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권 제52장 신위 강림 (53/84)

제52장 신위 강림

1

안타레스 남부 최대의 관문 요새, 엘드릴 가드.

바실리 왕국과 안타레스 공국을 연결하는 광대한 분지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은 이 요새는 실로 안타레스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힐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높이가 60여 미터에 달하고 좌우로 수백 미터를 뻗어 가는 거대한 성벽은 일국의 수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고, 좌우의 분지 절벽과 연결되어 철통같은 수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진군한 바실리 왕국군이 기겁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맙소사, 어찌 1년 만에 저런 엄청난 건축물을!”

전쟁 전부터 안타레스 공국을 드나들던 상인을 통해 바실리 쪽도 엘드릴 요새에 대한 정보쯤은 갖추고 있었다. 분명 1년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저런 거대한 요새는 없었다. 새삼 드워프의 건축술이 얼마나 굉장한지 실감이 드는 광경이었다.

반면, 건축술에 조예가 좀 있는 이들은 다른 의미로 경악하고 있었다.

“맙소사, 저 요새가 어떻게 서 있는 거야?”

겉보기에 웅장한 저 엘드릴 가드는,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건축가가 보기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성벽이며 건물들 대부분이 잡석을 대충 끌어모아 쌓아 올리고 아슬아슬하게 무게 균형만을 맞춰 형태만 간신히 이루었을 뿐이다.

쉽게 말해서, 저 진금 엘드릴의 이름을 붙인 요새는 엄청나게 부실 공사였던 것이다!

☆ ☆ ☆

“……그러니까, 아무 짓도 안 해도 1년도 못 버티고 무너질 것이라 하지 않았나?”

개전을 실시한 지 열사흘째, 바실리 왕국군의 총사령관 에그라드 경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참모를 바라보았다.

건축학에 조예가 깊어 이 자리에 불린 참모가 고개를 숙였다.

“예, 각하. 분명 저 요새는 저대로라면 자체 하중을 못 이기고 무너질 게 뻔합니다.”

에그라드 경이 막사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엘드릴 가드가 보였다. 벌써 열사흘째 마법을 날리고 오러를 쏘며 붕괴를 노렸지만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요새가!

“그럼 대체 그 부실한 요새가 어떻게 아직껏 버티고 있다는 건가?”

분노한 에그라드 경의 외침에 참모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것이…….”

이유는 알고 있었다.

분명 엘드릴 가드는 부실 공사의 표본이라 할 정도로 엉성한 재질로 만들어진 요새였다.

하지만 건축술 자체가 부실한 건 또 아니었다.

엉성한 잡석들이 서로 절묘하게 얽혀 무게 중심을 지탱하며 묘하게 튼튼한 구조를 이룬다. 게다가 어떤 식으로 계산한 것인지, 일부가 붕괴되면 붕괴된 지역에 허술한 옆의 잡석 성벽이 무너져 내리며 저절로 붕괴 자리를 메워 버린다.

요새를 지은 재료 자체는 개판이었지만, 그 재료를 이용한 기술력은 오히려 초일류였던 것이다. 과연 건축의 대가인 드워프답게, 그들은 부실 공사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었다.

“분명 부실 공사는 부실 공사지만, 아예 그걸 감안해 세운 요새로 보입니다. 적어도 앞으로 반년은 틀림없이 요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입니다.”

에그라드 경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충 만들어 내버려 둬도 무너질 요새가, 당장은 완벽하게 기능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재질적인 문제로 위태로운 하중을 복잡한 계산을 통해 분산시키며 오히려 하중 자체를 이용해 성벽의 강도를 높이는 방식입니다. 비유하자면 아치 형태의 다리를 가공할 때 쓰는 방식을 발달시킨 것인데…… 단지 그것만으로는 석재 사이의 접착력이 설명이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이치는 저런 식인데…….”

건축학을 모르는 이에게 설명하자니 참으로 난해하다. 참모가 더듬거리며 설명을 이었다. 전문적인 이야기가 나오니 못 알아들은 에그라드 경이 참모의 설명을 막고 재차 물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됐고. 그러니까 지금 저 요새는 튼튼한 건가, 아닌가?”

참모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당장은…… 대륙 어느 요새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내구도를 자랑할 겁니다. 당장은요.”

에그라드 경은 눈을 껌벅였다.

건축학은 모르는 그였지만,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전쟁에만 써먹으려고 급하게 만든 요새란 의미인가? 오래는 못 가지만 당분간은 어떤 요새와도 맞먹는 그런 방어력을 갖춘?”

“그렇습니다, 각하.”

에그라드 경이 혀를 내둘렀다.

“……그게 말이 되나?”

“물론 말이 안 되지요. 저희가 알고 있는 건축술로는.”

참모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가능했던 모양입니다.”

☆ ☆ ☆

“아, 이런 걸 요새라고 짓다니 참으로 부끄럽도다.”

성벽 위에 서서 엘드릴 가드를 살펴보며 백색 수염의 노인 드워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옆에 서 있던 커다란 어금니를 지닌 트롤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난 오히려 그대들의 기술력을 증거하는 가장 훌륭한 건축물이라 생각합니다, 마켈린 공. 수백 년을 지탱하는 건물은 인간도 지을 수 있지만, 이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투입한 부실 공사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처음일 것이오.”

“……그야 처음이겠지. 어느 미친 드워프가 일부러 부실 공사를 하겠소?”

구시렁대는 알 포트의 교황, 마켈린을 향해 트롤의 대주술사, 아틸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오래 써먹을 요새도 아니니 공들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단기간에 이 정도 규모의 요새를 짓다니, 새삼 드워프의 기술력에 감탄하게 되는군요.”

“아무 돌이나 닥치는 대로 주워 와서 쌓아 올린 건데 시간이 오래 걸릴 이유가 없지.”

“아무 돌이나 닥치는 대로 쌓아 올렸는데 이런 방어력을 지녔다는 것이 대단하단 겁니다.”

마켈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트롤들의 세멘테리움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우리가 건축술에 자신 있다 해도 이건 좀 무리지.”

현재 엘드릴 가드는 착공 시작하고 완공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애당초 레펜하르트의 작전 때문에 오래 쓸 요새가 아니어서, 잠깐만 버틸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마켈린도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요구라 생각했지만 트롤의 세멘테리움을 접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강력한 접착력을 지니고 있고 마음대로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세멘테리움은 그야말로 잡석을 굳히는 데 최고의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드워프의 기술력이 부가되니 벌써 열흘이 넘도록 적들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도 엘드릴 가드는 붕괴되지 않고 용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쉬워하며 마켈린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세멘테리움의 양이 많았다면 정말 천년을 버틸 수 있는 요새를 지을 수도 있었을 텐데…….”

트롤의 흙만짐이가 만드는 세멘테리움은 트롤 주술사 중에서도 제법 고위의 구루만이 생성이 가능한 산물이다. 그렇다 보니 이 거대한 요새에 전부 투입하기엔 양이 극도로 부족했던 것이다.

“희석해서 쓰다 보니 내구도가 엉망인 게 아쉬울 뿐이오. 그 세멘테리움 좀 대량으로 못 만드나?”

아쉬워하는 마켈린을 향해 아틸카가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재료만을 모은다면 흙만짐 의식 없이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거라면 수행 중인 구루들도 가능할 테니.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백색 한숨의 돌가루가 필요하지요. 아무 흙이나 모래만으로도 세멘테리움을 만들려면 역시 흙만짐이의 주술이 필수요.”

“……그러니까 그 백색 한숨의 돌가루란 게 대체 뭐냐고? 그것만 알면 우리가 땅 파서 재료 조달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태고의 한숨을 내뱉는 돌을 부수면 나오는 가루요. 마치 밀가루처럼 새하얗지.”

“……그런 설명으론 도저히 모르겠다니까?”

종족 간에 호칭이 다르니 말이 안 통한다. 나중에 트롤들로부터 직접 표본을 얻어 그랜드 포지로 보내야겠다며 마켈린은 다짐했다. 잘만 하면 드워프의 건축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기회인 것이다.

아틸카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마켈린을 달랬다.

“그건 그때고, 당장은 눈앞의 환란부터 이겨 내야겠지요. 내일의 햇살을 즐기려면 오늘 밤의 추위를 견뎌 내야 하는 법이니.”

빙그레 웃으며 마켈린이 표정을 폈다. 그가 성벽 바깥으로 시선을 옮기며 양 손가락을 움직였다.

“과연, 오늘도 추위가 몰아치는 모양이구려.”

성벽 너머, 요새를 포위한 바실리 왕국군으로부터 또다시 공성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바실리의 오만 정병이 요새를 포위하고 정공법으로 공성전을 펼친다. 사다리와 공성차를 이용해 수많은 병사들이 성벽 여기저기를 기어오르고, 화살과 투석에 맞아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들 뒤에서,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바실리의 용사들아! 오늘이야말로 저 성을 함락시켜라! 제일 먼저 성벽을 차지하는 이에게 금화 일만 닢을 주겠다!”

바실리 왕국군은 제국처럼 충성도가 높지도 않고, 신성군이나 성기사단처럼 광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에그라드 경은 전통의 사기 진작 방식, 포상으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병사들의 사기는 그리 높아지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지난 열흘 동안 저 성벽의 방어가 얼마나 튼튼한지 몸소 겪고 있었으니까.

“와, 금화 일만 닢이래.”

“어제는 팔천 닢이었는데.”

“첫날에는 금화 오백 닢이었어. 많이 올랐네.”

“사령관님도 쪼잔하시군. 이왕 올릴 거 팍팍 좀 올리지 천, 이천 단위로 올리시나?”

출전 당시 에그라드 경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는 이미 바슈탈론 제국으로부터 안타레스 공국 대부분의 전력이 크로방스로 빠져나갔음을 들어 알고 있었다.

주요 전력이 빠진 안타레스 공국에서 신경 써야 할 이는 권왕 레펜하르트와 눈의 여왕 이니야, 오크 대모 스탈라 정도였다. 나머지는 오합지졸, 그러니 오만의 병력으로 몰아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이야기가 달랐다.

안타레스 공국은 아직도 숨은 힘이 상당했던 것이다.

한창 공성이 벌어지는 엘드릴 가드, 그 성벽 위에서 수십 명의 기이한 복색을 한 트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원이 툭 튀어나온 어금니를 지니고 전신에 무늬를 그려 넣은 이들, 바로 트롤 구루들이었다.

손에 든 뼈다귀며 돌도끼를 서로 때리고 북을 두드리며 트롤 구루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호수는 울부짖고 뇌성은 고요하네, 여울목이 돌고 돌아 핏빛 홍수 되어 내리니 이는 땅 어머니의 슬픔이로다…….”

붉은 안개가 피어올라 성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핏빛 안개에 휩쓸린 바실리 왕국군이 비명을 지르며 싹 쓸려 간다. 아틸카도 구사했던 트롤 주술, 당시엔 협곡 하나를 무너트릴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이 정도로도 성벽에 달라붙은 적군을 떼어 내기엔 충분하다.

안개에 휩쓸려 떠내려가며 바실리의 노병 하나가 치를 떨었다.

“저, 저 괴물들이 또!”

크로방스 왕국을 원조하기 위해 레펜하르트와 카를은 안타레스 군세를 아끼지 않았다. 강력한 오크와 엘프, 드워프들을 대거 크로방스 서부 전선에 투입했다.

하지만 트롤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나마 노예 신세였던 종족과 달리 트롤은 기본 인식부터가 몬스터였다. 아무리 인식이 바뀌었다 해도 다른 종족처럼 바로 인간들 사이에 어우러지기가 힘든 것이다.

게다가 트롤들 인상이 좀 흉악한가? 일단 외모에서 점수 깎고 들어가다 보니 다른 종족처럼 외국에 보내기엔 너무 위험이 컸다.

그래서 카를은 트롤 군세를 고스란히 보존해 안타레스 공국 방어에 투입했다. 이것이 대부분의 전력을 빼돌리고도 카를이 승산을 장담한 이유였다.

한차례 핏빛 안개가 성벽을 휩쓸자, 이내 엘드릴 요새 위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구루들이어!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오!”

레펜하르트에게 몸을 의탁한 인간 지휘관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성벽 한쪽이 열리며 한 무리의 트롤 군세가 출격한다. 전원이 구루로 이루어진 이들이 방울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바실리 군세를 휩쓸었다.

딸랑딸랑딸랑딸랑!

“땅이 울고 하늘이 울고 내가 울고 네가 운다.”

“잘리고 잘리고 잘리고 잘리고…….”

“개울 흘러 강이 되고 바다 되어 하늘 오르리…….”

트롤어로 이루어진 주술가가 울려 퍼질 때마다 바실리 왕국군의 피가 전장을 적신다. 피와 비명이 아우성친다.

바실리의 기사들이 치를 떨며 말을 달렸다.

“제기랄! 저 괴물들이!”

“죽지도 않는 괴물들!”

어지간한 기사 이상의 뛰어난 움직임에 기이한 사술을 써 마법도 잘 통하지 않으며 일반병의 창칼이나 화살 정도는 그 자리에서 재생해 버리는 트롤 구루의 힘은 실로 가공했다.

퍼억!

트롤 구루의 돌도끼에 맞아 낙마하며 기사 하나가 절규를 터트렸다.

“빌어먹을! 이젠 트롤조차 사람처럼 군단 말이냐!”

그저 몬스터로만 치부했던 트롤들, 그들이 지금 뚜렷하게 대열을 갖추고 마치 군대처럼 작전을 따라 자신들을 섬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친 세상!”

낙하한 기사를 죽이지 않고 스쳐 지나가며 트롤 구루 하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흉악한 얼굴, 섬뜩한 어금니를 드러낸 채 트롤이 으르렁거리며 공용어로 말했다.

“그대는 우리를 짐승 이하로 보나, 우리는 그대를 사람 이상으로 대접하겠다. 죽지 않았으니 그 생명 소중히 여기라.”

안 어울리게 현기가 도는 말에 낙마한 기사가 쓰러진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 그 트롤 구루는 이미 자리를 뜬 채 또 다른 기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차례 트롤 주술사단이 전장을 휩쓰니 삽시간에 진열이 어지러워진다. 에그라드 경은 인상을 썼다. 벌써 몇 번이나 전략을 바꿔 보았지만, 역시 저 트롤들은 상대할 방법이 딱히 떠오르질 않았다.

“역시 정예로 밀어붙이는 방법밖에 없는 건가.”

에그라드 경이 바로 신호를 보냈다.

“파트란 경과 스파론 경, 케틀 경을 출격시켜라!”

이내 바실리 왕국군에서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빛을 뿜었다.

바슈탈론 제국이 비밀리에 투입한 자유 오러 유저들이었다. 네 명의 자유 오러 유저를 제국은 모조리 안타레스 남부에 투입했던 것이다. 에그라드 경이 승리를 장담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사령검사 파트란이 칠흑의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뒤이어 천검의 스파론과 강철의 기사 케틀이 전장을 가르며 무섭도록 말을 달렸다.

파트란이 검을 뽑아 들며 고함을 질렀다.

“오늘이야말로 도륙을 내 주마! 추악한 트롤들아!”

☆ ☆ ☆

올해로 쉰다섯이 된 자유 오러 유저 파트란은 원래 할라인 왕국 출신의 살인 청부업자였다.

살인 청부업자로 살아가던 도중 그는 우연히 제대로 된 오러 검술을 접해, 결국 오러를 각성하는 데 성공하고 기사의 작위를 얻었다. 그러나 오랜 살인의 습성이 영혼에 깃들어 그의 블레이드 오러는 사기死氣의 속성을 띠게 되었다.

파트란의 블레이드 오러에 베이면 상처가 아물지 않으며, 아무리 튼튼한 이라도 병에 걸리게 된다. 게다가 어떤 신성 치유도 통하지 않으니 오직 자연적인 치유 외엔 부상을 돌볼 길이 없다.

강하다기보다는 기괴한 그의 능력 때문에 세인들은 파트란을 사령검사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오러 유저 정도라면 자연적인 치유 능력도 월등하니 설사 베인다 해도 그냥 평범한 부상일 뿐이다. 하지만 일개 병사에겐 다르다. 파트란은 그저 아주 옅게, 거의 살상력이 없을 정도로 넓게 오러를 흩뿌리기만 해도 수백 단위의 병력을 ‘부상자 및 중병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령검사 파트란은 대륙에서도 인정받는 ‘전장에 특화된 오러 유저’ 중 하나였다.

“타아앗!”

선두에 선 오러 유저, 사령검사 파트란이 머리 위로 검을 들었다. 블레이드 오러가 옅게 흩어지며 마치 눈보라처럼 사방으로 흩날린다. 칠흑의 눈보라가 트롤 주술사들을 뒤덮었다.

화아아악!

하지만, 저 검은 눈보라 속에서도 트롤 구루들은 그리 부상을 입지 않았다.

“본대로 복귀합시다!”

눈보라에 전신이 베이면서도 트롤 구루들은 당황하지 않고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분명 인간이라면 파트란의 오러 스킬, ‘오버 소울 슬래시’에 의해 심각한 병마에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트롤은 그 육체의 재생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거의 효과가 없는 것이다.

뒤이어 강철의 기사, 케틀과 천검의 스파론도 각자 오러 스킬을 발동했다.

“아이언 크로우!”

오러가 강철의 속성을 띠고 발톱의 형상이 되어 전장을 휩쓴다.

“사우전드 소드!”

이름처럼 천 개는 아니지만 백은 족히 넘는 수많은 오러 소드의 형상이 트롤 구루의 등 뒤를 쫓는다.

파트란처럼 천검의 스파론과 강철의 기사 케틀 또한 ‘전장에 익숙한 오러 유저’들인 것이다.

사령검사의 기술이라면 모를까. 스파론이나 케틀의 공격은 트롤 구루들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하지만 구루들은 무사히 전장을 이탈할 수 있었다. 그들이 공격을 감행한 순간, 엘드릴 요새에서 한 명의 그림자가 빠르게 중간에 끼어든 덕분에.

“솟구치고 오르고 휘몰아치고 노래 부르라!”

중간에 가로막은 그림자가 물구나무선 채 두 다리를 빠르게 휘두른다. 회오리가 일어나며 케틀과 스파론의 블레이드 오러가 모조리 튕겨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내 몸을 일으키고 대지를 밟은 신장 2미터의 훤칠한 트롤, 그를 보며 천검의 스파론이 이를 갈았다.

“나타났구나. 상아어금니!”

☆ ☆ ☆

아틸카가 양손으로 허리의 북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둥, 둥, 둥둥둥둥!

리듬을 타고 주술력이 음파에 실려 사방으로 퍼진다. 사령검사 파트란의 오러에 깃든 사기가 정화되며 강력한 병마의 안개가 말 그대로 그냥 ‘안개’가 되어 버린다.

파트란이 혀를 찼다.

“또 저 짓이군!”

오러 유저를 상대하며, 주위 병사들을 몰아붙여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파트란뿐 아니라 전장에 특화된 이들이 벌이는 대표적인 전법이다. 그러나 저 괴물 트롤에게는 그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 마법 같은 기이한 사술로 전장의 아군까지 보호하며 자신을 상대한다.

사기가 걷힌 파트란은 그냥 초짜 오러 유저가 될 뿐이다. 파트란이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섰다.

“먼저 나서게, 용병왕 케틀!”

강철의 기사, 케틀이 인상을 쓰며 앞으로 나섰다.

‘젠장! 또 저따위로 부르는군.’

그는 원래는 용병 출신이었다가 오러에 각성하며 기사 작위를 받은 케이스로, 덕분에 대륙에서는 용병왕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뭐, 본인은 그 칭호를 대단히 싫어하고 있지만.

‘강철의 기사라는 좋은 칭호도 있는데! 검성도 용병 출신이긴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왜 내가 용병왕이야?’

왕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깡패왕이니 거지왕이니 하는 칭호가 좋아 보이는가?

아무래도 용병은 제대로 된 기사에 비해 천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파트란이 입에 담은 저 칭호에도, 비아냥이 확연히 담겨 있었다.

비록 같은 군 소속이긴 하지만 이들은 몇 번이나 적으로 서로를 마주했던 무소속 오러 유저들, 그렇다 보니 서로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케틀도 같이 비아냥을 던지자니 저 파트란은 사령검사라는 ‘치욕스러운 칭호’를 당당히 쓰는 명예도 모르는 작자다.

‘끙, 앓으니 죽지. 내가 참아야지.’

하여튼, 케틀이 앞장서자 천검의 스파론도 옆에 달라붙었다.

“내가 좌측에서 몰고 가겠다, 용병왕!”

“오냐, 이번엔 좀 제대로 해 봐라! 칼장수!”

천검의 스파론도 그 무수한 오러의 검을 만드는 능력 때문에 칼장수라는 괴상한 별칭이 있었다. 서로 비아냥대면서도 케틀과 스파론은 예리하게 호흡을 맞춰 아틸카에게 공세를 펼쳤다.

오러 유저는 서로의 기술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해 다른 이의 눈이 있을 경우 기술을 숨기는 경향이 심하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에나 그렇지, 이미 이 셋은 지난 열사흘간 지겹게 아틸카를 상대로 합공을 해 온 처지였다. 오러 스킬을 마음껏 꺼내며 케틀과 스파론이 검을 뻗어 냈다.

“아이언 스피어!”

“소드 스톰!”

회색빛 블레이드 오러가 강철의 창이 되어 허공을 가른다. 뒤이어 수십 자루의 오러 소드가 폭풍처럼 회오리치며 주위를 뒤덮는다.

둘 다 전투에 익숙한 이들답게 허점이 없어 보이는 합격술이었다. 하지만 아틸카는 당황하지 않았다.

“흐음…….”

북 두드리는 것을 멈추며 아틸카가 선두에 선 케틀을 향해 외쳤다.

“역시 대단한 실력이구려, 용병왕!”

“카아악! 트롤 따위까지 날 그렇게 불러?”

흥분한 케틀의 공세가 살짝 흐트러진다. 아주 작은 허점일 뿐이지만 아틸카 정도의 실력자에겐 뻥 뚫린 구멍이나 다름없다.

속으로 혀를 차며 아틸카가 공세를 피해 몸을 뒤틀었다.

‘쯔쯔, 또 걸렸구나. 나이도 지긋한 인간이 어찌 저리 성격이 폭급할꼬?’

처음에 조우할 시 강철의 기사보다는 용병왕이 짧고 부르기 쉬워 무심코 부른 건데, 냉정 다 버리고 돌진하는 통에 상대하기 쉬워져 그 후로 계속 이런 식으로 상대를 흥분시키는 아틸카였다. 벌써 이게 몇 번째인데 그때마다 착착 걸려 주니 참 어이없기까지 하다.

‘생각 짧고 제 성질 못 다스리는 것이 딱 용병이구먼.’

같은 용병 출신이지만 바나텔은 어디까지나 검사였다. 검술에 충실하며 검 말고 다른 무기를 쓰지 않은, 지나치게 검사라서 문제일 정도인 타입이다.

반면 케틀은 전형적인 용병이었다. 몰락한 검가 출신이라 제대로 된 검술을 익혀 오러 유저가 될 순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오랜 용병 생활로 몸에 밴 성품이 어디 가진 않는 것이다.

간단히 공격을 피해 낸 아틸카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양손에 쥔 단봉을 회전시키며 그가 노래를 시작했다.

“날개 달린 매가 창공을 누비니 종달새 지저귀며 그 뒤를 따르네!”

좌우의 회전하는 단봉으로부터 푸른 빛의 회오리가 뻗어 나가 케틀과 스파론의 오러 스킬을 뒤덮는다. 순식간에 두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박살 나며 오히려 역습이 들어왔다. 케틀과 스파론이 신음을 흘렸다.

“큭!”

“젠장, 정말 괴물이군, 저놈의 트롤은!”

사령검사 파트란이 재빨리 끼어들어 아틸카의 등 뒤를 노렸다. 그 덕에 아틸카의 정신이 분산되어 간신히 케틀과 스파론이 공격권 밖으로 벗어났다.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던 에그라드 경이 혀를 찼다.

“도대체…… 던전의 악마도 아닌데 오러 유저 셋을 동시에 상대하다니…….”

벌써 며칠째 저런 상황이었다. 믿었던 세 오러 유저가 모조리 괴물 트롤, 상아어금니 하나를 감당치 못하고 발이 묶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 명 빼 다른 쪽으로 돌리자니 남은 두 사람만으론 도저히 아틸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틸카는 세 사람을 상대할 땐 철저히 방어형으로 나오며 시간을 끌다 이쪽이 한 명이라도 빠질 기미를 보이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력하게 몰아치곤 했다. 그야말로 세 오러 유저의 발만을 묶겠다는 의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수법이었지만…….

‘실력 차가 너무 월등하니 뻔히 수작을 알면서도 대책이 없군.’

결국 이번 전쟁에서, 믿었던 저 ‘전장 특화형 오러 유저’들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인상을 쓰며 에그라드 경은 엘드릴 가드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러 유저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상 다른 방법으로 요새를 공략해야 하는데…….

“제국의 대마법사도 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으니.”

그곳에서는 바슈탈론 제국에서 대여받은 대마법사 파킨스가 마법을 난사하며 성벽을 맹렬히 폭격하고 있다. 8서클 중반에 종사하는 그는 태양탑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마법사로, 대륙 모든 마법사의 추앙을 받고 있는 이였다.

그러나, 지금 파킨스의 마법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성벽 위에 서서 강렬한 성광을 뿜어내며 모든 마법을 막아 내는 흰 수염의 노인 드워프 한 명 때문에!

“알 포트여! 그대의 종이 청원하나이다! 만물을 감싸는 대지의 가호를 내려 주소서!”

성스러운 기도를 올리며 마켈린은 파킨스의 마법이 날아올 때마다 그 강력한 신성력으로 마법의 위력 대부분을 죽여 버리고 있었다. 어찌나 신성 가호가 강력한지 8서클 폭렬 주문이 가호의 빛을 통과하고 나면 그냥 2, 3서클 폭발 주문 정도로까지 줄어들 지경이었다.

대마법사 파킨스가 치를 떨었다.

“제길! 저 빌어먹을 악신의 교황!”

저 사악한 드워프의 신성력은 실로 인간의 교황 이상이었다. 대마법사답게 그는 세이어의 교황이나 아틀라스의 교황과도 안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신성력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교황 마켈린의 신성력은 대마법사 파킨스를 감당하고도 여력이 남아, 태양탑의 마법병단마저도 감당할 정도였다. 덕분에 파킨스가 이끄는 마법병단 역시 드워프 신관대를 상대로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악신은 쉽게 권세를 내려 준다더니!”

이를 갈며 파킨스는 계속 마법을 시전했다. 이미 열흘 넘게 마켈린을 상대하며 별 소용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후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손 놓고 항복 선언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래도 마법 난무로 인해 어느 정도 공성의 틈이 드러난다. 이 틈에 에그라드 경이 본진을 이끌고 직접 나섰다.

“바실리의 용사들아! 오늘이야말로 저 요새를 함락하라! 바실리에 영광을!”

열심히 독려하며 에그라드 경이 선두에 서서 요새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리며 전진하는 그의 위용은 과연 오러 유저의 명성에 걸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엘드릴 가드는 정말 지독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계속 화살을 쏴!”

“돌을 던져!”

성벽 위의 병사들이 맹렬히 항전한다. 그 위를 에그라드 경의 블레이드 오러가 시원하게 훑고 지나간다.

“으악! 오러다!”

“피해!”

평소 무슨 훈련을 쌓은 것인지, 엘드릴 가드는 일개 병사들도 블레이드 오러를 상대로 침착하게 잘도 대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블레이드 오러가 박살 내 버린다.

콰콰콰쾅!

아까의 표현은 사실 좀 틀렸다. 엘드릴 가드는 무너지긴 참 잘 무너졌다.

우르르릉!

문제는, 무너져도 그 빈자리를 희한할 정도로 좌우의 잡석이 칼같이 채워 버린다는 것이다.

“됐다! 성벽 복구됐어!”

“다시 화살을 쏴!”

엘드릴 가드의 병사들도 성벽쯤은 원래 무너지는 걸로 인식하고 있는지, 파석 위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잘도 응전하고 있었다. 덕분에 에그라드 경이 아무리 날뛰어도 쉽게 성벽 위를 장악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작정하고 오러 유저다운 가공할 신체 능력으로 몸을 날린다면 성벽 위로 오를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러면 홀로 공세를 감당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짐 언브레이커블이 아닌 이상, 에그라드 경 역시 눈먼 칼을 주의해야 하는 평범한(?) 오러 유저인 것이다.

결국 재차 물러서며 에그라드 경은 퇴군 신호를 보냈다.

“퇴각! 전원 퇴각하라!”

오늘도, 엘드릴 가드 공략은 실패였다.

2

엘드릴 가드 전역에서 벌어지는 공방은 확실히 안타레스의 우세였다. 바실리 왕국군이 쉴 새 없이 몰아쳤지만, 성벽 어느 곳 하나 내주지 않은 채 엘드릴 가드의 혼합 종족 군세는 철저히 요새를 지켜 냈다.

세상 그 어떤 요새보다 잘 무너지면서도 동시에 절대 무너지지 않는 요새, 엘드릴 가드.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며 에그라드 경은 분노한 얼굴로 참모진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좀 더 쓸 만한 전략은 없는 건가? 그대들이 내놓은 작전치고 먹힌 것이 없지 않은가?”

분노한 사령관 앞에서 참모진이 모두 고양이 앞의 쥐 꼴이 되어 벌벌 떤다. 에그라드 경은 한심스러워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나마 권왕이 아직 나타나지 않아 이 정도다. 이대로라면 공략은 고사하고 오히려 역습을 당해 패할 수도 있단 말이다!”

현재 권왕 레펜하르트는 본격적으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한번 9서클의 마스터 드레자와 접전을 벌인 레펜하르트다. 사실상 패했다고 봐야 옳기도 하다.

그래서 드레자가 나타날 것을 대비해 힘을 비축하느라 미리 전장에 뛰어들지를 않은 것이다. 드레자 정도의 강자라면 레펜하르트라도 완벽하게 온전한 힘을 지닌 채 상대해야 할 테니까.

문제는…….

“아으, 그 빌어먹을 노인네…….”

머리를 감싸며 에그라드 경이 욕설을 내뱉었다.

철저히 비밀로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현재 바실리 왕국군에는 드레자가 없었다.

열사흘 전, 레펜하르트와의 사투 후.

드레자는 상당히 탈진한 채로 본진에 복귀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폭탄선언을 했다.

-이 전쟁에서 빠지겠다.

공식적인 이유는, 레펜하르트를 상대하느라 전신의 마력 흐름이 엉망이 되어 한동안 전력이 되질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달랐다.

-제자조차 누르지 못하는데 어찌 제라드 그놈을 상대할까!

레펜하르트를 상대로 지극히 자괴감을 느낀 드레자가 좀 더 힘을 키워야겠다며 라스틸 공국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뭐, 마법 흐름이 헝클어진 것이 아주 거짓말도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쯤은 며칠만 지나도 낫는 것이니 누가 봐도 핑계였다. 본진에 마법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대마법사 파킨스까지 있는데 참 뻔뻔한 핑계를 댄다며 에그라드 경도 화를 터트렸지만…….

-걔는 8서클이라서 금방 낫지만 9서클 마스터쯤 되면 안 나아!

대놓고 저렇게 나오는데 할 말이 없었다.

현 대륙에 9서클 마스터는 오직 드레자 한 명뿐. 본인이 그렇다고 하면 반박할 자격을 가진 마법사가 존재하질 않는 것이다.

결국 드레자는 다음 날 아침 홀랑 본진을 떠나 홀로 라스틸 공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마력 흐름 헝클어졌다는 핑계가 있으니 날아 돌아가진 못하고 마차를 이용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전장에서 이탈한 것은 확실하다.

“그나마 그 미친 노인네가 마차 타고 간 덕에 저쪽에 부재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대놓고 마력을 써 하늘로 날아갔다면 안타레스 측에서도 드레자가 이탈했다는 사실이 여실히 알려졌으리라.

한숨을 푹 쉬며 에그라드 경은 막사 틈새로 보이는 거대한 검은 요새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벌써 공성전을 벌인 지 보름째, 전력도 일만 명 가까이 잃은 후였다.

‘슬슬 뭔가 수를 쓰지 않으면 불명예스러운 회군을 해야 할지도 몰라.’

죽은 병사들의 생명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그야말로 귀족의 귀감이 될 만한 태도라 하겠다. 어쨌거나 에그라드 경 입장에서는 심각하기 그지없는 문제였다.

평소 신을 찾지 않은 그였지만 절로 입가에 기도가 맴돌았다.

“아레스여, 그대가 진정 존재한다면 기적을 내려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세이어 핑계대고 시작한 전쟁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전사나 기사는 투신 아레스를 섬기는 일이 많다. 아레스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에그라드 경은 힘없이 회의를 끝마쳤다.

근심을 가득 안고 잠을 청하니 이내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에그라드 경은 눈을 뜨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제 오늘도 승산 없는 공성전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대충 세안을 하고 무장을 갖춘 뒤 그가 회의 막사로 들어갔다.

수하 기사 하나가 보고를 올렸다.

“에그라드 사령관 각하!”

“무슨 일이냐?”

수하 기사가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말했다.

“……엘드릴 가드가 함락되었습니다.”

“……에엥?”

☆ ☆ ☆

바실리 왕국군이 질서 정연하게 엘드릴 가드로 진군했다. 선두에 서서 요새 성문으로 들어서며 에그라드 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건 도대체?”

단 하룻밤 사이에, 엘드릴 가드가 텅 비어 있었다. 성벽도 요새도 건물도 모두 멀쩡하건만 그 지독하던 안타레스의 병력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레스시여…… 설마 정말로 기적을 내려 주신 건 아니겠지요?”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어제 올린 기도마저 떠오르는 에그라드 경이었다. 물론 현 상황은 그런 농담을 떠올릴 기분이 아니었다.

텅 빈 요새.

사라진 적군.

그야말로 괴담의 한 장면이 아닌가?

실제로 수하 기사 한 명이 그 괴담을 입에 담기도 했다.

“이게 무슨 가란 성의 최후도 아니고…….”

바실리 왕국의 민간 괴담 중에는, 저주를 받아 단 하룻밤 만에 성 안의 모든 인구가 사라져 버린 가란 성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엘드릴 가드의 지금 상태는 그 괴담과는 달랐다.

“사라진 건 아닙니다. 확실하게 짐 다 꾸리고 하나도 안 남기고 떠났군요. 작정하고 철수한 것입니다, 이건.”

참모의 말에 에그라드 경의 미간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남은 흔적을 보면, 안타레스군이 무슨 저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철수 방식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요새를 떠났음이 분명했다.

“어째서?”

혹시 함정인가 싶어 한나절 동안 전군을 동원해 철저히 수색도 벌였다.

우물에 독을 탔는지, 마법 함정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요새를 통째로 무너뜨려 바실리 왕국군을 몰살시키려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이 거대한 요새를 통째로 무너뜨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기술로 요새를 지은 드워프들이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결과는 명백했다.

그냥 떠났다.

잘 싸우다가 하룻밤 만에 요새 비우고 싹 철군해 버렸다!

“대체 왜 이기는 쪽이 알아서 후퇴를 한단 말인가?”

☆ ☆ ☆

바실리 왕국군의 승전(?) 소식에 바실리 국왕은 크게 기뻐했다.

“으하하! 이제야 그 무도한 권왕 놈에게 한 방 먹였구나!”

멍청한 국왕과 달리 제대로 된 신하들은 크게 걱정했다.

“대체 무슨 일인 거요?”

“아니, 패배해서 후퇴한 것도 아니고 그대로라면 오히려 이쪽을 몰아붙일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다는데…….”

어지간한 상황이었다면 에그라드 경도 슬쩍 보고를 조작해 자신의 승리인 것처럼 본국에 알렸으리라. 하지만 상황이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 바실리의 수만 정병이 모두 증인인 셈인데, 거짓 보고 올려 봐야 소용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하게, 우세하던 안타레스군이 스스로 철수했다는 사실을 본국에 알렸다.

“혹시 안타레스 깊숙한 곳으로 유인해서 반격할 생각인 것은?”

“군사학의 기초만 핥았더라도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은 알 거요! 자국 깊숙이 적의 본대를 끌어들이는 게 무슨 유인이오? 그냥 점령당하는 거지!”

“그런 기초조차 없는 것이 아닐까요?”

“짐 언브레이커블이야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이단의 현자가 그 기초가 없다고? 그 작자가 크로방스와 안타레스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잘 알지 않소?”

“화, 확실히…… 첩자들의 보고는 어떻소?”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바실리 왕국 역시 안타레스 공국에 상당수의 첩자를 심어 놓고 동태를 계속 염탐하고 있었다.

“정말 후퇴한 것이 맞소. 현재 엘드릴 가드를 수호하던 모든 병력이 아라난 그라드로 입성하는 걸 확인했다 하오.”

“혹시 군대 일부를 몰래 빼돌려 다른 수작을 노린 것은 아니오?”

“빼돌릴 군대가 있어야 수작을 벌이지? 수십 명 단위라면 모를까. 병력 수천 명이 줄어든 걸 설마 우리 측 첩자들이 모를 것 같소? 적어도 엘드릴 가드의 병력 대다수가 아라난 그라드로 후퇴한 것은 확실하오.”

“그럼 대체 왜?”

왜?

대체 왜?

이는 바실리 왕국뿐 아니라 바슈탈론 제국이며 이 전쟁을 주시하던 모든 국가가 공통으로 갖는 의문이었다.

대체 왜 이기고 있는 측에서 알아서 성문 열고 자리를 비운 채 몰리는 상황을 자청했단 말인가?

☆ ☆ ☆

아라난 그라드 중심부, 왕성 가이라크.

집무실에 마주 앉아 레펜하르트와 카를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금쯤 저쪽은 미치고 환장하겠군요.”

“그렇겠지?”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훗, 이 작전을 눈치챌 만한 이가 과연 현 대륙에 있을까?”

카를이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이게 무슨 작전입니까? 그냥 사기 치는 거지. 뭐, 이런 사기를 칠 능력이 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사기도 아니긴 하지만 말입니다.”

낄낄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어쨌거나 먹히기만 하면 되는 거지. 저쪽의 상황은 어떤가?”

“예상대로 아라난 그라드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가건 안 가건,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독 오른 살쾡이처럼 한껏 긴장해 천천히 진군 중입니다.”

“예상했던 날짜보다 조금 늦어지겠군?”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애초에 진군 속도 느려질 것까지 예상한 날짜니까요.”

“역시 자네는 대단해.”

새삼 카를의 능력에 감탄하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인상을 썼다.

“그나저나, 엘드릴 가드에서의 일은 아쉽군. 드레자 소식을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바실리 왕국군의 짐작대로 레펜하르트는 드레자의 존재를 경계하느라 직접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끝까지 드레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날짜가 다 되어 아라난 그라드로 돌아온 것이다.

돌아오고 나서야 드레자가 이미 전장을 이탈, 라스틸 공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레펜하르트도 마음껏 전장을 휘저었을 것이고 안타레스군의 피해를 상당수 줄일 수 있었으리라.

“적어도 저쪽 오러 유저나 대마법사 한둘쯤은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며칠 뒤면 대륙의 그 누구도 안타레스를 적대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때쯤 되면 그들도 더 이상 적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레펜하르트가 표정을 풀고 빙그레 웃었다. 문득 카를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레펜하르트 님을 믿고 이 사기를 치긴 했다만, 정말이지 너무하군요. 신이 인간에게 사기 치는 형국이 아닙니까, 이건?”

“그 대가로 애꿎은 일반 병사들의 피를 줄일 수 있다면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은 힐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왕궁 가이라크 뒤쪽, 병풍처럼 아라난 그라드를 감싸고 있는 아렌드 산맥 너머 희미한 그림자가 비추고 있었다.

구름이 끼어 마치 산봉우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산이 아닌, 거대한 나무의 가지임을 알 수 있으리라.

산맥 깊숙한 곳에 위치함에도 높이가 수백 미터에 달해 슬슬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 이미 나무라 하기도 부끄러운 그 웅장한 존재는 바로 레펜하르트가 심은 세 번째 세계수 제네로스였다.

문득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실란 대주교께서 알현을 청합니다.”

이내 붉은 머리의 미청년이 안으로 들어섰다. 레펜하르트와 카를이 실란을 맞이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서와, 실란.”

“어서 오십시오, 안타레스 대주교.”

“대주교라니, 정말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네요. 하긴 레펜 씨 만나는 게 알현인 것도 적응 안 되긴 마찬가지지만.”

너스레를 떨며 실란이 집무실 소파에 와 앉았다. 카를이 물었다.

“교단 일은 잘되어 갑니까?”

퉁명스레 실란이 입을 삐죽였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하는 게 없는데.”

안타레스의 모든 이들이 전쟁에 한창인 지금, 실란은 철저하게 놀고 있었다.

현재 안타레스 공국에서 가장 교세가 강력한 교단을 꼽으라 하면 물론 필라넨스 교단이다. 공국의 주요 권력자이자 개국공신인 실란이 필라넨스의 대주교인 만큼, 기존의 레단티 교단조차도 필라넨스 교단의 위세에는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사랑의 여신, 필라넨스의 교리는 이종족이 받아들이기 매우 쉬운 것이다. 오크건 드워프건 엘프건 트롤이건 시집 장가가는 것은 인간과 마찬가지니까. 현재 이종족들이 가장 친근하게 느끼는 교단이 바로 필라넨스 교단이었다.

문제는 저 필라넨스 교단의 본산이 바로 바실리 왕국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세이어를 제외한 대륙의 모든 교단이 정교 분리의 원칙을 지킨다지만, 그래도 왕국 내에 있는 이상 교단 입장에서 바실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타레스 공국과의 전쟁에 대놓고 성직자를 파견하자니 기껏 손에 넣은 안타레스 교구가 아까운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교단의 위세가 한 방에 두 배로 늘었는데 그걸 멍청한 국왕 눈치 보느라 날리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래서 현 필라넨스의 교황, 라울 3세는 바실리와 안타레스 양국의 필라넨스 신관들에게 칙령을 내렸다.

-이는 속세의 전쟁일 뿐. 자애와 사랑을 중시하는 필라넨스의 뜻과도 어긋나는 전쟁이노라. 모든 필라넨스의 종들은 이 전쟁에 중립을 지키도록 명하노라.

덕분에 현재 모든 필라넨스 신관들은 반쯤 개점휴업 상태가 되어 있었다. 평소처럼 일반 시민들을 치유하고 상담하고 결혼식을 주도하는 정도가 업무의 전부, 어느 누구도 전장에서 부상자를 돌보거나 아군을 가호할 수 없었다.

“덕분에 남는 시간에 운동이나 신 나게 했죠. 어때요? 팔뚝 많이 굵어졌죠?”

실란이 팔을 걷어붙이고 알통을 만들며 으스댔다.

팔뚝이 실란 허리만 한 레펜하르트와, 팔뚝이 실란 허벅지만 한 카를이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음…….”

“으음…….”

저리 좋아하는데 그 앞에서 차마 ‘1밀리미터도 안 늘었는데?’라고 할 만큼 두 사람은 야박한 성품이 아니었다.

“어, 어쨌거나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실란?”

레펜하르트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정 안 되면 마켈린을 이용해 알 포트의 위세를 빌릴 수도 있겠지만, 역시 이 작전에는 필라넨스 여신께서 제일 잘 어울리니까 말이야.”

팔을 내리며 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 아마도 허락은 떨어진 것 같아요. 네, 필라넨스께서 허락하셨어요. 신탁은 아니지만 징조로 분명히 그 뜻을 전해 받았어요.”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으며 허리춤을 매만졌다.

“좋아.”

사방신의 유물, 무한의 마력이 담긴 고대의 기물을 툭툭 건드리며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호쾌하게 외쳤다.

“그렇다면 이제 작전 개시다!”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 카를과 실란이 구시렁댔다.

“그러니까 그건 작전도 아니지 말입니다.”

“그렇죠. 그냥 고금에 유례없는 사기극일 뿐이지.”

3

사흘에 걸쳐 바실리 왕국군은 안타레스 공국 깊숙이 전진했다. 사만의 대군이 안타레스 공국의 영토를 짓밟으며 아라난 그라드를 향해 거리낌 없이 나아갔다.

저항은 전혀 없었다. 진군로에 속하는 안타레스의 모든 영지는 이미 영지민까지 데리고 깔끔히 피난을 한 후였다. 생각이 짧은 병사들은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어떻게 도착하는 마을마다 텅 비어 있지?”

강간과 약탈을 기대하던 병사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바실리 왕국군 수뇌부가 그런 병사들을 위해 진군로를 바꾸진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아라난 그라드였으니까.

“하지만 청야 전술이라니, 의외로 이단의 현자도 독한 면이 있군요.”

바실리의 참모 하나가 말에 탄 채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자국 영토 내부로 쳐들어온 적군에 물자를 넘기지 않기 위해 성이며 마을을 텅 비우는 것이 바로 청야 전술이다.

겉보기에는 상당히 효율적인 작전 같지만 이는 군사학에서 가장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당사자인 백성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기에, 그야말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이 아니면 아무리 폭군이라도 함부로 시행하지 못하는 전술이기도 했다.

“……그걸 왜 이기고 있던 놈들이 시행한단 말인가?”

본진에서 말을 몰며 에그라드 경은 여전히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엘드릴 가드를 ‘거저’ 먹은 이래 지난 사흘 간 바실리 왕국군은 단 한 차례의 접전도 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미 안타레스 공국이 항복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엘드릴 가드에서 지독하게 고생을 한 에그라드 경 입장에서는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다.

“아라난 그라드에서 수성을 할 생각인가?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엘드릴 가드에서 수성을 해도 되었었잖아?”

곁에서 말을 몰던 기사 한 명이 에그라드 경을 달랬다.

“지금 고민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일단 아라난 그라드에 도달해 보면 대답이 나오겠지요.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건 힘으로 꺾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참으로 기사다운 호탕한 발언이었다. 에그라드 경도 표정을 폈다.

“허허, 그렇지.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 봤자 결국은 이 검이 모든 걸 판가름해주는 법이니까!”

기사들이 그렇게 다시금 사기를 높이는 걸 보며 참모진은 한숨을 쉬었다.

‘……힘으로 꺾긴 개뿔. 열흘 넘게 그 힘에서 사정없이 밀린 주제에 뭘 힘으로 꺾는다는 거야?’

하지만 참모진은 기사들에 비해 직위가 낮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기사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안타레스의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지금은, 저렇게 사기를 유지하는 쪽이 분명 그나마 승산이 있었으니까.

☆ ☆ ☆

“내일이면, 바실리 왕국군이 아라난 그라드에 도달할 겁니다.”

왕궁 가이라크의 회의실에서 카를이 보고서를 살펴보며 말했다. 레펜하르트가 턱을 괸 채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영지민의 피해는 없는 것이겠지?”

카를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모두 무사히 인근 산속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바실리 왕국군도 굳이 그런 이들을 제압하려 들지는 않고 있습니다. 예상대로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좀 위험한 작전이 아니었나, 카를? 바실리 왕국군의 목표는 안타레스의 점령이었을 터. 저들이 저대로 진군하지 않고 영지를 점거하고 영토 점령을 노렸다면 영지민의 피해가 컸을지도 모르는데.”

확실히 바실리 왕국군은 군세 일부를 점령한 영지에 남긴 뒤, 그 지역을 지배하려 들 수도 있었다. 사실 점령 전쟁은 이쪽이 정상이다.

영지민을 피난시켰다고, 바실리 측이 그 영지민을 무시하고 그냥 진군할 거라 생각한 것은 너무 운에 맡긴 게 아닐까? 레펜하르트는 이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물론 평범하게 엘드릴 가드가 함락되었다면 저들도 그렇게 나왔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대놓고 엘드릴 가드를 그냥 내주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 바실리 왕국군의 입장을.”

카를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 밀리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어요. 그리고 적국의 수도는 그냥 달려오기만 하면 됩니다. 눈앞에 목표가 있고, 분명 상대에게 꿍꿍이가 있을 게 뻔하지요. 그런데 어느 정신 나간 지휘관이 그런 상황에서 군세를 분리한단 말입니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라도 모든 병력을 보전하고 싶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쪽의 꿍꿍이를 신경 써서 아예 진군을 멈추고 점령 지역에 눌러앉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카를이 손가락을 저었다. 레펜하르트도 워낙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여러 예상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 분야만큼은 카를이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이 바실리 단독 전쟁이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엄연히 세이어의 이름을 건 성전이고, 또 바슈탈론 제국과의 연합 작전입니다. 제국과의 연계를 위해서도 바실리 왕국군은 아라난 그라드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폐하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말이죠.”

머리가 여럿인 세력은 예측하기 쉽다. 서로 이득이 걸려 있고 서로의 의견을 무시할 수가 없으니, 단독으로 변수란 걸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제멋대로인 강자 개인의 움직임이야 카를도 예측할 수 없었다지만, 바실리라는 거대한 세력의 움직임은 확실히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군, 그렇지만 그래도 영지민들의 고초가 크지 않을까?”

카를의 예상이 맞아 영지민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피난 생활이란 것은 결코 편한 일이 아니다. 피신한 안타레스 영지민들 입장에서는 나라를 원망할 법한 일이다.

하지만 카를은 대수롭잖게 고개를 저었다.

“별문제 없습니다. 어차피 그 지역 영지민들은 원래 대기근 당시 몰려온 유민이거나 전쟁에서 패해 흡수한 지역 주민들이니까요. 불만은 있겠지만 감히 반발은 없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반발해도 별문제 없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반발하기엔 지금의 안타레스 공국이 너무 강하지요. 애초에 백성들의 뜻이 모여 만들어진 나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잘난 폐하와 잘난 폐하 동료들이 잘난 이종족 모아서 만든 나라인데요. 대륙 역사상 이 정도의 독재 국가도 사실 별로 없습니다?”

“그, 그런가?”

어째 힐난을 듣고 있는 기분이 들어 레펜하르트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카를이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나라를 레펜하르트 님 당대에서 끝내지 않으려면 앞으로 계속 기틀을 잡아야겠지요. 하지만 당장은 이쪽이 최선입니다.”

“그래도…… 나중에 보상이라도 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가차 없이 카를이 대꾸했다.

“그럴 예산 없습니다. 지금도 재정이 휘청거리는데 무슨…….”

“자, 자네 의외로 독하군…….”

“독할 것 없습니다. 이번 전쟁을 위해 엘프며 드워프, 트롤과 오크들이 얼마나 많은 물자를 부담하는지 아십니까? 물론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만, 결국은 모두 안타레스라는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 인간 역시 안타레스의 일원, 그렇다면 똑같은 부담을 져야겠지요.”

안타레스는 이종족만의 국가가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다섯 종족이 어우러진 나라다.

그렇다면 인간 역시 똑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국민 된 의무라 카를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카를은 자신의 군주를 향해 간언했다.

“안타레스는 엘프와 오크, 트롤과 드워프, 그리고 인간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적은 인간이 아니라 대륙의 관습이며 다른 국가이고요. 이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야말로 폐하의 책무라 할 것입니다.”

레펜하르트도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고 또 명심하겠네, 카를 재상.”

☆ ☆ ☆

안타레스 공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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