필라넨스 교단의 에스틱 사업이라든가.

“탈로스 교단은 아예 암살 장례 사업도 하는데, 뭘.”

죽음과 어둠의 신, 탈로스를 섬기는 저 교단은 일단 대륙의 장례를 통괄하며 동시에 강력한 어새신을 길러 각국에 수출하기도 한다. 자기들이 죽여 놓고 가는 길 편하시라며 직접 염까지 해 주는 엽기적인 경우도 있는데 저게 뭐 대수일까?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며 레펜하르트는 영상에서 신경을 껐다. 영상을 튼 그 거대한 건물 입구,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한 곳에 눈에 띄었던 탓이다.

‘저건 무슨 가게 같은 건가?’

건물 한쪽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진열해 놓은 장소가 보였다. 보아하니 엘프며 드워프와 관련된 인형이나 조각상, 그림들을 파는 모양이었다.

개중 낯익은 것도 한두 개 있었다. 저 조각상이나 그림 중 몇몇은 은의 시대 유적을 발굴할 때 발견했던 것이었다.

‘아니, 그런데 가게가 맞나?’

척 봐도 가게 같은데도 레펜하르트가 확신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분명 저 접객 태도, 손님을 맞이하며 짓는 억지 미소는 저곳이 가게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데…….

‘어째 돈도 안 내고 물건을 막 집어 가네?’

아무도 돈, 혹은 화폐로 추정되는 무엇인가를 건네는 경우가 없다. 그냥 웬 트럼프 카드 같은 걸 잠깐 보여 주는 걸로 끝이다. 그때마다 점원(?)이 빙긋 웃으며 물건을 내주는 걸 보면 도둑질이나 강탈은 아닌 것 같고.

‘외상인가? 저 카드는 가문의 문장 같은 것이고?’

미묘하게 진실을 꿰뚫는 레펜하르트였지만 물론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하여튼, 레펜하르트는 그렇게 관광이라도 하듯 한참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테스론의 잠재의식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이거 느려도 너무 늦잖아? 농담 삼아 영혼까지 근육이냐곤 했지만 정말 그럴 리도 없고.”

아무리 테스론이 단순 무식하다지만 그건 그의 성정이나 육체가 그렇다는 의미지 생각이 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정박아도 아니고 멀쩡한 정신 상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렇게 느릴 리가?

그제야 레펜하르트는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 풍경, 너무 자세한데?’

은의 시대 도시 정경.

그야말로 이 도시에 레펜하르트가 직접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고 세밀한 기억의 재현.

여태껏 레펜하르트는 이 도시가 테스론의 기억이라 생각했다. 테스론이 은의 현자 소속이 되어 얻은 정보, 은의 시대 도시에 대한 광경을 봄으로써 그의 기억이 되어 이렇게 재현되는 것이라고.

그의 영혼이 공명하는 것은 분명 테스론의 영혼이니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이 재현도는 너무도 높아!’

무릇 정보와 기억은 다른 법이다.

무엇인가의 영상을 아무리 보아 봤자 그것이 모두 뇌리에 남지는 않는다. 남는 것은 그 영상에서 필요로 하는 ‘정보’, 본 대상자가 ‘원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부분뿐이다. 그렇게 대상자의 의지가 개입되어야 비로소 그것은 기억이 된다.

하지만 이 도시는 그런 정보로써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의 기억, 정말 본인이 이 시대 속에서 부대끼고 살며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진정한 의미의 기억이어야 이 정도 정밀도가 나올 수 있다. 정보가 아닌 기억이라면 설사 본인은 잊어도 무의식 속에서 대부분 저장이 되니까.

“어?”

모순을 깨달은 레펜하르트는 멍한 소리를 냈다.

“이게 정말 테스론의 기억인가?”

☆ ☆ ☆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모든 것이 너무도 세밀하다.

그야말로 직접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완벽하게 재현된 은의 시대 정경.

이것이 전부 테스론이 접했던 은의 시대 기록 영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테스론의 머리가 그리 좋았던가?

‘……좋을 수도…… 있나?’

현 시대 테스론의 육체는 바로 레펜하르트의 것이었다. 고금 역사상 최고로 뛰어났던 레펜하르트의 두뇌.

권왕이 아닌 레펜하르트의 두뇌를 지닌 테스론이라면 이런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건 별로 가능성이 없군.’

현생의 테스론이 분명 레펜하르트의 천재적인 두뇌를 얻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시기상, 그가 은의 시대 정보를 얻었다면 레펜하르트의 두뇌로 습득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테스론이 그 정보를 이렇게 완벽하게 저장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무리 내 두뇌라도, 영혼이 테스론인 이상 이렇게까지는 안 되지.’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세인의 상식과 달리, 정보를 저장하는 것은 두뇌가 아니라 영혼이니까.’

기존 마법학의 정설은 인간의 두뇌가 곧 인간의 기억을 저장한다는 것이다. 두뇌에 큰 손상을 입은 이들이 기억을 잃는 것을 보며 유추한 결론이다.

그러나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다른 학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정보의 집합체이며, 그 정보를 유지하는 힘이 곧 퍼스널리티, 자아라 여겼다.

인간의 두뇌는 정보를 저장하는 부분이 아니라 오감을 통해 얻은 정보를 최적화해 영혼에 전달하고, 또 영혼의 정보를 물질계로 재투영하는 송수신기 역할이란 것이 레펜하르트의 가설이었다. 두뇌에 손상을 입고 기억을 잃는 것은 정보를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정보와 연결된 영혼과 수신하는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두뇌가 정보를 저장한다면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환생 현상이나 망령의 출몰 등을 확실하게 설명할 수가 없거든. 데자뷰 이론이나 잔재 사념만으로는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많으니.’

하지만 레펜하르트의 가설이라면 환생 현상은 새로운 조합으로 탄생된 영혼에 옛 영혼의 조각이 가진 구 정보가 미처 소실되지 않아 일부 기억이 수신되는 것, 그리고 육신이 없는 망령의 출몰도 그 지역의 사기死氣가 우연히 수신기 역할을 대체해 일어난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명확하게 증명할 수가 없어 전생 땐 가설일 뿐 발표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이제 레펜하르트는 저 가설이 옳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전생의 내가 지금 이렇게 같은 자아로 존재할 리가 없으니까.’

만약 육체에 기억이 종속된다면 이 시대 테스론의 육체에 들어온 순간 레펜하르트의 기억은 사라졌겠지. 이 육체의 두뇌는 분명 어린 테스론의 것이었으니.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확실하 기억과 자아를 지닌 채 이 시대로 전생했다. 이는 개인의 기억, 그 정보가 뇌가 아닌 영혼에 저장된다는 확실한 증거다.

저 가설이 옳기에 레펜하르트는 그 괴상한 능력, 인공 주마등도 개발하게 된 것이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극단적으로 예민해진 어린 테스론의 두뇌가 100퍼센트 가동하며 레펜하르트의 영혼, 그 정보 저장소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수신율이 높아지는 것이 바로 인공 주마등의 정체다.

‘분명 테스론 놈이 꽤나 머리가 좋아지긴 했지만.’

아무리 영혼이 그대로라도 두뇌가 바뀐다면 그 차이는 실로 크다.

일단 같은 정보라도 두뇌가 최적화된 상태로 영혼에 전달하는 만큼 몇 배나 되는 정보 저장이 가능해진다.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옷장에 쑤셔 넣는 것과, 차곡차곡 잘 접어서 예쁘게 수납하는 것의 차이랄까?

또한 정보를 꺼내고 유추하며 활용하는 것 역시 월등히 수월해졌을 터다. 원래 대충 쑤셔 넣은 옷장보다 잘 정돈된 옷장에서 옷 찾기 더 쉬운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테스론의 영혼은 전생에 비해 몇 배나 뛰어나졌다. 적어도 정보 관리력이란 측면에선. 뭐,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그조차도 어이없을 정도로 자기 두뇌 활용 못하는 격이라 화를 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정보로 얻은 은의 시대 풍경, 그것도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기억으로 재현한다?

‘그런 건 전생의 나도 못하겠다.’

자신의 두뇌와 영혼을 모두 지닌, 전성기의 레펜하르트라 할지라도 그냥 영상과 정보만으로 이런 풍경을 기억 속에 재현할 순 없다. 이건 오직 저 고대, 은의 시대를 직접 살아 본 이의 영혼이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그야말로 전설처럼 전해질 뿐인 저 위대한 시대를 직접 살아 본 이가 있을 리가?

순간 레펜하르트의 인상이 팍삭 구겨졌다.

“……있을 수도 있구먼.”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가능성이라면 한 명 있었다.

처음이자 끝인 존재, 신.

스스로를 그 신이라 소개한 자.

그 소개에 걸맞은 권능과 오만함을 지닌 자.

그리고 원래는 레펜하르트의 것이었으며 한때 테스론의 것이었던 육체의 현 소유자!

“세이어.”

그 이름을 내뱉자마자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녕하세요.”

그것은 분명 알아들을 수 없었던 고대 은의 시대 언어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언어가 아닌 음성에 담긴 뜻 자체가 영혼에 직접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그는 놀라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위치를 바라보았다.

한 고대인이 웃으며 인사를 받고 있었다.

“아! 어서 오너라. 오랜만이구나.”

3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은발의 고대인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그 놀라운 문명의 도시 속에서 그 소년은 이질적인 존재감을 발하며 가슴에 웬 봉지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님이 사 오라고 하셔서…….”

“어, 그래.”

여전히 다른 고대인들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소년과 그를 상대하는 이의 언어는 이해가 간다.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이건…….’

언어가 다른, 대륙 공용어를 모르는 이종족의 의식에 드림 다이브를 행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상의 기억 속 언어는 시전자가 모르는 언어 정보이므로 당연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드림 다이브로 연결된 대상, 즉 기억의 주체가 직접 하는 대화는 언어의 틀을 넘어 뜻 자체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애초에 알아듣는 것은 의식의 주체고 드림 다이브 시전자가 읽는 것은 언어가 아닌 저 의식 주체의 상념이니까.

그렇다는 것은…….

‘저 소년이 이 기억의 주체라는 의미로군.’

상황을 파악하며 레펜하르트는 진지하게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의아해했다.

‘그런데 누구지, 저놈은?’

테스론은 아닌 것 같았다. 생긴 것도 그렇고, 상황을 살펴보아도 이 기억의 주체가 테스론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정황상…….’

레펜하르트가 의식하자마자 등장한 점이며 이 기억의 재현도를 볼 때 가장 가능성 높은 경우는 하나.

‘……세이어?’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또 뭔가 이상했다.

일단 소년의 모습부터가 그랬다.

소년은 인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레펜하르트가 알고 있던 이종족 지성체도 아니었다.

인간도 아니고 엘프, 드워프, 오크, 트롤도 아닌…….

‘저건 대체 무슨 종족이지?’

아예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의 범주에 들지 않는 모습으로 저 소년은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겉보기엔 인간과 비슷하게 보인다.

나이는 1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

하지만 얼굴 형태며 골격이 상당히 다르고, 무엇보다 눈썹이며 머리칼이 푸른색이었다. 염색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렇진 않은 듯했다. 모근 쪽 뿌리까지 깔끔하게 색이 통일되어 있었으니까.

‘저런 머리색은 엘프에게나 나오지 인간에겐 나오지 않아.’

귀는 마치 엘프나 드워프처럼 뾰족하다. 그리고 어중간하게 길다. 엘프처럼 아예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드워프처럼 짧고 뾰족하지도 않다.

체격 역시 엘프라 하기엔 짜리몽땅하지만 드워프라 하기엔 지나치게 훤칠하다. 어깨 넓이도 엘프치곤 떡대지만 드워프치곤 가냘프다.

‘이건 무슨…… 엘프랑 드워프를 섞어 놓은 것 같은 모양새로군.’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두 종족 간의 혼혈이 있다면 저런 외모가 아닐까 싶다. 혹시 은의 시대 그 특유의 고도 문명에 의해 탄생된, 자연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엘프와 드워프의 혼혈이라도 되는 걸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자연스러운데.’

노새라든가 인위적으로 피를 섞어 만든 견종 같은 경우는 그 외모가 자연스럽다. 반면 마법사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키메라 같은 혼혈종은 그 외모에 분명한 부자연스러움이 있다.

자연이 허용한 혼혈과, 허용되지 않는 이종 교배를 마력으로 강제 융합시킨 경우의 차이는 명확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마법에 대해서만큼은 절대적인 자신이 있는 레펜하르트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소년의 외모는 절대 마법에 의한 부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니었다. 분명 자연이 허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엘프와 드워프 사이엔 이종 교배가 일어나질 않는데?’

사자와 호랑이는 자연적으로 이종 교배가 가능하다. 그러나 고양이와 개는 이종 교배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미 엘프와 드워프는 이종 교배가 불가능하다는 걸 레펜하르트는 전생 때의 연구로 확인을 끝냈다.

‘원래는 시리스와 나 사이에 어떻게든 아이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작한 연구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혼란해하던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가게 주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소년이 발길을 돌려 거리를 나섰다. 잠시 고민하던 레펜하르트가 살며시 소년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 ☆ ☆

수많은 고대인들 사이를 걷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전혀 다른 외모, 전혀 다른 인상.

그 소년을 본 몇몇 지나가던 여성 고대인들이 수군거린다.

“어머? 저거…….”

“선주 종족이잖아? 저 야만인이 어떻게 엘디아에…….”

“뉴스에서 본 그거 아니니? 마학 연구부에서 몇 마리 샘플로 거두었다고…….”

수군거리는 행인들의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 소년은 당당히 걸음을 계속 옮겼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소년이 태도와 달리 저 음성을 민감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을 테니까.’

다른 행인들의 목소리와 달리 저 고대인 여성들의 언어는 레펜하르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기억의 주체인 소년이 ‘직접’ 받아들인 목소리라는 의미다.

‘그런데 선주 종족? 뉴스? 마학 연구부?’

저 단어의 뜻 자체는 알 수 있다. 왜냐면 단어의 뜻을 저 소년이 명확히 이해한 채 레펜하르트에게 전달했으니까.

선주 종족은 먼저 살고 있던 종족이란 의미이며 뉴스는 바로바로 갱신되는 국가적 소식 전파 수단, 그리고 마학 연구부는 말 그대로 마학을 연구하는 국가 관리 시스템이다.

그래, 여기까진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단어가 이해가 가도 문장이 이해가 가질 않으니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구먼.’

그나마 하나 알 수 있었던 것은 ‘엘디아’라는 단어가 레펜하르트가 아는 엘프의 여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를 부르는 칭호라는 것 정도?

‘뭐, 그래 봤자 별 도움 되는 것은 없지만.’

신의 이름을 따 도시 명칭을 짓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엘디아라는 단어가 중의적으로 쓰이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엘븐하임도 엘프의 천국, 세계수 이름이면서 동시에 차탄 공국의 저주받을 엘프 노예 양성소 이름이며 안타레스 공국의 엘프 도시 엘븐 포레스트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여튼 소년은 주변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꿋꿋이 무시하며 계속 거리를 걷고 있었다. 바로 뒤를 따르는 레펜하르트의 존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것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만약 저 소년이 기억의 주체라면 침략자인 레펜하르트의 의식에 이리도 무감할 수가 없다.

‘도무지 상황을 모르겠군.’

혹시나 싶어 아예 대놓고 소년의 앞을 가로막아 보기도 했다. 남의 의식 흐름 속에서 대놓고 주체를 드러낸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짓이라 정신적 충격도 각오했는데, 그래도 소년은 다른 행인들처럼 레펜하르트를 통과해 계속 길을 갈 뿐이었다.

‘이런, 이런…….’

레펜하르트는 난감해했다.

단순히 이 무의식에서 나가는 것은 간단하다. 그냥 드림 다이브를 끝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경우 원하는 원래 세계의 공간 좌표를 얻을 수가 없다.

표층 의식을 통해 ‘강제로 배출된다.’라는 과정을 겪어야 저게 가능한데…….

‘그런데 기억의 주체가 날 무시해 버리면 대체 무슨 수로 쫓겨나라는 거야?’

애초에 드림 다이브의 목적은 최대한 의식의 주체 간섭을 피해 대상의 기억을 헤집는 것. 레펜하르트도 다른 마법사들도 어떻게 하면 의식의 주체를 피해 오래도록 다이브 상태를 유지하느냐만 연구해 봤지, 그 반대를 고민해 본 적은 없다.

황당과 당황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계속 소년의 뒤를 쫓았다. 상황이 이해되진 않지만, 그나마 유일한 실마리가 저 소년이니 놓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거리를 걸었을까?

소년이 한 커다란 건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건물 입구에는 은발의 잘생긴 중년 남자가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 다녀왔구나.”

소년이 퉁명스레 손에 든 봉지를 남자에게 건넸다.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심부름을 제가 못 할 리가 없잖습니까?”

남자가 껄껄 웃었다.

“물론 난 그 사실을 알지.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그 행위는 꽤나 중요하게 작용한단다.”

은발의 중년 고대인이 눈을 빛냈다.

“단순히 물건을 사 오는 행위일 뿐이지만 이 도시는 네게 낯선 환경이자 이질적인 사람들이지. 이것만으로도 적응력과 친화력의 존재가 증명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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