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권 제46장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 (47/84)

제46장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

1

쌔애액!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파공음을 울리며 현란하게 흩뿌려졌다. 사방의 급소를 향해 파괴의 섬광이 날아든다. 키린트도 재빨리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타앗!”

퍼지는 오러 파문 속에서 러스가 계속 참격을 퍼부었다.

위인가 하면 옆이고, 아래인가 하면 휘어지며 등 뒤를 노리는 자유분방한 검격이 연신 키린트를 몰아붙였다. 러스 특유의 형태가 없는 자유로운 검술, 마음대로 검을 휘둘러도 그 이치가 어긋나지 않는 천재만의 검술이다.

반면 키린트는 철저히 제국 검술을 응용해 맞상대하고 있었다. 기본에 충실하게 자세를 유지하며 언제라도 다음 공격을 이을 수 있도록 모든 검격이 올올히 뿌려져 이어진다. 자유의 극과 격식의 극에 달한 두 달인의 검이 연달아 허공에 맞붙었다.

키린트가 감탄을 터트렸다.

“제법이구나!”

그러나 감탄과 달리, 키린트는 예측하기 힘든 자유분방한 러스의 검술을 무난히 막아 내고 있었다. 점점 러스의 안색이 굳어 갔다.

키린트가 문득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천재란 것들의 검은 대체로 이런 식이지!”

동시에 키린트의 검술이 바뀌었다. 기본에 충실하던 제국검에서 갑자기 온갖 변칙적인 궤도로 검이 날아온다.

“으윽!”

당황하며 러스는 뒤로 물러섰다.

낯선, 동시에 낯익은 검술이었다. 한 번도 상대해 본 적은 없지만 모를 수가 없는 타입의 검술, 바로 러스 자신의 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맹렬히 러스를 몰아붙이며 키린트가 차갑게 소리쳤다.

“나 역시 그대가 나타나기 전에는 최연소 오러 유저라 불렸다!”

키린트가 오러 유저로 각성한 것은 서른한 살 때의 일, 러스 이전만 해도 저 최연소 타이틀은 바로 그가 가지고 있었다.

“어린놈이 재능만으로 오러를 각성하면 보통 검술은 이따위가 되기 마련이지!”

자신의 무기에 자신이 당하는 꼴이 된 러스가 당황하며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이대로 밀리다간 도저히 승기를 잡을 수 없다!

이를 악물며 러스가 자세를 고쳐 오러 스킬을 발동했다.

“질풍 찌르기!”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회오리치며 키린트의 검광 전체를 뒤덮는다. 기세를 꺾으며 러스가 바로 후속타를 날렸다.

“혈풍의 베기!”

찌르기와 베기의 연계가 폭풍의 칼날이 되어 몰아친다.

“폭풍의 연검!”

칼날 폭풍이 오러의 빛을 발하며 혼란스럽게 키린트의 사방을 에워쌌다. 테이칸 왕국의 오러 유저, 웨를 경이 자랑하는 3단 연계기가 완벽하게 러스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이건 제법이구나!”

이번 기술은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기본에 충실하게 발동된 제대로 된 오러 스킬이었다. 잽싸게 키린트도 방어에 나섰다.

“중첩의 장막!”

은청색 오러가 올올히 풀리더니 허공에서 가로세로로 엮였다. 마치 씨실과 날실로 천을 잣듯이, 오러를 세밀하게 갈라 장막을 만든 것이다.

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칼날 폭풍이 오러 장막에 가로막혔다.

일반적인 오러 실드라면 뚫렸겠지만, 중첩의 장막은 모든 오러를 겹겹이 중첩해 구조적으로 보강하며 몇 배나 뛰어난 강도와 탄력성을 부여한다. 두꺼운 가죽조끼는 화살이 가볍게 뚫지만 여러 겹의 비단은 뚫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폭풍의 연검을 날린 러스가 눈을 빛냈다.

‘호오? 저런 식의 방어법도 있었나?’

하지만 돛에 바람 불면 뒤로 밀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 방어는 했으되 키린트는 연신 뒷걸음질을 치며 밀리게 되었다.

수세에서 벗어난 러스가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승기도 잡았을뿐더러 새 기술도 하나 건졌다!

그때였다.

“이게…… 이렇게 하는 건가?”

숨을 고른 키린트가 검을 들어 찌르기를 날렸다.

“질풍의 찌르기!”

은청색 블레이드 오러가 회오리치며 날아든다!

러스는 기겁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완벽한 질풍 찌르기였다.

“그리고, 이렇게였지? 혈풍의 베기!”

찌르기와 베기가 연계되며 태풍이 일어나 러스에게 불어 닥쳤다.

“폭풍의 연검!”

놀랍게도 키린트는 지금, 러스가 딱 한 번 선보인 웨를 경의 비기를 완벽하게 재현해 거꾸로 몰아친 것이다. 허구한 날 자기가 했던 짓, 남에게 당하니 그야말로 역지사지라 하겠다.

당황 속에서 러스가 무의식중에 검을 놀려 허공에 블레이드 오러를 뿌렸다.

“중첩의 장막!”

다급하다 보니 무심코 키린트가 했던 방식대로 방어한 것이다. 과연 누가 천재 아니랄까 봐 저 세밀한 오러 운용이 필요한 기술을, 러스는 딱 한 번 보고 그대로 베껴 내 허공에 재현했다. 이번엔 러스가 바람 맞은 돛단배가 되어 뒤로 밀렸다.

겨우 균형을 잡은 러스가 놀란 눈으로 키린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 번 보고 내 기술을…….”

웃기는 건, 키린트도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한 번 보고 내 기술을…….”

둘 다 당황한 나머지 잠시 공방이 멈췄다. 그동안도 타한 요새와 바슈탈론 제국군은 여전히 전투에 한창이다. 소란스러운 전장의 성벽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당황한 채 바라보았다.

키린트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비슷한 천재 정도가 아니었다 이거지…….”

러스도 마주 신음하며 말했다.

“……아예 동류라 이건가?”

☆ ☆ ☆

제국의 명문 검가, 라테반 가문에서 태어난 키린트는 어릴 적부터 스승이 없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그는 어떤 검술이라도 한 번 보면 따라 할 수 있었고 어떤 기술이라도 재현할 수 있었다.

덕분에 어린 키린트는 그리 열심히 검술을 수행하지 않았다. 잔소리가 심하면 가끔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낼 뿐, 허구한 날 딴 짓하며 놀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강했다. 단지 재능만으로도 명문 검가, 라테반 가문의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재능을 인정받은 키린트는 이례적으로 어린, 스물이란 나이에 제국 기사단 입단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30대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러를 각성하는 행운을 얻었다. 워낙 재능을 타고나다 보니 별로 열심히 수행하지도 않았는데 오러 유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갓 오러 유저가 되었을 때의 키린트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청년이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검술뿐 아니라 오러 스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오러양만 허용한다면, 어지간한 오러 스킬은 보자마자 바로 구사할 수 있었다. 제국 내의 경험 많은 오러 유저라도 그를 슬그머니 피해 다녔다. 승패는 둘째 치고, 자신의 기술을 훔칠 수 있는 상대를 좋아할 이는 아무도 없다.

세상에 그를 막을 이는 없었다. 있다면 오직 시간뿐, 나이가 들며 오러양만 늘어나면 저절로 대륙 최강의 무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는 만났다.

한동안 은거하고 있던, 그토록 명성 높은 현 대륙 최강의 검사, 검성 바나텔을.

당시 바나텔은 숙적 제라드와의 재대결을 위해 신기술, 아포칼립스 스팅거를 연마 중이라 속세와의 연락을 끊고 있었다. 그래서 입단한 지 몇 년인 키린트도 미처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아무리 키린트라지만 자신이 검성 바나텔과 비견되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바나텔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명성을 떨쳐온 전설의 검성인 것이다.

하지만 바나텔을 존경하지도 않았다. 그냥 먼저 태어나 먼저 강해졌을 뿐인 선배 무인이라 여겼다.

바나텔은 그런 키린트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조국을 사랑하고, 세이어를 찬양하는 바슈탈론 제국인이었다. 타국의 후배 오러 유저라면 싹수가 보이건 말건 가차 없이 죽여 버리곤 했지만, 제국의 후배 무인일 경우 마치 자신이 스승이라도 된 양 신경을 쓰곤 했다. 본인이 제자를 둘 수 없는 타입의 무인이기에 더더욱 그런 성향이 강했을 것이다.

그런 바나텔에게 키린트의 나태함은 도저히 두고 볼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바나텔이 그를 불렀다.

-한번 붙어 보자꾸나, 키린트. 네 실력이 보고 싶다.

애당초 그가 바나텔의 상대가 될 리 없다. 그래서 키린트는 정중히 거절했다. 속으로 ‘이놈의 노인네가 노망났나, 왜 새파랗게 어린 후배를 핍박하려 하는 거야?’라며 구시렁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바나텔은 조건을 걸었다.

-모든 힘으로 덤벼 봐라. 나는 딱, 네가 쓸 수 있는 수준의 오러양만을 쓰겠다.

키린트는 내심 비웃었다.

바나텔이 전설의 검성이자, 동시에 전설의 둔재라는 사실은 그리 비밀이 아니다. 그가 검성으로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존경받는 것은 오로지 저 무지막지한 오러양 때문이 아니던가?

그 오러양을 동일하게 맞춘다면 그는 어떤 오러 유저도 이기지 못하리라. 하물며 오러양이 낮은 상태에서도 제국의 강자를 수시로 격파해 온 키린트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젊은 치기도 있고 해서, 키린트는 자신만만하게 검을 들었다.

자신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검술을 마음껏 펼쳤다. 그동안 익혀온 제국 각 오러 유저들의 비기도 완벽하게 구사했다.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바나텔이 그 넘치는 오러로 키린트를 핍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딱, 키린트만큼의 오러양만을 썼던 것이다.

무형의 극에 다다른, 예측할 수 없는 그의 검술은 단순 무식한 바나텔의 제국검을 뚫을 수 없었다. 단순한 검술이라도 상대보다 빠르고, 강하고, 정확하면 어떤 공격이건 막을 수 있다. 아무리 온갖 페인트를 섞어 공격해도 상대의 반응이 그 페인트 모션까지 모조리 감당할 정도로 빠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반면 키린트는 바나텔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뻔히 아는 궤적, 뻔히 아는 공격이지만 막으면 막은 채로 무너져 버리고 피하려 들기엔 몸이 너무 느렸다. 이제껏 모든 공격을 예측하고 먼저 피해 온 키린트였지만, 아예 검격 자체를 무자비하게 퍼부어 융단 폭격을 해버리면 피하고 말고도 없다.

기본기.

기본적인 기량.

이것이 너무도 차이가 났다. 걸레처럼 널브러진 키린트에게 바나텔은 차가운 한마디를 남겼다.

-달걀을 아무리 화려하게 던져 봐야, 바위에 부딪히면 깨진다, 애송이.

그제야 키린트는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다.

넘치는 재능으로 그동안 많은 적수를 물리쳐 왔지만 사실 그는 체력, 스피드, 근력 같은 측면에서 너무 떨어졌다.

차라리 그에게 졌던 다른 기사들, 기본기를 단련한 그들이라면 오히려 바나텔과 좋은 승부를 벌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와 달리 매일매일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허탈해하는 키린트를 향해 바나텔은 가차 없이 꾸짖었다.

-그렇게 그냥 살아도 네 녀석은 강하겠지. 그럭저럭 이름난 오러 유저 수준은 유지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그게 네 녀석의 목표냐?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음에도 그 자리에서 만족하겠다는 거냐?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따듯한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그대로 떠났다.

-바슈탈론 제국은 언제나 최강이어야 한다. 나는 검성의 지위가 내 사후에도 제국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고 싶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이후 미친 듯이 기본기를 닦는 데 열중했다.

안 그래도 타고난 재능이 과했던 키린트다. 거기에 이제 노력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붙은 것이다. 고작 2년 정도였지만, 키린트는 순식간에 경험 많은 나이 든 제국 오러 유저들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키린트는 만족하지 않았다.

여태까지와 달리, 검성이란 목표는 너무도 높았으니까.

다른 무인들보다 상대적으로 강해서는 검성의 칭호를 얻을 수 없다. 저것은 오직 대륙의 무인을 철저히 압도하는 절대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다.

그리고 그런 키린트를 보며 대륙의 무인들은 조심스레 그를 차세대 검성으로 칭했다. 재능만으로도 상대할 자가 없었던 이가, 그 누구보다도 노력한다면 과연 누가 감히 상대할 수 있겠는가?

바슈탈론 제국은 대륙 최강이다.

그러므로 제국 최강의 검사는 대륙 최강의 검사이어야 한다.

대륙 최강의 검사의 칭호, 검성은 바슈탈론 제국의 것이다!

이 믿음만으로 여태껏 달려온 키린트였다.

그런데 지금, 또 다른 차세대 검성 후보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 ☆

성벽 위를 치달리며 러스가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반월참! 잔월!”

검의 궤적을 따라 초승달 형태의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에 응집되어 맺힌다. 그렇게 공중에 머무는 자신의 오러를 향해 러스가 일격을 날렸다.

“굉천월광!”

수십 개의 달빛이 비처럼 쏟아진다. 키린트가 양팔을 가슴으로 모으며 오러를 끌어냈다.

“레이븐 실드!”

은청색의 날개가 겹겹이 피어올라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굉천월광의 빛을 차단했다.

은청색의 날개에 레이븐, 까마귀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 좀 어색하겠지만 이는 원래 바실리 출신의 자유 오러 유저, 크로아틀 경의 비기로 원본은 회색의 날개가 펼쳐져 저런 이름이 붙었다.

지금 키린트는 방금 러스가 구사한 레이븐 실드를 보자마자 카피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저, 저 자식이 남의 기술을!”

멀쩡한 오러 스킬 눈앞에서 도둑맞은 러스가 이를 갈았다. 슬슬 적반하장의 격을 넘어서 장물아비 자기 집 털린 분위기였다.

키린트가 피식 웃으며 기술을 이었다.

“반월참, 잔월! 굉천월광!”

똑같은 공격이 러스에게 돌아갔다. 이번엔 러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방어에 나섰다.

“미라쥬!”

러스의 몸체가 흐릿해지더니 굉천월광이 그의 형상 주위로 미끄러지며 엉뚱한 데로 휘었다. 방금 전 키린트가 구사한, 오러에 매끄러운 속성을 부여하며 반발력으로 상대 블레이드 오러의 궤도를 뒤트는 오러 가드 스킬, 미라쥬였다.

뭐, 어차피 저 기술 미라쥬도 원래는 테이칸 왕국의 오러 유저, 모라이스 경의 것이었다. 예전 검을 나눈 적이 있어 그때 훔친 것이니 키린트 입장에서는 도둑맞는다고 딱히 속 쓰릴 일도 없다. (속 쓰려하는 러스의 경우, 아무래도 젊다 보니 그런 경향이 좀 있었다.)

키린트가 조롱하듯 뇌까렸다.

“원숭이처럼 잘도 따라 하는군.”

기가 막혀 러스가 핀잔을 흘렸다.

“댁이 할 소리는 아니지, 선배 원숭이 양반?”

서로가 서로의 기술을 카피해 대며 둘은 그렇게 싸워 댔다. 어느 정도 공방을 주고받으니 서로의 기술도 슬슬 밑천이 떨어져 갔다.

검을 섞는 와중에도 양쪽 모두 바슈탈론 제국의 오러 스킬이나 안타레스의 이종족 오러 스킬은 전혀 구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 적으로 마주하고 있는데, 상대에게 아군의 기술을 함부로 노출했다가 이후 원래 주인이 불리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

검을 휘두르며 키린트가 비아냥을 던졌다.

“슬슬 기술이 반복되는데?”

러스도 비웃음을 담아 대꾸해주었다.

“그쪽이야말로 아까부터 같은 기술만 반복하고 있는 것 같소만?”

역시 양쪽 다 동류다 보니 스타일도 비슷해서 쉽게 결판이 나질 않는다. 동시에 서로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또 그에 따라 똑같이 반응하다 보니 그야말로 짜고 치는 도박, 혹은 미리 수를 맞춘 검무처럼 되어 버렸다.

하지만 키린트는 그리 다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껏 이런 식으로 싸운 이유는 상대, 사이러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싶어 한 짓일 뿐이다.

‘천재다. 진짜 천재야, 거의 나만큼이나.’

말하고 보니 자화자찬도 이런 자화자찬이 없다. 그렇지만 키린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천재’라는 단어는 칭찬의 용도로 쓰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천재라 잘 알지. 천재란 족속은 원래 그 바닥이 얕디얕은 법이거든.’

타고난 천재는 노력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기에.

이를 가리켜 혹자는 ‘사자는 수행하지 않아도 강하다!’라든가 ‘진정한 강자는 수련하지 않는다. 수련은 오직 약자만이 하는 것!’ 따위로 미화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만 키린트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사자가 수행을 안 하니까, 그렇게 영양을 자주 놓치는 것 아니겠냐?’

키린트의 눈빛이 바뀌었다.

갑자기 그의 스타일도 바뀌었다.

진중한 자세, 거악처럼 뿌리내린 분위기에 차분히 가라앉은 오러의 흐름.

제국검의 자세로 돌아오며 키린트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나는 천재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바나텔 스승님 덕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단순하면서도 호쾌한, 순수한 블레이드 오러가 러스를 향해 뻗어 갔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러스도 손쉽게 피하거나 걷어 낼 수 있었겠지만 그 블레이드 오러의 끝은 미세하게 흔들리며 러스의 모든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다.

“어디 피해 봐라!”

자유와 격식의 융합, 키린트는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제국검을 완벽히 구사하며 그 검격의 방향을 자유분방한 그의 검술로 컨트롤하는 것이다.

“이, 이런!”

천하의 러스라도 피할 방법이 없는 일격이었다. 오러 가드 스킬을 쓸 겨를도 없었다. 억지로 몸을 틀며 러스는 간신히 검을 들어 공격을 흘렸다.

파지직!

오러 파문이 퍼져 나가며 은청색 전격이 튀었다. 동시에 러스가 뒤로 10여 미터 가까이 날려 갔다. 간신히 자세를 잡고 착지했지만, 막은 두 팔은 저려 왔다.

딱딱하게 굳은 러스를 보며 키린트는 전의를 더더욱 불태웠다.

그에게 있어 이 결전은 단순히 제국의 전쟁뿐만이 아니었다.

이는 차후의 검성, 그 칭호를 얻을 자격을 가진 이를 가리는 결투이기도 하다!

“스승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다음 검성의 칭호는 내가 제국으로 가져오겠다.”

☆ ☆ ☆

러스가 당혹스러운 듯 물었다.

“스승? 그대는 검성 바나텔의 제자였소?”

키린트의 스타일은 아무리 봐도 우직함이랑 거리가 멀었다. 우직함에 있어 신의 경지조차 초월한 바나텔의 제자로는 도저히 뵈지 않는다.

과연, 키린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하늘이 선택한 진정한 강자. 세상 그 누구도 그분을 사부라 칭할 자격이 없다.”

순간 키린트의 두 눈에 경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바나텔 님은 그럼에도 불민한 나에게 도움을 주시고 스승이라 칭하도록 허락하셨지.”

“……사부는 안 되지만 스승은 된다고?”

어이없다는 러스의 반응에 키린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저것이 남들이 듣기에 웃기는 소리란 건 그도 잘 알았다. 하지만 키린트에겐 분명 자랑스러운 호칭이다.

그런데 어째 러스의 표정이 기묘했다. 어이없기는 한데, 그게 우습다기보다는 공교롭다에 가까운 표정이랄까?

“……왜 그런 표정을 짓지?”

“아니, 그냥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다 싶어서…… 끼리끼리 놀다 보면 저런 것도 닮는 건가?”

“……?”

의문이 떠올랐지만 키린트는 더 말을 섞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느긋하게 수다나 떨고 있을 사이는 아니니까.

“받아 봐라!”

제국검 제2식, 내려 베기에 이은 올려치기가 키린트의 손에 의해 펼쳐졌다. 동작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 속에 담긴 블레이드 오러는 키린트가 그간 고련에 고련을 거듭한 막대한 거력을 담고 있었다.

‘감히 받아치지 못할 터, 피하는 순간 바로 네 목이 날아간다!’

키린트의 이 노림수는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 격인 수법이었다. 그야말로 기량에서 압도하는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수법인 것이다.

그런데, 러스가 키린트의 예상을 뒤엎었다.

“흥!”

코웃음을 치며 러스는 피하긴 커녕, 오히려 함께 내려 베기를 시전했다!

콰아아앙!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은청색 블레이드 오러와 부딪쳤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대한 파문이 사방으로 퍼지며 두 검사가 동시에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처음으로 키린트의 입에서 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윽!”

애써 자세를 바로 하는 키린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러스의 내려 베기, 그 속에 담긴 힘은 결코 그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충분히 강력한, 심지가 굳은 일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는 오직 노력을 통해 기량을 갈고 닦을 때만이 가능한 것인데?’

키린트의 심정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는지, 러스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댁만 천재로 태어난 게 아냐. 나도 천재란 게 얼마나 인생 허술하게 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거든?”

러스가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이번엔 그도 평소의 무형의 검세가 아니었다.

분명 자유분방한 기세를 풍기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에 충실하며 오랜 세월 검증되었음이 분명한 격조 높은 검세, 바로 눈의 여왕 이니야의 검술이었다.

차가운 기운을 어깨 위로 흩뿌리며 러스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쪽은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라서 재능만으로도 편히 살 수 있었나 본데, 난 재능만 믿기에는 너무 삶이 팍팍했거든?”

제대로 된 검술 한 조각 얻지 못해 내려 베기만 10년을 해 왔던 러스다.

기껏 오러를 각성해도 옆에 있는 것이 전설의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이었다.

겨우 좀 마음에 드는 기술 개발해도 주위의 온갖 이종족 괴수들로부터 이리저리 채이고 살았다.

대륙 최연소 오러 각성자라는 자부심조차도 테스론, 알렉스 등에게 깨진 지 오래다.

“기량? 기본기?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안다고!”

러스가 몸을 날렸다. 블레이드 오러가 바람을 가르며 키린트를 쇄도했다. 키린트도 검을 들어 막았다.

수차례나 오러가 맞부딪치며 파문이 일었다. 일격, 일격을 마주할 때마다 검을 쥔 두 손이 저려 왔다.

키린트는 이를 악물었다. 이는 절대 천재의 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노력, 또 노력한 인간의 검이었다. 그것도 혼자만의 노력이 아닌, 누군가 절대적 강자의 손길이 닿은 듯한 흔들림 없는 기량이다!

러스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래, 잘 알지! 기본기 중요한 거! 그래서 그런 미친 짓도 했지! 젠장, 내가 미쳤지! 내가 왜 그 양반에게 가르침을 달라고 했을까?”

일단 흥분하고 나니 제라드의 밑에서 당해 왔던 그동안의 고생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지독한 꼴까지 당하며 기본기를 닦았는데, 거기다 기본기나 익히란 소리 들으면 사람이 화가 안 날 리가 있나?

“어디 확인해 보시지! 과연 내가 재능만 믿는 어리석은 천재인지!”

2

키린트와 사이러스는 성벽 위를 치달리며 백중세로 싸웠다.

서로가 튼튼한 검술의 기본 위에 자유로운 검격을 날려 공방일체의 자세를 구축하며, 동시에 온갖 화려한 오러 스킬을 난무한다. 서로가 서로의 기술을 베껴 대며 찬란한 블레이드 오러를 흩뿌리는데 둘 다 지구력 또한 장난이 아니라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키린트를 상대하며 러스가 고민했다.

‘어쩌지, 허공검을 꺼내야 하나?’

키린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기를 써야 할까?’

러스의 허공검처럼, 키린트 역시 남들에게서 베낀 것이 아닌 자신만의 오러 스킬이 있다.

그의 오러는 중력을 조작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한 일격에 거악 같은 무게를 실을 수도 있으며,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해 상대의 공세를 흘릴 수도 있다. 일정 범위 내에서 중력을 역전시키거나 오히려 고중력을 가해 상대를 압박하는 것도 가능하다.

키린트의 중력검 앞에 상대한 적들은 가공할 압박을 느끼며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중압의 기사라는 칭호를 얻은 이유였다.

하지만 러스나 키린트나 함부로 비기를 꺼내 들지 못했다.

양쪽 모두 같은 이유였다.

‘혹시 이것마저 저놈이 베껴 버리면…….’

러스의 허공검이나 키린트의 중력검이나, 그들 스스로도 카피할 수 없을 만큼 고도의 기술이었다. 그러니 설마 이것마저 베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그들 자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못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못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허공검을 빼앗기면 더 이상 상대할 방법이 없어!’

‘설마 싶지만 중력검마저 카피당하면 그땐 대책이 없다.’

스타일이 비슷하니 생각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결국 결정적인 일격 없이 둘 모두 소모적인 싸움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성벽 아래에서는 또 다른 사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죽어라! 이 더러운 오크!”

제국 오러 유저, 모스 경이 암회색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참격을 쏘아 댔다. 상대의 참격을 튕겨 내며 타시드는 힐끔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하늘이 내린 두 천재들.

그들의 사투는 성벽 밑에서 보고 있던 타시드에게도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저들은 여전히 저 화려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성벽과 수직으로 서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참, 저러고 멀미도 안 나나?”

키린트도 키린트지만, 새삼 러스가 얼마나 천재인지 실감이 드는 타시드였다. 비록 대련 때야 워낙 서로 익숙해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타시드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저런 짓은 할 자신이 없었다.

“잘도 서로의 기술 베껴 대네? 난 대여섯 번은 봐야 겨우 감 잡겠던데.”

게다가 저 중첩의 장막이라 했던가? 오러를 복잡하게 엮어 방어력을 극도로 높이는 저 수법은 솔직히 가르쳐 줘도 할 자신이 없었다.

타고난 천재인 타시드는 굉천월광이나 기간틱 블레이드 같은 류의 오러 스킬은 그래도 연습하면 쉽게 따라할 수 있었다. 사실 인간 기준에서나 타시드가 강검사지, 오크 투사 중에서는 세련되고 정교한 검술을 지닌 기교 위주 검사에 속한다. 그의 또 하나의 스승, 대모 스탈라처럼.

하지만 폭풍의 연검 같은 고도의 오러 운용은 역시 무리였다. 분명 몇 번 보면 어찌하는지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자기 손으로 행하기엔 역시 세심함이 부족한 것이다.

“어휴, 나도 부족에선 천재 소리 제법 들었었는데 러스 저 자식이랑 비교하면 영 둔한 것 같단 말이지.”

안 그래도 스탈라에게 둔하다며 잔소리 듣는 처지라 더더욱 우울한 처지의 타시드였다. 의기소침해져 그는 계속 성벽 위를 힐끔거렸다.

……문제는, 그가 지금 한가하게 자리 깔고 구경하며 감탄하는 처지가 아니란 점이었다.

“으윽! 이 괴물 같은 오크 놈!”

“대체 어떻게 이런 오크가 세상에 있을 수가!”

타시드를 상대하고 있는 두 오러 유저는 지금 누구처럼 느긋하게 성벽 위나 바라보며 감탄사 늘어놓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에겐 눈앞의 오크나 제국 유수의 천재 검사 키린트나 별 차이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키린트보다 이 녹색 피부의 오크가 더 강한 것 같았다!

“타앗! 블레이드 랩소디!”

“천검난무!”

프레드릭과 모스가 저마다 자신의 고유 기술로 타시드를 압박했다. 하지만 타시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허업!”

참마도 다카르를 교묘하게 놀리며 타시드의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가 좌우로 뻗었다.

그 공세가 절묘하게 두 기술의 시발점을 찔러 기술의 맥을 끊는다. 제대로 위력이 붙기도 전에 흩어진 두 참격, 그 사이를 노리며 타시드가 연격을 퍼부었다.

푸른 전갈의 습격!

좌우 횡 베기가 두 오러 유저를 동시에 노렸다. 두 사람 다 허겁지겁 공세를 막는 찰나, 타시드의 기술이 이어졌다.

내려찍는 전갈의 꼬리!

검세가 허공에서 변화해 유성우처럼 머리 위로 쏟아진다. 감당키 어려워 프레드릭과 모스가 정신없이 뒤로 밀렸다.

두 사람 모두 신체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나며 피가 흘렀다. 상처 자체는 옅지만 오러의 중압감 때문에 마치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 전신이 뻐근하다.

“크윽, 이것도 먹히지 않는가?”

“마치 내 기술을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잖아, 이건!”

밀린 프레드릭과 모스가 이를 갈았다.

아까부터 이런 상황이었다. 어떤 공격을 해도 저 건장한 오크는 마치 미리 예상하기라도 했듯 도중에 반격을 해 대고 있었다. 오러양이 제국 오러 유저 측이 더 높기에 카운터를 먹고도 별 피해는 없었지만, 기술적 측면에서 노골적으로 읽혔다는 것은 역시 정신적 타격이 크다.

게다가 더더욱 굴욕적인 부분은…….

“야, 천재다. 진짜 둘 다 천재네.”

타시드는 그 와중에도 계속 성벽 위를 힐끔거리며 이쪽에 집중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타시드가 오크어로 중얼거리고 있어 망정이지, 만약 알아들었다면 울화통 터져 뒷목 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계속 곁눈질을 하는 타시드의 태도에 보다 못한 제국의 오러 유저, 모스 경이 버럭 호통을 쳤다.

“기사도도 모르는 비천한 오크 놈 같으니! 네놈도 검을 쥐었다면 눈앞의 상대를 존중해라!”

그러자 타시드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의 기사도를 굳이 그가 지킬 이유는 없지만 오크 전사의 전통 또한 눈앞의 대적자에게 집중하지 않음은 큰 무례다. 원래 타시드도 이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근묵자흑,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고 하도 러스와 오래 어울리다 보니 절로 신기한 기술 보면 그쪽에 신경 쓰는 습관이 붙어 버렸다.

‘으윽, 나의 실수로다.’

바로 성벽에서 시선을 떼고 타시드가 정중히 사과를 건넸다. 이번엔 혼잣말이 아니라서, 오크어가 아닌 마법 목걸이로 인해 번역된 공용어였다.

“미안하오, 나의 과오를 용서해 주시오.”

모스 경이 숨을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이 자식, 어떻게 기술을 모조리 읽는 거지?”

“안력과 반사 신경이 그리 좋은가?”

“검세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오러 스킬마저 미리 막는단 말이오? 그것은 기감으로도 안 되는 것이거늘?”

모스 경의 분통에 프레드릭 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키린트 경은 막았잖나?”

“그럼 저 따위 오크가 키린트 경과 동급의 천재란 말이오? 말도 안 되는!”

“확실히…… 키린트 경과는 좀 다른 느낌이지만…….”

동료의 투덜거림에 프레드릭은 고민했다. 타시드의 저 기이한 짓거리는 천재, 키린트를 상대할 때와는 좀 달랐다.

키린트는 기술을 한 번 보자마자 바로 이해, 두 번을 허용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타시드는 달랐다. 저 오크는 아예 처음 한 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쪽의 기술을 모두 파악해 버리는 것도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맥을 끊을 때 바로 결정타를 날렸을 터, 하지만 맥을 끊는 것 이상의 공격은 하지 않는단 말이지?’

비교적 침착한 성품인 프레드릭은 이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혈질인 모스는 달랐다. 오크 따위에게 밀리는 자신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는지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며 대뜸 반격에 들어갔다.

“이 비천한 노예 새끼가!”

모스의 오러 스킬이 막 뻗어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너무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블레이드 오러의 제어가 일순 흩어지며 제어된 힘이 엉뚱한 데로 흩어져 버렸다.

모스 경의 안색이 굳었다.

‘아차! 실수다!’

그런데, 하필 뒤틀어진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에서 휘어 타시드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노리질 않았는데 엉뚱하게 회검류 기술이 된 셈이었다. 그야말로 천운이다.

‘이거 운이 따르는군!’

모스 경은 당황했지만 프레드릭 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노리지도 않은 기술이니 예측이 될 리가 없다. 바로 공격에 합세하려 무릎을 굽히는 찰나였다.

“흥! 어금니 막기!”

콧방귀를 켜며 타시드가 대뜸 허리를 비틀어 대지로 대검을 크게 그어 넣었다.

콰콰쾅!

청록색 오러가 간헐천처럼 분출하며 타시드의 등 뒤를 가로막았다. 대족장 칼켄의 비기를 적절한 순간에 구사한 것이다.

순간 프레드릭이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마, 말도 안 돼!’

애당초 실수한 기술을 예측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사전 동작도, 오러의 흐름도 모두 측면 공격을 위한 것이었다. 그저 제어가 벗어나 배후 공격이 되었을 뿐.

그런데 타시드는 그걸 간단히 알아챘다.

‘단순히 상대 공격에 반응한 것이 아니야. 분명 모스 경이 실수하기 전에 먼저 움직였어!’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오건 이후 이어질 공격을 알아채는 능력.

프레드릭 경은 저 능력에 대해 문헌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전투 예지!”

☆ ☆ ☆

300년 전의 검성, 아인츠발트의 비기.

전투 예지.

그것은 인간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는 시간과 공간, 물질 중 시간 그 자체에 개입하는 초월적인 오러 스킬이었다.

“말도 안 돼…… 오크 따위가 그런 기술을 터득했을 리가…….”

검성 아인츠발트는 전투에 인해 3초 전의 모든 공격을 ‘미리’ 볼 수 있었다. 예측 따위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예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사실을 시간을 뛰어넘어 미리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이것이 전생의 오크 대전사, 타시드가 검성 사이러스와 동등하게 싸울 수 있던 진정한 이유였다.

공간을 다루는 검성 사이러스를 상대로 오크 대전사 타시드는 시간을 초월하는 안목으로 맞섰다. 무술에 대해 잘 모르던 당시의 레펜하르트는 그냥 감 좋아서 막은 줄 알았지만, 사실 허공검이 감 좀 좋다고 막을 수 있는 레벨의 기술은 결코 아니다. 오크 대전사 타시드는 확실히 검성 사이러스와 같은 위치, 비슷한 깨달음을 지닌 진정한 강자였던 것이다.

비록 현재 타시드의 전투 예지는 전생과 비교하면 미약할 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두 오러 유저를 상대하기엔 충분하다.

프레드릭이 전율하며 중얼거렸다.

“전투 예지라니…… 그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거늘…….”

전투 예지의 힘은 검성 아인츠발트 이후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다. 기술의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그 부작용이 너무 심각해 설사 단초를 잡았던 오러 유저라도 제대로 익히질 못한 기술이었다.

예지 능력, 이는 분명 반칙적으로 강한 능력이지만 그만큼 감각을 크게 훼손한다. 온갖 공격이 난무하는 복잡한 검투 속에서 현재와 미래의 환영이 공존하는데, 그것을 구별하기에 인간의 뇌는 너무나 섬세한 것이다.

능력을 계속 사용할수록 뇌는 환영을 인식하고 그에 적응하며 점점 더 고도로 예민해진다. 종국엔 전투가 아닌 일상에서조차 환영과 실체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니 극도의 정체성 혼란과 우울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검성으로 이름 높았던 아인츠발트도 저 능력을 개화한 이후 3년이 채 못 되어 미쳐서 자살해버렸다.

미래를 보는 것은 그만큼의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리석구나, 전투 예지는 검사라면 손대어선 안 될 광기의 검이거늘!”

프레드릭 경이 고함을 터트렸다.

타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전투 예지? 뭐야, 그건 또?”

“네놈이 보고 있는 미래의 환영 말이다! 그걸 보고도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타시드가 눈을 껌뻑였다. 그제야 프레드릭이 뭔 소리 하는지 알아들은 것이다.

“아, 뭔 짓 할지 대충 보이긴 하는데 그게 뭐?”

이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오크는 정말로 시간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

대단하고 또 감탄스러운 능력이지만, 프레드릭의 표정은 오히려 밝아졌다.

‘정말 전투 예지라면 방법이 있지!’

검성 아인츠발트의 문헌을 통해, 그는 전투 예지를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일격의 파괴력이 아니라, 공세의 숫자를 크게 늘려 버리면 된다. 그렇다면 미래의 환영도 그 수가 월등히 많아질 것이고, 그만큼 그 힘을 다루는 타시드에겐 극도의 심적 부담이 될 테니까.

프레드릭의 검세가 더욱 그 수를 늘렸다. 상황을 알아챈 모스 경도 재빨리 합류했다.

자신만만하게 프레드릭이 고함쳤다.

“어리석구나, 오크야! 언제까지 그 힘을 다룰 수 있을 것 같으냐?”

무수히 쏟아지는 미래의 환영, 인간이라면 그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파편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어째 상황이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루긴 뭘 다뤄? 그냥 보이니까 막는 건데.”

공세가 늘건 줄건, 타시드는 전혀 부담 없이 감당하고 있었다.

분명 현재와 미래의 환영이 공존하고 있을 텐데 표정에 한 치의 혼란도 없어 보인다. 뭐, 살짝 우울한 감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 위에서 놀고 있는 두 천재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일 뿐이다.

그렇게 몇 번이나 다량의 검격을 퍼부었지만, 타시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무난히 막아 내며 적절하게 반격을 할 뿐이다.

오히려 프레드릭이 당황해 버렸다.

“이 오크 놈은 미래의 환영을 보면서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전투 예지는 분명 인간에게 허락된 기술이 아니었다. 창조적이고 창의적이며, 상상력이 뛰어나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볼 수 있는 인간에게는.

하지만 오크는 그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을 믿지 않고, 분명 존재했던 조상들을 믿는 오크다. 미래의 환영이 보인다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고민할 만큼 우울한 성격도 아니다. 그리고 타시드는 분명 오크치곤 머리가 좋았지만, 그래 봤자 오크였다.

보이면 보이는가 보다, 안 보이면 그런가 보다, 대충대충 넘어가는 오크에게 자아 정체성의 흔들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이것이 예지인지 그냥 감인지 구별 못 할 만큼 멍청한 것이다!

“정체성 의문? 씨발, 내가 내 팔로 내 검 들고 잘 싸우는데 뭔 의문이 있어?”

타시드는 전혀 고민도 고뇌도 없이 전투 예지를 막 쓰면서도 뇌에 조금도 부담을 느끼질 않았다. 애초에 부담을 느낄 만큼 섬세한 뇌도 아니고.

그 덕에 전투 예지가 100퍼센트 들어맞지도 않았지만…….

“윽!”

모스 경의 블레이드 오러가 타시드의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워낙 환영이 많다 보니 보면서도 구별을 못 한 탓이었다.

모스 경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어떠냐! 오크! 네 전투 예지가 무적이 아님을 알겠느냐?”

타시드는 개의치 않았다. 어깨의 상처는 가볍게 스친 것으로, 전투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다. 오크 전사는 이 정도는 상처로 치지 않는다.

“아, 감 잘못 잡았네?”

이러고 신경 끈다. 그리고 다시 전투에 매진한다.

“싸우다 보면 당연히 칼침 맞게 마련이지, 살짝 긁어 놓고 뭘 그리 저리 잘난 척을 한대?”

환청이나 환각도 머리가 받쳐 줘야 생기는 것이다. 환청도 기분 탓, 환각도 기분 탓이라며 대충대충 넘겨 버리는 타시드에게 스트레스란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껏 미래의 환영을 보며 두 오러 유저를 상대했다.

“이 방법은 안 되겠군.”

결국 프레드릭과 모스는 검세를 바꾸었다. 무수히 공세를 퍼붓는 것은 시행하는 입장에서도 체력 소모가 너무 커 오래 할 짓이 아니었다.

‘난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역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인가?’

전투 예지를 쓰는 자에게 기교는 통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막거나 피할 수 없는 외통수의 일격, 즉 순수한 힘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프레드릭과 모스가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힘으로?’

‘오크를 상대로?’

자신의 허벅지보다도 두꺼워 보이는 팔뚝에, 어디서 대들보를 뽑아온 것 같은 참마도를 몇십 분째 휘두르면서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저 우락부락한 오크를 힘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

두 오러 유저는 승부를 포기했다. 대신 방어에 치중하며 타시드의 발을 묶는 데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바꿨다.

일단 상대가 저렇게 나오니 타시드도 필살의 일격을 먹이기가 어려웠다. 일대일이라면 벌써 승부가 났겠지만, 전투 예지를 통해 카운터 일격을 넣어도 다른 한쪽이 커버해 주니 알면서도 놓칠 수밖에 없다.

“타아앗!”

“허업!”

기합을 연신 터트리며 세 오러 유저는 계속 공방을 주고받았다.

3

성벽 위와 아래에서 양측의 오러 유저가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제국의 공세 속에서 조금씩 타한 요새군의 피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화살 비에는 거의 무적이던 드워프의 ‘강철의 지붕’도 날아드는 마법에 대해선 그리 유효하지 못했다. 성벽 곳곳에 시체가 늘어났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타한 요새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결코 적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제국군 지맨 사령관은 인상을 썼다.

‘이거 안 되겠군.’

제국이 자랑하는 중장보병, 기사와 동급의 갑주를 갖춘 채 돌진하는 이 보병들은 특히나 공성에 탁월한 힘을 발한다. 화살도 떨어지는 돌덩이도 몸으로 버티는 방어력을 갖춘 존재들이니까.

그 중장보병이 전혀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다. 연신 돌을 맞고 창에 찔리며 사다리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군다.

모두 저 성 위의 철벽, 드워프 전사들 때문이었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띠는 이, 바로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성벽 이곳저곳을 종횡무진하는 저 드워프 전사 때문에!

“한 놈도 올라오지 못하게 해라! 모조리 떨궈 버려!”

드워프 오러 유저, 말로이드는 거대한 대검으로 성벽을 죽죽 긁어 가며 걸린 사다리니 갈고리밧줄이니 하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 내고 있었다. 낙석이나 화살도 버텨 내는 중장보병이지만 말로이드의 오러가 쓸고 갈 때마다 맥없이 성벽 아래로 떨어질 뿐이었다.

두꺼운 갑주 덕에 죽은 이는 많지 않지만 대신 부상자가 즐비하다. 슬슬 저들을 거두지 않으면 저 부상자는 곧 사망자로 변하리라.

“퇴군의 뿔피리를 울려라! 이 이상의 희생을 낼 순 없다!”

어리석은 장수라면 조금만 더 밀어붙이라며 닦달했을지 모르겠다만, 지맨 사령관은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아무리 병력의 질이 높더라도 제국군이 수적으로 열세라는 점은 명백했다. 지금은 병력을 아낄 때였다.

부우우웅!

지맨의 명이 떨어지자 바로 제국군의 움직임이 변했다. 궁병대가 화살을 쏘고 방패수들이 후진에서 앞으로 나와 선두에 선 중장보병의 앞을 가로막으며 천천히 후퇴를 시작했다.

“음?”

뿔피리 소리에 한창 검투에 열중하던 키린트가 힐끗 제국군 진지를 바라보았다.

‘퇴각인가? 아무래도 오늘의 공격은 실패한 모양이군.’

명령이 떨어졌으니 키린트 자신도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 아쉬워하며 그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러스가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었다.

“누가 달아나게 놔둘 것 같나?”

반격하며 키린트가 매섭게 소리쳤다

“누가 달아난다는 거냐!”

말은 저렇게 했지만, 여기서 아군과 함께 퇴각하지 않으면 적진 한복판에 고립되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적진 한복판에 뚝 떨어져 살아남을 가능성은 적다. 아니, 사실 키린트 혼자라면 그래도 살아남겠지만 그 적진에 동급의 오러 유저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겠다!”

고함을 터트리며 러스의 공세가 더욱 매서워졌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로 사방을 차단하며 키린트의 퇴로를 가로막는다. 키린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쳇, 쉽게 보내 주지 않겠다 이건가? 하긴, 나 같아도 저렇게 나섰겠지만.’

보아하니 성벽 밑, 녹색 오크 오러 유저와 싸우는 프레드릭 경과 모스 경도 쉽사리 발을 빼지 못하는 눈치였다. 서로의 실력은 백중지세, 먼저 등을 돌리기엔 너무 위험도가 크다.

하지만 키린트는 그리 난처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국군에는 이런 상황을 대비한 다양한 대처법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저 멀리에서 원호 공격이 들어왔다.

“나는 위대한 힘의 사역자, 정명된 이치에 따라 힘을 행사하노라! 아케인 포스 스트라이크!”

진지 안쪽에서 지맨 사령관과 함께 이 자리에 온 바슈탈론 마법병단 제 3대장, 9서클의 대마법사 론타리온이 융단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강력한 8서클 섬광 주문이 수십 줄기로 뻗어와 러스와 타시드를 노렸다.

“윽?”

“이런!”

다급하게 둘 모두 오러 가드를 펼치며 파괴의 섬광을 막아 냈다. 거리가 워낙 멀어 위력이 많이 반감했음에도 불구,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콰콰콰쾅!

황급히 크로방스 마법병단도 아군 오러 유저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 방어 마력장을 펼치고 날아드는 섬광 주문에 광계 반사 마법을 시전했다.

오러 가드를 펼친 채 타시드가 눈을 껌뻑였다.

“어? 공격이 좀 덜한데?”

러스가 눈을 빛냈다.

“좋아! 이 틈에 간다! 이대로 저자를 보내 줄 순 없어!”

적 측 오러 유저를 해치운다는 것은 이후 전쟁에 있어 크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셈이다. 기껏 기회가 왔는데 놓치기엔 너무 아깝다.

마법 폭격이 잦아드는 것 같아 러스와 타시드가 재차 후퇴하는 제국 오러 유저들을 쫓으려 했다.

그러나, 과연 9서클의 대마법사는 만만치 않았다.

“흐음, 그렇게는 안 되지?”

백발을 휘날리며 자색 로브 차림의 노인, 론타리온이 양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빠르게 수인을 맺으며 연달아 연계 마법을 시전한다.

“디스펠! 안티 매직 실드! 브로큰 에리어! 바람이여, 동토의 힘을 내 손에 담아 적을 치는 강력한 설풍이 되라! 블리저드 스톰!”

온갖 항마 주문이 크로방스의 마법 역장을 해체하고 동시에 영역 장악 주문이 광계 반사 주문을 파훼한다. 뒤이어 국지적인 눈보라가 러스와 타시드를 노리고 불어닥치니, 금방 팔다리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크윽!”

“젠장!”

오러로 몸을 보호하기에 냉기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지만, 순식간에 겉옷이며 갑주에 서리가 끼며 얼어붙어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느려진 틈에 거리를 벌린 제국 오러 유저들은 무사히 아군 진지로 퇴각했다. 닭 쫓던 개가 된 심정으로 타시드와 러스가 이를 갈았다.

“제길! 놓쳤다!”

“우리 쪽 마법사는 뭐 하고 있는 거야?”

크로방스 마법병단을 타박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사실 크로방스 측 마법사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계속 두 사람을 원호하며 해제 마법을 날리고 있었다.

그저 마법사로서 수준 차가 너무 심했을 뿐이다.

“으, 역시 우리 측 실력으로 저자를 상대하기는 벅찬가…….”

요새 높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타한 총사령관, 갈린 백작이 혀를 찼다.

현재 타한 요새의 마법병단장은 마법사 자크라스, 7서클 후반의 종사자로 고위 마법사의 위계를 가진 자였다. 요새 최강의 마법사이자 전투를 상당히 경험해 본 노련한 이지만, 아무래도 대마법사 론타리온에 비하면 많이 밀리는 감이 있었다.

‘오러 유저의 전력은 그럭저럭 맞는데, 마법 전력이 너무 떨어지는군.’

현재 크로방스 왕국 최강의 마법사는 9서클 초반의 종사자인 왕실 마법사 에스타리드로 국왕 유벨 2세와 함께 파루간 요새에 머물고 있다. 그 외에 크로방스 왕국에 대마법사의 위계를 지닌 이는 아바드 가문의 8서클 종사자, 리스터뿐인데 그는 가문과 함께 불참전 선언을 해 왔다.

반면 제국군은 대마법사의 위계를 지닌 이만 넷이나 있었다. 심지어 지금 상대하는 대마법사 론타리온은 9서클 중반의 종사자, 크로방스 최강의 마법사 에스타리드보다도 오히려 윗줄에 있는 자인 것이다.

불꽃과 연기를 피워 올리는 타한 요새 곳곳을 살펴보며 갈린 백작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화살비와 공성 병력은 드워프 부대가 확실하게 막아 주었으니, 저 상흔 대부분은 적들의 마법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

“요새 마법진의 힘을 빌리고도 이런 피해를 내다니…….”

마법사는 오랜 시간 준비한 자신의 영역, 마법진 내에선 서클 이상의 힘을 낸다. 4, 5서클 마법사라도 마법진의 힘을 빌리면 6, 7서클 마법사와 자웅을 결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타한 요새는 제클릭 경에 의해 방어 마법진의 유지, 보수를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번 농성전에도 최고의 위력을 발휘해 주었다.

‘아니, 그나마 오랜 세월 준비해 두었던 타한 요새의 마법진이 있기에 9서클 대마법사를 상대로도 여기까지 버텼다고 할 수 있으려나.’

그러는 동안 제국군은 착실히 타한 요새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요새군 쪽도 마법을 날리고 화살을 쏘아 보았지만, 퇴각하는 와중에도 전혀 진열이 흩어지지 않으니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적들이 물러난다!”

“우, 우리가 이긴 건가?”

“그, 글쎄…….”

분명 요새 방어에 성공했건만 타한 요새군의 사기는 그리 높지 않았다. 퇴각하는 제국군의 전력은 공격 전과 거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고작해야 몇십 단위의 시체만을 남긴 채 깔끔히 물러난 것이다.

병사들이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젠장, 죽도록 싸운 것 같은데 저것밖에 못 죽였단 말이야?”

“저게 제국의 진짜 힘인가…….”

물러나는 제국군의 진열 뒤로 한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확성 마법의 힘을 빌려 기사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타한 요새를 향해 외쳤다.

“축하한다! 이단자들아! 오늘은 그대들이 승리했구나!”

기사가 껄껄 웃으며 마저 소리쳤다.

“내일 또 보자! 하하하하핫!”

그러자 제국군 전체에서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래! 내일 보자! 이놈들!”

“한숨 자고 다시 들이 받아 주마!”

퇴각하는 도중임에도 제국군의 사기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타한 요새군을 조롱하는 분위기이기까지 했다. 멀쩡한 제국병도 부상자도 모두 한마음이 되어 고함을 질러댔다.

“어디 내일도 한번 아등바등 버티어 보거라!”

“크하하하!”

당연한 분위기였다.

비록 공성은 실패했지만, 제국군의 사망자는 이백이 채 되지 않는다. 워낙 병사 개개인의 기량이 높고 무장 상태 역시 뛰어나다 보니 그 혹독한 공성전 속에서도 부상자는 많을지언정 죽은 이는 거의 없는 것이다.

부상자라도 팔다리를 잘라야 할 정도의 중상자는 얼마 없었다. 세이어 신관의 힘을 빌리면 하루 만에 완치될 수준이었다. 실질적인 피해는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타한 요새는 오늘 하루만 천에 가까운 목숨을 잃었다. 성벽 쪽은 차라리 드워프들 덕에 방어가 튼튼해 그렇게까지 피해가 크진 않았는데, 문제는 제국군의 마법 공격이었다. 크로방스의 마력장을 돌파한 온갖 마법에 의해 후위의 병사들이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

즐비한 시체 사이에서 망연자실한 타한 요새군을 보며 킬리언 경이 이를 갈았다. 이대로 있다간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질 상황이었다.

“부관! 승리의 나팔을 불어라! 오늘은 우리의 승리다!”

나팔 소리가 요새를 뒤덮었다. 기사들 몇몇이 분위기를 선동했다.

“이겼다!”

“승리했다!”

“제국 놈들을 물리쳤다!”

그제야 병사들도 조금 안색이 밝아졌다. 하나 둘 선동에 따라 승리의 외침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이겼다!”

“제국 놈들아! 이것이 크로방스의 힘이다!”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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