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권 제61장 제국의 역습 (62/84)

제61장 제국의 역습

1

귀환하는 신 프리지안 해방단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들은 절묘한 카를의 작전 아래 거의 피해 없이 대륙 서부 각 도시를 습격했고, 노예로 학대받는 동족들을 구해 냈다. 그리고 인간들의 눈을 피해 안타레스 공국으로 복귀하는 것까지 성공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래서 수천의 이종족을 구한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타레스 공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분위기가 변한 것은 그 후였다.

인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오지로만 다닌 탓에 미처 접하지 못했던, 그러나 이미 대륙을 진동하고 있는 진실을 접한 후…….

☆ ☆ ☆

안타레스 공국 남부의 소도시, 카르작.

그 중앙 시청 홀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실입니까?”

신 프리지안 해방단을 이끌던 세 여인 중 한 명, 틸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카를이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오, 틸라.”

목이 멘 듯 잠시 카를은 호흡을 하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선 돌아가셨소…….”

틸라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금 당장도 밖으로 눈을 돌리면, 카르작 시 외곽에 천막을 치고 겨우겨우 살아가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보이는 것이다.

바로 아라난 그라드에서 탈출한 시민들이었다.

하늘에 떠 있어야 할 태양이 지상을 불사른 아라난 그라드 인근은 더 이상 생명이 살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도시 시설 자체도 박살 났을 뿐더러, 마법사들에 의하면 너무도 강력한 마법의 여파로 죽음의 독이 퍼져 있어 그곳의 물도 공기도 극심히 오염되었다고 했다. 도시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카를은 최대한 기량을 발휘, 살아남은 이들을 이곳 카르작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피난민 중 상당한 숫자가 기이한 질병에 시달렸다. 대부분 아라난 그라드에 불어닥쳤던 마지막 대폭풍에 휘말린 이들이었다.

강력한 마도구의 보호를 받은 카를이나 실베릭 나이츠, 오러나 신성력으로 몸을 지킬 수 있었던 타시드나 러스, 시리스, 실란 등은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반 병사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썩고 구더기가 끓었다.

문둥병에 걸린 것처럼 손발이 뚝뚝 떨어지는 일도 속출했다.

임산부가 유산하거나, 기형아를 출산했다.

성직자의 치유술, 심지어 강력한 실란의 신성력조차도 전혀 통하지 않는 기이한 질병이었다. 사람들은 세이어의 신벌이라며 공포에 떨었다.

민심이 어지러워진 것은 필연이었다.

삶이 힘들어지면 사람의 마음도 메말라지는 것, 겨우 이루어 놓았던 각 종족의 단합은 도로 흔들리고, 심지어 같은 종족끼리도 다툼이 늘어났다. 카를이며 타시드, 시리스 등이 열심히 혼란을 다스리려 했지만 그리 효과는 없었다.

그들은 각 종족의 일부에게만 인정받는 이들이었다. 이런 혼란일수록 모두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이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안타레스의 공왕 레펜하르트처럼.

“그러나 폐하께선 더 이상 계시지 않지요…….”

카를과 함께 행정 업무를 보던 주행정관 팔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카를을 보좌하며 그동안 그는 내심 레펜하르트의 태도에 걱정을 꽤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정치 업무는 재상 카를이 행하고 국왕인 레펜하르트는 검토만 하는 것이 안타레스 공국의 시스템이다. 행정과 정치에 민감한 이들이 보기엔 상당히 불안해 보이는 체제인 것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지금 사실상의 국왕은 카를 재상님이나 다름이 없는데?

반역이나 다름없는 생각이라 감히 입 밖에 꺼내진 못했지만 팔트뿐 아니라 행정관 대부분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레펜하르트의 존재가 사라지고 나니 왜 그가 국왕이어야 하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은 분명 유능하게 국정을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명령이 처리되는 것은 바로 국왕 레펜하르트가 그 뒤에서 권위의 베일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사라지자 바로 이종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카를의 명령에 반발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우리가 인정한 인간은 바로 레펜하르트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었기에, 그분이 미래를 보여 주었기에 이곳까지 왔다!

-그분이 사라진 이상…….

-그 누가 미래를 보여 줄 수 있겠는가?

타시드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크들의 의견도 분열되었습니다. 노예 출신은 그렇다 치고 오지의 용맹한 전사들조차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날의 공포가 워낙 강하다 보니…….”

시리스도 맥없이 말을 이었다.

“엘프 쪽도 비슷해요. 더 이상 미래가 없으니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많아요.”

타시드와 시리스는 모두 레펜하르트의 측근으로서, 레펜하르트의 권위하에 오크와 엘프의 수장좌에 앉은 상태였다. 레펜하르트가 사라지면 그들의 권위 역시 사라진다.

아틸카도 근심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트롤 쪽도 상황이 좋지 않소. 그래도 이쪽은 아직 내 말이 먹히는 편이지만…….”

마켈린이 말을 받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자중하며 미래를 대비해 종족을 보전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이겠지? 드워프 쪽도 상황은 비슷하니…….”

아틸카와 마켈린은 타시드나 시리스와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레펜하르트 없이도 원래부터 트롤과 드워프로부터 존경받았던 이들, 덕분에 이 상황 속에서도 어느 정도 종족을 통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길 리가 없었다. 트롤과 드워프 역시 레펜하르트가 보여 주는 미래를 믿고 여기까지 온 이들이니까. 좀 더 온건하게 의견을 피력할 뿐이지 그들도 태도 자체는 오크나 엘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미 희망은 꺾였다. 이미 안타레스는 망했다. 그러니 지금은 어떤 굴욕을 겪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스운 것은, 이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흔들리지 않는 것이 인간 쪽이라는 거지요.”

오크처럼 용맹하지도 않고 드워프처럼 강인하지도, 트롤처럼 현명하지도 엘프처럼 차분하지도 않은 종족, 인간.

인간은 평화로울 때도 잘 단합되지 않으며 분란이 흔하다. 그래서 인간 지도부는 언제나 뭉치지 않고 분란이 가득한 백성을 통치하는 데 익숙하다.

즉, 이런 환란 속에서도 인간은 충분히 통솔이 가능한 것이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니까.

“예전 같으면 이 정도도 백성의 혼란이 과하다고 여겼겠지만…… 다른 종족들을 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인간 쪽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솔이 되는 상황입니다.”

문득 카를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래 봤자 오래는 못 가겠지만…….”

어쨌거나, 현재 안타레스 공국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이들에게는 대책이 없었다.

시리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물었다.

“……혹시, 레펜하르트 님께서 살아 계실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녀 역시 그날의 하늘을 보았다.

하늘을 뒤덮는 광폭한 열기. 세상을 부술 것만 같던 그 어마어마한 권세를 똑똑히 느꼈다. 아무리 레펜하르트라도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분이 쉽게 죽을 분은 아니잖아요?”

……죽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아니다.

혹시나, 혹시나 희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이제껏 수많은 기적을 보여 온 레펜하르트가 또다시 기적을 일구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잖은가?

그런 시리스의 강변에 타시드와 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너무 확실하게 확인한 사실이라서…….”

그때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니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레펜하르트의 죽음을 듣고 그녀는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회의에 참가한 지금도 마치 꿈을 꾸는 듯 몽롱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레펜하르트 님께서 몸을 피하셨을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혹시 빈사 상태로 어디 쓰러져 계실 수도 있지 않나요?”

모두가 죽은 줄 알았지만 사실은 중상을 입고 살아남아 산속 같은 곳에서 발견되는 일은, 보통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지 현실에서는 그리 없다. 그러나 짐 언브레이커블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이다.

가냘픈 희망을 담은 이니야의 질문에 카를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러스 경과 타시드 경, 심지어 제라드 님께서도 확인하셨소. 그분의 기감으로 직접.”

이니야의 눈빛에 체념이 떠올랐다.

“……그럼 레펜하르트 님은 진짜 돌아가신 거군요.”

틸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기…… 아무리 제라드 님이라도 해도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잖아요? 착각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나요?”

이니야와 유스테아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타시드와 러스가 시선을 외면했다. 더더욱 이해가 안 가 다시 물었다.

“왜들 그래요?”

대신 대답한 것은 카를이었다.

“틸라, 오러 유저라면 모두 저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더군.”

그날, 아라난 그라드의 오러 유저는 모두 기감으로 확인했다. 레펜하르트의 존재가 일순간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그분의 기운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사라진 것이 확실하다 했소.”

오러 유저가 아닌 이는 레펜하르트의 기운이 사라지는 것과, 존재가 사라지는 것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러 유저라면 듣는 순간 이해해 버리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칼에 찔리는 모습을 본 일반인과 무술가의 차이다.

일반인이라면 그냥 칼 맞고 피 흘리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찔린 위치에 따라 급소일 수도 있고, 운 좋게 살 수도 있으니까.

반면 경지에 오른 무술가라면 상대의 상처를 보고 바로 살지 죽을지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타시드며 러스, 제라드가 느낀 것은 비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무술가의 눈으로, 정확히 심장에 칼이 꽂힌 것을 본 것과 같은 감각.

“의문을 품을 여지조차 없습니다…….”

러스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라면 심장에 칼 꽂힌 걸 보고도 ‘혹시 살릴 수 있을지 몰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술가라면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

즉사한 것이 너무도 확실하니까!

“형님은 돌아가셨어요. 더 이상 세상에 없습니다…….”

☆ ☆ ☆

아라난 그라드가 죽음의 땅이 된 지 보름 후.

실란의 힘으로 간신히 몸을 추스른 권황 제라드는 안타레스 공국을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떠나게 되어 미안하구나. 하지만 내게는 내 목숨보다도 중한 책무가 있으니…….”

현 안타레스 공국의 처지에서 제라드의 이탈은 실로 거대한 전력 손실이다. 하지만 카를도 다른 이들도 그런 제라드를 만류하지 못했다.

레펜하르트의 죽음으로 인해 제라드는 소중한 후계자를 잃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장 큰 의무는 바로 무문의 대를 끊지 않는 것. 이제서라도 다시 새로운 후계자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허어, 내 나이 이제 여든을 넘겼는데…… 과연 다시 찾을 수 있을는지…….”

아직 낫지도 않은 두 팔을 붕대로 칭칭 감고서 길을 떠날 정도로 제라드는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도 차마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달리 힘없는 발걸음으로 제라드는 안타레스 공국을 떠났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그의 약한 모습은 더더욱 레펜하르트의 죽음을 실감 나게 하는 것이었다.

안타레스의 수뇌부 대부분은 망연자실하게 시간을 보냈다.

낮 동안 정신없이 동족을 달래고 나면 어둠 속에서 앞이 없는 미래를 보며 멍하니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동맹인 크로방스와 바실리 왕국 역시 흔들리는 중이었다.

바실리 왕국 쪽은 이미 반쯤 안타레스 공국과 외교를 단절한 채,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갑론을박을 계속하고 있었다. 노예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강경론과, 세이어의 뜻 못지않게 필라넨스의 뜻 역시 중요하니 감히 경거망동할 일이 아니라는 신중론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워낙 필라넨스의 교세가 강한 국가다 보니 세이어의 기적 앞에도 아직 여신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세력이 꽤 존재했다.

크로방스 왕국도 비슷했다. 크로방스 왕국은 딱히 필라넨스의 교세가 강하지 않지만, 대신 유벨 2세를 비롯한 권력층 대부분이 안타레스 공국과 친분이 깊은 것이다. 그래서 비슷하게 양쪽 의견이 대립해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죽은 지 고작 보름 만에 안타레스 공국은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이 상황에 쐐기를 박는 소식이 들려왔다.

-바슈탈론 제국이 다시 침공해 옵니다!

-그라임 왕국과 할라인 왕국이 가세했습니다!

-삼국 동맹군의 병력이 차탄 남부 국경에 모이고 있습니다! 그 군세가 이십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소식을 들은 카를은 서류를 던져 버렸다.

“다 끝났군.”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가 한 가득이지만 카를은 멋대로 서류더미를 걷어찬 뒤 의자에 몸을 숙였다. 피폐해진 얼굴에 퀭한 눈으로 카를이 킬킬 웃었다.

“모든 것이 끝났어. 이제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물론 카를도 처음부터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시작은 전쟁 포로였지만 이미 안타레스 공국은 그의 나라였다. 사랑하는 이가 이곳에 있었고 우정을 나눈 이들이 이곳에 있었고 이 나라 곳곳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그 역시 제왕학을 익힌 자, 어떻게든 레펜하르트의 빈자리를 메워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카를은 왕이 될 수 없었다.

인간인 카를을 이종족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도 않았다. 틸라와 사귄다는 사실 덕분에 드워프만이 비교적 명령에 따를 뿐 엘프며 오크, 트롤들은 통솔에서 벗어나 버렸다.

이종족들은 묻는 것이다.

-당신의 무엇이 레펜하르트를 대신할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카를에겐 그들에게 들려줄 대답이 없었다.

절망한 표정으로 카를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2년, 아니 1년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카를도 결국 이종족을 포용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제국은 침공을 시작했다. 적은 예전보다 더욱 강력하게 단합되어 쳐들어오는데 안타레스 쪽은 동맹도 잃고 스스로 분열되어 있다. 아무리 카를이라도 이 상황에서는 수가 없었다.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폐하.”

그렇게 넋이 나간 얼굴로 카를이 임시 집무실의 의자에 늘어져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보랏빛 머리에 푸른 눈동자, 싸늘하기 짝이 없는 얼음 같은 미녀 엘프가 매서운 눈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이니야 씨?”

그녀가 카를을 힐끔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제국이 침공한다 들었습니다, 카를 재상.”

“그렇다더군요.”

남 일인 것처럼 카를이 대수롭잖다는 어조로 대꾸했다. 이니야의 인상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과연 현자는 다르군요. 필시 제국을 상대할 놀라운 전략과 전술을 구상하고 있을 텐데, 제 눈엔 꼭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무슨 얼어 죽을 현자입니까? 보이는 그대로입니다.”

방만한 태도로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서 제가 뭘 더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폐하는 돌아가셨습니다.”

“네, 그는 죽었지요.”

이니야가 대수롭잖다는 듯 되물었다.

“그것이 우리가 나태해야 할 이유가 되나요?”

순간 그녀의 전신에서 차가운 한기가 밀려왔다. 섬뜩한 냉기가 카를의 전신을 휘감고 등골이 오싹하게 만든다.

“지금은 칼을 들고 싸울 때입니다. 전략을 짜고, 전술을 구상하고, 수하들을 움직여 맞서야 할 때이지요.”

부르르 떨며 카를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억울한 듯 되물었다.

“나 역시 그걸 모른다고 생각합니까? 하지만 폐하께서 안 계신 지금 구심점이 없습니다! 당장 제가 온갖 전략, 전술을 짜 봐야 그걸 시행할 우두머리가 없단 말입니다!”

이니야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없으면 만들어야지요.”

“네?”

카를이 눈을 껌뻑였다. 이니야가 말을 이었다.

“레펜하르트 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일국의 왕이 죽은 겁니다. 그렇다면 보통 인간의 나라에선 이 경우, 어떻게 하지요?”

“그야 왕자가 왕위를 잇고…… 하지만 폐하껜 자녀가 없으니…… 그럼 보통 왕비가…… 하지만 폐하는 결혼도 하지 않으셨으니…….”

무심코 중얼거리던 카를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던 자녀를 만들 순 없지만, 없던 왕비는 만들 수 있지요.”

“그렇군!”

카를의 눈동자가 빛났다. 워낙 안타레스 왕실의 구조 자체가 괴상해 미처 저런 평범한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폐하께서 성혼을 하지 않은 건 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 하지만 약혼 정도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 않겠지요.”

카를의 혼잣말에 이니야가 질문을 이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 님이 선택한 유일한 반려라면 충분히 그를 대신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카를의 표정이 밝아졌다. 멈춰있던 머리가 다시 놀라운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가만, 그러면 현재 폐하의 왕비로 내세워도 어색하지 않을 인물이라면…….”

이니야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스 양은 안 됩니다. 그녀는 여전히 넋이 나가 있더군요. 전혀 수장의 자각이 없어요.”

카를도 수긍했다.

현재 시리스는 두문불출, 방에 처박혀 슬픔에 젖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탓하는 이도 없었다. 안타레스의 수뇌부 대부분도 같은 처지인 것이다. 당장 카를만 해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카를의 의문에 이니야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가 레펜하르트 님과 교제하고 있었고, 곧 왕비가 될 예정이었다고 한다면, 그 정도라면 국민들이 믿을까요?”

안타레스 국민들은 은연중 시리스와 이니야를 미래의 왕비로 점찍고 있었다. 저잣거리에선 저 두 엘프 미녀 중 누가 왕의 간택을 받을지에 대해 떠들어 대기도 했다. 확실히 이니야 정도면 레펜하르트의 미망인으로 나선다 해도 아무도 의아해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그럼 이니야 씨가 너무 큰 짐을 지게 됩니다만…….”

지금 이니야가 안타레스 공국의 여왕이 된다는 것은, 일국의 왕이 된다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닥칠 온갖 고난과 역경에 제일 먼저 노출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아무리 구심점이 생겼다 해도 현재 안타레스 공국의 운명이 풍전등화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이 전쟁은 승리보다는 패배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그 경우 이니야의 운명은 눈에 보이듯 뻔하다.

“……당신은 여성입니다, 심지어 엘프지요. 만약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어떤 비참한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특히 남자는 잔인하다.

만약 이 전쟁에서 패하고 수장인 이니야가 적들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얼마나 끔찍한 굴욕을 당할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차라리 죽는 것이 축복일 정도의 능욕과 고통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니야는 태연했다.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요.”

그 비참함을 받아들일 각오가 서야 비로소 다른 이들의 위에 설 자격이 생기는 법.

“그런 면에서 시리스 양은 아직 너무 어리지요. 저밖에 없지 않나요?”

이니야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제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카를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현재 이니야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레펜하르트를 사모했는지 카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레펜하르트의 마음을 얻고자 했는지, 서툴게나마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그녀는…….

‘저게 정말 내가 알던 이니야 씨인가?’

사랑하던 이의 죽음을 너무도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다. 조금의 감정도 슬픔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현 상황에 대한 타개책만을 담담하게 뇌까릴 뿐.

“때로는 거짓이 진실보다 나을 때도 있는 법. 지금은 어떻게든 이 위기를 이겨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민들을 기만하는 것이지만 나라가 멸망하는 것보다는 제가 거짓된 여왕이 되는 것이 낫겠지요.”

말을 잇는 그녀의 표정에 레펜하르트에 대한 그리움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질감이 카를의 말미를 흐리게 한 것이다.

“……이니야 씨는 폐하가 그립진 않습니까?”

무심코 말해놓고 카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무슨 무신경한 발언을 한 거지, 나는?’

그런데 이니야가 웃었다.

“그는 죽은 사람입니다.”

너무도 차가운, 서릿발 같은 웃음을.

“세상은 산 자의 것, 우리 어깨엔 그 산 자의 수많은 목숨이 올라가 있지요.”

카를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비록 거짓된 여왕으로 살아가겠다고 말했지만…….

“위에 선 자는 슬픔에 젖을 자격이 없습니다.”

단호하면서도 위엄이 흐르는 지금의 이니야는 이미 훌륭한 여왕이었다. 레펜하르트와 만나기 전, 스티리아 일족을 이끌며 눈의 여왕이란 칭호로 불렸던 바로 그녀였다.

카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선포할 준비를 해야겠군요. 각지에 새로운 여왕의 옹립을 전하고, 왕명을 전달해야 할 테니.”

이니야가 말투를 바꾸었다. 위에 선 자의 어조로,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럼 부탁드리오, 카를 재상. 이 나라의 앞날은 그대 손에 달렸으니.”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며 카를이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왕 폐하.”

☆ ☆ ☆

안타레스 임시 정부가 세워진 소도시 카르작.

그곳에서 공국 전역으로 전언이 보내졌다.

안타레스의 전사들, 자유를 위해 싸우는 모든 용사들이여!

환난 앞에 흔들리는 그대들에게 고한다.

짐은 이니야 엘 안타레스.

안타레스의 왕비가 될 이였고, 이제 그대들의 새로운 여왕이 된 이다.

인간들은 새로운 여왕의 옹립에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왕의 사후, 후계자가 없거나 너무 어릴 경우 왕비가 대신 국가를 통치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제법 흔한 편이다. 특히나 안타레스 공국 같은 신생 국가, 딱히 왕족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정부가 혼란을 빠르게 추스르고 새롭게 국민들을 이끄니 혼란했던 민심도 상당히 가라앉았다.

대부분의 이종족들도 납득하며 이니야의 권위를 인정했다.

오크도 트롤도 드워프도, 남편의 빈자리를 아내가 대신 차지하는 것에 대해 익숙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스티리아 일족의 이니야는 강력한 오러 유저이며 엘프의 족장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의 아내, 이니야는 이야기가 달랐다. 레펜하르트가 선택한 여인인 만큼 레펜하르트와 동등한 존재로 비춰 보는 것이 이들의 인식이었다.

의외로 가장 마지막까지 고민한 것은 이니야의 동족, 엘프들이었다.

엘프는 부부 관계가 다른 종족만큼 투철하지 않아, 일족의 모든 어른이 일족의 모든 아이들의 부모가 되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 그런 만큼 레펜하르트의 아내라고 해서 딱히 이니야를 인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니야가 모든 종족의 우두머리로서 가장 자격 있는 이라는 걸 부인할 이유도 없었다. 합리적인 엘프들은 그 합리성 덕에, 냉철하게 이니야가 새로운 여왕이 된다면 레펜하르트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 것이라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분열되었던 안타레스가 겨우 다시 뭉쳤다.

사그라지던 희망의 빛이 겨우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연약하고 위태로운 빛이었다. 이미 안타레스는 거대한 폭풍에 휘말려 있는 것이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 그라임 왕국, 할라인 왕국.

그리고 인류의 신, 세이어라는 이름 아래 불어오는 거대한 절망의 폭풍에.

2

권왕 레펜하르트가 세상을 떠난 지 두 달 후.

동쪽으로 진군하던 삼국 동맹군이 결국 안타레스 공국의 대지를 밟았다. 이십만 대군이 강력한 오러 유저와 대마법사를 앞세워 노도와 같은 기세로 몰려왔다.

순식간에 국경이 돌파되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고작 보름 만에 글로텐 산맥 서쪽, 안타레스 공국의 본토 대부분이 점령당했다. 이번이 첫 출전인 삼국 동맹군 총사령관, 바슈탈론의 크라작 공작이 어처구니없어할 정도로 일방적인 패배였다.

“어이가 없군. 이런 놈들을 상대로 왜 전에는 그리 고전했던 것이지?”

1차 침공 때도 참전했던 크라작의 참모가 조심스레 대꾸했다.

“그때는 아직 저놈들도 기가 살아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세이어께서 내린 신벌에 이미 만신창이가 아닙니까?”

당시와 지금의 안타레스 공국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레펜하르트도 잃었고 칼켄도 잃었다. 오크라트에 주둔해 있던 강력한 이종족 전사들도 상당수 줄었고 아라난 그라드의 병력도 반토막이 났다. 군사력만 보더라도 당시의 절반 이하다.

게다가 현재의 안타레스 공국은 대륙에서 고립된 상태였다.

동맹국 안타레스의 위기 앞에서도 크로방스와 바실리, 두 왕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세이어 교단의 위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양국의 수뇌부 중 안타레스 공국에 우호적이었던 이들, 그들 전원이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나의 아이들아, 침묵하라. 침묵하고 지켜보라.

그것은 세이어의 음성이었다. 인간이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거룩함과 위엄을 담은 신의 목소리였다.

-이는 옳은 일이니, 즐거이 따를지어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두렵지 않을 수 없다. 필라넨스 여신의 뜻은 기적으로 이 땅에 임했지만, 세이어의 뜻은 음성으로 개인에게 임했다. 원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왕을 잃고, 터전을 잃고, 병력도 잃었다. 굳건했던 동맹 조약마저 휴지 조각이 되었다. 반면 제국은 그라임과 할라인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1차 제국 침공 때보다 월등히 앞선 병력을 지녔으니…….

-무조건 후퇴. 지금은 그저 계속 후퇴하며 어떻게든 힘을 보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카를의 명령대로 해일처럼 몰려오는 삼국 동맹군 앞에 안타레스군은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열세였다. 현재 안타레스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정면 승부를 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그저 최대한 병력을 보전해 후퇴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전쟁이었다.

그리고 지금 안타레스가 지켜야 할 것은 병력뿐이 아니었다.

안타레스 수뇌부도 최대한 노력을 했지만, 그렇다 해도 점령된 지역의 모든 이들이 피난을 가진 못했다. 상당한 수의 안타레스 국민들이 포로가 되어 붙잡혔다.

제국은 공식적으로 그들을 노예로 천명했다. 엘프와 드워프, 오크 들은 다시 쇠사슬을 목에 걸고 발목에 족쇄를 차게 되었다. 인간 역시 처지는 비슷했다. 임시 수용소에 갇힌 뒤 그들은 농노,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삼국 각지로 끌려갈 예정이었다.

트롤의 경우는 더욱 비참했다.

제국은 트롤을 아예 노예로 삼지도 않았다. 이십만이라는 대군답게 삼국 동맹군에는 의료 지원을 위해 상당수의 연금술사들도 참전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 붙잡히는 족족 난도질당해 힐링 포션의 시약 재료가 되어 버렸다.

현재 안타레스군의 최대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다.

바로 국민들의 피난이었다.

☆ ☆ ☆

안타레스 공국 동부 협곡, 세베아.

수많은 피난민의 행렬이 협곡 사이로 줄을 잇고 있었다. 저마다 허름한 보따리며 배낭을 메고 힘겹게 발을 옮긴다. 우마차 따윈 없었다. 제국군이 바로 뒤까지 쫓아오니 가재도구를 챙겨서 달아나려 하다간 이내 붙잡힐 뿐이었다. 실제로 저런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이들은, 대열에서 늦춰져 이미 제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아비의 옷자락을 쥔 채 걷고 있던 오크 소녀가 칭얼거렸다.

“아빠, 다리 아파…….”

“조금만 참아라…….”

딸아이의 울상에도 오크 아비는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다. 그 자신이 너무도 지쳐 딸에게 신경 쓸 기운이 없다.

다른 쪽에선 어린 드워프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리고 있다.

“으앙! 으아앙!”

등에 업은 아이가 울고 있는데도 드워프 어미는 아이를 무시한 채 한숨만을 쉬고 있었다.

“하아아…….”

모정은 위대한 것이라지만 그 모정도 결국 육체에서 나오는 것, 지치고 두려움에 젖은 어미에겐 모정마저도 사치다. 이 힘겨운 와중에 아이를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 모정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인간도 엘프도 오크도 드워프도 트롤도, 모두 피로와 두려움 속에서 걷고 있었다.

인간들은 강력한 안타레스의 이종족 전사들만 보고 안타레스의 엘프나 오크, 드워프나 트롤은 모두 담대하고 강하고 뛰어난 줄 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각 종족에서도 소수뿐, 인간이 아닌 종족이라 해서 소시민의 처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약한 자의 처지는, 어느 종족이건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피난민 대열의 주위를 몇몇 안타레스의 병사들이 애써 통솔하고 있었다.

“좀 더 빨리 움직이시오!”

“이 협곡만 넘으면 좀 쉴 수 있소!”

병사들의 외침에도 피난민들의 속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누군들 빨리 가고 싶지 않아 이렇게 느릿느릿 걷겠는가? 지치고 힘들어서 그런 것 아닌가?

하지만 이런 경우 왕왕 벌어지는 병사와 피난민의 실랑이조차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실랑이는 이미 체력 남아 있을 때 충분히 벌인 것이다.

그저 병사들의 호통을 귓가로 흘리며 반쯤 떠밀리듯 대열에 속해 걷고 또 걸을 뿐.

그런 피난민의 대열에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대열 후미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며 조금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바로, 대열 후미에서 들려온 외침 때문이었다.

“제국군이다!”

지축이 흔들리며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피난민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국군이 결국 여기까지 따라잡은 것이다.

“제국군이다!”

“빨리! 더 빨리 걸으시오!”

“붙잡히면 끝장이야!”

역시 그 어떠한 피로도 죽음의 공포 앞에선 무력한 모양이다. 피난민 대열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피난민 대열로부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세베아 협곡 입구.

바슈탈론 제국군 8연대, 오천의 군세를 이끄는 사령관인 라마스 경이 협곡 너머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어리석구나. 난민들을 껴안고 무슨 후퇴를 하겠다는 건가?”

참모장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저들이 어리석어 저러는 것은 아닐 겁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겠지요.”

라마스 경이 다시 한 번 비웃음을 흘렸다.

“나도 그 사실은 안다. 그래서 어리석다는 것이다.”

제국은 무능한 자를 기용하지 않는다. 라마스 경도 왜 안타레스군이 굳이 느려터진 피난민을 애써 보호하며 후퇴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안타레스의 국민은 다른 나라 국민과는 개념이 좀 다르다. 다른 나라의 국민이라면 전쟁에 패할 시, 그냥 승전국의 또 다른 국민이 될 뿐이다. 물론 패전국의 국민답게 차별과 불합리를 겪어야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안타레스의 국민은 붙잡히는 순간 짐승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이미 제국군 곳곳에서는 붙잡은 이종족 여인들을 잔혹하게 윤간하는 일이 잦았다. 군령이 엄격한 바슈탈론 제국군은 설사 패전국의 국민이라도 함부로 다루지 않지만, 이종족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니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고, 짐승이 아니니 수간을 한다는 도덕적 터부도 없다. 그야말로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장난감인 것이다. 엘프나 드워프 여성은 물론이고, 심지어 오크나 트롤 여성조차도 능욕을 당하곤 했다.

“노예 것들 홀려서 세운 나라니만큼 국민을 함부로 버릴 수도 없겠지.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라마스 경이 어리석다 칭한 이유는 다른 부분이었다.

“현명한 이라면 여기서 바로 항복하고 저 노예들을 원래 위치로 되돌려야 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적어도 노예다운 처우는 받게 될 터, 짐승처럼 죽어 가진 않을 터이다.

비웃음을 흘리면서도 라마스 경은 자신의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바로 지휘봉을 들고 명령을 내렸다.

“타란, 그릴, 프렌 대대, 출격하라. 저들의 피로 세이어의 말씀을 이 땅에 펼쳐라!”

세 무리의 기마대가 대열에서 이탈해 용맹하게 협곡 입구로 달려 나갔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오른다. 순식간에 삼백의 기마대가 협곡 입구에 도착해 무기를 꺼내드는 순간이었다.

“여기서부터는 통행금지다.”

협곡 위쪽 절벽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외치는 어투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기마대 전원에게 또렷하게 들리는 음성. 순간 기마대장 타란과 그릴, 프렌 경이 일제히 소리쳤다.

“전원! 정지!”

“공격에 대비하라!”

“기습이다!”

번쩍!

한 줄기 푸른 섬광이 기마대를 가르고 지나쳤다. 기마대가 빠르게 대처했음에도 섬광이 피를 뿌리며 십수 명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 간다. 흥분한 말을 달래며 타란 기마대장이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자는?”

잘생긴 30대 초반의 청년이 냉막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손에 쥔 예리한 롱 소드 위로는 창공처럼 푸른빛이 선명히 맴돌고 있다.

그 오러의 빛을 알아본 기마대장 그릴과 프렌이 경악해 외쳤다.

“인간 배반자!”

“배신의 기사, 사이러스다!”

러스가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세베아 협곡 입구, 수천의 제국군 앞에 당당히 홀로 서며 그가 검을 들어 허공을 찔렀다.

“그 누구도!”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10여 미터 가까이 치솟는다. 그 상태로 러스가 대지를 길게 그었다.

콰콰콰쾅!

협곡 입구가 연신 폭발하며 대지 위에 거대한 빗금이 그어졌다. 빗금 앞에 서서 러스가 호탕하게 소리쳤다.

“이 선을 넘지 못할 것이다!”

폭음과 오러의 기운 앞에 제국군 기마대의 말들이 놀라 투레질을 했다.

히이이잉!

“이, 이런!”

“말들이!”

비록 말이란 동물이 원래 겁이 많다지만, 제국군 기마들은 많은 훈련과 전쟁을 통해 어지간한 일로는 동요하지 않는 동물이다.

그런 기마들이 일제히 놀라 날뛴다. 가공할 오러의 기세가 훈련의 경지를 넘어서 본능의 공포를 이끈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위세에 삼백의 기마대가 기겁해 뒤로 물러섰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라마스 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자는? 이번에는 이곳에 나타났는가?”

인간임에도 인류를 배신하고 세이어의 뜻을 거역한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 사이러스.

그는 이 전쟁이 시작된 이래 공국 곳곳에 나타났다 사라지며 철저히 제국군의 발을 묶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저 신출귀몰한 행보에 제국군은 몇 번이나 다 잡은 안타레스군을 놓치는 일이 허다했다. 라마스 경이 이끄는 8연대도 결국 그 대상이 된 것이다.

“정말 저자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라마스 경이 놀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놀람 속에는 공포가 아닌 감탄이 섞여 있었다. 지금 그가 놀란 것은 다른 이유였다.

라마스 경 뒤에서 말없이 앉아 있던 한 청년 기사가 검을 차며 몸을 일으켰다.

“내 말했잖소? 아마도 이곳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흥분한 눈빛으로 앞장서는 청년 기사를 보며 라마스 경이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어찌 아셨습니까? 제국 참모부도 예측하지 못한 일인데…….”

“일종의 감이랄까? 나도 그냥 느낀 것이지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설명은 못 하겠군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청년 기사가 종자에게 손짓을 했다.

“이 경우는, 그냥 악연이라 해야겠지요. 숙적 사이에 존재하는 악연.”

종자가 갈색 군마 하나를 끌고 와 청년 기사에게 건넸다. 말에 올라타는 청년 기사를 보며 라마스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 청년 기사는 제국군 8연대 소속이 아니었다. 따로 8연대를 보조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개인적인 의지로 멋대로 이곳에 따라왔다.

하지만 라마스는 청년을 탓하지 않았다. 제국군은 군령이 엄격하지만, 동시에 군령으로 일부 기사들에게는 개인의 판단에 따라 제국에 이득이 될 경우 명령불복종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청년 기사는 그 자격을 지닌 자, 오러를 각성해 제국을 수호하는 초인 중 한 명이었다.

“배신의 기사는 당신 것입니다. 중압의 기사, 키린트 경.”

☆ ☆ ☆

‘배신의 기사라…….’

러스는 뺨을 긁었다.

‘거참, 새로운 칭호를 원하긴 했지만 이런 게 붙을 줄은 몰랐는데.’

언제까지고 대륙 최연소 오러 유저로만 불리는 것에 불만이 많았던 러스다. 그래서 사실 그동안 은근히 다른 나라 기사 만날 때마다 ‘나 사실 허공검이라는 비기도 있는데…….’라며 은근슬쩍 기술명에 대해 흘리기도 했었다.

은근 유치한 면이 있달까? 뭐, 워낙 사교성 없는 성격이다 보니 거의 효과는 없었지만.

그런데 드디어 대륙 최연소 딱지를 뗀 것이다.

‘대신 붙은 칭호가 인간 배반자, 배신의 기사라니…….’

러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기사를 꿈꾸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보면 얼마나 기막혀할까? 위대한 기사가 되고 싶어 치기 어린 나이에도 열심히 검을 휘둘렀는데, 정작 되고 났더니 인류의 배신자 소리나 듣게 되었다.

‘이것도 나름 대단하다면 대단한 건가? 어쨌거나 스케일은 크잖아?’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쓸데없는 인간의 찬사보다, 인간들이 붙여 주는 위대한 기사의 칭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지금 자신의 등 뒤에 있었으니까.

러스는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피난민 대열의 후미가 이제 협곡 중간까지 멀어져 있었다.

‘아직 좀 모자라는군.’

그때 강렬한 기세가 제국군 쪽에서 뻗어 왔다. 은청색 섬광이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경각심을 느끼며 러스는 검을 고쳐 쥐었다.

‘이 기운은?’

익숙한 기운이었다. 익숙한 빛이었다.

‘그자다!’

순식간에 말을 달려 협곡 입구로 도달한 키린트가 마상에서 바로 몸을 날렸다. 경갑 차림으로, 마치 새처럼 가볍게 수십 미터의 허공을 질주해 순식간에 러스 앞에 도달한다.

착지와 동시에 검을 뽑아 자세를 취하며 키린트가 희열 어린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사이러스 경!”

마주 자세를 취하며 러스가 인상을 썼다.

“키린트 경, 오랜만이구려.”

두 사람은 1차 제국 침공 전쟁 당시, 수십 번이나 붙고도 결국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서로 목숨을 각오하고 마지막 비기를 꺼내려는 순간 전쟁이 끝나 버려 각자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후후, 정말 더럽게 찜찜한 기분이었다.”

귀족 출신으로 곱게 자란 키린트는 저잣거리의 더러운 표현에 대해 그리 밝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때 키린트는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화장실 갔다가 밑 안 닦고 온 기분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었지. 하인들이 떠들 때는 저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흥분으로 눈을 번뜩이며 키린트가 러스를 노려본다. 러스도 검을 그에게 겨누었다.

“이런 자리에서 당신을 만난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 오러 유저, 키린트가 나타났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지금 러스의 등 뒤에는 수만의 피난민 행렬이 있었고, 그들의 피신을 막아 줄 이는 오직 그 자신뿐이다. 여기서 그가 뚫린다면 수만의 목숨이 헛되이 사라진다.

그러니 수많은 생명을 양어깨에 짊어진 자로서 결코 지금 이 상황을 즐거워해서는 안 되겠지만…….

“즐겁다는 점은 부인 못 하겠군.”

러스는 웃었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점점 더 기세를 더하며 환하게 불타올랐다.

키린트도 웃었다. 은청색 블레이드 오러가 더더욱 선명해져 찬란한 섬광이 되었다.

“오늘 끝을 보자!”

“내가 할 소리!”

동시에 외치며 두 오러 유저가 서로에게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어지러운 검광이 협곡 입구를 가득 수놓았다. 수십 미터 반경이 모조리 파헤쳐지며 대지가 속살을 드러냈다. 오러 파문이 연거푸 터져 협곡 좌우를 뒤흔들었다.

콰콰쾅!

그 폭발을 보며 라마스 경이 혀를 찼다. 키린트가 러스를 맡은 사이 피난민 대열을 뒤쫓을 생각이었는데 저래서야 도저히 병력을 협곡에 투입할 수가 없다.

‘끙, 이왕이면 다른 데서 좀 싸우시지.’

하지만 그걸 알기에 러스도 굳이 저기에 버티고 있는 것일 터다. 아마 키린트가 거리를 벌려 도발해도 굳이 쫓지는 않겠지.

‘뭐, 괜찮아. 키린트 경이 배신의 기사를 베면 그 이후엔 아무 장애물도 없다.’

키린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채 라마스는 일단 대기 명령을 내렸다.

‘그때 바로 전군을 진격시킨다!’

한편 키린트와 러스는 벌써 몇 차례나 격돌하며 서로의 오러 스킬을 꺼내 든 후였다.

“굉천월광!”

취향에 맞다 보니 가장 자주 구사하게 된, 이젠 거의 러스 자신의 기술이 되어 버린 굉천월광이 키린트를 향해 뻗어나갔다. 키린트가 혀를 차며 반격했다.

“그건 이미 몇 번이나 보지 않았는가? 다른 것은 없는 건가? 미라쥬!”

흔들리는 은청색 오러를 보며 러스도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그쪽도 재탕이긴 마찬가지인데? 신선한 것은 없나?”

연달아 그들은 서로 재어 놓았던 기술을 꺼내 들고, 또 막아 냈다. 수십에 달하는 대륙 각지의 오러 스킬들이 두 천재에 의해 재현되어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쉴 새 없이 굉음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 그야말로 초인의 대전이란 표현이 부끄럽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에는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검을 놀리며 키린트가 뇌까렸다.

“언제까지 이런 장난을 할 셈인가?”

러스도 비슷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대가 장난만 치고 있으니 나도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지 않나?”

이미 1차 제국 침공 전쟁 때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던 상황이다. 서로 진짜 비기를 감춘 상태에서는 절대 결판이 나지 않는다는 걸 서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키린트가 같은 양상을 되풀이한 것은 현재 러스의 정확한 기량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날의 치욕을 갚기 위해 얼마나 절치부심했던가? 겨우 다시 만나게 된 숙적이었다. 경거망동해 억울한 패배를 당할 순 없으니 충분히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러스는 현재 시간을 끌어야 할 처지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난민 대열은 열심히 제국군과의 거리를 벌리고 있을 터다. 이대로 계속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진다 해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다.

덕분에 둘의 전투는 겉으로 보기엔 맹렬한, 그러나 정작 본인들에겐 민숭민숭한 전개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서로 남의 기술을 꺼낸 뒤, 서로 남의 기술로 막는다. 한번 보면 익힐 수 있는 천재들에게, 한번 보면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위협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 상황도 길지는 않았다.

‘흐음, 기량 자체는 여전히 그리 차이가 없군.’

러스의 움직임과 기세를 살피며 키린트는 확신했다. 그날 이후 고련하고 또 고련했지만 러스 또한 놀고 있지 않았는지 두 사람의 실력은 여전히 백중지세였다.

뭐, 무인 사이엔 실력의 일부를 감추는 것도 일종의 상식이긴 하다. 오러 유저들 역시 그런 의미로 저마다 숨겨 놓은 밑천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오러 유저의 이야기, 키린트나 러스 정도로 월등히 감각이 뛰어난 천재라면 아무리 기량을 숨겨 봐야 숨긴 기량마저 알아챌 수 있다.

키린트도 러스도 현재 전력을 다하지 않았지만, 그것까지 감안해 이미 상대의 기량을 파악한 후.

“역시 승패를 가리려면 이것밖에 없겠군.”

키린트가 눈을 빛내며 발도 자세를 잡았다. 검을 검집으로 넣더니 자세를 극히 낮추며 검을 등 뒤로 감춘다.

“타아아앗!”

‘드디어 진짜 비기를 꺼내는가!’

상대의 변화한 기세에 긴장하며 러스도 전신의 오러 흐름을 뒤틀었다.

“하아아앗!”

선공을 날린 것은 키린트였다.

“중압뢰, 그래비티!”

검집으로부터 섬광이 맹렬히 분사해 대기를 찢었다. 찢긴 대기가 뒤틀리며 아지랑이를 일으키더니 이내 거대한 힘이 되어 러스 주위 수십 미터를 짓눌러 댔다.

“으윽!”

순식간에 전신이 천근만근이 된다. 두 팔이 쇳덩어리가 묶인 것처럼 무겁기 그지없다. 당황한 러스를 노리고 한 줄기 은청색 블레이드 오러가 쇄도해 왔다.

“허공검, 호라이즌!”

애써 팔을 움직여 러스는 자신의 사방에 원형으로 공허의 검을 날렸다. 그를 누르던 정체불명의 힘, 중력이 공간 채 절단되며 이내 몸이 자유로워진다. 바로 몸을 날려 러스가 공세를 피하는 순간이었다.

키린트의 공격이 이어졌다.

“리버스!”

발도한 자세에서 크게 몸을 회전하며 세로로 검을 긋는다. 겉보기엔 허공에 그냥 칼춤 추는 걸로밖에 안 보이지만, 그에 따라 일어나는 오러 기류는 결코 칼춤 정도가 아니다. 잘려 나간 중력의 우물이 이내 허공으로 역류한다.

“윽!”

마치 허공이 땅이 된 것처럼 몸이 미친 듯이 위로 쏠린다. 간신히 균형을 잡으려는 순간 이번엔 다시 땅이 제 역할을 찾고 러스를 끌어당긴다. 몇 번이나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것을 반복한다.

그야말로 중력의 거미줄에 묶인 신세가 된 러스를 향해 키린트가 블레이드 오러를 뿌려 냈다.

“받아 보아라!”

키린트의 비기, 중압뢰 천지역전이었다.

위아래가 미친 듯이 바뀌니 어지간한 오러 유저라도 감당 못 하고 평범한 일격에 죽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현상을 일으키는 원리는 아무리 러스라도 짐작도 가질 않는다. 과연 키린트가 천재는 천재였다.

하지만…….

“고작 이건가?”

실망하며 러스는 정신없이 뒤바뀌는 중력 속에서 간단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몸을 뒤틀어 쉽게 키린트의 블레이드 오러를 피했다.

“쓸데없이 고난이도면서 쓸모는 없잖아?”

중력을 다룬다는 것은 틀림없이 굉장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로 하는 게 고작 사람 띄웠다 꺼졌다가 전부라면 대응이 그리 어려울 것이 없다. 위아래가 계속 바뀐다면, 바뀔 때마다 바로 러스도 위아래로 신체 중심을 바꾸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이게 러스니까 별로 어려울 게 없는 것이지, 다른 오러 유저였다면 기겁할 만큼 세심한 오러 운용이지만…….

“실망이오, 키린트 경.”

적어도 러스와 동급의 천재인 키린트라면, 상대가 이런 식으로 피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이 정도라면 러스의 허공검에 비해 한참이나 격이 낮다!

혀를 차며 러스가 바로 검격을 뿌렸다.

“허공검, 호라이즌!”

공간을 초월해 선후를 무시하고 목표만을 베는 검격.

검성 바나텔조차도 피하지 못한 일격이 키린트에게 작렬했다.

그때였다.

“흡!”

묘한 호흡과 함께 키린트가 검을 빙그르 돌렸다. 순간 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

허공검이 사라졌다!

이니야나 칼켄, 스탈라처럼 발동을 못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레펜하르트나 제라드처럼 몸으로 때운 것도 아니었다.

타시드처럼 공격 목표를 미리 예지하고 먼저 오러를 끼워 넣어 막은 것도 아니었다.

바포메틱 슈트를 상대할 때처럼 공간 진입이 막힌 것도 아니었다.

그냥, 허공검이 베어야 할 공간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황당해하며 러스가 도로 착지했다. 검의 회전을 멈추고 다시 발도 자세로 돌아가며 키린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실망시켜서 미안하군. 천지역전은 그저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한 예비 동작일 뿐. 생각해 보면 나도 쉽게 피할 수 있는 기술을 그대에게 썼으니 이는 내 실수다.”

순간 키린트의 눈빛이 빛났다.

“하지만 이건 다를 것이다.”

그의 검이 다시 창공을 갈랐다.

“중압뢰, 스틸 에리어.”

눈앞에서 키린트가 사라졌다. 순간 러스는 경악했다. 빠르게 이동했다거나, 눈을 속인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등 뒤에서 키린트가 나타나 검광을 날렸다. 은청색 섬광이 러스의 심장을 쇄도하는 순간.

“으윽!”

기겁하며 러스가 검을 내리그었다. 허공검이 발동하며 키린트의 블레이드 오러를 단숨에 가르고 그가 존재하는 공간마저 절단해 버렸다.

그러나 그 공간에 이미 키린트는 없었다.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곳에 서서 키린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허공검, 허공검이라 하는가.”

아무리 타고난 천재라지만, 키린트라고 허공검 같은 고도의 비기를 보고 베낄 능력은 없었다. 솔직히 몇 번이나 보았지만 대체 어떤 원리로 저런 짓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러나 허공검이 어떤 류의 기술인지는 알 수 있다.

“하하, 우리는 정말 얼마나 닮은 꼴인 거냐?”

러스 역시 키린트와 마찬가지였다. 중압뢰가 무슨 원리인진 몰라도 어떤 류의 기술인지는 이미 파악했다.

“그렇군.”

러스가 공간을 벤다면.

“하필 비기마저 똑같은 공간 계열인 건가?”

키린트는 공간을 훔친다.

3

“중압뢰, 스틸 에리어!”

비기를 발동하며 키린트가 허공을 베었다. 공간을 훔치며, 순식간에 키린트와 러스 사이의 공간이 사라지고 두 사람의 거리가 제로가 된다. 순식간에 상대의 좌측으로 이동한 키린트가 검을 찔러 넣었다.

상대의 검이 어디를 찌를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회피나 방어로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러스는 검을 크게 돌렸다.

“허공검, 블루 홀!”

공간 포털이 열리며 키린트의 공격이 아예 러스의 등 너머로 흘러 버렸다. 이참에 러스가 반격에 나섰다.

“허공검, 호라이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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