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권 제54장 옛 추억 (55/84)

제54장 옛 추억

1

마법사로서 이상적인, 아니 초월적인 재능을 타고 태어난 레펜하르트.

하나를 가르치면 열이 아니라 백, 천을 깨달아 버리고 마는 희대의 천재.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최초의 ‘하나’를 배우는 것만은 필요했다.

그 하나를 배우지 못했을 때의 그는 불길한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 아이는 저주받았어!

-악마의 자식 같으니!

사람들은 욕을 했다. 두려움과 공포에 젖은 눈으로, 욕하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어떤 해코지도 못 한 채 그저 꺼려하고 멀리하려고만 했다.

열 살의 아이는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흥!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 주위에서는 항상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의 아버지는 서까래를 고치다가 이유 없이 추락해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 그 튼튼하던 서까래가 왜 부러졌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유 모를 병에 걸려 죽었다. 평소 잔병치레 하나 없던 여인이 어떻게 그토록 쉽게 죽어 버렸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고아가 된 아이는 처음엔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돌보았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불길한 아이였다.

아이의 주변에서 끝없이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벽이 무너지고 지붕에 구멍이 뚫리고 키우던 소나 말이 죽거나 같이 놀던 아이들이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았다.

자연스레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이렇게 불렀다.

불길한 아이, 귀신 붙은 레펜.

결국 아이가 아홉 살이 되던 해, 마지막까지 아이를 돌봐 주던 집에 큰 화재가 났다. 다행히 자고 있던 가족들은 빠르게 대피했지만 모든 재산이 불타 버려 거지가 되었다.

-전부 너 때문이야!

-제 부모 잡아먹은 새끼!

-악마 같은 놈!

아이는 마을 밖으로 쫓겨났다. 마을로부터 한참 떨어진 사냥꾼의 오두막, 집이라 할 수도 없는 허름한 곳으로 내쳐져 버렸다.

그러고 나니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 더 이상 어떤 불길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안심했고, 더더욱 확신했다.

레펜, 그 아이는 저주받은 아이라는 것을.

☆ ☆ ☆

“그땐 몰랐지, 내 마력이 문제였다는 걸.”

정제되지 않은 마력은 체내에 쌓여 안정된 상태로 존재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명상 등을 통해 마력을 키우는 방법도 모른 채 마력을 쌓을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마력이 쌓여 봤자 술식을 통해 구현되지 않는 한, 현실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문제는 내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거지.”

레펜하르트의 재능은 너무 뛰어났다. 과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뛰어났다.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그저 멍하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쌓였다. 쌓인 마력이 저절로 정제되어 본연의 힘이 되었다. 너무도 강력한 마법 친화력이 무의식적으로 그 마력을 움직여 현세에 영향을 끼쳤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은 양날의 검, 당시의 난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너무 어렸다.”

☆ ☆ ☆

-꺼져! 이 악마!

-당장 마을에서 사라져!

아이들의 욕설을 뒤로한 채 어린 레펜은 손에 주머니를 쥐고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에 든 것은 약간의 빵과 치즈 덩이였다. 그의 일주일 치 식량, 이것이 아니라면 이런 박해를 받으며 굳이 마을로 내려오지도 않았으리라.

마을 사람들은 레펜을 두려워해 내쫓았다. 열 살도 채 안 된 어린아이를 어른의 보살핌도 없이 외진 흉가에 버려두면 그건 곧 죽으라는 소리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감히 레펜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딱히 사람들이 순박하고 선량해서만은 아니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안 그래도 미신이 팽배한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저 저주받은 아이가 만약 죽는다면 그 저주가 자신들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매주 일정량의 식량을 대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이 더 줄었잖아? 요새 마을 사정이 안 좋나?

손에 든 빵과 치즈의 무게를 가늠하며 레펜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접하기를 두려워하는 마을 사람들은 이 식량조차 직접 주지 않았다. 레펜이 하산할 때에 맞춰 정해진 장소에 미리 갖다 놓을 뿐.

레펜에게 야유를 던지는 아이들 뒤로 한 무리의 아낙네들이 나타났다. 여인들이 아이를 감싸 안고 작은 목소리로 혼을 냈다.

-뭐하는 거니? 저 애 근처에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근처에 안 갔어요. 그냥 멀리서 말한 건데…….

-말도 하지 마! 보지도 마! 그냥 없는 애인 것처럼 굴란 말이야!

-에, 하지만 엄마…….

레펜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아주 역병 취급이네.

구시렁대며 아이들이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간다. 그 뒷모습을 어린 레펜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엄마라…….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 위로 살짝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그 물기는 이내 사라졌다.

-뭐, 부럽긴 하지만 부러워한다고 없는 엄마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깨를 한번 으쓱여 준 뒤, 레펜은 다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열 살짜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냉정한 태도였다.

아이는 현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현실을 조합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만큼 영리하기도 했다.

-안 되는 거에 매달려 봤자 바보짓이지.

그저, 그 아이의 현실이 너무 좁았을 뿐.

태연스레 주머니를 휘두르며 아이는 마을 밖으로 나섰다.

-자, 집에 가야지.

☆ ☆ ☆

“생각해 보면 용케도 살았다 싶어. 그런 어린애가 어른의 보살핌도 없이 버려졌다가 병이라도 앓으면 그냥 죽는 건데.”

오두막은 추웠다.

당시의 레펜하르트는 불을 피울 장작조차 구할 힘이 없는 어린아이였다. 밤이 되면 낮에 모은 지푸라기를 잔뜩 바닥에 깔고 누더기를 뒤집어쓴 채 벌벌 떨며 지내야 했다.

식량도 넉넉하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정말 딱 안 죽을 정도의 식량만을 줬을 뿐이었다. 아무리 아껴 먹어도 하루에 두 끼 먹기가 힘들었다. 그나마도 주말이 가까워지면 다 떨어지곤 했다. 어린 나이다 보니 사냥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시의 난 내 의지대로 마력을 다루지 못했거든. 다룰 수 있었으면 애초에 저주받았다는 소리도 안 나왔겠지만.”

그나마 여름이나 가을엔 과일을 따거나 개구리나 애벌레 같은 걸 잡아 어떻게든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겨울이 문제였다. 굶주린 채 추위에 떠는 열 살짜리 아이가 건강하게 겨울을 났을 리가 없다. 수시로 앓고 또 앓았다.

“그렇게 앓고도 용케 안 죽은 건, 역시 체내의 마력 덕분이었겠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 물론 그 당시엔 내 운명에 그저 저주만 퍼부었지만.”

☆ ☆ ☆

설풍이 불어닥치던 어느 겨울날.

누더기를 뒤집어 쓴 채 고열에 신음하며 레펜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왜 난 이렇게 태어난 걸까?

왜 나만 이렇게 저주받은 걸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답을 내기엔 열 살의 아이는 너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풀리지 않는 분노만 가슴 한쪽에 뭉쳐 쌓이고 또 쌓일 뿐.

결국 아이는 포기했다.

세상은 원래 이런 거구나.

나는 원래 이런 놈이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이구나.

새하얀 눈이 내리는 밤, 무너져가는 폐가 속에서 아이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포기하니 웃을 수 있었다.

-하하.

웃음을 되돌려 받은 것이 기뻐 아이는 더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때였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추운 밤, 절망에 빠져 있었으면서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던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이글거리는 화톳불을 손에 든 채 어둠을 밝히며, 맑고 청량한 음성을 동반하며 ‘그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떤 미친년이 야밤에 처웃고 앉았어?

레펜은 멍하니 눈을 떴다.

침입자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미녀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싸늘한 눈매에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절로 경계하는 레펜을 보며 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여자가 아니었네? 하긴 변성기 안 지난 애들 목소리가 그렇긴 하겠다.

놀랍게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마자 인상이 돌변했다. 냉혹해 보이던 인상이 순식간에 장난스러운 그것으로 바뀐다.

-아, 네가 여기 산다는 애구나?

누더기를 두른 채 뒷걸음질 치며 레펜이 차갑게 되물었다.

-당신 누구야?

여인이 장난스레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 살 사람?

-그게 무슨 헛소리야!

버럭 소리 지르는 레펜을 향해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너무 경계할 필요 없어, 꼬맹아.

여인이 레펜의 오두막에 나타난 이유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이 근처를 지나다 잠시 머물 일이 생겼는데, 되도록 인적이 없는 거처를 원했던 것이다. 때마침 레펜의 오두막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고, 그래서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겨울 동안만 묵겠다고 요청했다.

물론 마을 사람들도 처음엔 거절했다.

-그곳엔 저주받은 아이가 있소!

-그건 신경 안 써요.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겠지. 하지만 진짜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반대는 곧 수그러졌다. 여인이 내민 한 줌의 은화 덕이었다.

은화를 허겁지겁 챙기며, 그래도 겁이 나는지 마을 사람들이 연신 조심하라며 다짐을 주었다.

-워, 원한다면 묵어도 좋지만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해도 우린 책임이 없소!

-저런 이유로, 겨울 동안 내가 여길 쓰게 되었다 이거지.

눈을 부라리며 레펜이 호통을 쳤다.

-웃기지 마! 이건 내 집이야!

뭐, 열 살짜리가 호통쳐 봐야 뭐가 무섭겠냐마는.

당연히 여인은 신경도 안 쓴 채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스미스던가? 그 인간 집이지. 넌 공짜로 묵고 있을 뿐이고. 아니면 너 혹시 매달 집세 내니? 이중 계약이면 가서 따져야겠네.

-…….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 오두막은 스미스 아저씨 소유였고, 자신은 그냥 얹혀사는 신세였다.

입을 다문 레펜을 보며 여인이 도리어 놀랐다.

-뭐야? 납득한 거야? 열 살짜리가?

아무리 합리적인 이야기라지만, 이런 상황에서 바로 상황을 파악해 납득하는 건 어른에게도 힘든 일이다. 보통 영리한 꼬마가 아니었다.

-흐음.

여인의 눈동자에 호기심의 빛이 맴돌았다. 레펜이 주저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비웃음을 머금은 채 레펜이 뇌까렸다.

-그렇다 해도 나랑 사는 건 피하는 게 좋을걸?

-어머나, 어째서?

-난 저주받았거든. 당장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당신도 불행에 휩쓸릴걸?

나름 협박이라고 한 건데 오히려 여인은 웃었다.

-그래, 마을 사람들로부터 듣기는 했지.

-뭐가 그리 태연해? 못 들은 거야? 난 저주받았다고!

-이런 촌동네에서야 그렇게 여기겠만 세상 떠돌다 보면 의외로 너 같은 아이는 상당히 많단다.

여인은 비웃었다. 저주받은 아이? 대륙을 떠돌며 그녀는 이런 식의 취급을 받는 아이를 꽤나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게으름 피워 불씨를 제대로 끄지 않았다가 화재가 나면 저주받은 아이 때문.

평소 제대로 꼴을 먹이지 않아 허약해진 소가 어느 날 죽으면 저주받은 아이 때문.

-어리석은 사람들은 우연이 겹쳐 불운을 당하면 원망할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거든.

-흥! 그 애들도 이딴 짓을 하나 보지?

레펜이 버럭 성을 내는 순간이었다.

화르르륵!

갑자기 여인이 든 화톳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동시에 벽 여기저기에 금이 가며 우지끈하는 소리가 났다.

여인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이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레펜이 조소를 흘렸다.

-당신이 아는 애들도 이런 짓을 하던가?

여인은 말없이 화톳불을 바라보았다. 잠시 크게 타오르던 화톳불은 이내 사그라지며 원상태로 돌아왔다. 뭔가 알겠다는 듯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뭔가 있긴 있구나.

-그래? 이제 알았나 보지? 내가 저주받았다는 걸?

-그런데…….

허리에 손을 얹으며 여인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래 봤자 이것도 신기할 건 없어. 좀 특이한 건 사실이지만.

-무, 무슨?”

흥미 어린 눈으로 여인이 레펜 곁으로 다가왔다.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며 그녀가 단정 짓듯 말했다.

-더더욱 여기서 살아야겠다, 꼬맹아.

-누가 살게 해 준대?

하지만 레펜의 반항은 이내 사라졌다. 그녀가 꺼낸 주머니, 그 속을 보여 준 것이다.

-꼬맹이, 배 안 고프니?

눈앞에 흰 빵이랑 닭고기가 척 나왔다. 부끄럽게도 레펜은 바로 넘어갔다. 안 그래도 며칠째 쫄쫄 굶으며 앓았던 차였다. 눈앞의 음식을 보고 나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웁, 웁웁!

정신없이 빵을 씹고 고기를 찢어 삼키는 어린아이를 보며 여인이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레펜이 배를 채우는 동안 여인은 가만있지 않았다. 잠깐 밖으로 나가더니, 이내 한 무더기의 장작더미를 마련해 온 것이다.

설풍이 불어 산사람도 감히 나다니길 두려워하는 이 한겨울의 산속에서 대체 무슨 수로 저런 장작을 마련한 걸까? 의아해할 법도 하지만 레펜은 눈앞의 음식에 정신이 팔려 미처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영리하다 해도 그는 고작 열 살짜리 아이였을 뿐이다.

타닥타닥.

장작 튀는 소리와 함께 벽난로에 불길이 솟았다. 레펜이 이 흉가에 거한 후 처음으로 오두막에 온기가 감돌았다. 따스한 공기가 삽시간에 겨울의 추위를 몰아내고 내부를 훈훈하게 데웠다.

배를 채우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레펜이 얼굴을 붉혔다. 고작 음식 몇 개에 정신을 확 놓아 버리다니…….

-음, 뭐, 여기서 살든지 말든지 당신 마음대로 해.

부끄러움을 감추려 버럭 신경질을 내며 레펜은 자신의 침상으로 걸어갔다. 주린 배도 채웠고 공기도 훈훈해지니 절로 졸음이 왔다.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몸을 홱 돌리며 앙칼지게 말을 이었다.

-여기 있다가 무슨 일 당해도 난 몰라!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여인이 깔깔 웃었다.

-그래, 꼬맹아. 뭔 일을 당해도 내가 당하는 거니까 안심하고 처자기나 하렴.

말투가 험하면서도 묘하게 다정하다.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며 레펜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들지는 못했다.

침입자의 등장으로 잠시 흥분해 잊고 있었지만, 레펜은 고열에 시달리는 몸이었다. 일단 몸을 누이니 또다시 열이 오르고 오한이 들며 전신이 으슬으슬 떨렸다.

-으, 으으…….

고통을 참으며 레펜은 애써 잠을 청했다. 딱히 서러움 따윌 느끼진 않았다. 이런 밤은 처음이 아니었고 이런 고통도 처음이 아니었다. 그저 흔한 일상 중 하나일 뿐이니 서러울 것도 없었다.

평소처럼 차가운 바닥에 누워 누더기를 뒤집어쓴 채 참다 보면 다시 해가 뜨고 아침이 오리라. 태양의 온기가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아픔이 가시겠지.

그렇게 막 레펜이 몸을 뒤척이던 차였다.

-춥냐? 꼬맹아?

어째 말투가 ‘내가 기껏 불도 피워줬는데 감히 추워한단 말이냐?’처럼 들린다. 레펜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당신이 상관할 바 아냐.

그런데 어째 여인의 질문은 그런 의도가 아닌 모양이었다.

-나도 추워.

빙그레 웃더니 여인이 겉옷을 벗고 속옷차림이 되어 레펜의 누더기 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이리 와, 꼬맹아. 같이 자자.

-무, 무슨 짓이야?

기겁한 레펜이 꿈틀거렸지만 그녀는 어느새 레펜의 작은 몸을 꼭 껴안고 있었다. 품속에 작은 아이를 담은 채 여인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아, 역시 어린애는 따듯해.

풍만한 가슴이 레펜의 등을 눌렀다. 부드러우면서도 말랑한 그 감촉, 부끄러워 레펜이 악을 썼다.

-다, 당신 잘 자리는 알아서 구해!

-어머나? 네 침대 내가 쓰는 게 불만이니?

-당연하지!

-불만이면 먹은 빵이랑 고기 도로 토해 내든가.

와, 이렇게 치사할 수가?

기가 막혀 레펜은 반항을 멈췄다. 저렇게 나오니 뭐 대꾸할 말도 없다.

-끄응.

나이는 어려도 레펜은 바보가 아니었다. 여인이 정말 추워서 자신을 난로 삼으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막상 품에 안겨 보니 떠나기 싫기도 했다.

부드럽고 따스한 몸이었다. 오한이 드는 전신을 그녀의 온기가 감싸고 있었다. 왠지 아픔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열이 심하네.

레펜의 이마를 짚으며 여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희미한 냉기가 흘러나와 열이 오른 레펜의 이마를 감쌌다.

이마가 차가워지니 한결 나아졌다. 아이의 표정도 한결 가벼워졌다. 자기도 모르게 레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따듯한 식사에 따듯한 침상, 그리고 자신을 꼭 감싸 주는 온기.

천국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럼 얌전히 자라, 꼬맹이.

서늘한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어 주며 그녀는 다정하게 말했다.

누더기 모포를 머리끝까지 올린 채 어린 레펜이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람.

☆ ☆ ☆

“일단 그렇게 되고 나니 더 대들기도 애매하더라. 어차피 저주받아도 그녀가 받지 나랑 뭔 상관이냐 싶기도 했고. 그래서 그날 이후, 그녀와 난 함께 살게 되었지.”

2

함께 살기 시작하며, 레펜은 그녀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제일 먼저 알게 된 사실은, 그녀는 진짜로 겨울을 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거의 추위를 타지 않았다.

겨울 산의 추위는 각별히 매섭다. 그런데 그녀는 어지간한 추위 속에서도 거리낌 없이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니곤 했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도 간단한 외투 하나를 걸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겨울을 피하겠다고 한 거야?

여인이 베어 온 장작을 오두막 한쪽에 쌓아 두며 레펜이 물었다. 앞뜰에 서 있던 그녀가 대꾸했다.

-사실은 내가 이 근방에서 사고를 좀 쳤거든. 잠잠해질 때까지 조용히 지낼 곳이 필요했어.

무슨 사고를 쳤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앞뜰에서 장검을 뽑아 들고 연무 중이었다. 검술 따위 아무것도 모르는 레펜이지만, 그녀가 상당한 수준의 검사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화려한 잔상이 번뜩이고 쌓인 눈이 휘몰아쳐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니 결코 약할 리가 없었다.

-그럼 이름은? 언제까지고 당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내 이름?

잠깐 고민하더니 여인이 대답했다.

-음, 위니스라고 하자.

레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위니스라면 이 근방에서 제일 흔한 여자 이름이 아닌가?

-아? 성도 필요하겠지?

힐끔 앞뜰에 놓은 작은 돌을 바라보더니 그녀가 말을 이었다.

-스톤. 스톤 정도면 괜찮겠네. 혹시 누가 물어보면 위니스 스톤이라고 해.

-……어이, 가명인 게 너무 뻔하잖아!

-내가 아까 사고 쳤다고 했지, 꼬맹아? 미안하지만 본명은 못 가르쳐 준단다.

뭐,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에게 친절하다곤 해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타인, 지나가다 만난 어린아이에게 모든 걸 드러낼 수는 없겠지.

그래도 살짝 서운한 것은 사실이었다.

-치이…….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위니스가 정말 대단한 검술의 고수라는 것이었다.

-꼬맹아, 자자!

-아 제발 좀! 오늘도 나 안고 자려고?

-밤엔 춥단 말이야.

-나 이제 열도 다 내렸어! 안 춥다고!

-내가 춥다고, 꼬맹아. 네가 춥건 말건 무슨 상관이니?

-추위 안 타는 거 뻔히 아는데 무슨 헛소릴…….

함께 살게 된 이후 위니스는 틈만 나면 어린 레펜을 안고 자려 들었다. 인형처럼 귀여워서 껴안고 자는 맛이 있대나?

-이리 와!

밤만 되면 억지로 붙잡아 안아 버리는데, 도대체 그 손을 피할 수가 없다!

-역시 꼬맹이는 따듯해.

-우왁! 저리 가!

물론 레펜도 나름 벗어나려고 발버둥은 쳐 봤지만…….

-훗, 네가 발버둥 친다고 단련을 거듭한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니?

뭐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그녀에게 안기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발버둥 쳐 봐야 소용없다. 뭐,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좋네. 계속 발버둥 치렴. 나름 운동 되겠다. 잠은 푹 잘 올 거야.

-우씨…….

저렇게 나오니 오히려 반발이 생겨 발버둥 치기가 싫어진다.

-어머? 벌써 포기? 근성 없네? 아이구, 우리 꼬맹이. 얌전한 게 귀엽기도 하지. 그런데 포기하는 것보단 반항하는 게 나아. 적어도 운동은 되잖아? 운동 열심히 해야 쑥쑥 자라서 근사한 남자가 되지.

이놈의 여자는 얌전히 있어도 속을 벅벅 긁어 댄다. 아무리 레펜이 영리해 봤자 경험도 지식도 없는 열 살짜리 아이였다. 신경질이 나 도로 발버둥을 쳤다.

-우이씨!

물론 그래 봤자 소용은 없다. 어린 레펜을 품에 안은 채 위니스가 깔깔 웃었다.

-역시 꼬맹이는 팔팔해서 좋다니까.

일이 터진 것은 그 후였다.

콰직!

갑자기 벽 일부가 부서지며 그 파편이 위니스를 향해 날아든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갑자기 벽난로의 불길이 치솟고 집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린다!

레펜이 놀라 소리쳤다.

-위니스!

또다! 또 그놈의 저주가 발동했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죽이고, 마을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그 저주!

결국 두려워하던 일이 터졌다. 이 저주가 그녀를 해할 것이다. 용케 저주를 피해 간다 해도 그녀는 자신을 떠날 것이다.

공포에 질려 레펜이 위니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레펜의 예상을 벗어났다.

-이런 건가? 좀 신기하긴 하네.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집안을 위니스는 태연자약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부지깽이 하나를 들어 가볍게 허공을 휘저었다.

굳이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어린 레펜을 품에 안은 채, 누운 자세로 나비라도 잡는 것처럼 대충 부지깽이를 휘두른다.

부지깽이가 날아든 파편 하나를 후려갈겼다.

타악!

타격음과 함께 파편이 튕겨 다른 파편을 때렸다. 파편과 파편이 충돌하며 또다시 방향을 바꿔 다시 튕겨 났다. 파편이 파편을 때리고, 또 튕겨나 다른 파편을 부순다.

그녀를 노리던 모든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뭐야?

레펜은 경악해 눈을 크게 떴다.

영리한 아이는 금새 위니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파편을 튕겨 내는 각도를 조절해 다른 파편과 연쇄 충돌을 일으켜 모든 파편을 되돌린 것이다. 무시무시한 힘 조절과 어마어마한 감각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맙소사,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란 말이야?’

위니스가 부지깽이를 한 번 더 휘둘렀다. 바람이 불며 벽난로의 불길이 도로 잠잠해지고 오두막의 흔들림도 멎었다.

-자, 도로 자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그녀를 보며 레펜이 혀를 내둘렀다.

-위니스, 진짜 고수였구나.

-그럼. 난 고수지.

으스대며 그녀가 잘난 척을 했다.

-그러니 잠버릇 험한 꼬맹이 하나쯤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단다.

그 후로도 위니스는 레펜을 안고 자는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가끔 자는 도중 저주가 발동하는 일도 생겼다.

그때마다 그녀는 태연하게 모든 저주를 물리쳤다. 어떨 때는 저주가 발동된 줄도 모른 채 자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주위가 어지러운 걸 보고 알아채는 일도 있었다.

레펜도 더 이상 위니스의 품을 거부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의 품 안에서는, 안심하고 아이처럼 잠들 수 있었으니까.

☆ ☆ ☆

겨울도 어느덧 절반 이상 지났다. 레펜도 더 이상 위니스와 함께 사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맑은 겨울 하늘이 높게 펼쳐진 어느 날.

레펜은 오두막 앞뜰로 나섰다. 평소처럼 검술 수련 중인 위니스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위니스!

아무 대꾸 없이 위니스는 계속 검을 휘둘렀다. 좀 더 목청을 높여 레펜이 재차 불렀다.

-어이! 위니스!

-응? 아? 나?

그제야 위니스가 고개를 돌려 레펜을 바라보았다. 레펜은 혀를 찼다. 기껏 불러도 그녀가 반응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이, 아무리 가명이란 걸 알고 있다지만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시지?

-에이, 익숙하지 않은데 어쩌라고?

-너무 당당하잖아!

-어차피 이곳엔 너랑 나밖에 없잖니. 그냥 대충 편한 대로 부르면 되는 걸 가지고, 뭘.

대범한 건지 둔한 건지 모르겠네. 입을 삐죽이며 레펜이 투덜거렸다.

-그럼 나도 편한 대로 부르지. 어이, 아줌마!

순간 위니스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레펜의 등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호호호.

분명 웃음소리인데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하다. 질겁을 하고 레펜이 뒤를 돌아보았다.

-꼬맹아?

-……네?

자기도 모르게 존대말이 나와 버렸다.

-잘 알아 두렴. 사내가 젊은 여성을 대할 땐 반드시 지켜야 할 룰이 있는 거란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어겨서는 안 되는 룰이지. 무슨 소리인지 알겠니?

장난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무시무시한 뭔가가 느껴진다. 살기는 아니고 저걸 뭐라 해야 하나? 여인의 자존심?

레펜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 것 같아요.

실실 웃으며 위니스가 레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앞으론 누나라고 부르렴.

-그, 그건 싫어. 부끄럽단 말이야.

샐쭉하니 고개를 돌리는 레펜의 태도에 위니스가 눈을 빛냈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었다.

-아니, 누나보단 언니가 좋겠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누가 남자애로 보겠어? 그렇지?

확실히 요즘 레펜은 어지간한 여자애보다도 예쁜 소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못 먹고 힘겹게 살며 앙상하던 팔다리에 살이 붙고, 저주로 인한 스트레스도 줄어 피부도 뽀얗게 변했다. 안 그래도 타고난 미모가 굉장한 터라, 잘 먹고 잘 자라니 정말 일국의 공주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자, 불러 보렴. 언니~.

-부를까 보냐!

-에이, 그럼 그냥 누나라고 부를 거야?

-당연하지!

실망한 기색으로 위니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쳇, 할 수 없지. 그냥 누나라고 불러.

승리자의 기쁨을 만끽하며 레펜은 당당하게 그녀를 불렀다.

-알았어, 위니스 누나.

그리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가만? 뭔가 당한 기분인데?

위니스가 소리 높여 웃었다.

-역시 애들은 놀리는 맛이 삼삼하다니까?

-우씨! 얼른 밥이나 먹어, 위니스!

밥 먹으라고 부르러 온 건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에이, 누나라고 부른다고 했잖아? 자, 불러 봐. 누. 나.

-아, 몰라!

☆ ☆ ☆

위니스와 함께 살게 된 후 레펜의 생활은 매우 풍성해졌다. 이 허름한 오두막을 은화를 주고 빌릴 정도로 그녀는 상당한 부자였고, 생필품을 사는 데 딱히 돈을 아끼지도 않았다.

언제나 입고 있던 구멍 난 옷 대신 양털로 짠 겨울 외투를 입을 수 있었다.

언제나 덮고 자던 누더기 대신 푹신한 솜이불을 덮을 수 있었다.

식사 또한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 두 사람의 식탁엔 흰 빵에 고기 스튜, 야채 절임에 신선한 치즈까지 놓여 있었다. 언제나 마른 빵과 곰팡이 핀 치즈로 연명하던 시절이 거짓말 같을 정도였다.

단지 문제는 위니스가 너무 요리를 못해서 어린 레펜이 손을 써야 한다는 점이었지만.

-대체 위니스는 그렇게 검술을 잘하면서 요리는 왜 못하는 거야?

사실 요리에 대해 문외한이긴 레펜도 마찬가지였다. 음식 자체도 제대로 접한 적이 드문데 요리를 익힐 기회가 있을 리 있나?

하지만 식재료가 풍부해진 이후엔 달라졌다. 식재료를 사 오며 간단한 레시피도 함께 얻은 레펜은 그 레시피대로 이래저래 요리 연습에 매달렸다.

해 보니 생각보다 요리라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냥 정확한 분량을 정확한 시간에 넣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원래 그런 정밀한 계량은 예전부터 본능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고작 열 살인 레펜의 요리 솜씨는 이제 어지간한 새댁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다.

빵을 찢으며 위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신경 꺼, 꼬맹아. 어차피 요리란 건 남이 해 주는 걸 먹으면 되는 법이야. 사람은 자기가 잘하는 걸 해야지. 원래 한 우물만 파는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다?

-핑계는…….

핀잔을 던지며 레펜은 배시시 웃었다. 이제 이 저주받은 아이도 또래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이런 사소한 일상조차도 행복해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행복해 두렵기까지 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저기, 위니스.

-왜, 꼬맹아?

잠시 주저하다 레펜이 조심스레 물었다.

-……위니스는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는 거야?

대수롭잖다는 듯 그녀가 대꾸했다.

-그게 뭐가 이상하니? 난 마침 묵을 곳이 필요했고, 마침 그곳에 귀엽고 불쌍한 아이가 있었고, 마침 돈도 있었고 애가 똘망똘망해서 같이 사는 게 귀찮지도 않았고.

-그게 전부야?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왜? 혹시 내가 꼬맹이 너한테 무슨 흑심이 있어서 잘해 주는 줄 알았니?

부끄러워하며 레펜이 고개를 움츠렸다.

사실은 그런 생각도 좀 했다. 자신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니까, 저주받은 자신을 이용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었다.

위니스는 깔깔 웃었다.

-꼬맹아, 네 입장에선 세상이 뒤바뀔 정도로 큰 도움이겠지만, 사실 난 금전 몇 푼을 더 썼을 뿐이란다. 널 책임지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른이 될 때까지 키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겨울 날 동안 같이 있는 것뿐이라고.

레펜의 말랑말랑한 뺨을 주욱 당기며 그녀가 장난스레 말했다.

-네가 특별해서가 아냐. 내가 특별해서 널 잠시 돌봐 주는 거지. 사실 나같이 착한 사람도 흔치 않거든?

언뜻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레펜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니 안심하고 이 행운을 즐기렴. 잠깐의 겨울이 주는 짧은 행운일 테니까.

오히려 기뻤다.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에헤헤.

헤실거리는 레펜을 향해 위니스가 핀잔을 던졌다.

-이제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밥이나 마저 먹어. 사내애가 그렇게 삐쩍 말라서야 어디 쓰겠니? 모름지기 남자라면 듬직해야 하는 법이야.

☆ ☆ ☆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다. 문득 생각나 레펜이 말했다.

-아, 위니스? 슬슬 식재료 떨어졌어. 사러 가야 돼.

현재 마을에서 식재료를 구입하는 일은 어린 레펜이 맡고 있었다. 사고를 친―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위니스가 되도록 마을 사람들 눈앞에 나서는 걸 꺼려한 탓이었다.

열 살짜리 아이가 오르내리기엔 좀 험한 산길이었지만, 레펜은 예전 헐벗고 굶주렸을 때도 매주 그 길을 오갔었다. 지금은 살도 붙고 체력도 예전과 비교가 안 되니 전혀 오가는 데 지장이 없었다.

위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뒤져 은화 몇 닢을 건네주었다.

-자, 대충 사오고 남은 건 너 갖고 싶은 거 사렴.

말은 이렇게 해도 위니스는 레펜이 저 은화를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영리하고 계산도 빠른 아이다. 받은 은화를 확실히 계산해 필요한 물품을 전부 구입함으로써 받은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는다.

식사를 마친 뒤 레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마을 갔다 올게!

반나절 뒤, 마을의 한 잡화점 앞.

-빵이랑 치즈랑, 순무랑 마른 야채도 좀 주세요.

레펜의 주문에 따라 잡화점 주인이 빠른 손놀림으로 물건을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후딱 바구니를 내밀었다.

-자! 여기 있다!

위니스가 온 이후 레펜은 다시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레펜의 저주는 여전히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만큼이나 그가 쥔 은화의 유혹도 컸던 것이다. 과연 돈의 힘은 위대해서 은화 몇 줌으로 충분한 식재료를 구하며 동시에 몇몇 레시피도 얻을 수 있었다.

-자, 여기 돈요.

-다 받았다. 그럼 어서 꺼져!

돈을 받자마자 잡화점 주인은 레펜를 쫓아내듯 밖으로 몰아냈다. 비록 은화가 탐나 거래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 귀신 붙은 아이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뭐, 하루 이틀 당했던 일도 아니다. 레펜은 태연하게 바구니를 들고 잡화점을 나섰다. 필요한 걸 전부 샀고 딱히 이 마을에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서 오두막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오늘 저녁은 뭘 하지? 탕을 끓여 볼까?

그렇게 저녁 메뉴를 고심하며 발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귀신 붙은 레펜이다!

-그 악마 새끼야!

마을 아이들이었다. 언제나처럼 레펜을 보고 놀리는 것이었다. 이 역시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지라 가볍게 무시하며 지나치려던 차였다.

-저 괴물 새끼가 무시하네?

마을 아이 중 덩치가 큰 놈이 돌멩이를 하나 집어 던진 것이다. 어른조차 두려워하는 레펜에게 돌을 던짐으로써 다른 아이들에게 위엄을 보이겠다는, 참으로 아이다운 치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휘익!

평소 같으면 당연히 빗나갔을 것인데, 하필 운이 나빴는지 돌멩이가 레펜의 뒤통수를 때렸다.

-윽!

통증을 느끼며 레펜이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아이들이 당황하며 떠들어 댔다.

-어, 맞았다?

-피, 피 나는 거 같은데?

-흥! 맞았으면 제까짓 놈이 어쩔 건데?

돌을 던진 아이가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가슴을 활짝 편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레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예전 같았으면 무시했을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모른 척 넘어갔을 것이다.

자신은 저주받은 아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부정한 존재이니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위니스가 있었다. 그녀 덕분에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가 있었다. 너무 행복한 나머지, 예전에는 견딜 수 있었던 수모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되었다.

분노가 일어났다.

-이이익!

물론 분노해 봤자, 레펜은 여전히 어린아이일 뿐이다.

흥분한 채 레펜이 떨어진 돌을 주웠다. 자신의 피 묻은 돌을 주워 도로 아이들에게 던졌다. 화가 난 아이다운 평범한 반응이었다.

-꺼져!

화르륵!

날아가는 돌 주위로 새까만 암흑이 피어올랐다. 어둠이 돌멩이를 순식간에 휘감으며 그대로 아이들의 발치에 떨어진다. 순간 폭음이 울렸다.

콰아앙!

새까만 회오리가 아이들을 뒤덮고 용솟음쳤다. 아이들이 회오리에 휘감겨 허공에 떠올라 발버둥 쳤다. 새까만 회오리 사이로 아이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엄마아아!

-앙앙앙!

눈물콧물을 흘려 가며 아이들이 방금 전까지 놀린 레펜에게 빌기 시작했다. 그만큼 이 회오리는 맹렬하고, 또 무서웠다.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오오!

레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

레펜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당연히 저 회오리를 도로 잠재울 방법 또한 모른다. 회오리는 계속 휘몰아쳐 아이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이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갔다.

-으아아앙!

-엄마아아!

-아빠아아!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아무런 방도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얘질 뿐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레펜은 무릎을 꿇었다.

어리석었다. 잠시 꿈을 꾸다 보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잊었다.

저주받은 아이. 가까이 하는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뿐인 부정한 존재!

그때였다.

-에잉, 결국 일 터졌네.

갑자기 마을 어귀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순식간에 레펜의 곁까지 달려온다. 그녀를 본 순간 레펜이 눈물범벅이 되어 소리쳤다.

-위니스!

허리의 검을 뽑으며 위니스가 혀를 찼다.

-쯧,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 같더라.

그녀의 검이 검은 회오리를 갈랐다. 눈부신 빛 때문에 레펜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검은 회오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든 것처럼 바닥에 쓰러진 마을 아이들과, 도로 검을 검집에 넣는 위니스만 보일 뿐이었다.

-어, 위니스, 나, 나…….

공포와 자괴감 속에서 레펜은 울상을 하며 말을 더듬었다. 위니스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쉿, 사내자식이 질질 짜면 안 되지?

레펜을 달래며 위니스는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한 무리의 주민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광경이 보였다. 그토록 큰 회오리였다.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해야겠네.

위니스가 레펜의 허리를 안아 들고 옆구리에 끼웠다.

-튀자, 꼬맹아.

☆ ☆ ☆

위니스는 분명 마을 사람들 앞에 자주 나타나는 걸 꺼려했다.

그러나 고작 열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를 홀로 산길에 보내고 신경도 쓰지 않을 만큼 냉혈한도 아니었다. 시선을 꺼리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진 않았지만, 그래도 레펜이 마을로 가는 동안 혹여 무슨 일 당할까 싶어 몰래 뒤따르곤 했다.

게다가 그렇게라도 안 하면 어린 레펜은 정말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살 테니 사회 경험도 시킬 겸 겸사겸사 한 일이었다.

‘덕분에 늦지 않았지.’

품에 안은 어린아이를 보며 위니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레펜은 그대로 기절해 있었다. 아무리 영악해 보여도 고작 열 살짜리 아이, 심적인 부담이 상당히 심했으리라.

레펜을 안은 채 위니스는 빠른 속도로 산길을 달렸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몇 미터씩 쑥쑥 달리니 그 속도가 산양도 울고 갈 지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레펜이 다시 깨어난 것은 오두막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위니스?

-정신 차렸냐, 꼬맹아?

주위를 둘러보더니 레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 애들은?

-다들 무사해. 뭐, 상당히 놀랐으니까 몇몇 애들은 경기 좀 일으키겠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애들은 없어.

그제야 안심이 되어 레펜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이를 달래려 위니스가 다가섰을 때였다.

-오지 마.

레펜이 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위니스가 콧방귀를 켰다.

-얼씨구? 갑자기 분위기 잡니?

섬뜩한 눈동자를 빛내며 레펜이 고개를 저었다. 열 살짜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음산한 눈빛이었다.

-주제 파악을 못 했어. 위니스 때문에 내가 평범한 아이라고 착각해 버렸어.

그동안 너무 행복해서 잊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즐거워서 무시하고 있었다.

-난 저주받았어.

-또 그 소리다, 또.

-난 태어나선 안 될 아이야.”

-원래 너처럼 조숙한 꼬맹이들은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곤 하거든? 하나도 이상할 것 없어.

평소처럼 위니스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받아친다. 하지만 레펜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상할 것 없다고? 응? 이상할 것 없다고?

레펜이 두 손을 펼치며 악을 썼다.

-조숙한 꼬맹이가 그런 짓을 해? 조숙한 꼬맹이가 그런 일을 벌이냐고!

울부짖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위니스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아빠도! 엄마도! 나 때문에 죽었어! 그 애들도 나 때문에 죽을 뻔했어! 앞으로 또 누가 나 때문에 죽어 갈지 몰라! 그런데 이상할 것이 없다고?

레펜이 땅에 주저앉았다. 죽은 자의 눈동자를 한 채 아이가 무기력한 한탄을 토해 냈다.

-계속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위니스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더 이상 평소의 장난기는 없었다.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중에서도 가장 바보 같은 소리야, 그건.

짝!

레펜의 뺨이 돌아갔다. 따귀를 맞고도 레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위니스가 뺨을 때릴 줄 알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놀라지 않는 걸 보니 맞을 소리 했다는 건 아나 보지?

-적어도 위니스가 그렇게 여길 거란 건 알고 있었으니까.

빨개진 뺨을 감추지 않은 채 레펜이 위니스를 올려다보았다.

강한 위니스.

아름다운 위니스.

세상 어느 누구라도 그녀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세상 어느 누구더라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당신처럼 축복받은 사람은 몰라. 내 기분 따위…….

앞으로도 레펜은 이렇게 살아야 하겠지.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 박해 받으며 평생 음지에서 쥐새끼처럼 웅크려야 하겠지.

입가에 비웃음을 띤 채 레펜이 위니스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그걸 알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을?

위니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적막이 흘렀다.

문득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꼬맹아.

차분한 눈빛으로 레펜을 바라보며 위니스가 귓가에 손을 가져갔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 어떤 건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단다…….

푸른 보석이 달린 귀걸이, 위니스가 가볍게 그것을 뗐다. 그 순간 옅은 빛이 반짝였다. 레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어?

그녀의 귓바퀴가 변했다. 동그란 인간의 그것이 아닌 길고 뾰족한 형태로.

-그, 그건……?

위니스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이래 봬도 나도 그리 편한 팔자는 아니거든?

저 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레펜도 잘 알고 있었다.

-엘…… 프?

3

달이 빛나는 겨울 하늘.

위니스는 레펜을 품에 안은 채 오두막 속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팍에 아이를 깊게 묻은 채, 뒤에서부터 감싸 안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건넨다.

-놀랬니, 꼬맹아?

-응…….

품에 안긴 채 레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정말 위니스가 엘프……?

레펜도 엘프를 비롯한 이종족에 대한 이야기는 제법 알고 있었다. 마을에는 종종 세이어의 유랑 신관이 찾아와 설교를 펼치곤 했고, 레펜도 가끔 마을 회관 밖에서 몰래 숨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직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종족.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지음받아 오직 인간의 노예로 살아갈 때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자비 없이는 짐승이나 다름없는 비천한 존재.

그런데, 저 자신만만하고 여유가 넘치는 위니스가 그 엘프라고?

-그래, 난 엘프지. 이 사실이 들통 나면 당장 노예사냥꾼이 달려올 거야. 엘프는 굉장히 비싸거든. 그 사람들 눈에 난 아마 황금덩어리로 보이겠지?

-그래서 이렇게 숨어 있는 거야?

-뭐, 비슷해.

원래 위니스는 몇몇 인간 동료들과 팀을 꾸려 던전 탐사 등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중에 실수를 해 정체가 들통 났다는 것이다.

-이 귀걸이, 마법이 걸려 있는 마도구거든. 그래서 인간처럼 평범한 귀로 보이게 해 주는 건데 재수 없게 들어간 던전에 마력 해제 공간이 있었지 뭐니? 덕분에 짠 하고 드러나 버렸지.

위니스가 엘프란 걸 알아챈 순간 동료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녀처럼 뛰어난 검술을 지닌 엘프는 그 가격이 천문학적이었다. 그동안의 동료애와 우정이 욕망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 그런 놈들이 다 있어!

레펜이 분노해 언성을 높였다. 오히려 위니스가 그를 달래야 할 정도였다.

-그리 화낼 것도 없어. 다 이해하니까.

정작 위니스는 별로 분노한 눈치도 아니었다.

-나 정도 되는 엘프라면 거의 3대가 먹고살 돈을 받을 수 있거든. 목숨을 내놓아 가며 던전을 10년 넘게 들락거려야 겨우 벌 수 있는 금액이 한 방에 생기는데 욕심이 안 날 이가 누가 있겠어?

-뭐야, 그게? 착한 것도 정도가 있지!

-화낼 것 없다니까? 어차피 다 죽었고.

-죽었다고? ……설마 위니스가?

-나 잡아 갖다 팔겠다며 덤비는데 그럼 어쩌겠어? 나도 살아야지.

-……왜 숨어야 한다는 건지 이해는 되네.

몰랐는데 은근 살벌한 구석이 있었구나. 레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앞으로 위니스에게 말 걸 땐 눈치 좀 봐야겠다.

-어차피 그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으니까.

대체로 정체를 숨기고 잘 지낼 수 있었지만 이번처럼 재수 없게 들통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위니스는 자신이 엘프라는 것을,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세상 살기 쉽지는 않더라고.

레펜은 말없이 위니스를 올려다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와 자신은 상황이 다르다. 경멸과 공포가 아닌, 탐욕과 무시를 세상으로부터 받고 있으니까.

그러나,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위니스는 행복하게 산 줄 알았어. 그토록 당당하고, 고민도 없어 보이고 여유도 많아서…….

-나름 오래 살았으니까.”

어깨를 으쓱인 뒤 위니스가 레펜을 일으켰다. 레펜이 순진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위니스처럼 살 수 있어?

아이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나도 아직 모른단다, 꼬맹아. 그러니 엘프 주제에 이렇게 변장하고 인간 세상에서 발버둥 치는 것이고.

그녀의 목소리가 달빛 아래 은은히 들려왔다.

-어쨌거나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잖니? 산 자는 죽음을 택할 수 있지만 죽은 자는 삶을 택할 수 없으니까.

행복하게, 평온하게 살아온 자가 하는 말이라면 이보다 더 위선적인 말도 없겠지.

하지만 저 말을 한 이는 대륙에서 박해받는 엘프였다.

-그러니 일단 살아가렴.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죽어 버리면 결코 좋은 날은 오지 않아.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위니스.

☆ ☆ ☆

그날 이후로도 위니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쾌활하고, 장난기 많고, 당당했다.

엘프의 특징을 보여 주던 긴 귀 역시 다시 감췄다. 언제 들킬지 모르니 항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소 중이던 레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보니까, 위니스는 정말 인간 같아.

도로 귀가 짧아진 그녀를 보니, 왠지 그날의 일이 꿈처럼 느껴진다.

-하나도 엘프 안 같아.

오두막 구석에 앉아 독서 중이던 위니스가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그래? 그럼 엘프 같은 건 뭐니, 꼬맹아?

-에……?

엘프 같은 것? 그러고 보니 엘프 같은 것이 뭐지?

입을 삐죽이며 레펜이 말미를 흐렸다.

-……그래도 그때 본 엘프는 절대 위니스 같지 않았어.

먼발치에서나마 엘프를 직접 본 일도 있었다.

아직 마을에서 살던 시절, 이 일대를 지배하는 영주의 아들이 마을에 시찰 나올 때의 일이었다. 제법 부유했던 영주의 아들은 이런 산골에까지 부리던 엘프 노예를 데리고 왔고, 그때의 그 모습은 어린 레펜의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그녀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비천했다.

그녀는 분명 우아했지만 너무나 비굴했다.

당시 레펜이 본 엘프는 자존심도 자존감도 없이, 그저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밖에 모르던 애완견 같은 존재였다. 세이어의 신관이 가르쳤던 그대로였다.

-엘프는 다 그렇게 비굴한 줄 알았어. 하지만 위니스는 너무 인간 같잖아?

빙그레 웃으며 위니스가 되물었다.

-인간은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단 말이니, 그럼?

순간 레펜의 말문이 막혔다. 위니스의 질문이 이어졌다.

-당시 영주를 만나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기억하니? 그들은 당당했었니? 영주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니?

-그러고 보니…….

그렇진 않았다. 모두들 영주의 아들을 향해 굽실거렸고 허리를 깊게 숙였으며 평소와 다른 비굴한 목소리를 냈다.

-우웅…… 모르겠어. 어려워.

-이리 와, 꼬맹아.

고민에 빠진 레펜을 향해 위니스가 손짓을 했다. 안아 줄 테니 무릎에 와 앉으라는 의미였다. 예전에는 반항도 좀 했지만 요샌 레펜도 그녀에게 안겨 있는 것이 워낙 좋았다. 좋아라 쪼르르 달려가 폴짝 안겼다.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니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네가 본 비굴함은 그들이 엘프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나온 비굴함이 아니야. 노예라는 상황, 영민이라는 상황이 만들어 낸 비굴함일 뿐이지.

아이를 안은 채 속삭이듯 말을 잇고.

-엘프이기 때문에 비천한 것이 아니야. 노예이기 때문에 비천한 것이지. 인간이기 때문에 굽실거리는 게 아니라 영민이기 때문에 굽실거리는 것처럼.

자신의 부드러운 온기를 나눠 주며, 자상한 목소리를 건넨다.

-인간이나 엘프나 별로 다를 것 없어. 그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할 뿐이지.

-그런가…….

레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니스의 말은 영 이해하기 어려웠다. 흐릿하게 느껴지는 바는 있지만 명확하게 머릿속에 정립되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은 이제껏 레펜이 보고 들은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호호, 꼬맹이에겐 너무 어려운 이야기인가? 하지만 우리 꼬맹이는 영리하니까 금방 이해할 거야.

-응, 위니스.

꼬물거리며 레펜이 위니스가 읽던 책에 손을 가져갔다. 자신의 품속에서 자신이 읽던 책을 펼쳐 드는 어린 레펜을 보며 위니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진짜 영리한 아이라니까? 어떻게 벌써 이 책을 술술 읽는 거야?’

레펜에게 위니스가 글자를 가르쳐 준 것은 그냥 심심풀이 삼아서였다. 그날 이후 의욕이 생긴 레펜이 자신에게 글자를 가르쳐 달라고 위니스에게 조른 것이다.

딱히 어린애용 글자책 같은 것도 없어서 위니스는 그냥 들고 다니던 서적을 꺼냈다. 무슨 문학 작품이 아니라 대륙 각지의 풍토며 문화 등을 담은 안내서 같은 것이었다. 대륙 여기저기를 떠도는 그녀에겐 꼭 필요한 책이었다.

그 서적과 원래 가지고 있던 공용어 사전―엘프인 그녀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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