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장 새로운 이종족의 왕
1
전쟁 발발 한 달 후.
안타레스 공국은 글로텐 산맥 서쪽의 모든 영토를 빼앗겼다. 제국군뿐 아니라 그라임과 할라인 왕국군 역시 사기가 워낙 높아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세이어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이 전쟁에서 죽은 자, 세이어의 천국에서 영원토록 행복을 누리리라!”
신의 이름, 신의 기적은 엄청난 영향을 가지고 있었다. 곳곳에서 안타레스군은 끝없는 후퇴만을 계속할 뿐이었다. 임시 정부가 위치했던 카르작도 적의 손에 넘어가고, 수많은 피난민들이 험준한 글로텐 산맥 안쪽까지 내몰렸다.
대륙의 모든 시선이 이 전쟁에 쏠렸다. 모두가 삼국 동맹군의 위세를 보며 이번에야말로 안타레스가 멸망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안타레스의 위기는 대륙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 ☆ ☆
“모두 죽이고, 모두 부수어라!”
“세이어께 영광을 바쳐라!”
온갖 석상과 탑, 건물이 즐비한 거대한 지저 도시에 살육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수백에 가까운 은빛 경갑의 인간 전사들이 도시 곳곳을 누비며 강렬한 섬광을 연신 뿜어 댄다.
쾅! 쾅! 콰쾅!
섬광이 스칠 때마다 건물이 무너지고 탑이 붕괴된다. 파괴의 향연 속에서 수많은 드워프들이 벌벌 떨며 도망쳐 간다.
수백 년을 버텨 온 드워프들의 본산, 그랜드 포지.
이곳도 결국 인간의 공세를 피하진 못한 것이다.
선두에 선 중년 사내가 검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더러운 난쟁이들!”
은의 암살자들을 이끌고 있는 현자 브렉티스였다. 연신 사방으로 블레이드 오러를 뿌리며 브렉티스가 흉흉한 살기를 피워 냈다.
“네놈들을 베어 그날의 수모를 갚으리라!”
레펜하르트에게 어이없이 사로잡혀 포로가 된 후, 현자 브렉티스는 내내 왕궁 가이라크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운 좋게 그가 살아난 이유였다.
세이어의 아토믹 버스트가 도시를 날려 버린 그날, 지하 깊숙이 갇혀 있던 브렉티스는 오히려 아토믹 버스트의 여파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붕괴된 감옥에서 탈출해 은의 현자에게 돌아간 것이다.
은의 보관고를 잃고 레펜하르트에게 패하기까지 한 브렉티스를 은의 현자는 관대하게 다시 받아 주었다. 뭐, 관대하다기보다는 워낙 쓸모가 많으니 죽이기 아깝다는 것이 진짜 이유지만.
이후 근신하던 브렉티스는 세이어의 귀환으로 다시 현역에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은의 암살자들을 이끌고 그랜드 포지를 함락하는 중이었다.
“모두 죽여라! 이들의 피로 세이어께 영광을 돌리리라!”
광신도의 외침 아래 은의 암살자들은 그랜드 포지 곳곳을 누비며 파괴와 살육을 행했다. 강력한 아티팩트로 무장한 그들의 마법은 쉽게 탑을 부수고 건물을 무너트렸으며, 인간 기사 수 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드워프 전사조차 간단히 베어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의 저항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모두! 모두 피신하시오!”
“우리가 막는 사이 신전으로 향하시오!”
목숨을 버려 가면서도 용맹한 드워프 전사들은 은의 암살자를 상대로 애써 시간을 벌었다. 이미 도시는 포기한 상황, 그러나 동족들은 살려야 했다.
그랜드 포지 외곽에 위치한 알 포트의 신전.
간신히 살아남은 그랜드 포지의 시민들이 마당에 모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사들이 은의 암살자들을 막는 사이 공간 포털을 타기 위해서였다.
“다들 질서를 지키게!”
“서두르면 모두가 죽을 뿐이야!”
시민들을 통솔하는 다른 신관들을 보며, 노신관 갈라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수백 년 동안 살아온 도시가 불탄다. 거대한 지하 공동 가득 흑연이 진동하고 먼지의 회오리가 휘몰아친다.
인간의 마법은 너무도 강력해 이미 그랜드 포지의 절반 이상이 폐허나 다름없는 비참한 파괴의 현장으로 화해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동족의 비명과 인간의 살기뿐.
“크아아악!”
“이 난쟁이 놈들이 왜 이리 끈질기게 덤비는 거야?”
“다 죽여 버려!”
압도적인 전력 차 속에서도 드워프 전사들은 끈질기게 버텼다. 이미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이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어,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싸우고 죽어 갈 뿐이었다.
덕분에 그랜드 포지의 시민들 대부분이 공간 너머로 피할 수 있었다. 어느새 마지막 시민 한 명이 공간 포털로 들어서고, 신관대도 대부분 포털로 향한다. 이제 남은 것은 갈라트와 두 노신관뿐.
“모두 피했는가?”
“그렇습니다, 갈라트. 물론 아직 도시 안에 남아 있는 이들은 있겠지만…….”
적어도 신전에 모인 이들은 모두 피했다. 그리고 적들은 이미 신전 코앞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군!”
갈라트와 두 노신관이 삼각형으로 신전 중앙에 섰다. 막 달려오던 브렉티스가 그들을 보고 인상을 썼다.
“응?”
세 드워프 노신관이 동시에 기도를 올렸다.
“알 포트여! 그대의 신민들을 보우하소서!”
세 줄기 빛이 허공에 묶여 신성한 빛으로 화한다. 동시에 신전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미리 준비해 놓았던 대지 붕괴 신성 주문이었다. 신전이 붕괴하며 그곳에 설치되어 있던 고대의 공간 포털 역시 박살 나 암석에 깔려 버렸다.
달려오던 브렉티스의 인상이 찡그러졌다.
“이것들이?”
노신관 세 명이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이 신성 주문을 발동하기 위해선 최소 세 명의 고위 신관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주문이 발동되면 공간 포털은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동족을 지키기 위해, 이들 셋은 이곳에서 죽음을 각오했던 것이다.
“쳇!”
혀를 차며 브렉티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날렸다. 갈라트가 외침을 터트렸다.
“드워프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그 상태로 갈라트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드워프 신관들을 일격에 참살한 뒤 브렉티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쩝, 다 놓쳤나?”
분명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 대부분이 이 신전으로 몰리는 걸 확인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그 많던 드워프 중 보이는 것은 이들 셋뿐이다.
미리 언질을 들은 터라 바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게 그 공간 포털인가 보군.”
새삼 신의 위업에 감탄이 나왔다.
은의 현자가 수백 년이나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이 그랜드 포지의 존재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감춰진 도시였다.
그런데 세이어는 강림하자마자 바로 이곳을 지목하고 자신들을 보낸 것이다. 또한 이곳에 공간 포털이 있어 이들이 그걸 이용할 거란 것도 알려 주었다. 그야말로 세이어께서는 모든 것을 굽어살피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알면서도 결국 놓치다니…….’
잠시 아쉬워하던 브렉티스는 이내 표정을 폈다.
“음, 그래도 임무는 완수했으니까.”
비록 놓쳤지만 저 드워프들이 향할 곳은 뻔했다. 안타레스 공국이다. 그리고 그 안타레스 공국 역시 지금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다.
“네놈들이 도망칠 곳이 남아 있을 것 같으냐? 멍청한 노예 놈들, 퉤!”
목 잘린 갈라트의 시체에 침을 뱉은 뒤 브렉티스가 명령을 내렸다.
“도시를 마저 불태워라!”
은의 암살자들이 그랜드 포지 곳곳으로 퍼졌다. 사방에서 마법의 섬광이 도시를 부수고 화염을 일구어 냈다.
드워프들의 마지막 도시가 불길 속에 사라지고 있었다.
☆ ☆ ☆
분명 삼국 동맹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안타레스 공국을 유린했다. 그들의 진군은 거칠 것이 없었고, 안타레스는 아무 저항도 못 한 채 끝없이 밀리기만 했다.
그러나 글로텐 산맥까지 진군하자 삼국 동맹군의 위세도 한풀 꺾였다.
글로텐 산맥은 원래 지세의 험준함과 온갖 몬스터들의 창궐로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던 곳, 애초에 인류의 영역이 아니었던 오지다. 군사력이 아닌 산맥 자체가 삼국 동맹의 적이 되어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평범한 국가 간 전쟁이었다면 이쯤에서 만족하고 전쟁을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쟁은 세이어의 뜻 아래 펼쳐진 전쟁, 땅끝까지라도 쫓아가 이종족들의 뿌리를 뽑아야 했다. 산악전에 대비하기 위해 삼국 동맹군은 잠시 진군을 멈추고 태세 정비에 들어갔다.
그 틈에 안타레스도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산맥 이곳저곳에 분산되었다. 비록 오크라트와 그랜드 포지, 아라난 그라드는 잃었지만 아직 엘븐 포레스트와 트로리아드가 건재했기에 그럭저럭 이들을 수용할 장소가 있었다.
간신히 숨을 돌리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적들은 여전히 산맥 밑에 포진하고 있었고 언제 엘븐 포레스트와 트로리아드까지 들이닥칠지 몰랐다. 오지 출신 이종족 중 상당수가 더 물러서길 주장했다.
-언제부터 우리가 좋은 땅에서 살았단 말인가?
-페틀랜드 너머까지 피해야 한다. 그곳이라면 인간도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카를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단 다 죽소.
현재의 상황은 예전과 다르다. 예전처럼 이종족들이 오지로 피한다면 인간도 그만 쫓아오리란 것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안이한 처사다.
-인간은 이미 그대들의 힘을 보았소. 그대들이 어떤 걸 할 수 있는지도 보았지. 그런데 등 뒤에 후환을 남기려 할 것 같소? 심지어 지금 저들은 세이어의 이름마저도 팔고 있소.
신의 이름이 걸린 이상, 결코 이대로 끝날 리가 없었다.
-여기서 페틀랜드 너머까지 물러선다면 제국은 글로텐 산맥에 강대한 요새와 산성을 구축할 거요. 그리고 그곳을 본거지 삼아 오지의 이종족 사냥에 나서겠지. 일단 그렇게 되면 상황은 끝이오.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거요.
비록 카를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는 천 년 전 바슈탈론 제국이 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글로텐 산맥의 험준함은 물론 훌륭한 방벽이지만 잘 닦인 행군로와 착실한 보급,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튼튼한 본거지가 있다면 인간의 군대라도 넘나드는 데 크게 어려울 것은 없다. 그래서 당시 제국은 글로텐 산맥 곳곳에 요새를 세우고 페틀랜드의 이종족 대부분을 섬멸했다. 그토록 강력했던 이종족들이 지금 이토록 몰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글로텐 산맥은 우리의 최후 방어선이오. 이곳마저 뚫리면 우리의 후손들은 살아갈 한 줌의 땅조차 가지지 못하게 될 거요.
☆ ☆ ☆
제국군 제3연대는 원래부터 산악 지대에서 주둔하던, 레인저 형태의 부대였다. 그런 만큼 제일 먼저 글로텐 산맥에 투입되었다.
비록 인간임에도 어지간한 엘프나 오크 못지않게 산을 잘 타는 이들은 부대 단위로 글로텐 산맥 곳곳을 속속들이 뒤졌다. 안타레스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글로텐 산맥 중부의 한 구릉지.
3연대에 속한, 삼백여 명의 병사들이 무장한 채 행군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그리 긴장하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이 노예 놈들이 대체 어디 숨은 거지?”
“엘프 년 하나만 걸렸으면 좋겠다.”
“그러게. 우리 팔자에 엘프 계집 안아 볼 기회가 이번 말고 언제 있겠어?”
다들 적의 습격보다는 떨어질 콩고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제껏 전투하며 안타레스군은 제국군 앞에 항시 일방적인 패배만을 당해 왔다. 이미 병사들의 인식 속에 안타레스는 적군이 아니라 ‘전리품’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슥 손을 뻗어 맛볼 수 있는 달콤한 전리품.
그런 그들의 앞에 한 무리의 엘프들이 나타났다. 고작해야 쉰여 명, 비교도 안 되는 전력 차였다.
“오옷! 찾았다!”
“엘프다! 엘프!”
“계집도 있어!”
병사들이 환호하며 창칼을 뽑아 들고 돌진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저놈들을 놓치고, 그러면 야들야들한 엘프 계집의 속살도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 상황이 이상했다.
이번에 나타난 엘프들은 전혀 도망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원, 공격하라.”
덤덤한 말투와 함께 선두에 선 보랏빛 머리의 엘프 여인이 검을 겨누었다. 순식간에 엘프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숲속 여기저기로 뛰어올랐다.
병사들은 당황했다. 말도 안 되는 엄청난 몸놀림이었다.
“으억?”
“뭐야? 무슨 원숭이도 아닌 게…….”
순식간에 엘프들이 단검을 뽑아 들고 병사들의 후미를 덮쳤다. 사방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렸다. 대열이 삽시간에 흐트러졌다. 고작 쉰 명의 엘프가 삼백의 부대를 학살하는 데는 채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동료들이 마치 볏단처럼 베어지는 걸 보며 병사들은 그제야 떠올렸다.
한때 대륙을 진동했던, 진정한 안타레스의 이종족 전사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이렇게 무시할 존재가 아닌 것이다.
“으어어어…….”
공포에 질린 병사들 앞을 보랏빛 머리칼의 여인이 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다가온다.
섬광이 번뜩이며 수십의 머리가 동시에 허공으로 날려 갔다.
삼백의 시체 앞에서 여인이 검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전원 집결,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
엘프 두 명이 다가와 빠르게 보고했다.
“사망자, 없습니다.”
“중상자 셋, 자신의 발로 걸을 수 있는 경상자가 다섯입니다.”
엘프 여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명령을 내렸다.
“경상자로 하여금 중상자를 부축해 복귀시켜라. 나머지는 바로 이동한다. 목표는 이들의 본대다.”
쉰여 명의 엘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추상같은 기세, 마치 인간의 기사 같은 태도다. 아무리 일족의 수장이라도 쉽게 자신을 낮추지 않는 엘프들에게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예, 이니야 여왕 폐하!”
☆ ☆ ☆
산악 기슭의 숲속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제국군 3연대.
그곳은 지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불을 꺼라!”
“적습이다!”
“말들을 달래!”
공포에 질린 전투마의 투레질 소리와 병사들의 호통 소리가 요란하다. 그 소란 속에서 비명이 터진다. 거의 대부분 인간의 비명이었다.
“으아악!”
“안타레스군이다!”
“안타레스 놈들이 습격해 왔다!”
수백의 인간과 오크, 엘프와 드워프, 트롤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진지를 유린한다. 그 숫자는 총 삼백. 삼천의 제국군 3연대에 비하면 너무도 미약한 전력이다. 그러나 지금 안타레스군은 열 배나 되는 제국군을 오히려 압도하고 있었다.
제국군이 딱히 경계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고 사기가 떨어진 것도 아니며, 병사들을 잘 먹이지 않았거나 피로한 상태였던 것도 아니었다.
모든 점에서 완벽했음에도 제국군은 죽어 가고 있었다. 바로 이들을 이끄는 한 여인의 존재 때문에.
“북해의 숨결.”
은빛 안개가 숲속을 가득 메운다. 냉기가 요사스러운 춤을 추며 진지 여기저기를 뒤덮는다. 저 안개에 휩싸이는 순간 팔다리가 굳고 육체가 마비되며 마음까지 얼어붙는다.
“추, 추워…….”
“몸이 움직이질 않아…….”
그러나 안타레스군은 이 안개 속에서도 거리낌 없이 진지를 누비고 있다. 이 차가운 안개는 오직 제국병만을 얼리고, 굳히는 것이다.
“더러운 제국 놈들!”
“모조리 죽여 주마!”
제국병의 뜨거운 피가 허공으로 치솟고, 이내 얼어붙어 붉은 수정이 되어 다시 땅에 떨어진다. 연이은 참살 속에서 보랏빛 머리의 여인은 계속 진지를 거닐었다. 그녀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안개도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대며 그 위세를 사방으로 떨친다.
“저자다!”
“저 계집을 죽여야 해!”
기사 중 용맹한 이들이 여인의 존재를 알아채고 검을 뽑았다. 안개의 냉기를 애써 이겨 내고 전력을 다해 여인에게 달려간다.
여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검을 휘저었다.
“북풍의 한숨.”
냉기의 안개가 기사들에게 몰리며 회오리쳐 불었다. 순식간에 기사들의 전신이 꽁꽁 얼어붙어 얼음상이 된다. 그대로 여인이 손가락을 튀겼다.
차차창!
맑은 음향과 함께 인간이 얼어붙은 채 박살이 났다. 얼어붙은 피와 살점이 수십, 수백 조각으로 흩어져 사방에 빛난다. 진지를 불태우는 불길 속에 얼음 파편이 아름답게 반짝인다.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끔찍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으아악!”
이제야 저 여인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압도적인 승리 탓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하지만 명실공이 대륙 최강자 중 하나임이 분명한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
“눈의 여왕이다!”
안개의 냉기와 불길의 열기 속에서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아우성을 쳤다. 얼음보다 차가운 냉기를 전신에 감고, 그 냉기보다도 차가운 표정으로 더없이 침착하게 살육을 벌이는 그 모습은 실로 눈의 여왕이란 칭호가 걸맞은 것이었다.
정신없이 제국병들이 도망칠 자리만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정신 차려라, 이 멍청한 놈들아!”
커다란 외침이 병사들의 뇌리를 때렸다. 그저 큰 목소리일 뿐 아니라, 오러의 힘이 깃들어 있어 단숨에 흥분이 가라앉고 정신이 든다. 그렇게 병사들의 혼란을 잠재우며 목소리의 주인이 허공을 넘어서 이니야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타아앗!”
기합과 함께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작렬한다. 가볍게 검을 틀어 이니야가 공격을 흘렸다. 땅이 파헤쳐지는 폭음 속에서 기사가 착지하더니 흥분한 미소를 지었다.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가 나타날 줄은 알았다. 하지만 눈의 여왕이라니, 이거 대어가 걸렸군!”
검을 뽑아 들며 슬렌 경이 두 눈을 번득거렸다. 이니야가 무심히 그를 바라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제법 강한 자,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 잘난 척을 하는 걸 보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군?”
슬렌이 씨익 웃었다.
“그래, 솔직히 네년이 나보다 한 수 위인 건 사실이지. 그래서 준비를 좀 했다.”
그가 손을 들었다. 이 혼란 속에서도 나타나지 않던 한 무리의 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마다 방패며 기이한 창과 도구를 든, 마법사와 신관까지 섞여 있는 혼성 부대.
바로 대오러 유저 전용 부대였다.
그들을 보며 슬렌 경이 타박을 던졌다.
“젠장, 네놈들 준비가 빨랐으면 피도 덜 흘렸을 것 아니냐.”
제국군 진지가 쑥대밭이 되도록 슬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이니야를 상대할 준비가 덜 되어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오러 유저를 상대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그리고 같은 오러 유저인 슬렌 경이 이들을 지휘한다.
검을 겨누며 슬렌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잘도 날뛰었지만 여기서 끝이다!”
대륙에는 일반인이 초인, 오러 유저를 상대하기 위한 전형적인 전법이 존재한다.
그리고 제국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초인인 오러 유저가, 자신보다 더욱 강한 오러 유저조차 죽일 수 있는 전법까지.
“일대일 대결은 기사의 의무, 하나 제국의 영광은 기사의 명예보다 앞서는 것! 이곳에서 제국의 힘을 보여 주마!”
이니야 주위로 기사와 마법사, 신관들이 빠르게 포진했다. 방패수를 앞세우고 성광의 가호를 걸고 강력한 마법을 준비하며 순식간에 진형을 끌어낸다.
이니야는 그 모든 광경을 차분하게 바라만 보았다. 딱히 대비를 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만하게 검을 늘어트리며 뇌까릴 뿐.
“그럼 보여 보도록 하라.”
슬렌이 자세를 취하며 진형에 가담했다.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검신을 따라 맺혔다.
“잘도 태연한 척하는구나. 하지만 나중에도 그런 표정을 짓게 되는지 보자.”
이 특별부대는 제국의 오러 유저를 상대하며 훈련한 이들이었다. 설사 슬렌이라 할지라도 이들을 상대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강한 이들이었다.
거기에 같은 오러 유저인 자신이 가세한다. 절대 패할 가능성이 없다.
검을 겨눈 채 슬렌이 흥분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네년은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른 뒤 가랑이부터 검을 꿰뚫어 저잣거리에 매달아 주마, 크크큭.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꼴로 만들어 노예 것들의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기사라면, 아니 그냥 정상적인 인간이라도 어지간해선 입에 담기 힘들 더러운 표현이었다. 원래 슬렌은 귀족 출신이지만 그 성격이 변태적인 데가 있었던 것이다. 제국 기사라는 지위도 그 본성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이니야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렇군. 참고하도록 하지.”
옆에서 개가 짖어도 이정도로 무심하진 않을 것이다. 도리어 슬렌이 흥분했다.
“전원 공격하라!”
대오러 전용 부대가 움직였다.
방패수가 전진하고 성광의 가호가 이니야의 주위를 에워쌌다. 온갖 마법이 그녀의 허점을 노리고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사방의 공세에 포위된 이니야는 현재 다 잡은 사냥감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부대의 특성상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가 힘들 뿐.
그 일격을 자신이 날린다!
슬렌이 몸을 던졌다.
“타아앗!”
동시에 이니야도 움직였다.
“서릿발의 거울.”
빠르게 검을 놀려 검막을 펼친다. 눈부신 은빛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에 빛의 장막을 형성한다. 그 장막 위로 이니야의 모습이 선명히 비친다.
비친 이니야의 그림자가 좌우로 갈라졌다. 또 다른 두 명의 이니야가 현실에 구현되었다. 오러로 영수 순록을 만드는 수법, 그것을 더더욱 발전시켜 자신의 분신을 생성한 것이다.
이니야의 그림자가 검을 들고 좌우로 몸을 날렸다. 두 명의 이니야가 좁혀 오는 포위망을 거꾸로 덮쳤다.
“억?”
“뭐야, 이거?”
이들은 애초에 ‘단 한 명’을 대상으로 상정하고 전법을 짰다. 상대가 둘일 경우는 전혀 훈련한 적이 없다. 단숨에 진형이 깨지고 혼란에 빠졌다. 순식간에 방패수와 마법사 몇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이런!’
공격한 슬렌 경의 안색이 굳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상대는 공세에 휘말려 손발이 묶여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이니야 본인은 아무 제한도 없이 검을 들고 있는 것이다.
“크윽! 브로큰 애…….”
채 오러 스킬을 발하기도 전에 이니야가 먼저 움직였다.
“휘날리는 눈꽃!”
수십, 수백의 검화가 눈앞에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슬렌이 당황하며 방어로 오러를 돌렸다. 예상과 전혀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
“동토의 칼날!”
섬뜩한 예기가 이내 슬렌의 사지를 스쳤다. 허공에 뜬 채 슬렌의 팔다리가 동강 나 잘려 나갔다. 너무도 허망한 패배였다. 슬렌의 생각과 달리 그와 이니야의 격차는 한 수 위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크아악!”
비명을 지르는 슬렌을 향해 이니야가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순간 슬렌이 공포에 질렸다. 상대가 어딜 노리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가랑이다!
“왜 그러지? 이런 죽음이 취향 아니었나?”
비아냥이라기엔 너무도 무감정한 어조로 이니야가 오러를 떨쳤다. 섬광이 슬렌을 가랑이부터 길게 꿰뚫었다.
“…….”
단 일격에 슬렌은 절명했다. 자기 입으로 한 말 그대로, 너무도 비참한 모습이었다.
검을 거두며 이니야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한기를 전신에 두른 채, 무심한 살기를 담아 그녀가 물었다.
“자, 그대들은 짐을 어찌 죽일 셈인가?”
2
글로텐 산맥 곳곳에서 삼국 동맹군의 패퇴가 이어졌다. 소수의 정예들이 오러 유저며 강력한 마검사, 주술사 등을 앞세워 유격전으로 동맹군 각 진지를 유린하고, 바람 같이 사라져 갔다.
그동안의 평야 회전에서 아무 대책 없이 밀리기만 한 안타레스군이었다. 하지만 산악전은 달랐다.
분명 안타레스군이 삼국 동맹보다 한참 군사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일반 병력도, 정예병도 1차 제국 침공 때에 비해 상당히 줄었다.
하지만, 정예의 수가 줄었다고 질까지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비록 칼켄과 레펜하르트를 잃고 제라드마저 떠났지만, 여전히 안타레스는 바슈탈론 제국과 함께 대륙에서 가장 많은 오러 유저를 보유한 나라다. 거기에 마흔 명의 실베릭 나이츠까지 가세했다. 오히려 오러 유저급 전력으로만 보면 1차 침공 때보다 더 우위인 것이다.
산악전, 유격전은 대군의 회전보다는 소규모 부대의 기동성과 전투력에 크게 좌우된다.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급 전력이 소수의 정예만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나서니 삼국 동맹의 피해도 점점 커졌다.
바슈탈론 제국은 당황했다.
이미 제국 참모부는 안타레스가 게릴라전으로 나설 것을 예상했고, 또 그래 봤자 별 효용이 없을 거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딱히 대비를 하지도 않았다.
게릴라전으로 동맹에게 타격을 주려면 그 모든 움직임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했다. 그리고 게릴라전에 투입된 구성원 모두가 하나의 명령 아래 철두철미하게 움직여 주어야 비로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그 명령을 내릴 권왕은 이미 죽지 않았는가?”
“구심점이 없는데 어떻게 저놈들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지?”
왕을 잃은 안타레스의 잔당이 게릴라전을 펼쳐 봐야, 저마다 따로 놀다가 각개격파를 당할 뿐이었다. 응당 그래야 했다.
“이단의 현자 짓인가?”
“이단의 현자는 왕이 될 수 없소. 실적도 권위도 없으니. 노예 것들도 권왕이니까 따른 것이지 이단의 현자를 또 다른 왕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오.”
유능한 제국 참모부는 정확히 이종족들의 움직임을 짚어 냈다. 그래서 더더욱 당황했다. 자신들의 예측은 분명 틀리지 않은데, 현실은 다르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것인가?”
해답은 일부 패잔병들이 본진에 합류한 뒤에야 밝혀졌다.
“안타레스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
☆ ☆ ☆
지치고 절망한 안타레스의 이종족들.
그들이 다시 일어섰다.
한 여인의 목소리, 한 여인의 검에 이끌려 다시금 희망을 갖고 용기를 얻어 창칼을 쥐었다.
우리는 왕을 잃었고, 또다시 적을 맞이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마라, 눈물 흘리지 마라.
적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우리 후손의 피가 될 뿐이니.
두려워 말고 일어서라. 일어서 창칼을 쥐고 적들과 맞서라!
짐이 그 앞에 서리라!
글로텐 산맥 곳곳에서 삼국 동맹군의 피가 흘렀다. 그저 밀리기만 하던, 겁에 질린 토끼처럼 도망갈 굴만 찾던 안타레스군이 돌연 흉포한 맹수가 되어 이빨을 드러냈다.
그들 앞에는 언제나 보랏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한 여인이 있었다.
새로운 안타레스의 제왕.
눈의 여왕, 이니야였다.
☆ ☆ ☆
글로텐 산맥 중부의 한 고원.
수천의 병사들이 맞붙고 있었다. 할라인의 수천 정병과 온갖 종족으로 이루어진 혼성 병사들이 사투를 벌인다.
치열하게 죽고 죽이는 그 지옥도 속에서 안타레스군은 점점 밀리고 있었다. 할라인의 병력은 이천, 이 좁은 고원에서 운신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운 대군이었다. 반면 안타레스는 고작 칠백.
아무리 용맹하게 싸워도 숫자에서 밀리니 점점 아군의 시체가 늘어만 간다. 날아드는 화살 비를 보며 절망에 빠져 한 오크 전사가 중얼거렸다.
“아, 왕이시여…….”
레펜하르트가 살아 있었다면, 그 어떤 창칼도 화살도 뚫을 수 없는 강철의 거인이 그들 앞을 든든히 지켜 주고 있었다면 이렇게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을…….
그때였다.
파아아앗!
은색의 장막이 허공을 뒤덮었다. 장막이 화살 비를 일제히 막아 내며 안타레스군의 머리 위를 에워싼다. 병사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원군이다!”
“원군이 왔어!”
한 여인이 수십 기의 기마를 이끌고 고원 서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절망했던 오크 전사가 희열에 몸을 떨었다.
“오오!”
왕은 죽었다.
그러나 안타레스엔 새로운 여왕이 있었다.
“이니야 여왕 폐하!”
오러를 떨쳐 아군을 구하며 이니야가 바로 진형 선두로 달려 나갔다, 검을 뽑아 들며 그녀가 소리 높여 외쳤다.
“가라! 안타레스의 용사들아!”
오러의 힘이 깃든 낭랑한 목소리가 고원 전체에 떨쳐 울린다. 할라인 왕국군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 간다.
“짐승이 되어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들이 패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가족의 미래도 없다! 아이들의 세상도 사라진다!”
안타레스군이 다시 무기를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피로했던 육신에 거짓말처럼 새로운 활력이 돈다.
“죽음 따위 두려워하건 말건 알 바 아니다! 이것만 기억해라!”
단숨에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 블레이드 오러를 떨치며 이니야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저들을 하나 더 죽일수록 우리 가족들이 한 명 더 살아남는다!”
오크 전사가 외쳤다.
“여왕 폐하 만세!”
드워프 신관이 외쳤다.
“폐하를 따르라!”
인간 기사가 외쳤다.
“신이시여, 여왕을 보우하소서!”
광전사처럼 포효하며 칠백의 안타레스군이 오히려 삼천의 할라인 왕국군을 덮쳐 갔다.
“으아아아!”
“모조리 죽여라!”
난전이 벌어지고 창칼이 번뜩이고 화살 비가 서로의 하늘을 덮었다. 혼탁한 전장 속에서 이니야는 계속 적진을 돌파했다. 아무리 사기가 올라갔다 해도 현재 안타레스가 열세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빠른 승리를 위해 지휘관을 노려야했다.
“하아앗!”
순식간에 본진에 도달한 이니야가 길게 오러를 뿌렸다.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가 지휘관과 부관, 참모진까지 동시에 베어 넘겼다. 선혈과 비명이 사방으로 터졌다.
그러나 지휘관은 죽지 않았다. 그가 휘두른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 그 칼날에 깃든 군청색 블레이드 오러가 이니야의 참격을 가로막은 것이다.
파아앙!
오러 파문이 터지며 이니야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파동 속에서도 전혀 자세의 흔들림 없이 그녀가 재차 검을 겨눴다.
반면, 할라인의 오러 유저는 몇 번이나 물러서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고 있었다. 한 번의 대치만으로 둘의 기량 차가 현격히 보인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훌륭히 참격을 막았다. 이 군세의 지휘관, 할라인의 일곱 오러 유저 중 하나인 네티아드 경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나 역시 오러 유저다! 이 정도로 나를 벨 수 있을 것 같은가, 눈의 여왕!”
이니야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딱히 그대를 베려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두른다.
“이번엔 확실히 ‘그대를’ 베겠다.”
화려한 검화가 설풍을 일으키며 네티아드의 사방으로 몰아쳤다.
“휘날리는 눈꽃!”
당황하지 않고 네티아드도 검막을 펼쳤다.
“천폭섬!”
검화와 검막이 부딪혔다. 허공에 수백 개의 스파크를 일어 냈다. 둘 다 기교파 검사라 순식간에 몇십 합의 검격이 오간다. 네티아드 역시 할라인 왕국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 온 오러 유저, 이니야라 한들 단시간에 승부를 볼 수가 없었다.
연신 검을 나누며 네티아드가 감탄했다.
“기량은 확실히 나보다 몇 수나 위군. 하지만 엘프인 이상 체력은 어찌할 수 없을 터!”
일반 병사라면 모를까, 오러 유저쯤 되면 대륙의 유명한 다른 오러 유저의 정보는 평소에도 입수하고 산다. 이미 이니야가 실력에 비해 체력이 낮다는 점은 1차 제국 침공 때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네티아드가 검막에 깃든 일검의 위력을 높였다. 상대의 검화를 뚫을 생각을 포기하고, 대신 검화 자체에 압박을 가한다!
파밧! 파밧! 파바밧!
얼음의 칼날이 연신 네티아드의 전신을 베어 갔다. 점점 네티아드가 피투성이가 되었다.
일검의 위력을 높이면 그만큼 검막의 구멍이 커진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니야의 공격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피륙의 상처일 뿐이다. 이쪽은 한 방만 넣으면 돼!’
이니야의 약점을 철저히 공략하며 네티아드는 상대가 지치기만을 기다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연신 검을 휘두르며, 급소만을 가린 채 상대의 공세가 둔해지길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숨이 점점 차오른다. 그래도 기다린다.
잔상처가 너무 많아진 탓일까? 피를 너무 흘려 점점 검을 휘두르는 팔이 무거워진다. 그래도 기다린다.
네티아드의 오러의 흐름이 흐트러지고 검격의 정교함이 사라져 갔다. 그의 안색이 굳었다.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지, 지치질 않아?”
땀 한 방울 안 흘린 채, 여전히 냉기가 감도는 얼굴로 이니야가 고요히 말했다.
“수많은 목숨을 짊어진 자는 지칠 수 없다.”
도리어 네티아드의 공세가 흐트러졌다. 그리고 이니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동토의 칼날!”
한 줄기 섬광이 검막을 뚫었다.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가 네티아드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네티아드의 눈에서 생기의 빛이 사라졌다.
번쩍!
뒤이은 이니야의 후속타가 그의 머리통을 허공으로 날렸다.
주위에서 환호가 터졌다.
“오러 유저가 죽었다!”
“폐하께서 적장의 목을 베었다!”
“우리가 승리했도다!”
지휘관을 잃은 할라인 왕국군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사방으로 분열되어 이리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안타레스의 환호성이 피에 젖은 고원을 가득 울렸다.
“만세!”
“여왕 폐하 만세!”
☆ ☆ ☆
글로텐 산맥 중부 기슭, 삼국 동맹군 총 본진.
삼국 동맹 총사령관 크로작 공작은 올라온 보고를 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슬렌 경에 이어 네티아드 경도 전사했나.”
이로써 삼국 동맹은 두 명의 오러 유저를 잃게 되었다. 저 위업을 달성한 이의 이름을 보며 크로작은 더더욱 표정을 굳혔다.
“눈의 여왕, 이니야. 공왕 레펜하르트의 왕비였고 이제 안타레스의 새로운 왕이라…….”
이제야 안타레스군의 돌변한 움직임이 이해가 되었다.
레펜하르트의 왕비, 이니야는 분명 새로운 왕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안타레스의 국민 모두 군말 없이 그녀를 따르리라.
눈의 여왕, 이니야는 분명 지금의 안타레스를 재집결시키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안타레스의 전사 모두 기꺼이 그녀를 위해 검을 들리라.
레펜하르트니 제라드니 하는 ‘존재감 강한 짐 언브레이커블’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 이니야의 무위 역시 대륙에서 이미 그 명성이 자자하다.
바실리의 이름 높은 기사, 왈그란 경이 그녀 손에 죽었고 그 외에도 두 명의 오러 유저가 그녀의 검에 반병신이 되었다. 1차 제국 침공 때도 그라임의 이라나드 경을 비롯, 두 명의 오러 유저가 그녀에게 패배해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이번 전쟁에서도 제국의 오러 유저 슬렌과 할라인의 카피르, 두 명을 죽여 명성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사실 그동안 제라드는 바나텔을 상대한 것 말고는 딱히 한 것이 없고 레펜하르트도 왕이다 보니 실제로 전장에 자주 나가지는 않았다.
단순히 숫자로만 치면 이니야는 현재 안타레스에서 ‘오러 유저를 상대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검사’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무인이자 장수이기도 하다. 강력한 오러 유저이면서 용병술 또한 상당한 수준, 안타레스에 합류하기 전에는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도 대단히 익숙하다.
이니야에 대한 보고를 보며 크로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보면 볼수록 만만찮은 상대였다.
“이거, 오히려 권왕보다 이쪽이 더 왕다운 왕이군.”
긴장하며 크로작 공작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처럼 쉽지는 않겠는데?”
3
산맥 깊숙한 어느 숲 속.
수십 개의 허름한 천막이 열을 지어 세워져 있다. 할라인 왕국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안타레스 유격군의 진지였다.
칠백의 병력만으로 삼천에 가까운 대군을 이겼다. 적군 대부분이 죽였고 살아남은 이는 채 이백이 되지 않으니 대승 중의 대승이었다. 평소라면 크게 잔치를 열고 고기와 술로 이 승리를 축하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안타레스군 어디에도 승리 축하연의 모습 따윈 보이지 않았다.
한 무리의 배급병들이 광주리를 든 채 진지 이곳저곳을 누빈다.
“배급이오!”
“식사다!”
피투성이가 된 오크며 엘프, 트롤, 드워프, 인간 들이 삼삼오오 모닥불에 앉아 배급을 받았다. 대승을 거둔 그들에게 주어진 승리의 만찬은 딱딱한 빵 한 덩어리와 말라비틀어진 개가죽 같은 육포 한 조각이 전부였다.
드워프 노병 하나가 배급을 받고 한숨을 쉬었다.
“더 적어졌군…….”
배급을 담당하던 트롤 여병사가 안타까워하며 대꾸했다.
“어쩔 수 없어요. 보급이 더 줄어서…….”
삼국 동맹의 진군에 맞서 카를은 최대한 국민을 피난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의 유능함은 이번에도 빛을 발해, 안타레스 본토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국민들을 훌륭히 글로텐 산맥 안쪽까지 피신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현재 안타레스는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너무 많은 인명을 살리고 나니 그들을 먹일 식량이 부족해진 것이다. 아무리 카를의 유능함이 하늘을 찔러도 없는 물자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빵 두 덩이와 다섯 개의 생선으로 오천을 먹이는 것은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간신히 죽지 않을 정도의 배급만을 받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간신히 기력을 잃지 않을 정도의 배급만을 받았다.
그래도 식량은 모자랐다. 그래서 카를은 잔혹한 처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시 죽어 가는 병사의 수를 예상하고 그에 맞춰 배급량을 정한 것이다. 삼백의 군대가 있다면, 백 명은 죽을 걸 애초에 상정하고 보급을 하는 식이다.
그런데 오늘 안타레스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예상대로라면 절반 이상이 죽었어야 했는데 칠백 명 중 오백 명 가까이 살아남았다. 소중한 전우가 한 명 더 살아남으로서, 남은 이들이 더 배를 곯게 되었다.
이쯤 되면 원망을 할 법도 하지만…….
“살아남아 배를 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지.”
이미 목숨을 내놓은 이들이다. 이미 살아 돌아갈 생각이 없는 이들이었다.
“배급이 모자라나? 상관없어. 다음 전쟁 땐 아마도 나는 더 이상 밥 먹을 일이 없을 테니까. 입 좀 줄겠지, 크크큭.”
병사들은 오히려 너털웃음을 흘렸다.
물론 아무리 가족의 미래가 걸려 있다 해도 병사들에게 저딴 배급을 하고 고위층이 배불리 먹는다면 불만이 없을 리 없을 터다.
하지만 병사들은 아무 불만 없이 육포를 입에 넣고 씹었다.
“폐하께서도 우리와 같은 식사를 하시는데…….”
병사들이 문득 진지 중앙을 바라보았다.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허름한, 그러나 두 배쯤 거대한 천막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감히 투정을 할 수 있겠나?”
☆ ☆ ☆
백성을 이끄는 왕은 솔선수범해야 한다.
이는 어느 나라의 국왕이건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
하지만 실제로 솔선수범을 완벽하게 행하는 왕은 역사적으로도 극히 적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현군, 명군으로 역사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긴다.
현 안타레스의 여왕, 이니야는 그런 드문 이 중 하나였다.
이니야의 천막은 가장 질 낮은 병사의 천막보다도 더 나쁜 것이었다. 반쯤 썩어 냄새가 나고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날벌레가 드나들고 비가 새는 것이 왕의 천막이었다. 다른 병사들보다 천막 크기가 큰 이유는 그저 그곳이 전투 회의실을 겸하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녀는 병사들과 똑같이 맨바닥에 누워, 누더기를 덮고 잤다.
그녀는 병사들과 똑같이 딱딱한 빵 덩어리로 연명했으며, 그나마도 병사들보다 적게 먹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늦게 잠들고,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병사들을 이끌며 싸웠다.
“다들 체력을 보존하라. 내일의 전투는 더욱 가혹할 테니.”
모두의 앞에 서서 이니야가 병사들에게 고한다.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 맹렬히 싸웠음에도 그녀는 전혀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그야말로 철의 여인!
인간도 드워프도 오크도 트롤도, 모두 그 믿음직한 모습에 감동하며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여왕 폐하!”
병사들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이니야가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보며 엘프 병사들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지만…….”
다른 종족들은 몰라도 엘프들은 잘 아는 것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체력이 약한 종족인지. 그리고 현재 이니야의 모습은 정상적인 엘프의 체력이라면 결코 보일 수 없다는 것 또한.
“……폐하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닐까?”
☆ ☆ ☆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이니야는 천막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휘장을 내리자마자 바로 선혈을 토했다.
“우욱!”
시뻘건 핏물이 흙바닥에 흥건히 고인다. 쌓이는 피로 속에 육체가 둔해지는 걸 막기 위해 그녀는 오러를 운용, 억지로 전신에 활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부작용이었다.
피를 토한 뒤 이니야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시원하네.”
병사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그동안 계속 참았다. 피를 토하는 고통보다 오히려 후련함이 더 컸다.
피 웅덩이를 바라보며 이니야가 빙긋 웃었다.
‘역시 천막 하나는 잘 골랐어.’
워낙 썩은 내가 풍기는 천막이다 보니 코가 예민한 오크들도 여기서 피 냄새를 맡질 못한다. 뭐, 굳이 이런 천막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피 냄새는 진지 전체에 진동하니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때였다. 천막 안쪽 그림자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 상태가 안 좋은가 보죠?”
흠칫 놀라며 이니야가 고개를 돌렸다.
“시리스인가?”
백금발의 갈색 피부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미터를 쌍으로 허리에 차고 사슬과 가죽을 섞어 만든 안타레스 특유의 경장갑 차림이었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걸 눈치 못 챘나요?”
“실력이 많이 늘었군.”
이니야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정령술의 궁극, 엘리멘트를 갈고닦은 시리스는 예전보다 월등히 실력이 올라가 있었다. 이제 어지간한 오러 유저를 상대해도 승리할 수 있을 정도다.
“하?”
시리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제 실력이 늘었다고요? 당신의 눈을 속일 정도로?”
시리스의 매서운 눈이 예리하게 이니야의 전신을 훑었다.
“대체 얼마나 망가진 거지요?”
오러 유저의 눈조차도 속인 이니야지만, 7대 정령의 힘을 통합한 시리스의 엘리멘트는 생명 흐름의 파악에 있어선 오히려 오러 유저보다도 감지 능력이 높다. 보자마자 바로 이니야의 상태를 알아챈 것이다.
태연하게 이니야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차후 이어질 보급과 전략 계획을 훑어보며 대수롭잖다는 듯 대꾸했다.
“좀 무리를 한 것은 사실이나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실란 대주교에게 치유 받으면 완치될 수준이야.”
“아직은 그렇겠지요.”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실란에게 치유받을 때까지도 위험하지 않을지는 모르는 일이죠.”
현재 실란은 필라넨스 신관단을 이끌고 후방에서 중상자의 치유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바실리에 위치한 필라넨스 총단은 안타레스 교구의 신관들이 고국에 봉사하는 걸 허락했다. 비록 눈치가 보여 대놓고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안타레스는 분명히 필라넨스께서 축복을 내리신 나라다. 교단 입장에선 결코 버릴 수 없는 신성한 국가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실란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지금 그가 후위에서 빠지면 너무 많은 병력을 잃게 된다. 적들과 달리 우리는 병사 한 명을 잃으면 다시 채울 수가 없다.”
실란이 현재 처리하는 중상자의 숫자는 하루에 백이 넘는다. 그리고 현재 안타레스는 매일 수십, 수백의 중상자가 후방으로 실려 가고 있다. 그런 어마어마한 치유 능력을 후방에서 빼게 된다면, 이어지는 중상자들의 치료가 늦어지고 살릴 수 있는 이들이 죽는 경우도 생긴다.
“노련한 병사 한 명을 잃는 것이 내 육체가 피로한 것보다 더 손실이 크다. 걱정 마라. 한계에 다다르면 나 역시 실란 대주교를 부를 것이다. 군주가 제 몸이 상해 가는 걸 방치한다면 그 또한 수장의 자격이 없음이니.”
왕은 자신의 몸을 건강히 지킬 의무도 있는 것이다.
“단지 아직은 때가 아닐 뿐이다.”
“네, 과연 여왕 폐하시네요. 모든 것을 굽어살피고 계시니.”
어깨를 들썩이며 시리스가 조소를 흘렸다.
이니야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꼭 비아냥처럼 들리는군. 짐은 그대의 왕이다. 왕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 그대가 나를 섬기건 말건 상관치 않으나, 수뇌부가 분열하면 병사들이 동요하게 된다.”
차가운 위엄을 담아 왕의 목소리로 자신을 꾸짖는다. 시리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눈앞의 이니야는 정말 왕좌에 어울려 보였다.
‘어떻게…….’
자신은 아직도 레펜하르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니야는 이미 레펜하르트의 흔적을 멀리 밀어내고 안타레스 공국 전체에 자신의 자취를 확실히 남기고 있다. 이미 안타레스의 모든 이들이 그녀를 여왕으로 섬기고, 그녀가 여왕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조금의 슬픔도 동요도 없이 무심하게 왕의 임무를 행한다.
처음부터 자신이 여왕이었다는 듯이.
레펜하르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죠?”
이니야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것이 왕의 의무다.”
한 남자를 사랑했던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두 여인이 침묵 속에 서로를 응시한다. 시리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니야 여왕 폐하.”
“말하라.”
시리스의 목소리가 변했다.
“당신은 슬프지도 않은 건가요?”
날카롭고 적대적이던 음성이, 흔들리는 슬픔을 담아 천막 안에 울린다.
“그분이 남긴 백성, 그분이 남긴 나라. 그것을 지키려는 그 마음은 저도 알아요.”
안타까워하며 묻는다.
“하지만…… 적어도 남들이 보지 않을 땐 그분을 위해 눈물 흘려도 되지 않나요?”
이니야는 비웃었다.
“그분이 남긴 나라라고?”
차가운 비웃음으로 시리스를 압도한다.
“안타레스의 국민들은 한 명, 한 명이 삶을 가지고 미래를 지닌,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 수많은 인생을 한낱 죽은 자의 유산 따위로 치부한다니 내 평생 이 정도로 오만한 소리는 처음 들어 보겠군.”
시리스의 말문이 막혔다. 이니야의 말이 이어졌다.
“왕이 슬퍼한다면 그것은 국민의 미래에 암운이 드리워졌을 때뿐. 왕이 눈물 흘린다면 그건 국민의 피가 흐를 때뿐이다. 이미 죽은 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나친 사치다.”
한번 흘린 눈물은 각오를 녹인다.
녹아 버린 각오는 다시 굳지 않는다.
“제국을 물리치기 전까지, 짐이 그를 위해 눈물 흘릴 일은 없을 것이다.”
추상같은 이니야의 말에 시리스는 눈을 감았다.
“다, 당신이란 사람은…….”
가슴 속 한편에서 뭔가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정말 레펜하르트 님을 사랑하긴 한 건가요?”
“흥.”
이니야는 콧방귀를 켰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무심히 손을 들어 나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만 나가 보도록. 할 일이 많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기엔 시간이 아깝다.”
“예, 여왕 폐하. 공사가 다망하신데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했군요.”
과한 동작으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뒤 시리스는 날카로운 동작으로 천막 밖으로 나가 버렸다. 찬바람이 쌩쌩 도는 모습, 그걸 보며 이니야는 빙그레 웃었다.
그야말로 어린 소녀다운 생각, 소녀다운 태도다. 어찌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과연 아직 어리네.’
사실은 자신도 저러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차가운 왕의 가면, 왕의 모습을 버리고 싶었다.
처음 레펜하르트를 만나고 스티리아 일족의 운명을 그에게 의탁한 뒤, 수장의 의무에서 벗어나 일개 여인으로 행동했던 그 때처럼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분의 죽음 앞에 마음껏 슬퍼할 수도 있었겠지.’
누군가 한 명만이라도, 자신을 대신할 이가 한 명만이라도 더 있었다면…….
“하아…….”
문득 한숨이 흘러나왔다. 참으려 해도 저절로 한 남자의 모습, 한 남자의 웃음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럼 이니야, 죄송한 말인데…….
딱 10분만 기절해 있겠습니다.
어머나!
어휴, 이 사람 좀 봐…….
의외로 머리가 크네.
커도 멋있기만 하다, 뭐.
자신의 무릎에 누워 조용히 잠들던 그 이…….
“……쓸데없는 기억이다.”
애써 머리를 흔들며 이니야는 상념을 지웠다. 그리고 내일의 전투를 위해 다시 서류를 들었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얼음처럼 차갑게 굳히며, 그녀는 나직하게 뇌까렸다.
“레펜하르트 님은 이미 세상에 없다…….”
한편, 시리스는 막사 밖으로 나와 자신의 천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이니야가 옳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 현재의 안타레스를 위해서 이니야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니야처럼 생각하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는 것도 속으론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현실을 받아들이려 해도 마음 한구석, 본능적인 무엇인가가 그 사실이 틀렸다고 부르짖고 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본능의 외침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아니야…….”
시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레펜하르트 님은 죽지 않았어.”
☆ ☆ ☆
이니야는 틀리지 않았다.
레펜하르트는 분명히,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시리스도 틀리지 않았다.
레펜하르트는 죽지 않았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위도 아래도, 하늘도 땅도, 시간과 공간조차도 존재하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