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장 소멸
1
황금빛으로 물든 거구의 육체가 허공을 갈랐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날아드는 그 강렬한 기세에 세이어가 바로 방어에 나섰다.
“포스 필드, 프리스매틱 가드, 나인 배리어, 월 오브 아케인…….”
순식간에 여러 방어 마법이 다중으로 겹쳐지며 세이어의 전신을 촘촘히 감쌌다. 동시에 레펜하르트의 일격이 방어 마력장을 격중시켰다.
“스트레이트 캐논!”
폭음과 함께 세이어의 육체가 뒤로 밀렸다. 제라드와의 전투 때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땐 10여 미터 단위로 밀렸는데 이번엔 그냥 1미터 정도 밀렸다는 것?
하지만 10미터건 1미터건 밀리는 시점에서 어차피 마법 좌표 지정은 깨진다.
“역시, 제 사부와 똑같은 수작이구나.”
예상했다는 듯 세이어가 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부동명왕.”
또다시 10서클 공간 결계 마법이 발동되었다. 연거푸 주먹을 날리며 레펜하르트가 포효를 터트렸다.
“타아아앗!”
황금빛 오러로 물든 주먹이 폭격이 되어 쉴 새 없이 내리꽂힌다. 그러나 세이어는 더 이상 밀리지 않았다. 제라드의 공세마저도 무시해 버린 공간 결계 마법이다. 10서클의 이적은 결코 허세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제라드 때와 달리 레펜하르트는 그리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쳇, 하는 짓도 비슷하네.”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가 세이어를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스텝을 밟으며 상대의 겨냥을 피해 움직이는 것이다. 덕분에 바로 마법으로 반격하려던 세이어가 타깃팅을 실패해 잠시 주춤거렸다.
“……반응이 빠르군?”
제라드조차도 일시 당황해 반격을 허용했는데, 제자인 레펜하르트 쪽이 오히려 더 노련하게 반응하고 있다니?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 테스론 놈 상대할 때 내가 했던 짓이니까.’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
그가 터득한 10서클의 경지에는 시간과 공간, 물질에 직접 개입하는 술식 또한 존재한다. 지금 세이어가 선보이는 마법과는 개념이 다르지만 레펜하르트 역시 전생의 권왕 테스론을 상대하며 공간 고정을 이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안 그러면 공처럼 이리저리 튕겨 나가니까. 강하다기보다는 사람 귀찮게 만드는 전술이었지.’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법이 워낙 단순하니 반격하는 측 수법도 뻔해진다. 당연히 세이어도 저런 식으로 나설 거라 예상했기에 놀랄 일도 없었다.
‘그나저나 저놈이 정말 10서클의 종사자가 맞기는 하군.’
이제껏 보아 온 마법 자취로 충분히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실제로 10서클을 구사하는 걸 보니 솔직히 놀랍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침을 삼켰다.
과거의 자신이, 과거의 힘으로 눈앞에 서 있다.
과연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까?
‘테스론 놈은 어떻게 했더라?’
기억이 떠올랐다.
“흐읍!”
레펜하르트의 움직임이 더더욱 빨라졌다.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는 세이어를 중심으로 빠르게 원을 그리며 계속 방어장에 주먹을 갈긴다.
세이어도 마법으로 공격에 나섰다. 마력의 섬광과 불꽃, 뇌전과 빙설의 창이 연신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모든 공격은 허무하게 빗나갈 뿐이었다. 레펜하르트가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쉴 새 없이 움직이니 세이어로서도 상대를 명중시키기가 어렵다. 차라리 제라드처럼 강력한 한 방을 날리겠다는 식이면 어떻게든 타이밍을 잡아 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으음…….”
모든 공격을 잘고 빠르게, 쉴 새 없이 잽에 가까운 권격을 날리며 파워보다 횟수로 승부한다. 중심을 안정화시키고 강타를 날리는 것이 아니니 당연히 움직임도 가볍기 짝이 없다.
“타아아앗!”
그렇게 주먹뿐 아니라 발길질이며 팔꿈치, 무릎까지 이용해 레펜하르트는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공격은 전부 세이어를 목표로 가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어 마력장을 노리고 스치듯 휘둘러 대니 조금씩 방어 마력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유롭던 세이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마력장이…….’
마력장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마치 과일에서 껍질을 벗기듯, 레펜하르트는 계속 세이어 주위를 빙빙 돌며 마력장의 위력만을 약화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이어의 마력장은 아무리 강력한 오러의 힘이라도 쉽게 벗겨질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레펜하르트의 공격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앱솔루트 디스펠? 어떻게 저렇게 맹렬히 움직이며 동시에 마법을 쓰는 거지?”
황금빛 오러로 물든 레펜하르트의 주먹, 그 속에는 마법의 기운 역시 스며들어 있었다. 9서클의 절대 마법 억제 주문, 앱솔루트 디스펠을 구사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의 마력장을 잠식하고 있다!
세이어의 눈동자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대단하군! 이게 그 아이가 말하던 것이었구나. 듣고도 몰랐으되, 눈으로 보니 알 수 있겠다.”
생뚱맞은 듯한 발언이지만 레펜하르트는 바로 알아들었다.
“또 테스론의 기억인가?”
그는 테스론과의 전투에서 권마합신, 그리고 짐 언브레이커블의 동작에 맞춰 마법을 구사하는 체술수인법을 이미 선보인 바 있었다. 세이어라 칭하는 저자가 테스론의 기억을 엿보았다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겠지.
“타아앗!”
투기를 높이며 레펜하르트는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쉴 새 없이 퍼붓는 폭풍 같은 공격 속에 이미 포스 필드와 프리스매틱 가드는 해체되었고 다른 마력장도 흔들린다. 공격을 퍼부으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거참, 역지사지란 속담을 이런 식으로 실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온갖 마법 방어장으로 무장한 전생의 레펜하르트를 테스론이 상대한 수법이 바로 이거였다.
넘치는 체력에 무식한 스피드를 바탕으로 테스론은 그저 단순하게 뱅뱅 돌면서 레펜하르트의 마력장만을 열심히 두들겨 댔다. 물론 당시 테스론은 지금의 레펜하르트처럼 디스펠 계열 마법을 쓰는 것이 아니었지만, 대신 성녀 엘린으로부터 항마의 축복을 받은 상태였다. 사실 효과는 비슷하다.
점점 해체되는 자신의 마력장을 보며 세이어가 인상을 썼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세이어의 양손이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각종 마법의 시동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월 오브 드레이스. 서렌트 라인 플레임.”
마력장 속의 세이어로부터 전격과 불꽃의 광범위 9서클 주문이 시전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레펜하르트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는군.’
모기나 파리처럼 왱왱대며 끊임없이 빙빙 돌기만 하는 이 수법은 마법사 입장에서 꽤 짜증이 난다. 시원하게 마법 날려서 격추시키고 싶어도 상대가 워낙 빠르게 움직이니 명중시키기 힘들다.
당연히 세이어도 전생의 레펜하르트와 같은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어디, 통째로 휩쓸려도 피할 수 있나 보자!”
세이어가 광범위한 마법을 연거푸 터트렸다. 순식간에 사방 몇십 킬로미터가 모조리 마법의 범위 안에 들어선다. 왱왱대는 모기 놈, 손으로 때려잡을 수 없으니 아예 모깃불을 피워 버리겠다는 식이다.
순식간에 강렬한 마법이 레펜하르트의 사방을 잠식했다. 스파이럴 가드와 불굴의 육체라도 상당한 부상을 각오해야 할 강력한 마법들이었다. 이미 이 전개를 예상한 레펜하르트지만 안색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렇게 나올 줄은 알았는데…… 문제는 이걸 감당할 수 있느냐지.’
전생의 테스론도 이 수법으로 나선 레펜하르트의 공격에는 대책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테스론에겐 동료가 있었다. 허공검을 다루는 검성 사이러스가 배후를 노려 레펜하르트의 마법을 방해해 주었다.
그러나 현재의 레펜하르트는 혼자다.
“허업!”
긴 기합을 흘리며 레페하르트가 공중제비를 넘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며 양 주먹을 번갈아 내뻗었다.
“뇌전폭염권!”
월 오브 드레이스, 세상을 뒤덮는 듯한 거대한 전격의 벽을 향해 뇌전의 주먹이 뻗어 나갔다.
서렌트 라인 플레임, 사방 수백 미터를 휘감는 거대한 불꽃의 폭풍을 향해 폭염의 주먹이 뻗어 나갔다.
거대한, 이미 자연재해 그 자체인 마법을 향해 너무도 미약해 보이는 인간의 주먹질이 맞선다. 그야말로 당랑거철이라는 속담 그 자체였다.
세이어가 코웃음을 쳤다.
“흥! 해일을 주먹으로 막을 셈이냐?”
순간 레펜하르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몰랐냐? 우리 무문은 원래 그거 돼.”
파지직!
뇌전의 권격이 전격의 벽을 후려갈겼다.
화르륵!
폭염의 권풍이 불꽃의 폭풍을 후려갈겼다.
놀랍게도, 벽이 허물어지고 폭풍이 사그라졌다.
무시무시한 소음과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고 전격의 벽이 찌그러지며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형상이 생겨난다. 불꽃의 폭풍 쪽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폭풍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지랑이가 피는 풍경처럼 통째로 일그러져 엉뚱한 방향으로 불꽃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윽?”
당황한 세이어가 혼잣말을 흘렸다.
“……반발 현상?”
마력 반발 현상.
완전히 동일한 속성과 패턴의 두 마법이 서로 충돌할 경우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쪽 마법에 동일한 속성과 패턴의 다른 마법이 끼어듦으로써, 동일한 마법의 연장으로 술식화되는 바람에 에러가 일어나는 것이다.
세이어가 놀라 중얼거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마법전의 경우, 수준 높은 마법사가 상대의 마법 술식에 직접 개입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직접적으로 술식에 훼방을 놓아 마법 자체를 구사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레펜하르트도 여태 몇 번이나 써먹은 수법이다.
그리고 이 술식 파훼, 훼방은 그리 희귀한 수법은 아니었다. 상대의 술식과 시전 타이밍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기법, 물론 상대와 어마어마한 수준 차이가 나야 할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마법사들끼리의 전투에서 가끔 볼 수 있었다. 자고로 대마법사쯤 되면 오만하기 마련이고, 상대 무시하며 저런 식으로 잘난 척하는 경우가 의외로 꽤 있으니까.
그러나 마력 반발 현상은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속성을 맞추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상대 마법 패턴을 완벽히 파악한다는 것은 대마법사라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마력 감지력이 신의 경지에 다다라야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그렇게 상대의 패턴을 완벽히 파악한다 해도 그것으로 똑같은 마법 패턴을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야말로 안목이 신의 경지에 다다른 무술가가 있어 상대의 근육 움직임, 피의 흐름, 그 육체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자가 있다고 치자. 말도 안 되는 경지지만 그래도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저런 괴수가 아주 없으리란 법도 없다.
그러나 그 무술가가 상대와 똑같이 자신의 근육 움직임, 피의 흐름, 그 모든 것을 조절해 카피해서 반격을 날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건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아예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데 지금 레펜하르트는 그 불가능을 해냈다.
“우연인가, 아니면…….”
당황한 세이어의 마력장이 일시 흔들린다. 상대의 동요는 곧 반격의 기회다. 레펜하르트가 바로 허점을 노리려 했다. 그러나 세이어는 이내 동요를 가라앉혔다.
“아니, 아예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니구나. 이 육체는 그대의 것이니.”
“쩝, 그새 알아챘나…….”
아쉬워하며 레펜하르트는 입맛을 다셨다.
사실, 아무리 고금 제일의 마법사인 그라도 인위적으로 반발 현상을 끌어낼 순 없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저 청년, 세이어의 육체는 바로 레펜하르트의 육체다. 그 누구보다도 레펜하르트 자신이 저 육체의 마력 패턴을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다. 이제 갓 육체를 손에 넣은 세이어보다도 오히려 확실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당황시키고 이득을 볼까 했는데 바로 알아채 버리는군. 저놈도 그 정도 수준은 된다 이거지.’
이미 침착을 되찾은 상대에게 섣불리 뛰어들었다가는 이쪽이 오히려 피를 보겠지.
레펜하르트는 긴장하며 계속 세이어의 주위를 맴돌았다. 빙빙 도는 상대를 노려보며 세이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그 아이에게 들었으면서도 그대의 존재를 채 파악하지 못했다. 이 육체를 입었음에도 그대의 경지를 너무 무시했다.”
세이어의 마력 방어장이 형태가 변화했다. 몇 가지의 고정된 마력장을 주위에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마력장이 생성, 그리고 변화하며 복잡한 형태로 연계된다. 레펜하르트가 치를 떨었다.
‘순환 마력 방어. 젠장, 저놈도 저거 할 줄 아나?’
마법 방어장을 펼친 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흐름을 만들어 계속 속성과 패턴을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무술로 치면 두 팔을 들어 얼굴만 가리고 있는 정적인 상태에서, 연신 움직이며 어떤 공격이든 대처할 수 있는 동적인 방어 스타일로 바뀐 것과 같다.
자신과 비슷한, 그러나 확실히 술식이 다른 세이어의 수법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잠시 씁쓸해했다.
‘내가 창안한 건 줄 알았는데. 저것도 은의 시대엔 이미 있었던 기법이었나 보군.’
하긴, 미티어 폴이나 헬 오브 더 월드도 그 개념은 은의 시대 유적에서 온갖 지식과 지혜를 손에 넣으며 터득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창안이라기보다는 복원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원본이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래도 고생해서 새로운 걸 만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재탕이더라는 사실은 역시 입맛이 쓰다.
견고한 방어 속에서 세이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손에 넣어서는 안 될 것을 손에 넣은 자. 다다라선 안 될 곳에 다다른 자. 그런 자라면 응당 경의를 가지고 상대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육신이 바뀌었다는 것만으로 우습게 보았으니 내 오만이 너무 심했구나. 육신을 잃었다 해도 그대의 정신은 이미 진정한 지식에 닿아 있거늘.”
세이어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세이어에게 더 이상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세이어가 양손을 들었다.
“이제부턴 시험하지 않겠다.”
싸늘한 목소리가 레페하르트의 귓가에 들려왔다.
“심판하겠노라.”
☆ ☆ ☆
섬광이 하늘을 뒤덮었다. 제라드를 경악케 만들었던, 대지를 뒤덮는 그 백색 섬광이었다. 제라드조차도 도저히 맞설 방법을 찾지 못해 부상을 각오했던 그 수법,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차분하게 섬광에 맞섰다.
“타아아앗!”
제라드처럼 더블 스파이럴 가드를 쓸 수는 없다. 그것은 캘러미티 혼 8중첩의 경지에 들어서나 가능한 고도의 기법이니까.
그 대신…….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
콰콰콰쾅!
백색 섬광이 금빛과 백색이 섞인 소용돌이 앞에서 갈려 버렸다. 공세를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드레자, 그 영감에게 고마워해야겠군.”
드레자와의 전투는 그야말로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사실 레펜하르트가 패한 전투라는 쪽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대가도 컸다. 이제 레펜하르트는 6중첩 캘러미티 혼, 권마합신을 사용하면 7중첩까지도 가능하다. 그만큼 무술의 깨달음도 깊어졌기에 스파이럴 가드의 방어력 역시 월등히 높아진 것이다. 적어도 마법을 상대할 때만은, 마력을 섞어 스파이럴 가드를 펼치는 레펜하르트 쪽이 오히려 제라드의 더블 스파이럴 가드보다 방어력이 높을 정도다.
“섬전 기격탄, 연환!”
양 주먹을 떨쳐 내며 레펜하르트가 공세로 나섰다. 마력과 융합된 기격탄이 몇 배나 강력해진 힘으로 세이어의 방어장을 두들겼다. 사이즈는 기존 연환 기격탄과 별 차이가 없지만, 그 속에 깃든 힘은 차원이 다르다. 핀 포인트로 힘이 집중되니 2층 집 사이즈인 제라드의 연환 기격탄과 비교해도 위력이 큰 차이가 없다.
쾅쾅쾅쾅!
섬전 기격탄이 세이어의 방어장을 두들기며 폭음을 울렸다. 그러나 세이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라드의 연환 기격탄도 먹히지 않았으니 레펜하르트의 것인들 먹힐 리가 없다.
“이 정도로 신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호통을 치며 세이어가 또다시 마법을 날렸다.
“임페리얼 버스터!”
직경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그야말로 불꽃의 기둥을 넘어서 불꽃의 탑이나 성이라고 해야 할 사이즈의 마법이 날아든다. 시야를 뒤덮는 그 불길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거, 나도 어릴 적 인성 교육 개판으로 받았지만 저놈은 더하는구먼.”
시험이 아니라 심판을 하겠다니, 뭔 말이 저따위냐? 레펜하르트도 전생 때 겉멋 들어서 온갖 괴상한 발언 다 해 댔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러운 헛소리 많이 했었지.’
말투야 어떻건 날아드는 마법 자체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긴장하며 레펜하르트는 불꽃의 탑을 향해 두 주먹을 내밀었다. 양손을 회전시키며 전신의 오러와 영기를 동시에 이끌어 낸다.
“디스펠 스트레이트 캐논, 스파이럴!”
테스론에게서 훔친 수법으로 스트레이트 캐논을 꼬아서 드릴 형태로 만들고 거기에 디스펠 마력까지 싣는다. 고도의 항마력에 강렬한 관통력, 추진력까지 실어 반격하니 마법의 위력 자체는 세이어가 월등히 위지만 도리어 레펜하르트 쪽이 임페리얼 버스터를 꿰뚫어 버린다.
“타아아앗!”
불꽃을 꿰뚫고 날아들며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세이어의 정면까지 쇄도했다. 그리고 곧바로 수십 발의 펀치와 킥을 퍼부었다.
“다중 집약! 파이널 스트라이크 임팩트!”
모든 펀치와 킥에 다양한 속성의 마법이 깃들어 마력장을 두들긴다. 전격, 뇌전, 빙설, 어둠, 섬광, 파괴와 항마의 기운이 강렬한 물리력을 동반하며 세이어의 사방을 폭격해 댔다.
일일이 주먹질 날릴 때마다 시동어 외우기 귀찮아진 레펜하르트가 또다시 만들어 낸 짐 언브레이커블 전용 마법, 아예 동작에 맞춰 다양한 속성 마법을 연계시키는 권무 형태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순환 마력 방어를 사용하는 세이어에겐 먹히지 않았다.
“놀랍군. 하지만 무의미하다.”
아무리 다양하게 공격해 봐야 저쪽의 마력장이 유동적으로 방어하니 금방 모든 마력장이 복구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반격이 날아든다.
“매스 아케인 블래스터.”
수십 줄기의 마력 섬광이 레펜하르트를 노렸다. 레펜하르트가 또다시 가슴을 활짝 펼쳤다.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
튕겨 나는 마법을 보며 세이어가 혀를 찼다.
“잘도 막아 내는군.”
아무리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의 대마법 방어력이 높다 해도, 현재 세이어의 마법을 막아 낼 수준은 아니다. 세이어의 마법이 그 정도였다면 제라드도 저렇게까지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레펜하르트는 무난히 세이어의 모든 마법을 감당하고 있었다. 단순히 스파이럴 가드에 마법 방어력만을 싣는 것이 아니라, 세이어의 순환 마력 방어처럼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의 방어 속성을 계속 변화시켜 막아 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이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마력 감지 능력 하나는 어마어마하구나.”
레펜하르트의 현재 연산력으로는 순환 마력 방어를 사용할 수 없다. 저 기법은 말하자면 쉴 새 없이 마법을 쓰고 또 써서 계속 다른 마력장을 끌어내는 방식이다. 머리로 이해는 하지만 현재 레펜하르트의 두뇌로는 방어장 순환 속도가 느려 무의미한 짓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세이어와 비슷한 속도로 상대의 마법을 속성에 맞춰 방어하고 있었다. 세이어처럼 쉴 새 없이 속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마법을 쓸 때마다 딱딱 맞춰 필요한 속성만을 꺼내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에 깃들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카드놀이를 하며, 상대가 패를 꺼낼 때마다 무조건 반대되는 패로만 막는 식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발동한 마법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바로 그 순간, 상대의 마법 속성을 그 짧은 찰나에 이해하고 본능에 가까운 속도로 반대되는 패를 꺼내야 한다.
아무리 레펜하르트의 마력 감지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세이어의 마법 역시 궁극의 경지에 다다른 것,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이 정도로 빠르게 대응하진 못했으리라.
“네놈이 내 육체를 들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무리 나라도 이런 미친 짓거리는 불가능했겠지.”
중얼거리며 레펜하르트가 재차 거리를 좁혔다. 세이어의 마력장 주위를 계속 돌며 마법의 흐름을 파악, 허점에 일격을 찔러 넣는다.
“타앗!”
세이어도 진지하게 마력을 운용하며 반격했다. 빈틈없이 방어 마력장을 순환하며, 흐름이 파악되어 허점이 드러나도 바로 그 허점을 지우며 광범위한 마법을 쉴 새 없이 갈겨 댄다.
“어림없노라!”
끔찍한 파괴의 여파를 사방에 흩날리며 둘은 연신 싸워 댔다. 둘의 공격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이 흔들리고 대지가 뒤엎어졌다. 이미 둘 사이의 대지는 더 이상 대지라 부르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공기는 시뻘겋게 달구어져 호흡조차 불가능할 정도도 땅 위는 녹아내린 거암괴석이 용암처럼 강이 되어 흐른다. 열기와 혼탁한 권능이 뒤섞인, 인세이면서도 인세가 아닌 것 같은 그 지옥의 공간 속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은 세이어였다.
“잘도 버티는구나, 이놈!”
끝없는 마력을 바탕으로 세이어가 9서클 마법을 계속해 쏘아 냈다. 하나하나가 한 방에 성을 무너트릴 가공할 마법, 그 막대한 힘 앞에는 아무리 레페하르트라도 열세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크으, 역시 내 몸답게 마력 하난 끝장나게 높네.’
테스론이 저 육체를 입고 나타났을 때와 비교하니 절로 이가 갈린다. 똑같은 육체라도 테스론이 깃들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저거…….’
하지만, 열세인 와중에도 레펜하르트는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 세이어의 마력 패턴을 파악해 최소한의 마력과 오러를 구사, 아슬아슬하게 모든 마법을 피하며 침착하게 상대의 기량을 파악한다.
세이어의 마법은 과연 어마어마했다. 마력뿐 아니라 연산력이며 마법의 위력, 시전 속도며 타이밍 모두 나무랄 데가 없었다. 과연 왕년 자신의 육체다운, 새삼 자신을 상대했던 전생의 사이러스며 테스론 일행이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의 힘이다.
‘그래도 아주 답이 안 나올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현재 세이어의 기량은 분명 레펜하르트의 전성기와 비교해도 그리 꿀리지 않는다. 솔직히 저 젊은 몸으로 어떻게 중년 시기의 레펜하르트와 동등한 수준을 보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 세이어에겐 사방신의 유물이 없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내 전성기에 비해 마력은 절반 수준.’
게다가 제라드가 반 죽여 놨다는 말도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사부 상대하면서 마력 절반 깎아먹기도 한 것 같고.’
물론 이것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지만…….
‘지금은 나도 사방신의 유물에서 마력을 끌어 쓸 수 있으니 크게 차이는 안 날 터다.’
드레자와 싸울 땐 그놈의 천지창조 준비하느라 상당히 마력 아껴 가며 싸워야 했다. 반면 지금은 다르다. 사방신의 유물과 동기동조화한 마력을 총동원한 현재 레펜하르트의 순수 마력은 드레자와의 전투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 정도 차이라면 경험과 오러로 어떻게든 메울 수 있다!’
세이어의 마법이 점점 더 위력을 높여 날아든다. 레펜하르트도 계속 빠르게 대응하며 반격을 해 댔다. 서로 마법과 주먹이 교차할 때마다 주위 대지가 헥타르 단위로 날아가 버린다.
얼마나 그렇게 싸워 댔을까?
문득 세이어가 미소를 띠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응?”
경각심을 높이며 레펜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놈이 뜬금없이 왜 처웃지?’
경험상, 전투 중 뜬금없이 처웃는 놈은 반드시 믿는 구석이 있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이어가 말을 이었다.
“그대의 기량은 실로 놀랍구나, 시공 회귀자여. 그 육체도, 그 정신도 모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갑자기 순환 마력 방어를 푼다.
“하지만, 결국 그 육체는 그대의 족쇄일 뿐이로구나.”
상대를 감싸던 불굴의 갑옷이 사라졌다. 결정타를 날릴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크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본능이 너무도 강렬하게 경종을 울리고 있어, 차마 몸이 앞으로 나서질 않는다.
방어 마력장이 사라지며 대신 세이어의 전신에 절대적인 기운이 서렸다. 그 어떤 것도 범접치 못할 압도적인 기류가 세이어를 휘감는다. 아까의 방어 마력장이 불굴의 갑옷이라면, 이것은 숫제 성벽이다.
“신의 힘을 다루는 자가 신살자의 업을 이었다. 그리하여 나도 경계치 않을 수 없었다.”
세이어가 양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그대에겐 더 이상 경계할 이유가 없으니…….”
레펜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현상이 무엇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진정한 궁극의 힘.
마법의 극을 넘어 세계 자체를 조성하는 절대적인 권능.
“이제, 신의 힘으로 그대를 벌하겠노라.”
드디어 세이어가 진정한 10서클 마법을 구사하려는 것이다.
“젠장!”
욕설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연거푸 오러를 날렸다. 연환 기격탄과 연환 기격포가 세이어를 강타했다.
“하하하!”
웃음과 함께 모든 오러가 세이어의 주위를 빗나가 흘렀다. 너무도 강렬한 마법이 시전되는 그 여파로 세이어의 주변 공간이 일그러진 것이다. 저 강력한 공간 왜곡력이 있으니 굳이 마력 방어장을 펼칠 이유가 없겠지.
모든 공격이 허사로 돌아가자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캘러미티 혼 정도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저 공간 왜곡을 뚫을 수가 없다.
그리고, 세이어는 결코 그 여유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만 끝내야겠다.”
인류의 신이, 그 입술을 움직여 궁극의 힘을 발했다.
“대이적 마법, 필멸 세계.”
2
10서클 공격 마법, 필멸 세계는 사실 그 개념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 마법의 효과는 극히 간단하다. 목표한 과녁을 꼼짝도 못하게 만들고, 거기에 마법을 날려 상대를 해하는 것뿐이다. 개념만 보면 사냥꾼이 덫을 놓고 잡힌 사냥감에 활을 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10서클에는 저 모든 개념에 ‘절대’라는 표현이 붙는다.
레펜하르트를 중심으로 사방 수 킬로미터의 ‘세계’.
그 세계의 모든 시간이 고정되었다.
그 세계의 모든 공간이 고정되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이 단 하나를 위해 움직였다. 바로 레펜하르트를 제자리에 얽매이게 하기 위해서.
세상 그 누구도, 설사 신이라 해도 ‘반드시’ 얽매일 수밖에 없는 시공의 덫이 놓였다.
그 후, 필멸의 빛이 따라붙었다. 세상 그 어떠한 것도, 설사 신이라 해도 ‘반드시’ 소멸할 수밖에 없는 소멸의 화살이다.
무조건 묶이고.
무조건 맞으며.
무조건 죽는.
저 단순한 개념을 절대화하기 위해 세상을 재구성하는 힘.
“그것이 10서클이지.”
온화하게 웃으며 세이어는 레펜하르트를 지켜보았다.
필멸의 빛은 상당히 느린 속도로 레펜하르트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고정된 세상, 그 세상의 법칙을 ‘소멸’시키며 날아가는 빛이기에 아무리 10서클이라지만 그 속도가 빠를 수는 없었다. 굳이 오러 유저가 아니더라도, 그냥 그 누구라도 보고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피할 수 없었다. 그를 둘러싼 세계가 ‘이탈’을 금하고 있었기에.
죽음을 눈앞에 둔 상대를 보며 세이어가 느긋하게 뇌까렸다.
“흥겨운 시간이었다. 그대는 앞으로도 기억하게 될 것 같구나.”
그때였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것은.
“그래, 네놈도 내가 했던 병신 짓을 할 줄 알았다.”
허공에 고정된 채 레펜하르트가 두 손을 어지럽게 놀렸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체술 수인술이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도 고도로 발달된 정통 마법의 수인술이었다.
빠르게 영창을 끝내며 레펜하르트가 양손을 떨쳤다.
“대이적 마법, 인피니티 게이트!”
모든 것에 ‘반드시’ 적중하는 필멸의 빛 앞에.
모든 것을 ‘무조건’ 다른 곳으로 보내는 공간의 문이 열렸다.
☆ ☆ ☆
쿠우우우웅!
굉음과 함께 필멸의 빛이 인피니티 게이트 속으로 빨려들며 사방에 그 여파를 떨쳐 낸다. 이탈을 금함으로써 세상의 법칙을 뒤틀었던 강대한 10서클의 마력이 폭풍이 되어 사방으로 불어닥친다.
절대와 절대가 충돌하면 혼돈만을 낳을 뿐.
웅웅웅웅!
시야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일그러지며 마치 초현실주의 화풍의 그림처럼 괴상하게 변한다. 완벽했던 필멸 세계에 인피니티 게이트가 개입되며 모든 법칙이 혼돈화된 것이다.
시공이 뒤틀리고 가공할 마력 폭풍이 폭주해 세상을 뒤흔들었다. 그 끔찍한 마력 폭주 속에서 세이어는 당황했다.
“이, 이런 수작을?”
평범한 마법이 아니라 10서클의 폭주였다. 이 정도면 아무리 세이어라 할지라도 마법 술식을 짤 수가 없었다. 세이어뿐 아니라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와도 결단코 무리다.
그러나, 현생의 레펜하르트는 전혀 문제없이 그 폭주 속을 돌진하고 있었다.
“타아아앗!”
지금의 그에겐 마법 뿐 아니라 오러의 힘도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마법이 묶인 세이어에게 접근하며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웃었다.
“애당초 10서클은 사람한테 쓰는 게 아니거든?”
소 잡는 칼로 닭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쓸데없이 힘을 낭비한다는 의미를 담은 속담이다.
그런데, 사실 소 잡는 칼로는 닭 못 잡는다.
소를 잡을 정도면 그 칼의 사이즈도 어마어마할 터, 그걸 휘둘러서 대체 무슨 수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닭 모가지를 맞출 건데?
10서클의 힘은 세상을 흔드는 힘,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한 개인에게 집중시킨다는 것은 지나치게 정밀한 술식을 요구하게 된다. 조금만 어긋나도 깨져 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정밀한 술식을.
‘그걸 억지로 한 점에 집중하는데 부작용이 없을 리 없잖아?’
전생의 레펜하르트도 괜히 공간 왜곡으로 검성 사이러스 한 방에 보내려다가, 거꾸로 허공검에 반격당하고 마법 술식이 꼬여 허차원 관광 갔다 온 경험이 있었다. 이후 그는 굳이 개인을 상대로는 공격 용도로 10서클을 쓰지 않았다. 10서클의 힘으로 유리한 전황을 만들기만 하면 그 후로는 하위 서클로도 충분한 것이다.
순식간에 세이어의 코앞까지 들이닥치며 레펜하르트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네놈의 경지는 분명 대단하지만, 경험은 아직 멀었다!”
“허튼 수작!”
흥분하며 세이어도 순식간에 전신의 마력을 끌어올려 두꺼운 방어막을 형성했다. 마법을 쓸 수 없으니 마력 그 자체로 방어한 것이다. 제라드의 반격기, 캘러미티 혼 데스 카운터조차 막아 냈던 가공할 힘이 세이어의 전신을 감쌌다.
아무리 마법을 못 쓴다 해도 세이어의 힘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하다. 마력 자체를 거대한 에너지체로 구현하며 세이어가 소리쳤다.
“마법 따위 필요 없다! 이대로 짓눌러 죽여 주마!”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전투 중 뜬금없이 처웃을 때는 반드시 믿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그것도 예상 못 했을 것 같나?”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짓눌러 오는 거대한 마력을 향해 손날을 뻗어 갔다.
“대이적 마법, 룰 브레이커!”
미리 준비했던, 현재 기량으로는 일주일에 세 번이 한계인 또 다른 10서클 마법이 발동되었다.
세이어의 필멸 세계가 세상의 법칙을 새로 쓴다면, 룰 브레이커는 세상의 법칙을 부수어 버리는 것.
단숨에 그 방대한 마력에 깃든 ‘방어’의 법칙이 무시된다. 별조차 박살 낼 듯한 압도적인 힘의 망치가, 그냥 압도적이기만 하고 아무 물리력이 없는 공허한 외침으로 변해 버린다.
처음으로 세이어가 진정 경악해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런 마법이?”
은의 시대조차도 없던, 상상을 초월하는 술식이 그의 모든 마력을 무효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일곱 오러 파동이 주먹에 맺혀 눈앞을 가득 메운다…….
“캘러미티 혼!”
신의 입술 사이로, 당혹한 인간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으윽!”
황금의 섬광이 하늘을 반으로 쪼갰다.
☆ ☆ ☆
쿠르르릉!
뇌전이 용처럼 꿈틀대며 허공 가득 춤추며 노닐었다. 갈라진 암운 위로 푸른 하늘이 일그러져 연신 요동친다. 녹아내린 대지 위로 용암이 솟구쳐 끔찍한 열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한때 거친 황야였던 아라난 그라드의 동쪽 대지.
그곳은 이제 더 이상 광야도 황야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기암괴석이 가득한, 차라리 다른 세계라 칭해야 옳을 정도로 변질되어 버린 죽음의 땅이었다.
그 암천의 하늘 아래 황금의 거인이 떠 있었다. 깊게 심호흡하며 거인이 뻗어 낸 오른 주먹을 거두었다.
“후우우…….”
시야에 한 형체가 보였다. 한때는 인간의 육체였던, 그러나 하반신과 좌측 상반신이 통째로 사라져 이제는 고깃덩이일 뿐인 무엇인가가.
가공할 캘러미티 혼 7중첩의 위력에 세이어의 육체 절반 이상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직 마력의 잔해가 남아 있어 그 부유력으로 시신이 떠 있긴 하지만 이내 저대로 대지로 추락해 흔적도 없이 파묻히리라.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저 육체의 비참한 몰골에 레펜하르트가 표정을 굳혔다.
“내 몸을 두 번이나 내 손으로 박살 내게 되다니, 참 살다 보니 별 해괴한 경험을 다 해 보네.”
고개를 저으며 레펜하르트는 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으, 그나저나 사부는 무사하시려나? 도저히 여유가 없어 사부 신경 쓰면서 까지는 못 싸웠는데.’
제라드가 기절했던 그 자리는 이미 흔적도 남지 않았다. 들끓는 용암과 녹았다 다시 굳은 암석의 숲만이 기괴한 몰골을 드러낼 뿐이다. 상식적으로는 저 끔찍한 곳에서 사람이 살아 있을 리 없지만…….
‘……살아 계시네. 하여튼 진짜 튼튼한 영감이다. 정말.’
기감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다른 장소에서 제라드의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새 정신을 차리고 피신한 모양이었다. 그 심각한 중상으로, 그 무자비한 파괴 속에서도 버텨 내다니 역시 짐 언브레이커블은 짐 언브레이커블이었다.
‘그래도 얼른 모시지 않으면 정말 황천 가시겠지?’
힐끔 세이어의 시체를 본 뒤 레펜하르트는 몸을 돌렸다.
저 정도면 확실하다.
확실히 죽었다.
‘짐 언브레이커블도 아닌데 인간이 맨몸으로, 아무런 방어 없이 캘러미티 혼에 직격당했는데 살았을 리가 없지.’
그러던 중이었다.
“……가만?”
순간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무 방어 없이 캘러미티 혼을 맞았는데, 아직도 저만큼이나 육체가 남아 있다고?’
뭔가 잘못되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레펜하르트가 다시 오러를 끌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번쩍.
시체의 눈이 뜨였다.
평온한 표정으로 시체가 눈동자를 굴려 레펜하르트를 응시했다.
입술이 열리며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끄럽구나.”
육체의 손상 따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세이어가 근엄한 음성을 흘렸다.
“신의 의지는 흔들림이 없거늘, 순간 인간의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아들이로구나.”
남은 오른손을 들어 세이어가 가슴을 쓸었다.
순식간에 육체가 복원되었다.
그냥 육체만 복원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걸치고 있던 옷가지는 물론, 흐트러져 있던 머리칼이나 몸에 묻은 자잘한 먼지마저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완벽한 모습의 세이어가 레펜하르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신과 여신, 나의 아름다운 피조물들에게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레펜하르트는 경악해 입을 쩍 벌렸다.
“무, 무슨…….”
지금의 세이어는 단순히 부상이 나은 정도가 아니었다. 제라드를 상대하고, 또 레펜하르트를 상대하며 소모되고 고갈되었던 마력, 그것조차 완벽히 복구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법칙을 무시하는 광경이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 같은 이적…….
그리고 저 모든 기적의 뒤에 ‘그것’이 있었다.
‘저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며 레펜하르트는 세이어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세이어가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서서히 흘러나오는 초월적인 기운을.
그것은 마력이 아니었다.
마력은 세계를 뒤틀고, 우회하고, 때로는 속이는 힘. 세계를 이용하는 힘이다.
하지만 저 힘은 그렇지 않았다.
세계를 뒤트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쓰는 힘. 세계의 법칙을 우회하거나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새로운 일부로 화하는 힘.
세계가 세계이도록 하는 권능이 세이어의 전신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저 권능을 알고 있었다.
전생의 성녀 엘린조차도 아주 미약하게나마 구사했던 바로 그 권능.
알 포트의 지상 대리자인 마켈린도 접근은 고사하고 존재조차 의심했던 바로 그 힘.
“……신성!”
진정한 신의 권능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시공 회귀자여.”
세이어가 부드럽게 입을 놀렸다.
“역시 그 육체는 그대의 족쇄일 뿐이로구나.”
☆ ☆ ☆
“타아아앗!”
기합을 터트리며 레펜하르트가 전신의 오러를 폭발시켰다. 황금의 오러를 최대 출력으로 끌어낸 뒤 남은 마력을 총동원해 양손에 깃들인다.
“플레임 스트레이트 캐논!”
불꽃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라이트닝 스트레이트 캐논!”
천둥의 주먹이 눈앞의 과녁에 꽂혔다.
콰콰콰쾅!
무시무시한 연타가 너무도 미약한 한 개인에게 집중되었다. 굉음이 대기를 뒤흔들며 가공할 폭격이 세이어의 주위를 가득 메운다.
“권마합신! 캘러미티 혼!”
마력과 오러를 융합해, 일곱 파문을 끌어낸 뒤 한 점에 응축해 모든 것을 멸할 권격으로 화한다. 필살의 일격, 거대한 황금의 빛무리가 상대의 모든 것을 뒤덮으며 또다시 하늘을 반으로 가른다.
세이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소용없도다.”
그 가공할 폭격, 심지어 캘러미티 혼에도 세이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든 폭격은 공간 고정 결계에 가로막혔으며 공간조차 일그러뜨리는 캘러미티 혼은 또 다른 10서클 마법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대이적 마법, 암천 이계.”
가벼운 시동어와 함께 세이어의 정면에 거대한 검은 구멍이 열린다. 세이어에게 쏟아진 캘러미티 혼을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이라도 되는 양 검은 구멍이 게걸스레 집어 삼켰다. 완전히 소멸한 캘러미티 혼을 보며 레펜하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저거…….’
술식도 다르고 명칭도 다르지만, 자신의 인피니티 게이트였다. 전생 때 테스론의 공격을 막아 냈던 그 수법 그대로 당한 셈이다.
“자, 그럼 이번에도 막을 수 있겠느냐?”
세이어가 손가락을 튀겼다. 온갖 강력한 9서클의 마법이 그의 주위에서 형성되어 레펜하르트에게 날아들었다. 레펜하르트가 기겁해 두 팔로 정면을 막았다.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
수십 줄기의 마법이 레펜하르트를 강타했다. 폭음과 함께 레펜하르트가 피를 흩뿌리며 뒤로 날려 갔다.
“크으윽!”
날려 간 레펜하르트가 유성이라도 된 것처럼 대지에 처박혀 폭발을 일궈 냈다. 흙먼지 속에서 애써 몸을 일으키며 레펜하르트는 입가의 피를 닦았다.
“빌어먹을…….”
아까와 달리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가 간단히 깨져 버렸다. 현재 세이어의 마력 패턴이 완전히 달라진 탓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이어의 마력은 완벽히 레펜하르트의 육체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레펜하르트도 패턴을 파악하고 반발 효과를 노려 대응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신성을 두른 세이어의 마법은 더 이상 레펜하르트와는 무관한 무엇인가가 되어 있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정말 신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초월적인 무엇인가가!
“빌어먹을!”
터진 욕설 위로 또다시 세이어의 마법이 날아들었다. 폭음과 함께 레펜하르트가 허공으로 날려 갔다. 수십 차례나 마법을 피하고 또 얻어맞으며 피를 뿌리고 또 뿌린다.
더 이상 레펜하르트의 공격은 세이어에게 통하지 않았다.
더 이상 레펜하르트는 세이어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도저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을까?
“크윽, 크으으…….”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세이어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대로 몰아붙여도 결과는 같겠지만…….”
갑자기 세이어가 자잘하게 날려 대던 마법을 거두었다. 말이 좋아 자잘이지, 하나하나가 세상에서는 궁극이라 불리는 마법뿐이다. 붉은 시야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힘겹게 의문을 띄웠다.
‘무슨 수작이지?’
세이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의 힘을 보여 주겠다 했으니 허언을 할 수는 없지.”
세이어의 주변 공간이 왜곡되며 세상을 뒤트는 기운이 흘러나온다. 레펜하르트가 순간 눈을 빛냈다.
‘저건?’
10서클 마법이었다.
“신의 발언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세이어는 레펜하르트에게, 신의 힘으로 죽여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을 지키려는 것이다.
“델 제스트 라 파라나드…….”
가공할 마력으로 세이어가 술식을 짜기 시작한다. 레펜하르트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저 멍청한 놈이 한번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10서클을 쓰려는 것이다.
‘기회다!’
레펜하르트는 긴장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인피니티 게이트와 룰 브레이커를 한 번씩 썼으니 이제 10서클을 구사할 기회는 한 번밖에 남지 않았다. 상대의 마법을 파악하고, 완벽하게 받아쳐야만 한다!
‘무슨 마법이냐?’
세이어조차도 감탄했던 레펜하르트의 마력 감지 능력이 모든 정신을 집중한다. 고도로 발달한 마력 감지력이 삽시간에 세이어가 어떤 술식을 쓰려는지 파악해 냈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가차없이 구겨졌다.
‘……이런…….’
세이어가 천천히 뇌까렸다.
“아까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짙은 절망이 레펜하르트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젠장! 저것도 내 오리지널이 아니었나?’
보통 동물을 잡는다는 것은 그 동물의 고기를 먹기 위해 도축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수는 없다. 도저히 그 큰 칼로 정교하게 닭의 모가지만을 잘라 낼 수는 없기에.
그러나, 소 잡는 칼로 닭을 죽일 수는 있는 것이다. 고기를 포기하고 닭을 박살 낼 각오로 소 잡는 칼을 휘두른다면.
10서클에는 그런 술식이 하나 있었다.
정교하게 한 점에 힘을 집약하는 방식이 아니라 광포하게 모든 파괴를 떨쳐 버리는 술식.
너무도 강력하고 너무도 제어가 안 되어 레펜하르트조차도 한 번 시도해 보고 두 번 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궁극의 파괴 마법.
시전되는 순간, 피하지도 막지도 살아남지도 못하는 절대적인 죽음.
‘……뉴클리어 버스트!’
전생의 레펜하르트조차도 준비에만 한 달이 걸렸던 마법, 그러나 세이어는 순식간에 술식을 끝내 버렸다. 미소 지으며 세이어가 손바닥을 밀어냈다.
“소멸할지어다. 어리석고 현명한 이여.”
나직한 목소리로 소멸의 이름을 뱉는다.
“아토믹 버스트.”
지상에 두 번째 태양이 떠올랐다.
3
빛이 세상을 덮었다.
소리가 세상을 메웠다.
드넓은 창공에 오로지 빛과 소리만 존재하게 되었다.
“맙소사!”
기겁하며 카를은 아라난 그라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야의 모든 것이 불길로 뒤덮여 있었다. 아니, 저걸 불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압도적인 빛과 압도적인 소리, 그야말로 신의 이름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권능 그 자체!
곧이어 거대한 폭풍이 아라난 그라드 전역을 쓸어 갔다.
흙먼지가 해일이 되어 도시를 덮친다. 드워프들이 피땀 흘려 세운 성벽과 건축물, 탑이 일제히 해일에 휩쓸려 모래성처럼 스러져 간다.
부서진다거나 붕괴된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마치 빗자루로 앞마당을 쓰는 것처럼, 천년을 버틸 견고한 도시가 사금파리처럼 쓸려 간다.
“으아아악!”
“크라라라!”
“사람 살려!”
“카아아악!”
도시 전역에서 비명과 절규가 터졌다. 더 이상 악마와 인간의 구별은 없었다. 저 압도적인 힘 앞에선 아무리 강력한 악마라도 한낱 부평초일 뿐이다.
수많은 악마들이 폭풍에 휘말려 사라졌다. 어느 곳에도 피신처 따윈 없었다. 건물 속으로 숨으려 해도, 그 건물 자체가 뿌리째 뽑혀 날아가는 판이다. 수많은 악마들이 허무하게 폭풍에 휩싸여 먼지 속에 파묻혔다.
그나마 본능뿐인 악마에 비해 인간들의 처지는 좀 나았다. 안타레스 공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병사들은 폭풍에 아무 대책 없이 휘말렸지만, 백국 시절부터 복무한 이들을 그 와중에도 빠르게 움직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마!”
“지하실! 지하실을 찾아라!”
제라드와 바나텔의 대결을 한번 겪어 본 이들은 그 와중에도 거의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았다. 안타레스 기사들의 지휘 아래 병사들이 건물 지하실로 몸을 던진다. 실베릭 나이츠가 폭풍을 가로막고 검풍을 날려 어떻게든 기세를 줄인다.
“막을 수는 없지만……!”
“기세를 약화시킬 수는 있어!”
“이 틈에 한 명이라도 더 피하시오!”
정신없이 검풍을 날리며 실베릭 나이츠, 질타렌 경은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도시 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두렵고 또 두려울 뿐이다. 아무리 절세의 마도구를 받았다 한들 그는 한낱 인간일 뿐이니까.
문득 질타렌이 옆을 돌아보았다.
“……러스 경!”
폭풍 속에서 러스가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오러 유저라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 걸까?
“정신 차리십시오! 아직 피하지 못한 병력이 남았습니다!”
러스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질타렌 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닌데?’
한낱 인간인 자신도 그럭저럭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데, 초인인 오러 유저가 왜 저 정도 충격을 받았단 말인가?
질타렌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순간 심각한 충격을 받은 것은 러스뿐만이 아니었다. 도시 반대편에 있던 타시드와 겨우 의식이 돌아온 제라드 역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낱 인간이 아니기에, 오러의 경지에 든 초인이기에 그들은 눈이 아니라 기감으로 세상을 본다. 그리고 그 기감이 알려 준 사실은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허공을 응시하며 타시드가 벌벌 떨며 뇌까렸다.
“이럴 수가…….”
창백한 얼굴로 러스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형님께서…….”
저 광폭한 신의 힘이 세상을 뒤덮는 순간, 기감을 지닌 오러 유저는 모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안타레스의 공왕, 권왕 레펜하르트.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피를 흘리며 제라드가 침통한 신음을 흘렸다.
“……제자 놈이 죽었다…….”
☆ ☆ ☆
세이어는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휘몰아치는 폭풍 사이로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기절한 두 여인과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숨을 쉬는 한 여인이 구체 속에 떠 있었다.
겨우 기절하지 않은 여인, 필레나가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중간부터는 그저 머리를 숙이고 최대한 마력장을 전개하며 살아남는 데만 전력을 다했다.
그나마 세이어가 필레나를 위해 일부 마력을 허해 따로 방어장을 쳐 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예전에 세 여인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을 것이다.
그만큼 엄청나고 또 어마어마한 파괴의 충돌이었다. 인간의 인식을 아득히 벗어나는.
“너희에게 미안하구나. 견디기 쉽지 않았을 터, 잘해 주었다.”
그 속에서 세렐라인과 렐시아를 지킨 필레네에게 세이어는 칭찬을 건넸다. 그리고 손가락을 튀겨 두 여인을 깨웠다.
“일어나 숨 쉬라.”
세렐라인과 렐시아가 정신을 차리고 헐떡거린다.
“하아, 하아…….”
“헉헉…….”
애써 정신을 차리며 세렐라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검은 폭풍과 힘의 기류 속이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기절 전에는 평범한 광야였던 곳이 지금은 숫제 이계로 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어찌 된 것입니까?”
대수롭잖다는 어조로 세이어가 대답했다.
“이단자를 벌했다.”
렐시아도 덜덜 떨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문득 그녀의 눈에 아라난 그라드의 광경이 비쳤다. 오크라트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 버린 죄악의 도시가.
“아아…….”
두려운 와중에서도 흥분이 밀려온다. 그녀가 원하는 광경이었다. 피와 살육, 그리고 처참하게 망가진 황폐한 도시.
하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위대한 분이시여, 그자는 어찌 되었나이까?”
질문하다 말고 렐시아는 흠칫 놀랐다. 노예 주제에 감히 위대한 분에게 질문을 던지다니?
“죄,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세이어는 탓하지 않았다.
“너는 잘해 주었다. 의문을 가질 자격이 있노라.”
힐끔 허공을 응시하며 세이어가 말을 이었다.
“그는 죽었다. 더 이상 세상에 없다.”
그것은 신의 말이었다. 혹시나 상대가 살아 있을지도, 눈을 속이고 피했을지도 모른다는 근심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말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 어떠한 술수를 써도 결코 신의 눈을 속이지는 못하니까.
렐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아아…….”
이젠 더 이상 여한이 없었다.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다행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수명이 다하기 전, 스테반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그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세렐라인은 아라난 그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크라트와 비견될 정도로 파괴된 저 도시는, 그래도 아직 많은 이가 살아 있었다. 절반 이상 죽어 간 오크라트에 비하면 상당한 수가 살아남았다.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