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권 제48장 초인들의 전쟁 (49/84)

제48장 초인들의 전쟁

1

적진을 향해 오러로 이루어진 순록을 내달리며, 이니야가 허공에 검을 흩뿌렸다.

“북해의 숨결!”

사아아아!

냉기의 안개가 그녀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의지가 있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안개가 교묘히 엘프들을 피해 달려오는 기사들을 덮쳐 갔다.

“크윽!”

“허억!”

순식간에 기사들의 중갑이 새하얗게 서리가 끼며 얼어붙었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말들의 움직임이 크게 둔화되며 돌진하던 기세가 크게 떨어졌다.

“지금이다! 나의 일족, 나의 자매들이여!”

이니야가 검을 들어 기사단을 겨누며 용맹하게 외쳤다.

“레펜하르트 님을 위해 저들을 섬멸하라!”

용맹하게 돌진하던 보랏빛 머리의 엘프 병사들이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프들의 미래를 위해서겠죠, 족장님.’

‘대놓고 자기 남자 챙기기라니?’

‘하긴, 저분 노처녀 시절이 길긴 길었지.’

말이야 어쨌건 이 전쟁의 중요성은 엘프들 역시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성적인 면이 강한 엘프들은 딱히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족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대놓고 자기 남자 이름을 부르짖어도 다들 아랑곳 않고 전투에 임하기 시작했다.

기사단과의 거리가 좁아지자 엘프들이 저마다 검을 휘두르며 낭랑한 음성을 토했다.

“내 손에 임해 줘요, 로시아.”

“나의 친구, 샤이드. 나와 함께 싸워요.”

엘프의 정령술은 오크들의 스피리츠 웨폰처럼 뜨거운 열혈 담긴 포효로 발동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전투의 흥분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하더라도, 정령을 다룰 때만큼은 친애와 우정으로 대해야 한다.

혼탁한 전장에 아름다운 정령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아아!

안 그래도 남자의 비율이 적다 보니 엘프 병력은 남녀 혼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남자들도 여자처럼 하나같이 미끈한 외모,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으로 정령을 부르는 엘프의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차라리 섬뜩하다.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이, 이것들이!”

“무슨 사이한 짓을 하려는 것이냐!”

정령의 기운이 사방에서 휘몰아치며 수백 개체의 물의 정령 로시아와 어둠의 정령 샤이드가 기사단에게 쏘아졌다. 정령술로 상대의 시선을 교란하며 엘프들이 일제히 마상의 기사들에게 몸을 날렸다.

“타아앗!”

엘프들은 하나같이 몸이 가볍고 날렵하다. 성노로만 자란, 아무런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엘프 여인조차도 서전트 점프 2미터가 가능할 정도로 날렵한 종족이다.

하물며 이 자리의 스티리아 일족은 모두 가혹한 북해의 환경 속에서 수많은 몬스터들과 싸우며 생존해 온 전투의 달인들.

대부분의 엘프 병사들이 저 높은 마상 위로 쉽게도 점프해 올랐다. 기사들도 반격했지만 날렵한 몸놀림으로 공격을 흘리며 오히려 상대의 등 뒤에 걸터앉는다.

순식간에 기사 한 명의 배후를 장악한 뒤 이니야의 부관, 세르펠이 단검으로 상대의 목을 길게 그었다.

“엘디아여, 용서하소서!”

기사의 목이 반 이상 베여 피를 뿌렸다. 반쯤 잘린 목을 덜렁거리며 기사의 시체가 땅에 떨어진다.

전장 곳곳에서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병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암살자의 모습으로, 엘프들이 기사의 목을 베고 말 위를 뛰어다닌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이는 눈의 여왕, 이니야.

“동토의 칼날!”

화려한 검풍과 함께 은빛 블레이드 오러를 뿌린다. 그녀는 단숨에 돌진한 기사단 수십을 베어 넘기며 적진을 가로질렀다. 완전히 진형이 와해된 기사들을 뒤따르는 엘프들이 처리하며 함성을 질러 댔다.

“엘디아여!”

“엘프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족장님 빨리 시집 좀!”

마지막 구령은 어째 좀 괘씸했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일족은 훌륭히 신성군 배후를 흩어 놓고 있었다. 한시름 놓은 이니야가 저쪽, 아스레일과 하다툼이 이끄는 부대 쪽을 힐끔거렸다.

‘저쪽은 어떻지?’

이니야의 참전으로 인해 신성군 전방의 사기도 크게 흔들렸다. 한동안 밀린 것처럼 보이던 안타레스군도 다시 기세를 가다듬고 맞서고 있었다.

황금기사 유서스가 여전히 엘드릴의 빛을 흩뿌리며 광범위한 파괴력으로 아군을 해치우고 있지만, 그 밖에는 팽팽한 국면을 유지 중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니야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늦지 않은 모양이다, 조금 헷갈렸는데.’

☆ ☆ ☆

신성군 배후를 기습하기 위해 이니야는 이백의 스티리아 일족 정병에 대륙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엘프 일족의 전사 오백을 이끌고 전장 좌측의 숲에 매복하고 있었다.

칠백이나 되는 병력이 매복하고 있음에도 전혀 적들의 정찰에 걸리지 않은 이유는 바로 스티리아 일족이 자랑하는 북해의 정령술 덕분이었다.

스티리아 일족은 주로 물과 어둠의 정령을 이용해 냉기를 다루는 부족.

이들은 어둠의 정령을 이용해 완벽하게 몸을 숨길 수 있다. 시각은 물론 마법이나 기감조차도 속이는 완벽한 은신술이다.

실제로 이니야가 처음 안타레스와 접할 때, 오러 유저인 칼켄이나 그토록 기감이 좋은 러스조차도 계곡 위에 숨은 스티리아 일족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다. 고작 해야 5서클의 정규 마법사가 띄운 옵저버 정도로는 저들을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몸을 숨긴 채 이니야는 카를의 말대로 기습할 타이밍만을 재고 있었다.

-안타레스는 적들에 비해 병력이 적지요. 그러니 제대로 기습의 묘리를 살려야 합니다.

일만의 신성군에 대비해 카를이 운용할 수 있는 부대는 오천이 한계였다. 현 안타레스의 국력상 그 이상은 무리였던 것이다.

수적 열세를 뒤엎으려면 절묘한 작전이 필수, 그래서 카를은 단순한 포위 공격 대신 기습에 의한 전세 역전을 노렸다.

-반드시 아스레일과 하다툼 부대가 몰아치거나, 혹은 완전히 밀리는 상황을 맞춰야 합니다. 그냥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배후를 노린다면 평범한 양면 공격이 될 뿐. 그래서는 적측도 간단히 반격합니다. 병력에서 우위에 있으니 전방 부대는 전방을 상대하고 후방 부대는 후방을 상대하면 그만이니까요. 상대 진영의 의식이 몽땅 한쪽으로 쏠리는 바로 그때를 노려야 하는 겁니다.

현명한 이니야는 바로 이해했다.

-무술의 카운터 같은 이치로군?

카운터 공격은 단순히 상대의 힘에 이쪽 힘을 실어 두 배로 돌려주기에 그토록 강한 일격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상대의 의식, 공격에 전념하느라 방어에 소홀해진 마음의 틈새를 노리기에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이다.

이해한 이니야를 향해 카를은 기습해야 할 정확한 타이밍도 알려 주었다.

-가장 좋은 시기는 오크 라이더들이 기사들을 몰아치며 적진을 와해시킬 때입니다만, 아마도 그런 좋은 기회는 오지 않을 겁니다.

똥고집 오크들이 끝끝내 스피리츠 웨폰을 쓰겠다 우겼으니, 카를은 오크 라이더들이 전투를 개시하자마자 바로 밀릴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아마도 초반에 꽤 당황하며 밀리겠지요. 신성군 쪽은 승기를 잡았으니 신 나서 몰아칠 테고. 바로 그때 기습을 하십시오. 아무리 대기하고 있는 부대가 있다 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의식이 전방에 쏠리게 됩니다. 거기서 갑자기 배후 부대가 나타나면 반응이 쉽지 않지요. 지휘관도 당황할 테고, 만약 지휘관이 당황치 않고 제대로 반격 명령을 내린다 해도 따르는 병력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을 테니까요.

군사학에선 초보적 수준인 매복, 기습 작전이지만 카를은 성공을 확신했다.

너무나도 매복하기 좋은 위치의 숲을 신성군이 미리 정찰하지 않을 리 없다. 그리고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 후에는 반드시 방심하게 되는 것이다. 스티리아 일족의 은신술은 그만큼 반칙적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작전이었고, 그래서 이니야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계속 기습할 기회를 노렸다.

문제는 여기서 카를조차도 예상 못한 사태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저 무식한 종자들이 설마 무기 회수할 생각도 안 하고 맨주먹으로 덤빌 줄이야?’

이니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분명 카를 말대로 오크 라이더들이 일순 무기를 제압당하긴 했다. 그런데 또 밀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맨주먹 붉은 피, 뜨거운 열혈로 대뜸 기사단과 붙어 버렸다.

천하의 카를이라도 설마 오크가 저토록 무식할 줄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들은 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고 저게 몰아치는 것인지 아니면 밀리는 것인지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이니야도 이게 맞는 타이밍인지 아닌지 헷갈려 배후 공격을 시도할 타이밍을 놓쳤다.

덕분에 상당한 아군의 피를 흘린 후에야 합공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아주 효과가 없진 않아!’

늦기는 했지만, 어쨌건 이니야는 분명 안타레스군이 밀리는 타이밍에 뛰쳐나왔다. 덕분에 전방의 기사들도 배후 기습에 당황해 집중력을 잃었으니 그럭저럭 기습의 묘리는 살렸다 할 수 있으리라.

후방의 신성군은 암살자처럼 신출귀몰하게 전장을 날뛰는 스티리아 일족의 빠른 기동력에 휩쓸려 일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니야는 순록의 머리를 돌렸다. 이 틈에 저쪽을 도와야 했다.

‘일단 저자를 처리해야지.’

저 멀리서 날뛰는 황금기사 유서스, 저 강력한 마검사를 막으려면 역시 오러 유저가 아니면 안 된다. 하다툼이 덫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는 지금 그녀만이 유서스를 막을 수 있는 존재다.

“세르펠, 지휘를 맡기겠다!”

“예, 족장님!”

부관에게 명을 내리며 이니야가 막 오러의 순록을 달리려 할 때였다.

“타아아앗!”

우렁찬 기합과 함께 적진 중심에서 보라색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을 꿰뚫었다. 동시에 눈부신 백마를 탄 중년 기사가 뛰쳐나오며 고함을 터트렸다.

“당황하지 마라, 세이어의 용사들이어! 저 마녀는 이 몸이 상대한다!”

☆ ☆ ☆

난전 속에서 이라나드 공작은 연신 말을 달리며 좌우로 참격을 날렸다. 오러 유저의 능력은 과연 가공해, 날렵한 스티리아 일족조차 채 반응도 못 하고 목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엘프들을 학살하며 공작이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흥분하지 마라! 이미 예상했던 것 아닌가! 훈련받은 대로 움직여라!”

그제야 기사들도 냉정을 되찾고 반격에 나섰다.

매복 공격이 있을 것임은 이미 공작의 말에 따라 예상했다. 그저, 아무리 정찰해도 보이지 않는 적이 어찌 매복을 하냐 싶어 정신적으로 방심했을 뿐.

일단 냉정을 되찾고 나니 기사들도 미리 준비한 작전대로 엘프 병력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경험 많은 기사들이 사방에서 소리 질러 후학들을 일깨웠다.

“저들에게 현혹되지 마라! 그저 움직임이 기묘하고 공격 범위가 넓은 것뿐, 공격 자체는 강하지 않다!”

“하피들을 상대한다는 기분으로 싸워라! 그럼 별것 아니다!”

정신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공격하는 하피와 점프력으로 상대의 뒤를 노리는 엘프의 전투 방식은 비슷한 데가 있다. 물론 기술의 교묘함에서 크게 차이가 나니 하피 따위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좋아! 슬슬 보인다!”

“잠깐 날뛰었지만 끝이다! 어딜 감히 엘프 따위가!”

일단 상대하는 감각을 되찾고 나니 엘프의 빠른 몸놀림도 아주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니다. 피 흘리는 기사들의 수가 빠르게 줄었다. 동시에 스티리아 일족의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거 유서스 잡으러 갈 때가 아니었다. 당황한 이니야가 검을 휘둘러 다시금 오러 스킬을 발휘했다.

“북해의 숨결!”

냉기의 안개가 혼란한 전장 전역을 뒤덮어 갔다. 그녀의 오러 스킬, 북해의 숨결은 강력한 냉기로 적의 움직임을 제어하며 그 범위 또한 대단하다. 게다가 적아가 섞인 속에서도 적군만 골라 얼리는 놀라운 제어력 또한 갖추고 있다.

사아아아!

안개가 퍼지며 다시 기사들의 기세가 꺾였다. 세이어의 신관들이 신성 주문을 발동하며 막으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으윽! 어찌 세이어의 가호가 먹히지 않는단 말인가!”

“마법의 안개라면 모두 막을 수 있거늘!”

이라나드 공작이 혀를 찼다.

‘끄응, 역시 저 수법은 어떻게 대처법이 없군.’

이니야의 저 초월적인 오러 스킬에 대해선 이미 그 정보가 공작에게도 알려져 있다. 차탄 공국 등 여기저기서 막 써 댔으니 몸소 당한 이들도 꽤 많았다.

문제는, 알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신성 가호도 통하지 않고 마법적인 방어도 안 통한다. 정령술은 마법과 다른 원리, 다른 차원의 기술이라 디스펠이나 안티 매직 계열의 대마법 방어에 전혀 가로막히지 않는 것이다. 오러와 정령을 융합해 현세의 물질적 현상으로 바꾸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저 오러 스킬에 편법 따윈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사들 몸에 불을 지를 수도 없고…….’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시전자 본인을 처리할밖에!’

연신 말을 박차며 이라나드 공작은 엘프 진영을 그대로 돌파했다. 보랏빛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뻗어 내며 공작이 소리쳤다.

“안타레스의 엘프 오러 유저! 그라임의 이라나드가 그대를 상대한다!”

2

쌔애애액!

블레이드 오러가 파공음을 울리며 쇄도한다. 예사롭지 않은 기세, 다른 데 신경 팔면서 상대할 만큼 만만한 공격이 아니었다. 북해의 숨결을 거둔 뒤 이니야도 정신을 가다듬어 반격했다.

파아앙!

보라색과 은색의 오러가 허공에 충돌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 파문 사이로 이라나드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니야를 노려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조용히 백마에서 내렸다.

보통 하마下馬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

하지만 오러 유저의 대결에서 말을 포기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말에 올라타서는 모든 기량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오러 유저라는 초인의 숙명, 이제부터 전력을 다하겠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으음…….”

이라나드 공작의 강함을 느낀 이니야도 표정을 굳히며 순록에서 내렸다. 오러로 이루어진 영수가 허공에서 녹아들듯 사라졌다.

‘신기한 수법이군.’

그 모습에 잠시 감탄한 이라나드가 차분한 눈으로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그라임의 이라나드라 하오.”

“스티리아의 이니야다.”

오만한 표정으로 이니야는 존대조차 없이 대꾸했다. 하지만 공작은 방약무인하다 느끼지 못했다.

차가운 빙벽처럼 유유하면서도 굳건히 흐르는 저 오러는 이니야가 얼마나 강자인지 증명하고 있다. 저 싸늘하면서도 놀라운 미모에는 역시 저 도도한 모습이 극히 어울린다.

‘과연, 눈의 여왕이라 불릴 만한 기세로다.’

하지만 이라나드 공작 또한 그라임 왕국 최강의 오러 유저로 오랜 세월 명성을 떨쳐 온 몸이다!

“내 그대를 존중해 예의를 갖췄거늘, 그런 반응인가? 역시 엘프는 어쩔 수 없는 천한 것들이군!”

오만하기로는 공작 역시 조예가 깊은 것이다. 바로 태도를 바꾸며 공작이 자세를 잡았다.

이니야가 코웃음을 켜며 마주 검을 노렸다.

“서로 죽일 처지에 예의는 얼어 죽을? 그 심장에 구멍 뚫은 후엔 마음껏 예의를 차려 주지!”

투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이내 폭풍이 되어 사방으로 불어 닥쳤다.

“죽여 주마! 엘프!”

“흥! 누구 마음대로?”

두 오러 유저가 살기를 띤 채 서로에게 돌진했다.

☆ ☆ ☆

하다툼은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었다.

“어림없다, 오크 놈!”

“세이어께서 보고 계신다!”

“우리가 물러설 것 같으냐!”

선두의 방패 기사들은 아무리 오러로 후려 패도 처맞으면서 끝끝내 버티고 있었고, 뒤에 선 치사한 것들은 기사도 부르짖는 주제에 마음껏 활이며 창이며 그물이며 끈끈이 등을 던져 대고 있다. 그렇다고 위로 점프하면 마법이 날아와 격추시켜 버린다.

“씨발! 이 짜증 나는 놈들!”

아까부터 몇 번이나 터트린 욕설을 재차 터트리며 하다툼은 초조해했다.

이들의 포위진은 단단했지만, 날카롭진 않았다. 공격 자체는 부실해 딱히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가 아니다.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이 오크 전사의 전통이라지만 이런 치사한 놈들을 ‘상대’로 여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하다툼은 아까부터 힐끔힐끔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이니야가 이끄는 스티리아 일족이 합세하며 전황은 다시금 바뀌었다. 오크 라이더야 원래 아군이 밀리건 말건 항시 사기충천한 놈들이니 별 효과가 없었지만, 인간은 달랐다.

분위기에 오락가락하는 것이 인간이란 종자의 특징인 바, 사기가 떨어지면 지닌 실력의 반도 못 발휘하다가도 사기가 오르면 실력의 두 배도 우습게 발휘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니야의 참전으로 아스레일이 이끄는 경장기병의 사기가 크게 올라 오히려 기사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한창 사기가 오른 그들의 실력은 오크 라이더와 비교해도 오히려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아니, 오히려 신성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항하는 오크 라이더보다 오히려 더 전공을 세우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역시 전황은 밀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날뛰고 있는 누리끼리한 마법 기사 한 놈 때문에!

‘검 든 놈이 치졸하게 마법을 쓰다니! 저러고도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황금기사 유서스는 여전히 파죽지세, 걸리적거릴 것 없이 적진을 마음껏 누비며 마법을 난사하고 참격을 뿌려 대고 있다.

사기 오른 경장기병도, 용맹한 오크 라이더도 저자의 검에 걸리면 한 줌의 고혼이 될 뿐이었다. 불굴의 용기만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만큼 실력 차가 너무 컸다.

‘아, 큰일났네! 이러다 애들 다 죽겠네!’

하지만 저자와 맞설 유일한 강자인 자신은 이 요상한 덫에 갇혀 허둥대고 있을 뿐.

울화통이 터져 하다툼이 분노를 터트렸다.

“네놈들도 전사라면 당당하게 싸워라! 이 무슨 쪼잔한 짓이냐!”

당연히 기사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몬스터를 상대로 정당함을 논하다니, 언어도단!”

“그런데 저 오크는 참 말 잘하네. 발음도 또렷하고.”

“안타레스 오크들은 저렇게 말발 좋은 놈들이 많다더군. 신기한 것들이야.”

진형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상대에 대한 의문을 논할 정도가 된 기사들이었다. 살다 살다 말발 좋단 소리 처음 들어 본 하다툼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하필 처음 듣는 찬사(?)가 적에 의해서라니, 실로 서글픈 이야기다.

여하튼 지금 당장 유서스를 막을 이는 안타레스군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현실.

‘이럴 줄 알았으면 킨지르도 같이 왔음 딱 좋았겠는데.’

안타레스에 합류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낸 맹우를 떠올리며 하다툼은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크로방스 서부 국경으로 향한 킨지르가 이 자리에 나타날 리는 만무.

답답해진 하다툼이 애꿎은 카를에게 원망을 던졌다.

‘뭐야! 재상! 우리 둘이면 된다며!’

카를은 신성군에 대비해 안타레스 기사단과 오러 유저 이니야, 하다툼을 투입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오러 유저는 투입하지 않았다.

아무리 오러 유저를 빵틀에서 찍어 낸다는 평마저 듣는 안타레스 공국이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오러 유저가 널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수가 딱 정해져 있는 것이다.

크로방스의 서부 국경에 필요한 오러 유저를 보내고, 어떻게든 안타레스 공국 측에도 필요 전력을 남기기 위해 카를은 머리를 쥐어짜며 고심했다. 전력은 제한되어 있고 적측은 강력하니 적재적소에 병력을 운용하지 않으면 도저히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다.

이쪽에 이니야와 하다툼을 투입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니야는 누가 뭐래도 현 안타레스 공국 최강자 중 한 명, 그라임 왕국 최강의 오러 유저를 상대하려면 그녀 정도 실력자는 되어야 했다. 하다툼이 상대적으로 좀 떨어지긴 하지만 유서스도 제대로 된 오러 유저는 아니니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카를 나름대로는 아슬아슬하게 힘의 균형을 맞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카를이라도 전장의 모든 것을 다 예측할 수는 없으니, 하다툼이 발이 묶이며 유서스를 감당할 이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어 버렸다.

“크하하하! 벌레 같은 놈들!”

신 나게 날뛰며 살육의 쾌감에 젖은 저 황금기사를 보며 하다툼이 허탈한 신음을 흘렸다. 이래서야 자신을 믿고 이곳에 보낸 카를을 볼 면목이 없다.

‘아, 부끄럽도다!’

☆ ☆ ☆

이라나드 공작은 오러 유저이며 동시에 그라임의 왕족이기도 하다. 왕족으로 태어나 제왕학을 배운 그의 기품은 검술에도 깃들어 있어 그를 강검사 계열로 키워 주었다.

강력한 위력과 품격으로 적을 압도하며 반격의 틈조차 주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익힌 그라임 왕가의 검술, 제왕검의 묘리였다. 흔들림 없는 안정적인 자세 속에서 뻗어 나오는 파괴적인 검세 앞에 수많은 적수가 여태 무릎을 꿇었다.

“제왕의 일격!”

중후하기까지 한 참격을 날리며 이라나드 공작이 이니야의 정면을 베어 갔다.

단순한 베기처럼 보이지만, 저 보랏빛 블레이드 오러 주위로는 보이지 않는 오러의 기류가 복잡하게 얽혀 올가미처럼 따라오고 있다. 오러에 머금은 속박력으로 상대에게 회피를 허용치 않고 막은 상대를 무기째 베어 버리는 이라나드 공작의 오러 스킬, 제왕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 강력한 속박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흥!”

조소와 함께 이니야가 공세의 주위로 검화를 피웠다. 은색 블레이드 오러가 냉기를 담은 눈꽃이 되어 제왕의 일격에 담긴 속박력을 하나하나, 깔끔하게도 해체해 버린다.

그러고 나면 남은 것은 그저 단순한 베기일 뿐, 버들가지처럼 살랑대며 이니야는 쉽게도 스텝을 밟아 공세를 피했다.

“백야의 눈보라!”

이번엔 이니야가 반격에 나섰다. 화려한 검풍이 설화를 머금고 피어나 사방에서 예리한 찌르기를 동반해 불어온다. 오러 가드로 몸을 지키지만 예리함이 너무 높아 가드가 자꾸 뚫린다. 전신에 옅은 자상을 입은 채 이라나드 공작이 뒤로 물러섰다.

“크으으윽!”

오러 가드 덕에 상처는 얕았지만, 그래도 갑주 여기저기에 금이 가고 그 사이로 붉은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니야의 우위였다.

둘의 전투는 아까부터 이런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니야의 화려한 검세와 오러 운용은 굳건한 바위 같은 이라나드 공작의 틈새를 정확히 노릴 정도로 정밀했다. 반면 이라나드 공작의 일격은 그녀의 기교 앞에 대부분의 힘을 잃고 빗나갈 뿐이다.

“그대도 상당한 강자, 하지만 아직 내 상대는 아니다.”

오만한 이니야의 말에 이라나드 공작은 수치로 미간을 찌푸렸다.

‘제길, 아무리 명성은 들었지만 고작 엘프, 그것도 여인이 이 정도일 줄이야…….’

눈의 여왕 이니야가 바실리의 왈그란과 자유 기사 크로아틀, 두 오러 유저를 일격에 쓰러뜨리고 그중 한 명을 황천으로 보내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가 엘프라는 사실을 잊고 그저 순수한 무인의 마음가짐으로 이니야를 상대했다.

그런데도 실력에서 밀린다. 그라임 왕국 최강의 검사인 자신이!

‘크윽! 질 수는 없다!’

각오를 다지며 이라나드 공작이 재차 덤벼들었다. 이니야도 맞서 싸웠다. 검투가 이어지고 오러가 사방으로 뻗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이 짙어지는 쪽은 이라나드 공작이었다.

‘어찌 이런 검세가? 전혀 틈이 없지 않은가!’

아무리 전력을 다해도 저 교묘한 검세는 자꾸 방어를 뚫고 전신에 자상을 남긴다. 신체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린 채 공작은 암담해했다.

“크으으윽!”

이대로라면 질 판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상황을 뒤엎을 궁극의 오러 스킬, 제왕의 진군이 있었지만 이니야가 통 구사할 틈을 안 주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기술이었다.

원래 오러 유저끼리는 궁극기로 승부를 보는 것보단 이렇게 지닌 기량으로 점점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더 흔한 것이다. 짐 언브레이커블이나 일격의 미학을 추구하는 오크, 대지 공명의 힘을 쓰는 드워프가 특이한 것일 뿐.

결국 이니야의 일격이 이라나드 공작의 어깨와 허벅지를 동시에 베어 버렸다.

“타앗!”

피를 뿌리며 이라나드 공작이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오러를 운용해 간신히 한 다리로 서서 무릎을 꿇는 굴욕은 면했지만, 좌반신 전체가 움직이질 않았다.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패배였다.

“끝내겠다!”

차가운 외침과 함께 이니야가 몸을 날렸다. 이대로 적의 수장의 목을 베어 전투를 끝내겠다는 심산이었다.

바로 그 순간, 한 줄기 황금의 빛이 이라나드 공작을 살렸다.

“울어라, 엘드란!”

마검 엘드란의 최강 술식, 엘드릴의 빛이었다. 공작의 위기를 감지한 유서스가 그새 전장을 떠나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가공할 파괴의 빛이 이니야의 좌측을 노리고 정확히 날아들었다. 이대로 공작을 노리다간 저 빛에 직격할 판이라 이니야도 어쩔 수 없이 검 끝을 돌렸다.

검을 십자로 그으며 그녀가 소리쳤다.

“영원의 빙벽!”

냉기를 담은 오러가 물질 변환의 힘을 담아 실체를 지닌 거대한 얼음 방벽이 되었다. 황금의 빛이 방벽과 충돌하며 대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빛 가루를 뿌린다. 그렇게 둘 사이를 벌리며 유서스가 말을 탄 채 중간에 뛰어들었다.

피 흘리는 공작을 향해 유서스가 다급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아, 덕분에 살았다, 유서스 경.”

감사를 표하며 공작은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잠시 물러난 그녀는 다시 살기를 띠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유서스의 기습에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는 오히려 호기였다. 전방에서 날뛰던 유서스가 제 발로 이곳에 와 주었으니 찾아갈 수고를 덜은 것이다.

“마침 잘됐군. 둘 다 이 자리에서 처리해 주겠어!”

그녀의 외침에 이라나드 공작이 화급히 소리쳤다.

“세이어의 용사들이여! 저 마녀를 막아라!”

기사들이 일제히 이니야에게 달려든다. 블레이드 오러를 휘둘러 선두의 기사 다섯을 동시에 베어 넘기며 그녀가 조소를 던졌다.

“목숨이 아까워 부하들의 힘을 빌리느냐? 그러고도 그대가 전사라 자처할 수 있는가?”

살짝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공작이 중얼거렸다.

“그야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쟁에서 패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잠깐 패배의 치욕에 휩싸인 이라나드 공작이었지만, 그는 어느새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이종족들의 힘에 대해 충분히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패배로 인해 입은 자존심의 상처도 남들보다 훨씬 작은 편이었다.

이니야에게 덤벼드는 기사들을 향해 공작이 소리쳤다.

“세이어의 기사들이여! 저 마녀는 이미 충분히 지쳤다! 더 이상 이제까지의 무위는 보이지 못할 것이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역시 그라임 최강의 기사란 명성은 거저먹은 것이 아니다. 이라나드 공작은 밀리는 와중에도 착실히 이니야의 체력을 갉아먹었고 또 기감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아채고 있었다.

상대가 지쳤다는 소리에 기사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상대는 이라나드 공작마저 패퇴시킨 강력한 오러 유저, 만약 저 엘프 여인의 목을 벤다면 그 이상의 전공은 없을 터였다.

“저 년의 목은 캠벨 기사단이 갖겠다!”

“무슨! 그것은 페이난의 차지다!”

☆ ☆ ☆

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기사들이 이니야를 포위해 정신없이 공세를 퍼부었다. 평소 보이던 오러 유저에 대한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다.

거기에 이라나드 공작은 떡밥을 하나 더 놓았다.

“저 여인의 목을 베는 자에겐 백작의 작위를 내리겠다! 그라임의 이라나드 공작가가 보증한다! 저 여인에게 작은 상처를 내기만 해도 금화 천 닢을 하사하겠다!”

기사뿐 아니라, 보병들마저 탐욕으로 눈이 벌게져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니야가 조롱하며 좌우로 오러를 뿌렸다.

“헛된 욕심에 목숨을 거는 거냐? 어리석은 놈들!”

지쳤다 해도 오러 유저는 오러 유저, 단숨에 포위한 기사 수십이 피를 뿌리며 동강 나 날아갔다. 실로 무시무시한 무용. 평소라면 맥없이 당한 동료들의 모습에 바로 기세가 꺾였을 것이다.

그러나, 재차 말하지만 인간은 분위기에 참 잘 휩쓸리는 종자들이다.

“으아아!”

“저년을 죽이면 나도 백작이다!”

“스치기만 해도 금화 천 닢이야!”

평소라면 블레이드 오러만 봐도 벌벌 떨던 이들이 지금은 공포를 잊고 계속 덤벼든다. 동료가 죽어도 아랑곳 않는다. 그저 눈앞의 여인에게 창칼을 찌를 생각으로 뇌가 마비되어 있다.

“크윽!”

끝없이 몰려오는 병력, 사방에서 찔러오는 공세 속에서 이니야의 검세도 점점 기세를 잃었다. 오러 스킬을 쓰기도 쉽지 않았다. 어떤 오러 스킬이라도 아주 잠깐의 발동 시간은 필요한데, 이런 난전 속에서는 그럴 틈이 없다.

물론 이니야쯤 되면 단순한 블레이드 오러라도 가공할 위력을 낸다.

“타아앗!”

기합과 함께 또다시 그녀의 은빛 오러가 넓게 휘둘러졌다. 또다시 10여 미터 반경에 피의 꽃이 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점점 이니야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일격에 강철도 베고 반경 10여 미터를 싹 쓸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 오러 유저라는 초인,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 역시 사람이고 찌르면 피가 나는 육체를 지닌 몸이다.

아무리 주위를 쓸어 봤자 바로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창을 찔러 댄다. 강력한 오러 가드로 몸을 보호한 오러 유저는 기사의 차징조차도 막을 수 있지만 그 오러 가드조차도 전신, 모든 범위를 균일하게 덮는 것은 아니다. 오러 유저의 의식에 따라 강하고 약한 부분이 나뉘어 있다.

“으으…….”

점점 의식 밖에서 자꾸 엉뚱한 일격이 방어를 뚫고 들어와 이니야는 신음을 흘렸다.

기감도 없는 일개 기사가 이니야의 오러 가드 속 강약을 파악할 수 있을 리 없겠지만, 그 공격이 무수히 이어지면 이야기가 다르다.

눈 감고 다트를 던져도 수십, 수백 번을 던진다면 결국 한 번은 중앙을 꿰뚫게 마련.

“크윽!”

필연적 우연에 의해, 한 보병의 눈먼 검이 그녀의 옆구리를 시원하게 긁었다.

대륙의 격언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전장의 눈먼 검은 설사 오러 유저라도 피할 수 없다…….

“스, 스쳤다! 금화 천 닢이다!”

물론 이 보병의 외침은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이니야가 바로 그의 목을 시원하게 날려 버렸으니까. 저 격언은 오러 유저 찌른 눈먼 검이 그 후 어떻게 된다는 것까지는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흥!”

콧방귀를 뀌며 이니야는 또 한 차례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늘려 주위를 모조리 쓸어내렸다. 일격에 수십의 목숨이 피를 뿌리며 사라졌다.

그렇게 잠시 공터를 만들었지만 이니야는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피에 취하고 탐욕에 취하고 명예에 취한 신성군은 저 가공할 무위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재차 덤벼들고 있었다.

“죽어라! 엘프 마녀!”

이니야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 독한 놈들…….’

손에 쥔 검이 무겁게 느껴진다. 호흡도 가빠 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의 일족 역시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다.

체력과 지구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니야뿐 아니라 엘프라는 종족 자체의 약점, 초반에는 매섭게 내달린 엘프 병력은 슬슬 체력이 떨어지며 기사들에게 밀리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황금기사 유서스가 있었다.

“아이스 볼트, 프레임 애로우! 라이트닝 스톰!”

이라나드 공작을 구해낸 유서스는 바로 이니야를 상대하지 않았다.

‘나는 상대가 안 된다.’

일대일로 붙어 봤자 승부가 뻔하다. 평소라면 이대로 물러서는 것이 기사의 수치겠지만 지금은 전쟁터, 굳이 그가 이니야와의 대결을 피한다 해도 딱히 명예롭지 못한 행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군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욕심을 버렸으니 찬사받을 행위였다.

뭐, 상대가 러스나 레펜하르트였다면 승패를 도외시하고 덤볐겠지. 하지만 이니야는 까놓고 말해 별로 자주 만난 적도 없는 상대, 딱히 감정이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서스는 부담 없이 이니야를 기사들에게 맡긴 채 후방의 엘프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울부짖어라, 엘드란!”

엘드란에 각인된 마법을 난사하며 마음껏 학살의 정경을 그린다. 역시 전장에서 다수를 상대하는 데는 오러 유저보다 마검사가 훨씬 효율이 좋다. 신성군의 승리를 위해서는, 유서스가 이렇게 행동하는 쪽이 옳은 것이다.

모든 것이 카를이 세운 작전과는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니야가 한탄했다.

‘크, 이래서 초반에 적장의 목을 베었어야 했는데!’

원래 카를의 작전은 속전속결. 엘프의 저질 체력을 잘 아는 카를은 결코 전투를 길게 끌지 않도록 다짐, 또 다짐했다.

하지만 역시 전장은 예상대로 돌아가 주질 않는다.

평범한 인간처럼 이종족을 무시하지 않은 이라나드 공작의 노련한 지휘는 속전속결의 기회를 앗아 갔다. 이대로 난전이 된다면 결국 수적으로 열세인 안타레스군의 패배다.

그리고, 지금 이니야는 전쟁의 승패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목을 내놓아라! 마녀!”

“아으, 제발 스치기만 해라!”

대륙의 유수한 역사 속에서 대오러 유저용 전법에 죽은 오러 유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전장의 혼란에 휩쓸려 일개 창칼에 죽은 이는 의외로 많다.

이니야 역시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공격 앞에 목숨조차 위태로운 처지, 이대로라면 오러를 각성한 무인답지 않게 하찮은 칼에 맞아 죽을 판이었다.

‘빌어먹을!’

점점 가빠지는 호흡 속에서 그녀는 문득 죽음을 직감했다. 동시에 한 남자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평생 처음 만난 완벽한 남자.

생전 처음으로 그녀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거구의 사내.

아련함이 가슴 한구석을 맴돌았다.

‘레펜…….’

그러나 이니야는 이내 머리를 흔들어 뇌리 속 사내의 그림자를 떨쳤다.

‘흥! 잡념 따위!’

그녀는 검을 쥔 전사였다.

검에 매진해 오러를 각성한, 전사의 길을 걷는 자였다.

그런 자신이 죽음을 앞에 두고 마치 일개 아녀자처럼 남자의 얼굴 따위를 떠올리는 부끄러운 짓은 허용할 수 없었다.

결코 레펜하르트 ‘따위’를 떠올려 이제껏 쌓아 올린 전사의 긍지를 버릴 수는 없다!

“동토의 칼날!”

잡념을 버린 채 이니야가 마지막 힘을 끌어 올렸다. 싸늘한 표정 위로 냉기를 가득 뿌리며 살기를 사방으로 퍼트린다. 눈의 여왕이라는 칭호처럼, 그녀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실로 여왕다운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라! 인간들아! 와서 내 목을 가져가 보아라!”

오러를 폭발시켜 주위 수십 미터를 피바다로 만들며 그녀가 잔혹하게 소리쳤다.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사기충천한 신성군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저 달려들고 또 달려들 뿐.

지친 이니야를 포위한 채 신성군이 함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함성이 비명으로 이어졌다.

“……아아아아악!”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아홉 줄기의 빛의 기둥, 그것이 그녀를 둘러싼 모든 병력을 한 번에 날려 버리며 가공할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놀란 이니야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어머?’

허공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연환 기격포!”

해가 떠오른 것 같은 찬란한 황금의 섬광 속, 거구의 사내가 허공에 떠올라 주먹을 내뻗는다. 단 일격에 빛의 대포가 쏘아져 대지를 거죽째 벗겨 내며 광풍을 동반한다.

갑작스레 나타난 그를 보며 신성군의 안색이 바뀌었다. 허공을 올려다본 유서스가 놀람과 증오를 담아 소리쳤다.

“레펜하르트!”

3

레펜하르트가 낙하하는 유성처럼 그대로 전장에 내리꽂혔다.

“아발란시 킥!”

정말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그가 지면과 격돌하는 순간 어마어마한 파문이 일어나며 주위의 병력들을 싹 쓸어버린다. 뒤이어 레펜하르트가 양팔을 좌우로 휘두르며 오러를 내뿜었다.

“스트레이트 캐논!”

오러의 장막이 반경 수십 미터를 싹 휩쓸며 또다시 피보라가 인다. 신성군의 비명이 아우성쳤다.

“크억!”

“으아악!”

“아아악!”

단 한 방에 전황을 뒤바꾸며 등장한 그의 모습에 신성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저, 저자는!”

“권왕 레펜하르트!”

이니야에게 다가가며 레펜하르트가 안도의 얼굴로 말을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이니야?”

위기의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 기적처럼 그녀를 구원해 주었다.

이니야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레, 레펜하르트 님…….”

평범한 여인이라면 여기서 감동치 않을 수 없었겠지만…….

“어째서 당신이 여기 있는 겁니까!?”

버럭 화를 내며 이니야는 되려 쌍심지를 켰다. 레펜하르트가 움찔하자 그녀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대는 엘드릴 가드를 보호해야 하지 않습니까? 엘드릴 가드는 어쩌고 이곳에 오신 건가요? 함부로 진지를 이탈하면 카를 재상의 작전이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감동은 감동이고, 책임은 책임이다. 이니야는 분명 사랑 중인 여인이지만 동시에 한 일족을 책임지는 족장이었다.

‘아, 이럴 줄 알았어.’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전생 후 많이 성격 바뀌긴 했지만 역시 이런 면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기껏 구해 준 건데 감사의 말은 없을망정 보자마자 구박부터 하다니?

‘이러니 전생 때도 전혀 친하게 지내질 못했지.’

지친 와중에도 싸늘한 눈으로 타박하는 빛을 보내는 이니야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머쓱해하며 대꾸했다.

“딱히 이쪽을 원조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쪽으로 향해야 할 이유가 있었어요.”

“무슨……?”

“아니, 일단은 상황부터 정리합시다. 이거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니.”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신성군이지만, 그들은 어느새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라나드 공작의 빠른 반응 때문이었다.

“당황할 것 없다! 내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권왕이 직접 올지도 모른다고!”

부상 속에서도 공작은 후방으로 물러나지 않고 계속 지휘봉을 쥐고 있었다. 이미 권왕이 직접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공작의 예측은 신성군 각 수뇌부에 전달되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다들 이내 냉정을 찾았다.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신성군 기사와 병사들이 이젠 창끝을 레펜하르트에게 향했다. 공작이 소리쳤다.

“두려워 마라! 그도 역시 사람이다! 훈련받은 대로 행하면 결코 쓰러뜨리지 못할 것 없다!”

“으아아아!”

이니야를 상대로 해, 오러 유저도 결국 한계가 있음을 확인했다. 기세등등하게 신성군이 레펜하르트를 포위하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세이어를 위하여!”

“권왕이여! 그 목을 베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겠다!”

그러나 정작 이라나드 공작은 지휘봉을 내려놓으며 부관에게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퇴각 준비를 해라.”

“네? 지금 한창 사기가 올랐습니다만?”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이젠 안 돼. 아무리 병력을 몰아붙여 봐야 저 빌어먹을 짐 언브레이커블은 못 잡는다.”

☆ ☆ ☆

신성군이 물 밀 듯이 사방에서 몰려온다. 레펜하르트가 다시금 양팔을 좌우로 떨쳤다.

“스트레이트 캐논!”

황금빛 오러의 파도가 반경 10여 미터를 쓸어 내며 기사와 말, 병사가 통째로 박살 나 육편이 되어 허공에 나부꼈다.

실로 끔찍한 광경, 하지만 신성군의 사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물러서지 마라, 세이어의 용사들이어!”

이미 다가가다 박살 나는 광경은 이니야를 상대하며 충분히 본 후다. 어떻게든 저 공세만 피해 접근한다면 오러 유저라 한들 피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과연, 레펜하르트도 이니야처럼 이내 사방에 적의 접근을 허용했다. 주먹을 날리고 연신 발길질을 해 댔지만 역시 인해전술은 당하기 힘들었다.

사방에서 창칼이 날아들었다.

“죽어라, 권왕!”

“제발 스치기만 해라!”

레펜하르트는 이니야보다도 기교에 둔하다. 그녀보다 훨씬 많은 공격을 허용했다.

그렇다.

허용은 했다…….

탕! 파지직! 타타탕!

찌른 창칼이 레펜하르트의 육체에 닿는 순간, 불꽃이 튀고 금속 비비는 음향이 울려 퍼졌다.

자신에게 닿은―찔린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닿은!― 창칼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심드렁하게 뇌까렸다.

“이런, 스쳤군.”

똑같이 찔렸지만 레펜하르트의 육신에는 긁힌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신성군 기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

히죽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휘둘렀다.

“잘 가라.”

콰아아아아앙!

오러의 파문이 사방으로 뻗어 가며 공격한 병력 전부를 피 떡으로 만들어 사방으로 퍼트렸다. 사람의 주먹이 행한 일이라기보다는 무슨 대폭발 같은 광경이었다.

그제야 신성군 병력의 머리가 식으며 대륙의 격언이 떠올랐다.

전장의 눈먼 검은 오러 유저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는 눈먼 검도 뚫을 수 없다…….

드디어 탐욕으로 마비되었던 뇌에 이성이란 것이 찾아왔다. 기사며 병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용맹하게 덤벼들 수 있었던 이유는, 운이 좋다면 상대를 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소용이 없는데 어디서 용맹의 근거를 찾으란 말인가?

레펜하르트가 황금빛으로 전신을 물들이며 정면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양 주먹 가득 오러를 넘실거리며 그가 고함을 질렀다.

“내 앞을 막는 자!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 ☆ ☆

황금빛 거인이 전장을 날뛴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부수고 박살 내며 패도적으로 피를 뿌린다.

어느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피를 볼 수 없었다.

“이, 이런…….”

단 한 명의 가세로 인해 승기를 잡았던 전장이 삽시간에 패색으로 돌변한다. 부관이 덜덜 떨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이름 높은 권왕이라지만 어찌 저런 위력이…….”

이라나드 공작이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 짐 언브레이커블이 상종 못 할 종자들이란 거다.”

세상에는 다양한 오러 유저가 있다.

일대일에 특화된 자, 오러양이 월등한 자, 놀라운 기교를 지닌 자, 그중에는 오러를 광범위하게 뿌려 전장에서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이들도 물론 있다.

“폭염의 기사 탈론, 사령검사 파트란, 천검의 스파론. 모두 전장에서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이들.”

공작이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모두를 모아도, 저 짐 언브레이커블보다 전장에 특화된 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딴 것 다 때려치우고 몸 단단하게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는 괴상망측한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

그들의 강철조차 능가하는 육체는 설사 오러 가드가 없어도 창칼의 범접을 허용치 않는다. 맨몸으로도 어지간한 블레이드 오러 정도는 그냥 긁힌 상처나 입고 마는 괴랄하기 그지없는 육체다.

강력한 오러 유저라도 뚫기 힘든 불굴의 신체, 일개 병사의 힘으로는 설사 짐 언브레이커블이 수면 중에 기습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낼 수 없다.

이는 전장에서 그야말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아무리 다수가 몰려가도 개인의 기량이 받쳐 주지 않으면 저 육체에 흠집 하나 못 내는 것이다.

정신을 딴 데 팔아도 상관없다. 육체가 알아서 튕겨 준다.

오러를 한쪽에 집중해도 상관없다. 오러 없이도 저 육체는 창칼로 뚫을 수 없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지칠 때까지 몰아붙인다? 지상 최강의 지구력을 가진 자를 상대로?

차라리 단단한 갑옷을 입은 이라면 틈새라도 노리겠는데, 저 육체는 틈새도 없는 것이다. 강철을 부어 만든 거상이 스스로 움직여 전장을 돌아다니며 학살을 하는 셈인데, 병력의 우위로 대체 어떻게 막으라는 건가?

“저주받을 짐 언브레이커블!”

짐 언브레이커블은 단순히 대량 학살에 특화된 정도가 아니다. 대량 학살 후 집에 돌아가 침대에 누워 속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무문이다!

상황을 둘러보며 공작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에서는 권왕 대비 전법도 쓸 수 없겠군.’

레펜하르트의 등장을 예상한 이라나드 공작이다. 그에 대한 대비도 당연히 해 놓았다.

다수의 잡병은 수천수만이 덤벼들어도 짐 언브레이커블에 통하지 않는다.

오직 강력한 정예만이 상대할 수 있을 뿐.

그래서 하다툼을 상대할 때처럼 대 권왕 전용 부대를 따로 마련한 이라나드 공작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등장하면 바로 투입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 거금을 들여 온갖 마법 금속으로 구성된 장비도 잔뜩 사 놓았다.

그런데 권왕의 등장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레펜하르트 대신 이니야가 나타나는 바람에 준비한 전용 부대를 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짐 언브레이커블에 특화시켜 대비한 부대라 장비 특성상 다른 오러 유저에겐 그리 효율적이지 않았다. 보통 오러 유저도 대비하긴 했지만, 그쪽은 이미 하다툼을 상대하고 있었고.

어차피 상대가 권왕만 아니라면 자신이 질 리 없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이니야가 기습했을 때는 이라나드 공작 자신이 몸소 나섰다.

그런데 한창 난전 중 권왕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버리니 계획대로 부대를 투입해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펼칠 적절한 공간이 있어야 효능을 발휘한다. 지금처럼 이미 양쪽이 혼탁하게 얽힌 후엔 불가능하다.

게다가 아직 이니야가 건재하지 않은가?

‘이제 저쪽은 오러 유저가 둘이니 억지로 자리를 마련하고 부대를 보내 봐야 효과가 없겠지.’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쪽에 오러 유저를 셋이나 보내다니? 안타레스 공국에 그 정도 여력은 없을 터인데?’

잠시 의문을 느꼈지만 공작은 이내 신경을 껐다.

만약 여력 없이 한 짓이라면 그만큼 다른 쪽 방어가 허술해질 테니 큰 안목에서 볼 때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눈앞의 일을 고민하기도 벅차다.

공작이 부관에게 물었다.

“퇴각 준비는?”

“대열을 갖추며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처음엔 의아해한 부관이지만, 레펜하르트의 위력을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없이 공작의 명을 수행했다.

공작이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트레이트 캐논, 스파이럴!”

저 멀리 전장에서 레펜하르트의 외침이 아련히 들려온다. 곧바로 가공할 폭음이 귀청을 찢을 듯 이어진다.

단 한 명이지만, 전장에 끼치는 폐해는 기사단 수백과 맞먹는 초인 중의 초인.

‘누군가가 저자를 막아 주어야 큰 피해 없이 퇴각할 수 있다.’

공작 자신이 부상을 입은 이상, 그런 강자는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유서스 경에게 전하라! 후위를 맡으라고!”

깃발을 올리며 공작이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신성군 전원에게 고한다. 퇴각! 진형을 갖춰 고원 아래까지 후퇴한다!”

4

굳이 이라나드 공작이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다.

이미 레펜하르트를 본 순간, 유서스는 눈에 증오의 불을 켜며 맹렬히 달리고 있었으니까.

“레펜하르트으으으으!”

온갖 감정을 실어 외치며 유서스가 마상에서 그대로 날아올랐다. 권왕을 상대하려면 말을 타지 않는 쪽이 더 유리하니까.

허공에 뜬 채 유서스가 양팔을 좌우로 활짝 벌렸다.

“엘드릴 기간투스!”

찬란한 황금빛이 유서스의 전신을 휘감으며 공간을 뛰어넘어 십여 개의 갑옷 파츠가 나타났다.

은의 현자에게 새로 받은 힘, 러스조차도 한때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었던 초월적인 아티팩트가 그의 마갑 위에 달라붙어 새로운 형태로 가공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게 그건가? 요샌 저런 식의 변신이 유행인가 보군?”

테스론 때도 느꼈지만, 저 갑옷 장착 광경은 어찌 보면 그럴듯한데 어떻게 보면 또 웃기는 감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참 오동통해졌구먼?’

착지한 유서스의 몰골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긴장이 풀렸다. 뭐, 풍기는 마력만으로도 굉장한 기물이란 건 알겠다만 그래도 꼬락서니가 저래서야?

하지만 유서스는 마냥 진지했다.

“권왕 레펜하르트! 예전의 내가 아니다! 더 이상 그때의 굴욕은 없을 것이다!”

“확실히 예전의 모습은 아니군. 그래도 그땐 멋은 있었는데.”

레펜하르트가 비아냥대건 말건, 마검 엘드란을 뽑아들며 유서스가 외쳤다.

“울어라! 엘드란!”

엘드릴의 빛이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쏘아졌다.

“스파이럴 가드!”

상대의 공격이 뭐든 가리지도 따지지도 않고 싹 다 갈아 버리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방어 수법, 스파이럴 가드가 엘드릴의 빛을 산산이 흩어 사방으로 퍼트렸다.

유서스가 연신 공격을 이었다.

“어차피 첫 타에 먹힐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강력한 파괴 술식, 엘드릴의 빛이 연타로 날아왔다. 하나라면 모를까, 저대로 계속 폭격을 해 대면 설사 스파이럴 가드로 방어해도 상당히 오러양을 소모하게 될 터였다.

‘이거라면 권왕에게도 충분히 먹힐 것이다!’

러스를 상대할 땐 예의 그 이해 못 할 괴상한 수법에 갑옷 입은 보람도 없이 두 다리가 잘리는 수모를 겪었다.

‘그놈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이 상대라면 다를 터!’

어차피 짐 언브레이커블에 고도의 오러 운용법 따위는 없다. 그저 너무도 강맹하고 패도적인 그 힘 앞에 무릎 꿇는 것뿐이다.

‘강맹함과 패도적이란 측면에선 이 엘드릴 기간투스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자신만만하게 유서스가 레펜하르트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도리어 웃었다.

“러스에게 들은 그대로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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