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안타레스 공국
1
레펜하르트가 대수림 플룬탄에서 돌아온 지 석 달 후.
크로방스 왕도 크로틴의 성스러운 홀, 브라스티나에서 거창한 행사가 열리는 중이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홀 안 가득 맑은 빛을 뿌린다. 도열해 있는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 앞에서 금발 녹안의 소년이 황금의 왕관을 쓰고 당당히 섰다.
크로방스의 국왕, 유벨 2세가 왕가의 인장을 내밀며 엄숙히 선언했다.
“이로써 왕국 내의 모든 엘프와 드워프, 오크, 트롤은 모두 크로방스 왕국의 진정한 국민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귀족과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
“진정한 왕의 명을 받드옵니다! 유벨 폐하, 만세!”
환호하는 신하들을 유벨은 차분히 둘러보았다. 저들 중엔 진심으로 이 정책을 찬동하는 이도 있었고, 마지못해 따르는 척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이종족 해방 정책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이다.
유벨이 힐끔 왕좌 옆에 서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연인, 피니아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해냈어, 피니아.’
유벨의 아버지, 전 국왕 고트린 1세는 원래부터 드워프에 대한 해방 정책을 준비 중이었다. 고트린 1세가 급사하는 바람에 크로방스 내전이 일어나 그 정책도 물거품이 되나 했지만, 유벨은 왕위에 앉자마자 다시 정책을 재개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
드워프뿐 아니라 모든 이종족으로 정책의 영역을 넓히고, 정책을 찬동하는 귀족들을 끌어모으고 반대파를 숙청하며, 유벨은 몇 년에 걸쳐 차근차근 터전을 닦아 왔다. 그리고 결국 꿈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유벨 2세가 손을 들었다. 환호가 수그러졌다.
유벨이 엄숙하게 외쳤다.
“안타레스 백작은 앞으로 나오라.”
화려한 예복을 입은 거구의 사내가 걸어 나와 무릎 꿇었다. 그를 향해 유벨이 다시 한 번 왕가의 인장을 내밀었다.
“이 정책을 시행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그대를 치하하노라! 이로써 크로방스 왕국은 번영의 길을 닦게 되었으니, 그 공이 실로 적지 않도다!”
“모두가 폐하의 은덕 때문이옵니다.”
안타레스 백작, 레펜하르트가 겸양을 표했다. 하지만 여기 모인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없었더라면 아무리 유벨 2세가 노력했다 한들 이종족 해방 정책이 시행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걸.
강력한 무력과 재력이 뒷받침된 안타레스 백국은 그 이름 높은 검성 바나텔과 다른 오러 유저의 협공조차 물리치며 그 위세를 대륙 전역에 떨쳤다. 심지어 권황 제라드마저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으니, 이제 안타레스 백국은 당당히 다른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었다. 분명 형식상으로는 크로방스의 속국인데도 오히려 크로방스 왕국보다도 더 강해진 것이다.
보통 자신의 신하가 이렇게 강해지면 국왕 된 입장에서 경계하는 법이다. 한 산에서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 없고, 두 제왕이 한 자리에 설 수는 없다. 실제로 유벨의 신하들 중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레펜하르트의 존재를 경계해야 한다며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벨과 레펜하르트의 관계는 그 상식조차 깨고 있었다.
애당초 유벨은 감히 레펜하르트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그는 저 거구의 사내가 얼마나 강력하고 영리하며 엄청난 세력을 지녔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형식상 자치령이라며 국토 일부를 던져 주고 신하로 삼긴 했지만, 본인 감각으로는 전혀 자기 밑이라는 인식이 없었달까? 유벨이 본 레펜하르트는 너무나 거인이라―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히 그를 상대로 권력 욕심을 낼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권력욕에서 벗어난 유벨에게 레펜하르트는, 같은 꿈을 꾸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지였다.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유벨과 시선이 마주쳤다.
‘결국 성공했군, 유벨.’
‘모두 그대의 덕이지요.’
유벨이 추진하는 이종족 해방 정책을 레펜하르트는 전력으로 도왔다. 반대파를 숙청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중도 귀족들을 설득하는 대부분의 일을 한 것이 레펜하르트였다. (뭐, 정확히는 카를이 했지만.)
왕국 최고의 권력자 둘이 사심 없이 사이좋게 손을 잡았으니 반대파가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제법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모두 눌러 버렸다.
또한 레펜하르트가 누른 것은 귀족의 반발뿐만이 아니었다. 카를의 조언을 따라 그는 속세의 세력 말고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충실히 밑작업을 해 두었다.
크로방스에서 가장 세력이 큰 것은 물론 레단티 교단이지만 세이어 교단의 위세도 만만치 않다. 정책이 알려지자 당연히 세이어 교단에서는 신을 모독하는 짓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 반발을 억누른 것이 바로 안타레스 백국의 로비를 받은 레단티와 필라넨스, 두 교단이었다.
안 그래도 세이어 교단을 누를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레단티 교단이었다. 그런데 양국의 국왕이 절호의 기회를 주었으니 이 찬스를 놓칠 이유가 없다. 대놓고 세이어 교단의 교리에 반대하는 선언을 선포했다.
-레단티의 가르침에 의하면, 여신께선 사람을 축복하시어 대지를 경작하고 그 소산을 먹으라 하셨음이로다. 짐승은 결코 대지를 경작치 않으며 그저 여신의 은총을 훔칠 뿐이니 대지의 소산을 거두는 자는 곧 사람임을 의미하는 바, 저들이 사람이라는 명확한 증명이 될 것이다!
엘프나 드워프는 물론, 유목 생활 중심인 오크나 자연 동화적 삶을 사는 트롤들도 텃밭 정도는 가꾼다. 이제껏 적용된 적은 없었지만, 레단티의 교리에 따르면 이들도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필라넨스 교단 쪽은 안타레스 대주교 실란의 주도하에 일이 진행되었다. 교단의 현자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교단 본산의 허락을 받아 실란도 세상에 선포했다.
-필라넨스의 가르침에 의하면, 짐승은 오직 육욕만으로 교미할 뿐이나 사람은 사랑으로 그 후손을 낳는다. 저들은 정신적인 교감을 통해 배우자를 얻고 그 사랑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니 이는 저들이 사람이라는 분명한 증명이다!
인식의 변화와 제도적 뒷받침, 그리고 종교적 근거가 확립된 이종족 해방 정책은 결국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순간부터 더 이상 크로방스 왕국의 이종족들은 노예가 아니었다. 당당한 자유인으로서, 일국의 국민의 권리를 얻게 되었다.
신성한 홀, 브라스티나.
그곳에서 선 유벨이 위엄 있는 태도로 레펜하르트에게 손짓했다.
“일어서시오, 안타레스 백작.”
거구의 사내가 허리를 곧게 펴고 몸을 일으켰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도 위풍당당함이 홀을 가득 메우는 듯하다.
유벨 2세가 왕가의 인장을 내밀며 선언했다.
“그의 공을 치하하며 크로방스의 이름으로 안타레스 백작에게 공작위를 내린다. 이제 그는 안타레스 공작이니 그의 영지 또한 안타레스 공국이라 칭하노라!”
☆ ☆ ☆
푸른 가을 하늘이 맑게 빛나는 안타레스 공국의 새로운 왕도.
아라난 그라드는 축제 분위기로 한창이었다. 그들의 왕, 레펜하르트가 정식으로 공작위를 받았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거리마다 맥주와 포도주가 오가고 춤과 음악이 넘쳐흐른다. 각지에서 몰려온 유랑 극단이 거리에서 공연을 펼치고 각 술집이며 식당에서는 간이 테이블까지 내놓으며 몇 배나 불어난 손님들을 맞이해 호황에 즐거워한다.
지붕 위로 꽃가루가 날리며 웅장한 퍼레이드도 이어졌다. 천을 짜서 만든 큰 모형이 대로를 지나갔다. 원숭이를 닮은 검사 노인을 후련하게 두들겨 패는 근육질 거구 노인의 모습을 담은 모형이었다.
그 웅장한 퍼레이드는 왕궁 가이라크, 레펜하르트의 개인실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퍼레이드 모형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저거…… 검성 바나텔이 보면 난리 나는 거 아닌가 몰라? 뭐, 사부는 좋아하시는 것 같았으니 상관없으려나.”
어쨌거나 레펜하르트는 흐뭇한 눈으로 축제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인간도 엘프도 드워프도 오크도 트롤도, 다섯 종족이 모두 어우러져 흥겹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예전 안타레스 제국 시절에는 없던 광경이었다.
“역시 축제를 열길 잘한 것 같군.”
마법사였던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축제 따위에 전혀 의미를 두지 못했던 것이다. 일하다 지치면 휴식을 취해야지, 왜 노는데 또 힘을 빼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사실 이번에도 쓸데없는 짓이라며 축제 열자는 카를을 만류하려고 했었다.
-내가 공왕이 된 걸 일부러 국민들에게 축하시키다니, 좀 웃기는 일 아니오?
축제 하나 진행하려면 돈도 상당히 많이 든다. 안 그래도 제라드에게 나가는 월급 때문에 재정도 좋지 않은데 쓸데없이 돈 쓸 필요 있나? 물론 그동안 이종족의 특산물이 전 대륙으로 팔려 안타레스의 재정이 상당히 풍요로워지긴 했다만…….
하지만 카를이 단호히 반대했다.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딱히 공왕님 축하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냥 놀 기회가 생기는 걸 좋아하는 겁니다만?
이런 국가적 행사가 국민들을 얼마나 단결시키는지 잘 아는 카를이다. 무릇 지배자라면 국민들에게 적당히 핑계를 대고 숨통 틔울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빵과 놀이, 이것이 국민을 다스리는 가장 어리석은 지배자의 행태라고는 하지요. 그렇다고 현명한 지배자가 빵과 놀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당연히 저것도 제공하고, 또 다른 것 역시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지요.
그래서 카를은 꽉 짜인 재정 계획 속에서도 용케 따로 축제 예산을 마련했다. 어떻게 저 예산을 다 만드는 건지 레펜하르트도 신기해할 정도였다. 행정부에서는 저 카를의 절묘한 솜씨를 두고 ‘우리 재상님은 연금술사!’라는 말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카를은 계획을 짜고 축제를 열었다. 이름 하여 ‘안타레스 건국제’였다. 생긴 지 몇 년이나 된 나라인데 이제 와서 건국이라고 하는 것도 좀 웃기지 않나 싶지만, 카를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핑계는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놀 기회가 생기는 것이라니까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왕님처럼 오직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놀 때 놀고, 쉴 때 쉬어야 다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레펜하르트 본인도 자신이 세상의 보편적인 인식에서 좀 벗어나 있다는 건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태 카를은 틀린 말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를 믿고 일을 추진했다.
“과연, 카를은 빈말 하지 않는군.”
모두가 어우러지는 저 모습은,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운 광경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다 레펜하르트가 창문에서 시선을 뗐다.
‘놀 사람은 놀게 놔두고, 난 내 할 일 해야지, 음.’
지금 레펜하르트는 평소처럼 웃통을 벗고 바지만 입은 채였다. 언제부터 이게 평소 차림이 됐는지 모르겠다. 한숨을 쉬며 자신의 금속 허리띠를 내려다보았다.
드워프의 솜씨로 가공한 이 미스릴제 허리띠는 그가 온갖 마법을 걸어 특정한 기능을 갖춘 마도구다. 바로 허리띠 옆에 붙은 작은 무한의 주머니,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방신의 유물을 활용하는 기능이었다. 주머니 입구에는 작은 사슬이 빠져나와 허리띠와 연결되어 있었다.
사방신의 유물은 가로세로 30센티미터 정도의 커다란 금속판 형태다. 그냥 들고 다니기에는 너무 휴대가 불편하다. 그래서 전생 때도 이렇게 무한의 주머니 안에 넣어 부피를 줄인 뒤 마력선으로 연결해 들고 다니는 방식을 애용했다.
단지 그때는 목에 걸고 다녔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웃통 벗고 싸우는 경우가 많으니 목에 거는 건 좀 위험하지. 공격받을 수도 있고.”
그래서 허리띠 형태로 가공한 것이다. 뭐, 현 실력으로는 그때처럼 목걸이 크기로까지 사이즈를 줄이기가 힘들다는 이유도 있긴 했다.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손을 들었다. 수인을 맺으며 차분하게 스펠 영창을 시작했다.
잠시 후, 마법이 발동됐다.
“아케인 블래스터!”
창문 너머로 무지갯빛 섬광이 뻗어 나가 아라난 그라드의 상공을 스쳐 지나갔다. 굉음이 우르릉 울렸다. 축제 중이던 시민들이 잠시 놀라 허공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다시 환호를 터트렸다.
“오오!”
“와아, 예쁘다!”
아무래도 축하용 마법이라도 터트린 줄 아는 눈치였다. 하긴, 아케인 블래스터가 알록달록 예쁘긴 하다. 레펜하르트도 이걸 아니까 대놓고 마법을 구사한 것이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8서클도 문제없고.”
그가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9서클 광역 폭렬 주문, 프로미넌스 템페스트였다. 수백 개의 불꽃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화려하게 폭발했다. 또다시 시민들이 좋아라 날뛰었다.
“이왕 마법 연습 할 거 시민들에게 서비스도 하고, 좋잖아?”
저 정도 상공에서 폭발하면 아무리 9서클 마법이라도 아무 피해도 줄 수 없다. 그저 예쁘게 불꽃만 사방으로 튈 뿐.
레펜하르트가 손을 거두었다. 9서클 마법도 이제 큰 문제없이 구사가 가능했다. 절로 가슴이 뿌듯했다.
“7서클에서 빌빌댄 게 엊그제 같은데 바로 9서클까지 되찾아 버렸네.”
어차피 몰라서 못 쓰던 마법이 아니었다. 그놈의 마력이 모자라 여태껏 고생한 게 아니던가?
비록 예전보다 연산 속도가 조금 느리긴 하지만, 이 테스론 헤드도 충분히 발달될 대로 발달되었다. 마력만 받쳐 주면 단숨에 9서클 마스터의 경지에 드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뭐, 여기까지야 당연한 거고. 문제는 이다음이지.’
침착하게 레펜하르트가 정신을 집중했다. 양손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주문을 외운다. 그의 허리띠를 통해 사방신의 유물이 마력을 공급한다.
현재 그의 마력 허용량을 압도적으로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가상의 구상 공간을 마련하고 마치 레펜하르트의 마력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동된다.
이것이 사방신의 유물이 지닌 최고의 강점이다. 그릇이 작은 현재의 레펜하르트에게 억지로 마력을 부어 넣어 봤자 넘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사방신의 유물은 마력을 부어 넣는 대신 또 다른 가상의 그릇을 만들기 때문에 허용된 마력 이상의 마법도 구사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외부의 마력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레펜하르트가 10서클의 권능을 발동했다.
“대이적 마법, 인피니티 게이트.”
어둠의 공간이 눈앞에 활짝 열렸다. 그렇게 잠시 아공간을 유지하다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10서클 마법을 발동했다.
“대이적 마법, 인피니티 게이트.”
그렇게 초월역장을 세 번 연달아 펼치고 나니 더 이상 사방신의 유물이 마력을 허락하지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입맛을 다셨다.
“쩝, 벌써 석 달째 동조동기화 중인데 참 말 안 듣네, 이거.”
사방신의 유물이 담은 마력은 그야말로 무한대에 가까웠다. 아무리 퍼내 써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레펜하르트도 대체, 고대에 무슨 이유로 이런 무지막지한 아티팩트를 만들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무한의 마력을 레펜하르트가 전부 꺼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동조화, 동기화가 끝난 영역까지만 마력을 허락하는 것이다.
전생에서 레펜하르트가 사방신의 유물을 소화한 영역은 고작 5퍼센트 정도, 그것만으로도 그는 본신 마력의 두 배 가까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전생의 그는 고유 마력만으로도 대륙 2위의 마법사, 9서클 마스터였던 빛의 마도사 제이드의 두 배에 달했었다. 게다가 10서클 대이적 마법, 마나 리플레인으로 90퍼센트의 사용 마나를 되돌려 받았으니 효율로 따지면 거의 제이드의 마흔 배에 달하는 마력을 지녔다 하겠다.
괜히 레펜하르트가 고금 최악의 마왕으로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다. 대륙 2위부터 100위까지의 모든 마법사의 마력을 합친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으니, 과연 마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권능이다.
당시에도 사천왕이며 이종족들 탈출시키느라 10서클 마법 펑펑 쓴 후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상대가 대륙 최강의 5인이더라도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땐 참 좋았는데.”
반면 현재의 레펜하르트가 동기화시킨 영역은 고작 0.5퍼센트에 불과했다. 물론 이 정도로도 현재 고유 마력의 백 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깨달음과 경지를 통해 억지로 서클을 올리긴 했지만, 지금 그는 누가 뭐래도 7서클 수준의 마법사다. 고유 마력도 딱 그 수준일 수밖에 없다.
허리띠를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가 툴툴거렸다.
“이 마력 수준으로는…… 인피니티 게이트 세 번 쓰면 고갈이구먼. 사방신의 유물 동조동기화 영역에 마력 도로 찰 때까지 일주일은 걸리고.”
그나마 인피니티 게이트가 10서클치고는 마력 소모량이 적은 편이라 세 번이나 쓸 수 있는 것이다. 어지간한 10서클 마법은 한 번 쓰면 그냥 끝일 것 같다.
“마나 리플레인은 고유 마력만으로 발동하는 거라 아예 시전이 불가능하고…… 이걸로 뉴클리어 버스트나 헬 오브 더 월드는 턱도 없고…… 고유 마력까지 총동원해서 바닥까지 긁으면 그럭저럭 미티어 폴까지는 가능하려나?”
사방신의 유물을 얻고 금방 과거의 힘을 되찾을 줄 알았는데, 역시 세상살이 만만치가 않다.
그는 예전 자신을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었다.
-나는 10서클의 종사자, 레펜하르트다!
그런데 지금은 소개문을 이렇게 바꿔야 할 판이었다.
-나는 주 1회 10서클 대마법사, 레펜하르트다! 아, 경우에 따라서 주 3회까진 될 수도 있다!
상당히 구차한 소개문이 되어 버린다. 레펜하르트는 입맛을 다셨다.
‘뭔가 좀 더 연구하면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아, 그때 연구 좀 더 할걸!’
전생 때는 딱히 마력에 아쉬운 적이 없어 사방신의 유물을 연구하다 말았다. 한 5퍼센트쯤 동기화시키고 이쯤이면 됐다 싶어 손을 놔 버렸다. 당시엔 제국 경영이며 인류의 침략 등 워낙 바쁜 일이 많아 차분히 연구에만 몰두할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나니 새삼 아쉬움이 몰려온다.
‘뭐, 대신 육체가 엄청나게 좋아졌으니 억울할 건 없지.’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레펜하르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 그대로 테스론의 육체를 얻었으니 큰 손해는 아니다…….
“윽!”
순간 레펜하르트가 이마를 짚었다. 테스론을 떠올린 순간 또다시 두통이 밀려왔다.
‘또냐…….’
테스론을 죽인 후부터다. 그때부터 수시로 이런 통증이 엄습한다. 주로 그를 떠올릴 경우 생기는 일이다.
‘왜 이러지? 역시 내 육체를 박살 낸 것 때문에 무의식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생각해 보면 그는 자신의 육체를 자기 손으로 부숴 버렸다. 일종의 자살을 한 셈이니 역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잠시 후 두통이 사라졌다.
“으음…….”
근심 어린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는 이마를 매만졌다. 역시 두통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당장 어찌할 방도가 없다. 이미 실란이나 마켈린을 찾아가 신성치료도 받아 봤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방법도 없는 일 고민해 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래, 그놈은 죽었다. 내 육체도 죽었어. 다 끝난 일이다. 그냥 정신적 충격이 아직 남아서 그 후유증이 나타나는 걸 거야.’
실제로 테스론을 죽인 후 두통만 생긴 것만은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훨씬 머리가 맑아진 점도 있다.
레펜하르트는 잡념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허리띠를 바라보며 사방신의 유물을 새롭게 동기화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렇게 계속 새로운 방식을 궁리하던 중이었다.
“레펜하르트 님?”
방문이 열리며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아리따운 미소녀 엘프가 생글생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 시리스? 어쩐 일이야?”
2
시리스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며 주저앉은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왔다. 양손을 뒷짐 진 채 다리를 꼬며 걸어오는데, 묘하게 아양 떠는 것처럼 보였다.
“많이 바쁘세요?”
애교 어린 음성을 흘리며 시리스가 등 뒤에서 레펜하르트를 껴안았다. 새하얀 손가락이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더듬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현재 레펜하르트는 웃통을 깠다. 맨가슴이란 소리다. 벗은 것만 봐도 얼굴 붉히던 애가 대놓고 사내의 맨살을 어루만지다니?
레펜하르트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어, 응. 뭐 좀 고민 중이긴 했는데…….”
“흐응, 그렇구나.”
싱긋 웃으며 시리스가 두꺼운 레펜하르트의 목덜미에 머리를 얹는다. 예전엔 목 근육 두꺼운 거 싫다더니, 좀 태도가 이상하다. 그녀의 숨결이 레펜하르트의 귓가에 맴돌았다.
“무슨 일이니, 시리스?”
“그냥 뭐 하시나 궁금해서요. 왜요? 오면 안 되나요?”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레펜하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시리스를 힐끔거렸다. 청순한 소녀의 얼굴 위로 묘하게 요염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은 아니었다. 전생 때, 연인이었던 그녀가 둘이서 사랑을 나눌 때 짓곤 하던 바로 그 표정이다.
분명 그립고 사랑스러운 얼굴.
하지만, 지금은 너무 어색하다.
‘얘가 요새 왜 이러지?’
사방신의 유물을 찾으러 가기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그때도 왠지 모르게 수심이 느껴지긴 했지만 딱히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애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
항상 무뚝뚝하고 싸늘했던 애가, 갑자기 눈웃음을 치는가 하면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걷기도 하고, 요새는 아예 이렇게 스킨십까지 시도한다!
‘아, 물론 좋기야 좋지만.’
시리스와 이런 사이가 되는 것은 레펜하르트도 항상 꿈꿔 온 일이다. 하지만 애가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도 있는 건가?
솔직히 걱정이 돼서 슬쩍 틸라며 플로라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뭐가 걱정이세요, 공왕님? 시리스 양은 저래 봬도 아직 10대 소녀라고요.
-질풍노도 못 들어 봤어요? 질풍노도? 원래 저 나이 때는 다 그렇답니다. 갑자기 쌀쌀맞다가 또 갑자기 애교도 부리고 그래요.
-그나저나 시리스 양도 제법이네요.
-역시 이니야 씨가 나타나서 걱정이 되었겠죠? 호호호.
여인네들의 수다로 변질될 기미가 보여 잽싸게 도망치긴 했지만, 하여튼 두 사람 다 별걱정 다 한다는 말투였다.
‘원래 저 나이 때 소녀들은 다 이런가?’
전생 때는 이미 여인이 된 후 만났는지라 이 나이 때의 시리스가 뭔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별 큰일도 아닌 것 같고…….
‘그래도 마냥 좋아하기엔 좀 찜찜한데…….’
“왜 그러세요? 레펜하르트 님? 혹시 싫으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몸을 찰싹 붙인 채 시리스가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린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그녀의 가슴이 등 뒤로 느껴지고 있었다.
“으음…….”
여자 가슴 좀 느껴진다고 당황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전생 때 이미 시리스랑 갈 데까지 갔었는데 그 정도로 부끄러워 할 리가 있나? 정말 걱정이 되어서였다.
‘애가 뭘 잘못 먹었나?’
그때였다.
“레펜하르트 님!”
문이 벌컥 열리며 보랏빛 머리의 엘프 미녀가 방 안에 난입했다. 보통 난입이라는 단어는 전투 도중 뛰어들 때 주로 쓰니 일상에는 안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난입’이라는 단어가 매우 잘 어울리는 기세였다.
방 안의 두 사람을 본 이니야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미 기감으로 시리스가 방 안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저 포즈는 대체!
‘저년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어머? 이니야 씨? 어서 오세요.”
이니야가 들어왔음에도 시리스는 레펜하르트의 목을 껴안은 채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갑자기 방안의 온도가 싸늘하게 내려갔다. 바람도 없는데 이니야의 머리칼이 천천히 휘날렸다.
“호, 호호호…… 시리스 양…… 여기엔 어쩐 일로…….”
“당연히 레펜하르트 님 보러 왔죠.”
따박따박 대꾸하는 시리스였다. 이니야가 애써 음성을 가다듬었다.
“그, 그렇군요. 그런데 레펜하르트 님은 지금 바쁘시지 않았나요?”
아까부터 기감으로 레펜하르트가 마학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꾹 참고 밖에서 서성대고 있었는데!
‘왜 레펜하르트 님은 화도 안 내시는 거야?’
지극히 억울해져 이니야가 눈을 부라렸다. 시리스도 눈가를 가늘게 모으고 이니야를 노려봤다. 사이에 낀 레펜하르트만 그저 황당할 뿐이다.
‘시리스도 그렇고 이니야 양도 그렇고 왜 저러지?’
저래서야 꼭 질투하는 것 같지만 설마 그럴 리는 없고.
이니야가 자신을 마음에 두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한 레펜하르트였다. 당연히 이 상황도 이해가 가지 않을 수밖에.
어쨌거나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그는 지금 한창 사방신의 유물에 대해 궁리하던 중이었다. 한창 연구 중이다가 끊긴 셈인데, 솔직히 말하면 마저 연구나 계속하고 싶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나 연구 좀 마저 하면 안 될까?”
그러자 두 여인 모두 몸을 흠칫 떨었다.
시리스가 슬그머니 목을 감싼 팔을 풀었다. 이니야가 조신하게 손을 모으더니 도로 방을 나섰다. 시리스도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살포시 방문이 닫히고 다시 방 안에 레펜하르트만 홀로 남았다.
다시 한 번 머리를 긁으며 레펜하르트가 눈을 껌뻑였다.
“……뭐였지?”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조용해지자 다시 사방신의 유물 쪽으로 생각이 쏠린 것이다. 다시 머릿속으로 마학 이론을 조합하며 아까 하던 고민을 잇는다.
‘음, 예전에 쓰던 동기동조화는 지금 몸에는 안 맞아. 역시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그새 두 여인의 존재를 잊은 채, 마법사 레펜하르트는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 ☆
방 밖으로 나온 이니야가 시리스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흐음,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나마 예전에는 소심하게 방해만 하던 애가, 요즘 들어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구애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듣자하니 자신이 오기 전에는 저런 태도가 아니었다던데…….
‘그럼 왜 이제 와서 이래? 나 엿 먹이겠다는 거야, 뭐야?’
눈빛이 파괴력을 지닌다면 오리하르콘도 썰어 버릴 듯한 가공할 안광이 시리스의 전신을 뾰족뾰족 찔렀다. 하지만 시리스는 태연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하게 받아칠 뿐이다.
“왜 그러세요, 이니야 씨?”
겉으로는 순진한 표정을 가장하는데, 참으로 뻔뻔하기도 하지.
이니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요, 시리스 양?”
두 여인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서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래 봤자 서로 엘프다. 엘프의 정령 교감으로 어느 정도 상대의 감정을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이니야가 눈을 부라렸다.
‘이년이 이제 숟가락 꽂는 걸로 모자라 밥통째 들고 튀려고?’
시리스도 눈을 흘겼다.
‘내가 질 줄 알아?’
예전과 달리 애가 이상하게 반항적이 되었다. 이니야가 최종 비기를 시전했다. 시리스의 가슴께를 빤히 본 것이다.
흠칫하며 시리스가 몸을 떨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이니야가 생글생글 웃었다.
“아, 그냥 레펜하르트 님 같은 듬직한 남성이라면 좀 더 성숙한 여인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필살기를 날린 뒤 이니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반격이 돌아왔다.
“저런, 뭘 모르시네요? 남자들 중에는 너무 가슴 큰 것보다는 한 손에 폭 들어오는 아담한 가슴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확실히 시리스 역시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미소녀였다. 그녀의 갈색 피부 역시, 이니야와 달리 풋풋하면서도 생기발랄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역시 이니야의 연륜이 한 수 위였다.
“아, 한 손에 폭 들어가야 한다 이거죠?”
“……?”
“레펜하르트 님의 한 손에?”
“아?”
순간 시리스는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레펜하르트의 신체 사이즈를 생각 못했다. 신장 2미터가 넘고 체중이 15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다. 당연히 손아귀도 무지막지하다!
‘헉!’
이니야의 저 풍만한 가슴도 그 인간 손아귀에 들어가면 그냥 아담한 수준일 것 같았다.
“호호호!”
통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이니야는 시리스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통로를 돌아 시리스와 멀어진 뒤 도로 침울하게 주저앉았다.
‘왜 처웃고 앉았냐, 나? 어차피 쫓겨난 건 마찬가진데.’
아, 정말 남자 유혹하기 힘들다. 이니야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한편, 시리스는 계속 차가운 눈으로 이니야가 사라진 통로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요부 같던 그녀의 표정이 소녀의 그것으로 돌아오며 시리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 어머나!’
그제야 자신이 한 행위가 부끄러워진다. 양 뺨을 감싸며 시리스는 털썩 주저앉았다.
‘내, 내가 왜 그랬지?’
조금 전까지의 그녀가 마치 자신과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요즘 들어 몇 번이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계속 얼굴을 붉힌 채 시리스가 중얼거렸다.
“나…… 요새 왜 이러지…….”
☆ ☆ ☆
왕궁 가이라크 서쪽의 한 연무장.
연무장 한복판에서 거구의 근육질 노인이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문득 노인이 눈을 떴다. 황금빛 안광이 뿜어 나왔다.
“허어업!”
노인이 벌떡 일어나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찬란한 금색의 오러가 뿜어 나가 상공으로 치솟더니, 허공에서 회전해 다시 노인에게로 떨어진다.
노인이 가슴을 활짝 펴더니 모든 오러 가드를 거둔 채 맨몸으로 떨어지는 오러 기둥을 정통으로 맞았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연무장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며 연기 속에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저 폭발 속에서도 흠집 하나 생기지 않은 모습이었다. 목을 매만지며 노인이 뇌까렸다.
“으어, 시원하다.”
오러를 맞아 놓고 한다는 소리가 무슨 온천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 그때 연무장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훈련 중이십니까, 사부?”
거구의 노인, 제라드가 고개를 돌렸다. 애제자 레펜하르트가 연무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라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 따위가 무슨 훈련? 그냥 몸이 뻐근해서 푼 것뿐이다.”
“아, 물론 그러시겠죠.”
레펜하르트는 어이없어하며 방금 폭발한 연무장 바닥을 바라보았다. 카를이 비싼 돈 들여서 대 물리 처리를 한 연무장인데, 아주 파괴 흔적이 예쁘게 남아 있다.
‘저런 걸 맞고 한다는 소리가 그냥 몸 뻐근해서 푼 거라니!’
“뭘 그런 눈으로 보느냐, 제자야? 너도 하는 짓이잖아?”
“전 이렇게 무식하게 안 합니다. 그냥 연환 기격탄이나 날리고 만다고요.”
어디까지나 상식을 추구하는 레펜하르트는, 몸 풀 때 가볍게 연환 기격탄을 날려 전신을 두들기곤 했다. 이렇게 무식하게 오러를 퍼붓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남들이 보기엔 그놈이 그놈이었다. 지나가던 왕궁 시종들이 흠칫 떨더니 종종 걸음으로 재빨리 지나갔다.
“제자 탐색은 잘되십니까, 사부?”
공식적으로 안타레스 공국 호위 무장이 된 제라드는 계속 아라난 그라드에 머물고 있었다.
어차피 적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할 일이 없는 제라드다. 그래서 이종족 중 혹시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문이 될 만한 놈이 있을까 열심히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라드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체적인 수준은 그래도 인간보다 나은데…… 그래 봤자 그놈이 그놈이더라.”
애초에 엘프 쪽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라드는 일단 오크부터 훑고 지나갔다. 확실히 오크들은 그 특성상 인간에 비해 월등한 재능이 많았다. 괜히 전투 종족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꽤 기대를 했는데, 그래도 좀 모자라.”
오크 아이들 중에는 과연 뛰어난 육체를 지닌 이들이 제법 보였지만 여전히 짐 언브레이커블 기준에는 못 미쳤던 것이다.
“그, 그렇습니까?”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전투 종족이라는 오크조차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준을 통과 못하다니, 새삼 이 육체가 얼마나 무식 괴팍한 것인지 실감이 났다.
“그 칼켄이나 타시드란 아이는 그래도 좀 가능성이 보이던데…… 애들이 너무 커 버렸어. 게다가 오크는 너무 빨리 자라지 않느냐? 몸 제대로 만들기도 전에 성인이 되어 버리니 과연 될지 모르겠다.”
레펜하르트는 살짝 실망했다. 내심 제라드가 오크들 중 쓸 만한 이들을 골라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도 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전력이 될 테니 은근 기대도 했다.
‘오크 언브레이커블 군단은 역시 무린가, 쳇.’
수십 명의 오크가 스파이럴 가드를 휘감고 황금빛 오러를 쏘아 대는 장대한 광경은 역시 비현실적인 망상이었던 모양이다.
“아, 그럼 트롤은요? 트롤도 육체 능력은 오크 못지않은데?”
“그쪽?”
제라드가 고개를 저었다.
“걔들은 안 돼. 두세 대만 때려도 바로 미쳐서 날뛰더라.”
그렇다. 트롤에겐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발동하는 종족 특기, 광폭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은 생명을 경각까지 몰아붙여 완벽한 신체를 만드는 방식이다.
‘……맙소사, 난 그럼 트롤이 광폭화할 정도의 타격을 몇 년씩 맞고 살았단 말이냐?’
소름이 돋아 레펜하르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그렇다고 제라드가 트롤 줄초상 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냥 깔끔하게 한 방 먹여 기절시켰겠지. 전생의 그도 수하의 트롤이 실수로 광폭화하면 같은 수법으로 제압했었으니까.
입맛을 다시며 제라드가 구시렁댔다.
“그래서 요새는 드워프 쪽을 찾아보고 있다. 너무 조그매서 될까 모르겠다만, 뭐 작은 거야 키우면 되는 거니까.”
순간 짜리몽땅한 체구에 신장 2.5미터의 드워프가 수염을 휘날리며 호탕하게 웃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건 그거대로 무섭겠는데.’
“그런데 이쪽은 영 애들 찾기가 힘들더라.”
드워프 일족이 아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드워프 어미들이 제라드만 나타나면 기겁을 하고 애를 숨겼던 것이다.
처음에는 제라드의 드넓은 가슴에 눈 돌아갔던 드워프 여인들이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이 알려지자 다들 애 숨기기 바빴다.
안 그래도 수명이 길다 보니 손이 귀한 드워프였다. 저런 생고문에 소중한 아이를 갖다 바칠 수는 없다!
제라드의 흉명이 대체 어떻게 퍼졌는지, 요즘 아라난 그라드의 드워프들 사이에선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너! 그렇게 엄마 말 안 들으면 제라드 님이 잡아간다!’ 라는 식으로 겁도 주고 있었다.
“이 좋은 가르침을 널리 퍼트리고 싶은데 왜 이리 인재가 없는지…….”
하소연하는 사부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기운 내십쇼, 사부. 찾다 보면 언젠가는 나오겠죠.”
제라드가 눈을 뜨더니 핀잔을 던졌다.
“응? 네가 기운을 내야지, 왜 내가 내느냐? 무맥을 이을 의무는 너한테 있다? 난 의무 다 했어!”
설마 레펜하르트가 무맥을 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자신의 후계자라면 이 자랑스러운 가르침을 반드시 후세에 전할 거라는 철통같은 믿음이 있는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그건 그러네. 으음, 찾긴 찾아야 할 텐데.’
제라드가 콧방귀를 켜며 제자를 타박했다.
“아직 젊으니 안 급하지? 나도 그랬다. 늙어 봐라, 조급해질걸?”
솔직히 머릿속은 레펜하르트도 충분히 늙었다. 대충 흘려듣고 있는데 제라드가 물었다.
“아, 그런데 왜 왔느냐, 제자야?”
레펜하르트가 용건을 꺼냈다.
“사부님께 6중첩 캘러미티 혼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응? 아니 5중첩 뚫어 줬음 됐지, 뭘 또 가르쳐 달라고?”
“그냥 한 번만 보여 달라고요. 감이라도 잡게.”
8중첩은 보긴 했는데, 그건 너무 천외천이라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레펜하르트의 말에 제라드가 잠시 고민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이미 하산한 제자는 당당한 한 사람의 권사로 인정한다. 계속 가르침을 내리는 것은 과보호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옆에서 보겠다는데, 그것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 같지?’
제라드가 주먹을 쥐었다. 노끈 같은 힘줄이 팔뚝 위로 뱀처럼 불끈거렸다. 성냥을 그으면 불이 붙을 듯한 우람한 이두박근이 부풀어 올랐다. 팔뚝의 움직임에 따라 근육이 깊게 파이고, 또 도드라졌다.
“기다려라, 제자야. 금방 보여 주마.”
우우웅!
무시무시한 황금빛 오러가 폭풍처럼 피어올랐다. 레펜하르트가 기겁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실로 어마어마한 기운이었다. 제라드의 굵은 팔뚝 위로 여덟 개의 오러 파문이 선명하게 빛났다.
‘아니, 6중첩 보여 달랬더니 이 양반이 왜 갑자기 8중첩을…….’
그때 문득 떠올랐다.
‘윽! 그러고 보니 이 캘러미티 혼, 원래 조절 안 되는 거였잖아?’
애당초 캘러미티 혼은 중첩 수 골라서 날릴 수 있는 기술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도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 술식을 따로 개발하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아니 그럼 대체 사부는 어떻게 보여 주시겠다는 거지?’
꽈아아아앙!
8중첩 캘러미티 혼이 왕궁의 상공을 뚫고 장대하게 뻗어 올랐다.
축제 축하용 마법도 어느 정도지, 이건 너무 거하다. 재주 피우던 광대가 줄에서 떨어지고 퍼레이드가 일순 멈췄다. 자던 애가 경기 일으키고 웃고 떠들던 아낙들이 창백해져 왕궁 가이라크를 바라보았다.
다시 제라드가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캘러미티 혼!”
꽈아아아앙!
그렇게 제라드는 연달아 허공에 캘러미티 혼을 갈겨 댔다. 한 방, 한 방 갈겨댈 때마다 구름이 휙휙 밀려나 다섯 방쯤 되니 아예 아라난 그라드 상공에 조각구름 하나 남지 않아 버렸다.
자세를 취한 채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됐다. 하나 낮췄어.”
이번엔 7중첩 캘러미티 혼이 날아갔다. 이 무식한 양반은, 스스로 중첩 수 조절이 안 되니까 ‘에라, 그럼 오러양 다 떨어질 때까지 갈겨 대지, 뭐.’라는 단순한 생각을 해 버린 것이다!
7중첩 캘러미티 혼이 또다시 허공을 뻥뻥 꿰뚫었다.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아, 내가 뭔 짓 한 거냐?’
레펜하르트는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아라난 그라드의 시민에게 참 못 할 짓을 해 버렸다. 축제 즐겁게 즐기다 이게 웬 봉변인가?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처음에 놀랐던 시민들도 이제는 오히려 좋아하고 있었다. 황금빛 오러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색채라는 것은 어지간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런 빛이 연달아 죽죽 뻗으니 아마도 축제를 축하하는 의미일 거라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시내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오오! 공왕님께서 직접 손을 쓰시나 봐!”
“천만에! 저 색과 굵기를 보게! 저건 권황 제라드 님이라네!”
“똑같이 황금색인데 뭐가 다르오?”
“저쪽이 좀 더 순금색이야.”
금은방을 하는 중년 사내의 예리한 안목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7중첩 캘러미티 혼을 연달아 날리고 나니 어지간한 제라드라도 상당히 녹초가 되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전신의 오러양이 상당히 감소했음이 느껴진다. 제라드가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어, 이제 슬슬 되겠다. 잘 봐라, 제자야.”
제라드의 팔뚝 위로 여섯 개의 오러 파문이 떠올라 한 점으로 모였다. 그가 허공을 강하게 찔렀다.
“캘러미티 혼!”
레펜하르트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 저런 식인가!’
여섯 개의 오러 고리, 그것이 어떻게 수렴되고 어떻게 회전하며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새긴다.
잠시 후 팔을 거둔 제라드가 피곤해하며 레펜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음, 원하니까 보여 주긴 했다만…… 뭐 좀 건졌냐? 솔직히 이거 한 번 본다고 뭐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 텐데?”
“아닙니다, 사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라드는 눈을 껌뻑였다. 이놈의 제자가 사부 부려 먹은 게 미안해 빈말로 감사하나 싶었는데, 표정이 어째 진심인 것 같았다.
‘이거 봤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거지?’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쿨 가이를 지향하는 바, 여기서 사부가 제자에게 코치코치 캐묻는 것은 구차한 일이다. 그는 금세 호기심을 잊었다.
“그럼 뭐가 됐든 열심히 해 보거라, 제자야.”
손을 흔들며 제라드는 호방한 태도로 연무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한 번 그의 등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부!”
제라드의 의문처럼, 그저 한번 시전하는 걸 보았다고 바로 뭔가를 얻을 만큼 캘러미티 혼은 만만한 기술이 아니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도 무술적인 면에선 딱히 얻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마법이라는 측면에선 달랐다.
‘과연, 예상대로군.’
제대로 된 오러 고리의 운용 방식을 몰라 이제까지는 그냥 마법으로 한 점에 수렴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젠 제대로 된 6중첩 캘러미티 혼을 보았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파괴의 힘을 낳는지도 확실히 알아냈다.
허리춤에 찬 사방신의 유물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권마합신으로 6중첩 캘러미티 혼을 구현할 수 있겠어!’
3
안타레스 건국제는 닷새 동안 진행되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온갖 행사가 공짜로 벌어져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축제의 행복은 공평하게 돌아갔다. 관청에서 무료로 빵과 피복류를 나누어 주고, 각 신전에서도 문을 활짝 열고 자선과 봉사에 나섰다.
마켈린이 이끄는 알 포트 교단이 정식으로 신전을 열었고 원래부터 이 지역에서 강세였던 레단티 교단, 그리고 새롭게 신흥 세력으로 떠오른 필라넨스 교단도 질세라 영업(?)을 뛰고 있었다.
분홍빛으로 예쁘게 단장한 필라넨스 신전, 그 앞 광장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다. 인간뿐 아니라 각 이종족들도 많아 구성원이 다양했다. 자고로 이성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은 종족 공통인 것이다.
그 앞에 아름다운 미모의 신관 한 명이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성광을 뿜어 대고 있었다. 안타레스 교구의 대주교, 실란 필 마르시스였다.
“필라넨스시여, 이들에게 당신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그동안의 고련이 헛되지 않아 실란은 이제 늘씬한 키에 백옥 같은 피부, 차분한 눈매에 성숙한 미모를 뽐내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묘사에 주목하라. 분명 단어는 ‘청년’이지만 설명은 어째 ‘미녀’쪽에 가깝다.
실란의 핑크빛 성광이 수많은 인파 위로 뿌려졌다. 여신의 축복이 그들을 감싸자 모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사랑하는 이와 이어질 수 있기를 원하는 기원이다. 덤으로 요통, 치통, 생리통 등 자잘한 병을 앓고 있는 이들도 적당히 치유가 되었다.
사람들이 감격하며 실란을 칭송했다.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고맙습니다, 실란 님.”
“오오, 성녀시여!”
실란의 칭호를 들은 다른 필라넨스 신관들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바실리 왕국에서 이적해 안타레스 교구로 온 이들이었다.
순간 찬란하던 성광에 빠직 금이 갔다.
“남자거든요!”
울상을 지으며 실란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사람들은 연신 ‘성녀 실란’을 연호할 뿐이었다. 저 아리따운 미청년을 놀려 먹고 반응을 즐기는 것도 축제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개중 좀 순진한 필라넨스 신관 몇 명은 실란을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아! 대주교씩이나 되는 높은 신분임에도 저리 민중의 사랑을 받으시다니! 과연 저 어린 나이에 대주교의 자리에 오를 만한 분이로다!’
물론 실란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 울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누가 뭐래도 여성들이 부러워할 면을 전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날씬한 허리며 잘 빠진 팔다리에 매끄러운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며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에 놀라운 미모까지. 심지어는 나이가 스물인데 수염 한 올 없다.
법복으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자신의 가는 허리를 내려다보며 실란이 인상을 썼다.
“아우, 이놈의 허리는 왜 군살도 안 붙는 거야?”
세상 인류의 절반이 치를 떨며 욕할 천인공노할 소리를 태연히도 해 대는 실란이었다.
미사를 끝내고 이제 아이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되었다. 모든 신관들이 아이들에게 사탕이며 쿠키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에겐 종족 구별이고 뭐고 없다. 그냥 마음에 들면 친구고 아니면 나쁜 놈일 뿐. 귀여운 엘프며 드워프, 인간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줄을 섰다.
오크와 트롤 아기들도 질세라 대열에 합류했다. 과자를 받고 다들 방긋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다.
“고맙습니다, 성녀님!”
“감사해요, 실란 언니!”
“잘 먹을게요, 실란 누나!”
열심히 놀림당하며 실란이 울상을 지었다.
“오빠다! 오빠라고 불러!”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래서 어른은 아이들의 거울이라 하는 것 같았다. 안 좋은 건 참 귀신같이 배운다.
개중에는 진지하게 당황하는 아이들도 있어 실란의 여린 가슴을 더더욱 찢어 놓고 있었다.
“엥? 오빠 아닌데? 언닌데? 우리 언니보다 더 예쁘게 생겼는데?”
저 말 하는 아이가 엘프 소녀라는 점이 더욱 서글펐다. 실란이 억지로 웃었다. 분명 눈은 웃고 있는데 입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실란이 팔뚝을 들어 보였다.
“무슨 소리니? 이 오빠의 근육이 보이지 않니?”
이래 봬도 예전보다 몇 배나 두꺼워진 팔뚝인데!
하지만 아이들에겐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 모양이었다.
“아닌데. 근육은 저런 건데.”
엘프 소녀가 진지하게 다른 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우락부락한 근육질 대머리 사내들이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필라넨스를 섬기는 몽크들이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실란이 엉뚱한 데 화풀이를 했다.
“저분들 좀 딴 데 보내요! 비교되잖아!”
괜히 불벼락 맞은 몽크들이 실란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아무리 나이는 어려도 실란은 그들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신관인 것이다. 참고로 필라넨스 교단에선 몽크승의 직급이 그리 높지 않다. 뭐, 하루 이틀 당하는 일도 아닌지라 다들 덤덤한 표정이었다.
“으음, 대주교께서 또 발작하셨군.”
“아니, 남자다워 보이려면 머리라도 좀 짧게 깎으시든가…….”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워 놓고 남자로 안 봐 준다고 난리 치는 이유는 또 뭐래?”
사실 실란도 몰라서 머리 기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발도 해 봤고 빡빡머리도 해 봤다. 그런데 다음 날이면 도로 장발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필라넨스 교단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유례가 없는 괴사였다. 교단의 현명한 이들이 토론도 나눠 봤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 ‘여신께서 그를 사랑하사, 그의 외모에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내려 주심이 틀림없다!’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당장 ‘신이 내려 주신 수염’을 자랑스레 쓰다듬는 마켈린이 있었으니 아주 근거 없는 소리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요샌 실란도 그냥 헤어스타일은 포기하고 근육 단련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아이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거리 저편을 바라보며 실란이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인파 사이로 두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거구의 근육질 사내가 어색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고, 백금발에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두꺼운 팔뚝에 반쯤 매달리듯 달라붙어 있다. 표정에 아양이 가득한 것이 마치 주인에게 달라붙은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아이들이 저 남녀를 보더니 아는 척을 했다.
“앗! 폐하시다!”
“시리스 님이시네?”
실란이 눈을 빛냈다.
‘오잉? 레펜 씨랑 시리스가 데이트라도 하나?’
시리스와 레펜하르트가 실란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실란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나치는 두 사람을 보며 실란이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좋아! 시리스 파이팅!’
아, 드디어 시리스가 레펜하르트의 마음을 받아들였나? 실란이 기뻐하며 진심어린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들의 사랑을 보살펴 주소서. 그래서 제발 이놈의 소문 좀 가라앉게 하소서!’
아무래도 필라넨스께서,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별로 들어주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온갖 종족의 소녀들이 다급하게 실란을 재촉했다.
“어떡해요, 실란 님?”
“저러다 시리스 님에게 폐하를 빼앗기겠어요!”
또다시 실란이 발작했다.
“애당초 그런 사이 아니거든!”
현기증이 나 실란은 이마를 짚었다. 아, 이러다가 아예 역사에 남는 거 아냐? 안타레스 공왕의 애첩으로? 주먹을 꾹 쥐고 다짐, 또 다짐했다.
‘행사 끝나면 바로 카를 씨 찾아가서 같이 운동해야겠다!’
☆ ☆ ☆
아라난 그라드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전혀 인파에 시달리지 않고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앗! 폐하시다!”
“레펜하르트 폐하!”
“시리스 님도 계시네!”
모두가 그들을 알아보고 허리를 숙이며 알아서 길을 내주었다. 레펜하르트는 그 외모 자체가 이미 이름표인 것이다. 다른 나라 왕처럼 굳이 자기 얼굴 화폐에 박지 않아도 그를 못 알아볼 국민은 없다.
일국의 왕이 호위병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본인이 곧 군대인데 무슨 호위병이 필요할까? 뒷골목의 소매치기나 깡패들도 레펜하르트가 나타난 순간 기겁하며 도망가기 바빴다.
둘은 그렇게 거리를 거닐며 즐겁게 축제를 구경했다.
거리 좌우로 엘프들이 옷가게를 열고 아리따운 옷감을 진열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차린 무기점이며 철물점, 대장간 등도 열기를 뿜고 있다. 오크 특유의 가죽 제품들을 내놓은 상회도 있었다.
오크는 그리 경제관념이 없는지라, 직원은 오크지만 점주는 인간이었다. 타오반 상회의 입김이 들어간 상회가 오크들로부터 물건을 떼 와서 파는 것이다. 간간이 푸른 피부의 트롤들이 가판대를 열고 도자기를 늘어놓은 모습도 보였다.
엘프와 드워프야 그렇다 치고, 오크와 트롤이 버젓이 대낮에 거리를 돌아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