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장 각국의 정세
1
제플린 해방 작전 한 달 후, 안타레스 백왕성의 재상 집무실.
카를은 한창 탈출한 노예 출신 이종족들에 대한 행정적 뒤처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연신 펜촉을 잉크에 적셔 가며 빠른 속도로 서류를 작성해 댄다. 휘갈기는 듯 빠른 속필인데도 필치는 하나같이 우아하고 귀족적이다. 저 필치의 주인이 테이블이 좁아 보일 정도로 우람한 사내라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어색한 광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현재 카를의 앞에 놓인 서류의 산들은 그 우람한 덩치조차 가릴 정도로 방대했다. 전부 드워프와 트롤, 엘프와 오크로부터 올라온 보고 서류들이었다. 일만에 가까운 숫자가 유입되었으니 업무량도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류를 훑어보며 카를이 중얼거렸다.
“역시 드워프 쪽이 제일 자리 잡는 게 빠르군.”
드워프들은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의 지도 아래 무사히 백국 내에 자리를 잡았다.
조상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던 드워프들은 비록 노예라 할지라도 자유로운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과 문화적인 공감대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알 포트라는 그들의 신을 섬기고 있으며 노예 생활 속에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있어 대신관 마켈린의 권위를 충분히 존중했다.
“트롤 쪽도 별문제 없는 듯하고.”
이미 대륙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트롤 부족은 대부분 안타레스 백국의 비호하에 들어왔다. 덕분에 구출된 트롤들 대다수가 원래 속했던 부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돌아갈 부족이 없는 이들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아틸카가 구출한 트롤들 전원이 주술사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깊은 숲 속에서 인간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것이 현 시대 트롤의 삶, 평범한 트롤들은 애당초 마을 주변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구루 수행자들만이 마을의 결계 밖을 벗어나 자연의 가르침을 따르며 수행을 쌓다가 인간과 조우해 붙잡히곤 하는 것이다. 이것이 트롤이 인간들에게 강력한 몬스터로 알려진 이유이기도 했다.
트롤들 사이에서 주술사는 어딜 가도 환영받았다. 기존의 구루들도 새로운 구루가 부족에 영입되는 것을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트롤 주술의 가르침이 ‘동화同化’를 추구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트롤이 무사히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술적인 ‘심장 뽑기 의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무리 강력한 재생력을 가진 트롤 구루라도 저 ‘심장 뽑기 의식’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아틸카 정도 되는 대주술사라면 모를까, 일개 구루는 저 의식 한 번 행할 때마다 일주일씩 앓아눕곤 하는 것이 예사였다. 실력이 낮은 구루 중에는 심장 재생에 실패하고 죽어 버리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의식을 행해 줄 이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는 횟수가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보니 쌍수 들고 환영하면 했지 결코 텃세 같은 것은 부리지 않는 것이다.
뭐, 트롤 구루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영입 자체를 거부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런 이유로 돌아갈 부족이 없는 트롤 구루들도 무난하게 백국에 합류할 수 있었다.
다시 카를이 다음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엘프와 오크 쪽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편이군.”
구출된 노예 출신 엘프와 오크의 처리는 각자 시리스와 타시드가 맡고 있었다.
영향력이나 권위를 생각하면 이니야나 칼켄이 맡아야 했겠지만, 엘프와 오크 노예는 드워프나 트롤에 비해 너무 인간의 지배에 물들어 있어 옛 조상들의 문화와 단절된 지 오래였다.
렐하드나 이니야, 칼켄이며 스탈라 등 기존의 수장들과 이들 노예 출신들은 너무도 공감대가 없는 것이다. 비록 이니야가 왕년 무술 수행을 하며 인간 세상을 제법 접해 보았다지만, 어디까지나 정체를 숨기고 인간인 척했던 것이니 노예로 살아간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같은 노예 출신이며 인간과 동족 양쪽을 접해 본 시리스와 타시드가 각자 엘프와 오크의 대표자 격이 되었다. 저들과 레펜하르트의 친분도 있고 해서 기존의 수장들도 별 거부감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양쪽 다 나이가 어린 편이라 아틸카나 마켈린처럼 순탄하게 진행하지는 못했지만, 모자란 경험을 레펜하르트와 카를의 도움을 받아 메워 가며 구출한 동족을 안착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서류를 결재하며 카를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걱정했었는데 제법 잘하네, 둘 다.”
하여튼, 참으로 방대한 업무량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리 천하의 카를이라 한들 과로로 쓰러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플로라 등의 엘프 비서들이 많이 업무에 적응하긴 했지만 그래도 원체 배움이 느린 종족이다 보니 아직도 행정 관료로서는 모자란 점이 많았다. 엘프답게 꼼꼼하고 섬세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까진 좋은데 단순한 서류 업무 하나를 맡겨도 며칠씩 걸리기 일쑤였다. 일처리가 느려도 너무 느렸다.
하지만 현재 안타레스 백국 행정부는 용케도 이 모든 업무를 감당하고 있었다. 새롭게 들인 부하들 덕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베이드입니다, 카를 재상님.”
“들어오시오.”
집무실 문이 열리며 50대 중년인 한 명이 한 무더기 서류를 들고 방 안에 들어섰다.
“각 종족 동맹들에게서 올라온 추가 보고 정리입니다.”
“어디 봅시다.”
서류를 간략히 검토한 뒤 카를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처리했군. 수고했소. 다른 이들에게도 치하한다고 전해 주시오, 베이드.”
베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받은 은혜가 그토록 큰데 어찌 이 정도로 칭찬을 바라겠습니까?”
현재 카를은 휘하에 기존의 엘프 비서 말고도 서른 명 정도의 ‘제대로 된’ 행정관을 두고 있었다. 모두 크로방스 왕국 남부, 체타스 남작령에서 일하던 이들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갈린 남작과 손잡고 일으킨 영지전에 의해 완전히 몰락해 버린 체타스 남작가.
크로방스 왕국의 유력 귀족으로 넓은 영지와 교역 도시 자루드를 다스리고 있던 체타스 남작가는 그만큼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의 숫자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남작가가 몰락하며 일제히 실업자가 되어 버렸다.
그때 카를은 그들 중 인재를 추려 안타레스 백국의 관료 지위를 주고 고용했다. 혈통제 사회 대부분이 그렇듯 실력이 있음에도 뒷배가 없어 하찮은 일만 하는 이들의 숫자가 꽤 되었다.
능력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던 이들이 일국의 행정 중추에 앉게 되었으니, 다들 감격하여 충심으로 안타레스 백국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눈앞의 중년인, 베이드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재상님.”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인 뒤 베이드가 다시 밖으로 향했다. 카를도 계속 업무에 열중했다.
마지막 한 장을 검토하고 최종 사인을 한 뒤 기지개를 켠다.
“아으, 간신히 끝났군. 이제 운동 좀 할 수 있으려나?”
한차례의 서류 폭풍이 지나가고 겨우 막간의 휴식 시간이 다가왔다. 카를이 숨을 돌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때 또다시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저기, 재상님.”
카를의 전속 비서, 플로라였다. 원래는 레펜하르트의 비서였지만 대부분의 행정 업무가 카를에게로 옮겨진 지금은 재상의 전속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플로라?”
“백왕님께서 부르십니다. 크로방스 왕국에서 사절단이 도착했다는군요.”
“……조금의 쉴 틈도 안 주는군.”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로라가 재빨리 다가와 외투를 건넸다. 고상한 무늬를 수놓은 정례복이었다. 사절단을 만나야 하니 격식에 맞는 의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복을 걸치며 카를이 물었다.
“누가 인솔하고 있다던가?”
“라로스 백작이라고 하던데요.”
“윽? 라로스 백작?”
순간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양반, 나랑 구면인데…….”
라로스 백작은 카를이 카르사스이던 시절, 페르난도 가문을 몇 번이나 찾은 크로방스의 고위 귀족이었다. 어릴 적부터 봐 온 잘 아는 인물이란 소리다.
기운 없는 음성을 흘리며 카를이 뺨을 긁었다.
“이거 들키지 않으려나?”
한때 레펜하르트가 그에게 걸어 주었던 인상 왜곡 마법은 현재 풀려 있는 상태였다.
마법은 신성 주문과 달리 마력 없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마법으로 외모를 바꾸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화려한 금발이던 수염과 머리는 염색약으로 검게 물들여 놓았지만 이목구비나 눈동자 등은 다시 카르사스이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리 유벨 2세가 레펜하르트를 총애한다지만, 왕위 찬탈을 노린 반역자를 살려 두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절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겠지.
“으음…….”
그냥 만나지 말고 레펜하르트에게 전부 맡길까 고민하는 카를의 모습에 플로라가 실소를 흘렸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재상님.”
사실 현재 카를에게 예전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일단 덥수룩한 수염만으로 얼굴 대부분이 충분히 가려진다. 게다가 그동안 틸라 취향 맞추느라 과하게 근육을 키운 덕택에 체구는 물론이고 인상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아무리 외모 변환 마법이 풀렸다지만, 현재 카를을 보고 왕년의 날렵하던 미남 기사 카르사스를 떠올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재상님 어머님이 살아 돌아오셔도 과연 알아볼지 아닐지 의문인 판인데요?”
“으음, 그런가?”
여전한 부분이 있다면 눈 정도? 바다처럼 푸르고 청명한 눈동자만이 그가 카르사스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뭐, 걱정 없겠군.”
이야기 중에는 눈빛만 보고도 ‘아니! 당신은!’ 하면서 변장한 사람 척척 알아보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현실에서는 거의 없는 이야기다.
눈빛만 봐도 사람을 알아봐? 그게 가능하면 복면강도는 왜 생겼겠는가? 부모나 연인 정도 되면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지인 정도면 어림없는 소리지.
카를이 안심하며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플로라에게 손짓했다.
“그럼 알현실로 가겠다. 집무실 뒷정리 좀 부탁해, 플로라.”
“네, 재상님.”
☆ ☆ ☆
안타레스 백왕성, 알현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정갈하게 꾸며진 그 방에서 거구의 근육질 사내와, 그보다 더 거구의 근육질 사내 두 명이 삐쩍 마른 50대 중년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타레스의 재상 카를과 백왕 레펜하르트였다.
“크로방스의 라로스가 안타레스의 군주를 뵙습니다.”
빛바랜 금발 머리를 숙이며 라로스 백작은 레펜하르트에게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같은 백작위를 지니고 있다지만 그와 레펜하르트는 결코 동격이 아니다. 차탄이나 라스틸 공국의 공왕에게 같은 공작위를 지녔다고 맞먹으려는 이는 없다. 당연히 일국의 왕을 대하는 예법을 갖추는 것이 예의였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비주얼부터가 저절로 무릎을 꿇게 만들지만.
팔뚝이 자기 허벅지보다 더 굵은 사람이 눈앞에 둘이나 있는데도 건방을 떨려면 어지간히 생각이 짧지 않고는 힘든 일인 것이다.
‘백왕님이야 원래 유명하지만 대체 저 재상은 뭐 하던 양반이지? 대체 행정 일 하는데 저런 몸이 무슨 필요가 있다고…….’
카를을 힐끔거리며 라로스가 딴생각을 할 때였다.
레펜하르트가 일어서라며 손짓을 했다.
“안타레스에 잘 왔네, 라로스 백작. 폐하께서는 안녕하신가?”
흠칫 라로스가 정신을 차리고 품속에서 국왕의 편지를 꺼냈다.
“예,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으시지만 젊으신 터라 건강이 상하진 않으셨습니다. 여기 서찰을…….”
서신을 받아 들고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읽어갔다.
시종관의 잔소리가 격했는지 서신이 온통 국왕다운 품위와 고상, 우아함으로 포장되어 있긴 했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차탄 공국 꼴 보기 싫었는데 참 잘했음.
앞으로도 차탄 공국 엿 먹일 일 생기면 연락 바람.
열심히 도와주겠음.
라로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첨언했다.
“폐하께서는 백왕님의 이번 행보에 크게 만족하고 계십니다.”
역사적으로 크로방스 왕국과 차탄 공국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농업이 주요 산업인 크로방스 왕국과 상업이 주인 차탄 공국, 쉽게 말해 두 나라의 관계는 1차 생산자인 농민과 물건 떼어 가는 2차 도매상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도매상이 양심적이라면 그 무엇보다 좋은 관계가 될 수 있겠지만, 차탄 공국이 비양심으로 무장한 것은 온 대륙이 다 안다. 중간에서 온갖 폭리 취하는 저 나라를 크로방스 왕국이 좋게 볼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현 정권에 들어서는 완전히 적대 관계로까지 되어 있었다.
유벨 2세와 왕위를 두고 다투다 패한 카르사스 공자 일파는 현재 차탄 공국에 망명한 상태였다.
유벨 2세뿐 아니라 새로이 권력을 잡은 모든 신흥 귀족들에게 저 망명 귀족들의 존재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크로방스 왕국은 그동안 몇 번이나 차탄 공국에 서신을 보냈고 무시당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크로방스의 귀족들은 분노를 곱씹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플린 해방 작전을 위해 안타레스 백국에서 길을 빌려 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 반대하는 크로방스의 귀족들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저 간악한 차탄 공국에 엿을 먹일 수 있는데 왜 반대하겠습니까?”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듯 보이는 레펜하르트의 행보도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이미 크로방스 왕국은 이종족을 자유인처럼 대하는 안타레스 백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한 번 허용한 것인데 두 번 못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서찰을 모두 읽은 뒤 레펜하르트가 말을 건넸다.
“폐하께 안타레스 백국이 호의에 감사한다고 전해 드리게.”
“예, 백왕님.”
“아, 차탄 공국 쪽 반응은 어떤가?”
“당연히 길길이 날뛰고 있지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라로스가 미소를 띠었다.
당연하겠지만, 이번 사태에 대한 차탄 공국의 분노는 실로 엄청났다.
수도 제플린을 침범당한 데다가 왕궁이 농락당했고 막대한 재물을 빼앗겼으며 그 와중에 상당한 피해도 입었다. 실로 국치國恥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극도로 흥분하며 차탄의 공왕, 나틴 2세는 바로 성명을 발표했다.
일국의 왕인 주제에 야만스러운 무뢰배나 도적처럼 제플린을 습격한 권왕 레펜하르트에 대한 비난, 그리고 그를 묵인할 뿐 아니라 탈취한 노예들을 안타레스 백국까지 이송할 수 있게 길을 내어 준 크로방스 왕국에 대한 성토였다.
당장 빼앗아 간 노예들을 내놓고, 피해 액수를 보상하며, 권왕 레펜하르트에게 합당한 정의를 구현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노라며 엄포를 놓았다.
“물론 가뿐히 무시했습니다만.”
라로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크로방스 왕국도 상당히 대처에 걱정을 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틴 2세가 저렇게 강하게 나오긴 했지만, 사실 지금 차탄 공국은 감히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권왕 레펜하르트와 안타레스의 이종족들이 벌인 일로 인해 차탄 공국이 입은 피해는 실로 엄청나다. 수천에 달하는 제플린의 노예들을 빼앗았으며 일국의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무수한 병력을 학살했다.
이것만으로도 차탄 공국의 피해액은 천문학적인 숫자, 하지만 가장 심각한 피해는 역시 콜른 협곡 사건이었다. 일국의 지형 자체를 바꿔 버린 그 위업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곳에서 차탄 공국의 최강 전력, 제플린 나이츠가 모조리 몰살당했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기사단이라면 설사 주력이 전멸했다 한들 어떻게든 재기할 구석이 있다. 이름 있는 기사단의 일원이라면 은퇴나 죽음을 대비해 종자를 두어 후계를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니까. 그리고 제플린 나이츠 역시 만일을 대비해 자신의 후계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문제는 제플린 나이츠가 마검사 집단이라는 점이었다.
제플린 나이츠의 후계자들도 다른 기사단처럼 충실히 기술과 역량을 키운다. 하지만 그것은 마도구를 다루는 기술과 역량이다. 그런데 현재 제플린 나이츠는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무너진 콜른 협곡, 그 절벽 아래 깔려 죽었다.
단순히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한 명, 한 명이 보기 드문 아티팩트, 혹은 그에 맞먹는 최고위 마갑과 마검으로 무장한 제플린 나이츠였다. 그들의 모든 무구가 수천만 톤의 돌산 아래 묻혀 버린 것이다.
인간 후계자는 키우면 되지만 사용하던 마도구는 다시 만들기 어렵다. 아무리 막대한 금액을 투자한다 하더라도 제플린 나이츠가 쓰던 수준의 마갑과 마검을 다시 마련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원래 제플린 나이츠의 마도구를 다시 되찾으려니, 산 하나를 통째로 파내야 할 지경이다. 어느 쪽이건, 10~20년 단위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상업으로 이름 높던 차탄의 경제 역시 크게 흔들렸다.
노예 매매는 차탄의 경제를 책임지는 주 품목 중 하나, 공국을 버티던 다리 하나가 분질러지니 그 여파가 장난이 아니었다.
자고로 경제란 모든 면에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법이다. 무수한 노예상들이 망해 버리니 그와 거래하고 있던 다른 상인들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며 무너져 갔다.
막대한 액수의 환어음이 종이 쪼가리가 되어 버리고 그로 인해 망한 상인들이 대거 차탄을 떠나 버렸다. 상업의 나라로 명성 높았던 차탄 공국에는 실로 막대한 타격이었다.
차탄 공국이 이 정도로 무너질 만큼 허약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국력이 크게 깎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다. 대흉년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은 전통의 대국 크로방스와, 이미 강력한 군사력을 증명한 신흥 세력 안타레스는 현재 차탄 공국으로는 상대하기 벅차다.
“오히려 일부 호전적인 귀족 중엔 차탄 공국이 쳐들어와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도 있지요. 말씀은 안 하시지만 폐하께서도 은근히 그런 눈치이신 듯하고요.”
원래 사절로 오는 이들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각국의 정세와 연관이 되기 때문에 함부로 확언을 하지 않는다. 그런 라로스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유벨 2세가 전쟁에 뜻이 있음이 확실하단 소리다.
라로스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때가 되면, 다시 한 번 안타레스의 그 강력한 전사들을 전장에서 만날 수 있겠지요?”
레펜하르트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것이오.”
환하게 웃으며 라로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 ☆ ☆
라로스가 물러가자 알현실에는 레펜하르트와 카를만 남게 되었다.
레펜하르트가 카를을 돌아보며 물었다.
“흐음, 저 정도면 크로방스 왕국은 믿을 만한 동맹이라고 봐도 되겠지?”
“예. 대부분의 크로방스 귀족들은 안타레스 백국에 호의적입니다.”
내전 때의 일로 인해 이종족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 크로방스 귀족들은 계속 안타레스의 소문을 듣고 지내며 점점 더 생각을 바꿔 갔다.
눈으로 보이는 변화.
그리고 뒤에서 피나게 노력했던 안타레스 백국―정확히는 카를―의 로비와 여론 조작.
그 덕분에 예전에는 레펜하르트를 미친놈 취급했던 이들이, 조금 지나자 그럴 법도 하다고 말을 바꿨고, 지금 와서는 실로 선구자라며 칭송하는 자까지도 나타났다.
뭐, 칭송까진 아니더라도 레펜하르트를 적대하고 싶어 하는 이는 확실히 없었다.
많은 귀족들이, 레펜하르트와 친분이 있던 갈린 남작이 그의 도움으로 유력 귀족으로 거듭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렇다 보니 영지 내 노예들을 해방시켜 안타레스 백국으로 보내 레펜하르트와 친분을 돈독히 하려는 자들도 제법 생겨났다. 저 당대의 권왕과 교분을 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는 이미 대부분의 귀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레펜하르트 본인도 일부러 그런 뉘앙스를 열심히 풍겼다.)
아직 크로방스의 국법이 이종족의 인권을 보장하지 않기에 겉보기로는 그냥 노예를 무상으로 제공한 것처럼 꾸미긴 했지만 적어도 레펜하르트의 사상 자체는 이해하고 행하는 행동이었다.
적어도 예전처럼, 레펜하르트가 ‘이들은 내 노예가 아니라 동맹이오!’라고 아무리 외쳐도 ‘에이, 아까워서 안 팔려고 그러죠? 웃돈 줄 테니 노예 파세요.’라고 마이동풍 놀이를 하는 수준은 지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왕이 우리 편이잖습니까? 유벨 녀석, 장가가고 싶어서라도 철통같이 백왕님을 지지할 겁니다. 배신할 리가 없죠.”
말하다 말고 문득 카를이 키득거렸다.
“생각해 보니 불쌍하군요, 유벨도. 이긴 그 녀석은 아직도 사랑하는 이와 당당히 결합할 수 없는데 패배한 저는 속 편하게 틸라와 사귀고 있으니.”
놀리는 카를의 어조에 레펜하르트도 농조로 말을 받았다.
“에이, 자네도 아직 결혼은 못 하지 않나? 장인이 허락을 안 한다며?”
카를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드워프 고집이 명불허전이긴 하더군요.”
그리고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하지만 3년이면 됩니다. 3년 안에 그분이 허락하게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카를의 얼굴에 레펜하르트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카를은 제플린 공략법을 짤 때의 그 책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인간이 대체 무슨 뒷공작을 벌이려고 저런 표정이다냐?
“……되도록 인도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허락하게 만들길 바라네.”
“에이, 틸라 양의 아버님인데 저도 그렇게 악랄한 방법은 별로 안 씁니다.”
별로 안 쓴단 소리는, 어쩌다가 쓸 수도 있단 소리 아닌가? 레펜하르트는 황당해하며 카를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시선을 뗐다.
‘뭐, 자기가 알아서 잘하겠지.’
“음, 어쨌건 차탄 공국은 됐고…… 다른 나라의 반응은 어떤가?”
농조를 거두며 카를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잘 처리되었습니다.”
2
대륙 북서부를 지배하는 그라임 왕국의 수도, 템페라드.
왕성 델 그라임의 그랜드 홀에서 40대의 장년 사내가 왕좌에 앉아 신하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현 그라임 왕국의 국왕, 하이드 엘 그라임 2세였다.
왕좌 좌우로 도열한 신하들, 그 앞에 한 중년 귀족이 부복하고 있었다. 안타레스 백국에 사절로 갔던 페론 자작이었다.
“신臣 페론, 폐하의 은혜에 힘입어 무사히 명을 마치고 돌아왔나이다.”
왕좌에 앉은 채 하이드 2세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페론 자작. 안타레스 백국의 답변은 어떻던가?”
권왕 레펜하르트의 제플린 습격 전쟁은 차탄 공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 역시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제플린 습격전이 단순한 침략 전쟁이었다면 그건 차탄과 안타레스, 양국 간의 문제니 그냥 상황이나 좀 경계 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확실하게 이종족 노예 제도에 반기를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해도 대륙의 질서를 흔드는 일이니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피해 규모가 적고 증거가 없다 뿐이지, 그동안 안타레스 백국에 이종족 노예들을 탈취당한 것은 다른 왕국들도 마찬가지인 입장이다. 제플린의 참변이 언제 자기 일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라임 왕국은 물론이고 할라인, 바실리, 테이칸 왕국 등의 대국이 저마다 안타레스 백국에 사절을 보내 정치적 압박을 가했다. 라스틸 공국 등 대국들 사이의 소규모 국가들도 정세를 파악하려 한껏 백국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각국의 요구 사항은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차탄 공국처럼 적대적인 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들 권왕의 무도함과 국가 간의 도리를 어긴 그 전쟁에 대해 비난을 성토했다. 대륙의 질서를 위해 훔쳐 간 노예들을 차탄 공국에 돌려주고 이종족 노예 제도를 부활시켜야 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레펜하르트를 알현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페론 자작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평판과 달리 안타레스의 백왕은 말이 통하는 자더군요.”
안타레스 백국은 다른 나라의 사절들을 융숭하게 대접했으며 각국의 요구 역시 성심껏 듣는 자세를 보였다. 차탄 공국의 사절을 문전박대했던 것과는 정반대 태도였다.
-안타레스 백국이 차탄 공국을 도모한 것은 어디까지나 백국의 국민들, 그 가족과 친지 들이 제플린에서 너무도 고통받고 살았기에 행한 일일 뿐이다. 그동안 일어났던 대륙 각국의 노예 탈주 행위에 대해서는 백국과 전혀 무관하며,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노예 제도에 대해서는 내정 간섭이니 수용할 수 없으나, 각국의 우려 역시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안타레스 백국은 향후 더 이상 이런 사태는 벌이지 않겠다. 안타레스 백국은 침략 전쟁을 할 생각이 없으며 대륙의 질서를 존중한다. 차탄 공국 외 다른 나라에 안타레스 백국이 발을 디디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뭐, 잘 보면 교묘히 책임을 회피하는 대답이긴 했다. 요약하자면, 차탄 공국 습격한 일은 전혀 반성하지 않지만 다른 나라의 입장은 존중하겠다 정도?
하지만 이 정도면 다른 왕국 입장에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적대 관계는 차탄 공국 하나에 국한하고, 다른 나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확실하게 밝혔다.
안타레스 백국이 힘없는 나라도 아니고, 군사력만 따지면 다른 왕국과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곳이다. 그런 나라가 저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국가 간 관계에 있어서는 충분히 저자세를 취했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안타레스 백국이 준비한 것은 저뿐만이 아니었다.
“들여보내라!”
페론 자작이 손뼉을 쳤다. 홀 안으로 왕실 시종이 커다란 궤짝 몇 개를 들고 들어왔다.
하이드 2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것은 무언가?”
“권왕 레펜하르트가 폐하께 보내는 예물이옵니다.”
페론 자작이 손짓을 하자 시종들이 궤짝을 열고 물러섰다. 궤짝마다 화려한 옷감과 고급스러운 가죽 물품들, 그리고 우아하기 그지없는 도자기며 미스릴제 무기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신하들이 놀라 중얼거렸다.
“허어, 대단한 보물들이로다.”
마치 달빛으로 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운 빛을 자랑하는 옷감들은 그 유명한 할라인산 비단을 크게 능가해, 귀족인 그들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죽 제품들도 대단히 고급스러웠고 특히나 도자기들은 처음 보는 예술적인 무늬를 뽐내고 있어 실로 보기 드문 명장의 작품으로 보였다. 미스릴제 무기야 이미 그 가치가 정평이 난 것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비록 금은보화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보다도 더 귀하고 가치 있는 물건들이었던 것이다.
페론 자작이 궤짝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록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물의를 일으킨 점, 이웃된 이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우정의 증표로 보내는 선물이라 하였습니다.”
늙은 신하 한 명이 흡족한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런 물건들을 구하려면 적지 않은 노력을 들였어야 할 터, 역시 천하의 권왕이라도 폐하의 위명 앞에서는 두려움이 없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허허허.”
도열해 있던 다른 신하도 입을 열었다.
“과연 주먹패 출신답군. 기분대로 일 터트렸다가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야.”
아무래도 다들, 레펜하르트가 뒷생각 없이 저질렀다가 혼이 나자 몸을 사리고 있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물론 상식적인 평범한 국왕이라면 어찌 일국의 행사를 그렇게 가벼이 할 수 있겠냐마는…….
“원래 그런 무문 아닌가, 그곳은.”
“짐 언브레이커블이면 그럴 만도 하지.”
“그 작자들 무식한 게 뭐 하루 이틀 이야기도 아니고…….”
대대로 내려온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식 전설은 레펜하르트의 진의를 감추는 데 지대한 공을 하고 있었다.
늙은 신하 한 명이 하이드 2세에게 발언했다.
“과연 명성다운 무식한 행보이나, 앞으로 단단히 확답을 받았으니 더 이상의 분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저대로 그냥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그자가 적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차탄 공국, 양국의 문제이니 굳이 우리 왕국이 간섭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좁은 소견이옵니다, 폐하.”
페론 자작도 동의의 뜻을 보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차탄 공국의 일이 아닙니까? 차탄을 위해 그라임의 피를 흘릴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하이드 2세는 심각한 얼굴로 신하들과, 눈앞에 놓은 예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하들 대부분, 이 정도 성의를 보였으니 이대로 넘어가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들 안타레스 백국이 겁을 먹고 알아서 기고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으음…….”
솔직히 하이드 2세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눈앞에 쌓인 보물들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랬다. 평소라면 그 역시 별생각 없이 이대로 일을 덮어두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라임의 국왕인 동시에, 은의 현자의 일원이라는 점이었다.
‘골치 아프군.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면 은의 현자 쪽에서 길길이 날뛸 것 같은데.’
은의 현자에서는 이미 레펜하르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살시키라는 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하이드 2세 역시 그 일원으로서, 그 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일국의 왕이라 해도 타국과의 전쟁을 독단적인 기분만으로 질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명분이라도 있어야지 뭘 좀 하겠는데 전쟁을 하기엔 안타레스 백국이 너무 처신을 잘해 버렸다. 당장 하이드 2세 본인조차도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신하들에게 은의 현자에 대해 밝힐 수도 없고…….
‘에잉,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면 은의 현자들도 이해해 주겠지.’
결국 하이드 2세도 신하들의 뜻에 동의해 버렸다.
“알겠다. 그럼 그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지.”
☆ ☆ ☆
“이걸로 한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라임 왕실에서 벌어진 저 상황은, 비단 저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바실리 왕국이며 테이칸, 할라인 등 사절을 보낸 모든 왕국에 같은 성명과 같은 예물이 보내졌다. 그리고 그들 모두 그라임 왕국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안타레스 백국의 행위가 국가 간의 도리에 어긋나긴 했지만, 이후 대륙의 질서를 존중하고 성의를 보였으니 이대로 넘어가겠다.
“그렇군…….”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흘렸다.
예전, 전생 때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대놓고 전 대륙에 노예 해방 선언을 선포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바보짓이었지.’
올바른 이상을 앞세워 세상의 이해를 바란 것까지는 좋지만, 사실 저거 ‘세상아, 나랑 싸우자!’라고 외치는 거나 다름없다. 당연히 경각심을 느낀 각 왕국이 호전적인 반응을 보일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때는 나 혼자 제플린을 싹 쓸어버렸으니 더더욱 그랬고.’
고작 한 명의 마법사가 인구 이십만의 대도시를 개박살 내고 인적 없는 폐허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걸 보고도 경각심을 못 느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이번엔 레펜하르트도 ‘인류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예 탈출을 도모했다. 군사를 일으키고 전술, 전략을 이용해 상식적인 선에서 거사를 치렀다.
덕분에 인간들의 반응도 전생 때처럼 격하지 않았다. 콜른 협곡을 무너트린 것에 대해서도 굉장하다는 반응은 보일지언정, 전생 때의 뉴클리어 버스트 사건처럼 대륙의 공포가 되지는 않았다.
바위를 둘로 쪼개는 것과, 바위를 아예 증발시켜 버리는 것은 받아들이는 감각이 크게 차이난다.
바위를 둘로 쪼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놀라운 위업이지만 바위가 아예 소멸해 버리면 그건 그냥 불가능,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러의 힘으로 콜른 협곡을 무너트린 것은 같은 오러 유저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뉴클리어 버스트로 산 자체가 사라져 평지가 된다면, 그것은 마법사조차도 이해 못 할 끔찍한 기적인 것이다.
‘뭐, 그때는 나도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별로 이해하지 못했으니 별수 없었지만.’
전생 때의 레펜하르트는 마법사다 보니 정치적인 감각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워낙 뛰어난 재능 탓에 일반 인간들의 생각 같은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마켈린 등의 수하들도 인간이 아니다 보니 인간의 반응을 예상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카를이 있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에 자라 온 환경을 바탕으로, 카를은 능숙하게 대륙 각국에 로비를 해 갔다. 사건 자체를 차탄 공국과 안타레스-크로방스 연합 간의 세력 대결 구도로 여론을 몰아가며 은근슬쩍 노예 제도 반대에 대한 반감을 감추는데, 그 솜씨가 실로 감탄이 나올 만큼 교묘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지도층이라고 해도 꽤 단순한 면이 있어서요, 이 정도 성의를 보이면 아무래도 적대하는 분위기가 나오기 힘들지요. 뭐, 각국에 보낼 예물 준비하느라 고생을 좀 하긴 했습니다만…….”
현재 안타레스 백국의 재정은 꽤나 위태로운 상태였다. 제플린 전역에 광범위하게 뇌물을 먹이고, 또 노예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물품들을 구입하느라 예산 대부분을 소모한 상태다.
“다행히 우리에겐 금은보화 말고도 충분히 먹히는 물건들이 있었으니까요.”
각 왕국에 예물로 보낸 물품들은 모두 각 종족의 특산물들이었다. 엘프의 엘븐 실크며 오크의 가죽 세공 제품, 드워프의 무기와 트롤의 도자기는 백국 내에서야 흔한 것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희귀한 물건들이다.
물론 명색이 일국의 왕에게 보낼 예물이니, 이종족들이 평소에 쓰는 일반적인 물품을 보낼 수는 없다. 당연히 각 종족 내에서도 제법 귀한 취급 받는 고급품들만 골라 보냈다.
“덕분에 물량 확보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금은보화로 채우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혔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카를이 말을 맺었다.
“거둔 효과에 비하면 거저나 다름없지요.”
레펜하르트가 흡족해하며 카를을 치하했다.
“고생했소, 카를. 그대의 공이 실로 크오.”
그리고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왠지 사기 치는 것 같아서 좀 찝찝하긴 하군.”
분명 안타레스 백국은 각 왕국에 약속을 했다. 더 이상 안타레스 백국이 ‘침략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뭐, 거짓말은 아니었다. 추후 세력이 더 커지고 대륙 전체에 노예 해방 전쟁의 기치를 올릴 때쯤이면 더 이상 안타레스는 ‘백국’이 아닐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말장난이다. 당당히 세상에 나서던 레펜하르트로서는 꺼림칙하게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카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만 가지고 살아가려면 절대적인 힘이 필요하지요. 백왕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시려면, 이 정도 타협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세상의 룰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의 룰에 맞춰 움직여야 할 필요도 있는 것.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실소를 흘렸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더군.”
“네?”
“아, 타협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손을 내저으며 레펜하르트가 아련한 목소리를 흘렸다.
“절대적인 힘이 있어도, 이상만 가지고는 살 수 없더라고.”
카를이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신경 쓰지 마시게.”
레펜하르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지금, 더 이상의 설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함께 이상을 꿈꾸는 동지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오직 마켈린과 시리스에게만 털어놓았던 그의 전생前生.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조차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내내 레펜하르트를 괴롭히는 문제였다. 가끔은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밝히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는 전생에 대해 이야기한들 레펜하르트를 미친놈 취급할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이니까. 오히려 그로 인해, 그동안 보이던 이해 못 할 행보가 속 시원하게 해결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역시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믿어 주지 않을까 봐서였지만 지금은…….
‘내가 한 번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겨우 얻은 신뢰였다.
겨우 여기까지 왔다.
‘권왕’ 레펜하르트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흔들 수 있는 저 사실을 동지들에게 알리는 것은 역시 쉽게 정할 일이 아니다.
‘마켈린도 그냥 알리지 않는 쪽이 더 나을 거라 하긴 했고.’
레펜하르트는 입을 다문 채 그렇게 상념에 잠겼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그를 보며 카를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열었다.
“뭔가, 제가 모르는 이야기인가 보군요.”
“으음? 아, 그냥 개인적인 비밀이라…….”
카를이 피식 웃었다.
“아, 개인적인 것치고는 너무 ‘깊어’ 보이는 ‘그 비밀’ 말입니까?”
레펜하르트가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 카를이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백왕님께서 꽤나 비밀을 지니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칼켄 공이나 러스 경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당장 제플린의 마법사들 발 묶어 놓은 수법부터가 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만? 백왕님께서는 그냥 아는 마법사분으로부터 얻어 들은 지식이라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그 정도의 지식량은 한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으음, 그건…….”
말문이 막혀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렸다. 카를이 손을 저었다.
“캐묻는 것이 아니니 안심하시길. 저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소?”
“사실 좋은 책사라면 모든 정보를 알고 있어야 밤잠을 편히 잘 수 있는 법이긴 하지요. 하지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카를이 빙긋 웃었다.
“신하에게 모든 것을 내보이는 왕은 인간미는 있어 보일지 몰라도 왕으로서는 실격일 테니까요. 백왕께서 품으신 뜻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며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레펜하르트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고마운 말이로군. 앞으로도 명심하겠소.”
“그저 수하된 이로서의 작은 조언일 뿐입니다.”
카를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레펜하르트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이 친구가 내 편인 게 정말 다행이군.’
사실, 카를을 살렸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도움이 될 거라곤 채 생각하지 못했다. 전생 때의 레펜하르트는 마법사답게 정치력이나 외교의 힘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눈앞의 강자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뒤에서 보좌한 카르사스 대왕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죽이기 미안해서 살렸을 뿐이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생의 카를은 크로방스 왕국 역사상 이름 높은 현군이며 인류 연합군을 뭉치게 만든 구심점 중 하나였다. 지도자라는 입장에서 볼 때, 개인의 무력만으로 황제가 된 레펜하르트와는 비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의 재목인 것이다.
‘어쩐지 전생 때 사이도 안 좋은 나라들끼리 잘도 뭉쳐서 덤벼들더라니…… 이런 작자가 뒤에서 수를 썼으니 인류 연합군이 그토록 똘똘 뭉칠 수 있었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군. 카를, 그대도 인간인데 다른 종족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데 거부감은 없소?”
카를이 헛웃음을 흘렸다.
“틸라 양과 사귀는 시점에서 거부감 느끼는 것도 웃기는 소리긴 합니다만?”
“그것도 그러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저도 쉽게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이렇지만 한동안 고민도 많이 했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 별로 고민할 것이 없더군요.”
차분한 목소리로 카를이 말을 이었다.
“제가 페르난도 가문의 후계자일 때는 영지민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때 타 영지의 인간들은 제게는 ‘다른 종족’이나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왕위를 꿈꾸며 ‘다른 종족’이었던 타 영지민 역시 ‘크로방스의 국민’이란 이름으로 제 속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꿨지요.”
문득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백왕님 때문에 그 꿈은 접어야 했지만…… 대신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 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염 가득한 젊은 재상의 입가에 뚜렷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찬가지더군요. 이종족이라 여겼던 이들이 제 속에서 ‘사람’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전 이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고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 ☆
안타레스 백국의 공식 입장에 대해, 대륙 대부분의 나라들은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현 황제, 레어폴 프라임 바슈탈론 1세.
올해 예순이 넘은 이 노황제는 지금 대단히 분노하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모두 불살라라!”
황궁 뒤에 마련된 거대한 연무장, 그곳에서 커다란 모닥불이 불길의 혀를 날름댄다. 그 속에 타고 있는 것은 안타레스 백국으로부터 온 예물들이었다.
화르르륵…….
아름다운 색상과 무늬를 자랑하는 엘븐 실크며 오크리시 레더 제품들이 매캐한 연기를 하늘 높이 피워 올렸다. 이미 트롤의 도자기는 전부 깨트려 사금파리로 만들었고 드워프제 무기는 녹여 버렸다.
“흥! 이따위 재물로 눈 가리고 아웅을 하려 하다니!”
노기를 감추지 않은 채 황제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 옆에선 신하들이 입가를 가린 채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황제가 물었다.
“그래, 정녕 안타레스 백국은 태도를 굽히지 않겠다더냐?”
백국에 사절로 다녀온 신하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그들은 세이어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죄악의 길을 걷기를 주저치 않았습니다.”
타국과 달리, 레어폴 1세는 안타레스 백국의 답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종족을 다시 노예로 환원하지 않으면 제국의 공적으로 선포하겠다며 강경하게 나갔다.
하지만 안타레스 백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입장을 공고히 굳혔다.
또 다른 신하 하나가 발언했다.
“세이어께서 말씀하시길, 인간은 그분의 얼을 따라 창조되어 만물의 지배자로 지음받았습니다. 이 가르침을 무시함은 곧 제국에 대한 모욕이니,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폐하!”
“실로 옳은 말이로다!”
황제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 세이어로부터 칭제를 허락받은 나라답게 국교 역시 세이어 교단이다. 다른 교단을 인정하는 타국과 달리 안타레스 백국의 저 이종족 자유인 제도를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세이어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행위이니까.
“정벌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세이어의 가르침으로 저들을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폐하!”
신하 중 일부가 안타레스 백국의 정벌을 주장했다. 비교적 생각이 단순하고 성정이 격한 이들, 대체로 무인이 중심이 된 주전파主戰派였다.
하지만 찬동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안타레스 백국을 벌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폐하.”
어느 정도 현실 감각이 있는 문관들이었다.
무장이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 그러니 무장들은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전쟁부터 부르짖는다.
하지만 문관들은 전쟁이 시작되면 오히려 지닌 지위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현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폐하의 분노는 실로 합당하옵니다. 허나 안타레스 백국과 제국 사이의 거리는 너무도 멉니다. 크로방스 왕국이 안타레스와 동맹을 맺고 있으니, 정벌군을 일으키려면 크로방스 역시 적대하거나 바실리 왕국을 경유해야 합니다. 타국과의 관계가 문제될 수 있습니다.”
황제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분노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신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크로방스야 그렇다 치고, 바실리 왕국을 경유하는 것 역시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실리 왕국은 차탄 공국이나 라스틸 공국처럼 제국의 입김하에 있는 나라가 아니다. 거기다 대고 ‘안타레스 백국을 벌하기 위해 그대의 나라를 지나가겠소!’라며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제정신 박힌 나라라면 타국의 군대가 자국 땅을 밟는 것을 인정할 리가 없으니까.
“타국의 입장 역시 제국이 너무 과하게 반응한다는 눈치이옵니다.”
바슈탈론 제국과 달리 다른 나라들은 다들 ‘일단 넘어가자’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리고 황제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긴, 그동안 차탄 공국이 너무 해 먹긴 했지.’
대륙 제일의 상업 국가, 차탄.
바슈탈론 제국의 비호를 업은 차탄 공국은 그동안 대륙 각국과 중계 무역을 하며 큰 이득을 올렸다. 그리고 그 이득만큼 욕도 먹었다.
자국의 부를 야금야금 좀먹는 차탄 공국의 행위에 분노치 않은 나라는 없었다. 그저 공국의 뒤에 있는 바슈탈론 제국 때문에 대놓고 적대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태가 터지니 다들 속으로 고소해한 것이다. 안타레스 백국이 예뻐서라기보다는, 차탄 공국이 미워서 다들 이대로 레펜하르트의 행위를 인정해 버렸다.
특히나 테이칸 왕국 같은 경우는 아예 공개적으로 안타레스 백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바란다며 답례 예물마저 보낼 정도였다.
테이칸 왕국의 수치, 소아 성애자 오러 유저 란타스 경 때문이었다. 시체를 찢어 죽여도 모자랄 저 전설적인 변태를, 차탄 공국은 체포에 협조하긴커녕 오히려 망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니 이후 양국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다. 테이칸 왕국민 대부분이 차탄 공국이라고 하면 이를 갈 정도였다.
그런 차탄 공국을 안타레스 백국이 시원하게 엿 먹여 버렸으니, 대놓고 칭찬이야 못 하지만 테이칸 측에서 꽤나 기꺼워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게다가 저 란타스 경이 권왕 레펜하르트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카를의 로비는 이런 사소한 곳까지 꼼꼼히 닿아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테이칸 왕국의 민심은 확실히 안타레스 백국에 손을 들어 주고 있었다.
“다른 교단의 반응 역시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대륙 전역에 세이어 교단이 가장 융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인간이 믿는 신은 오직 세이어뿐만이 아니다.
대륙의 사방을 가호하는 네 수신獸神.
신룡神龍 바메트. 천호天虎 파르가. 불멸의 사타르. 얼어붙은 티아논.
이 사방신四方神을 제외하고라도 여덟 교단이 대륙 각국에서 교리를 펼치고 있다.
특히 크로방스 왕국의 레단티 교단이나 그라임의 에어리아스 교단, 할라인의 젠트랄 교단과 바실리의 필라넨스 교단 등은, 그 지역에서만큼은 세이어 교단보다 더 발언력이 크다.
“안타레스 백국에는 레단티와 필라넨스의 신관들이 제법 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 성자’ 같은 경우에는 아예 백국의 중추에 앉아 있어 필라넨스 교단에서도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각 교단의 반발을 살 위험이 큽니다.”
인간을 가호하는 주신 세이어와 열두 신이라는 관용구는 대륙에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세이어 밑에 열두 신이 상하 관계로 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강이 바다의 부하인가?
강은 강이고, 바다는 바다다. 스케일 크다고 윗대가리가 아니란 소리다. 그저 세이어 교단이 워낙 융성해서 다들 한 수 접어 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종족이 노예라는 가르침은 사실 세이어 교단 말고는 없다. 그냥 대륙 전체의 관습이라 다른 교단에서도 인정하는 것이지.
까놓고 레단티 교단이나 필라넨스 교단이 보기엔 레펜하르트를 적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기회에 세이어 교단을 치고 올라가 교세를 넓혀야 한다는 강경파도 나오고 있었다.
“현 상황에서 제국이 직접적으로 안타레스 백국을 벌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폐하.”
이어진 신하들의 말에 황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비록 흥분하긴 했지만,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권왕이란 자는 대대로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고 들었는데 용케도 이리 해 놓았군. 그냥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신하를 잘 둔 것인가?’
만약 이 대륙 정세를 안타레스 백국이 의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면, 실로 보통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타국에 심어 놓은 은의 협력자며 현자들조차도 ‘용납 못 하는 건 알지만, 상황상 당장 어떻게 하긴 좀 힘들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을 정도니까.
‘끄응, 세렐라인은 대체 뭐 한 거야? 알아서 처리하겠다더니 제플린을 말아먹냐?’
속으로 구시렁대며 황제는 호통을 쳤다.
“그렇다고 저들을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이대로 눈감아 버리자는 것인가? 세이어께서 지켜보고 계신데 정녕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황제의 호통에 신하들이 입을 닫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때 젊은 무관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신 에길네스, 폐하께 고하고자 합니다.”
제국의 유서 깊은 가문, 에길네스 백작가의 당대 가주였다. 에길네스 백작을 향해 황제가 손짓을 했다.
“말하라.”
에길네스 백작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안타레스 백국은 차탄 공국과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습격했을 뿐이지요.”
“자세히 고하라.”
“안타레스 백국은 넓은 영토와 많은 국민을 지닌 전통적인 대국이 아닙니다. 그저 군사의 질이 높고, 오러 유저가 많을 뿐이지요. 그래서 소규모 정예 부대로 저런 짓을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힘은 강대합니다. 안타레스 백국이 할 수 있는데 제국이 못 할 리가 없지요.”
황제가 눈을 빛냈다.
에길네스 백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행한 방식 그대로 저들을 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이어의 정의에 합당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