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장 사투私鬪와 사투死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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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 도시 자루드의 참상을 본 레펜하르트 일행은 전력을 다해 안타레스 백왕성으로 달렸다.
카를이 준비해 준 명마는 자루드에 그냥 버려두었다. 극강으로 단련된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는 스피드, 지구력 모두 이름난 명마를 압도적으로 능가한다. 평소에는 체력 보존을 위해 말을 이용하지만 이토록 급할 때는 차라리 두 발로 뛰는 것이 빨랐다.
오러수를 이용하는 이니야와 변신이 가능한 아틸카도 레펜하르트 못지않은 스피드와 지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시리스를 악몽의 흑마, 블랙 나이트메어로 변신한 아틸카가 등에 태우고 달리니 세 시간 만에 백왕성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러스의 예상과 달리 무려 두 시간 이상을 단축한 것이다.
안타레스 백왕성 인근의 숲 속.
레펜하르트는 계속 땅을 박차며 질주했다. 아무리 그라도 세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니 슬슬 숨이 가쁘고 피로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제 이 숲을 통과해 언덕만 넘으면 안타레스 백왕성이었다.
뒤따르고 있는 이니야에게서도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레펜하르트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이니야 양?”
그녀가 몰고 있는 은빛 순록은 자신의 오러로 구현한 영수, 구현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본인의 오러를 소모하는 수법이었다. 두 발로 뛰는 것보다야 월등히 체력, 오러 소모가 적지만 그렇다 해도 이리 장시간 구현하고 있으니 힘들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니야는 땀을 흘리면서도 활짝 웃었다. 레펜하르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엄살 피울 만큼 단련을 게을리하진 않았어요.”
반면 아틸카는 시리스까지 태우고도 비교적 안색이 평온했다.
강한 재생력을 지닌 트롤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월등한 지구력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트롤 주술로 장거리 달리기에 특화된 마수, 블랙 나이트메어로 변신했으니 스피드는 비슷할지 몰라도 지구력만큼은 두 사람을 크게 능가한다.
흑마로 변신한 아틸카의 갈기를 붙잡은 채 시리스가 근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은 무사할 까요?”
“그리 큰 기대는 할 수 없겠소만…….”
아틸카가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루드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현재 백왕성을 침략한 이들은 무려 검성을 비롯해 열 한 명이나 되는 오러 유저들이다. 아무리 러스와 타시드가 날고뛰어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싸워 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 전투라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전력이 비슷할 때의 이야기다. 이토록 절대적으로 전력 차가 나면 결과는 뻔하다.
하지만 아틸카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절망을 앞에 두기까진 희망을 가지는 것이 생명 지닌 이를 위한 자연의 가르침. 믿어 봅시다, 그들이 무사하기를.”
네 사람은 빠르게 숲을 빠져나왔다. 백왕성이 가까워지니 점차 하늘과 땅을 울리는 강렬한 굉음이 들려왔다.
계속 땅을 박차고 달리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뭐지, 이 엄청난 기운은? 대체 백왕성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상식을 초월한 엄청난 오러의 힘이 끝없이 맞붙고 있었다. 특히 그중 하나는 상당히 익숙한 느낌이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백왕성 하늘이 선홍색과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익숙한 느낌의 황금색 오러는…….
“……설마?”
드디어 네 사람이 백왕성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까지 올랐을 때였다. 이니야와 아틸카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어머나?”
“허억? 뭐요, 저것들은?”
괴물 두 마리가 날뛰고 있었다. 비록 인간의 노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본 저 두 사람은 그냥 더도 덜도 말고 그냥 괴수 그 자체였다. 사방을 초토화시키는 두 괴물의 전투에 레펜하르트 일행은 모두 석상처럼 굳어 제자리에 섰다.
특히 이니야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저 두 괴물 중 한쪽, 황금빛을 뿜어내는 거구의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세상에 저런 사내가 레펜하르트 님 말고 또 있었다니!’
이럴 수가!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이는 레펜하르트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정말 세상은 넓어도 너무 넓구나!
그렇다고 이니야의 감정이 저 근육질 노인네로 옮겨 갔다는 소리는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냥 근육이 아니라 ‘문무 겸비’다. 그녀가 오직 근육만 탐했다면 오크도 취향에 맞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실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엘프 최강임을 자부하는 이니야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역시 인간은 무서워…….’
아틸카가 잽싸게 흑마의 변신을 풀고 물었다.
“왕이시여, 황금빛 오러에 저런 육체라면 혹시…….”
멍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맞소, 아틸카. 내 사부요…….”
☆ ☆ ☆
레펜하르트는 눈을 비빈 뒤 다시 전장을 바라보았다.
틀림없었다.
“진짜 사부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악몽 속 단골로 출몰하던 바로 그 양반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시리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레펜하르트 님? 왜 뒷걸음질 치세요?”
“아니, 그냥 나도 모르게…….”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육체에 각인된 공포가 주인의 의지를 거역하고 멋대로 움직인 모양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가 사부를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은가? 비록 수행 과정이 고통스러웠다고는 하지만 다 잘되라고 한 짓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사부님이 여기 계신 거지?’
문득 몸이 흠칫 떨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두려워할 이유가 있었다.
‘서, 설마 새로운 수련법이라도 개발하신 건 아니겠지?’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진정하고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사부의 저 ‘사랑 가득한 폭력’이 뼛속을 넘어서 영혼까지 각인되었다지만, 그도 전생에서 마왕씩이나 불리던 위대한 대마법사였다. 이 정도도 못 이겨서야 그런 지고한 경지에 오를 수 있을 리가 없지!
마음을 가라앉히며 레펜하르트는 차분하게 상황을 살폈다. 그의 시선이 제라드의 상대, 선홍색 오러를 뿜어 대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저자가 검성 바나텔인가 보군.”
두 사람이 떨어졌다 다시 맞붙을 때마다 구름이 반으로 갈라지고 대지가 흔들린다. 빗나간 기격탄이며 스트레이트 캐논이 세상을 황금색으로 물들일 때마다 경치 자체가 바뀌어 버린다.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광포하게 날뛸 때마다 언덕이 들판이 되고 들판이 구덩이가 된다.
실시간으로 지도를 바꿔 대는 저 두 사람의 위력은, 아무리 차분하게 바라본다 해도 무덤덤해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허, 사부가 저 정도로 괴물이었나?”
하산 전에 그는 몇 번이나 제라드와 대련을 붙은 적이 있다. 그때도 아무리 두들겨도 꿈쩍 안 하는 제라드를 보며 괴물이라 기막혀했었다. 물론 당시 사부가 봐주면서 자신을 상대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와, 봐주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사부 표현 그대로 어루만지는 수준이었구나, 그거.’
지금 보이는 바나텔과 제라드의 기량은 전성기의 검성 사이러스와 권왕 테스론조차도 능가하는 듯 보였다. 사이러스와 테스론이 힘을 합쳐도 바나텔이나 제라드, 둘 중 한 명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하긴, 당시 두 사람은 갓 쉰을 넘겼었고 현재의 제라드와 바나텔은 여든을 넘긴 나이다. 수행 시간만도 30년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 당연히 경지도 다르겠지.
문득 소름이 끼쳐 레펜하르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맙소사, 전생 때 저 양반들이 있었으면 나도 위험했겠군.’
아무리 저들이 강해도 레펜하르트 역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10서클의 대마법사, 전생의 그가 감당치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사이러스나 테스론 대신 저들이 엘린이나 제이드와 함께 덤벼들었다면 확실히 시공 회귀를 할 여유는 없었으리라. (불쌍한 잡탕 용사 알렉스는 어느새 레펜하르트의 기억 속에서 삭제되어 있었다.)
한편, 시리스는 다른 이들과 달리 제라드와 바나텔보다는 파괴된 백왕성 인근을 더 주시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걱정하고 있던 두 사람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반색을 하며 외쳤다.
“레펜하르트 님! 두 사람 다 살아 있어요!”
엘프다운 가공할 시력으로 들판 한쪽에 주저앉은 러스와 타시드를 발견한 것이다. 원래의 트롤 형태로 돌아온 아틸카가 표정을 환하게 밝혔다.
“그렇구려! 비록 부상은 심해 보이지만…….”
그때였다. 갑자기 이니야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앗! 레펜하르트 님!”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구경만 하고 있던 오러 유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명은 부상당한 러스와 타시드에게 덤벼들고, 나머지는 백왕성을 향해 일제히 몸을 날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움직였다.
“아차!”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저 괴물 같은 검성이야 사부가 상대해 준다 해도, 아직 열 명이나 되는 오러 유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재빨리 연환 기격포를 날리며 레펜하르트는 오러 유저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연환 기격포가 현란한 파괴의 궤적을 그리며 대지에 커다란 금을 그었다. 그 위세에 달려오던 오러 유저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긴장한 채 자신을 응시하는 그들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호통을 터트렸다.
“누가 감히 나의 백성들을 핍박하느냐!”
전생에도 제국의 황제로 군림했고, 현생에서도 권왕다운 말투를 고심한 레펜하르트다. 두 가지가 융합되니 자연스럽게 저런 식의 호통이 나와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레펜하르트도 짐 언브레이커블에 물들대로 물든 탓인지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웅장한 기합과 함께 몸을 날렸다.
“타아앗!”
또 한 줄기의 황금빛 유성이 백왕성 앞 들판으로 날아들었다.
☆ ☆ ☆
빛의 궤적이 대지를 강타했다. 폭음과 함께 빛이 사라지며 구릿빛 청동상 같은 거대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들판 위에 우뚝 선 그의 모습에 오러 유저들이 긴장의 표정을 떠올렸다.
“권왕 레펜하르트…….”
뒤이어 아틸카와 이니야도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레펜하르트 곁에 섰다. 무형의 기운을 흩뿌리며 세 사람이 반파된 백왕성 앞을 가로막았다.
착지한 레펜하르트가 강렬한 눈빛으로 오러 유저들을 노려보았다. 그 위압감에 오러 유저들은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산악을 연상케 하는 우락부락한 근육에 흔들림 없는 무형의 투기, 과연 전설적인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의 당대 계승자다운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특히나 저 육체는 참으로 인간미가 없었다. 똑같이 어미 뱃속에서 나온 인간일진대 어떻게 사람 몸이 저리 또박또박 각이 졌단 말인가? 그래도 권황 제라드에 비하면 많이 인간미가 남아 있기는 한데, 그래 봤자 사람 같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괴물의 제자는 역시 괴물이었다.
게블릭 경이 침을 꿀꺽 삼키며 신음을 흘렸다.
“과연 명성대로의 기세로다.”
주먹을 들어 올리며 레펜하르트가 여덟 명의 오러 유저들에게 고함을 쳤다.
“이곳은 안타레스 백국의 땅, 그대들은 누구이기에 감히 이 땅을 침범하는가?”
오러가 실린 외침이 귀청 따갑도록 울려 퍼졌다. 오러 유저들의 안색이 굳었다. 레펜하르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전신을 저릿저릿하게 달구고 있었다.
“역시 권왕…….”
“대단한 기운이군.”
더 이상 기세에서 밀릴 수는 없다. 검성과 함께 바슈탈론 제국에서 온 오러 유저, 리카본 경이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나는 바슈탈론의 리카본! 세이어를 모독하고 이단의 길을 걷는 자여! 세이어와 신성 제국의 이름으로 그대를 처단하겠다!”
“역시 바슈탈론 쪽이었나. 하긴 그 동네 예전부터 그랬지.”
레펜하르트는 납득했다. 전생 때 암흑제국을 상대로 제일 날뛰던 것도 바슈탈론 제국이었다.
황금빛 오러가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일어났다. 투기가 폭발하며 그를 중심으로 광풍이 불었다.
“좋다!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이니야도 검을 뽑으며 백은의 오러를 전신으로 휘감았다. 아틸카가 어깨를 들썩이며 주술의 노래를 불렀다.
“내 몸이 크게 자라, 노간주나무 푸름을 띤 삼림을 발로 찼도다!”
전투태세를 갖추는 세 사람을 향해 각국의 오러 유저들도 저마다 자기소개를 하며 오러를 일깨웠다.
“그라임의 게블릭이다.”
“테이칸의 웨를이라 하오.”
“라스틸의 나스단이오.”
그들의 소개를 들은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구성원의 출신이 죄다 다른 것이다. 황제 노릇 해 보기도 했던 그이기에 바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제국에서 제 전력 아끼려고 여기저기서 강제로 끌어왔나 보군.’
보아하니 대부분 각국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저 정도의 오러 유저가 움직였다면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을 텐데, 레펜하르트나 카를은 저런 정보를 접한 적이 없었다. 바슈탈론 제국에서 상당히 은밀하게 기밀을 유지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래야 이런 기습 작전을 성공할 수 있을 테니까.’
양측의 투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전투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또 ‘그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그런데 누가 싸우지?’
각국의 오러 유저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보았다.
싸우긴 싸워야 한다. 하지만 여러 명이서 한 명을 공격하는 것은 기사의 명예에 누가 된다. 그렇다고 세 명만 나서자니 남은 이들에게 밑천 까발리는 짓이 되어 버린다.
‘젠장, 또 이 문제냐?’
리카본은 혀를 찼다. 러스와 타시드를 상대할 때야 검성이 있었으니 몸 좀 사려도 되지만 지금은 꼭 싸워야 할 때가 아닌가? 하지만 자신도 몸 사리는 판에 뭐라 타박을 하기도 그렇고…….
결국 비교적 머리가 트인 나스단이 또 나섰다.
“이봐요들. 이런 이유로 제국의 명을 거부한다면 왕국에도 폐가 될 터, 이 역시 충성의 명예를 해치는 일이오. 뭔가 하나는 포기해야 하지 않겠소?”
바실리 출신의 자유 오러 유저, 크로아틀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합공을 합시다.”
합공이란 말에 오러 유저들 대부분이 인상을 쓴다. 그때 나스단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신 비기는 숨기고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쓰는 거요. 아무리 기본적인 기술만 써도 이쪽이 수적으로 월등한데, 설마 지진 않을 것 아니오?”
그럴듯한 말이었다. 아무리 짐 언브레이커블의 위명이 대륙에 진동한다지만 그들 역시 똑같이 오러를 각성하고 똑같이 초인의 반열에 든 자들이었다. 비록 기본적인 기술만 쓴다 해도 여럿이서 권왕 하나 감당 못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쪽이 제약을 둔다면 합공을 한다는 불명예 역시 상당히 퇴색하는 바, 어떻게든 정당한 대결이었다고 우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군…….”
“뭐, 그 정도라면…….”
오러 유저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들의 투지가 확연하게 강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별 지랄을 다 해 대네.”
레펜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까짓 자기들만 알아주는 명예 때문에 저따위 헛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왜 병사들이 기껏 나눠 준 군복에 멋대로 다림줄 그어 놓고 자기들끼리 ‘봐라! 이거 멋있지?’ 하면서 잘난 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민간인이 보기엔 똑같이 허름한 군복일 뿐이구먼.
‘하지만 덕분에 편하게 싸우게 됐군. 말리진 말아야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강하게 두들겼다.
“좋다! 누가 나를 상대하겠느냐!”
쾅!
주먹이 부딪치며 가공할 파문이 사방으로 뻗었다. 레펜하르트가 시위라도 하듯 연신 양 주먹을 계속 부딪쳤다. 그때마다 빛의 파문이 터지며 굉음을 울렸다.
노골적으로 힘자랑을 해 대는 그 모습에 오러 유저들이 눈을 빛내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당대의 권왕, 그 위명 높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사다.
만약 저자의 목을 베게 된다면 그 명예 또한 대단히 클 터!
‘그렇다면!’
‘권왕의 목은 내가!’
노골적으로 대부분의 살기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흘러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전히 이종족에 대한 편견을 벗지 못한 이들이다. 엘프인 이니야나 트롤인 아틸카 따위는 관심 밖인 것이다.
저들의 작태에 할라인 왕국의 카메룬 경이 혀를 찼다.
“쯧쯧…….”
다른 이들과 달리 카메룬 경은 이종족을 경시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경시하긴 경시하는데, 단 한 명만은 경시하지 않았다.
할라인 왕국은 대륙에서도 가장 연금술사 길드가 성행한 왕국, 그곳 출신은 카메룬 경은 젊은 시절부터 저 전설의 트롤 상아어금니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 왔다. 안 그래도 얼마 전 먼 친척뻘인 오러 유저 카피르 경이 상아어금니에게 처맞고 반년간 요양 들어갔다는 소릴 들은 적도 있었다.
사실은 아틸카가 아니라 타시드에게 처맞은 것이지만 카피르 경은 굳이 그런 헛소문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두들겨 맞은 것은 사실이니, 웬 듣도 보도 못한 오크보다는 그래도 악명이 자자한 상아어금니에게 패했다는 쪽이 그나마 명예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아틸카에게도 많이 맞았으니 아주 거짓말도 아니었고.
하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카메룬 경은 아틸카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블레이드 오러를 뽑은 채 카메룬 경이 아틸카를 노려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저놈들도 보통 놈들이 아닌데 어찌 권왕만 노리는고? 누군가는 저들을 견제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상황 파악을 할 줄 아는 이는 카메룬 경뿐이 아니었다. 바실리의 기사, 왈그란 경 역시 저 보랏빛 머리의 엘프 여인, 이니야를 경계하고 있었다.
사실 이니야는 겉보기엔 전혀 강해 보이지 않는다. 전신이 잘 단련되어 가녀리기보다는 건강미 넘치는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워낙 날씬하고 잘 빠진 몸매의 소유자다. 게다가 눈처럼 흰 살결과 풍만한 가슴, 엘프 여인에게 익숙한 러스조차 순간 혹했을 정도로 놀라운 미모는 절대 그녀를 전사로 보이지 않게 한다.
하지만 경험 많은 오러 유저인 왈그란 경은 이니야의 전신에 갈무리된 가공할 기운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저 기운만으로도 결코 그의 밑이 아니었다.
‘굉장한 검사다. 엘프라고 얕잡아 볼 수가 없겠어.’
엘프 검사라면 기껏해야 슬레이어 정도라 생각해왔던 왈그란 경에게 이니야의 존재는 충격 그 자체였다. 긴장하며 그는 이니야를 노려보았다.
왈그란의 살기가 이니야를 향해 흘러갔다.
카메룬의 살기가 아틸카를 향해 흘러갔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오러를 각성한 자, 기감만으로도 주위의 기운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다. 말은 없지만 모두 두 사람의 생각을 짐작했다.
머리가 트인 축인 나스단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애창, 레드 스피어를 들었다. 오러 유저치고는 특이하게 그는 검 대신 창으로 오러를 각성한 케이스였다. 창끝을 이니야에게 겨누며 그가 중얼거렸다.
“하긴, 명예 욕심 부릴 때가 아니구려.”
테이칸 왕국의 오러 유저, 웨를 경도 아틸카 쪽으로 투기를 돌렸다.
테이칸 왕실에 충성하는 그는 권왕 레펜하르트에 대해 전혀 악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저 간악한 소아 성애 변태 오러 유저, 란타스를 격살한 그에게 살짝 호감도 느끼고 있었다.
그저 명령 때문에 이 자리에 오긴 했지만, 왕국의 수치를 제거해 준 레펜하르트에게 검을 겨누는 것이 영 찝찝하던 차였다.
“차라리 트롤이나 상대하는 쪽이 속이 편하지.”
네 명의 오러 유저가 레펜하르트를, 나머지 오러 유저가 두 명씩 편을 맺고 아틸카와 이니야를 상대하기 위해 기세를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양측의 투기가 점점 거세지며 끓어오른 공기가 부딪쳐 웅웅거리며 울렸다.
저만치서 따로 싸우고 있는 두 괴수에 비하면 많이 손색이 있지만, 이들 역시 초인 중의 초인이다. 그런 오러 유저가 십수 명이 모였으니 그 기세가 참으로 굉장했다. 순식간에 사방에 폭풍이 불며 먼지가 자욱하게 날렸다.
어느 순간,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섰다.
“타앗!”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양측 모두가 몸을 날리며 서로 격돌했다.
2
사부는 말했다.
-자고로 싸움은 선빵이 최선이니라.
사부는 또 말했다.
-여러 놈을 상대할 땐 어떻게 하냐고? 일단 하나 조지고 봐! 생각은 그다음에 해도 충분하다!
제라드의 가르침은 과연 몇 번을 곱씹어도 우러나오는 맛이 있다.
‘선수 필승!’
자신을 노리는 네 명의 중장년 오러 유저들, 레펜하르트가 대뜸 그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일단 하나 조지고 생각하자!’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순식간에 그중 한 명의 코앞까지 닥쳤다. 시야 가득 몰려오는 저 근육의 먹구름에 리카본 경이 기겁했다.
“이, 이런!”
그냥도 위압감 넘치는데 코앞에서 보니 정말 공포 그 자체였다. 리카본이 정신없이 검을 들며 오러 가드를 펼쳤다. 그때 레펜하르트가 대뜸 정권을 날리며 소리쳤다.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
정권의 주위로 다섯 개의 황금빛 파동이 일어 올라 한 점으로 수렴되며 모든 파괴력을 집중시킨다. 찬란한 빛과 함께 섬광이 리카본의 전신을 강타했다.
콰앙!
폭발과 함께 리카본이 피투성이가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검이 부러지고 갑옷이 박살 나 여기저기 흩어진다. 다른 오러 유저들이 기겁해 외쳤다.
“이런!”
“리카본 경!”
주먹을 거두며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일단 한 놈 조졌고!”
오러 유저들을 앞에 두고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두들긴 것은 그저 힘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가 무슨 드러밍하는 고릴라도 아니고, 강적들을 앞에 두고 왜 쓸데없이 힘을 빼겠는가?
비록 이런 육체에 들어와 이런 꼴로 살고는 있지만 그는 분명 마법사였고, 전투 전 냉철히 전략을 짜는 데 익숙했다. 힘자랑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전용 술식,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가떨어진 바슈탈론 제국의 오러 유저, 리카본은 저 한 방으로 즉사해 버렸다. 아무리 출력을 낮추었다 해도 캘러미티 혼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기였다. 그걸 정통으로 맞았으니 살 수 있을 리가 있나?
숨이 끊어진 리카본을 보며 다른 오러 유저들이 신음을 흘렸다. 오러를 각성한 자가 일격에 죽는 경우는 정말 흔하지 않다.
“맙소사…… 리카본 경이…….”
“단 한 방에…….”
사지가 뒤틀린 리카본의 시체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바보 같은 놈.’
비록 기습이었다지만, 리카본은 바슈탈론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오러 유저였다. 평소처럼 진지하게 전력을 다했다면 아무리 그래도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의 위력에 일격사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갈고닦은 비기를 썼다면 어떻게든 위력을 흘리거나 회피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리카본은 스스로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쓴다고 제약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하는 와중에도 기본적인 오러 가드만 펼쳤다. 덕분에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고 모든 위력을 고스란히 맞아 버린 것이다.
‘하여튼, 마음가짐이란 게 참 중요하다니까?’
뭐, 레펜하르트도 유서스와 처음 조우했을 때 똑같은 짓을 했으니 남 말 할 처지는 못 되지만.
덕분에 각국의 오러 유저들은 허무하게 전력 하나를 잃게 되었다.
“젠장!”
욕설을 흘리며 남은 세 오러 유저들이 일제히 레펜하르트를 공격했다.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사방에서 찔러 왔다. 딱히 변화를 가미하지 않은 기본적인 블레이드 오러였지만 동시에 날아드니 회피할 곳이 없었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스파이럴 가드!”
황금빛 오러의 소용돌이가 블레이드 오러들을 일제히 밀쳤다. 전력을 다해 비기를 써도 뚫기 힘들 판에 기본적인 블레이드 오러만 날렸으니 상대가 될 리가 있나? 당황한 오러 유저들이 다시 자세를 고치려는 찰나였다.
“헙!”
레펜하르트가 기합을 뱉으며 땅을 박찼다.
세 오러 유저들이 눈을 부릅떴다. 어이없게도 그는 세 오러 유저들에게 돌진한 것이 아니었다. 저만치 떨어진, 이니야를 상대하는 나스단과 왈그란 경이 목표였다.
“동토의 칼날!”
이니야는 검무를 추며 백은의 섬광을 연신 뿌려 대고 있었다. 그녀의 블레이드 오러가 초승달처럼 휜 채 나스단과 왈그란 경의 주위를 점유하며 날아든다.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쓰다 보니 딱히 맞받아칠 방법이 없어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나며 공세를 피하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기격탄!”
날아든 레펜하르트가 대뜸 기격탄을 쏘아 나스단에게 날렸다. 나스단도 허겁지겁 창날에 깃든 블레이드 오러로 기격탄을 막아 냈지만 그 위력이 너무 높아 주룩 뒤로 밀렸다.
그렇게 상대를 멀리 떨어트려 놓은 뒤, 계속 돌진하며 레펜하르트가 이니야에게 눈짓했다.
‘뒤를 부탁하오!’
바로 알아듣고 이니야가 크게 검을 휘두르며 새하얀 안개를 뿌려 댔다.
북해의 숨결!
모든 것을 얼어 붙이는 차가운 빙무가 달려오는 세 오러 유저들을 덮쳤다. 레펜하르트를 노리던 이들의 발이 그 자리에 묶여 버렸다. 오러 방어를 펼치는 것만으로 금세 얼음을 깨고 다시 움직일 수 있었지만…….
“으하하!”
그 잠깐의 틈을 레펜하르트는 놓치지 않았다.
어느새 이니야를 지나쳐 나스단에게 쇄도한다. 쾌소를 터트리며 두 주먹으로 폭풍처럼 몰아친다. 날카로운 라이트 펀치로 나스단의 블레이드 오러를 두들긴 뒤 곧바로 로우 킥!
퍽!
나스단의 허벅지에서 기괴한 가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신음을 흘리며 비틀대는 나스단의 턱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어퍼컷을 올려 쳤다. 나스단의 턱이 뽑힐 듯 뒤로 젖혀지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커, 커억!”
당하는 나스단을 보며 카메룬 경과 쫓아오던 세 오러 유저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얼른 도와주기 위해 세 오러 유저가 다시 레펜하르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백은의 블레이드 오러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백야白夜의 눈보라!”
이니야가 어느새 그들 앞을 가로막고 찬란한 냉기의 검세를 뿌려 대고 있었다.
진짜 눈보라처럼 산산이 흩어진 블레이드 오러가 저마다 칼날이 되어 휘몰아친다. 그 사이로 수십 개의 찌르기가 쇄도한다.
광범위한 공격이면서도 그 사이에 치명적인 연격이 숨어 있다.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으론 도저히 뚫을 방법이 없어 카메룬 경과 세 오러 유저의 발길이 멈췄다.
한편, 허공으로 날려간 나스단은 애써 정신을 차리며 몸을 바로 하고 있었다.
“크으…….”
피를 토하면서도 나스단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 역시 이제껏 패배를 모르던 강력한 오러 유저다! 이 정도로 저 ‘병신’ 리카본처럼 쓰러지진 않는다!
공중에서 몸을 돌리며 나스단이 오러를 이용, 허공을 박찼다. 다시 레펜하르트에게 낙하하며 그가 창을 화려하게 휘둘러 댔다.
“레인지 오브 자벨린!”
창날의 궤적에 따라 나스단 주위에 오러로 구현된 자벨린, 투창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가 손짓하자 열 개의 오러 자벨린이 일제히 레펜하르트를 향해 날아갔다. 리카본을 떠올리고 정신이 든 나스단이 고유의 오러 스킬을 아끼지 않고 구사한 것이었다.
쌔애애애액!
강렬한 파괴력을 머금은 열 개의 오러 자벨린이 정교하게 맞물리며 레펜하르트의 전신 급소를 노리고 날아왔다.
오러 유저라면 누구나 무기에 정신을 집중해 오크의 비전, 스피리츠 웨폰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방식을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집중력과 오러를 소모하는 짓이라 그리 효율적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나스단의 오러 스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강렬한 관통력을 지닌 오러 자벨린을 구현해 허공에 띄운 뒤, 미리 정해진 궤도로 발사하는 류의 기술이었다. 일종의 비도술이나 회검술廻劍術과 비슷하달까?
창을 조종하는데 집중력이나 오러를 쓸 필요가 없으니 모든 힘이 온전히 파괴력에 집중된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저건 단순한 블레이드 오러가 아니라 고도로 운용한 오러 스킬이었다. 한둘 정도면 스파이럴 가드로 튕기겠는데 열 개나 되면 아무래도 힘들다.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뒤로 뺐다가, 이내 크게 펀치를 날렸다.
“스트레이트 캐논!”
황금의 장막이 열 개의 오러 자벨린을 뒤덮으며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일일이 쳐 낼 섬세함이 없으니 그냥 한 방에 날려 먹자는 심보였다.
날아오던 오러 자벨린들의 기세가 일순 꺾였다. 하지만 이내 돌진력을 되찾고 마치 천을 베는 가위처럼 스트레이트 캐논을 갈라내며 다시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때, 레펜하르트가 팔뚝을 회전하며 다음 동작을 취했다.
“스파이럴!”
황금의 장막이 휘리릭 휘감기며 열 개의 오러 자벨린을 모조리 휘감았다. 황금의 천이 칼날을 뒤덮으며 이내 모든 영기의 투창이 공중에서 폭발해 버렸다.
테스론이 구사했던 스트레이트 캐논의 응용기, 레펜하르트는 그걸 잘 봐 두었다가 그동안 틈틈이 연습해 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우르릉!
두 오러 스킬의 충돌 여파로 하늘에서 뇌성이 울렸다. 주먹을 거둔 채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공격을 막은 것은 좋은데, 그 틈에 나스단이 그의 사정권 밖으로 벗어나 버렸다.
“쳇!”
간신히 몸을 피한 나스단이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젠장! 밑천을 드러내고 말았네.”
그래도 리카본 같은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은 것이 어딘가?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네, 젊은이.”
나이 쉰이 다 되어 가는 그를 누가 감히 젊은이라 부르는가? 나스단이 미처 의문을 품기도 전에 강렬한 충격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꽝!
방어는 물론 심적 대비조차 하지 않은 때 허용한 일격이라 그 한 방으로 정신이 흐릿해진다. 눈을 감으며 나스단이 애써 고개를 돌렸다.
‘누, 누구…….’
흐릿해지는 시선 속에서 나스단은 보았다. 코끼리처럼 긴 어금니를 지닌 거구의 트롤이 겸연쩍은 얼굴로 단봉을 들고 있는 것을.
☆ ☆ ☆
“상아어금니! 이 사악한 마물이!”
아틸카를 상대하던 왈그란 경과 웨를 경이 치를 떨었다. 둘을 상대하던 아틸카가 갑자기 몸을 빼더니 떨어져 있던 나스단을 기습한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바로 아틸카의 뒤를 쫓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아틸카가 트롤 주술로 커다란 식물 줄기를 키워 내 그들의 발을 묶어 버린 탓이었다.
“제길!”
블레이드 오러로 간단히 줄기를 끊을 수 있었지만, 그 틈에 이미 아틸카는 나스단을 공격해 버렸다.
혀를 차며 왈그란과 웨를이 다시 아틸카에게 덤비려는 찰나였다. 아틸카가 두 자루 단봉으로 땅을 찍으며 또다시 그 괴이한 술수를 부렸다.
“마파람에 새싹이 혀를 빼물고 자란다!”
땅이 꿈틀대며 또 두 사람의 다리를 두꺼운 식물 줄기가 휘감아 버렸다. 잽싸게 오러로 줄기를 끊었지만 이미 아틸카는 펄쩍펄쩍 뛰어 이니야와 레펜하르트에게 합류한 후였다.
쓰러진 나스단을 보며 게블릭 경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 나스단 경마저 당하다니…….”
그래도 한 방에 유명을 달리한 리카본과 달리 나스단은 기절했을 뿐 죽지는 않았다. 딱히 그가 리카본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막 살수殺手를 펼치려는 아틸카를 레펜하르트가 메시지 마법으로 말린 덕분이었다.
바슈탈론 제국이야 어차피 좋은 관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제국의 기사인 리카본에게는 상대의 전력도 줄일 겸 부담 없이 살인기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나스단은 그저 본의 아니게 제국에 끌려 나온 신세인 것이다.
침략당한 입장에서 열은 뻗치지만, 그렇다고 후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왕의 입장. 잠정적인 적을 늘리지 않으려면 나스단처럼 제국 외의 오러 유저들은 역시 함부로 목숨을 앗을 수가 없다.
뭐, 그렇다 해도 현재 나스단이 전력에서 제외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카메룬 경이 이를 갈았다.
이건 뭐, 몇 번 손을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리카본과 나스단, 두 명의 오러 유저를 잃었다!
“크으…… 자신의 상대도 아닌 이를 기습하다니! 이 무슨 비겁한 짓이냐, 권왕!”
카메룬이 분노하며 외쳤다.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리더니 마주 소리쳤다.
“일대일 대결도 아닌데 내가 누굴 패건 뭔 상관이냐?”
이니야도 한껏 비아냥을 담아 말을 받았다.
“여럿이서 덤벼들면서 잘도 비겁을 그 입에 담는구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여럿이서 덤비는 주제에 자기 상대만 공격하라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애당초 명예를 먼저 무시한 것은 저쪽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종자가 논리대로 말이 먹히는 대상이면 세상은 참으로 평화로웠겠지. 당연히 각국의 오러 유저들은 저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들 저 명예도 도리도 모르는 이들의 작태에 분노를 터트렸다.
왈그란 경이 고함을 질렀다.
“권왕 레펜하르트! 그대는 무인의 자부심도 없는가! 방심한 상대의 뒤를 노리다니! 권왕씩이나 되는 자가 이런 치졸한 짓을 계속 할 셈인가?”
“응.”
참으로 간략한 대꾸가 더욱 화를 돋운다. 왈그란 경의 안색이 수시로 변색되었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계속 동료를 잃을 판이었다. 저들은 눈앞의 상대에 연연하지 않고 눈치껏 몸을 빼 서로 힘을 합쳐 하나하나 각개격파할 셈인 것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수적 우세도 그리 의미가 없다. 오러 유저끼리 손을 합쳐 본 적이 없어,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다.
레펜하르트를 상대하던 바실리 출신 오러 유저, 크로아틀이 동료들을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이대로 멍청한 짓을 계속할 셈이오?”
자신들이 본격적으로 전력을 다했다면 저들도 몸을 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쓰고 있으니 안심하고 등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얼마든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방심한 다른 이의 뒤를 칠 수 있다!
“바보가 아니라면 당신들도 슬슬 힘을 쓰라고!”
크로아틀이 블레이드 오러를 넓게 퍼트렸다. 회색 블레이드 오러가 톱날처럼 변하며 강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고유의 오러 스킬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자기도 같은 짓 한 주제에.’
타박하는 크로이틀을 보며 몇몇이 불만을 떠올렸지만 애써 삭였다. 어쨌거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지금 밑천 아끼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다 같이 밑천 까발리는 거면 손해 볼 것도 없으니까.”
무기를 고쳐 쥐며 오러 유저들이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비슷하게 흐르던 각자의 오러가 저마다 고유의 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불길처럼 타오르고 안개처럼 흐르고 어둠처럼 은밀히, 산처럼 굳건히.
저마다 고유의 오러 스킬을 숨기지 않으며 진정한 힘을 보인다. 이니야가 긴장하며 중얼거렸다.
“이젠 아까처럼 쉽지는 않겠네요.”
레펜하르트가 아쉬워하며 주먹을 매만졌다.
“쩝, 두어 놈 정도는 더 조지고 싶었는데…….”
저들이 전력을 다하면 레펜하르트 일행도 감히 상대하다 말고 등을 돌리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기습으로 재미 보는 기간은 지난 듯했다.
아틸카가 두 자루 단봉을 역수로 든 채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두 분 다 조심하시오.”
☆ ☆ ☆
그린드 왕국은 할라인 왕국과 바슈탈론 제국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산악 왕국, 험한 산세로 인해 다량의 몬스터가 출몰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린드 왕국의 기사들은 주로 순수한 검보다는 몬스터와 대항하기 편한 중병기를 쓰는 쪽을 택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린드 왕국의 오러 유저, 르카완 역시 그런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자신의 모닝 스타를 빙빙 돌리며 레펜하르트에게 접근했다.
보통 모닝스타의 추椎가 성인 장정 주먹만 한 데 비해, 르카완의 모닝스타는 그 철구가 족히 사람 머리통만 한 사이즈였다. 저만한 쇳덩어리가 강렬하게 회전하고 있으니 그 기세가 실로 무시무시했다.
“받아라! 권왕!”
르카완이 돌진하며 모닝 스타를 휘둘렀다. 사슬에 달린 쇠공이 블레이드 오러를 뿜으며 레펜하르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철구에 담긴 오러를 ‘블레이드’ 오러라 하기는 좀 어폐가 있겠지만, 원래 대륙에서는 무기를 통해 발현하는 모든 오러를 관용적으로 블레이드 오러라 부른다. 그리고 르카완은 모닝스타의 쇠공 위에 돋아난 뾰족한 송곳을 통해 절삭력이 담긴 오러 또한 구현하고 있었으니, 그리 틀린 명칭인 것만도 아니었다.
쌔애액!
원심력이 실린 모닝 스타가 오러를 한껏 머금고 대기를 가르며 파공음을 낸다. 고유의 오러 스킬을 쓰기 시작한 탓인지 아까와는 파괴력이 전혀 다르다. 감히 방심하지 않고 레펜하르트가 신중히 라이트 펀치를 뻗었다.
“헙!”
강철의 추와, 강철의 주먹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오러 파문이 퍼져 나갔다.
둘의 대결은 레펜하르트의 압승이었다. 그는 충돌 후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은 반면, 르카완은 반발력 때문에 신체 중심선이 흔들려 버렸다.
“윽!”
그 틈을 타 레펜하르트가 미들 킥을 날렸다. 나무를 뿌리째 뽑아 휘두르는 듯한 위력적인 킥이 르카완의 좌측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르카완이 허겁지겁 왼팔을 들어, 오러 실드를 펼쳤다.
“진철벽眞鐵壁!”
찬란한 빛이 명확한 방패의 형상으로 구현되며 레펜하르트의 정강이와 부딪쳤다. 폭음이 울리며 오러 실드가 미들 킥을 막아 냈다.
‘단단하군.’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아까와는 달리 오러 실드가 부서지지 않았다.
모닝 스타를 다루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그렇듯, 르카완의 원래 전투 스타일은 커다란 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모닝 스타를 휘둘러 진격하는 중장보병 타입이었다. 오러 유저가 된 후론 굳이 거추장스러운 방패를 들고 다니지 않았지만 대신 오러 실드를 강화하는 특유의 스킬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런 르카완만의 오러 방패, 진철벽은 평범한 오러 실드와는 방어력의 차원이 달랐다. 레펜하르트의 미들 킥을 막아낼 만큼 충분히 견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격은 막았어도 그에 실린 힘까지 모두 흘릴 수는 없었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르카완이 뒤로 길게 밀려났다. 막 그를 쫓으려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인상을 썼다. 승기를 잡은 김에 계속 르카완을 몰아치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리 편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타앗!”
긴 기합을 터트리며 그라임 왕국의 오러 유저, 게블릭 경이 레펜하르트의 뒤를 노린 것이다. 돌진력을 담아 사선으로 연속 베기를 날리니 두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십자의 형상을 띠며 레펜하르트의 등으로 날아왔다.
“오러 크로스!”
몸을 돌리며 레펜하르트가 두 팔뚝을 들어 방어했다.
“스파이럴 가드!”
파지지직!
황금빛 전격이 튀며 스파이럴 가드가 게블릭의 오러 크로스를 갈아 버렸다. 게블릭이 인상을 썼다. 훨씬 강화한 오러 스킬을 썼는데도 저 황금빛 회오리를 뚫지 못했다.
“쳇!”
브로드 소드로 연달아 소드 패링을 펼치며 게블릭이 반격에 대비했다. 그때 떨어져 있던 르카완이 모닝 스타를 맹렬히 돌렸다.
블레이드 오러가 모닝 스타의 회전에 실리며 거대한 광륜光輪으로 화한다. 르카완이 모닝 스타를 아래로 떨치며 소리쳤다.
“샛별의 고리!”
회전하는 광륜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실소했다. 저 흉악한 무기로 구사하는 기술답지 않게 참 명칭이 운치 있다. 아마도 그냥 모닝 스타로 쓰는 기술이라 저따위 이름을 붙인 듯하다.
명칭이야 어찌 되었건, 그 위력은 결코 비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스파이럴 가드를 펼쳐 광륜과 충돌했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다급해졌다.
‘윽?’
광륜이 아무런 저항 없이 스파이럴 가드를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똑같이 회전을 이용한 오러 스킬, 스파이럴 가드와 샛별의 고리.
르카완은 광륜의 회전수와 방향을 절묘하게 조절해 레펜하르트의 스파이럴 가드와 완전히 동조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스파이럴 가드의 기세에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흐름에 휩싸인 채 안으로 파고든다!
르카완의 광륜이 가드를 뚫고 제대로 직격했다.
콰아앙!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수 발자국이나 뒤로 밀렸다. 가슴에 길게 자상이 생겨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 식의 기술도 있나? 오러 스킬을 제대로 쓰니 장난이 아닌데?’
비록 적이지만 실로 놀라운 기술이었다. 솔직히 감탄할 만했다.
물론, 르카완은 전혀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지만.
“아니, 정통으로 맞았는데 그걸 맨몸으로 버텨?”
짐 언브레이커블이 흉악하다는 소린 누누이 들어 왔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가 찼다. 이게 안 통하면 대체 저 괴물을 무슨 수로 베란 말인가?
게블릭 경이 고개를 저으며 르카완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왕이오. 저 정도는 예상했어야지.”
레펜하르트에게 돌진하며 게블릭이 브로드 소드를 십자 형태로 베었다. 또다시 오러의 십자가가 허공에 그려졌다.
하지만 게블릭의 움직임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미 오러 크로스로는 스파이럴 가드를 뚫지 못한다는 걸 확인한 그였다.
오러 십자가 가운데 찌르기를 날리며 게블릭이 소리쳤다.
“크로스 펜타곤!”
날아가는 십자의 블레이드 오러 가운데 날카로운 창이 솟구친다. 창이 달린 오러 십자가가 레펜하르트의 정면을 뒤덮었다.
허공을 가르며 오러 십자의 네 끝이 휘더니 가운데 달린 창날을 향해 모여들었다. 마치 꽃봉오리가 아무는 듯한 형상과 함께 다섯 개의 블레이드 오러가 한 점에 모여 강력한 관통력으로 화했다.
콰아아악!
한 점에 집중된 관통력이 스파이럴 가드의 회전력마저 뚫으며 쇄도해 온다. 그냥 몸뚱어리만 믿고 있다간 꼬치가 될 판이다. 레펜하르트가 재빨리 몸을 비틀어 타점을 흘렸다.
파지지직!
게블릭의 찌르기가 레펜하르트의 가슴을 스치며 지나갔다. 또 선혈이 튀었다.
‘어차피 찰과상일 뿐!’
무시하며 레펜하르트가 길게 팔을 뻗어 손등 치기를 날렸다.
부웅!
공기가 떨리며 커다란 주먹이 반원을 그린다. 손등 치기의 궤적이 돌진하는 게블릭과 정확히 겹쳐졌다. 돌진 도중이라 도중에 멈출 수 있을 리 없었다.
‘잡았다!’
막 레펜하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띠려는 차였다.
“헙!”
기합을 터트리며 날아오던 게블릭이 돌진을 멈췄다. 레펜하르트의 반격을 감지한 순간, 전신 기혈을 통해 오러를 내뿜어 허공에서 에어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레펜하르트의 주먹이 게블릭의 얼굴 앞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길!”
공격이 빗나가자 레펜하르트가 욕설을 흘렸다. 간신히 피한 게블릭이 숨을 몰아쉬다 주르륵 코피를 흘렸다.
코피를 닦으며 게블릭이 질려 중얼거렸다.
“맙소사, 맞지도 않았는데 권풍만으로 이 정도인가…….”
정통으로 맞았다간 한 방에 황천 갈 뻔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남은 평생 단단한 것은 못 씹는 신세 정도는 되었을 게 분명하다!
절로 등 뒤가 시원해졌다. 게블릭이 스스로에게 조소를 흘렸다.
“이런 자를 상대로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쓰겠다고 했다니…… 참으로 주제 파악을 못 했구나.”
한껏 긴장한 채 게블릭이 다시 몸을 날렸다. 르카완도 오러 실드, 진철벽을 앞세우며 레펜하르트에게 접근했다.
온갖 오러의 빛이 날뛰고, 충돌하고, 퍼져 나가고, 폭발했다.
연신 공격을 퍼붓는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점점 굳어 갔다. 스파이럴 가드로 계속 몸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조금씩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역시 둘 다 대륙 각지에서 명성을 떨치는 오러 유저다웠다. 본격적으로 전력을 다하니 점점 힘이 부친다.
‘으, 이거 쉽지 않네.’
사실, 표정이 굳기는 사실 게블릭과 르카완 쪽이 더했다.
“두 명이서 덤비는데도 이 정도인가?”
“진짜 괴물이구나! 짐 언브레이커블!”
비록 레펜하르트가 상처를 입었다지만 그것은 살짝 거죽이 긁힌 정도에 불과했다. 전혀 전투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대의 공격을 잘 흘리고 있다 해서 피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직격타를 피한다 해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는 스치는 것만으로 필살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레펜하르트의 펀치와 킥이 두 사람에게 쇄도할 때마다 피가 튀고 상처가 부어오른다.
팽팽한 승부 속에서 레펜하르트와 두 오러 유저가 한껏 살기를 퍼트리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마음이 급해진 르카완이 속으로 혀를 찼다.
‘크으, 한 명만 더 있으면 어떻게 될 거 같은데!’
이미 일대일 대결의 명예 따윈 머릿속에서 없어진 지 오래였다. 르카완이 힐끔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았다.
‘저쪽은 고작 엘프나 상대하면서 뭐하고 있는 거야? 얼른 해치우고 이쪽이나 좀 도와주지!’
☆ ☆ ☆
르카완의 기대와 달리, 다른 쪽도 그리 상황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아아…….”
이니야가 머리를 휘날리며 호흡을 내뱉었다. 새하얀 빙무가 사방으로 퍼지며 지면을 뒤덮었다. 모든 것을 얼어 붙이는 북해의 숨결, 그 강렬한 한기는 그 자체로도 이미 상당한 위협이다. 일반 병사라면 저것만으로도 꽁꽁 언 동상이 되어 죽어 가리라.
왈그란과 크로아틀이 전신의 오러를 더더욱 끌어 올렸다.
“흐읍!”
“하아압!”
이글거리는 오러의 불길이 냉기로부터 육체를 보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발이 진창에 빠진 것처럼 무거워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을 위협하는 것은 저 빙무뿐만이 아니었다. 눈 돌아갈 정도로 현란한 궤적을 그리는 저 엘프 검사의 레이피어가 연신 급소를 노리고 날아든다!
“휘날리는 눈꽃!”
수십, 수백 개의 검화를 피우며 이니야는 연신 두 사람을 공격해 댔다. 찌르는가 하면 베기이고, 베는가 하면 찌르기로 변환되는 무수한 변화! 검술이란 측면에서 이니야는 왈그란 경과 크로아틀, 두 오러 유저를 압도하고 있었다.
회색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는 크로아틀이 점점 궁지에 몰렸다.
“이, 고작해야 엘프 주제에 어찌 이런 기술을…….”
순간 이니야가 참격을 날렸다.
“동토의 칼날!”
초승달 모양의 블레이드 오러가 사방에서 날아든다. 강렬한 진동이 담긴 그 공격은 도저히 일반적인 오러 가드론 막기가 불가능하다.
크로아틀이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검면을 앞으로 내세웠다.
“레이븐 실드!”
칼날을 통해 회색 오러의 날개가 활짝 펼쳐진다. 회색 오러의 깃털이 몇 중으로 겹치며, 마치 까마귀가 날개를 접듯 크로아틀의 앞을 겹겹이 감쌌다. 백은의 블레이드 오러가 레이븐 실드를 두들기며 연달아 파문을 떨쳤다.
공격을 막아 낸 크로아틀이 바로 다음 기술의 연계에 들어갔다.
“어비스 암즈!”
크로아틀 주위로 검을 쥔 회색 팔의 형상이 솟아났다. 심연으로부터 솟아나온 듯한 어둠의 팔이 검을 휘두르며 이니야의 전신을 찔러 갔다.
왈그란 경도 롱 소드로 연속 찌르기를 시도하며 합세했다.
“트윙클 스타!”
변화를 담은 수십 줄기의 찌르기가 허와 실을 교환하며 명멸한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 가득 반짝이며 이니야의 머리 위를 점유했다.
“으으…….”
이니야의 안색이 다급해졌다. 저들의 오러 스킬은 일대일이더라도 감히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양쪽으로 쏟아지고 있다!
그녀가 빠르게 레이피어를 허공에 저었다.
휘이이이익!
휘파람 소리 같은 파공음과 함께 검광이 난무하며 백은의 선이 수십 줄기의 궤적을 낳았다. 크로아틀과 왈그란의 공격이 백은의 궤적과 겹치며 멋대로 궤도를 수정당했다.
모든 공격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걸 느끼며 왈그란 경이 입을 쩍 벌렸다.
“뭐야! 어떻게 이걸 전부 감당할 수가!”
강검을 추구하는 크로아틀과 달리 왈그란 경은 변화와 허실을 중시하는 기교파 검사였다. 검술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떤 오러 유저와 비교한다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저 보랏빛 머리의 엘프 검사가 구사하는 검술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기술이 조잡해 보일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한 검술이었다.
‘빌어먹을! 저 엘프 계집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이란 말인가!’
모든 공격을 걷어낸 이니야가 땀을 줄줄 흘리며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헉, 헉…….”
그녀의 ‘흘리기’는 상당한 체력과 집중력을 소모하는 기술이었다. 워낙 공세가 많다 보니 그만큼 체력 소모도 크다. 간신히 방어할 수는 있었지만 그 탓에 상당히 지쳐 버렸다.
아무리 뛰어난 검술과 오러 스킬을 지니고 있다 해도 이니야는 어쩔 수 없이 엘프, 엘프 특유의 저질 체력은 두고두고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전투가 길어지니 점점 팔다리가 무거워진다.
또한, 그녀의 체력을 앗는 것은 그저 왈그란과 크로아틀뿐이 아니었다.
휘이이익!
한창 싸우고 있는 이들의 머리 위로 파공음이 들려온다. 크로아틀이 힐끔 위를 보며 혀를 찼다.
“이런! 또 날아온다!”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저 멀리서 광포하게 날뛰고 있는 제라드와 바나텔, 둘의 전투 여파가 이곳까지 미치는 것이다.
이니야와 왈그란, 크로아틀이 동시에 뒤로 몸을 던졌다. 선홍의 빛이 그들이 있던 자리를 직격했다.
콰아앙!
폭발을 피한 왈그란이 저쪽 ‘괴수대결전’을 힐끔거리며 구시렁댔다.
“그냥 싸워도 힘든 판에 저기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원 참.”
아까부터 종종 바나텔과 제라드의 오러가 이쪽까지 날아들고 있었다. 그때마다 전투를 멈추고 피해야 하는 것이다.
하여튼 참으로 짜증 나는 전투 환경이었다.
땅은 이니야의 빙무 때문에 진창 같은 느낌이지, 하늘에선 오러 유저도 무시 못 할 무식한 오러 우박이 수시로 떨어지지. 옛 이야기에 절벽이나 외나무다리에서 싸우는 무인의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도 지금 이곳에 비하면 참으로 평온하고 안락한 전장이라 할 것이다.
그래도 왈그란 경과 크로아틀은 이니야에 비하면 많이 체력이 남은 편이었다. 점점 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