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권 제45장 크로방스 서부 전선 (46/84)

제45장 크로방스 서부 전선

1

차탄 공국 동부, 진달트 평원.

수많은 군대가 황량한 대지 위에 진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진지 곳곳에 제국의 깃발이 힘차게 휘날린다. 그 수많은 깃발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야전 천막에서, 화려한 금빛 갑옷을 입은 40대의 중년인이 참모장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하라.”

오만한 말투로 중년인, 현 바슈탈론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이며 황태자의 지위를 지닌 길리우스가 손짓을 했다. 염소수염의 사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현재 크로방스 쪽은 총 오만의 정병을 동원, 서부 국경의 네 요새에 분산 포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새의 상태는 어떤가?”

“튼튼합니다. 비축 식량도 전투 물자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원래 크로방스 왕국은 전통적으로 차탄 공국과 앙숙이라 서부 국경을 방비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내전의 영향은 보이지 않던가?”

“서부 국경을 담당하던 총사령관은 크로방스의 오러 유저, 제클릭 경입니다. 그는 내전 도중에도 중립을 지키며 오직 국경 수비에만 신경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전의 영향은 없다고 보는 쪽이 옳습니다.”

길리우스 황태자가 턱을 매만지며 제클릭 경을 평했다.

“나라 꼴이 어찌 되건 자기 일만 하는 타입인가? 성실하고 우직하겠군.”

“과연 영명하십니다, 황태자 전하. 실제로 제클릭 경은 그 성실함과 우직함으로 검술을 수행해 오러를 각성한 케이스라 알려져 있습니다.”

염소수염 참모가 호들갑을 떨며 말을 받았다. 까놓고 말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인물평이지만, 원래 윗사람 모실 때는 적절히 아부를 하는 것 또한 세상 살아가는 비결인 법이다.

과연 길리우스 황태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흠흠, 그럴 줄 알았느니라. 그래, 저쪽의 주요 정예들의 면모는 어떠하더냐?”

“쉽게 말해 총력전이옵니다, 전하.”

염소수염 참모는 차분히 크로방스의 전력을 설명했다. 크로방스의 오러 유저 두 명과 대마법사, 왕실 기사단과 마법병단이 모두 출전했다는 설명에 길리우스가 태연한 얼굴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군. 국왕이 직접 지휘하니 당연한 이야기일 터다.”

유벨 2세가 직접 참전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제국군의 세력은 강대하다. 크로방스의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모든 전력을 서부로 보내 버리면 수도와 국왕을 보호할 병력이 남지 않는다. 반란의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그럴 바엔 아예 국왕도 함께 서부 국경에 머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만약 반란이 일어나도 국왕과 군대가 멀쩡하다면 바로 수습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 크로방스의 배후를 칠 만한 세력도 남아 있지 않고 말이지.”

원래 크로방스 동부 국경, 글로텐 산맥은 온갖 몬스터와 산악 민족 세력에 의해 항시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이미 글로텐 산맥은 안타레스의 이종족이 몽땅 차지했으며 그 너머 페틀랜드까지 세력을 뻗친 바 있다.

배후랄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서부에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울 수 있었다.

“단지 오러 유저 그란디아드 경의 불참은 우리도 예상치 못한 부분입니다. 정말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지, 아니면 크로방스 측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

오러 유저가 한 명 준다는 것은 전력적으로 볼 때 거의 대부대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다급한 처지의 크로방스 왕국이 귀한 오러 유저를 놀린다는 것은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참모장의 말에 길리우스는 속으로 웃었다.

‘과연, 은의 현자가 잘해 주었군.’

손을 내저으며 황태자가 단언했다.

“그란디아드 경은 참전하지 않는다.”

“어찌 확신하시는지?”

“그대는 알 필요는 없지. 어쨌건 함정 따위는 아니다. 신경 쓰지 말라고 다른 참모부에게도 전하라.”

“알겠습니다, 전하.”

영문은 모르겠지만 참모장은 동의하며 명에 따랐다. 황태자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제국 황실의 권위는 그 정도로 넓고 깊었다.

“어차피 이쯤은 다 알고 있던 이야기니라, 참모장. 빨리 다음 건으로 넘어가게.”

길리우스 황태자가 지겹다는 듯 재촉을 했다. 참모장이 긴장하며 말을 빨리했다.

“무, 물론입니다. 전하. 역시 중요한 것은 안타레스의 원군 세력인데…….”

참모장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기대했던 대로 파루간 요새에서 권황 제라드의 존재가 확인되었습니다.”

참 확인하기도 쉬웠다. 첩자를 보내거나 내부 정찰을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요새 첨탑 위에 보란 듯이 올라가 있었으니까.

“바나텔 공이 좋아하시겠군. 그 외엔?”

어차피 제라드가 나타날 것은 모두가 예측한 대로다.

“대륙 최연소 오러 유저, 사이러스 경의 존재도 파악되었습니다.”

“바나텔 공의 피를 본 그자 말이지? 차세대 검성으로 유력하다는…….”

바나텔의 목에 칼침을 놓은 이래 사이러스의 평가는 급등했다. 마치 바나텔이 제라드의 피를 처음 본 후 결국 검성으로 추대된 것처럼, 이제 세인들은 그를 바나텔에 이은 차세대 검성이 될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키린트 경도 좋아하겠군. 안 그런가?”

길리우스 황태자가 빙그레 웃었다. 참모장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사이러스 경이 나타나기 전까진 모두들 키린트 경을 차세대 검성으로 낙점 짓고 있었으니까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으실 겁니다.”

“호쾌한 검투를 볼 수 있겠군. 키린트 경을 그쪽에 보내 주게.”

“명하신 대로 행하겠나이다, 전하.”

잠시 기대하는 눈빛을 짓더니 길리우스가 마저 질문했다.

“그리고 노예 종족 놈들 쪽은 어떤가? 안타레스 공국에는 오러를 쓰는 건방진 노예들이 다수 있다던데.”

그러자 참모장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아쉽게도…… 노예 종족 쪽의 전력은 아직 확실히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드워프와 오크 오러 유저는 분명 와 있는 듯했습니다만…….”

순간 황태자의 언성에 노기가 띠었다.

“이미 전쟁이 코앞이거늘 무슨 소리인가? 제국의 첩보 능력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가?”

“그, 그것이…… 아무래도 노예 놈들은 기존 첩보 방식으로는 알아보기가 힘든지라…….”

정보력에 있어 대륙 제일이라는 바슈탈론 제국이지만, 그렇다 해도 그 방식 자체는 다른 나라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첩자를 내부에 투입하거나 은밀히 변장한 이들을 보내 수소문을 들어 파악하는 방식. 제국이 대륙 제일인 이유는, 저 첩자의 규모가 최대이기 때문이지 뭔가 제국만의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이 방식으로 인간인 제라드나 사이러스의 존재는 분명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예 종족 놈들은 이게 좀 어렵습니다.”

참모장이 허겁지겁 변명을 늘어놓았다.

“인간과 달리 드워프나 오크들은 얼굴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보니…… 크로방스 측의 병사들도 누가 오러 유저이고 누가 보통 병사인지 구별을 못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전 수뇌부 정도 되어야 알 수 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거기에 첩자를 심어 놓기는 지난한 일인지라…….”

“……듣고 보니 그렇겠군.”

인간 오러 유저라면 저절로 정체가 양쪽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 병사들도 충분히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니까. 자존심 강한 오러 유저들은 죄 지은 것처럼 얼굴 가리고 정체 숨긴 채 진지를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족의 경우, 똑같이 진지에 돌아다녀도 알아볼 방법이 없다.

“드워프나 오크 무리에 인간 첩자를 투입시킬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짐승 같은 노예 놈들을 첩자 교육 시켜서 투입시킬 수도 없고 말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이해했노라, 참모장.”

“감사합니다, 전하!”

화색이 되어 참모장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조금 기운을 얻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엘프 오러 유저나 상아어금니가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칼켄이라는 오크 놈들의 수괴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그것은 용케 알아냈군?”

“비교적 용모가 특이한 것들인지라…….”

사실 타시드나 하다툼, 킨지르 같은 오크 오러 유저는 겉보기로는 보통 오크 전사들과 구별이 쉽지 않다. 분명 크고 강력해 보이지만 그래도 다들 비슷해 보인달까?

하지만 신장이 2.3미터의 우악스러운 거구, 대족장 칼켄 정도는 인간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엘프답지 않게 가슴이 큰 이니야나 거대한 어금니로 확연히 구별되는 아틸카처럼.

턱을 만지며 길리우스가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일단 알려진 것만으로 크로방스의 오러 유저가 둘에,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가 셋이군.”

“예, 하지만 분명 더 있겠지요.”

“제국 측 오러 유저라면 저쪽도 파악했을 터, 최소 알려지지 않은 오러 쓰는 노예 놈들이 서너 명은 더 있다고 봐야겠군.”

“일단 참모부는 다섯 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바실리 왕국 쪽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안타레스 공국으로서도 그 이상의 전력 차출은 불가할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럼 크로방스 측의 오러 유저는 모두 열인가? 우리 측 오러 유저보다 둘이나 많군?”

“예, 알려진 대로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쪽도 우리 측에 숨겨진 전력이 있다는 것쯤은 예상했을 테니 저 정도는 준비했을 겁니다.”

현재 제국에 속한 자유 오러 유저의 거취는 알려져 있지 않다. 크로방스나 안타레스나 그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납득할 수 있도다. 저쪽도 아주 바보는 아닐 테니까.”

“실제로 안타레스의 재상, 카를이란 자는 상당한 수완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리석을 것이란 기대는 할 수 없겠지요.”

카를의 이야기가 나오자 문득 길리우스가 눈을 빛냈다.

“신기하단 말이야. 어디서 그런 인물이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아무리 낭중지추라는 속담이 있다지만, 세상에 인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일은 없는 법인데…….”

안타레스의 재상, 카를에 대해서는 전 대륙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안타레스 공국은 분명 신흥 세력이다. 국왕 레펜하르트나 사이러스 같은 강력한 오러 유저는 물론 수많은 강력한 이종족 전사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 일국을 세워 버렸으니까.

하지만 저들의 존재는 캐고 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그 유명한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이고 사이러스는 명문 검가 테네스의 일원이었다. 그 강함의 근원이 있다는 의미다. 이종족 전사들 역시 오지에서 살아가던 몬스터들이라 간주하면 그 강력함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 카를이란 자만은 도저히 근원을 알 수가 없었다.

행정학, 군사학, 정치학뿐 아니라 전략, 전술에도 능통하며 통치학에도 뛰어나다. 사실 말만 레펜하르트가 국왕이지 안타레스 공국은 사실 카를이 다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의 정보를 통해 제국도 이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는 홀로 생겨나지 않는 법이거늘.”

지식은 서적을 통해 혼자 쌓을 수도 있지만 지혜는 선인의 위업을 통해 얻는 것,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고는 쳐도 어디서 수학했으며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지 정도는 뒷조사를 하면 알아낼 수 있어야 했다.

“설사 재야에 묻혀 있던 이들이라도, 함께 동문수학하던 이 정도는 알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힘없는 참모장의 말에 길리우스가 기책이라도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흐음, 원래 크로방스에 그런 인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단지 신분을 숨기고 다른 사람인 척하고 있다면?”

“현재 알려진 바로는 전혀 일치되는 인물이 없습니다.”

참모장이 바로 대답했다.

정식 참모도 아닌 길리우스가 떠올린 생각을 전문가들이 못 떠올렸을 리 없다. 이미 제일 먼저 조사해 본 것이다. 그 뛰어난 제국의 정보력으로도 차마 현재의 카를과 미청년 카르사스가 동일인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정보를 모으고 있으니 조만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길리우스가 허리를 펴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뉘었다.

“뭐, 되었느니라. 알아내면 좋지만 몰라도 그만이다. 시체는 더 이상 지혜를 쏟을 수 없을 테니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길리우스가 화제를 바꿔 물었다.

“우리 군의 상태는 어떠한가?”

“황태자 전하와 함께하는 전쟁입니다. 모두가 사기충천, 당장이라도 출진할 수 있습니다.”

“바실리 왕국 쪽은?”

“마법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이미 안타레스 남부 국경까지 진군,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좋군.”

이제 양쪽에서 몰아칠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길리우스가 목을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전군에 알려라. 내일 아침 동이 틀 때, 일제히 국경을 넘겠노라고!”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참모장이 무릎을 꿇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오만한 태도로 자리에 선 채 길리우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성전이니 신성군이니 갖다 붙였지만 창칼 든 무리가 부딪치는 본질은 언제나 같다.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고 그 피로 배를 불리는 것.

“자, 전쟁이다!”

2

크로방스 서부 국경의 한 숲 속.

제국군 제 3연대는 숲 속에 진을 치고 막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이곳에서 1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크로방스 왕국의 요새, 타한을 정찰하는 것. 요새의 수비 상황과 전력 파악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이미 한차례 소규모 정찰병들을 여럿 보내 요새 곳곳을 파악했다. 적당히 철수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숲 속에 짙은 안개가 끼어 진지를 구축한 것이었다. 이 정도로 짙은 안개라면 부대의 모습을 감추기에 충분할 테니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이 천막에 주저앉아 열심히 배를 채웠다. 늦가을인 데다 안개도 끼고 또 수풀의 그림자 밑이다 보니 공기가 상당히 찼다.

젊은 병사 중 하나가 투덜거렸다.

“으음, 더운 국물이 마시고 싶네요.”

나이든 병사가 젊은이를 타박했다.

“닥치고 먹게. 연기 피우면 국물 마실 입도 안 남아 있을걸?”

정찰 부대의 임무 특성상 불을 피울 수 없기에 다들 차가운 빵과 딱딱한 건육으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다.

“그건 알고 있지만 말이죠, 이 정도 안개면 연기 피워도 모를 것 같은데.”

“자네 목을 걸고 장담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것?”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젊은 병사는 투덜거리며 남은 빵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허리춤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은 것도 없는데 오줌만 자꾸 마렵네.”

“긴장해서 그런 게야. 자네 이번이 첫 출전이지?”

“흥! 누가 긴장했다고 그러는 거요? 그냥 물을 많이 마셔서 그렇소!”

“어, 그래, 그래.”

나이든 병사가 비웃음을 던진다.

“조심해! 안개가 너무 끼어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이런 날씨라면 적이 나타나도 알아채기 힘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크로방스 놈들이 지금 안개 끼는 줄 어찌 알고 여기 때맞춰 나타난답니까?”

젊은 제국병은 투덜대며 그대로 근처 나무 그늘 아래로 향했다.

나무 뒤로 숨어 바지를 내리자 소변 줄기가 시원스레 나무등치를 때렸다.

“어, 시원하…… 응?”

순간 젊은 병사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어둑어둑한 수풀 저편, 그곳에 섬뜩하리만치 빛나는 두 개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산속에서 살던 병사였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로 맹수, 그것도 늑대의 눈빛이다.

“그런데…… 뭔 눈빛이 호랑이만 한 거야?”

병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눈빛은 무려 병사의 눈높이와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늑대가 이족 보행을 하는 동물이 아닌 이상, 정상적이라면 저 위치에 있을 리가 없다.

그보다 더 문제는 그 눈빛보다 더 높은 곳에 또 다른 눈빛이 빛을 발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건…….”

순간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숲을 스치며 가지를 흔들어 잠시 드리운 그림자를 걷었다.

크르르릉…….

으르렁대는 맹수의 소리.

병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맹수의 등 위에 탄 흉악한 얼굴이 병사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첫 번째 사냥감이군.”

병사가 알고 있던 노예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

그 강함과 흉폭함으로 전 대륙에 공포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들.

안타레스의 오크들이었다.

“울프 라이…….”

병사가 막 고함을 지르려던 차였다. 순간 그의 목이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다이어울프를 탄 오크가 검에 묻은 피를 떨쳐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때맞춰 안개가 끼는군.”

숲 전체가 흔들리며 수많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 규모의 부대가 근처까지 왔음에도 제국군 진지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 짙은 안개가 모든 것을 감춰 준 것이다.

선두에 선 울프 라이더, 전신이 흉터투성이인 강인한 인상의 오크가 검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가자! 위대한 형제들이여! 조상님들께 피의 제물을 바치자!”

“크하하하!”

“조상님들께 피의 제물을!”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워라!”

“탈카타 대장을 따라라!”

포효를 터트리며 울프 라이더들이 물밀듯이 밀려와 제국군 진지를 덮쳐 갔다. 한창 식사 중이던 병사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창칼을 들고 일어섰다.

“뭐, 뭐야?”

“으악! 적습이다!”

“안타레스 오크들이다!”

부대장이 기겁하며 갑옷도 채 입지 않고 튀어나왔다.

“저놈들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안개는 몇 날 며칠을 계속 끼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새벽부터 끼기 시작한 잠시 형성된 안개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틈에 저들이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마치……저들이 안개를 부른 것 같지 않은가?”

다이어울프를 탄 오크 전사들이 잔혹하게 진지 여기저기를 누볐다. 병사들이며 기사들이 애써 무기를 들고 반격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기습을 제대로 당한 데다가, 이 울프 라이더들의 실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가라, 스칸달!”

울프 라이더의 대장, 탈카타가 자신의 대검을 던지며 혼을 담아 그 이름을 외쳤다. 다른 울프 라이더 역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가라, 타르막!”

“날아라! 오루카!”

수많은 검들이 저절로 허공에 떠올라 전장 여기저기를 누비며 병사들의 피와 살을 베어 버린다.

“으아악!”

“귀신 붙은 칼이다!”

“안타레스 오크다!”

허공을 한 바퀴 휘저은 대검, 스칸달이 호선을 그리고 주인 탈카타의 손아귀로 돌아온다. 대검을 쥐고 다이어울프를 몰며 탈카타가 좌우로 참격을 날렸다.

서걱!

“커억!”

으어어억!”

두 명의 병사를 동시에 베어가며 탈카타가 호통을 쳐댔다.

“모두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곳곳에서 살육전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국병들이 무기를 버리고 숲 여기저기로 정신없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부대장의 목을 든 채 탈카타가 호쾌하게 웃었다.

“으하하! 이것이 진정한 오크 전사의 힘이다!”

다른 오크 전사들 역시 흥분한 얼굴로 고함을 질러 댔다. 모두가 색색의 피부를 지닌, 한 일족이 아닌 다양한 오크들이 모인 부대였다. 바로 탈카타를 비롯해 대륙 전역에서 구출된 오크 검투사들이었던 것이다.

한때는 인간의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며 서로에게 칼을 찔러 댔던 이들.

이제 이들은 위대한 검의 영혼을 깨닫고 맹수와 소통하며 자신의 무기와 대화하는 진정한 오크 전사가 되어 있었다.

즐비한 시체 위에서 탈카타가 포효했다.

“외쳐라! 우리가 승리했도다!”

“크아아!”

“조상님께 피의 제물을!”

“조상님께 피의 제물을!”

제국 침략 전쟁.

그 첫 번째 전투는 크로방스 연합군의 승리였다.

☆ ☆ ☆

쾅!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또!”

제국군 제 3대 사령관, 지맨은 분통을 터트리며 막사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또 그놈의 늑대 탄 오크 놈들인가?”

부관이 마찬가지로 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엔 크눕 경의 부대가 당했습니다.”

현재 바슈탈론 제국군은 네 부대로 나뉘어 각자 크로방스 서부 국경 요새로 진군하고 있었다.

원래 강력한 군세를 구축하고 있다면 굳이 힘을 나누어 각개격파될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크로방스 서부 국경의 방비 상태는 제국군으로 하여금 전력 분산을 강제하고 있었다.

파루간 요새로부터 양팔을 뻗어 나간 것처럼 남북의 요충지에 세워진 세 요새.

제스턴, 타한, 라카스.

그 위로는 얼어붙은 동토와 깎아지른 은빛 산맥이 있으니 저 네 요새는 크로방스 서부 국경을 철통같이 지키는 강력한 성벽이었다.

고대의 인간 제국 중에는 단순 무식하게 국경 전부를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쌓는 어리석은 군주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국경을 방어하는 데 그런 엄청난 성벽은 필요 없다. 저런 성벽은 쳐들어오는 적에 비해 이쪽의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질 때나 쓸모 있는 법이다.

기동력이 받쳐 준다면, 적절한 지형적 요충지에 튼튼한 요새를 세우고 군대의 기동력을 이용해 광범위한 영역을 방비하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다.

적이 쳐들어오면 싸우러 나서면 된다.

적의 군세가 강력해 평원에서의 전투가 불가능하다면 농성을 준비하면 된다.

적들이 요새를 노리면 맞서 싸우는 것이고, 요새를 포기한다면 출전해 기습하고 다시 요새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땅바닥에 진지치고 선잠 자는 침략군과 요새의 자기 방 침대에서 편한 잠자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출전하는 요새군, 어느 쪽이 사기가 높을 지는 말하나 마나다.

물론 요새를 무시하고 우회하는 전법도 있긴 하다. 농성하는 요새에 대비해 일부 군세를 남기고 바로 수도를 노리는 수법으로 승리를 거둔 장수도 인류 역사 속에 제법 있다.

하지만 크로방스 서부 국경 방어선은 그런 방식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단 하나의 요새라면 저 방식이 통하겠지만 크로방스 서부 국경은 파루간을 머리 삼아 세 개의 요새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긴밀히 연계되는 위치에 세워져 있었다.

모든 요새의 지형적 위치가 사리에 맞고 방어 범위가 절묘하게 겹쳐져 있으니 제국군도 저 요새들을 무시한 채 바로 파루간을 공략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간 세 요새로부터 바로 지원군이 와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포위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네 요새가 방어하는 범위는 국경 같은 한 줄의 선이 아니라 몇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의 지형이다. 만약 제국군이 요새를 무시한 채 그대로 진격한다면, 방어 지역을 진군하는 내내 크로방스 연합군은 요새에 주둔한 채 매일 치고 빠지는 수법으로 제국군을 말려 죽일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결국 방어선을 돌파해 봤자 제국군은 기진맥진할 것이고, 지친 제국군을 크로방스 연합군은 간단히 뒤를 노려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제국군 참모부도 바보는 아닌지라, 저 요새들을 점령하지 못하면 승리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정예 중의 정예로 이루어진 제국군, 네 부대로 나뉜다 해도 계산상 각 요새의 전력보다 월등히 높았기에 굳이 한 부대를 유지하는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제국군 3대 사령관 지맨도 승리를 장담하며 타한 요새로 진군하고 있었는데…….

“이러다간 요새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기가 꺾이겠어!”

행군하는 내내 제국군은 기습을 받아야 했다. 저 간악한 크로방스 연합군은 기사다운 정정당당한 결투 대신 비열한 기습을 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 노예 놈들을 쓰다니!”

“노예 놈들이라고 무시하기엔 피해가 너무 큽니다.”

오크의 울프 라이더에 의해 입은 피해가 벌써 천 단위였다. 심야나 짙은 안개, 흐린 날만을 골라 나타나 빠른 기습 후 잽싸게 도주해 버리는 저 울프 라이더들은 제국군의 기동력으로 쫓기가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말들은 기후에 민감한지라…… 다이어울프처럼 흙탕물에서도 평소처럼 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흙탕물이나 우천 시조차 개의치 않고 달리는 말들은 보통 명마 대열에 끼이며 귀한 존재들이다. 반면 다이어울프는 원래 산악을 뛰어다니던 야생적인 맹수,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천둥이 치건 신경 안 쓰는 무감각한 몬스터인 것이다.

지맨 사령관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참모부에서는 왜 이런 걸 미리 파악하지 못했나? 다이어울프의 습성에 대해서는 그들도 이미 파악이 끝났을 터인데?”

제국의 참모진은 유능하다. 대륙 제일의 국가에서 가장 머리 좋은 인간들만 골라 뽑은, 엘리트 중 엘리트다. 안타레스 오크들이 다이어울프를 타고 다닌다는 것도 이미 어지간히 알려진 사실, 이런 상황쯤은 당연히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부관은 난처해할 뿐이었다.

“그것이…… 다이어울프의 지구력으로는 이런 작전이 불가능했었는지라…….”

다이어울프는 분명 강력한 맹수이며 말에 비해 여러모로 전장에 유리한 점이 많다. 하지만 분명 약점도 있었다.

일단 인간이 길들이기가 불가능하다는 점, 또한 고기를 먹기에 농업 문화에서는 유지가 너무 어렵다는 점도 있었지만 제일 큰 문제는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차이였다.

자연계에서 사자는 영양을 사냥한다. 사람들은 사자가 무섭게 치달려 영양의 목을 무는 광경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 사자는 그 영양을 사냥하기에 앞서 수십 마리의 영양을 놓친 후다.

순간적인 폭발력, 사나운 기세, 돌격력은 분명 다이어울프가 위지만 지구력이나 장거리 질주력은 도저히 말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타한 요새와 현재 제국군의 위치는 도저히 한나절에 왕복할 거리가 아닙니다. 말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다이어울프의 지구력으로 그 거리는 무리지요. 그러니 미리 출격해 저희 진군 위치에 매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부관이 황당해하며 말을 이었다.

“거기서 원하는 흐린 날씨가 안 나타나면 소규모 울프 라이더들은 그냥 진군하는 제국군의 밥이 될 뿐입니다. 실제로는 시행할 수 없는 작전이란 말입니다.”

울프 라이더가 이토록 기습에 성과를 보인 것은 철저히 말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날씨만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날씨가 맑았다면?

말만 제대로 움직여 주었다면 제국군의 대규모 기마부대는 간단히 소규모의 울프 라이더들을 격퇴할 수 있었으리라.

울프 라이더는 도망도 갈 수가 없다. 다이어울프가 전력으로 달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십여 분에 불과하지만 말은 그 몇십 배나 되는 시간을 꾸준히 내달릴 수 있으니까.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도박 같은 작전입니다.”

“……그런데 그 도박이 먹히고 있지 않은가?”

지맨의 타박에 부관이 힘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이 일대의 기후를 잘 아는 현지인을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현명한 노인들은 그날 날씨만 봐도 다음 날 비가 올지, 해가 쨍쨍하게 뜰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뭐,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간의 감각에 한해서다. 실제로 저 노인이 100퍼센트 완벽하게 일기를 맞힌다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두세 번 틀리다가도 한 번만 맞으면 사람들은 대충 날씨를 맞힌 걸로 봐 주니까.

지맨 사령관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불확실한 것으로 전쟁을 치르는 바보들이라니…….”

“제대로 된 전략가가 할 짓은 아니지만, 어차피 상대가 어리석은 오크란 걸 감안하면 그럴듯합니다. 그냥 이제까지는 운이 좋았겠지요.”

부관의 설명에 지맨 사령관은 만족했다. 현 상황은 저런 식으로밖에는 도저히 합리적인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어리석은 사령관이라면 ‘언제까지고 운이 계속 될 리 없으니, 만약 맑은 날씨에 그놈들이 나타난다면 모두 도륙해라!’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지맨은 대륙 제일의 영토와 인구를 지닌 대제국 바슈탈론에서도 고르고 고른 무인이었다.

혈통과 인맥이 있어야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귀족 중심 체제라는 것은 바슈탈론 제국도 마찬가지지만, 제국 정도 되면 혈통과 인맥이 받쳐 주는 귀족의 숫자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거기서 고르고 고른 이들 중 유능하지 않은 이는 없는 것이다.

“놈들의 운이 나쁘다면 그냥 물리치면 그만일 터, 굳이 신경 쓸 이유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운이 따라 줄 가능성도 있겠지.”

지맨 사령관이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군, 중장보병을 내세워 이제부터 3교대로 보초를 선다. 말들을 쉬게 하고 대신 방어선을 굳게 둘러 습격에 항시 대비하라.”

기습을 막을 수 없다면, 언제 기습이 닥쳐도 대비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

물론 이렇게 하면 맑은 날씨에 울프 라이더가 나타나도 추격전을 못 하게 되는 문제가 생기니 코앞에서 적을 놓치는 굴욕을 당하게 되지만…….

“어차피 우리 목표는 타한 요새다. 놈들이 아무리 날뛰어 봐야 타한 요새를 벗어나진 못할 터, 보복은 그때 가서 하면 된다. 중간에 쓸데없이 병력을 소모할 이유는 없지.”

눈앞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지맨은 냉철하게 판단을 내렸다.

전혀 흠잡을 곳이 없는 대처였다. 부관도 깊이 승복했다.

“그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각하.”

☆ ☆ ☆

크로방스 서부 국경 요새. 타한.

검은 암석과 벽돌로 높게 쌓아 올린 이 거대한 요새 성곽에서 두 명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잘생긴 미청년 인간 검사와 녹색 피부의 우락부락한 오크 청년, 그래도 오크치고는 상당히 현명해 보이는 눈빛을 지닌 이였다.

“탈카타 쪽은 아무래도 더 이상 재미를 못 볼 것 같다더군, 러스.”

“벌써 제국이 대처를 했나? 빠르네.”

러스는 성벽 너머를 보며 혀를 찼다. 현재 그는 휘하의 안타레스 기사단 십 기에 인간 정병 오백을 거느리고 타한 요새에 합류해 있었다.

푸른 곰 부족의 전사 백을 거느리고 함께 합류한 타시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제 또 한 번 들이닥쳤는데, 다들 목책 두르고 방패 들고 버티고 있어 얼쩡거리다 그냥 왔다더군. 그 정도로 버티고 있으면 날씨가 어쨌거나 못 뚫지.”

“일기 예보로 재미 보는 것도 여기까진가? 너무 짧은데.”

러스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그리 깊이 공부하진 않았지만, 기사로 자라며 그 역시 초보적인 군사학은 익혀 두고 있었다. 전장에서의 기후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카를로부터 이 일대의 기후를 미리 알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런데 역시 제국은 만만치 않았다.

“고작 서너 번 써먹었는데 바로 대처했단 말이지, 쳇.”

“제국군이 설마 우리가 미리 기상을 알고 습격한다는 걸 알아챈 것은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날씨가 어찌 되건 상관없는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한 거지. 괄괄한 성격의 무인이면 하지 않을 선택지인데…….”

그리고 무인의 성격은 보통 괄괄하다. 그런 성격이 아니었으면 보통 칼 밥 먹는 길을 택하진 않을 테니까.

“아무래도 저쪽 사령관도 상당히 유능한 모양이군.”

현재 타한 요새로 진군 중인 제국군의 병력은 오륙천 정도로 파악되고 있었다. 반면 타한 요새의 주둔군은 일만, 농성 측이 공성보다 세 배 가까이 유리하다는 점을 파악하면 타한 요새의 승리를 낙점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러스는 긴장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병력의 질이 너무 달라.”

비록 그간 울프 라이더의 습격으로 인해 천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지만, 제국군 입장에서 그는 그리 큰 손실이 아니었다. 잃은 병력 대부분이 평범한 보병들. 제국군의 진짜 전력인 기사와 중장보병, 강궁병 등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반면 타한 요새의 일만 병력 중 구천은 평범한 보병이다. 일개 보병이 활을 쏜다고 정예 궁병이 되지도 않고 말을 탄다고 제대로 된 기마병이 되는 것도 아니니, 정예 전력을 파악하면 여전히 이쪽의 열세였다.

근심을 감추지 않는 친우의 표정에 타시드가 등을 툭 쳤다.

“뭐, 요새 방어는 저쪽이 알아서 잘해 주지 않겠어?”

타시드의 시선이 요새 반대쪽 성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많은 드워프 전사들이 인간 병사들을 지휘하며 요새 곳곳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드워프 오러 유저, 말로이드와 함께 온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이었다.

드워프 전사들이 열심히 인간 병사들에게 손짓하며 함께 돌들을 성벽으로 나른다. 투석전 대비용 돌들이다.

드워프 전사들을 지휘하는 말로이드, 그가 드워프와 인간 병사 모두에게 고함을 질렀다.

“다들 복창! 짱돌은 목숨이다!”

“짱돌은 목숨이다!”

“무심코 던진 짱돌에 제국군은 죽는다!”

“무심코 던진 짱돌에 제국군은 죽는다!”

드워프들이 진지하게 복창하니 인간 병사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한다. 웃기는 소리를 진지하게 따라 하니 전투를 대비해 한껏 긴장해 있는 이들도 어깨에 힘이 조금 풀린다.

말로이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려! 아, 공성 별거 아냐! 원래 돌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지는 것이고! 떨어진 돌 맞으면 사람은 죽는 것이여!”

“그, 그렇군요! 허허허!”

인간 병사 하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병사들도 함께 웃었다. 그 모습에 러스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거참, 전쟁 한번 단순하게도 만드네.”

타시드가 눈을 껌뻑였다.

“틀린 말도 아니잖나? 그리고 저거, 효과 좋다고.”

사기라는 것은 꼭 반드시 적의 목을 따고 그 피를 뿌리겠다는 각오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긴장을 풀어 주는 것도 사기를 올리는 한 방편이다.

여하튼, 저런 식으로 타한 요새는 곳곳이 드워프 전사들의 손길이 닿아 한층 더 강력하게 변하는 중이었다. 타시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어 하면 역시 드워프지. 모의전에서 푸른 곰 전사들의 진군도 막은 양반들인데? 저 방어선은 우리 일족의 전사들도 못 뚫어.”

“대신 드워프 쪽도 방어만 하지 푸른 곰의 울프 라이더를 쫓질 못했었지. 그야말로 모순이라는 고사성어 그대로군.”

제국군의 발길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당장이라도 적들의 군세가 저 평원 위로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손가락을 쥐락펴락 하며 러스가 흥분을 삭이고 있을 때였다.

“러스 경, 타시드 경, 작전 회의에 참가할 시간이오!”

갑옷을 완벽히 걸쳐 입은 중년인이 성벽 위로 올라와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러스가 송구스러워하며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 갈린 사령관님. 그냥 전령을 보내시지 어찌 사령관께서 직접…….”

중년인은 바로 타한 요새 방어 연합군을 총괄하는 갈린 백작이었다.

원래 타한 요새 주둔 사령관은 오러 유저 제클릭 경의 충성스러운 수하, 킬리언 경이지만 안타레스의 원군과 연합한 지금은 새로운 지휘 체계가 필요하기에 유벨 2세로부터 정식으로 임명받은 것이었다.

갈린 백작, 한때는 남작이었던 중년인이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다들 내일의 전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어찌 사령관이라고 전령을 쓰는 호사를 누리겠소? 무슨 먼 거리도 아니고 그냥 요새 안인데. 게다가 난 할 일도 없잖소?”

실제로 갈린 백작은 현재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딱히 뛰어난 무인도 아니고 대단한 전략가도 아닌 것이다.

그가 이 요새의 총사령관을 맡은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뿐이었다.

바로 안타레스 공국과 교류가 깊으며 크로방스 쪽에도 신망이 깊다는 것.

한때 옆 영지, 체타스 남작가에 의해 멸문할 뻔했던 갈린 남작가는 안타레스의 공왕, 레펜하르트에 의해 구원받고 오히려 더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유벨 2세의 눈에 든 그는 크로방스 정계 내에서 활약해 백작의 위계를 받은 지금, 그는 양 국의 외교를 조율하는 중요한 다리 중 하나였다.

그런 갈린 백작이기에 카를이 선택한 것이었다.

아무리 양국의 분위기가 화목하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군대가 연합하는데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원래 타한 요새 주둔 사령관인 킬리언 경을 무시하고 안타레스 측이 지휘 체계를 잡는다는 것은 주객전도, 지나친 명예 침해다.

하지만 사이러스나 타시드, 말로이드 같은 오러 유저를 킬리언 경 밑으로 넣을 수도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지휘를 마음 편히 할 수가 없을 테니까.

반면 갈린 백작은 양쪽 모두에게 호감을 얻고 있고 또 연장자의 위엄도 있었다. 어차피 전략 자체는 카를이 다 짜 놓은 것, 그때그때 상황 맞춰서 실행하기만 하면 되니 필요한 것은 양쪽 모두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다독일 사람뿐인 것이다.

타한 요새뿐 아니라 모든 요새의 지휘 체계는 이렇듯 카를에 의해 절묘한 인원 배치가 되어 있었다. 모두 크로방스와 안타레스 양국으로부터 불만이 없는 인선이었다. 사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는 카를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갑시다.”

“네, 사령관님.”

갈린 백작을 따라 러스와 타시드가 성벽을 내려왔다. 미리 갈린 백작이 먼저 들렀었는지, 이미 말로이드도 성벽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회의실로 향하며 타시드가 물었다.

“킬리언 경은 이미 회의실에 가 있습니까?”

영지전의 인연 이후, 갈린 백작은 수시로 안타레스 공국을 들락거리며 안면을 익혀 왔다. 타시드 역시 몇 번이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서로 익숙했다.

갈린 백작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 친구야 항상 성실하니까. 상사 닮아서 그런가? 제클릭 경의 수하는 모두 성격이 비슷해 보이더구려.”

“깐깐해 보이긴 합디다, 음.”

회의실로 들어서자 목석같은 딱딱한 인상의 장년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원래 타한 요새 주둔군 사령관 킬리언 경이었다.

테이블로 안내하며 그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어서 오시오, 사이러스 경, 타시드 경, 말로이드 경.”

러스뿐 아니라 오크인 타시드와 드워프인 말로이드에게도 그는 거리낌 없이 경의 칭호를 붙였다. 그에 대한 어색함도 없었다. 이종족을 같은 사람처럼 대하는 분위기가 충분히 널리 퍼졌다는 증거였다.

모두가 탁자에 앉자 킬리언 경이 작전 지도를 펼쳤다.

“정찰이 돌아왔소. 드디어 제국군이 하루 거리까지 진군했음이 확인되었소.”

이미 모든 준비는 갖춰져 있다.

이미 모든 대응 전략도 짜여 있다.

남은 것은 마음의 각오를 다지는 것뿐.

킬리언 경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뇌까렸다.

“내일 아침, 제국군이 타한 요새를 공략해 올 것이오.”

3

“함성을 질러라!”

수천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타한 요새를 둘러싸고 수천의 제국군이 창칼을 드높이며 사기를 북돋기 시작했다. 세이어의 신관 하나가 제국군 진지에서 나타나 확성 마법으로 전군에 외침을 전달했다.

“세이어께서 그대들을 가호한다! 주신께서 승리를 약속하셨으니 패배란 있을 수 없다! 바슈탈론의 용사들이여! 세이어께 그대들의 용기를 보여라!”

동시에 신성한 빛이 수천이나 되는 제국군 전체를 뒤덮었다. 제국군에 소속된 세이어의 신관들이 용맹과 강인함을 부여하는 신성 주문을 구사한 것이다.

화아아앗!

눈부신 빛이 전신을 감싸며 세상 전체가 세이어의 은총으로 가득해진다.

보라!

신께서 굽어살핀다!

제국군 병사들의 사기가 끝 모르고 올라갔다. 그만큼 이 세이어의 빛은 강렬했다. 타한 요새 주위가 모두 빛으로 둘러싸인 듯한 장관이었다.

그 찬란한 위명을 내려다보며 러스가 구시렁거렸다.

“……그냥 빛만 요란하지 저거 효과는 거의 없잖아? 기껏해야 기침 좀 덜 하고 콧물 좀 덜 나는 정도겠구먼.”

실란과 워낙 오래 함께 다녀 그도 제법 신성 주문에 대한 지식이 깊었다. 저 화려 무비한 성스러운 빛은 보는 그대로 퍼포먼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교황급도 아니고 평범한 신관 몇십 명이서 저런 엄청난 영역을 감당하려면 그만큼 신성 주문의 효력은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신성 주문 자체에는 분명 용기를 끌어 올리는 효과가 있겠지만 물 한 항아리에 술 한 방울 타면 냄새도 나지 않는 법, 저 병사들의 사기는 전적으로 분위기 덕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결과는 같겠지.”

착각이건 진짜건 병사들은 용기를 얻었다. 그럼 저 신성 주문도 진짜가 된 셈이다. 제국군 쪽도 애당초 저 효과를 기대했을 터, 이대로 기세에서 밀릴 수는 없다.

과연, 타한 요새 쪽에서도 신성한 빛이 솟구쳐 올랐다. 레단티의 신관과 알포트를 섬기는 드워프 신관들이 함께 손을 쓴 것이다.

“이 땅은 우리의 것, 이 대지를 범하려는 제국군에 여신의 진노가 쏟아지리라!”

레단티의 신관들 역시 비슷한 퍼포먼스를 하며 타한 요새군 전체에 신성한 빛을 쬐여 주었다. 뭐, 드워프 신관들은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광원 효과만 보탰지만.

파아앗!

양측 모두에 신성한 힘이 깃들었다. 양쪽 모두 신들이 굽어살핌이 증명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인간들의 싸움.

제국군 3대 사령관 지맨이 지휘검을 휘두르며 개전을 선포했다.

“돌진하라! 제국의 용사들아! 저 간악한 이들의 성벽을 뭉개 버려라!”

함성과 함께 수많은 병력이 해일처럼 타한 요새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 ☆ ☆

바슈탈론 제국군은 일단 공성전의 정석대로 움직였다.

화살을 성벽 위로 쏴 대어 성벽 위 방어선을 혼란시키며, 동시에 수많은 사다리와 갈고리 밧줄을 요새 성벽 위에 건다.

타한 요새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평범한 보병들이지만 화살비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두 돌멩이를 던지고 화살을 마주 쏘아 댔다.

직업 군인도 아닌 징집병인 이들에게 이런 놀라운 용기가 생겨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믿을 만한 이들이 화살을 위에서 모두 막아 주고 있었으니까.

“죄다 쳐 내 줄 테니까 안심하고 짱돌만 던져!”

보병들 사이로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이 군데군데 포진해 커다란 철우산 같은 것을 휘두르고 있었다.

타한 요새 성벽 사방에 수백 개의 철우산이 우뚝 서서 깃발처럼 좌우로 정신없이 흔들린다. 그야말로 휴가 나온 파라솔 해변 같은 몰골이다. 지맨 사령관이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저, 저건 뭐야? 저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리냐?”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전법, 바로 드워프 전통 화살 대응법인 ‘강철의 지붕’이었다. 저런 커다란 철우산이 머리 위를 단단히 지켜 주고 있으니 쏟아지는 화살 비도 거의 소용이 없다. 징집병들이 안심하고 눈앞의 적만 상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렇게 제국군 측이 당황하는 동안, 드워프 전사들이 열심히 철우산을 휘두르며 서로 중얼거렸다.

“그것참, 인간들은 왜 이 수법을 안 쓰지?”

“그러게? 화살 막기 딱 좋은데.”

당연히 인간들의 전쟁에 이런 방법이 나오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 철우산은 생긴 것은 딱 우산이지만 재질이 잘 단련된 드워프제 강철, 그 크기도 어마어마해 지름이 거의 2미터에 다다르고 높이는 3미터에 가깝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감히 들 엄두도 못 낼 무게인 것이다. 대지 공명의 힘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몇 배나 되는 괴력과 지구력을 지닌 드워프 전사들에게나 가능한 짓이다.

뭐, 실제로 들 힘이 있는 병사가 있다 할지라도 비효율적이긴 마찬가지다.

“아니, 뭐하러 귀한 철로 저런 걸 만든 거지? 저기 들어갈 강철이면 기사단 두셋에 모두 플레이트 아머를 입히고도 남겠군.”

황당해하며 길리우스가 중얼거렸다. 인구가 적고 상대적으로 금속 생산량은 많은 드워프와 인구가 썩어 나는 인간의 인식 차이였다.

어쨌거나 화살 비가 소용없어진 것을 보며 부관이 혀를 찼다.

“쳇, 예전 전쟁에서 나무 방패를 높이 올려 저런 짓을 하는 경우는 봤지만 별 소용이 없는 방식인데…….”

인간도 바보는 아니다. 드워프처럼 철로는 무리더라도, 나무를 이용해 비슷한 수법을 시도한 적은 물론 역사적으로 있었다.

하지만 금방 사라진 이유는 역시 손이 많이 가고 재료가 많이 든다는 이유였다. 어차피 갑옷 입은 기사에겐 화살이 크게 위험하지 않다. 화살을 두려워하는 건 일개 병사일 뿐.

일개 병사를 위해 일부러 물자를 들여 나무 방패를 만드느니, 그냥 희생을 감수하고 그 여력으로 기사를 강화하는 쪽이 귀족 입장에선 훨씬 편한 것이다. 어차피 평민의 목숨 따위 흔하게 널려 있는 것일 뿐이니까!

“이대로는 화살만 낭비하겠군. 궁병을 물려라! 일단 성벽 위를 정리해야겠다!”

보다 못한 지맨 사령관이 강궁병을 철수시켰다. 공성전의 정석이라면 이후 공성차나 투석기가 나서야겠지만 먼 거리를 원정 온 바슈탈론 제국군은 그런 부피 크고 거추장스러운 공성병기를 준비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위력적이고 범용적이며, 운송에 힘이 거의 들지 않는 공성 병기가 존재한다. 밥 몇 끼 먹이고 마차 몇 대만 준비해 주면 되는 그런 병기다.

“마법사들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각하!”

전령이 명을 받아 진지 저편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제국군 진지 위에서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태양탑의 마법사, 바슈탈론 마법병단이었다.

“마법사인가? 결국 나왔군!”

킬리언 경이 이를 악물며 등 뒤로 손짓했다. 병사 하나가 깃발을 높이 올리자 요새 안쪽 첨탑마다 두세 명의 로브 차림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로방스 마법병단이었다.

바슈탈론의 마법사들이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저마다 영창을 시작했다.

“나는 불길을 사로잡는 자, 화염의 칼날로 적을 치노라! 플레임 블레이드!”

“불꽃이여, 적을 사르는 파괴의 노래가 되리! 매스 파이어볼!”

수십 개의 회전하는 불의 칼날이 타한 요새로 날아들었다. 그 뒤를 수많은 화염구가 뒤따랐다. 마법사들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가장 유명한 마법. 파괴 마법의 대표 격이며 가장 흔한,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공격 마법 파이어볼이었다.

타한 요새의 첨탑 위 마법사들도 빠르게 대처했다.

“대기여, 울어라! 눈물 흘려 근원의 불길을 잡을지니! 아쿠아 월!”

“이는 근원된 힘의 역전이니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르리라! 디스펠 매직!”

크로방스의 마법사들이 저마다 자신 있는 마법으로 적의 공세를 막았다. 물의 장막이 펼쳐져 화염구를 허공에서 폭발시키고 해제 마법의 힘이 회전하는 불의 칼날을 흩어 허공에 열기를 뿌렸다.

그렇다 해도 공격하는 측에 비해 방어하는 측은 모든 것에 완전히 대응할 수 없는 법, 몇몇 놓친 화염 마법들이 성벽 여기저기를 강타했다.

쾅! 쾅! 콰콰쾅!

굴지의 요새인 만큼 타한 요새 역시 성벽과 성문에 강력한 대 마법 처리가 되어 있었다. 폭발이 일어남에도 요새 자체는 조금 그슬리기만 할 뿐 크게 손상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달랐다. 열풍과 폭염에 휩싸이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어억!”

“으아아악!”

불길이 사방에서 치솟아 살타는 냄새를 뿌린다. 첨탑 위의 마법사들이 이를 갈며 공격 주문을 준비해 요새 밖으로 흩뿌렸다.

불길과 전격, 강력한 마법의 화살이 정신없이 오갔다. 대부분 서로의 마법 방어장에 막혀 허공에서 소멸되었지만 미처 막지 못한 마법들이 서로의 진지를 두들겨 댔다. 사방에 폭음과 비명, 함성과 절규가 메아리쳤다.

한층 혼란스러워진 전장을 보며 부관이 혀를 찼다.

“역시 저쪽에도 마법사가 있으면 마법에 의한 공성 능력은 큰 효과가 없군요.”

동감을 표하며 지맨 사령관이 뇌까렸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공성 병기를 들고 올 걸 그랬나?”

물론 말은 저렇게 해도, 지맨은 현 상황에서 공성기가 별 의미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성기가 효과를 발휘하는 전장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마법사나 오러 유저가 없는 국지전에 한해서이다. 지금 같은 국가 간 전쟁, 각국의 대마법사와 오러 유저가 모두 나서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공성기는 꺼내자마자 바로 오러와 마법의 밥이 될 뿐이다.

그렇다 해도 마법전으로 인해 전장은 극히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 혼란은 공격 쪽인 제국군보다 방어 쪽인 타한 요새군 쪽이 더 심했다. 제국군은 타한 요새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는 반면, 요새군은 사방이 적이라 목표가 너무 많았으니까.

요새의 방어선이 흔들리는 걸 파악한 지맨 사령관이 씨익 웃었다.

“때가 되었군.”

☆ ☆ ☆

전장의 화염이 점점 거세진다.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땔감 삼아 대지를 피로 적시며 이글이글 타오른다.

“제길, 아직인가?”

성벽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튕겨 내며 러스와 타시드가 초조하게 제국군 진지 쪽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전장으로 돌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키는 입장, 제국군 오러 유저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요새를 비웠을 때 반대쪽에서 오러 유저가 나타나 성벽을 노린다며 맥없이 진지를 내줘 버리는 것이다.

오러 유저는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으며 대적할 자가 거의 없는, 카드 게임으로 치면 조커 카드와도 같은 존재다. 저쪽이 패를 보이지 않는 이상 이쪽도 꾹 참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이었다.

우우우웅!

제국군 진지 한쪽에서 눈부신 빛이 솟구쳤다. 강렬한 예기를 담은 은청색의 빛이 전장을 밝히며 무서운 속도로 요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블레이드 오러!”

“오러 유저다!”

타한 요새군에서 당황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은청색의 빛을 손에 쥔 채 30대 후반의 기사가 말을 몰고 전장으로 난입해 사방으로 오러를 흩뿌려 댔다. 순식간에 몰려있던 병력 대다수가 싹 쓸리며 혼잡한 전장 중심에 공터가 생겨났다.

제국군이 그 은청색의 빛을 알아보고 환호했다.

“중압의 기사, 키린트 경의 빛이다!”

드디어 제국군에서 오러 유저를 투입한 것이다.

곧바로 적색과 암회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뒤이어 솟구치며 키린트의 뒤를 따랐다. 세 오러 유저 모두 성벽 한쪽을 노리며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갔다.

성벽 점유를 노리는 것이었다.

오러 유저 모두가 레펜하르트나 안타레스의 오크 투사처럼 성문, 성벽을 통째로 날리는 파괴력을 보일 수는 없다. 상대적으로 약해서가 아니다. 이는 강약의 문제가 아니라 지닌 검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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