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안타레스 남부 전선
1
바실리 왕국과 안타레스 공국을 가르는 국경 지대, 재쿼드 평원.
바실리의 대군은 험준한 라키드 산맥을 피해 이곳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라키드 산맥은 바실리의 북부와 동부를 크게 아우르는 타원형의 산맥, 몬스터 출몰이 잦아 도저히 군대가 진군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었다. 소수라면 모를까, 수만 단위의 대군이 지날 수 있는 지형은 아니다.
“그런 만큼 안타레스 공국 쪽도 전혀 방어를 하지 않을 텐데…… 별동대를 꾸려서 라키드 산맥 쪽을 노리면 안 될까? 그러면 놈들의 수도를 바로 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길게 대열을 늘려 진군하는 수만의 바실리 왕국군, 그 중심에서 남들보다 배나 큰 백마를 탄 우아한 인상의 중년 검사가 있었다. 바실리 왕국이 자랑하는 오러 유저, 이번 안타레스 정벌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에그라드 경이었다.
에그라드 경의 말에 부관 겸 참모인 아쉬르 경이 고개를 저었다.
“라키드 산맥은 도저히 군대가 지날 곳이 아닙니다. 만약 그곳으로 진군하려다간 적지에 들어서기도 전에 병사의 태반은 잃을 것이옵니다.”
“그럼 산맥의 지형을 감당할 만한 정예병을 꾸리면 될 것 아닌가?”
연이은 에그라드 경의 질문에 부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에휴…….’
에그라드 경은 분명 강력한 오러 유저로 바실리의 모든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무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훌륭한 지휘관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생 검만을 수행해 왔기에 전략, 전술에 대해선 일개 기사만도 못한 타입이었다.
그런 양반이 대뜸 대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놓으니 어떻게든 기책을 발휘, 역사에 남을 멋진 전술을 펼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야 역사책 보면 산맥 넘어 빈집 털이 들어간 명장들 이야기가 워낙 자주 나오니 그럴 만도 하겠지. 하지만 그 명장들이 역사에 남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분명 옛 명장 중엔 그런 기책을 발휘, 승리를 거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통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사령관 각하.”
“어째서? 잘 먹힐 것 같은데?”
한심하다는 듯 참모가 대꾸했다.
“지금은 마법 통신이 있지 않습니까?”
마탑이 존재하지 않아 실시간 통신이 불가능했던 옛날에는 저렇게 정보 전달 속도의 차이를 이용한 기습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마탑을 통해 정보를 전할 수 있는 마법의 전성시대다.
“우리 바실리 왕국도 그렇지만, 현재 대륙의 모든 국가는 산맥이나 황야 같은 험준한 지형에도 정규 마법사와 소규모 부대를 상주시키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이쪽이 산맥을 넘는다는 소식이 적측에 알려지기도 전에 기습전을 할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그 마법사와 소규모 부대를 연락 전에 해치워 버리면 될 것 아닌가?”
“예전처럼 전령에 의한 소식 전달 체제라면 그게 되지요. 부대 주둔지를 몰래 접근해 포위해 버리면 전령이 빠져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전서구도 모두 사냥해 버리면 되고.”
참모가 피곤하다는 듯 설명을 이었다.
“그렇지만 마법사가 마탑에 수정구 통신을 보내는 걸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있다면 아예 주둔지 주변의 마나 흐름을 통째로 헝클어 재밍 신호를 보내는 것뿐인데, 그게 가능하면 이미 대마법사입니다. 대마법사가 과연 그런 임무를 맡으려 할까요? 사령관 각하의 말씀은 오러 유저만 동원해서 기습전을 벌이자는 소리나 다름없는데, 그 정도 소규모 정예면 굳이 산맥을 넘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얼굴 가리고 상인들 틈에 섞여 국경 넘어 버리면 되는데 말입니다.”
산맥을 넘은 기습전은, 상대가 대비할 시간적 여유를 줘 버리면 끝장이다. 만약 정보가 미리 알려진다면 상대는 미리 산맥 기슭에 군대를 옮겨 놓고 산맥 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병력을 쉽사리 학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군. 요새 저런 전술이 나오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이건가?”
에그라드 경은 분명 전략, 전술에 문외한이었고 공명심도 강했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이는 아니었다.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부관이 괘씸하긴 했지만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쉬워하며 바로 자신의 기책(?)을 접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음, 그럼 현 시대에서는 산맥을 통한 기습전은 절대 먹히지 않는가, 부관?”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따지자면 한 가지 경우는 있겠습니다. 원래부터 산맥에 살아 지형에 익숙한 산악 민족이 군대를 꾸려서 평지와 다름없는 속도로 산맥을 통해 진군한다면, 저 기책도 먹히겠지요. 산맥에서 시간을 잡아먹지 않는다면 군대가 이동할 틈을 주기도 전에 수도에 타격을 가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에그라드 경이 헛웃음을 지었다.
“몇십 명도 잘 안 모이는 산악 민족이 군대를 꾸린다? 거기에 산맥에서 평지를 달리는 말과 같은 속도로 진군해야 한다?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이거군?”
“그렇지요.”
“알아들었다, 아쉬르 경.”
말고삐를 잡아채며 에그라드 경이 활기차게 말했다.
“괜찮다, 그것 외에도 몇 가지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그 기책들은 안타레스 놈들을 맞이해 천천히 풀어 보도록 하지!”
아무래도 에그라드 경은 ‘역사에 남을 명장’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의기양양한 에그라드 경을 향해 부관은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아니, 그냥 참모부가 정한대로 작전 수행하셨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새삼 바슈탈론 제국이 부러워지는 아쉬르 경이었다.
오랜 세월 체계가 잡힌 바슈탈론 제국군은 설사 오러 유저라 한들 바로 군대의 지휘를 맡기지 않았다.
제국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분하는 것을 무엇보다 미덕으로 삼는다.
군대의 지휘는 인정받은 베테랑 지휘관이 참모부와 상의해서 결정하며, 설사 오러 유저라도 전시만큼은 그 사령관의 명령에는 복종하는 것이 제국의 분위기였다. 실제로 타한 요새를 공략한 제국군 제3대대도 키린트 경을 비롯, 강력한 오러 유저가 셋이나 있지만 지휘관은 지맨 사령관이지 않았는가?
황태자 길리우스가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역임한 것도 그가 단순히 황태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길리우스는 황태자이지만 이미 제국의 유수한 전략, 전술가에게 사사했고 그 뛰어남을 인정받은 후였다.
만약 그에게 지휘관의 재능이 없었다면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황제는 결코 지휘봉을 건네지 않았을 것이고, 또 황태자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바실리 왕국군의 지휘 체계는 철저히 혈통과 가문에 따라 이루어져 있었다. 바실리의 참모부 역시 유능한 인재들이 잔뜩 모여 있었지만 최종 결정은 어디까지나 총사령관 에그라드 경이나 전통 깊은 대귀족 출신의 부대 사령관이 맡는 것이다.
이래서야 사령관이 잠깐 흥분해 판단력이 흐려지면 이길 전쟁도 지는 경우가 생긴다.
부관, 아쉬르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제국은 제국이야. 칭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우리나라 국왕처럼 괴상한 이유로 전쟁 일으키지도 않고 말이야.’
무인으로서 명예를 높일 무대가 마련된 것은 물론 달갑다. 하지만 이 전쟁의 이유는 솔직히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제국의 참전 명분은 얼마나 그럴듯한가?
무려 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신성한 이유가 아닌가?
그에 비해 바실리 왕국은…….
‘세상에, 자국의 오러 유저를 죽였다고 전쟁을 일으키다니?’
그것도 저쪽이 먼저 손쓴 것이 아니라 이쪽이 덤벼 놓고 반격받아 죽은 것 아닌가?
현 바실리 국왕이 상당히 치졸한 성격이란 것은 흘러 들어 알고 있었지만, 국민 된 입장에서 솔직히 부끄러운 이유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신하들은 뭐 하는 거야? 폐하 좀 안 말리고?’
아쉬르는 모르고 있었지만, 바실리 왕국의 신하들은 국왕의 저 치졸한 전쟁 선언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 동조했다.
신하 전원이 치졸하고 치사한 성품이어서는 물론 아니었다. 그랬으면 나라가 제대로 유지되지도 않았겠지. 한 나라의 국왕이 길길이 날뛸 수는 있겠지만, 그 신하 모두가 감정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명분은 저런 것이지만 실상 바실리 왕국의 이 정벌에는 진정한 의미가 있었다.
안타레스 공국의 급성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안타레스 공국은 크로방스와 바실리에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크로방스와 상당히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사이다.
처음에는 신흥 국가가 커져 봤자지, 하고 신경도 안 썼는데 고작 몇 년 사이에 무시무시하게 성장을 해 버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나치게 강해진 국가가 옆 나라 그냥 내버려 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 다리 건너 불구경 중인 다른 나라들과 달리 바실리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인 셈이다.
또, 레펜하르트의 출신도 문제가 되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바실리 왕국 출신이 세운 나라니만큼 오히려 친근감을 가질 법도 하겠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일 경우 이야기다.
짐 언브레이커블이라면 남의 말 안 듣기로 대륙 제일, 하늘 아래 저 혼자 잘났다며 천상천하 근육 독존을 외치는 괴상망측한 무문.
지상 최강의 마초가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온화하고 평화로운 성향일 것이라 어찌 기대할 수 있을까? 옆 나라 된 입장에서 심히 불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역대 권왕 치고 고향 신경 쓰는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전전대 권왕이었던 라스탈은 라스틸 공국 출신 주제에 당시 라스틸 공왕의 목을 부담 없이 분질렀던 무뢰한이었다. (무려 라스탈이란 이름도 부모가 조국에 충성하라며 국명 따서 지어 준 이름이었는데!)
감정과 상황이 결합되니 바실리의 신하들 모두가 정벌을 찬성했다. 길길이 날뛰던 바실리 국왕이야 웬일로 이번엔 신하들이 모두 자기 말에 찬성하니 좋아라 할 뿐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런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앞날을 위해서라도 이번 전쟁은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된다.”
백마를 몰며 에그라드 경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쉬르야 저기까지 생각지 못했지만, 에그라드 경은 저 정도는 충분히 짐작했다. 그는 비록 전략, 전술에는 약하지만 타고난 귀족답게 오히려 저런 정치적 흐름은 쉽사리 파악하고 있었다.
말을 몰다 말고 에그라드 경이 문득 물었다.
“엘드릴 가드는 얼마나 남았는가?”
아쉬르 경이 잽싸게 대답했다.
“앞으로 사흘 거리입니다, 사령관 각하.”
오랜 세월 갈고닦은 크로방스 서부 국경 방어진과 달리 안타레스 공국의 남부 전선은 조촐했다. 재쿼드 평야의 끝자락, 테르마니아 관도와 연결되는 좁은 협곡에 세워진 요새, 엘드릴 가드가 전부다. 국가의 연륜이 적다 보니 그 이상은 무리였다.
엘드릴 가드를 부수게 되면 그 이후에는 가로막는 것이 없다. 바로 수도, 아라난 그라드까지 진군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안타레스 공국의 총력을 기울여 세운 강력무비한 요새였지만…….
“엘드릴 가드라니, 이름 한번 거창하기도 하지.”
요새의 명칭을 떠올리며 에그라드 경은 비웃음을 흘렸다. 진금 엘드릴, 지상 최강의 금속 이름을 요새에 붙이다니? 대륙 유수의, 철통같은 방어를 자랑하는 역사 깊은 요새들도 감히 하지 않는 짓이다.
“신흥 국가답게 패기만 넘치는 거죠.”
“흥, 패기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보여 주마, 안타레스! 감히 바실리를 상대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에그라드 경이 문득 눈동자에 분한 빛을 띠었다.
그들은 이미 안타레스의 강력한 전력 대부분이 크로방스 서부 전선으로 차출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진군함을 알면서도 저런 짓을 한다는 것은 바실리 왕국을 심히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는가?
자신만만하게 에그라드 경이 중얼거렸다.
“과연 오만한 짐 언브레이커블. 권왕 레펜하르트여, 바실리 왕국의 힘을 보여주겠다!”
☆ ☆ ☆
제국보다 하루 늦게 안타레스의 국경을 넘은 바실리 연합군은, 재쿼드 평야 끝자락에서 부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일찌감치 요충지를 선점하고 요새끼리 강력한 연대를 꾸린 크로방스 서부 국경선과 달리 아직 역사가 짧은 안타레스 남부 국경은 그렇게까지 완벽하지 않다.
엘드릴 가드는 분명 수도 아라난 그라드의 관문이라 불리는 중요한 요새고, 그곳을 뚫리게 될 경우 바로 왕도까지 진격이 가능하다. 하지만 크로방스 서부 국경처럼 돌아갈 길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다.
엘드릴 가드가 위치한 협곡 좌우는 높은 고원 지대, 군대가 진격하기 쉽지 않은 지형이지만 돌아서 못 갈 정도로 험준하지도 않았다. 기동력이 뛰어난 정예로 구성된 부대라면 엘드릴 가드의 손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크게 돌아 수도 정복을 도모할 수 있다.
그래서 바실리 연합군은 사만 오천의 정병으로 엘드릴 가드를 향해 진군하는 한편 일만의 신성군을 요새 서쪽 고원으로, 오천의 세이어 성기사단에 오천의 보병을 더해 동쪽 고원으로 보냈다. 어차피 연합군, 지휘 계통이 통일되지 않아 함께 싸워 봤자 손발이 맞지도 않을 테니 이쪽이 훨씬 각 부대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포진이었다.
엘드릴 가드로부터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원 지대. 사천 명 정도의 인간과 이종족 혼성 병력이 고원 입구에 포진한 채 다가오는 기마부대의 흙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휘날리는 안타레스의 깃발 아래, 아스레일 경이 적군을 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카를 각하의 예측대로 신성군이 이쪽으로 향했군.”
적이 세 부대로 갈라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구성원이 바실리 본진과 신성군, 성기사단으로 나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측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니까. 군사학을 겉핥기로 배운 아스레일조차도 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신성군이 이 서쪽 고원으로 향하고, 성기사단이 동쪽으로 향할 줄 알았을까?
‘설마 반반 확률로 찍으신 건 아니겠지?’
잠깐 딴생각을 하다 아스레일은 스스로가 어이없어 피식 웃었다.
카를은 정확하게 신성군의 성향과 병력에 맞춰 이쪽에 군대를 보냈다. 세이어의 성기사단 역시 마찬가지, 만약 대충 찍은 것이었다면 이토록 확신을 담아 부대 운용을 하진 않았겠지.
‘대체 어떻게 아신 걸까?’
☆ ☆ ☆
국경이 침공당하기 며칠 전, 아라난 그라드의 황성 가이라크.
레펜하르트는 아스레일과 같은 의문을 카일에게 던지고 있었다.
“대체 신성군이 동쪽으로 향할 것이라는 거요? 솔직히 어느 부대가 그쪽으로 향해도 별 차이 없어 보였는데? 군사학을 깊이 공부하면 그런 것도 보이나?”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군사학에 저런 게 있을 리가 있습니까? 공왕님 말씀대로 군사학적으로 볼 땐 둘 다 반반 확률이지요.”
“그럼?”
“제가 신경 쓴 쪽은 전략적인 이치가 아닙니다. 각 부대 지휘관의 발언력 쪽이지요.”
바실리 연합군을 담당하는 세 축, 바실리 본군의 에그라드 경과 신성군의 이라나드 공작, 그리고 성기사단의 크리스틴 경은 공식적으로는 동등한 지위다. 지휘 계통상으로 저 셋은 동맹 관계일 뿐이며 상하 관계가 성립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살아온 세월이 다르고 지닌 경험, 나이가 다른데 상하 관계가 성립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비웃듯 말했다.
“일단, 저 셋 중 가장 잘나가는 양반은 누가 뭐래도 이라나드 공작입니다. 에그라드 경이 아무리 바실리에서 큰소리쳐 봤자 왕족도 아닌 방계 귀족, 오러 유저가 되어 큰소리치긴 하지만 가문 자체는 그리 볼 것이 없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잇는다.
“크리스틴 경은 더더욱 그렇지요. 덩치만 컸지 이제 겨우 20대 후반의 여인, 발언력이 아무래도 약하지요. 사실 명성이나 실력이나 이라나드 공작은 고사하고 신성군 부사령관 유서스 경보다도 밑이니까요.”
카를이 지도를 가리켰다.
“현재 아라난 그라드를 도모하기 가장 좋은 위치는 엘드릴 가드 동쪽으로 우회해 프란트 고원을 경유하는 것입니다. 잘만 된다면 최단 시간에 아라난 그라드에 도착할 수 있지요. 반면 엘드릴 가드 서쪽은 라키드 산맥의 지류가 중간에 뻗어 있어 아무래도 진군이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레펜하르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그러니까, 이쪽 진군로를 차지하는 부대가 제일 공을 세울 확률이 높다, 이 말씀입니다. 아라난 그라드에 첫 입성하는 부대라면 그 영광 역시 이 전쟁에서 제일 빛날 테니까요.”
“과연…… 공적을 탐하는 지휘관이라면 모두 이쪽 진군로를 택하고 싶어 할 것이라 이거군?”
“그렇습니다.”
카를은 빙그레 웃었다.
“들은 대로라면 이라나드 공작은 그리 공적에 연연하지 않는 성품,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에게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라나드 공작의 휘하에 있는 일만의 신성군은 원래 그의 부하가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모인 기사들입니다. 지휘해야 하는 공작 입장에서는 저들에게 전장의 명예를 안겨 줄 의무가 있으니, 공적을 탐하지 않을 수 없지요.”
“크리스틴 경도 마찬가지일 테고?”
“네, 아마 에그라드 경도 내심 엘드릴 요새 공략은 수하에게 맡기고 별동대를 꾸려 동쪽 진군로를 택하고 싶었을 겁니다. 요새 공략은 굳이 그가 없어도 가능한 일이니.”
이는 실제로 군사 회의 당시 에그라드 경과 이라나드 공작, 크리스틴 경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셋 모두 동부 진군로로 향하고 싶어 했고, 또 자신이 그곳으로 향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머나먼 아라난 그라드에 앉아, 카를은 마치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바실리 연합군 내의 속사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이 같으면, 결국 발언력 센 쪽이 이기기 마련이지요.”
이해한 레펜하르트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쉽게 말해서, 남은 두 사람은 짬밥에서 밀린다 이거지?”
“속된 말로 표현하면 그거죠, 뭐.”
고개를 주억거리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어, 그럼 그냥 요새 무시하고 전부 동쪽 우회로로 향하는 것 아닌가, 혹시? 이야기 듣고 보니 그쪽이 제일 좋아 보이는데.”
“그건 아닙니다. 동쪽 우회로가 가치가 생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엘드릴 요새에 안타레스의 본군이 위치하고, 또 아라난 그라드 방비를 위해 라키드 산맥으로도 군대를 보낼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바실리 연합군은 매가 양 날개를 펼치고 부리로 목표를 쪼아 대는 형국, 그중 오른 날개가 가장 강하다고 해서 몸통과 왼 날개 없이 매가 날 수 있겠습니까?”
마치 학생에게 설명하듯, 카를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일단 이라나드 공작이 동쪽 우회로로 향한 이상 에그라드 경과 크리스틴 경은 다른 쪽 포진을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드릴 요새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그곳에 오러 유저급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상황이 저렇게 되면 저들은 저리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뭐, 정말 레펜하르트 님 말씀대로 움직여 주는 바보들이라면 이 전쟁, 고생도 안 하겠습니다만 그렇게까지는 기대할 수 없지요?”
“뭔가 복잡하구만.”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라리 마법이 쉽지, 저런 걸 죄다 신경 쓰면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네?’
카를이 별것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재차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요. 사람 자체가 복잡한 존재인데, 그 사람이 하는 전쟁이 복잡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2
신의 뜻에 따라, 대륙 각지에서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모인 일만의 명예로운 기사들.
그들 앞에 서서 중후한 인상의 중년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위대한 세이어의 용사들이여!”
화려한 은빛 갑옷이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눈처럼 새하얀 백마 위에서 중년 기사, 이라나드 공작은 찬란한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냈다. 보랏빛 검광이 기둥처럼 솟구쳐 모인 모든 기사들의 시야를 밝혔다.
“간악한 이단자, 노예로 지음받은 비천한 것들이 감히 그분의 뜻을 거역했도다!”
말을 몰며 진열 앞을 차례로 이동한다. 그때마다 모인 기사들의 눈빛에 투지가 피어오른다. 이라나드 공작이 쩌렁쩌렁한 외침을 터트렸다.
“그분의 종으로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렁찬 함성이 터졌다.
“세이어여!”
“세이어를 위하여!”
“그분을 위해 검을 들겠소!”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전의를 불사른다. 비록 대륙 각지에서 모인, 저마다 제각각의 개성을 지닌 기사며 기사단들이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나로 뭉친다.
세이어!
세이어를 위하여!
☆ ☆ ☆
“흥, 세이어 따위야 내 알 바 아니지.”
아군 진지의 분위기를 살피던 황금빛 갑옷의 기사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감히 대놓고 할 말이 아닌지라 입 속으로 웅얼거리는 수준이지만, 어쨌거나 그가 딱히 불타는 신앙심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님은 명백했다.
전혀 세이어에 대한 신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성군 부사령관의 지위를 차지한 이 기사, 그라임의 유서스 경을 향해 부관이 말을 건넸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단장님.”
부관은 왜 유서스가 저런 표정을 짓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러스 자식…….”
적진을 보며 유서스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의 이복동생, 사이러스를 해치우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은의 현자에게 협력했고, 가문을 떠나 테스론을 따르며 대륙을 떠돌았다.
하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기껏 새로운 힘을 얻어 봤자 러스에게 비참하게 당하기만 했다.
기껏 믿었던 테스론은 권왕 레펜하르트의 손에 죽어 버렸다.
도저히 일대일, 정예들끼리의 전투로는 러스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래서 기꺼이 성전에 참가했다. 전장이라면, 군대와 군대가 붙는 전쟁터라면 러스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검사라면 모를까, 지휘관으로서는 분명 그가 러스보다 우위에 있을 것이 확실하기에.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러스는 상대측에 있지도 않은 것이다!
듣자 하니 바슈탈론 제국과 상대하기 위해 크로방스 쪽으로 가 버렸다 한다. 기껏 이번 기회를 기다린 유서스에겐 실로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이해한다는 듯 부관이 유서스를 달랬다.
“진정하십시오. 저희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 반역자에게 테네스의 천벌을 가할 기회를 놓치다니.”
유서스를 따르는 테네스 기사단 또한 이 기회에 가문을 배신한 이를 벌할 기회를 놓친 걸 아쉬워했다. 이미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가 된 러스를 상대로 참 속 편하게도 말하고 있다 하겠다. 여전히 이들에게 러스는 배신자, 반역자, 그리고 가문의 천덕꾸러기일 뿐인 것이다.
다른 기사도 나서서 유서스를 위로했다.
“러스 본인을 벌하지 못함은 아쉬우나, 안타레스 공왕 역시 테네스 가문에 죄를 지은 몸. 안타레스가 무너지는 것 역시 배신자에 대한 벌이 될 것입니다.”
배신자 러스만큼이나 테네스 기사단은 권왕 레펜하르트도 증오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권왕으로 이름을 날린 시초는 바로 황금기사 유서스의 패배 덕이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복수를 달성해야 할 상대, 하물며 그는 배신자 러스를 거두어 자신의 심복으로 삼아 버렸다.
테네스 가문으로서는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수하들의 위로에 유서스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지. 안타레스 공국이 무너지면 그 배신자도 갈 곳이 없을 터, 그때 단죄해도 늦지 않다.”
잡념을 떨치고 유서스는 눈앞의 적에 집중했다. 고원 위쪽에 포진하고 있는, 러스만큼이나 증오스러운 안타레스의 이종족들을 향해.
마검 엘드란을 뽑아 들며 유서스가 투지를 불태웠다.
“오늘은 저들을 벌할 때로다!”
☆ ☆ ☆
이라나드 공작이 신성군의 사기를 드높이며 투기의 외침을 터트리는 바로 그때.
안타레스군은 진중한 태도로 지휘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중이었다.
“안타레스의 용사들이여!”
이백의 안타레스 기사단, 그리고 공국 각지에서 모인 구백의 인간 경장기병들.
이들은 지금 굳은 얼굴로 창칼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눈앞의 신성군, 일만 병력은 실로 거대해 보였다. 하나하나가 이름난 기사단이며 강력한 무장과 갑주를 걸친 이들, 그에 비해 이쪽은 안타레스 기사단과 경장기병 모두가 가죽과 사슬을 섞어 입은 가벼운 차림이다.
병사들을 향해 아스레일 경이 질문을 던졌다.
“저들이 두려운가?”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병사들의 표정은 대답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스레일 경이 문득 웃었다.
“나도 두렵다.”
웃으며 그가 신성군 쪽에 턱짓을 했다.
“저들의 갑옷은 우리보다 두껍고, 저들의 숫자는 우리보다 월등히 많다. 저들의 전투 경험 역시 우리보다 월등히 높겠지!”
기병들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전투 직전에 지휘관이 힘 빠지는 소리를 한다냐?
“하지만 저 두꺼운 갑옷이 우리 갑옷보다 튼튼한 것은 아니다!”
아스레일이 망토를 걷었다. 경장기병과 똑같은 갑옷이 드러났다.
“믿어라! 그대들의 갑옷은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저들의 갑옷에 비할 것이 아니다!”
아스레일이 부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부관이 석궁을 준비하더니, 이내 아스레일에게 쏘았다. 병사들이 흠칫하던 찰나였다.
티잉!
놀랍게도 석궁의 화살이 가죽과 사슬을 엮은 아스레일의 가슴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자랑스레 아스레일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인간의 손으론 결코 이런 갑옷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저들과 마찬가지로 튼튼하며, 또 저들보다 몇 배나 가볍고 빠른 것이다!”
현재 그들이 입고 있는 경장갑은 일반적인 갑주가 아니었다. 바로 오크와 드워프의 기술력이 총동원되어 제작된, 새로운 형태의 갑주였다.
오크의 가죽 갑옷은 질기기 이를 데 없어 어지간한 강궁으로도 쉽사리 뚫리지 않는다. 하지만 베기 공격에는 가죽인 이상 취약할 수밖에 없다.
드워프의 사슬 갑옷은 그 강도가 인간의 것과 비교가 안 되어, 어지간한 명검으로도 썰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슬인 이상 찌르기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두 종족이 함께 어울리게 되며, 드워프 대장장이와 오크 무기아비는 서로 기술 교류를 나누었다. 장인 정신은 종족조차도 초월하는 것, 두 종족의 명장들은 새로운 기술 앞에 기꺼이 손을 합쳤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가볍고 튼튼하면서도 운신에 전혀 제약이 없는 이 신형 경장 갑주였다.
아스레일의 시위에 기병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신성군과 안타레스 기병들의 실력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
그러나 신성군과 안타레스 기병들의 말은 별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보다 가벼운 쪽이 월등한 기동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병사들의 공포가 점점 사그라졌다.
“어차피 안타레스는 신흥 국가! 고작 생긴 지 몇 년 되지도 않는 나라에 충성심을 다해 목숨을 바치라는 소리 따윈 하지 않는다!”
곧 전투를 앞둔 지휘관 치곤 꽤나 개성 넘치는 연설이라 하겠다. 국가의 녹을 먹는 이가 충성하지 말란 소릴 하다니?
그때 아스레일이 검을 들어 신성군을 가리켰다.
“그대들 모두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겠지? 저놈들에게 우리가 패하면 그땐 우리 친지, 가족이 모두 죽는다!”
병사들의 얼굴에 투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알겠느냐! 저놈들은 세이어의 광신도다!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도 않는다 말이다! 세이어의 법에 따르면 이단자는 죽이고 강간해도 전혀 죄가 아니다! 명심하라! 놈들은 분명 그럴 것이다!”
신흥 국가다 보니 다들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긍심은 그리 없는 편이다.
하지만 가족, 친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감정은 어느 나라 사람이건 다를 바가 없다.
병사들의 안색에서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스레일이 검을 뽑아 높게 쳐들었다.
“그대들은 그대의 가족이 그런 꼴을 당하게 두겠는가?”
기병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결코 아니오!”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안타레스!”
“안타레스를 위하여!”
☆ ☆ ☆
한편, 오크 투사 하다툼은 아스레일의 저 연설을 감명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 씨발, 폼 난다.”
오크들에게도 전투에 앞서 일장 연설을 하는 전통은 있다. 특히나 대족장 칼켄은 오크 중에서도 말발이 받쳐 주어, 그의 연설을 들으면 가장 겁쟁이 오크도 광전사처럼 날뛰게 된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비록 일족의 족장이긴 하지만, 그리 말발이 없는 편인 하다툼에게는 항상 부러웠던 점이었다.
“에, 나도 저런 거 해 볼까……?”
뻐드렁니를 매만지며 하다툼도 어슬렁어슬렁 오크 전사들 앞으로 다가갔다. 자기도 뭔가 아스레일처럼 폼 나는 연설 하고 환호받고 싶었다.
주먹을 쥔 채 하다툼이 고함을 터트렸다.
“위대한 오크의 전사들이어!”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하다툼이 머리를 굴렸다.
‘자, 일단 시선은 잡았는데…….’
역시 안 하던 짓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막상 뭔가 말을 하려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오크 전사들도 ‘저 양반, 뭐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저래?’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우 씨…….”
에라,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떠오른다.
결국 하다툼은 포기하고 하던 대로 나갔다.
“씨발, 싸우는 데 무슨 이유가 있어? 그냥 싸우는 거지!”
그러더니 대뜸 자신의 애병을 뽑아 들고 전사의 포효를 터트린다.
“크아아아! 가자! 피의 축제다!”
“우와아아아!”
검을 든 채 오크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사실 하다툼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이 호쾌한 ‘세 마디 연설’은 대족장 칼켄만큼이나 오크들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가슴 속의 호기를 부르는 외침이란 말인가?
아스레일이 손을 아래로 내저었다.
“전군 돌격!”
요란한 굉음과 함께, 사천의 기병이 일제히 고원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3
정면 돌격에 나선 사천의 안타레스군, 그들을 상대로 신성군은 중장갑을 두른 기사들을 앞세웠다. 그라임과 할라인, 그리고 테이칸 왕국에서 명성을 떨치는 전통의 기사들이 거창을 내세우며 마주 돌격했다.
기사도 전투의 꽃, 랜스 차징이었다.
“저 어리석은 이단자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
제일 선두에 선 그라임의 기사, 제폴드 경이 호기로운 고함과 함께 아스레일 경과 격돌했다. 서로 랜스 차징을 하며 스치는 그 순간!
“커억!”
놀랍게도 노련한 제폴드 경이 아직 젊은 아스레일에게 쓰러져 버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안타레스 기사단 거의 전원이 랜스 차징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보고 있던 이라나드 공작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어떻게 저런 경갑주로 저런 안정감이?”
안타레스 기사단의 경장갑은 분명 신성군의 중장갑 못지않은 강도를 자랑하는 제품이다. 하지만 그래도 틀림없는 경장갑, 무게에 있어서는 뒤떨어진다. 동시에 부딪친다면 보다 무거운 쪽이 이기는 것이 세상 이치일진대 어째서?
일제히 낙마하는 신성군 기사단을 지나치며 안타레스 기사단조차 너무 쉬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뭐 이래?”
“이거 할 만하네?”
“가볍잖아!”
“뭐야? 이름만 높았지 붙어 보니 별것 아닌데?”
다른 기사단들처럼 안타레스 기사단도 평소 열심히 수행을 쌓았다. 특히 기사도의 꽃이라는 랜스 차징을 열심히 수련했다.
……오크 울프 라이더들이랑.
애당초 체급이 다르고 근력이 다른, 본격적으로 붙으면 열 명이서 한 명 감당하기도 힘든 것이 바로 오크 라이더들이다. 상대적으로 체중도 근력도 심각하게 뒤떨어지는 안타레스 기사단이 오크 라이더를 상대로 랜스 차징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보통 솜씨로는 무리였다.
상대의 균형을 일격에 흩을 수 있는, 바늘구멍을 꿰뚫을 정도로 정확 무비한 차징.
몇 배의 체중 차이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흔들림 없는 안정적인 자세.
몇 초 사이의 허점을 정확하게 노릴 수 있는 빈틈없는 안력과 판단력.
이 모든 것이 갖춰져야 겨우 울프 라이더에게 랜스 차징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타점이 빗나가거나 랜스를 찌르는 타이밍이 어긋나면 바로 울프 라이더는 균형을 회복할 뿐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워낙 가혹한 수행 환경이었다.
항시 괴물들만 상대하던 나날이었다.
괴물들만 상대하다 같은 인간을 만나니, 이건 뭐 수련 기사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타타타탕!
또다시 한 무리 기사단이 안타레스 기사단과 충돌했다.
또다시 신성군 기사단이 일제히 랜스에 부딪혀 낙마해 버렸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신성군 진영까지 파고드는 안타레스 기사단의 기세에 이라나드 공작이 혀를 찼다. 오러 유저의 안목으로도 감탄이 나올 만큼 철두철미하게 기본에 충실한 랜스 차징이었다. 저래서야 중장갑을 믿고 있는 신성군 기사들이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아니, 저놈들은 밥 먹고 저거만 연습했나…….”
반감탄 반황당을 담아 이라나드 공작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이라나드 공작은 핵심을 꿰뚫은 셈이 되었다.
두 번이나 돌파당하며 안타레스 기사단은 순식간에 신성군 본진까지 도달했다. 속도를 줄이며 물러나려는 안타레스 기사단을 대기하고 있던 신성군 기사들이 뛰쳐나와 포위망을 구축했다.
아무리 돌파력이 강해도 워낙 상대 병력이 많았다. 안타레스 기사들이 뛰쳐나온 신성군 기사들과 뒤섞이며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으윽!”
“젠장, 역시 강하군!”
일단 난전이 벌어지자, 랜스 차징에는 달인급 경지를 보이던 안타레스 기사들이 검투에는 그리 신성군을 누르지 못했다. 사방에서 팽팽한 접전이 벌어졌다. 개중에는 밀리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상황을 지켜보며 아스레일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크으, 역시 랜스 차징에 비해 다른 쪽은 아직 부실한가? 하긴, 랜스 차징 수행하기만도 벅차 하루가 다 가곤 했으니…….’
……정말로 안타레스 기사단은 랜스 차징밖에 연습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일 모두 장단점이 있다. 가혹한 수행 환경은 거꾸로 말하면 하나 제대로 하기도 벅차다는 의미도 된다.
일단 랜스 차징이라도 우위에 서야 검투를 하건 창술을 익히건 하지? 울프 라이더를 상대하던 안타레스 기사단은 랜스 차징 외 다른 기량까지 키울 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술적이기까지 한 안타레스 기사단의 랜스 차징에 기겁한 신성군 기사단도, 일단 상대의 검술 솜씨를 보고 나니 도로 기가 살았다. 용맹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맞서기 시작했다.
“뭐야, 이놈들? 발 멈추니까 별것도 아니잖아!”
“모조리 썰어 주마!”
돌진할 때는 대륙 그 누구보다 용맹해 보이던 안타레스 기사단은 일단 적진에 도착하고 나니 도로 평범한 기사단이 되어 사방의 칼질에 허우적대게 되었다.
물론, 카를은 이것까지 예상하고 부대를 꾸렸다. 타이밍 좋게 경장기병이 기사단의 뒤를 따랐다.
“가자! 기사 분들을 도와라!”
안타레스 기사들과 달리 이 경장기병대는 모두 용병이나 수행 중의 검사, 혹은 페틀랜드에서 항복한 유목민 전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거창 돌격에는 전혀 솜씨가 없지만 마상 검술에 있어서는 오히려 안타레스 기사들보다 월등한 솜씨를 지닌 이들이다.
챙챙챙!
전장 곳곳에서 칼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틈에 안타레스 기사단이 적진에서 이탈했다. 신성군 기사들도 열심히 쫓아갔지만 애초에 입은 갑옷의 무게가 너무 다르다. 말을 아무리 달려도 점점 거리가 벌어진다.
그렇게 다시 거리를 벌린 안타레스 기사단이 크게 회선하며 도로 돌진을 시작했다.
일단 거리가 벌어지면 다시 랜스 차징을 쓸 수 있다!
“크어억!”
“크아악!”
랜스 차징‘만’ 달인인 안타레스 기사단의 거창 돌격에 뒤쫓던 신성군 기사들 수십이 목숨을 잃었다. 사방에서 혈화가 피고 혈향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적들을 쓰러뜨리고 스쳐 지나가며 안타레스 기사들이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크, 이래서 가벼운 갑옷 입힌 거였군.”
“우린 그냥 이 짓이나 계속해야겠는데?”
그래, 어차피 우린 검술은 별로다.
그러니 닥치고 랜스 차징!
치고 빠지기를 계속하며 안타레스 기사단은 계속 신성군 기사 진을 유린해 댔다. 살짝 편중된 감은 있지만, 어쨌거나 드디어 일국을 대표하는 기사단다운 무위를 떨치는 안타레스 기사단이었다.
☆ ☆ ☆
“크윽, 저것들이 저런 실력을 보일 줄이야.”
별로 전력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안타레스 기사단의 의외의 활약에 이라나드 공작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 중의 무인이다. 잽싸게 대처법을 떠올려 대응했다.
“카밀, 도플러, 막시밀리안의 기사들이여! 그대들의 방패가 필요하오!”
호령과 함께 이백 명 정도로 이루어진 기사단 셋이 안타레스의 거창 돌격 앞을 가로막았다. 모두 경험 많은 기사답게 함축적인 이라나드 공작의 명을 바로 이해하고 실행에 옮겼다.
타타탕!
쇳소리가 연거푸 울리며 안타레스 기사단이 신성군의 세 기사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도 쓰러지지 않고 말을 돌려 다시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안타레스 기사들 사이에서 당혹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윽?”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기사 주제에 이런 부끄러운 짓을!”
지금 카밀과 도플러, 막시밀리안의 기사들은 같이 랜스 차징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타워 실드로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데만 집중한 것이다.
아무리 상대의 공세가 바늘처럼 예리하더라도, 거대한 방패로 못 막을 정도로 신성군 기사들의 기량이 낮지는 않다. 상대가 공격을 포기하고 이런 식으로 방어만 굳히면 예술적인 안타레스 기사단의 랜스 차징도 무용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간신히 안타레스 기사단의 발을 묶은 뒤, 이라나드 공작은 진정한 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진짜 위험한 놈들은 저놈들이지.’
오크 오러 유저 하다툼이 이끄는 회색 솔개 부족의 울프 라이더 300기와 흙 멧돼지 부족의 보어 라이더 200기, 그 외에 각 오크 부족이 선별한 다양한 오크 라이더 1천 기가 신성군 좌우를 매섭게 몰아친다.
“위대한 조상님들께 피의 제물을!”
“피의 제물을 바쳐라!”
그 뒤를 천오백 명의 오크 보병이 맹렬히 뒤쫓고 있었다.
모두 아직 전사의 칭호를 받지 못한 오크 부족원들, 하지만 자유로운 오크 부족에서는 전사가 아닌 이들도 전투의 베테랑들이다. 성인이 되자마자 오크 스카우터가 되어 황야를 떠돌며 전사의 꿈을 키워 온 이들이니까.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워라!”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워라!”
“조상님이 우리를 가호하리라!”
비록 두 발로 뛰고 있지만, 거친 황야에서 달리기라면 이력이 난 오크들이다. 인간 보병과는 비교가 안 되는 스피드로 신성군을 향해 돌진해 갔다.
선두의 하다툼이 호쾌하게 자신의 양날 도끼를 허공으로 날렸다.
“크하하하! 가라, 아크라!”
뒤따르던 정규 오크 라이더들도 저마다 애병을 허공에 날리며 공세를 취했다. 귀신 붙은 칼이라며 대륙 전역에 그 흉명이 자자한 오크들의 스피리츠 웨폰이었다.
휘이이익!
멋대로 허공을 나부끼는 수백 자루의 검 아래, 흉폭하게 돌진하는 오크 라이더의 섬뜩한 광경.
그 가공할 모습 앞에 이라나드 공작은 오히려 눈을 빛냈다. 크로방스 내전에서 이름난 기사들조차 맥없이 당하고 말았던, 익히 들어온 안타레스 오크의 공격 형태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
기다렸다는 듯 이라나드 공작이 반격에 나섰다.
“가라! 세이어의 용사들아! 준비했던 대로 저 천한 것들에게 인류의 힘을 보여 주어라!”
신성군 본진 일부가 갈라지며, 준비된 한 무리의 부대가 출격했다. 전원 두꺼운 중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었다.
천에 가까운 그 병력을 보며 하다툼이 코웃음을 쳤다.
“겁쟁이처럼 철옷 속에 숨어서 진정한 전사를 당해 낼 수 있겠느냐!”
하다툼의 도끼, 아크라가 허공을 날아 중갑 기사들을 노렸다.
그 순간이었다.
“허업!”
돌진하던 기사들이 모두 정면에 두꺼운 방패를 들더니 날아온 무기들을 강렬하게 쳐 냈다.
타앙!
방패 치기에 적중한 아크라가 허공에서 휘청거리며 잠시 움직임이 느려졌다. 동시에 기사가 방패를 들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갈고리 사슬을 던져 느려진 아크라를 얽맸다.
채애앵!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크라를 봉쇄한 기사가 손에 든 무거운 방패에 갈고리 사슬 끝을 연결해 바닥에 던졌다. 그 손놀림이 보통 빠른 것이 아니어, 한두 번 연습한 솜씨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갈고리 사슬과 연결된 육중한 방패가 전장의 진창 위에 푸욱 처박힌다. 방패의 무게에 얽매여 자유롭게 허공을 날던 아크라가 발이 묶여 버렸다!
“윽!”
하다툼은 당황했다. 그의 애병뿐 아니라 오크 라이더들의 스피리츠 웨폰 대부분이 똑같은 수법에 당하고 있었다.
이제 오크들의 무기는 더 이상 자유롭게 허공을 나는 귀신 붙은 칼이 아니다. 그저 사슬로 인해 땅에 얽매인 떠 있는 무기일 뿐!
기사들이 통쾌한 듯 외쳤다.
“보았느냐, 더러운 오크들아!”
“그따위 조잡한 수가 언제까지 통할 줄 알았느냐!”
생전 처음 당해 본 수법에 오크 라이더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방패를 버리고 가벼워진 기사들이 검을 들고 맹렬히 그들을 덮쳐 갔다.
“죽여주마!”
무기를 자유롭게 허공에서 조종하는 오크들만의 비기, 스피리츠 웨폰.
이는 분명 강력하기 그지없는 능력이지만 동시에 약점도 있다.
지금처럼 날린 무기가 제압당하면 오크들은 전부 맨손이 되어 버린다!
“크아아악!”
“커억!”
맨손 무술에도 소양이 깊은 오크 전사들이지만 신성군 기사들도 전투로 잔뼈가 굵은 몸, 무기도 없이 대항할 만큼 만만한 적은 결코 아니다. 무기를 봉인당한 오크 라이더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젠장! 와라, 아크라!”
바득바득 이를 갈며 하다툼이 사슬에 묶인 도끼를 향해 손짓했다. 도끼, 아크라의 양날이 황동의 블레이드 오러를 뿜으며 간단히 사슬을 잘라 내고 하다툼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감히 나의 친우를!”
분노하며 하다툼이 블레이드 오러를 흩뿌렸다. 일격에 세 기사의 몸통이 두 동강 나며 전장에 피를 뿌렸다.
도끼를 회수한 뒤 하다툼은 주위를 살폈다. 그 자신이야 오러 유저라 블레이드 오러로 사슬을 끊고 무기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다른 오크들에게는 무리인 이야기였다.
밀리는 전황을 보며 하다툼이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우, 재상 말 들을걸.”
☆ ☆ ☆
출진에 앞서 카를은 오크의 스피리츠 웨폰 사용을 염려했다.
-스피리츠 웨폰은 강력한 기술이지만 다수의 전장에서는 역시 약점이 뚜렷합니다. 2인 1조로 분담해 무기와 오크 라이더 각자를 상대하는 수법도 있을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무기 자체를 봉쇄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그냥 쇠 그물에 무거운 추 달아서 던져 버리기만 해도 스피리츠 웨폰은 움직임이 극히 제약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카를은 어지간하면 스피리츠 웨폰 없이 싸우길 권장했다.
-어차피 오크 라이더는 무기만 휘둘러도 충분히 강합니다. 굳이 위험 부담을 안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 판단됩니다만…….
당시 하다툼을 비롯한 오크 족장들은 카를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넘겼다.
-크하하! 카를 재상! 우리의 무기는 우리의 수족이자 영혼이라네! 허약한 인간 따위가 어찌 자유로운 영혼을 포박할 수 있을까?
-그럼 만일을 대비해 보조 무기라도 들고 가심이…….
-나의 영혼은 하나, 그러므로 나의 무기도 하나뿐이다! 어찌 영혼을 소통한 친우를 배신하고 다른 무기를 등에 짊어질 수 있단 말인가!
오크들의 저 똥고집에 결국 카를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오크 전사의 진정한 강함은 스피리츠 웨폰을 사용하는 전투 스타일에서 나오니, 그것을 봉인하면 강함도 크게 깎인다.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할 입장도 아니긴 했다.
하여튼, 그런 이유로 카를의 조언을 무시한 채 대뜸 전장에 들어섰는데…….
“크윽! 인간 놈들!”
“감히 나의 친우를!”
그 대가가 이것이었다.
물론 오크는 무기가 없다고 그 용맹함이 퇴색하지 않는다. 맨손, 맨주먹으로도 오크 라이더들은 필사적으로 기사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맨주먹으로 창 든 놈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역시나, 돌격의 기세는 꺾인 지 오래고 혼탁한 난전 속에서 점점 오크 라이더의 비명만이 그 수를 더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경장기병들이 동료 오크 라이더에게 고함도 질러 보았다.
“일단 무기를 회수하시오! 어찌 맨주먹으로 검 쥔 자를 상대하려는 거요?”
문제는 이놈의 오크란 종자들이 일단 전투 모드 들어가면 그저 돌진, 돌격, 용맹하게 다 때려 부수고 나아가는 것밖에 모른다는 점이었다.
무기가 없으면 주먹으로!
주먹이 잘리면 발길질로!
발도 잘리면 몸통 박치기!
이도 저도 없으면 죽어서 유령이 되어 저주라도 퍼부으리라!
이것이 오크 전사들의 미덕이니, 무기가 없다고 눈앞의 적에게 등을 돌릴 리가 없다. 뭐, 덕분에 맨손으로도 용케 기사들을 상대해 크게 전황이 기울지 않았다는 장점도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질 것은 자명했다.
‘아으, 미치겠네!’
블레이드 오러를 휘둘러 적진을 누비며 하다툼은 고민에 빠졌다.
그도 경장기병의 말대로 지금은 무기부터 되찾아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동족들이 그럴 리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씨발, 나 같아도 저랬을 테니까!’
지금 하다툼도 애병을 회수했으니 도로 냉정을 되찾은 것이지, 만약 오러 유저가 아니었다면 저들처럼 맨주먹으로 기사들에게 덤볐을 것이다. 원래 오크 전사란 그런 종자들인 것이다.
그때, 구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안타레스의 오크들! 뛰어난 용맹을 지닌 형제들이여!”
또 한 차례의 랜스 차징으로 신성군의 좌측을 흩어 놓은 안타레스 기사단, 그 단장인 아스레일이었다.
“그대들의 영혼의 친구가 사슬에 묶여 있소! 이를 구하지 않고 어찌 전사를 자처할 수 있단 말이오?”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같은 말이라도 저렇게 하니 뉘앙스가 바뀌었다. 이미 피가 머리끝까지 오른 오크들이었지만 저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럴듯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영혼의 친구가 사슬에 묶여 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냉정을 되찾았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들끓는 투지의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하여튼 단순한 종자들이었다.
“나의 친우여!”
“그 족쇄에서 풀어 주겠다!”
오크 라이더의 움직임이 변했다. 다들 눈앞의 상대 대신 자신의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챙! 챙그랑! 차창!
애초에 자물쇠 걸어 잠근 것도 아니고 그냥 사슬에 묶어 방패 매달았을 뿐이다. 스피리츠 웨폰의 움직임과 힘으로는 무리더라도 직접 손으로 들고 흔들면 그리 풀기 어렵지도 않다.
하나 둘 자신의 애병을 되찾고 본격적으로 기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어, 고맙다, 아스레일 경!”
하다툼이 진심으로 감사를 건넸다. 그 자신도 오크지만, 저런 식으로 동족들을 이끌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아스레일도 먼 거리에서 목례로 답했다.
“오크들과는 워낙 오래 어울렸으니…….”
안 그래도 이종족과 자주 어울렸던 아스레일이다.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 적도 많다.
특히 기사단장이라는 직책상, 그가 자주 만난 것은 역시 오크였다.
엘프는 아무래도 병력의 질은 높아도 수가 적고, 드워프는 수성 전문이다 보니 기사의 업무와 별로 겹칠 일이 많지 않다. 트롤 주술사들은 허구한 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서 아직도 좀 이해하기 힘들고.
기사와 사상도 비슷하고 전투를 숭앙하는 오크야말로 아스레일이 가장 오래 어울린 이종족들이다. 슬슬 저 종자들을 상대하는 수법만큼은 달인의 경지에 오른 아스레일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전장은 계속 팽팽한 양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무기를 쥔 오크 라이더지만 그렇다고 쉽게 기사들을 베어 넘기지는 못했다. 오크들이 무기를 되찾았다고 기사들이 동요하지도 않았다.
기사들 입장에서는 무기를 회수하고 다시 싸우는 쪽이 오히려 상식이었으니까. 차라리 맨주먹으로 덤빌 때 더 당황했었다.
“크아아아!”
“모가지를 비틀어 조상님께 바치겠다!”
전사의 포효를 터트리며 돌진하는 오크 라이더를 상대로 기사들은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았다. 노련한 기마술로 교묘히 좌우로 갈라지며 검을 휘둘러 오크 라이더의 측면을 노린다. 말의 다리나 보병을 상대하는 방식, 플랭크였다.
전황을 지켜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잘되고 있군. 저 무식한 괴물들을 상대로 정면 돌격을 할 필요는 없지.’
안타레스 기사단은 그래도 기사의 소양을 갖추기 위해 오크 라이더 상대로 차징 수행을 쌓았지만, 사실 오크 라이더를 진짜로 이기려면 굳이 무식하게 들이받을 필요는 전혀 없다. 힘도 체급도 압도적으로 우위인 상대로 정면 상대를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그냥 돌아가서 베면 된다.
이제껏 이 방법을 못 쓴 이유는 검을 허공으로 날리는 오크들의 기술 때문에 선회 도중 반격받았기 때문인데, 이젠 저 수법이 봉쇄된 것이다.
다다다다!
말발굽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신성군 기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오크 라이더의 좌우로 포진했다. 다이어울프가 광포하게 포효하며 말들을 겁줬지만 별로 먹히지 않았다. 이미 신성군은 다이어울프에 대비, 몬스터들을 포획해 마구간 옆에 가둬 놓음으로써 군마에게 맹수의 존재를 익숙하게 한 후였다.
“세이어를 위하여!”
“저 천한 것들을 모조리 베어 버려라!”
인류의 무지로 인해 얻었던 오크 라이더의 이점 대부분이 사라지니 남은 것은 순수한 실력의 승부뿐이다. 그리고 신성군의 기사들은 모두 대륙 곳곳에서 전투와 던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