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 제37장 오랜 악연 (38/84)

11권

제37장 오랜 악연

1

강철 수조 속에 알몸의 젊은 사내가 둥둥 떠 있었다. 전신이 단단하게 짜인, 놀라운 미모의 청년이었다.

부글부글…….

기포가 올라올 때마다 흑단 같은 고운 머리칼이 해초처럼 흔들린다.

이윽고 청년이 눈을 떴다.

‘내가 아직…… 살아 있나?’

신기하게도 물속인데도 불구하고 호흡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청년은 눈을 깜박였다.

‘……여긴 대체?’

잠시 후, 수조 속의 액체가 아래로 빠지며 공기가 들어왔다. 수조 앞쪽이 천천히 열렸다. 청년이 기침을 터트렸다.

“쿠, 쿨럭,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폐 속에서 액체가 흘러나온다. 숨을 헐떡이며 청년은 수조 밖으로 애써 걸음을 옮겼다. 로브 차림의 여인이 소리치며 그에게 달려왔다.

“테스론!”

테스론은 비틀거리며 수조 밖으로 나왔다. 여인이 재빨리 챙겨 온 천으로 그의 나신을 가려 주었다. 천을 받아 걸치며 테스론이 중얼거렸다.

“필레나…….”

필레나가 테스론의 전신을 훑어보며 걱정 가득한 질문을 던졌다.

“몸은? 몸은 괜찮아?”

테스론은 멍하니 필레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덮쳐 오던 그 가공할 일격, 6중첩 캘러미티 혼. 산산이 박살 나 버린 아다만드릴 슈트.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던 자신…….

“어떻게…… 된 거지?”

필레나가 잽싸게 대답했다.

“귀환의 깃털로 탈출할 수 있었어. 그리고 세렐라인 님이 바로 널 여기에 넣어 주셨고.”

테스론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날렵해 보이는 근육을 자랑하는 늘씬한 육체, 그곳에는 어떤 흉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아기의 그것처럼 피부 전체가 매끈하고 윤기가 돈다.

테스론은 멍하니 수조를 돌아보았다. 필레나가 설명을 이었다.

“고대의 아티팩트, 리커버리 캡슐recovery capsule이야. 세렐라인 님 말씀이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떤 부상이라도 전부 완치 가능하다고 하셨어.”

몸 상태를 점검해 본 테스론은 혀를 내둘렀다.

그토록 참혹하게 당했던 육체다. 하지만 지금은 전신에 어떤 통증도,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아 기운이 없을 뿐이다.

‘세상에,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부상이었는데…….’

과연 은의 현자다. 이런 엄청난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다니.

무사한 테스론을 보며 필레나가 눈물을 흘렸다. 양손으로 테스론의 얼굴을 매만지며 목이 메어 말을 더듬는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울먹거리는 필레나를 보며 테스론은 부드럽게 웃었다. 필레나의 진심이 절절히 느껴졌다.

새삼 그녀가 귀엽게 느껴져 테스론은 필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난 괜찮아, 필레나.”

“응, 으응…….”

필레나가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테스론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보다 레펜하르트는? 그는 어떻게 되었지?”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쉽게도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은발의 소녀가 무심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의 수호자, 세렐라인이었다.

“권왕은 노예들을 이끌고 제플린을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그게 벌써 몇 달 전 이야기예요.”

“으음…….”

테스론이 신음을 흘렸다.

‘결국 마왕을 막지 못했는가…….’

세렐라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하지만 그자의 운명도 얼마 가지는 않을 겁니다. 제플린의 사태 덕분에 이제는 공식적으로 그를 죽일 수 있는 명분이 생겼으니까요. 공개적으로 그가 죽음을 당한다 해도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살짝 한숨을 쉰다.

“후, 되도록 인간들에게 영향력이 적을 때 처리하고 싶었지만, 일이 이토록 커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테스론은 납득했다. 레펜하르트의 이번 행보는 확실히 대륙 전역에 진동할 만한 것이었다. 이미 은의 현자가 은밀히 처리할 수준은 지나 버렸다. 그렇다면 예전처럼 암살자를 보낼 필요도 없으리라.

문득 테스론이 의아해했다.

“그런데, 그자를 해치울 만한 강자가 은의 현자에 있었습니까?”

그런 강자가 없어서 세렐라인이 자신을 찾아온 것 아니었던가?

“은의 현자 측이 아닙니다.”

세렐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바슈탈론 제국의, 대륙 최강의 검사가 나섰지요.”

“검성 바나텔!”

테스론이 반색을 했다.

‘그렇군, 이 시간대면 그도 아직 살아 있겠구나.’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가 안타레스 제국을 세우고 한창 악명을 떨치며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이미 사이러스와 테스론은 검성과 권왕이라 불리며 대륙의 최강자 자리를 양분하고 있었다. 테스론이 아직 제자를 찾지 못했기에 권황이라 불리지 않았을 뿐이지, 당시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최강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대륙 최강자의 자리는 다른 두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바슈탈론 제국의 수호신, 검성 바나텔.

그리고 테스론을 키운 이후 권황이라 불리게 된 제라드.

여든이 넘는 노구에도 두 사람은 당대 최강을 자랑하며 검과 권 양쪽에서 흔들림 없는 명성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위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둘의 오래된 악연이었다.

검성 바나텔과 권황 제라드는 그들의 명성만큼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견원지간 정도는 이 두 사람에 비하면 매우 따사롭고 우애 넘치는 관계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서로가 검성과 권황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후로, 둘은 몇 번이나 맞붙었고 그때마다 승부를 결하지 못했다.

결국 제라드와 바나텔은 네위그 숲에서 최후의 싸움을 벌였고 서로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때가 대륙력 998년,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후의 일이다.

‘그 검성 바나텔이 마왕을 노린단 말이지?’

테스론이 바나텔을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강한지 실감해 보진 못했다.

그러나 그의 스승, 제라드가 얼마나 강력한 무인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바나텔은 그와 필적하는 강자다.

예전처럼 10서클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 아니고서야 현재의 레펜하르트로서는 절대 검성 바나텔을 상대로 살아남지 못하리라.

“검성 바나텔이라…… 하하.”

어째 기쁜 기색이 아니기에 필레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테스론? 잘된 거 아니야?”

“으음, 그렇지…….”

그런데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느껴진다.

‘하긴, 마왕을 막겠다는 일념만으로 여태껏 달려왔으니 당연한 일인가?’

테스론이 허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레펜하르트도 이제 끝이군.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지…….”

☆ ☆ ☆

같은 시각, 안타레스 백왕성이 내려다보이는 인근 언덕.

열 명의 오러 유저들은 긴장한 눈으로 갑자기 나타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누구도 이번 일이 위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스스로의 무위에 자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 곁에는 무려 천하의 검성, 바나텔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 첨탑 위에 우뚝 선 거구의 노인, 권황 제라드는 바나텔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또 다른 대륙 최강자다!

언덕 쪽을 내려다보던 제라드가 갑자기 가볍게 발을 굴렸다.

“흡!”

신장 2.5미터의 거구가 소리도 없이 백왕성 첨탑을 날아올랐다. 날개 달린 새도 아니거늘, 한 번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 단숨에 첨탑을 날아올라 내성을 넘어 백왕성 외벽까지 나아간다. 거기서 한 번 착지한 뒤 다시 몸을 날리니, 두 번 점프한 것만으로 제라드는 순식간에 쓰러진 러스와 타시드 옆에 도달했다.

경악할 만한 몸놀림이었다. 간신히 숨을 고르며 오러로 육체를 회복하고 있던 러스와 타시드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저분이 권황 제라드…….’

‘은인의 스승이라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제라드가 태연하게 물었다.

“레펜하르트 놈은 어디 갔느냐?”

러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형님께서는 지금 성을 비우셔서…… 아마도 서너 시간은 지나야 다시 돌아올 겁니다만…….”

순간 제라드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엥? 형님? 그놈이 더 어릴 텐데?”

눈앞의 이 청년이 아무리 봐도 20대 후반 정도는 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나마 러스가 동안이라 저리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서른도 넘겼다.)

‘제자 놈 나이가…… 분명 20대 중반일 텐데?’

하지만 제라드는 곧 납득했다. 실제 나이보다 액면가가 10년쯤 더 먹어 보이는 것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랜 전통이었다. 호방한 성품의 역대 권왕들은 저런 조잡한 오해에 굳이 변명을 달거나 하지 않은 것이다. 제라드가 스무 살에 세상에 나설 때에도 어느 누구도 그를 절대 서른 이하로는 보지 않았었다. 게다가…….

‘하긴 레펜하르트 그놈, 우리 무문치고도 이상하게 조숙해서 가끔 이 새끼가 10대 소년이 맞나 싶기도 했으니까.’

분명 어릴 때 제자로 거두어 키웠는데도 가끔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세상 살 만큼 산 중늙은이 같은 분위기를 풍기곤 했었다.

제라드가 이번엔 타시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크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단련된 오러를 내재한 그를 보며 제라드가 신기해했다.

“이건 또 뭐야? 오크인데 오러를 각성했어?”

타시드도 눈을 껌뻑이며 제라드를 향해 중얼거렸다.

“뭐냐, 저 얼굴만 늙은 인간은? 인간인데 어떻게 저렇게 큰 거냐?”

그는 평생 칼켄보다 더 큰 사람이 세상에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칼켄이 2.3미터에 달하는 거구인데, 저 노인은 인간인 주제에 그 칼켄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솔직히, 인간은 고사하고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멍해 있는 타시드를 보며 제라드가 피식 웃었다.

“이놈의 제자, 별 신기한 걸 다 키우는구먼.”

하지만 제라드는 바로 타시드에게서 신경을 끊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끼는 제자의 정신이 오락가락해 스스로 막 이름을 바꿀 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함을 지닌 그였다. 이까짓 오크가 오러 쓰는 것 정도로는 그의 대범함을 흔들 수 없었다.

한편, 바나텔은 제라드를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권왕 레펜하르트가 제라드의 제자라는 것이야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 자리에 권황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랜 전통 때문이었다.

“이놈, 제라드! 네놈이 어째서 여기 있느냐?”

제라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별 소리 다 한다는 듯 대꾸했다.

“사부가 제자 놈 집 들른 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당연히 이상하지! 짐 언브레이커블이 언제 사제 간의 정 따위 느끼는 무문이더냐? 일단 하산시키면 남남 되잖아, 네놈들은!”

역대 권왕들은 하산한 이후 그들의 사부, 권황과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다. 사부 쪽도 굳이 제자를 찾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나텔도 바슈탈론 제국도 설마 이곳에 제라드가 나타날 거라곤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허허, 어디서 그런 오해를?”

사실 짐 언브레이커블은 결코 사제 간의 정이 없지 않다. 제자에 대한 사랑이나 스승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 정도는 오히려 짐 언브레이커블이 다른 무문보다 훨씬 더 진할 것이다. 제자 키우는 데 드는 고생이 워낙 막심하니까.

제라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도 당연히 볼일 있으면 서로 찾아보고 그러지.”

단지, 짐 언브레이커블의 호쾌한 역대 계승자들은 일반인처럼 평범한 일상의 행사, 즉 생일이나 결혼식, 장례 정도는 굳이 ‘볼일’로 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제자의 목숨이 위기에 처했다든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든가 하는 일조차도 짐 언브레이커블 기준에서는 전혀 큰 ‘볼일’이 아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모토는 담대, 호쾌, 대범.

쿨한 사나이의 길을 지향하는 짐 언브레이커블은, 무릇 남자라면 깔끔하게 헤어지면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일단 하산하면 워낙 서로 안 보고 살아서 저런 오해가 퍼져 버렸다. 뭐, 맞고 자란 제자 쪽이 본능적으로 사부를 피해 다니긴 했으니 아주 틀린 오해도 아니었다.

제라드가 눈을 껌뻑이며 되려 바나텔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바나텔? 나이가 몇인데 애송이들한테 힘자랑이나 하고 말이야. 체통 좀 지키자, 응?”

바나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도 손자뻘인 러스에게 직접 손을 쓰는 것이 부끄럽기는 했다.

“네, 네놈이 체통 따질 때냐? 웃통이나 가려라! 그 나이 먹고도 옷차림이 그게 뭐야?”

현재 제라드는 간편한 바지 차림으로, 상의를 통째로 탈의하고 있었다. 한겨울에도 조끼 정도만 입거나 그냥 벗고 지내는데 하물며 지금은 한여름, 그로서는 당연한 의상이었다.

“흐음…….”

제라드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바나텔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2.5미터의 거구에 알찬 근육을 지닌 그에 비해, 바나텔은 겉보기엔 평범한 노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노인치곤 허리도 곧고 장신에 제법 몸도 탄탄했지만 그래 봤자 일반인 수준일 뿐이다.

시위하듯 양쪽 대흉근을 씰룩거리며 제라드가 껄껄 웃었다.

“이 나이 먹고도 이런 옷차림이 가능하면 그건 자랑거리지, 뭐가 부끄러운 일이겠나? 혹시 부러운가 보지?”

“끄응…….”

바나텔은 신음을 흘렸다. 솔직히 부럽긴 부러웠다.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끄럽다!”

호통을 치며 바나텔이 제라드에게 검을 겨누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바나텔이 말을 이었다.

“힘자랑은 무슨! 세이어의 뜻에 따라 이단자를 벌하러 온 것뿐이다!”

“아, 하긴 제국에서 월급받고 사니 시키는 건 해야겠지. 그러게 젊을 때 좀 부지런히 돈 모으지 그랬나?”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제라드가 조롱을 던졌다. 바나텔의 표정이 더더욱 구겨졌다.

제자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역대 후계자들은 젊을 때부터 열심히 재산을 축재한다. 당연히 제라드도 젊을 때부터 던전 탐사며 이런저런 의뢰를 받아 열심히 돈을 모으고 또 불려 왔다. 레펜하르트를 키우느라 절반 이상 탕진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바실리 왕국에서 손꼽히는 부자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굳이 국가에 아쉬운 소릴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제라드는 자유로운 무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반면, 젊은 시절의 바나텔은 그리 강한 검사가 아니다 보니 먹고 살기도 바빴다. 그래서 딱히 재산을 모을 수가 없었다. 오러 유저가 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나텔의 검술은 그 특성상 딱히 제자를 둘 수가 없다. 그의 오러양이 무지막지한 것은 무슨 절묘한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본인이 그렇게 태어난 덕분이니까.

그렇다고 바나텔이 가난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제국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검성씩이나 되니 당연히 품위 유지 명목으로 제국에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긴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 봤자 결국은 월급쟁이 신세인 것이다.

몸도 좋은 놈이 돈도 많다. 바나텔이 이를 갈았다.

“아으, 역시 저 새끼는 재수 없어.”

제라드도 마주 인상을 썼다.

“헛소리하네. 네놈은 뭐 재수 있는 줄 아냐?”

바나텔의 대해 같은 오러양은 제라드로서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러 유저로서 어찌 저 엄청난 오러의 힘이 부럽지 않을까? 솔직히 질투심이 안 날 수가 없다.

바나텔과 제라드가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댔다. 그 모습에 러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투가 저리…….’

당대에 이름 높은 검성과 권황의 대화라고 보기엔 너무 품위 없는 말투인 것이다. 마치 시장의 무뢰배 같지 않은가?

하지만 나이 지긋하게 먹은 다른 오러 유저들은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젊은 것들은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말투도 노숙해지는 줄 아는데, 원래 어린 것들 앞에서 고상 떠는 70대 노인도 같은 동년배 만나면 젊은 시절 말투 도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특히나 그것이 몇십 년이나 이어진 악연이라면 더더욱!

‘으음…… 이놈이 하필 여기에 나타나다니.’

바나텔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눈앞의 이 거구의 노인, 권황 제라드.

저 오랜 악연을 보니 절로 손이 근질근질하다. 하지만 그는 애써 황제의 명령을 떠올렸다. 호승심을 애써 억누르며 바나텔이 입을 열었다.

“물러나라, 제라드! 이는 바슈탈론 제국의 일이다! 설마 제국과 적대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러스와 타시드를 힐끔거리며 비아냥대듯 말을 이었다.

“아니면, 설마 제자의 부하들이니 지켜 주겠다는 낯간지러운 소릴 할 셈인가? 짐 언브레커블은 호쾌한 사나이의 길을 걷는 게 모토 아니었나?”

의외로 제라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 굳이 저것들 지키려고 기격탄 날린 것은 아니지. 그냥 반가운 얼굴이 보여서 인사나 한 것뿐이야.”

집채만 한 기격탄을 고작 안부 인사 취급하는 제라드의 배포에 다른 오러 유저들이 기막혀 입을 벌렸다. 그러나 바나텔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실제로 바나텔이 먼저 제라드를 발견했다면 그도 인사 삼아 블레이드 오러 죽죽 뻗어 갈겨 줬을 테니까.

제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내가 굳이 제국 눈치 보면서 제자 놈 부하 죽는 걸 방관하고 있을 이유도 없지 않나?”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 역시 호쾌한 사나이의 길에 어긋나는 행위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라드가 빙그레 웃더니 양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자네와 내가 만났는데 피가 튀지 않으면 너무 섭섭하잖아?”

겨우 참던 인내심의 끈이 툭 끊겼다. 솔직히 바나텔도 황제의 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눈앞의 이 악연부터 처리하고 싶었으니까.

바나텔의 어깨 너머로도 자욱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네놈을 만났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안 그런가, 제라드!”

“아무렴!”

검을 고쳐 쥐며 바나텔이 전신에서 폭풍 같은 오러를 피워 올렸다. 그 기세만으로 바람이 휘몰아치고 대지가 진동한다.

“제라드! 이번에야말로 회를 떠 주마!”

제라드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마주 외쳤다.

“내가 할 소리다, 바나텔! 이번에야말로 피 떡으로 만들어 주지!”

제라드의 전신으로도 황금빛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빛의 기둥이 허공을 꿰뚫어 대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바나텔이 검을 든 채 제라드를 노려보았다.

제라드도 주먹을 쥔 채 바나텔을 응시했다.

둘의 거리는 20여 미터 정도, 박투搏鬪를 나누기엔 너무도 먼 거리지만 오러 유저에겐 충분히 사정권 안쪽이다.

선홍색 오러의 불길을 일렁이며 바나텔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고 보니 네놈과 붙는 것도 꽤 오랜만이구나, 제라드.”

나직하게 뇌까리며 왼발로 강하게 대지를 내리친다. 찬란한 오러의 장벽이 일어 올라 거대한 파도로 화했다. 굉음과 함께 대지에 주름이 생기며 거대한 오러의 해일이 제라드를 향해 밀려갔다.

눈앞을 뒤덮는 오러의 파도, 그것도 조금 전처럼 사방으로 퍼지는 것이 아닌 제라드가 있는 방향만을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오러 웨이브였다. 당연히 그에 실린 위력도 아까와는 천양지차!

뒤에 있던 러스와 타시드가 기겁하며 뒤로 점프했다.

“크윽!”

“젠장! 휩쓸리면 끝장이다!”

콰콰콰콰콰!

오러의 파도가 백왕성 앞 대지를 사정없이 파헤치며 제라드를 덮쳐 간다. 그 순간 제라드도 한 발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렇군, 한 10년 만인가?”

태연하게 대꾸하며 제라드가 발을 들었다. 그리고 바나텔처럼 강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황금빛 오러가 간헐천처럼 솟구쳤다. 10여 미터 가까운 오러 기둥이 선홍색 빛의 파도와 맞부딪쳤다.

꽈앙!

대지가 통째로 뒤흔들렸다. 땅거죽이 통째로 휘말려 올라 나선형 흙기둥이 되어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허공에서 부스러져 돌비가 되어 내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타국의 오러 유저들이 혀를 차며 각자 오러 가드를 펼쳤다.

“으윽!”

“저 괴물들!”

바나텔이 이번엔 오른발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10년? 더 된 것 같은데?”

몰아친 오러의 파도 뒤로 선홍색 빛의 소용돌이가 수십 개씩이나 생성되어 돌풍의 영역을 형성했다. 오러의 폭풍이 땅 위에 길게 궤적을 남기며 제라드를 향해 휘몰아쳤다.

제라드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그가 중얼거렸다.

“음, 14년 정도겠군.”

어린 테스론, 그러니까 지금은 레펜하르트라 불리는 제자를 찾은 것이 당시 바나텔과의 결투 직후였니까.

쿠웅!

육중한 발이 땅을 밟는 순간 원형으로 거대한 오러의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퍼진 황금빛 파문이 선홍의 광풍과 충돌해 곳곳에서 폭발했다. 뇌성이 울리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백왕성과 인근 언덕, 숲이 모두 통째로 진동했다. 백왕성의 성벽 곳곳에 금이 가고 벽돌이 부서져 파편을 떨어트렸다. 기사며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으아악!”

“피, 피해라! 성벽이 무너진다!”

쿵! 쿠쿵!

무너진 성벽의 파편이 백왕성 곳곳에 흙먼지를 피웠다. 몸을 낮춘 채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파편을 막고 있던 아스레일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저게 정녕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바나텔과 제라드가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대기가 뒤틀리고 대지가 요동을 쳤다. 두 줄기 선홍과 황금의 빛이 가공할 파괴력을 사방으로 뿌려 댔다.

“많이 늘었구나! 바나텔!”

한 걸음 내디디면 대지가 갈라지고.

“네놈이야말로! 제라드!”

두 걸음 내디디면 하늘이 찢어진다.

선홍과 황금의 빛이 사방을 뒤덮으며 광폭하게 날뛰었다. 하늘 높이 흙과 풀잎이 휘말려 올라 날리고 구름이 갈라지며 회오리쳤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였다.

정신없이 파괴의 여파를 피하면서 러스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일개 개인이 보일 수 있다니, 정녕 감탄스러웠다.

‘정말 굉장하군…….’

분명 굉장하기는 한데…….

“아니, 어떻게 당대 최강의 무인 둘이서 싸우는데 이렇게 공부가 안 될 수가!”

러스는 기가 차 중얼거렸다. 당대 최강의 검성과 권황의 결투라면 뭔가, 보기만 해도 새로운 경지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은근 기대도 많이 했던 러스였다.

그런데 한 놈은 무식하게 오러양만 늘렸고 한 놈은 무식하게 몸만 단련했으니 정작 배울 것이 없는 것이다. 둘 다 오러 운용 자체는 단순하기 그지없으니까. 제라드가 바나텔이랑 비교되는 바람에 꽤 기교파로 보이긴 하는데, 그래 봤자 진짜 기교파 검사인 러스가 보기엔 여전히 단순한 용법이다.

‘정말 대단하고 건질 것 없는 싸움이로군.’

쓴웃음을 지으며 러스는 계속 두 사람의 결투를 바라보았다. 참, 당대의 최강자다우면서도 동시에 전혀 최강자답지 않은 결투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점점 둘의 기세도 커져 갔다.

강렬한 살기가 오러에 실려 하늘을 쩌렁쩌렁 울린다. 인근 언덕이 쩍쩍 갈라지며 대지가 속살을 드러낸다. 숲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진다. 백왕성 곳곳이 붕괴되고 첨탑이 꺾이며 내성 곳곳이 무너져 내린다.

걸음걸음 즈려밟을 때마다 인근의 모든 것이 초토화되고 있었다.

우르르릉!

이윽고,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다. 소용돌이치는 오러의 영역 속에서 바나텔과 제라드가 서로를 보며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멍청하게 기본기만 해 댔구나, 바나텔!”

“여전히 무식하게 몸만 키웠구나, 제라드!”

두 사람이 동시에 통쾌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하하하핫!”

바나텔이 검을 겨누더니 정식으로 자세를 취했다. 그가 익힌 유일한 검술, 제국검의 기수식이었다.

“역시 네놈 정도 되어야 손맛이 온다니까, 제라드.”

제라드도 주먹을 뻗은 채 다리를 벌리고 두 무릎을 살짝 굽혔다. 흔들리지 않는 거악巨嶽을 연상케 하는, 육중하면서도 안정적인 자세였다.

“지난 시간에 대한 인사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바나텔?”

검과 권을 서로에게 겨눈 채 두 사람이 눈을 빛냈다. 바나텔의 블레이드 오러가 점점 더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바나텔이 쩌렁쩌렁 호통을 쳤다.

“그럼 장난은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붙어 보자!”

순간 백왕성의 모든 이들이 기가 차 입을 쩍 벌렸다. 장난? 장난이라고? 지금 백왕성은 그 장난 때문에 강제 철거 상태가 되었는데!

“…….”

아스레일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을 이만큼 절실하게 느껴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제라드가 고함을 치며 화답했다.

“죽여 주마!”

콰아앙!

두 사람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바나텔과 제라드가 서 있던 자리에 높이 수 미터의 폭발 기둥이 치솟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삽시간에 거리를 좁히며 서로 겹쳤다.

2

바나텔은 바슈탈론 제국 남부의 작은 영지 출신의 평민이었다.

자영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귀족처럼 호강하면서 살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에 여유가 있어 영지 안의 작은 무관에서 검술을 배울 수도 있었다.

그 무관은 제대로 된 검사가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제국군에서 은퇴한 노병 하나가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작은 곳이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검술도 바슈탈론 제국군 공식 검술인 제국 검법뿐이었다.

제국 검법은 모든 제국 병사들에게 익히게 하는 범용적인 검술, 그런 만큼 무슨 오묘한 기술이나 비의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단순한 팔방 베기며 찌르기, 기본적인 스텝 정도만 갖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해서 제국검이 결코 엉망인 검술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범용성이 큰 만큼 제국 검법은 기본기에 매우 충실했다. 누구라도 사지만 멀쩡하면 기본을 닦을 수 있는 체계적인 검술이었다.

실제로 제국의 이름난 기사나 검술 무문 중에서도 어린아이들을 위한 기본 검술로 제국검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았다. 기본이 튼튼해야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오랜 무언武言이었으니까.

제국검을 배운 어린 바나텔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우직하게 검을 익혔다. 그리고 놀라운 실력을 보여 무관뿐 아니라 그 일대에서 당해 낼 수 없는 강자가 되었다.

바나텔이 센스가 없느니 어쩌니 해도 그것은 오러를 각성할 정도의 천재들과 비교할 때나 그렇다는 소리다. 저런 시골 영지의 무지렁이들 사이에선 그의 신체 능력만으로도 적수가 없었다.

나름 검에 자신이 생긴 바나텔은 스무 살 때, 집을 떠나 제도로 향했다.

기사가 되려면 타고난 혈통이 받쳐 줘야 하는 법, 저런 시골 영지에서는 아무리 강해 봤자 병사들을 지휘하는 대장 정도가 출세의 한계다. 평민이 검만으로 출세하려면 제도에서 용병으로서 이름을 날릴 수밖에 없다. 이름난 용병은 지방 귀족들이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기사로 등용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제도에 도착한 바나텔은 당시 이름난 용병단이었던 위론 용병단에 적을 두고 검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풋내기 용병이었지만, 시간이 가고 각종 전투를 겪으며 조금씩 ‘제국검을 쓰는 검사’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용병뿐 아니라 검을 쥔 자치고 제국검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다. 아예 군대에서 가르치는 제식 검술이니 배우기도 대단히 쉬운 것이다. 하지만 제국검은 어디까지나 기본일 뿐이지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검술은 아니다.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히지 못한 용병들이 제국검을 쓰는 일은 흔하지만, 그런 이들도 단순히 제국검만을 구사하진 않았다. 보통은 제국검을 바탕으로 용병 생활을 하며 얻은 변칙기를 넣어 자신만의 검술을 만들어 쓰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바나텔은 달랐다.

오직 제국검의 단순한 기술 그 자체만으로 바나텔은 이름난 용병이며 기사마저 베어 버리곤 했다. 그의 검은 너무도 빠르고 강렬해, 다들 뻔히 검의 궤도를 보면서도 채 피하거나 막지 못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저 특이성 때문에 바나텔은 꽤나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나텔이 신분의 벽을 뛰어넘을 만큼 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분명 기본은 탄탄했지만 세상은 그저 기본기만으로 모든 것을 이겨 낼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가끔씩 패배하고, 상처 입고, 죽을 위기도 넘겨야 했다.

그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조언했다.

기본에만 매달리지 말라고.

제발 응용을 좀 하라고.

오직 한 가지 기술만을 갈고닦아 천하제일이 된 무인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이야기일 뿐,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물론 바나텔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찌르기 하나만을 완벽하게 구사해 달인이 된다 해서 진짜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예전처럼 마법이 발달하기 전, 무술가에 대한 정보가 저장될 수 없을 때나 통용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마법사가 흔하고 마탑에서 온갖 마도구를 만들어 내는 시대다. 영상 마법 크리스탈로 녹화가 가능해진 지금은 절대적인 기술 하나만으로 계속 이겨 나갈 수가 없다. 설사 한두 명 정도는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기술이 알려지는 순간 끝장이다. 일단 상대가 그 기술에 대해 충분히 대비를 하면 다른 대응법이 없으니 바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 알고 있다.

바나텔도 충분히 납득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도저히 응용이 안 되는데 어쩌라고?

바나텔이라고 좋아서 기본기만 죽어라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나름 이런저런 시도는 해 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어설프게 따라 할 수야 있지만, 조금이라도 검로를 흐트러트리면 바로 위력도 스피드도 일개 병사 수준으로 줄어 버렸다. 자신보다 훨씬 약한 용병들도 하나 배우면 이래저래 잘도 응용해 대는데, 그는 그런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바나텔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좌절하기에는 너무 굳건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연습하다 보면 늘겠지.

수련하다 보면 되겠지.

남들이 하루 연습할 때 열흘 연습하고, 한 달 연습하고, 1년 연습하면 설마 똑같이 눈 코 입 달리고 팔다리 달린 같은 인간인데 안 될 리가 있겠어?

……그런데 안 되었다.

사람에게는 정말 타고난 것이 있는지,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신기할 정도로 센스가 늘지 않았다.

그러나 바나텔은 실망하지 않았다. 분명 센스는 하나도 늘지 않았지만, 대신 초월적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자고로 한 우물만 파는 자가 보다 빨리 목을 축이는 법.

여전히 단순한 제국 검술만을 구사함에도 불구하고 바나텔은 비교적 빠른, 3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오러를 각성할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경악했다. 위론 용병대의 일개 대장이었던 바나텔이 갑자기 초인 중의 초인이라는 오러 유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깨를 같이하던 동급의 검사가 갑자기 저 하늘 높이 올라가 버렸다.

바나텔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도 달라졌다. 제국의 온갖 유력 귀족들에게서 그를 초빙하고 싶다며 서신을 보냈다. 타국에서는 백작의 작위를 약속하는 왕도 많았다.

어린 시절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바나텔은 흡족해했다. 역시 그의 믿음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수많은 초빙, 그중에서 바나텔이 선택한 것은 바슈탈론 제국 기사단의 대장 자리였다.

타국에서 제의한 작위와 영지에 비하면 좀 모자란 감이 있겠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바슈탈론 제국인이었고 제국의 검술을 익힌 자였다.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바나텔이 딱히 세속의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어릴 적이야 출세하고 싶었지만 정작 오러를 각성하고 나니 무인으로서 더더욱 높은 경지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그런 면에서 제국 기사단의 대장 지위는 검을 수행하기에 매우 좋은 자리였다.

바슈탈론 제국은 황제에게 충성한 오러 유저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었다. 모든 복잡한 업무는 다른 이들이 대신 해 주었다. 자유로운 무인처럼 기사단 버려두고 대륙을 떠돌며 수행을 나가는 것도 막지 않았다. 풍족한 대우를 받으며 오로지 검술에만 매진할 수 있는 것이다.

제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제약이 심하면 심할수록 오러 유저의 경지를 높이기도 힘들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제국 기사단에는 바나텔처럼 평민 출신 오러 유저도 상당수 있어, 마음도 꽤 편했다.

제국 기사단에 적을 둔 후로도 바나텔은 여전히 우직하게 할 수 있는 것만을 수행했다. 남들이 오러 유저치고 참 발전 없다며 혀를 찰 때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우직함이 어떤 결과를 주었는지 몸소 체득한 그였다.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대부분 제국 내에서 수행만 하던 그였지만, 가끔씩은 밖으로 나갈 일이 있었다. 제국의 명 때문이기도 했고, 또 후원을 받는 다른 귀족들의 일을 돕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수행이 중요하다지만 그렇다고 실전을 멀리 하면 골방의 달인이 될 뿐이다. 그걸 잘 아는 바나텔은 들어오는 협조 요청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마흔을 갓 넘겼던 어느 봄날.

그때 바나텔은 라스틸 공국 변방에서 차탄의 한 상단을 도와 귀족가 하나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러 유저인 바나텔의 힘은 압도적이었으니 귀족가의 기사와 병사 들은 결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그 귀족가는 가문이 휘청거릴 정도의 금액을 들여 당시 공국에 머물고 있던 이름 높은 오러 유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때, 바나텔은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철탑 같은 육체에 사람 같지 않은 거구를 지닌 우락부락한 사내.

이미 20년 가까이 오러 유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권왕 제라드였다.

☆ ☆ ☆

제라드를 향해 돌진하며 바나텔이 검을 뽑아 휘둘렀다.

번쩍!

섬광이 번뜩이며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순식간에 제라드의 가슴에 적중했다. 중간 과정이 아예 생략된 것처럼 보이는 무시무시한 스피드의 참격이었다. 이제까지는 그저 넘치는 오러양을 바탕으로 느긋한 공격만을 했었지만, 제라드를 만났으니 본격적으로 전력을 다할 필요가 있었다.

러스와 타시드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빠, 빠르다!’

아까 저 베기를 자신들에게 날렸다면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일거에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정말 바나텔이 봐주긴 많이 봐주었던 것이다. 오러 유저인 그들의 동체 시력으로도 구분이 안 갈 정도의 쾌검이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제라드는 전신에 오러 가드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흥, 이 정도면 굳이 스파이럴 가드를 쓸 것도 없지!”

완숙의 극에 달한 참격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 동작 자체는 기본적인 횡 베기와 다름이 없었다. 제라드 정도 수준이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제라드는 가슴을 활짝 폈다. 황금빛 불길이 일렁이며 타올라 선홍의 오러와 맞붙었다.

콰쾅!

두 색의 오러가 서로 충돌하며 비명을 질러 댔다.

둘의 오러 대결은 바나텔의 우세였다. 선홍색 오러가 황금의 빛을 뚫고 제라드의 육체에까지 파고들었다. 폭음이 울리며 제라드의 등 뒤로 거대한 파문이 터졌다. 충격파가 부챗살처럼 뻗어 나가 대지 위에 파괴의 그림을 남겼다.

검을 거두며 바나텔이 감탄을 터트렸다.

“더 단단해졌군, 제라드!”

분명 그의 블레이드 오러는 제라드의 오러 가드를 뚫었다. 하지만 저 인간의 탈을 쓴 쇳덩어리는 오러 가드 없이도 그 육체만으로 가뿐히 나머지 위력을 막아 낸 것이다.

“으하하! 네놈은 전혀 예리해지지 않았구나!”

블레이드 오러에 실린 위력은 물론 강대했지만, 거기 담긴 절삭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의기양양해하며 제라드가 껄껄 웃었다.

바나텔이 인상을 구겼다.

“그래! 어차피 난 그런 거 할 줄 모른다!”

보통 숙련된 오러 유저들은 오러를 진동시키거나 회전시키는 등으로 관통력이나 절삭력을 높이지만 슬프게도 검성씩이나 되는 주제에 바나텔은 그런 짓 전혀 못 한다. 하지만…….

“한 번 찍어서 안 넘어가면 열 번 찍으면 되지!”

검을 쥔 바나텔이 스피드를 올리며 순식간에 검을 여덟 번 베었다. 제국검술의 기본, 팔방 베기였다.

팔방 베기는 다른 오러 유저들처럼 검을 오묘하게 놀려 여덟 번 연속으로 베는 그런 고도의 동작이 아니다. 일단 한 번 베고, 다시 자세 잡고, 또 한 번 베고, 다시 자세 잡고. 이걸 여덟 번 반복하는 진짜 기초 동작이다.

그런데, 팔만 휘두르는 다른 검술가보다도 몸통 전체를 움직이는 바나텔이 오히려 더 빨랐다!

어찌나 동작이 빠른지 몸이 통째로 흐릿해지며 여덟 개의 참격이 원래부터 하나의 기술인 것처럼 동시에 날아온다. 제라드가 기가 차서 혀를 내둘렀다.

‘아, 저 새끼, 여전히 병신같이 강하네.’

남들 다 하는 8연격은 못하는 주제에, 아무도 못하는 ‘일격 여덟 번 동시 구사’는 해내다니? 바나텔은 분명 센스가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할 줄 아는 동작만큼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위력적이고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하면서도 비효율의 극에 달하는 연격이다. 단순 무식한 바나텔의 검술을 보며 제라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거참, 저놈 놔두고 왜 세상은 나보고 단순 무식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 와중에도 바나텔의 참격은 제라드의 사방을 철저하게 감싸며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사실 너무 정직한 기술이라 피하려면 피할 수는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찰라의 순간 펼쳐진 참격이지만, 같은 레벨인 권황 제라드에게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스피드였으니까.

하지만 제라드는 피할 마음이 없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에 회피란 없다!

“스파이럴 가드!”

2.5미터에 달하는 거구 위로 황금빛 회오리가 솟구쳤다. 강렬한 오러의 소용돌이가 돌풍이 되어 날아오는 블레이드 오러를 산산이 갈아 버렸다.

콰콰콰콰콰!

귀를 찢는 굉음이 연거푸 울렸다.

바나텔이 오러를 더더욱 끌어 올리며 제라드를 밀어붙였다. 참격에 깃든 블레이드 오러의 사이즈가 점점 거대해지더니, 종국엔 무슨 강 건너는 다리만 해졌다. 세상이 선홍빛으로 물들며 제라드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스파이럴 가드의 회전을 올리며 제라드도 제자리에서 버텼다.

놀랍게도 비효율의 극치에 달하는 바나텔의 오러가 제라드의 스파이럴 가드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 스파이럴 가드가 조금씩 흩어지며 선홍색 오러가 제라드의 사방을 파헤치고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제라드의 거구가 조금씩 뒤로 밀렸다. 그가 인상을 쓰며 발을 들어 크게 올려 찼다.

“타이푼 킥!”

발차기의 궤도를 따라 황금빛 오러가 돌풍이 되어 오르며 남은 바나텔의 블레이드 오러를 모조리 걷어 냈다. 제라드가 혀를 내둘렀다.

“거기서 오러양이 더 늘었냐? 괴물 같은 놈.”

오러를 거두어 다시 몸을 방어하며 바나텔이 조롱하듯 말을 건넸다.

“네놈은 그리 늘지 않았군?”

“원래 오러양이란 게 시간만 흐른다고 펑펑 늘어나는 건 아니거든? 네놈이 괴상한 종자인 것뿐이야!”

호통을 치며 제라드가 몸을 날렸다. 2.5미터의 신장에 200킬로그램 가까운 그 거구가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상태로 제라드가 길게 옆차기를 뻗었다.

“타앗!”

뻗어 나간 옆차기가 공성추 같은 위력을 실어 바나텔의 옆구리를 노렸다. 말이 옆구리지, 제라드의 발 사이즈를 생각하면 상체 좌반신 전부가 타격점이다. 손바닥을 펼쳐 내뻗으며 바나탈도 기합을 터트렸다.

“허업!”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와 제라드의 옆차기와 충돌했다. 뇌성이 울리며 대기가 진동했다. 재차 바닥에 착지하며 제라드가 진각을 내디뎌 오른 주먹을 뻗었다. 대포 같은 정권 찌르기가 바나텔의 상체를 향해 쏘아졌다.

쿠웅!

주먹을 지르는 기세만으로 제라드의 등 뒤로 후폭풍이 10여 미터 가까이 일어 올랐다. 바위 같은 정권이 섬광처럼 바나텔을 향해 쇄도했다.

순간 바나텔이 눈을 빛냈다.

“어림없다!”

짧은 외침과 함께 그의 정면으로 무려 아홉 개의 선홍빛 오러 실드가 겹겹이 떠올랐다. 제라드의 주먹이 빛을 발하며 중첩된 오러 실드를 깨부수고 나아갔다.

박살난 오러 실드가 사방으로 튀어 구경하고 있던 러스며 타시드, 다른 오러 유저는 물론 백왕성 인근의 숲과 언덕까지 덮쳤다.

“으에엑!”

“아이고, 검성이시여!”

언덕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른 명의 시종들이 사색이 되어 숲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제라드나 바나텔 입장에서는 그냥 깨진 오러 실드의 파편이 사방으로 떨어졌을 뿐이지만 시종들에겐 유성우나 다름없는 것이다.

비명을 지르는 그들을 보며 바실리의 오러 유저, 왈그란 경이 몸을 날렸다.

“에잉, 꼴 보기 싫은 제국 놈이라지만 저것들은 죄가 없지.”

왈그란 경이 손을 들어 시종들 머리 위에 커다란 오러의 원반을 형성했다. 시종들이 화색이 되어 원반 밑으로 피신했다.

자유 검사, 마라드도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끙! 주위 좀 보고 싸우지, 좀!”

마라드가 자신이 애용하는 곡검曲劍, 팔시온을 길게 뻗었다. 현란한 주황색 블레이드 오러가 창공을 휘감았다. 허공 가득 검광이 휘몰아치며 시종들 머리 위로 떨어지던 오러의 파편들이 일제히 비산해 사라졌다.

“사, 사람 살려!”

“도망쳐!”

정신 차린 시종들이 기겁해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계속 있으면 개죽음만 당할 뿐이었다.

그렇게 다른 오러 유저들이 애꿎은 목숨 살리기 위해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제라드와 바나텔은 둘만의 싸움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

“쳇! 안 뚫리네.”

제라드가 혀를 차며 주먹을 거뒀다. 그의 정권은 바나텔의 아홉 오러 실드, 그중 여덟 개까지는 무난히 파괴했지만 마지막 한 개에서 결국 가로막혀 버렸다.

“예전보다 더 두꺼워졌구먼.”

“나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으니까!”

회심의 미소를 띠며 바나텔이 이번엔 검을 뒤로 뽑더니 찌르기를 날렸다. 바나텔의 전신에서 선홍색 빛의 추 형상이 떠오르며 그 끝이 제라드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꿰뚫어 주마!”

그 유명한 검성 바나텔의 관통격貫通擊이었다. 예전 바나텔이 자신의 위력이 궁금해서 땅에다 대뜸 찌르기를 날렸는데, 하도 깊이 파고들어 온천이 솟았다는 엽기적인 전설이 있는 일격이다.

그 위력은 실로 발군!

‘역시 대단하군.’

제라드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은 흘렸다. 숙적의 존재는 실로 애증의 대상, 피 떡을 만들어도 시원치 않을 바나텔이지만 이렇듯 손을 섞고 있으면 흥겹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받아 주마! 으하하하!”

절로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제라드가 두 팔을 떨치며 가슴을 활짝 폈다.

“더블 스파이럴 가드!”

순간 바나텔이 기겁해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저건?”

제라드의 전신을 휘감으며 왼쪽으로 도는 황금빛 오러의 소용돌이, 그 표면에 또 하나의 회오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안쪽의 스파이럴 가드와 달리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강렬한 기세를 사방으로 뿌린다!

“저놈 저거, 저런 기술 없었는데?”

“나도 안 놀았다는 증거지!”

자신만만한 제라드의 대꾸와 함께 바나텔의 찌르기가 두 겹의 스파이럴 가드와 충돌했다. 쇠끼리 긁어 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더블 스파이럴 가드가 바나텔의 블레이드 오러를 끝부터 빠르게 갉아먹었다.

결국 제라드는 바나텔의 찌르기를 무난히 막아 냈다. 바나텔이 인상을 쓰며 다음 공세를 준비하려던 때였다.

이번엔 제라드가 앞으로 나섰다. 오른 주먹에 찬란한 황금의 오러를 머금은 채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흥!”

코웃음을 치며 바나텔이 손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아홉 개의 오러 실드가 차곡차곡 겹치며 제라드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제라드가 오른쪽 팔뚝을 몸통에 붙였다. 그리고 전신을 짧게 회전하며 오러 가드 앞에 주먹을 가져갔다.

“제로 임팩트!”

강렬한 권경이 주먹 끝에서 뻗어 나왔다.

레펜하르트처럼 사람을 상대로 충격을 관통시키는 평범한(?) 제로 임팩트가 아니었다. 예전 제라드는 심심풀이 삼아 성벽을 격하고 외성은 놔둔 채 내성만 제로 임팩트로 박살 낸 적이 있었다. 엽기적인 전설이란 측면에서는 제라드도 바나텔 못지않았던 것이다.

아홉의 오러 실드를 모조리 관통하며 전혀 소실되지 않은 충격이 바나텔을 강타했다!

“헙!”

순간, 바나텔은 오러 가드를 또 펼쳐서 제로 임팩트의 위력을 모조리 상쇄시켜 버렸다. 오러 실드를 아홉 개나 펼치고도 오러양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제라드가 혀를 내둘렀다.

“쳇, 역시 만만치 않아. 이번에도 승패를 가리기 힘들겠군.”

바나텔도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오랜 숙원을 풀고 싶었는데, 역시 쉽지가 않다.

“역시 내 호적수는 네놈밖에 없군, 제라드.”

문득 제라드가 눈가를 찌푸렸다. 주름살을 만들며 그가 바나텔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어이, 어디서 은근슬쩍 맞먹으려고 해? 네놈 분명 나한테 한 번 패했어.”

바나텔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버럭 성을 내며 그가 호통을 쳤다.

“야! 그걸 숫자에 넣으면 안 되지!”

3

당대 최강의 권사, 권황 제라드.

겉으로 보이는 외모로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제라드는 바실리 왕국에서 꽤나 전통 있는 귀족가 출신이었다. 그의 풀 네임은 제라드 크롬 프로테이스, 뼈대 있는 가문을 상징하는 미들 네임이 엄연히 중간에 붙어 있는 것이다.

프로테이스 가문은 중앙의 유력 귀족은 아니었지만 나름 바실리 동부에서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난 제라드는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제라드의 운명이 뒤틀리게 된 것은 열한 살 때.

그의 앞에 나타난 거구의 노인, 당시의 권왕이었던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사 라스탈 덕분이었다.

이미 대륙 최강의 권사로 명성이 높았던 라스탈은 어린 제라드를 발견하자마자 대뜸 무릎을 꿇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찾았소! 사부! 드디어 찾았소!

2.4미터의 거대한 근육 노괴가 무릎 꿇고 징징 짜는 모습은 참으로 공포스러웠다. 어린 마음에도 ‘나 이 자리에서 죽나 보다.’라고 겁먹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라스탈 입장에선 정말 절로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20대에 세상에 나와 어언 40년, 온갖 명성을 다 얻었지만 그도 슬슬 늙어 가고 있었다. 뭐, 그의 육체를 본 자라면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후계자 걱정이 되는 나이인 건 사실이었다.

무인으로서의 활동도 모두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제자를 찾아 대륙을 떠돈 지 벌써 10년째였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행법을 견뎌 낼 만한 인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스승의 은혜를 갚지 못하고 위대한 가르침의 맥을 끊게 될까 싶어 초조해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찾았다!

인간의 한계를 가뿐히 벗어난 뼈와 근육을 지닌, 실로 짐승 같은 놈을!

눈물을 훔친 뒤 라스탈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당시 제라드는 귀족가 후예답게 예의 바른 아이였다. 눈치도 빨라, 눈앞의 노인이 결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님도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신장 2.4미터의 노인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없겠지만.)

-프로테이스 가문의 제라드라고 합니다.

예의 바른 아이의 대꾸에 라스탈은 호쾌하게 껄껄 웃었다. 그리고 대뜸 한 손으로 어린 제라드의 허리를 잡고―팔뚝이 아니다. 허리다. 워낙 사이즈가 무지막지하다 보니 손아귀에 어린아이 하나가 통째로 들어갔던 것이다― 들어 올린 뒤 바로 그의 아비를 찾았다.

-아들을 내놓아라! 그럼 권왕으로 키워 주마!

과연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답게, 라스탈은 대뜸 저렇게 선언했다.

프로테이스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원래 프로테이스 가문은 바실리 서쪽에서 역사가 깊은 무인 가문이다. 당대 최강자가 아들의 재질을 인정해 제자로 맡겠다고 하니 평범한 상황이라면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을 것이다.

문제는 권왕에 대한 소문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그 강력함만큼이나 무식한 수행법 역시 대륙 전역에 잘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초대 권왕은 제자 수십 들였다가 모조리 시체 만들어 도로 뱉었다지 않은가?

물론 라스탈은 그건 다 예전의 일이며, 그때의 노하우를 통해 제대로 안목을 길러 이제는 확실한 인재만 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설득했지만 역시 믿기는 힘든 이야기였다.

제라드의 아비, 프로테이스 남작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아들을 저런 살벌한 무문에 집어넣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당시의 라스탈은 이미 대륙 최강자로서 일개 귀족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명성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굳이 영향력을 따지지 않더라도 권왕 라스탈은 그냥 그 자신만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귀족가 하나둘쯤은 가볍게 몰락시킬 수 있는 무력의 소유자였다. 함부로 제안을 거부할 만큼 만만한 작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제라드가 유일한 후계자도 아니고, 남작에겐 이미 다른 아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그중 하나를 내줌으로써 당대 최강의 오러 유저와 인연을 맺는다면 그 또한 가문으로서 나쁜 일이 아니었다.

도덕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남작을 보며 라스탈은 좀 더 설득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는 권왕, 주먹으로 대화하는 자였다.

그래서 짐 언브레이커블답게 ‘설득’했다.

-그대의 아들은 이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호통을 치며 벽에 슥 주먹을 가져가는데, 그 순간 대폭발이 일어나며 저택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라스탈의 설득(?)이 먹혔는지, 프로테이스 가문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순순히 어린 제라드를 내주었다. (그래도 라스탈이 양심은 있었는지 착실히 수리비는 보상해 주고 갔다.)

그렇게 열한 살의 어린 제라드는 라스탈의 제자가 되었다.

처음 1년은 무수히 울었다. 부모가 협박을 못 이겨 사부에게 자신을 팔았다고 여겼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2년쯤 되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바빴다.

3년쯤 되니 부모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든 도망가겠다는 생각만 했다.

5년이 지나자 도망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슬슬 사부가 좋아졌다.

진심은 통한다던가? 아무리 혹독한 수행이라지만 그것에는 모두 합리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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