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장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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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방스와 안타레스의 ‘이종족 해방 선언’으로 인해 세상은 확실히 변했다. 이제 적어도 저 두 나라 내에서 모든 이종족들은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 인간들은 새로운 정책을 받아들이고 이종족들을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사람으로 대하게 되었다.
그렇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쉽게 돌변하지 않는다.
국민은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니다. 위의 명령대로 완벽하게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리다. 왕국의 권력자들 눈에는 이제 인간과 이종족들이 화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 해도 그 정책이 구석구석까지 완벽하게 스며든 것은 아니었다.
안타레스 공국 남부의 주요 교역 도시 자루드.
수많은 행상이 오가는 이 도시의 한 술집에서 폭행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딜 감히 드워프 따위가!”
“난쟁이 주제에 감히 인간님의 술집에 들어 와?”
십여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술에 취해 드워프 한 명을 짓밟고 있었다. 구둣발에 짓밟히며 드워프가 신음을 흘려댔다.
“아고고, 나가겠소! 나간단 말이오!”
그는 한때 크로방스의 한 귀족의 노예로 살다가 이번에 자유의 몸이 된 드워프였다. 다른 일족과 달리 자유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 드워프 제 무기며 도구들을 짊어지고 행상으로 나섰던 것이다.
먼 길을 걸어 자루드로 돌아와 가볍게 맥주 한잔 하려고 아무 술집이나 찾은 것이 화근이었다.
레펜하르트며 각 이종족의 수장들이 버티고 있는 아라난 그라드와 달리, 교역 도시 자루드는 원래부터 크로방스의 주요 교역 도시로 역사가 깊은 곳이다. 아무리 안타레스 이종족의 소문이 퍼지고, 또 정책이 선포되었다 해도 여전히 뿌리 깊은 편견이 남아 있는 이들이 있었다.
“건방지게 난쟁이 따위가 감히 우리랑 합석을 하려고 해?”
“세상이 변했다고 아주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얼큰하게 취한 이들이 흥분해 계속 쓰러진 드워프를 짓밟는다. 전사의 혈통을 타고나지 않은 드워프는 대지 공명의 힘도 없는, 그저 단단한 체구의 키 작은 사람일 뿐이다. 죽도록 두들겨 패고 나서야 취한 이들이 드워프를 들어 술집 밖으로 내던졌다.
“꺼져라! 미천한 난쟁이 놈!”
“자, 가서 다시 술이나 한잔 하세!”
취객들이 껄껄대며 다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흙바닥을 뒹굴며 드워프가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
“어흐흐흑!”
세상이 변했다곤 하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비단 교역 도시 자루드뿐만이 아니었다. 전 국민의 수에 비하면 비록 소수지만 여전히 이종족을 고깝게 보는 시선은 존재했다. 국법이 지엄해 감히 드러내질 못할 뿐이다. 홀로 다니거나 소수로 다니던 이종족 행인이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주로 오크와 드워프가 그 대상이었다.
아무래도 엘프는 인간이 보기에도 아름다워 크게 반발심을 느끼지 않는다. 트롤은 워낙 수가 적고 자신들의 마을에서 잘 나오지 않으며, 돌아다니는 이들은 강력한 힘을 지닌 구루뿐이니 딱히 습격받을 일이 없다.
하지만 비교적 수가 많으면서도 인간과 확연히 다른 외모를 지닌, 게다가 그리 부러워할 외모가 아닌 오크와 드워프에 대한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인간인 이상 외모에 구애받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이종족이라고 해 봤자 머리 굳은 이들에게 오크는 못생긴 괴물이고 드워프는 못생긴 난쟁이일 뿐인 것이다. 크로방스와 안타레스 관청에서 추가 인원까지 보충하며 차별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모든 지역에 국가의 손이 닿지는 않았다.
그리고 차별이 일어나는 것은 오색의 도시, 아라난 그라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아라난 그라드의 거리를 한 연인이 걷고 있었다. 젊은 인간 청년과 아리따운 미모의 엘프 여인이었다. 사이좋게 손을 잡은 채 인간 청년이 엘프 여인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꿈만 같아, 질레인. 당당히 널 내 아내라 말할 수 있다니.”
“저도요, 헬바트 님.”
감미로운 음성으로 엘프 여인이 대꾸했다. 인간 청년이 쯧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헬바트 님이라니? 이젠 여보라고 불러야지?”
“……여보.”
그들은 탄압을 피해 이곳 아라난 그라드로 이주해 온 이들이었다. 이곳에선 두 사람의 사랑을 당당히 인정해 준다. 이미 그들은 필라넨스 신전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꿈에도 그리던 떳떳한 부부가 되었다.
“사랑해, 질레인.”
인간 청년이 엘프 여인의 뺨에 키스하며 즐거워했다. 엘프 여인도 행복해하며 남자에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복면 쓴 이들이 나타났다. 흠칫 놀라 청년이 여인을 감싸며 물었다.
“응? 뉘시오?”
복면을 쓰고 있지만 뾰족한 귀가 확실히 드러났다. 즉, 이들은 엘프 남자들인 것이다. 당황하며 인간 청년이 재차 물었다.
“대체 무슨 일로…….”
제일 앞에 선 엘프 청년이 호통을 쳤다.
“비열한 인간 놈! 언제까지고 그런 더러운 수작질을 할 셈이냐!”
“수작질이라니, 그게 무슨…….”
당황한 인간 청년을 엘프들이 모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쓰러져 인간 청년이 비명을 질렀다.
“억! 어억! 살려…….”
연신 발길질을 하며 엘프 청년들이 이를 갈았다.
“천벌이다! 인간 놈아!”
“아직도 엘프가 네놈의 더러운 노리개로 보이나 본데…….”
“그 썩은 머릿속을 뜯어고쳐 주마!”
두들겨 맞으며 인간 청년이 신음을 흘렸다.
“아, 아니오! 나는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해서…….”
엘프 여인, 질레인이 울상을 지으며 동족 청년들에게 매달렸다.
“하지 말아요! 제 남편이란 말이에요!”
짝!
엘프 청년이 질레인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여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더러운 창녀 같으니!”
“수치도 모르는구나!”
“인간들과 놀아나고도 선조께 부끄럽지 않느냐?”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결국 인간 청년이 혼절해 버렸다. 엘프 여인이 엉엉 울며 다시 소리쳤다.
“그러지 마요! 정말 제 남편이란 말이에요!”
그러자 이번엔 엘프 남자들이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따귀가 날아갔다. 여인이 뺨을 감싸고 쓰러졌다.
“수치도 모르고 다리를 벌린 벌이다!”
“교훈을 얻었기를 바란다. 창녀 같은 년!”
걸레처럼 널브러진 인간 청년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낸 뒤 엘프 청년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갑시다, 동지들! 아직도 인간의 세뇌에 빠진 동족의 여인들이 많소. 그들에게 교훈을 내려야 하오!”
“물론입니다!”
“아직도 우리 종족을 노리개로 보는 더러운 인간 놈들이 많으니, 결코 쉴 수 없지!”
그때 저 멀리서 호각 소리가 들렸다. 엘프 청년들이 당황했다.
“윽? 도시 경비대다!”
“도망쳐!”
쓰러진 인간 청년의 머리를 한 번 더 걷어찬 뒤, 엘프 청년들이 우르르 거리 너머로 사라졌다. 질레인이 엉금엉금 기어가 남편에게 다가갔다. 펑펑 울며 쓰러진 남편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여보, 일어나세요! 여보오……!”
도시 반대편에서는 가판대를 차린 트롤 행상 하나가 한 인간 중년인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거 사 간 그날 깨졌단 말이오! 어디서 불량품을 팔아!”
“인간! 그것은 불량품이 아니다! 감히 내 솜씨를 모욕하려는 거냐!”
“아니, 모욕이고 뭐고 집에 들고 간 그날 깨졌다니까?”
사실은 중년인의 실수로 깬 것이 맞았다. 집에 들고 가 장식해 놓았는데, 어린 아들이 실수로 가지고 놀다 깨 먹은 것이다. 비싼 돈 주고 사 온 것이 하루 만에 깨지니 돈이 아까워 이리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이 인간이 진짜…….”
말다툼이 격해지자 트롤의 표정도 점점 일그러졌다. 사실 트롤은 그리 격한 성품이 아니며, 꽤나 인내심이 강하고 평화로운 종족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진상 떠는 중년인을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잠시 울컥했다. 그래서 무심코 손을 휘둘렀다.
휘익!
인간으로 치면 멱살을 잡는 정도의 가벼운 행동이었다. 단, 그것은 트롤 기준에서나 그렇다. 중년인의 오른팔이 싹둑 잘려 나갔다.
“아?”
순간 멍해진 중년인이 비명을 터트리며 주저앉았다.
“으, 으아아악!”
트롤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트롤들은 다툼이 있으면 팔다리 하나쯤 자르는 것은 예사였다. 재생력이 있으니 그 정도는 그리 심한 부상이 아닌 것이다. 그냥 멱살 잡고 시위하는 것과 같은 감각이다.
하지만, 다른 종족에게는 생사가 오가는 심각한 부상이었다.
트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잠시 후 레단티의 신관이 달려와 부상자를 돌봤다. 치안대도 달려와 트롤을 체포해 갔다.
“실수요! 그냥 실수일 뿐이라니까!”
억울하다며 트롤이 하소연했지만, 멀쩡한 팔 잘라 놓고 억울하다 소리쳐 봐야 설득력이 없었다. 팔 잘린 중년인의 비명이 하늘 위로 아우성쳤다.
“으아아악!”
안타레스 공국의 한 지방 도시.
한 무리의 오크 청년들이 술집으로 들어오며 왁자지껄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다들 노예로 살다 이번 정책으로 인해 해방된 이들이었다. 우락부락한 오크들이 술집으로 들어오자 다른 인간들이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러운 것도 시끄러운 것이지만, 그들 몸에서 너무 냄새가 났던 것이다.
오크 사내 중 하나가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부라렸다.
“인간들! 왜 보나?”
오크답게 단순한 어휘, 하지만 워낙 목소리가 살벌하다. 술을 마시던 인간들이 움찔거리며 눈을 피했다.
오크들이 자리를 잡고 자기들끼리 신 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서빙 하는 웨이트리스의 치마도 마구 걷어 올렸다.
“흐헤헤!”
“여자다!”
“꺄아악!
웨이트리스가 울상을 지은 채 도망갔다. 오크들의 횡포가 너무 심하니 중년인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그가 점잖게 한마디 건넸다.
“조용히 술이나 먹을 것이지, 그게 무슨 횡포인가?”
딱히 천시하는 어조가 아니었다. 나이 많은 이로서 청년에게 할 법한 말투였다. 하지만 오크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꺼져라, 인간!”
오크 하나가 대뜸 중년인을 후려갈겼다. 비명이 터지고 술집 안이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오크들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오크어로 으르렁거렸다.
“흥! 아직도 우리가 노예인 줄 아는 거냐!”
“이젠 네놈들을 두들겨 패도 우릴 혼낼 주인이 없다 이거야!”
“더 이상 인간들에게 빌빌댈 필요가 없어! 우리 세상이 왔다고!”
죄 없는 이를 폭행하고도 오크들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도로 술집에 주저앉아 빨리 술 내오라며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잠시 후, 도시 치안대가 들이닥쳤다. 겁먹은 주인이 재빨리 연락한 것이다.
선두에 선 것은 치안대장 차발타, 검투사 출신의 오크였다. 동족을 체포하려는 그를 보며 오크들이 화를 냈다.
“왜 우리를 잡아가나?”
“저들도 이랬다! 우리도 그럴 거다!”
묵직한 펀치를 한 방씩 날리며 오크 보안관이 인상을 썼다.
“시끄러워, 이 병신들아!”
그는 백국 초기, 타시드에 의해 구출된 검투사 중 한 명이었다. 그 후 오크의 전통을 이어받아 스피리츠 웨폰을 터득하고 전사의 자격까지 얻었다.
자부심 있는 차발타에게 이 오크들은 같은 동족이지만 정말 쓰레기였다. 긍지도 명예도 모르고, 그저 자유로워졌으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며 짐승처럼 굴 뿐이다.
잠시 후 오크들이 줄줄이 묶여 끌려 나갔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억울하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 한심한 광경을 보며 차발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비록 동족이라지만, 오크는 그가 보기에도 너무 무식하고 난폭한 놈들이 많았다. 이래서야 노예로 살아도 싼 놈들이 아닌가?
“이런 놈들이 점점 늘고 있으니…… 윗분들도 고생이 많으시겠군.”
☆ ☆ ☆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으며 카를은 머리를 싸맸다. 역시 아무리 법을 공표했어도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끙, 골치 아프군요.”
여전히 이종족을 노예로 보는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종족을 학대했다.
자유와 방종을 구별하지 못하는 풀려난 이종족들은 대놓고 인간에게 자기들이 당한 것처럼 똑같이 대하려 했다.
“그러게 말일세, 카를 재상.”
카를 앞에 마주 앉은 마켈린도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을 대표하는 카를 재상.
드워프뿐 아니라 모든 이종족들의 존경을 받는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
이 둘은 안타레스 공국을 지탱하는 양 기둥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이 둘이라도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것이었다.
카를이 서류를 손가락으로 넘겼다.
“인간과 이종족의 불화는 예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현재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것은 학대한 인간과, 학대받는 이종족들뿐이 아니었다.
똑같이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지만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은 엄연히 다른 종족이고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서로 얽히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로워진 엘프들은 오크며 드워프, 트롤들을 무식하고 야만적이며 난폭하다 여겨 멸시했다.
자유로워진 드워프들은 딱히 다른 종족에 대한 편견은 없었지만, 사는 환경이 너무 달랐다. 드워프의 특성상 그들은 소음 공해라 할 정도로 시끄럽게 무기를 제련하며 마구 연기를 피우고 살았다. 드워프 말고 다른 종족은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트롤과 드워프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드워프는 대장장이 일을 위해 석탄과 목재를 마구 땐다. 자연을 사랑하는 트롤들로서는 기겁할 파괴 행위인 것이다. 같은 의미로 엘프도 드워프를 좋아하지 않았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작은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오크들은 특유의 난폭함 때문에 모든 종족과 사고를 종종 일으켰다. 특히 검투사 출신이나 오지의 자유로운 오크 중에는 노예 출신 오크들을 같은 동족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인간처럼, 아니 인간보다 더 천시하며 학대하기도 했다. 오크는 어디까지나 강자를 숭상한다. 그런 이들에게 ‘약자’는 학대해도 좋은 존재인 것이다.
문화와 인식 차이로 사고가 나고, 노예 출신과 자유로운 오지 출신의 차이로 싸움이 벌어지고, 인간과 이종족의 역사로 또 문제가 생긴다.
카를과 타시드. 시리스, 아틸카와 마켈린이 열심히 중재하고 동족들을 교육했지만 이는 단시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카를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 ☆ ☆
왕궁 가이라크의 공왕 집무실.
그곳에서 레페하르트는 굳은 얼굴로 카를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이 단호하게 말했다.
“현행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현재의 안타레스 공국법은 모든 종족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각 종족의 문화를 최대한 존중해 최대한 공평하게 만든 법이었다. 이상 자체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현실적이진 않았다.
“각 종족마다 가치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법률 역시 그에 맞춰야 합니다. 당장 현재의 형벌은 각 종족에 따라 유리한 부분과 불리한 부분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중대한 범죄를 지었을 때 손발을 자르는 것은, 다른 종족에겐 충분히 범죄 억제력이 있는 공포스러운 형벌이다. 하지만 트롤에겐 그냥 매 몇 대 맞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범죄에 따라 감옥에 넣고 노역을 시키는 것은 다른 종족에게는 충분히 형벌이지만 드워프들에게는 평소 생활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공평한 법이라지만 그 법은 실제로 공평하지 않았다. 처벌의 범위나 강도 역시 너무 약했다. 애초에 저 법은 각 종족이 서로 존중하며 화합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만든 법인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며 되물었다.
“그렇다고 사형의 영역을 넓힐 수도 없지 않은가?”
카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해야 합니다.”
모든 종족에게 공통적으로 드리워진 두려움은 죽음뿐이다.
“법은 지엄한 것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국가는 법의 공평성을 중시하지 그 형벌의 강도를 낮추려 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국민들을 아끼는 마음은 잘 알지만…….”
잠시 말문을 흐리다 카를이 다시 말했다.
“지금 레펜하르트 님의 태도는 인군도, 성군도, 현군도 아닙니다. 그냥 물러 터진 것일 뿐이지요.”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더없이 창백해졌다. 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카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 준다지만 방금의 간언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 정도가 아니면 난 이분을 주군으로 여기지도 않았을 터다.’
과연, 레펜하르트는 카를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잠깐 울컥하긴 했지만 이내 카를의 말이 타당함을 인정했다.
“아프지만…… 옳은 지적이군…….”
전생과 다른 길을 가려 했다. 그러다 보니 전생 때처럼 냉혹하게 손쓰는 일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겠네. 잠시 고민할 시간을 주게.”
카를이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가 신하인 그의 의무였다. 이 이후는 레펜하르트의 뜻에 따를 뿐이다.
“폭언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이는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닙니다.”
“알겠네.”
카를이 다시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아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이종족의 수가 적을 땐 이런 일이 없었다.
다들 억압 속에서도 명예와 긍지를 지키던 이들이었다. 고결한 영혼을 유지하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의지 견정으로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구출되어 자유로워진 이들도 그들의 분위기를 본받아 위대한 조상의 문화를 따라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수가 많아지자, 저들이 더 이상 ‘약자’가 아니게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일단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선 이들은, 하는 짓도 인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똑같이 서로를 질시하고 무시하고 천대하고 학대하고 미워했다.
그래, 전생 때도 이런 일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는데…….”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현재 안타레스 공국의 국법은 전생의 제국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는 이 법으로도 그리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역시 그때와 건국 시간이 너무 달라서 그런 건가?’
그때는 이처럼 급박하게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이종족을 규합하고 조금씩 구출하고 점점 인구를 늘리며 점진적으로 제국의 위치까지 올랐다. 화합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일어나는 사태는 너무 심하다…….
“으음…….”
그때 집무실에 마켈린이 들어왔다.
“고민하고 계시는 듯하군요, 레펜하르트 님.”
“안 할 수가 없지 않소?”
퉁명스레 대꾸하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지만 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건지…….”
“전 짐작이 갑니다만?”
“그렇소?”
레펜하르트가 마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 포트가 내려 준 순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켈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종종 제게 말씀해주셨지요. 레펜하르트 님의 전생, 안타레스 제국에 대해서.”
“그랬지. 그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소, 분명.”
“당연한 이야기지요.”
마켈린이 말을 이었다.
“당시의 안타레스 제국은, 누가 뭐래도 종족 별로 계급이 확실히 나뉘어 있지 않았습니까?”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요? 나는 분명 모두를 동등하게 대했거늘.”
“그야, 법적으로는 그렇지요. 나뉜 것은 계급이라기보다는 직종이었고 법적으로는 모두 평등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동등하다고 외쳐 봐야 농민과 그들을 관리하는 행정관이 같습니까? 상점의 주인과 하인이 같은 지위일까요? 법적, 도덕적으로 평등하다고 선언해 봐야 직업에 따라 위아래는 생기는 법입니다.”
마켈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들은 안타레스 제국은 누가 뭐래도, 인간이라는 최하층민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동등하게 대했다고 믿는 레펜하르트 님 입에서 들은 것이 이 정도니 실제로는 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통으로 학대할 ‘인간’이라는 대상이 있었으니 이종족들끼리 크게 다툼이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원래 사람은 공통의 적이 있을 때 단결하니까요.”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렸다. 마켈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날아드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요.”
“다른 이유도 있단 말이오?”
“네, 레펜하르트 님이라는 존재 말입니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10서클의 대마법사, 누가 뭐래도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마왕이었다. 반면 지금의 레펜하르트는 인간의 한계를 ‘살짝’ 뛰어넘은 정도인 것이다.
“전 레펜하르트 님의 마법을 실제로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플린 공략 이야기는 들었지요. 솔직히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공포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직접 그 힘을 본 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분명 전 인류가 공포로 떨었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를 느낀 것은 인류만이 아니었다.
같은 편인 이종족에게조차도 공포스러운 힘이었다. 손짓 한 번에 산이 날아가고 외침 한 번에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심지어 그러고도 전혀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마왕의 모습은 적아를 막론하고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생 때와 지금의 레펜하르트는 성격도 상당히 바뀐 편이었다.
제플린의 사례나 침략해 온 타국의 적을 몰살시킬 때처럼,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일단 상대를 적이라 인식하고 나면 지독하게 냉혹해지는 자였다. 그리고 마법사답게 그의 기준은 편협하기 그지없었다. 그 적아의 기준이 만약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된다면 어쩔 것인가? 같은 안타레스 제국민이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시에는 레펜하르트 님이 절대적 공포의 대상으로 국민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법과 도덕을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인 억제력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럼 어쩌란 말이오? 지금이라도 10서클 마법을 선보일까?”
‘미티어 폴 정도라면 주 1회는 가능한데…….’
레펜하르트가 그 생각을 하며 묻자 마켈린이 기막히단 얼굴을 했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꼭 저런 식으로 생각이 도나?
“그게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국가는 어버이와 같습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존경과 경외, 두려움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은 어버이지요. 그래야 자식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테니.”
그런 의미에서 마켈린은 카를의 법 개정을 찬성하고 있었다. 교육과 사상 변화로 국민들이 변하길 기다리는 것은 너무 늦다. 그동안 무수한 억울한 피해자가 속출할 테니까.
“원래 건국 초기에 굳건한 법으로 국민들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들에게도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카를 재상의 제안에 찬성합니다.”
“으음…….”
레펜하르트가 다시금 신음을 흘렸다. 마켈린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마켈린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레펜하르트 님은 항상 말씀하셨죠.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늙은 드워프가 고개를 들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저 강자와 약자라는 입장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요. 아마 입장이 역전되었었다면, 추악한 성품의 드워프 종족이 고결한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현자의 눈동자를 빛내며 그가 단언했다.
“우리도, 인간과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2
현재 안타레스 공국에 살고 있는 이종족들은 모두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있다. 억압받고 살다 겨우 해방된 이들이니, 변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없을 리 없다.
그중 가장 심각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오크와 엘프의 성비였다.
인간에게 있어 오크 여성과 엘프 남성은 노예로의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키우는데 돈 들이지 않고 죽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유로워진 엘프들의 남녀 성비는 1:10에 가까웠다. 반면 오크의 남녀 성비는 10:1이었다.
남자만 너무 많은 종족과 여자만 너무 많은 종족.
이 두 종족이 한데 어울려 사니 결국 예정된 문제가 터져 버렸다. 남자가 남아도는 노예 출신 오크들이 성욕을 참지 못하고 엘프 여인을 강간한 것이다.
자유로운 오크와 엘프들이 어울려 살 땐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오크 기준에서 다른 종족의 여성은 다들 ‘비만’이었다. 아무리 몸매가 늘씬해봐야 근육이 없으면 뚱뚱이 취급하는 것이 오크다. 그렇다 보니 총각 오크들도 엘프나 드워프 여인을 넘보는 일은 전혀 없었다. 트롤 여성 쪽은 꽤 심미관이 맞았지만, 워낙 숫자가 적어 만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원래 전통의 오크들은 여성을 존중했다. 남자라면 당연히 여인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였다. 보다 자연의 법칙에 가깝달까? 여인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남자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불명예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인간에게 물든 노예 출신 오크들에겐 그 위대한 조상의 문화가 전해지지 않았다. 미의식 역시 인간에 가까워졌다. 또한, 인간이 언제나 마음대로 엘프 여자를 강간하는 것을 쉽게 보아 왔다.
그렇다 보니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오크들이 생긴 것이다.
“어차피 엘프들은 변변찮은 남자도 없지 않나? 과부로 늙을 불쌍한 여자들에게 남자 맛을 보여 주는 게 뭐가 잘못이란 말이야?”
아라난 그라드, 오크 지구.
수십 명의 오크를 앞에 두고 한 무리의 엘프가 모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당장 그 간악한 자들을 불러내시오!”
단하임 일족의 수장, 렐하드였다. 그는 지금 일족으로 받아들인 노예 출신 엘프 여인들을 대변해 이 자리에 왔다. 얼마 전, 여섯 명의 오크에게 강간당한 여인들이었다.
렐하드 앞에 선 이는 회색 오크의 수장, 오러 유저 하다툼이었다. 그는 제플린 공략 시절, 렐하드와 함께 도적단인 척 꾸미고 함께 노예들을 구출한 적이 있었다. 서로 아는 사이라 평소엔 꽤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하다툼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가 힐끔 등 뒤에 무릎 꿇은 여섯 명의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죽도록 두들겨 맞았는지 전신이 알록달록했다.
하다툼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으음, 내 말하지 않았소? 이놈들은 이미 벌을 받았다고.”
렐하드의 표정이 더더욱 살벌해졌다.
“여인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주고 어찌 매타작으로 벌이 끝난다 말이오! 목을 베어도 모자랄 것을!”
하다툼의 표정도 점점 구겨졌다.
“아니, 그럼 저들을 죽여야 한단 말이오? 저놈들이 엘프들을 죽이기라도 했소? 저 병신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사실 그쪽 여인들이 무슨 큰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잖소?”
두 종족 간의 문화 차이가 빚은 일이었다.
분명 오크들은 여인의 선택을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여인의 정조까지 중시하지는 않았다.
오크들에게 있어 여인은 평생 살아가며 수십 명의 남자를 고를 수 있었다. 남자들도 처녀보다는 오히려 경험 많은 여인을 선호했다. 애를 많이 낳았다는 것은 그만큼 생산력이 입증되었다는 증거니까. 오크 여인에게 있어 처녀성이란 그저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뿐이며, 빨리 버릴수록 자랑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반면 엘프는 일부일처제를 고집하며 한 남자를 사랑하면 평생을 함께한다. 인간의 네 배나 되는 수명을 지닌 그들이니만큼 결혼에 대한 의식도 매우 굳다. 여인이 남편 아닌 다른 이에게 정조를 빼앗긴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수치이며 모욕이다.
“무, 무슨 그런…….”
렐하드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여인을 죽음보다 못한 꼴로 만들고 저런 뻔뻔한 소릴 하다니!
“거참, 억지가 너무 심하군!”
하다툼도 성질을 내며 투기를 피워 올렸다. 아니, 세상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쪽이 목숨을 앗은 것도 아닌데, 그 대가로 생명을 요구하다니 이 무슨 불합리한 요구인가!
양쪽의 살기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렐하드가 분노를 못 참고 이그나시스를 발동시켰다.
“이 뻔뻔한 작자들!”
하다툼도 블레이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는 게야!”
오러와 불의 정령이 사방을 찬란하게 빛낸다. 각 부족의 두 수장이 눈을 부라리며 서로를 공격하려던 참이었다.
“양쪽 다 멈추세요!”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백금발을 휘날리며 오른손으로 물의 정령을 소환해 이그나시스를 밀어내고 검을 떨쳐 블레이드 오러를 가로막는다.
콰쾅!
폭발이 일어나며 하다툼과 렐하드가 한 발자국씩 뒤로 밀렸다. 렐하드가 놀라 눈을 껌뻑였다.
“시, 시리스?”
방금 이그나시스를 밀어낸 힘은 렐하드의 몇 배나 되는 것이었다. 아니, 저 아이의 정령술이 이렇게까지 강해졌단 말인가?
“어? 시리스 양?”
하다툼도 경악했다. 현재 시리스의 시미터에는 희미한 백색 빛이 맴돌고 있었다. 그 빛이 간단히 그의 블레이드 오러를 막아 낸 것이다. 설마 오러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뭔가 달랐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저 백색 빛이 오러 못지않은 힘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양쪽을 제압한 채 시리스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 문제는 당신들이 정할 일이 아니에요!”
렐하드와 하다툼이 동시에 억울하다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입니까, 시리스! 그대도 여인이라면 저들의 아픔을 잘 알 것을!”
비록 일족의 후예이지만, 시리스는 대외적으로 엘프의 수장이었다. 그래서 렐하드도 일단 존댓말을 썼다.
“아니, 같은 엘프라고 편드는 거요? 어차피 그 여인들은 노예 출신! 처녀도 아니었잖소! 그런데 죽음으로 갚으라는 게 말이 되오?”
서로의 기준이 너무 다르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시리스가 눈에 살기를 띠었다. 울컥 짜증이 밀려올라왔다. 이유 모를 살의가 마구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귀찮은 것들이…… 다 죽여 버릴까?’
순간 시리스는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방금 한 생각이 정말 자신의 것이었는지 의심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사악하게 속삭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하아…….”
애써 숨을 고르며 시리스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좌우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누구 편을 들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저 중재를 하러 온 것뿐이에요. 이 일을 판단하는 것은 레펜하르트 님께 맡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렐하드와 하다툼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레펜하르트라면 그들 모두의 은인이었다. 그가 내린 결론이라면 양쪽 모두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좋소.”
“좋다!”
렐하드와 하다툼이 동시에 무기를 거두었다. 뒤에 서 있던 엘프와 오크 전사들도 분위기를 보며 전의를 거두기 시작했다.
시리스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쉴 때였다.
“틀렸어요, 시리스 양.”
갑자기 오크들의 천막 위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렐하드와 하다툼, 시리스가 놀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특히 하다툼의 경악은 대단했다.
‘누구지? 아무런 기척도 못 느꼈는데?’
보랏빛 머리의 미녀 엘프가 천막 위에 고고히 서 있었다.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고 눈빛은 오만하게 좌중을 오시한다. 시리스가 흠칫 놀랐다. 언제나 레펜하르트를 졸졸 따라다니며 바보짓만 하던 그 이니야였다.
“이, 이니야 씨?”
지금의 이니야는 시리스가 아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위압감과 존재감을 사방에 과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의 여왕이라는 별칭이 부끄럽지 않을 당당한 모습이다.
“세상에는 물러서도 되는 것이 있고, 물러설 수 없는 것이 있지요.”
도도한 목소리를 흘리며 이니야가 사뿐히 레이피어를 뽑았다. 그녀의 전신에서 냉기와 살기가 더더욱 강렬하게 흘러나왔다. 모인 이들이 모두 부르르 떨 때였다.
휘익!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비명이 터졌다.
“아악!”
“으악!”
“커억!”
하다툼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니야가 그의 눈을 간단히도 속이며 단숨에 등 뒤로 돌아가 무릎 꿇은 오크 강간범 셋의 머리를 날려 버린 것이다!
세 줄기 피분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오크들이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이니야의 레이피어가 다시 춤을 췄다. 남은 세 강간범의 목을 마저 칠 셈이었다.
“이런!”
하다툼이 당황해 몸을 날렸다. 블레이드 오러를 뿌려 공격을 막아 내며 그가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이들은 우리 일족! 그 생사도 우리가 결정한다!”
이니야가 사뿐히 검을 돌렸다. 하다툼의 공격이 궤도를 바꾸며 엉뚱한 데로 흘러가 버렸다. 단숨에 이니야가 접근하며 상대의 목덜미에 레이피어를 겨누었다. 섬뜩한 냉기가 예기를 동반하며 목젖에 닿았다. 하다툼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으윽!”
이니야는 오크 최강의 투사, 칼켄과 맞먹는 최고위 오러 유저다. 아무래도 하다툼의 실력이 좀 떨어지는 것이다.
검을 겨눈 채 이니야가 입을 열었다.
“알아 두거라. 우리는 서로 다르다.”
하다툼뿐 아니라 모든 오크들을 향해 그녀가 말했다.
“서로 다른 이들에겐 그 가치도 서로 다른 법. 세상엔 죽음보다 더한 가치를 가진 것도 있다. 네놈들이 범한 것이 그것이다.”
엘프로서, 일족의 수장으로서의 권위를 담아 이니야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그것을 존중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너희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아스레일과 아틸카가 경비대를 이끌고 오크 지구로 달려왔다. 사고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온 것이었다. 목이 날아간 오크 강간범들의 시체를 보며 아틸카가 혀를 찼다. 시체에 새하얗게 냉기가 맺혀 있었으니, 누가 이들을 죽였는지 안 봐도 뻔했다.
“쯧…….”
아스레일이 살아남은 세 오크를 체포해 꽁꽁 묶었다. 관청으로 이송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니야를 보며 당황했다.
“으음, 이니야 님…….”
오크 강간범이야 그 죄가 확실하니 당연히 체포한다. 하지만 저 오크들을 죽인 이니야는 어찌해야 하나? 어쨌거나 국법을 무시하고 재판도 없이 바로 살인을 저지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이며 강력한 오러 유저인 이니야를 감히 체포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때, 이니야가 빙그레 웃으며 양손을 내밀었다.
“체포하세요. 국민을 살해한 것은 분명 중죄이니까.”
아스레일이 질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찌 이니야 님을 묶을 수 있겠습니까? 도망가실 분도 아니고…….”
이니야를 일개 범죄자처럼 묶어서 데려간다고? 아스레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했다.
“법은 법이니까요. 묶으세요.”
아스레일이 조심스레 이니야의 두 팔을 살짝 묶었다. 너무 살짝 묶어 이건 뭐, 조금만 힘을 줘도 풀릴 지경이었다. 하긴, 그녀의 능력이라면 설사 꽁꽁 묶는다 해도 줄째로 끊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 별 의미 없는 짓이긴 했다.
그러고도 이니야의 모습이 신경 쓰이는지 아스레일이 망토를 벗어 묶인 이니야의 양 팔목을 가렸다. 그제야 좀 안정이 되었는지 그가 나직이 말했다.
“별일 없을 겁니다, 이니야 님. 누가 뭐래도 저놈들은 범죄자이니까요.”
이니야를 데리고 아스레일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의 차갑고 엄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 사고 쳐 버렸다아…… 히잉, 레펜하르트 님이 미워하시면 어쩌지?”
멀어져가는 이니야의 뒷모습을 시리스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록 시기하는 상대라지만, 지금의 이니야만큼은 도저히 질투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 ☆
무단으로 오크들의 목숨을 취한 이니야의 처벌은 꽤나 가벼운 것이었다. 그녀의 지위도 있고, 또 대상이 무고한 것도 아니었기에 일주일간 연금되는 형벌이 내려졌다.
오크 쪽에서도 의외로 반발은 없었다. 오히려 하다툼 같은 경우 그녀를 옹호하고 나섰다.
“나는 투사 이니야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는 옳은 일을 했다.”
애당초 하다툼도 저 오크 강간범들이 좋아서 비호한 것이 아니다. 그저 동족을 다스리는 입장에서 타당한 벌이라 생각했을 뿐. 이니야의 강경한 태도를 보고 나니 그제야 저놈들이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오크들은 솔직 담백한 부분이 있어 인간처럼 자존심 문제로 권세 다툼을 하지는 않으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줄 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니야의 ‘주장’은 오크 입장에서도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다.
다음 날 오후.
아라난 그라드의 광장에 공식으로 처형식이 벌어졌다. 수많은 인파가 처형식을 구경하기 위해 광장으로 모여 있었다.
처벌은 죄를 다스리는 것에도 목적이 있지만, 만인에게 공표함으로써 추후의 범죄를 예방하는 목적이 사실은 더욱 강하다. 추후에도 이런 사건을 벌이는 자는 확실하게 사형당한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광장 앞 관청 2층의 테라스에 안타레스 공국의 지도층들이 나타났다.
공왕 레펜하르트며 카를, 각 종족의 대표인 시리스, 타시드, 아틸카, 마켈린 등이 앞장서고 그 뒤로 이번 사건의 당사자 종족 대리인 렐하드와 하다툼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를이 엄숙한 목소리로 죄인들의 죄를 나열했다. 그리고 외쳤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죄인들을 끌어내라!”
세 명의 오크들이 오랏줄에 묶인 채 끌려 나왔다. 엘프 여인들을 덮칠 때의 당당함은 어디로 갔는지, 다들 잔뜩 두들겨 맞고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오크들이 처형대 위에 묶였다. 형틀 위에 강제로 엎드리게 해 몸을 고정시킨다. 섬뜩한 칼을 든 오크 망나니가 도신에 술을 뿌렸다.
강간범들이 기겁해 소리쳤다.
“살려 주십쇼!”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를!”
인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주로 드워프와 엘프, 트롤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인간과 오크들도 여성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멸시의 눈빛만을 보냈다.
반면 인간과 오크 남자들은 당혹하는 기색이었다.
“어, 진짜 죽이네…….”
“아니, 강간 좀 했다고 죽일 것까지는…….”
“정말로 목을 치는 거야?”
그들의 반응을 예리하게 살피며 카를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좀 더 일찍 이렇게 했어야 했어.’
카를이 등 뒤로 눈짓을 보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가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내자 묶인 오크 강간범들이 소리쳤다.
“살려 주십시오! 폐하!”
“다시는 안 이럴게요!”
오크어로 외친 것이라 다른 종족 귀에는 으르렁대는 걸로만 들렸다. 과연 흉악범들이라며 여인들이 치를 떨었다.
레펜하르크가 굳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처형하라!”
오크 망나니가 칼을 들고 눈알을 굴리며 묶인 죄수들에게 다가갔다. 죄수들의 표정이 더욱 사색이 되었다. 정말 죽는구나 생각하니 다들 악이 받쳐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일 거면 왜 구해 준 거냐?”
“네가 뭔데 우리를 멋대로 죽여! 이 나쁜 새끼들!”
“누가 우리를 구해 달라고 했냐? 엉? 자유롭게 해 달라고 했냐고? 그대로 살았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 아냐!”
악을 쓰는 죄수들의 외침이 처형대 위로 아우성쳤다. 레펜하르트는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오크 망나니의 대도가 칼춤을 췄다.
휘이익!
“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잘린 머리 하나가 바구니에 풀썩 떨어졌다. 남은 오크 강간범들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증오, 오직 증오만이 담긴 눈빛이었다.
“저주받아라! 더러운 인간!”
단말마의 외침을 터트리며 또 하나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오크 망나니의 솜씨는 대단했다. 세 명의 목을 치는데 조금도 힘든 기색 없이 마저 칼을 놀린다.
뎅겅!
마지막 오크 강간범의 목도 잘려 나갔다. 부릅뜬 두 눈에 공포와 증오가 가득했다. 광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적막을 깨고, 카를이 선언했다.
“이상, 처형식을 마친다!”
3
왕궁 가이라크의 서쪽 탑.
이니야는 왕실 감옥이 위치된 그 탑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감옥답게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음습한 곳이지만, 그녀는 딱히 지내는 데 불편함을 못 느끼고 있었다.
애당초 빙산 위에서도 잘만 드러누워 자던 이니야다. 북해는 특히나 햇볕이 부족하니, 어두운 감옥이라지만 그리 일조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간수들도 그녀에겐 지극히 정중하게 대했다. 그녀가 왜 이곳에 들어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설사 죄수를 막 다루는 성질 더러운 간수라도 감히 이니야를 해코지하진 못했다.
지금 이니야는 그냥 비무장 상태로, 평범한 돌 감옥 안에 갇혀 있었다. 오러 유저의 힘이라면 맨손으로도 간단히 벽을 허물거나 창살을 휘고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수틀리면 당장이라도 간수 목 서너 개쯤은 쉽게 딸 수 있는 죄수에게 누가 감히 함부로 대하겠는가?
정말 오러 유저를 감금하려면 최소 감옥 주위에 삼중의 결계 마법진을 치고, 죄수의 목에도 오러에 반응해 바로 독침을 꽂는 마법의 형틀 정도는 채워야 한다. 현재 이니야의 처우는 이 감금 생활이 어디까지나 형식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제약 없는 감옥 생활을 하는 이니야는 지금, 얌전히 쪼그려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아, 이거 어렵네.”
아무리 편한 감옥 생활이라지만 감옥은 감옥. 문제가 있긴 있었다.
너무너무 심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티리아 일족으로부터 수놓는 도구 받아서 깨작깨작 시간을 때우는 이니야였다.
원래 엘프는 전통적으로 직조에 강하다. 특히 엘프들의 자수는 인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하기로 유명한데, 이는 엘프 특유의 긴 수명과도 연관이 있었다.
자고로 시간 때우는 데는 자수가 제일인 것이다! 군대에서도 고참 병사들은 할 일 없을 때 빈둥빈둥 자수나 하면서 시간 때우지 않는가?
워낙 오래 사는 양반들이고 또 천성적으로 격한 성품이 아니다 보니 엘프는 남녀 할 것 없이 자수에 익숙했다. 마찬가지로 오래 사는 드워프들이 건물에 쓸데없을 정도로 장식을 붙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랄까?
하여튼, 엘프 여인이라면 아름다운 수를 놓을 줄 알아야 훌륭한 여성으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이니야는 무술에 너무 치중하느라 그동안 여인의 덕목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껏 굳이 저런 것에 신경 써야 할 만큼 마음에 든 남자가 없었던 것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니야는 레펜하르트를 만나기 전까지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절망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사기 칠 순 없잖아? 마침 시간도 남아도는데 이때 연습이나 해야지.’
정신을 집중하며 이니야가 연신 바느질을 했다.
너무 집중한 탓일까? 살짝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는지 바늘이 툭 부러졌다. 저래 봬도 무쇠를 담금질해 만든 바늘인데 참 쉽게도 부러져 버린다.
“앗! 또 부러졌어! 웬 바늘이 이렇게 약한 거야? 드워프한테 부탁해서 미스릴로 만들어 달라고 해 볼까?”
구시렁대며 이니야가 바늘을 옆으로 휙 던졌다. 옆에는 부러진 바늘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바늘 산을 보며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오러는 밀리미터 단위로도 운용할 수 있는데 바느질은 왜 이리 힘든 걸까? 앞으로는 수놓는 여인들은 모두 존경해야지.”
새 바늘을 꺼내 들고 이니야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듣자하니 시리스는 요리면 요리, 가사면 가사, 바느질이면 바느질 할 것 없이 모두 능통하다 했다. 거기에 질 수는 없다!
“흠흐흠…….”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이니야는 계속 들고 있는 천에 수를 놓았다.
처음엔 장갑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사는 장갑 따위 안 끼고 살았다.
그래서 목도리로 바꿀까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레펜하르트가 추위 타는 건 본 적 없는 것 같았다.
언제나 웃통 까고 반쯤 벗고 다니는 양반이다. 물론 이니야 보기에 매우 좋긴 했지만, 막상 선물을 하려니 옷을 고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뭐, 일상적으로 입고 다니는 게 있어야지?
물론 국왕답게 예를 차릴 때야 근사한 예복 입고 다니지만, 솔직히 그 정도의 고급품은 지금 그녀의 솜씨로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이니야는 결심했다.
“팬티 만들어 드려야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레펜하르트가 언제나 입고 다니는 건 팬티 정도밖에 없다.
그렇게 깨작깨작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간수 한 명이 다가와 정중히 말을 건넸다.
“이니야 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어마? 레펜하르트 님이?”
화들짝 놀라며 이니야가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는데 통로 저편에서 거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레펜하르트였다.
이니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레펜하르트 님.”
감옥을 둘러보며 레펜하르트가 한탄을 흘렸다.
“내가 미욱해 이런 꼴을 당하게 해 미안합니다.”
밝게 웃으며 이니야가 오히려 그를 달랬다.
“괜찮아요, 전혀 불편한 점 없는걸요?”
빈말이 아니고, 정말로 불편한 점이 없었다.
렐하드가 특별히 넣어 준 침상은 물론 감옥답게 겉으론 수수하지만, 매트리스며 이불의 재질이 엘븐 실크로 만들어 안락하고 따듯한 물건이었다. 바닥에는 사죄의 의미라며 하다툼이 특별히 보낸 가죽 카페트가 깔려 있어 돌바닥의 온기를 확실하게 차단하고 있다. 식사도 카를이 특별히 챙겨 왕실 요리사가 직접 조리한 것이 제공되었다.
운신의 자유가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냥 휴양 생활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심심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것도 이제는 해결했고!’
진심으로 한 답변이니 당연히 상대에게도 전해진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고마운 말씀이군요, 이니야.”
창살을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안에 갇혀 사는 이니야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전해 주는 것이다.
그러던 중, 오늘 있었던 처형식 이야기가 나왔다.
“그 오크들은 오늘 오후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런 것치곤, 별로 표정이 밝지 않으신 건 같네요?”
다정한 그녀의 목소리에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
“과연 잘한 짓인지 의문이 듭니다.”
중범죄를 엄히 다스리는 것은 좋다. 하지만 사형은 한번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는 제도였다. 지금이야 범죄 사실이 명확히 하니 별문제가 없지만, 만약 앞으로 계속 이 제도를 유지하며 만약 억울한 이가 생겨나면 어떻게 되는가?
레펜하르트의 말에 이니야가 어리둥절해했다. 그의 말은 인간뿐 아니라 이종족에게조차 너무 생소한 감각이었다.
세상은 어차피 억울한 법이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최대한 법에 여유를 둬 버리면 그만큼 범죄자가 늘어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억울한 자가 생긴다 해도 무시하고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현 시대의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말도 일리는 있지요. 만약 내가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비록 노예로 살지언정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범죄를 저지를 일도 없었겠지요.”
말하다 말고 문득 레펜하르트는 실소를 흘렸다. 원래 이렇게까지 깊은 속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다.
“아니, 신경 쓰지 마세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 버렸군요.”
이니야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녀 역시 일족을 이끄는 자, 사람 위에 선다는 것이 어떤 것이 아는 여인이었다. 비록 규모는 다를지언정 레펜하르트의 고민이 이해가 갔다.
“올바른 말씀이긴 한데…….”
눈의 여왕이 되어,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옳은 말씀은 아니네요.”
어리둥절해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올바름과 옳음, 그릇됨과 틀림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같지 않지요. 레펜하르트 님은 분명 좋은 분이시지만, 세상일은 좋은 의도로도 얼마든지 추악한 결과를 낳더군요.”
레펜하르트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의도로 낳은 추악한 결과? 그런 거라면 레펜하르트를 따라갈 이는 고금을 통틀어 몇 없을 것이다. 마왕으로 군림하던 그 때문에 죽어 간 이가 몇십만 명이던가?
“순서를 지키세요, 레펜하르트 님.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사람을 다스리는 일은 마법 같지 않습니다. 정령과 달리 사람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지요. 마법도 그렇겠지요? 잘은 모르지만 술식을 짜고 마력을 흘리면 언제나 같은 결과가 나오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마법과 다르지요.”
“그렇긴 하지요…….”
이니야가 눈웃음을 쳤다.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격려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 올바른 일은 아닐지 몰라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레펜하르트 님은 잘하고 계신 거예요.”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잠시 실소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감옥에 있는 그녀를 위로하러 왔다가 도리어 위로를 받다니?
레펜하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할 일이 많으니 언제고 이니야와 수다만 떨고 있을 순 없다.
“조금만 더 참아 줘요, 이니야. 곧 나가게 될 테니.”
“어마? 전 좀 더 여기 있어도 되는데요?”
마음의 짐을 덜어 주는 그녀의 대답에 레펜하르트는 포근함을 느꼈다.
뭐, 이니야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 진심이었지만. 아직 익혀야 할 자수가 많아서 솔직히 ‘일주일쯤 더 있다 나갈까?’란 생각도 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이니야. 훨씬 기분이 나아졌군요.”
이니야의 눈빛이 빛났다.
‘오잉?’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대단히 부드럽다? 예전과 달리 애정도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내가 뭘 했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이니야는 슬쩍 수놓던 천을 꺼냈다. 기회가 왔으니 이때 선물 건넬 생각이었다.
“아, 그리고 이거…… 부끄러운 솜씨지만…….”
아리따운 미녀가 몸을 꼬며 부끄러운 듯 팬티(!)를 내민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하는 짓과 선물이 매치가 안 되잖아! 아니,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거랑은 좀 다르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당혹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