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장 부서진 언브레이커블
1
“크라타가!”
괴이한 음성을 외치며 악마가 삼지창을 찔러 왔다. 삼지창이 이글거리는 지옥의 푸른 불길을 실어 허공을 빠르게 갈랐다.
타앙!
그리고 황금빛 거검에 가로막혔다. 거검을 쥔 황금 갑주의 거인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악마의 좌측으로 파고들었다.
“타아앗!”
기합과 함께 악마의 창을 튕기며 바로 올려 베기! 선혈이 허공으로 흩뿌려지며 거대한 악마가 통째로 일도양단된다. 어지간한 기사단이라도 감당키 힘들 강력한 악마가 단 일격에 죽어 버린 것이다.
놀라운 무위를 보이며 황금의 거인, 카를이 등 뒤로 소리쳤다.
“서부 경비대에게 전달! 1대대는 자리를 지키고 3대대는 제 4피난소로 이동! 그쪽의 병력이 밀리니 원호하라고 전해라!”
테라스에 위치한 시종들이 겁먹은 얼굴로 열심히 깃발을 흔들었다. 몇 종류의 깃발을 동시에 흔들어 신호를 보내니 아라난 그라드의 병력 배치가 변하며 카를의 말대로 서부 경비대 3대대가 이동을 시작한다.
“크아아!”
또 다른 악마 두 마리가 피막의 날개를 펄럭이며 공습해 왔다. 카를이 아니라 참모진이 목표였다.
머릿속으로 수천의 병력도 다룰 수 있으나, 두 손으로는 한 명의 병사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군사라는 종자인 법. 다가온 악마들을 보며 참모들이 사색이 되었다.
“으히힉!”
“재, 재상님!”
그 순간 카를이 재빨리 허공에 빛의 수를 놓았다.
“불꽃, 일렁여 섬멸의 진이 되리! 플레임 크로스!”
참모진 주위의 바닥에서 불길이 솟구쳐 허공에 화염진을 형성했다. 떠오른 화염진이 회전하며 화기를 흩뿌려 악마들을 불살랐다.
비명과 함께 악마들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 카를이 땅을 박차며 크게 두 차례 참격을 날렸다.
“어림없다, 악마 놈들!”
악마들의 피륙이 파편이 되어 흩날린다. 선혈 가득한 안개 속에서 카를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외침을 이었다.
“계속 보고하라!”
떨리는 목소리로 참모들이 각자 입을 열었다.
“북부 지구, 80퍼센트 정도 대피 중입니다.”
“남부 지구, 대피 완료. 그러나 피난소 쪽으로 적습이 이어집니다. 안타레스 상비군 쪽이 밀리는 양상입니다.”
“동부 지구, 좋지 않습니다. 절반 정도 대피가 진행 중이나 전선이 계속 후퇴합니다.”
참모들의 보고 속에서도 카를은 계속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덤벼오는 악마들을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현재 그와 참모진이 위치한 곳은 왕궁 가이라크 최상부 중 하나인 진격의 탑 꼭대기의 테라스, 아라난 그라드의 정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도시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는 의미는 곧 도시 어디서도 저 탑이 보인다는 의미도 된다. 공습한 악마들에게 좋은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카를도 전투에 휘말렸다. 모든 병력을 아라난 그라드 전역에 보내 버렸기에 지금 이곳에 전투원이라곤 그밖에 없었다. 직접 모든 악마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카를은 그 와중에서도 여전히 상황 파악 및 병력 지휘를 유지하고 있었다.
“북부 경비대, 2대대만 남기고 남부로 이동시킨다.”
지시를 내리면서 동시에 날아드는 악마의 검격을 몸을 틀어 피해 낸다. 그리고 바로 반격, 악마의 허리를 크게 베어 두 동강 내며 외침을 잇는다.
“질웨거, 슈미트, 스텐브링커, 휘하 병력을 이끌고 남부로!”
멀리서 악마들이 불꽃을 토해 낸다. 지옥의 불길이 십수 개의 화구가 되어 카를과 참모진 전부를 뒤덮을 듯 날아든다.
왼손으로 원을 그리며 카를이 나직하게 외쳤다.
“가로막는 빙설의 방패, 프리즌 실드!”
엘드릴 기간투스에 내장된 마법 술식이 발동해 커다란 얼음 장벽을 일궈 냈다. 불꽃이 장벽에 부딪쳐 모조리 소멸되었다. 카를이 마저 소리쳤다.
“리마델, 하첼, 아웨인. 동부 지구로 향하라고 전해라!”
연신 이어지는 전투 중에도 교묘히 도시 전체의 전황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병력 운용을 계속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많은 각 기사며 부대장의 이름까지 전부 외우고 있다.
게다가, 전투 중에서 힐끔거리며 자신의 눈으로 전황을 파악하는 것마저 카를은 잊지 않았다.
“그렌 거리 쪽이 좋지 않군. 왜 저쪽은 보고가 없지?”
뜨끔한 참모진이 그제야 그렌 거리 쪽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남부 경비대 1대대가 맡고 있는 그 거리 쪽은 얼핏 잘 싸우고 있는 듯했지만 그 덕에 주위 악마들의 시선을 끌어 계속 협공당하는 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들이 먼저 파악하고 카를에게 보고했어야 할 일이다. 그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보니 미처 못 보았을 뿐.
전투를 이어 가며 카를이 호통을 쳤다.
“정신을 놓지 마라! 우리는 지금 이 도시의 머리다! 머리가 살아 있어 봤자 생각을 하지 않으면 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힐난을 들으면서도 참모진은 분해하기는커녕 마냥 감탄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자신들은 그저 뒤에 숨어서 전황을 지켜보며 보고를 할 뿐이다. 하지만 카를은 전투에 임하며, 눈앞의 악마들 움직임에 집중해 검술과 마법까지 구사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한편으론 고도의 병력 운용과 상황 파악을 행하고 있다!
‘세상에나…….’
‘어떻게 저런 게 되지?’
하여튼, 이대로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언제까지고 카를에게만 기댈 것인가? 그들 역시 전문 군사 교육을 받은 참모진이다. 충실히 카를을 보좌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재상님!”
명을 받들며 참모진은 재빨리 카를의 명령을 더욱 세밀화하여 병력 배치를 변화시켰다. 현재 악마들의 습격은 정해진 전술이나 목표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무작정 학살만을 원하기에, 시시각각 상황에 맞춰 병력 배치가 바뀌어야 감당할 수 있었다.
“적기와 청기를 올리게!”
참모의 명령에 따라 시종들이 바로 깃발을 흔든다. 현재 아라난 그라드 전역에 퍼져 유동적으로 방어에 임하고 있는 이들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안타레스 기사단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무위를 지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래는 다른 이들과 별 차이 없는 무위였는데 충성심을 인정받아 달리 이름을 받게 된 이들에게.
-실베릭 나이트. 리마델 경, 하첼 경, 아웨인 경은 지금 자리를 이탈해 서부 지구를 원조하라!
☆ ☆ ☆
신호가 떨어지는 그 순간, 아라난 그라드 시내에서도 그 신호를 바로 받았다.
“재상께서 추가 명령을 내리셨군.”
“확실히 이곳은 슬슬 감당이 되지.”
“그렇다면 움직입시다, 하첼 경!”
“알았네!”
세 줄기 은빛 신형이 거리를 가로지르며 빠르게 나아간다. 지붕을 건너뛰며 서부 지구에 도착한 이들의 눈에 비친 것은 끝없이 악마들을 상대하고 있는 아라난 그라드의 방어선.
대뜸 악마 무리의 중앙으로 뛰어들며 은빛 갑주의 기사가 대검을 크게 내리쳤다.
“울부짖어라! 레반트!”
검에 내장된 강력한 고위 섬광 마법이 거리를 가르며 뻗어 가 십여 개체의 악마들을 휩쓸었다. 피를 흩뿌리며 악마들이 일제히 육편이 되어 흩어졌다.
“케엑!”
“크라락!”
뒤이어 같은 은빛 갑주를 걸친 기사 둘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두꺼운 중갑을 걸쳤음에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른 스피드였다. 실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 단 세 명이서 수십의 악마들을 충분히 감당하며 전투를 벌인다.
방어선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오오! 저분들이 오셨다!”
“이제 살았어!”
바로 안타레스 기사단 중에서도 백국 시절부터 복무한, 그래서 특별히 그 충성심과 경력을 인정받아 레펜하르트로부터 실베릭 아머를 하사받은 이들, 실베릭 나이츠였다.
초인적인 힘을 발하며 은빛의 기사들이 가차 없이 악마들 사이를 유린해 갔다. 흉폭하고 잔인한 악마들이라지만, 이들은 더더욱 흉폭했고 더더욱 잔인했다.
피를 흩뿌리며 쉴 새 없이 검격을 날리던 중, 중년 기사 하첼 경이 문득 혀를 내둘렀다.
“정말 엄청난 마도구로군, 이것.”
동년배인 아웨인 경이 동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우리 팔자에 이런 걸 들고 싸우게 될 줄이야…….”
지금이야 일국의 수호 기사라며 목에 힘주고 다니지만 사실 초기 안타레스 기사단은 대부분 한물 간 기사거나 나이 든 용병 출신들이다. 경험은 많지만 전성기는 이미 지나간 이들, 예전 같으면 이런 악마 한 마리에도 쩔쩔매며 감당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러나 레펜하르트가 하사한 이 은빛 갑주의 마도구, 실베릭 아머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다.
한 걸음에 수십 미터를 내달릴 수 있고, 한 번 땅을 박차 십수 미터를 뛰어오를 수 있다. 검을 휘두르면 바위가 치즈처럼 썰리고 간단한 발동어만으로 고위 마법사나 가능한 강력한 마법들이 자기 손에 의해 쏟아진다.
한때 대륙 최강의 마검사 집단으로 유명했던 차탄의 제플린 나이츠, 그들이 쓰던 마법기조차도 이 실베릭 아머에 비하면 한 수 떨어질 정도였다.
실베릭 나이츠, 리마델 경이 감동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모두 폐하의 은덕이지요.”
안타레스 백국이 공국이 되며, 국가 규모가 커지며 안타레스 기사단의 규모도 더더욱 커졌다.
이미 안타레스는 백국 시절의 앞날이 불투명한 신흥 국가가 아니었다.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군사 강국이었다. 그런 만큼 예전과 달리 젊고 유능한 이들도 안타레스 기사단에 속하기 위해 속속 지원을 해 왔다.
이름 높은 검가에서 어릴 적부터 수행해 온 이들, 용병들 사이에서도 유달리 이름을 날리던 젊은 것들이 속속 밑으로 들어온다. 기존의 안타레스 기사 입장에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들은 자꾸 치고 올라오는데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저 경험과 경력뿐이었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이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들의 충성심에 걸맞은, 아니 더더욱 큰 보답을 내려 주었다.
이제 이들은 그저 살아온 세월만 많은 늙은 기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갈고닦은 전투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을 살리기에 충분한 힘도 얻었다!
“용맹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리라!”
“레펜하르트 폐하 만세!”
“안타레스를 위하여!”
기세등등하게 노기사들은 전장을 질주했다. 수많은 악마들 속에서도 그들의 투지는 결코 줄지 않았다. 서부 지구에서 싸우던 다른 안타레스 기사단, 그 젊은 기사들이 그들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단하시군…….”
“저런 악마를 상대로…….”
“아무리 마도구를 쓴다지만 저렇게 밀리지 않다니…….”
한때 실베릭 아머를 받은 저들을 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경력이 있고 충성심이 보장된 이들이라지만 저런 한물 간 무인들에게 그런 마도구는 너무 과하다고 여겼다. 차라리 그 힘을 젊고 강력한 이가 쓴다면 더더욱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악마들과 상대하는 실베릭 나이츠를 본 지금,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는 젊은 기사들은 없었다.
보기만 해도 두렵고 몸이 위축되는 가공할 악마들이었다. 젊은 혈기로 애써 검을 휘두르긴 하지만 지금도 허락만 되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저 노기사들은 그런 악마들을 상대로 조금의 공포도 보이지 않은 채 돌격하고 있었다.
단순히 저돌적으로 용맹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노련하게, 인간과는 전혀 다른 악마들의 공세를 충분히 버텨 내며 오히려 반격에 나서 적들을 참살한다. 자신들이 실베릭 아머를 받았다 해도 도저히 저렇게 싸울 자신은 없었다.
“흥! 네놈들 같은 악마들은!”
“젊을 적 자주 싸워 봤거든?”
실베릭 나이츠 대부분은 경험 많은 기사나 용병 출신. 젊은 기사들과 달리 던전 탐사 경험도 많았다. 인세에서는 평생에 한번 보기 힘든 악마들이라지만 던전에서는 갈 때마다 보이는 게 악마이기도 하다. 이들에겐 악마와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것이다.
뭐, 그 경험의 종류가 살짝 다르긴 하지만.
“그래 봤자 오러 유저가 앞에서 싸울 때 뒤에서 창질한 게 다잖소? 댁이나 나나 당시 졸자였을 텐데 저런 악마랑 정면으로 싸웠을 리가 있나?”
“어, 어쨌거나 저런 악마에게 익숙하기는 하다는 소리지. 애들 보는데 초 치긴가, 하첼 경?”
“그건 그렇지, 큭큭.”
긴박한 전투 중에 농을 즐기는 여유까지 보이며 실베릭 나이츠는 악마들을 몰아붙였다. 이들이 서부 지구에 원조되니 상황도 한결 나아졌다. 실베릭 나이츠의 분투에 힘입어 다른 병력도 시민들을 무사히 대피시키며 방어선을 굳건히 지켰다.
그러던 중이었다.
“크르르르…….”
“크아아아!”
검은 구멍이 또 다른 한 무리의 악마들을 토해 냈다.
아니, 사실 검은 구멍은 전투가 한창일 때도 계속 악마들을 토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튀어나온 악마들은 뭔가 달랐다.
몇 배나 거대한 덩치, 피막뿐 아니라 비늘이 덮인 각질의 날개, 우뚝 솟은 머리의 뿔에는 기이한 전격과 청염이 일렁인다. 숫자는 백 정도로 그리 많지 않지만, 워낙 하나같이 거체이다 보니 하늘이 꽉 차는 느낌마저 들었다.
전신에서 기이한 어둠의 기운을 머금은 채 서서히 하강하는 그 모습에 리마델 경의 안색이 굳었다.
“윽! 저건…….”
오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악마들은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놈이었다.
“다들 조심하라! 저놈들은 던전 수호자급이다!”
검은 구멍이 토해 낸 악마들은 저마다 급수가 달랐다. 시민들 입장에선 똑같이 흉폭하고 강력한 악마겠지만, 던전 탐사 경험이 많은 이들은 잘 알 수 있었다.
처음에 나온 것들은 비교적 약한 놈들, 던전으로 치면 초입부에 출몰하는 악마에 해당한다. 일개 기사라도 무장만 잘 갖추고 실력만 있다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는 마물들. 그런 놈들은 현재 아라난 그라드 도시 병력에 의해 대부분 정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난 후 나온 것들은 던전 중반부에 출몰하는 수준의 악마들이었다. 기사들도 병진을 짜고 손발을 맞춰야 간신히 해치울 수 있는 놈들, 하지만 실베릭 아머의 위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 나오는 놈들은 바로 던전의 수호자급, 오러 유저급의 전사라면 모를까 일반 기사들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진정한 대악마들이었다.
“크아아아!”
선두에 선 악마가 기괴한 포효를 터트렸다. 단지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정신력 약한 이는 오금이 저리고 손발이 마비된다. 도마뱀을 닮은 사족 보행의 신체에 인간의 그것 같은 상반신을 지닌 악마, 이름 높은 던전에서 가끔 수호자로 출몰하는 대악마 스트그렝이었다.
3미터가 넘는 거구의 악마가 세 은빛의 노기사들 앞에 섰다.
“으, 저거 예전에 사라토베 경이 싸우는 거 본 적 있는데…….”
리마델 경이 기가 질려 중얼거렸다. 기억에 있는 악마였다.
젊은 시절, 그라임 왕국에서 이름 높던 오러 유저 사라토베 경의 던전 탐사대에 용병으로 참전했을 때 봤던 그 수호자 악마. 솔직히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가끔 악몽이 되어 나오곤 하는데…….
아웨인 경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 사라토베 경은 어찌 싸우셨소?”
“워낙 간단히 조지셔서 잘 모르겠어. 그냥 번쩍번쩍 하더니 끝나던데.”
“그럼 우리도 그렇게 싸우면 되겠구먼?”
두 노기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오러 유저급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악마라고? 이 실베릭 아머라면 그들도 오러 유저급의 위력을 낼 수 있다!
“근데 재상님께서 말하길 실제로는 오러 유저보단 많이 모자란다고 하시지 않았나? 아무래도 마이너 버전이라 출력도 마력도 원본에 비해 꽤 떨어진다고…….”
초 치기 좋아하는 하첼 경이 또 초를 쳤다. 이 실베릭 아머를 하사하고 사용법을 전수하며, 카를 재상은 실베릭 아머의 한계 역시 명확히 말해 준 것이다. 자신의 무기를 믿는 것은 좋지만 과신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니까.
‘그래도 이 상황에서 꼭 저런 소릴 해야 하냐?’
아웨인과 리마델이 하첼 경에게 눈을 흘겼다. 하첼 경이 머쓱해하며 말꼬리를 돌렸다.
“……하지만 우리 셋이 모이면 그래도 오러 유저 하나 정도는 되겠지? 자! 가 봅시다!”
투지를 일깨우며 노기사들이 악마에게 돌진했다.
“더러운 악마 놈들!”
“감히 우리 도시를 노리다니!”
“지옥으로 돌아가게 해 주마!”
☆ ☆ ☆
현세의 악몽, 마지막 백팔 개체의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검은 구멍은 다시 닫혔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던전의 수호자급 뿐인 이 대악마들에 의해 아라난 그라드 방어선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크윽!”
“이런!”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악마의 일격에 은빛의 기사 두 명이 동시에 날려 간다. 낙법을 구사,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으며 질웨거 경이 주름진 노안을 찌푸렸다.
“제길, 생각처럼 안 되네.”
눈앞의 대악마들은 과연 이제까지의 상대와는 달랐다. 힘도 스피드도 월등, 실베릭 아머의 힘을 빌리고도 감당키 힘든 마물이었다.
스텐브링커 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 악마들을 그 양반들은 어찌 그리 쉽게도 잡았나 모르겠어.”
새삼 젊은 시절, 오러 유저들을 따라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던전의 수호자 악마들을 상대하며 찬란한 블레이드 오러를 뿌리던 오러 유저들. 일개 하급 기사나 용병이었던 자신들의 눈에 그토록 위대하게 비쳤던 무인들.
그들은 실로 간단히 저 가공할 악마들을 참살하곤 했다.
물론 그 오러 유저들도 나름대로 전력을 다해 수호자급 악마들을 상대했다. 수호자급 정도 되면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간식 먹듯이 대충 상대할 놈들은 아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몇 번씩 생사의 고비를 넘긴 적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땀을 흘릴지언정 피는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일개 용병의 눈엔 충분히 압도적으로, 쉽게도 상대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젠 우리도 될 줄 알았는데…….”
슈미트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신들도 실베릭 아머를 얻어 그 대열에 끼었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수호자급 악마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셋이서 덤벼도 겨우 저 수호자급 악마 하나와 평수를 이루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염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질웨거 경이 혀를 찼다.
“오러 유저급……인 것과 진짜 오러 유저는 차이가 크구먼.”
세간에는 오러 유저급이란 표현이 있다. 오러가 아닌 다른 힘으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능력을 보이는 마검사나 성기사, 혹은 저런 이들이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나 마물을 칭할 때 보통 쓰는 관용구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실제의 격차는 이리도 컸다. 오러 유저급이라 불리는 수호자급 악마를 진짜 오러 유저는 어렵지 않게 상대한다. 하지만 오러 유저급이라 불리는 자신들은 저 수호급 악마 하나를 감당키 어렵다. 관용구는 관용구일 뿐, 실질적인 무위를 정확히 측정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도망갈 순 없는 노릇이잖소?”
피 섞인 가래침을 뱉어 내며 슈미트 경이 너스레를 떨었다. 다른 두 사람도 노안에 각오 서린 미소를 띠었다.
“운이 좋아 이 나이에 이런 영광스러운 전투에 설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얼마 남지 않은 목숨 따윌 아낄 이유는 없지?”
투지를 불사르며 세 노기사는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검광을 뿜어내 화염을 가르고 냉기와 전격을 쏘아 내며 맹렬히 싸운다. 그들의 분투와 용맹, 거기에 운이 따라 주었다. 질웨거의 일격이 악마의 목을 깊숙이 베었다.
“크어억!”
“해치웠다!”
쾌재를 터트리는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섬뜩한 포효가 들려왔다.
“크아아아!”
“크라카!”
“카사타!”
여러 포효가 뒤섞여 굉음이 된다. 두려움 섞인 눈으로 세 기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빌어먹을…….”
“쓰벌, 많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구멍에서 나온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지?”
조금 전 간신히 하나를 해치웠던 수호자급 악마, 그것이 수십 개체 단위로 모여 그들을 노려보고 붉은 눈을 번뜩거리고 있었다.
2
“크어억!”
하첼 경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악마의 머리를 내리치는 그 순간, 방전된 전격이 터져 그를 두들긴 것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직격을 피했지만 실린 힘이 너무 커 갑옷 속의 육체에도 막중한 충격이 와 닿았다.
고통 속에서 막 고개를 드는 그의 눈앞에 시뻘건 칼날이 비쳤다. 악마의 칼날이 하첼 경의 몸통을 둘로 가르려 포탄처럼 쏘아지고 있었다.
‘죽었다!’
죽음을 예감하며 하첼 경이 포기한 그 순간이었다.
“타앗!”
강렬한 기합과 함께 한 줄기 검광이 악마의 칼날 옆면을 두들겼다. 검격이 빗나가며 악마의 공세가 바닥을 내리찍었다.
“크으윽?”
황당해하며 악마가 옆을 보았다. 잘생긴 청년 기사 하나가 검을 거두며 자세를 바로잡고 있었다. 딱히 마력이 느껴지지도 오러가 느껴지지도 않는 기사였다. 화려하긴 하지만 평범한 갑옷을 걸쳤을 뿐이다.
그런데 방금의 그 일격은 악마의 공세도 빗나가게 할 힘이 있었다.
하첼 경이 화색이 되어 소리쳤다.
“다, 단장님!”
안타레스 기사단 단장, 아스레일 경이었다. 재차 악마를 향해 달려들며 아스레일이 외쳤다.
“어서 몸을 추스르고 일어서시오, 하첼 경!”
외침과 동시에 아스레일이 악마의 품속으로 달려들었다. 악마도 대검을 휘두르며 반격했다.
거대한 쇳덩이가 사방 수십 미터를 광풍처럼 휩쓸고 그 뒤로 불길이 날아올라 대기를 달구었다. 그 속에서 아스레일은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한 치 정도만을 남긴 채 간신히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틈을 보아 다시 찌르기 일격!
“타앗!”
악마의 팔에 핏물이 튀었다. 그러나 상처가 깊진 않았다. 평범한 인간일 뿐인 아스레일의 검력으로는 그 정도가 한계인 것이다.
아스레일이 재차 소리쳤다.
“하첼 경!”
“아, 알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하첼이 재빨리 일어섰다. 후퇴한 아스레일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빠르게 말했다.
“난 힘없는 인간일 뿐. 기회를 잡아 용케 일격을 먹였지만 저런 공격에는 휩쓸리기만 해도 죽을 겁니다. 실베릭 나이츠가 막아 주어야 합니다.”
아스레일은 하첼 경과 달리 평범한 플레이트 아머만을 착용한 차림이었다. 하첼 경처럼 실베릭 아머를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레스 기사단의 단장인 그가 실베릭 아머를 쓰지 않는 것은, 레펜하르트나 카를이 그의 충성심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는 가장 처음 안타레스 기사단에 가입했고 최초로 레펜하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이제껏 한 번도 그 충성심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도 카를도 제일 먼저 그에게 실베릭 아머를 하사하려 했다.
-이 갑옷이라면 아스레일 경의 무위도 몇 배로 증가할 것이오.
그때 아스레일은 레펜하르트의 제의를 거절했다.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으니, 이 갑옷을 쓰고도 과연 오러의 경지를 엿볼 수 있겠습니까?
아쉽게도 레펜하르트와 카를은 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마검사, 마법기를 쓰는 이는 오러 유저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이 시대의 상식이자 진실이기도 하다. 마법기를 다루는 감각은 오러 유저의 그것과 상극이라 한번 그 감각을 익혀 버리면 그만큼 오러로 가는 길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카를은 이미 무인의 길을 포기했기에 부담 없이 엘드릴 기간투스를 쓸 수 있었다. 다른 실베릭 나이츠도 이미 전성기가 지난, 게다가 그리 재능이 출중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이들이라 딱히 실베릭 아머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아스레일은 그들과 달리 아직 젊고, 또 재능도 출중하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아직 꿈을 포기하지 않았지요. 감히 폐하의 성은을 거부하려는 것은 아니나 저는 조금 더 꿈을 꾸고 싶습니다.
레펜하르트도 카를도 아스레일의 의지를 존중했다. 그리고 이후, 그는 안타레스 기사단이자 실베릭 나이츠의 총단장이면서도 실베릭 아머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으면 그냥 받을 걸 그랬지?’
입맛을 다시며 아스레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아라난 그라드에 필요한 것은 미래의 오러 유저가 아니라 눈앞의 강자이니까!
“크아아!”
상처 입은 분노로 악마가 더더욱 거칠게 날뛴다. 돌진하며 악마가 불길을 뿜어내고 대검을 휘둘러 댄다. 아스레일과 하첼 경이 잽싸게 옆으로 뛰어 공세를 피했다.
실베릭 아머의 힘을 쓰는 하첼 경은 단숨에 10여 미터 넘게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반면 아스레일은 기껏해야 2, 3미터 정도 옆에 뛴 것이 전부, 그러나 정작 공격을 받은 것은 하첼 경이었다.
“크윽!”
착지하는 시점을 노려 악마의 불길이 하첼 경을 뒤덮는다. 순간 냉기 마법으로 공격을 완화했음에도 막대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노기사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나뒹굴었다.
반면, 아스레일은 아슬아슬하게 대검을 스쳐 지나가며 오히려 반격에 나서고 있다.
“타앗!”
스친다기보다는 오히려 통과하는 느낌으로, 아스레일은 거대한 악마의 품속에 파고들며 세 번의 찌르기를 넣었다. 검광이 번뜩이며 악마의 가슴팍에 혈화가 피었다.
악마가 비명을 터트렸다.
“크케켁!”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고통이 심했다. 그저 평범한 찌르기일 뿐인데 시기가 워낙 적절하고 급소인지라 순간 전신이 마비되며 통각이 자극된 것이다. 흥분해 악마가 허우적대며 대검을 내리쳤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피하며 아스레일은 이를 악물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일개 인간의 힘으로 저런 공격을 계속 받아 낼 순 없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오러에 각성하거나, 실베릭 나이츠처럼 마법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기회를 잡는다면 전신의 힘을 집중해 찰나간의 위력을 낼 수는 있다!
“타아앗!”
아스레일의 검광이 번뜩였다. 일개 인간의 힘으로는 사실 꿰뚫는 것이 불가능한 악마의 육체. 그러나 아스레일의 검은 근육의 결을 타고 교묘히 틈새를 노려 악마의 심장을 노렸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게.
적과는 가깝게, 나와는 멀게.
거리를 조절하고 흐름을 타고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해 약점을 유도하며 힘의 기세 사이를 노려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
파아앗!
핏물이 터져 나오며 악마의 심장이 뻥 뚫렸다. 비명과 함께 악마의 거구가 천천히 침몰해 갔다.
“끄어어어…….”
숨을 헐떡이며 아스레일은 검을 뽑았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호흡이 극도로 거칠어 말조차 하기 힘들었다.
‘진짜 운이 좋았다. 자칫했으면 죽는 쪽은 나였을 거야…….’
새삼 다시 한 번 후회가 된다.
‘그냥 실베릭 아머 받고 안전하게 싸울 걸 그랬나?’
그러나 아스레일은 이내 후회를 떨쳤다.
이미 결심한 일이다. 이미 정한 길이다. 일단 한번 길을 정했으면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걷는 것이 무인, 그리고 기사의 도리일 터다.
고개를 저으며 아스레일은 하첼과 다른 실베릭 나이츠를 바라보았다.
“다들 무사합니까? 아직 악마 놈들은 많이 남아있습니다.”
간신히 이 주변을 정리했지만, 여전히 수호자급 악마는 아라난 그라드 전역에 퍼져 있으며 이쪽으로 날아오는 놈들도 많이 있었다. 바로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후우우…….”
침착하게 숨을 고르는 아스레일을 보며 은빛 갑주의 노기사들이 감탄의 시선을 보냈다.
“허어…….”
입으로는 힘없는 인간이라고 했지만, 그리고 실제로 힘이나 방어력, 스피드는 실베릭 나이츠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지만 현재 그들도 감당 못한 악마를 처리한 것은 아스레일이었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움직여 필요한 만큼의 위력을 내어 필요한 부분을 찌른다. 저것이야말로 진정 무술이고 검술일 터였다. 그저 늘어난 힘과 스피드만으로 무작정 덤벼드는 자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지다.
“역시…….”
하첼 경이 경의를 담아 중얼거렸다.
“저런 양반이나 오러 유저가 될 수 있는 거겠지?”
☆ ☆ ☆
아라난 그라드 병력의 고군분투로 시민들 대다수는 피난을 끝마쳤다. 도시 각지에 위치한 피난소 안에서 그들은 공포에 떨며 이 환란이 지나가기만을 기원하고 또 기원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이 대피를 끝냈다고 해서 전투가 끝나진 않았다.
악마들은 전략, 전술적인 목적으로 시민들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살육의 본능으로 눈앞의 이성체를 모조리 죽이려 들 뿐.
시민들이 피난처로 몸을 피했다고 악마들이 후퇴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더더욱 독이 올라 날뛴다.
“크아아아!”
악마의 포효 속에서 오크 전사 하나가 허리가 두 동강 나 죽음을 맞이했다. 혈풍 속에서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며 엘프와 드워프, 인간 병사가 합심해 달려든다.
“저 마물이 타락트를!”
“이 개자식!”
“죽여 버리겠다!”
여러 종족이 혼성으로 이루어진 아라난 그라드 서부 경비대, 그 속에서 이미 인간과 엘프, 드워프, 오크는 종족을 초월한 전우애로 묶여 있었다. 소중한 전우의 죽음에 분노하며 원통한 검을 휘두른다.
그러나 눈앞의 악마들은 너무도 강했다.
“크랄타!”
불길의 대검이 병력을 휩쓸며 또다시 아까운 목숨이 피 떡이 되어 날아갔다. 그러나 서부 경비대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 모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자신들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소중한 아라난 그라드의 시민, 그들의 부모·형제·자매가 대신 피를 흘리리란 걸.
“어림없다, 이 악마들!”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비슷한 전투가 도시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출몰한 악마들은 이성이 없다. 살육의 본능만 남아 최후의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전투를 멈추지 않는다.
아직 초중반에 출몰했던 악마들도 많이 남아 있고 거기에 하나하나가 던전 수호자급인 백팔의 악마들이 가세했다. 실베릭 나이츠가 분투했고 각 종족의 강력한 전사들이 용맹하게 맞서 싸웠지만 저 악마들의 절반도 채 죽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남부 지구, 칼켄가街.
오크 대족장의 이름을 딴 이 거리에서 한 중년 기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피에 물든 은빛 팔뚝이 허공을 갈랐다. 악마의 일격이 실베릭 아머를 부수고 오른팔을 잘라 버린 것이다.
아득한 통증 속에서 실베릭 나이츠, 사셀 경은 어깻죽지를 감싸며 비참하게 바닥을 굴렀다. 통증이 머리를 통째로 태우는 듯했다.
“아악! 아으윽!”
아무리 경험이 많다지만 그 경험 속에 팔이 잘리는 경우는 없었다. 있었다면 애초에 두 팔 다 달려 있지도 않았겠지.
처음 경험하는 격통에 사셀 경의 이성이 마비됐다. 그리고 그 위로 날아드는 거대한 악마의 삼지창.
“카아!”
채 죽음을 각오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사셀 경이 그 광경을 보고 있을 때였다.
“가라! 다카르!”
구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청록색의 섬광이 허공을 가르며 눈앞의 대악마에게 쇄도했다.
단 일격에 악마의 상체와 하체가 둘로 분리되었다. 저 강력한 수호자급 악마가 허망할 정도로 쉽게 죽음을 맞이하며 비명조차 없이 시체로 화한다.
사셀 경이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오크 사내가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청록색의 섬광이 다시 그의 굳건한 손아귀로 돌아갔다. 거대한 참마도가 된 청록색 섬광을 붙잡고, 건장한 녹색 피부의 오크가 포효를 터트렸다.
“이 악마 새끼들아! 덤벼! 나랑 놀자!”
오크 전사의 포효가 아라난 그라드의 하늘 위로 떨쳐 울렸다. 사셀 경이 흥분해 소리쳤다.
“타시드 경!”
힘겨워하던 다른 병사들의 눈에도 화색이 돌았다.
“카루가 타시드!”
“오러 유저 타시드 경이다!”
“오러 유저가 왔어!”
떨어지던 사기가 급격히 올랐다. 권왕 레펜하르트와 함께 아라난 그라드를 비웠던 초인 중 하나, 오러 능력자 타시드가 지금 돌아온 것이다.
그 의미는…….
“폐하께서 돌아오셨다!”
☆ ☆ ☆
타시드가 발한 전사의 포효에 자잘한 악마들이 겁에 질려 물러선다. 반면 수호자급 악마들은 오히려 눈을 번뜩거렸다.
이성이 날아간 그들의 감각에 보다 큰 생기, 보다 큰 기운이 나타났다. 살육원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엄청난 기운이다.
“크라라라!”
굉음을 울리며 수호자급 악마들이 타시드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지붕에서 뛰어내리며 타시드가 병사들에게 외쳤다.
“이놈들은 내가 맡을 테니 남은 거 부탁하오!”
전사의 포효로 자연스럽게 악마들 사이에서 수호자급만 빼낸 것이다.
한결 나아진 병사들이 사기를 끌어 올리고 남은 악마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몸을 추스른 실베릭 나이츠들도 다시 검을 쥐었다.
“아무리 타시드 경이라지만…….”
“그래도 다섯 놈이나 되는데.”
“우리도 합세해야겠지!”
다섯 마리의 수호자급 악마들이 각자 전격의 창과 불길의 검을 휘두르며 타시드를 노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타시드가 오러 유저라지만 저쪽은 오러 유저급이라 불리는 악마가 다섯, 홀로 상대하긴 힘들 터였다.
그래서 그들도 가세하려 했는데…….
“에라! 이놈들! 뭔 짓 할지 뻔히 보인다!”
호통을 치며 타시드가 달리다말고 갑자기 몸을 돌렸다.
적 앞에서 등을 돌리다니? 하지만 이미 악마는 대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뻔히 허점 많은 회전 동작을 보면서도 휘두른 기세를 이기지 못해 악마가 그대로 검격을 내리쳤다. 덕분에 그 회전 동작이 바로 회피 동작이 되었다.
“으랏차!”
등을 돌려 회피하며 그대로 원심력을 실어 타시드는 크게 검을 내리그었다. 뻔히 보이는 큰 동작이지만 자세가 흐트러진 그 순간 공격이 들어오니 피할 수가 없다. 두 눈 뻔히 뜬 채 악마가 일도양단되었다.
“크어억!”
너무도 쉽게 수호자급 악마 하나를 참살하며 타시드는 계속 내달렸다. 다른 악마들이 분노로 흥분하며 마주 공세를 취한다. 불길과 전격이 어지럽게 허공을 난무했다. 그러나 타시드는 간단히도 그 모든 공격을 피했다.
“러스 녀석 허공검도 피해 봤는데, 네놈들 공격 따위에 맞겠냐?”
호기롭게 외치며 타시드는 연신 거력을 실어 참마도 다카르를 휘둘렀다.
머리 위로 검을 들어 길게 내려치기, 그리고 아예 몸을 두 번이나 돌리며 원심력을 실어 허리 베기, 전신을 던져 회전하며 날리는 사선 베기 등.
일견 어이없을 정도로 큰 동작들이었다. 보고 있던 실베릭 나이츠가 기가 막힐 정도로.
“뭐야, 저거…….”
하나하나가 허점이 크다 못해 병신 짓거리로 보일 정도로 거창한 동작뿐이었다. 아무리 오크 전사가 호쾌한 걸 좋아한다지만 저건 호쾌함이 너무 과했다.
저렇게 크게 휘두르면 당연히 카운터의 밥이 될 뿐이다. 설사 오러 유저급이 아니더라도, 그냥 어느 정도 무술에 소양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저 공격에 카운터를 먹일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게 먹힌다…….
“크아악!”
“커억!”
“아아악!”
타시드는 저 거창한 동작으로 수호자급 악마를 간단히 참살하고 있었다.
그 동작을 발하는 타이밍 덕분이었다. 정확하게 악마의 움직임에 맞춰, 상대가 공격하는 그 찰나의 순간 공격에 들어서니 저 허점 많은 동작이 곧 공방 일체의 비기가 되어 버린다.
악마의 짧은 연속 찌르기, 그리고 공격을 거두며 불길을 뿜기 위해 입을 벌리는 그 타이밍에 몸을 크게 회전시키니 저 거창한 동작에도 반격을 할 수가 없다. 스스로의 자세가 무너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원심력을 실은 큰 공격은 적은 힘으로도 충분히 가공할 위력을 참마도에 실어 준다.
“타앗! 허업! 으랏차!”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딱히 체력 소모도 없이 타시드는 쉽게 남은 수호자급 악마를 박살 냈다. 그야말로 일격 필살의 위용이었다. 실베릭 나이츠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마치 악마들이 알아서 원하는 대로 공격을 해 주는 것 같잖아?”
“어떻게 적이 공격하기도 전에 회피를 먼저 하는 거지?”
“오러 유저가 이해 못 할 경지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타시드의 오러 스킬, 전투 예지가 빛을 발한 것이다.
전투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예지하는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권능, 인간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이 불길한 권능을 타시드는 마음껏 구사하면서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모두 오크의 순결한 뇌 구조 덕이었다.
“으랏차! 다 조졌다!”
마지막 수호자급 악마의 모가지를 뎅겅 자른 뒤 타시드는 씨익 웃으며 참마도를 거뒀다. 단숨에 다섯 마리를 연달아 베어 넘겼으면서 숨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실로 경제적으로 움직였으니 지칠 일도 없었다.
서부 경비대 소속 오크 전사들이 환호하며 소리쳤다.
“오오!”
“타시드! 타시드!”
“카루가 타시드!
알고 보면 정교하고 교묘한 공방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타시드의 공세는 오크답게 단순 무식하고 호쾌할 뿐이다. 실로 오크 전사들의 모범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그런 타시드를 보며 오크 전사들이 경외와 환호를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족들에게 손을 흔들며 타시드가 외쳤다.
“자, 그럼 나 딴 데 간다! 남은 건 댁들도 처리할 수 있지?”
아라난 그라드 병력이 밀리는 것은 수호자급 악마의 존재 때문이다. 그것들만 없으면 남은 악마들은 실베릭 나이츠와 자체 방어 병력으로도 어떻게든 감당이 된다. 그래서 현재 타시드뿐 아니라 러스와 시리스도 도시 곳곳을 누비며 수호자급 악마만을 처리한 뒤 계속 장소를 이동하고 있었다.
타시드의 외침에 오크 전사들도 포효를 터트렸다.
“물론이오!”
“맡겨 주십쇼!”
막 땅을 박차려는 타시드를 향해 실베릭 나이츠 하나가 질문했다.
“잠깐, 타시드 경!”
“응? 왜?”
“폐하께선? 폐하께선 무사하십니까?”
충성스러운 기사답게 레펜하르트의 안위부터 물은 것이다. 타시드가 멀뚱히 대답했다.
“아, 폐하는 원인 조지러 가셨는데?”
3
세이어는 혀를 찼다.
“쯧쯧, 부수기 아까워서 굳이 지옥문을 열었거늘…….”
그의 시야에 비친 죄악의 도시, 아라난 그라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기껏 수천의 악마들을 불러냈는데 의외로 너무 잘 버티지 않는가? 이래서야 원하는 공포를 저들에게 안겨 줄 수가 없다.
하지만 세이어는 딱히 실망한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생각보다 저들이 잘 버티는구나.”
그저 무심히 중얼거릴 뿐.
저들이 아무리 용맹 분투해 봐야 그에겐 의미가 없었다. 세이어가 굳이 대이적 마법, ‘나이트메어 오브 더 월드’를 구사한 것은 도시가 아깝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도시를 아까워하는 감각은, 인간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것은 숲을 아까워하는 정원지기의 그것에 오히려 닮아 있었다.
제법 멋지고 아름답게 자란 나무가 있는데, 그것에 벌레가 끼었다. 나무를 버리기 아까워 연기를 피워 벌레를 몰아내려 했다. 그런데 그 연기 속에서도 나무에 사는 벌레들이 죽지 않고 용케 버티고 있다.
“연기를 피워도 벌레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아쉽지만 통째로 불사를 수밖에.”
그것이 숲을 살리는 길이다.
아무리 고군분투해 봐야 저기다 미티어 폴이라도 한 방 떨어트리면 상황 종료다. 저들의 용맹, 분투, 치열한 정신력 모두가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세이어는 여전히 느긋하게 다른 쪽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말 죽이기엔 아까운 인간이로다. 그것마저 버텨 냈느냐?”
너덜너덜해진 오른팔을 축 늘어뜨린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피투성이의 노인에게로.
놀랍게도 제라드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비록 만신창이일지언정 두 발로 아직 대지를 딛고 있었다. 어찌 보면 바나텔의 아포칼립스 스팅거를 상대했을 때보다도 더 양호해 보일 정도였다.
힘겹게 웃으며 제라드가 대꾸했다.
“아아, 마법이라서 간신히 살았지. 네놈 공격이 오러 쪽이었으면 무리였을 게다.”
세이어의 마법, 임페리얼 버스트 펜타곤의 위력은 바나텔의 아포칼립스 스팅거보다도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마법은 그 특성상 오러만큼 한 점에 힘이 집약되지는 않는다.
바나텔의 아포칼립스 스팅거나 제라드의 캘러미티 혼은 날카로운 한 자루 창이다. 반면 세이어의 마법은 성벽도 부술 어마어마한 공성추, 위력도 범위도 감히 비교가 안 되지만 그만큼 한 점에 집중되는 힘은 살짝 모자란 감이 있다. 아슬아슬하게 캘러미티 혼의 관통력이 세이어의 마법을 넘어서 겨우 직격을 피해 낸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제라드 역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지만.
한 자루 창으로 날아드는 공성추를 꿰뚫었다. 드높은 무술의 경지로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실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위업, 하지만 공성추를 꿰뚫을 정도면 창 또한 무사할 리가 없지 않은가?
뒤틀리고 뼈가 튀어나온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며 제라드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완전히 박살 났군.’
이 오른팔을 다시 쓰려면 어지간한 권능으로는 무리였다. 최소 교황급 성직자에게 수십 일에 걸쳐 치유를 받아야 겨우 회복할 수 있으리라.
세이어가 다시금 오른손을 들며 태연하게 말했다.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대항하겠느냐?”
또다시 강대한 마력이 오른손에 맺혔다. 여전히 세이어에겐 방금 전 같은 강대한 마법을 몇 발, 몇십 발이라도 날릴 여력이 있는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인 것은 변함이 없다.
제라드는 씨익 웃었다.
“아직 왼팔 남았다.”
왼 주먹을 들어 보이는 노인의 표정에 절망 따윈 비치지 않았다. 진심으로 대항할 생각이다. 세이어가 감탄을 흘렸다.
“정말 불굴의 이름이 아깝지 않구나!”
오른손에 맺힌 강대한 마력이 꿈틀대며 빛을 발한다. 그러나 세이어는 바로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잔잔한 눈으로 피투성이가 된 제라드를 바라볼 뿐.
“정말 죽이기엔 아깝군.”
주저하는 세이어의 태도에 제라드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손을 쓸 거면 빨리 쓰든가? 흥미 없어졌다더니 거참 말도 많네.”
세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흥미가 없다 하여 어찌 보석이 아깝지 않으랴.”
상대가 노예 종족이었다면 세이어는 조금도 주저치 않고 상대의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허나 눈앞의 노인, 권황 제라드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한 분야에서 극에 달한, 빛나는 보석 같은 인간이었다.
“그대 같은 인간의 존재는 곧 내 기쁨이다. 어찌 주저치 않을 수 있겠느냐?”
세이어는 알고 있었다. 제라드가 딱히 이종족에 대한 무슨 사상이 있어 자신과 대적하는 것이 아님을.
까놓고 말해 제라드는 그저 비싼 월급 받아 가며 제자 놈 왕국에 얹혀 있을 뿐이다. 이종족이 노예이건 아니건 그리 신경 쓰지도 않는다.
-안타레스 공국에선 이종족이 노예가 아니라고? 그런가 보지, 뭐.
안타레스 공국의 이종족들에겐 분명 친근하게 대하지만 그건 그냥 공국의 분위기에 맞추는 것뿐이지 노예 해방 사상에 동조해서는 아니다. 다른 나라의 이종족들을 만나면 도로 노예 취급을 할 것이며, 그걸 별로 어색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오직 무술 일변도의 삶을 살아가는 제라드에게 사회의 통념 따위는 그리 신경 쓸 가치가 없는 것이다.
즉, 세이어 입장에서는 제라드를 딱히 죽일 이유가 없다.
“승산이 없음은 스스로가 더 잘 알 터, 어찌하여 무릎 꿇지 않는가?”
“승산이 없으니까, 싸우는 게 재밌는 것 아니겠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제라드가 단호히 대꾸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세이어가 고개를 까닥였다.
“아쉽구나.”
세이어가 오른손을 폈다. 아깝긴 하지만 상대는 꺾일 자가 아니었다.
이제, 원대로 죽음을 내려 줄 차례다.
파아아앗!
눈부신 폭염이 청색 빛을 발하며 마법진 형태로 맺혔다.
“타아아앗!”
왼팔을 허리춤으로 가져가며 제라드도 다시금 투기를 끌어 올렸다. 황금빛 오러가 폭풍처럼 피어올라 피에 물든 육체를 감싼다. 그야 말로 남은 모든 여력, 생명마저 불사르는 최후의 힘이 왼 주먹으로 응집된다.
“캘러미티 혼!”
강렬한 오러의 파동에 대지가 흔들렸다. 머리칼을 휘날리며 세이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일격에 모든 것을 거는가? 너무 단순하지 않느냐?”
제라드가 껄껄 웃었다.
“자고로 남자라면! 한 방인 법이다!”
“하긴 애초에 그것밖에 없는 무문이긴 하지.”
쓴웃음을 짓는 세이어를 향해 제라드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우렁찬 함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번에야말로 꿰뚫어 주마!”
흔들림 없이 쇄도해 오는 금빛 유성, 그걸 보며 세이어가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어리석구나.”
이번에야말로 꿰뚫겠다고? 이번에도 여전히 ‘공성추’를 날릴 거라 생각하는가?
마법의 세계는 깊고 광활하다. ‘공성추’뿐 아니라 부러지지 않는 한 자루 ‘거창’ 역시 얼마든지 존재한다!
세이어가 손가락을 튀겼다. 청색의 폭염이 한 점에 집중되며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아케인 퍼니시먼트 맥시멈.”
임페리얼 버스트 펜타곤과 달리 9서클 최강의 관통력을 지닌 섬멸 주문이다.
“그 어리석음이 그대가 죽는 이유다.”
눈부신 청색의 섬광이 제라드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허업!”
갑자기 제라드가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어엉?”
놀란 세이어가 눈을 부릅떴다. 몸을 비튼 제라드가 순식간에 섬광을 흘리며 호선을 그려 세이어에게 파고들었다.
“안 피한다곤 안 했거든?”
어느새 주름진 노안이 차가운 미소를 띠고 코앞까지 도달한다. 황금빛 주먹이 여덟 파동을 실어 일격에 쏟아졌다.
“캘러미티 혼, 데스 카운터!”
세이어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카운터로 들어온 캘러미티 혼은 이제까지와는 파괴력이 전혀 달랐다. 제라드의 모든 공격을 튕겨 내던 포스 필드가 종잇장처럼 찢기고 가공할 오러가 부동명왕, 공간 고정 결계마저 부수며 날아든다.
“이, 이런!”
마법을 날린 직후라 현재 세이어는 추가로 마력 방어를 하지 않았다. 상대가 저렇게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한 것이다. 여태껏 보인 성깔이 있고 한 말이 있는데 설마 이제 와서 피할 줄이야?
“으아아아아!”
거친 외침을 터트리며 세이어는 단숨에 전신의 모든 마력을 개방했다. 너무 다급해 마력을 언령화할 시간도, 속성을 부여해 정제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있는 대로 전부 방출하며 전력으로 몸을 보호한다!
콰아아앙!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또다시 거체가 뒤로 튕겨 나갔다.
제라드였다.
“크윽!”
세이어의 끝없는 마력은, 캘러미티 혼의 카운터마저도 버텨 낸 것이다.
☆ ☆ ☆
“허억, 허억.”
세이어는 숨을 헐떡였다. 전신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시고 있었다.
순식간에 전신 모든 마력을 개방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치다. 강철 같은 강도의 마법장을 구현할 마력량이라도, 그냥 언령 없이 개방하면 종잇장만 못하게 되어 버린다.
그걸 강제로 끌어내 몸을 보호했으니 끝이 없을 듯하던 세이어의 마력도 어마어마하게 소모된 후였다.
자신의 마력을 점검하며 세이어가 인상을 썼다.
‘절반 정도인가?’
이 육체의 잠재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부활한 이후, 이 육체에 걸맞은 마력을 쌓기 위해 세이어가 먹어 치운 금단의 아티팩트만도 세 자릿수에 달한다. 지고의 권능을 지닌 그조차도 이 육체의 마력 허용량을 채우는 데 근 한 달 가까이 걸렸을 정도다.
그 방대한 마력이 방금의 일격을 막기 위해 절반 가까이 날아가 버렸다. 그만큼 다급하고, 또 어마어마한 위력의 일격이었다.
“하하…….”
어이가 없어 헛웃음마저 흘리며 세이어는 고개를 돌렸다. 입으로는 꿰뚫어 준다느니, 남자는 한 방이라느니 떠들더니 막판에 이런 치사한 수를 써?
분노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잘도 속였구나, 이놈!”
이제는 두 발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처 입은 거구의 노인이 비실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신 타령하면서 고상 떨더니 결국 성깔 나오는구먼.”
세이어의 어깨 위로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감히 신을 능멸하다니!”
살기를 받으며 제라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데스 카운터가 완벽하게 통하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 세이어를 해하지는 못한 것이다.
‘진짜 어마어마한 놈일세.’
최강기, 캘러미티 혼을 데스 카운터에 실어 최고의 위력으로 선보였다. 솔직히 제라드도 두 번 하라고 하면 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들어간 기술이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전혀 상처 입지 않았다. 마력은 상당히 소진되었지만 여전히 무지막지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뭐, 그래도 바닷물 많이 줄었구먼.”
기감으로 느껴지는 세이어의 기운을 감지해 보니, 똑같이 망망대해이긴 한데 수위가 대폭 낮아진 게 느껴진다.
“크큭, 이 정도면 헛짓거리 한 건 아니지.”
“이놈…….”
살기를 흩뿌리며 세이어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제라드에게 다가가며 인류의 신이 진노를 담아 읊조린다.
“죽이기 아까워 계속 사정을 봐주었다. 그러나 신의 자비에도 한계는 있는 법, 더 이상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 마라!”
남은 절반의 마력만으로도 세이어는 아라난 그라드를 지상에서 지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어마어마한 기운이 제라드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데도 제라드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애초에 자비가 한계가 있으면 신이 아니지. 그냥 속 좁은 인간이잖아?”
다 죽어 가면서도 여전히 큰 소리다. 어이가 없어 세이어가 물었다.
“허세가 우습구나. 두 팔이 다 날아간 네놈에게 이제 뭐가 남았느냐?”
“……뭐가 남았냐고?”
문득 제라드가 빙그레 웃었다.
“잘 키운 제자 한 놈.”
“응?”
피 묻은 수염 사이로 짙은 미소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지겹게 들렸던 외침이 전혀 다른 목소리가 되어 세이어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캘러미티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