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 제39장 아라난 그라드 (40/84)

제39장 아라난 그라드

1

신성 바슈탈론 제국 황도, 엠퍼러란드.

황제의 옥좌에 앉아 레어폴 1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선 이는 굳은 얼굴로 눈치를 보는 젊은 무관, 보고를 위해 나선 에길네스 백작이었다.

레어폴 1세가 버럭 호통을 쳤다.

“그 무슨 어처구니없는! 어찌 바나텔 공이 패했단 말이냐!”

“그것이…….”

황제의 진노에 벌벌 떨며 에길네스 백작이 보고를 이었다. 레어폴 1세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권황 제라드라고?”

“예, 폐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다. 그자가 어째서?”

황제의 독백에 에길네스 백작은 속으로 격하게 동의했다. 이 작전을 제안한 그도 설마 실패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이리저리 재 봐도 전력상 실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아는 검성 바나텔의 힘이라면, 단신으로도 안타레스 백국의 오러 유저 대부분을 감당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각국의 오러 유저를 열 명이나 동원했는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온단 말인가?

전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난입자, 권황 제라드 때문이다! 그자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작전의 제안자로서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을 수 있었다!

‘대체! 대체 왜 그 정신 나간 영감이 하필 이번에만 안 하던 짓을 한 거냐!’

아니, 언제부터 짐 언브레이커블이 제자 챙겼다고? 에길네스 백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물론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감히 황제 앞에서 무엄한 짓 했다가 목 뎅겅 잘리긴 싫었으니까.

하지만, 이 작전의 제안자인 에길네스 백작은 어차피 목 부지하기 힘든 팔자였다.

“후우…….”

레어폴 1세가 한숨을 푹 쉬더니 갑자기 눈을 부라렸다. 그가 손짓을 했다.

“데려가라.”

대기하고 있던 로열 가드가 앞으로 나와 에길네스 백작의 좌우 팔을 붙잡았다. 백작이 기겁하며 자비를 구걸했다.

“폐, 폐하! 부디 자비를!”

에길네스 백작은 홀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아우성이 홀 안을 메아리쳤지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레어폴 1세가 신음을 흘렸다.

“으음…….”

이번 사태의 대가는 참혹했다. 제국의 수호신, 검성 바나텔이 중상을 입었다. 열한 명밖에 없는 충성스러운 제국의 오러 능력자 중 한 명, 리카본 경도 잃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원성도 자자했다. 애당초 반 강압적으로 협조를 구해 끌어낸 오러 유저들이었다. 저마다 각국의 귀한 보물들, 그들이 죽거나 상처 입었으니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각국마다 제국에게 격한 항의를 보냈다.

-아무 일 없을 거라 하지 않았소?

-어차피 위험한 건 검성이 알아서 할 테니 뒤에서 대충 상대하면 된다면서?

-비밀을 지켜야 한다기에 온갖 핑계 만들어 가면서 겨우 보내 줬더니만!

-귀중한 자국의 오러 유저를 보냈더니 반병신으로 만들어 돌려보내!

평소처럼 고풍스러운 말투 떼고 요약한 서신이 아니다. 정말 저 말투 그대로 각국의 왕이며 지도자가 항의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해 감히 하지도 못할 짓, 각국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예였다.

특히 르카완 경을 잃은 그린드 왕국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린드 왕국은 바슈탈론과 할라인 사이에 위치한 작은 소국 연합 중 하나다. 제국의 일개 영지 수준인 가난한 소국, 그린드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가 바로 왕국 유일의 오러 유저 르카완이었다.

소국 연합 사이에서는 한 명의 오러 유저가 국력을 좌우할 정도다. 그나마 르카완 때문에 우리나라도 오러 유저가 있다며 소국 연합 속에서 제법 큰소리치고 살았는데, 그 귀중한 왕국의 보물을 데리고 가더니 산산이 박살 나 시체도 못 건지게 한 것이다.

지금도 그린드 왕국의 사신은 ‘우리나라 오러 유저 물어내라!’면서 황궁 밖에서 단식 투쟁을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목을 베고 싶지만, 제국의 체면도 있고 지은 죄도 있어서 그냥 놔두는 중이었다.

골치 아프다.

정말 골치 아프다.

“후우우우…….”

지상 최강의 제국의 황제, 레어폴 1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흘렸다. 근심 어린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좌우로 도열한 신하들은 그저 침묵만 지켰다.

그때 황제 가까이 서 있던 노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젊은 시절엔 꽤나 미남이었을 잘생긴 노신관이었다.

순백의 법복에 화려한 금박 문양을 수놓은 노인이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상의 황제에게 세이어의 첫 번째 지팡이가 감히 고하오!”

바슈탈론 제국을 다스리는 또 한 명의 제왕, 교황청 판테온의 주인이자 세이어 교단의 우두머리인 교황 타세라드였다.

신하들이 당황하며 교황을 바라보았다.

“예, 예하?”

교황이 목청을 가다듬고 위엄 있는 음성을 이었다.

“인간의 사정은 신의 뜻을 행함에 있어 아침 이슬처럼 덧없는 것! 어찌 세이어의 가르침을 앞에 두고 고민한단 말이오? 응당 세이어의 진노를 사기 전에 기필코 저들을 응징해야 할 것이오!”

타세라드의 외침에 신하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광신狂信을 경계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끄럽다는 표정이었다. 신하들의 태도를 본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교황을 향해 레어폴 1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지상의 신성 대행자여. 그분께서 내려다보고 계신데 부끄러운 삶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강압적인 시선으로 좌우를 둘러보더니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안타레스의 이단자를 벌하겠다! 방법을 강구하라!”

단호한 말투에 신하들이 웅성거렸다. 신하 한 명이 반론을 제시하려 조심스레 앞으로 나설 때였다. 옷자락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차게 몸을 돌리며 황제가 말을 끊었다.

“물러가라! 정례를 마치겠다!”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제국의 사정이야 어찌 되건 전혀 뜻을 굽히지 않겠다, 무조건 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앞으로 나선 신하가 다시 대열로 돌아갔다.

신하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명대로 행하겠나이다!”

홀을 떠나며 문득 황제가 옆에 서 있던 세이어의 교황, 타세라드를 바라보았다.

“지상의 신성 대행자여, 그대와는 따로 할 말이 있소.”

타세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뒤를 따랐다.

“따르겠나이다, 지상의 황제여.”

☆ ☆ ☆

정견政見의 홀을 떠난 황제와 교황은 어깨를 함께한 채 복도를 걸었다. 격분한 둘의 기세에 시종들이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중앙궁을 벗어나 별궁으로 향했다. 시종들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황궁 서쪽에 위치한 별궁, ‘순백의 탑’은 감히 그들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시종들을 뒤로한 채 황제와 교황만이 탑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장식이 된 복도에 두 사람만 남아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두 층 정도 오르니 강철로 된 민무늬 철문이 나타났다. 안으로 들어서니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둥근 테이블 하나만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 손을 얹고 황제가 나직하게 뇌까렸다.

“소환.”

교황도 같은 동작을 취했다. 빛이 두 사람을 휘감으며 복색이 바뀌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바슈탈론 제국의 황제와 세이어의 교황이 아니었다.

인류를 뒤에서 수호하는 위대한 집단의 계승자, 13인의 은의 수호자중 한 명이었다.

은의 수호자, 바슈탈이 된 황제가 입을 열었다.

“예상 밖이구려, 이런 식으로 일이 틀어질 줄이야.”

은의 수호자, 타세랄이 된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그나마 얻은 것이 있다면 바실리 왕국과 안타레스 백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 정도군.”

세 명밖에 없던 오러 유저 중 한 명, 왈그란 경을 잃은 바실리 왕국은 당연히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제국만큼이나 안타레스 백국에도 크게 향하고 있었다.

안타레스 백국에 쳐들어간 열한 명의 오러 유저, 그들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다. 제국의 리카본과 그린드 왕국의 르카완, 그리고 바실리 왕국의 왈그란만이 죽음을 당했다.

다른 나라들은 보유한 오러 유저를 잃지 않았다. 그라임의 게블릭이나 할라인의 카메룬이 팔다리를 입는 큰 부상을 입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더 이상 무용지물이 되진 않는다.

저 세 나라만이 실질적인 손해를 본 것이다.

물론 그 사투 중에 레펜하르트나 이니야가 출신 골라 가면서 죽인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저 재수가 없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손해 본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한 일이다. 아니, 하고 많은 오러 유저 중에 하필 자기 나라 오러 유저만 골라 죽일 건 또 뭐란 말인가?

특히, 바실리 왕국의 억울함은 더했다.

권황 제라드도, 권왕 레펜하르트―정확히는 그의 육체인 테스론―도 엄연히 바실리 왕국 출신이었다. 안타레스 백국의 주요 공신 중 한 명인 실란 필 마르시스도 바실리 출신의 신관이다. 동향 사람 봐주지는 못할망정 가루도 안 남기고 박살 내다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먼저 쳐들어간 주제에 분노한다는 것이 참으로 뻔뻔한 태도겠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물건인가?

당연히 바실리의 국왕은 제국뿐 아니라 안타레스 백국에도 이를 득득 갈고 있었다.

수호자 타세랄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될 바에야, 권왕이 모든 오러 유저를 싹 다 죽여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럼 차라리 일이 편해졌을 텐데.”

그렇다면 손쉽게 대륙의 모든 나라가 안타레스 백국을 적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수호자 타세랄의 아쉬움 섞인 말에 수호자 바슈탈이 고개를 저었다.

“그걸 알고 일부러 보내 주었던 것 같소. 세상의 소문대로만 저 권왕이란 자를 바라볼 순 없지. 겉보기와 달리 상당히 머리가 좋은 자요.”

“그렇겠지. 마법사가 머리 나쁠 리는 없을 테니.”

광범위 대륙 감시용 아티팩트, 세이어의 눈을 통해 이 둘은 이미 레펜하르트가 마법사임을 알고 있었다. 실은 그동안 은근 주변에 ‘혹시 마법사가 아닐까?’라며 말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만큼 짐 언브레이커블의 악명은 자자했으니까.

“그 무식한 무문의 이야기가 좀 깊숙이 박혀 있어야지? 사람들에게 이 진실을 알리려면 신탁이라도 떨어지기 전엔 무리겠더군.”

수호자 타세랄이 투덜거렸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새하얀 테이블 한쪽이 빨갛게 점멸했다. 수호자 바슈탈이 타세랄을 불렀다.

“왔군. 수호자 루디움과 수호자 세렐라인이 연결되었소.”

이내 주위가 빛으로 물들이며 순백의 공간으로 화했다.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세계와 그 가운데 세워진 비현실적인 새하얀 신전.

공간을 초월해 정보를 전달하는 고대의 아티팩트, 세이어 템플이었다.

사용자의 의식을 투영해 현실과 똑같은 감각을 재현하는 이 유사 공간 덕분에 은의 수호자들은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서로 의사를 나눌 수 있었다.

신전의 중앙 홀에 네 명의 남녀가 나타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중 한 명, 50대의 중년인을 향해 수호자 바슈탈이 버럭 성을 냈다.

“이게 어찌 된 것이오, 수호자 루디움! 분명 권황 제라드는 그대가 처리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던가?”

수호자 타세랄도 합세했다.

“아니, 그자가 왜 나타난단 말이오? 덕분에 일이 크게 틀어졌소. 대체 왜 아직도 저자가 살아 있는 거요?”

50대 중년인, 수호자 루디움이 인상을 구겼다.

“아, 그게…….”

우물쭈물하던 루디움이 대답했다.

“……보낸 은의 암살자들이 모두 당했소.”

바슈탈과 타세랄이 동시에 놀랐다.

“엉? 그자는 오러 유저가 아니오? 아무리 강해 봤자 마법의 힘이 없는데 어찌 죽이지 못한단 말이오?”

“충분한 준비를 갖춰 보낸 것이 아니었소?”

연이은 두 사람의 질문에 루디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랬소. 정해진 규정대로 정해진 장비를 들려서, 오러 유저를 상대하는 매뉴얼을 착실히 따랐소.”

“그런데 왜?”

인상을 쓰는 바슈탈을 보며 루디움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그런데 안 통하더구려.”

바슈탈과 타세랄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러 유저를 암살하는 법은 물리적인 방법뿐이 아니다. 은의 현자가 보유한 아티팩트 중에는 강력한 저주를 건다거나 치명적인 독을 형성하고, 또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현자라도 미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정신계 마법을 담은 마도구들도 많았다.

상대가 오러 유저건 대마법사건 신의 화신에 가까운 성직자건 간에, 모든 대상에 전부 통용이 될 만큼 다양한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기에 여태껏 은의 현자가 인류를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물리력 때문이라면 오러 유저에게 밀릴 수도 있겠지만 어찌 마법이 있는데 안 통한단 말인가?

루디움이 한 번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인들 저런 시도를 안 해 보았겠는가? 물론 다 해 봤다.

하지만 저 권황 제라드는 상식을 초월한 괴물이었다.

강력한 저주는 기합으로 떨쳐 내고 고래도 녹이는 독은 으적으적 씹어 먹고 정신계 마법은 불굴의 근성으로 그냥 버텨 내는데, 대체 어쩌란 말인가?

벌써 제라드를 노리다 죽어 간 은의 암살자만 두 자릿수였다. 은의 현자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이렇게 기가 막힌 암살 대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설명하자니 참…… 자신도 이 상황이 납득이 안 가는데 남을 이해시킬 자신도 없고…….

루디움이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바꿨다.

“그냥, 그렇게 되었소. 아무래도 특급 금기 물품 사용을 허락해야 할 것 같소만…….”

타세랄이 혀를 찼다.

“여기서 뭘 더 내 달라고? 벌써 몇 개를 잃었는데?”

그러자 루디움도 인상을 쓰며 신경질적으로 말을 받았다.

“아니, 안 통하는 물건만 갖다 쓰니 그런 거 아니오? 아예 화끈하게 센 걸로 들이붓자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씩씩거리다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슬그머니 눈치만 보고 있던 은발의 작은 소녀, 세렐라인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수호자 세렐라인! 그대는 무엇을 했소? 권왕을 암살할 수 있다지 않았소?”

루디움이 버럭 성을 내며 비난의 화살을 슬쩍 그녀에게 돌렸다. 바슈탈과 타세랄도 가세했다.

“그러게 말이오! 외인이었던 현자 레스틴에, 노출 위험까지 각오하며 그의 협력자마저 동원했거늘!”

“심지어는 아다만드릴 슈트마저 내가지 않았소? 그건 금단의 기물 중에서도 특급 중의 특급품이오!”

그 귀한 아다만드릴 슈트 날려 먹고 온 세렐라인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울상을 지었다.

“아니,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훌쩍거리던 세렐라인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혼나니까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기는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것들 전부 그녀보다 연하年下다. 10대 소녀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엄연히 여든 살이 넘었다.

“아니, 근데 이것들이 어디다 대고 눈을 부라려? 특히 레어폴, 너! 넌 내가 기저귀 갈아 가며 키웠어!”

50~60대의 노인들이 움찔했다.

세렐라인이 제국의 황제를 노려보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지상 최강의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바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수호자 바슈탈에서 레어폴 1세로 돌아가 눈을 껌뻑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친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흰 수염의 노인이 새파랗게 어린 소녀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지금은 수호자 회의 아닙니까? 왜 여기서 속세의 일을…….”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니 얼떨결에 언성을 높이긴 했는데 저 세렐라인이라는 소녀는 무려 60년도 전, 그가 아기일 때 자신을 돌봤던 ‘보모 누나’였다. 감히 호통을 칠 대상이 아닌 것이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수호자 타세랄이 헛기침을 흘리며 화제를 바꿨다.

“험험, 지금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서 무엇하겠소?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오.”

바슈탈도 얼른 세렐라인의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어쨌건, 이제 공식적으로도 권왕 레펜하르트를 향해 속세의 전력을 동원할 수 있소. 제국이 나설 수 있으니 곧 해결이 될 거라 보오.”

루디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일단 권황 제라드를 노리는 것은 관두고 타깃을 바꿔 보겠소. 권황이 아니더라도 말살해야 할 대상은 적지 않으니까.”

타세랄이 달래듯 세렐라인에게 말을 건넸다.

“수호자 세렐라인, 그대는 계속 권왕의 제거 시도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소. 어쨌거나 아직 현자 레스틴은 건재하고, 그의 힘도 여전하니까.”

세렐라인도 진정하고 다시 수호자의 말투로 돌아왔다.

“그럴 생각이에요. 대륙에 무수한 오러 유저가 있지만, 은의 기물을 쓸 자격이 있는 오러 유저는 현자 레스틴을 제외하면 현자 브렉티스와 RX 시리즈 뿐. 아직 현자 레스틴에겐 이용 가치가 있어요.”

은의 현자가 간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오러 유저나 마법사 자체는 많다. 속세의 권력을 이용해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다. 하지만 금지된 아티팩트마저 내줄 만큼 은의 현자 내에 깊이 소속되어 있는 오러 유저는 얼마 없는 것이다. 비밀 유지는 은의 현자의 가장 중요한 규칙이니까.

비록 실패했지만 테스론은 여전히 은의 현자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인재였다.

결론이 나자 모인 수호자들이 저마다 유사 공간을 떠나 현실로 돌아갔다. 세렐라인도 손가락을 튀겼다.

딱!

그녀의 모습이 빛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순백의 빛이 사라지며 다시 주위가 통상 공간으로 돌아왔다. 새하얀 신전 대신 화려한 카펫이 깔린 근사한 응접실의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응접실 창문 밖으로 험준한 산세가 보였다. 이곳, 아스티노플 공작가의 여름 별장이 위치한 퍼틴 고원의 정경이었다. 세렐라인의 옷차림 또한 어느새 순백의 로브에서 귀족가 영양다운 드레스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서자 마침 지나가던 하녀들이 세렐라인을 보더니 조신하게 허리를 굽혔다.

세렐라인이 하녀들을 손짓해 불렀다.

“테스론 경은 어디 있지?”

30대의 나이 든 하녀 한 명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금역禁域에 가셨습니다, 에렌드 아가씨.”

세렐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길을 옮겼다. 하녀들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그녀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세렐라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하녀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저분은 왜 저런 젊은 나이에 이런 산속에 계시는 걸까요?”

다른 하녀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모두 아스티노플 공작가의 본 저택에서 근무하다 두어 달 전, 별장으로 온 하녀들이었다.

그녀들에게 있어 저 ‘에렌드 아가씨’는 참으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명문 중의 명문가, 아스티노플 공작가의 영애로 태어나 한창 피어나는 꽃 같은 나이의 소녀다. 그런 미소녀가 황도의 화려한 무도회며 사교계에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이런 깊은 산속에 살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말로는 지병이 있어 몸이 허약하기 때문에 요양 중이라는데, 솔직히 옆에서 모신 하녀들 입장에서는 별로 허약한 것 같지도 않았다.

평소에도 움직이는 것 보면 건강 그 자체인 데다가 가끔 몇 달씩 별장을 비우고 여행도 다닌다. 그때마다 생생하게 돌아오는 소녀가 지병이 있다면 그것도 웃긴 소리다.

하녀들이 목소리를 낮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런 산속에서 살면 멋진 남자를 만나지도 못할 텐데 말이지.”

“그렇지? 에렌드 아가씨 정도의 미모라면 황도에서도 남자들이 줄을 설 텐데.”

“어쩌면 황태자님을 만날 지도 모르지!”

“황태자께서 올해 마흔이 아니시던가? 그분이 결혼한 지가 언젠데…….”

예순이 넘은 레어폴 1세가 여전히 정정하게 제국을 통치하고 있기에, 후계자인 길리우스는 마흔이 다 되도록 아직 황태자 신세였다.

“그, 그럼 황태손!”

“그건 좀 가능성 있겠다, 얘.”

화려한 귀족들의 삶은 하녀들에게 있어 영원한 동경이다. 일단 수다가 시작되니 바로 왁자지껄해진다. 30대의 나이 든 베테랑 하녀, 메를렌이 혀를 차며 어린 하녀들을 꾸짖었다.

“쓸데없는 소리군요! 높으신 분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메이드의 덕목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할 일만 성실히 하면 되는 거예요!”

혼난 하녀들이 입을 다물고 다시 자기 할 일을 하기 위해 저택 안쪽으로 총총 뛰어갔다.

☆ ☆ ☆

아스티노플 공작가의 여름 별장 뒷산.

그곳에 제법 커다란 건물 하나가 세워져 있다. 저택이라 하기엔 너무 투박한, 그저 돌로 올린 건물과 그 주위로 높은 담장이 둘러싸인 이곳은 하녀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공작가의 금역이었다.

담장 안쪽, 포석이 깔린 연무대 위에서 흑발의 아름다운 청년이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후우우…….”

숨을 잔잔하게 몰아쉬며 청년, 테스론이 눈을 떴다. 체내에서 맴도는 마력을 느끼며 그가 중얼거렸다.

“7서클 대부분을 터득해 버렸군. 역시 마왕의 두뇌인가? 일단 작정하고 덤벼드니 진도가 빠르네.”

레펜하르트의 권마합신 캘러미티 혼에 크게 당한 후, 테스론은 자신의 목표를 조금 수정했다. 마왕을 노리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직 무술에만 매진하고 마법은 어디까지나 보조로 익히던 마음가짐을 고친 것이다.

그의 육체를 가진 레펜하르트는 결국 권왕다운 힘을 손에 넣고, 전생의 경지까지 융합해 새로운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테스론이 그렇게 못할 이유는 뭐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 바뀐 육체의 우월성은 오히려 테스론 쪽이 더 높다.

“그래, 누가 뭐래도 이 육체는 고금 제일 마법사의 것이 아닌가? 그런 무기를 쥐고 있으면서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또다시 떠오른다. 캘러미티 혼에 당하던 바로 그 순간이.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바로 그때 테스론은 마법의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

모든 마나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느껴졌다. 그토록 이해가 안 갔던 모든 마학 이론의 글귀들이 영혼에 각인되듯 속속 익혀졌다. 무인의 각성과 비견되는 마법사의 깨달음, 정신 고양情神高揚이었다.

그토록 다룰 수 없던 마왕의 두뇌가 드디어 테스론의 영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때의 감각을 바탕으로 테스론은 결국 7서클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 후 마법 수준은 계속 무섭게 늘어, 지금은 은의 현자로부터 받은 7서클 주문 거의 전부를 터득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당장이라도 8서클을 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 몇 달 만에 이루어진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진보였다. 전생 때 레펜하르트가 고작 서른의 나이에 9서클을 입문한 것이 납득이 갔다.

문득 테스론이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해 보니…… 차라리 육체가 바뀐 것이 다행이었어.’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을 비롯, 대륙의 모든 강자가 한꺼번에 덤벼서야 겨우 상대할 수 있었던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만약 서로의 육체 그대로, 동시에 왕년의 힘을 되찾는다면 테스론은 감히 마왕을 건드리지도 못한다.

‘그나마 육체가 바뀌어 이 정도 수준 차라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겠지…….’

고개를 저으며 테스론이 다시 명상에 들어가려던 차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렐라인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곁에 오자 테스론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떤 처벌이 떨어졌습니까?”

아다만드릴 슈트는 은의 현자 내에서도 손꼽히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걸 날려 먹은 테스론의 죄는 결코 작지 않았다. 내심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세렐라인이 빙그레 웃었다.

“일단은, 그대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상대의 강함을 정확히 측정 못 한 수호자들의 잘못도 있으니까요.”

테스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이제 겨우 마법 쪽으로 레펜하르트를 상대할 길이 보였는데 여기서 은의 현자의 지원이 끊기면 기껏 잡은 희망도 흐려진다.

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쉽군, 아다만드릴 슈트가 건재했다면 좀 더 승률이 높았을 텐데…….”

아무리 마왕의 두뇌를 제대로 써서 대마법사가 될 수 있다 해도, 역시 오러와 마법을 융합해 쓰는 레펜하르트는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놈의 권마합신!’

솔직히 정신 고양을 이룬 지금도 저건 어떻게 하는지 감도 안 잡힌다. 테스론은 분명 마왕의 두뇌를 소화해 냈지만, 그래 봤자 전생의 마왕과 겨우 같은 시작점에 섰을 뿐인 것이다. 레펜하르트야 태어날 때부터 이런 상태였을 테니까.

역시 권왕으로 살아온 그 시절의 경험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실망한 듯한 테스론의 얼굴을 보며 세렐라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해 볼게요. 아직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

테스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렐라인은 설명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분들은?”

“유서스 경은 일단 테네스 가문으로 돌아갔고, 크리스틴 양과 필레나는 옆에서 수련 중입니다.”

세렐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상황을 마저 점검하기 위해 테스론 곁을 떠났다.

연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

크리스틴은 메사이어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성광검 메사이어를 쓰고도 레펜하르트 일행은커녕 정체도 모르는 조그만 트롤 소녀에게 당한 그녀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아무리 실란의 가공할 신성력이 뒤를 받쳐 주었다 해도 일개 몬스터에게 밀렸으니 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별장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현재 메사이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매진 중이었다.

입자마자 아다만드릴 슈트에 적응해 버린 테스론, 애당초 자기가 써 오던 엘드라드를 강화했을 뿐인 유서스, 뛰어난 전투 센스를 타고 태어난 필레나는 아티팩트를 받은 즉시 그 힘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었다.

반면 크리스틴은 당시 메사이어의 힘을 절반도 제대로 못 꺼냈던 것이다. 똑같이 업그레이드 버서커 아머 받고 제대로 다룰 줄도 몰라 비명횡사한 스테반의 예도 있으니, 사실 운이 좋아서 살았지 제대로 된 오러 유저 만났으면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을 것이다.

‘실란을 되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메사이어를 완벽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해!’

과연, 크리스틴의 검풍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강렬한 신성검의 빛이 대기를 울린다. 확실하게 메사이어의 능력을 제대로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저 정도면 오러 유저 정도는 아니더라도 바로 밑까진 다다를 것 같았다. 적어도 예전처럼 테스론에게 10초도 못 버티는 수준은 벗어났다.

세렐라인이 내심 감탄을 흘렸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수준이 괜찮네?’

어차피 크리스틴이 가진 성광검 메사이어는 그리 주요 기밀이 아니었다. 막말로 맞아 죽고 적에게 빼앗겨도 은의 현자 입장에선 아플 것도 간지러울 것도 없다. 저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흡족해하며 세렐라인은 자리를 떴다.

공터 반대편의 수풀 사이에서는 필레나가 가부좌를 틀고 테스론처럼 명상에 잠겨 있었다. 세렐라인이 다가오는 걸 보며 필레나가 재빨리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어, 어서 오세요. 세렐라인 님.”

평민 출신인 필레나는 아직도 그녀를 어려워하며 극존대를 하고 있었다. 존칭받는 입장에서 기분 나쁠 것도 없는지라 세렐라인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손을 저어 인사를 받으며 그녀가 필레나에게 말했다.

“열심이시네요, 필레나 양. 다중복제의 지팡이는 좀 익숙해졌나요?”

“네, 다 세렐라인 님 덕분이에요.”

제플린에서 보인 그녀의 마법을 떠올리며 세렐라인이 칭찬을 건넸다.

“필레나 양의 마법 경지가 상당하더군요. 특히 전투만으로 보면 대마법사 수준이라 해도 믿겠던데요?”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평민 출신에 20대 후반인 젊은 여마법사, 필레나. 처음에는 도무지 탐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실력을 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레나의 경지는 벌써 7서클, 나이를 보면 천재로 태어나 가문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그 재능으로 대륙에 위명이 자자한 제이드와 동급이다.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천재도 보통 천재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아직 7서클 초입일 뿐이지만, 마법을 다루는 그녀의 전투 센스만큼은 7서클 후반인 제이드보다도 더 나은 것 같다.

‘과연, 현자 레스틴이 안목이 있긴 있었군. 어쩐지 강하게 그녀를 추천하더라니.’

세렐라인의 칭찬에 필레나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넙죽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어째 표정이 뭔가 감추는 듯한 느낌이어서 세렐라인은 잠시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 사실을 잊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이미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감춘 비밀이라 봐야 별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응원을 건넨 뒤 세렐라인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완전히 떠나가자 필레나가 안심하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휴우, 들킨 줄 알았네.”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 필레나가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고대어로 된 문양이 새겨진 검고 네모난 블록, 엘류시온의 목소리였다. 예전, 프리즈랜드에서 은의 현자의 명을 받아 마법사 할 일행을 처단할 때 손에 넣었던 고대의 아티팩트다.

마왕 레펜하르트가 아끼던 이 기물을 또 발견한 테스론은 은의 현자 몰래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챙겨 두었던 것이다. 수호자 세렐라인에게는 결코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더 강해져야 해.”

마력을 집중해 엘류시온의 목소리에 주입하며 그녀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스위치 온.”

둥근 마력장이 펼쳐지며 필레나의 전신을 감쌌다.

우우웅!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얻은 테스론은 틈나는 대로 그것을 열심히 연구했다. 하지만 지식에 비해 센스가 딸려 도저히 발동 조건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필레나에게 맡겨 보관하게 했다.

가진 두뇌조차 활용 못 하던 테스론과 달리 필레나는 타고난 재능에 어린 레펜하르트의 도움으로 마학자로서의 경지 또한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꾸준한 연구 끝에 결국 발동 조건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필레나가 나직하게 언령을 토했다.

“도전. 8단계. 최고급 숙련자용.”

유사 공간이 펼쳐졌다. 사방이 용암으로 뒤덮인 화산 지대가 필레나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발동시킨 필레나는 기뻐하며 바로 테스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정작 이 기물은 테스론에겐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의 연산력은 이미 아티팩트로 강화시킬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엘류시온의 목소리는 필레나의 소유가 되었다. 이런 기물마저 아낌없이 내준 그를 떠올리며 필레나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더 강해져서 테스론의 힘이 되어야 해!”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로 각오를 다진다.

“다시는 그가 다치는 모습을 보기 싫어!”

붉은 하늘 위로 커다란 고대 문자가 떠올라 빛을 발했다.

Welcome to Magical Beat!

2

안타레스 백국의 새로운 수도, 아라난 그라드.

그 중심에 위치한 백왕궁은 마지막 손질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외벽과 기둥 등은 전부 끝났고 내부 수리만 남은 상태였다. 레펜하르트의 뜻에 따라 가이라크라는 이름도 붙었다.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거주하던 황궁 가이라크.

모든 종족의 힘이 합쳐져 건축된 그 황궁은 대륙에서 제일 거대하고 위엄 있는 건물이었다. 비록 인간들에겐 대마궁이라 불렸지만 레펜하르트에겐 언제나 그리워하던 장소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같은 이름을 붙였다. 비록 그때와는 규모도 화려함도 비교가 안 되지만, 언젠가 다시 그 위세를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동일한 이유로 심연의 전당이라 명명된, 백왕궁 가이라크 서쪽의 거대한 홀.

심연의 전당은 사방이 대리석으로 에워싸고 화려한 벽화와 금은 장식이 치장된 장엄한 공간이었다. 드워프들이 진심을 담아 지은 건물인 만큼, 그 규모며 견고함이 현 대륙 최대의 건축물인 교황청 판테온과도 맞먹을 수준이었다.

벽마다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는 엘븐 실크로 이루어져 있고 도자기며 타일은 트롤의 손이 닿아 정교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바닥 역시 오크들이 정성을 다해 무두질한 가죽 카펫으로 촘촘하게 덮여 있다.

세상 어느 왕궁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화려하고 웅장한 심연의 전당.

이 사치스러운 공간 안에 수십 개의 허름한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 천막 입구를 헤치고 근육질 거구의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하암, 잘 잤다.”

안타레스의 제왕, 레펜하르트였다. 젊은 시종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세숫물을 갖다 바쳤다. 세수를 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종이 분한 듯 중얼거렸다.

“크으, 백왕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묵으시다니…….”

안타레스 백왕성은 제라드와 바나텔의 결투로 인해 완전히 붕괴됐다. 관용구 그대로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날아가 버렸다. 아스레일이며 안타레스 기사단, 백왕성 거주민들은 일찌감치 대피해 피해가 없었지만 살던 곳이 싹 날아갔으니 새로운 거주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현재 레펜하르트와 백왕성 주민들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백왕궁 가이라크에서 묵고 있었다.

천막 위쪽에 펼쳐진 화려한 천장을 가리키며 레펜하르트가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누추하긴? 여기 들어간 돈이 얼만데 그런 섭섭한 소릴.”

시종이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아니, 절대 누추하지 않습니다. 암요, 화려하기 그지없습죠. 하지만 누추한 것이…….”

분명 백왕궁 가이라크는 일국의 왕이 묵기에 부끄럽지 않은 웅장한 곳이었다. 하지만 아직 미완공인 것이다. 창문이며 문, 천장 일부는 여전히 공사 중이다. 그렇다 보니 내부 가재도구도 하나 안 들여놓았다. 어쩔 수 없이 홀 안에 천막 치고 잘 수밖에 없었다.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번듯한 곳에 가실 수도 있었잖습니까?”

시종의 하소연에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이, 이 정도 인원이 묵게 되면 너무 민폐가 커.”

사실 안타레스 백국은 이미 꽤나 성세를 보이고 있어 교역 도시 자루드며 여기저기 도시와 영지에 쓸 만한 저택이 꽤 있었다. 그러니 그쪽에 임시로 묵었어도 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굳이 아라난 그라드를 고집했다.

안타레스 기사와 병사, 백왕성의 거주민을 다 합치면 족히 이백여 명은 된다. 그만한 숫자가 묵으려면 아무래도 고위층 몇몇만 저택 들어가고 나머지는 천막생활 해야 하는데, 집 잃고 고생하는 이들에게 그런 대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시종에게 수건을 받아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레펜하르트가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난 괜찮던데? 솔직히 여기도 별로 불편할 거 없고.”

레펜하르트도 이종족 전사들도 그리 사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야 한겨울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자도 불편함을 못 느끼는 몸이 되어 버렸고, 다른 이종족 전사들도 워낙 오지에서 힘들게 살다 보니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괜히 남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아라난 그라드로 오자는 레펜하르트의 제안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카를이며 아스레일 등 인간 수하들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들은 아라난 그라드마저 백왕성 꼴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군대가 쳐들어온다면 모를까, 아무리 카를이 유능하다 해도 현실적으로 고작 열 몇 명 정도의 소인원이 정체 감추고 국내로 들어오는 것은 알아낼 방법이 없다. 안타레스 백국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제플린을 상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각국의 오러 유저들마다 일일이 정보원을 붙여 둘 만큼 광범위한 정보력을 갖추기엔 아직 안타레스 백국의 국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 제국이 또 오러 유저만 모아서 비밀리에 저런 식으로 쳐들어오면 대비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일국의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전투의 중추이기도 하다. 이들이 아라난 그라드에 있어 줘야 안심하고 도시 건축을 끝마칠 수 있다. 이 문제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잠자리의 불편함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레펜하르트 일행은 왕궁 안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참으로 화려한지 초라한지 애매한 생활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천막, 보기에만 이렇지 사실은 되게 고급품이라고. 오크들이 특별히 마련해 준 건데. 어지간한 석조 건물에서 자느니 여기가 훨씬 나아.”

수건을 받아 들며 시종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더군요. 천막 안에서 털가죽 깔고 자는데도 침대보다 더 편안한 것이, 이러다 도로 침대 생활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요. 하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이신데 체통이…….”

그렇게 시종이 대답하던 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천막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으갸갸갸!”

러스와 타시드의 목소리였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또 시작이네.”

시종도 웃으며 대답했다.

“아침 정례 행사입죠.”

“난 요새 저 소리 안 들으면 일어난 것 같지가 않다니까?”

그 치열한 사투 이후, 레펜하르트는 물론 다른 이들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실란이 바로 신성력을 써 그들을 치유했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은 남아 있었다.

재생력이 있는 아틸카, 그리고 육체 하나는 대륙 최강인 제라드며 레펜하르트는 하루 만에 자리 털고 일어났다. 단지 탈진했을 뿐 깊은 상처는 없던 이니야도 그럭저럭 사흘 만에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러스와 타시드는 일주일이 다 되도록 여전히 부상을 달고 있었다.

심연의 전당 안쪽에 설치된 오크리쉬 텐트.

그곳에서 분홍색 성광이 찬란한 빛을 뿌렸다.

칼로 베이는 고통도 눈 깜빡하지 않고 견뎌 내던 굳건한 의지의 소유자, 러스가 비명을 질렀다.

“시, 실란! 그만! 그만! 못 참겠어!”

옆에 누워 있던 타시드도 절규했다.

“아악! 뼛속까지 아프다!”

야멸찬 실란의 대꾸가 뒤를 이었다.

“참아, 이 양반들아! 죽을 만큼 아프다는 거 나도 잘 안다고! 뼛속까지 오러가 박혔으니 당연히 거기도 아프겠지!”

현재 실란의 신성력이라면 어떤 부상이라도 하루 안에 깔끔히 완치시킬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들이 일주일째 누워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러스와 타시드의 부상은 단순한 피륙의 상처가 아닌 것이다.

상대한 오러 유저의 잔재 오러가 체내에 남아 있으니, 실란의 치유 주문과 충돌해 어마어마한 고통을 낳는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혹독한 단련을 이겨 낸 레펜하르트조차도 ‘사람 살려!’를 외칠 만한 격통이다.

러스나 타시드가 인내심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한 번에 감내할 정도도 아니었다. 단숨에 치료하려다가는 트라우마 생겨 정신적으로 문제 생길 수도 있는 수준이어서 실란도 일주일에 걸쳐 조금씩 치유력을 부여해 상처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으악! 으악! 으아악!”

“오크 살려! 아악! ……앗! 돌아가신 아버지, 어쩐 일로 이곳에?”

고통스럽다 못해 환각까지 보이는 모양이다. 이 처절한 절규에 천막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났다.

“아, 아침이네.”

“저 소리 들리는 걸 보니 일어날 때가 됐구먼.”

“닭 우는 소리보다 정확하지, 저거.”

한때는 러스며 타시드의 비명에 겁을 잔뜩 먹은 시종과 하녀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쯤 듣고 나니 다들 무덤덤해져 버렸다. 다들 그냥 아침이구나 하는 얼굴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비명이 흐르는 천막 옆에서는 거대한 다이어울프가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었다. 타시드의 애랑, 흑왕이었다. 처음엔 주인의 절규에 잔뜩 긴장해 으르렁댔지만 요새는 한쪽 귀로 흘리며 어서 아침이나 내놓으라는 듯 바닥을 앞발을 두들길 뿐이었다.

“쯧쯧. 언제까지 저래야 하려나?”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는 세면을 한 뒤 의관을 갖춰 입었다. 전투 중에는 웃통 까고 사는 그이지만, 평소에는 그래도 왕다운 차림을 하고 살고 있었다.

사실 요즘 들어서는 의관 안 갖추는 경우가 잦았는데 사부 다시 만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어 ‘아, 저렇게 되면 안 되잖아! 정신 차려야지!’라는 자성의 기회가 되어 주었다.

“사부님은?”

시녀인 엘프 여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밖에서 칼켄 공과 대련 중이십니다.”

☆ ☆ ☆

심연의 전당 밖의 커다란 광장.

그곳에서 거구의 오크와, 더 거구의 인간 노인이 서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허허, 오크 녀석이 제법 칼질을 할 줄 아는구나!”

제라드가 껄껄 웃으며 펀치를 날린다. 육중한 일격이 대검, 마그눔의 검면을 강타한다. 칼켄이 뒤로 10여 미터 넘게 주르륵 밀려났다.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이면서도, 칼켄은 감탄해 마지않는 눈으로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평생 최강자로만 살아온 그였다. 같은 오크 중에는 누구도 그의 상대가 없었다. 유일한 적수가 소꿉친구로 어릴 때부터 티격태격해 온 스탈라였다. 결국 부부가 되었지만 아내는 여전히 그의 훌륭한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스탈라는 어쩔 수 없는 여인이었고, 칼켄보다 근력이며 파워가 떨어진다. 그녀의 오묘한 기술은 존경할 만하지만 역시 칼켄보다는 약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노인은 모든 면에서 그를 압도한다!

일단 덩치부터가 달랐다. 칼켄은 평생 자기보다 큰 사람은 처음 보았다. 예전 황야에서 만났던 오우거랑 비슷해 보인달까?

파워도 스피드도, 압도적이었다. 펀치며 킥이 스칠 때마다 ‘뱀들의 왕’이라는 엘더 스네이크의 꼬리치기를 맞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이조차도 제라드에게는 기술이 아니란 점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비기를 쓰지 않고 그냥 손발만 놀리는데도 상대가 안 된다!

“굉장하다! 늙은 인간 투사여! 그대야말로 투신鬪神이다!”

경외 가득한 눈으로 칼켄이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제라드가 허허 웃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네 녀석도 보통이 아니다. 좀 어렸으면 데려다 가르쳤을 텐데, 아쉽게도 너무 나이를 먹었구나.”

저 ‘데려다 가르친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 칼켄은 눈만 껌뻑거렸다. 하지만 묘하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이상하네?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어쨌거나 이 정도로 초월적인 강자를 만나는 것은 투사로서 최고의 영예다. 칼켄이 마그눔을 들고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했다.

“나의 맹우, 마그눔이여!”

대검이 찬란한 오러를 뿜으며 그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떠오른다. 그 상태로 칼켄이 양손에 수도 형태의 블레이드 오러를 생성시켰다.

“이것이 나의 최고의 공격! 받아 주겠는가? 위대한 투사여!”

제라드가 흐뭇해하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오너라, 음미해 보자꾸나.”

백발을 휘날리며 칼켄이 기합과 함께 몸을 날렸다.

“타아앗!”

양손의 수도가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서 합일된다. 합일된 블레이드 오러가 마그눔과 결합해 불규칙적인 뇌전을 그려 낸다. 그의 필살기인 벼락 떨구기, 칼켄은 요 몇 년간 고련을 통해 그것을 한층 더 강한 궁극기로 심화시켰다.

“날벼락 떨구기!”

오크답게 기술 이름이 좀 단순하긴 하지만, 어쨌건 이 오러 스킬은 벼락 떨구기의 몇 배나 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푸른 전격이 제라드의 가슴을 후려갈겼다.

제라드가 가슴을 늠름하게 폈다.

“더블 스파이럴 가드!”

우르르릉!

빛이 터지며 대지가 진동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레펜하르트가 감탄했다.

‘허, 칼켄 저 양반 그동안 더 세졌네.’

처음 만났을 때 레펜하르트는 칼켄과 동수를 이룬 적이 있다. 5중첩 캘러미티 혼을 터득하고 모든 면에서 무인으로서 강해진 지금은 확실히 칼켄을 능가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붙으면 승부를 장담 못 하겠는데?’

칼켄 역시 그동안 계속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칼켄의 나이는 이제 마흔다섯, 오크로서는 중년이 지난 나이지만 여전히 청년기의 굴강한 육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성기의 육체에 노숙한 경험, 타 종족 오러 유저와의 만남과 온갖 전투로 이해 그의 기량은 더더욱 높아진 상태였다.

‘뭐, 그래 봤자 사부님에겐 안 통하지만.’

날벼락 떨구기는 분명 강력한 기술이었지만 제라드의 더블 스파이럴 가드에 막혀 정작 육체에 닿지도 못하고 가로막혔다. 하긴, 제라드로 하여금 더블 스파이럴 가드를 쓰게 한 것부터가 저 기술의 위력이 경천동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어지간해서는 그냥 스파이럴 가드만으로 막았을 테니까.

잠시 후, 한 대 거하게 맞은 칼켄이 허공에서 세 바퀴 돌며 얼굴부터 착지하는 서글픈 광경이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쯧, 한 방이구먼.’

대련을 옆에서 보고 있던 푸른 곰 부족이며 다른 부족 출신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터트렸다.

“오오오오?”

“칼켄 족장님이 한 방에!”

“과연 투신이시다!”

“역시 백왕님의 스승다운 무위다!”

존경하는 족장이 개같이 날려 갔는데도 구경하는 오크들 중 분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제라드를 향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끝없는 존경과 경외의 시선만을 보일 뿐이었다. 주인 바라보는 충견도 저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날벼락 떨구기마저 안 통하다니? 진정 대단하도다!”

심지어는 맞고 날아간 칼켄조차도 전혀 분노한 표정이 아니었다.

“역시 오크…….”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오크는 강자를 숭상한다.

또한 무조건 큰 걸 미덕으로 치며, 단련된 육체를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여긴다.

그런데 제라드는 ‘크고 아름다운 강자’다! 어찌 경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오크들에게 큰 은인인 레펜하르트의 스승인 만큼, 딱히 제라드에게 패한다 해도 자존심에 상처 입을 것이 없는 것이다.

덕분에 현재 오크 전사들 대부분은 제라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스승의 파워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잘 패거라 빠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의 육체는 강철이시다

아아, 부러워라 스승의 근육

아아, 본받으리 스승의 주먹

등의 괴상망측한 노래까지 불러 대며 한 수 가르쳐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무슨 신흥 사이비 종교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제라드도 그런 반응이 싫지 않은지 기분 내킬 때마다 친절하게 한 수씩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대씩 두들겨 팼다는 소리다.)

“하여튼…… 사부가 와서 정말 다행이었지.”

새삼 당시의 사투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검성 바나텔의 힘은 굉장했다. 지금의 그는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제라드가 없었다면 기껏 얻은 또 한 번의 생을 그대로 접을 뻔했다.

‘용케 도망칠 수 있었다 해도, 러스와 타시드는 잃었을 테고.’

문득 레펜하르트는 품을 뒤져 작은 은빛 엠블렘 하나를 꺼냈다. 제이드를 쓰러뜨렸을 때 발견했던 물건이었다.

“흐음.”

옅은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마저 품을 뒤졌다. 이번에는 저 은빛 엠블렘 십수 개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이 수많은 은빛 엠블렘을 보며 그는 사부와 재회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3

쓰러진 지 하루 뒤, 제라드는 다시 깨어났다. 그때 레펜하르트 일행은 지원군의 호위를 받으며 아라난 그라드로 향하고 있었다. 숙영지의 모닥불을 앞에 두고 레펜하르트는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사부?”

따지듯 묻는 것은 아니었다. 제라드의 등장은 분명 기적이나 다름없는 행운이었다. 그가 없었으면 입을 피해는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다. 당연히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

그저 순수한 의문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아는 짐 언브레이커블은 제자가 위험에 처했다고 구하러 온다거나 하는 그런 소심한 문파가 아닌 것이다.

딱히 제자의 생명을 신경 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라면 그 어떤 위험이 닥쳐도 굳건히 헤쳐 나갈 것이다!’라는 굳은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볼일이 아니고서는 제라드가 자신을 찾을 리가 없었다.

“음…….”

제자의 질문에 제라드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숙영지 내에는 오크와 드워프, 인간으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저마다 불을 피우고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라드가 수염을 쓰다듬더니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 소문은 오가며 들었다. 제법 희한한 짓을 하고 다닌다고 하더구나? 노예 것들 모아다 사람 취급 하면서 왕국도 세웠다며?”

“아, 예…… 그냥 어쩌다 보니…….”

레펜하르트가 뜨끔한 표정으로 제라드의 눈치를 보았다.

생각해 보니 아무리 그의 사부라지만, 제라드는 엄연히 이종족에 대한 편견 속에서 살아온 이 시대의 인간이었다. 상식인이라면 분명 노예들을 데려다 희한한 짓 하며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화를 낼 것이었다.

그렇다. 상식인이라면.

“잘했다!”

짝!

제라드가 호쾌하게 레펜하르트의 등을 두들겼다. 그리고 캑캑대는 제자를 향해 흡족한 미소를 보냈다.

“암! 짐 언브레이커블이 사고를 치면 이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지! 허허허!”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그의 사부를 바라보았다. 어째 전혀 화를 내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꽤 기분 좋아 보이기까지 한다?

“어, 사부…… 혹시 사부도 이종족들을 사람으로 느끼게 되셨습니까?”

레펜하르트가 은근 기대를 하며 물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혹시나 제라드도 그의 사상에 감화된 것일까?

물론 그것은 짐 언브레이커블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였다. 제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사람?”

어째 표정이 뭔 소리 하는지 도통 못 알아듣겠다는 듯했다. 레펜하르트가 풀어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혹시 사부도 엘프나 오크 들을 인간처럼 사람으로 대하게 되셨나 해서…….”

얼토당토않다는 듯 제라드가 대꾸했다.

“무슨 소리냐? 어차피 다 똑같이 약한 것들 아니냐? 인간이나, 이종족이나 그게 그거지.”

그렇다.

제라드는 이종족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도 사람으로 안 보고 있었던 것이다!

딱히 제라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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