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권 제55장 비밀은 드러난다 (56/84)

제55장 비밀은 드러난다

1

“으아아악!”

왕궁 가이라크의 집무실, 그 안에서 레펜하르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폐하?”

막 레펜하르트를 알현하기 위해 집무실 앞까지 온 카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일국의 왕이 자신의 왕궁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특히나 그 당사자가 절벽에서 밀어 떨어트려도 하품하며 일어나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당대 계승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체 어떤 어마어마한 사태가 일어났단 말인가? 기겁하며 카를과 경비병이 집무실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거의 부수듯 집무실 문을 박차니 방 가운데서 서 있는 레펜하르트가 보였다. 평소처럼 웃통을 벗은 채 웬 긴 줄을 하나 들고 있는데, 표정이 극도의 경악과 공포로 질려 있다.

경비병들이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져 경계 태세를 취했다. 카를도 전투 자세를 잡으며 조심스레 레펜하르트에게 다가갔다.

“혹시 암살자입니까?”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손에 든 줄을 들어 올렸다. 잘 보니 줄 위로 눈금이 그려진 것이 보였다.

줄자였다.

“또…….”

덜덜 떨며 레펜하르트가 절망에 빠져 소리쳤다.

“또 커졌어! 이젠 2미터 15센티미터라고!”

“…….”

순간 충성스러운 카를은 눈앞의 주군을 한 대 패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한숨을 푹 쉬며 카를이 경비병들에게 손짓했다. 경비병들도 안도하며, 그리고 어이없어하며 도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상황이 정리되자 카를이 투덜대며 레펜하르트를 째려보았다.

“뭡니까, 폐하? 깜짝 놀랐잖습니까?”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레펜하르트가 변명을 흘렸다.

“아니, 너무 놀라서 그만.”

요 근래 정신없이 바빠서 미처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왠지 오늘따라 주위 사물이 평소보다 작아 보였던 것이다. 왠지 바짓단도 좀 짧아진 것 같았다. 그래서 설마 하며 키를 재 본 것이었는데…….

“아니, 뭔 몸이 무슨 20대 후반이 다 되도록 성장이 멈추질 않는 거야?”

전생 때는 키가 딱 사춘기 지나자마자 성장 끝나 버려 참 슬프기도 하고 그랬다. 당시의 시리스보다 살짝 작기도 해서 콤플렉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차라리 그 시절이 더 낫겠다는 생각조차 든다.

‘이러다 정말 테스론 놈처럼 2.3미터 되어 버리는 것 아냐?’

카를이 웃으며 레펜하르트를 위로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애초에 왕궁을 설계할 때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의 신장을 감안해 건설했습니다. 앞으로 제라드 님 정도의 덩치가 되시더라도 전혀 거동에 불편함이 없으실 겁니다.”

철저한 카를은 충성을 바친 주군을 위해 이런 세밀한 분야까지 신경을 쓴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그 소릴 듣고 기뻐할 리는 없지만.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요?”

진지하게 ‘성장을 멈추는 마법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나?’라고 고민하며 레펜하르트는 도로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문득 물었다.

“아, 그런데 어쩐 일이오?”

카를도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바꾸었다.

“아,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서스 경에 대해서입니다.”

☆ ☆ ☆

레펜하르트에게 패배해 포로가 된 유서스는 이후 왕궁 가이라크의 지하 감옥에 유폐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 어떻게 됐나?”

완전히 잊고 있었다. 러스에게 알아서 하라며 떠넘긴 기억은 난다.

카를이 대꾸했다.

“러스 경은 저더러 알아서 하라더군요.”

한때는 유서스를 존경하기도, 증오하기도 했던 러스다. 하지만 그 마음을 떨친 지도 이미 오래, 친구도 가족도 존경할 만한 ‘형님’도 생긴 그였다.

“자신은 상관하지 말고 다른 포로들처럼 처리해 달라더군요. 보아하니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별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습니다.”

“하긴 그 녀석이 지금 유서스 신경 쓸 때가 아니겠지.”

이해한다는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러스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맹렬히 수련 중이었다. 전쟁 도중 만났던 제국의 오러 유저, 키린트였다.

-다른 오러 유저라면 몰라도 그놈과는 반드시 결판을 지어야겠습니다!

레펜하르트나 이니야, 아틸카나 칼켄에게 패배하는 것에는 그리 불만이 없는 러스였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보다 월등히 앞선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으니까. 뭐, 바나텔이나 제라드 같은 경우엔 아예 비교 대상도 아니고.

하지만 키린트는 달랐다. 그는 러스와 비슷한 나이, 비슷한 수준의 실력자였고 심지어 지닌 재능조차도 비슷했다. 일종의 동족 혐오랄까? 반드시 그날의 수모를 갚겠다며 매일매일 검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러스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가 실소했다.

“타시드만 신 났지.”

호승심에 불타는 친구를 둔 덕에 요즘 타시드는 아주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수련을 위해 러스는 타시드도 동참하길 요구했고, 타시드도 신바람을 내며 승낙했다. 러스와 수행해야 한다는 핑계로 복잡한 오크 수장 업무를 카를에게 미룰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요즘 타시드는 하루 종일 검만 휘두르며 지내고 있었다. 신 나게 러스가 빼먹은 기술, 자신도 쏙쏙 빼먹으며 나날이 기량을 높이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강해지는 건 안타레스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니 말릴 수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없겠소, 카를 재상? 어쨌건 타시드는 오크의 수장이 되어 주어야 할 몸인데 그렇게 업무에 관심이 없는 것도 좀 문제 같은데…….”

노예일 때도 신앙심을 간직한 드워프들은 마켈린이란 구심점 아래 뭉칠 수 있다. 원래 자유로운 종족이었던 트롤은 대주술사 아틸카를 모두 인정한다.

하지만 이니야나 칼켄은 엘프나 오크의 총 수장이 될 수 없다.

저들이 자격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 대한 경험이 많은 이니야는 충분히 노예였던 엘프들의 처지도 이해하고 있다. 사실 노예였다지만 그저 엘븐하임에서 살았을 뿐인 시리스보다는 오히려 더 엘프들을 위한 좋은 수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칼켄은 인간 세상에 대해 그리 아는 것이 없지만, 대신 본인이 오크 최강자로서 오지 출신 오크들의 대족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가 힘으로 군림하려 한다 해도 딱히 반발하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민심을 확실히 잡을 수 없다.

괜히 두 나라가 통합될 때 왕자, 공주가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양쪽의 민심과 인망을 모두 잡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가 진심으로 인정하는 대상이 필요하다.

오지 출신이었다가 노예가 된 시리스, 그리고 노예 출신이었다가 오지의 강자가 된 타시드야말로 양쪽의 민심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타시드가 저렇게 업무 손 놓고 있으면 역시 곤란하지 않나?”

“그래서 나름 대비는 하고 있습니다. 오크들도 수장과 실무자를 분리하면 되는 문제니까요.”

수장은 상징으로 군림하고, 실제로 오크들을 관리하는 건 다른 이가 담당한다. 레펜하르트와 카를 같은 관계랄까?

사실 가능하기만 하면 대단히 좋은 제도다. 그런데도 전생 때 저러지 못한 이유는, 저 실무자 역시 양쪽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 인재가 또 있었나?”

“탈카타 경이 있잖습니까?”

한때 노예 출신 오크 군단의 대장으로 일하던 탈카타였다. 하지만 카를의 예리한 안목은 탈카타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검투사로 뼈가 굵어 노예 출신 오크들도 군말 없이 따르며, 늦은 나이임에도 훌륭히 스피리츠 웨폰을 각성해 오지 출신들 역시 인정하고 따른다. 나이도 적당히 많고 인품도 괜찮은 편이다. 검투사 은퇴 후 인간 귀족 밑에서 호위병 노릇을 했을 정도니 머리도 상당히 좋다.

타시드의 부관으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인물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요새 오크 관련 실무는 탈카타 경이 다 하고 있습니다. 잘 하던데요?”

“그, 그렇소? 의외의 인재였군.”

예전 탈카타의 모습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어쩐지 요즘따라 오크 관련 문제가 팍 줄었다 했다. 그저 우연히 만난 오크 전사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나?

그를 발굴해 낸 카를의 안목에 새삼 감탄하며 레펜하르트가 찬사를 건넸다.

“재상이 없었으면 이 나라, 어떻게 유지했을지 모르겠소.”

“과찬이십니다, 폐하.”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그대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모든 일이 잘 풀리진 않았을 거요.”

실제로 전생 때 카를 없이 나라 세워 본 레펜하르트였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진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를이 피식거리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건 저도 알지만, 그래도 저렇게 대답하는 게 신하의 도리죠.”

“……정말 신하의 도리를 지키려거든 마지막 말은 안 해야 하는 것 아니오?”

서로를 보며 두 사람은 잠시 웃었다.

카를이 다시 정색하고 화제를 돌렸다.

“어쨌거나, 그 이후 유서스 경은 제 담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유서스 경에게 몇 가지 좀 질문한 게 있습니다.”

“질문?”

“은의 현자에 관한 질문입니다.”

☆ ☆ ☆

카를이 왕궁 가이라크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유서스를 심문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전후 처리할 일이 워낙 많다 보니, 특히나 예정에도 없던 아라난 그라드 주변 조경 공사가 워낙 거창하다 보니 바빠서 미처 그 일까지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겨우 급한 일을 처리하고 나서야 유서스를 만났다. 예전 러스가 언급한 은의 현자라는 조직을 카를은 잊지 않고 있었다. 기회가 온 김에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은의 현자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서스의 반응이 색달랐다.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만?

안색이 싹 급변하고 말까지 더듬으며 모르겠다는데, 그걸 믿을 바보는 세상에 없다.

‘어라? 이걸 봐라?’

눈치 보니 뭔가 상당히 중대한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틸라까지 불러 가며 본격적으로 심문을 했는데…….

“본격적으로 심문을 한 게 실수더군요. 경계하기 시작하고 아예 아무 말도 하질 않았습니다.”

드워프는 분명 상대가 한 말의 진위를 구별할 수 있다. 즉, 아무 말도 안 해 버리면 진위고 뭐고도 없다.

“아무래도 명성이 있다 보니 함부로 고문을 할 수도 없고요.”

이젠 아라난 그라드에도 고문 기술자가 있다. 암살자 사태를 접한 후 카를이 잽싸게 영입한 것이다. 그렇지만 유서스 정도 명성을 지닌 기사를 함부로 고문하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예 죽여 버릴 생각이라면 모를까, 살려서 돌려보낼 것이면 평판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명색이 러스 경의 혈육인데 함부로 죽일 수도 없지요.”

혹시나 해 마법사를 불러 정신계 자백 마법도 써 보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원래 중책을 맡은 장수나 기사쯤 되면 자백 마법에 대한 저항 훈련은 필수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측 마법사에 의해 아군의 정보를 나불나불 불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자백 마법이 있음에도 여전히 고문 기술자가 존재하는 이유다.

유서스 역시 그런 저항 훈련을 충실히 받았고, 그래서 어지간한 자백 마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저런 이유로, 혹시 폐하께서는 방법이 있으실까 싶어 찾아왔습니다.”

“그렇군. 좋아, 내가 힘을 써 보도록 하지.”

자신만만하게 레펜하르트가 팔뚝을 걷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아무리 패고 패고 또 패도 절대 ‘죽지는’ 않는 뛰어난 구타 수련법이 있지 않은가?

“까짓것, 제 놈이 아무리 입을 다물고 싶어 봤자 1단계 구타 수련이면 충분…….”

“아니, 패란 소리가 아니고요. 그럴 거면 그냥 고문을 했지 뭐하러 폐하를 찾았겠습니까?”

“그럼 난 왜?”

“폐하께선 강력한 마법사시잖습니까? 뭔가 고위 마법 중에 방법이 있을까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만?”

레펜하르트는 가슴 깊이 반성했다. 아, 이젠 정말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이 다 되었구나.

도로 걷은 팔뚝을 내리며 레펜하르트가 걸음을 옮겼다.

“생각해 보니 몇 가지 있군. 일단 갑시다.”

☆ ☆ ☆

흐릿한 횃불만이 어슴푸레하게 주위를 밝히는 어두운 지하 감옥.

유서스는 그 감옥 제일 안쪽에 갇혀 있었다.

포로 신세지만 대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황금기사라는 명성 때문인지, 아니면 러스와 혈육이란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세 끼 꼬박꼬박 제대로 된 식사가 나왔고 감옥 내부도 깔끔했다. 몇 달째 갇혀 있던 죄수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의 이야기.

그의 눈빛은 이미 죽어 있었다.

“아아…….”

횃불을 바라보며 유서스는 탄식을 터트렸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면서까지 나선 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패해 버렸다. 대부분의 수하들도 잃었다. 가문의 보물인 마갑 엘드라드마저 빼앗겼다.

철저하게 빈털터리가 되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르겠구나.”

유서스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그가 가문으로 돌아간다 해도 좋은 꼴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걸.

마갑 엘드라드는 단순한 아티팩트가 아니라 테네스 가문의 권위이자 상징이었다. 그것을 잃은 유서스를 과연 누가 가주로 인정해 줄 것인가? 어쩌면 벌써 그의 아버지가 다시 가문을 장악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 보았자 배신자라는 불명예 속에 비참한 신세가 될 뿐이겠지. 정말로 진지하게 자살도 몇 번 고려해 보았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죽을 수는 없어.’

죽음이 두렵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해. 이대로 후계를 잇지도 못하고 죽을 순 없어.’

아직 가문을 이을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 여기서 그냥 그가 죽어 버린다면 저 더러운 러스의 씨앗에게 테네스 가문이 이어질 터였다. 그것만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과연 돌아갈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자신의 엘드라드를 갈취한, 저 간악한 이단의 현자는 결코 자신을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전까지는.

‘은의 현자라니, 대체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지?’

은의 현자가 얼마나 비밀 유지에 힘쓰는지 잘 아는 유서스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을까?

‘역시 러스, 그놈인가?’

설마 아버지가 러스에게도 비밀을 전한 것은 아니겠지? 비록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최소 가문의 후계자임은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더욱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진다.

한 번도 그를 사랑하지 않은 아버지.

한 번도 따스한 눈빛을 보내 주지 않은 아버지.

복잡한 감정을 담아, 유서스는 나직하게 뇌까렸다.

“아버지…….”

점점 그의 눈이 감겼다. 세상이 점점 어두워졌다. 정신이 흐릿해졌다.

흐릿한 정신 속에서 유서스는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 한 중년인이 있었다.

아버지였다.

부드러운 눈빛, 자상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운 채 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서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그의 아버지가 저렇게 애정을 담아 그를 바라본 적이 있던가?

아버지가 곁으로 다가온다. 근엄한 태도 속에 애정을 담아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어느새 어린 소년이 되어 있는 자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테네스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비밀, 잘 기억하고 있느냐?”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저 애정, 저 사랑이 담긴 눈빛은 그가 평생 갈구하던 것이었다. 너무도 바라던 것이기에, 너무도 원하던 것이기에 감히 의문을 품을 수가 없었다.

이토록 전신 가득 행복한 느낌이 충만한데 어찌 의심할 수 있을까?

순진무구한 소년의 목소리로 유서스가 대답했다.

“네, 아버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말해 보거라. 은의 현자에 대해. 이 아비가 전해준 비밀을 과연 잘 기억하고 있는지 보아야겠구나.”

물론 유서스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소년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네, 아버지!”

2

사방이 가로막힌 네모난 방, 바닥에 그려진 붉은 마법진 위에 멍한 상태의 유서스가 누워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네 사람 중 한 명,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제대로 먹혔구먼.”

고개를 돌려 레펜하르트가 등 뒤의 두 사람을 칭찬했다.

“잘했어, 실란, 티티마.”

뒤에선 실란이 분홍빛 성광을 양손에 띄운 채 천천히 유서스의 전신을 감싸는 중이었다. 그 옆에선 푸른 피부의 트롤 소녀, 티티마가 작은 도자기 화로를 갖다 놓고 뭔가를 태우며 새하얀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다시 유서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어떤 의심도 못 할 거다.”

사실 아무리 유서스의 정신력이 높다 해도 레펜하르트의 마법을 막을 정도는 아니다. 레펜하르트가 작정하고 정신계 마법을 쓰면 얼마든지 유서스의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유서스의 정신이 붕괴되어 폐인이 될 확률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폐인 만들어도 상관없었으면 그냥 고문을 했지, 굳이 이런 방법을 썼겠는가?

그래서 불려 온 것이 실란과 티티마였다.

우선 수면 마법으로 유서스를 재운 뒤 미리 준비한 이곳으로 옮긴다. 그리고 레펜하르트가 정신 제어 마법과 환각 마법을 병행해 유서스의 현실감을 흩어 놓는다.

실란은 필라넨스의 신성력으로 옆에 보조한다. 유서스로 하여금 자신이 한없는 자애와 사랑를 받고 있도록 느끼게 해 감히 의문을 품을 수 없게 만든다.

물론 이렇게 해도 완전히 모순을 없앨 수는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트롤 주술이었다. 유서스가 자백 마법에 대한 저항 훈련은 받았을지 몰라도 트롤 주술에 대해서는 전혀 무저항, 트롤 주술의 현혹술로 남은 의심을 지우고 모순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원래는 아틸카를 찾았지만 그는 업무차 트롤들의 도시, 트로리아드에 출타 중이었다. 그래서 허구한 날 실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티티마를 부른 것이다.

“흩어지네, 솟구치네, 스며들고 흐드러져 피어오르네.”

화로에 마른 꽃잎을 넣어 계속 태우며 티티마는 우아한 손동작으로 연기를 다뤄 유서스에게 보냈다. 하얀 연기가 구름처럼 뭉쳐 유서스의 주위를 연신 맴돌았다.

완전히 주술을 건 뒤 그녀가 폴짝거리며 실란에게 다가갔다.

“잘했지? 나 잘했지?”

“응, 잘했다.”

“에헤헤.”

실란이 자연스럽게 티티마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티티마도 좋다며 생글생글 웃었다. 처음에는 자꾸 달라붙는 그녀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요샌 실란도 그냥 고양이 한 마리 키우는 기분으로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카를에게 눈짓을 보냈다. 카를이 헛기침을 좀 한 뒤 굵은 목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말해 보거라, 유서스.”

☆ ☆ ☆

“은의 현자란 무엇이지?”

“은의 현자는 인류의 수호자로, 위대한 고대의 힘을 계승하고 인류의 미래를 선도, 유지하는 의무를 지닌 이들입니다.”

“테네스 가문과 은의 현자와의 관계는?”

“테네스 가문은 은의 현자로부터 선택된 축복받은 가문, 대대로 인류를 위해 그분들에게 충성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왕 폐하 역시 은의 현자, 은의 현자에게 충성하는 것은 곧 폐하께 충성하는 것이요, 기사의 의무입니다.”

카를은 계속 유서스에게 질문했다. 그때마다 유서스는 몽롱한 눈빛으로 순순히 모든 것을 대답했다.

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주신 세이어의 뜻을 따르며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고 있다고 했다.

강력한 고대의 힘을 이용, 고대 문명의 잔재가 함부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을 막고 더러운 노예 종족이 인류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삿된 과거를 지우고 긍지 높은 역사를 세움으로써 인류의 자긍심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 했다.

이야기를 듣다 말고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수천 년 동안이나 저 은의 현자란 조직이 인류 뒤에서 암약하고 있었다고?”

“적어도 이자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폐하.”

“그게 말이 되나?”

비밀 조직이란 게 듣기엔 좋지만 실제로는 유지가 굉장히 어려운 법이다. 사람이란 건 셋만 모여도 서로 뜻이 틀어지기 일쑤다. 수십 년 단위라면 이해가 가는데 수천 년?

“조직이란 게 그렇게 오래 유지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게다가 고작 몇몇이 모인 조직으로 세상 전체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고?

레펜하르트가 불신의 눈으로 유서스를 바라보았다.

“세상일이 그렇게 만만할 리가 없잖아? 몇몇 개인이 대륙, 인류 전체에 영향력을 준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러자 카를은 물론 실란과 티티마조차도 어이없다는 듯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불경한 눈빛이라 권위 안 따지는 레펜하르트조차도 움찔했을 정도다.

“왜, 왜들 그런 눈으로 보나?”

티티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폐하가 그런 말을 하심요?”

실란이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펜 씨가 그런 소릴 하면 안 되죠.”

카를이 코웃음을 쳤다.

“폐하께서 지금껏 열심히 한 짓이 바로 저런 짓입니다만? 몇몇 개인이 대륙, 인류 전체에 영향력을 주는 짓.”

“어, 그런가?”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레펜하르트가 헛기침을 하며 잽싸게 말을 돌렸다.

“험험, 일단 그런 집단이 실존한다 치지. 그럼 계속 물어보게, 카를 재상.”

☆ ☆ ☆

아버지가 질문을 던진다.

“네가 아는 은의 현자, 그 구성원에 대해 말해 보거라.”

“국왕 폐하와 이라나드 공작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수호자 세렐라인 님이 있지요. 마법사 제이드와 테스론 경 역시 은의 현자이십니다. 아, 테스론 경은 사망하셨군요.”

말하다 말고 어린 유서스는 의아해했다. 어떻게 이걸 내가 알고 있지? 이건 아버님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닌데?

사랑이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테네스 가문은 은의 현자가 아닌 게냐?”

“우리는 은의 협력자입니다. 비록 위대한 비의에 닿을 자격은 없으나, 은의 현자께 협력하며 인류를 수호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지요.”

“협력자? 그렇다면 수호자는 무엇이냐?”

“은의 수호자는 은의 현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분들입니다.”

대답하면서도 어린 유서스는 점점 아리송해했다. 어째 아버지의 질문이 이상했다.

‘왜 가르쳐 주시지도 않은 것에 대해 물으시는 것이지?’

그러고 보니 답하는 자신도 이상했다.

‘왜 난 배우지도 않은 것을 대답하고 있지?’

뭔가 이상하다. 점점 의문이 커진다. 어린 유서스는 멍하니 눈앞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원하던, 자신에게 따스한 눈빛을 보내 주던 아버지, 그토록 바라보기만 했던 아버지의 넓은 어깨…….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응? 아버님 덩치가 저렇게 크셨던가?’

☆ ☆ ☆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던 카를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윽,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티티마! 현혹술! 현혹술!”

실란이 호들갑을 떨며 티티마를 재촉했다. 아무리 환각과 현혹을 제대로 걸었다지만, 역시 가상 상황과 질문이 맞지 않으니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으, 응!”

티티마도 당황하며 더더욱 화로의 불을 크게 지폈다. 연기도 더욱 크게 올랐다. 더 이상 느긋하게 손짓으로 연기를 이끌 여유도 없었다. 열심히 양 뺨을 부풀려 가며 티티마가 화로를 훅훅 불었다.

훅! 훅! 훅!

어째 처음의 우아한 주술사는 사라지고 아궁이 불 때는 부엌데기 같은 모습이 되어 버렸지만, 여기 모인 이들 중 그에 대해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칫하면 기껏 건 술법이 깨질 수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유서스가 다시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제때 티티마의 현혹술이 재발동된 모양이었다.

일단 은의 현자란 조직이 은의 수호자, 은의 현자, 그리고 은의 협력자로 이루어졌다는 것까진 알게 되었다. 식은땀을 닦으며 카를이 말했다.

“휴우, 아슬아슬했군요. 그럼 계속 캐내 보겠습니다.”

☆ ☆ ☆

“네가 알고 있는 은의 협력자는 누구지?”

“테스론 경에게 협력하는 필레나 양, 크리스틴 양, 그리고 스테반 경입니다. 아, 스테반 경은 죽었습니다만.”

“그렇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아티팩트는 은의 현자가 준 것이냐?”

“예.”

“은의 현자가 수여한 아티팩트는 무엇이 있지?”

어린 유서스는 천천히 이름을 댔다. 아다만드릴 슈트, 드래고닉 발러 아머, 엘드릴 기간투스 등등.

대답하면서도 그는 모순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당연하게 대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아버지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전부 한 번씩 봤던 거군.”

아버지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듣는 순간 굉장히 화가 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응? 아버지, 누가 또 계신가요?”

“으익! 폐하, 쉿!”

“……?”

“아무것도 아니다. 자, 그럼 어떻게 은의 현자들과 협력하게 되었지?”

잠시 의아해하다 어린 유서스가 다시 대꾸했다.

“테스론 경이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그에 협조해 권왕을 상대하고, 힘에 부치자 수호자 세렐라인께서 아티팩트를 건네 주셨습니다. 이후 그녀의 저택에서 힘을 키우며……, 키우며…….”

어린 유서스가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왠지 그 이후에도 뭔가 일이 터졌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뭔가가 이상했다.

☆ ☆ ☆

“앗! 또 의심한다!”

“티티마! 현혹술!”

레펜하르트와 실란이 호들갑을 떨었다. 티티마가 더욱 바빠졌다.

“하고 있어!”

이제 그녀는 아예 부채를 하나 꺼내 죽어라 화로를 부치고 있었다. 슬슬 부엌데기도 벗어나 석쇠에 생선 굽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히잉, 원래 주술 이렇게 쓰는 거 아닌데.”

티티마가 울상을 지었지만, 급한데 어찌하리? 그래도 덕분에 유서스는 다시 모순을 잊고 환각 상태로 돌아갔다.

카를이 목청을 가다듬고 질문했다.

“자, 유서스. 그럼 은의 현자와 접촉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그분들이 찾아오십니다. 수호 문장으로 자신을 증거하시고 책무를 내려 주십니다.”

“그럼 네가 그들과 접촉할 방법은 없느냐?”

점점 질문이 노골적이 되어 가니 유서스의 표정도 점점 흔들린다. 그때마다 티티마는 열심히 부채를 부쳤다. 연기가 점점 유서스를 감싸 아예 모습조차 흐릿해질 지경이 되었다.

“아버지, 어디서 훈제하는 냄새가 나는데요…….”

“기분 탓이니라.”

잽싸게 말을 막으며 카를이 재차 물었다.

“은의 현자와 접촉할 방법은 없느냐?”

잠깐 고민하다 유서스가 대답했다.

“수호자 세렐라인께서 머무시는 저택이 있습니다. 그곳의 아티팩트 덕에 잘린 두 다리도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린 두 다리?”

“신경 쓰지 말거라. 이 애비가 이야기하지 않니? 자, 저택이라고 했지? 그 저택은 어디 있느냐?”

“그 저택은…….”

☆ ☆ ☆

다음 날 아침.

유서스는 감옥에서 눈을 떴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작은 창살 속에서 미약한 빛만이 들어오는, 여전히 죄수인 신세였다.

그는 한탄을 터트렸다.

“하아…….”

죽을 순 없다. 반드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은의 현자에 대해 저들이 뭔가 눈치챈 이상 결코 자신을 풀어 줄 리 없을 것이다. 과연 어찌해야 할까?

‘그래도, 결코 비밀을 털어놓을 수는 없지.’

은의 현자에 대한 비밀을 지키는 일은,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 것이었다.

그는 기사였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 온다 해도 결코 맹세를 어길 수는 없다.

‘흥! 내가 입을 열 것 같으냐!’

안색을 굳히며 유서스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그러다 문득 의아해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타는 냄새가 나지? 어디서 불이라도 났나?’

같은 시간, 레펜하르트의 집무실.

테이블 위 수정 구슬에 감옥에 갇힌 유서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눈치 못 챈 것 같지?”

“그렇습니다, 폐하.”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며 레펜하르트와 카를이 대화를 나눴다.

“그 저택이란 곳의 위치도 파악했고…… 그런데 어떻게 가지? 바슈탈론 제국은 아무래도 적지인데.”

“걱정 마십시오, 폐하. 이미 여행 루트를 확보 중입니다. 그런데, 혹시 폐하께서 직접 나서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 보통 일이 아니란 느낌이 들어서…… 그런데 내가 나서면 곤란하기라도 하오? 아, 물론 일국의 국왕이 함부로 자리 비우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요샌 일도 많이 줄었고…….”

워낙 잔소리 듣고 살다 보니 변명부터 먼저 나오는 레펜하르트였다. 의외로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나랏일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잠행 난이도가 올라갈 뿐이지요.”

확실히 레펜하르트의 덩치는 얼굴 가리고 몸을 숨긴다 해도 한 번씩은 쳐다보게 되는 수준이다. 그리고 자고로 잠행이란 남의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

“괜히 내가 키 컸다고 비명 지른 게 아니라니까?”

어차피 카를도 레펜하르트가 직접 나설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까지 감안해서 루트를 확보 중입니다. 별문제 없을 겁니다. 그럼 출발 날짜와 수행인을 정해야겠군요. 일단 공국의 방어를 위해 어느 정도 인원은 남겨 놓아야 할 테니…….”

카를이 손을 꼽았다. 이니야와 유스테아는 노예 해방을 위해 타국으로 향했고 아틸카는 트로리아드 건설이 막바지라 도저히 손을 뗄 수 없다. 칼켄과 스탈라는 페틀랜드 쪽 산악 민족 잔당 처리에 한창이며 마켈린은 그랜드 포지에 가 있다. 그 외에도 오크와 드워프 오러 유저는 공국 각지의 방어를 위해 밖으로 뺄 수가 없다.

“제라드 님이 계시니 아라난 그라드 방어는 별문제 없겠지요. 일단 폐하와 저, 그리고 러스 경과 타시드 경 정도가 되겠군요. 두 사람 다 요새 하는 일이 없으니 월급값 좀 하라고 해야죠. 아, 시리스 양과 실란 대주교는 요새 바쁘니 힘들라나?”

“플로라가 있어서 시리스는 그리 바쁘지 않으니 괜찮을 걸세.”

레펜하르트와 카를, 타시드와 탈카타의 경우처럼 시리스 역시 요즘은 상징으로 엘프 수장 자리에 있고 실무는 플로라가 보고 있었다.

탈카타와 함께 거의 초기에 레펜하르트에게 구원받아 노예 신세에서 벗어난 플로라다. 이후 합류한 오지의 엘프들보다도 안타레스 공국에서는 선배이고 오랜 기간 레펜하르트와 카를의 비서로 일했는지라 행정 업무에도 슬슬 이골이 났다. 탈카타처럼 그녀 역시 오지와 노예 출신의 엘프, 양쪽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이였다.

‘전생 때도 이렇게 했으면 훨씬 나라가 잘 돌아갔을 텐데.’

새삼 아쉬워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당시의 그는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하려 했다. 마찬가지로 각 수장의 업무 역시 타시드며 시리스, 아틸카와 마켈린이 스스로 처리하는 걸 선호했다. 높은 자리에 선 자는 그만큼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 생각 자체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의무에 대한 종류를 구분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바보짓이다. 덕분에 안타레스 제국은 겉만 번지르르했지 내실을 보면 상당히 여기 삐걱, 저기 삐걱대는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사람이 자기가 잘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모자란 것은 도움도 받고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데…….’

당시엔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만, 막상 카를의 일처리를 보고 나니 상당히 엉망이었다는 실감이 든다. 뭐, 지난 일 아쉬워해 봐야 뭐하겠냐마는.

“실란 같은 경우는 오히려 데려가 달라고 사정할걸? 요새 안 그래도 시민들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좀 자리 비우고 싶다던데. 그런데 타시드와 시리스는 괜찮은 건가? 시리스야 어떻게 변장시킨다 쳐도 타시드는 인간인 척하기가 힘들 텐데?”

“폐하가 갈 수 있는데 타시드가 못 가겠습니까?”

“그건 그렇구먼.”

말하다 말고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카를이 ‘일단 폐하와 저’라고 말한 것 같은데?

“가만, 그런데 카를 재상도 혹시 갈 생각이오?”

“예, 폐하.”

당연하다는 듯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펜하르트가 기겁해 되물었다.

“아니, 그럼 나랏일은 누가 보라고?”

“원래 나랏일은 폐하께서 보셔야 하는 겁니다만?”

자신도 자리 비우는 주제에 자길 탓할 수 있냐는 카를의 일침이었다. 그래도 레펜하르트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아무리 여신 걸고 사기 쳐서 안전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 전쟁이 끝난 후다. 여기서 일국의 왕과 재상이 동시에 자리 비워도 되는 건가?

“없어도 잘 돌아가도록 처리해 놓고 갈 겁니다. 심려 마시지요.”

“아니…….”

어련히 잘 처리해 놓았겠지만, 그래도 평소의 카를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굳이 그런 위험부담까지 져 가며 재상이 직접 나설 필요가 있소?”

“다른 건 몰라도, 은의 현자에 관한 문제라면 남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카를의 안색이 변했다. 평소 보기 힘든, 지극히 차가운 얼굴이었다.

감추지 못한 분노를 담은 채 카를이 이를 갈았다.

“한때 주군으로 모셨던 분을 살해한 자들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크로방스 내전의 시발점이 된 고트린 1세와 텔리온 왕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3

험한 산세가 끝없이 이어지는 산세 사이로 드러난 퍼틴 고원. 그곳에 한 귀족가 저택이 서 있다. 바슈탈론 제국의 명문가, 아스티노플 공작자의 여름 별장이었다. 시기가 겨울인 지금은 관리인 외엔 텅 비어 있어야 정상이겠지만, 의외로 저택에는 상당수의 시종과 하녀가 머물고 있었다.

이곳에서 요양 중인 아스티노플 가문의 귀한 딸, 에렌드 공작 영애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데 난 정작 에렌드 아가씨가 요양하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거든?”

빨래를 하다 말고 하녀 중 한 명이 구시렁거렸다. 그녀가 이 저택에서 일한 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이 저택의 주인인 ‘에렌드 아가씨’는 볼수록 의문에 쌓여 있었다.

아파서 요양한다는 아가씨가 뻑하면 어디론가 사라져 몇 달 만에 돌아오는 것도 모르겠고, 에렌드와 함께 있던 기사와 마법사 일행이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저택에 있을 때도 수시로 귀신처럼 사라지기 일쑤고, 분명 나간 흔적이 없는데도 며칠씩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았다.

특히나 섬뜩했던 것은 에렌드와 함께 있던 마법사 여인이었다.

처음에는 꽤나 명랑하고 인상 좋던 아가씨였다. 그런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나날이 말라 가며 피골이 상접해지더니 눈에 광기가 번득거린다. 평소 금역에서만 지내던 그 여인은 가끔 식료품 조달을 위해 저택에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하녀들은 공포에 질려 몸을 피하곤 했다.

함께 빨래하던 다른 하녀가 안심이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 여자는 이제 없잖아?”

“그건 그래. 다행이지 뭐니.”

그 마법사 여자는 몇 달 전 홀연히 사라졌다. 금역으로 향한 에렌드 아가씨가 이상한 사내와 함께 하산한 후였다.

세 사람은 그대로 숲 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그 사실은 하녀들에게 더더욱 의문을 품게 했다. 길이라곤 없는 깊은 숲 속으로 왜 향했으며, 대체 지금 그들은 그 숲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두 하녀의 수다에 조금 고참이던 하녀가 혀를 찼다.

“둘 다 빨래나 해! 이 저택의 불문율을 잊었니?”

이 저택의 불문율은 ‘에렌드 아가씨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다. 그녀는 저 불문율이 익숙해질 만큼 이 저택에 오래 있던 하녀였다.

“네.”

“알고 있어요.”

흠칫하며 두 하녀도 빨래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 ☆ ☆

저택이 내려다보이는 한 언덕의 수풀 속.

일곱 명의 무리가 아스티노플 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와 카를, 그리고 미리 정했던 대로 러스와 타시드, 실란과 시리스였다. 단지 여기에 예상치 못한 인원이 하나 더 껴 있었는데…….

“저기예요?”

푸른 피부의 트롤 소녀가 저택을 보며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실란이 가면 자신도 가겠다며 티티마가 달라붙은 것이다. 어차피 평소 하는 일도 없는 애였고, 그녀 자신도 트롤 주술사로서 충분히 강력한 전력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어떻습니까, 폐하?”

카를의 질문에, 마력 감지를 통해 저택 상황을 지켜본 레펜하르트가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딱히 마법적인 방어 결계 같은 건 없군. 경비 태세도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고. 제대로 온 것 맞나, 이거?”

유서스의 정보에 따르면 저 별장이야말로 은의 수호자 세렐라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상당한 수준의 경비 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어째 아무리 마력을 감지해 봐도 그냥 일반적인 귀족 별장으로만 보인다.

“기껏 고생해서 여기까지 온 건데 허탕 치는 건 아니겠지?”

이곳, 바슈탈론 제국까지 잠입한 일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레펜하르트가 정체를 숨기고 이래저래 한 일이 많다 보니 요새 제국에선 일단 덩치가 거대하면 무조건 의심부터 하고 본다. 남들보다 키 크고 어깨 좀 넓다 싶으면 절대 지나치지 않는다. 덕분에 예전처럼 덩치 큰 용병인 척 후드 쓰고 변장하는 짓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타시드나 시리스, 티티마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노예인 척 잠입해 다른 노예 구출해 달아나는 안타레스 공국의 방식을 경계한 바슈탈론 제국은 아예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제국 전역에서 노예 거래 행위를 일시 중단시킨 것이다. 저래 버리면 노예상으로 위장하고 몰래 이종족들을 이동시키는 짓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니 예전처럼 타시드나 시리스를 노예로 위장하고 데리고 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이 문제에 대해 카를이 내린 결론은 아주 단순했다.

-신 프리지안 해방단처럼 하면 되죠, 뭐.

제국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처럼 변장하는 것이 필수다. 그래야 인간의 도시에 잠입해 노예들과 접촉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 노예들을 데리고 빠져나올 때도 인간처럼 변장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구출한 이종족 노예들을 전부 인간인 척 꾸미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노예들을 이끌고 추적대의 눈을 피하며 최대한 인적 드문 곳으로 이동해 대륙 동부로 넘어오는 수밖에 없다.

-그들처럼 우리도 인간들의 눈 자체를 피해서 이동할 생각입니다.

아예 인간의 길이나 마을, 도시를 피해 산이나 황무지로만 이동해 버리면 들키고 자시고 할 일도 없는 것이다. 타고난 사냥꾼인 타시드는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안타레스 백국이던 시절, 페틀랜드와 인간 세상을 오가곤 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레펜하르트 일행은 스펠라트 사막의 공간 포털을 통해 대륙 서부로 온 뒤, 계속 북진하며 이동했다. 그동안 철저히 노숙만을 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함부로 불을 피울 수조차 없으니 찬 땅바닥에서 간단한 모포만을 두른 채 잠을 청해야 했다.

상당히 고난의 여정이었지만 사실 레펜하르트도 그렇고 타시드나 시리스, 티티마도 이 정도 노숙으로 축날 몸들은 아니다. 평소라면 딱히 고생했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으리라.

레펜하르트가 투덜대는 이유는 다른 부분이었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길바닥에 재우고 뜨듯한 이불 덮고 있으니 잠이 잘 오던가, 카를 재상?”

그렇다. 카를이나 러스, 실란은 인간이다.

이 세 사람은 굳이 노숙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인간의 마을 나올 때마다 비싼 여관 잡고 좋은 방에서 푹신한 이불 덮으며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실란은 여장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 덕에 식사만큼은 제대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마을에서 꾸준히 음식을 조달하지 않았다면 내내 육포나 뜯고 계셨어야 할 텐데요?”

“그럼 그냥 음식만 사 오지 그랬소?”

주군의 따사로운 눈길이 참으로 부담스럽다. 카를과 러스, 실란이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레펜하르트와 타시드, 티티마가 저 ‘일행 내 인류 제군’을 향해 불만을 토했다.

“지들만 따뜻한 밥 먹고.”

“지들만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실란 못됐어.”

물론 얌전한 시리스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쉴 수 있는 사람은 쉬어야지요, 허허.”

“전 레펜 씨처럼 튼튼하지 않다고요. 길바닥에서 계속 자다간 병나요.”

“형님, 전 그냥 재상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

하여튼, 레펜하르트는 다시 아스티노플 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기감과 마법을 병행해 저택 내부의 인원은 대충 파악이 끝났다. 겉보기엔 평범한 귀족 별장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특이한 부분도 있긴 있었다.

“분명 여름 별장이라 들었는데, 겨울임에도 시종인의 숫자가 꽤 많은걸?”

상당히 높은 계급의 누군가가 이 별장에 계속 상주하고 있다는 증거다. 은의 현자란 자들이 평소엔 속세 신분으로 지낸다는 걸 감안하면 딱히 경비 수준이 높지 않은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러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일단 잠입해 보지요, 형님. 아무나 하나 잡아서 정보를 캐내면 뭔가 나와도 나오겠지요.”

☆ ☆ ☆

빨래를 끝낸 하녀는 어깨를 매만지며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차피 에렌드 아가씨가 없을 때는 저택의 시중일도 그리 많지 않다. 오랜만에 만들던 자수 무늬를 완성해야겠다며 하녀가 총총 걸음을 옮길 때였다.

시꺼먼 그림자가 눈앞을 가렸다. 채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하녀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이 저택의 주인은 어디 있나?”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레펜하르트의 강력한 정신계 마법에 제압당한 하녀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질문이 이어졌다.

“이 저택에 뭔가 기이하게 느껴지는 일은 없는가?”

“에렌드 아가씨요. 그분은 정말 신기한 분이세요.”

“어째서 신기하다는 것이지?”

하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수시로 사라지는 에렌드 아가씨와, 그녀가 데리고 온 정체불명의 일당, 그리고 그 일당이 머무르고 있던 금역에 대해서까지.

딱!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녀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가볍게 안에 벽에 기대게 한 뒤 레펜하르트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테스론 일당이 이곳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아무래도 그 금역이란 곳을 가 봐야겠어.”

☆ ☆ ☆

금역이라 불린 곳은 저택 뒤쪽 오솔길을 따라 10여 분 정도 걸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투박한 건물 몇 채로만 이루어진, 귀족의 저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쟁터의 병영에 가까운 형태였다.

금역의 건물들을 바라보며 문득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요, 레펜하르트 님?”

“건물 안의 아티팩트 때문에 그렇단다, 시리스. 저 희미한 마력을 느끼는 걸 보니 너도 꽤 경지에 올랐구나.”

저 정도면 슬슬 7서클에 입문할 수준이다. 역시 어린 시절부터 가르쳐서 그런지 전생의 시리스보다 진도가 빠르다. 내심 흐뭇해하며 레펜하르트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도 투박하긴 마찬가지였다. 장식 따위는 없는 석벽에 테이블과 침상이 몇 개 놓인 것이 전부였다. 건너 방을 살피던 티티마가 일행에게 손짓했다.

“여기 뭔가 있어요.”

방 안에 놓인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수조였다. 사람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투명한 유리통이 방 중앙에 세워져 있었고, 그 밑을 복잡한 형태의 구조물이 받치고 있었다.

실란이 의아해하며 중얼거렸다.

“이건 뭐죠? 물고기라도 키웠나?”

“저수통이 아닐까요?”

시리스의 말에 실란이 말도 안 된다며 반박했다.

“에이, 그냥 물 담는데 이 비싼 유리를 이렇게 통으로 썼을 리가 없잖아요?”

“하긴…… 심지어 유리도 아닌 것 같네요.”

레펜하르트가 수조 근처로 다가갔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희미한 마력파는 이 수조로부터 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수조 여기저기를 만져 보며 그가 말했다.

“뭔가 아티팩트임은 분명하다. 사용법은…… 당장은 모르겠군.”

주저앉아 계속 연구하다 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카를이 물었다.

“이거 어찌하시겠습니까, 폐하?”

타시드가 눈을 빛냈다.

“뭔지는 몰라도 아티팩트라면 비싼 거죠? 챙길 깝쇼?”

러스가 실소를 흘렸다.

“뭔 수로 그걸 챙기게? 짊어지고 가게?”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확실히 이 수조는 너무 컸다. 적어도 들고 갈 사이즈는 아니었다. 아무리 무한의 주머니가 있다지만 일단은 주머니 입구에 들어가야 옮기든 말든 하지.

‘그렇다고 두고 가자니 용도를 몰라 뒤가 찜찜하고.’

단순한 타시드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부숴 버릴까요?”

“부수기엔 또 아깝지. 고대의 유산이 흔한 것도 아닌데.”

고민하던 레펜하르트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냥 락을 걸어 버리자. 뭔지는 몰라도 마력으로 발동되는 건 분명하니까, 그냥 마력 봉쇄를 걸어 두면 되겠지.”

수조 주위에 몇 가지 제어 마법을 시전한 뒤 레펜하르트가 싱긋 웃었다.

“이 정도면 대마법사 수준이 아닌 이상 풀기 힘들 거다.”

수조의 마력 발동을 봉쇄하니 희미하게 느껴지던 마력의 흐름도 딱 끊겼다. 그러고 나니 또 다른 마력이 감지된다. 워낙 희미해서, 수조의 마력장에 묻혀 채 느껴지지 않은 마력이었다.

‘이건 또 뭐지?’

레펜하르트가 마력 흐름을 따라 반대편 건물로 향했다. 그 흐름은 건물 외곽의 작은 방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뒤를 따르던 러스가 물었다.

“뭡니까, 형님?”

아무 대꾸도 않은 채 레펜하르트는 유심히 방 여기저기를 살폈다.

‘이거 아무래도…….’

방 전체에 희미한 공간 간섭 마력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이만 터미널 같은 것인가? 아니, 조금 다르군.’

아무래도 이 방은 시간을 들여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예 주저앉아 레펜하르트가 연신 마력의 실을 방 여기저기로 날렸다.

“다들 나가서 쉬고 있어. 아니면 주위를 탐색하든가. 이쪽은 한참 걸릴 것 같다.”

☆ ☆ ☆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한참 동안 방 여기저기를 탐색하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런 거구만.”

대충 감이 왔다. 이것은 분명 공간 이동을 위한 장치였다. 단지 다이만 터미널과는 좀 달랐다.

다이만 터미널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방식, 불특정 다수를 이동시킬 수 있는 일종의 대중교통 수단이라는 느낌이다.

반면 이쪽은 오히려 그것에 가깝다.

‘그, 제이드가 썼던 괴상한 깃털 아티팩트…….’

공간을 접어 날리는 방식은 다이만 터미널에 비해 개인, 혹은 소수의 사람만이 옮길 수 있을 뿐이지만 그 대신 대규모 구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깃털처럼 자체적으로 시스템이 독립된 아티팩트는 아닌 것 같고.’

마법적인 구조물과 시스템을 갖추고는 있지만 동력원이 없다. 말하자면 일종의 공간 지도랄까?

‘뭔가 열쇠가 되는 다른 아티팩트와 연동해, 그 아티팩트의 마력으로 공간 이동을 시키는 방식이야. 두 가지를 접목시켜 응용한 타입이군.’

정해진 사용자가 정해진 열쇠를 꽂으면 정해진 장소로 공간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마력을 모았다. 구조와 시스템을 이해하고 나니 임시로나마 1회용 열쇠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부우웅.

잠시 후, 레펜하르트의 손바닥 위로 새빨간 작은 보석 하나가 떠올랐다. 조심스레 그가 방 중앙에 보석을 박았다. 아무것도 없던 방바닥이 빛을 발하며 커다란 마법진을 그려 냈다.

“되는군.”

흡족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일행을 불러 모았다.

“다들 모여 봐!”

안 그래도 밖에서 긴장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바로 방 안으로 집결했다. 변모한 방의 모습에 카를이 물었다.

“이건 뭡니까, 폐하?”

“공간 이동 마법진. 다이만 터미널 같은 거다.”

엄밀히 말하면 포털이 아니니 좀 다르지만, 하여튼 공간 이동을 시킨다는 점에선 별 차이가 없다. 이미 몇 번이나 다이만 터미널을 이용해 본 이들이었다. 다들 쉽게 레펜하르트의 말을 알아들었다.

실란이 마법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에 들어가면 어디로 가게 되는 건데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은의 현자와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겠지?”

러스와 타시드가 눈을 빛냈다.

“준비를 해야겠군요.”

저 공간 이동기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공간 이동과 동시에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러스와 타시드, 시리스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실란도 성표를 꺼내 손에 쥐었고 티티마도 곁에 찰싹 달라붙어 단검 두 자루를 쥐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카를이 등에 멘 거검을 꺼내 소리쳤다.

“와라! 엘드라드!”

순식간에 황금빛 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뒤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었습니다, 폐하.”

레펜하르트가 마법진에 손을 얹으며 외쳤다.

“전이轉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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