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권 제58장 나이트메어 오브 더 월드 (59/84)

16권

제58장 나이트메어 오브 더 월드

1

광활한 황야 위를 네 사람이 달리고 있었다. 선두에 선 거구의 사내, 레펜하르트와 뒤를 따르는 갈색 피부의 엘프, 시리스. 좌우로는 러스와 타시드가 한껏 굳은 얼굴로 두 다리를 바삐 놀리는 중이었다.

네 사람 모두 말 따위는 타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광야를 질주한다. 예전 바나텔 일행의 습격 때도 그랬지만, 경지에 오른 강자인 이들이라면 어지간한 준마보다는 오히려 본인의 육체 쪽이 스피드며 지구력 모두 월등한 것이다. 평소에는 체력 낭비를 막기 위해 말을 타고 움직이곤 하지만 사태가 급할 경우에는 이렇게 두 발로 뛰는 쪽이 더 나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한 상황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한달음에 수 미터 씩 나아가며 러스가 신음을 흘렸다.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속도로 함께 달리며 타시드도 안색을 굳힌 채 말했다.

“거의 필라넨스 여신의 기적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어, 그거.”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평화롭던 아라난 그라드의 왕궁 가이라크, 러스와 타시드는 여전히 평소처럼 수행을 쌓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세계를 찢어발기는 듯한 어마어마한 힘의 발현을 느낀 것이다.

일반인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기감을 가진 오러 유저에겐 그야말로 천둥벼락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명확히 느껴지는 가공할 힘이었다.

순간 기겁을 하고 둘 다 힘의 방향과 거리를 점쳤다. 그리고 더더욱 기겁하게 되었다.

그 힘이 발현된 것은 안타레스 공국 동부 쪽. 산맥을 넘어 위치한 오크들의 도시, 오크라트였다.

경악을 한 러스와 타시드는 바로 수련을 관두고 레펜하르트에게 달려갔다. 집무실로 향하니 이미 레펜하르트와 카를도 그들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역시 그 힘의 발현에 대해 알아챈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레펜하르트 쪽이 보다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창밖을 내다보며 레펜하르트는 망연자실해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카를 역시 이마를 짚은 채 심호흡을 하는 중이었다. 오러 유저가 아니니 기감이 있을 리도 없는 카를이지만, 그럼에도 저 기운에 대해 명확히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 이유를 레펜하르트가 신음과 함께 말했다.

“마법, 그것도 어마어마한 마법의 힘이다.”

너무도 엄청난 마법의 힘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으니, 이제 갓 마법에 입문한 카를조차도 그 뒤틀림을 느낄 수 있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곧이어 시리스가 기겁을 하며 집무실로 달려왔고.

“레펜하르트 님!”

궁정 마법사와 안타레스 마법사단 역시 공포에 질려 레펜하르트를 찾았다. 오러 유저가 아니더라도 마법에 종사하는 이라면, 저 기운에 대해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폐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폐하!”

당황 속에서도 레펜하르트는 애써 수하들을 진정시켰다.

“일단 다들 진정해! 바로 알아볼 테니까.”

무슨 사태가 벌어진 건지 글로텐 산맥 인근의 마력 기류가 흐트러져 마법 전언이 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접 가 봐야겠다고 판단을 내린 뒤, 레펜하르트는 카를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시리스와 타시드, 러스만을 대동한 채 아라난 그라드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바로 오크라트로 향했다.

말을 타고 달려도 족히 보름은 걸릴 거리, 특히나 험준한 산맥을 넘어야 하는 만큼 그 행로의 험함은 필설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레펜하르트 일행은 잠도 자지 않고 거의 하루를 꼬박 내달렸다. 도대체 무슨 사태가 벌어졌는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니 도저히 쉴 여유가 없었다.

“이제 곧 오크라트입니다, 형님.”

“알고 있어.”

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도대체 뭐지, 그 엄청난 힘은?”

사실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마법의 경지, 바로 10서클의 마법이 발동될 때 느껴지는 힘이다.

‘하지만 나 말고 다른 10서클의 종사자가 세상에 있을 리가…….’

그렇게 막 레펜하르트 일행이 오크라트가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까지 오른 순간이었다.

“……!”

경악하며 레펜하르트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뒤따르던 시리스가 당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펜하르트 님?”

하지만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 역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타시드와 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릉 위에 올라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지켜보며, 네 사람은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오크들의 도시, 오크라트.

그곳이 참혹할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다.

☆ ☆ ☆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폐허였다. 굳건히 세워 올렸던 석탑과 가옥들은 걸레짝처럼 갈가리 찢겨 사방에 흩어져 있고, 그 사이로 무수한 시체가 끝없이 이어진다.

오크라트에 거하고 있던 수많은 이들이 처참한 육편이 되어 바닥을 나뒹군다. 심지어 그 강력한 재생력을 가진 트롤조차도 박살이 난 채 죽어 있었다.

곳곳에 흑연이 가득하고 피 웅덩이가 즐비하다. 그 속에서 끝없이 절규와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어머니! 어흐흐흑!”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수많은 이들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사랑하던 이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한다. 오크라트를 지키는 강인한 오크 전사들조차도 그 대열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저 망연자실한 얼굴로 살아남은 이들을 챙기고 어떻게든 시체를 수습하려 할 뿐.

하늘의 별이 떨어진 지 하루째, 그토록 활기차고 생에 넘치던 오크라트는 죽음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언덕 위에서 오크라트를 내려다보면 러스와 시리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 맙소사!”

“끔찍하네요…….”

멀쩡한 건물이 남아 있지를 않았다. 굳건한 성벽도 모조리 무너져 토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대체 얼마나 가공할 파괴가 있었기에 그토록 거대하던 도시가 이리 참혹하게 무너졌단 말인가?

오크다 보니 이 도시에 남달리 애착이 있는 타시드의 심정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칼켄! 스탈라!”

존경하는 족장과 대모의 이름을 외치며 타시드가 한발 먼저 오크라트로 내달렸다. 사방을 살피며 러스가 레펜하르트에게 말했다.

“이거 대체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안 가는데요, 형님.”

온갖 전장을 보아 온 러스지만, 이토록 처참히 박살 난 광경을 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도시 인구의 절반 가까이 죽음을 당한 듯싶었다. 그 숫자를 생각하니 현기증이 올 지경이었다.

시리스도 질린 얼굴로 뇌까렸다.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요?”

레펜하르트 곁에서 여러 무지막지한 파괴 현장을 보아 왔던 그녀다. 하지만 그 기억 속에서도 이 정도 광경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차탄 공국에서 레펜하르트가 벌였던 엽기적인 파괴, ‘오러로 절벽 뭉개기’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거의 그때 그…….’

그래, 제라드와 바나텔이 동시에 힘을 쓴 것이 아닌 한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제라드 님은 아라난 그라드에 계신데 그럴 리는 없고.’

의아해하며 시리스는 레펜하르트를 올려보았다.

“어찌 된 일일까요, 레펜하르트 님?”

레펜하르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굳은 얼굴로 눈앞의 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지극히 혼란스러워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건 분명…….’

알아볼 수 있었다.

보는 순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이 가공할 파괴의 흔적은 바로 레펜하르트 자신이 직접 창시한 10서클 대이적 주문, 하늘의 별을 떨어트리는 미티어 폴의 자취다!

‘하지만 난 그 마법을 타인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그때 레펜하르트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잘 보니, 자신의 주문과 지금 이 ‘미티어 폴’은 그 흔적이 좀 달랐다.

‘아니, 이건 내 마법이랑 술식이 틀려.’

워낙 엄청난 마법이다 보니 하루가 지났음에도 사방에 마법의 여파가 진하게 남아 있다. 대기에 맴도는 잔여 마력을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술식을 역으로 탐지해 갔다. 확실하진 않지만 대충은 짐작이 갔다.

‘내 술식과는 다른 개념의 미티어 폴이군, 이쪽은.’

레펜하르트의 미티어 폴은 외공간에 떠다니는 운석을 마법으로 끌어당긴 뒤, 외공간과 대기권 사이에 순환하는 공간 통로를 만들어 떨어트리는 방식이다. 마법에 사로잡힌 운석은 공간 통로를 통해 순환하며 극가속이 붙은 후에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고, 가공할 파괴의 별이 되어 대지를 강타하게 된다.

반면, 이쪽 미티어 폴은 좀 달랐다.

‘외공간에 떠다니는 운석을 이용하는 건 같은데, 끌어당기는 방식이 달라. 공간 통로를 만드는 게 아니라 대기권 위쪽에 공간 포털을 열고 바로 운석을 이동시키는 거다. 그리해서 중력에 의해 가속도를 붙여 지면을 강타하는 방식이야.’

양쪽 모두 장단점이 있다.

레펜하르트의 미티어 폴은 시전하고 나서 파괴력을 낼 때까지 거의 딜레이가 없었다. 공간 통로를 통해 충분히 가속한 뒤 현세에 운석이 구현되는 방식이라 시간 소모가 적은 편이다. 그래서 파괴력이 어마어마한 대신 파괴력 대비 마력 소모가 많다.

반면 이 오크라트의 미티어 폴은 시전 후 실제 파괴를 낼 때까지의 딜레이가 훨씬 길었다. 대기권 위에서 중력 낙하하는 방식이다 보니 시전 후 실제로 지면에 충돌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모된다.

대신 필요 마력은 몇 배로 적다. 오직 운석을 붙잡아 이동시키는 데만 마력이 소모되고 그 후엔 자연 중력을 이용하니 상대적으로 마력 소모가 적은 것이다. 덕분에 파괴력도 레펜하르트의 미티어 폴만 못하다.

“어쩐지 피해가 너무 적더라니…….”

턱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시리스가 기가 막혀 반문했다.

“네? 피해가 적다고요?”

“응…….”

시리스는 이 참상을 보며 제라드와 바나텔의 충돌을 떠올렸을지 모르겠는데, 당시 두 사람의 충돌은 크레이터만도 200미터 가까이에 충격파는 수십 킬로미터에까지 달했다. 파괴력으로만 놓고 보면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게다가 그걸 감안해도 너무 약하고…….”

무심히 뇌까리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시리스의 안색이 굳었다. 이 지독한 참상이 약하다고?

“그럼 이보다 더 끔찍하게 파괴되었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시리스가 분노하며 레펜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마법에만 심취해 있던 레펜하르트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심코 대꾸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함부로 할 말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말 그대로 미티어 폴치고는 너무 약하다는 의미였어.”

땀을 뻘뻘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손사래를 쳤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미티어 폴 한 방으로 차탄 왕궁을 소멸시키고 제플린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제 갓 생겨난 신생 도시 오크라트와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국의 수도 제플린은 그 규모가 차원이 다르다. 차탄 왕궁과 인근 거리만으로도 면적이 오크라트 전역과 비슷할 정도다.

그런데 같은 미티어 폴이 떨어진 이 오크라트는…….

“그럼 대체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인 건가요? 도시의 인구가 절반이나 죽었는데!”

……절반이나 살아남지 않았는가?

씩씩거리는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오해를 풀어 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 참상을 대수롭잖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시리스. 시전된 마법의 위력에 비해 파괴 흔적이 너무 작다는 의미야.”

아무리 레펜하르트와 술식 개념이 다르다곤 해도 미티어 폴은 미티어 폴이었다. 그 가공할 마법이 직격했는데 오크라트가 이렇게 흔적이나마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정상적이라면 아예 이 근처가 모조리 거대한 구덩이가 되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그 이유를 금방 찾아냈다. 잔여 마력의 흐름이 아니라, 그냥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유는 명확했다.

애초에 하늘의 별, 미티어 폴은 오크라트를 직격하지 않았다.

오크라트 동부 성벽 외곽 몇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여 있었던 것이다. 도시의 참상이며 대기를 떠도는 마력에 정신이 팔려 미처 못 알아챘을 뿐.

어떻게 저렇게 거대한 흔적을 미처 못 보냐 싶겠지만, 그것이 바로 왕의 입장이자 지고의 마법사다운 관점인 법이다.

‘저러니 오크라트가 이 정도 피해로 끝난 거였군.’

저 위치라면 이 정도 피해 상황이 이해가 갔다. 물론 그 충격파만으로도 오크라트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무수한 인명 피해가 일어나 수많은 이들이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저 미티어가 만약 오크라트 중심에 떨어졌다면 슬퍼할 이조차도 남지 않았을 거다.”

모든 것이 싹 쓸려 버렸을 테니까.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정체불명의 적이 어째서 일부러 직격을 피했을까?

자비를 베푼 게 아닌 것은 확실하다. 자비를 베풀 거면 굳이 이런 어마어마한 마법을 쓸 이유도 없겠지.

마법사가 아닌 왕으로서의 레펜하르트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섬멸이 아니라 공포의 확산을 노리는 것이군.’

자신이 한 짓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천지창조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었던 것처럼, 이 정체불명의 적 역시 모두 죽이는 것보다는 압도적인 힘으로 공포를 전파시키는 것에 주목적을 두었다. 그러려면 그날의 공포를 기억할 이가 어느 정도는 살아 있어야 하겠지.

“우리도 일단 내려가자.”

“네, 형님.”

“예, 레펜하르트 님.”

레펜하르트는 러스와 시리스를 대동하고 오크라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황은 파악했지만 여전히 의문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지?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애초에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10서클의 경지에 오른 것은 레펜하르트가 유일하다. 그렇기에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10서클 종사자, 고금 제일의 마법사라 불리며 칭송받았던 것이 아닌가?

‘어떻게 나 말고 다른 10서클 종사자가 있을 수 있지?’

그때 레펜하르트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아!’

그가 분명 인류 역사상 최초이긴 하지만, 그 역사 이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레펜하르트가 10서클이라는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역시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 많은 지식을 필요로 했다.

바로, 인류 역사 이전의 고도 문명 시대, 은의 시대에 대한 수많은 지식을.

그래, 비록 레펜하르트와 궤는 다르지만 은의 시대 역시 10서클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펜하르트 역시 그 자취를 따르며 결국 저 경지에 오른 것이고.

예전 같으면 여기까지 추리한다 해도 여전히 적에 대해 짐작조차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짐작 가는 놈들이 있다.

‘역시 은의 현자란 놈들이 관련된 것인가?’

고대 문명의 힘을 독점하고 있다는 은의 현자, 그들이 지닌 고대의 힘 중에 이런 파괴를 보이는 기물이 없으리란 법도 없다.

‘아냐, 이건 아티팩트가 아니라 분명 마법이 직접 시전된 흔적이다.’

다시 의문이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은인이여!”

한발 먼저 달려갔던 타시드가 누군가를 짊어진 채 허겁지겁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오크 여인이었다. 그녀를 본 순간 레펜하르트 일행이 기겁해 외쳤다.

“스탈라 씨!”

☆ ☆ ☆

스탈라의 부상은 끔찍한 수준이었다. 그토록 강인한 전사인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중상인 것이다.

실란이 없기에 치유술을 쓸 수는 없다. 대신 레펜하르트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와 치유 마법을 병행해 스탈라의 부상을 다스렸다. 이제는 그 역시 9서클의 마스터, 성직자만은 못해도 어느 정도 힐링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겨우 스탈라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칼켄은 죽었소.”

타시드가 눈시울을 붉혔다.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물었다.

“누구의 짓입니까?”

“그자는 자신을 신이라 칭했소.”

“신?”

“인류의 신, 세이어.”

모두가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스탈라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신일 리 없겠지만, 그자의 힘을 보면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오. 칼켄과 내가 상대조차 되지 않더군.”

이후 스탈라는 천천히 상황을 설명했다. 세이어와 그를 따르던 세 여인이 오크라트에 나타나 어떤 일을 했는지를.

렐시아에 대해 듣는 순간 시리스의 어깨 위로 살기가 피어올랐다.

“렐시아!”

천지창조에 의해 소모되었던 세계수의 정이 보완되며 그녀의 심성 역시 다시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러스가 흠칫 놀라 시리스를 달랬다.

“조심해요, 부상자 앞입니다.”

과도한 살기는 부상을 입은 스탈라에게 좋지 않다. 하지만 시리스의 살기는 누그러질 줄을 몰랐다. 아무런 대꾸 없이 싸늘한 눈동자만을 빛낼 뿐이다.

더듬거리며 스탈라가 간신히 모든 이야기를 마쳤다.

“이후 그자들은 날 버리고 다시 떠났소. 듣자하니 다음 ‘죄악의 도시’로 향한다더군.”

레펜하르트는 이를 갈았다.

“죄악의 도시라…….”

아집에 빠진 그 미친놈들이 자신들의 소중한 도시를 어떻게 부르건 그건 알 바 아니다. 문제는 그놈들이 다음으로 어디를 노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엘븐 포레스트인가? 아니면 트로리아드?”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랜드 포지는 위치가 멀어 위험권 밖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공간 포털이 뚫린 시점에서 그랜드 포지도 무사하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현재 레펜하르트는 그것까지는 모르고 있으니 저리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바로 아라난 그라드로 향할지도 모르겠군.”

레펜하르트의 혼잣말에 러스가 물었다.

“이제 어쩌지요, 형님?”

시리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엘븐 포레스트로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트로리아드엔 아틸카와 강력한 트롤 주술사단이 상주하고 있다. 아라난 그라드 역시 권황 제라드와 황금재상 카를, 그리고 실베릭 아머를 받은 안타레스 기사단이 있다.

하지만 현재 엘븐 포레스트는 방어 병력이 약한 편이었다. 이니야와 샤일렌을 비롯, 강력한 엘프 전사와 정령사들 대다수가 노예 해방을 위해 인간으로 변장하고 안타레스 공국을 떠난 상태다. 굳이 시리스가 엘프여서가 아니라, 현재 가장 위험한 곳이 엘븐 포레스트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칼켄과 스탈라가 손도 못 쓰고 당했어. 어디든 마찬가지다.”

정말 10서클 종사자라면 권황 제라드라도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바로 레펜하르트 자신이 전생의 힘으로 제라드를 상대할 경우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아니까.

‘설마하니 전생의 나 정도는 아닐 거라고 보지만…….’

그래도 낙관은 금물이다.

‘무려 인류의 신을 자처하는 놈이다. 만만한 놈일 리가 없지.’

레펜하르트가 스탈라를 보며 빠르게 말했다.

“살아남은 이들을 추스르고, 마법 전언이 통하지 않으니 직접 전령을 엘븐 포레스트와 트로리아드로 보내 주시오. 지금 당장 각 도시에 방어 태세를 갖추고 만약 적이 나타날 경우 절대 정면으로 맞붙지 말라고. 가능하다면 도시에서 피난하라고도 전하고.”

말을 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자신의 명령에 혀를 차고 있었다. 각 도시의 인구가 얼마인데 이제 와서 빠르게 피난이 될까? 하지만, 적어도 경고는 해 두어야 한다.

“으음, 알겠소. 왕이여.”

스탈라가 신음을 흘리며 애써 몸을 일으켰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스탈라 공. 그럴 경향이 아니란 건 알지만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구려.”

마음 같아서는 타시드나 시리스를 이곳에 남겨 스탈라를 돕게 하고 싶다. 하지만 상대가 정말 10서클 대마법사라면 전력을 나누어선 안 된다. 그래선 각개격파를 당할 뿐이다. 여기서 전력을 뺄 수는 없다.

스탈라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구려. 남편을 잃었다고 정신을 놓는 연약한 아낙은 아니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무시무시하게 불타올랐다.

“다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시오, 왕이여.”

“무슨?”

“그놈의 목을 내게 주시오! 그 뼈와 살을 씹어 남편의 한을 달래겠소!”

무시무시한 살기가 상처 입은 오크 여인의 전신에서 피어오른다. 레펜하르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소, 스탈라. 그자의 목은 당신 것이오.”

그때 러스가 난처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하지만 형님, 어디부터 가야 하겠습니까? 놈들의 행선지를 모르니 쫓을 수가 없을 텐데요?”

문득 스탈라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자가 바로 목적지를 언급하진 않았소. 하지만 비슷한 말은 한 것 같구려.”

쓰러진 스탈라를 뒤로한 채 렐시아가 물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이제 어디로 향하시겠나이까? 죄악의 도시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굳이 그곳까지 건드릴 필요가 있겠느냐? 본보기는 충분하다. 오크는 수가 많고 쓸모가 적다. 하나 엘프와 드워프는 귀하지 않느냐? 그들은 쓸모가 많다.

-하오면 어찌 하실는지?

끔찍한 참상을 뒤로한 채 세이어는 맑게 웃었다.

-헛생각이 들어간 이들에게 세상을 알려 주었다. 그다음은 저들에게 헛생각을 집어넣은 자들의 차례가 아니겠느냐?

스탈라의 말에 레펜하르트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아라난 그라드인가!”

2

황량한 광야 위 한 언덕에 서서 세이어는 눈앞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도시로구나.”

세렐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름다운가요?”

안타레스 공국의 수도, 아라난 그라드.

일국의 수도이자 왕궁이 있는 곳이라기엔 상당히 수수해 보이는 도시다. 보통 왕궁 같은 걸 지을 때면 온갖 장식을 다 붙이기 마련이다. 곳곳에 금박과 은박을 입히고 화려한 탑을 세우고 석상과 동상을 즐비하게 늘어놓아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 한다. 일국의 수도쯤 되면 대부분 비슷한 법이다.

그러나 아라난 그라드는 달랐다.

석상이 많은 것은 그대로지만 딱히 금은으로 치장한 부분은 없다. 벽은 그냥 벽일 뿐 조각이 새겨져 있다거나 한 부분도 거의 없다. 그야말로 실용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어 만든 도시다.

“튼튼해 보이긴 하지만 아름답다고는…….”

촌구석에 속하는 바실리나 크로방스 인이라며 저 정도도 아름답다 여기겠지. 하지만 화려한 금은보화로 치장된 바슈탈론 제국의 수도를 알고 있는 세렐라인에겐 영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세이어는 빙그레 웃었다.

“너희들에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아라난 그라드의 아름다움은 도시 전체의 조형미에 있다. 요소요소로만 보면 단순해 보이는 것이 도시 전체와 아우러지며 놀랍도록 통일성을 이룬다. 세이어에게 있어 그 단순의 미학은 참으로 보기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세렐라인에겐 그렇지 않으리라.

“너희들은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의상이 단색보다 아름답다고 여길 테지?”

세렐라인은 눈을 깜빡였다.

단색? 색을 하나밖에 못 넣은 옷보다 여러 색상을 물들인 옷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감히 세이어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다. 세렐라인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지금 저 위대한 분께서는 묘한 그리움을 안고 계시는 듯 했으니까.

“드워프의 솜씨겠지. 인간의 취향을 강요하지 않은. 그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자취는 아직도 남아 있구나.”

그리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세이어가 문득 아라난 그라드 외각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

“그런데 듣던 것과 풍경이 다르구나?”

올 때 들은 바로는 이 대지에 여신의 축복이 내려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세이어의 눈에 비친 아라난 그라드 주위는 그냥 평범한 황야일 뿐인 것이다.

“필라넨스의 기적이 임했다지 않았더냐?”

“그것이…….”

얌전히 두 손을 포개 채 시녀처럼 서 있던 렐시아가 재빨리 설명했다. 전쟁 직후 필라넨스의 대신관, 실란 대주교가 어떤 연설을 했으며,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세이어가 크게 웃었다.

“하하! 그런 거였군. 과연. 필라넨스에게 불가능한 일이 어찌 일어났나 했다. 그런 것이었구나.”

왠지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이었다.

“대단하구나, 안타레스의 왕. 그런 짓도 가능하구나. 이론은 알지만 내게도 불가능한 일이거늘. 정녕 대단하다. 사실 좀 당황했는데 이제 이해가 가는구나.”

세이어의 말은 참으로 두서가 없었다. 필레나가 당황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나이다.”

하지만 세이어는 아무래도 친절하게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 눈치였다. 그저 혼잣말만을 이을 뿐이었다.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매우 그릇된 방법, 그러나 그 깊이만큼은 대단하구나. 올바르지 않으니 보통은 알아도 시행하지 못 할 터, 그런데 그는 했다. 깊을 뿐 아니라 넓기까지 하구나.”

문득 세이어가 오른손을 들었다. 허공을 가리킨 그의 오른손에서 보랏빛 영기가 솟구쳤다. 렐시아가 기대로 눈을 빛냈다.

“신벌을 내리려 하시나이까? 또 하늘의 별을?”

박살난 오크라트를 떠올리며 그녀가 희열로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었다. 세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 도시는 부수기엔 아깝구나.”

대답과 달리 솟구친 영기는 더더욱 그 기세를 높이고 있었다. 또다시 끔찍한 마력의 기운이 세상을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대기 속에서 세이어가 천천히 영창을 시작했다.

“라 스텔 피르트 파 케인트…….”

나직한 음성이 권능과 힘을 실어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

“맞잡은 두 세계여, 심연의 허를 열어라. 만마萬魔의 찬미 앞에 복종해 이끌림에 따라 일어서라.”

그의 오른손이 허공을 저었다.

“대이적 마법, 나이트메어 오브 더 월드.”

☆ ☆ ☆

검은 달이 떠올랐다.

아라난 그라드의 상공에 떠오른 그 거대한 검은 구체는 마치 달처럼도, 혹은 하늘에 뚫린 검은 구멍처럼도 보였다. 일상에 종사하던 시민들이 모두 놀라 허공을 응시했다.

“뭐지?”

“저건 대체?”

그러나 그 놀람 속에 두려움은 그리 보이지 않았다.

기적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수시로 왕궁에서 황금빛 기둥이 허공을 뚫어 대고 도시 주변이 하루아침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하는 것도 본 이들이다. 현재 아라난 그라드의 시민들만큼 기적에 둔감한 이들도 없을 것이다.

“폐하께서 또 뭔 짓 하셨나?”

“아니면 실란 대주교님이?”

그렇게 다들 조금 신기해하며 무덤덤하게 하늘의 기적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시민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화했다.

“어?”

“저거…….”

검은 구멍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는 그것은 얼핏 새 떼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고 모습이 드러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크아아아아!”

구멍으로부터 나온 ‘그것’이 포효를 터트렸다. 흉측한 외모에 검붉은 근육질 피부, 뒤틀린 사지와 피막의 날개, 그리고 우락부락한 각질의 뿔.

젊을 적 던전 탐사 경험이 있는 은퇴 용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악마다!”

까마귀 떼가 날아들듯 거대한 그림자가 아라난 그라드 상공을 뒤덮었다. 날갯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대기를 울려 댔다. 시민들이 그제야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수천의 악마들이 검은 구멍을 통해 아라난 그라드를 덮쳐 오고 있었다.

“켈타카!”

순식간에 하늘을 가르고 착지한 악마 하나가 외침을 터트리며 창을 휘두른다. 도망치던 시민이 두 동강 나며 사방으로 피를 흩뿌린다. 바로 옆에선 악마가 뿜어낸 불길에 집이 통째로 불타며 한 가족이 겁화 속에 재가 되어 버린다.

평화롭던 도시가 지옥도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라난 그라드 전역에서 끔찍한 학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렐시아의 얼굴이 더더욱 상기되었다. 이제는 숫제, 성적으로 흥분한 것처럼도 보이는 모습이다.

‘아아, 스테반 님. 당신께 바치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그 혼돈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시민들은 정해진 대피소로 어서 움직이시오!”

“이들은 우리가 막겠소!”

“겁먹지 말고 침착함을 유지하시오!”

어느새 아라난 그라드 곳곳에서 병력이 출동해 악마들과 대치를 벌인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다. 여러 혼성 종족으로 이루어진 상비군이 순식간에 정해진 진형을 짜고 악마들을 상대하며, 공포에 질린 시민들도 그 와중에 질서 정연하게 도시 곳곳에 위치한 지하 대피소로 침착히 움직인다.

보고 있던 세이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어? 반응이 굉장히 빠른데?”

☆ ☆ ☆

“제3대대! 동부 지역으로! 1대와 4대는 남서 지역에서 퇴로를 확보하라!”

황금의 갑주를 입은 청년이 왕궁 가이라크의 테라스에 서서 도시 전역을 내려다보며 외침을 터트린다. 그가 외침을 터트릴 때마다 곁에 있던 시종들이 각양색색의 깃발을 들어 신호를 보낸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아수라장이 되어 혼돈 상태가 되어 버린 아라난 그라드. 그러나 거구의 청년은 놀랍게도 그 복잡한 상황을 한눈에 꿰뚫어보고 절묘하게 병력을 배치해 사태를 막고 있었다. 일단 군대가 출동하니 악마들에 의해 살해되는 시민들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줄기 시작한다.

그 놀라운 솜씨와 빠른 대응은 실로 신조차도 감탄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하지만 정작 본인, 카를은 속으로 치를 떨고 있었다.

‘젠장! 대처가 너무 늦었어!’

아직 오크라트로 향한 레펜하르트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야 스탈라와 만나 자초지종을 확인하고 아라난 그라드로 돌아오는 중이니까.

그러나 카를은 애초에 레펜하르트의 소식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보나마나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다. 바로 준비해야 해!

본인 역시 마법사이기도 하고, 미티어 폴의 기운 또한 직접 체감한 카를이었다.

자고로 현자라면 소가 도망가기 전에 미리 외양간을 고치는 법, 레펜하르트가 아라난 그라드를 떠나자마자 바로 도시 병력을 소집해 최고의 경계 태세를 갖춘 것이다.

성벽마다 병력을 세 배로 늘리고 전투 물자를 미리 옮겨 놓아 전투 준비를 마쳤다. 미리 시민들에게도 경보를 날리고 명령이 떨어질 경우 어떤 경로로, 어느 대피소로 피난할 것인지 까지 전부 명해 두었다.

‘그런데 적이 하늘에서 올 줄이야!’

카를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의 공습에 초반 반응이 크게 늦어졌다. 덕분에 흘려서는 안 될 피가 흐르지 않았는가?

계속 기수들에게 신호를 보내며 카를이 명령을 이었다.

“아직 병력이 모자라다. 왕궁 수비대에게 전달해! 전원 남부 지구로 향하라고!”

참모 중 하나가 당황하며 물었다.

“하지만 재상님! 그러면 왕궁 경비가…….”

코웃음을 치며 카를이 반문했다.

“그들이 이 왕궁에서 대체 뭘 경비하겠다는 것인가? 왕? 아니면 왕비? 왕자? 왕족?”

순간 참모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국왕인 레펜하르트는 이미 왕실을 비웠고, 아직 안타레스 공국에 왕비는 없다. 뭐, 본인은 몰라도 주변인들은 은연중 시리스나 이니야 정도를 왕비 비슷한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긴 한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둘 다 경비대가 지켜 줘야 할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왕궁에서 가장 지켜야 할 이들이라면 자네와 나 정도군. 이곳이 본진이니.”

참모들이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곁에는 또 다른 초인, 엘드릴 기간투스를 걸친 카를이 있으니 딱히 방어 병력이 필요 없다.

카를이 피식 웃었다.

“웃기지 않나? 한 나라의 수도에서 가장 지킬 필요가 없는 곳이 왕궁이라는 사실이?”

실제로 아라난 그라드를 세울 때, 카를은 왕궁 가이라크의 방어에 그리 중점을 두지 않았다. 첩자를 대비해 경계는 철저히 세웠지만 방어 병력 배치나 피난로 등도 거의 고려하지 않았고, 심지어 도시 곳곳에 있는 지하 대피소 등도 전혀 세우지 않았다.

-그런 거 만들 예산 있으면 딴 데 돌리고 말겠다!

모두 안타레스 공국의 특이성 덕분이었다.

한 나라의 왕궁은 일국의 왕이 사는 곳이다. 그러니 보통은 가장 엄중한 경비 체제를 갖춰야 한다.

그런데 현재 안타레스 공국의 주요 지도층은 죄다 무인, 그것도 거의 오러 유저급의 초인들뿐인 것이다!

‘나중엔 몰라도 당장은 피난소 따위 만들 필요가 없지.’

피난소 만들면 누가 들어갈 건데? 권왕 레펜하르트? 아니면 권황 제라드? 혹은 오러 유저인 이니야나 러스, 타시드라던가 오러 유저급인 시리스나 카를?

피난소 따위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의 몸에 상처를 입힐 정도의 공격이면 그까짓 지하 피난소쯤은 증발되고 말 테니까.

모두 안타레스 공국의 역사가 짧기에 일어난 일이다. 워낙 역사가 짧다 보니 왕실이라 해 봐야 그 흔한 왕족 하나 없고 요인이라곤 전부 초대 왕인 레펜하르트의 지인들뿐, 말이 좋아 왕실이지 무슨 산적의 산채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장단점이 있는 법. 역사가 짧다는 건 이런 장점도 있는 법이지.

역사가 짧으니 지켜야 할 요인도 적다. 그리고 군사 독재 국가다 보니 그 요인들 역시 딱히 지켜 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카를은 각별히 아라난 그라드 각지에 시민용 대피소를 마련하는 데 예산을 투자했다.

어차피 육체가 곧 불굴의 철옹성인 레펜하르트에게 대피소 따위를 마련해 주는 것은 사치다. 하지만 시민들은 달랐다. 안타레스 공국의 시민은 다른 나라처럼 인간 뿐 아니라 다수의 이종족들이 포진하고 있으며, 이들은 여전히 수가 적어 하나하나가 귀하디 귀한 존재들이었다. 다른 나라가 국민 하나를 잃는 것과 공국에서 이종족 하나를 잃는 것은 그 가치 손실이 전혀 틀렸다.

딱히 카를이 인명을 중시하고 시민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선진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감가상각비를 따져서 정말로 그 가치가 높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식으로 도시 구조를 짜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아라난 그라드의 시민들의 피해를 줄이는 데 큰 역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이 사태를 일으키는 주범을 해치워야…….’

연신 명령을 내리며 카를은 눈을 빛냈다. 저 검은 구멍, 지금도 수없이 악마를 토해 내고 있는 흑색 달을 띄워 올린 자를 찾아야 했다.

☆ ☆ ☆

아라난 그라드의 상황을 지켜보며 세이어는 무심코 턱을 긁었다. 사실, 그는 지금 좀 놀라고 있었다.

“허어…….”

안타레스 공국의 대응이 빠른 것은 감탄스러운 일이었다. 확실히 저 재상 카를이란 자의 능력이 출중하다더니 과연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저것은 뛰어난 현자이자 군사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현명한 자가 전권을 가지고 사욕 없이 그 능력을 쓰면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감탄스럽기는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세이어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뭔 일개 시민들이 저리 대피를 잘하지?”

안타레스의 병력이 악마들을 막아 내는 사이 시민들은 침착하게 대피하고 있었다. 벌써 절반 이상이 안전한 대피소로 향했고 다른 이들도 대열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원래 피난 계획이라는 것은 계획대로 안 되기 마련이다.

지도층이야 백 명은 이쪽 가고 백 명은 저쪽 가고, 질서 안 지키면 모두 죽으니까 침착하게 기다리라는 식으로 쉽게도 명령을 내릴 수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죽은 부모의 시체를 두고 대피소로 향하기가 쉽겠는가? 보통은 넋이 나가 부모의 시체 앞에서 오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오열하는 아이는 또 그냥 두고 갈 수 있을까? 내버려 두면 죽는데? 어떻게든 달래고 달래서 데려가려 한다.

또, 지인을 잃지 않은 이라도 이 상황에서 침착을 유지하기란 실로 지난한 일이다. 등 뒤에서 피가 흐르고 비명이 터지는데, 악마의 포효가 귀청을 찌르고 불길이 이글거리는데 어찌 침착하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나 둘 발목을 잡고, 그 발목이 지뢰처럼 여기저기 우후죽순 터져 나면 이동로가 막히며 결국 학살이 일어난다. 그래서 보통 대피 계획을 세울 때는 시민의 절반만 살려도 큰 성공이라 할 정도다.

“……그런데 이곳의 시민들은 아주 침착하구나. 아무리 전쟁 경험이 많다 해도 보통 저렇게까진 안 되는데.”

아라난 그라드의 시민 중 이종족이 많은 탓이었다.

노예로 살아가던 이들, 상실과 슬픔 속에 살아가던 이들.

그리고 그 상실과 슬픔 속에서도 명령을 따르는 데 익숙한 이들.

자유민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들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익숙한 이들이었다. 채 씻지 못한 노예근성이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라 하겠다.

“뭐, 그래 보았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표정을 풀며 세이어는 대수롭잖게 여겼다. 생각보다 아라난 그라드의 반응이 뛰어나 제법 악마의 군세를 잘 막아 내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문제다.

“이계의 악마가 육천육백이다.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살짝 비웃음을 담아 세이어가 뇌까렸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캘러미티 혼!”

거의 100여 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고 경직될 것만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동시에 거대한 황금빛 기둥이 허공을 갈랐다.

콰콰콰쾅!

가공할 파괴의 힘이 그대로 아라난 그라드 상공까지 작렬했다. 황금의 빛에 휩쓸리며 수많은 악마들이 일제히 핏덩이가 되어 사라졌다. 악마의 비명과 절규가 하늘 가득 울려 퍼졌다.

놀란 렐시아와 필레나, 세렐라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헉!”

“이건 설마!”

광야 저편,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떨어진 또 다른 언덕 위에 한 근육질의 사내가 서 있었다. 백발을 휘날리며 터질 듯한 육체미를 뽐내는 거구의 노인이.

그가 땅을 박찼다.

쾅!

한 걸음에 백 미터가 넘는 거리가 좁아지며 노인이 순식간에 세이어 일행 앞에 나타난다. 어깨를 활짝 펴며 노인, 권황 제라드가 차갑게 웃었다.

“육천오백 마리 남았다!”

☆ ☆ ☆

제라드를 향해 세이어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명확한 살기와 적의가 저 거대한 노인의 전신에서 흘러나와 거미줄처럼 전신을 옭죄고 있었다.

칼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운이었다. 실제로 세이어를 제외한 다른 여인들은 그 살기 앞에 마주 선 것만으로 꼼짝도 못하고 벌벌 떨 뿐이었다.

마치 호랑이가 으르렁대듯, 제라드가 성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뭐 하는 놈이냐, 네놈은?”

세이어는 힐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제라드의 살기가 너무 강력해, 이제 세렐라인이나 렐시아는 숫제 숨도 못 쉴 지경까지 되어 있었다. 마법사인 필레나만이 정신력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역시 창백하긴 마찬가지다.

이대로 두면 실금이라도 할 기세라 세이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살짝 손가락을 움직이니 묘한 기운이 흘러나와 세 여인을 감쌌다.

그제야 렐시아며 세렐라인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악…….”

“하악, 하악.”

제라드를 보며 세이어가 미간을 찡그렸다.

“연약한 여성에게 너무한 것 아닌가?”

“그래서 차분하게 보고만 있지 않느냐?”

순간 세렐라인은 기가 막혔다. 위압감 때문에 숨도 못 쉴 지경이었는데, 그게 차분하게 보고만 있었던 거라고?

그런데 세이어는 오히려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군. 본격적으로 살기를 뿜었다면 이 아이들의 호흡이 아니라 심장이 멈췄겠지.”

자기도 모르게 죽을 뻔한 렐시아와 세렐라인이 부르르 떨었다.

제라드가 주먹을 움켜쥐며 세이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뭐 하는 놈이냐?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데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게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세이어가 되물었다.

“어찌 내가 이 사태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느냐?”

확실히 현재 세이어와 세 여인들은 그냥 겉으로만 보기엔 평범한 남녀 일행일 뿐이다. 뭐, 세이어의 미모가 지나치게 아름답다 보니 딱히 평범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외부에서 보기엔 딱히 적으로 보일 상황이 아니다. 그냥 지나가는 이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라드는 너무도 확고하게 이들이 적임을 확신하고 나타났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이유가 궁금하다.

“보아하니 그대는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것 같은데?”

세이어의 질문에 제라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노인의 눈빛이 잠시 아라난 그라드를 향했다. 지금도 불길과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그 지독한 광경을.

“내가 마법은 몰라도 사람은 좀 알고 있느니라.”

제라드가 주먹을 말아 쥐어 양쪽으로 쾅 부딪쳤다. 황금빛 파문이 부웅 일어나며 또다시 살기와 적의가 피어올랐다.

확신을 담아 그가 뇌까렸다.

“저런 참상을 보면서 웃고 있는 새끼가 보통 범인이거든!”

“하하하하!”

세이어는 크게 웃었다. 실로 유쾌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렇군. 틀린 말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난장판 벌어진 걸 보면서 태연하면 보통은 범인이지.

하지만 하늘에서 수천 마리의 악마가 내려와 대학살을 벌이는데, 그 와중에 침착하게 주변 인물들의 표정을 살핀다는 것은 보통 집중력이 아니다. 특히나 학살을 뒤로한 채 바로 주범을 노리는 저 결단력은 더더욱!

세이어는 새삼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강철 같은 신체.

철탑 같은 거구.

흔들림 없는 정신력.

이 시대를 잘 모르는 그였지만 눈앞의 노인만큼은 쉽게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안에 존재하는 이가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군. 그대가 권황이라는 자로구나.”

권황 제라드를 앞에 두고도 긴장하기는커녕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살짝 불쾌해져 제라드가 인상을 썼다.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저지른 짓을 보니 예사 마법사 놈은 아니지 싶은데.”

“그대에겐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세이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세이어, 인류의 신이다.”

순간 제라드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불쾌함 대신 어처구니없다는, 살짝 동정심마저 깃든 표정이 노안 위로 떠오른다.

“저런, 젊은 친구가 어쩌다…….”

심지어 세렐라인 쪽을 보며 슬쩍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돌리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쉽게 말해 ‘저거, 미친 거 아니냐?’라는 제스처였다.

“하긴, 마법사 놈들이 원래 쉽게 회까닥 가곤 했었지.”

당연히 세렐라인과 렐시아는 발끈했다.

“무엄하다!”

“감히 위대한 분께 무슨 말을!”

이젠 제라드의 동정 어린 눈빛이 여인들에게까지 향했다.

“저런, 저 아이들도 같이 미쳤구나.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예쁜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하지. 그런데 어째 저 엘프 아이는 낯이 익은 것도 같고?”

대범한 제라드는 렐시아 같은 일개 엘프 따윈 기억에 담아 두지도 않는 것이다. 렐시아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세이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왼손을 들었다.

“믿으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왼손을 중심으로 강력한 마력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곧 믿게 될 테니까.”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광풍이 불었다. 단순한 마력의 파동만으로 땅거죽이 벗겨지고 대기가 휘몰아친다. 단순한 시위일 뿐인데 그 위력이 어지간한 고위 마법 못지않다!

“이런!”

기겁을 하며 필레나가 전력으로 마법 장벽을 전개, 세렐라인과 렐시아를 챙겨 뒤로 후퇴했다. 간신히 파괴 범위 밖으로 나간 뒤 필레나는 제라드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혀를 내둘렀다.

‘저, 저 괴물…….’

과연 권황 제라드의 명성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사방을 파헤치는 이 강렬한 마력 폭풍을 마치 산들바람이라도 되는 양 태연히 맞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로는 믿게 하기 힘들겠는데?”

태연자약한 제라드의 말에, 세이어가 더더욱 태연히 대꾸했다.

“물론 이건 그냥 저 아이들을 피신시키기 위함일 뿐이다.”

무엄하게도, 필레나는 순간 울컥해 버렸다. 피신이라고?

‘우린 죽을 뻔했는데?’

엄청난 마력 파동이었다. 그 순간 필레나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면 세 여인은 세이어의 일격에 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그걸 기대한 거라고? 그냥 피하라고 말로 해도 되었을 일을?

그런데 제라드는 오히려 납득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군. 그럼 이제 제대로 된 것이 나오는 게냐?”

역시, 너무 강한 자들의 사고방식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법이다. 제라드만 해도 저 정도인데 하물며 신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새삼 자신이 평범한 인간임을 실감하며 필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모,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그러니까 저거 신 아니라니까?”

시종일관 퉁명스러운 제라드의 말에 항시 웃음기가 돌던 세이어의 표정도 살짝 굳었다. 슬슬 불쾌해진 모양이다.

“그렇다면 불신한 채 죽을지어다!”

호통을 치며 세이어가 왼손을 크게 내리그었다.

“나는 가르는 자, 아케인 슬래시!”

순간 제라드의 눈앞이 절반으로 쪼개졌다. 수십 미터나 되는 섬광의 칼날이 시야의 모든 것을 반으로 가른 채 날아든다. 제라드의 두 눈에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강하구나! 더블 스파이럴 가드!”

두 줄기 황금의 회오리가 제라드의 근육질 거체를 휘감는다. 이중의 소용돌이와 섬광의 칼날이 서로 격돌하며 충격파를 낳았다. 대기가 흔들리며 가공할 폭발이 사방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 수십 미터 반경이 모조리 폐허가 되어 버렸다.

“으하하하!”

폭발 속에서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흑연을 뚫고 제라드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공중에서 몸을 돌려 허공을 박차며 그가 유쾌하게 소리쳤다.

“좋구나! 마법사! 그럼 놀아보자!”

3

강력한 마법사와 경지에 오른 전사는 서로 물리고 물리는 관계다. 마법사는 전사의 민첩함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전사는 마법사의 파괴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같은 수준의 전사와 마법사라면 아무래도 유리한 쪽은 마법사였다.

마법사의 전술은 강력한 마법 장벽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이동 주문으로 거리를 벌리며 파괴력 있는 마법을 쏘아 대는 방식이다. 상대가 전사건 몬스터건 마물이건, 대체로 이 전술은 변함이 없다.

반면 전사는 보다 그 전술이 다양하다. 화려한 검술로 상대의 눈을 현혹시킨다거나, 초접근전으로 상대의 신체를 제압한다거나, 심리적인 허점을 노리거나 혹은 강력하고 패도적인 힘으로 상대 자체를 굴복시키는 것.

그리고 그 전술 자체가 전사 계열에겐 불리할 수밖에 없다.

마법사의 전술은 굳이 비유하자면, 대포를 장착한 요새가 마음껏 움직이는 방식이다. 요새 상대로 화려하고 현혹적인 검술이나 신체를 장악해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정교한 체술 따윈 의미가 없다.

어차피 마법 장벽을 뚫지 못하면 검술이니 체술 따윈 쓸모가 없다. 그리고 뚫고 나면 굳이 마법사 따위를 상대로 검술이니 체술을 쓸 필요가 없다. 그냥 푹 찌르면 끝나는데?

대부분의 전사 입장에서는 자신이 익힌 기술의 절반 이상을 구사하지 못한 채 마법사를 상대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달랐다.

“하하하하!”

통쾌한 웃음과 함께 제라드가 허공에서 내려찍기를 날렸다. 단순한 찍기임에도 황금빛 오러가 휩싸이니 흡사 금빛의 유성이 내리꽂히는 듯하다. 단 일격에 폭발과 함께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콰아앙!

그러나 구덩이 중심에 선 세이어의 전신엔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그를 가호하고 있는 강력한 마법 장벽, 포스 필드가 제라드의 일격마저 훌륭히 감당했기에.

“아스트랄 아콘.”

세이어가 연달아 빛의 구슬을 쏘아 냈다. 물질계의 상위 차원, 천상계의 힘이 구형으로 맺혀 수십 발이나 제라드의 전신에 처박힌다. 제라드가 양팔을 펼치며 호통을 쳤다.

“더블 스파이럴 가드!”

연속 폭발이 황금빛 소용돌이 위로 연달아 터졌다. 폭연 사이로 제라드의 굵직한 팔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혀 상처 입지 않은 모습으로 그가 권격을 날렸다.

“스트레이트 캐논!”

레펜하르트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어마어마한 황금빛 파동이 대기를 갈랐다. 세이어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으음…….”

스트레이트 캐논이 세이어를 뒤덮고 황야를 가로질렀다. 순식간에 수십 제곱미터가 넘는 넓이의 파괴 흔적이 부챗살 모양으로 길게 생겨났다. 그 속에서 세이어도 수십 미터 가까이 밀려난 상태였다. 반격의 여지를 주지 않고 또다시 제라드가 공격을 퍼부었다.

“타이푼 킥, 연환퇴!”

연달아 허공으로 발차기를 차올리니 수십 줄기의 금빛 회오리가 연달아 생겨나며 세이어의 사방을 노리고 날아든다. 세이어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런…….’

회오리에 휘말려 마법 장벽 사방에서 충격이 다가온다. 물론 세이어의 방어 장벽 자체는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마력은 아무리 제라드의 연격이라도 충분히 감당할 만큼 가공했다.

그러나, 아예 장벽 자체를 밀어 버려 마법 주문을 흩어 놓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시전자인 세이어 자신의 위치 좌표가 어긋나니, 설정해 놓은 마법 좌표 역시 어긋나며 즉시 시전 가능한 마법이 딜레이가 생겨 버린다.

“제법이구나, 권황.”

솔직히 감탄하며 세이어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아케인 스트라이크 파이널 디시전!”

레펜하르트도 애용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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