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다가오는 위기
1
열흘 내리 비가 오더니 간만에 날이 개었다. 청명한 여름 하늘이 펼쳐져 젖은 대지를 순식간에 보송보송하게 말렸다.
간만에 뜬 태양 아래 안타레스 백왕성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낙들은 밀린 빨래를 햇살 아래 널어놓고 마부들은 말들을 운동시켰다. 기사와 병사들도 곰팡이가 피지 않게 하기 위해 무기며 갑옷의 수선에 들어갔다.
백왕성으로부터 5킬로미터쯤 떨어진 인근의 개간지.
그곳에서 러스가 간만에 블레이드 오러를 마음껏 발동하며 대련에 임하고 있었다.
“옆구리입니다, 형님!”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을 가르며 상대의 옆구리를 노린다. 순간 황금빛 오러가 번뜩이며 빛의 칼날을 가로막는다.
“허업!”
오러 방어를 끌어 올리는 것만으로 레펜하르트는 가뿐히 러스의 공격을 받아 냈다. 그동안 무술 수행에도 꽤나 전력을 다했기에 육체도 오러도 수준이 훨씬 높아져 있었다. 기간틱 블레이드 같이 힘을 집중한 기술이 아니라 그냥 날린 정도의 블레이드 오러라면, 굳이 스파이럴 가드를 쓸 필요도 없었다.
“내 차례다! 스트레이트 캐논!”
호통을 치며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뻗었다. 황금빛 커튼이 러스의 사방을 점유하고 날아들었다. 전력으로 옆으로 몸을 날려 러스가 공세를 피했다. 빗나간 스트레이트 캐논이 대지를 파헤치며 폭음을 울렸다.
콰콰콰쾅!
“에이! 일대일에서 그건 좀 아니죠, 형님! 그건 다 대 일 때 쓰는 기술 아닙니까?”
흙먼지 속에서 러스가 검을 머리 위로 세워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내려쳤다.
“기간틱 블레이드!”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의 블레이드 오러가 레펜하르트의 가슴을 직격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스파이럴 가드를 펼치지 않았다.
“걱정마라, 러스! 너 잡으려고 쓴 기술 아니니까!”
흙먼지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살짝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기간틱 블레이드의 거대한 빛의 칼날이 빗나가며 땅을 파헤쳤다. 또다시 폭음이 울렸다.
러스가 혀를 찼다.
“쳇, 시야 제어용이었군요.”
아무리 기감으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해도 정밀한 거리 조절은 역시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간틱 블레이드를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반격에 나섰다.
“연환 기격탄!”
양 주먹을 연달아 휘두르며 수십 개의 황금빛 오러 탄환을 쏘아 댄다. 날아드는 기격탄을 러스가 일일이 검으로 쳐 냈다. 튕겨 나간 기격탄들이 땅 위로 떨어져 또다시 폭발을 일으켰다.
쾅! 쾅! 콰콰쾅!
두 오러 유저의 대결에 주변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러스도 레펜하르트도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오랜만에 몸 푸니까 좋네요, 형님.”
“나도 간만에 기분이 상쾌하군.”
비가 오는 내내 안타레스 백왕성의 오러 유저들은 대련을 금지당했다. 현재 백왕성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틸라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아, 힘자랑하다 벽 부수지 말고 다들 좀 얌전히 있어욧!
오러 유저의 힘은 너무도 파괴적이라 실내 연무장 정도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연무장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부수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러니 과소비를 막기 위해서라도 실내 대련 때는 오러 사용을 금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러스와 타시드는 그냥 비 맞으면서 수행을 할까도 고민했다. 둘 다 타고난 무인이다 보니 하루 종일 쉬고 있으면 몸이 근질거려 못 참는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명감에 불타는 틸라에게 제지당했다.
-두 사람 다 비 맞으면서 날뛰지 마요! 옷 상해요! 빨래는 뭐 저절로 되는 건 줄 알아요?
원래는 카를이 백왕성 내의 행정까지 전부 보았었다. 하지만 점점 일이 많아지자 옆에서 틸라도 하나 둘 돕기 시작, 그것이 자연스럽게 업무 인수인계가 되어 버렸다. 부창부수랄까? 백국의 덩치가 이토록 커지고 나니 이제 그녀는 명실공히 백왕성의 시녀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틸라를 떠올리며 러스가 문득 혀를 내둘렀다.
“틸라 양도 참 알뜰하다니까…….”
“그러게 말이다.”
두 사람의 오러로 인해 쑥대밭이 된 주위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도 동감을 표했다.
현재 이들이 대련을 하고 있는 곳은 백왕성 내가 아닌 인근의 개간지, 바위와 잡목들이 즐비해 농토로 쓰기 힘든 곳이다.
평소에 대련하던 장소 대신 이곳에 온 이유는 역시 틸라 때문이었다.
-그냥 허공에 날리는 힘 너무 아깝잖아요? 그거 좀 실용적으로 쓰면 안 되나요?
오러 유저끼리 대련하다 보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새 나가는 블레이드 오러만으로도 건물 한두 개쯤은 간단히 박살 나는 데다가, 오러끼리 부딪칠 때 일어나는 오러 파문 역시 바위를 부수고 거목을 꺾어 버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카를에게 감화되어 상당히 경제적 마인드를 지니게 된 틸라 입장에서는, 이 허공에 날아가는 힘들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레펜하르트에게 진지하게 요구한 것이다. 이왕 오러 써서 대련할 거면, 백왕성 근처의 개간지에서 좀 하라고.
그럼 보나마나 그 일대를 싹 갈아엎어 버릴 테니 그곳이 얼마나 훌륭한 농지가 되겠는가?
-만날 말로만 쑥대밭, 쑥대밭 하지 말고, 정말로 밭 좀 만들어 봐요.
오러 유저를 밭 가는 소로 써먹겠다는 이 아이디어에는 천하의 레펜하르트도 잠시 기겁했다. 아마 타국의 오러 유저였다면 지독한 모욕으로 여기고 벌컥 화를 냈겠지.
하지만 이종족 오러 유저들은 딱히 그런 쪽 권위 의식이 없다 보니 오히려 좋은 생각이라며 찬동한 것이다. 덕분에 다들 대련 장소로 백왕성 근처의 개간지를 고르는 것이 유행이 되어 버렸다.
“그럼 다시 간다, 러스!”
“예! 형님!”
두 사람이 다시 맞붙었다.
황금과 청색의 오러가 또다시 사방을 수놓으며 열심히 땅을 골랐다.
쾅쾅! 으적으적! 우르릉!
밭도 갈고 승부도 겨루며, 참으로 생산적인 대련을 행하는 두 사람.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이니야가 손을 흔들며 레펜하르트를 응원했다.
“레펜하르트 님, 파이팅!”
곁에 있던 시리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얼른 뒤를 따른다.
“나, 나도 파이팅!”
그래 놓고 바로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무래도 부끄럽긴 한 모양이다.
이니야와 시리스의 응원을 보더니 아틸카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왕님만 응원하면 형평성이 안 맞지 않나? 이보게! 러스 군! 힘내시게!”
타시드도 히죽 웃으며 러스를 응원했다.
“그래, 이 친구야! 한 방 제대로 먹여 보라고!”
러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저쪽은 아리따운 엘프 여인 둘이서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응원을 해 주고 있는데, 이쪽은 사납게 생긴 트롤과 오크 사내 둘이서 응원을 해 주고 있다?
뭐, 좋은 의미라는 건 알겠는데 목소리가 너무 살벌하다 보니 어째 응원이 아니라 지면 가만 안 두겠다는 협박 같기도 하다.
“……뭔가 묘하게 서러운데, 이거.”
러스의 하소연을 하늘이 들었는지, 이번에는 꾀꼬리 같은 맑은 음성의 응원이 들려왔다.
“힘내요! 러스 경!”
엘프 여인들과 비교해도 결코 꿀리지 않는 미모의 소유자, 실란이었다.
“아니, 이건 더 서러운데…….”
그래도 응원이라도 해 주면 다행이다. 티티마 같은 경우엔 러스가 대련을 하건 말건 전혀 관심 없이, 햇볕 쬐는 고양이처럼 돗자리 구석에 웅크린 채 도롱도롱 졸고 있었으니까.
“우웅, 조용히 좀 싸우지, 귀 아프다아…….”
현재 이곳에 와 있는 이는 러스와 레펜하르트뿐이 아니었다. 평소에 대련을 금지당했던 타시드가 눈을 빛내며 따라왔고, 아틸카 역시 자기도 몸 좀 풀어야겠다며 합류했다.
바늘 가는 데 어찌 실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레펜하르트를 따라 이니야가 눈을 빛내며 달라붙었고, 그러자 시리스도 인상을 쓰며 따라왔다.
실란은 그냥 재밌는 구경 하겠다며 끼어들었다. 실란이 움직이자 티티마도 ‘내 거’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며 졸랑졸랑 뒤를 따랐다.
실란을 제외하면 다들 전사 계열, 비 때문에 그동안 대련을 금지당하기는 서로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은 이미 한바탕 대련을 통해 몸을 풀어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경하다 말고 이니야가 돗자리 곁에 놓인 바구니에서 연어 샌드위치와 음료를 꺼냈다.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점심 도시락이었다.
“다들 드시면서 구경하세요.”
이니야가 방긋방긋 웃으며 아틸카와 타시드, 실란이며 티티마에게까지 골고루 샌드위치를 돌렸다. 이들은 모두 레펜하르트와 친분이 깊은 이들, 장수를 노리려면 말부터 쏘라는 실란의 조언을 그녀는 착실히 지키고 있었다.
시리스에게 건넬 때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그녀만 안 줄 수는 없으니 마저 건넸다.
“시, 시리스 양도 들어요.”
“저도 도시락 싸 왔어요.”
새침한 표정으로 시리스도 바구니를 하나 꺼내 들었다. 흰 빵에 올리브유, 마늘 소스를 얹은 고기 크로켓에 샐러드를 곁들이고 제법 질 좋은 와인까지 챙겨 왔다. 이니야의 도시락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화려해 보인다.
“자, 다들 드세요. ……뭐, 이니야 씨도 드시고 싶으면 드시고?”
돗자리 위에 음식 판이 벌어졌다. 원래는 오러 유저들 간의 대련을 위해 나온 것인데, 뭔가 소풍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니야와 시리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요리 잘하시네요, 이니야 씨.”
“시리스 양도요, 호호호.”
두 사람 모두 입가는 웃고 있었는데, 어째 눈빛이 따로 놀고 있다.
“……뭔가 춥다.”
눈치는 없어도 감은 좋은 타시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분 탓일세.”
모든 것을 관조하는 현자의 눈으로, 아틸카가 허하게 대꾸했다.
‘아무나 파이팅!’
실란은 무책임하게 응원만 하고 있었다.
“하암, 졸리다…….”
티티마는 아무 생각 없이 하품만 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한가한 분위기인 것은 사실이었다.
쾅! 쾅! 콰콰쾅!
……바로 옆에서 웅장한 폭음이 계속 울리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면 말이다.
☆ ☆ ☆
한참 후에야 레펜하르트와 러스가 땀범벅이 되어 돗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 위에 펼쳐진 음식들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탄성을 질렀다.
“오, 이게 웬 진수성찬이야?”
안 그래도 아침부터 내리 대련을 뛰었더니 보통 허기진 것이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크로켓이며 빵을 입에 넣었다. 손가락을 꼬면서 이니야가 중얼거렸다.
“나, 나도 샌드위치 싸 왔는데…….”
물론 짐 언브레이커블의 원대한 위장은 두 여인의 도시락을 모두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다. 레펜하르트는 이니야의 샌드위치도 마저 입속에 넣고 씹었다.
우걱우걱 씹어 삼키고 벌컥벌컥 들이켠다.
참으로 호쾌한 그 식사 광경에 시리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부터 가진 불만이지만, 레펜하르트는 지나치게 막되게 밥을 먹는 버릇이 있다.
‘아니, 예전엔 우아한 마법사셨다면서 대체 그때 버릇은 다 어디 간 거야?’
뭐, 누구든 짐 언브레이커블 밑에서 4년쯤 밥 먹고 살다 보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만.
반면 이니야는 몽롱한 눈빛으로 뺨을 발그레 붉히고 있었다.
‘아, 먹는 모습도 너무 사내다워!’
계속 식사를 하며 레펜하르트는 오늘의 대련을 점검했다. 그는 오늘 러스 말고도 이니야며 아틸카, 타시드 등과도 모두 무술을 겨루었다. 그리고 그 모든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확실히 실력이 늘었군.’
6중첩이야 야매(?)이니 제외한다손 치더라도, 5중첩 캘러미티 혼을 각성한 것만으로도 모든 신체 능력이며 오러양이 확연하게 늘어났다.
예전만 해도 타시드나 러스는 그렇다 치고 이니야나 아틸카를 상대하기엔 꽤 벅찬 감이 있었다. 특히 아틸카 같은 경우에는 순수한 무술만으로는 세 번 붙어서 한 번 이기기도 어려웠다. 마법까지 같이 써야 겨우 접전이 가능할 정도로 아틸카의 무력은 높았다.
그런데 지금은 마법 없이도 어느 정도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실로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마력 쪽은 진짜 지지부진이네.’
무술 쪽은 일단 마음잡고 노력하니 노력하는 대로 쑥쑥 실력이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마력 쪽은 영 굼벵이 걸음이다. 7서클 돌파한 게 언젠데 아직도 마력 증가량은 눈곱만큼, 7서클 마법도 절반 이상 구사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10서클의 깨달음이 있으니 있는 마법 이리저리 꼬아서 새 마법 만드는 건 가능한데, 절대적 레벨을 올리는 것은 역시 시간이 드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사방신의 유물을 찾기 전에는 이제 더 이상 단기간에 마력을 올릴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사방신의 유물이 있는 결계를 통과하려면 최소 8서클의 마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도 여태껏 손을 못 대고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권마합신이 있으니까.’
이전에는 사용하지 못했던 오러와 마법의 융합 술식, 권마합신을 응용하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슬슬 사방신의 유물을 찾으러 가 볼까? 하지만 막상 갔다가 안 통하면 시간만 낭비하는 건데.’
한편 러스는 실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란이 제플린에서 납치되었던 사건에 대해서였다.
“……그렇게 되어서 무사히 탈출은 할 수 있었어요. 티티마 없었음 큰일 날 뻔 했죠, 진짜.”
“그래도 티티마 양 실력 정도면 별로 힘든 상대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이 자리에 모인 전사들은 모두 아침 내내 서로 대련을 해 보았다. 그 와중에 러스는 티티마와도 검을 섞었다.
오러 유저에 비하면 물론 손색이 많았지만, 그래도 티티마의 실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크리스틴에 비하면 충분히 우세를 점할 수 있어 보였다.
실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았어요. 그 여자가 어디서 메사이어를 얻어 왔더라고요. 덕분에 저도 힘 좀 썼죠.”
러스가 이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유서스도 괴상한 아티팩트 들고 나타나긴 했었지. 형님 이야기론 다른 놈들도 뭔가 하나씩 들고 있었다고 했고. 거참, 어디서 그런 걸 구했는지…….”
허공검을 터득한 덕에 이길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당시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러스가 혀를 내둘렀다.
그때, 밥을 먹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실란. 그거 혹시 성광검 메사이어?”
“알아요? 하긴, 워낙 유명하니까.”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놀란 이유는 단순히 크리스틴이 이름난 아티팩트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성광검 메사이어라면…… 시리스가 쓰던 거잖아?’
성광검 메사이어는 레펜하르트가 아직 10서클에 진입하기 전, 대륙을 떠돌 때 얻은 기물이었다. 던전에서 구한 것은 아니고, 할라인 왕국의 몰락 귀족이었던 실니악 남작가에서 하룻밤 묵다가 그 집 창고에서 썩고 있던 걸 발견한 것이었다.
당시의 성광검 메사이어에는 강력한 저주가 걸려 있어 실니악 남작가는 희대의 아티팩트를 보고도 저주받은 검이라며 봉인해 둘 뿐이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적당히 금액을 치르고 메사이어를 구매, 간단히 저주를 풀고 시리스에게 선물했다.
성광검 메사이어는 사용자가 지닌 각종 기운을 골고루 증폭시켜 준다. 쉽게 말해서 능력이 잡다하면 잡다할수록 증폭도도 커진단 소리다. 그런 만큼 검술과 정령술, 마법을 모두 구사하는 시리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증폭도에 한계가 있어 시리스가 경지에 오른 후로는 수하의 엘프 부관에게 줘 버렸지만, 아직 전생 때만큼 강해지지 않은 현재의 그녀에게는 대단히 유용한 기물이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이번 생애에도 시간 나는 대로 남작가에 들러서 시리스에게 메사이어를 구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 이유로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를 보고도 별 욕심을 내지 않았던 것이고.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었다.
‘끄응, 급한 일부터 처리하려 하다 보니 우선순위가 밀려 일단 미뤄 뒀었는데, 그새 딴 놈이 찾아 버렸나.’
전생 때의 그가 실니악 남작가를 들린 나이는 30대 초반,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곳에 성광검 메사이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메사이어의 출처에 대해선 레펜하르트도 시리스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테스론이 그 사실을 알 리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 다른 자가 메사이어를 채 갈 거라는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또 내가 회귀한 결과로 미래가 뒤틀려서 이런 건가? 역시 다른 일 제쳐 놓고 메사이어부터 찾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크로방스 내전 같은 경우엔 딱 시기에 맞춰 일어나는 일이라 놓칠 수가 없었다. 늦장 부렸다면 유벨도 잃었을 것이고, 카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안타레스 백국을 세울 때도 그랬다.
백국이 자리 잡을 때까지는 함부로 밖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혹여 시간이 생겨도 더 급한 일이 많았다. 아틸카와의 재회나 제플린 노예 해방 전쟁 등은 고작 검 한 자루 얻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레펜하르트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레펜하르트가 오직 전생 때의 인연에만 연연했다면 지금의 안타레스 백국도 없었을 터,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미래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면 바뀐 미래도 수용해야 한다.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성격을 보아하니 크리스틴이 실란을 포기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럼 다시 만날 때 메사이어 회수해서 선물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그래도 대체 메사이어가 왜 이 시간대에 나타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생각을 정리하며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그 떡대 여자가 우연히 실니악 남작가를 들렀었나?”
“응?”
레펜하르트의 혼잣말에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리스틴 말로는 은의 현자가 주었다던데요?”
“은의 현자?”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혹시 실니악 가문이 이번 시간대에는 은의 현자라고 불리나? 하지만 전생의 그, 쫄딱 망해서 비실대던 실니악 가문을 떠올리면 전혀 어울리는 명칭이 아니다.
‘아니, 그보다 실니악 남작가에서 얻은 게 아니라면, 성광검 메사이어를 그냥 받았다는 소리인데?’
새로 조우한 테스론 일행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강력한 아티팩트들을 들고 나타났다. 정황을 보면, 아무래도 성광검 메사이어도 저 아티팩트들과 출처가 같다는 쪽이 더 그럴듯하다. 저마다 다른 장소에서, 저마다 다른 아티팩트를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발견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제이드 놈도 그렇고.’
레펜하르트의 머릿속에, 제이드가 놓고 간 은빛 엠블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은의 현자.
다량의 아티팩트.
그리고 제이드.
이 모든 것이 관계가 있어 보인다. 물론 너무 정보가 적어 억측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왠지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든다.
이건 결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라고!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관련 정보를 모아 봐야겠군.’
예전 같았으면 워낙 시급한 일이 많다 보니 따로 신경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카를 시키면 알아서 잘하겠지? 아, 역시 그 양반 잘 살려 뒀어.’
히죽거리며 레펜하르트는 어깨를 폈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마저 씹어 삼키며 생각했다.
‘사방신의 유물부터 빨리 찾아야겠네. 그곳의 위치는 테스론도 알고 있으니.’
이제까지는 레펜하르트도 마력이 모자라 사방신의 유물을 거두러 갈 수가 없었다. 테스론도 같은 처지일 것이라 생각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성광검 메사이어에 대해 듣고 나니 역시 걱정이 된다.
카를 덕분에 예전처럼 백국 내에 급한 일도 많이 없어진 상황이니 여유도 좀 있는 편, 씹고 있던 크로켓을 꿀꺽 삼키며 레펜하르트는 결심했다.
‘아라난 그라드 건설지 시찰만 끝내면, 바로 날짜 잡아 움직여야겠다.’
2
대륙의 동쪽을 종단하는 대산맥 글로텐의 서쪽 지류, 아렌드 산맥.
오랜 세월 침식된 이 완만한 산맥 서쪽에 강을 낀 커다란 평원이 있다. 산맥으로부터 흐르는 세린 강을 따라 형성된 지형으로, 안타레스 백왕성으로부터 100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예전에는 체타스 남작령이었지만 영지전을 통해 백국에 편입된 곳으로, 테르마니아 관도와 세린 강을 끼고 있어 교역 도시 자루드와 바실리 왕국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기도 하다.
그 아렌드 평야의 중부, 세린 강변을 따라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고 있었다.
아라난 그라드.
룬어로 오색五色의 도시란 의미를 지닌, 안타레스 백국의 새로운 수도였다.
도시의 정경을 바라본 레펜하르트가 감탄을 터트렸다.
“호오, 이제 거의 도시 형태를 갖췄군? 예전에 봤을 때는 그냥 벌판일 뿐이었는데.”
외부 성벽은 이미 대부분 공사를 마쳤으며, 왕궁이며 각 종족들의 대표자가 묶을 공공건물들 역시 건설이 끝나 있었다.
전부 드워프의 손길이 닿아 있어,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견고하지 그지없어 보인다. 세린 강변을 따라 설치된 나루터도 완공되고 성문 쪽도 조각상 등의 외부 치장만 덜 되었을 뿐 이미 완성되어 있다.
카를이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인재도 많고 인력도 많았으니까요. 생각보다 진행이 빨랐습니다.”
백국 내를 정비하고 안정화시키며 제플린 공략을 짜는 한편, 카를은 새로운 백국의 수도 건설에도 열을 올렸다.
현재 안타레스 백왕성은 사실, 예전 쓰던 겔페인 자작의 성을 약간 수리한 뒤 그대로 눌러앉았을 뿐이다. 원래는 왕국의 일개 지방 귀족이 쓰던 소규모 성이어서 백국의 규모가 커진 지금 왕성으로 쓰기엔 여러 모로 불편함이 많았다. 위치 역시 너무 산맥 인근에 붙어 있어 교통이 불편하고, 또 지형도 일국의 수도라기엔 너무 좁았다.
새롭게 유입된 유민들이며 이종족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해서라도 대규모 공사는 필요했다. 그래서 2년 전부터 조금씩 공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인력이 적어 그리 진행이 빠르지 않았지만 점점 더 백국의 인구가 늘며 건설 속도도 가속화되었다. 제플린에서 구출한 노예 출신 이종족들이 대거 투입된 지금은 슬슬 도시가 제 기능을 할 정도까지 완성이 되어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감탄을 이었다.
“만날 돈 모자라다고 하소연하더니 용케 이 정도까지 예산을 마련했구려.”
카를이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이것까지 하려니 돈이 모자랐던 겁니다. 사실 크로방스 왕국에 빚도 좀 졌습니다. 할 수 없지요. 돈 모자란다고 눈앞의 일을 미루면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겠습니까?”
돈 이야기 나오자 바로 어깨가 축 늘어지며 눈이 퀭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았다.
레펜하르트가 웃으며 그를 달랬다.
“슬슬 구해 낸 이들이 자리를 잡고 생산 활동에 들어갔으니 곧 예산도 확보될 거요.”
각 종족의 특산물들은 다른 나라에서 상당한 고급품으로 취급받는다. 품질도 품질이지만, 일단 희귀성이 있다 보니 생산원가에 비해 마진을 크게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이종족들의 특산물은 안타레스 백국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크로방스 왕국으로 적을 옮긴 타오반 상회와 손을 잡고, 안타레스 백국은 현재 대륙 각지에 엘븐 실크며 오크리시 레더 제품, 트롤제 유리와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있었다. 드워프의 무기와 갑옷은 전쟁을 대비해야 하니 밖으로 유출할 수 없지만 저것들은 사치품이니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었다.
카를도 웃으며 다시 표정을 폈다.
“안 그래도, 덕분에 구멍 난 예산을 제법 메울 수 있었습니다.”
이종족의 특산품들은 대륙 각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바슈탈론 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안타레스의 엘븐 실크로 옷을 짜고, 오크들의 가죽 외투를 걸치며, 트롤들의 유리와 도자기로 저택을 장식하는 것이 큰 유행으로 번질 정도였다.
안타레스 백국이 대륙 각국에 예물로 이종족의 특산품을 선보인 덕분이었다. 물론 정치적 이유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각국의 귀족층에 백국의 산물을 광고하는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설마, 이 효과까지 노린 거였소?”
태연자약하게 카를이 대꾸했다.
“제대로 된 행정가라면 한 가지 행동으로 여러 결과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카를은 그렇게 레펜하르트 일행을 안내하며 거리를 걸었다. 성문을 통과해 아라난 그라드 외곽을 돌며 주변을 시찰한 뒤, 중심 거리 쪽으로 향한다.
시리스가 주위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대단하네요. 제플린과 비교해도 별로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비록 미완성이긴 하지만 아라난 그라드는 실로 훌륭한 도시였다.
거리의 모든 구획이 잘 구분되어 있고 가파른 곳에는 돌계단도 놓여 있다. 도시 전체가 질서 정연하달까? 곳곳에 우물과 목욕탕을 건설하는 모습도 보였다. 녹지 역시 잘 조성되었다.
“드워프들이 만든다고 해서 엘프가 살기 좀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모든 시설이 하나 같이 드워프뿐 아니라 모든 종족이 사용하기에 편하도록 만들어졌다. 옛 시대의 드워프는 오직 자기네 종족 신장에만 맞춰 건축을 하기에 사실 다른 종족에게는 좀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현 시대의 드워프들은 이미 오랜 노예 생활 동안, 인간의 기준에 맞춰 건물을 올리는 것 역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이니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 그런데 여기에도 세계수 심으실 건가요, 레펜하르트 님?”
엘프의 거처는 보통 세계수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럼 다른 나라에 너무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당분간은 아렌드 산맥 안쪽에 세 번째 세계수를 심어 영향력하에만 놓이게 할 생각입니다.”
“그 정도면 엘프들도 사는 데 불편함은 없겠네요.”
거리가 가까워지자 거대한 건물 사이에 자리 잡은 임시 오두막과 많은 수의 천막들이 보였다. 중요 건물은 완성되었지만 일반적인 건물들은 여전히 공사 중이라 인부들의 거처가 필요한 것이다.
수많은 드워프와 오크들이 열심히 돌을 쪼고 벽돌을 나르며 구슬땀을 흘린다. 그러다 레펜하르트 일행을 보자 흠칫 놀라며 저마다 허리를 숙였다.
“오잉, 백왕님이시다.”
“재상님, 또 오셨네.”
레펜하르트나 카를이라, 둘 다 실로 범상치 않은 외모다 보니 사방에서 알아보고 인사를 해 댄다. 개중에는 아틸카나 이니야를 알아보는 이도 있었다.
“오, 저분이 트롤의 대구루, 아틸카신가 보군. 듣던 대로 이빨 죽이네.”
“엘프 오러 유저 이니야 님이신가? 과연 가슴이…….”
둘 다 ‘특정 부위’가 과하다 보니 이야기만 들어도 확실하게 인상착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시리스와 실란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일반 국민들이 이야기만으로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사실 실란은 그냥 보면 예쁜 소녀 신관으로밖에 안 보이고 시리스 역시 평범한 엘프 소녀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레펜하르트와 함께 있으니 그들 역시 여기저기서 아는 척을 했다.
“저분이 신월의 검사님이신가보군.”
“그럼 저분이 ‘그’ 어린 성자?”
“그런 듯하이. ‘그’ 어린 성자님이신 듯해.”
‘그’라는 단어가 굉장히 신경에 거슬렸지만…… 실란은 애써 무시하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나 이제 알통도 생겼는데! 왜 아직도 저런 반응인 거야! 쳇!’
슬프게도 티티마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 트롤이다.”
“트롤 여자애네.”
“누구지?”
물론 티티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 가며 일행은 계속 거리를 걸었다.
현재 레펜하르트를 따르는 이들은 시리스와 이니야, 아틸카와 실란, 티티마였다.
시리스와 아틸카는 각자 엘프와 트롤의 대표 격으로 시찰에 참가하고 있었다. 건축의 주 인부들이 드워프와 오크라 평소에도 마켈린과 타시드는 이곳을 자주 왕래해 굳이 이번에 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켈린은 현재 그랜드 포지로 돌아갔고, 타시드는 러스와 함께 백왕성에 남았다.
이니야 경우에는 딱히 볼일 없이 이번에도 레펜하르트와 함께 있겠다며 따라온 것이었다. 일족마저 내팽개치고 남자 따라다니는 족장의 행태에 분노할 법도 하겠다만, 사실 스티리아 일족은 열심히 이니야를 응원하고 있었다.
-파이팅! 족장님!
-꼭 그 남자 잡아요!
-그리고 이젠 제발 노처녀 히스테리 좀 그만…….
뭐, 부관인 세르펠이 워낙 유능한지라 딱히 문제가 없기도 했다.
티티마야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실란이 오니 그냥 따라온 것이었고.
하지만 실란은 확실히 이곳, 아라난 그라드에 볼일이 있었다.
“자, 이곳입니다. 프리스트 실란.”
구획 하나를 건너자 카를이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실란이 화색을 보였다.
“오오! 크네요!”
그것은 특이하게도 ‘분홍색’으로 외벽을 칠한 거대한 3층 신전이었다. 저 색상만 봐도 이 신전이 누구를 섬기는지 바로 알 수 있으리라.
이번에 새롭게 신설된 ‘안타레스 교구’의 필라넨스 대신전이었다.
연신 히죽거리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그렇게 좋냐?”
“당연하죠. 나도 이제는 당당한 대주교라고요! 엣헴!”
크로방스 내전과 안타레스 백국 내에서, 실란이 보인 위업은 결코 작지 않았다.
비록 본인이 입만 열면 근육 타령을 해 대서 그렇게 안 보일 뿐이지, 실란은 백국의 주요 건국 공신이며 수많은 이종족에게 필라넨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한편 전쟁터에서도 많은 명성을 떨쳤다. 이런 인재를 교단에서 어찌 그냥 놔두겠는가?
그래서 필라넨스 교단은 정식으로 교칙을 내려 안타레스 백국에 교구를 마련하고 실란을 교구장, 대주교의 지위로 올려 주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유례가 없는 대출세이지만 워낙 업적도 높고 권왕과의 관계도 좋은 데다 신성력도 충분히 대주교 수준이다. 그런 실란의 대주교 취임을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신전이 완공되고 공식적으로 수도를 이전하면, 바실리 왕국 쪽에서 실란의 손발이 될 프리스트들을 대거 보내 주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처음 레펜하르트를 만났을 때 실란이 꿈꾸었던 것처럼 교단의 역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아, 역시 레펜 씨 따라다니길 잘했지.”
실란이 흐뭇한 미소를 얼굴 가득 떠올렸다. 다른 이들도 기꺼이 축하해 주었다.
“축하한다, 대주교 실란.”
“축하해요.”
하여튼, 아라난 그라드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모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훌륭한 도시일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크게 만족하며 레펜하르트가 치하의 말을 건넸다.
“실로 완벽한 도시요, 카를. 정말 수고가 많았소.”
하지만 카를은 여전히 불만인 것 같았다.
“완벽하지는 않지요. 역시 수도 이름이 좀 권위가 적은 것이…… 레펜하임, 참 좋은 이름인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아니, 그건 싫다고 했잖소…….”
전생의 안타레스 제국 수도, 레펜하임.
풀이하자면 ‘레펜하르트의 도시’라는 의미다.
원래 각 나라의 국명은 건국왕의 성을, 수도는 이름을 따는 것이 대륙의 관례다. 우연의 일치로 카를 역시 백국의 수도 이름으로 레펜하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런 쪽팔린 이름을 어떻게 붙여?
전생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 시간대로 회귀하며 곰곰이 생각하니 영 낯 뜨거운 명칭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도시에다가 자기 이름을 붙이다니? 권력욕 가득한 독재자나 할 짓이 아닌가?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그 홀로 군림하며 이종족들을 다스릴 생각은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인도다. 그래서 ‘레펜하임’이라는 얼굴 팔리는 명칭 대신 다섯 종족이 모두 어우러져 살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오색의 도시, 아라난 그라드’라는 이름을 주장했다.
레펜하르트의 고집이 워낙 세서 카를도 결국 승낙은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레펜하임…… 참 좋은 이름인데…… 어떻게 설득할 방법이 없네…….”
구시렁대며 카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시를 모두 보여 주었으니 이제 왕궁 차례였다.
“왕궁은 겉은 완성되었지만 내부는 아직 손댈 데가 많습니다. 그래도 대략적인 파악은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왕궁으로 막 향하려던 중이었다.
저만치서 전령 한 명이 맹렬히 말을 달리며 다가오더니 바로 카를을 불렀다.
“재상님! 자루드에서 급보입니다!”
자루드라면 안타레스 백국의 주요 교역 도시다. 카를이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전령이 잽싸게 품에서 전서를 꺼냈다.
“마탑으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레펜하르트로부터 마법을 전수받은 드워프 마법병단은 비록 느린 종족이지만 워낙 월등한 스승을 둔 덕에 슬슬 4서클 정규 마법사 수준까지 다다라 있었다.
카를은 그 드워프 마법병단을 백국의 요충지로 보내고 마탑을 세워 마법 통신망 역시 세워 둔 후였다. 아직 실력이 낮아 글자 몇 개밖에 보내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급한 보고는 바로 받을 수 있으니 그 효능이 적지 않았다.
카를이 전서를 받고 나서 안색을 굳혔다.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카를이 레펜하르트에게 전서를 건넸다. 종이를 펼친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 역시 굳어 버렸다.
서신은 실로 간단한 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자 루 드 적 습
☆ ☆ ☆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두 사람이 탄 말은 카를이 고른 준마 중의 준마였지만, 워낙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전신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결코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지금 마음이 급했다.
‘대체 어디서 쳐들어온 거지? 바실리 왕국? 아니면 바슈탈론 제국?’
교역 도시 자루드는 바실리 왕국과 인접해 있으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그곳이다. 그러나 바실리 왕국은 안타레스 백국의 입장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바슈탈론 제국일 가능성도 크다.
‘그렇지만 제국이 바실리를 통과해서 군대를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탑에서 온 전서는 너무 요약되어 있어 도저히 자세한 사항을 알 수가 없었다. 한시바삐 교역도시 자루드에 도착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랴!”
레펜하르트는 박차를 가하며 더욱 말을 재촉했다.
말을 달리는 레펜하르트와 시리스, 그들 옆에는 거대한 어금니를 지닌 샤벨 타이거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고 있었다.
전신이 푸른 털로 덮이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이 마수는 트롤 주술로 변신한 아틸카였다. 구루의 가르침은, 부상당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살아 있는 생물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반대편에선 이니야가 은빛으로 빛나는 새하얀 순록을 타고 따라붙고 있었다.
살아 있는 순록이 아니라 그녀의 오러를 물질 변환시켜 생성한 일종의 영수靈獸였다. 딱히 아틸카처럼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니야도 말을 탈 줄 모르기에 평소 쓰던 이동 수단을 선택한 것이다.
카를과 실란, 티티마는 일단 아라난 그라드에 남았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니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였다. 이 셋은 일단 후속대를 모은 뒤 뒤따르기로 되어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 언덕을 넘자 숲이 끝나며 교역 도시 자루드의 모습이 보였다.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이럴 수가…….”
자루드의 성벽 일부가 참혹할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성문도 완전히 박살 난 것이 확연히 보인다.
아틸카가 신음을 흘렸다.
“적이 쳐들어온 것이 확실하군요.”
속도를 높여 네 사람은 빠르게 자루드 시를 향했다. 성문 근처로 다가가니 피 흘리며 쓰러진 경비병이며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더더욱 굳었다.
“제길…….”
성안으로 들어선 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일단 말에서 내렸다. 혹시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니 더 이상 말을 타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니야가 영수를 거두었고 아틸카도 변신을 풀고 다시 트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 사람은 주위를 경계하며 시내로 들어섰다.
무너진 성벽이나 박살 난 성문에 비해, 도시 안쪽은 그리 파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아 보이는 광경이다.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적이 보이지 않는데요?”
어째 적의 모습도 없었고, 딱히 군대가 휩쓸고 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니야도 동의의 빛을 보였다.
“확실히 군대가 지나갔다면 이렇게 흔적이 남지 않을 리는 없지요.”
하지만 분위기는 분명 흉흉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처박혀 있었다. 창문 틈으로 힐끔 보이는 표정에 공포의 빛이 역력하다.
그리고 분명 성벽과 성문은 파괴되어 있지 않은가?
“으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의문은 자루드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 자루드 시청에 도착한 순간 풀렸다.
높이가 4층에 달하고 면적도 어지간한 성에 육박하는 자루드 시청은 명실공히 자루드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그 시청이 지금 정확하게 반토막 나 있었다.
허물어지거나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무슨 생일 케이크 잘라 놓은 것처럼 딱 절반으로 ‘쪼개져’ 있다. 지진이라도 일어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연재해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저 둘로 쪼개진 시청의 단면은 하나같이 반들반들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아틸카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이건 대체…….”
이니야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오러군요.”
마법으로는 이렇게까지 집중된 절삭력을 보이기 힘들다. 이런 절단면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블레이드 오러뿐이다.
‘하지만 대체 누가?’
파괴력 하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짐 언브레이커블도 건물을 통째로 무너트릴 수는 있을지언정, 이렇게 딱 잘라 버릴 수는 없다.
황당해하며 일행은 시청 안쪽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병사들과 기사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중에는 자루드의 시장, 행정관 페이론의 시체도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렸다.
“이자도 죽었나. 제법 유능한 친구였는데…….”
사실 잘 알지는 못하는 자였다. 백국의 행정관들은 카를의 지시하에 움직이는 지라 레펜하르트로서는 취임식 때 한번 보았을 뿐이었다. 이곳의 기사와 병사들도 직접 임관시킨 이들이 아니라 대부분 낯이 설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들은 그의 신하였고 그의 책임하에 있던 이들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자기도 모르게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누구냐!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콰앙!
반토막 난 시청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했다. 그때 한쪽에서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궈, 권왕님…….”
무너진 기둥 사이에 작은 키의 인간 여인 한 명이 숨어 있었다. 시리스가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대는?”
“페이론 님의 하녀인 릴리안이라고 합니다.”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다그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 그게…….”
릴리안이 더듬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냥 갑자기 폭음이 울리고 기사님들이 출동하시면서 피해 있으라 하셔서…… 하지만 이 일을 저지른 자들은 보았습니다. 나이 든 노인 한 명과 열 명의 기사들이었는데, 전부 검에서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말로만 듣던 오러가 아니었는지…….”
레펜하르트와 시리스가 서로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과 열 명의 기사?”
“전원이 오러 유저였다고요?”
릴리안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그, 그러고 보니 그 노인이 저쪽에 블레이드 오러로 뭔가를 하는 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부 도시를 떠나 버렸는데…….”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릴리안의 손끝 너머로 향했다.
시청 외벽에 새겨진 훼손 자국이 보였다. 워낙 커서 처음엔 몰랐는데 의식을 하고 보니 그 자국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블레이드 오러로 외벽 전체에 글귀를 적어 둔 것이었다.
간악한 이단의 왕을 참하기 위해 검을 드노니
세이어의 이름으로 이 땅에 천벌을 내리노라
-바나텔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바나텔이라면, 그의 스승인 제라드와 함께 이 시대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검성劍星이 아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레펜하르트가 비명처럼 외쳤다.
“젠장! 백왕성이 위험해!”
3
파아앗!
눈부신 빛이 안타레스 백왕성의 외벽을 가로질렀다.
콰콰콰쾅!
성 전체가 흔들리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 무슨 일이냐!”
홀을 통해 흑발의 20대 청년이 달려왔다. 현재 백왕성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안타레스 기사단의 단장, 아스레일 경이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방에서 단장으로서의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기사단의 단장쯤 되면 단순히 검술이 뛰어나고 무력이 높은 것만으로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기사와 병사들의 훈련 스케줄을 짜고 백왕성 방어 상태를 점검하며 기사단에 딸린 마부나 하인, 시종들을 관리하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 평소처럼 열심히 이것저것 계산해 가며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뇌성 같은 굉음이 울리며 발밑이 크게 흔들린 것이다.
“아스레일 단장님!”
정신없이 걸음 옮기는 아스레일 옆으로 건장한 중년 기사가 따라붙었다. 안타레스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헌트 경이었다.
“오, 헌트 경!”
헌트 경에게 다가가며 아스레일이 물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백왕성에서는 이런 난리통이 벌어질 때 보통 제일 먼저 의심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었다.
“혹시 러스 경과 타시드 경이 과하게 날뛰시나?”
등 뒤에서 억울해하는 답변이 들려왔다.
“우리 아니오!”
“그러게! 억울하다!”
러스와 타시드였다. 두 사람 다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가 진동을 느끼고 놀라서 뛰쳐나온 것이었다.
아스레일의 안색이 굳었다. 두 사람의 짓이 아니라면 이는 대체?
러스가 소음이 울린 쪽을 바라보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하오, 이건 오러의 기운입니다.”
타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것도 처음 접해 보는 투혼이다.”
타이밍 좋게, 경비병 하나가 헐떡이며 달려와 소리쳤다.
“적습입니다, 단장님!”
아스레일이 혀를 찼다.
“젠장, 하필 백왕님께서 자리를 비운 이 시기에…….”
무장을 갖춘 뒤 아스레일이며 러스, 타시드와 헌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굉음이 울린 성벽 쪽으로 달려갔다.
이미 성벽 주위에는 안타레스 기사단과 백왕성 경비대가 모여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일부는 무너진 파편에 깔린 병사들을 구하고 일부는 반파된 외벽 위로 올라 밖을 바라보고 있다.
외벽의 상태를 본 순간 러스가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이거?”
성벽은 단순히 무너진 정도가 아니었다. 흩어진 성벽의 파편, 그 위의 절단면이 놀랍도록 반질거린다. 오러 유저인 러스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는 블레이드 오러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단 일 검에 이루어진 일이다!
타시드가 기가 차 중얼거렸다.
“……이걸, 한 번에 썰었다고?”
이 절단면의 길이는 거의 수십 미터에 달하고 있었다. 최강의 오크 투사, 푸른 곰의 칼켄이 전력을 다해도 이렇게까지는 못할 것이다.
네 사람은 빠르게 성벽 위로 올라갔다.
백왕성 밖, 숲과 이어진 넓은 언덕에 한 무리의 일행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사 열 명 정도와 서른 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이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새하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풍채 좋은 노인 하나가 뒷짐을 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레일이 의아하며 중얼거렸다.
“누구지, 저들은?”
다 합쳐 봐야 마흔이 조금 넘는 이들, 백왕성을 노리고 온 적이라고 보기엔 상당히 적은 숫자다. 하지만 러스와 타시드는 아스레일처럼 느긋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 러스…… 저 철 갑옷 입은 친구들 전부 투사인 것 같은데?”
“그렇군, 타시드…… 어떻게 저리 많은 오러 유저가 백왕성에…….”
두 사람 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한을 느꼈다.
저 기사들은 굳이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지 않았다. 오러를 외부로 발현하지 않은 상태지만, 그럼에도 내부에 갈무리된 광포한 힘이 100여 미터가 넘는 거리를 뛰어넘어 와 닿고 있었다.
게다가, 저들 앞에 선 저 노인은 대체?
타시드가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저 괴물은 뭐지? 어떻게 인간에게 저런 투혼이 느껴지는 거냐?”
그저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서 있을 뿐인데,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등줄기로 냉기가 스쳐 지나간다.
강자, 그것도 어마어마한 강자였다. 이제껏 많은 오러 유저를 접해 본 러스조차도 경악할 정도로.
아스레일이 침을 꿀꺽 삼킨 뒤 성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가 목청을 돋워 소리쳤다.
“그대는 누구요? 안타레스를 적대한 자, 이름을 밝히시오!”
노인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바슈탈론의 바나텔, 세이어의 뜻에 따라 이곳에 왔노라…….”
그리 큰 음성이 아닌데도, 그저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도 노인의 목소리는 기이하게 백왕성 전체에 울리고 있었다. 기사들이 공포를 느끼며 사색이 되었다. 병사들 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 이들도 있었다.
“허억!”
“으어어…….”
음성에 담긴 힘만으로도 심력이 약한 이를 무릎 꿇리는 절대적인 힘!
러스며 아스레일, 헌트 경 등 정신력이 강한 이들도 공포를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음성에 담긴 힘의 공포는 이겨 냈으되, 그 의미가 주는 공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창백해진 얼굴로 아스레일이 중얼거렸다.
“저, 정녕 검성 바나텔이란 말인가?”
노인이 느긋한 어조로 외침을 이었다.
“안타레스의 백왕에게 고한다! 당장 모습을 드러내 무릎 꿇고 세이어의 이름 앞에 그 죄를 고하라!”
☆ ☆ ☆
바나텔의 뒤에 서 있던, 대부분 40~50대의 중장년인인 열 명의 오러 유저들.
그들 중 갈색 머리에 중후한 인상을 한 기사가 백왕성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할라인 왕국의 이름 높은 오러 능력자, 카메룬 경이었다.
“분위기 보니까…… 어째 권왕은 자리 비운 것 같군?”
바실리 왕국의 오러 유저, 왈그란 경이 동의의 뜻을 표했다.
“그렇구려. 그리고 오러 유저도 두 명밖에 없어 보이는데?”
오러 유저인 그들은 기감만으로도 대충 백왕성 내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라임 왕국의 게블릭 경이 혀를 찼다.
“안타레스 백국에는 오러 능력자가 열 명 가까이 있다지 않았나? 그래서 이런 짓까지 해 놓고는…….”
검성 바나텔과 함께 이 자리에 온 열 명의 오러 유저들이 저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모두 바슈탈론 제국이 아닌, 대륙 각지에서 명성을 떨치던 타국의 오러 유저들이었다.
현실적으로 전쟁이 힘들다는 걸 알기에 바슈탈론 제국은 권왕 레펜하르트를 벌하기 위해 동등한 방식을 쓰기로 결심했다. 레펜하르트가 제플린을 침략했을 때 했던 짓처럼 강력한 오러 유저들만을 모아서 소수의 초인들을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안타레스 백국의 오러 유저는 현재 파악된 것만 아홉. 그나마 한 명 죽긴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이쪽도 최소 열 명 이상의 오러 유저는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바슈탈론 제국이라도 왕실에 충성한 오러 능력자의 숫자는 열한 명뿐. 가능성이 거의 없긴 하지만, 만약 그들을 모두 잃게 된다면 제국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래서 바슈탈론 제국은 자국의 오러 유저를 동원하는 대신 대륙 각국에 협박성 전언을 보냈다.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세이어에 반기를 드는 이단자를 처벌하고자 하니, 힘을 보태 주길 바란다!
전쟁을 하자는 것이었으면 다른 나라들도 이래저래 핑계를 댈 수 있었겠지만, 그냥 오러 유저만으로 벌하자는 제국의 요구까지 반대할 수는 없었다. 군대를 보내라는 게 아니라 개인을 요구하는 것이니 명분이 서질 않는 것이다.
물론 오러 유저의 존재는 각국의 주요 전력이니 이 또한 들어주기 힘든 요구인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은의 현자가 뒤에서 은밀히 영향력을 발휘하니, 결국 각국에서는 왕국에 충성하는 여섯 명의 오러 유저들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테이칸 왕국 출신의 자유 기사, 마라드가 입술을 삐죽였다.
“자루드 시에서도 순 허약한 자들밖에 없었는데…… 여기서도 무의미한 학살을 해야 하는 거요?”
세이어 교단 역시 마라드를 비롯한 네 명의 오러 유저를 동원했다. 교단 내의 오러 유저가 아닌, 교단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유로운 오러 유저들이었다.
대륙에 현존하는 인간 오러 유저의 숫자는 거의 일흔 가까이 된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각 왕국에 충성하는 이들은 아니다.
오러를 각성하려면 극한의 무武를 깨달아야 하니, 그 특성상 오러 유저 중에는 속세의 권력이나 지위에 연연치 않는 구도자적인 성격을 지닌 이가 상당히 많았다. 각국의 오러 유저로 활동하는 이는 절반 정도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초국가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명성 높은 권황 제라드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는 분명 바실리 왕국 출신이지만 바실리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은 자유로운 무인이었다. 바실리 왕국에 등록된 오러 유저는 기사단장인 탈리온 경을 비롯해 세 명, 그 숫자에 권황 제라드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출신만 따지면 권왕 레펜하르트도 바실리의 오러 유저이겠지만, 아무도 그렇게 봐 주지 않는 것처럼.
마라드가 불만을 이었다.
“그냥 권왕만 해치우고 끝내면 될 걸, 왜 애꿎은 이들까지 죽여야 하는 거야?”
마라드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