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제44장 크루세이더
1
테네스 저택은 소란에 차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늙은 집사의 외침을 뒤로한 채 요란한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한 무리의 건장한 기사들이 중무장을 하고 기세등등하게 복도를 걷고 있었다.
“문을 열어라!”
선두에 선 금발의 사내가 손짓을 하자 이내 커다란 백양목 문이 벌컥 열리며 단아한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테네스 저택의 가주 전용 거실이었다.
선두에 선 남자가 멋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한 가문의 가주실에 디디는 발걸음이라기엔 지나치게 무례한 태도였다. 뒤이은 기사들 역시 만만치 않게 무도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거실 안에는 60대의 노인과 50대의 고운 귀부인이 침입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것으로 보이는 귀부인에 비해, 노인의 표정은 허탈하기 그지없는 듯했다.
노인이 선두에 선 남자, 자신의 아들을 보며 힘없이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유서스?”
금발의 기사, 유서스가 차갑게 웃으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대답을 원하십니까, 아버지?”
당대 테네스 가문의 가주, 폴트 테네스 백작이 허망한 목소리로 질문을 이었다.
“이거 설마 가주직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따위의 상황인 게냐, 유서스?”
“용건을 알고 계시니 다행이군요, 아버지.”
찬란한 황금 갑옷, 테네스 가문의 보물인 마갑 엘드라드를 걸친 채 유서스는 천천히 폴트 백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폴트 백작은 주름진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미 테네스 기사단의 전원이 이 반란에 참여한 듯 보였다. 가신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유서스에게 포섭되었음이 분명했다.
분명 자신이 가주임에도 불구하고, 이 테네스 저택 내에서 그의 편은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 이미 유서스가 엘드라드를 물려받은 지 15년이 넘었으니…….’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유서스는 이미 흔들림 없는 후계자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었으며, 가주로서의 권리 또한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요 몇 년간 기사 수행을 하느라 바깥으로 떠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경쟁자가 없는 몸이었다.
“설마 사이러스 녀석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아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질문을 하다 말고 폴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둘째 아들 사이러스가 오러 유저로 각성하고 또 안타레스 공국에서 위명을 떨치는 중이긴 하다. 대륙 최연소 오러 유저로 맹활약을 펼치는 아들의 소식을 들으며 흐뭇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러스를 유서스 대신 후계자로 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사이러스는 명실공이 테네스 백작가의 반역자다. 후계자인 유서스를 암살하려 한 그 과오는 오러 유저가 되었다고 쉽게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유서스가 뒤집어씌운 누명이지만, 테네스 가문은 그 사실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이러스를 편애하는 폴트 백작이나 자기 배 아파서 낳은 백작 부인조차도…….
‘사이러스가 제 형을 노렸단 말인가? 하긴…… 그 녀석 성격이면 그럴 법도…….’
‘제 새끼긴 하지만, 우리 러스가 그렇게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니까요, 여보.’
라는 반응을 보이며 유서스의 말을 믿어 버렸다.
러스가 레펜하르트 만나서 참 많이 사람 되긴 했는데, 그 전까진 분명 자타가 공인하는 음침한 아웃사이더였던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설사 사이러스에게 과오가 없다 해도 그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지닌 바 재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귀족가에게 있어 혈통이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부분이다. 유서스가 심각한 결함이 있다면 모를까, 그 역시 오러 유저만은 못하지만 그라임의 황금기사로 충분히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굳이 위기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가신들 중에는 사이러스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고 가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오러 유저의 길을 잃은 테네스 백작가에 사이러스의 존재는 귀하다. 당연히 저런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리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일단 가문 내에서도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고 또, 사이러스 입장에서도 저것은 이제 그리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볼 때 그 녀석이 굳이 가문에 돌아올 이유가 없으니까.’
러스 본인은 별로 못 느끼고 있었지만, 사실 외부에서 보기에 그는 어마어마하게 출세한 축에 속하고 있었다.
현재 사이러스는 떠오르는 신예 강국 안타레스의 주요 개국공신이며 공왕 레펜하르트와 호형호제를 하는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었다. 개국 초기다 보니 안타레스 공국 내 위계질서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작위는 아직 없는 듯했지만, 일단 안정만 되면 최소 백작쯤은 먹고 들어갈 위치였다.
안타레스 공국에 그대로 있으면 국왕의 의동생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가 될 수 있는데 테네스 가문으로 돌아오면 그라임 왕국의 무수한 귀족가 중 하나, 그것도 가주도 아니고 그냥 일원이 될 뿐이다. 수구초심도 정도껏이지 이쯤 되면 돌아오는 쪽이 바보가 될 판이다.
‘절대 돌아올 리가 없지.’
폴트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귀족가의 사정은 비정한 것이라 살다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시해하는 일도 곧장 일어나곤 한다. 폴트 백작도 귀족으로 나고 자라나 그 사실은 잘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리 재고 저리 재어 봐도 현재 유서스의 지위는 확고부동한 것이다. 도저히 이런 일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에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록 맥없이 당해 버렸다.
폴트 백작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미 테네스의 가주나 다름이 없다, 유서스.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유서스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젠 가주라 부르지도 않는구나.”
“네, 아버지.”
씁쓸해하는 폴트 백작을 향해 유서스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성전 참가를 반대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이러진 않았을 겁니다.”
딱딱한 아들의 목소리에 폴트 백작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전? 설마 바슈탈론 제국에서 주장하는 그 전쟁 말이냐?”
바슈탈론 제국과 세이어 교단이 크로방스 왕국과 안타레스 공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문은 폴트 백작도 들었다. 그라임 왕국의 귀족인 그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소식이기에 그냥 이 기회에 시세 변동이 있을 테니 물자나 좀 비축해 놓아야겠구나 생각하며 넘어갔다.
그런데 왜 유서스가 저 이야기를 꺼낸단 말인가?
“아니, 그 성전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어이없어하는 폴트 백작을 향해 유서스가 노성을 터트렸다.
“세이어께서 모든 인간을 굽어살피시는데 어찌 상관이 없단 말입니까!”
“아니, 우리 가문이 언제 그렇게 세이어 교단이랑 친했다고…….”
폴트 백작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테네스 가문이 가까이 하는 교단은 그라임 왕국에서 가장 교세가 큰 창공의 여신, 에어리어스 교단이었다. 실제로 테네스 기사단이 던전 탐사를 나서거나 기타 일로 출타할 때 도움을 받는 신관들도 에어리어스 교단 출신들이었다. 세이어 신전 역시 영지 내에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지민들을 상대할 뿐이고, 테네스 가문의 관혼상제 같은 큰 행사는 에어리어스 교단이 주관하곤 했다.
황당해하는 폴트 백작을 향해 유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변하셨군요. 그들의 명이 떨어지면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 것은 아버지셨거늘…….”
“으음?”
멍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를 보며 유서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토록 러스를 아낀다 이 말이지요…….’
은의 현자의 요청이 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다니, 이는 러스가 있는 안타레스 공국을 적대하고 싶지 않다는 명백한 표현이 아닌가?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은의 현자를 입에 담을 수는 없다. 유서스는 침묵을 지킨 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침묵한 채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유서스의 모습에 폴트 백작이 더더욱 당황했다.
‘명? 무슨 명령이 있었다는 게야?’
사실은 여기서 살짝 오해가 있었다.
유서스는 지금, 폴트 백작이 은의 현자가 보낸 협조 요청을 정면으로 거역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은의 현자는 이번 성전에 대비해 크루세이더로서 봉기해 달라며 대륙에 흩어진 그들의 협력자 가문 전체에 협조 요청을 보냈다. 크로방스 왕국 내의 협력자 가문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 노골적이라 은의 현자의 존재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냥 전쟁 불참 요청만 보냈지만, 다른 나라에는 모두 은밀하게 연락이 간 상태였다.
테네스 가문 역시 은의 협력자 가문 중 하나, 당연히 연락이 안 왔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러스를 너무 아껴 가문의 전통조차도 무시하겠다는 처사가 아닌가?
유서스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젠장, 아직도 그놈의 러스를 저토록 편애하시나! 그 자식이 있는 나라와 싸우는 것도 허락지 않겠다 이거지?’
그런데 사실, 폴트 백작은 은의 현자로부터 아무 소식도 받지 못했다.
딱히 은의 현자가 테네스 가문을 의심하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인원 절약 차원이었다.
아무리 전 세계를 뒤흔드는 강력한 은의 현자라도 그 본질은 틀림없이 비밀결사다. 그리고 비밀결사는 그 특성상 구성원이 적을 수밖에 없다.
당하는 입장에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연락 넣고 사라지는 은의 현자의 신출귀몰함에 감동, 감탄하겠지만 행하는 입장에선 이게 꽤 고생인 것이다.
고대의 아티팩트를 마음껏 이용해 대륙 이곳저곳을 마구 오갈 수 있다 해도 그 실행자는 분명 실존하는 사람이었다. 인원은 적은데 우편배달(?)할 장소는 대륙 전역, 그렇다면 굳이 불필요한 장소까지 서신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테네스 가문은 이미 은의 협력자인 유서스가 이 정보를 알고 있으니 ‘굳이 서신을 보낼 필요 없는 불필요한 장소’에 속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유서스는 굳이 저런 이야기를 폴트 백작에게 하지 않았고, 어련히 소식이 갔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당당히 성전을 주장했다.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한 폴트 백작에게 저 성전은 전혀 타당한 이유가 없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성전 참가를 반대했다.
자고로 모든 가정불화의 근원은 대화 단절이라.
서로 대화가 없으니 그저 감정만 쌓여 으르렁대게 되게 되었다. 아들만 으르렁대고 아버지 쪽은 아무것도 모른 채 가정 화목한 줄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거대한 귀족가, 테네스 가문도 결국 대부분의 가정과 다를 것 하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유, 유서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냐?”
당황한 폴트 백작이 아들을 불렀다. 하지만 유서스는 더 이상 아버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한 채 유서스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아버님을 북쪽 당으로 모셔라!”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가 백작 부부의 주위에 도열했다. 백작 부인, 러스의 어미인 에이리가 두려워하며 폴트 백작의 품에 안겼다.
“여, 여보. 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무 걱정 마시오, 부인. 별일 없을 것이니…….”
“하, 하지만…….”
벌벌 떠는 귀부인을 보며 유서스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증오스러운 러스의 어미, 저 여인 때문의 어머니와 자신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잣거리로 내쳐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귀족이었고 또한 기사였다. 비록 이런 상황이 되었지만 정도를 지나치게 벗어날 수는 없다. 어쨌거나 현재 그녀는 폴트 백작이 선택한 귀족가의 부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정도 대접은 해 주어야 했다.
‘젠장!’
들끓는 속을 애써 감추며 유서스가 고함을 질렀다.
“당장 저분들을 모셔가라!”
“예! 단장님!”
명을 받은 수하들이 질서 정연하게 백작 부부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섰다. 남은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 꿇고 유서스를 향해 소리쳤다.
“새로운 가주님께 검의 충성을!”
“새로운 가주님께 검의 충성을!”
스르릉!
유서스가 마검 엘드란을 뽑아 들었다. 찬란한 황금빛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검을 든 채 유서스가 당당히 선언했다.
“가주로서 첫 번째 명을 내린다! 지금 시간부로 테네스 가문은 세이어의 뜻에 따라 신성한 검의 길을 걷노라!”
부복한 기사들 역시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세이어를 위하여!”
“세이어를 위하여!”
테네스 가문이 정식으로 성전에 참가하는 순간이었다.
☆ ☆ ☆
대륙 곳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주가 바뀌는 극단적인 상황은 테네스 가문뿐이었지만, 수많은 기사 가문들이 검을 높이 들고 세이어의 뜻에 호응해 신성한 전쟁에 참여하기로 뜻을 표했다.
세이어를 제외한 다른 교단들은 당황했다. 분명 그리 세이어와 교류도 없던 가문들이 갑자기 성전에 참가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그러나 딱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명분이야 어찌 되었건 전쟁은 참가한 이들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법이고, 기사들은 전쟁 속에서 비로소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법이니까.
다른 교단 입장에서 그리 달가운 현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만류할 명분이 있지도 않다. 세이어 교단을 제외한 다른 교단에선 적당히 침묵하며 상황을 두고 보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대륙 곳곳에서 성전의 기치를 든 크루세이더의 군세가 바실리 왕국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군세의 합이 무려 기사 일만, 종자며 마부, 시종 등 비전투원을 더하며 더욱 거대한 규모였다.
바실리 왕국에서 이들을 맞이해 합동 정벌군을 꾸몄다. 오만의 바실리 왕국군을 동원하고 사령관으로 이름 높은 기사이자 오러 유저, 바실리 왕국의 에그라드 경이 나섰다.
바실리 왕국에 적을 올렸던 오러 유저는 세 명.
최강의 오러 유저인 왕국 기사단장 탈로스 경은 국왕을 지키기 위해 수도에 남았고 왈그란 경은 얼마 전 안타레스와의 전투에서 죽음을 당했으니, 에그라드 경은 바실리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를 맞춰 바슈탈론 제국도 움직였다. 차탄 공국을 경유해 이름 높은 제국기사단이 삼만의 병력을 이끌고 직접 나섰다.
바실리 왕국보다 병력은 적지만, 결코 제국의 전력을 무시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제국기사단을 지휘하는 것은 제국의 황태자 길리우스였으며 검성 바나텔을 비롯해 무려 8인의 오러 유저가 참가했다. 바슈탈론 제국이 이번 전쟁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부분이었다.
또한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국과 세이어 교단에서는 정해진 소속이 없는 자유 무인 출신의 오러 유저 또한 거액을 들여 대거 고용했다고 한다.
흉흉한 소문이 대륙 전역을 떠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타레스 공국의 멸망을 점쳤다. 아무리 강력한 신예 군사 국가라지만 역시 전통의 강호, 바슈탈론 제국의 저력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렇게, 대륙 서쪽에 전란의 바람이 점점 더 거칠게 불어오고 있었다.
☆ ☆ ☆
험준한 글로텐 산맥 서부, 페틀랜드.
황량한 황야 위를 몇 필의 말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 저마다 번쩍이는 미스릴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의 선두에는 한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4색으로 나뉘고 중앙에 황금빛 주먹이 그려진 문양이 그려진 깃발, 대륙 역사상 가장 알아보기 쉽고 또 가장 촌스럽다는 평을 받고 있는 권왕 레펜하르트의 문장이었다.
이 깃발을 당당히 들고 있는 이들은 바로 안타레스 기사단, 그 선두에 선 것은 기사단장 아스레일이었다. 그는 지금 재상 카를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받고 산맥 서부의 페틀랜드로 향하는 중이었다.
“좀 더 힘내라! 곧 목적지가 보일 것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수하들을 향해 아스레일이 독려를 날렸다.
과연 글로텐 산맥의 험준함은 대단했다. 페틀랜드의 황량함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괜히 그 오래 시간 인간의 왕국이 이 땅을 침략하려 들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이곳은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황량한 땅 한가운데에, 지금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고 있었다.
“오, 저곳이…….”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도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스레일이 살짝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감탄이기도 하며, 동시에 황당함이 깃든 신음이었다.
그것은 엄연한 도시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모습의 도시는 아니었다.
거대한 괴수의 뼈와 바위로 성벽을 올린 그 속에 투박한 바위 건물과 거대한 천막들이 즐비하다. 분명 가죽으로 만든 천막이지만, 과연 저것을 천막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제법 세상을 떠돈 아스레일이었지만, 세상에 5층 천막 따위가 존재할 것이라곤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대체 저건 무슨 수로 세운 거야?”
수하의 말에 공감의 표정을 지으며 아스레일이 대답했다.
“천막의 형태를 했지만 이동이 가능한 것은 아니겠지. 아마도 뼈대는 바위나 목재로 세우고 그 위에 가죽을 덧댄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웅장하군.”
거대한 몬스터 수십 마리를 잡아야 겨우 저것에 붙일 가죽이 나오리라.
가죽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방패보다 더 큰 비늘이 촘촘히 붙어 있는 벽면이며, 바위보다 두꺼워 보이는 각질의 가죽으로 올린 지붕은 인간의 성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내구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스레일이 감탄을 흘렸다.
“저곳이 오크라트인가…….”
오크라트.
푸른 곰 부족이 주축이 되어 페틀랜드를 떠돌던 스물일곱 개 오크 부족이 모두 뭉치고, 드워프들을 초빙해 건축술을 조언 받아 만들어 낸 오크들만의 도시였다.
아스레일 일행은 더욱 말을 달려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 역시 보통 상식적인 나무 문이 아니었다. 아마도 무슨 거대한 괴수의 갈비뼈를 통째로 이용한 듯한 뼈 문, 그 사이에 가죽과 강철을 덧붙여 강인한 느낌이 물씬 난다.
입구에 서 있던 수문장 오크가 인상을 쓰며 앞으로 나섰다.
“서라! 인간!”
아스레일이 바로 깃발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안타레스의 사절이오!”
수문장 오크들이 바로 반색을 했다.
“그 깃발! 형제 인간이다!”
“금주먹 깃발 든 인간, 우리 형제다! 환영한다!”
투박한 공용어와 함께 바로 성문이 열렸다. 안타레스 기사단도 속력을 줄이며 오크라트 안으로 들어섰다.
오크라트 내에는 수많은 오크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모두들 생업에 몰두하다 안타레스 기사들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이내 그 깃발을 보고 안심한 듯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천천히 말을 몰며 아스레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크들의 유목 문화와 달리 가옥들 대부분이 대지에 뿌리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죽을 다루는 그들의 문화를 버리고 드워프나 인간처럼 돌과 나무로 만든 집을 세운 것도 아니다. 기틀은 나무나 뼈를 쓰고 가죽을 덧대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고정된 거대 천막 같은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비록 임무를 띠고 온 몸이지만 역시 이런 기이한 도시를 보니 관광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스레일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들이 문화가 다르다는 실감이 나는군.”
수하들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정신없이 주위를 힐끔거리다 수하 중 한 명이 아스레일에게 물었다.
“그랜드 포지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단장님?”
안타레스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아스레일은 그랜드 포지에 들른 경험이 있었다. 드워프들의 그 웅장한 도시를 보며 기가 질린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랜드 포지는 정말 웅장했지. 나 자신이 너무도 작게 느껴지는 거대한 도시였어.”
오크라트를 돌아보며 아스레일이 말을 이었다.
“규모는 아무래도 그랜드 포지만 못하지만, 대신 오크라트는 정말 야성적인 느낌이군. 이곳에서 살기만 해도 절로 강해질 것 같은 기분이야.”
“엘프나 트롤들의 도시도 한번 보고 싶군요. 그쪽도 많이 건설되었다던데…….”
“엘븐하임와 트로리아드 말이지? 그쪽은 한 번도 못 봤군.”
오크들처럼 엘프와 트롤들 역시 각자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엘븐 포레스트는 이미 세계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가옥이 올려져, 하나의 거대 공중 도시 엘븐하임이 되었다. 트롤들 역시 구출한 수많은 트롤 구루들의 힘으로 막대한 양의 세멘테리움을 정제, 수많은 지구라트로 이루어진 광대한 도시 트로리아드를 건설 중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이곳에 온 바, 관광 기분이나 낼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아스레일 일행은 다시 말을 몰았다.
오크라트 중앙 지역으로 가니 5층 높이의 거대한 천막 성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전투 멧돼지, 배틀보어를 탄 녹색 오크가 환한 웃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오! 아스레일 경! 오랜 만이오!”
“오랜만입니다, 카루가 킨지르.”
흙 멧돼지 일족의 족장이자 오러 유저이기도 한 킨지르는 레펜하르트가 만들어 준 통역 목걸이를 끼고 있기에 유창한 공용어를 할 수 있었다. 전원 하마하자 오크 몇 명이 나와 말 고삐를 쥐고 말들을 마구간으로 옮겼다.
킨지르가 반가워하며 성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 험한 곳까지 어쩐 일이시오, 아스레일 경?”
“스탈라 대모께 중요한 서신을 전하러 왔습니다.”
스물일곱 개 오크 부족이 선출한 대족장 칼켄은 현재 아라난 그라드에서 타시드와 함께 오크 무리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래서 현재 오크라트는 오크의 전통에 따라 아내인 스탈라가 대족장 대리로서 통치하는 중이었다.
“그럼 전령을 보낼 것이지 어찌 아스레일 경이 직접?”
“이곳까지 올 수 있는 전령이 어디 있습니까?”
의아해하는 킨지르를 보며 아스레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다 해도 안타레스 기사단은 공식적으로 일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이다. 이런 서신 전달이나 할 정도로 지위가 낮지는 않은 것이다. 특히나 단장인 아스레일은 더더욱.
하지만 글로텐 산맥을 넘어 페틀랜드까지 오는 행보는 결코 만만치 않다. 일개 전령을 보냈다간 사흘도 안 되어 글로텐 산맥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의 밥이 되리라.
사실 이곳까지 전령으로 보내졌다는 것 자체가 안타레스 기사단이 상당히 뛰어난 무력을 지녔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이제 전령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 다행이죠.”
함께 온 기사, 아스레일의 부관 고스탄 경이 너스레를 떨었다. 안타레스 초기만 해도 이 전령 역할은 푸른 곰 부족의 울프 라이더들만이 맡을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안타레스 기사단은 너무 약해서 글로텐 산맥을 넘을 힘조차 없었으니까.
그 굴욕을 씻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행한 이들이었다.
원래 목표가 높으면 그만큼 실력도 더욱 오르기 마련이다. 주위에 강력한 이종족 전사들이 즐비했던 안타레스 기사단이기에 비교 대상 역시 높고 높았다. 덕분에 현재 그들은 어지간한 타 왕국의 정예 기사단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실력자로 탈바꿈해 있었다.
“아직 무대가 없어 실력을 보이진 못했지만…….”
아스레일이 기대 어린 눈빛을 지었다.
“조만간, 무대가 생길 테니까요.”
킨지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스탈라 대모를 찾아오셨다니 안내를 해야겠군.”
“어디 계십니까?”
킨지르가 뒷마당을 가리키며 이해하기 힘든 대답을 했다.
“대모님은 지금 아기들 수유授乳하며 수행修行 중이시라네.”
“……네?”
멍한 얼굴로 아스레일은 킨지르의 뒤를 따랐다.
‘수유하며 수행 중?’
참 이해하기 힘들었다. 수유라면 그, 애들 젖 준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스레일은 스탈라가 오크 중에서도 미녀 중 미녀이며 그 풍만한 가슴으로 수많은 오크 아기들의 젖을 먹인 위대한 유모라는 사실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인간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원래 오크들 사이에선 강한 여자의 젖을 물고 자란 아기는 강한 전사가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체질 좋은 아기들을 골라 여전사가 젖을 물리는 풍습이 있었다. 오크 어미로서는 가장 큰 영예 중 하나며, 아기를 칭찬하는 극찬의 행동 중 하나다.
그러니 스탈라가 유모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만했다.
그런데 수행은 또 뭔가?
‘아니, 수유랑 수행이 동시 진행이 되는 행위였나? 그게 말이 돼?’
같이 ‘수’ 자로 시작한다지만 뉘앙스는 천양지차, 아스레일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킨지르가 공용어에 익숙하지 않아 말을 실수했다고 여겼다.
☆ ☆ ☆
3분 뒤, 뒷마당.
“어…….”
아스레일은 입을 쩍 벌렸다.
세상은 역시 만만치 않다. 그의 상식을 초월하는 광경은 얼마든지 있다.
지금 뒷마당에서, 근육질의 오크 여인이 분명 ‘수유’와 ‘수행’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타아앗!”
날카로운 단검을 양손에 쥔 채 스탈라가 날렵하게 허공을 찔러 댔다. 허리를 비틀며 그 회전력을 실어 양손으로 찌르기를 날리는 그 모습은 같은 무인으로서 분명 감탄이 나올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가슴이 그대로 노출되어 양쪽 유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종족이 다르지만 엄연히 여인의 유방, 똑바로 바라보기엔 남자로서 참 부끄러운 광경이리라. 하지만 아스레일은 눈을 떼지 못했다.
스탈라의 양쪽 유방에 갓 태어난 듯한 오크 아기 두 명이 필사적으로 매달린 채 젖을 빨고 있었으니까!
“에…… 저건 대체?”
여인이 아이 젖 주는 모습에는 보통 경건함이 느껴진다는데, 저걸 보면 경건은 전혀 없고 오히려 강건, 불굴, 극강 등의 이미지만 떠오른다. 멍한 아스레일의 목소리에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킨지르가 허허롭게 대꾸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소. 수유하며 수행 중이시라고…….”
스탈라의 기합이 이어졌다.
“허업!”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그 격렬한 움직임에 왼쪽 유방에 매달려 있던 아기가 결국 손을 놓고 떨어져 버렸다.
땅에 처박힌 오크 아기가 우렁찬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저, 저런!”
흠칫하며 아스레일이 나서려던 찰나였다. 스탈라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아기를 내려다보며 벽력같은 외침을 터트렸다.
“일어나라! 푸른 곰의 아이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먹을 것을 쟁취해라!”
열혈 넘치는 호통이 오크 아기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뚝!
오크 아기가 울음을 그치더니 주먹을 불끈 쥔 채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아기 표정이 결연한지 아닌지 알게 뭐냐마는, 일단 분위기는 그래 보였다.
종종종!
아기가 그 고사리 손으로 스탈라의 종아리를 붙잡더니 록 클라이밍이라도 하는 것처럼 열심히 스탈라를 타고 올랐다.
이윽고 아기가 그녀의 가슴께에 도착해 젖을 물었다. 성취감과 포만감을 느끼며 오크 아기가 다시 젖을 빨기 시작했다.
스탈라가 기뻐하며 아기를 칭찬했다.
“장하구나! 푸른 곰의 아이라면 응당 그 정도 근성은 있어야지!”
아기도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아스레일만 기가 막혀 입을 못 다물 뿐이었다.
‘맙소사, 이게 오크들의 양육법인가?’
나름 오크의 문화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자부하는 아스레일이었지만, 저 모습은 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때 뒷마당에 모여 있던 다른 오크 여인들이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저 아기들의 어미인 모양이었다.
“아이고, 대모님!”
“그러다 애 잡겠어요!”
“무슨 소리야? 애들은 원래 강하게 키워야 돼!”
스탈라의 대꾸를 들으며 아스레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내가 오크들을 잘못 이해한 건 아니었어.’
그냥 스탈라가 이상한 것이었다. 역시 오크도 사람이었다.
“놀랐소, 아스레일 경?”
“상당히요.”
“우리도 놀랐소. 왜 푸른 곰 부족이 최강의 오크들인지 알 것 같더구려.”
역시 저게 오크 전통 문화는 아닌 거구나.
“전, 오크들은 다들 저렇게 애를 키우는 줄 알았습니다.”
킨지르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린 저렇게 무식하지 않소!”
오크들 사이에서 무식하단 소리를 들으려면 어지간한 경지로는 힘들다.
“……대모님께서 교육이 꽤 가혹하시군요.”
왜 타시드를 비롯한 그가 아는 오크들이 스탈라의 훈련 이야기만 나오면 사색이 되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기한테 저렇게 대할 정도면 성인에겐 오죽하겠나.’
그때, 스탈라가 아스레일을 돌아보았다.
“아스레일 경, 왔으면 용건을 말하시게. 아까부터 거기 서서 뭐 하시나?”
역시 오러 유저답게 그녀는 아스레일 일행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알아챈 것이다.
아스레일이 아차하며 부관에게 손짓했다. 부관이 서신을 꺼내 앞으로 나섰다.
“공왕님의 전언을 전하고자 왔습니다.”
잠시 후, 서신을 읽은 스탈라의 눈빛이 빛났다.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녀가 기쁜 듯 외쳤다.
“오! 축제로군!”
“아니, 전쟁입니다만…… 축제는 얼마 전에 이미 했습니다.”
혹시 잘못 읽었나 싶어 아스레일의 부관이 바로 첨언했다. 하지만 이는 호전적인 오크들의 성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인간의 판단일 뿐이다.
이미 알아들은 아스레일이 부관에게 가만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스탈라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축제. 괜히 길바닥에 금 뿌리는 이상한 짓 말고 진짜 축제.”
킨지르도 전언을 보더니 눈을 빛냈다.
“당장 다른 부족에 연락을 취해야겠군요.”
“부탁하네, 카루가 킨지르. 남편은 이미 신이 나 있겠군?”
오크어로 대화하며 두 오크 투사들은 흉흉한 웃음을 띠었다.
그래, 축제다.
오크들의 축제는 피를 뿌린다!
2
안타레스 공국 수도, 아라난 그라드
그 중심에 위치한 왕성 가이라크의 한 집무실에서 지금 두 거구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보가 어느 정도 모였습니다, 공왕님.”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며 거구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딱 벌어진 어깨에 드넓은 가슴, 얼굴 가득 기르던 수염도 이제 길이가 제법 되어 가슴께까지 늘어져 있다.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수염이로다!’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외모의 주인공은 물론 안타레스 공국의 재상, 카를이었다.
한때 미남자로서 뭇 여성들의 여심을 한껏 흔들었던 기사 중의 기사, 카르사스 공자는 이제 이 지경까지 와 버린 것이다. 뭐, 본인은 만족하고 있으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길리우스 황태자가 이끄는 바슈탈론 제국군은 이미 차탄 공국을 통과해 크로방스 서부 국경까지 진군한 상태입니다. 바실리 왕국 측은 신성군과의 지휘 계통 조율 때문에…….”
“음? 신성군?”
카를의 보고에 마주 앉은 사내가 문득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카를보다 더더욱 벌어진 어깨에 드넓다 못해 광활하기까지 한 가슴팍을 자랑하는―다행히 수염은 없는― 어마어마한 거구의 사내, 현 안타레스의 공왕이자 이름 높은 권사, 권왕 레펜하르트였다.
이 근육덩어리 거인들이 안타레스 공국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진 두 사람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겠다.
레펜하르트의 질문에 카를이 피식 웃었다.
“세이어 교단에 호응해 일어선 대륙 각지의 기사단들 말입니다. 자신들을 신성군, 혹은 크루세이더라 부르더군요.”
“별것에 다 신성을 갖다 붙이는구먼.”
“말인들 뭘 못하겠습니까? 하여튼 바실리 왕국 측은 저런 문제로 조금 진군이 늦어 아직 바실리 북부 쪽에 머물러 있습니다만, 거리가 가깝다 보니 안타레스 남부 국경선에 다다르는 시간은 서로 비슷할 것이라 판단됩니다.”
“정말이지 재상의 예측과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군. 신기하기까지 하네.”
서류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바슈탈론 제국이 선전포고를 하고 세이어 교단이 성전의 기치를 들어 올린 이래, 카를은 바로 정보를 수집해 적진의 진군 예측 경로를 산출해 냈다.
뭐, 여기까지는 그리 신기할 것이 없었다. 아무리 땅덩이가 넓다 하더라도 대군이 이동할 수 있는 경로는 한정되어 있다. 상대할 군대의 세력만 대충 알면 어디로 진군해 올 것인지 파악하는 것은 초보적인 군사학 수준이다.
신기한 부분은 시간마저 정확하게 맞췄다는 점이었다.
언제 집결하고 언제 출발하며, 어느 정도 속도로 행군해 언제 국경에 도달할지까지 카를은 모두 예상해 놓았는데, 현재까지 그의 예상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시간 단위의 오차는 있을지언정 하루 단위의 오차는 없을 정도로 정확한 예측이었다.
“저쪽 수뇌부에 스파이라도 심어 놓은 거요?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딱딱 맞지?”
감탄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카를이 별거 아니란 표정을 지었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각자 상황에 맞춰 전술을 구상할 테지만, 지금은 그저 행군일 뿐이지 않습니까? 군사학을 공부한 이라면 가장 효율적인 이동을 원할 터, 그렇다면 이 정도는 예상할 수 있지요.”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그렇다 해도 지휘관의 실력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 것 아니오? 그런데도 이리 시간이 맞으니 신기하다는 것이지.”
카를이 뭐 그리 신기하냐는 듯 말을 이었다.
“상대가 수만의 대군이니까요. 지휘관의 실력에 따라 행군 속도가 차이 나는 것은 수백에 수천 사이의 병력에 한해서나 생기는 일입니다. 만 단위의 거대 군세라면 총지휘관이 누구건 그리 쉽게 개인의 역량으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치에 맞게 실리를 따지며 움직이게 되지요. 지휘관이라면 누구든 병사의 피로도, 보급선의 보존 등을 따지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 그런가……?”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전생 때 수십만의 이종족 군세를 거느렸던 그였지만 레펜하르트는 저런 걸 신경 쓴 적이 없었다. 막상 카를 덕에 제대로 된 전술, 전략을 접하게 되니 당시에 참 얼마나 엉망으로 군대를 운용했었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끙, 이러니까 결국 졌지.’
전생 때, 이종족들도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결코 인간에게 뒤지지 않았다. 수백 단위의 전투가 벌어지면 오크도 드워프도 엘프도 트롤도, 모두 교묘한 전술로써 전쟁에 임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지적인 전술의 국면이고 포괄적인 전략 측면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랐다.
온갖 기상천외한 전술을 동원해 봐야 이종족들의 전략적 목표는 항상 거기서 거기였다.
오크들은 그저 무작정 돌진했고, 드워프는 그저 죽자고 방어만 했으며, 엘프들은 눈이 벌게지도록 정령만 던져 댔고 트롤들은 열심히 주술적인 춤을 추며 뼈다귀만 휘둘렀다.
그러다가 마왕 레펜하르트가 하늘 위에서 짠하고 나타나면 게임 끝,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고 그동안 못 버티면 지는 것이다.
참으로 전략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상황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근육질 수염남을 향해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비록 근육과 수염에 잔뜩 가려 있지만 누가 뭐래도 저 속에 담긴 두뇌는 당대 최고의 책사임이 분명하니까.
“……?”
갑자기 저 양반이 왜 저런 끈적끈적한 눈빛을 보내나?
카를은 잠시 흠칫 떨었다. 하지만 이내 신경을 껐다. 뭐,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바로 카를이 다음 용건으로 화제를 옮겼다.
“바슈탈론 제국의 전력은 정병 삼만, 기사 일만에 중장보병 일만, 궁병과 기타 편제로 일만인 상당히 기형적인 형태입니다.”
레펜하르트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기사 일만이라면 십만 정도의 군세가 뒤를 받치는 것이 상식이다.
카를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 전쟁의 성격을 생각하면 타당한 편제입니다. 제국과 크로방스 왕국의 거리는 적지 않고, 병력은 그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니까요. 바슈탈론 제국 단독의 원정이라면 더 많은 보병이 필요하겠지만 그들은 지금 바실리 왕국과 연대하고 있습니다. 바실리 왕국의 오만 병력 중 기사의 숫자는 삼천 정도, 사만 칠천 정도의 일반 보병이 뒤를 받쳐 주고 있으니 제국 측에서는 정예만을 꾸려 출격시키는 것이 합당하겠지요.”
“그렇겠지. 사실 보병의 존재 가치는 전투보다는 점령 지역 유지에 있으니까.”
오러 유저는 일반 보병 수백 명에 맞먹는 전투력을 지닌다. 기사 한 명의 전력 역시 보병 수십 명과 맞먹는다.
하지만 오러 유저나 기사들이 일반 보병보다 수백 배나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은 아닌 것이다. 보급을 생각한다면 정예만을 꾸려 보내는 이 상황이 타당하다. 어차피 수백 배씩 밥 준비하고 무기 준비해야 하는 보병 쪽은 바실리 왕국이 담당해 주고 있으니까.
“어차피 진짜 전력은 이들이지요.”
카를이 서류를 넘겼다. 그가 침을 한번 삼킨 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슈탈론 제국군 쪽에 현재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오러 유저의 숫자는 여덟, 검성 바나텔을 비롯한 제국기사단의 최정예들입니다.”
“제국의 오러 유저가 총 열 명이라 하지 않았나? 상당히 무리했군그래.”
저 정도면 제국의 전력이 총출동한 것이나 다름없다.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쪽 오러 유저의 전력이 대부분 공개되었으니까요. 상식이 있다면 이 정도 준비는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우리도 이 정도는 예상했던 바이고.”
카를이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이쪽입니다.”
카를의 목소리에 맞춰 서류를 보던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제국 마법병단이로군.”
“네, 80인의 고위 마법사에 300인의 정규 마법사로 이루어진 제국 마법병단 세 개 단이 모두 투입되었습니다. 대마법사의 위계를 지닌 이들도 넷이나 참전했지요. 이 정도면 태양탑이 통째로 출동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더군요.”
전쟁은 몰라도 마법만큼은 레펜하르트의 전공 분야다.
레펜하르트는 계속 안색을 굳힌 채 서류철을 넘겼다.
“……키란트에 바록, 론타리온에 파킨스인가? 이거야 원, 유명인 총출동이군.”
모두 8, 9서클의 경지에 다다른 제국 소속 태양탑의 대마법사들이었다. 전생 때 어릴 적의 레펜하르트가 동경하던 이들이기도 하다. 뭐, 서른 넘어서며 바로 앞질러 버려 동경의 기간이 상당히 짧긴 했지만 어쨌건 무시 못 할 강자 중의 강자들이다.
게다가, 문제는 이 마법병단의 총지휘자가 유명인 중의 유명인이라는 점이었다.
“드레자 이 영감이 마법병단장을 맡았나? 제국인도 아닌 양반이 왜 낀 거야?”
드레자 레판스틴.
올해 세수 일흔셋의 노인인 이 마법사는 라스틸 공국의 왕실 마법사이며 동시에 당대 최고, 최강의 마법사였다.
그는 현존하는 유일한 9서클의 ‘마스터’인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마스터급은 골치 아픈데…….”
같은 오러 유저라도 실력 차이가 확연하듯, 마법사 역시 같은 서클이라도 수행자와 마스터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9서클 마스터인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레펜하르트였다. 절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강력한 마법사는 단신으로도 전쟁에 수많은 변수를 불어 넣을 수 있으니까요. 쉽지 않은 상대일 겁니다.”
카를의 말에 레펜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무식하게도 동원했군, 바슈탈론 황제. 제국기사단의 오러 유저 대다수에 검성으로 모자라 9서클의 마스터에 태양탑을 통째로 뽑아 오다니.”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겠지요. 안타레스 공국은 분명 강력하지만, 노골적인 약점이 있으니까요.”
신흥 국사 강국으로 이름 높은 안타레스 공국, 수많은 오러 유저의 존재로 각국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안타레스에도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마법 전력이 지나치게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마법사가 너무 없지요.”
“그렇지, 세상천지 어디에 고작 5서클의 왕실 마법사가 어디 있겠나?”
카를과 레펜하르트는 헛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안타레스 공국 역시 다른 나라처럼 마법병단이 있다. 레펜하르트가 직접 가르친 드워프 마법사들과 3대 학회에 속하지 못하고 자력으로 마법의 길을 걷는 방랑 마법사들을 모아 만든 마법병단이었다.
숫자는 이백 명 정도로 제법 되었지만, 문제는 그 실력이었다.
대다수의 드워프 마법사들은 아직도 3서클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정규 마법사조차 되지 못할 견습 수준의 실력이다.
애초에 드워프나 엘프처럼 수명이 긴 종족들은 배움의 속도가 너무 느린 것이다. 그나마 저 진도도 저들이 드워프치고는 천재에 속하는 마법사였고, 또 가르치는 이가 고금 최강의 마법사 레펜하르트였기에 간신히 가능한 결과였다.
그리고 인간들로 이루어진 방랑 마법사 출신들은, 아직 그 충성도나 사상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함부로 마법적 지식을 전수해 줄 수가 없었다. 레펜하르트 입장에서 쉽게 신뢰할 수 없는 이들, 그렇기에 아직까지는 간접적으로 마법 이론을 전수하며 조율하는 단계다. 구색은 갖췄지만 실전에 투입할 레벨이 아니었다.
덕분에 현재 마법병단의 최고위 마법사는 현 안타레스 마법병단장이자 왕실 마법사, 5서클 후반의 경지에 이른 마법사 웨스틴이었다.
웃기는 상황이었다. 레펜하르트야 열외로 치더라도, 시리스마저 이미 6서클 후반에 다다랐다. 그런데 왕실 마법사란 작자가 고작 5서클이라니? 타국에서 볼 때 노골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끙, 이럴 줄 알았으면 마탑이라도 하나 세우고 본격적으로 마법사 양성을 할 걸 그랬나?”
레펜하르트의 마법적 지식과 지혜, 경지를 감안해 마탑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후진 양성을 시도한다면 아마도 대륙의 관용구가 3대에서 4대 마법 학회로 바뀌겠지.
“뭐, 그랬다면 마법 전력이야 꽤 늘었겠습니다만…….”
카를도 납득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의 마법적 경지에 대해 잘 모르는 그였지만 지금껏 단편적으로 보인 지식만을 조합해도 레펜하르트는 최소 대마법사였다. 대륙의 관용구를 바꿀 정도라곤 생각지 않지만, 상당히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껏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공왕님은 대외적으론 무식한 권사신데, 그런 짓을 했다간 안타레스의 이점을 빼앗기게 됩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식 전설로 여태 안타레스 공국이 얻은 이득이 얼마인가? 마법 전력을 위해 포기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이점이다.
“알고 있소. 그냥 답답해서 해 본 소리지.”
툴툴대는 주군을 향해 카를이 달래듯 웃음을 건넸다.
“너무 심려치는 마십시오. 마법 전력은 약하지만, 마법사에 대한 대응법은 다들 착실히 익혔으니 어떻게든 될 겁니다. 저도 따지고 보면 공왕님의 제자 아닙니까?”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레펜하르트도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많이 가르치긴 했는데, 사실 제대로 효과 본 것은 자네와 시리스 정도지.”
전생 때도 그랬듯이, 레펜하르트는 현생에도 시간 나는 대로 주변 지인들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시리스야 예전부터 꾸준히 가르쳐 와 이제 경지에 이른 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마켈린과 아틸카에게도 전생 때처럼 틈틈이 마법 지식을 전수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직접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이는 시리스 한 명뿐이다. 마켈린과 아틸카는 어디까지나 마법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뿐, 마법사가 된 것은 아니다.
신성력은 마력과 충돌하니 마켈린이 직접 마법을 구사할 순 없고, 트롤 주술도 신성력 정도는 아니지만 마법과 그리 궁합이 좋질 않다. 하지만 마법을 쓸 수 없더라도 그 지식을 얻고 이론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마법사를 상대할 때 굉장히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셈이다.
타시드 경우, 이번 생애엔 애초에 가르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결과가 뻔하니까.
대신 이니야를 가르쳤는데…….
-으아, 못하겠는데요…….
아무래도 한 분야에 절대적 재능을 지닌 이는 그만큼 다른 영역에 취약한 모양이었다. 시리스처럼 엘류시온의 목소리로 연산력을 높이고 거의 주입식에 가깝게 마법 감각을 가르쳤는데도 그녀는 마법을 쓰지 못했다. 고금 최강의 마법사와 상식을 초월한 고대의 아티팩트로도 커버가 안 될 만큼 그녀는 재능이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정령술과 오러가 그 정도 수준인데 굳이 마법 익힐 이유가 없기도 하다. 그래서 이니야도 마법의 총론 정도만 이해해 대對마법사 전투에 대한 개념 정도만 잡는 정도로 끝냈다.
또한 이번 생애의 레펜하르트는 인간 동료도 잊지 않았다. 카를이며 실란, 러스에게도 틈나는 대로 마법 지식을 전수했다. 신관인 실란이나 타고난 검사인 러스는 마켈린이나 이니야와 마찬가지로 대마법사전에 대한 개념을 잡는 정도로 끝냈지만 카를은 달랐다.
“그 기물, 정말 좋더군요. 엘류시온의 목소리라고 하던가요?”
시리스와 마찬가지로 엘류시온의 목소리로 연산력을 높인 카를은 벌써 3서클의 마법까지 구사하는 견습 마법사 수준이 되어 있었다.
재상의 업무 다 보고, 틈틈이 밤일 대비로 허리 단련하고, 기사로서의 버릇 때문에 가끔 검도 휘두르며, 그래서 침대에 눕기 전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마법서를 들여다본 정도인데 저 수준이다. 이래서 원래 머리 좋은 놈은 뭘 해도 된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마법 전력은 낮지만 엘프 정령군의 정령술은 충분히 마법과 비견될 만큼 범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렐하드 공과 이니야 양에게도 따로 전략을 전해놓았으니 어떻게든 될 겁니다.”
레펜하르트를 안심시키며 카를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놓았다. 그리고 이번엔 커다란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오? 드디어 안타레스 전도가 완성되었는가?”
“예, 다행히 시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카를이 꺼낸 것은 대륙 서부 전역을 정확하게 그려놓은 군사 지도였다.
보통 여행용 지도는 대략적인 방위와 거리 정도가 두루뭉술하게 그려져 있어 그리 신뢰도가 높지 않지만, 전쟁에 임해 그런 지도를 사용하는 것은 실로 곤란하다. 각국에서도 그런 이유로 군사용 지도는 거액을 들여 정확하게 제작하며, 또한 그 모든 지도는 국가 기밀로써 엄중히 관리된다.
카를이 펼친 이 지도는 그런 군사 지도들과 비교해도 월등할 정도로 뛰어나게 제작된 것이었다. 일단 거리와 축적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한 데다가, 이 지도는 타국의 군사 지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지도 옆에 서책 하나를 꺼내들며 카를이 감탄사를 흘렸다.
“트롤들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서책에는 안타레스와 크로방스 전역의 각 지형에 따른 기상 변화와 국지적인 지형 변화가 모두 예측되어 적혀 있었다. 쉽게 말해 어느 지역에 어느 시기에 비가 오고, 안개가 끼고, 샘이 마르고 무더위가 찾아오며 폭설이 내릴 지까지를 전부 예상한 기상 예보집이었다.
모두 흙을 숭상하고 자연을 숭배하는 트롤 주술사들의 작품이었다.
자연의 흐름에 민감한 트롤 구루들은 봄이 오면 여름을 예상하고 가을을 파악하며 겨울을 준비할 수 있다. 물론 구루들의 능력도 한계는 있어 한 해 단위로만 예상이 가능했지만, 그렇다 해도 무시무시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카를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반칙이란 느낌마저 듭니다.”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기상 변화가 얼마나 큰 변수가 되는지 잘 아는 카를이다. 전쟁 도중 언제 비가 오고, 언제 날씨가 궂어질지 알 수 있다니? 책사에게 있어 이 정보는 황금과도 맞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반면 레펜하르트는 그저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단 말이지. 난 왜 전생 때는 저 생각을 못 했을까?’
그야, 당시의 레펜하르트는 마음만 먹으면 기상 변화를 자기 손으로 바꿔 버릴 수 있었으니 신경 쓸 이유가 없었겠지.
카를이 지도 위에 각국의 부대를 형상화한 모형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일단 바슈탈론 제국군의 전력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삼만의 병력 모형이 크로방스 왕국 서부 국경, 차탄 공국와의 국경선 위에 놓였다.
“황태자 길리우스가 직접 지휘하는 삼만 제국군은 서쪽으로 진군할 예정입니다. 검성 바나텔을 비롯한 여덟 오러 유저 역시 모두 이쪽에 포진하고 있지요. 하지만 마법병단은 둘로 나뉘었더군요.”
3대대의 마법병단 중 1대대가 뒤로 빠졌다.
“9서클의 마스터, 드레자가 지휘하는 마법병단 한 개 대대와 세이어의 신관들 절반은 이쪽이 아닌 바실리 왕국 쪽에 지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흐음, 바실리 왕국 쪽 마법 전력이 취약하니 당연한 조치일 테지. 하지만 오러 유저를 모두 크로방스 쪽으로 보냈는가?”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황제의 목표는 크로방스가 아니라 안타레스 아니었던가?
“바실리 왕국 쪽도 만만치는 않으니까요.”
대꾸하며 카를이 이번엔 안타레스 공국 남부 국경, 바실리 왕국 북부에 모형을 포진시켰다.
“바실리 왕국군의 정병 오만과 오러 유저 에그라드 경이 남쪽에서 치고 올라옵니다. 거기에 신성군의 일만 기사들이 합쳤지요.”
“오러 유저 한 명인가? 하긴, 지금 바실리 왕국에 더 이상의 오러 유저는 없겠지.”
그나마 세 명 있던 중 한 명을 이니야가 죽여 버렸으니까.
“대신 신성군을 지휘하는 이가 그라임 왕국 최강의 오러 유저, 이라나드 공작입니다.”
“그라임의 이라나드 공작?”
마법사 외에는 잘 모르는 레펜하르트지만, 이라나드 공작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라임 왕국 최대의 재력과 권력을 지닌 귀족이며 왕위 계승 서열 7위의 오러 유저, 전생 때 그라임 왕국군의 총사령관으로 안타레스 제국을 매섭게 몰아치던 장수 중 한 명이다.
누가 뭐래도 확고한 그라임 왕국의 2인자가, 전혀 득 될 것 없어 뵈는 성전에 참가한 것이다.
황당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뇌까렸다.
“……그 양반, 세이어의 신도도 아닌 걸로 아는데? 왜 성전에 참가했지?”
카를도 동감의 뜻을 표했다.
“저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라 따로 조사 중입니다만, 어쨌건 참전한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그라임의 황금기사, 유서스 경이 부사령관으로 신성군을 통솔하고 있습니다.”
“황금기사야, 워낙 이쪽에 맺힌 게 많으니 빠졌다면 더 이상했겠지.”
레펜하르트가 조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