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장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신神에는 신神
1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이 지평선과 하늘을 연결한다.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영혼마저 얼릴 추위를 동반해 모든 것을 침묵시킨다.
어떠한 생명도 그 생을 잇지 못하는 이곳은 불모지 중의 불모지, 그라임 왕국 최북단에 위치한 영구 동토 프리즈랜드였다.
끝없이 펼쳐진 눈과 얼음의 세계, 그 설풍 속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셋 다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 가볍기 그지없는 여행자 차림이었다.
실제로 북풍은 이들의 머리칼 하나 범접하지 못했다. 스스로 몸을 틀어 이들을 비껴감으로서 경의를 표할 뿐이었다.
세 사람 중 20대의 청년이 땅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잘도 해 놓았구나.”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운, 어지간한 미녀도 눈 아래로 둘 아름다운 미모의 청년이었다.
흑안을 반짝이며 청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곳의 관리는 완벽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세렐라인?”
청년의 오른쪽에 서 있던, 순백의 로브를 걸친 소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1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은발의 소녀였다.
“아버지여, 부디 용서를…… 저도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청년의 왼쪽에 서 있던 싸늘한 눈빛의 20대 여인이 물었다.
“세이어시여, 이는 그들의 소행인가요?”
청년, 세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필레나. 아주 제대로 파묻었구나.”
그들이 서 있는 장소는 은의 현자가 지닌 아티팩트 보관소 중에서도 가장 큰, 천공의 방이 위치한 곳이었다. 정확히는 이곳에서 지저 450미터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그 안에 진입할 방법이 없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모든 공간 이동진이 파괴된 탓이었다.
세이어가 빙그레 웃으며 세렐라인을 돌아보았다.
“나의 아이야,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느냐?”
식은땀을 흘리며 세렐라인은 잠시 자신의 성표를 매만졌다. 그녀에게 부여된 마력 코드를 이용해 어떻게든 지하의 시설에 닿으려 노력한다.
하나 소용없었다. 시설은 완벽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시여.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시설에 파묻힌 아티팩트들을 물리적으로 발굴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세렐라인이 안타까워하며 세이어에게 애원했다.
“당신께서 은총을 내려 주실 수 없는 것입니까?”
“나의 은총은 그런 식으로 내려지지 않는다.”
세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당장은 포기해야겠구나.”
옅은 그리움이 담긴 음성이었다. 세렐라인이 초조해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 그 많은 경계 결계랑 방어 결계가 죄다 발동하지 않은 거지?’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세이어가 세렐라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자라면 가능하다. 내 속의 아이가 알고 있는 그자라면 이 정도는 별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는 네 탓이 아니다, 세렐라인.”
“……네?”
세렐라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사실 그녀는 이 사태가 자신의 잘못인 줄조차 모르고 있었다. 세이어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신은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용서할 뿐.
“그러니 용서하마, 나의 딸아.”
둘의 대화를 필레나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문득 그녀가 세이어를 바라보았다.
“테스론은 잘 있나요?”
“물론이다. 조금 전에도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흥겨운 듯 세이어가 미소를 지었다.
부활한 이후, 그는 한동안 인간을 만나지 않았다. 세렐라인과 필레나만을 대동한 채 깊은 숲 속에서 자신을 관조하며 명상에 잠길 뿐이었다.
“내 속의 아이, 이 육체의 영혼은 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더구나.”
눈보라 속에서 세이어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 경탄할 만한 육체의 주인에 대해서.”
“예?”
세렐라인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세이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이어가 부드럽게 웃었다.
“알 것 없다. 내 너무 오래 잠들어 말하는 것이 즐겁다 보니 혼잣말이 늘었구나.”
세이어가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이미 이곳의 볼일은 끝난 것이다. 그의 뒤를 따르며 세렐라인이 허겁지겁 말했다.
“진흙탕을 흐리던 미꾸라지가 이제 최대의 적이 되었습니다. 은의 현자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알고 있다.”
“위엄을 보여 주소서. 미욱한 저희들에게 우리가 당신의 뜻을 올곧게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소서.”
“그럴 셈이다.”
연이은 세이어의 대답에 세렐라인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신전으로 가시겠습니까?”
어서 세이어 템플로 향하고 싶었다. 어서 은의 수호자들을 모두 부르고, 그들 앞에서 진정한 세이어의 뜻을 설파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이어는 그녀의 원願을 거부했다.
“나는 말로 증명하지 않는다. 신전은 추후에 가겠다.”
세이어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세렐라인과 필레나도 허겁지겁 그를 따랐다.
그가 한 걸음 옮기니 눈보라가 멈췄다.
그가 두 걸음 옮기니 얼어붙은 대지 위로 마른 관목이 보였다.
세 걸음 옮김으로써 세이어와 두 사람은 영구 동토, 프리즈랜드를 벗어났다.
바뀐 날씨를 바라보며 세이어가 혀를 찼다,
“편하게 이동하는 것은 여기까지구나. 여기서부턴 인간의 발을 써야겠군.”
문득 세이어가 필레나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필레나, 알고 있느냐? 그 아이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예, 세이어시여.”
“하지만 그 아이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세이어시여.”
“그럼에도 돕겠느냐?”
“예.”
세이어의 조용한 질문에 필레나는 계속 조용히 답했다. 양쪽 모두 담담하기 그지없는 어조였다.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 세렐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세이어가 세렐라인에게 손짓했다.
“그럼 움직여 보자꾸나. 세렐라인, 인간의 말과 마차가 필요하다.”
“어디로 행하시겠나이까?”
세렐라인의 의문에 세이어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아들이 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바꾸었구나.”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세이어가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 인간의 아들도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다.”
☆ ☆ ☆
글로텐 산맥 중부의 한 깊은 산속.
이곳에는 제법 견고한 요새가 하나 건설되어 있었다.
상당히 기이한 요새였다. 요새 자체는 그냥 평범하게 성벽과 연병장, 건물이 모인 것이지만 그 지정학적 위치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요새란 자고로 방어를 위해 세우는 법이다. 그런데 이곳은 중요한 교통로도 아니고, 주위에 중요한 행정 도시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산속에 요새 하나만 덜렁 세워져 있는 것이다. 전쟁 시 대피를 위해 산속에 피난용 요새를 세우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 경우 글로텐 산맥에는 훨씬 지리적으로 좋은 장소가 많이 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납득이 가는 이유가 있었다.
안타레스 공국의 행정 서류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이 요새의 용도는 병사 양성용 연병장이었다. 하지만 직접 요새를 본 이라면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이 요새는 단지 병사 양성용 연병장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철저한 방어 태세다.
모든 것은 이 요새, 클로이 가드의 지하에 위치한 클로이 공간 포털의 존재 때문이었다.
공간 포털의 존재는 안타레스 공국 최대의 비밀 중 하나다. 이 공간 포털이 있음으로 해서 백국 시절 얼마나 큰 효용을 보았는가? 안타레스 공국이 자리 잡은 후에도 이 공간 포털을 이용해 은밀한 잠행을 몇 번이나 했으니, 이는 결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될 중요한 시설이었다.
문제는 그 중요성에 비해 공간 포털의 존재를 아는 이가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이 포털을 이용해 탈출한 이종족 노예의 수만도 거의 천에 이른다. 탈출한 노예들을 무사히 하산시키기 위해 오크 병사들을 상주시키다 보니 그들 대부분도 공간 포털의 존재를 알고 있다. 아무리 오크가 단순 무식하다 해도 땅 밑에서 사람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데 못 알아채라는 건 무리다.
물론 레펜하르트도 이 공간 포털의 비밀을 발설한 이는 사형으로 다스리겠다며 엄포를 놓긴 했다. 하지만 비밀을 아는 이가 천 명도 넘는데, 모두가 입을 다물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처사다.
그래서 카를은 만일을 대비해 클로이 가드의 규모를 키우고 정예 중 정예를 골라 이곳을 지키게 했다. 혹여 외부의 군대가 이 포털로 안타레스 공국 내부에서 쳐들어오는 걸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아예 공간 포털을 부숴서 아무도 못 쓰게 하는 것이지만, 그러기엔 공간 포털이 너무 쓸모가 많았다.
오늘도 클로이 포털로 향하는 통로는 수십의 정예 오크병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경비를 서고 있던 오크 하나가 하품을 하며 동료에게 오크어로 말했다.
“하암, 교대 시간 아직 멀었나?”
“슬슬 시간 된 거 같은데? 후딱 교대하고 가서 잠이나 잤음 좋겠다.”
타성에 젖으면 게을러지는 건 인간이나 오크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곳을 경비한 지 몇 년째, 단 한 번도 침입이 없었으니 오크 경비병들의 얼굴에도 긴장 따윈 보이지 않았다.
벽에 걸린 화톳불이 흔들리며 반쯤 조는 오크들의 얼굴을 비춘다. 그때, 그림자의 움직임에 맞춰 뭔가가 함께 흔들렸다.
“……엉?”
기척을 느끼고 오크 한 명이 졸린 눈을 치켜뜰 때였다.
파아앗!
선혈이 튀며 오크의 목이 반 이상 베어졌다. 순간 놀라 다른 오크가 눈을 부릅뜨려던 때였다.
‘뭐, 뭐?’
푸욱!
단검이 남은 오크의 복부를 깊숙이 찔렀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오크는 비명조차 못 지르고 입을 쩍 벌렸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엘……프?’
엘프가 대체 왜 이런 짓을?
의문을 품은 채 오크 경비병은 그대로 절명했다. 단검을 뽑아 피를 닦으며 엘프 여인, 렐시아가 차갑게 웃었다.
‘이제 곧 그분들이 오신다.’
클로이 공간 포털의 존재에 대해 렐시아가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함께 지내던 선배 시녀, 안타레스 공국이 백국이던 시절 구출되었던 엘프 여인 한 명이 무심코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땐 정말 놀랐어. 갑자기 눈앞이 바뀌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데…….
여인 딴에는 노예에서 해방되었던 그 감격을 떠올리며 무심코 한 소리였다. 렐시아가 인간이 아니라 엘프인 만큼, 딱히 비밀을 발설한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렐시아에게는 실로 귀중한 정보였다.
렐시아는 계속 통로 안쪽으로 향했다. 슬레이어의 교육을 충실히 받은 그녀는 무음암살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무리 정예 중 정예라지만, 방심하고 있던 오크 경비병들은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잠시 후, 모든 경비병들을 처리한 그녀 앞에 높이 10여 미터 정도의 커다란 석실이 나타났다. 설식 가운데 서 있는 아치 형태의 석조 조형물로 다가가며 렐시아가 품에서 작은 엠블렘 하나를 꺼냈다.
거대한 나무 사이로 각종 신수들이 정교하게 세공된 은빛 엠블렘, 그것을 조형물에 가져가며 렐시아가 작게 속삭였다.
“간섭 시동. 사용자, 실란 필 마르시스. 인증번호 352525.”
우우우웅!
희미한 굉음과 함께 아치가 빛을 발한다. 클로이 다이만 포털이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빛 속에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렐시아가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어서 오세요, 위대한 분이시여.”
흑발의 미남자, 세이어가 포털 밖으로 완전히 나왔다. 세렐라인과 필레나도 뒤를 따랐다. 포털의 빛이 이내 사그라졌다.
세이어가 렐시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네가 말한 내부 조력자인가 보구나, 세렐라인.”
“예, 이 아이는 어리석은 다른 엘프들과 달리 인간에게 충실합니다.”
세렐라인의 대답에 세이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의 아이야, 진실을 아는 네가 어찌 그들을 어리석다 하느냐?”
그녀는 당황했다. 세이어가 저런 식으로 말할 줄 미처 몰랐던 터였다.
“저들의 행위는 위험한 것이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내 가르침이 그러하니 세상의 아이들이 그리 여김은 크게 기쁘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이가 그래서는 곤란하구나.”
“죄, 죄송합니다.”
세렐라인이 어깨를 움츠리며 세이어의 눈치를 살폈다. 말은 저리 했어도 세이어는 그리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죄송해할 것까진 없으니.”
한가한 어조로 말을 이으며 세이어는 무릎 꿇은 렐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네 이름은?”
“렐시아입니다.”
렐시아가 공손히 대답했다. 목소리며 태도, 그 모든 것에 흔들림 없는 충성심이 엿보였다.
세이어가 혀를 찼다.
“실로 쓰레기로구나.”
렐시아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혹시 위대한 분께서 분노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유용한 쓰레기는 쓸모없는 보석보다 나은 법.”
다시 온화한 표정이 되어 세이어가 렐시아에게 찬사를 던졌다.
“잘했다, 렐시아.”
그 칭찬은 비아냥이나 조롱이 아니었다. 순수한 칭찬이었다. 주인으로부터 칭찬받은 기쁨이 노예의 혈관을 가득 채웠다.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정신이 쾌락으로 물든다.
아아, 이 기쁨을 누려 본 것이 대체 얼마만이던가!
“감사합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세이어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빨을 드러낸 맹수는 아름답지. 하지만 이빨이 뽑힌 가축은 사랑스럽다. 나는 사랑스러운 이들이 좋다.”
그가 렐시아에게 손짓했다.
“안내하여라.”
“예.”
단검을 든 채 렐시아가 앞장서서 통로로 향했다.
☆ ☆ ☆
“으아악!”
깊은 밤, 외마디 비명이 어둠을 꿰뚫었다. 경비를 서고 있던 오크며, 자고 있던 이들이 모두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누, 누구냐?”
“침입자다!”
비록 타성에 젖어 있다 해도 이들은 오크 전사의 정예였다. 일단 위기감을 감지하고 나니 곧바로 전사다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멋대로 널브러져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무장을 하고 날이 바짝 선 병사가 되어 연병장으로 모였다.
모인 이들의 시선이 중앙 병영으로 향했다. 이 클로이 가드에서 가장 중요한 곳, 바로 클로이 다이만 포털로 향하는 통로가 있는 곳이다.
그곳에 처음 보는 네 사람이 서 있었다. 피 묻은 단검을 든 엘프 여인과 인간 세 명, 흑발의 인간 청년이 엘프를 보며 칭찬했다.
“잘했다, 렐시아. 비명 덕에 모두가 모였구나.”
“감사합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엘프 여인이 교태를 부리며 머리를 조아린다. 오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모습은 한때 대륙의 모든 엘프들이 보이던 태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들은 자유인이었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클로이 가드를 관리하는 총대장, 쌍검의 잘카토가 살기를 피우며 세이어에게 외쳤다. 세이어가 잘카토를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네가 이곳의 책임자냐?”
“그, 그렇다!”
잘카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더 이상 말을 섞을 것도 없이 바로 검을 날리고 싶었다. 상대는 마치 계집처럼 말라비틀어진 사내, 저런 가느다란 모가지쯤은 맨손으로도 뚝 분지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전신을 누르고 영혼마저 구속하는 느낌이다.
“크으윽!”
애써 공포를 떨치며 잘카토가 양손의 쌍검을 일제히 날렸다.
“나의 맹우여!”
쌍검이 저절로 떠올라 섬광처럼 허공을 갈랐다.
“가라! 스케반! 사타라!”
오크의 비기, 스피리츠 웨폰의 힘이 실린 두 자루 장검이 세이어의 좌우로 화살처럼 날아든다. 순간 세이어가 오른손가락을 들며 중얼거렸다.
“익스플로전.”
콰쾅!
두 자루 장검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잘카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신의 애병이 너무도 간단히 박살 나 버린 것이다.
“마, 말도 안 되는!”
세이어의 오른손가락이 잘카토를 가리켰다.
“퍼니시먼트.”
번쩍!
백색 섬광이 허공에서 내리꽂혔다. 잘카토의 모습이 빛 속에 잠겼다. 그리고 그대로 사라졌다. 피도 살도 뼈도, 심지어 비명조차도 남기지 못한 채!
잘카토에게 남은 것은 절단된 두 발목뿐이었다. 당황한 오크 전사들이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터트렸다.
“잘카토 님!”
“전사 잘카토!”
외침은 그대로 분노와 살의가 되었다. 오크들이 각자 무기를 쥐고 맹렬히 덤벼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죽인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오크 병사들을 보면서도 세이어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여전히 태연한, 나른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너희들은 내 분노를 받을 자격이 없으니…….”
그가 살짝 발로 땅을 눌렀다.
“고통 없이 죽도록 하라.”
파아아!
세이어를 중심으로 파동이 크게 터졌다. 파동이 주위의 오크 병사들을 모조리 뒤덮으며 클로이 가드 전역으로 퍼져 갔다.
달려들던 오크 병사들이 그 자세 그대로 제자리에 굳었다. 오크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 으어…….”
“어어…….”
육체가 점점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손부터, 발부터, 전신이 결정화되어 간다.
파사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기를 든 손이 박살 났다. 끝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린다.
“으아아악!”
고통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두려웠다. 그래서 더더욱 비명도 컸다.
처절한 비명이 어둠 속을 메아리쳤다. 수십, 수백 명이나 모인 오크 병사들 모두가 소금 기둥이 되어 박살 나 가루가 되어 흩뿌려졌다.
클로이 가드 전역에 적막이 흘렀다. 연병장에 모인 오크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생명체가 방금 그 파동으로 인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세이어와 세 여인을 제외하고는.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오크들을 보며 렐시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감히 주인을 배반하고 인간에게 칼을 들이댄 추악한 것들이 응당한 벌을 받은 것이다.
물론 이걸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들을 벌하는 것만으로는 그녀가 품은 분노를 해소할 수 없었다.
권왕 레펜하르트.
인간 주제에 인간을 배신한 그자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필요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주인님. 당신의 분노를 풀어 드리겠습니다.’
스테반을 떠올리며 렐시아는 눈을 감았다. 세이어가 그녀를 불렀다.
“렐시아.”
“예, 위대한 분이시여.”
표정을 관리하고 렐시아는 다시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세이어가 손짓했다.
“안내하여라. 신의 위엄이 필요한 곳으로.”
2
페틀랜드 서부에 위치한 오크들만의 대도시, 오크라트.
뼈와 돌과 가죽으로 세워진 그 거대한 도시는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늑대왕의 가죽이다! 이 가죽을 뒤집어쓰면 늑대왕의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시장 곳곳에서 가죽을 파는 오크들의 외침이 들리고.
“이 양념 하나만 발라 주면 고기 맛이 차원이 달라져! 일주일 된 고기가 갓 잡은 맛이 난다니까?”
인간들로부터 각종 물건을 수입해 파는 전문 오크 장사꾼도 많이 보였다.
“자 자, 똑바로 줄을 서시오! 아직 안에 자리가 없소!”
음식점 앞에선 나이 든 오크 종업원이 대기 탄 오크들을 열심히 줄 세우고 있었다. 인간 요리사가 은퇴한 오크 전사와 손을 잡고 세운 음식점이었는데, 워낙 그 맛이 뛰어나 오크들은 줄을 서서라도 이곳의 음식을 맛보고 싶어 했다.
반대편에선 트롤 주술사가 흙으로 빚은 도자기며 부적 등을 팔고 있었다. 트롤의 부적은 단순히 액막이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트롤 주술이 깃들어 오크들에게 낮은 수준의 항마력을 부여하는 물건이었다. 실용품이다 보니 장사도 잘 되었다.
그 옆에선 일용품을 실은 가판을 열고 장사하는 중년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식칼이며 망치 등의 가정용 도구를 제작해 파는 드워프 대장간도 도시 곳곳에 서 있다. 엘프들이 관리하는 커다란 목재상이며 가구점도 몇 개나 들어섰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건물마다 오크와 인간, 트롤과 드워프가 힘을 모아 비지땀을 흘리며 일에 한창이다.
오크가 주축이 된 도시지만 오크만이 살고 있지는 않다. 이미 다른 종족의 문화를 접한 이들이었다. 여러 분야에서 종족 간 문화가 섞이며 오크가 아닌 종족들도 오크라트에서 한밑천 단단히 잡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파리 날리는 분야도 있었다.
시장 구석에 무기와 갑옷을 늘어놓고 한숨만 쉬는 이 떠돌이 드워프 무기장들처럼.
“아오, 여긴 진짜 장사 안 되네.”
“거봐요. 여긴 건축업자들이나 돈 만지지, 우리 같은 무기장이는 찬밥이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오크들은 검과 갑옷만은 결코 타 종족의 것을 쓰지 않는 것이다. 무기아비가 내려 준 무기만이 유일한 친구라 믿는 데다가, 가죽 갑옷 외에 다른 걸 걸치지도 않으니까.
옆자리에 자리 잡은 엘프 직조공 두 명이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호호 웃었다.
“단순하게 무기며 갑옷만 만드니까 그렇죠. 우리는 뭐, 오크들이 천 옷 걸쳐서 장사가 되는 줄 아시나요? 호호호.”
엘프의 직조 기술은 그 어느 종족보다도 뛰어나다. 당연히 그들이 만든 옷감도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질기고 오래간다.
하지만 오크는 애당초 천으로 된 옷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무구질 기술이면 어지간한 천옷 이상으로 질기고 부드러우며 오래 가는 의복을 만들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이 엘프 직조공들은 아예 방향을 선회했다.
“오크라도 여인은 여인인 법이죠, 호호.”
여성용 속옷과 손수건 등을 제작해 판 것이다. 아무리 가죽옷 좋아하는 오크 여인들이라지만 속옷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착용감이 달라도 너무 다른 걸?
강자를 숭상하는 오크인 만큼 겉을 연약한 엘프 의복으로 두르는 것은 치욕으로 여겼지만, 보이지 않는 속옷이나 단순한 도구인 손수건에는 의외로 정신적 거부감이 없었다. 특히 엘프가 만든 아름다운 손수건은 여인의 환심을 사는 데 즉효였기에 남성 오크들도 눈치를 보며 사 가곤 했다.
두 드워프가 인상을 썼다.
“크으, 우리도 업종 변경을 해야 하나?”
“그냥 트로리아드나 엘픈 포레스트로 옮기죠, 형님? 거긴 드워프제 무기도 인기 좋다던데.”
“차라리 아라난 그라드로 갈까?”
“거긴 너무 경쟁이 심해서 우리 실력으로는 좀…….”
이렇듯 시장은 온갖 종족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자 용 가죽 외투를 파는 오크 가죽 장인도, 인간 한 무리가 시장을 걸어가는 걸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거기 가는 인간 양반! 보아하니 여행자 같구먼!”
여행자 복장을 한 흑발의 청년과 인간 여성 둘, 그리고 엘프 여인이 함께 걷고 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외투의 품질이 꽤 조악했다. 오크라면 가죽 외투를 저리 질 나쁘게 만들 리가 없었다. 인간의 것이 분명했다.
요즘 안타레스 공국에서 가죽 외투는 무조건 오크제가 최고다. 좋은 기회 잡았다 싶어 고객 유치에 나섰다.
“그 정도 옷으로 페틀랜드를 어찌 지나려 하는가! 여기서 하나 골라 보시게!”
흑발의 청년이 빤히 오크 가죽 장인을 바라본다. 장인의 딸이 아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작게 말했다.
“아빠! 인간은 우리말 몰라요.”
“아, 그렇지.”
공용어로 바꿔 다시 오크 장인이 외쳤다.
“페틀랜드 빡세다! 좋은 옷 입어라! 이 옷 죽인다!”
외투를 흔드는 건장한 중년 오크를 보며 흑발의 사내, 세이어는 빙그레 웃었다.
“재미있는 곳이로구나.”
그가 기억하는 오크는 넓은 대지에서 천막을 치고 살며 유목 생활을 하는 종족이었다. 이런 거대한 도시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오크들이 정체성을 잃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 도시는 분명 잘 짜여 있으면서도, 오크의 문화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자의 짓인지, 오크의 짓인지 모르겠군.”
턱을 매만지며 세이어가 렐시아에게 물었다.
“이곳을 다스리는 자가 칼켄과 스탈라라 하였더냐?”
“예, 위대하신 분이여.”
“그들이 보고 싶구나.”
필레나를 돌아보며 세이어가 손짓했다.
“필레나, 그들을 불러라.”
“어떻게 부를까요?”
필레나의 눈동자 위로 싸늘한 살기가 맴돌았다. 아무 어조의 변동 없이, 세이어가 대답했다.
“많은 피가 흐르면 저절로 오리라.”
☆ ☆ ☆
열풍이 불어 닥쳤다.
불길이 바람을 타고 휘몰아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군다. 잘 닦인 석조 포장도로가 녹아내리고 폭풍에 쓸리며 몇 겹이나 굽이쳐 식어 간다.
평화롭던 시장은 순식간에 지옥이 되었다. 비명이 아우성치고 수많은 인파가 사방으로 도망쳤다. 도망치는 이들의 뒤를 불꽃의 파도가 뒤덮었다. 살이 익고 뼈가 타고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 참혹한 파괴의 중심에 한 여인이 있었다. 1미터 정도 되는 지팡이를 한 손에 든 채 그녀가 손가락을 허공에 돌리며 또다시 주문을 외웠다.
“세이그 제라핀 카바니에프, 연옥의 불길이여, 치솟아라, 뻗어 올라 드리워져 지상을 태우는 폭우가 되리! 레인 오브 플레어!”
수십, 수백 줄기의 화염 비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건물에 불길이 치솟고 천막들이 연달아 불이 붙었다. 사방이 자욱한 연기로 가득했다. 오크와 엘프, 드워프, 트롤과 인간 할 것 없이 모두 절규하며 죽어 갔다.
“으아악!”
“마법사다!”
“인간 마법사가 나타났다!”
잠시 후, 한 무리의 오크 전사들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정신없이 뛰어왔는지 숨이 거칠었다. 오크라트의 시티 가드들이었다.
오크 경비대장이 검을 뽑아 들고 필레나를 겨누며 소리쳤다.
“전사들이여! 저 사악한 인간 마녀를 격살하라!”
과연 오크답게, 누구냐고 묻거나 왜 이런 일을 하느냐 등의 쓸데없는 대화 따윈 시도하지도 않았다. 일단 쑤시고 나서 시체를 바라보며 ‘이 자식이 누굴까?’라고 의아해하는 것이 오크 전사의 덕목인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명의 오크 전사들이 검을 들고 용맹하게 돌격해 갔다.
“크아아!”
“타아앗!”
필레나가 우아한 손동작으로 지팡이를 허공에 휘저었다.
“그라운드 데스!”
검은 기운이 퍼져 오크 병사들을 일제히 뒤덮었다. 강렬한 죽음의 공포를 안겨 상대를 미치게 만드는 정신계 마법이었다. 어지간한 전사라면 버텨 낼 수 있겠지만, 항마력이 없는 오크에겐 이토록 무서운 마법도 없다.
그런데, 검은 기운 속에서도 오크 전사들이 힘겹게 버텨 냈다.
“크윽!”
“크으윽!”
그들의 가슴에 걸린 트롤 부적 덕이었다. 사용자의 정신력과 비례해 항마력을 부여하는 이 부적이 있으면 오크라도 정신력으로 마법을 버텨 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오크 전사들이 그라운드 데스를 이겨 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경비대장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흥!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남들만큼 버틸 수 있게 되었을 뿐이야, 멍청한 놈들.”
필레나가 차갑게 뇌까렸다. 어차피 그라운드 데스는 그리 고위 마법이 아닌지라 그녀도 대충 예상한 결과였다.
긴장한 경비대장이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화살을 쏘아라!”
상대의 마법이 예사롭지 않으니 무작정 돌진하기가 꺼려진 것이다. 화살로 집중력을 흩은 뒤 처리할 셈이었다. 수십 대의 화살이 필레나와 세이어 일행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화살 비는 곧바로 필레나의 마력 방어장에 모조리 막혔다. 그리고 그녀는 날아온 화살들을 그냥 땅에 버리지 않았다.
“에어 웨이브.”
시동어가 울리며 바람이 불어 사방의 화살들을 허공으로 떠올린다.
“매스 웹.”
다량의 마법 거미줄이 형성되어 떠오른 화살들을 뒤덮었다.
“파이어.”
가연성 물질인 마법 거미줄에 얽힌 화살들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거스트 오브 윈드.”
저 모든 마법을 필레나는 거의 한순간에 처리해 버렸다. 전부 3서클 이하의 하위 주문인 만큼 시간이 들 이유가 없었다.
폭풍이 불었다. 불화살들이 폭풍에 실려 무자비한 기세로 반전해 날아갔다. 화살을 쏘았던 오크 병사들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불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크악!”
“컥!”
“앗 뜨거!”
사지 여기저기에 불화살이 박혀 오크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필레나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스톤 블록.”
땅위에 작은 돌기둥을 솟아오르게 하는 1서클 주문, 스톤 블록은 원래 상대의 발밑에 걸림돌을 생성해 추적자를 넘어지게 하거나 군마의 진격을 막는 식의 보조 주문이다.
그러나 필레나는 스톤 블록을 그런 식으로 쓰지 않았다.
그녀는 저 오크 병사들의 좌우에 위치한, 불타는 건물의 지지대에 스톤 블록을 걸었다.
불화살을 날리며 썼던 화염과 풍계 마법, 그 와중에 온도 차를 감지해 건물의 지지대 강도를 파악하고 대기의 흐름을 파악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건물들의 취약점을 순식간에 파악한다. 그리고 그 취약점에 아주 간단한, 작은 땅의 뒤틀림을 만드는 마법을 날려 준 것이다.
그 결과는…….
우르릉!
불타던 좌우의 건물이 일제히 붕괴되어 오크 시티 가드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불에 타고 파편이 뒤덮여 생매장되며 오크들이 비명 속에 죽어 갔다.
“으아아아악!”
땀 한 방울 안 흘린 채 필레나는 그 모든 참상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쓴 주문은 대부분 3서클 이하 마법뿐이다. 마력 소모도 심력 소모도 거의 없었으니 태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어난 결과는 어지간한 고위 서클보다도 더 파괴력이 크다. 그녀의 소꿉친구가 창안한 마법적 상황 제어 이론은 이제, 엘류시온의 목소리로 한껏 연산력을 높인 필레나의 손에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있었다.
싹 쓸린 오크들의 시체를 보며 필레나가 물었다.
“세이어시여, 더 많은 피가 흘러야 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겠구나.”
파괴의 흔적 너머를 바라보며 세이어가 기분 좋게 웃었다.
“기다리던 이들이 왔다.
☆ ☆ ☆
칼켄과 스탈라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오크라트의 건물 지붕 위를 치달리고 있었다.
“이게 뭔 난리야?”
뻐드렁니를 드러낸 채 칼켄이 으르렁댔다.
그는 평소처럼 자신의 천막성에서 수하 부족의 전사들을 굴리며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크라트 서부 시장에서 폭음이 들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폭발 속에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칼켄은 바로 긴장했다. 그 많은 전쟁을 통해 그는 저 기운을 여러 본 맛본 바가 있었다. 익숙하디 익숙한, 마법사의 기운이었다.
“침입자!”
수하 부하들에게 출동 명령을 하달하며 본인도 무기를 들고 바로 천막성을 뛰쳐나갔다. 따로 업무를 보던 그의 아내, 스탈라도 잽싸게 합류했다.
서부 시장에 도착해 보니, 그곳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파괴의 흔적이요, 시체와 핏물, 육편으로 가득했다. 끓어오르는 분노 속에서 스탈라가 한 곳을 가리켰다.
“남편, 아무래도 저것들이 원흉인 것 같은데?”
핏발 선 눈으로 칼켄이 자신의 애도를 뽑아 들었다.
“감히 나의 도시를!”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검 위로, 그보다 더 거대한 녹색 블레이드 오러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죽여 버리겠다, 인간 마법사!”
가공할 기세가 오크 대족장 칼켄의 주위를 소용돌이친다. 필레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2.3미터의 거대한 오크가 맹렬히 포효하니 그 압박감만으로도 숨이 멎는 듯했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녀가 지팡이를 움켜쥘 무렵이었다.
“물러나라, 필레나.”
만류하며 세이어가 앞으로 나섰다.
“저들은 아직 네가 상대할 수 없겠구나. 다른 아이들을 지켜 주지 않으련?”
“뜻대로 하소서.”
물러난 필레나가 지팡이를 들고 세렐라인과 렐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세이어가 칼켄을 보며 빙긋 웃었다.
“네 기운이 실로 강대하다. 네겐 내 분노를 받을 자격이 있구나.”
으르렁대며 칼켄이 눈을 부라렸다.
“네놈이 우두머리인가 보구나!”
하지만 칼켄은 바로 몸을 날리지 않았다. 평소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 눈앞의 인간이 피우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경각심이 강하게 뇌리를 두들기고 있으니 도저히 흥분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눈싸움만 하고 있을 상황도 아니지.’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쏘아 내며 칼켄이 선공을 날렸다.
“타아앗!”
녹색의 오러가 빛의 기둥이 되어 세이어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세이어는 피하지 않았다. 무심히 날아오는 블레이드 오러를 보고만 있었다.
‘뭐야, 저거? 겉멋뿐이었나?’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 세이어를 보며 칼켄이 의아해할 때였다.
“카오틱 실드.”
낭랑한 음성과 함께 암흑의 방패가 형성되어 녹색 오러 앞을 가로막았다. 방패와 충돌한 칼켄의 오러가 비명을 지르며 박살이 났다.
콰콰콰쾅!
폭음 속에서 칼켄이 도리어 눈을 빛냈다.
“그래! 예삿놈이 아닐 줄은 알았다!”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칼켄이 거구를 허공에 띄웠다.
“타아앗!”
대지도 쪼갤 듯한 강렬한 일격이 세이어의 정수리를 정확히 직격한다. 세이어가 한손을 들었다.
“아케인 핸드.”
마력의 거대한 손이 형성되어 칼켄의 대검을 도중에 붙잡아 버렸다. 블레이드 오러가 마력과 충돌해 연신 전격을 방전시켰다.
파직! 파지직!
“이익!”
신경질적인 외침을 흘리며 칼켄이 검을 놓았다. 스피리츠 웨폰을 쓰는 오크 전사들은 인간 기사와 달리 무기를 놓는 것을 그리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맨손으로 세이어에게 접근하며 칼켄이 양 주먹을 폭풍처럼 날렸다.
“가죽 다지기!”
오러를 실은 연타가 세이어의 전신을 포위하고 날아들었다. 2.3미터의 칼켄에 비해 세이어의 육체는 고작해야 170센티미터 정도. 녹색 그림자가 순식간에 세이어를 뒤덮었다.
세이어는 웃었다.
“프리스매틱 가드.”
무지갯빛 장막이 형성되어 칼켄의 공격을 모조리 가로막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강렬한 반발력이 일어나 칼켄이 오히려 뒤로 튕겨 났다.
“크으윽!”
마치 대포처럼 칼켄의 거구가 10여 미터 이상 날아간다. 스탈라가 놀라 외쳤다.
“남편!”
간신히 자세를 잡으며 칼켄이 고개를 들었다. 양 주먹이 얼얼했다. 그의 애검은 여전히 상대의 이상한 손 같은 것에 붙잡혀 있다.
세이어가 까닥거리며 손짓했다. 마력의 손이 사라지며 애검이 도로 칼켄에게 날아갔다.
“네 무기를 가져가거라. 나는 불리를 탐하는 자가 아니니, 그대의 불리不利를 나의 이利로써 사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애검을 도로 잡아채며 칼켄이 인상을 구겼다. 강해도 보통 강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칼켄도 오크 대족장, 대투사라 불리는 이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강하긴 강하구나. 하지만 이 핏값은 반드시 받아 내겠다!”
칼켄이 검을 바닥으로 길게 늘이며 재차 돌진해 갔다. 수십 개의 녹색 검광이 화려한 궤적 속에서 세이어를 노리고 쇄도했다.
그러나 세이어는 그야말로 철벽이었다. 그 어떤 공격도 그의 강력한 마력 방어장을 뚫을 수가 없었다. 반면, 그가 한 번 손을 쓸 때마다 칼켄의 몸에서 피가 흐른다.
“애시드 스톰.”
산성의 폭풍이 불어와 칼켄의 두꺼운 피부를 덮어 간다. 극렬한 통증과 함께 어지간한 짐승보다도 두꺼운 가죽이 녹아내린다.
“크으윽!”
오러 가드를 높여 산성액을 밀어내며 칼켄이 계속 거리를 좁히자 이번엔 암석의 창이 쏟아져 온다.
“스톤 스피어.”
돌로 된 창쯤은 맨손으로도 부술 수 있다. 칼켄의 일격에 석창이 박살 나자 이번엔 박살난 돌 파편이 투석이 되어 칼켄의 전신을 두들겼다.
“레인 오브 스톤.”
근육을 부풀리며 칼켄이 오러 실드를 펼쳤다. 마력을 실은 투석이 죄다 튕겨 났다. 칼켄이 포효를 터트렸다.
“이 정도론 어림없다!”
세이어가 혀를 차며 필레나를 돌아보았다.
“너처럼은 잘 안 되는구나, 필레나. 현 시대의 마법도 제법 오묘하군.”
필레나가 쓴 연계 마법은 단순한 마법 효과의 연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효율을 낳았다. 흥미를 느껴 세이어도 한번 시도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꽤 힘들다.
필레나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현 시대의 마법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것이지요.”
“그런가? 아, 그렇군. 이해할 수 있다.”
“알려 드릴까요?”
세이어는 거절했다.
“그 수법은 가난한 자의 것. 부유한 자라면 달리 검소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칼켄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세이어가 차갑게 웃었다.
“아케인 블래스터.”
섬광이 번뜩였다. 거대한 빛의 기둥이 천둥을 동반하며 대지를 파헤치고 날아들었다. 어마어마한 기세에 칼켄이 사색이 되어 몸을 날렸다.
콰콰콰쾅!
빛의 기둥이 건물 수십 채를 박살내며 오크라트의 서쪽에 거대한 자국을 남겼다.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본 칼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헉헉, 뭐 이런 무식한 위력이…….”
스탈라가 단검을 양손에 쥐고 뛰어들었다.
“함께한다, 남편!”
블레이드 오러를 찬란히 빛내며 스탈라가 세이어의 등 뒤로 돌아가며 외쳤다.
“마법사 상대로 전사의 도리를 지킬 필요는 없어! 이 경우라면 칼도 슬퍼하지 않아!”
“알았다, 마누라!”
오크 전사라면 응당 상대와 일대일로 자웅을 겨루는 것이 도리, 하지만 사악한 마법사 상대라면 둘이 덤벼도 명예를 잃을 일이 없다.
세이어의 앞뒤로 포진한 채 칼켄과 스탈라가 살기를 피웠다. 등 뒤를 힐끔거리며 세이어가 재미있어했다.
“부부가 다정하니 참으로 보기 좋구나.”
그야말로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젊은 놈이 겉멋만 들었구나!”
비웃으며 스탈라가 양손을 떨쳤다.
“가라! 나의 자매여!”
열두 자루 단검이 블레이드 오러를 머금고 사방으로 비산했다. 어차피 칼켄과의 전투를 보며 상대의 저력은 충분히 파악했으니, 처음부터 최강의 공격으로 나선 것이다.
쌔애애액!
바람을 가르며 열두 자루 단검이 세이어에게 쇄도했다. 세이어가 그 모습을 빤히 보며 말했다.
“그런 수법이라면 나도 가지고 있다.”
세이어의 주위로 마력의 원반 열두 개가 형성되어 맹렬히 회전했다.
“플로팅 디스크.”
마력의 원반이 날아가 스탈라의 단검을 강타했다. 허공에서 열두 개의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열두 자루의 단검이 일제히 박살 나 버렸다.
“아아악!”
평생을 함께했던 맹우의 죽음에 심력이 흔들린 스탈라가 비명을 질렀다. 공포가 밀려왔다. 어떻게 이렇게 간단히 그녀의 최강기를 박살 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마, 말도 안 돼…….”
3
“매스 익스플로전.”
폭발과 함께 칼켄과 스탈라가 뒤로 날려 갔다. 처참하게 바닥을 뒹굴며 스탈라가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
그녀의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이미 팔 하나가 부러지고 전신 여기저기 근육이 찢겨 제대로 서기도 힘들다.
칼켄은 더욱 심했다. 피 양동이를 뒤집어쓴 것처럼 선혈이 전신 곳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두 사람과 달리 세이어에겐 조금의 상처도 없었다. 아니, 상처는 고사하고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흙먼지로 인해 더러워진 흔적조차 없다.
“이 정도가 요즘 오크의 힘인가? 실로 놀랍구나. 내 가르침이 올바로 퍼졌음에도 천년의 힘을 유지하고 있다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세이어가 만족의 표정을 보였다.
“굳이 손발을 놀린 보람이 있구나.”
“괴, 괴물…….”
스탈라는 이를 갈았다. 전쟁 속에서 대마법사라 불리는 이도 제법 보았지만 저 괴물은 차원이 달랐다. 오러 유저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그녀와 칼켄이 옷자락 하나 건드려 보지 못하다니!
“네놈은 누구냐?”
이를 갈며 스탈라가 소리쳤다.
세이어가 대답했다.
“알게 될 것이다.”
칼켄이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일어났다.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다시 애검을 부둥켜 잡고 투지를 끌어 올린다.
“으아아아!”
폭발적인 오러가 칼켄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세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알았다. 너는 더 이상 덤빌 필요는 없다.”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만 죽도록 하라. 그것이 네 의무다.”
“미친 새끼!”
욕설을 퍼부으며 칼켄이 몸을 날렸다. 생사여탈을 손에 쥐었다는 듯한 저 어처구니없는 말투가 그로 하여금 없는 힘도 끌어내게 했다.
기합을 터트리며 칼켄이 세이어를 향해 검격을 내리쳤다.
“벼락 떨구기!”
녹색 번개가 불규칙적인 궤도로 번뜩여 세이어의 정수리를 노린다. 물론 이번에도 세이어는 간단히 마력장을 펼쳐 공격을 막았다.
“덤빌 필요 없대도.”
튕겨나간 칼켄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었다.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공격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자세를 잡으며 칼켄이 재차 검을 내리쳤다.
“날벼락 떨구기!”
번쩍!
녹색 번개가 몇 배나 두꺼워지며 세이어의 마력장을 두들겼다. 파괴력이 연타로 들어와 중첩되니 이번엔 세이어의 마력장도 버티지 못하고 뚫려 버렸다. 순간 당황한 세이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음?”
콰쾅!
칼켄의 날벼락 떨구기가 바닥을 찍으며 가공할 폭발을 낳았다. 폭발 속에서 세이어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앞섶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날벼락 떨구기의 파괴력을 미처 해소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력장을 몇 배로 강화하며 세이어가 감탄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번 건 좀 괜찮았다.”
그래도 칼켄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몸을 날리며 칼켄이 내려 베기를 시도했다.
“쌍벼락 떨구기!”
이번엔 세이어도 대비를 해 몇 배나 강한 마력장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내려 베기를 가뿐히 막으며 그가 피식거렸다.
“그놈의 벼락, 많기도 하구나.”
그때였다.
세이어의 발밑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의 머리를 내려친 칼켄의 오러 스킬, 그것은 스피리츠 웨폰으로 움직이는 대검의 힘이었다. 칼켄 본인은 오히려 세이어의 하단으로 파고들어 손칼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번쩍!
녹색 섬광이 세이어를 아래로부터 올려 벤다. 그 기세는 실로 하늘로 솟구치는 번개! 이번에는 세이어의 표정도 다급해졌다.
“윽!”
신음까지 흘려가며 세이어가 정신없이 뒤로 몸을 날렸다. 수십 개의 마법 결계를 단숨에 펼쳐 내고 바람 걸음 주문을 삼중으로 겹쳐 이동력을 극대화한다. 이 모든 것이 찰나에 이루어졌다.
파아앗!
피가 튀었다.
세이어의 오른쪽 뺨에 길게 그어진 상처가 생겨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세렐라인이 경악해 소리쳤다.
“세이어시여!”
세이어는 멍하니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이번엔 정말로 놀랬다.
“하, 하하…….”
너무 기가 막혀 웃음마저 나왔다.
“크크, 어떠냐? 건방진 놈!”
이죽거리며 칼켄이 대검을 고쳐 쥐었다. 이 쌍벼락 떨구기는 허구한 날 제라드에게 처맞으며 만든 기술이었다. 날벼락 떨구기로도 제라드의 더블 스파이럴 가드를 뚫지 못하자 칼켄은 심히 고민하고 고민했다. 아무리 궁리해도 날벼락 떨구기보다 더 강한 기술을 만들 자신은 없었다.
이 고민을 제라드는 쉽게도 풀어 줬다.
-나도 스파이럴 가드 두 개 쓰잖아? 네놈도 두 개 써. 그 생 번개 베기인가 뭔가.
제라드의 조언은 효과적이었다. 무식한 오크의 입맛에 딱 맞기도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스피리츠 웨폰과 본인이 연계해 상하로 날벼락 떨구기를 날리는 신기술, 쌍벼락 떨구기였다.
눈을 깜박거리다 세이어가 무심코 물었다.
“……떨구기가 아니잖아? 올려치기인데?”
“그게 이 기술의 묘미지.”
이빨을 드러내며 칼켄이 씩 웃었다. 세이어도 함께 미소를 띠었다.
“오크의 교활함인가?”
세이어가 손으로 뺨에 묻은 핏물을 슥 닦았다.
“이 시대의 오크는 강인함과 교활함을 겸비했구나. 좋은 정보가 되었다.”
피가 닦였다.
상처도 닦였다.
그저 한번 슥 문질렀을 뿐인데, 그의 뺨에 난 긴 자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칼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젠장,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이건가?’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정신적으로 타격을 주었다 여겼다. 그런데 상대는 여전히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다. 저래서야 반격의 기회를 노릴 수도 없다!
“크윽…….”
이를 가는 칼켄을 향해 세이어가 뇌까렸다.
“네 힘에 경의를 표한다, 오크 전사여.”
세이어의 전신에서 가공할 마력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랏빛 영기가 폭풍처럼 피어올랐다.
“그러니 이젠 죽여 주겠다.”
세이어의 손가락이 칼켄을 가리켰다. 그 어떤 주문 언령도 없이, 오직 시동어만으로 9서클 폭발 주문이 세상에 구현되었다.
“임페리얼 버스터.”
가공할 폭염이 눈앞을 뒤덮는 순간, 칼켄은 깨달아 버렸다.
“아아…….”
처음부터 반격의 기회 따윈 없었다. 저자는 언제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사투는 저자에겐 그저 놀이였을 뿐이다.
절망이 노회한 투사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폭염의 기둥이 순식간에 칼켄을 뒤덮었다. 채 피할 틈도 없었다. 가공할 열기가 순식간에 칼켄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대검, 마그눔이 순식간에 녹아 증발해 버렸다.
오러 가드가 종잇장처럼 찢겨 날아가며 강철 같던 칼켄의 육체가 파편이 되어 폭풍과 함께 날려 갔다.
스탈라가 절규를 터트렸다.
“남편!”
콰콰콰쾅!
오크라트 서부 지구가 통째로 날아가며 거대한 궤적이 생겨났다. 수많은 비명과 아우성 속에 수많은 생명이 불꽃에 사그라진다.
그 지독한 파괴의 궤적 위로, 둥근 무엇인가가 툭 떨어졌다.
칼켄의 머리였다.
“으아아악!”
남편을 잃은 아내의 절규가 오크라트의 허공을 가득 메웠다.
☆ ☆ ☆
칼켄의 머리가 제멋대로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더러운 먼지와 핏물에 엉켜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라는 남편의 머리를 안고 오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사지는 이미 저 흑발의 청년에 의해 부러지고 상처 입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이어를 노려보며 스탈라가 차갑게 외쳤다.
“죽여라, 인간!”
“여인이여. 그대는 죽이지 않는다.”
세이어가 허공에 손짓을 했다. 쓰러진 스탈라의 몸이 저절로 떠올랐다. 세렐라인과 렐시아, 필레나 또한 세이어와 함께 허공으로 부유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충분히 발전하였다. 인류에게 있어 더 이상 오크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이 존속하고 싶다면 그 가치를 증명해야 할 터다. 지금의 너희들은 그 가치가 없다.”
“네가 뭔데 우리 가치를 정하고 말고 하느냐!”
으르렁대는 스탈라의 의문에 세이어는 조용히 답했다.
“나는 세이어, 인류의 신이다.”
“지랄하지 마! 너 같은 신이 세상에 어디 있어?”
스탈라의 비난에도 세이어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부유 마법으로 고도를 높일 뿐이었다.
“오크 여인아, 보아라.”
점점 고도를 높이니 오크라트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이어가 무심하게 뇌까렸다.
“여인이여, 그대는 살아서 노예의 어머니가 되어라. 그리고 아이들에게 가르쳐라.”
참으로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어 간다.
“존엄을 버리고, 긍지를 버리고, 자유로운 꿈을 버리고, 인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갖추어 노예의 행복을 찾게 하여라. 그것이 네 의무다.”
기가 막혀도 너무 막힌다. 하도 어이가 없어 반박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스탈라가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 누가 그런 개소리를 따를 것 같으냐!”
“그대는 따를 것이다.”
세이어가 오크라트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느닷없는 환란으로 당혹해하는 시민들이 보였다. 뒤늦게 움직이는 각 부족의 전사들도 보였다. 모두가 혼란의 도가니였다.
세이어는 허공에 오른손을 들었다. 보랏빛 영기가 솟구쳐 구름을 꿰뚫고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었다. 세상 전부를 뒤덮는 그 끔찍한 기운은 정녕 신을 자처하기에 부끄러움 없는 것이었다.
“따르지 않는다면, 모든 오크들은 이렇게 될 것이니.”
오크라트를 향해 세이어가 정해진 시동어를 영창했다.
“대이적 마법, 미티어 폴.”
하늘이 울부짖었다.
구름이 찢겨 나갔다.
멸망의 날이라도 온 것처럼 하늘 너머로 끔찍한 굉음이 울리고 또 울렸다.
이윽고 ‘그것’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순간 스탈라는 경악과 공포로 신음을 흘렸다.
“아아아…….”
하늘의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1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