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권 제56장 잊힌 역사 (57/84)

제56장 잊힌 역사

1

사방이 새하얀 금속질 벽이었다. 신전이나 왕궁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홀, 그 가운데 서서 레펜하르트 일행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긴?”

“제대로 온 건가?”

다이만 터미널 때도 그렇지만, 공간 이동 자체는 순식간이다. 잠깐 눈앞이 번쩍이더니 바로 서 있던 장소가 바뀌어 버린다.

일행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홀 여기저기서 불이 켜졌다. 천장 곳곳에 커다란 백색 구슬 같은 것이 박혀 빛을 내는데, 마치 한낮처럼 환했다.

“윽?”

“기습인가?”

불이 켜지자 일행이 놀라 주위를 경계했다. 한껏 경각심을 높이며 원진을 형성, 사방으로 검을 겨눈다. 하지만 주위는 고요했다. 그저 불만 켜졌을 뿐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러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기감을 펼치며 타시드도 동의했다.

“아무 기척도 안 느껴집니다.”

마검 엘드란을 다시 등에 차며 카를이 의아해했다.

“버려진 곳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인적은 없었지만, 버려졌다고 하기엔 너무 깔끔하다. 먼지도 거의 쌓이지 않았고 철제 벽도 매끈한 백색을 뽐내고 있다. 오랫동안 관리된 흔적이 역력하다.

“평소 상주하는 인원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재상님. 은의 현자는 평소에 속세 신분으로 산다면서요? 그럼 볼일이 있을 때만 이곳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러스의 말에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흐음, 그렇다고 경계를 늦출 수는 없지.”

아까부터 그는 홀 내부의 마력 흐름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들이 공간 이동을 한 마법진은 다시 모습을 감췄지만 그래도 그 여파는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이 홀 곳곳에 같은 느낌의 마력파가 감지된다. 같은 종류의 마법진이 다량으로 포진해 있다는 의미다.

“역시 이곳은 다이만 터미널과 비슷한 용도인 것 같다. 우리가 이용한 마법진이 그곳 말고도 대륙 곳곳에 분포하고, 이곳이 터미널 역할을 하는 거지.”

“누군가가 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소리군요, 형님.”

“그렇지.”

양 주먹을 말아 쥐며 레펜하르트가 걸음을 옮겼다.

“일단 움직여 보지. 여기 서 있어 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진 않으니.”

☆ ☆ ☆

홀 외부는 긴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좌우에 문 하나 없는, 단순하게 길기만 한 흰색 통로였다. 걸음을 옮기며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대체 뭐죠? 왜 쓸데없이 이렇게 복도만 잔뜩…….”

자고로 복도란 것은 방과 방 사이를 연결하기 위한 길이 아닌가? 이해하기 힘든 구조였다.

그렇게 잠시 걷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복도 바닥에서 둥근 원반이 분리되며 떠올랐다. 그 숫자는 일곱, 딱 레펜하르트 일행과 같은 수였다.

긴장하며 러스와 타시드가 검을 겨누었다.

“뭐지, 저건?”

“함정인가!”

허공에 떠오른 원반은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몰라, 블레이드 오러까지 끌어내며 막 두 사람이 투지를 불태우려던 차였다.

갑자기 떠오른 원반들이 움직였다. 단 일행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위이잉.

묘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복도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다. 러스와 타시드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

“……뭐야?”

뭔가 있을 것처럼 나타나더니 왜 그냥 가 버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광경이었다.

실란이 자신없어하며 슬그머니 말했다.

“혹시…… 저걸 타고 이 복도를 지나가는 게 아닐까요?”

러스와 타시드가 헛웃음을 흘리며 핀잔을 던졌다.

“멀쩡한 두 다리 놔두고 뭐하러? 은의 현자는 죄다 다리 불구래?”

“그렇다, 실란. 이 복도가 길어 봤자 200미터도 안 되는데 이걸 안 걷겠다고 저딴 걸 만들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하지만 복도란 게 방과 방을 연결하는 것이고, 여기가 방과 방 사이가 너무 멀어서 이런 구조라면…… 노약자들을 위해서 저런 장치를 해둘 수도 있잖아요?”

이래서 초인이란 작자들은 문제다. 자기들에게야 200미터야 대충 발 몇 번 구르면 닿는 거리겠지만 일반인에게는 충분히 먼 것이다.

걸음을 옮기며 레펜하르트가 손짓했다.

“계속 가 보면 알겠지. 실란 말이 옳다면 이 복도 끝에 뭔가가 나올 테니까.”

복도 끝에 다다르니 커다란 철제문이 보였다. 철제문을 기점으로 복도가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더 가다 끊겼다. 근처까지 가 보니 어둠에 휩싸여 새까만 칠흑의 공간이 나왔다. 통로는 그 공간 중앙쯤에 뻥 뚫린 형태로 나 있었다.

마치 큰 절벽 중간쯤에 뚫린 동굴 같은 형태였다. 조심스레 어둠 저편을 내려다보며 카를이 중얼거렸다.

“이건 뭔지 모르겠군요. 건축을 하다 만 건가?”

떨어져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저 절벽 아래로는 사다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식의 구조를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레펜하르트가 등 뒤로 손짓을 했다.

“일단 저 문 안쪽을 조사해 보세.”

철제문은 강력한 잠금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물론 그 마법이 아무리 강력해도 레펜하르트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낑낑대긴 했지만 이내 잠금 마법을 풀었다.

문이 열리며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홀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장에서 불이 켜지며 내부 구조가 확연히 드러났다.

“이건 또 뭐래?”

주위를 둘러보며 타시드가 들창코를 킁킁거렸다.

기이한 곳이었다. 그 공간 전체를 수백 개의 거대한 찬장 같은 것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다. 아니, 찬장이라기보다는 책장에 더 가까운 형태랄까? 하지만 그 책장에 놓여 있는 것은 책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수정구가 책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정보 저장용 수정구로군.”

대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마법의 수정구들이었다.

이 시대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자신의 지식을 저장하기 위한 매체로 서적을 사용했다. 하지만 대마법사쯤 되면 다른 방식을 찾기도 했다.

마법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마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

그 위대한 비밀을 남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마법서는 복잡한 암호와 은밀한 은유로 쓰이며 오직 마법사 당사자와 그 가르침을 이은 도제들만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엔 머리 좋은 이도 많고 암호 해독에 재능을 지닌 이도 드물지 않으니, 그것만으로는 결코 자신의 정보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정도는 해독해 정보를 빼앗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대마법사쯤 되면 정보 수정구를 애용하곤 했다.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는 이 정보 수정구는 마법의 결계를 깨기 전엔 내부 내용에 대해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다.

방 안을 둘러보며 레펜하르트가 감탄을 흘렸다.

“이 귀한 물건이 무슨 제과점 빵 진열해 놓은 것처럼 놓여 있다니…….”

정보 수정구는 그 효능만큼이나 귀했다. 재료도 귀하고 제작 기간도 대단히 오래 걸린다. 어지간한 대마법사라도 정보 수정구는 한두 개 정도 보유하는 것이 전부, 그래서 제일 중요한 핵심적인 정보만 수정구를 쓰고 나머진 서적으로 대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뭐, 나는 쓰지 않았지만.’

재수 없을 정도로 천재였던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굳이 저 정보 저장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다 외우고 있으면 되는 문제니까.

쓰지는 않았어도 정보 수정구의 용법쯤은 이미 마스터한 레펜하르트다. 그가 화색을 띠우며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하여튼 잘됐군.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어.”

이 정보 저장구의 장점은 바로, 자신보다 약한 마법사라면 절대 이 정보를 들여다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장점은 그대로 단점으로도 바뀐다.

수정구의 주인보다도 강력한 마법사라면 오히려 서적보다도 빠르고 쉽게 모든 정보를 훔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대마법사 입장에선 별 의미가 없는 단점이다. 자신의 정보 수정구를 훔쳐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마법사라면 어차피 자신보다 한 수 위, 굳이 들여다볼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라면 대단히 유용해진다.

‘이 귀한 물건이 흔한 서적처럼 놓여 있다니 정말 보통 조직이 아니군, 이거.’

이쯤 되니 슬슬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는 동안 본 공간 마법진이며 이 거대한 구조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기기들, 이것만 봐도 은의 현자란 조직이 얼마나 강력한 고대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니 어서 정체를 파악해야지.’

양손을 가슴에 모으며 레펜하르트가 주문을 외웠다.

“만물을 꿰뚫는 자, 그 눈이 내게 임해 통찰의 시야로 화하라. 임프로브드 데이터 리딩.”

순식간에 수정구들의 잠금 결계가 차례로 해지되며 그 속에 담긴 지식이 레펜하르트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

그것은 보통 정보가 아니었다.

바로, 잊힌 옛 역사에 대한 정보였다.

☆ ☆ ☆

수만 년 전, 주신 세이어가 인간을 창조하였다.

창조된 인간은 곧 번성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놀라운 번영을 누렸으니, 그 찬란한 시대를 일컬어 은의 시대라 부르게 되었다.

하나 은의 시대 인류는 오만해져 신의 자리를 탐했으니, 이에 분노한 세이어께서 진노의 잔을 부으사 그 찬란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문명을 잃은 인류의 고통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울며 인류는 세이어께 용서를 구했고, 자비로운 주신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어 새로운 번영을 약속하셨다.

약속의 증표로 세이어께서 인류를 도울 새로운 종족을 내려 주셨으니, 이는 곧 엘프와 드워프, 또 오크라.

아름다운 엘프를 빚어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고, 손재주 좋은 드워프를 빚어 인간의 집을 짓게 하며, 힘이 센 오크로 하여금 인간의 궂은일을 돕게 하였으니, 저들을 부리며 인류는 다시 번영의 길을 걸었다.

수많은 인간의 왕국이 생기고 서로 싸우고 또는 협동하며 문명을 발전시켜 갔다. 그 와중에 어리석은 노예 종족들이 인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야만화된 오지의 이종족들이었다.

인간들 사이의 전쟁이 심화되며 인간 왕국의 힘도 서서히 약해졌다. 그 틈에 야만화된 오지의 노예 종족들이 인간을 습격하게 되었으니 날이 갈수록 점점 그 피해가 커졌다.

결국 보다 못한 세이어께서 위대한 선지자에게 뜻을 전해 인간을 보살피게 하였으니, 이가 바로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초대 황제, 바슈탈론 1세였다.

바슈탈론 1세는 오지를 청소하고 인류의 안전을 도모하게 되었으니 그 이후 노예 종족들도 본성을 되찾고 인류에 대적하는 그릇됨을 버리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세이어 교단이 가르치는 세계의 역사다.

하지만 오지의 이종족을 접하고 각종 고대 문헌을 해독한 레펜하르트는 또 다른 역사를 알고 있었다.

천 년 전, 최후의 엘프 왕국 엘븐하임이 멸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엘프는 인간의 노예가 아니었다.

천 년 전, 마지막 드워프 왕국 그랜드기어가 멸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드워프는 인간의 노예가 아니었다.

엘드라스 문명의 잔재, 세계수 엘븐하임 속에서 엘프는 우아한 문화와 강력한 힘을 지닌 종족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알하트란 문명의 기술을 물려받은 드워프는 플룬탄 산맥을 중심으로 거대한 지저 왕국을 세우고 번성하고 있었다.

물론 마냥 평화로운 삶인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대륙을 지배하던 인간의 아홉 왕국은 수시로 서로 싸우고, 또는 협력하며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엘프나 드워프와 충돌한 것도 부지기수였다.

예나 지금이나 엘프의 미모는 인간의 탐욕의 대상이었다. 드워프의 기술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몇 번이나 엘프, 드워프와 인류의 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서로가 멸망할 지경까지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등 뒤의 적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인류는 총력을 다해 엘프나 드워프 왕국을 공격하지 못했으니까.

변화가 생긴 것은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초대 황제, 바슈탈론 1세가 등장한 후였다.

그는 놀라운 카리스마로 전 대륙의 인류를 통일했다. 그리고 각종 개혁을 행했다.

제멋대로이던 다른 교단들을 눌러 세이어의 위세 아래 놓았다. 그리하여 모든 성직자의 힘을 손에 넣었다.

일인전승으로 전해지던 마법의 지식도 제국의 힘으로 한데 모았다. 마탑을 세우고 마법사들을 우대해 중구난방이던 마법 학파를 확실히 정리하고, 대대적으로 강력한 마법사를 대거 양성했다.

하나로 통일된 인류 제국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황제는 그 힘을 제일 먼저 대륙 동부로 뻗었다.

지금의 크로방스, 바실리, 테이칸 왕국 등이 위치한 대륙 동부는 당시만 해도 인간의 땅이 아니었다. 무자비한 전사의 종족, 오크들이 그 거대한 대지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과 오크의 거대한 종족 전쟁이 일어났다.

통일된 인류의 힘에 비해 오크들은 수십, 수백의 부족 단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개개인은 강력해도 군대로서 통일성이 부족하니 인간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또한 바슈탈론 1세는 마법사들을 대대적으로 앞세웠다. 전사의 종족이라는 오크들이지만, 마법에 대한 저항력은 너무 약했다. 강력한 오크 전사들이 서글플 정도로 맥없이 쓰러져 갔다.

결국 대부분의 오크들이 죽거나 사로잡혀 노예가 되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오크들은 산맥 너머 황무지, 페틀란드까지 쫓겨나 몬스터 취급을 받았다.

바슈탈론 1세의 정복욕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강력한 인간의 군대, 그것은 바로 엘븐하임과 그랜드기어로 향했다.

오랜 전쟁 끝에 결국 승리한 것은 인류였다.

거대한 세계수, 엘븐하임이 불타 쓰러졌다. 그 가혹한 전쟁의 여파로 신록이 우거지던 숲이 사라지고 광활한 스펠라트 사막이 되었다.

위대한 왕국, 그랜드기어는 주춧돌까지 파괴당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산맥 일부는 대분화가 일어 대륙 최대의 화산, 레단트 웨일이 되었으며 일부는 바다로 가라앉고 나머지는 열대 밀림이 덮어 대수해 플룬탄이 되었다.

살아남은 엘프와 드워프는 모두 노예가 되었다. 간신히 도망친 소수만이 오지에 숨어 명맥을 이을 뿐이었다.

이후, 인류는 자연스럽게 이종족을 노예 종족으로 인식했다. 천 년 전의 모든 역사는 잊히고 세이어 교단이 가르치는 대로 처음부터 그들은 노예로 태어났다 믿게 되었다.

인간만이 대륙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고, 인간만이 만물을 다스릴 자격이 있다고 믿으며 트롤들의 위상도 변했다.

천 년 전에도 트롤들은 소규모 부족 상태로 대륙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자연과의 동화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트롤들은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 오크처럼 대규모로 무리 짓지 않고 숲 속에서 작은 마을만을 꾸린 채 은둔자적인 생활을 영유했다. 그런 트롤은 숲 속의 현자, 숲의 보호자로 여겨졌고 가끔 인류와 접촉하는 일도 있었지만 서로 적대하는 일은 그리 없었다.

이런 트롤의 처지가 바뀐 것은 바슈탈론 제국이 대륙을 통일한 후였다.

트롤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원래 인간은 엘프나 오크, 드워프처럼 트롤 역시 그들과는 다르지만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종족 노예들을 부리게 되며 트롤 역시 저들처럼 인간 이하의 야만스러운 종족으로 여기게 되었다.

인간에게 트롤을 노릴 실리적인 이유가 생겨났다.

마법사들이 대거 양성되며 각종 마법 시약도 점점 발달했다. 한때 마법사들의 몫이었던 시약 조제는 점점 세밀하고 전문화되어 연금술이라는 독립된 학문이 되었다. 그 마법 시약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부상을 낫게 해 주는 힐링 포션이었다.

힐링 포션은 그 효능만큼이나 들어가는 재료도 희귀하다. 그래서 한때는 일국의 왕족 정도나 쓸 수 있었던 귀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연금술사들이 트롤의 피에 대해 연구하며 상황은 달라졌다. 그저 숲 속에서 살아가던 아무 상관없던 종족이 갑자기 황금과도 같은 가치를 갖게 되었다.

인식이 바뀐 인류에게 있어 트롤을 죽이고 피를 뽑는 행위는 더 이상 살인이 아니었다.

수백 년에 걸쳐 트롤 사냥의 빈도수가 점점 늘어났다. 공격받은 트롤들은 궁지에 몰리며 광폭화 상태로 맞서니, 그 흉폭한 모습에 트롤을 몬스터로 여기는 인식 역시 점점 깊어졌다.

천 년이 지난 후, 이제 트롤은 그저 몬스터의 일종으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변경에서는 아직도 숲의 현자라는 옛 트롤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애들이나 보는 동화라며 비웃음만 당했다.

그렇게 인간은 모든 경쟁자를 발밑에 놓았다. 이후 바슈탈론 제국의 권위가 흔들리며 휘하에 있던 대영주들이 하나둘 독립해 그라임, 할라인, 크로방스 왕가 등으로 분화되었을 때도 인간 자체를 위협하는 종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는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 ☆ ☆

‘내가 알아낸 역사와 거의 차이가 없군.’

뇌리에 스며드는 역사적 정보를 추려 내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의 이종족들로부터 들은 전승, 던전 곳곳에서 발견한 유물에 대한 고찰 등을 통해 전생의 그 역시 저런 추론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모르는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그랜드기어가 어디 위치했나 했더니 플룬탄이었나? 그럼 몰튼 모라스 던전도 그랜드기어의 일부였겠군.’

왜 그곳에 고대 드워프어가 적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쨌거나 큰 범위 내에선 그의 예상과 거의 맞아떨어진다. 중요한 건 그 이면의 부분이었다.

사실 전생 때 레펜하르트는 역사를 알아보면서도 내내 궁금해했다.

대체 왜 엘프와 드워프, 오크가 패배했는가?

당시의 인간들은 이종족들보다 그리 뛰어난 문명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유물과 유적을 살펴보면, 바슈탈론 제국 전의 인간들은 그렇게 이종족들에 비해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저리 압도적으로 세 종족을 지배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슈탈론 1세가 나타났고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정상적인 문명 발달 속도를 갑자기 뛰어넘어, 대량의 마법사가 나오고 수많은 마도구와 아티팩트로 무장한 인간들이 삽시간에 이종족들을 쓸어버렸다.

거대한 세계수 엘븐하임이 불탔다는데, 레펜하르트가 세운 양산형 세계수만 하더라도 현재의 힘으로 불태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산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강력한 권능이 깃든 나무다. 단순히 불태우려고만 해도 최소 대마법사 십수 명은 달라붙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엘프들이 그 꼴을 가만 보고 있을 리가 있는가? 하물며 당시의 엘븐하임은 오리지널, 지금의 세계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권능을 지니고 있는 진정한 세계수다.

드워프 왕국 그랜드기어를 붕괴시키고 왕국의 코어를 부숴 그 여파로 대륙 최대의 화산을 분화시켰다는데, 현재 드워프 도시인 그랜드 포지만 해도 어지간한 연합 왕국의 합공을 견디기에 충분히 강인한 도시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인류의 문명은 점차 발전해 갔다. 문화도 기술도 마법도 모두 예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 지금의 인류 문명을 기준으로 해도 당시의 이종족 문명은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천 년 전?

레펜하르트가 보기에 당시의 인류는 엘프와 드워프, 오크들을 억누를 힘이 없었다.

‘하지만 역사는 이종족들의 패배를 기록했고 현재 세상은 분명 인간의 것이지.’

저 이해 못 할 정보의 공백.

그 모든 것의 뒤에 바로 은의 현자가 있었다.

2

은의 시대가 멸망하며 그 시절의 문명, 그 일부를 물려받은 이들이 있었다.

스스로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한 문명, 은의 시대.

그들은 그 힘을 두려워했다. 인류가 저 초월적인 문명을 손에 넣을 경우 어리석은 선택을 해 또다시 멸망의 길을 걸을지도 몰랐다. 분수에 맞지 않는 거대한 힘을 손에 넣은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당혹에 빠져 있었다.

그때 인류의 신, 세이어가 나타나 계시를 내리며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었다. 세이어의 가르침대로 그들은 인류를 위해, 손에 넣은 강대한 힘과 지혜를 올곧게 다루는 법을 익혔다.

세이어로부터 은의 현자로 지음받은 그들은 충실히 가르침에 따랐다.

수천여 년에 걸쳐 은의 현자는 인류를 지켜보았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할 때마다 그에 걸맞은 문명 수준의 지혜와 지식을 남몰래 전수하며 인류를 이상적인 발전의 길로 이끌었다.

세월이 흐르며 점점 인류의 숫자가 늘어났다. 인류의 영역이 당시 이미 문명을 누리고 있던 엘프와 드워프, 오크의 영역에까지 맞닿았다.

다툼이 일어났다.

전쟁이 벌어졌다.

은의 현자는 계속 인류를 지켜보았다. 인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호적수가 필요했다. 엘프와 드워프, 오크의 존재는 인류에게 있어 나쁜 것이 아니었다. 저들과 경쟁하며 인류는 더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인류가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밀리지 않도록 작은 조력은 주었으되, 대부분은 인간 스스로 저들과 맞서도록 관조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좀 더 세월이 흐른 후였다.

오랜 다툼과 전쟁 속에서, 점점 이종족을 대하는 생각을 바꾸는 인간들이 생겨났다.

늙지 않고 영원히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엘프들은 인간이 원하는 이상형 중 하나였다.

놀라운 손재주와 강인한 체력을 지닌 드워프들은 인간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았다.

타고난 전사의 종족, 오크들의 강인함과 그 뛰어난 육체를 경외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늙고 추레해져야 하고, 병에 걸리거나 부상을 입으면 쉽사리 약해지는 인간들에게 엘프와 드워프, 오크의 존재는 점점 대적자가 아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옳지 못한 일이었다.

인류는 저들과 맞서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발전시켜야 했다. 결코 저들을 숭배하며 마음부터 꺾여서는 안 되었다.

세이어는 고민했다.

작은 불씨는 이내 거대한 불길로 화해 세상을 태운다. 아직은 몇몇 소수 인간들의 움직임일 뿐이지만 내버려 두면 언젠가 인류 전체의 인식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시기가 늦는다.

늦기 전에, 이종족들이 완전히 인간의 위에 서기 전에 손을 써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인류의 힘만으로는 엘프와 드워프, 오크를 당할 수 없었다.

은의 시대, 그 화려한 문명의 후계자인 엘프는 인간보다 몇 배나 앞선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은의 시대, 그 화려한 문명의 계승자인 드워프는 인간보다 몇 배나 뛰어난 기술력을 지니고 있었다.

은의 시대, 그 화려한 문명의 후예인 오크는 인간보다 몇 배나 뛰어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을 인간이 앞서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관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 ☆ ☆

정보를 받아들이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런 거였군.’

은의 현자들은 분명 자신들의 은의 시대, 그 문명의 후계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곳의 아티팩트라든가 마학 수준을 보면 확실히 그럴 법했다.

오지의 이종족들도 자신들이 은의 시대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오크나 트롤의 전승을 보면, 한때 그들의 조상은 놀라운 문명을 구가했으나 탐욕을 버리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엘프나 드워프 같은 경우엔 적게나마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물을 지니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다섯 종족이 모두 은의 시대 정통 후계자다?

일견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역시 은의 시대는 여러 혼성 종족이 모여 구축한 문명이었나.’

그 시대를 살아가며 문명을 구가하던 이들이 인간과 엘프, 드워프며 오크, 트롤이었다고 보면 별로 신기할 것도 없었다.

지금 대륙도 여러 왕국이 있지 않은가? 저 종족명 대신 바슈탈론 제국인, 그라임 왕국인, 크로방스 왕국인 등을 대입하면 별 차이도 없다.

납득하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정보를 읽기 시작했다.

☆ ☆ ☆

세이어는 결단을 내렸다.

은의 현자로 하여금 금지된 비밀의 문을 열게 하여 은의 시대, 그 강대한 힘을 세상에 풀어놓았다. 은의 수호자, 바슈탈론을 중심으로 모든 인류를 통합하고 이종족들을 정복하도록 명했다.

순식간에 몇 배나 문명 레벨이 폭증한 인간은 오랜 전쟁 끝에 모든 종족을 발아래 둘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은의 현자는 신의 이름하에 인류에게 주어진 것을 다시 거두었다. 갑작스러운 문명 발달은 부작용을 낳으니, 고대의 힘이 아직 성장하지 않은 인류에게 남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미 한번 고대의 지혜를 접한 인류는 충분히 강해졌고 더 이상의 경쟁자도 존재치 않았다. 더 이상 은의 시대 유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번성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은의 현자가 인류로부터 완전히 손을 뗀 것도 아니었다.

엘프와 드워프, 오크를 노예로 삼았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언제 다시 인류의 위에 설지 모를 이들이었다.

인류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인류가 자부심을 느끼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세이어 교단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전파했다. 신의 가르침에 따라 엘프와 드워프, 오크의 역사는 지워지고 노예로 지음받은 종족이 되었다.

그 와중에 트롤의 위상이 떨어진 것은 부수적인 효과였다.

사실 은의 현자는 딱히 트롤에게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트롤은 애당초 숲 속 깊숙이 살며 인간과 거의 접촉이 없는 종족이었다. 일종의 신령이나 산신 같은, 미신적인 존재로 여겨지던 그들이 인류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전무했다.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인류의 인식이 바뀌고 탐욕의 대상이 되어 이후 몬스터로 불리게 되었을 뿐이다.

역사를 전파한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비천한 노예를 부러워하는 인간은 없었다. 스스로가 인간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멸망한 은의 시대, 그 강대한 힘은 현세에도 여전히 영향을 끼친다. 지금도 수많은 던전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그리고 그 던전들은 모두 은의 시대의 진실을 담고 있다.

그 진실을 접한 인류가 현존하는 역사에 대해 모순을 느끼게 된다면 모든 일이 허사였다. 대책이 필요했다.

대륙 전체를 감시하며 은의 현자는 진실이 드러날지도 모르는 유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았다. 그 와중에 죄 없는 이가 희생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인류 전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절대 알릴 수 없었다.

위대한 은의 시대, 그 주역이 인간이 아닌 고대 엘프와 고대 드워프라는 진실을.

결코 의문을 품게 할 수 없었다.

대체 그 시대에 인간들은 무엇을 했는지, 저 위대한 고대인이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면 인간은 대체 무엇을 조상으로 삼고 있는 것인지를.

아무리 은의 현자라도 세상에 흩어진 모든 문헌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는 허점을 막기 위해, 몇몇 역사는 은의 시대 진실에 뒷받침되어 만들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은의 시대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고대인들을 인류의 조상인 것처럼 꾸몄다.

지금과 달리 은발에 귀가 둥근 고대 엘프들은 마치 장신의 인간처럼 보였다.

지금과 달리 키가 더 크고 흑발에 귀가 둥근 고대 드워프들은 마치 단신의 인간처럼 보였다.

진실을 기반으로 일부의 거짓을 섞으니, 인간들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반면 귀가 길고 몸이 가느다란 엘프나 귀가 뾰족하고 지나치게 짧고 굵은 드워프의 외모는 도저히 인간이라 우길 수 없었다. 오크와 트롤은 은의 시대와 무관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의문을 품게 할 수 있으니 역시 관리 대상이었다.

그들의 존재를 담은 유물은 어쩔 수 없이 개입해 빼앗았다. 다행히 저런 유물은 극히 소수여서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그렇게 인간의 인식을 가리고, 때로는 희생을 낳아 가며 수백 년에 걸쳐 은의 현자들은 역사를 조작했다.

☆ ☆ ☆

‘엥? 이게 뭔 소리야?’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였다. 어째 정보의 내용이 좀 이상했다.

‘오크와 트롤은 은의 시대와 무관하다고?’

다른 정보에서는 오크가 은의 시대의 후예라 하더니, 여기선 또 무관하다고 한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고대인들이 엘프와 드워프들이라고? 내가 뭘 잘못 읽었나?’

현재 그가 읽고 있는 정보는 한 사람이 쓴, 정리된 문장 같은 것이 아니다. 수많은 정보 수정구에 동시 접속해 데이터를 모으고 그것을 마법으로 혼용해 정리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량의 책을 읽은 이가 그 내용을 따로 간략화해 하나의 이야기로 바꾸는 방식이랄까?

이 방법의 단점은 수집한 정보 중 빈 부분이 생기면 이야기가 꼬인다는 것이다. 혹시 그런 경우인가 싶어 레펜하르트는 데이터 리딩의 범위를 더욱 넓혔다.

다른 정보 수정구를 통해 비슷한 내용만을 검색한 뒤 추려 내 보았다. 그래도 결론은 같았다.

모든 정보 수정구는 한결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위대한 은의 시대, 그 주역인 고대인은 인간이 아닌 고대 엘프와 고대 드워프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네.’

레펜하르트도 은의 시대 고대인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고대 엘프어나 고대 드워프어를 사용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대인들이 엘프나 드워프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그럼 당시의 엘프와 드워프는 뭔데?’

전생 때 레펜하르트는 은의 시대 유물의 자료에서 고대인과 엘프, 드워프가 함께 나오는 경우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직접 찾은 유물도 있었고, 오지의 엘프나 드워프가 지닌 유물인 경우도 있었다.

‘당장 엘류시온의 목소리만 해도 귀 긴 금발 엘프들이 나오잖아.’

뿐만 아니라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상위 레벨까지 사용하다 보면 오크나 트롤도 등장한다. 플레이 방식이 오크와 트롤의 습격이 닥치기 전에 모든 판자를 맞춰 떨어트리는 타입이다 보니 오크는 흉악하게 나오고 트롤은 광폭화된 상태로 구현되었지만, 어쨌건 등장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 은의 시대엔 분명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이 있었다. 그리고 은발과 흑발의 고대인 또한.

레펜하르트는 고민에 잠겼다.

“으음, 이건 도대체…….”

고대인들에 비해 엘프와 드워프가 그려진 유물은 극소수다. 하지만 모든 은의 시대 유물은 고대 엘프어와 고대 드워프어로 적혀 있다. 세상은 그저 고대어라고만 알고 있지만, 언어학적으로도 조예가 깊은 레펜하르트는 저 고대어가 현존하는 엘프, 드워프어와 같은 계통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은의 시대 문명은 엘프와 드워프가 선도하고 있었다.

인류의 조상이 된 고대인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당시의 오크와 트롤은 지금처럼 자연 친화적인 삶을 구가하고 있어 그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뿐이다.

‘엘프나 드워프의 번식력과 인간의 번식력을 비교해 보면 유물의 숫자 차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지.’

고고학적으로 볼 때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었다.

‘그런데 고대인이 사실은 고대 엘프와 고대 드워프였다고?’

순간 은의 현자들은 엘프, 드워프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당장 정보 속에 ‘귀가 길고 몸이 가느다란 엘프나 귀가 뾰족하고 지나치게 짧고 굵은 드워프의 모습은 도저히 인간이라 우길 수 없었다.’라는 내용이 있었으니까.

‘왜 은의 현자가 저런 결론을 내렸는지 모르겠군.’

은의 현자가 고대의 비밀을 감추려 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만물의 영장이라 믿었던 인류, 그 위에 노예인 줄만 알았던 엘프와 드워프가 존재했다는 것은 극단적인 이들에겐 치욕으로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굳이 고대인을 엘프와 드워프로 만들 필요는 없는데?’

장신의 인간처럼 보이는 엘프, 단신의 인간처럼 보이는 드워프가 있다면 그건 그냥 장신과 단신의 인간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명확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은의 현자가 일부러 정보를 조작한 것 같지도 않다.

인류를 수호하고, 인류의 긍지를 높이기 위해서 역사까지 조작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눈에 뻔히 보이고 가능성도 가장 높은 결론을 놔두고, 굳이 고대인들을 고대 엘프와 고대 드워프라 믿을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오지에 살고 있던 현재의 엘프와 드워프들조차도 고대인이 인간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판인데 말이지.’

모순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뭔가……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는 건가?’

의문을 품고 레펜하르트는 좀 더 정보 수정구들을 뒤져 보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아쉽군.’

혀를 차며 일단 고민을 접었다. 제국 이후의 역사를 검색해 보니 은의 현자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을 행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잔뜩 나오기 시작했다.

비밀에 접근한 유적 탐사자들을 죽이고, 유물을 빼앗고,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면 몰래 말살하고, 이종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려는 왕이나 귀족을 제거하며, 미처 손을 쓰지 못했을 경우 타국을 움직여 왕국을 전복시키는 일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하면서도 결코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은의 현자라는 명칭조차도 철저히 숨겼다. 아무리 비밀 조직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민담 형식으로 존재나 이름 정도는 알려질 법도 한데, 이들은 그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기록을 읽으며 레펜하르트는 기가 찼다.

‘이런 놈들이 세상에 있었다니…….’

왜 전생 때 인간 왕국들이 그리 잘도 뭉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놈들이 뒤에 있었으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그런 대전쟁도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테스론과 제이드가 은의 현자라고 했지? 그럼 전생 때도 마찬가지였겠군.’

지금의 유서스가 은의 협력자인 걸 보면 당시의 검성 사이러스도 은의 협력자였을 것이다. 전생 땐 사이러스가 유서스를 밀어내고 테네스의 가주 자리를 차지했었으니까.

이 시대에 있을 리 없는 알렉스가 테스론, 제이드와 함께 나타난 것을 보면 전생 때의 알렉스도 은의 현자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성녀 엘린 역시 세이어의 성직자인 만큼 은의 현자 소속일 가능성이 높았다.

즉, 전생 때 자신의 사천왕을 죽이고 레펜하르트를 궁지에 몰았던 다섯 명의 용사 일행 역시 알고 보면 모조리 은의 현자가 보낸 놈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빠드득.

주먹을 쥐며 레펜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미간이 짙게 일그러졌다.

가슴 한구석에서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그 모든 일의 뒤에 이놈들이 있었단 말이지?’

☆ ☆ ☆

필요한 정보를 대충 다 검색한 뒤 레펜하르트는 탐색 마법을 거두었다. 장시간 마법을 지속했더니 살짝 두통이 왔다.

“으음…….”

신음하는 레펜하르트를 부축하며 시리스가 수통을 건넸다.

“괜찮으세요, 레펜하르트 님?”

“아, 고마워, 시리스.”

목을 축이니 한결 나아진다.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일행은 그가 마법을 시전하는 내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카를이 물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까, 폐하?”

레펜하르트는 간략하게 정리해 얻은 정보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고대 엘프와 드워프에 대한 이야기는 뺐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일행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러스가 황당해하며 말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우리를 조종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실란도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어이가 없네요. 아니, 자기들이 뭔데 멋대로 인류의 수호자를 자처한대?”

카를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이종족에 대한 진실이 그토록 알려지지 않았는지 알 것 같군요. 저 정도로 철저한 놈들이 뒤에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다들 황당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반면 이종족들은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티티마가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거렸다.

“되게 웃긴 양반들이네? 우리가 보기엔 인간이 제일 무서운데.”

“그렇다. 대체 얼마나 겁이 많기에 저런 짓을 한 거지? 이상한 놈들이군.”

두 사람을 보며 시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마저 그렇게 생각하는 걸 보면, 확실히 저들이 성공하긴 했군요.”

얼핏 타시드를 겁쟁이라 매도하는 것처럼도 들리는 발언이었다. 타시드가 발끈하며 반박했다.

“제라드 님이나 바나텔 영감을 보고도 인간이 약하다는 소리가 나오나? 당장 폐하는?”

“그분들이야 어쩌다 한번 나오는 괴물들이잖아요.”

“전사를 숭상하는 우리 오크들 중에서도 저런 괴물은 안 나온다. 엘프 중엔 흔한가 보지?”

“아, 물론 없긴 하지만 그건 지금 시대니까 그렇죠. 과거에 없었으리란 법 있나요?”

“그럼 과거 인간들 중엔 없으리란 법이 있나? 마찬가지 아닌가?”

시리스와 타시드의 대화에 레펜하르트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 본인이 눈앞에 있는데 괴물이라니…….”

하여튼, 드러난 역사의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세상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지닌 이들이 이렇게까지 알려지지 않을 수 있다니?

“한 가지는 확실하군요.”

머릿속을 정리하며 카를이 단언했다.

“은의 현자와 안타레스 공국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3

레펜하르트 일행은 정보 수정구들이 놓인 방을 나왔다. 다른 곳도 탐색해 보기 위해서였다.

“……라고는 해도, 길이 이것밖에 없는데요?”

어둠이 깔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실란이 난처해했다. 얼마나 큰 공간인지, 시리스가 빛의 정령으로 주위를 밝혀 보아도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왜 이런 데서 길이 끊겨 있는지 모르겠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카를이 말했다.

“일단 내려가 볼까요?”

상식적인 경우라면 바닥도 보이지 않는 이 매끈한 절벽―사실은 거대한 공간의 금속 벽이었지만―을 무턱대고 내려간다는 소리가 참으로 어이없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일행에 마법사가 있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매스 레비테이션.”

다중 부유 주문으로 일행 전부를 허공에 띄운 뒤,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발을 디뎠다.

“실란, 이번엔 신성 주문 쓰지 마. 또 충돌할라.”

“안 써요, 안 써. 누굴 바보로 아나.”

핀잔을 던지며 실란도 살며시 몸을 던졌다. 일행 모두가 어둠 속에 묻혀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려앉으며 러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야 마법으로 내려온다손 치고, 은의 현자는 어떻게 여길 사용하는 걸까요?”

“부유 주문쯤은 다들 기본으로 사용하는 게 아닐까?”

레펜하르트는 대수롭잖다는 듯 대답했다. 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의 현자는 죄다 5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는 겁니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당장 이라나드 공작 같은 경우를 봐도 순수한 오러 유저였으니까.

“아니면 죄다 부유 주문이 걸린 부츠라도 신고 있나 보지. 몇천 년 동안 남의 유물 강탈했다잖아?”

“하기야…….”

그때 실란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요?”

실란이 머리 위를 손짓했다. 일행이 들어왔던 절벽 중앙의 통로, 그곳에서 예의 기묘한 굉음과 함께 몇 개의 원반이 벽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위이잉.

실란이 발끈했다.

“거 봐요! 저거 타는 거 맞잖아!”

굳이 안전하게 내려가고 있는데 굳이 정체도 모르는 물체를 탈 필요는 없다. 일행은 계속 부유 주문을 써서 아래로 하강했다.

☆ ☆ ☆

한참을 내려가니 바닥이 보였다.

착지한 시리스와 레펜하르트, 실란이 저마다 빛의 정령이며 마법, 신성한 빛의 주문을 써 주위를 밝혔다. 세 사람이 힘을 합치니 상당한 광량이 나왔다. 사방이 환하게 밝아지며 공간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를 살피던 레펜하르트 일행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야…….”

“우와!”

어지간한 왕궁 홀을 능가할 정도로 넓은 바닥이었다. 수백 개의 제단들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고, 그 위로 각종 기이한 물체들이 놓여 있었다.

갑옷이나 무기, 배낭처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물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 더 많았다. 새하얀 백색 상자라든가 마치 비석처럼 거대한 검은 돌, 그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일단 바닥에 내려오니 위에선 느껴지지 않던 기운이 강렬히 느껴진다. 마법사인 시리스나 레펜하르트는 물론, 아직 마법이 미숙한 카를마저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카를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 이거 혹시 전부 마도구입니까, 폐하?”

“그것도 죄다 아티팩트급이다. 엄청나군.”

감탄하며 레펜하르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티팩트가 이리도 많은데 저 위에서 아무 마력도 느끼지 못한 걸 보면 뭔가 따로 또 장치가 있는 듯했다.

‘던전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공간 결계의 일종인가?’

일행을 돌아보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여긴 아무래도 은의 현자의 무기고 같은 것인가 보군.”

눈이 휘둥그레 뜨며 러스와 타시드가 정신없이 사방을 살폈다.

“이게 전부 아티팩트?”

“여기 있는 것 가져다 팔면 천년은 놀고먹겠는데?”

예산에 민감한 카를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이것들 챙길 수 있을까요, 폐하?”

단숨에 안타레스 공국의 전력을 몇 배로 올릴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안 그래도 이미 러스며 타시드, 실란은 뭐 챙길 거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그들을 말렸다.

“참아! 정체도 모르는데 함부로 챙겼다가 무슨 일 나려고? 일단 조사는 해 봐야지.”

탐욕 때문에 던전에서 찾은 유물, 확인도 없이 챙겼다 변을 당한 던전 탐사자의 이야기는 그리 드문 것이 아니다.

당장 유서스만 해도, 엘류시온 던전 탐사 시 정체 모를 유물 하나 챙겼다가 악마가 소환되어 성도 망가지고 곤욕을 치르지 않았는가? 뭐, 정작 피 본 것은 유서스 재워 줬던 켈베른 자작이었지만.

아쉬워하며 일행은 일단 손을 뗐다. 앞장서 걸으며 레펜하르트는 일단 알아보기 쉬운 주머니며 갑옷, 무기 형태의 아티팩트들부터 살펴보았다.

제단 위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가방, 백팩이며 배낭 등이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놀랍게도 전부 무한의 주머니, 그것도 세상에서 흔히 보는 무한의 주머니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평범한 무한의 주머니는 보통 열 배의 공간 효율을 지닐 뿐인데 여기 있는 것들은 최대 서른 배 가까운 효율을 지닌 것들도 있었다.

“이건 챙겨도 되겠군.”

레펜하르트의 혼잣말에, 흥분한 카를이 허겁지겁 러스와 타시드에게 손짓했다.

“챙겨, 챙겨.”

무한의 주머니는 모든 것을 넣을 수 있지만 단 하나, 같은 무한의 주머니만은 넣을 수가 없다. 그랬다간 공간 왜곡 마법이 서로 충돌해 주머니 입구에서 튕겨 버린다.

그렇다 보니 가방들을 챙긴 러스와 타시드의 몰골이 볼 만해졌다. 전신에 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데, 강력무비한 전사의 위엄은 싹 사라지고 무슨 넝마주이 같은 꼴이 되어 버렸다.

“풋!”

“거지 같아.”

“웃지 말고 너희들도 좀 들어!”

웃은 대가로 티티마와 실란도 넝마주이가 되었다. 그렇게 대략 서른 개의 가방을 나눠 든 일행의 모습을 보며 시리스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요, 레펜하르트 님? 함부로 건드렸다가 함정이 발동한다든가…….”

이 정도로 어마어마한 보물이 가득 있는 곳치곤 아무리 생각해도 경비가 너무 허술하다.

“은의 현자가 이런 보물을 이렇게 대충 놔둘 리가 없잖아요?”

레펜하르트도 의아해하다며 대답했다.

“나도 그 걱정은 좀 했는데, 이상하게 함정이나 경보 마법이 없더라?”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이건 레펜하르트가 만들었던 공간 열쇠, 마력의 붉은 보석 때문이었다.

레펜하르트는 마법진을 거꾸로 유추해 그것을 가동시키는 마력 코드를 찾아 이곳까지 공간 이동을 했다. 그런데 그 코드는 바로 은의 수호자, 세렐라인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조직의 최고위직답게 세렐라인의 패스 코드는 전 구역 프리 패스, 즉 이곳으로 공간 이동한 시점에서 모든 경계 마법이 해제된 것이다. 한마디로 운이 좋은 케이스였달까?

이래서 특권이란 건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아무리 초월적인 문명을 지닌 은의 현자라도 그 구성원은 어쩔 수 없이 평범한 인간, 문명 수준을 사용자의 개념 수준이 따라가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일단 기다려 보자, 시리스. 은의 현자가 나타난다고 딱히 나쁠 것도 없잖니? 어차피 붙잡고 캐물어야 할 판인데.”

그렇게 무한의 주머니들을 챙긴 뒤, 레펜하르트 일행은 갑옷 형태의 아티팩트가 진열된 쪽으로 향했다.

평범한 갑옷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뭔가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어 은은한 마력을 풍긴다. 워낙 복잡한 마법이 다중으로 걸려 있어 천하의 레펜하르트라도 척 보고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개중엔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제단 위로 똑같은 디자인의 은빛 갑옷이 수십 개나 서 있고 그 옆에 커다란 은색 대검이 차례로 꽂혀 있다. 그걸 보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이건 엘드라드 마이너쯤 되겠군. 재질이나 걸린 마법의 수준은 다르지만 제조 스타일이 비슷해.”

이번에도 카를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챙겨도 된다는 말씀이시죠? 마침 무한의 주머니도 잔뜩 생겼으니…….”

“챙길 방법이 있으면 챙겨 보든가. 사람이 입는 갑옷을 어떻게 무한의 주머니에 넣을 셈인가, 카를 재상?”

놀리려고 한 소리였는데 의외로 카를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게 엘드라드랑 구동 원리가 같으면, 검집의 형태로도 변할 것 아닙니까? 그럼 가방 입구에 들어갈 수 있죠.”

“어? 그러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 못 했다. 레펜하르트는 바로 탐색 마법을 엘드라드 마이너들에 걸어 보았다. 과연, 엘드라드처럼 이들도 검집으로의 변형 기능이 있었다.

“가능합니까?”

“어, 가능은 한데…….”

머리를 긁적이더니 문득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법의 언령을 토했다.

“와라, 란카트.”

갑옷 하나가 바로 곁에 꽂혀 있던 기괴한 형태의 검집으로 변했다. 카를이 환호했다.

“되는군요!”

“그래, 되긴 되지.”

또다시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왠지 기쁜 기색이 아니다. 일행은 의아해했다. 저 양반이 대체 왜 저러나?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와라, 그라필! 와라, 말카드! 와라, 보르카스! 와라, 레스탈! 와라, 바비아트! 와라, 플라카!”

와라, 와라, 와라, 와라, 와라…….

레펜하르트의 목소리가 공간을 메아리쳤다. 그때마다 갑옷이 차례로 검집의 형태로 바뀌었다. 카를과 러스, 타시드가 신바람을 내며 그때마다 검집을 열심히 무한의 가방에 쑤셔 넣었다.

이 짓거리를 쉰 번을 했다…….

“…….”

실란이며 시리스, 티티마는 멍하니 눈앞의 덩치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고도의 마법과 지혜를 구사하고 있는데, 어째 골방에서 인형 눈 붙이고 있는 소녀 가장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마지막 엘드라드 마이너를 검집 형태를 바꾼 뒤 레펜하르트가 이마를 짚었다. 수십 개나 되는 이름을 일일이 외치려니 아주 죽겠다.

“아이고, 이게 뭔 짓이여.”

“돈 버는 짓이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카를이었다.

☆ ☆ ☆

은의 현자가 지닌 무한의 가방이 일반 무한의 주머니보다 월등히 효율이 좋긴 하지만, 검집으로 변한 엘드라드 마이너 역시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검과 검집을 합치면 길이가 거의 사람 키에 맞먹는다. 덕분에 개당 두 세 개만 넣어도 무한의 가방이 꽉 찼다.

열댓 개의 가방을 카를, 러스, 타시드가 나누어 짊어졌다. (무게가 너무 무거워져 티티마와 실란은 빈 가방만 들었다.)

가방을 짊어진 채 카를이 희희낙락하며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혹시 엘드릴 기간투스 마이너 같은 건 없습니까?”

“아주 돈독이 올랐구먼, 자네.”

핀잔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보이는데? 그건 흔한 물건이 아닌 모양이오, 이 은의 현자들에게도.”

다른 갑옷은 정체를 모르니 그냥 지나쳤다. 그렇게 갑옷 진열대 끝까지 가니 이번엔 칠흑 같은 검은색 갑옷이 여러 벌 놓여 있었다.

“스테반이 썼던 버서커 아머잖아? 이거 대량생산품이었나?”

카를이 눈을 벌겋게 떴다. 슬슬 무서워 보일 정도였다.

“챙기죠!”

“이건 안 되오. 진짜 위험해 보이더라고. 멀쩡한 애가 훅 가던데?”

아쉬워하며 카를이 뒤로 물러섰다. 일행은 계속 제단 사이를 거닐었다. 각종 아티팩트들을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이 거대한 골렘은 뭐죠? 안에 사람 모양 구멍이 나 있는데.”

“저걸 타고 싸우는 게 아닐까?”

시리스와 러스의 대화에 실란이 끼어들었다.

“무엇하러 그런 위험한 짓을 한대요? 그냥 멀리서 골렘만 조종하면 안전하고 편할 텐데.”

“그것도 그러네.”

티티마가 그럴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거리 조종 골렘과 탑승형 골렘의 실효성 차이를 알아채기엔 이들의 문명 수준이 너무 낮았다.

칼이며 창 등 각종 병기도 놓인 제단도 즐비했다. 감히 건드리진 못했지만 눈으로나마 열심히 구경을 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어? 이건…….”

레펜하르트의 시선은 한 자루 롱 소드에 향해 있었다. 카를이 물었다.

“뭡니까? 혹시 챙겨도 되는 거?”

말없이 레펜하르트는 롱 소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그리 특별한 부분이 없는 평범한 형태의 롱 소드. 특이한 점이 있다면 검막 좌우로 드래곤 머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 푸른 보석이 장식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 검을 알고 있었다.

‘검성 사이러스의 애검, 일루미네이터잖아?’

완벽한 빛의 검, 일루미네이터.

이 검은 그 완전성으로 인해 명검 중의 명검으로 불렸다.

조금도 엇나가지 않는 무게 중심과 좌우 균형, 가장 완벽한 비율을 맞춰 티끌만큼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이 검은 가장 노련한 드워프 대장장이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완벽성을 자랑했다. 진정한 검사라면 이 검을 한번 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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