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권 제53장 전후戰後 처리 (54/84)

15권

제53장 전후戰後 처리

1

한때 황량한 광야였던 아라난 그라드 주위는 필라넨스 여신의 은총에 의해 숲이 우거지고 기화요초가 가득 한 풍요로운 땅이 되었다. 그 장엄한 광경 앞에 제국은 숨을 죽였고 대륙은 여신의 사랑을 받은 안타레스 공국을 향해 경외와 찬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모조리 갈아엎어!”

“보이는 건 전부 뽑아 버려!”

여신의 사랑이 강림한 대지. 지금 이곳에서 좀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아라난 그라드의 시민들, 인간과 엘프, 드워프, 오크 트롤로 이루어진 다양한 혼성 종족의 무리가 저마다 손에 연장을 들고 열심히 땅을 파헤치고 있었던 것이다.

“잡아당겨!”

“허이차!”

기합을 신호 삼아 우락부락한 오크 무리들이 나무에 밧줄을 걸어 잡아당긴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거목이 뿌리째 뽑혀 나온다.

“좀 더 메워야 하오! 흙을 더 가져오시오!”

“알겠습니다!”

맑은 개울물이 흐르는 시내 위로 사람들이 가마니에 담긴 흙을 퍼붓는다. 물이 넘치고 개울이 끊기고 질척한 땅 위에 수많은 발자국이 찍히고 또 찍힌다.

“풀 한 포기도 남기지 말고 다 캐내야 해요!”

“알고 있어요!”

힘이 약한 아낙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저마다 손에 호미며 가래를 들고 푸른 초원을 샅샅이 갈아엎는다. 열심히 풀을 뽑고 땅을 파헤치며 신록 가득한 대지를 도로 적갈색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야말로 대규모 공사였다. 수천, 거의 일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대지를 갈아엎고 숲을 파헤치며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대지를 파괴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이다.

기껏 여신께서 사랑하사, 그 은총을 대지에 베풀었는데 감히 그 은혜를 저버리고 숲을 파헤치고 개울을 메우다니? 신성모독이라 해도 좋을 엄청난 일이다.

하지만 아라난 그라드 주위에서 일하는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쁜 기색마저 있었다.

그들의 등 뒤에서 열심히 독려하는 붉은 장발의 소년 덕분이었다.

“기운 내세요. 이 모든 것은 필라넨스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모두가 감격에 떨었던 그 날 이후, 실란은 다시금 아라난 그라드 시민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펼쳤다.

-필라넨스께서 은총을 내려 저희에게 지상 낙원을 펼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과연 미욱한 우리에게 이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그저 받기만 해서야 과연 진정 여신을 섬길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혹해하는 시민들 앞에서 실란은 단언했다.

-우리가 이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만 중의 오만! 우리는 여신의 사랑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이미 여신께선 낙원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이 모든 것을 여신께 돌려 드리고 사람의 손, 사람의 힘만으로 다시 낙원을 건설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필라넨스의 은총을 받은 우리가 그분께 보일 진정한 겸허함일 것입니다!

다른 이의 말이었다면 크게 호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신성 모독이라며 돌팔매를 맞았을 수도 있었다.

그럴싸하게 포장하긴 했지만, 쉽게 말해서 숲 도로 갈아엎자는 소리인 것이다. 그냥 숲도 아니고 여신이 내려 준 숲을!

하지만 말한 이가 실란 대주교, 필라넨스의 뜻을 직접 이 땅에 강림시킨 장본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날 이후, 실란은 공식적으로 필라넨스의 지상 대행자로 불리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권위를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의심을 하기엔 기적의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큰 것이다. 적어도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다.

또한 실란은 사내인 주제에 엘프조차 질시할 만큼 무시무시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사랑의 여신 필라넨스가 얼마나 총애했기에 저런 축복을 타고 났단 말인가? 필라넨스 교단조차도 ‘여신께서 그 뜻을 펼치시려한다면 실란 대주교가 가장 어울리는 이다.’라고 인정할 정도다. 의심을 할 여지 자체가 별로 없었다.

아라난 그라드의 모든 시민이 충실히 실란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전원 연장을 들고 성 밖으로 향했다.

종족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협력해 나무를 베고 풀을 뽑고 개울을 메웠다.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지만 진행은 의외로 빨랐다. 건설이 아니라 철거인 만큼 특별히 전문 기술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특히나 오러 유저의 힘이 컸다. 거대한 숲이나 절벽을 원상태로 복구하는 데 이들의 힘을 필수였다.

안타레스 공국의 오러 유저들이 손을 모아 저마다 블레이드 오러를 내뿜는다. 선두에 선 슬로이틀이 좌우로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자, 그럼 다들 준비하시고! 스탈라 씨가 신호 주세요!”

“유스테아 씨는 처음이죠? 별로 어려울 건 없어요. 그냥 신호 맞춰서 블레이드 오러를 날리기만 하면 돼요.”

이미 차탄 공국에서도 절벽을 한 번 무너트려 본 이들이었다. 한 번 한 짓, 두 번 못 할 리가 없다.

우르르릉!

이내 절벽이 무너지고 굉음과 함께 흙 연기가 피어올랐다. 트롤 구루들이 주술로 무너진 파편을 사방으로 흩고 엘프 정령사들이 저마다 마법으로 잔해를 부쉈다.

열심히 땅을 갈아엎는 아라난 그라드의 시민들을 향해 실란이 다시금 설교를 했다.

“여신의 은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고 교만한 자세일 뿐!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께서 내려 주신 이적을 돌려 드림으로써 스스로를 더욱 갈고닦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저게 정말 옳은 말인지 아닌지는 잘 몰랐다. 중요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한 이가 여신의 대행자는 것뿐.

그것이면 충분했다. 모두가 한 치의 의문 없이 계속 손을 움직였다.

“으라라차!”

“허이차!”

그러나 시민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정적 저 설교를 한 실란이 몸을 돌리며, 남 몰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아이고, 아까워라. 이거 도로 개간하려면 대체 몇 년이 걸리려나?’

걸음을 옮기는 실란 옆으로 검은 머리의 깐깐한 인상을 지닌 청년이 다가왔다. 안타레스의 황금재상, 카를이었다. 지금 그는 성 주위의 공사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왕성을 비운 채였다.

실란 곁으로 가 카를이 속삭였다.

“이대로 두면 큰일입니다. 실란 대주교도 폐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까?”

레펜하르트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실란이 입을 삐죽거렸다.

“아, 나도 이해는 해요. 이해는. 그냥 아깝다는 거지.”

☆ ☆ ☆

기껏 멋지게 주변 조경 끝내 놓고 도로 갈아엎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 마법, 사실은 무지하게 위험한 마법이거든? 당장 원상 복귀시키지 않으며 큰일 나거든?

레펜하르트가 발동시킨 대이적 마법, 천지창조.

메마른 황야를 순식간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바꾸어 놓은 이 마법은 일견 굉장히 축복받은 마법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의 설명에 따르면 현실은 좀 달랐다.

-저게 막 숲 생기고 풀 나고 하니까 굉장히 에콜로지하고 웰빙한 마법일 것 같은데 사실은 부작용이 엄청 심하거든.

세상 모든 일은 자연스럽지 않을 경우 뭔가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생명계 마법 중에는 새싹을 트게 한다거나 넝쿨을 자라게 한다거나 하는 수법이 있는데, 그 정도의 작은 뒤틀림에도 분명 대가가 돌아온다. 자라난 넝쿨이 순식간에 시든다거나, 새싹을 틔운 땅 주위는 한동안 씨를 뿌려도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런데 맨땅이 한순간에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으로 바뀐다?

겉보기엔 굉장히 자연 친화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에 이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일도 없는 것이다.

-원래는 이렇게 단숨에 진행되는 마법이 아냐. 몇 년에 걸쳐서 대지의 정의 흐름을 유도하면서 자연스럽게 옥토로 만드는 수법이지. 이번에는 바로 효과를 봐야 하니까 이런 식으로 발동시켰지만.

애초에 황무지에서 살고 있는 이종족들에게 농지 좀 만들어 주려고 개발한 마법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엄청난 마법도 아니었고, 마법명도 천지창조라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만들다 보니…….

‘이왕이면 개울도 만들자. 이왕이면 절벽도. 이왕이면 숲도. 이왕이면 진행 속도도 좀 빠르게. 이왕이면…….’

라는 ‘이왕이면 병’이 붙어 자꾸 개선하고 개선하다 보니 저런 엄청난 마법까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누가 고금 제일 마법사 아니랄까 봐, ‘이왕이면 병’도 그 스케일이 고금 제일이었다.

-이렇게 단숨에 대지의 기운을 소모하면 큰일 나지. 어서 원상 복귀시키지 않으면 대륙 전역의 지세地勢가 뒤틀릴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되는 데요, 레펜 씨?

-에, 부작용이 작으면 숲이 사막화되거나 비가 오지 않거나, 대지가 썩거나 할 거고…….

-……그게 작은 부작용이면 대체 큰 부작용은 뭐예요?

-생명이 더 태어나지 않게 된다거나, 공기가 오염되어 숨을 쉴 수 없게 된다거나…….

-당장 갈아엎어, 인간아! 이 작자가 세상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려고 작정했나!

☆ ☆ ☆

당시의 대화를 떠올리며 실란은 치를 떨었다.

“하여튼 그 양반은 엄청난 것 같으면서 가끔 해괴하게 멍청한 짓을 한다니까.”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분인 건 사실이지요. 그 능력도, 머릿속도. 게다가 분명 쓸모는 있었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한때 레펜하르트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도 있었다.

그가 지닌 강력한 오러의 힘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라는 것만으로 모두 설명이 된다. 하지만 그가 지닌 강력한 마법의 힘이며 뛰어난 고대의 지식은 대체?

레펜하르트는 사부 친구 중에 마법사가 있어 배웠다는 식으로 얼버무렸지만 이젠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일단 그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라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이유도 없거니와, 남 몰래 제라드에게 물어본 바로는 그에겐 마법사 친구도 없었던 것이다.

-친하게 지낸 마법사? 허약하고 입만 산 마법사 따위와 왜 친하게 지내?

괜히 드레자가 ‘권왕 대 마법사 관련 전투 자료’를 잔뜩 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역대 권왕치고 때려잡은 마법사가 세 자릿수 미만인 이가 없었고, 제라드 역시 그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를 가는 마법사라면 군대 단위로 있지만 친하게 지낸 마법사는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느냐?

-아, 혹시 레펜하르트 님이 그분께 마법을 배웠나 해서.

-아닌데? 나중에 배웠나 보지. 원체 똑똑한 놈이잖냐?

이젠 제라드도 레펜하르트가 마법 또한 구사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야 어떻게든 숨기려 했지만, 그가 마법사란 사실은 측근뿐 아니라 어지간한 이종족들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짐 언브레이커블에 대한 편견이 깊은 인간들만이 아직 믿지 않을 뿐.

심심하면 오크 어루만지며 가르침을 주던 제라드가 그 이야기를 못 들을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정말 불같이 화를 내며 레펜하르트를 찾았었다.

-네 이노오옴! 레펜하르트! 마법이라니 어찌 된 거냐아아!

흥분한 사부를 보고 레펜하르트가 권마합신까지 준비해 가며 전투태세를 갖춘 것은 딱히 그를 탓할 일이 아닐 것이다.

‘아, 결국 걸렸구나. 저 양반 흥분 가라앉을 때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려칠 것 같은 표정으로 제라드가 버럭 성을 냈다.

-위대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을 잊었느냐! 도구를 쓰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지 못한 자의 치졸한 도피다! 그런데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다니!

예상대로였다. 속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마법을 쓴 건 맞지만 그래도 아티팩트를 쓴 건 아닙니다.

-아티팩트가 아니면 어떻게 네놈이 마법을 쓰는데?

-저, 마법사이기도 합니다, 사부님.

일단 레펜하르트는 사실대로 털어놨다. 그리고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려 방어 태세를 갖췄다. 무인이 마법 따위의 힘을 빌렸으니 그 분노가 장난이 아닐 터였다.

그렇게 각오를 굳히고 있던 차였는데…….

-엥? 아티팩트가 아니라고? 네가 마법을 쓴다고?

-예, 사부님.

개가 알을 낳았다는 소릴 들은 표정이 되어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참 후에야 쇼크에서 벗어난 제라드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써 봐.

-쓰는 건 좋지만, 사부님께서 그 마법이 아티팩트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는 있으십니까?

천하의 9서클 마스터, 드레자조차도 확신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무식한 제라드가 과연?

의외로 제라드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아주 쉽다!

정말 쉬운 방법이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그 말을 한 걸 후회했다.

-홀랑 벗겨 놓으면 되지!

그렇다. 전신에 실 한 오라기 안 남겨 놓으면 아티팩트도 당연히 못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순간 기가 막혔지만, 여기서 흥분한 제라드를 상대하느니 그냥 잠시 탈의하는 게 나았다. 레펜하르트가 주위의 시종을 물리고 나체가 된 뒤 몇 가지 마법을 시전했다.

-매직 애로우, 라이트, 플레임 피스트…….

일국의 왕이 자신의 궁성에서 알궁둥이를 드러낸 채 마법을 시전하는, 진귀하고 해괴하며 서글픈 광경이 벌어졌다. 몇 가지 마법을 시전한 뒤 후딱 바지를 입는 제자를 보며 제라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진짜네?

-하, 하여튼 도구는 안 썼습니다, 사부님.

사방신의 유물 이야기는 쏙 뺀 채 레펜하르트가 자신 없이 말했다. 그래도 도구 쓴 게 아니면 사부의 분노도 조금은 누그러지겠지.

그런데, 웬일로 제라드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그렇구나! 역시 나의 제자다! 암,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가 도구 따위를 써서 전투에 임하는 쪽팔린 짓을 할 리가 없지!

-그럼 마법을 쓰는 건 괜찮습니까?

-응? 마법은 자기 머리로 쓰는 것이잖냐?

-에, 뭐 그렇죠?

-그럼 괜찮지. 나도 머리로 박치기 잘하는데?

박치기와 마법 연산을 과연 같은 ‘머리 사용’이라 할 수 있을까? 기가 막혔지만 레펜하르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용케 넘어갔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그, 그럼 우리 무문도 마법 익히는 것은 금기가 아니군요?

-내 사부님께서도 마법 익히지 말라고 한 적은 없느니라.

그냥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의 계승자치고 마법 익힐 만큼 똑똑한 인간이 없었을 뿐이다.

-실제로 초대 권왕께서는 마법도 쓰셨다고 하던걸?

-어, 진짭니까?

-일단 전승은 그런데, 솔직히 믿을 순 없지. 원래 어떤 무문이건 시초는 각종 전설 다 갖다 붙이지 않느냐?

하긴 각국의 초대 왕이나 무문의 창시자에게 특이한 전설이 붙는 일은 희귀하지 않다. 모래를 밀가루로 바꿨다느니, 다섯 마리 생선으로 천 명을 먹였다느니, 이파리 한 장 타고 강을 건넜다느니.

-하여튼 네놈 재주도 용하구나. 나라 세운 거 봐서 똑똑한 줄은 알았다만 마법은 또 언제 배웠느냐?

-아, 하산한 뒤에 이래저래…….

사실을 말할 수 없기에 레펜하르트는 말문을 흐렸다. 그의 마법 수준을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제라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뭐,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역시 내 제자다. 재주도 좋구나.

제자가 도구를 쓴 게 아니란 걸 안 순간 바로 관심을 끊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라드는 매우 대범한 성품이었다.

하여튼, 제라드 덕에 레펜하르트의 거짓말은 이미 들통 난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 이후 실란이 대놓고 물어보기도 했다.

대체, 그 엄청난 마법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고.

그때 레펜하르트는 대답했다.

-지금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약속하마. 이 나라가 반석에 오르고, 내가 없어도 이종족들이 사람답게 사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 나를 믿어 다오.

“이제 안타레스 공국도 거의 자리를 잡았으니까, 곧 알려 주지 않을까요?”

생글생글 웃는 실란을 보며 카를은 표정을 굳혔다. 실란은 상당히 태평하게 저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믿어 달라고는 하지만, 폐하의 힘은 강해도 너무 강하단 말이지…….’

☆ ☆ ☆

아라난 그라드의 남쪽 성벽.

다시 황야로 돌아가는 성 주위의 공사 현장을 바라보며 마켈린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참 좋을 텐데, 아쉽긴 아쉽군요.”

“부작용을 감수하느니 그냥 손발을 더 놀리는 게 낫지 않소? 시민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쓸데없이 노역거리 늘어난 아라난 그라드 시민들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기서 레펜하르트가 직접 마법을 써 천지창조를 도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하루아침에 도로 세상이 황야로 변한다면 시민들은 필라넨스 여신이 분노해 은총을 거두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괜찮겠지요. 어차피 목표는 달성했잖습니까.”

마켈린은 천천히 영역을 줄여가는 푸른 숲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많이 갈아엎었지만, 그래도 상당한 숲이 남아 있었다.

“레펜하르트 님의 전생에 대해선 들었지만, 그래도 눈으로 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군요. 이런 엄청난 힘을 가지고도 실패하셨었다니…….”

“그때의 난 이런 식으로 마법을 쓰지 않았었소.”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래, 쓰지 않았었다.

전생의 자신은.

천지창조는 그때도 쓸 수 있던 마법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그는 이 천지창조 마법을 이런 식으로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너무 위험한 마법이었으니까. 사실 실패한 마법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마법사에게 있어 마법이란, 마나를 움직여 세상을 뒤튼 뒤 ‘필요한’ 뭔가를 재창조하는 작업이다. 그것이 불꽃이 되었건 냉기가 되었건 전격이 되었건 간에.

그 기준에서 천지창조는 쓸데가 없는 마법이었다. 기껏 옥토로 바꿔 놓고 부작용 때문에 도로 갈아엎어야 한다니, 괜히 힘만 들고 남는 것은 없지 않은가?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이런 부작용 심한 마법은 쓸 생각도 하지 않는 법이지.”

부작용이라는 측면으로만 보면 차라리 뉴클리어 버스트가 더 안전할 정도였다. 뉴클리어 버스트는 고작 산 하나 증발하고, 산맥 두어 개 싹 쓸리고 나라 절반 정도 오염되어 죽음의 땅으로 변하는 수준이니까.

“……그게 고작입니까?”

“대륙 전체에 영향을 주는 천지창조에 비하면.”

“그런데 용케 지금은 쓸 생각을 하셨군요?”

“난 더 이상 순수한 마법사가 아니니까.”

빙그레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마켈린을 돌아보았다.

“마법사의 딜레마라는 이야기를 아시오?”

마법사의 딜레마.

이것은 마법사 사이에서 오가는 일종의 뼈 있는 농담이다.

견습 마법사에게 사람을 겁에 질리게 하라고 하면 그는 이글거리는 불길이나 파괴적인 마법을 선보여 상대의 목숨을 위협해 공포를 유도한다.

정규 마법사에게 사람을 겁에 질리게 하라고 하면 그는 무시무시한 환상을 보여 상대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한다.

그렇다면 대마법사는?

“그냥 공포 주문을 걸지.”

마법사는 파이어볼 발사기가 아니다.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위력적인 마법보다는 가장 적절할 때, 가장 적절한 마법을 쓰는 응용력이 제일 중요하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경지를 벗어나 버리면 오히려 단순해진다. 대마법사 정도 되면 목적을 위한 가장 직접적인 힘을 써 버릴 수 있으니까. 돌아 돌아 가다 보니 결국 도로 단순함으로 회귀하는 원칙이랄까?

“당시의 나는 마법사였소, 순수한 마법사.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법사다웠던 마법사.”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지 않고, 세인의 인식도 중요시 여기지 않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오롯이 자신만의 길을 걷던 구도자 중의 구도자.

“그래서 몰랐지. 인간들의 생각을, 인간들의 마음을. 그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오묘한지를.”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당시의 난…….”

회한에 찬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세계가 돌아가는 이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2

아라난 그라드 주위를 원상태로 복구시키는 것 외에도 할 일은 많았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복구해야 하고 확연히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안타레스 공국 내부도 정비해야 했다. 할 일이 많으니 하루가 바빴다. 단 여기서 바쁘다는 건 어디까지나 카를의 이야기였다. 레펜하르트는 별로 바쁠 일이 없었다.

법령을 선포하고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고 국민들의 생활을 돌보는 이 모든 업무의 뒤에 카를이 있었다. 워낙 그가 해놓은 일이 완벽하다 보니, 요즘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왕인지 도장 찍는 기계인지 구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에이, 말은 그렇게 하셔도 모든 서류 일일이 다 검토하시잖아요?”

테이블 위에 또 한 뭉치의 서류를 올리며 비서인 엘프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재상부에서 올라온 결재 서류였다.

최대한 간략하게 올라온 보고지만 공국 전체의 일을 담은 것이니만큼 그 분량이 장난이 아니다. 높이가 거의 레펜하르트 가슴치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레펜하르트가 대수롭잖다는 듯 서류를 받아 들었다.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 그냥 읽고 이해만 하는 건데 뭐가 어렵겠느냐?”

굵직한 손가락 사이로 서류가 파르르 넘어간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서류가 테이블 왼쪽에 놓였다. 전부 파악이 끝났다는 의미다.

“이제 도장만 찍으면 되네.”

오른손으로 서류를 잡고 파르르 넘긴다. 왼손으로 도장을 들고 맹렬히 찍어 간다.

두다다다다다!

콩 볶는 소리가 나며 서류 위로 도장이 연달아 찍혔다. 극강의 오러 유저이며 권왕이기도 한 레펜하르트의 핸드 스피드로 도장을 찍어 대니, 그 많던 종이들이 전부 결재 서류로 변하는 데 채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결재 끝난 서류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흐뭇하게 웃었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니 일 참 편하네. 예전엔 카를이랑 둘이서 이걸 다 해야 했는데.”

보고 있던 비서가 혀를 내둘렀다.

‘폐하나 재상님이나 둘 다 참 괴물이야.’

애초에 저걸 둘이서 했었다는 것부터가 기가 찰 일이다.

서류를 옆으로 밀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공식 업무는 끝이고, 이제 비공식 업무만 남았나?”

비서가 대답했다.

“예, 폐하. 오늘 오후에 그분들과 알현하셔야 합니다.”

“몇 시지?”

“네 시쯤이라 들었습니다만.”

비서가 말한 ‘그분들’은 바로 신생 이종족 노예 해방단이었다.

현재 안타레스 공국은 인접한 저 바실리, 크로방스 두 국가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대륙 동부 지역의 이종족 노예 제도도 철폐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륙 서부 지역의 이종족들은 노예 신세였다.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버릴 생각도 없다.

그래서 카를과 레펜하르트는 또다시 비밀리에 노예 해방단을 꾸려 그들을 구해낼 계획을 세웠다. 안타레스 백국 시절 대륙 전역에서 했던 짓을 또 할 셈이었다.

단지, 예전처럼 노예인 척 꾸며서 타국으로 잠입하는 수법은 더 이상 쓰기 힘들었다. 아직 이종족 노예 제도를 유지하는 대륙 서부 국가들은 타국에서 들어오는 이종족 노예들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며, 심지어는 아예 입국을 불허하는 일도 많았다. 예전 레펜하르트에게 당한 것이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종족들을 인간처럼 변장시킨 뒤 인간 무리 사이에 끼워서 잠입시킬 생각입니다. 타국에서 들어오는 이종족 노예에는 민감해도 아직 그냥 오가는 인간 상인까지는 신경 안 쓰거든요.

카를의 의견대로, 비교적 인간과 외모가 비슷한 이종족들이 변장을 맡았다. 주로 오지 출신의 엘프와 드워프 여성들이 대상이었다.

일단 트롤이나 오크는 변장한다고 인간으로 보일 외모가 아니다. 그리고 드워프 남성들은 억지로 우겨 봐야 너무 근육 키워서 키 안 큰 중년 남자일 뿐이다. 속을 리가 없었다.

반면 드워프 여성은 뾰족한 귀만 살짝 가리고 그 풍만한 가슴을 압박붕대로 감아 놓으면 그냥 어린 10대 인간 소녀처럼 보이는 것이다. 엘프들도 귀를 가리고 머리를 염색하면 그냥저냥 인간이라 우길 수 있고.

문제는 엘프의 체형이 너무 가는지라 아무래도 의심을 사게 된다는 부분이었다. 엘프 중에서는 보디빌더급 근육질이더라도 인간 기준으로는 ‘좀 더 먹이면 그럭저럭 사내구실 하겠네.’ 수준이니까.

-그래서 오지 출신 엘프들 중에서 뽑았습니다. 전사 출신 엘프 중엔 그래도 제법 몸이 두꺼운 이들이 있었으니까요.

엘프 여성 같은 경우엔 좀 더 뽑기가 쉬웠다.

-그냥 가슴 큰 여인들만 고르면 되지요.

엘프 여인은 가슴이 납작하다는 것이 대륙의 정설.

그러나 인간도 체형이 천차만별이듯이 엘프도 저마다 체형이 다르다. 대부분의 엘프 여인들은 가슴이 작았지만, 드물게 인간 여인처럼 풍만한 가슴을 지닌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 차탄의 노예 경매장에서는 인위적으로 가슴 큰 엘프 여인을 키워서 팔기도 했었다. 뭐, 성공률이 높지 않아 그리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니야 씨도 예전에, 그 체형 덕분에 들키지 않고 인간 세상을 떠돌았다고 들었습니다. 문제없을 겁니다.

-흐음, 그냥 전부 인간들로 구성하면 안 되오? 그쪽이 더 들킬 위험성이 없을 텐데.

-아무래도 노예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신뢰를 주려면 이쪽도 이종족이 나서야 하니까요. 변장은 필수입니다.

납득할 수 있는 계획이었고, 그래서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그 후 열심히 인선을 꾸리는 것 같더니 드디어 출발하는 모양이었다.

“준비 다 끝났으면 그냥 가면 되지 귀찮게 왜 알현씩이나…….”

투덜대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비서가 달래듯 말했다.

“폐하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일이잖아요. 당연히 폐하께서 주관하셔야죠.”

“하긴, 그건 그렇지.”

허례허식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이런 사소한 일이 쌓여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인식을 만든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는 레펜하르트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네 시라 이거지? 그럼 아직 시간이 남았군.”

그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 일을 끝냈으니 좀 쉴 생각이었다.

“뭐 하지? 시리스랑 차나 마실까?”

☆ ☆ ☆

아라난 그라드의 정경이 내려다보이는 왕궁 가이라크의 테라스.

새하얀 테이블 위에 우아한 다기가 놓여 있었다. 찻잔 위로는 김이 오르며 기분 좋은 향기를 뿌려 내고 옆에 놓인 형형색색의 다과들은 먹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찻잔과 다과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 정도까지 기틀을 잡았군.”

이 과자는 왕궁 요리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아라난 그라드의 흔한 제과점에서 사 온 것이었다.

그냥 작은 과자일 뿐이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작지 않다. 이런 사소한 물품에서 곧 그 나라의 일반적인 물류가 드러나는 법이다. 특권 계층이 아니라 대중에게 이 정도 수준의 과자를 팔 수 있을 정도로 안타레스 공국의 문화적, 사회적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다.

곁에 앉아 있던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차탄에서 먹었던 것만은 못해요.”

“에이, 거기랑 비교하면 안 되지. 거기 역사가 몇 년인데?”

즐거워하며 레펜하르트는 과자를 입안에 털어 넣고 으적으적 씹었다.

“음, 맛도 괜찮네.”

조용히 차를 마시던 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좀 우아하게 드세요. 무슨 사료 먹는 것도 아니고.”

“으음, 미안하다.”

사과를 하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요즘 다시 시리스의 분위기가 변한 것 같은데.’

최근 묘하게 살갑게 굴던 그녀였다. 여기서 저 살갑다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살이 참 가깝다’라는 의미다. 이상할 정도로 달라붙고 비비적거려서 좋기도 했지만 솔직히 걱정도 되고 그랬다.

‘들은 바로는 전투 시에 이상할 정도로 잔인하게 날뛰었다는 말도 있었고.’

뭐, 전쟁 중에 흥분해 날뛰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고 해서 대수롭잖게 넘겼지만, 하여튼 그녀가 어딘가 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왠지 도로 예전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플로라의 말을 떠올려 보면 또 딱히 이상할 건 없는 것도 같고.

-질풍노도 못 들어 봤어요? 질풍노도? 원래 저 나이 대는 다 그렇답니다. 갑자기 쌀쌀맞다가 또 갑자기 애교도 부리고 그래요.

쌀쌀맞다가 갑자기 애교를 부릴 수 있으면, 애교를 부리다가 갑자기 쌀쌀맞아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따, 질풍노도 무섭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레펜하르트는 실소를 흘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리스는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흐음.”

마음이 차분하다. 얼마 전까지 격정적으로 날뛴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시리스는 자신의 이 변화에 대해 어느 정도 원인을 짐작하고 있었다.

‘세계수…….’

그녀의 심상이 변질된 것은 모두 7대 정령력의 힘, 엘리멘트를 터득한 이후였다. 세계수로부터 영향을 받아 발휘하는 정령력, 그리고 그 궁극의 경지인 엘리멘트는 분명 오러 유저와 필적할 만한 힘을 그녀에게 주었고, 그에 맞먹는 광기 또한 주었다.

하지만 현재 세계수의 힘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레펜하르트의 천지창조 마법이 세계수의 정을 몽땅 끌어낸 덕분이었다. 그렇다 보니 엘리멘트의 힘도 약화되었지만…….

‘대신 마음이 차분해.’

예전 같은 정신적인 동요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발정이라도 난 것 같던 그 부끄럽고 기이한 기분도 많이 사라졌다.

시리스는 말없이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

여전히 친애의 정은 느끼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남녀의 애정인지는…….

그때 시선을 느끼고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니, 시리스?”

“아뇨, 아무것도.”

말문을 흐리는 그녀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했다. 시리스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문득, 예전부터 담고 있던 질문이 떠올랐다.

“저, 레펜하르트 님.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응? 뭐든지 물어봐.”

“왜 레펜하르트 님은 저희를 보호하시는 건가요? 레펜하르트 님은 인간이시잖아요?”

뭘 새삼스러운 말이냐는 듯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엘프였기 때문이지. 난 그녀를 사랑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세상도 그녀를 사랑하길 원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륙을 공포로 휩쓴 마왕의 이유치곤 참 개인적이라 어처구니없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대륙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힘 있는 자의 개인 감정은 세상을 흔들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시리스가 궁금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럼 레펜하르트 님.”

시리스의 눈이 빛났다. 화제를 돌리려 한 짓이었지만, 이 의문은 그녀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녀가 진지하게 물었다.

“어떻게 엘프를 사랑하게 되신 건가요?”

☆ ☆ ☆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시리스는 이런 걸 물은 적이 없었지.’

그녀는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레펜하르트에게 헌신적이었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으며, 어떤 의심도 없이 그를 사랑했다. 그 헌신과 의심 없는 사랑 뒤에는 그녀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더렵혀진 몸, 농락당할 대로 당해 너덜너덜해진 자신을 거두어 준 레펜하르트에게 감히 의문 따위는 표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멸시가 바탕이 된 헌신이었다.

그래, 전생의 시리스는 감히 자신이 레펜하르트의 사랑에 의문을 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시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시리스 역시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레펜하르트에게 의존하고 있지 않았다. 비록 노예 생활이었지만 몸을 더럽히지도 않았고 긍지와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레펜하르트에게 의문도 표할 수 있었다.

분명 동일인임에도 어긋난 시간 축 속에 다른 운명을 맞이한 두 사람.

다른 시간과 다른 사건을 보낸 두 시리스는 이 정도까지 차이가 난다.

문득 궁금해졌다.

인간과 엘프 사이엔 보통 자손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전생의 나와 시리스가 만약 딸을 낳았다면, 이런 성격으로 컸을까?’

레펜하르트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혹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인가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레펜하르트가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은 아냐. 그냥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일 뿐이라서.”

“전생의 저에게도요?”

“응.”

시리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왜 밝아졌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자신이 여심에 대해 각별히 둔하다는 것은 레펜하르트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기억을 더듬으며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도 열 살 정도의 일이었을 거야. 내 이름이 레펜하르트가 아니라 레펜이던 시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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