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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제40장 녹아내린 늪molten morass (41/84)

12권

제40장 녹아내린 늪molten morass

1

대수해大樹海, 플룬탄pluntan.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이 거대한 열대 우림은 대륙을 종단하는 대하大河, 쥬란 강이 형성한 거대한 삼각주에 위치해 있었다. 할라인 왕국과 테이칸 왕국 사이에 위치해 반도 형태로 튀어나온 지형으로 그 면적만도 족히 할라인 왕국의 절반 가까이 된다. 고온 다습한 기후에 접근을 불허하는 수림과 독충, 몬스터들이 들끓어 인간들도 정글 초입에서나 간신히 터전을 꾸릴 뿐, 깊숙한 곳은 감히 들어서지 못한 곳이다.

사우나를 연상케 하는 폭염과 무더위로 가득한 열대 우림, 그 속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정글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왜에에엥! 왱왱왱!

“으아, 이놈의 벌레들!”

얼굴에 달라붙는 정체불명의 날파리를 떨쳐 내며 실란은 치를 떨었다.

그는 평소처럼 성직자 복장이 아닌, 얇은 상의에 반바지만을 입은 간편한 차림새였다. 이 무더위 속에서 전신을 덮는 법복을 입었다간 당장 탈수증으로 쓰러지는 것이다.

역시나, 팔다리를 훤히 드러낸 차림으로 러스가 옆에서 헉헉거렸다.

“아, 진짜 덥다…….”

그 역시 갑옷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 채 실란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었다. 이 열대 우림의 무더위는 그의 굳건한 기사도마저 꺾어 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흉부에 오크제 레더 아머를 걸친 것이 기사로서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러스와 함께 걷고 있던 거구의 오크, 타시드가 뻐드렁니 사이로 연신 넋 빠진 음성을 흘려 댔다.

“으, 끈적끈적해…… 기분 나빠…… 끈적끈적해…….”

타시드는 아예 반바지만 입은 채 상체를 홀랑 벗고 우람한 녹색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

페틀랜드 오지의 황야, 사막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자란 타시드는 더위에 꽤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더위는 단지 더울 뿐 아니라 습기마저 지독했다.

전신이 끈적끈적한 것이 실로 불쾌한 기분이다. 절로 치가 떨린다.

“으으, 괜히 따라온다고 했나? 아녀, 그래도 도장 찍는 것보단 낫지.”

그들 뒤에서 따르고 있는 것은 새하얀 수염의 늙은 드워프, 마켈린이었다. 두 사람과 달리 알 포트의 법복을 제대로 챙겨 입은 마켈린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후우, 더운 거야 별문제 없지만 확실히 이 곤충들은 견디기 힘들구려…….”

용광로의 열기에 익숙한 드워프들은 다른 종족보다 열에 대한 내성이 월등히 강하다. 대장장이 출신은 아니지만 마켈린 역시 드워프답게 더위나 습기에는 잘 견디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정없이 덤벼드는 이 벌레들만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옷자락을 열심히 부치며 마켈린도 득실대는 날파리 떼를 열심히 쳐 냈다.

“저리 가라, 이놈들아!”

다들 처음 겪어 보는 이 열대 우림의 환경에 치를 떨고 있었다. 특히나 추운 지방 출신인 이니야는 아예 발작 직전이었다.

“크아악! 더워!”

안 그래도 평소 차림이 꽤 야한 이니야다. 현재 그녀는 ‘입었다’라기보다는, ‘벗는 도중이다’에 가까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드러나는 민소매 상의에 배꼽조차 드러내고, 치마 역시 무릎 위로 한참 올라간 채였다.

놀라운 미모를 지닌 이니야가 저런 어마어마한 차림을 하고 있으니 일행의 남성 제군 모두 초반에는 참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러스나 실란은 물론―아무리 외모가 저 모양이라도 실란은 어엿한 스무 살 사내놈이다― 여색에 무던한 레펜하르트마저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 이야기.

이 쪄 죽을 것 같은 더위 속에서는 잘 빠진 여인의 나신도 그냥 ‘불쾌한 체온 덩어리’인 것이다. 다들 진이 빠져 이니야가 헐벗건 말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못 참겠어!”

결국 폭발한 이니야가 은빛 오러를 끌어냈다.

사아아아!

냉기를 띤 오러가 그녀의 주위를 삽시간에 에워쌌다. 벌레들이 윙윙대며 그녀를 피해 도망간다.

“앗! 이니야 씨, 또 발작했다!”

눈을 빛내며 실란이 잽싸게 이니야 곁으로 달라붙었다. 그녀의 다리 옆에 쪼그려 앉아 냉기 속에 몸을 담그고 몸을 부르르 떤다.

실란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아, 시원하다…….”

옆에서 러스가 한없이 부러운 표정으로 실란을 바라보았다.

차마 체면이 있어 얌전히 있지만, 마음 같아선 그도 이니야의 반대편 다리에 매달리고 싶었다. 타시드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으음…….”

“흠흠흠…….”

두 사람 다 슬금슬금 이니야에게 다가갔다.

실란처럼 대놓고 달라붙지는 못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몸이 그녀 근처로 향한다. 조금이라도 저 냉기의 세례에 몸을 맡기고 싶은 것이다.

당연히 이니야는 쌍심지를 켰지만.

“아! 더워요! 저리 가욧!”

왜 오라는 레펜하르트는 안 오고 엄한 사내놈들이 달라붙는가? 이니야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앞장선 거구의 근육질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짝 갈라진 등 근육을 여실히 드러내며 수풀을 짓밟고 있었다.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이니야가 손짓을 했다.

“저기, 레펜하르트 님? 안 더우세요?”

나 시원해요! 완전 시원해요! 자, 이리로 오세요~라는 의미를 가득 담은 손짓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체력 보존에 신경 쓰세요, 이니야. 앞으로도 갈 길이 멉니다.”

확실히, 워낙 더위가 가공하여 잠깐 냉기를 뿜어 봤자 이내 허공으로 사그라진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오러를 발산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무심한 그의 반응에 이니야가 손가락을 꼬았다.

‘히잉, 레펜하르트 님이 더워하시면 지칠 때까지 힘 쓸 수 있는데!’

정작 레펜하르트는 그녀의 냉기에도 그리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니야가 입술을 삐죽이며 냉기의 오러를 거뒀다.

‘치이…….’

잠깐의 천국이 끝나고 다시 폭염 지옥이 펼쳐졌다. 다들 헉헉대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레펜하르트는 다른 이들에 비해 꽤나 이 환경을 잘 견디고 있었다.

‘아, 좋다! 이 육체 최고!’

물론 그도 전신에 상당한 땀을 흘리고는 있었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단련된 육체는 이 정도 더위는 그냥 ‘적당히 따듯한 수준’으로 느끼는 것이다.

몰려드는 날벌레들도 그에겐 별문제가 없었다. 창칼도 안 들어가는 육체인데 거기다 침 꽂을 수 있는 날벌레가 있다면 아마도 그 곤충종이 세상을 제패했겠지.

‘예전 왔을 때에 비하면 천양지차구먼.’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흐뭇해했다.

예전에 여기 왔을 때는 정말 쪄 죽는 줄 알았다. 허약하기 짝이 없던 전생의 육체는 궁극 생존 주문, 서바이벌을 전신에 걸고서도 더위를 못 이겨 탈진하기 일쑤였다. 결국 시리스와 타시드가 그를 번갈아 업어 가며 간신히 밀림 지대를 통과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그때처럼 구차하게 업혀 갈 필요 없다! 남자답게 자기 발로 척척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싱글벙글하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보이는 수풀을 적당히 쳐 내니 금세 사람 지나갈 만한 길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앞에서 레펜하르트가 공성차처럼 모든 수풀을 쳐 내며 길을 뚫어 주지 않았다면 맨팔, 맨다리를 드러낸 뒷사람들 대부분이 풀에 쓸리고 베였을 것이다.

열대 우림에서는 각종 덩굴식물이 삼림의 수관부樹冠部를 덮기 때문에 바닥 부분이 어두워 풀 종류는 잘 자라지 못한다. 덕분에 길을 뚫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쨌거나, 대부분이 기진맥진한 열대의 강행군이었다. 그런데 저 앞에서 혼자 신 나서 날뛰는 이가 하나 있었다.

“이쪽이에요! 이쪽, 이쪽!”

푸른 피부의 트롤 소녀가 나무 위에서 쏙 내려와 머리를 내밀었다. 아틸카의 파구루, 티티마였다.

실란이 혀를 내둘렀다.

“……저거 아주 신이 났네.”

원래 이곳, 열대 우림 플룬탄은 트롤들의 주요 서식지였다. 지금은 대다수의 트롤 부족이 안타레스 백국으로 이주했지만 티티마의 출신 부족도 원래는 이 밀림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니 당연히 신 날 수밖에.

“백왕님! 저 앞에 개울이 하나 있어요!”

미리 앞쪽을 살펴보고 온 티티마가 손짓을 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쟤, 데려오길 잘했네.”

원래 티티마는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만약 이 열대 우림이 처음 오는 장소라면 길 안내를 위해서라도 트롤 구루 한 명쯤은 대동했겠지. 하지만 그는 이미 전생에 여기 와 본 몸이었다. 굳이 길안내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단지 실란이 온다고 하니 자신도 떨어질 수 없다며 티티마가 찰거머리처럼 매달리는 바람에 굳이 거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티티마를 대동해 보니 참으로 편했다.

노려하게 길을 찾고 먹을 만한 식수며 과일 등도 귀신같이 알아내는 데다가 쉴 수 있는 휴식지도 착착 안내한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도 죽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사실 전생에 비하면 이거 엄청나게 편하게 이동하는 편이다.

‘예전엔 진짜 힘들게 지나친 거였군. 그때도 길잡이 하나쯤 고용할 걸 그랬나?’

그러나 인간 길잡이는 결코 이렇게 깊이 들어오려 하지 않았고, 트롤과는 지금처럼 깊은 친분을 쌓기 전이었으니 당시의 레펜하르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조금만 더 가서 쉽시다.”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원숭이처럼 나무 사이를 뛰어 일행에게 돌아온 티티마가 물었다.

“백왕님, 점심도 먹을 거죠?”

“그럴 건데, 왜?”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그러자 눈을 빛내며 티티마가 실란에게 손짓했다.

“실란! 실란!”

“응? 왜?”

그녀가 방금 뛰어온 밀림 저편을 가리켰다.

“잠깐 혼자서 저쪽으로 가 봐.”

“응?”

의아해하며 실란이 졸랑졸랑 앞으로 나섰다. 티티마가 방긋 웃으며 다시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 다른 이들이 제 자리에 서서 멀뚱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일행에서 떨어진 실란이 정글을 헤치며 나아간다. 일행과 20미터 정도 떨어졌을 바로 그때였다.

사아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나무에서 떨어져 실란을 덮쳤다!

“으아악!”

놀란 실란이 비명을 질렀다. 레펜하르트며 다른 오러 유저들도 화들짝 놀랐다. 분명 기감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저런 마수가 튀어나오다니?

야생의 포식자는 보통 무리에서 낙오된 약자를 노리는 법이다. 실란이 따로 행동하자 버려졌다 판단한 것이다.

“앗! 실란!”

막 레펜하르트며 이니야가 실란을 구하려 몸을 날리려던 차였다. 실란을 머리부터 삼키려던 왕구렁이 위로 티티마가 단검을 든 채 떨어졌다.

“잘 먹겠습니다!”

외침과 함께 티티마가 뱀의 두개골을 정통으로 찔렀다. 정확히 급소를 찔렀는지 그 커다란 뱀이 일순 꿈틀대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으으.”

바짝 얼어 있던 실란이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돌렸다. 창백해진 얼굴로 실란이 버럭 호통을 쳤다.

“야! 티티마! 너 지금 사람을 미끼로 쓴 거야?”

착지하며 티티마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잘했어! 실란!”

☆ ☆ ☆

3천 종이 넘는 수목이 자라는 열대우림, 플룬탄. 이곳에는 높이가 70미터 가까이 되는 나무며 잎이 10미터에 이르는 야자류도 많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그런 큰 나무 밑에 임시 휴식처를 만들었다. 가지를 꺾어 뼈대를 세우고 거대한 잎으로 가림막을 세우니, 그럭저럭 쓸 만한 그늘이 만들어졌다.

녹초가 된 일행이 그늘을 찾아 몸을 뉘였다. 레펜하르트가 마법으로 간단한 결계를 쳐 더위와 벌레를 못 들어오게 막았다.

그동안 티티마가 신바람을 내며 왕구렁이 고기를 다듬었다.

“랄라라…….”

트롤들은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태우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그녀는 죽은 나뭇가지를 모아 토막 낸 왕구렁이 고기를 꿰어 세우고 주술적인 화염으로 익히고 있었다. 따로 연료를 때는 것이 아니니 그리 연기가 나지도 않았다.

이내 기름진 뱀 고기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흠흠…….”

“오오…….”

누워 있던 사람들이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그동안 보존육과 비스킷, 간간히 티티마가 따오는 열대 과일로 끼니를 때우던 차였다.

휴대 식량마다 레펜하르트가 장기 보존 마법을 걸어 두긴 했지만, 이 마법은 부패 속도를 늦추게 하는 것이라 결국 시간이 지나면 맛도 떨어지고 수분도 날아간다. 역시 갓 잡은 고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싱싱한 고기를 보니 절로 침이 고였다. 러스가 향을 음미하며 중얼거렸다.

“기막힌 냄새로군.”

타시드도 기대에 차 웃으며 대꾸했다.

“간만에 야들야들한 고기를 먹겠군.”

마켈린, 레펜하르트도 손을 비비며 곧 이을 만찬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니야가 연신 입맛을 다셨다.

뱀 뜯어 먹는 엘프라니, 어째 좀 이상한 느낌도 들겠지만 원래 스티리아 일족은 북해에서 바다사자며 물고기 잡아먹고 해초 뜯어 먹으며 살던 일족이다. 바다뱀도 날로 회 쳐 먹는 판에 구운 뱀 고기 정도로 비위 상할 리가 있나?

반면, 실란은 여전히 이를 갈며 티티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으, 내 다시는 네 말 믿나 봐라…….”

“왜 그래, 실란? 남자답게 굴고 싶다며?”

“난 남자답게 되고 싶은 거지, 왕구렁이 똥이 되고 싶은 게 아니거든?”

“일족의 식료를 위해 미끼가 되는 건 가장 사내다운 일인데?”

티티마는 눈을 깜빡이며 이해 못 할 표정을 지었다.

‘아니, 입만 열면 남자 취급 해 달라고 노래를 부르기에 제대로 사내 취급을 해 줬더니 왜 화를 내는 거야?’

이래서 문화 차이란 무서운 것이다.

“싫으면 실란은 먹지 마.”

“안 먹긴 왜 안 먹어?”

화는 화고, 고기는 고기다. 게다가 이 왕구렁이 잡는 데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실란, 자신이 아닌가?

“먹어도 남들보다 많이 먹어야지! 암!”

이윽고 뱀 고기가 다 익었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 펼쳐졌다. 다들 야자 잎사귀에 주저앉아 뱀 고기며 과일과 빵 등을 먹었다.

고기를 씹다 말고 문득 마켈린이 말했다.

“벌써 아라난 그라드를 떠난 지 23일째군요.”

백왕궁 가이라크에서 출발한 레펜하르트 일행은 일단 글로텐 산맥 안쪽에 위치한 클로이 포털로 향했다. 거기서 그랜드 포지를 경유, 세텔라드 사막 인근에 위치한 티다엔 포털로 공간을 넘은 뒤 할라인 왕국으로 들어가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 이들의 이동 속도라면 길어도 보름이면 족했을 여정이다.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빨리 온 셈이지 않나, 마켈린.”

예전과 달리 이제는 레펜하르트도 그렇고, 다른 이종족들도 워낙 유명인이 되어놔서 함부로 얼굴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밀수꾼이 쓰는 루트를 이용하다 보니 시간이 더 걸렸다.

티티마가 빵에 뱀 고기를 끼워 한입 물었다.

“아앙! 음, 맛있다!”

눈치를 보며 러스와 타시드도 따라 했다. 마른 빵이지만 뱀 고기의 기름기가 스며드니 한층 부드러워졌다.

말랑말랑해진 빵조각을 베어 물며 러스가 질문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잠시 계산을 해본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한 보름 정도?”

순간 일행의 안색이 바뀌었다. 아니, 이 상태로 보름을 더 가야 한단 말인가?

특히 이니야는 아주 사색이 되었다. 레펜하르트가 일행을 달랬다.

“중간에 에레카카 부족에 들를 수 있으니 좀 나을 거다. 거기서 좀 쉬고 체력을 회복한 뒤 다시 움직일 거니까.”

에레카카 부족은 아직 안타레스 백국으로 이주하지 않고 이 열대우림에 남아 있는 트롤 부족이었다. 티티마가 주술 잠자리를 날려 미리 그들의 행보를 알렸으니 지금쯤 자신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며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저 생각은 나도 미처 못 했었는데. 역시 티티마 잘 데려왔어.’

대견한 눈으로 티티마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도 식사를 이었다. 문득 마켈린이 남들 몰래 레펜하르트에게 속삭였다.

‘아, 그런데 레펜하르트 님. 그 사방신의 유물이란 걸 찾으면 전생의 힘을 완전히 되찾으실 수 있는 겁니까?’

레펜하르트가 찾으려는 고대의 아티팩트, 사방신의 유물.

그에 대해서는 이미 백국을 출발할 때 설명을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아티팩트는 일종의 마력 충전제 같은 것으로, 한 개인의 허용량을 훨씬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응집되어 있는 기물이라 했다.

다만 다른 마력 충전제와 다른 점이 있었다.

사방신의 유물은 지닌 마력의 속성이 언제나 외부와 조화를 이루었다.

다른 아티팩트라면 마나 드레인을 걸어 마력을 흡수한다 하더라도 시전자가 일단 소화시켜 자신의 마력으로 변환해야 비로소 마법을 구사할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방신의 유물은 그런 변환 과정 없이 시전자의 고유 마력 흐름에 스스로 맞추어 마나를 보태 준다.

즉, 마법사의 마나 허용량과 상관없이 외부 마력으로 존재하면서도 자신의 것처럼 그 힘을 빌려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마법사는 마력과 경지가 함께 오르니, 저 유물을 손에 넣더라도 있는 마법을 여러 번 쓸 수는 있을지언정 더 높은 경지의 마법까지 쓰게 해 주진 않는다. 하지만 현재 레펜하르트의 문제는 경지에 비해 마력이 지나치게 낮은 것이 아닌가? 사방신의 유물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왕년의 마법을 문제없이 쓸 수 있게 된다!

‘전생 때도 그걸 이용해 10서클의 경지에 오르시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기대 어린 마켈린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상황이 그때랑 많이 달라서.’

당시 10서클을 연구하던 레펜하르트는 상당히 많은 주문을 개발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고금 제일의 천재라도 결국 인간, 지닌 마력에 한계가 있었다. 개발해 놓고도 시험해 보지 못하는 주문이 태반이었다.

그때 사용한 것이 저 사방신의 유물이었다. 지닌 마력 이상의 주문도 사방신의 유물을 이용해 마력을 빌리면 충분히 구사할 수 있었다.

나중에 레펜하르트가 10서클 궁극 주문 중의 하나 ‘마나 리플레인’을 개발해 사용한 마력의 90퍼센트를 체내로 되돌리는 술식을 이용하게 된 후로는 그리 쓰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내내 많은 도움을 받았던 아티팩트였다. 최후의 싸움 때 대륙의 강자 5인을 상대하면서도 저 사방신의 유물이 있었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분명 사방신의 유물이 있으면 마력 모자라 못 쓰던 마법들도 대거 구사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육체의 마력 허용량이 너무 낮거든? 그래서 지금 수준으로 사방신의 유물에 내 마력을 각인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소.’

‘하지만 충분히 기대해 볼 만은 하겠지요?’

은근한 어조로 묻는 마켈린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씩 웃었다.

‘뭐, 시도할 가치는 충분히 있지 않겠소?’

그러던 중이었다. 여전히 삐친 얼굴로 고기를 우물거리던 실란이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레펜 씨? 그 사방신의 유물이란 거요. 그거 그 ‘사방신’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요?”

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척을 했다.

“사방신이라면, 섬김받지 않는 사방의 수호성수를 말하는 거지? 예전 신학 책에서 잠깐 본 기억이 있는데.”

“그렇죠.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실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인간이 믿는 신들로는 주신 세이어와 열두 신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륙에 열세 개의 교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의 신룡神龍, 바메트.

서의 천호天虎, 파르가.

남을 수호하는 불멸의 사타르.

북을 지배하는 얼어붙은 티아논.

세상을 가호하나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이 짐승 신들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자연 그 자체라 믿어지기에 따로 섬기는 교단이 없었다.

“신룡 바메트가 화염구를 토하면 천호 파르가가 그걸 받아 가지고 노니, 그로써 해가 떠오르고 지노라. 바메트가 눈을 감으면 밤이 오고 천호 파르가가 포효하면 새벽이 오니 이로써 낮과 밤이 이어지는도다. 신룡이 어둠의 공허를 달리니 그의 구슬이 달이 되어 밤을 밝히고, 천호의 이빨이 한없이 빛나 별이 되어 반짝이리라.”

낮과 밤의 순환을 기록한 신학의 내용이다. 실란이 말을 이었다.

“불멸의 사타르가 날갯짓하니 열기가 세상을 타고 오르며 얼어붙은 티아논이 숨을 내쉬니 냉기가 세상을 휩쓸며 내린다. 이것이 여름이 남에서 오고 겨울이 북에서 오는 까닭이라, 이들의 가호로 사계절이 순환하노라.”

마켈린이 눈을 반짝이며 실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군.”

“드워프들에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나요?”

실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마켈린은 그보다 훨씬 고위의 성직자였다. 그런데 그도 모르는 지식이 있었나?

마켈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알 포트의 가르침은 온전히 전해지지 않아 우리들 사이에서도 빠진 것이 많으니까. 다른 신의 이야기까지 귀 기울일 여력이 없었지.”

실란이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왠지 드워프의 아픈 역사를 건드린 기분이었다.

실란이 슬쩍 화제를 바꾸며 레펜하르트에게 다시 물었다.

“하여튼 그 사방신이랑 상관있는 건가요?”

“글쎄?”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긁었다.

이 사방신의 유물이라는 이름은 전생에 그가 직접 붙인 것이었다.

던전에서 발견되는 아티팩트는 저마다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성광검 메사이어 같은 경우는 아예 기물 자체에 고대어로 메사이어란 이름이 붙어 있었던 경우다. 마갑 엘드라드 역시 갑옷의 안쪽에 이름이 암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걸 발견한 이가 붙인 이름이 아니라, 원래 고대부터 그런 명칭으로 불렸던 케이스다.

반면 엘류시온의 목소리처럼 딱히 지칭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발견자가 적당히 상황에 맞춰 명명한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란 이름도 던전 엘류시온에서 발견되었고, 또 초기 연구 단계에서 자꾸 이상한 환청이 들려 레펜하르트가 직접 붙인 이름이었다.

던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구에 던전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물론 생각해 보면 입구에 붙은 이름이 그 던전을 칭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냥 당시 그 던전을 소유하고 있던 고대인의 이름이거나,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명칭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듯 사방신의 유물 역시 따로 명칭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방 수호 성수의 그림이 새겨져 있기에 그렇게 이름 붙였을 뿐. 당시에 연구해 봤지만 사방신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레펜하르트도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저 사정을 다 말하려면 전생의 이야기까지 꺼내야 할 터, 레펜하르트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무슨 상관이야? 성능만 좋으면 됐지. 자, 충분히 쉬고 배도 채웠으니 다시 출발하자고!”

먹고 쉬는 사이 벌써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밀림의 하루는 짧다. 해가 떠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이동해야 한다.

“크으, 다시 움직여야 하나.”

“할 수 없지, 뭐.”

“자, 다들 힘냅시다!”

다른 이들도 인상을 구기며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사흘 뒤, 우거진 밀림 사이로 한 무리의 거지 떼가 나타났다. 뭐, 예전엔 일국의 왕이니 위대한 신의 지상 대리자니 일족의 족장이니 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더도 덜도 말고 그냥 거지 떼였다.

자기 몸을 살펴보며 실란이 울상을 지었다.

“우우, 씻고 싶어…….”

윤기 나던 붉은 머리칼은 뭔가 다른 의미로 윤기가 돌고 있고, 뽀얗던 피부는 땡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하다. 거기에 팔다리는 진흙투성이고 옷에도 풀물이며 벌레 잡은 흔적이 가득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이니야가 하소연을 흘렸다.

“아, 시원한 물에 목욕 한 번만 해 봤으면…….”

“그러게 말입니다…….”

곁에 있던 러스가 격한 동의의 표정을 지었다. 물론 타시드는 격한 공포의 표정을 지으며 한 발 물러섰지만.

레펜하르트 일행 정도의 체력과 강인함이라면 사실 아무리 밀림이 우거진다 해도 신체적으로 문제가 생길 만큼 지치진 않는다.

명색이 오러 유저, 초인적인 힘을 지닌 이들이다. 그저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귀찮을 뿐이지 육체적으로는 딱히 문제는 없다. 이제까지 오면서 투덜거렸던 것은 사실 반쯤 엄살이었다. 평범한 탐험가였다면 아직도 밀림 초입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월적인 오러의 힘과 신의 축복도 때 타는 건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러스는 다리 밑에서 손 내밀면 한밑천 잡을 꼴로 변해 있었고 타시드는 슬슬 칼켄과 스탈라가 친아들로 여길 행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녹색 피부에 하도 진흙이 묻어 검붉어 보인다는 소리다.

이니야는 오직 여인의 근성 하나로 패시브 오러를 이용, 어떻게 새하얀 피부는 지켰지만 대신 걸친 옷은 심히 꾀죄죄했다. 마켈린의 신성한 법복도 이미 걸레가 된 지 오래였다. 그 와중에도 알 포트가 내린 신성한 수염만은 반질반질 순백의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 괴리감 때문에 더 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선두에서 걷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일행을 독려했다. 그 역시 광산에서 사흘쯤 땅 파다 나온 듯한 몰골이었다.

“자자, 기운들 내요. 조금만 더 가면 에레카카 부족의 마을이 나올 겁니다.”

이니야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트롤들은 흙을 주로 다루는 문화 특성상 항아리나 목욕통 등을 쉽게 만든다. 그리고 트롤 구루들도 전신에 문양을 그리고 지우는 일이 잦다 보니 몸을 꽤 자주 씻는다. 그 문양 역시 주술적 힘의 일부라 그때그때 바꿔 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트롤들 사이에선 꽤나 목욕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

에레카카 부족으로 가면 제대로 몸을 씻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다. 모두의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티티마의 인도를 받아 반나절을 더 밀림을 뚫으니 겨우 밀림 사이로 공터가 비쳤다. 실란이 환한 표정으로 수풀을 뛰쳐나갔다.

“와아…… 아?”

막 마을을 본 순간이었다.

실란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이건…….”

앞장 선 티티마는 이미 창백해진 안색이 되어 제자리에 석상처럼 굳었다. 다른 이들도 같은 표정이 되어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수림 사이에 펼쳐진 트롤들의 마을, 그곳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2

마을 곳곳이 불타고 무너져 폐허처럼 보였다. 사방에 트롤의 시체가 널려 있고 바닥이 붉은 피로 흥건했다. 그 참혹한 광경에 티티마가 트롤어로 비명을 질렀다.

“제카 오제브! 아와프라타!"

‘오, 맙소사! 대지 어머니여!’라는 의미였다. 사색이 되어 티티마가 달려 나갔다. 정신을 차린 레펜하르트가 바로 뒤를 따르며 소리쳤다.

“생존자가 있나 찾아봅시다!”

허겁지겁 다른 이들도 마을로 뛰어들어 갔다.

트롤들은 대부분 갈가리 찢겨 죽어 있었다. 이 참상은 아이와 여인조차 가리지 않았다. 채 몇 살 되지도 않은 어리디어린 아이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이니야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런 끔찍한 짓을!”

설사 사냥꾼이 산짐승을 만나도 새끼는 살려 두는 법이다. 대체 이 어린 트롤들이 무슨 죄가 있어 이토록 잔인한 죽음을 맞아야 한단 말인가?

모두들 치를 떨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애써 러스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후우, 후우…… 아무래도 플룬탄에 들어온 이들이 우리뿐만이 아닌 것 같군요.”

애써 머리를 식히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폐허를 살펴보았다.

실란이 중얼거렸다.

“마물 사냥꾼일까요?”

할라인 왕국에선 대수해 플룬탄 초입에 들어가 트롤을 사냥하는 마물 사냥꾼이 꽤 많았다. 성공하는 이는 그리 없지만 트롤 하나만 잡아도 대박이니 인생 역전을 꿈꾸는 이들이 제법 되었다.

타시드가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들이 이렇게 깊이 들어오는 경우는 없다고 들었다.”

러스도 동의를 표했다.

“타시드 말이 맞아. 그리고 마물 사냥꾼이면 이렇게 학살을 할 이유가 없지.”

마물 사냥꾼이 트롤을 노리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피를 탐해서다. 살려서 연금술사 길드로 끌고 가야 비로소 돈이 된다. 그런데 이 귀한 트롤의 피를 함부로 땅에 흘려 둘 까닭이 없다.

“정말 마물 사냥꾼의 소행이라면, 트롤 구루나 사내들은 몰라도 아이나 여인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겠지. 데려가면 큰돈이 될 텐데.”

“그러네요. 그럼 대체 왜?”

실란과 러스의 대화를 듣던 이니야가 슬쩍 레펜하르트에게 다가갔다.

“레펜하르트 님.”

“예?”

그녀가 마을 곳곳에 파헤쳐진 땅덩이를 가리켰다.

“이거, 오러 흔적이에요.”

“그렇습니까?”

레펜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사람에게 쓴 상태가 아니라 땅을 파헤친 것에 불과해 그의 안목으로는 구별이 힘들었다. 새삼 이니야의 경지가 높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니야가 확신하며 다시 말했다.

“확실해요. 오러, 그것도 그냥 블레이드 오러가 아니라 일종의 융합 형태의 오러예요. 아무래도 레펜하르트 님의 뇌전권이나 폭염권이랑 비슷한 느낌인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현재 마법과 오러를 모두 경지까지 올린 이는 그가 알기론 둘밖에 없었다.

레펜하르트 자신과 테스론.

‘하지만 테스론이 벌써 오러와 마법을 융합해서 쓰지는 못할 텐데?’

설사 테스론이 자신의 두뇌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한들 오러-마법 융합이 가능할 리 없었다. 권마합신의 술식은 10서클의 경지에 든 과거의 경험이 있었기에 창안이 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두뇌를 지녔다 한들 그 지식과 지혜 없이는 어림없는 이야기다.

인상을 쓴 그의 태도를 의구심으로 받아들였는지 이니야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첨언했다.

“분명해요. 정체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순수한 오러 스킬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어요. 저도 정령술과 오러를 융합해 쓰잖아요? 그래서 확실히 알 수 있어요.”

“당신의 안목을 의심한다는 게 아닙니다, 이니야. 그냥 놀라워서 그래요.”

그녀를 달래며 레펜하르트는 생각했다.

‘오러와 마법의 융합이라?’

그게 가능한 건 현생에서 그가 알기론 레펜하르트 자신뿐이다.

‘아, 전생에는 또 있긴 했군. 그 용사인가 뭔가 하던 놈.’

오러에 마법, 신성력까지 융합해서 구사하던 할라인 왕국의 왕자, 알렉스 폰 할라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 가지 힘을 모두 다루는 용사 알렉스의 능력은 제법 놀라웠다. 마법과 오러, 신성력을 합일시켜 기존의 몇 배나 되는 위력을 보이곤 했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도 대체 어떻게 저게 가능한지 한동안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법과 신성력의 융합만큼은 마왕인 그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영역이었으니까.

하지만 알렉스는 마법과 오러, 신성력 개개의 숙련도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다. 덕분에 위력이 증폭되어 봤자 초월적인 권능을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융합 방식 역시 별로 효율적이지 않았다. 레펜하르트의 권마합신에 비하면 쓸데없이 낭비되는 힘이 너무 많았다.

‘확실히 대륙 최강의 5인에 끼기엔 충분했지만, 그 다섯 중에선 제일 떨어지는 것이 그놈이었지.’

알렉스가 일행의 리더 격이긴 했지만, 무력으로는 검성 사이러스나 권왕 테스론에 비해 손색이 많았기에 당시의 레펜하르트에겐 그리 두려운 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동안 무심코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이걸 보니 또 생각나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이내 알렉스의 존재를 뇌리에서 지웠다.

현 시간대를 생각해 보면 성녀 엘린과 용사 알렉스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엘린이야 실란만 잘 챙기면 나타날 일이 없을 테고, 알렉스도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으니 아직 태어났을 리가 없다.

‘역시 새로운 적인가?’

레펜하르트는 트롤 시체들 사이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티티마를 바라보았다.

아틸카의 후계자답게, 그녀는 어느새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비록 분노하지만 격정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정신문화를 추구하는 트롤 구루의 상식이다. 그저 슬픔을 담아 차분하게 상황을 살펴볼 뿐.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 자, 그 영혼에 평안 있으리니…….”

진혼의 노래를 중얼거리며 티티마가 어린 트롤 아이들의 시신을 어루만진다. 그 시신에 남은 상흔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확신했다. 오러 흔적은 몰라도 저 트롤들의 시신에 남은 마법의 흔적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피를 매개로 발동하는 8서클의 연계 주문, 체인 오브 제노사이더.’

이 주문이라면 트롤의 재생력을 역행시켜 일거에 대량 살상을 할 수 있다.

‘8서클의 대마법사에, 오러-마법 융합이 가능한 오러 능력자란 말이지? 이런 자들이 예전에 있었던가?’

한참을 고민했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런 이들을 떠올릴 수 없었다. 시대도 다르고 세상은 넓으니 그가 모르는 강자가 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강자인 모양이다. 그렇게 결론 내리며 레펜하르트는 고민을 멈추고 눈앞의 일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이들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겠군…….”

고개를 돌려 일행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간단하게 장례라도 치러 줘야 할 것 같소만?”

다른 일행들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이니야며 마켈린, 타시드가 저마다 대꾸했다.

“그러죠. 어서 땅을 파야겠네요.”

“그보단 검불을 모아 화장할 준비를 합시다.”

“높은 솟대를 세우고 시신을 매달아야지요. 저들의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갈 수 있도록.”

전통적으로 엘프는 매장, 드워프는 화장, 오크는 풍장을 하다 보니 저마다 대답이 달랐다. 일동 모두가 티티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트롤은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나?

티티마가 마을을 둘러보며 인상을 썼다.

“끙, 저 혼자서 이 많은 분들을 다 먹을 순 없겠는데요?”

실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머, 먹어?”

레펜하르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맞다…… 트롤은 식인장을 하지, 참.”

실란의 안색이 이제 창백해지다 못해 사색이 되었다.

“식인이라니, 설마 사람을 먹……는단 말이에요?”

혹시 티티마가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이 살이 야들야들 부드러워 보여서 그런가? 응? 그런 거야?

벌벌 떠는 실란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개념이 달라. 살아 있는 사람 잡아먹는 건 트롤에게도 끔찍한 일이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

성인이 된 트롤은 워낙 재생력이 강해 쉽게 죽지 않는다. 돌림병이 돌거나 재해를 만나거나 해도 한꺼번에 시신이 생기는 경우가 거의 없어, 대부분 늙고 쇠해져 자연스레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렇게 일족 내에 죽은 자가 생기면, 트롤들은 전통적으로 죽은 이의 시체를 일족끼리 나눠 먹는 풍습이 있었다. 트롤 문화 특유의 사자死者를 기리는 방식이었다.

자연의 모든 것은 순환하니 그리함으로써 죽은 이의 피와 살이 자신 속에서 살아 숨 쉬며 함께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죽은 이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써 그 재생력이 먹은 트롤들에게 옮겨가 힘을 더하니, 나름 합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티티마가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땅에 묻어도 되지만, 다른 분들은 제대로 영혼을 기려야 할 텐데…….”

물론 이유가 어찌 되건 인간이 보기엔 기겁하며 치를 떨 야만스러운 행위였다.

막대에 시체를 매달아 새가 쪼아 먹게 놔두는 오크의 풍장만 해도 인간이 보기엔 끔찍한 광경이다. 심지어 동족의 시신을 먹다니?

역시 트롤이 대대로 몬스터로 알려진 이유가 있었다. 다른 종족에 비해서도 트롤은 인간의 문화와 동떨어진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래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타문화에 대한 존중을 아는 이들, 대놓고 끔찍하다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레펜하르트가 고민하던 차였다.

“아틸카 님이 전에 말씀하셨어요.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우리의 피와 살이 되어야 하지만, 사고로 죽은 자들은 한恨의 저주를 풀기 위해 불로써 정화해야 한다고.”

티티마가 일행에게 뒤로 물러나 달라 주문했다. 일행 모두가 마을에서 벗어나 밀림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을 전체를 바라보며 티티마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손가락의 각 마디를 튀기며 기이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지 어머니, 한숨 토하네. 날아오른 새의 깃털이 낮 태양의 혀를 탐하리. 이는 깨끗함이요 순결함이로다…….”

라라라라…….

나직한 허밍과 함께 티티마의 좌우로 주술적 불길이 일어났다. 불길이 땅 위를 달리며 마을을 길게 에워싼다.

화르륵!

불길이 마을 전체를 뒤덮었다. 그 참혹한 광경이 불 속에 파묻히며 사라져 갔다.

실란과 마켈린이 저마다 자신의 신에게 저들의 평안을 빌었다.

“알 포트의 이름으로 비노니, 당신들의 영혼이 안식에 들기를.”

“필라넨스시여, 저들의 영혼이 고통 없는 곳에서 사랑받으며 영원케 하소서.”

이글거리는 불길을 앞에 둔 채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불빛을 받은 구릿빛 근육이 시뻘겋게 번들거렸다.

‘누구냐? 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지독한 짓을?’

☆ ☆ ☆

에레카카 부족 마을로부터 서쪽으로 80킬로미터쯤 떨어진 밀림 속.

덩굴을 헤치며 한 무리의 일행이 걷고 있었다. 흑발의 잘생긴 청년을 중심으로 남녀 혼성으로 이루어진 인간 일행이었다.

일행 중 한 명, 적금발의 주근깨 여인이 앞장선 청년에게 시무룩한 음성을 보냈다.

“테스론, 그들을 꼭 다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어? 새끼들도 있던데…….”

흑발의 청년, 테스론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해충 박멸 같은 것이지. 신경 쓰지 마, 필레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필레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미를 흐렸다. 뒤에서 걷고 있던 잘생긴 금발의 청년, 제이드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집안에 쥐가 발견되었는데 아직 어리다고 놔두었다간 금방 새끼 쳐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싹 박멸해야 집안이 깨끗해지는 법이지요. 그리고 덕분에 전투 호흡을 꽤 맞추지 않았습니까?”

“그건 알지만요…….”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필레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성인 남자 트롤들은 워낙 흉악하게 생겨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하나 트롤 아이나 여인들은 트롤다운 특성이 약하다 보니 그리 인간과 다르게 생기지 않은 것이다. 겉보기엔 그냥 피부만 파란 특이한 생김새의 인간처럼 보인다. 별로 몬스터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우웅…….”

필레나는 이내 머리를 흔들며 찝찝함을 떨쳤다. 테스론 말대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문득 제이드가 앞을 향해 소리쳤다.

“알렉스! 길을 뚫어 주게!”

화려한 미모의 금발 청년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리고 검을 뽑아 빛을 발한다. 청년, 알렉스의 검이 블레이드 오러를 발하며 푸르게 빛나더니 이내 검은 마나로 뒤덮이고 순백의 성력과 어우러졌다.

“헙!”

기합을 터트리며 눈앞의 밀림을 향해 알렉스가 검을 뻗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수목과 풀이 통째로 날아가며 20미터 정도의 탄탄대로가 뚫렸다. 그 광경을 보며 제이드가 싱긋 웃었다.

“과연 쓸 만하군.”

검을 거둔 알렉스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테스론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인간이란 느낌은 안 듭니다만.”

“당연하지요. 인간이 아니니까.”

새삼스레 무슨 소리냔 얼굴로 제이드가 대꾸했다. 테스론이 뺨을 긁었다.

“그렇지만…….”

전생의 용사, 알렉스는 함께 마왕과 대적하던 소중한 동료였다. 그의 용기와 의지, 특히 인류를 위한 희생정신은 나이 든 테스론과 사이러스조차도 탄복할 정도였다.

아무리 전생의 알렉스와 저 RX-13이 같은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같은 얼굴을 한 이가 저렇게 인형처럼 굴고 있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으음, 계속 갑시다.”

상념을 떨쳐 내며 테스론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르릉!

조금 전까지 맑더니 갑자기 천둥이 치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성한 나무 위로 쏟아진 소나기가 작은 개울을 삽시간에 거대한 강으로 만들어 버렸다.

“좀 전까지 햇볕이 내리쬐었는데 그새 소나기가 와? 이곳 날씨는 정말 개판이군.”

콸콸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흙탕물의 강을 보며 테스론이 혀를 찼다.

“마법으로 날아서 건너가 버릴까요, 제이드 공?”

그는 이제 8서클의 대마법사였다. 비행이 가능한 플라이 주문 역시 사용할 수 있다.

“급한 여정도 아닌데 굳이 마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지요. 빗속에서 비행 마법을 쓰려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마력이 필요하다 들었습니다. 일단 비가 그치길 기다립시다.”

뒤에 서 있던 필레나가 바로 무한의 주머니에서 작은 막대기 하나를 꺼냈다.

“쉴 자리 만들게, 테스론.”

막대기를 적당한 평지에 꽂고 발동시키니 이내 커다란 천막이 되었다. 또한 천막 안쪽에 새하얀 구슬이 빛을 발하며 바로 냉기를 발산하며 주위 습기를 제거하자 순식간에 덥고 습하던 천막 안쪽이 봄처럼 청량한 공기로 가득 찼다.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여인, 크리스틴이 숨을 헐떡이며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따라 들어가며 제이드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굉장히 편하게 지나가고 있는 겁니다, 크리스틴 경. 이 장비들이 없었다면 훨씬 고생이 심했을걸요?”

예전, 테스론과 이곳을 한번 들렀던 필레나가 격렬히 동의했다.

“그건 그래요. 과연 은의 시대 기물, 특히 이 옷은 정말 좋던데요? 대체 무슨 소재일까? 하나 얻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의 옷을 살펴보며 필레나가 아쉬운 소리를 냈다. 테스론이 진지하게 타박했다.

“그거 금기 물품이야. 반납해야 된다고. 괜히 눈독 들이지 마.”

“나도 알아. 그냥 좋다 이거지.”

이 무더위 속에서 평소 차림을 할 수 없는 것은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성기사인 크리스틴도, 마법사인 필레나나 제이드도 평소의 갑옷이나 로브를 벗고 열대에 맞는 복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테스론 일행은 레펜하르트 쪽과는 좀 차림이 달랐다.

밀림에서는 모든 것이 무성하게 번식한다. 혹자는 나무마다 과실이 주렁주렁 열리고 사시사철 따듯한 밀림에서는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사실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기 좋다는 소리는 온갖 벌레며 맹수, 기생충, 거머리, 전염성 세균들에게도 살기 좋은 기후란 소리다. 그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한 것이다.

현재 테스론 일행은 모두 갈색 천으로 된 질긴 상·하의, 그 안에 검은 타이즈를 입어 팔다리는 물론 전신을 모두 감싼 상태였다. 이 무더위에 온몸을 싸매고 있으면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더위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체력이 그리 좋지 않은 여인들조차 그리 힘들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모두 그들이 걸친 검은 타이즈, 플레스텍스 슈트 덕분이었다.

레펜하르트 일행이 밀림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나름 열대 기후에 맞춰 준비를 해 왔다. 하지만 그들의 지식은 밀림의 토착민이나 트롤의 것, 결국 그들과 비슷한 옷차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트롤들도 벗고 살기는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저건 레펜하르트 일행이 워낙 초월적인 강자여서 가능한 것이지 실은 적절한 옷차림을 갖출 필요가 있다. 특히 편한 신발과 다리 보호대는 필수다. 물론 현 시대의 천 수준으로는 팔다리를 보호하려다 오히려 체온을 높여 탈수증에 시달리게 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플레스텍스 슈트라…….”

테스론이 팔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의 시대 기물을 쓸 수 있는 그들은 굳이 저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확실히 좋긴 좋지, 이거.”

이 플레스텍스 슈트는 은의 시대 소재답게 충분한 통기성과 내구성을 유지하면서, 가벼운 냉기 마법으로 외부 더위로 일부 차단해 주며 진흙이나 때가 묻을 경우 자동으로 털어 내는 기능까지 있었다.

테스론이 옷을 매만지며 뇌까렸다.

“역시 은의 현자에겐 별게 다 있단 말이야. 난 이번에도 ‘온기의 목걸이’ 같은 거 줄 줄 알았는데.”

“그건 냉기에 대한 저항을 높이는 아티팩트라서 열대에서는 그리 쓸모가 없지요.”

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필레나가 물었다.

“그럼 반대 효과가 있는 목걸이는 없나요? 냉기의 목걸이 같은.”

“그런 건 없어요. 은의 현자는 아티팩트 개발자가 아니라 그저 고대의 수혜자일 뿐, 필요하다고 편의대로 만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죠.”

솨아아아!

천막 밖에서 소나기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빗소리를 듣다 말고 제이드가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대수해, 플룬탄은 지도조차 없는지라 오직 테스론의 안내만 믿고 따라가야 한다. 테스론이 전생의 정보를 떠올렸다.

“이 이동 속도라면, 앞으로 사흘 안에 도착할 겁니다.”

대꾸하며 테스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레펜하르트보다 선수 쳐야지. 뭔지는 몰라도 마왕의 보물이라고까지 불리던 아티팩트니까.”

필레나가 용케 그의 혼잣말을 들었다. 입술을 귓가로 가져가며 그녀가 속삭였다.

“혹시그 자도 여기 있지 않을까?”

얼토당토않다는 듯 테스론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우연이 겹치려고?”

☆ ☆ ☆

폐허가 된 에레카카 부족 마을을 떠난 지 닷새째.

레펜하르트 일행은 드디어 원시 우림을 벗어나 열대의 고지대에 접어들었다. 지대가 높아지며 더위가 가시고 점점 기온이 내려간다. 주위 환경도 열대라기보다는 완연한 산악 지형으로 변한다.

열대를 벗어나자 더위도 습기도, 벌레의 습격도 한풀 꺾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고지대는 대수해 플룬탄의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화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대륙 최대의 화산, 레단트 웨일Redant wail.

레단티의 통곡이란 이름이 붙은 이 활화산은 평범하게 형성된 것이 아니다. 고대 은의 시대의 폭주로 인해 형성된 화산이라 일대가 전부 혼탁한 마나의 폭풍 지대다.

열대 우림에서도 어지간한 마수들은 오러 유저의 기감조차 속일 만큼 특이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곳에 비하면 약과였다. 이곳의 독충들은 설마 오러 유저라도 한번 물리면 상당히 고생을 해야 하며, 마켈린이나 실란의 해독 주문으로도 쉽게 독성이 풀리지 않는 지독한 놈들투성이였다.

그래서 밀림에선 가만있었던 레펜하르트도 이 지역에서는 독충에 대한 대책을 철저히 하고 있었다.

파직! 파직! 파지직!

일행이 움직일 때마다 주위에서 전격이 튀며 구워진 벌레 시체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레펜하르트가 일행 주위에 설치한 광범위 전하결계電荷結界 덕분이었다.

구워지는 독충 시체를 보며 실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거 있으면 진작 쓰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밀림에서 그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닌가? 실란의 불만에 레펜하르트가 쓰게 웃었다.

“함부로 마력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상황에 맞추는 것뿐이야.”

마법은 공짜가 아니다. 단순히 불편하다고 막 낭비할 순 없는 것이다.

그때는 그냥 벌레들 좀 물려도 상관없으니 최대한 마력을 아꼈다. 지금은 마력 소모보다 독충에 물리는 쪽이 더 리스크가 크니까 쓰는 것이고.

“마법은 분명 만능萬能이지만, 전능全能은 아니라고.”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그간의 고생을 생각하니 묘하게 억울했다. 실란이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고지대를 한참 지나니 저 멀리 거대한 화산이 보였다. 레단트 웨일 화산이었다. 다행히 분화 시기가 아닌지 연기를 뿜고 있지는 않았다.

그 밑에는 역청이 물과 섞여 유황 거품을 피워 올리는 검은 늪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늪을 보며 마켈린이 질린 목소리를 냈다.

“으, 혹시 저기를 지나가야 합니까?”

드워프답게 강인한 마켈린이지만 그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었다. 바로 늪이나 개울, 호수 같은 곳이다. 신장이 짧은 드워프에겐 다른 종족이 그냥 적당히 허리 담그고 지나갈 만한 깊이의 늪도 익사 위험이 다분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걱정 마시오, 마켈린. 다 왔으니까.”

늪을 가로지르지 않고 레펜하르트가 가장자리를 따라 좀 더 걸었다. 그렇게 1킬로미터쯤 더 걷자 늪 가장자리에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위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언덕에 가까이 가던 이니야가 긴장했다.

언덕 사이의 거암괴석들, 그 사이로 좁은 틈이 나 있었다. 바위에 비해 좁다는 것이지 사람 두세 명이 어깨를 마주하고 지나가기에 충분히 큰 틈이긴 했다. 그 틈에서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오, 여기가 그곳입니까?”

마켈린이 바로 알아챘다.

애당초 드워프의 본거지, 그랜드 포지는 옛날에는 던전이었다. 지금도 그랜드 포지 외곽에는 아직 이계와 연결되어 접근이 위험한 던전 일부가 남아 있다. 이 기운은 마켈린에게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렇소, 사방신의 유물이 있는 몰튼 모라스 던전, 그 입구라오.”

주먹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정식 입구는 아니고 던전 벽에 생긴 틈 같은 거지만.”

3

바위에 난 틈새는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 몇십 미터 정도 들어가니 기이한 공간이 나왔다.

사람 열댓 명이 서 있기에 충분한 공동, 그곳에 커다란 석벽 일부 드러나 있었다. 석벽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구멍이 뚫려 그 위로 무지갯빛 기운이 아롱져 빛을 냈다. 러스가 검을 뽑으며 물었다.

“저 기운을 흩어 버리면 되는 겁니까, 형님?”

레펜하르트가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할 수 있으면 어디 해 봐.”

러스는 바로 블레이드 오러를 뿜었다. 푸른 오러가 무지갯빛 광막과 충돌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오러 자체가 저 광막과 융합되며 아무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러스가 눈을 찡그렸다.

“이거…….”

“힘으로 될 거였으면 내가 직접 했겠지?”

대부분의 던전은 구조물 자체에 강력한 차원 시공 결계가 설치되어 있다. 은의 시대 고대인들이 일부러 설치한 게 아니라, 던전이 이계와 현세에 걸쳐 있다 보니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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