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권 제41장 사방신의 유물 (42/84)

제41장 사방신의 유물

1

두 일행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긴장하고 있었다면 양쪽 모두 오러 유저가 있으니 기감으로 상대의 존재를 눈치챘으리라. 하지만 테스론 일행은 밥하느라 정신없었고, 레펜하르트 일행도 드디어 아는 곳이 나왔다는 기쁨 때문에 완전히 긴장을 푼 상태였다.

덕분에 전혀 예측 못 한 상황에서 두 일행이 조우하게 되었다. 너무 뜬금없다보니 순간 경계심조차도 들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 스튜에 국자를 넣은 채 필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에?”

맹한 얼굴로 실란이 중얼거렸다.

“어, 저 사람들…….”

두 일행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눈만 껌뻑껌뻑…….

뒤늦게 테스론이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레펜하르트!”

제이드며 크리스틴 등, 다른 이들도 허겁지겁 일어나 경계심을 높였다. 국자를 든 채 필레나가 당황해 테스론을 불렀다.

“테, 테스론?”

테스론이 포크를 던지고 검을 꺼냈다.

“레펜하르트!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다시 만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군, 테스론. 용케도 멀쩡하구나.”

“안타레스 백국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이상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군, 레펜하르트? 이곳에는 대체 무슨 용무지?”

“내가 할 소리다, 테스론. 왜 네놈이 여기 있나?”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싸늘한 기운이 두 일행 사이로 피어났다. 잠시 주저하다 테스론이 대답했다.

“던전 탐사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나? 당연히 쓸 만한 아티팩트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왔지. 네놈을 죽이기 위해서!”

사실은 사방신의 유물을 노리고 온 것이지만 굳이 자신의 정보를 적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는 네놈은 왜 여기 있지, 레펜하르트?”

“나 역시 던전 탐사가로서 탐사를 왔을 뿐이지.”

레펜하르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테스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뻔히 짐작이 갔다. 전생에 그는, 사방신의 유물을 찾고 나서 굳이 몰튼 모라스 던전의 위치를 기밀로 하지 않았다. 대놓고 마탑에 공표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수하들에겐 제법 정보를 흘렸다. 전생의 권왕 테스론이라면 그 정도 정보쯤은 입수했겠지.

눈을 찌푸리며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을 노려보았다.

‘의뭉스러운 놈, 보나 마나 사방신의 유물 찾으러 왔으면서!’

테스론도 긴장하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역시 마왕도 사방신의 유물을 찾으러 온 거로군.’

두 사람의 살기가 점점 짙어지자 다른 일행들도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이니야와 러스, 타시드가 검을 뽑고 티티마도 양손에 단검을 쥔다. 실란도 기도를 올릴 준비를 했다. 마켈린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 청년이 테스론이군…… 원래 레펜하르트 님의…….”

다른 이들과 달리 티티마와 마켈린은 저들을 처음 본다. 티티마가 의아해했다.

“응? 레펜하르트 님의 뭐요?”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전신의 기운을 서서히 끌어 올리며 레펜하르트가 테스론 일행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소꿉친구 필레나였다.

‘그때는 어이없게 놓쳤었지. 쯧, 늙으면 어릴 적의 소꿉친구가 그리도 반갑다더니…….’

경계를 굳히며 레펜하르트는 다른 일행도 살펴보았다. 보고 있자니 참 구면들뿐이었다. 필레나에 크리스틴, 제이드에 알렉스까지…….

‘엥? 알렉스?’

기겁하며 레펜하르트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용사 알렉스가 이곳에? 그냥 얼굴만 닮은 자인가 싶었는데, 그렇게 보기엔 너무 똑같이 생겼다. 풍기는 분위기도 거의 흡사하다!

“저놈이 어떻게…….”

당황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테스론은 속으로 웃었다. 자신도 놀랐으니 그가 안 놀랄 리가 없지. 레펜하르트의 집중력이 일순 흔들린 걸 보며 테스론이 일행 전원에게 메시지 마법을 발동했다.

‘저자가 노리는 것은 우리와 같소! 먼저 손에 넣어야 합니다!’

바로 알아듣고 필레나가 메시지를 돌려보냈다.

‘먼저 가, 테스론! 여기는 우리가 막을 테니까!’

의사가 통일되자 바로 테스론이 마법을 발동했다.

“스톰 라이트!”

눈부신 빛이 광풍을 동반하며 홀 안에 몰아쳤다. 레펜하르트 일행이 당황해 뒤로 물러서는 찰나, 테스론이 대뜸 몸을 날렸다. 홀 반대편의 위치한, 석벽으로 향하는 출구를 향해서였다.

“윽!”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뒤쫓으려 참이었다. 알렉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그 앞을 막았다.

“못 간다!”

청람색 블레이드 오러가 길게 장막을 드리우며 파괴의 힘을 떨쳤다. 바닥이 파헤쳐지며 돌가루가 튀었다. 레펜하르트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그때 러스와 타시드가 각자 푸른색과 청록색 오러를 휘두르며 알렉스에게 쇄도했다.

“어림없다!”

“은인이여! 저자를 쫓으시오!”

눈치 빠르기는 레펜하르트 일행 쪽도 만만치 않다. 러스와 타시드가 알렉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니야가 바로 북해의 숨결을 발동했다.

사아아아!

냉기의 안개가 홀 바닥을 타고 흘렀다. 안개가 저 멀리 뛰어가는 테스론을 덮치려는 찰나, 제이드가 바로 마법을 발동시켜 냉기를 억제했다.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 이니야가 대뜸 제이드에게 달려가 블레이드 오러를 날렸다. 은색의 검광이 제이드를 직격하는 순간이었다.

“블링크!”

외침과 함께 제이드의 모습이 사라지며 20미터 저편에 나타났다. 이니야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시리스 양의?’

그동안 스펠 영창을 끝낸 필레나가 일행 전체에게 광역 마법을 쏘아 댔다.

“매스 포톤 드라이버!”

수십 줄기 빛의 섬광이 머리위로 쏟아진다. 마켈린이 알 포트의 신명神名을 외치며 일행 전원에게 강력한 항마의 장벽을 씌워 주었다. 섬광이 광막에 부딪쳐 폭발했다. 메사이어를 휘두르며 크리스틴이 마켈린에게 덤벼들었다.

“죽어라! 늙은 난쟁이 놈!”

트롤 주술로 신체를 강화한 티티마가 단검을 들고 크리스틴을 가로막았다. 실란이 티티마를 향해 성호를 그으며 온갖 신성 주문을 걸어 주었다.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블레이드 오러가 연신 파문을 뿜고 마법이 난무하며 성광이 회오리쳐 홀 안을 가득 메웠다.

그 틈새로 레펜하르트는 몸을 던졌다. 어서 선수 친 테스론을 쫓아가야 했다.

석벽 쪽 출구로 몸을 던지며 그가 소리쳤다.

“뒤를 부탁한다!”

☆ ☆ ☆

석벽 안쪽은 사방 4미터 정도의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연신 바닥을 박차며 레펜하르트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복도를 주파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달리고 있는 테스론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놈! 테스론!”

고함을 터트리며 레펜하르트가 바로 마법을 던졌다. 십여 개의 끈끈한 마력의 거미줄을 생성되어 테스론의 발치로 날아갔다.

“벌써 쫓아왔나?”

달리면서 테스론이 스펠 영창을 시작했다. 정신 고양을 이루고 나니 마법 집중력도 한층 높아져 이젠 무빙 캐스팅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영창을 끝마친 테스론이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매스 디스펠!”

마력의 거미줄이 이내 해제 주문에 의해 녹아내렸다. 역시 저급한 수준의 마법이라 바로 해제가 되어 버린다. 답답해진 레펜하르트가 좀 더 고위 주문을 준비했다.

“델 라드 피레아, 솟구치는 마력의 넝쿨이여, 내 적을 감싸라! 제로 시드 인탱글!”

테스론처럼 무빙 캐스팅이 아니라 이동하는 발걸음 자체를 수인, 소매틱 삼아 캐스팅을 하는 것이었다. 굳이 따지면 족인이랄까?

달리는 테스론의 앞으로 빛이 발하며 수십 줄기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저거면 먹히겠지 싶어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을 때였다.

“코어 로드 디스펠!”

타이밍 좋게 테스론이 고위 해제 주문을 날려 촉수들을 싹 날렸다. 보나마나 다음 마법이 날아올 걸 짐작하고 미리 영창 중이었던 것이다.

“엉? 8서클?”

저자식이 어느새 8서클에 다다랐단 말인가? 이쪽은 아직 7서클의 벽도 못 넘었는데!

‘아니, 생각해 보니 당연하군. 저놈이 8서클을 돌파했으니 이곳에 올 수 있었겠지.’

역시 마력 펑펑 쌓이는 자신의 몸다웠다.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가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내 머리 가져가서 신 나게 쓰는 모양인데, 나도 네 녀석 몸 신 나게 쓰고 있거든!”

본격적으로 힘을 쓰니 점점 거리가 줄어든다. 테스론이 혀를 찼다.

“쳇, 역시 신체 능력 차이가 너무 나.”

달리는 그대로 몸을 뒤로 날리며 테스론이 블레이드 오러를 뻗었다. 싯누런 오러가 회오리의 창이 되어 날아든다. 스파이럴 가드를 응용한 테스론만의 오러 스킬, 스파이럴 블레이드였다.

“흥!”

레펜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굳이 스피드를 줄일 것도 없었다. 그냥 스파이럴 가드로 튕겨 내면 된다!

폭주하는 황소처럼 오러를 튕겨 내며 레펜하르트가 계속 접근해 왔다. 테스론이 다급하게 마법을 이었다.

“플레임 캐논 & 프리즌 빔 & 소닉 버스터!”

세 종류 마법이 동시에 발동되어 레펜하르트에게 날아들었다. 하나하나가 6서클에 해당하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조금 놀랐다.

“트리플 캐스팅인가?”

그동안 마법의 경지를 한층 높인 모양이다. 새삼 현재의 자신과 테스론의 두뇌 차이가 실감이 났다.

콰콰콰콰!

좁은 복도를 가득 메우며, 화염의 광탄과 냉기의 섬광, 사물을 박살 내는 강렬한 초음파의 일격이 일제히 쏟아진다. 스파이럴 가드로 튕길 수야 있겠지만, 저 정도라면 아무래도 속도가 늦춰질 수밖에 없다.

스파이럴 가드를 펼친 채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대응 마법을 준비했다.

“디스펠 & 인챈트 플레임!”

해제 마법과 폭염권과 동시에 준비하며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뻗었다. 해제 마법으로 화염의 광탄을 해소하며 동시에 폭염권으로 냉기의 섬광을 녹여 버린다. 소닉 버스터는 스파이럴 가드로 그냥 때워 버렸다.

위력을 분산시켜 방어하며 레펜하르트는 조금도 속력이 떨어지지 않은 채 테스론의 뒤를 바짝 쫓았다. 테스론이 기가 차 중얼거렸다.

“맙소사, 더블 캐스팅?”

비록 적이지만 새삼 감탄이 나왔다.

‘내 머리로 저게 돼? 역시 인간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한가?’

뭐, 사실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기보다는 그만큼 레펜하르트가 억지로 개조했다는 쪽이 옳겠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로 열심히 수행한 덕에 분명 레펜하르트의 두뇌는 엄청나게 발달했다. 심지어 더블 캐스팅이 될 정도로.

하도 레펜하르트가 자기 원래 머리와 비교해서 쓸모없다고 타박하는데, 사실 현재 ‘테스론 헤드’면 충분히 천재 축에 드는 것이다. 원 테스론의 두뇌에 비하면 원숭이가 인간이 된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슬픈 점은,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단련이 되어서 그나마 이 정도라는 것이지만.’

원래 테스론의 머리도 그럭저럭 일반인 수준은 되었지만 마법사가 되려면 일반인이 보기엔 천재 수준이어야 가능하다. 하물며 그 마법사들조차도 기겁한 원 레펜하르트의 두뇌는 오죽할까?

여전히 그의 영혼이 담은 지식을 소화하기엔 한참 모자란 수준인 것이다. 앞으로 몇십 년을 계속 이렇게 단련하면 결국은 어느 정도 예전의 능력을 되찾겠지만…….

‘고작 몇 년으론 역시 무리지.’

속으로 구시렁대며 레펜하르트는 열심히 테스론을 추적했다. 쉴 새 없이 이동하며 연신 오러와 마법을 서로에게 퍼부어 댄다. 두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복도 여기저기서 악마며 악령들이 출몰했다.

“크아아! 이곳은…….”

“산 자여…… 죽여 주…….”

그럴듯하게 나타나서 뭔가 그럴듯한 말을 하려 하긴 했는데, 두 사람의 스피드가 너무 빨랐다. 막 출몰해 뭘 해 보기도 전에 레펜하르트와 테스론이 휙휙 지나가버린다. 닭 쫒던 개꼴이 된 악마와 악령들이 뒤늦게 포효하며 두 사람을 쫓아갔다.

물론 쫓아가 봤자 좋은 꼴 볼 일은 없었다.

“에잉! 귀찮게! 기격포!”

뒤쫓아 오는 놈들은 레펜하르트의 기격포 맞고 펑펑 날아갔고.

“하찮은 놈들이 감히! 스파이럴 블레이드!”

앞에서 막는 놈들은 테스론의 블레이드 오러에 척척 썰려갔다.

그렇게 주위의 악령들을 날파리 취급하며 두 사람은 계속 복도를 따라 추격전을 벌였다.

“어디까지 도망칠 셈이냐, 테스론!”

“도망치다니? 어디까지나 반대쪽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린 후였다. 드디어 복도가 끝나고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새하얀 벽면으로 사방이 뒤덮인, 높이만 족히 수십 미터에 달하는 넓은 전당이었다.

틈새 여기저기서 용암이 흘러내리고 바닥 일부는 무너져 밑으로 흐르는 마그마의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 끝에 위치한 것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조형물이었다. 파이프 오르간과 테이블, 왕궁의 옥좌를 뒤섞으면 저런 형태가 아닐까 싶다.

전당에 들어서자 테스론이 눈을 빛내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레펜하르트도 속도를 늦췄다.

“흥! 더 이상 도망치는 건 관뒀나?”

“아니, 이 정도 공간이면 굳이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

테스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레펜하르트도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고 경각심을 높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험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8서클까지 돌파한 모양인데, 그래 봤자 권마합신을 터득한 그의 적수는 못 된다.

“아다만드릴 슈트라 했던가? 그것도 박살 났는데 뭐로 상대할 셈이지?”

“확실히 그 아티팩트는 더 이상 없지. 하지만!”

테스론이 갑자기 품에서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소환!”

빛이 터지며 복잡한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졌다. 이내 육중한 황금빛 덩어리가 마법진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또 아다만드릴 슈트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전장 3미터 정도의, 웅크린 마수를 조각한 듯한 괴이한 형태였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또 뭐야?’

기물도 기물이지만, 저 소환 방식이 더 흥미롭다. 공간 이동? 아니다. 멀리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 보석을 매개체로 공간을 접어 아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사물을 넣는 방식이다.

아공간을 다루다니,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극히 보기 드문 권능이다.

‘저런 기물이 또 있다니!’

그렇게 잠깐 마법사의 호기심에 정신이 팔린 사이, 테스론이 조각상에 손을 뻗었다. 아차 싶어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들었다.

“그렇게 놔둘 것 같으냐!”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 보아하니 아다만드릴 슈트와 비슷한 계통일 터였다. 그렇다면 장착하게 놔두는 것은 바보짓이다. 레펜하르트가 바로 기격탄을 날려 허공의 조각상을 후려갈겼다.

꽝!

조각상이 그대로 밀려나가 저만치 바닥을 나뒹굴었다. 텅텅 깡통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히죽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에게 덤벼들었다.

“아무리 강력한 아티팩트라도 입지 않으면 무용지물!”

폭풍처럼 치달리며 바로 펀치를 내뻗는다. 테스론이 검을 던지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오러 실드를 만들고 그 위에 강력한 마법의 역장을 드리운다!

“포스 배리어!”

황금빛 오러가 분출하며 테스론의 광막을 두들겼다. 광막이 이내 깨지며 테스론의 몸이 뒤로 날려 갔다. 레펜하르트가 후속타를 위해 재차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콰앙!

저만치 날아가 뒹굴던 조각상이 갑자기 폭염을 분출하며 날아올랐다. 제 멋대로 허공을 날더니 대뜸 레펜하르트를 향해 수십 개의 섬광을 뿜어 댔다.

“엥?”

아무런 조짐도 없이 저 혼자서 움직였다? 당황한 레펜하르트가 스파이럴 가드로 공격을 막았다. 폭발과 함께 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동안 조각상이 어느새 테스론에게 근접했다.

날려간 테스론이 차갑게 웃으며 사지를 활짝 펼쳤다.

“와라! 드래고닉 발러 아머!”

위이잉!

금속음이 울리며 조각상이 일순 산산이 분해됐다. 흩어진 조각상의 파편이 스스로 테스론의 전신으로 날아가 달라붙었다. 조각끼리 서로 연결되고 이음새를 메우며 거대한 형상으로 화했다.

충격에서 벗어난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그 자리에 테스론은 없었다.

있는 것은 전장 4미터가 넘는 거대한 금속 거체. 전신이 금빛으로 빛나는 괴수의 형태뿐.

바닥을 내디딘 네 다리에 섬뜩한 발톱이 빛을 발한다. 커다란 동체엔 황금색 껍질이 두껍게 뒤덮여 있다. 긴 목 위에 달린 것은 뱀의 머리, 하지만 양쪽으로 난 커다란 뿔은 그것이 단순한 뱀이 아님을 보여 준다.

오지의 유명한 마물, 드레이크와 같은 형상이었다. 하지만 드레이크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으니 바로 등 뒤로 돋아난 두 장의 커다란 날개였다. 박쥐 날개를 연상케 하는 두 금속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크아아아!”

전설 속의 마수, 드래곤의 형상이 레펜하르트의 눈앞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 ☆ ☆

거대한 황금의 드래곤이 된 테스론이 높은 곳에서 두 눈을 반짝였다.

“자, 레펜하르트! 이제 네놈도 끝이다!”

레펜하르트는 놀란 눈으로 테스론을 올려다보았다. 전설 속 드래곤처럼 몇 백 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저 4미터가 넘는 거체는 위압감이 있었다. 신장 2미터의 그에게조차도.

‘저건 또 어디서 구한 거야? 진짜 신기하네.’

두렵다는 듯 레펜하르트가 질문했다.

“……설마 네놈이 방금 크아아아~라고 울부짖은 건 아니겠지, 테스론? 짐승 갑옷 입었다고 머릿속도 짐승이 됐냐?”

드래곤의 이빨 사이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건 그냥 드래고닉 아머 시동 소리다! 내가 낸 소리가 아니라고!”

이를 갈며 테스론이 움직였다. 여기서 마왕의 심리전에 휘말리면 자신만 손해였다. 드래곤이 입을 벌리더니 이내 불길을 토해 냈다.

콰콰콰콰!

시뻘건 화염이 일직선으로 레펜하르트에게 날아갔다. 살짝 옆으로 뛰어 간단히 공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도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그가 핀잔을 던졌다.

“이 유치한 공격은 뭐냐?”

위력은 둘째 치고, 그냥 직선으로 불길을 내뿜을 뿐이니 피하기가 너무 쉬운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바로 드래곤의 동체에 앞차기를 꽂아 넣었다.

콰앙!

폭발이 일어나며 레펜하르트가 뒤로 튕겨 나갔다. 그 순간 테스론이 오러 가드를 펼쳐 타격 부위를 감싼 것이었다. 스파이럴 가드는 아니었는데도 간단히 레펜하르트의 킥이 막혔다.

“아다만드릴 슈트보다 더 단단하군!”

역시 같은 재질이더라도 구조상 인간 형체인 아다만드릴 슈트보다 저 짐승 형태가 더 튼튼하다. 테스론이 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죽어라! 마왕!”

앞발을 휘두르며 테스론이 레펜하르트의 좌우를 후려갈겼다. 두 팔을 들어 공격을 막자 이내 꼬리를 휘둘러 추가타를 날린다. 튼튼한 육체를 믿고 레펜하르트가 그대로 공격을 받았다. 꼬리가 가슴을 때리며 그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크윽!”

강철 같은 육체인데도 충격이 있다. 살짝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바로 몸을 날렸다. 낮은 자세로 빠르게 파고들며 긴 목을 향해 강렬한 훅을 날린다!

“제로 임팩트!”

드래곤을 관통해 내부의 테스론에게 충격을 가할 셈이었다. 하지만 아다만드릴 슈트처럼 이 드래고닉 아머도 충격 흡수 능력이 있는 모양인지, 타격이 갑옷 전체로 퍼져나가며 드래곤의 거체가 흔들렸다.

“소용없다! 마왕!”

“흠, 기본은 아다만드릴 슈트랑 비슷하군. 갑옷 상대하는 감각은 안 되나?”

냉철히 상대를 분석하며 레펜하르트가 공격을 이었다.

“타아아앗!”

연달아 좌우 훅과 스트레이트 펀치를 연계하며 폭풍처럼 돌진한다.

텅텅텅텅!

덩치에 비해 속은 꽤나 비었는지 쇳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테스론이 허둥지둥 앞발을 휘두르고 꼬리를 날리며 날갯짓을 했다. 사방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공격이 들어왔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쉽게 그 모든 공격을 계속 피하며 반격했다.

“뭐냐? 이 쓸모없는 아티팩트는?”

공격이 너무 단순하다. 이래서야 그냥 보통 골렘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도대체 왜 굳이 안에 기어들어 간 거야?

“차라리 그 아다만드릴 슈트가 더 강했다! 테스론!”

아다만드릴 슈트를 걸친 테스론은 확실히 대단했다. 왕년의 힘을 모두 되찾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짐 언브레이커블의 모든 기술을 구사하며 강렬한 위력을 보였다.

반면 이 드래곤 형태는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것이다!

겉보기엔 강해 보이고 위압적일지 모르겠는데, 그래 봤자 네 발 짐승에 날개 달아 놓은 형태다. 제일 중요한 테스론의 경험, 짐 언브레이커블의 체술은 하나도 쓸 수가 없다. 그저 아티팩트의 힘과 내구도만 믿고 억지로 휘둘러 대는데 그런 단순한 공격에 맞기엔 현재 레펜하르트의 체술 수준이 너무 높았다.

“연환 기격탄!”

꼬리치기를 피해 날아오른 레펜하르트가 드래곤의 전신에 오러를 쏘아 댔다. 공격을 채 피하지 못하고 모조리 맞은 채 드래곤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테스론이 신음을 터트렸다.

“크, 크윽!”

신체 형태가 다르니 아무리 일체화되었다 해도 스파이럴 가드를 쓸 수가 없다. 감각이 너무 다른 것이다. 밀린 테스론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비아냥을 던졌다.

“쯧쯧, 그냥 아다만드릴 슈트나 들고 오지 그랬나?”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으드득 인간이 이 가는 음향이 흘러나왔다.

‘젠장! 누군 몰라서 이러는 줄 아나? 있었으면 나도 그거 들고 왔지!’

아다만드릴 슈트를 대신해 은의 수호자가 내린 기물, 드래고닉 발러 아머.

이는 아다만드릴 슈트처럼 고대에서 연구한 장착형 골렘 중 하나였다. 기본적으론 아다만드릴 슈트와 같은 계통의 물건이다. 솔직히 테스론도 은의 시대 고대인이 왜 이 따위 장착형 골렘을 만들었는지는 이해 못 하고 있었다.

‘아니, 개한테 입힐 것도 아니고 사람 쓸 물건인데 뭐하러 사족 보행체를 만든 거야? 그 재료로 아다만드릴 슈트나 하나 더 만들지!’

여기서 일반인과 엔지니어의 감각 차이가 나온다. 일반인은 쓸 만한 물건 하나 만들면 그거나 계속 만들면 된다고 여기지만 엔지니어의 마인드는 다르다. 괜찮은 거 하나 만들면 그걸 응용해서 어떻게든 새로운 걸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고대나 지금이나 엔지니어의 사고방식은 그리 큰 변화가 없다.

어쨌거나, 아쉽게도 은의 현자는 개발자가 아닌 수탐자다. 입맛대로 적합한 무구가 척척 나오는 게 아니란 소리다. 아다만드릴 슈트는 하나뿐이라 날아간 시점에서 끝이었다. 그래서 대신 비슷한 무구인 이 드래고닉 발러 아머를 받은 것인데…….

“이런 쓸모없는 아티팩트를 믿은 거였나, 테스론?”

의기양양하게 호통을 치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테스론을 공격했다. 온갖 펀치와 킥, 오러와 마법이 화려하게 드래곤 형태의 테스론을 두들겨 댔다. 움직임이 둔하니 때리는 족족 다 맞아 준다. 참 신 나는 샌드백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워낙 단단하다 보니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갑옷에 금 정도나 갈 뿐 치명타를 가하긴 힘들다.

‘그래도 반격당할 걱정이 없으니 두드리다 보면 부서지겠지?’

레펜하르트는 느긋하게 계속 연타를 날렸다. 테스론은 여전히 드래곤 형태로 허우적대고 있었다. 기다란 주둥이 사이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이거 이렇게 하는 거였는데? 그때 한번 연습해 봤는데?”

레펜하르트는 어리둥절했다.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아까부터 계속 저런 식으로 중얼대는데 이해를 못 하겠다.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테스론이 쾌재를 외쳤다.

“아, 이거군!”

“응?”

휘이이잉!

갑자기 드래곤이 크게 날갯짓하며 광풍을 일으켰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오러가 깃든 것이라 레펜하르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싯누런 오러 바람에서 잽싸게 그가 자세를 가다듬는 동안이었다.

위이이잉!

또다시 기계음이 들렸다. 동시에 드래곤이 일어섰다!

개나 고양이가 먹이 받아먹듯이 뒷다리로 땅을 디딘 채 상체를 들어 올린 것이다. 또한 갑옷 전체가 기이하게 뒤틀리고 부품 여기저기가 변환하며 형태 전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뭉툭하던 몸체가 압축되며 가늘어진다. 앞다리가 긴 팔로 변하며 손가락이 길어져 인간의 손 형태로 변한다. 앞으로 늘어졌던 목이 척추를 따라 꼿꼿이 선다. 엉덩이 쪽이 들어가고 뒷다리가 직선으로 뻗어 전신을 받친다.

레펜하르트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변신했어?”

이미 더 이상 테스론은 드래곤의 모습이 아니었다. 인간과 드래곤을 합친 듯한, 용인의 형태가 되었다.

테스론이 소리쳤다.

“됐다! 드라칸 모드!”

신장이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용인이 되어, 테스론이 자세를 취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본자세로 그가 주먹을 내밀었다.

“스파이럴 가드!”

우우웅!

용인의 전신으로 싯누런 오러가 회오리쳤다.

“좋아! 되는군!”

테스론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껄껄 웃었다.

“후후, 잠깐 기분 좋았겠지, 레펜하르트? 하지만 장난은 여기까지다!”

레펜하르트가 허탈하게 웃었다.

“뭐냐, 그건? 애들 장난감으로 주면 참 좋아하겠군.”

하지만 그의 안색은 아까처럼 여유롭지 않았다. 테스론이 인간 형태가 되면 더 이상 안심할 수가 없다. 아다만드릴 슈트 상태처럼 본신의 힘을 모조리 쓸 수 있다!

긴장하며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잡았다. 땅을 박차며 테스론이 앞으로 나섰다.

“네놈은 그 장난감에 죽는 거다! 레펜하르트!”

오러를 가득 머금은 금속의 펀치가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타아아앗!”

레펜하르트도 기합을 터트리며 마주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펀치와 펀치가 허공에서 맞붙으며 장대한 오러 파문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2

두 줄기 섬광이 공간을 휘감았다. 금색과 진황색 오러가 연달아 충돌해 파괴의 빛을 떨쳤다. 팔뚝이 서로 얽힌 채 레펜하르트와 용인 형태의 테스론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오러를 이글거리며 레펜하르트가 외쳤다.

“에레카카 부족의 참상이 네놈 짓이었구나, 테스론!”

“에레카카? 아, 그 흉악한 트롤 놈들 이야기인가?”

분노하며 레펜하르트가 킥을 날리려 했다. 무릎을 들어 올려 상대의 시야 뒤쪽으로 올려치는 하이 킥이었다.

“평화롭게 살던 이들에게 무슨 참혹한 짓을!”

서로의 팔뚝이 얽혀 있으니 이내 테스론도 레펜하르트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흥!”

테스론이 바로 레펜하르트의 정강이를 걷어차 공격을 막았다. 일종의 스톱 킥이다. 보디블로를 날리며 그가 비아냥거렸다.

“몬스터 떼를 발견했는데 그럼 처리하지, 안 하겠나?”

황금빛 금속 장갑이 복부를 강타했다. 복근에 힘을 줘 레펜하르트가 보디 블로를 버텨 냈다. 하지만 워낙 괴력의 펀치다 보니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크윽!”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으며 레펜하르트는 애써 머리를 식혔다. 흥분해 날뛰는 것은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재차 주먹을 겨눈 채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용케도 그 부상을 수습했더군, 테스론. 교황급 성직자라도 만났나 보지?”

잠깐 멈칫하더니 테스론이 말을 돌렸다.

“흥! 네놈에게 내 사정을 말해 줄 필요는 없지!”

레펜하르트의 눈동자에 호기심의 감정이 살짝 떠올랐다.

‘흐음?’

당시 권마합신 캘러미티 혼을 맞은 테스론의 부상은 자연적으로는 완치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요양을 하더라도 전신불수가 되었을 심각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신관의 힘을 빌리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잔여 오러 때문에 바로 낫게 하진 못했겠지만 시간을 들여 차분히 치유술을 받으면 충분히 완치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째 신관이 아닌 다른 힘을 빌렸다는 뉘앙스인데?’

강력한 신관은 드물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역시 뭔가 있나? 제이드가 두 발 멀쩡한 걸 보고 의심을 하긴 했지만.’

그때 기합을 터트리며 테스론이 노도와 같은 공격을 이었다.

“죽어라, 마왕!”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금속 용인이 좌우 스트레이트를 뻗어 낸다. 싯누런 오러를 머금은 권격이 폭풍처럼 쏟아진다. 근접전이라 스파이럴 가드는 소용이 없었다. 서로 스파이럴 가드를 구사하니 발동해 봤자 바로 테스론에 의해 파해되어 버린다.

열심히 양손을 놀려 레펜하르트는 펀치를 흘렸다. 그렇게 공방을 나누며 은근슬쩍 테스론을 떠보았다.

“……제이드와 함께 왔더군?”

메탈 드라칸의 이빨 사이로 시큰둥한 대꾸가 돌아왔다.

“전생의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이 뭐가 이상한가? 네놈도 마찬가지거늘!”

확실히 레펜하르트도 예전의 동료 열심히 모으고 다녔으니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검성 사이러스는 레펜하르트가 선수 쳤고, 성녀 엘린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그나마 남아 있는 전생의 동료, 빛의 마도사 제이드를 찾을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역시 말투에서 뭔가 숨기는 기색이 느껴진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레펜하르트가 질문을 이었다.

“알렉스는 이상하지. 저놈이 왜 이 시대에 있는 거지?”

“궁금하면 스스로 알아보시지?”

어째 자신도 궁금해 하는 투의 뉘앙스는 아니다. 말인즉슨, 테스론은 왜 알렉스가 이 시대에 존재하는지 알고 있다는 소리다. 레펜하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테스론이 고함을 터트렸다.

“여기서 내 손에 살아 돌아가면 말이다!”

3미터의 용인이 연거푸 돌려차기를 날렸다. 오러가 금속질 두 다리에 휘감기며 광풍처럼 날아든다. 그 끝에는 용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달려 있다. 허리를 접어 공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는 이를 갈았다. 신장이 3미터나 되니 다리도 저쪽이 훨씬 길다. 공격 범위가 너무 차이가 났다.

간신히 공격을 피한 레펜하르트가 치 떨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이런 아티팩트를 잘도 얻어다 쓰는구나. 심지어 필레나도 굉장한 걸 들고 왔던데.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물론 테스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은의 현자의 존재는 결코 외부로 발설해서는 안 될 기밀 중의 기밀인 것이다.

“제 돈 주고 사려면 일국의 보물 창고를 탈탈 털어도 모자랄 판인데……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말하다 말고 레펜하르트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문득 두렵다는 듯 테스론을 노려보았다. 야릇한 눈빛을 보내며 그가 물었다.

“헉! 네놈 설마 내 몸 팔아서 여기저기 대 주고 저런 거 얻은 거냐? 하긴, 예전부터 내 미모가 워낙 대단해서 여기저기 탐하는 놈들이 꽤 많긴 했지, 음.”

“뭐, 뭣이 어째?”

순간 테스론의 혈압이 머리끝까지 상승했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말 몇 마디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정당한 후계자인 자신을 남색가 취급한 것이다! 이는 실로 모욕 중에서도 최악의 모욕이다!

“무슨 개소리냐! 전부 네놈을 해치우기 위해서 받은 것뿐이다! 어디까지나 동등한 거래였다고!”

발끈해 테스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레펜하르트가 빙긋 웃었다.

‘그래, 받은 거라, 이거지?’

역시 그의 가설이 들어맞은 것 같다. 말투 보니 분명 저 아티팩트들, 어디선가 받았다. 그것도 일행이 아주 세트로! 즉, 어딘가에 아티팩트 재어 놓고 사는 놈들이 분명 있단 소리다!

“아차!”

테스론도 이내 말실수를 눈치챘는지 입을 다물었다. 버벅대다가 그가 눈을 부라렸다.

“상관없다!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3미터의 용인이 아가리를 벌렸다. 이빨 사이에서 홍염이 비치더니, 이내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

가공할 불길이 섬광이 되어 직선으로 뻗어 왔다. 레펜하르트가 잽싸게 몸을 틀어 공세를 피하는 순간이었다. 테스론이 따라붙으며 펀치를 날렸다. 좌우 훅으로 시선을 끈 뒤 사각에서 뻗어 오르는 어퍼컷!

“컥!”

강렬한 어퍼컷이 레펜하르트의 턱에 작렬했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애써 정신을 차리며 레펜하르트는 허겁지겁 반격했다.

라이트 펀치 후 이어지는 좌우 미들킥 연타, 하지만 테스론은 어느새 사정권 밖으로 빠진 후였다. 역시 아티팩트의 힘을 빌린 테스론은 오러만으로는 이기기 힘든 상대였다. 캘러미티 혼 5중첩의 경지에 다다라 많이 수준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모자라다.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챈트 프리즌 & 윈드 블로우!”

두 주먹에서 냉기와 바람이 일어나 황금빛 오러와 융합하며 빛을 발했다. 드디어 오러-마법 융합 술식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의 주먹을 뻗으며 레펜하르트가 소리쳤다.

“질풍기격탄!”

오러와 풍계 마력이 융합되며 몇 배나 위력이 증폭한다. 최강의 금속, 진금 엘드릴조차도 우그러뜨릴 강력한 파괴의 힘이다. 평소 기격탄의 세 배가 넘는 황금빛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테스론에게 날아들었다.

콰콰콰콰!

테스론이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그래, 언제 쓰나 했다!”

3미터의 금속체 용인이 머리를 높이 쳐들었다. 안쪽에서 테스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동! 스펠 리플렉션!”

드래고닉 발러 아머의 황금빛 표면 위로 복잡한 문양이 떠오르며 빛을 발했다. 질풍기격탄이 적중하는 순간, 그대로 반사되며 도로 레펜하르트에게 날아갔다!

“윽?”

당황하며 레펜하르트가 팔을 휘둘렀다.

“풍혈권!”

질풍기격탄이 바람의 마력을 담은 주먹과 부딪치며 폭발했다. 굉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폭연 사이로 레펜하르트가 손목을 매만지며 인상을 썼다. 간신히 튕기긴 했지만 손목이 뻐근했다.

“……반사 계열 마법 각인인가?”

의기양양하게 테스론이 껄껄 웃었다.

“네놈의 마법은 이미 보았는데 그에 대한 대비도 안 했을까? 드래고닉 발러 아머에는 이미 대對마법 처리가 되어 있다! 6서클 이하의 모든 주문은 전부 반사되지! 네놈은 아직 7서클에 머무를 뿐이었지, 아마?”

확실히 7서클 마법까지 융합해 전투에서 쓰기엔 시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용케도 머리를 굴렸구나.”

“그때와는 다르다! 그때와는!”

통쾌하게 외치며 테스론이 재차 공격해 왔다. 레펜하르트도 다시 마법권으로 반격했다. 연달아 마법을 실어 오러와 함께 날려 보지만, 그때마다 용인의 표면에서 반사되며 돌아올 뿐이다.

잠시 뒤로 밀리던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과연, 나쁘지 않은 방식이군.”

밀리는 주제에 여유를 보이는 그의 태도에 테스론이 인상을 썼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테스론. 정말 주입식으로만 마법을 익혔군? 그 정도 경지면 이 정도쯤은 당연히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지?”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튀겼다. 1서클의 가장 하위 마법, 윈드가 테스론에게 날아갔다가 도로 반사되어 돌아왔다. 레펜하르트가 그대로 돌아온 윈드 마법을 맞았다.

휘이익!

갈색 머리칼이 잠깐 흔들렸다. 윈드는 딱히 공격 마법도 아니고, 그냥 풍계 마법에 대해 감을 잡기 위한 기초 주문이다. 위력이랄 것도 없는 산들바람인 것이다. 일반인에게도 상해를 주지 못하는데 하물며 레펜하르트의 육체엔 어림도 없다.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래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나?”

테스론이 눈을 껌뻑였다. 정말로 모르겠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몸으로 알게 해 주마!”

양손에 풍혈권과 빙결권을 머금은 채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에게 돌격했다. 테스론도 반격에 나섰다. 주먹이 오가고 금속 펀치가 레펜하르트를 강타했다.

“큭!”

오러 가드로 충격을 버티며 그가 반격에 나섰다. 테스론의 가슴을 향해 강철 같은 주먹이 뻗어 나갔다.

“윈드 & 아케인 볼트!”

콰앙!

아케인 볼트와 융합된 마법권이 그대로 적중하며 폭음을 울렸다. 갑옷 일부가 눈에 뜨일 정도로 우그러지며 극심한 충격이 온다. 테스론이 순간 신음을 흘렸다.

“크윽!”

레펜하르트의 공격이 이어졌다. 펀치와 킥을 날리며 마법을 집중해 오러에 실어 공세를 퍼붓는다. 그때마다 폭음이 울리고 갑옷 여기저기가 일그러진다. 테스론이 허겁지겁 손발을 놀렸지만 위력이 너무 세 반격도 힘들었다.

‘이, 이런 제길!’

놀랍게도 레펜하르트의 마법권이 마법 반사경의 힘을 뚫고 있었다. 그렇게 접근하며 레펜하르트가 손을 뻗어 테스론의 팔뚝을 잡았다.

체술은 테스론이 몇 수나 위, 관절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손목을 비틀며 잡힌 부위를 풀어내려 할 때였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더블 캐스팅을 영창했다.

“윈드 & 빙결권!”

산들바람이 불며 레펜하르트의 손에서 냉기가 흘러나와 잡힌 팔뚝을 얼려 버렸다. 테스론이 눈을 부릅떴다.

또다! 또 반사경이 저 빙계 마법을 반사 못했다!

관절기로 얼음을 깰 순 없으니 꼼짝 못하고 잡혀 버렸다. 레펜하르트가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아아!”

3미터나 되는 용인을 붙잡은 채 레펜하르트가 몸을 크게 휘둘렀다. 상대를 들고 회전하며 점점 더 원심력을 싣는다. 회전이 정점에 달한 순간,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을 크게 내던졌다.

“래리어트 스윙!”

테스론의 거체가 유성처럼 공동 윗벽으로 날아갔다. 그대로 벽에 꽂히며 폭발이 일어났다. 얼마나 강하게 부딪쳤는지 주위에 크레이터가 파일 정도였다.

테스론을 던진 뒤 레펜하르트가 비아냥거렸다.

“이제 뭐가 문제인지 알겠나?”

벽에 파묻힌 채 테스론이 신음을 흘렸다.

“……이런 문제가 있었나.”

왜 반사경이 힘을 쓰지 못했는지 알았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모든 마법권 공격전에 단순한 윈드 마법을 동반해 먼저 반사경에 날린 것이다. 그리고 반사경이 윈드 마법을 되돌리는 그 순간 마법권을 꽂아 넣었다.

마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레펜하르트가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주었다.

“리플렉션의 마법 반사는 원래 딜레이가 있거든? 일단 하나 튕기면 다음 마법 튕기는 데 1초는 걸려. 그럼 별로 대응이 어렵지 않지.”

물론 이 수법이 가능하려면 더블 캐스팅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그나마 이 정도까지 연산력이 좋아져서 다행이지만.’

레펜하르트는 저 딜레이를 확인하기 위해 초반에 몇 대 맞아 준 것이다. 테스론이 혀를 찼다. 드래고닉 발러 아머를 받고, 이 반사경의 존재를 확인한 뒤 이번에야말로 간단히 레펜하르트를 처리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보자마자 바로 파해법을 생각해 낼 줄이야!’

역시 마왕은 마왕이었다. 테스론이 벽에서 몸을 빼내 다시 바닥에 착지했다. 그가 차갑게 웃었다.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군…….”

테스론이 재차 살기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반사경의 힘이 없더라도 네놈이 여기서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 ☆ ☆

레펜하르트와 테스론은 치열하게 싸우며 몇 차례나 공방을 나눴다. 반사경이 쓸모없다 해도 드래고닉 발러 아머를 입은 테스론의 힘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마법까지 쓰며 융합된 파괴력을 구사해도 체술에서 밀리니 레펜하르트도 쉽게 승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팽팽한 접전 속에서 테스론이 인상을 썼다.

‘크윽, 역시 마왕처럼은 안 되나?’

아까부터 그는 레펜하르트처럼 전투 도중 마법을 쓸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도 이젠 8서클의 대마법사, 강력한 마법의 힘을 빌리면 승부를 뒤엎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타이밍을 알 수가 없었다.

비록 뛰어난 마왕의 두뇌로 경지 자체는 쑥쑥 올릴 수 있었지만, 경지와 경험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골방에서 마법 익힌 거나 다름없는 테스론은 마법사들의 전투, 마전魔戰에 대해서는 완전히 젬병이다. 대체 언제 어떻게 마법을 구사해야 적절한 위력을 보일 수 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반면 레펜하르트는 무술가로서도 많은 전투를 겪어 왔다. 이 차이는 실로 컸다.

“이번에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테스론!”

기세등등하게 레펜하르트가 연신 마법권을 퍼부었다. 그토록 강인한 장착형 골렘의 전신 여기저기가 찌그러지고 파이며 충격이 본체까지 와 닿는다.

“큭! 크윽!”

흘러나오는 테스론의 신음이 점점 횟수가 잦아졌다.

‘하지만 여기서 질 수는 없지…….’

마왕을 살려 보낼 수는 없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질 수 없다! 더 이상 인류의 미래를 가로막게 두진 않겠어!”

“또 그 헛소리냐? 여전하구나, 테스론! 그래, 네놈 말대로라면 인간은 계속 제 밥그릇 챙기기 위해서 남을 억눌러야겠군?”

갑자기 테스론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단지 그뿐이라면 나도 이토록 두려워하진 않을 터다!”

“음?”

“그대 말이 옳다 치자! 그래서 이종족들이 인간과 동등하게 공존하게 되었다 치자!”

테스론이 서늘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외려 저들이 대륙의 주도권을 쥐면 인간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는 생각은 안 해 본 건가?”

은의 현자로부터 진실의 일부를 들었다. 그들이 행하는 일에 대해 이런저런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그 행위가 과도하여 인류를 약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그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은의 현자의 존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은의 현자가 저렇게 음지에서 인류를 수호하고 이종족에 대한 인식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노예가 아닌 이종족들은 인간에게 동경의 대상이 될 요소를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다.”

엘프의 수명과 미모.

오크의 강인한 육체와 전투력.

드워프의 뛰어난 기술이며 트롤의 재생력.

“이종족들이 노예였기에, 몬스터였기에 인간은 자부심을 가지고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자부심이 깨져 버리면 인류는 하위 종족으로 굴러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저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았나, 마왕?”

지금 이종족들은 약자다. 억압받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레펜하르트는 저들의 장점만을, 저들의 딱한 사정만을 보고 있다.

하지만 테스론의 생각은 달랐다. 저들이 약자에서 벗어나, 저 가공할 종족 능력으로 만약 대륙의 패권을 주도한다면 현재의 인간들처럼 인류를 노예로 부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레펜하르트, 그대는 항상 이종족들도 인간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했지? 그럼 묻겠다. 입장이 역전되었을 때 저들이 인류를 동등한 존재로 대우할 것 같나, 아니면 노예로 부릴 것 같나? 후자 쪽이 아무래도 ‘사람’의 본성에 가깝다고 생각지 않나?”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폈다.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너는 인류를 위한다면서 정작 인류의 능력은 믿지 않는구나, 테스론. 인류는 강하다. 그 누구보다도 이 내가 그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고금 최강의 마법사로 모든 이종족을 규합하고 강대한 힘을 떨쳤던 레펜하르트다. 그러고도 결국 그는 인류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난 내 동족의 힘을 믿는다. 충분히 저들과 공존하고 소통하며 함께 문명을 키워 갈 것이다.”

웃기는 아이러니였다.

인류의 가능성을 불신하기에 테스론은 인류를 지키려 한다.

인류의 능력을 믿기에 레펜하르트는 이종족 편을 들고 있다.

“문제는 지금 같은 시대다! 이 정체가 계속되면 인류는 바보가 된다! 썩은 물에 고인 것처럼 현재에 안주할 뿐이다!”

레펜하르트의 외침에 테스론이 속으로 웃었다. 솔직히 저 부분만큼은 그도 동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그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거기에 집어 던져 강인한 존재만 살아남는 것이 인류의 발전이냐? 꼭 그렇게 해야만 인간이 발전할 수 있단 말이냐?”

기껏 잡은 패권이다. 인류의 선조들이 피 흘리며 얻은 승리, 그로 인해 얻은 현실이었다. 이 현실을 되돌리려는 것은 피 흘리며 죽어 간 선조들에 대한 모욕이다.

“인류는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

각오를 다지며 테스론이 고함을 쳤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숨통을 끊겠다! 마왕!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살의를 더욱 키우며 레펜하르트도 마주 고함쳤다.

“좋다! 더 이상 말도 안 통하는 놈이랑 실랑이할 생각 없다! 걱정 마라! 이번엔 쓸데없는 헛짓거리 안 하고 바로 죽여 줄 테니까!”

레펜하르트의 전신에서 황금빛 오러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가 테스론의 품속 깊숙이 파고들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호쾌한 어퍼컷을 날렸다.

“골디언 어퍼!”

황금빛 기둥이 솟구치며 용인 상태의 테스론이 그대로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제라드나 레펜하르트가 흥분하면 무심코 하늘 찌르곤 했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금속질 몸체 여기저기가 금이 쩍쩍 가며 테스론이 허공으로 10여 미터 이상 떠올랐다.

“으윽!”

충격 속에서 애써 스파이럴 가드로 몸을 보호하며 테스론이 무심코 상념을 흘렸다.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허공에서 갑자기 정지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날개가 달려 있지 않다면. 그리고 테스론은 날개가 없다.

하지만 드래고닉 발러 아머는 날개가 있었다.

파아앗!

황금빛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테스론이 허공에 멈췄다. 그가 멍한 음성을 흘렸다.

“어?”

갑자기 머릿속에 기이한 정보가 입력되고 있었다. 드래고닉 발러 아머의 정식 사용법을 정신파로 알려 주는 원래 기능의 일부였다.

사실은 이 아티팩트를 착용할 시 자동으로 행해지는 일인데, 이제까진 테스론의 정신력이 너무 강해 접근이 막혔었다. 그런데 방금 잠깐 집중력이 흩어지며 겨우 접근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하하…….”

그토록 애매하던 사용법이 확실하게 이해되는 걸 느끼며 테스론은 잠시 기막혀했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그 고생 안 했을 텐데!’

과연 세상 모든 일은 장단점이 함께한다더니, 정신력이 높다고 다 좋은 건 아닌 듯싶었다.

날개를 편 채 허공에 떠 있는 3미터의 드라칸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지?’

현재의 테스론은 8서클의 대마법사다. 비행 주문 플라이 정도는 익혔을 테니 허공에 떠 있는 건 별로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플라이 마법은 빠르게 비행 궤도를 바꾸기가 힘들다. 마력만 받쳐 준다면 새보다 더 빨리 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급선회나 급상승, 급하강 등의 곡예비행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 공동이 상당히 넓다곤 하지만 그래도 갇힌 공간이었다. 사방이 뚫린 하늘이면 모를까 이렇게 사방에 막힌 곳에서 플라이로 비행했다간 제 속도 못 이기고 벽에 처박힐 게 뻔했다.

‘저놈, 아무리 주입식으로 마법 익혔다지만 그런 것도 모르나?’

기막혀하며 레펜하르트가 다시 몸을 날렸다. 마법 술식, 질풍권으로 오러 스킬을 발동하며 그가 펀치를 날렸다.

“에어로 스트레이트!”

황금빛 회오리가 스크류처럼 일어 올라 테스론을 직격했다. 그 순간, 테스론이 갑자기 변형했다!

위이잉!

회오리에 휘말리며 동시에 허리가 구부러지고 아머의 파편이 다시 재조립된다. 도로 드래곤 형태가 되더니 테스론이 무서운 속도로 공동 내를 날아다녔다.

쌔애애액!

요란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날개를 활짝 편 드래곤이 수십 차례나 공동 안을 회전하며 비행했다. 레펜하르트가 연신 질풍 기격포를 쏘아 댔지만 그때마다 S자로 비행하며 모든 공격을 가뿐히 피한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플라이 마법으로는 절대 보일 수 없는 고도의 비행 능력이었다.

“받아 보아라, 레펜하르트!”

드래곤이 입을 벌리고 불을 뿜었다. 붉은 섬광이 바닥을 태우며 레펜하르트를 덮친다. 불꽃을 피해 레펜하르트가 옆으로 몸을 던지자, 드래곤의 주위에 온갖 마법진이 생성되며 재차 폭격을 가했다.

수십 개의 폭염 마법이 공동 바닥을 쉴 새 없이 두들겨댔다. 정신없이 피하고 때로는 막아 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뭐야, 저거 저런 기능도 있었나?”

테스론이 고대의 엔지니어를 불만스러워하긴 했는데, 그들이 마냥 바보라서 이런 식의 장착형 골렘을 만든 것은 아니다. 이 정도 아티팩트를 디자인할 정도 엔지니어가 바보일 리가 있나?

용인 형태일 때는 사용자의 모든 움직임을 100퍼센트 재현해야 하기 때문에 술식 여유가 없다. 하지만 사족 보행체인 드래곤 모드라면 술식이 꽤 남으니 이렇듯 외부 폭격 형태로 바꿀 수 있었다. 애초에 근접 전투용과 장거리 폭격용을 나눠 상황에 맞춰 싸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이 드래곤 모드의 장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하! 이거라면 되겠군!”

허공을 날며 테스론이 쾌재를 올렸다. 비행 자체는 그의 의지지만 균형 제어나 관성 제어는 드래고닉 발러 아머가 대신 해 주기 때문에 그는 지금 상당히 집중력에 여유가 있었다. 무빙 캐스팅이 가능할 정도로!

“뎀 라이드 플라트 파라! 만물을 사르는 불꽃이여! 내 적을 치는 억겁의 창이 되라! 플레게톤!”

8서클 섬멸 주문, 플레게톤이 작열했다. 직격당한 암석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증발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기겁하며 피했다. 치를 떨며 그가 소리쳤다.

“멀리서 날아만 다니겠다 이거냐? 그럼 캘러미티 혼으로 깔끔하게 날려 주마!”

그러자 테스론이 날개를 반 접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레펜하르트에게 날아왔다. 저대로 캘러미티 혼을 완성하게 놔둘 수는 없는 것이다.

쌔애애액!

마치 화살이나 투창처럼 드래곤이 공기를 찢고 똑바로 돌진한다. 가공할 속도지만 궤도가 너무 단순하다. 투우를 하듯 레펜하르트가 옆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걸렸구나!”

애초에 캘러미티 혼을 날리는 척한 것은 속임수일 뿐, 이대로 옆에서 후려갈기면 끝장이다!

막 레펜하르트가 데스 카운터를 날리려던 차였다. 드래곤이 땅에 곤두박질치는 그 순간 또다시 변형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사지가 재조립되며 도로 용인 형태로 변하더니 앞구르기를 하며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른 변신 속도였다.

“타앗!”

테스론이 몸을 일으키며 돌진하는 레펜하르트를 돌려 찼다. 옆구리에 킥을 얻어맞고 레펜하르트가 옆으로 날려 갔다.

“크윽!”

“익숙해지니 이 짓도 할 만하군!”

드라칸 모드로 테스론이 레펜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정신없이 얻어맞다가 레펜하르트도 마법권을 휘두르며 반격에 나섰다.

“인챈트 라이트닝! 뇌전권!”

전격이 번뜩이는 순간 테스론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 드래곤 모드로 변신해 이어지는 추격타를 피해 쌩 날아가 버린다. 거리를 띄운 뒤 또다시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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