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제49장 마법의 극에 달한 자
1
청색 로브의 노인은 수백 미터의 아득한 상공에 위치한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산악조차도 발밑에 두는 아득한 높이, 이곳에서 안타레스와 신성군의 모습은 마치 바글거리는 개미떼처럼 보였다.
“흐음, 한 방 더 먹여 볼까?”
느긋하게 드레자는 수염을 휘날리며 2차적으로 주문을 준비했다.
대륙 최강의 마력을 가진 그가 아니고서는 이 높이까지 올라올 수 있는 마법사가 없다. 이 상공은 오직 날개 달린 새와 자신만이 존재할 수 있는 드레자의 영역이었다.
“사 스니크 에베린 아게크 나그, 불꽃이 불길이 되고 폭염이 되어 세상을 뒤덮을지니…….”
수인을 맺으며 언령을 외우니 강력한 마력장이 사방으로 퍼지며 주위 마나의 기류를 기형적으로 뒤틀어 현세에 영향을 끼친다. 아무런 연소 물질도 없이 허공에 불이 붙고 그 불덩이가 삽시간에 커져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난다.
“궁극의 재앙이 되어 만물을 사르리라! 게헤나스 블레이즈!”
노을이 지는 것처럼 하늘이 붉게 물들며 수백 개의 화염구가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 어마어마한 파괴의 힘 앞에 안타레스군 곳곳에서 미약한 반항이 터져 나왔다.
“알 포트여! 지켜 주소서!”
“알 포트여! 당신의 종을 가호하소서!”
안타레스군에 속한 스무 명 정도의 드워프 신관들이 저마다 신성력을 발동해 안타레스군 전체에 거대한 성광의 장막을 쳤다.
드레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헛수고로다. 고작 그 정도로 내 마법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콰콰콰콰쾅!
곧이어 안타레스 전군을 뒤덮으며 장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화마가 넘실거리고 열풍이 불어 닥치며 비명과 절규가 아우성을 쳤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오, 엘디아여!”
단 한 명의 절대자에 의해 안타레스군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추격은 고사하고 대열조차 가득 흩어진 채 우왕좌왕 날뛰기 시작했다. 이니야며 하다툼이 허겁지겁 진영을 정비하려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당황치 마라! 어서 불을 끄고 부상자를 수습해라!”
“이놈들아! 그런 건 침 바르면 나아! 쫄지 말고 불 꺼!”
반면 다 죽어 가던 신성군의 표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오, 대마법사 드레자 님이시다!”
“드레자 님이 계시다면 두려울 것이 없어!”
“저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시다!”
퇴각하던 신성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대로 회군해 반격하자는 이도 나왔다. 그러나 이라나드 공작은 끝까지 후퇴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냉정한 그는 저 화려함 속에 담긴 내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적들의 피해가 적다.”
반경 수백 미터를 폭격하는 드레자의 힘은 실로 인간을 초월한 것이었다. 불길과 폭연이 눈앞의 광경 전부를 뒤덮으니 멀리서 보기엔 전부 학살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작 죽은 놈은 몇십 단위야.’
저 가공할 화염구의 폭격은 드워프 신관의 신성 가호와 부딪힌 후, 대부분의 위력을 잃은 채 안타레스군을 폭격했다. 폭발이나 불길 자체는 커 보였지만 실제론 순식간에 꺼진 셈이었다.
폭심지에 서 있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2차 피해가 없었다. 그나마 잔여 열기도 이니야가 구사한 북해의 숨결과 엘프들이 쓴 냉기의 정령술로 이내 사라졌다.
겉보기에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화살 비 날린 정도의 피해밖에 못 준 것이다.
“계속 퇴각한다! 전 기사단, 대열을 흩트리지 마라!”
이라나드 공작은 계속 병력 손실을 줄이며 후퇴하는 것에만 전 신경을 집중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옆에서 말을 달리던 부관이 힐끔 뒤를 보며 중얼거렸다.
“안타레스엔 사악한 마신을 섬기는 드워프들이 있다더니, 보통 권능이 아니군요.”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는 듯, 공작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악신도 신이란 거겠지.”
이리나드 공작은 제왕학을 익힌 그라임 왕국 유수의 왕족이며 강력한 오러 유저다. 그렇기에 무술과 전투, 전쟁에 있어서 그의 판단은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공작이라도 마법이나 신학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공작의 착각과 달리 드레자는 자신의 마법을 막은 것이 드워프 신관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허, 이게 뭔가?”
그가 시전한 마법은 9서클 초반의 광역 폭격 주문, 한 방에 일국의 성도 타버린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마법이다. 뭐, 요새 어지간한 성은 전부 대 마법 방어진이 있으니 그리 쉽게 잿더미가 되어 주지 않지만 하여튼 위력은 그렇단 소리다.
그런 드레자의 마법을 고작 스무 명의 드워프 신관이 막았다?
물론 저들이 신성력을 한데 모아 국지적으로 방어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지금은 광범위하게 안타레스군 전부를 뒤덮어 막은 것이 아닌가?
저들 모두가 대주교급 성직자가 아닌 이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바람에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놈이 아까부터 계속 신경 거슬리게 하는데……”
제 위력이 안 나온 것은 게헤나스 블레이즈뿐이 아니었다.
첫 타로 날렸던 일렉트로닉 퍼니시먼트 역시 중간에 그 위력이 대폭 줄어 떨어진 것이었다. 당한 안타레스군 입장에서는 하늘의 재앙처럼 느껴졌겠지만, 사실 저 마법이 제대로 펼쳐졌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재앙이라 느끼기도 전에 탄화되어 한 줌의 재가 될 테니까!
여전히 여기저기 폭연이 피어오르는 전장을 내려다보며 드레자가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어떤 마법사 놈이 아까부터 계속 내 마법에 간섭하고 있는데, 대체 누군데 이 정도 실력을 지닌 거지?’
☆ ☆ ☆
허공에 마력 기류가 느껴지는 순간 레펜하르트는 바로 반응했다.
너무 거리가 멀어 드레자의 마력장 자체에 간섭할 수는 없었지만 내리치는 수백 줄기의 벼락은 달랐다. 대지까지 다가온 이미 구현된 마법 자체에 간섭 마법을 반응시켜 그 위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뭐, 신성군 측에도 마법사가 있으니 혹여 레펜하르트가 한 짓을 눈치채는 이가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들 정신없이 후퇴하는 중이라 그럴 정신이 있을 리 없었다. 안심하고 드레자의 마법을 방해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폭격 때에는 드워프 신관들에게 얹혀 갔다. 신성 주문과 타이밍을 맞춰 성광의 흐름에 스스로의 마력장을 숨겼으니 어지간한 실력으론 자신이 마법을 썼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그런데도 제법 피해가 크군.’
전장을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는 안색을 굳혔다. 나름 전력을 다해 약화시킨다고 약화시킨 것인데도, 그것만으로도 드레자의 마법에 소중한 안타레스의 정병 백 정도가 죽거나 중상을 입은 채였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역시 예전만큼은 안 되네. 어휴, 전 같았으면 쉬운 상대일 텐데.’
전생의 레펜하르트였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상대의 마법을 모조리 파훼, 역전시키고 마력 흐름을 거꾸로 뒤틀어 신성군 쪽으로 폭격을 가하게 했겠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딱히 아쉬울 건 없지만.’
잃은 것에 연연하던 시절은 이미 예전에 지났다. 지금은 어떻게든 있는 것에 만족하며 더더욱 갈고닦을 뿐.
“위대한 힘을 사역하여 나 창공을 가르는 한 줄기 바람이 되노라! 플라이!”
비행 주문을 시전하며 레펜하르트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 ☆
“허허?”
다시금 안타레스군에 폭격 준비를 하던 드레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자기 안타레스군 사이에서 거구의 근육질 사내가 허공으로 날아오른 것이다.
“저 아이가 당대의 권왕이로구나. 방해하던 마법사 놈 내세울 줄 알았더니 직접 나섰나?”
드레자가 눈을 빛내며 시전 중이던 마법을 거뒀다.
“당대의 권왕이 온갖 괴상한 아티팩트로 무장했다더니 과연 그렇군. 어디서 저런 굉장한 기물을 구한 거지?”
부유 주문 레비테이트를 구사하게 해 주는 마도구는 많다. 굳이 고대의 기물이 아니더라도, 인챈트에 숙련된 마법사라면 회수 제한이 있는 부유 마도구쯤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플라이 마법은 달랐다.
둥실둥실 떠오르거나 둥실둥실 내려가는, 그래서 허공에서는 거의 연습용 과녁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는 레비테이트와 달리 플라이 마법은 8서클의 고위 마법이었다. 8서클 마법을 구사하게 해 주는 아티팩트는 대륙 내에서도 희귀한 것이다.
“지 사부가 챙겨 줬나 보지? 신기하군, 짐 언브레이커블은 원래 그런 분위기가 아닌데.”
드레자가 의아해하는 동안 어느새 레펜하르트가 그와 같은 위치까지 고도를 높였다. 비행 속도를 줄이며 눈높이가 맞는 위치에까지 다가온다.
플라이 마법의 비행 고도는 마력량에 비례하는 것, 현 시대 마법사 중 이 고도까지 올라올 수 있는 마법사는 드레자가 유일하다.
순간 흠칫 놀란 드레자였지만 이내 안색을 폈다.
‘거 되게 좋은 아티팩트인가 보군.’
어차피 고대의 아티팩트 중에는 9서클의 마스터인 드레자조차도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기이한 물건들이 많았다. 저 높이까지 날게 해 주는 아티팩트가 있다 해서 딱히 경악할 일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참으로 바보짓이다. 드레자가 비웃으며 외쳤다.
“어리석구나! 제라드의 제자야! 그까짓 아티팩트의 힘을 믿고 진정한 마법사와 상대할 셈이냐!”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안착하며 드레자를 바라보았다.
“후, 생각보다 늦었구려? 마스터 드레자.”
☆ ☆ ☆
원래 레펜하르트는 카를의 작전에 따라 엘드릴 가드를 수호하고 있었다.
현 대륙 최강의 마법사, 9서클 마스터 드레자가 엘드릴 가드로 향하는 바실리 왕국군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드레자를 상대할 만한 이는 안타레스 공국 전력 중에는 레펜하르트뿐. 그가 드레자를 감당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일반 병력의 피해가 극심하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도 일찌감치 엘드릴 가드에서 드레자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바실리 왕국군과 드레자가 이끄는 마법병단과 함께 요새가 보이는 평야 바로 앞까지 도달해 진지를 쳤다. 전쟁을 치르려면 병사들을 잘 먹이고 쉬어야 하니 일단 하루를 쉬고 내일 아침, 엘드릴 가드를 공략하기로 작전도 짰다. 상식 있는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예측대로.
그런데 이후 카를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생겼다.
“응? 엘드릴 요새 공략을 내일 아침에 한다고? 그럼 난 오늘 하루 종일 뭐 하라고?”
“아니, 드레자 공께서도 좀 쉬셔야 하지 않습니까? 먼 길 오셨는데…….”
“먼 길을 내가 왔냐? 내 마차 끄는 말들이 왔지. 난 생생하다!”
평생 마법만 판 이 꼬장꼬장한 영감이 제멋대로 진영을 이탈해 버린 것이다.
“내일 공격할 거면 난 저쪽이나 들렀다 오마. 괜찮지? 나 간다?”
지휘 체계고 명령이고 전부 무시한 채 드레자는 신성군 쪽 상황 좀 보고 온다며 휙 날아올라 동쪽으로 날아갔다. 엘드릴 요새에서 계속 그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던 레펜하르트로서는 기겁할 일이었다.
“아니, 저 영감이 미쳤나? 왜 저기서 갑자기 저따위로 굴어?”
순식간에 멀어지는 드레자의 마력을 감지하고 레펜하르트도 화들짝 놀라 비행 마법으로 뒤를 따랐다.
“여기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마켈린! 엘드릴 가드를 부탁하오!”
정신없이 허공을 갈라 동쪽 고원으로 향하며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실수에 치를 떨었다.
‘크으, 너무 카를에게만 맡겼어. 아무리 그라도 모든 걸 다 예측할 수 있을 리 없는데!’
아무리 카를이라도 한 개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까지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래 마법사란 종자는 제멋대로인 경향이 강하다. 오직 힘만을 추구하고 평생 책과 지식에만 파고들어 자기들끼리 마탑 세우고 콕 처박혀 사람도 잘 안 만나는 것들이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괴팍한 성격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카를도 제멋대로인 마법사의 성품 자체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드레자 정도로 큰 책임이 있는 자가 상식 밖으로 굴 것이라곤 미처 생각지 않았다.
‘그야 카를은 마법사가 아니니 그럴 법하지. 그래도 나는 예상했어야 했는데!’
같은 마스터급 마법사인 레펜하르트는 드레자의 행동이 일견 엉뚱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크게 책임을 방기한 것이 아님도 잘 알고 있었다.
일반인 감각이라면 전쟁 중 자기 위치에서 멋대로 벗어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로 느껴진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나 드레자 정도 되는 대마법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차탄 공국 기습전에서 레펜하르트는 협곡에서 길 막고 싸워야 한다는 소릴 듣고 ‘그래? 그럼 그냥 협곡 무너트려 버리지?’란 엽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는 그가 카를보다 훨씬 생각이 깊고 잔머리가 잘 굴러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순히 생각의 스케일의 차이, 10서클 마법사였던 레펜하르트와 일반인인 카를의 인식 차이였다.
이는 9서클 마스터인 드레자에게도 똑같이 통용되었다.
‘응? 오늘 안 싸운대? 그럼 나 저쪽 갔다가 저녁때 올게.’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두 전장을 옆집 다녀오듯 말하는 것이 일반인이 보기엔 어처구니없겠지만, 대마법사쯤 되면 다르다.
대마법사에겐 실제로 저 정도 거리쯤은 오갈 능력이 있으니까!
‘끙, 나도 했던 짓이니 드레자가 할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뒀어야 했는데.’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그 가공할 마력으로 가장 빠른 매보다도 더 빨리 허공을 날아 안타레스 제국 곳곳의 침략군을 격퇴하곤 했다.
아침에 제국 북부의 침략군을 격퇴하고 저녁에 제국 남부의 적 해군까지 싹 침몰시켰던 그의 가공할 기동력에 인류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결국 그 기동력이 인류로 하여금 이백만 대군 파병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게 만든 이유가 아닌가?
9서클의 마스터, 드레자라면 오후에 동쪽 전장 갔다가 저녁 늦게 엘드릴 가드 공략군에 돌아오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멍청했지! 젠장! 내가 그 생각을 못 하다니? 마법사 간판 너무 오래 내려놨나?’
정신없이 비행하며 레펜하르트는 스스로를 타박했다. 이미 드레자의 존재는 마력 감지가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 버렸는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순간 마력량이 낮으니 속력에서 못 따라잡는군.’
마법사는 마력을 근원의 힘으로 삼아 마법을 사역해 기적을 일궈 낸다. 그리고 그 마법의 사역 시, 마법사가 자신 모든 마력을 일시에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거운 돌을 든다고 쳐 보자.
한 개인이 젖 먹던 힘까지 총동원해 몇십 킬로그램짜리 돌을 든다. 이는 그가 들 수 있는 최대한의 무게다. 그야말로 전력을 다했다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그 돌을 들고 난 이가 과연 전신에 한 올의 근력도 남지 않는가?
그건 아니다. 힘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조금 팔을 풀어 주면 다시 같은 무게의 돌을 들 수 있다.
마력 역시 비슷하다.
순간적으로 끌어내는 마력의 최대량, 이를 마학에서는 순간 마력량이라 부른다. 그가 지닌 모든 마력을 뜻하는 총 마력량과는 별개의 개념이다.
비행 마법 플라이의 속력은 순간 마력량에 비례하고 지속 시간은 총 마력량에 비례한다.
보통 순간 마력량은 총 마력량에 비례해 함께 오르기 마련, 현재의 레펜하르트보다 총 마력량이 많은 드레자는 그만큼 순간 마력량도 높다. 비행 마법의 속도 역시 훨씬 빠른 것이다.
하필 시간도 딱 안타레스군과 신성군이 전투를 시작할 시기였다. 재수 없으면 드레자에 의해 막대한 피해가 일어난다.
‘젠장, 최대한 따라잡아야 해!’
정신을 집중하며 레펜하르트는 점점 속력을 높였다.
총 마력량에서는 밀리지만 순간 마력량이라면 편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레펜하르트는 지닌 경지에 비해서는 마력이 낮은 상태, 마력의 출력을 일시적으로 올리는 술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타아아앗!”
기합까지 떨치며 레펜하르트는 점점 속도를 붙여 허공을 갈랐다. 그렇게 가공할 속도로 동쪽 고원에 도착해 보니 과연 전투가 한창, 이니야가 막 당하기 직전이었다.
정신없이 끼어들어 사방에 권격을 뿌리며 주위를 살폈는데 이게 웬걸?
‘어라?’
당황스럽게도 드레자가 없었던 것이다. 순간 어이가 없었던 레펜하르트는 이내 자신이 무엇을 간과했는지 깨달았다.
‘아, 맞다! 그 영감은 그냥 일반인 몸뚱어리지?’
☆ ☆ ☆
먼저 출발했고, 훨씬 빠른 드레자가 나중에야 도착한 이유는 간단했다.
분명 드레자의 마력이라면 비행 마법 플라이쯤은 하루 종일 시전해도 버틸 수 있다.
그렇지만 드레자의 체력은 그 비행을 하루 종일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비행 마법은 그저 허공에 둥실둥실 뜬 채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하게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계속 마법에 집중도 해야 하고 자세 제어도 해야 하며 나름 전신 근육도 쓰는 노동이다.
아무리 궁극의 대마도사, 9서클의 마스터 드레자라도 육체는 일반인, 아니 그 이하로 다 늙어 빠진 노인의 몸이다. 그래서 드레자는 20분 정도 날다가 10분 정도 내려서 숨 좀 돌리고, 또다시 날아오르는 것을 반복하며 비행했다.
그에 비해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더 말이 필요 없는 경지, 그렇다 보니 당연히 그가 먼저 도착해 버렸다.
“이런 몸이 되고 나서 평범한 마법사의 체력을 자꾸 간과하게 되더라고.”
허공에 뜬 채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전생 때는 드레자처럼 30분쯤 비행하면 체력 고갈로 허덕였던 주제에 이 몸에 들어오고 나서 싹 잊어버리다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릴 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드레자가 인상을 썼다.
“무슨 소리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기에 레펜하르트가 대충 대꾸했다.
“몸 허약해서 고맙단 소리지, 영감.”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모욕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드레자가 바드득 이를 갈았다.
“흥!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 지껄이는 건 제 사부랑 똑같군!”
두 눈에 명료한 분노를 담은 채 드레자가 양손을 들었다. 가공할 마력이 양손에 머금어져 빛을 발한다.
확고한 증오를 담은 채 드레자가 레펜하르트에게 소리쳤다.
“마침 잘 만났다, 당대의 권왕! 저승에서 네놈의 사부를 원망하거라!”
2
드레자가 대마법사가 된 것은 꽤나 이른, 나이 40대 중반의 일이었다. 당시 8서클에 든 드레자는 당당히 마라그랑드 학회로부터 대마법사의 위계를 인정받고 그 명성을 대륙에 떨쳤다.
이후 그는 강력한 마법사가 대부분 그렇듯, 던전을 탐사하며 부와 고대의 지식을 축적해 자신의 기량을 높이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는 와중 테이칸 왕국 중부에 위치한 고대 유적 크로소드에서 드레자의 탐사대는 우연히 같이 던전에 진입한 다른 탐사대를 만났다.
이럴 경우 보통 대륙의 상식은 먼저 던전에 진입한 이에게 우선권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좀 꼬였다. 서로 다른 입구로 진입한 데다가 날짜마저 같아 어느 쪽이 우선권이 있는지 가리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당시 드레자는 대마법사의 위계를 받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던 차였다. 그가 이끄는 탐사대 역시 라스틸 공국의 후원을 받으며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반면 상대 탐사대는 이제 갓 구성된 신흥 기사단, 그것도 남작가 출신의 하위 귀족들이었다.
오만하게 드레자가 말했다.
-나는 마라그랑드의 드레자, 이 던전은 내가 먼저 손댔노라! 위대한 마법의 힘을 맛보고 싶지 않다면 당장 물러서라!
그런데 별것 없어 뵈는 상대 탐사대가 감히 드레자의 명성에도 꼬리를 말지 않았다.
-흥! 비록 날짜는 같으나 우리는 오전에 진입했고 그쪽은 오후에 오지 않았소? 그러고도 어찌 우선권을 주장한단 말이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차이긴 하지만 분명 상대 탐사대가 먼저 진입하긴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 그렇군요. 그럼 수고하세요.’ 하고 물러날 정도면 오만하단 소리도 안 나왔으리라.
당연히 드레자는 분노했다.
-이것들이 뭘 믿고 내 앞을 막는 것이냐!
과연 그들은 믿는 것이 있었다. 그들 뒤에 말없이 서 있던 철탑 같은 체구의 중년인을.
상업을 통해 새로이 귀족이 된 이들은 거액을 들여 처음 나서는 던전 탐사에 믿을 만한 외부인을 초빙해 왔던 것이다.
그 외부인을 향해 탐사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부탁합니다!
문제는 저 믿을 만한 외부인이 영 탐탁찮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거 대마법사를 상대한다는 소린 없었는데? 계약에 어긋나잖소?
-크으! 계약한 금액의 두 배를 주겠소!
-에이, 그래도 두 배 가지고 대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좀…….
-세 배! 아니, 네 배를 주겠소!
네 배란 단어가 떨어지자마자 시큰둥하던 중년인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금방 끝내리다.
이후 드레자는 말로만 듣던 당대의 권왕 제라드와 사투를 벌이게 되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사투도 아니었다. 그냥 적절히 어루만짐당했을 뿐.
이미 6중첩 캘러미티 혼을 터득한 제라드에 비해 갓 대마법사가 된 당시의 드레자는 아무래도 수준이 좀 낮았다. 나이도 몇 살 어린 처지라 그만큼 수행 시간도 적었다.
다행히 드레자가 다른 무인들과 달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제라드도 마법사란 종자가 다른 인간에 비해 각별히 신체가 허약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성인 장정이라면 부담 없이 패 버리는 짐 언브레이커블이지만 허약한 아녀자에게까지 그런 손속을 드밀진 않는다. 그리고 제라드 기준에서 마법사는 ‘아녀자’에 속하는 종자들이었다.
날아오는 마법, 죄다 스파이럴 가드로 갈아 내며 그냥 드레자의 전신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문제는 그 손가락이 드레자에게 닿을 때마다 멍이 들고 근육이 풀리고 뼈가 부러지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커억! 으악! 으갸갹! 사람 살려!
잠시 후, 걸레 쪼가리가 된 드레자를 탐사대에 인계한 뒤 제라드가 정중히 말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요. 잘 보살피시오.
우연히 맞붙었을 뿐 전혀 드레자에게 악감정이 없는 제라드였기에 말투도 참 정중했다.
-저주한다! 짐 언브레이커블! 네놈을 저주한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제라드!
악감정이 철철 넘치는 드레자의 외침을 무시한 채 제라드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한 사흘 잘 요양하면 나을 것이오.
완치되는 데 석 달 걸렸다…….
짐 언브레이커블이야 그 정도 중상이라도 사흘이면 낫겠지.
그러나 일반인이면 평생 침상에서 못 일어날 정도의 극심한 부상인 것이다. 라스틸 공국에서 특별히 산악의 거신, 아틀라스 교단의 교황까지 초빙해 그를 치유해 주지 않았다면 정말 불구의 몸이 될 뻔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인해 드레자는 라스틸 공국의 왕실 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수모를 갚기 위해 마법에 매진, 또 매진해 결국 대륙의 유일한 9서클 마스터까지 올랐다.
“제라드, 으, 그 빌어먹을 짐 언브레이커블……!”
그때를 떠올리니 다시 한 번 혈압이 솟구치는지 노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왠지 어디서 한번 본 표정이라 레펜하르트가 떨떠름해했다.
‘저 양반도 사부랑 원한 진 사이인가?’
딱 보니 제라드 대하는 바나텔 표정이다. 아주 골수까지 원한이 진 듯했다.
드레자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복수를 위해 평생을 매진했다…….”
아무리 8서클의 대마법사라도 권왕과 싸우기엔 아무래도 승산이 낮다. 그래서 드레자는 적어도 9서클에 진입할 때까지 함부로 제라드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
기껏 9서클에 들어 자신이 붙고 나니 이번엔 제라드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제라드는 어린 테스론을 가르치느라 심산유곡에 처박혀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대로 평생 수모를 갚지 못하나 싶어 초조하던 차였다.
“제자 소식은 들려도 막상 본인은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 그런데 그놈이 기어 나왔더군.”
바나텔과 제라드의 대결을 듣고 드레자는 바로 안타레스 공국으로 날아가려 했다. 그때 라스틸 공왕이 그를 말렸다.
공왕 입장에서는, 공국의 가장 귀한 재산인 9서클의 마스터가 아무런 득도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건다는데 말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홀로 일국에 시비를 건다면 아무리 드레자라도 승산이 적을 것 아닌가?
-아니 되오! 드레자 공! 어찌 권황과 시비를 붙으려는 거요!
-보내 주십시오, 폐하! 개인적인 일일 뿐입니다!
-드레자 공은 이미 개인적인 몸이 아니지 않소! 라스틸 공국의 신민들을 생각해 주시오!
-아니, 공국이 저 없다고 망하기라도 한 댑니까? 좀 보내 주십시오!
-못 보내오!
-이거 놓으십시오, 로브 벗겨집니다.
-못 놓소!
위엄 있는 왕실에서 일국의 왕이 로브자락까지 붙잡고 매달리는데, 아무리 제멋대로인 드레자라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뜻을 굽혔다.
그런데 바슈탈론 제국이 또 한 번 기회를 주었다.
“역시 하늘은 무심치 않더군.”
세이어를 위해 나서겠다는 그의 주장에는 라스틸 공왕도 차마 뭐라 할 수 없었다. 그저 ‘평소 신전도 잘 안 나가던 양반이 참 뻔뻔하기도 하지…….’라고 구시렁댈 뿐.
제국의 일부로 참전하는 것이니 홀로 일국과 맞서는 상황도 아니게 되어, 결국 공왕도 허락을 한 것이다.
드레자가 희열에 차 웃었다.
“흐흐, 제라드 놈이 없는 것은 아쉽지만 어차피 똑같은 짐 언브레이커블. 그놈과 붙어 보기 전에 잠깐 예행연습을 해 보는 것도 좋겠지!”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는 레펜하르트지만 드레자의 혼잣말만으로도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어쩐지…… 세이어 신도도 아닌 드레자가 왜 참전을 했나 했더니…….’
아무리 라스틸 공국에 제국의 입김이 세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독립국이다. 드레자쯤 되는 대마법사가 제국의 압력에 눌려 참전할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냥 개인적인 원한이었다 이 말이지?’
그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안타레스 공국은 현 대륙 최강의 마법사를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지금쯤 크로방스 서부 전선에 있을 사부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니, 이 양반은 도대체 인생이 도움이 안 돼.’
진실을 알고 나니 절로 힘이 쭉 빠진다.
‘대륙의 강자란 강자한테는 죄다 시비만 걸고 다녔냐? 응? 좀 친하게 지낸 사이 없어? 보통 무인들은 서로의 강함을 비교하고 우정을 다지며 함께 술도 마시고 그런다며?’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했다.
제라드쯤 되면 당연히 평소 우정을 다지던 강력한 무인들도 제법 있을 법하다. 원래 무인이란 호탕한 기질이 있어 친우의 소식을 들으면 두 발 벗고 달려오는 경우가 흔하다. 마법사인 레펜하르트에겐 참 어리석어 보이면서도, 동시에 부러운 부분이었다.
‘그런데 어째 사부가 안타레스 공국에 합류한 이래, 사부 친구라고 나타난 작자는 단 한 명도 없었지…….’
오로지 하늘 아래 저 혼자 잘났다고 부르짖는 짐 언브레이커블을 상대로 우정을 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맨살로 칼 못 튕기면 다 똑같은 허약한 놈들이라고 무시나 하지,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라 조금만 수틀려도 주먹이 날아다니지, 게다가 그 주먹이 그냥 주먹인가? 스쳐도 생사가 오락가락할 철권이다.
심지어 짐 언브레이커블은 돈 문제도 칼같이 따지는 것이다.
결코 공짜로 돕거나 이딴 것 없다. 그러니 그에게 도움받은 이들로 고마움을 느끼기보단 거덜 난 재정을 보며 눈물짓는 쪽이 우선이었다. 아예 돈도 없고 억울한 이들이라면 무상으로 돕는 일도 꽤 잦았지만 이는 워낙 패도적인 평소 행동에 묻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짐 언브레이커블, 사실은 대륙적 규모의 왕따 무문이었냐?’
뭐, 그렇다고 제라드가 아주 인간 망종이란 소리는 아니다. 오래 대륙을 떠돌았던 만큼 꽤나 친구가 있었다. 단지 다들 무인이 아닐 뿐.
‘어? 그래도 테스론은 제법 무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전생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문득 의아해했다. 생각해 보니 전생의 권왕 테스론은 꽤 주변 무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었다.
‘사부가 역대 권왕 중에서도 특히 성격이 더러운 편이었나, 혹시?’
사실은 당대의 마왕 레펜하르트의 존재 때문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두 주먹으로 실천하는 역대 권왕들은 전부 제라드와 크게 성품이 차이 나지 않았다. 당연히 전생의 권왕 테스론도 한때는 그런 성격이었다.
그러나 레펜하르트가 나타나자 짐 언브레이커블도 더 이상 하늘 아래 저 홀로 잘났다고 부르짖는 처지가 못 된 것이다.
누가 봐도 마왕이 더 잘났는걸?
레펜하르트야 당사자라 못 느끼고 있었지만, 절대적인 초월자인 마왕 앞에선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왕도 일개 무인으로 전락해 버린다. 압도적인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일개 무인으로.
덕분에 당시 테스론은 짐 언브레이커블치고는 상당히 무난하고 겸손한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짐 언브레이커블치고는.
역대 권왕에 비하면 상당히 자신감이 부족한 편이었기에 오히려 성격이 평범해진 케이스랄까?
이유야 어찌 되었건 드레자가 지금 안타레스 공국의 적이란 점은 변함이 없다.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말아 쥐며 차갑게 뇌까렸다.
“사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일국의 행사, 적으로 이 자리에 왔으니 무사히 돌아갈 생각은 버리시오!”
자신을 상대로 전혀 굽힘 없는 태도를 보이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드레자는 쌍심지를 켰다.
“과연 오만한 짐 언브레이커블! 어린놈이 시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드레자가 양손을 가슴께로 들었다. 전신으로 폭풍처럼 적색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근육밖에 모르는 네놈에게 위대한 마법의 힘을 보여 주리라!”
☆ ☆ ☆
상대를 겨누며 드레자가 소리쳤다.
“아케인 블래스터!”
눈부신 빛의 기둥이 창공을 가르며 쏘아졌다. 일점에 힘을 집중해 가공할 관통력과 파괴력을 보이는, 레펜하르트도 애용하던 8서클 섬광 주문이었다. 이 마법을 전용 술식으로 개조해 대인용으로 바꾼 것이 바로 유서스가 쓰던 엘드릴의 빛이다.
구우우웅!
일격에 성문을 부수고 피와 살을 끓게 하는 가공할 열량이 화살보다도 빨리 날아온다. 레펜하르트도 감히 몸으로 부딪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흡!”
허공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제대로 된 ‘마법사’처럼 간단히 비행 마법을 써 공격을 회피한다. 순간 드레자가 살짝 인상을 썼다.
‘어라? 저놈 주위에서 왜 마력장이 느껴지지?’
너무 흥분해 미처 눈치 못 챘는데, 잘 보니 레펜하르트 주위로 마법사 특유의 마력장이 희미하게나마 흘러나오고 있다.
제이드도 레펜하르트가 아티팩트의 힘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마법을 구사한다는 걸 이내 알아챘다. 드레자 정도 되는 궁극의 마법사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젊은 제이드에 비해 드레자는 세수 일흔 가까이 된 노인, 늙은이는 아무래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마법의 극에 달한 이라 할지라도, 아니 마법의 극에 달했기에 오히려 스스로의 지식에 자신이 있는 드레자는 자신의 상식이 틀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방식의 아티팩트로군. 마법사의 감각마저 현혹시키다니?’
태연스레 넘어가며 드레자가 재차 마법을 이었다.
“그까짓 아티팩트는 진정한 마법의 힘 앞에 무용지물!”
어지러이 수인을 맺으며 후속타를 날린다.
“플라즈마 볼Plasma Ball, 플레임 캐논Flame Cannon, 플레어Flare, 프로미넌스prominence!”
백열하는 초열구와 불꽃의 탄환, 청색의 화염과 고온, 고압의 화염구과 동시에 생성되어 레펜하르트의 사방을 감싸며 날아들었다.
마력 기류를 느끼며 레펜하르트가 내심 감탄했다.
‘4중 동시 연산인가? 역시 마스터급이라 다르긴 다르군.’
마왕의 7중 동시 연산에 비하면 별것 아닌 것 같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사실 드레자의 연산력은 고금을 통틀어 그리 적수가 없는 수준이다.
더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위대한 힘의 사역, 그 쐐기를 박노라! 라그나 헬 파이어Lagna Hell Fire!”
마지막 마법이 미리 발동된 네 화계 마법과 연동되며 오망성을 그렸다. 오망성의 중심지는 바로 레펜하르트, 천지 사방 머리와 발밑까지 완벽하게 화염으로 뒤덮여 조금의 빈틈도 없는 포위망이 구축된다.
황급히 주먹을 들어 머리 위를 찌르며 레펜하르트가 반응했다.
“스파이럴 가드!”
드레자가 양손을 마주하며 최후의 시동어를 외쳤다.
“터져라!”
콰아아아앙!
가공할 폭발이 하늘을 떨쳐 울렸다. 자욱한 폭연이 안개처럼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4중 동시 연산에 이은 궁극 연계 마법. 충분히 필살의 일격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위력이었다. 어지간한 상대라면 이걸로 끝이 났으리라.
하지만 드레자는 전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아무리 애송이라도 권왕의 이름을 받은 놈. 짐 언브레이커블이 이 정도로 끝날 리 없지!’
과연, 이내 폭발을 뚫고 황금빛 회오리가 솟구쳤다. 전신에 스파이럴 가드를 감은 레펜하르트가 그 회오리의 끝을 뾰족하게 좁혀 화염 결계를 뚫어 버린 것이었다.
‘테스론이 쓴 거 보고 틈틈이 연습해두길 잘 했네.’
“제법이구나, 버틸 거야 예상했다만 상처 정도는 입을 줄 알았는데.”
감탄하며 드레자가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레펜하르트가 눈에 불을 켰다.
“그렇게는 안 되지!”
벌써 선제공격을 몇 번이나 허용했다. 이대로 계속 두들겨 맞기만 할 생각은 없다!
“타아앗!”
허공에 뜬 채 레펜하르트가 발을 굴렸다. 아무것도 없던 발밑에 눈부신 황금빛이 터져 나오며 그가 드레자를 향해 포탄처럼 돌진했다.
“기격포!”
비행 마법 플라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가공할 속도로 레펜하르트의 주먹이 드레자의 코앞까지 쇄도했다. 주먹 대신 발바닥으로 기격포를 터트려 추진력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드레자가 그대로 옆으로 수십 미터나 날아가 권격을 피해 냈다.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빠른 스피드, 덕분에 허공을 찌른 레펜하르트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주먹으로 기격포를 날렸다.
콰앙!
허공에 지른 주먹질로 재차 반동을 주며 레펜하르트는 바로 궤도를 틀어 재차 드레자를 쫒았다.
‘미안, 시리스. 네 수법 좀 쓴다.’
바로 정령을 밟고 이동하는 그녀의 수법의 응용이었다. 이렇게 오러의 반동력으로 허공을 때리며 이동하면 플라이 마법으로는 불가능한 3차원적인 움직임도 가능한 것이다.
연신 허공을 튕기며 레펜하르트는 드레자를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조리 헛손질로 이어졌다.
드레자의 비행 실력은 실로 놀라워, 직선적인 레펜하르트의 돌진을 죄다 피하면서 오히려 마법으로 반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콰콰콰콰쾅!
“크으…….”
전신에 마법을 두들겨 맞으며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벌써 몇 번이나 허공을 박차며 공격했는데 맞히질 못했다.
레펜하르트가 감탄과 당혹을 동시에 표했다.
‘이거 뭐야? 무슨 플라이 마법으로 저 정도 비행이 가능하지?’
드레자의 비행 실력은 놀라운 수준을 넘어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물러난 지금도 계속 곤충처럼 불규칙적인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누비는데, 날개 달린 새조차도 보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런 짓은 나도 못하겠는데.”
현재의 그와 비교한 것이 아니었다. 전생의 자신과 비교해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란 소리였다. 마왕이라고까지 불리던 레펜하르트조차도 저 정도로 교묘한 비행 실력을 갖추진 못했다.
마법은 마력량과 마법사의 깨달음, 경지에 의해 그 위력이 좌우된다. 그리고 마왕이라 불린 레펜하르트와 9서클 마스터 드레자의 수준은 확실히 차이가 크다. 서로가 일직선으로 날아간다면 드레자는 속도도 지속력도 결코 전생의 레펜하르트에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곡예비행의 숙련도는 마력이나 경지와는 전혀 상관없다. 이것은 그저 얼마나 오래 연습했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다. 적어도 플라이 마법의 숙련도만큼은 드레자가 마왕 레펜하르트보다도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이다.
‘대단하긴 대단하네, 정말 죽어라 연습한 모양인데…….’
상대의 기량에 감탄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의문을 느꼈다.
‘그런데 뭐하러 저딴 걸 저렇게 죽어라 연습한 거야?’
☆ ☆ ☆
허공을 떠올라 강대한 마법을 써 대는 마법사의 존재는 실로 공포의 대상이다. 일단 이쪽에서는 닿지도 않는 곳에서 일방적으로 폭격을 할 수 있으니 아무리 노련한 전사라도 대책이 없어 보일 법 하다.
하지만 세상일 모두 그렇듯, 마법사 입장에서도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5서클 부유 마법은 다른 마법 술식과 너무 충돌하는 부분이 많아 전신에 건 채로 쓸 수 있는 마법이 극히 제약된다. 그래서 레비테이트를 쓸 수 있는 마법사도 전장이 아닌 소규모 전투일 경우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싸우는 경우가 많다.
비행 주문, 플라이쯤 되면 완전 독립된 구동 술식을 쓰기 때문에 훨씬 범용성이 커지지만 이는 8서클의 최고위 주문, 이걸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이미 대마법사다.
얼마든지 최고위 방어 마법으로 몸을 지킬 수 있는 대마법사가 굳이 비행 마법을 저토록 죽자 살자 팔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법은 다양하고 적의 공격을 막는 방법 역시 무수히 많다. 방어막으로 막아도 되고, 못 막을 것 같으면 흐름을 흘려도 되고, 아니면 아예 속성에 맞춰 반전시켜 되돌려주는 수법도 있다. 차라리 저딴 짓 연습할 시간에 마력 방어막 발동을 숙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래서 전생의 레펜하르트도 비행 마법은 어디까지나 이동과 허공의 위치 선점에만 썼을 뿐 전투 시엔 각종 다양한 방식으로 몸을 지키며 강적과 싸워 왔다.
반면 눈앞의 드레자는 진짜 피하는 것 외엔 모르는 것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연환 기격탄!”
의아해하는 와중에도 레펜하르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계속 허공을 박차며 공세를 퍼붓는 중이다.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니 이번엔 원거리에서 오러로 포격을 가한다.
“흥!”
콧방귀를 뀌며 드레자가 손을 앞으로 내저었다. 빛의 광막이 생겨나 드레자의 정면을 가로막았다. 6서클 방호 주문, 래디언스 배리어였다.
콰콰쾅!
폭음과 함께 황금빛 기격탄이 모조리 광막에 가로막혔다. 아무래도 짐 언브레이커블은 원거리 포격에 취약한 편이라 기격탄이나 기격포 정도로는 대마법사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잠깐 발을 묶기에는 충분하다!
“타앗!”
틈을 노리고 레펜하르트가 다시 발을 굴렸다. 연달아 허공에서 각도를 틀며 연신 드레자에게 펀치와 킥을 날려 댄다.
“맞을 것 같으냐?”
연환 기격탄의 폭발 정도에도 불구하고 드레자의 비행은 전혀 흩어지지 않았다.
계속 허공에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레펜하르트의 공격을 그리며 모조리 피해 버린다. 레펜하르트는 직선으로 날아가다 중간에 각도를 꺾어 방향을 바꾸는 반면, 드레자는 곡선의 유려한 움직임을 보이며 비행하니 이는 몽둥이를 휘둘러 나비나 파리를 잡으려는 시도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또다시 마법의 일격.
“눌러라, 대기의 망치! 에올의 해머!”
퍼퍼펑!
연이어 압축된 공기가 전신을 두들겼다. 정신없이 밀리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진짜 비행 마법 하나는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군.’
저 정도 솜씨를 익히려면 한두 해 해서 될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10~20년 동안 매일 꾸준히 몇 시간씩 투자해 연습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솜씨다.
‘그러니까, 대단하긴 한데 대체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했냐고?’
마법이나 신성 주문 중엔 유도 기능이 있거나, 시전과 동시에 목표에 명중하는 방식의 마법도 많다. 빠르게 날아다닌다고 무조건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마법의 상식도 모르는 초짜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9서클을 마스터한 자가 그 정도 상식도 없을 리는 없지 않은가?
어이없어하는 와중에도 드레자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주위로 연이어 마법의 폭발이 터져댔다.
쾅! 쾅! 콰쾅!
스파이럴 가드를 최대한 발동해 막고는 있지만 점점 힘에 부친다. 결국 레펜하르트가 공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섰다.
한 대도 못 때리고 맞기만 하니 슬슬 열이 받는다. 무심코 내심이 입 밖으로 흘렀다.
“젠장, 대마법사 체통에 날파리처럼 날아다니고 부끄럽지도 않나?”
무릇 대마법사라면 오롯이 자리를 지키며 손짓만으로 강대한 마법을 발동, 적을 섬멸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순간 드레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도 솔직히 부끄럽긴 했으니까.
“크으…….”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전법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계속 어지러운 곡예비행을 유지하며 드레자가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은 저 저주받을 짐 언브레이커블을 누르기 위해서…… 그를 위해서라면 잠깐의 수치쯤은 감내해야겠지.”
3
제라드에 대한 복수를 위해 정진하던 시절이었다.
검성 바나텔처럼 드레자도 자신의 기량을 키우는 데 매진하고 또 매진했다.
또한, 그는 마법사답게 제라드를 상대할 방법을 연구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제라드가 참가했던 전투며 역대 권왕들의 전투 기록을 닥치는 대로 수입해 연구했다.
원래 전사가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한쪽은 죽어라 거리를 좁히고 한쪽은 죽어라 거리를 넓히며 서로를 쓰러뜨리는 데 열중한다. 그러다 서로 필살의 일격을 날린 쪽이 승리하는 것, 오러 유저와 대마법사인들 저 공식 자체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러 유저가 어떤 식으로 마법사에게 달라붙으려 하는 지였다.
대대로 짐 언브레이커블은 멧돼지처럼 무식한 돌격을 즐겨 왔다.
상대가 마법사건 전사건 그저 죽어라 달려가 때려눕힐 뿐!
문제는 저 무식한 전법이 짐 언브레이커블이 쓰면 무적의 전법이 된다는 점이었다.
어지간한 오러 유저라면 대마법사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면 어지간한 마법은 오러 유저처럼 즉시 시전이 가능해진다. 7서클 이하라면 상당히 주문이 짧아지고, 심지어 6서클 이하는 가장 필수로 하는 최소 언령, 시동어만으로도 발동이 가능하다.
6서클 이하 주문이라도 그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을 부수고 대지를 가를 정도는 아니지만 집채를 날리고 거암을 쪼갤 정도는 충분히 된다. 충분히 오러 유저의 오러 가드에게도 통용이 될 위력이다.
그런데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이것이 안 통하는 것이다.
-마법? 날릴 테면 날려라. 몸으로 때우고 다가가서 패 줄게.
이게 짐 언브레이커블의 방식인데, 기록을 보니 이 방법으로 반병신이 된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시동어만으로 가능한 수준의 주문은 아예 통하지도 않는다.
‘그놈의 빌어먹을 스파이럴 가드!’
그렇다고 통용될 만한 7서클 이상의 마법을 준비하자니 어찌나 돌진력이 빠른지 그사이 벌써 코앞까지 와 있다.
‘게다가 공격이 좀 세야지?’
어지간한 마법 방어장으론 뻥뻥 뚫린다.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일격을 막으려면 공격을 포기하고 전력으로 방어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럼 남은 결과는 당대의 권왕이 방어막 안에 처박혀 있는 대마법사를 상대로 신 나게 주먹질을 해 대는 것뿐이다.
결국 누가누가 오래 버티나 식의 지구력 싸움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상대는 대륙 최강의 지구력을 가진 작자들이잖아?’
기록을 보며 드레자는 공포에 질렸다.
놀랍게도 역대의 대마법사 중 짐 언브레이커블을 상대로 제대로 승리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승리한 경우는 당대의 권왕이 세상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6중첩 이상의 캘러미티 혼을 터득하지 못했던 경우일 뿐이었다. 물론 이 대마법사들은 이 득득 가는 당대의 권왕이 경지 올린 뒤 재도전, 모두 제 명에 못 죽고 골골대는 신세가 되었다.
‘뭐 이런 괴물 같은 작자들이 다 있냐…….’
차라리 역대 검성이라 불린 자 중엔 가끔 짐 언브레이커블과 무승부를 벌이거나 오히려 승리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승리한 검성을 패배시킨 대마법사도 존재했다. 강약의 문제가 아니라 짐 언브레이커블 자체가 그 특성상 마법사의 천적이었던 것이다. (고금 제일의 마법사인 마왕 레펜하르트를 상대로도 끝까지 서 있었던 무문 아닌가?)
마법사 입장에서는 절로 의욕이 꺾이는 기록들이었지만 드레자는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기엔 그날의 굴욕이 너무 컸다.
‘그래, 어딘가에 분명 허점이 있을 거야.’
다행인 것은, 전투 기록 하나는 참 많았다는 점이었다.
역대 권왕치고 싸움 피하는 성격은 없었다. 오는 시비 족족 받아 주며 신 나게 싸워 댔다.
특히 그중 제일 많은 대상이 마법사였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성향이 될 수밖에 없는 마법사와 오만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짐 언브레이커블.
양쪽 다 성질 더러우면 당연히 싸움도 잦다. 무인이라면 그래도 상대의 경지를 파악하고 알아서 기기나 하지,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무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아무리 상대가 권왕이라도 대마법사의 체면으로 싸움을 피한 적이 없었다. 상대가 ‘아녀자(?)에 속하는 마법사다 보니 역대 권왕들도 독하게 손을 쓰질 않아 은근히 살아남은 이들도 많았다. 덕분에 기록도 많이 남았다.
돈 좀 들이니 온갖 정보가 산처럼 쌓였다. 밤잠도 설쳐가며 드레자는 그 기록을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그 와중에 그는 작은 희망을 보았다. 역대 권왕들과 싸웠던 마법사들, 그중 간간히 무승부를 겨룬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예 상공 수십 미터 위에서 융단 폭격을 가했던 마법사들이었다.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면 짐 언브레이커블은 못 당한다.
그렇다고 땅 위에 있으면 짐 언브레이커블은 반드시 쫓아온다.
그럼 도망갈 곳은 하늘밖에 없지 않은가?
마법사뿐 아니라 누구라도 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권왕과 맞붙었던 대마법사들 중 한 번쯤이라도 공중전을 하지 않았던 이들은 없었다. (색다르게 땅 속으로 숨은 작자들도 몇 있긴 했는데, 짐 언브레이커블은 땅 파고 쫓아온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간간히 무승부, 즉 대부분 패배한 이유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공격이 꼭 주먹만은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날아올랐냐? 그럼 거기 계속 있어라.
그리고 대뜸 캘러미티 혼을 날리는데 이 빌어먹을 기술은 주먹질인 주제에 그 위력이 수백 미터까지 뻗는 악랄한 것이었다. 손 안 닿는다고 방심했다 골로 간 마법사의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개중엔 용케도 캘러미티 혼을 피해 낸 대마법사도 몇 명 있었다. 그런 이들은 권왕이 직접 다가가 어루만져 주었다.
레펜하르트야 비행 마법을 이용해 날아올랐지만, 역대 권왕들에게도 충분히 자기 힘만으로 이 높이까지 올라올 기량이 있었다.
검성이나 권왕쯤 되는 이라면 오러 유저 중에서도 초인으로 인정받는 자들.
서전트 점프로 거성 한 채쯤은 훌렁훌렁 뛰어넘는다. 거기에 오러의 분출력을 이용하면 마법도 쓰지 않는 주제에 수백 미터 상공까지 잘도 날아오른다. 사람이 맨몸으로 발 굴려 수백 미터 상공까지 뛰어오른다는 게 참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어차피 검성이나 권왕이나 말도 안 되는 존재들이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날아오른 허공에서 궤도를 바꾸는 것도 역대 권왕 모두 가능했다.
발로 기격포 쏘는 수법을 레펜하르트는 자기가 창안한 줄 알고 있지만, 사실 이 정도 발상쯤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아무리 단순한 역대 권왕이라도 그 정도 센스는 다들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법도 안 쓰는 주제에 수백 미터 상공까지 잘도 올라오고, 그 아득한 높이에서 방향을 바꿔 돌진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단 그렇게 근접을 허용하면 마법 방어고 뭐고 일격에 승부가 난다.
그나마 무승부가 있는 이유는 아무리 권왕이라도 허공에서까지 지상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었던 탓이었다.
원래 비행이란 인류 모두가 꿈꾸는 일종의 로망인 바, 대마법사 중엔 마법 연습은 안하고 비행에 심취해 취미로 날아다니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하라는 수련도 안 하고 딴 짓한 셈이다 보니 다들 대마법사치곤 그리 실력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기껏해야 8서클 초반에서 중반 정도?
그러데 그런 작자들은 다들 살아남았다. 뭐, 그쪽도 권왕을 어찌하질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무승부지만.
‘이거다!’
그 기록을 본 순간 드레자는 눈을 빛냈다.
드디어 짐 언브레이커블을 상대할 방법이 보인 것이다.
☆ ☆ ☆
“짐 언브레이커블을 상대할 방법은 오직 공중전뿐. 하지만 단순히 비행하는 것만으론 멧돼지 같은 네놈들을 당할 수 없지! 그래서 각별히 플라이 주문에 공을 들였느니라!”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드레자가 허공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손가락을 따라 빛의 원이 그려지며 이내 강렬한 마력을 분출한다.
“샤이닝 블래스터!”
파괴의 섬광이 연이어 날아오며 레펜하르트를 노렸다. 레펜하르트도 비행 주문과 기격포 분출로 회피를 시도했지만, 아무래도 그의 비행 실력은 드레자보다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다.
결국 몇 대를 허용했다. 또다시 폭음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스파이럴 가드로 깔끔히 막아 내 별 피해는 없었지만…….
‘크으, 이거 점점 지치는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스파이럴 가드는 그 사기적인 위력만큼이나 오러 소모도 큰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철저하게 짐 언브레이커블만 노리는 수법이군, 이것은.”
오로지 회피에만 집중하며 비행에 지장이 없는 수준의 마법을 난사한다. 아무리 대마법사의 마법도 맨몸으로 튕기는 짐 언브레이커블이라지만 이렇듯 연타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다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조금씩 몸이 축나게 된다.
드레자가 차갑게 웃었다.
“크크큭, 네놈들이 다른 오러 유저처럼 기교가 있었다면 안 통했겠지.”
몽둥이를 휘둘러 파리를 잡는 형국이라지만, 무술의 달인 중에는 정말 몽둥이로 파리 잡는 인간들도 있다. 기교파 검사 중에는 칼질로 파리 날개만 벤다든가, 아니면 젓가락으로 날아다니는 파리를 아예 잡아 버리는 솜씨를 보이는 자들도 의외로 드물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