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장 전장의 북소리여, 볼륨을 높여라!
1
성전 개시 사흘째.
크로방스 서부 국경은 여전히 팽팽한 국면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네 군단으로 나뉜 바슈탈론 제국군은 뛰어난 장비와 고도의 훈련을 통해 단련된 정예병을 투입해 끊임없이 크로방스의 네 요새를 공격해 댔다. 대륙 최강의 국력을 가진 바슈탈론 제국에서도 전문적으로 전투만을 수행하는 이들의 힘은 실로 강력했다. 어지간한 국가라면 이들 중 한 개 군단의 힘만으로도 나라가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방스는 용케도 버티고 있었다.
농성 사흘째의 제스턴 요새.
“날벼락 떨구기!”
우렁찬 기합과 함께 몰려오는 제국군의 머리 위로 녹색 벼락이 떨어졌다.
이내 거대한 오크가 녹색의 블레이드 오러를 사방으로 날린다. 두꺼운 갑주도 일격에 베는 저 파괴의 빛 앞에는 제국 정예병들도 어쩔 수 없다. 순식간에 정예 수십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제국군들이 두려워하며 소리쳤다.
“칼켄이다!”
“오크 대족장, 칼켄이 나타났다!”
지난 사흘간 칼켄이 떨친 무용은 제국의 인간들에게도 충분히 뇌리에 박힐 정도로 가공한 것이었다. 이제 제국군도 더 이상 칼켄을 ‘괴물 오크’라거나 ‘오크의 탈을 쓴 마물’ 같은 칭호로 부르지 않았다. 크로방스 측에서 부르는 것처럼 제대로 대족장이란 칭호를 붙이고 있었다.
칼켄의 등장으로 제스턴 요새 서쪽 공성 부대의 기세가 일순 주춤해졌다. 그러나 이내 제국군에서도 블레이드 오러가 빛을 뿜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목을 베어 주마, 오크 대족장!”
검붉은 오러를 전신에 감싼 50대의 중년 기사가 말도 타지 않은 채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왔다. 제국 기사단의 2인자, 걸포드 경이었다.
칼켄이 투지로 눈을 빛냈다.
“왔구나, 걸포드!”
두 오러 유저가 전장 한 가운데서 검투를 시작했다. 2.3미터의 거구인 칼켄이 패도적인 연격으로 밀어붙이면 걸포드 경도 놀라운 힘으로 공격을 막아 내며 도리어 반격을 한다.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칼켄!”
칼켄과 비교해 작아 보이긴 하지만 걸포드 경도 사실 신장이 2미터가 넘는 거구 중의 거구였다. 지닌 무술 역시 강검 계열이라 일격의 파괴력으로 성벽도 부술 수 있는 소유자였다.
칼켄이 신이 나 외쳤다.
“역시 좋구나! 나와 힘으로 맞먹는 인간이 또 있으니!”
걸포드 경이 비웃으며 되받아쳤다.
“흥! 세상에 그 정도 힘을 가진 이가 자신뿐인 줄 알았더냐?”
비록 검성 바나텔이라는 초인 중의 초인이 존재해 몇십 년째 제국의 2인자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 걸포드 경 역시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력한 오러 유저였다. 단순히 파괴력만으로는 족히 레펜하르트 수준이다.
“제국의 잠재력은 무궁무진! 우물 안 개구리에게 하늘 높다는 것을 알려 주마!”
제국의 자부심을 가득 안고 걸포드 경이 조롱을 던졌다. 그런데 의외로 칼켄이 납득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하늘 정말 높더라.”
“응?”
이미 칼켄은 제라드라는 ‘투신’을 상대해 본 바 있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전신으로 느낀 것이다.
“음, 그 양반은 그야말로 하늘이지…….”
중얼거리는 칼켄의 목소리에 걸포드 경이 공감의 빛을 띠었다. 그 역시 검성 바나텔을 통해 하늘 높은 줄 잘 아는 개구리(?)였다.
“그건 그렇지. 하늘 정말 높지…….”
“그렇지…… 높지…….”
싸우다 말고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버렸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피식 웃어 버렸다. 잘 싸우다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인가?
“죽어라, 인간!”
“죽어라, 오크 놈!”
다시 투지를 끌어 올리며 칼켄과 걸포드 경이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
둘 다 몇 번이나 맞붙은 처지라 쉽게 승패가 갈리지 않는다. 연달아 필살의 일격을 뿌려 대는 둘을 보며 남쪽의 방비를 맡고 있던 또 한 명의 오크 투사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대족장께서 또 주위 신경 안 쓰고 몰입해 버리셨네.”
칼켄과 걸포드의 대치가 길어지자 그 주위만 동그랗게 공터가 생긴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제국 측도 크로방스 측도 그쪽만 피해서 여전히 공성과 농성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쯧쯧, 모름지기 수장 된 이라면 항시 수하들을 살펴야 하는 것을…….”
그는 안타레스의 일곱 오크 투사 중 한 명, 갈색 바위 부족의 차기 부족장 프다칸이었다.
올해 스물다섯이 된 그는 타시드가 나타나기 전만 해도 오크 중 최연소로 카루가가 된 강력한 전사이며, 동시에 뛰어난 무기아비이기도 한 현명한 오크였다. 오크 중 몇 안 되는 ‘인간의 정치’를 이해하는 오크이기도 했다.
“형제들이여! 투지를 잃지 마시오! 조상들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니!”
현재 성벽 위는 드워프와 인간들이 자리 잡고 굳건히 방어 중이다. 하지만 농성이라고 해서 마냥 성 위에서만 버티고 있으면 언젠가는 뚫리기 마련, 빈틈이 생겼을 때 성 밑으로 출격해 후속 공세를 막아 주어야 한다.
프다칸이 이끄는 오크 라이더들이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공성의 흐름이 늦추어질 때마다 쪽문을 통해 돌진해 치고 빠지기를 계속함으로써 성 위쪽이 숨 돌릴 틈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원래 오크는 돌진에는 강하지만 이런 치고 빠지기에는 약한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프다칸은 적어도 인간의 전략을 이해할 정도의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다.
“가자! 위대한 용사들이어!”
오크 라이더들을 이끌고 프다칸은 성벽 좌측에 포진한 제국군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초반에는 거칠게 밀어붙이지만 이내 포위망이 구축되며 기세가 꺾였다.
또다시 슬슬 빠질 때, 프다칸이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형제들이여! 성벽의 아군을 보호하라!”
그냥 후퇴하라고 하면 용맹한 오크들에게는 그리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아스레일도 그랬듯, ‘돌진 상대’를 바꿔 주면 또 단순한 오크들은 잘 따르는 것이다.
“우오오!”
과연 계획대로 오크들이 용맹하게 ‘후퇴’했다. 뭐, 본인들은 후퇴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으니 용맹할 법도 했다.
그렇게 프다칸이 철수하는 오크 라이더의 뒤를 지키던 중이었다.
“오늘이야말로 베어 주마, 오크 놈!”
“저 늙은 인간, 또 왔네.”
제국군 쪽에서 군청색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60대의 늙은 기사 하나가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제국 기사단의 그라타스 경이었다. 비록 제국의 오러 유저 중에서는 약한 편에 속하지만 수많은 경험을 지니고 있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맞붙은 상대가 나타나자 프다칸이 눈에 불을 켰다.
“늙은 인간! 갈색 바위 부족의 프다칸이 상대한다!”
흥분한 두 사람이 검을 마주했다. 젊고 힘이 넘치는 프다칸과 늙었지만 노련한 그라타스가 수십 차례의 검격을 주고받으며 파문을 뿌려 댔다.
칼켄 뒷담을 깐 주제에, 프다칸도 어쩔 수 없는 오크라 일단 필적할 상대를 만나니 눈이 돌아가 버렸다. 수하들이 후퇴를 하는지 마는지 신경 끈 채 전력으로 그라타스를 상대한다.
“죽어라, 늙은 인간!”
“그놈 말본새하고는! 과연 천한 오크 놈답구나!”
그러나 그 와중에도 오크 라이더들은 용케 차분히 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어느새 성벽 위를 총괄하던 슬로이틀이 나타나 대신 지휘를 맡은 것이다.
“자기도 똑같은 주제에 뭐 칼켄 공 욕하고 그러나? 쯧쯧.”
칼켄과 똑같이 전장에 공터 만들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프다칸을 보며 슬로이틀은 혀를 찼다. 아무리 현명해 봤자 결국 오크는 오크랄까?
“자 자, 어서들 들어오라고, 오크 친구들! 아, 아니지? 성벽 쪽으로 돌진하라고!”
“슬로이틀 님! 동쪽에 마법사가!”
“어? 그새 떴어? 지금 간다!”
요새 서쪽과 남쪽에 정신 팔린 사이 제국의 마법사가 동쪽을 공략하고 나선 것이다. 허겁지겁 짧은 다리로 점프해 가며 슬로이틀이 순식간에 동쪽 성벽으로 향했다.
제국군 진지 쪽에서 남색 로브를 휘날리며 노인 하나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번 전쟁에 참전한 태양탑 4대 대마법사 중 한 명, 8서클 후반에 종사하고 있는 키란트였다. 천재 오러 유저 키린트의 숙부이기도 한 그가 양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난쟁이 놈! 신의 뜻 아래 네놈을 벌하겠다!”
마법이 발동되며 불의 비가 동쪽 성벽 전체에 흩뿌려진다. 슬로이틀도 블레이드 오러를 뿌려 대며 맞섰다.
“그놈의 신 타령 지겹다! 닥치고 덤벼!”
드워프답게 슬로이틀은 칼켄이나 프다간처럼 일대일 양상으로 몰고 가지 않았다. 드워프 전사들의 투창 공격과 연계해 블레이드 오러를 뿌리며 어디까지나 성벽 사수에 중점을 둔다.
자신이 날린 불의 비가 슬로이틀의 오러 장막에 가로막혀 모조리 허공에서 소멸된다. 대마법사 키란트가 불만스러운 듯 혀를 찼다.
“저 난쟁이 놈은 오러 유저 주제에 계속 거북이처럼만 구는군.”
전사답지 않게 냉정한 슬로이틀은 강자가 나타나도 일대일 양상으로 빠져들기보다는 전황에 더더욱 신경 쓰고 있었다. 딱히 상대가 마법사여서가 아니다. 지난 사흘 동안, 걸포드 경이나 그라타스 경을 상대할 때도 슬로이틀은 계속 저런 전법을 유지했다.
연이은 키란트의 마법을 계속 오러로 쳐 내며 슬로이틀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어림없다, 이놈들! 한 발자국이라도 내줄 성 싶으냐!”
☆ ☆ ☆
제스턴 요새가 한창 농성 중이던 그 시각.
다른 요새들 역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크로방스 서부 방어 요새 라카스.
그곳에서 한 묘령의 소녀가 황토색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겉보기엔 잘해 봐야 십대 중후반에 불과한 소녀, 하지만 가슴만큼은 풍만하기 그지없어 배틀 액스를 휘두를 때마다 출렁거림이 갑주 위에까지 티가 난다.
“인간들아! 드워프의 진정한 힘을 보여 주마!”
그랜드 포지의 새로운 오러 유저, 유스테아였다. 수많은 적병들 앞에서 유스테아가 두 다리로 대지를 굳게 디뎠다.
“대지 공명!”
대지의 힘을 빌어 전신의 힘을 끌어낸다. 그리고 손에 든 도끼 창을 제국병을 향해 맹렬하게 내던진다.
“가라, 할트론!”
카다마이트가 애지중지하던 애병, 이제는 그의 유품이 된 거대한 도끼 창이 황톳빛 블레이드 오러를 머금은 채 적진을 누볐다.
유스테아가 눈에 불을 키며 소리쳤다.
“카다마이트의 몫까지 싸워 주마!”
카다마이트와 동기였던 유스테아는 예전부터 오러 유저를 제외하곤 드워프 전사 중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카다마이트의 죽음을 접하고 그의 시체를 앞에 두며 오열하던 그 순간, 마지막 벽이 허물어지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그녀는 당당히 그랜드 포지의 새로운 오러 유저가 되었다.
“타아아앗!”
드워프답지 않게 농성이 아닌 정면 돌격을 가행하며 유스테아는 적진을 돌파했다. 오크 라이더와도 비견될 정도의 돌진력, 몇몇 드워프 전사들이 뒤를 따르다 헉헉거렸다.
“아이고, 유스테아 님. 우린 다리가 짧단 말입니다.”
“그러게, 우째 쫓아가라고.”
젊은 드워프들이 투덜거리자, 나이 든 중년 전사들이 혀를 차며 말을 받았다.
“그런데 다리는 쟤도 짧잖아?”
“저분은 대신 멀리 뛰잖아요!”
“그냥 좀 닥치고 쫓아가! 하여튼 요새 젊은 것들은 빠져 가지고…….”
투덜거리면서도 잘도 유스테아의 뒤를 쫓는 드워프 전사들이었다. 다른 요새와 달리 라카스 요새는 지형이 비교적 험하지 않아 성벽 위보다는 이렇게 요새 주위에 방어력을 집중해 공성의 흐름을 끊는 것이 중요했다. 일종의 이동 성벽이랄까?
유스테아가 돌진하자 제국군도 이내 반응했다. 제국 오러 유저가 말을 타고 달려오며 분노해 소리친다.
“시건방진 어린 계집 따위가!”
“어리긴? 네놈보다 백 살은 더 먹었다!”
50대 기사를 향해 소녀의 외모를 한 유스테아가 앙칼지게 대꾸쳤다.
겉보기엔 저래 보여도 유스테아는 드워프, 카다마이트와 동기인 중년의 나이인 것이다. 절대 나이가 아닌 종족 나이로 쳐도 저 기사와 크게 나이 차이가 안 난다.
달려오는 제국 오러 유저를 상대하기 위해 유스테아가 도끼 창을 마주 들었다. 뒤따른 드워프 전사들이 당황했다. 여기서 싸우면 포위망에 갇히는 형국이 되어 버린다. 일단 진을 뒤로 물려 성벽 밑에서 상대해야 했다.
드워프 주제에 성질이 폭급한 유스테아를 말리기 위해 수염이 수북한 드워프 하나가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 일단 후퇴해야 합니다!”
그러자 순간 주위의 제국병 모두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머니?”
“누가 누구의?”
과연 드워프답게 수염이 덥수룩하긴 했지만, 사실 저 드워프 청년은 올해 고작 일흔다섯, 갓 성년이 된 이였다. 시리스와 비슷한 나이대랄까?
반면 올해 백쉰 살인 유스테아는 이미 아들도 둘이나 본 당당한 유부녀인 것이다. 아라난 그라드에 대장장이 일하는 남편도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인간이 보기엔 귀여운 인상의 10대 소녀로밖에 안 보인다. 제국병들이 숙덕거렸다.
“저, 저렇게 어린데 애까지 낳은 유부녀라고?”
“애가 저리 늙었는데?”
“화, 확실히 가슴은 큰데…….
저리 소녀스러운 외모의 유부녀라니…… 특이한 취향을 지닌 제국병 몇몇이 묘한 상상으로 얼굴을 붉힌다. 물론 저런 무도한 작자들은 이내 유스테아의 일격에 한 줌 고혼이 되었다.
“죽어라, 이 변태들! 하여튼 인간은 뭔 변태가 이리 많아?”
“어머니! 후퇴해야 한다니까요?”
“알았다, 알았어!”
성질을 내면서도 유스테아가 병력을 이끌고 뒤로 물러섰다. 이내 오크 라이더와 합류하며 튼튼한 진형을 구축한다.
오크 라이더를 이끄는 지휘관은 놀랍게도 날씬한 체구의 오크 여인이었다.
“유스테아! 서쪽을 부탁해요!”
“알았어요, 아란타!”
그녀는 오크의 일곱 투사 중 한 명, 철사자 부족의 족장 아부타의 아내인 아란타였다. 유스테아의 드워프 전사들과 합류하며 그녀가 소리쳤다.
“철사자의 용사들이어! 전원 돌격!”
방어 위주인 드워프 전사들이 뒤를 받치고 오크 라이더들이 공세를 취하며 서로의 역할을 반전한다. 몇 번이나 해 온 전법이라 그 흐름이 노련하기 짝이 없다.
순식간에 성벽에서 뛰쳐나오는 돌격대가 된 오크 라이더들, 그를 이끄는 아란타를 보며 제국병들이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으, 괴물 오크녀다!”
아란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구 보곤 침 흘리고, 누구 보곤 괴물이냐?”
껄떡대는 시선도 싫지만 무시당하는 것은 더 싫다! 아, 복잡한 여심이여…….
“가라, 나의 자매들아!”
아란타가 손을 뻗자 등에 달린 네 자루의 무기가 일제히 하늘로 날았다.
오러를 머금은 망치와 도끼, 단검과 사슬낫이 허공을 누비며 복잡한 궤적을 그린다. 단순히 네 개의 무기가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계해 커다란 진법을 형성한다.
아란타가 자랑하는 비기, ‘용잡이 덫’이었다.
남자 전사와 달리 오크 여전사들은 스피리츠 웨폰으로 단 하나의 큰 무기가 아니라 여러 자루의 다양한 무기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근력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전사가 될 정도의 오크 여성이라면 근력에서 남자에게 밀리진 않는다.
오크 남성과 여성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는 채집을 하는 것이 오크의 전통 문화.
사냥을 위해선 한 가지 목표물에 집중해야 한다. 반면 채집은 온갖 다양한 열매를 골라서 채취하는 작업이다. 한 가지에 열중하는 남자의 본능과 멀티태스킹이 되는 여성의 차이랄까?
물론 각자 개성이라는 것이 있으니 남녀의 성격이 뒤바뀌는 경우도 의외로 흔하지만, 일단 문화적으로 고정이 되면 아무래도 그에 걸맞은 상식이란 게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오크 여전사들은 남자와 달리 다양한 무기를 선호했다. 열두 개의 단검을 쓰는 스탈라처럼 아란타도 네 자루의 도끼와 망치, 단검과 사슬낫을 동시에 영혼의 자매로 여기고 있었다.
“죽어 버려, 이 변태만도 못한 것들!”
흥분한 아란타의 앞을 제국 오러 유저가 가로막고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후퇴한 유스테아의 방어진 쪽으로도 또 한 명의 제국 오러 유저가 투입되어 팽팽한 국면을 맡았다.
라카스 요새 성벽 역시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나의 친구 이그나시스, 나를 위해 나와 줘요.”
십여 명의 갈색 피부를 지닌 엘프 정령사들이 제국의 대마법사 바록을 상대로 강력한 불의 정령술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이는 가녀려 보이는 청초한 미모를 지닌 미녀 엘프, 시리스와 친자매처럼 지내는 샤일렌이었다.
“이그나시스!”
강력한 불꽃의 정령이 바록의 냉기 마법과 충돌해 거친 폭풍우를 일궈 낸다. 자신의 마법이 계속 가로막히는 걸 보며 대마법사 바록이 혀를 찼다.
“거참, 엘프 따위가 어찌 저런 강력한 정령을…….”
8서클의 대마법사인 바록도 저리 강력한 정령을 불러낼 자신은 없었다. 마법으로 강제 이동시키며 정령의 힘을 소진하는 정령 소환 마법과 달리 엘프들은 전혀 힘의 감쇠 없는 정령 소환이 가능한 것이다. 아무래도 파워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샤일렌은 렐하드보다도 강력한, 현재 단하임 일족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정령사다. 첫 번째가 야매로 정령술 익힌 시리스임을 감안하면 제일 뛰어나다고 봐도 좋다. 그녀가 그 정도로 실력이 높기에 렐하드도 예전 샤일렌으로 하여금 시리스를 가르치게 한 것 아닌가?
세 여인이 전장 곳곳에서 힘을 쓰며 전투를 이끈다. 각 종족의 지휘층이 전원 여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딱히 카를이 일부러 노린 것은 아니었다.
라카스 요새는 그 특성상 성벽 안쪽에서 농성하기보다는 성 안팎에서 유동적으로 연계해 농성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드워프치고는 돌격력 강한 유스테아가 필요했고, 오크치고는 방어에도 강한 아란타가 뽑혔다. 둘 다 여인이다 보니 종족 성격이 뚜렷한 남자들보다는 좀 더 융통성이 있었다.
여기에 가장 강력한 정령술사를 투입하다 보니 샤일렌이 걸렸다. 그냥, 어쩌다보니 이런 구성이 되었달까?
뭐, 여인이라 해도 결코 남자들보다 약하지 않다. 당당히 제국의 오러 유저를 상대하며 아란타가 호쾌하게 외쳤다.
“와라, 제국의 개들아!”
2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들이 유독 눈에 띄긴 하지만, 그렇다고 크로방스 왕국이 그저 원군의 힘에만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부의 철벽, 제클릭 경이 양성한 원래의 크로방스 서부 국경군은 제국군 못지않은 정예다. 이들이 뒤를 받쳐 주지 않고서는 아무리 이종족들의 힘이 강하다 한들 제국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했으리라.
초반엔 피해가 컸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신병들과도 제대로 어우러져 필사적으로 요새를 보호하고 있었다.
덕분에 제국군 측에서는 상당히 골머리를 썩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크로방스의 저항이 거세군.”
전황을 보고받으며 제국군 총사령관 길리우스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참모장이 그를 달래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저들의 방어는 요새끼리의 연계에 의한 것, 하나만 함락되어도 둑 터진 제방처럼 일제히 무너질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 하나가 안 무너지지 않나?”
길리우스 황태자는 신경질을 내며 막사에서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의 눈에 높게 솟은 검은 성이 보였다. 크로방스 서부 최강의 요새, 파루간이었다.
참모장이 뒤따르며 아부하듯 말했다.
“각 요새들이 아무리 버텨 봐야 본진이 무너지면 의미가 없습니다. 파루간이 함락되는 순간 모두 실 끊어진 연이 될 것이옵니다.”
“파루간 요새가 무너질 경우의 이야기지, 그건.”
“전하의 위엄 앞에 저따위 요새쯤은 사흘도 못 버틸 것이옵니다.”
“으음…….”
아부인 줄은 알지만 길리우스는 굳이 참모장을 타박하지 않았다.
세상은 아부를 멀리 하는 왕이 좋은 왕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제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길리우스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래 인간은 호의가 계속 이어지면 그것이 당연한 권리인 줄 착각하는 종자들.
마냥 바른 소리만 하게 만들면 신하들이 건방져지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황권의 약화로 이어진다. 신하들이 바른 말을 하는 건 좋지만 그 말을 건방지게 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공손하게, 황권을 두려워하며 바른 말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통치란 어디까지나 조화로워야 하는 법.’
참모장의 아부를 대충 흘려 넘기며 길리우스는 파루간 요새를 노려보았다. 이틀째 공격 중이지만 저 철벽의 요새는 요지부동, 조금도 넘어갈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길리우스 황태자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정도 요새쯤, 바나텔 공이 제대로 힘을 쓰면 간단할 것을…….”
바나텔의 비기, 참성검 아틀라스의 기둥은 막으려 한다고 막아지는 물건이 아니다. 그 기술이라면 아무리 거대한 요새라도 일격에 붕괴시킬 수 있다.
참모장이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그랬다간 권황도 제대로 힘을 씁니다. 오히려 다행이지요.”
☆ ☆ ☆
이틀 전, 파루간 요새의 중앙 홀.
유벨 2세는 길리우스가 보낸 사신을 알현하고 있었다.
이미 선전포고는 했지만, 이곳 파루간 요새는 제국 황태자와 일국의 국왕이 함께한 전장이다. 양국의 우두머리가 만났으니 그에 걸맞은 격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마지막 경고요, 크로방스의 군주여. 바슈탈론 제국의 힘은 강력하고 세이어의 권세는 세상을 뒤덮으니 이에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만용일 뿐!”
시건방진 사신의 말투에 알현실 좌우의 기사들이 흥분해 눈을 부라렸다.
“아무리 제국이라 하나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감히 폐하께 무슨 망발을!”
“그 더러운 입을 도려내 주마!”
개중에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 자루로 손을 가져가는 이도 있었다.
슬쩍 주위를 보며 재빨리 사신이 말을 이었다.
“현 크로방스의 군주께서는 젊은 나이임에도 놀라운 영명함을 지니어 그 칭송이 드높다 들었소.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시길 바라오!”
오만한 가운데서도 은근슬쩍 유벨 2세를 띄워 주니 기사들도 차마 칼을 못 뽑고 씩씩대기만 한다. 제국의 사신이 슬그머니 유벨 2세의 눈치를 보았다.
대국의 사신이 적진 한복판에서도 시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무리 무도하게 굴어도 설마 자신을 건드리겠냐는 대책 없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소국으로 향한 사신이 건방 떨다가 목만 본국 돌아간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바보가 아닌 이상, 흥분한 상대가 뒷생각 안 하고 기분대로 저질러 버릴 경우를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뭐, 역사 속의 외교관 중엔 정말 저런 바보라서 목 잘린 이들도 상당히 많지만 적어도 바슈탈론 제국은 그 정도로 멍청한 이를 사신으로 보내진 않는다.
그런데도 제국의 사신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외교를 담당하는 자는 일국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대제국 바슈탈론의 사신이라면 국위에 걸맞은 오만함 또한 보일 의무가 있는 것이다. 제국의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상대의 비위를 아슬아슬한 데까지 긁는 것, 이 또한 제국에서는 좋은 외교관의 덕목이었다.
현 제국의 사신은 유능한 이였고, 그래서 저 밀고 당기기를 절묘하게 하고 있었다. 덕분에 유벨 2세도 흥분했을지언정 크게 분노하진 않았다.
“크로방스의 정책은 우리의 사정일 뿐, 아무리 제국이 강대하다 하나 내정 간섭까지 받을 이유는 없다. 크로방스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뭐, 예상했던 대로다. 어차피 사신도 상대의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니까.
“후회하실 겁니다, 크로방스의 군주여.”
눈치 보니 마지막 시건방 정도는 떨어도 되겠다 싶어 사신이 말을 이었다.
“설마 저것이 제국의 총 전력이라 생각하시진 않겠지요? 제국의 저력은 무한한 것, 황제께서 마음만 먹으면 백만 대군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유벨 2세가 손을 내저으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 대꾸했다.
“돌아가서 전하라. 그쪽에 백만 대군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짐 언브레이커블이 있다고!”
☆ ☆ ☆
사신이 돌아간 직후, 개전이 선포되었다.
길리우스가 이끄는 제국 제1군단이 공격을 시작했다. 무수한 병력이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파루간 요새에서는, 단 한 명을 내세웠다.
요새 성벽 위에서 한 노인이 사뿐히 몸을 날려 뛰어내린다. 손을 들어 전방을 살펴보며 노인, 제라드가 히죽 웃었다.
“어따, 많이도 몰려오는구먼.”
그는 이미 겉옷을 벗고 우람한 상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양 주먹을 불끈 쥐니 전신 근육이 꿈틀거리며 약동했다.
“와아아아아!”
포효를 터트리며 달려오는 제국의 군세를 향해 제라드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제라드가 허허롭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만 일반 병사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리? 자비를 베풀어 주마.”
콰앙!
내디딘 한 발이 폭음을 일구며 거대한 황금빛 파문이 되었다. 파문이 주위의 대지를 모조리 뒤집어엎으며 거대한 흙의 파도로 화한다.
달려오는 거대한 제국 군대의 해일을 향해, 더 거대한 흙의 해일이 밀려 갔다.
콰콰콰콰!
“으억?”
“뭐야, 저건?”
거대한 흙의 장벽이 어지간한 성벽 크기가 되어 밀려오며 머리부터 덮쳐 온다. 순식간에 선봉 부대 전부가 흙의 해일에 싹 휩쓸린다. 평지에서 산사태에 휩쓸리는 진귀한 경험을 하며 제국병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으아아아악!”
“권황이다!”
“권황 제라드다!”
확실히 공격에 살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 제라드가 빈말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언제 자연재해가 살기 피우는 것 봤나? 그냥 휩쓸리면 죽는 거다.
보고 있던 길리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유벨 2세가 그랬다지? 자신들에겐 짐 언브레이커블이 있다고.”
자비를 베푼다면서 대지를 에이커 단위로 갈아엎는 스케일 큰 작자는 대륙에서도 몇 없다. 확실히 기겁할 위용이었다. 유벨 2세가 그런 자신만만함을 보일 만하다.
그러나 길리우스는 겁먹지 않았다.
“백만 대군 따윈 필요 없지. 그쪽에 권황이 있다면, 이쪽엔 검성이 있다!”
길리우스가 깃발을 올려 출격 신호를 보냈다.
“바나텔 공!”
곧이어 제국군 진지에서 선홍색 빛의 기둥이 솟구쳐 창공을 꿰뚫었다.
“이놈, 제라드! 애꿎은 애들 괴롭히지 말고 둘이 붙자!”
“오냐, 바나텔! 그러게 일찌감치 나오지 그랬느냐? 엉덩이가 무거우니 애들이 고생하잖아?”
숙적을 만난 두 사람이 저마다 오러를 내뿜으며 격돌한다. 양쪽 모두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오오! 검성 바나텔!”
“권황 제라드시여! 제국 놈들을 박살 내 주소서!”
바나텔과 제라드가 전력을 다해 맞붙었다. 가공할 힘이 폭풍이 되어 전장을 뒤덮고 사방팔방에 오러의 파편을 유성처럼 뿌려 댄다. 무지막지한 폭발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점점, 환호하던 양쪽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
“어라……?”
미친 듯이 싸워 대는 두 괴수들, 그들이 흘리는 오러의 유성들은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빗나간 황금빛 오러가 파루간 요새를 두들기고 엇나간 선홍색 오러가 제국군 본진을 강타했다.
쾅! 쾅! 콰쾅!
그제야 병사들이 사색이 되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안타레스 공국에서의 사례도 있듯, 저 두 괴물은 그저 맞붙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깡그리 초토화시키는 것이다.
“역시 만만치 않구나, 제라드!”
“네놈이야말로, 바나텔!”
호적수를 만난 두 사람은 신바람을 내며 싸워 대지만, 두 고래의 싸움에 인근 새우 집단은 아주 죽을 맛이다. 기껏 설치한 요새 마법진이 ‘제라드’에 의해 박살 나고 힘들게 맞춘 제국군 본진이 ‘바나텔’에 의해 쑥대밭이 된다.
쾅! 쾅! 콰쾅!
두 사람이 맞붙은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유벨 2세와 길리우스 황태자가 공포에 떨며 같은 대사를 뇌까렸다.
“아으, 저 양반 괜히 내보냈다…….”
☆ ☆ ☆
첫 격돌 이후, 제라드와 바나텔은 경상만을 입은 채 서로의 본진으로 복귀했다. 크로방스와 바슈탈론 양측에서 합심해서 둘을 말린 것이다.
-그만! 거기까지! 이러다 제국군까지 다 죽겠소, 바나텔 공!
-멈춰 주시오, 권황이시여! 요새 다 무너지겠습니다!
일단 싸움 붙으면 주위에서 뭐라건 신경 끄는 두 사람이다. 그래서 아예 길리우스 황태자와 유벨 2세가 직접 나서서 말렸다. 일국의 지배자가 확성 마법까지 써 가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니 천하의 바나텔과 제라드라도 차마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쳇, 아직 본격적으로 붙지도 않았는데.”
본진으로 돌아온 제라드의 그 한마디만큼 공포스러운 대사는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훗날 유벨 2세는 회상했다고 한다. (참고로 길리우스도 비슷한 회상을 했다.)
이후 제라드와 바나텔은 얌전히 서로의 본진에서 대기했다.
서로 최종병기를 꺼내면 어찌 되는지 너무도 실감한 길리우스와 유벨 2세가 감히 두 사람을 다시 내보내질 못한 것이다. 어차피 상대의 최종병기를 막았다는 점에서 이미 두 사람은 충분히 효용을 다한 셈이었다.
물론 바나텔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 그런 나 혼자 가서 크로방스 왕 노릴게! 그럼 제라드 놈도 나 쫓아오겠지. 그럼 여기서 안 싸울 것 아니오?”
확실히 바나텔이 대놓고 파루간 요새 안쪽으로 들어가 싸우면 제국군엔 피해가 없겠지. 하지만 길리우스라고 그걸 몰라서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권황이 제 목 따러 오면요?”
아무리 황태자지만 바나텔은 인간을 초월한 검성, 제국의 권위로 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황제조차도 감히 하대하지 않는 바나텔은 제국의 신하면서 동시에 황태자의 숙부 정도의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길리우스도 존대를 통해 그를 대했다.
“권황이 바나텔 공을 무시하고 제국군 본진으로 와 버리면 그걸 누가 막습니까?”
“마법사들도 많고 오러 유저도 많잖소?”
불만스러운 듯 뇌까렸지만 바나텔의 흥분은 그새 가라앉았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분명 현 제국 1군단에 소속된 마법병단이나 오러 유저가 총동원되면 아무리 권황 제라드라도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 나면 요새 공략할 인원이 하나도 안 남을 겁니다.”
쐐기를 박는 참모장의 말에 바나텔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가 아는 제라드는 분명 짐 언브레이커블답게 단순 무식한 작자지만, 동시에 너무도 짐 언브레이커블스럽게 절대 손해는 보려 하지 않는 성격이다.
“전하를 노린다라? 확실히 제라드가 그럴 놈이긴 하지.”
실제로 그 순간, 파루간 요새에서 제라드가 똑같은 소릴 하고 있었다.
“아, 그냥 가서 내가 황태자 목 따 오면 되잖아!”
“그럼 바나텔이 저희 폐하 목 딸 것 아닙니까?”
“음, 바나텔은 분명히 그럴 놈이지.”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이 두 사람 모두 각국의 진지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이유였다.
‘분명 제라드, 그놈이 대장 목 따러 올 건데.’
‘바나텔 성격이면 혼자 날뛴다고 쳐들어올 텐데, 언제 오려나?’
처음에는 그냥 상대를 기다리는 수준이었는데, 이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묘한 경쟁 구도가 되었다.
‘어쭈, 제라드. 네놈 성격에 아직도 기다린단 말이지?’
‘훗, 바나텔 놈보다 인내심에서 뒤질 수야 없지!’
자고로 노인네 고집은 천하일품이라, 이상한 데서 경쟁심을 발동시키는 바람에 두 괴수의 격돌은 처음을 제외하고는 이후 전장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일반 병사들에겐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서로의 최종병기가 빠졌다 해도 제국이나 크로방스나 그 전력은 결코 만만치 않다.
제국 최정예병과 강력한 마법병단, 2명의 제국 오러 유저가 쉴 새 없이 파루간 요새의 문을 두들겼다.
크로방스도 최강의 기사, 하츠버겐 경과 안타레스의 오크 투사 킨지르의 힘을 빌려 굳건히 요새를 방어했다. 파루간 요새는 다른 요새와 달리 드워프 전력이 투입되지 않았지만 별 차이는 없었다. 서부의 철벽, 제클릭의 농성 솜씨는 충분히 드워프 못지않은 노련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틀이 지나도록 전황은 변함이 없었다. 길리우스 황태자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안타레스의 노예 종족들 전력이 강하군…….”
“비천한 것들일 수록 난폭하고 야만적이기 마련이지요. 그렇기에 세이어께서 이 전쟁을 준비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날뛰는 개는 패서라도 얌전히 만들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건 그렇지.”
제국의 황태자조차도 이제는 이종족들을 ‘무능력한 노예들’에서 ‘놔두면 위험하니 인류가 관리해야 하는 노예들’ 쪽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종족 입방에서는 똑같은 멸시이고 오만이겠지만 이는 사실 큰 변화였다. 적어도 이종족들이 ‘당연히’ 인류의 말을 듣는 종족이란 인식은 더 이상 대륙에 없다.
“하지만 이 정도면 안타레스 본국의 전력을 거의 다 빼낸 것이 분명하렷다?”
“예, 전하.”
현재 크로방스 전선에 확인된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는 총 열 명이다. 유능한 제국 참모부의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은 것이다.
참모장이 고개를 숙였다.
“심려치 마옵소서, 전하. 설사 저들이 계속 버틸 수 있다손 쳐도 저 정도 전력이 빠진 안타레스 공국이라면 바실리 연합군을 당할 리 없습니다.”
현재 바실리 연합군에 소속된 오러 유저급 무력의 숫자는 넷으로 알려져 있다. 오러 유저인 이라나드 공작과 에그라드 경, 그리고 마검사인 유서스와 성기사 크리스틴.
하지만 실제는 좀 다르다.
“자유 기사 출신 오러 유저 넷이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9서클의 마스터, 드레자 공께서도 계시지요. 그 힘을 당할 여력이 현 안타레스에는 없으니, 모든 것이 제국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신만만한 참모장의 말에도 길리우스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바실리 쪽의 진군이 영 늦는 것 같단 말이지…….”
3
안타레스 남부 국경 지대.
국경 서쪽으로 길게 드리운 글로텐 산맥과 라키드 산맥의 사이에 한 분지가 존재한다. 페틀랜드와 대륙을 연결하는 소통로이기도 한 이 게렐 분지는 안타레스 공국 수도, 아라난 그라드로 향하는 또 다른 길목이었다.
그 평원에서 지금 한 무리의 부대가 격돌하고 있었다.
“푸른 곰의 용사들아! 돌격!”
부대를 지휘하는 이는 다이어울프를 탄 근육질 오크 여인, 푸른 곰 부족의 대모 스탈라였다.
평소엔 남편과 어울려 다니던 스탈라지만, 지금 그녀는 칼켄을 따라 크로방스 쪽으로 가지 않고 안타레스에 남아 있었다. 오크 대족장인 칼켄이 자리를 비웠으니, 전통에 따라 아내인 그녀가 대족장 대리가 되어 안타레스 본토의 오크들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 덕에 애꿎은 독수공방 신세가 되었달까?
물론 오크 여전사는 ‘헤어진 임에 대한 그리움’ 따위를 느끼는 섬세한 감정은 키우지 않는다. 그딴 거 키울 바에야 애를 하나 더 키우고 말지.
“남편에게 질 수야 없지! 전원 돌격!”
그녀의 지휘 아래 수많은 오크 라이더들이 돌진을 시작했다. 마주한 백색 갑주의 기사단 사천, 그 선두에 선 거구의 미녀가 검을 뽑아 들며 맞받아쳤다.
“세이어의 기사들이여, 이단자들에게 신의 철퇴를!”
스탈라가 이끄는 이천의 이종족 혼성 병력과 크리스틴이 이끄는 사천의 세이어 성기사단이 평원 한가운데서 충돌했다.
벌써 몇 번이나 맞붙은 후라 쌍방이 군세가 상당히 줄어든 후, 덕분에 양쪽 모두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대모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대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오크 라이더의 선두에 선 것은 남달리 거대하고 용맹한 오크 전사들이었다. 바로 푸른 곰 부족의 최정예, ‘스탈라의 아이들’이다. 모두 대모 스탈라의 젖을 먹고 자라난 젊은 오크들로 나이는 어리지만 가공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저들을 오크로 보지 말라!”
“저놈들은 몬스터다! 세이어의 뜻을 거스르는 사악한 마물일 뿐이다!”
세이어의 성기사단, 그 선두에 선 이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전원 신성한 빛을 검에 머금고 맹렬히 돌격한다. 성기사 중에서도 탁월한 이만이 구현이 가능하다는 신성검의 위용이 선두의 기사들 전원의 검에 맺혀 빛을 뿌린다.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며 스탈라가 양손을 뻗었다.
“가라! 나의 자매들!”
열두 자루의 단검이 블레이드 오러를 머금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열둘의 단검이 저마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허공을 누비며 열둘의 목숨을 동시에 앗아 간다.
성기사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열둘의 비검! 오크 대모, 스탈라다!”
성기사단 안에서 40대 후반의 한 검사가 나타나 소리쳤다.
“그년은 내가 맡는다!”
짙디짙은 진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찬란히 솟구쳤다. 바슈탈론 제국이 비밀리에 고용한 자유 기사 출신 오러 유저, 폭염의 기사 탈론이었다.
화르르륵!
블레이드 오러와 함께 가공할 화염이 검신에 맺힌다.
“대폭염!”
거대한 폭염이 반경 십수 미터를 통째로 뒤덮었다. 이니야처럼 물질 변환을 통해 불길 그 자체로 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열기의 속성을 띤 진홍빛 오러가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날뛰다 보니 화염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스탈라가 혀를 찼다.
“또 저 지랄이네.”
폭염의 기사, 탈론.
그는 여러 타입의 오러 유저 중에서도 특히 전장에 특화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젊을 적, 불타는 성을 탈출하다가 깨달음을 얻어 오러 유저가 된 탈론은 그 후 독특한 오러 운용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일부러 오러를 제어하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 놓음으로써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제멋대로 날뛰는 그의 오러 스킬은 일대일 대결에선 그리 위력이 없다. 힘이 한 점으로 집중되지 않으니 간단한 오러 가드만으로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끝없이 사방으로 오러의 불길을 뻗어 내는 그는 그야말로 전장을 통째로 화재 현장으로 만들 수 있었다.
화르르르륵!
오러의 화염이 적아를 구별하지 않고 사방으로 날뛰었다. 세이어의 성기사단은 신성 은으로 만든 합금 갑주 덕에 큰 피해를 입지 않는 반면, 가죽 갑옷 차림인 오크 라이더에겐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가라, 나의 자매여!”
열둘의 단검 중 열 개를 날려 스탈라가 오러 화염의 맥을 끊었다. 그 틈에 탈론이 그녀를 노리고 덤벼들었다!
“일점화!”
스탈라가 진땀을 흘리며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아군에 신경쓰다 보니 반격은 무리, 방어가 한계였다. 벌써 세 차례나 맞붙었던 상대를 보며 스탈라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인간은 특이한 타입의 강자가 많아.’
굳이 오러 스킬만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한 일대일이라면 탈론은 아무래도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용병 생활로 잔뼈가 굵은 탈론은 오직 스탈라에게 전력을 다하면서도, 무의식중에 전장의 흐름을 파악해 연신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중이었다.
‘고정된 지형지물이 아닌 혼탁한 전장 속에서 저게 가능하다니…….’
스탈라로서도 감탄스러운 부분이었다. 덕분에 칼켄과도 맞상대하는 스탈라를 상대로, 탈론은 밀릴지언정 당하지는 않는 팽팽한 국면을 보이고 있었다.
강력한 오러 유저, 스탈라가 발이 묶이자 그 틈에 성기사단의 지휘관, 크리스틴이 바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하아아앗!”
오크 라이더와 맞서며 크리스틴이 호흡을 통해 전신의 힘을 몇 배나 강화시킨다.
“세이어께서 내리신 힘을 맛보아라!”
뭐, 사실은 제라드의 개인적 욕심 덕에 얻은 힘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효과는 지대하다. 크리스틴의 검이 거대한 오크 전사를 향해 신성검의 빛을 뿌렸다.
“세이어여, 내 적을 가르소서!”
단 일검에 오크 라이더의 거대한 도끼와 육중한 거구의 육체, 심지어 다이어울프까지 통째로 썰려 버린다!
“크아아악!”
크리스틴이 검을 좌우로 휘두르며 성가를 이었다.
“세이어께서 보우하시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도다!”
강력한 신성 가호가 크리스틴의 전신에 깃들었다. 대주교급의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전신을 감싸며 모든 신체 기능을 극대화시킨다. 성기사인 크리스틴의 신성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메사이어의 권능이 크리스틴의 신성력을 몇 배나 증폭시킨 것이다.
“모두 죽여 주마!”
메사이어의 권능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현재의 크리스틴은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실로 오러 유저와 비견해도 꿀리지 않는 기세로 수십의 오크 라이더들을 일순간 학살해 버린다. 그녀를 상대할 스탈라가 탈론에 의해 발이 묶여 있으니, 순식간에 진영이 붕괴되며 안타레스군 좌측이 무너져 내렸다.
“가라, 세이어의 검이여!”
“이단자들에게 신의 철퇴를!”
일찌감치 카를은 세이어 성기사단 쪽에도 제국이 오러 유저를 투입할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 세 부대로 나뉜 안타레스 남부 침략군, 신성군과 바실리 본군에 비해 성기사단이 유독 전력이 약했으니 뭔가 수를 쓰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상당한 강자가 투입될 것이라 바라보고 굳이 스탈라를 이곳에 배치하는 무리수까지 뒀다. 카를로서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문제는, 제국 참모부 역시 상당히 유능했다는 점이다.
제국 참모부는 그동안의 정보를 통해 안타레스 공국 오러 유저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홀로 대륙을 떠돌거나 오지에서 괴물을 상대하며 강해진 이들이다. 그런 만큼 개개의 전투력은 높으나 전장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전장에 익숙한 폭염의 기사, 탈론을 내세웠다.
-권왕 본인이 나서지 않는 한 탈론은 어떤 오러 유저와도 팽팽히 겨룰 수 있을 겁니다. 전장에 한해서라면요.
서로가 서로의 작전을 눈치 채며 체스를 두고 있다면, 게다가 서로의 장기말을 양쪽 모두 완벽히 다루고 있다면 결국은 누가 더 많은 장기말을 가지고 있냐로 승패가 갈린다.
그래서 제국은 승리를 확신했다.
이쪽은 탈론 말고도 세이어의 축복을 받은 크리스틴이라는 또 다른 오러 유저급 강자가 있었으니까.
카를 역시 패배를 짐작했다.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 숫자는 한정되어 있으니, 아무리 상대가 어찌 나올지 예상을 해도 장기말이 부족해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피해를 최대한 줄이며 시간을 끄는 전략을 세워 놓고 세이어 성기사단을 상대케 했다.
-보름, 보름만 버티면 됩니다. 그러니 무리하게 맞붙지 말고 천천히 후퇴하며 상대의 진군 속도만 늦추면 돼요. 동부 전선은 워낙 험지라 그냥 진군해도 아라난 그라드까지 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재 안타레스 동부 방어군은 나흘째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팽팽한 국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국 참모부도 카를 재상도 예상 못 한 새로운 장기말의 존재 덕분이었다.
“이그나시스!”
저돌적으로 달려가던 성기사단 선두에서 거대한 폭염이 솟구쳤다. 이내 가공할 정령의 불길이 기사단을 뒤덮으며 모든 것을 불살라 버렸다.
“으아악!”
오러와 마법, 신성력을 상대론 강력한 방호 능력을 자랑하는 세이어의 신성 은 갑옷도 정령력을 상대론 전혀 힘을 못 썼다. 처음 접해 보는 힘이라 태양탑이나 세이어 교단도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은 탓이었다.
화르르륵!
불길이 기사들을 뒤덮으며 갑옷째 녹여 버린다. 녹은 갑주가 살에 달라붙어 차마 눈 뜨고 못 볼 끔찍한 모습이 되었다.
그 광경을 본 엘프 병사들이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도 불의 정령술을 쓰지만, 보통은 폭발력을 이용해 부상을 입히지 저렇게 사람을 통째로 녹여 버리진 않는 것이다. 개중에는 헛구역질을 하는 엘프도 있었다.
“욱, 우욱!”
화상이 유독 잔혹한 이유는, 겉보기엔 회생 불가의 상처를 입음에도 의외로 쉽게 죽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화염에 휩싸인 성기사들은 채 죽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백금발을 휘날리며 날아올랐다.
“호호호호호!”
섬뜩한 광소를 내뱉으며 소녀가 채 숨이 끊어지지 않은 다른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이들, 그들을 바라보며 그녀가 키득키득 웃었다.
“바퀴벌레 같이 목숨 한번 질기기도 하네. 성기사랬지? 그럼 성스러운 바퀴벌레인가?”
소녀가 쓰러진 기사의 머리통을 짓밟았다.
“벌레는 짓밟아 죽이는 게 정석이지.”
콰직!
투구째 머리통이 박살 나며 육편과 뇌수가 사방으로 튄다.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소녀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으로 날아오른 안구 하나를 낚아챘다.
핏발이 선 눈알을 마치 장난감이라도 되는 냥 손가락으로 가지고 놀며 소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아하하하!”
잔혹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오크들조차 소름이 돋아 뒷걸음질을 쳤다. 크리스틴이 엘프 소녀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나왔구나!”
지난 나흘 동안, 성기사단은 전혀 진군하지 못하고 분지에서의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탈론 대신 안타레스군을 몰아붙여야 할 크리스틴이 단 한 명의 소녀 검사에게 계속 가로막힌 탓이었다.
비록 권왕과의 친분이 깊어 이름은 제법 알려졌지만 제국도 카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평범한 엘프 검사, 시리스 발렌시아.
이번 전쟁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지독하게 잔인한 손 속, 소름이 끼칠 정도의 살기, 사람을 벌레처럼 보는 광기의 학살로 인해 그녀는 더 이상 신월의 검사라는 청아한 칭호로 불리지 않는다.
“광기의 발렌시아!”
☆ ☆ ☆
“저주받을 마녀 같으니!”
“오늘이야말로 동료들의 원한을 갚아 주겠다!”
성기사들이 분노해 시리스를 향해 돌진해 갔다. 시리스가 요사스럽게 웃으며 가볍게 발을 튕겼다.
“나와, 사라나!”
바람의 정령, 사라나가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허공에 구현되었다.
이미 시리스의 태도는 정령을 친구로 여기는 엘프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강력한 그녀의 정령 친화력은 슬슬 그 도를 더해 거의 억제력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 사라나가 겁을 먹으면서도 충실한 부하처럼 명령에 따라 시리스의 발판이 되었다.
다섯 개체의 바람의 정령을 동시 소환한 뒤 시리스는 허공을 밟으며 순식간에 성기사들의 머리 위를 장악했다.
성기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또 저 수법이다!”
“당황치 마라! 모두 냉정하게 대처하라!”
말을 탄 기사들에게 머리 위에서의 공격은 영 익숙치 않다. 그러나 이미 몇 번이나 시리스를 상대했는지라 성기사 모두 노련하게 방패를 들어 공중을 가로막는다.
허공에 뜬 채 시리스가 비웃음을 흘렸다.
“흥!”
조소와 함께 그녀가 양손에 쥔 시미터를 돌렸다.
“가라! 샐러맨더!”
수십 개체의 불도마뱀이 허공에 구현된다. 시리스의 손짓에 따라 샐러맨더가 일제히 폭격을 가했다. 폭발 속에 뛰어들며 그녀가 양손의 시미터를 어지러이 놀렸다.
“타아앗!”
순수한 진철 아다만티움만으로 벼려진 두 자루 시미터가 살육의 춤을 추며 피비를 뿌려 댔다. 막은 기사들이 방패째 잘리며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간신히 공격을 피한 노기사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사슬낫을 휘둘렀다.
“죽어라, 마녀야!”
휘리릭!
사슬낫이 길게 풀어져 시리스의 등을 노렸다. 잽싸게 칼을 교차해 공격을 막는 순간 사슬이 두 자루 시미터와 얽히며 움직임을 봉쇄했다.
“어머? 늙다리가 제법이네?”
그 틈에 젊은 성기사가 장창을 찔러 왔다.
“세이어의 이름으로!”
갑자기 시리스가 두 칼을 놓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몸을 반전하며 맨손으로 성기사의 목을 노렸다. 아슬아슬하게 장창을 피하며 그녀의 수도가 기사의 목을 꿰뚫었다.
“커어억!”
비명과 함께 청년의 목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손에 깃든 백색의 빛, 엘리먼트의 힘이었다.
“안 돼! 게릭 경!”
아끼는 후배가 목째로 쥐어뜯기는 광경을 본 노기사가 절규를 터트렸다.
“어찌 어린 계집의 손 속이 그토록 악랄하단 말이냐!”
분노한 노기사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시리스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갔다.
“세이어의 천벌이 있을 것이다!”
순간 시리스가 허공의 청년 머리통에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피에 물든 머리칼을 움켜쥔다. 그대로 머리통을 철퇴처럼 휘두르며 그녀가 깔깔 웃었다.
“세이어의 천벌이다, 늙다리!”
꽝!
아끼던 후배의 머리통에 격타당한 노기사의 머리가 투구째 박살이 났다. 머리 잃은 시체가 바닥을 뒹굴고 빠진 백발이 허공에 나부꼈다.
빠진 머리칼을 도로 버리며 시리스가 광소를 터트렸다.
“아하하하핫!”
아군의 사기가 꺾이는 걸 느끼며 크리스틴이 허겁지겁 시리스에게 달려갔다. 메사이어를 뽑아 휘두르며 그녀가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이번에야말로 죽여 주마, 광기의 발렌시아!”
신성검이 깃든 메사이어가 시리스의 심장을 노리고 화살처럼 쇄도한다. 하지만 시리스는 오히려 비릿하게 웃었다.
“호호,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했니, 크리스틴?”
웃음을 흘리며 그녀는 몸을 비틀어 찌르기를 피해 냈다. 그리고 이내 시미터를 좌우로 내리쳐 반격에 들어갔다.
“엘리멘트!”
외침과 함께 시리스의 두 자루 칼날에 선명한 백색의 기운이 떠오른다. 그 기운에 충돌할 때마다 메사이어로 증폭된 신성검이 맥없이 흔들리며 그 위세를 잃는다.
크리스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젠장! 대체 저 계집이 어떻게 된 거야?’
예전 시리스와 맞붙었을 때 크리스틴은 그녀에게 밀린 적이 있다. 메사이어를 얻은 후에도 실란의 힘을 빌린 티티마에게 밀린 적이 있다.
하지만 더 이상 크리스틴은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메사이어의 힘을 완전히 소화한 지금, 그녀는 황금기사 유서스와도 비견될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레펜하르트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 장담하며 이 성전에 참가했는데…….
‘어떻게 이런 단시간에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