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권 제50장 마법의 극을 초월한 자 (51/84)

제50장 마법의 극을 초월한 자

1

“타아앗!”

레펜하르트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찬란한 오러와 마력의 빛이 비행 궤도를 따라 길게 빛의 꼬리를 남긴다. 드레자가 다급하게 반응했다.

“포스 필드!”

마력 방어장을 전신에 두른 채 재차 곡예비행을 시작한다. 아까처럼 불규칙적인 비행으로 이내 레펜하르트의 공세를 피해 낸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도 더 이상 아까 같지는 않다.

“훗!”

비웃음을 던지며 레펜하르트가 몸을 반전시켜 머리 위에 있는 드레자를 향해 권풍을 날렸다.

“에어로 스트레이트!”

풍계 마법이 섞인 스트레이트 캐논이 황금빛 장막을 펼치며 드레자의 사방을 감쌌다.

그냥 스트레이트 캐논이었다면 드레자도 마법으로 간단히 찢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크윽! 이건!”

빛의 장막은 연신 물결무늬로 흔들리며 마력과 오러가 융합된 채 펼쳐지고 있다. 그냥 마법을 날려서는 저 속에 깃든 마력 간섭에 의해 위력이 대폭 줄어들어 버린다. 줄어든 마법만으로 날릴 만큼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는 만만치가 않다.

“젠장! 어쩔 수 없군!”

정신을 집중하며 드레자가 보다 고위의 주문을 영창했다.

“법칙이 내 손에 임해 가르는 자가 되리, 이터널 블레이드!”

8서클 단절 주문을 쓰니 이내 모든 장막이 갈가리 찢어졌다.

아무리 마법과 오러를 융합한 가공할 파괴력이라지만 드레자의 능력도 만만치 않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를 수 있다.

문제는, 오러 장막 가르는 데 정신 팔다 보면 비행 술식 제어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느려졌군!”

그럴 줄 알았다며 레펜하르트가 쾌재를 울렸다. 단숨에 접근하며 그가 강렬한 붕권을 내뻗었다.

“타앗!”

드레자가 황급히 전신에 두른 방어막을 정면으로 모아 몇 배나 방어력을 높였다. 영역 형태인 필드가 아니라 방패, 실드의 형태로 마력장이 재구성된다.

“포스 실드!”

“소용없다!”

레펜하르트의 붕권이 마력의 방패를 뭉개며 그대로 전진했다.

파지지직!

붕권 속에 디스펠의 마력을 심어 함께 날린 것이다. 강도 위주의 마력 방패가 박살 나고 충격 흡수 방어 결계마저 주먹질로 뭉개 버린다. 그럼 남는 것은 기본적인 방어막뿐.

“으으윽!”

다가오는 저 주먹 형상의 죽음을 보며 드레자가 신음을 흘렸다. 주문 외우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그저 전력을 다해 이미 펼친 방어막에 순간 마력량을 총동원했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드레자가 허공에서 수십 미터나 뒤로 밀렸다. 간신히 자세를 제어하며 드레자가 숨을 헐떡였다.

“헉, 헉,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겨우 레펜하르트의 일격을 막긴 했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다. 로브 자락 여기저기가 풍압에 찢어져 나부끼고 곱게 빗어 넘겼던 백발도 멋대로 헝클어져 지저분하게 흔들린다.

“……내가 제라드도 아니고 그 제자 놈 따위에게!”

흥분하며 드레자도 반격에 나섰다. 우선 시동어만으로 가능한 하급 마법을 날려 접근을 막으며…….

“플라즈마 볼, 워터 블래스트, 윈드 프레스, 다크 캐논!”

이내 고위 마법 영창에 들어간다.

“레인 딜 헬라즈 프란드, 천권의 힘을 받아 이 손에 세계의 종말을 맺노니…….”

드레자 기준에서나 하급 마법이지, 6서클이면 충분히 강력하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이 정도 마법이 폭풍처럼 난사되는데 쉽게 거리를 좁힐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디스펠 스트레이트!”

해제 마법을 실은 오러의 장막이 보자기처럼 넓게 펼쳐져 날아오는 마법을 모조리 감싸 버린다.

“스파이럴!”

이내 회오리치며 난사된 마법이 모조리 오러의 회오리에 빨려 가 허공에서 모조리 폭발했다. 마치 태풍에 휩싸인 듯한 모습이었다.

‘젠장! 발조차도 못 묶는 거냐?’

영창 중인 드레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래서는 도저히 영창에 필요한 시간을 벌 수가 없다. 그야말로 무풍지대를 비행하는 것처럼 거리낌 없이 다가온다!

다행인 것은 레펜하르트가 아까와 달리 느긋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예 영창을 방해할 생각도 없다는 태도다.

‘역시 오만한 짐 언브레이커블!’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드레자의 궁극 주문이 먼저 완성되었다.

“……모든 것이 멸할지어다, 임페리얼 버스터!”

물론 레펜하르트가 여유 부린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가 다시금 가슴을 활짝 폈다.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

또다시 임페리얼 버스터가 허공에 화려한 폭발을 일궈 냈다.

또다시 폭연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드레자가 바드득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또냐?”

그가 자랑하는 최강의 폭렬 주문, 임페리얼 버스터지만 역시 저 마력과 오러의 융합 앞에선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완전히 위력이 죽어 버리고 잔여 파괴력은 스파이럴 가드에 의해 모조리 튕길 뿐!

더구나 현재 레펜하르트가 구사하는 스파이럴 가드는 평소와 달리 오러 소모량이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마력의 회오리로 때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순수한 물리적 방어 능력은 기존 스파이럴 가드보다 월등히 낮다. 하지만 마법에 한정한다면, 충분히 궁극 마법조차 감당할 수 있는 수법이었다.

힘은 덜 드는데 위력은 그 이상.

“저래서야 지칠 일도 없지 않은가?”

드레자의 안색이 먹빛이 되었다. 저런 식이라면 그의 마력량으로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공할 지구력을 감당할 수 없다.

“소용없다, 드레자! 이 정도론 나는 물론이고 사부님을 해할 수도 없어!”

드레자는 짐 언브레이커블을 너무 무시했다.

“아마 6중첩을 기준으로 사부님의 기량을 파악한 모양인데…….”

마법의 힘이 없어도 더블 스파이럴 가드라면 이 정도 위력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다니, 마법사 실격이다! 드레자!”

통쾌하게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드레자에게 접근했다. 무수한 정권이 쏟아졌다.

“타아아아앗!”

드레자도 애써 피하려 했지만 사방이 디스펠 스트레이트의 기운으로 회오리치고 있어 비행 제어가 쉽지 않았다. 원래의 교묘한 비행은 전혀 보이지 못한 채 또 일격을 허용했다.

콰앙!

폭발과 함께 드레자는 이번엔 허공에서 몇 바퀴나 굴러 버렸다. 이번에도 방어 마력을 무식하게 집중해 간신히 치명타는 피했지만, 덕분에 지독한 두통이 엄습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한 거지?”

마력과 오러의 융합이라니? 도대체 짐작도 가지 않았다. 평생 매진해 온 마법의 지식을 총 동원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대체 고대인들은 무슨 수로 저런 걸 만든 거냔 말이다!”

“아직도 그 소린가?”

레펜하르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 굳이 정정할 필요도 없지.”

무시한 채 레펜하르트가 공세를 더했다. 계속해 디스펠 스트레이트를 날려 주위의 마력 기류를 훼방하며 접근해 파해 마법이 섞인 연격을 날린다.

화려한 곡예비행이 막힌 드레자는 더 이상 나비가 아니었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겨우겨우 방어막으로 버티고 있으니, 오히려 풍뎅이 같다고 해야 할까?

“크윽, 내가 어찌 이런 수모를!”

분통이 터져 드레자가 한탄을 흘렸다. 그런 노인의 눈앞에 거대한 근육질 상체가 나타났다. 태양을 가리며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그 모습은 그야말로 사신과도 같아 보였다.

“죽어라, 마법의 극에 달한 자여!”

허공에서 자세를 잡으며 레펜하르트가 정권 찌르기를 날렸다.

퍼어어엉!

파문과 함께 우렁찬 폭음이 메아리치며 허공을 가득 메웠다. 동시에 드레자가 방어 결계째로 지상을 향해 사정없이 낙하했다.

마치 한 줄기 유성처럼, 지상으로 떨어져 가며 드레자가 처절한 비명을 흘려댔다.

“으아아아아…….”

☆ ☆ ☆

저 멀리 숲 속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유성처럼 떨어진 드레자가, 정말 유성이라도 된 듯 지면과 충돌해 거대한 폭발을 일군 것이다. 사람 몸뚱이가 떨어진 광경치고는 참 스케일 큰 모습이지만 레펜하르트는 심드렁했다.

‘어차피 자주 보는 광경인데, 뭘.’

전생에도 제이드니 테스론이니 날릴 때마다 저랬었고, 현생에 와서도 바나텔이니 제라드가 연출했던 모습이니 놀랄 것도 없다. 초인에겐 초인 나름대로의 상식이 있달까?

태연하게 레펜하르트는 비행 주문을 운용해 드레자가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지상으로 돌아오니, 숲 한쪽이 크게 크레이터가 파여 있고 나무들이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꺾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음?’

크레이터 가운데에는 한 노인이 흙투성이가 되어 처박힌 채 신음하는 중이었다.

“크, 크으윽!”

상공 수백 미터에서 추락, 그것도 그냥 떨어진 것도 아니고 짐 언브레이커블에 격추당한 추락이다. 그런데도 드레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내, 내가…… 제라드도 아니고 그 제자에게까지…….”

“역시 살아 있었군.”

테스론이 레펜하르트를 상대하며 그랬던 것처럼, 정신 고양을 극에 다다르도록 익힌 드레자가 그 순간 무의식중에 각종 보호 마법과 관성 제어 마법을 발동해 몸을 지킨 것이다.

“뭐, 9서클 마스터쯤 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이토록 어마어마한 파괴를 일구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충격을 외부로 돌리고 흘리고 흡수한 것이다. 실제로 드레자가 입은 타격은 기껏해야 집 지붕에서 떨어진 정도?

그렇지만 일개 노인은 지붕에서도 잘못 떨어지면 죽는다.

“크윽, 크으으…….”

끝없이 신음을 흘리며 드레자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연신 비틀거리는 모습이 실로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왠지 불쌍한 노인 괴롭힌 기분마저 드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저 불쌍해 보이는 노인은 마음만 먹으면 안타레스의 수천 병력도 몰살시킬 수 있는 존재.

‘살려 둘 순 없지!’

마음을 굳게 먹으며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말아 쥔 채 드레자에게 다가갔다. 드레자가 맥 빠진 음성을 흘렸다.

“제기랄…… 제라드 본인도 아니고 고작 제자 놈에게…….”

아직 드레자의 마력이 상당히 남아 있었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미 승패가 결정 났음을 잘 알고 있었다.

드레자의 가장 강력한 일격, 임페리얼 버스터조차도 레펜하르트는 그저 제자리에 서서 버틸 수 있다. 심지어 그러고도 지치지도 않는다. 반면 드레자는 더 이상 레펜하르트의 일격을 막을 수가 없다.

차갑게 안색을 굽히며 레펜하르트가 심판을 내리듯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그대의 손에 소중한 생명이 몇이나 죽었다. 대마법사 드레자여, 이제 그대에게 안타레스의 핏값을 받겠다!”

드레자는 고개를 축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저 끝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

“고작 제자에게…… 제라드 본인도 아니고 고작 제자에게…….”

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솔직히 좀 불쌍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레펜하르트는 애써 무시하며 살기를 끌어 올렸다.

“금방 끝내 주겠다.”

그때였다.

침울해 하는 드레자의 등 뒤로 기이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고작 제자에게…….”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 빛이 폭사했다.

“난 빌어먹을 그놈의 제자에게까지 이 수법을 써야 하는가!”

드레자의 어깨 위로 빛의 기둥이 솟았다.

빛이 주위를 찬란히 밝히며 가공할 기운을 내뿜었다. 단지 그 기운만으로 돌풍이 일고 푹 파인 크레이터, 그 갈색 대지가 새까맣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쓰러진 나무들이 급속도로 시들며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를 땅 위로 떨궜다.

레펜하르트가 기겁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지?”

처음에는 무슨 사기死氣인 줄 알았다. 가공할 죽음의 기운이 펼치는 광경과 흡사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내 깨달았다. 저것은 죽음의 기운이 아니었다.

‘그냥 마력장이잖아, 저거?’

드레자의 마력장, 그것이 너무도 출력을 높여 발현되는 나머지 현실에 영향을 줘 사기와 흡사한 현상을 보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고출력의 마력이었다. 이 정도면 전생의 그와도 맞먹는 수준이다. 그냥 단순히 레펜하르트 본신의 마력이 아닌, 사방신의 유물로 출력을 높인 마왕 레펜하르트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말도 안 돼! 저자가 예전의 나보다도 순수 마력량이 높다고?’

전생의 그는 인간의 한계에까지 다다른 마력을 지닌 자였다. 이론상 인체는 그 이상의 마력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 누구보다도 레펜하르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나조차도 사방신의 유물이 있기에 겨우 그 정도 순간 출력을 낼 수 있었는데.’

레펜하르트는 혼란스러웠다. 드레자에게 저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면, 결코 전생에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다.

가공할 힘을 뿜어내며 드레자가 한스러운 목소리를 이었다.

“부끄럽구나, 제라드도 아닌 그 제자에게까지 전력을 다해야 하다니…….”

“비장의 수를 감추고 있었나, 늙은이!”

당황한 레펜하르트를 향해 드레자가 허무한 눈빛을 보냈다. 수치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마법의 극에 달한 노인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뭘 그리 놀라느냐? 설마 네놈은 내가 그 정도 수준으로 네 사부와 붙으려고 한 줄 알았느냐?”

☆ ☆ ☆

오로지 제라드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30년을 비행에 매달린 드레자였다. 죽어라 수행한 결과 어느 정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는 자신도 생겼다.

하지만 문제가 전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진정한 강점은 그 패도적인 공격이 아니지 않은가?

뭔 수를 써도 무너지지 않는 불굴의 육체야 말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진정한 강함이다.

아무리 잘 피해 봐야,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그것은 승리가 아니다. 그저 또 다른 비참한 도주일 뿐.

“어느 정도 위력이어야 짐 언브레이커블을 부술 수 있을지 연구하고 또 연구했지…….”

레펜하르트의 생각과 달리 드레자는 마법사 자격이 충분했다. 결코 6중첩 시절의 제라드를 기준으로 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드레자가 그렇게까지 생각이 짧았다면 애초에 30년씩이나 비행에 매진했겠는가?

그는 역대 권왕의 기록을 통해 제대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강함을 파악하고 있었다.

9중첩 캘러미티 혼, 무신의 경지에 든 것은 초대 권왕뿐이지만 그 후로도 대대로 역대 권왕들은 7, 8중첩의 경지에는 무난히 들었다.

대륙을 샅샅이 털어 찾아낸 천재 중의 천재가, 오직 자신의 재능에 100퍼센트 들어맞는 무자비한 단련을 계속한 후 태어나는 것이 역대 권왕이란 존재다. 짐 언브레이커블치고 약한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나마나 제라드도 8중첩은 되었을 거라 예상했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

8중첩 캘러미티 혼을 터득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은 그야말로 괴물 그 자체다.

단순한 육체만으로도 블레이드 오러나 6서클 이상의 마법이 아니라면 부상조차 입힐 수 없다. 게다가 저기에 스파이럴 가드가 가세되면 진정한 언브레이커블, 절대 깨지지 않는 철벽이 된다.

아무리 계산해도 현 9서클 마법으로는 제라드를 부술 방법이 없었다. 가장 자신 있는 마법, 임페리얼 버스트조차도 제라드가 시전하는 스파이럴 가드라면 충분히 갈아 버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제라드, 그 괴물이 편법이 통하는 놈도 아니고…….”

역사 속에서는 스파이럴 가드의 회전수에 맞춰 공격하는 식으로 재미를 본 경우가 제법 있었다. 실제로 레펜하르트와 상대했던 그린드 왕국의 오러 유저, 르카완 역시 그런 경우였고.

그러나 이는 제라드쯤 되면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8중첩 캘러미티 혼의 경지에 든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은 더블 스파이럴 가드라는 새로운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 양방향으로 회전하는 저 회오리 앞에선 회전수를 맞추는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연구하면 할수록, 왜 역대 대마법사들이 6중첩 이후의 권왕을 상대로 맥을 못 췄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아무리 교묘하게 마법을 연계하고 연동하고 상황을 제어해도 압도적인 힘, 가로막는 모든 것을 깨부수는 그 압도적인 돌진력 앞에서는 무용이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기에 가장 완벽한 상태랄까?

“결국 해답은 하나밖에 없었지. 어떤 기교도 통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순수한 힘으로 부딪칠 수밖에…….”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드레자가 양팔을 걷었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저건?’

드러난 노인의 앙상한 두 팔, 그 쭈글쭈글한 피부 위로 복잡한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없던 붉은 빛의 문신이었다.

드레자가 한숨을 쉬며 허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걸 만들었느니라. 순간 마력 증폭 술식, 천신天神의 회랑. 빌어먹을 제라드의 육체를 부수려면 오직 마력의 출력을 높여 마법의 위력 자체를 높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으니까…….”

2

엄청난 마력을 뿜어내면서도 드레자는 전혀 의기양양한 기색이 아니었다.

“후우, 제라드도 아닌 그 제자에게 전력을 다해야 한다니…….”

하늘을 올라다보며 한탄하는 노안에는 오히려 심할 정도의 패배감이 머물러 있었다.

딱히 드레자는 비장의 수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제라드의 제자를 상대로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곧 제라드보다 자신이 밑임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상황이 밀릴 때에도 오기로 버티며 이 수법을 쓰지 않았다.

천신의 회랑을 쓴다는 것 자체가 드레자 입장에서는 지독한 수치이자 패배인 것이다.

“제라드가 정말 제자 하나는 잘 뒀군. 아니, 그러고 보면 역대 권왕치고 제자 못 둔 양반은 없었지.”

우울해 보이는 드레자의 전신에 빛나는 붉은 문양, 그걸 보며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어, 저건…….’

갑자기 나타난 드레자의 저 문신을 그는 바로 알아보았다. 마학에선 일종의 외도外道로 취급받는 방식, 바로 문신 술식법이었다.

가끔 마법사 중 지닌 실력에 비해 연산력이 달려 외부의 보조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 초짜 마법사들이 수정구가 달린 지팡이를 쓰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하지만 수정구 지팡이 정도로는 고도의 마법 술식을 넣을 수가 없다. 다른 도구를 써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신외지물인 이상 외부에 그려진 술식은 어디까지나 보조 이상이 아니었다.

한 3서클 정도만 되어도 외부 도구를 통해 술식을 보충하는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거기서 200년 전의 마라그랑드 학회 소속 한 마법사가 좀 특이한 방식을 생각해 냈다.

-신외지물이라 소용없다고? 그러면 신내지물(?)은 괜찮다는 것 아닌가?

마법사 본인의 피부에 직접 문신을 새겨 부족한 술식을 보충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실제로 마법사 중에는 마법 시료를 통해 임시적으로 손등이나 손바닥에 마법진을 그려 위력을 증폭시키는 경우가 이미 있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이라 땀만 흘려도 이내 마법진이 흩어질 뿐이니 크게 퍼지진 않았지만, 문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거의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드레자가 출력 증폭 술식을 쓰나 했더니…….’

순간 마력량을 증폭시키는 술식 자체는 레펜하르트도 쓰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의 마법 모두 저 술식을 통해 발현한 것이었다. 안 그러면 아무리 효율적으로 구사한다 해도 드레자의 저 어마어마한 마력량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는 레펜하르트가 마력만 낮을 뿐, 경지는 이미 10서클에 달하기에 가능한 경우였다.

비록 육체가 담은 마력은 낮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그 몇 배나 되는 마력도 충분히 감당할 만큼 단련된 상태기에 저 술식을 쓸 여유가 있는 것이다.

반면 드레자는 경우가 다르다. 그는 9서클에서 여전히 정체되어 있는 상태, 그의 영혼으로는 순간 마력량을 증폭시킬 술식을 유지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렇지만 저렇게 외부에 술식을 짜고 자기는 발동만 시키는 방식이라면…… 그래, 가능하겠군.’

저 정도로 복잡한 술식이라면 잉크로 몸에 그리는 정도론 어림도 없다. 고위 술식일수록 정교함이 극에 달해 아주 사소한 오차만으로도 모든 제어식이 박살 난다. 임시로 그려 봤자 조금 땀만 흘려도 파해될 것이다.

반면 문신이라면 아무 문제 없이 제대로 술식을 구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신 술식법을 시도했다 이거군. 그래, 이해는 가네.’

그렇다. 이해는 간다.

하지만…….

‘진짜 사부의 죄가 크구나, 쯧쯧.’

레펜하르트는 알고 있었다. 겉보기엔 좋은 점밖에 없어 보이는 저 문신 술식법이 왜 마학에서 외도 취급을 받는지.

분명 문신 술식법은 일견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수법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1, 2년도 못 버티는 쓸모없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사람의 몸은 계속 변한다. 살이 찌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며 시간이 흐르며 계속 늙게 마련이다.

문신 자체야 10년이고 20년이고 버틸 수 있겠지. 그러나 문신 술식법은 워낙 복잡해 조금만 형태가 늘어나거나 줄어들면 이내 망가져 버리게 된다. 겉보기엔 똑같아 보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피부의 탄력이 줄거나 하면서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효력을 잃는 것이다.

그런 만큼 늙을 대로 늙은 드레자는 사실 문신 술식법을 실패해야 정상이었다. 쭈글쭈글하고 탄력을 잃은 피부에 그려 놓은 문신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저 양반은 문신 술식이 제대로 작동을 하고 있단 말이지?’

즉, 드레자는 저 문신 술식을 늙은 현재의 피부에 맞춰서 새로 새겼다는 의미다!

‘저 나이에 뭔 고생이야, 그게…….’

괜히 뒷골목 건달들이 근성을 보인다며 등짝에 사자나 호랑이 그림 새기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바늘로 한 땀, 한 땀 생살을 찔러 그걸로 그림 하나를 그리는데 튼튼한 건달들조차 긴장과 고통으로 며칠씩 앓아눕는 일이 예사다.

‘슬슬 손자 재롱 보며 늘그막을 즐길 나이에, 죽어라 비행 연습하고 생살에 바늘 찔러 가며 살아왔단 말이야?’

게다가 저 술식의 성능을 보니 결코 8서클 이하의 마법사가 손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절대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었다.

말인즉슨 드레자는 자기 손으로 직접, 한 땀 한 땀 눈물지어 가며 자기 피부에 저 술식을 일일이 새겨 넣었다는 소리인 것이다. 실제로 술식이 발하는 마력이 오직 신체 정면, 손 닿는 부위에만 그려져 있어 레펜하르트의 추측을 받쳐 주고 있었다.

한 노인이 있다.

낮에는 열심히 비행 연습하고 밤에는 자기 방으로 돌아온다.

아무도 없을 때 홀랑 벗고 바늘과 마법 시료를 꺼낸다. 그리고 그 앙상한 늙은 피부에 한 땀, 한 땀 바늘을 찔러 댄다.

마취제도 쓸 수 없다. 정신이 흐려지면 술식을 제대로 새길 수 없을 테니 분명 맨정신으로 자기 피부를 뚫어 댔음이 분명하다.

……상상해 보니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다.

드레자가 저토록 우울해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저 고생을 해 놓고도 제라드는 고사하고 그 제자에게 밀려 결국 밑천을 전부 꺼내고 말았으니,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하아, 부끄럽도다…….”

한탄하며 드레자가 허공에 손짓을 했다. 폭염이 일어나며 레펜하르트를 덮쳐 갔다. 6서클 폭렬 주문, 프로미넌스였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와는 위력이 완전히 달랐다.

콰콰콰쾅!

몇 배나 되는 폭압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두들겼다.

‘크윽!’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며 물러섰다.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로 어떻게 방어는 했지만, 아까와 달리 자세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역시 출력이 높아진 만큼 개개의 마법도 위력이 폭증했어.’

이래서야 아까처럼 몸으로 때우며 돌진하는 것은 무리였다. 육신은 지켜도 폭압에 밀려 버린다!

“허허, 오직 제라드만을 바라보고 만든 수법이었거늘…….”

여전히 우울한 얼굴로 드레자가 마법을 이었다. 전격과 어둠의 구슬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얼마나 고출력인지 전격이 날아오며 주위의 대기가 방전되어 파직거린다. 보고 있는 레펜하르트도 우울해질 위력이었다.

“안 되겠다!”

몸으로 때우기 벅찰 지경이라 레펜하르트는 옆으로 뛰어 공세를 피했다. 그때 어둠의 구슬이 허공을 가르며 그를 쫓았다.

또다시 폭음과 함께 레펜하르트가 허공으로 날리며 몇 바퀴나 정신없이 굴렀다.

“크윽!”

간신히 자세를 잡아 착지했지만 전신이 욱신거린다. 신음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드레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다시 양손에 불꽃과 냉기의 마법을 머금은 채 그가 조용히 뇌까렸다.

“그날 이후, 이런 굴욕감을 또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이여, 너희는 끝까지 나를 패배감에 빠지게 하는구나…….”

☆ ☆ ☆

더 이상 드레자는 날파리처럼 정신없이 날아다니지 않았다. 두 발을 땅에 붙인 채 강력한 마법만으로 레펜하르트를 상대했다.

드레자가 그토록 현란한 비행 솜씨를 보인 것은 레펜하르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제라드를 상대하기 전, 짐 언브레이커블의 돌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한 연습일 뿐이다.

출력 증폭 술식, 천신의 회랑까지 쓴 지금은 굳이 추하게 비행을 지속할 의미가 없다. 그저 대마법사답게 오롯이 서서 강대한 마법을 난사할 뿐!

“플라즈마 볼, 익스플로전, 파이어 스트라이크.”

온갖 5, 6서클 주문이 시동어만으로 발동되어 천지 사방을 뒤덮으며 휘몰아쳤다. 말만 5, 6서클이지, 증폭된 현재 드레자의 주문은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7, 8서클에 맞먹는 위력이었다.

쾅! 쾅! 콰쾅!

무자비한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며 거목과 바위가 사정없이 허공으로 날렸다. 휘몰아치는 폭풍이 숲 전체를 거칠게 뒤흔들었다.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로 몸을 감싼 채 레펜하르트는 정신없이 공세를 피했다.

“큭! 크윽!”

전신을 빈틈없이 방어하는데도 육중한 통증이 연신 몸을 때렸다. 직격타를 피했음에도 폭압에 휩쓸려 도저히 반격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지금 드레자가 보이는 위력은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와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10서클을 몰라서 안 쓸 뿐이지 9서클 이하 주문으로 상대한다면 필적할 것이다.

‘젠장, 이 정도면 정말 사부도 상대할 수 있겠는데? 오직 사부만 노리고 절치부심했다더니…….’

레펜하르트는 드레자를 너무 무시했다. 그는 분명 이 시대의 절대자 중 한 명이고 검성 바나텔, 권황 제라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궁극의 마법사인 것이다.

그런 드레자가 제라드를 상대하기 위해 어설프게 준비했을 리가 없거늘!

“소용없다, 제라드의 제자여. 천신의 회랑은 네 사부를 상대하기 위해 마련한 것, 네 녀석 정도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정신없이 공세를 피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드레자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딱히 오만한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담담하게 말하는 어조일 뿐.

“파이어 필러.”

불꽃의 기둥이 레펜하르트의 정수리를 노리고 작렬했다. 허겁지겁 피한 자리에 가공할 불길이 내리꽂혀 열기의 회오리를 생성했다. 얼마나 열기가 강한지 땅거죽이 녹아 회오리에 휩쓸리며 돌기둥을 형성할 정도였다.

그 돌기둥이 바로 다음 마법의 연계가 되었다.

“록 블라스터.”

돌기둥이 박살 나며 그 파편 하나하나가 무수한 돌의 비가 되어 쏘아졌다. 그냥 돌의 비라면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에겐 평범한 비나 마찬가지겠지만, 저 석탄 하나하나에는 가공할 드레자의 마력이 깃들어 있다.

타타타타탁!

콩 볶는 듯한 소리와 함께 레펜하르트는 순식간에 수십 방을 얻어맞았다. 놀랍게도 맞은 자리마다 붉게 멍이 들어 있었다.

오러를 운용해 상처를 다스리며 레펜하르트는 감탄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눈으로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거참, 명색이 9서클의 마스터가 외도를 걸으면서까지 강해지려 하다니…….’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외부 술식의 도움을 받는 것은 수치 중의 수치다. 자기 실력이 떨어진다면 기량을 더욱 키울 생각을 해야지, 도구의 힘을 빌리려 하다니?

순간 마력량을 증폭해 출력을 높인다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순간 마력량을 폭증시킨다고 총 마력량이 늘어나진 않으니, 저대로 마법을 써 대면 평소의 몇 배나 빨리 마력이 고갈되는 것이다.

물통의 물은 그대로인데 찻잔 대신 바가지로 퍼내는 형국이랄까? 같은 위력이라지만 전생의 레펜하르트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드레자를 폄하할 수도 없었다.

그는 9서클의 마스터, 현 대륙의 마학상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경지였다. 극한까지 다다라서도 제라드를 이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과연 드레자가 얼마나 절망했을까? 심지어 그는 더 이상 젊지도 않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 아닌가?

그런데도 드레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을 조합하고 연구하고 수행해 어떻게든 제라드를 누를 방법을 강구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저 순간 마력 증폭 술식, 천신의 회랑.

마법사로서는 어리석은 선택일지도 모르나 그로 인해 분명 드레자는 짐 언브레이커블과 맞상대할 힘을 손에 얻었다.

방식보다는 그 소름 끼칠 정도의 집념과 열정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대단하긴 분명 대단하지만…….’

레펜하르트도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고 마냥 감탄하다 죽어 줄 수야 없지!’

☆ ☆ ☆

상대의 주위를 빠르게 돌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영 기회가 오질 않았다.

몇 배나 출력이 오른 드레자의 마력은 6서클 이하의 순간 시전 마법만으로도 레펜하르트의 돌진을 막을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레펜하르트도 무작정 달려들지 못하고 주위를 돌며 어떻게든 공세를 피해야 했다.

또한, 기껏 달라붙어도 일격에 드레자의 방어막이 부서지지 않았다. 증폭된 드레자의 순간 마력량은 공격뿐 아니라 방어의 위력 역시 몇 배로 높인 것이다.

이래서야 기존 방식대로 싸울 수밖에 없다. 세밀하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기회를 노려 승부를 결정짓는, 평범한 대마법사 대 오러 유저의 방식으로.

“짐 언브레이커블엔 그 정도의 세밀함이 없지.”

느긋하게 뇌까리며 드레자는 계속 레펜하르트를 향해 마법을 쏘아 댔다. 확실히 레펜하르트가 익힌 무술로는 드레자의 폭격을 뚫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 레펜하르트에겐 마법도 있다.

가공할 마법이 폭격을 해 대지만 비록 출력만 높아졌을 뿐 마법 자체는 여전히 드레자의 경지 그대로였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스펠 펀치!”

상황을 지켜보다 용케 빈틈을 발견하고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날렸다. 디스펠의 해제력과 정권의 파괴력이 합쳐져 뇌격이 박살 나 버렸다.

“타앗!”

그 틈에 돌진했다. 땅이 파일 정도로 바닥을 박차며 유성처럼 단숨에 드레자의 좌측에 달라붙은 뒤 마력장 위로 주먹을 가져간다.

“제로 임팩트!”

방어막을 격한 채 충격을 관통시킬 작정이었다. 그런데, 제로 임팩트의 충격이 마력장을 뚫지 못하고 도중에 소멸해 버렸다.

“에어 봄!”

드레자가 풍압 주문을 날리니 도로 몸이 밀려 허공에 떠올랐다.

발 디딜 데가 없으니 일순 허공에 몸이 고정된다. 레펜하르트가 막 기격포를 날려 몸을 튕기려던 찰나, 드레자가 반격했다.

“플라즈마 블래스트!”

폭음과 함께 레펜하르트가 열기에 휩싸여 날려 갔다. 숲 저편에 처박혀 굉음을 울리는 당대의 권왕을 향해 드레자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제로 임팩트라면 나도 알고 있느니라. 매질의 진동을 통해 일순 충격을 관통, 방어를 무시하고 내부에 타격을 입히는 수법이지. 비균질 결정 속성 마력 방어장이라면 깔끔히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침투경 계열 기술인 제로 임팩트는 분명 단단한 벽도 관통해 그 충격만 고스란히 안쪽으로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침투경이라도 젤리를 때려 충격을 관통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말투라, 몸을 일으키며 레펜하르트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쯤은 나도 안다고. 그냥 혹시나 해서 써 본 거지.’

전생 때 레펜하르트도 똑같은 수법으로 테스론의 제로 임팩트를 막았었으니 모를 리가 없다.

‘역시 연구 하난 철저히 했군.’

저 정도면 드레자는 현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술을 전부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긴, 짐 언브레이커블이 언제 기술 감추는 무문이던가? 어차피 알아도 못 막는 수법뿐이다 보니 사방팔방 많이도 퍼트려 놨었다. 정보 입수하기도 참 쉬웠겠지.

“짐 언브레이커블의 모든 것을 연구한 나다. 네 녀석의 아티팩트 탓에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긴 했다만, 그렇다 해도 감당치 못할 정도는 아니니라!”

다시 드레자가 손을 쓰기 시작했다.

“심연의 불꽃, 인페르노!”

드레자의 화염이 넘실거리며 레펜하르트를 향해 수십, 수백 개의 불길의 손을 내뻗는다. 마치 지옥에 빠진 이가 정신없이 손을 내미는 듯한 섬뜩한 광경, 바닥을 박차 허공으로 피하며 레펜하르트가 반격 술식을 펼쳤다.

“동토의 바람이 대기를 식힌다! 프리즈 스톰!”

냉기의 바람이 인페르노의 열기를 뒤덮으며 화기를 가라앉혔다. 도로 착지하며 레펜하르트가 우권右券을 뻗었다. 황금빛 섬광이 허공을 꿰뚫었다.

“캘러미티 혼!”

아까는 드레자의 곡예비행 때문에 도저히 캘러미티 혼을 쓸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제라드의 캘러미티 혼을 피하기 위해 그토록 비행 연습을 한 드레자가 아니던가? 레펜하르트의 실력으로는 격추는 고사하고 스치기도 힘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제자리에 서 있으니 충분히 구사할 수 있다!

콰아아아앙!

섬광이 황소의 뿔처럼 날카롭게 가공되어 드레자를 직격하며 웅장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연이 수십 미터나 피어오르고 후폭풍에 의해 순식간에 주위가 싹 쓸려갔다. 실로 엄청난 폭발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오히려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체엣…….”

대단한 위력이긴 하지만 지금 그가 날린 것이 6중첩 캘러미티 혼이란 걸 감안하면 지나치게 파괴력이 적었다.

과연 드레자가 폭연 속에서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섬뜩하긴 했다만 이 정도론 무리니라, 제라드의 제자여.”

‘세상에, 이것도 위력이 부족한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현재의 권마합신 캘러미티 혼은 순수한 6중첩 캘러미티 혼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아니, 마력과 융합된 상태이니 마법 방어장을 상대로는 오히려 더 큰 파괴력을 보인다.

그런데도 안 통한다…….

“제라드라면 모를까, 제자 놈의 캘러미티 혼 정도를 못 막을 것 같으냐?”

워낙 고출력의 마력, 그로부터 비롯된 드레자의 마력장은 6중첩 캘러미티 혼조차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암담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뇌까렸다.

“저 정도면 정말 사부와의 대결도 충분히 승산이 있겠군.”

방어 결계 대부분이 날아간 걸 보면 아마도 저게 한계인 것 같지만, 적어도 제라드의 기격탄이나 기격포 정도는 가볍게 막을 위력이었다.

캘러미티 혼이나 직접 돌격은 곡예비행으로 무조건 피하고, 원거리 공격은 방어장으로 막아 내며 반격의 기회를 잡는다. 이것이 드레자가 세운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 공략 방법이었던 것이다.

‘바나텔도 그렇고 드레자도 그렇고, 어째 둘 다 스타일이 비슷하군. 역시 사부 탓인가?’

보통의 검성이나 대마법사라면 저런 식으로 강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강함을 추구했겠지.

하지만 제라드와 얽혀 버린 저들에겐 선택지가 없다.

“아케인 실드, 포스 필드, 안타니악 배리어! 에리어 오브 크리스탈!”

부서진 방어 결계를 다시 발동해 전신에 두르며 드레자가 반격했다.

“쓸데없는 저항 말고 얌전히 목을 내놓아라!”

온갖 마법이 폭풍이 되어 레펜하르트를 휩쓸었다.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로 몸을 보호하며 그도 반대 속성 마법으로 반격해 폭풍의 흐름에서 벗어났다.

틈을 노려 레펜하르트가 또다시 최강의 일격을 날렸다.

“캘러미티 혼!”

안 통하는 건 알지만 그나마 지금 가진 기술 중 가장 파괴력 높은 것이 이 권마합신 6중첩 캘러미티 혼뿐이니, 그저 이것만 믿을 수밖에!

“소용없다!”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드레자가 방어막을 굳혀 캘러미티 혼을 막아 냈다. 물론 그 대가로 방호 결계 대부분이 날아갔지만 대마법사다운 연산력으로 순식간에 방어장을 재구축한 뒤 다시 폭렬 마법을 날린다.

콰콰쾅!

기껏 상대의 방어장을 흔들어도 뒤이어 날아오는 마법때문에 후속타를 날릴 수가 없다. 정신없이 밀리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크으, 진짜 대책 없네…… 인피니티 게이트만 쓸 수 있었어도 어떻게 해 보겠는데.’

10서클 대이적 마법, 인피니티 게이트는 상대의 위력이 어떻든 무조건 막을 수 있는 무적의 방어법이다.

사실 방어라 하기도 우습기는 하다. 방어, 즉 막는 것이 아니라 문 열고 딴 동네로 보내 버리는 수법이니 날아오는 게 화살이건 탄환이건 우주에서 떨어지는 운석이건 다 똑같다. 위력 자체가 몽땅 타 차원으로 향하니 후폭풍 같은 것도 전혀 없다.

비록 3회 한정이긴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레펜하르트는 모종의 이유로 10서클을 쓸 수가 없었다.

10서클을 구사하려면 사방신의 유물과 동기동조화한 영역 전부를 총동원해야 하는데…….

“젠장, 보름 뒤 준비하느라 죄다 술식을 묶어 놨으니…….”

현재 그는 9서클 주문을 쓸 정도의 마력만 빼고 모든 동기동조화 영역의 마력을 다른 술식에 투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전쟁 좀 오래 끌더라도 자유롭게 풀어 놓는 건데…….’

애초에 레펜하르트가 가늠한 드레자의 실력은 빛의 마도사 제이드와 비슷한 수준, 그 정도라면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그런데 드레자가 저 정도일 줄이야?

‘크,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마법의 극을 초월한 자랍시고 큰소리나 뻥뻥 쳤으니…….’

새삼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뭐, 후회해 봐야 이미 때는 늦은 것.

어떻게든 지금 있는 것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타아앗!”

애써 전의를 끌어 올리며 다시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3

분명 레펜하르트는 사정없이 밀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드레자가 우위임을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쉽게 쓰러지지도 않았다.

‘이것 참, 아무래도 예측했던 것과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는데?’

드레자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힘 차이가 있으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짐 언브레이커블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레펜하르트는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처럼 멧돼지 전법으로 드레자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교파 오러 유저처럼 정교한 공방으로 치고 빠지는 전법을 쓴다.

‘권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역대 검성의 전법에 가깝군.’

물론 레펜하르트가 역대 검성처럼 교묘한 기술을 쓰는 것은 아니었다. 체술 자체는 여전히 짐 언브레이커블의 그것이다.

문제는 저 가공할 마법 실력이었다.

교묘한 마법 술식으로 화력을 억제해 피하거나 또는 비껴 흘리며 오히려 반격을 해 온다. 그 수법이 마법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교하고 세밀하다.

9서클 마스터인 자신이 봐도, 레펜하르트의 마법은 결코 그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운용이나 술식 제어 등은 그보다 훨씬 뛰어났다. 만약 상대가 마법사였다면 자괴감에 빠졌을 정도였다.

‘정말 무시무시한 기물이로다…….’

아티팩트의 힘이라 착각하는 드레자조차도 공포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나마 아직 그가 우위에 차지한 것은 모두 마력량 덕.

‘성능은 엄청나지만 부여된 마력량은 그냥 상식적인 수준이군.’

현재 레펜하르트의 마력 수준은 딱 흔한(?) 대마법사 수준이었다. 일개 마법사가 보기엔 어마어마하겠지만 현재의 드레자에 비하면 상당히 낮다.

‘마력이 비슷했으면, 체술은 고사하고 그냥 마법만으로도 밀렸겠어.’

드레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저런 아티팩트는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을, 단숨에 9서클의 마스터인 그와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 올려 주는 아티팩트라니?

“더 이상 욕심 부릴 때가 아니군…….”

당한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기가 차겠지만, 이제까지 드레자는 상당히 조심스레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아티팩트가 부서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오직 레펜하르트의 상체, 홀랑 벗고 있어 아티팩트가 없음이 분명한 부위에만 위력을 집중해 마법을 썼다.

하지만 정작 저 성능을 계속 보고 있자니 아예 없애 버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어차피 드레자는 마법의 극에 달한 자, 저런 것 없이도 마법사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선 자다. 굳이 저런 기물을 남겨 후환을 만들 이유가 어디 있을까?

“연구가 문제가 아니야, 저런 끔찍한 물건이 세상에 나오면 곤란하지.”

호기심에 죽고 사는 마법사답지 않은 태도지만, 옛이야기를 보면 마법사가 호기심에 아무데나 끼어들어 사고치고 이기적으로 제 한 몸만 쏙 빼내 달아나는 일이 허다하다. 마법사는 호기심만큼이나 보신保身 감각 역시 강한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던 저울추가 결국 보신 쪽으로 기울었다.

“확실하게 박살 내 버려야겠다!”

☆ ☆ ☆

드레자의 마법이 점점 더 위력이 커져 갔다.

아까까지는 그래도 협소하게 위력을 좁혀 마법을 날렸기에 그럭저럭 피할 수 있었는데, 이젠 아예 광범위하게 펑펑 난사해 버린다. 아예 이 일대를 통째로 날려 버리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공세를 피하며 레페하르트가 혀를 찼다.

‘저 양반. 아직도 마력이 안 떨어졌나?’

이러다간 오히려 자신이 먼저 마력이 고갈될 판이었다. 사실 마력 마구 퍼 쓰고 있는 건 레펜하르트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출력 증폭 술식을 통해 순간 마력량을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드레자 타박할 자격이 없었달까?

뭐, 드레자도 느긋한 입장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위력을 조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도 심해진다는 뜻.

‘이거, 아무래도 마력이 슬슬 바닥나는 게 느껴지는데.’

기가 막혀 드레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도 저놈의 짐 언브레이커블은 아직 힘이 남았냐?’

제라드의 제자는 아직도 용케 두 발로 서 있었다.

분명 사정없이 당하는 중인데도 황금빛 오러의 빛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움직임도 어째 점점 더 노련해진다. 지친 것은 틀림없지만, 기량 자체는 오히려 더 오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제라드의 제자에게 비장의 수를 쓰는 걸로 모자라, 박빙의 승부를 하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럴 수야 없지!’

드레자가 손을 휘두르며 전투 방식을 바꿨다.

“아홉 머리, 하늘을 찔러 천권의 위세를 얻는다! 히드라즈 나인 헤드!”

거대한 용의 형상을 한 아홉 줄기 마력의 빛이 솟구쳤다.

동시에 아홉 속성의 마법을 연동하는 이 주문은 9서클 연계 마법의 극의라 할 수 있었다. 전혀 다른 속성의 아홉 마법이 생물처럼 날뛰며 사방에서 덮쳐 가니, 기교가 뛰어난 오러 유저라도 휘말려 혼란스러워하다 결국 날카로운 히드라의 이빨에 당할 뿐이다.

‘제라드 놈이라면 먹히지 않겠지만…….’

히드라의 이빨이 아무리 날카로워 봤자 어차피 제라드는 못 씹는다. 이빨 빠진 대가리가 하나든 아홉이든 무슨 상관인가?

‘저놈에겐 먹히겠지!’

과연, 사방의 공세에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극단적으로 창백해졌다.

“크으윽!”

아홉 개의 용 머리가 불규칙적인 궤도를 그리며 허공을 가득 감싼다. 레펜하르트도 허겁지겁 회피했지만 이내 불꽃과 뇌격의 머리가 뱀처럼 구불거리며 뒤를 쫓는다.

“냉기, 불을 사르고 대지, 번개를 그 속에 삼키노라!”

허겁지겁 레펜하르트가 반전 속성 마법으로 공격의 기세를 꺾었다. 그 틈에 냉기와 대지의 기운을 담은 머리 두 개가 다리 쪽을 노렸다.

“타이푼 킥!”

다급히 허공을 걷어차 레펜하르트가 오러의 소용돌이를 만들며 후속타마저 막았다.

하지만 머리는 아직도 다섯 개나 남아 있다.

크아아아아!

정말 살아 있는 생물처럼 히드라의 머리가 포효하며 레펜하르트를 덮쳤다.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두 팔뚝을 가슴에 겹쳤다. 이렇게 된 이상 그저 방어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

빛의 회오리가 히드라의 머리들과 충돌해 다중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콰콰쾅!

폭발 속에서도 용케 버티고 선 레펜하르트를 보며 드레자가 감탄을 흘렸다.

“굉장하군. 지금 저 녀석이라면 제 사부와 비교해도 방어력은 별 차이 없겠는데?”

하지만 이 수법이 레펜하르트에겐 통하고 제라드에겐 무용인 이유는 단순한 방어력 문제가 아니다.

“그래 봤자 힘이 제 사부에 못 미치지만.”

폭발로 인해 꼼짝도 못한 채 레펜하르트는 연신 신음을 흘렸다.

“큭, 크윽!”

분명 몸을 방어했는데도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아까의 임페리얼 버스터를 몸으로 때웠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여유 부리느라 반격을 안 한 것이지만, 지금은 아예 반격은 고사하고 움직일 여력도 없다.

같은 방어력이라도 제라드는 저 공세를 뚫고 오히려 돌진할 정도의 패도적인 힘이 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초월적 멸세의 홍염, 내 손에 머물지어다…….”

발이 묶인 레펜하르트를 향해 드레자가 느긋하게 주문을 외웠다.

“끝내 주마, 헬 플레어.”

가공할 홍염의 불길이 쏘아졌다. 이미 한 번은 레펜하르트가 튕겨 냈던 9서클 폭렬 주문, 그러나 지금 드레자의 마력이라면 그 위력도 천양지차다. 몇 배나 증폭된 화력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노렸다.

“크으으!”

당황한 레펜하르트가 다급히 상대할 방법을 궁리했다.

마력차가 너무 심해 간섭도 파해도 약화도 불가능하다.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로도 저 마법을 당해 낼 수 없다. 일단 직격당하면 아무리 단련된 이 육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

‘받아쳐 상쇄시키는 수밖에!’

주먹을 허리로 가져가며 정신없이 전신의 오러를 운용한다. 여섯 개의 오러의 고리가 차례로 떠올라 주먹 끝으로 모인다.

아슬아슬하게, 헬 플레어가 직격하기 직전 레펜하르트가 먼저 준비를 끝냈다.

“캘러미티 혼!”

황금빛 오러가 홍염의 불길과 정면으로 마주치며 장대한 폭발을 일궜다.

콰아아아앙!

4

홍염에 휩싸이며 레펜하르트는 몇 번이나 허공으로 날리고 땅 위를 굴렀다. 전신 여기저기가 붓고 찢어져 피투성이였다. 역시 6중첩 캘러미티 혼 정도로는 증폭된 9서클 마법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는 데는 성공했다.

“정말 질기기도 하구나, 짐 언브레이커블.”

심각한 부상 속에서도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드레자가 혀를 찼다.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육체다.

한편, 레펜하르트는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의아해하고 있었다.

‘어라, 이건 대체…….’

분명 다급하게 캘러미티 혼을 날렸다.

‘……그래, 너무 급해서 일단 지르고 봤는데…….’

권마합신이 아니었다. 마력 여유도 없고 시간도 없어 채 술식을 쓰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저 순수한 캘러미티 혼에만 집중했다. 여섯 개의 오러 고리를 이끌어 한 점에 파괴력을 수렴하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기를.

그렇다. 분명히 여섯 개의 오러 고리가 한 점으로 수렴되어 재앙의 뿔이 되었다.

지금 그는 순수한 6중첩 캘러미티 혼을 완벽하게 날린 것이다!

“뭐야, 나 언제 6중첩 됐지?”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전신의 오러가 상당히 빛이 짙어졌다. 생각해 보니 조금 전부터 움직임도 점점 더 좋아지던 것 같다.

‘5중첩을 터득할 때처럼 또 각성을 한 건가?’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며 무릎이 픽 꺾였다.

“윽?”

당황하며 그는 몸 상태를 살폈다.

분명 당시에는 새 경지를 열면서 막 오러도 솟구치고 몸에 힘도 나고 상처도 아물고 그랬었는데…….

‘어라…… 그때랑 달리 별로 몸이 나아지질 않네…….’

각성 시엔 세상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던 놀라운 감각이 전신을 뒤덮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째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리슬쩍 넘어간 느낌이었다.

확실히 이건 각성은 아니다.

원래 무인들이 새로운 경지를 열 때는, 그 순간을 확연히 깨닫게 되는 각성보다는 오히려 이렇듯 자기도 모르는 새 어느새 그 경지에 올라 있는 경우가 더 흔하다.

당시의 레펜하르트는 이미 충분히 수행을 한 상태에서 4중첩 이후의 캘러미티 혼의 이치를 몰라 정체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각성을 통해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반면 지금은 이치를 터득한 채 수행을 쌓다 보니 정체될 일이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다가 전투로 인해 감각이 고조되며 경지에 든 것이다.

어쨌거나 6중첩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현 상황에 레펜하르트는 살짝 당황했다.

‘아무리 테스론의 육체가 대단해도 그렇지, 벌써 6중첩이라고?’

전생의 테스론이 6중첩에 오른 것은 40대 초반, 반면 레펜하르트는 이제 겨우 서른을 넘보고 있다.

‘아니, 몸 빌린 놈이 원 주인보다 오히려 진도가 빠르다는 게 말이 되나? 내가 원래 무술에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사실 이 빠른 성장에는 이유가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만들어낸 오러-마력 융합 술식, 권마합신.

레펜하르트는 5중첩의 캘러미티 혼에 마력으로 고리를 하나 더해 6중첩을 구사하고 있다. 예전에는 어설펐지만 지금은 제라드로부터 올바른 오러의 흐름도 터득해, 제대로 된 마력의 고리를 덧붙였다.

비록 마력으로 이루어지긴 했어도 제대로 된 흐름으로 제대로 된 힘의 고리를 만들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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