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Exodus
1
실란은 울부짖고 있었다.
“아, 필라넨스시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신장 2미터, 어지간한 성인 장정도 눈 아래로 깔아 볼 장신의 미녀가 그를 옆구리에 낀 채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실란의 피앙세, 세이어로부터 혼약을 약속받은 여인, 크리스틴이었다.
크리스틴이 실란을 내려다보더니 방그레 웃었다.
“아, 실란. 세이어께서 보우하시어 당신을 구출할 수 있게 되었군요!”
“이게 무슨 구출이야? 보쌈이지!”
실란은 이를 갈며 몸부림을 쳤다. 그냥 몸부림친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손발이 닿는 대로 열심히 그녀를 두들겼다.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필라넨스의 가르침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지만, 여성도 여성 나름이었다.
열심히 크리스틴의 옆구리며 허벅지를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찼다. 발버둥을 치며 속으로 악도 써 댔다.
그토록 단련해 온 나의 근육이여!
힘을 다오!
이 여자로부터 빠져나갈 힘을!
“아이, 실란도 참. 품에 안겼다고 부끄러워하긴.”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절망하며 실란이 재차 소리쳤다.
“사람 살…….”
크리스틴이 오른손으로 실란의 입을 막았다. 성기사답지 않게 손이 매끈하고 하얬다. 섬섬옥수라 칭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물론 사이즈가 사이즈인지라, 입을 막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실란의 머리통이 통째로 잡혔지만.
“읍읍읍!”
안면이 통째로 가로막힌 실란이 연신 몸을 바동댔다. 그녀가 상냥하게 속삭였다.
“쉿, 조용히 하세요, 내 사랑. 잘못하면 저 몬스터들에게 들켜요.”
‘난 제발 들키고 싶다고!’
울상 짓는 실란을 옆에 낀 채 크리스틴은 계속 제플린의 골목을 달렸다. 골목길을 따라 도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희열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 드디어 이 사람이 내 품에 돌아왔어!’
테스론과 일행이 된 크리스틴 역시 은의 현자로부터 저들을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아티팩트를 받았다. 그리고 레펜하르트 일행을 막기 위해 제플린으로 투입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녀도 저 탈주 노예 무리 중 하나를 막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세렐라인으로부터 받은 명령이었다.
하지만 세렐라인은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주특기 중 하나가 남의 말 흘려들어 제멋대로 해석하기란 점이라는 걸.
분명 탈주 노예 무리를 막으라 했지만, 오늘도 크리스틴은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아, 저들 중에서 실란을 찾으라는 거구나!’
그래서 노예들이 도망을 치건 말건 실란이 보이지 않으면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뭐, 유서스도 지정된 위치 무시하고 러스만 찾아다녔으니 딱히 그녀만을 비난할 수도 없기는 하다.
이게 테스론 일행의 반응이 그토록 늦었던 이유였다.
스테반은 레펜하르트만 찾아다녔고, 유서스는 러스만, 크리스틴은 실란만 찾아다녔으니 제 시간 맞출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렇게 제플린 시내를 이리저리 뒤지고 다니다 결국 찾을 수 있었다. 수많은 탈주 노예들 틈에서, 황금기사와 러스의 대결을 지켜보며 초조해하는 사랑하는 임의 얼굴을!
‘오오오!’
크리스틴은 감격했다.
이 넓은 제플린에서 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조우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세이어의 인도하심이 아닌가!
사실은, 야밤이라 인적이 없으니 요란스러운 곳만 찾아다니면 되는 데다가 현재 그녀의 움직임이라면 제플린을 가로지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그냥 만날 만해서 만났다고 하는 쪽이 옳다. 하지만 그녀는 신의 인도라 굳게 믿었다.
운이 계속 따라 주는지, 실란 주위에 그 근육질 괴물- 그러니까 레펜하르트도 없었다. 다른 놈들도 다들 전투에 정신이 팔려 실란에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실란도 신성 주문을 난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슬그머니 뒤로 가 잽싸게 캐치했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 물어 가듯 뒷덜미 잡고 바로 골목으로 날랐다.
워낙 난전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실란과 포옹(?)한 채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실란을 옆구리에 낀 채 크리스틴은 계속 달렸다. 탈주한 노예 무리들을 피해 골목과 골목을 누비며 차탄 왕궁으로 향한다.
“돌아가요, 실란. 우리의 사랑의 보금자리로.”
‘그런 거 만든 기억 없거든?’
“말로만 듣던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다니, 우리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아요, 실란.”
‘사랑의 도피가 아니라 납치 후 도주겠지!’
물론 실란의 대꾸는 속으로만 흘러나왔다. 저 커다란 손으로 입이 꽉 막혀 있었으니까.
실란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하도 발버둥을 쳐 탈진한 탓에 이젠 악을 쓸 기운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욕설을 뱉고 또 뱉는 수밖에.
‘젠장! 이대로 끌려갈 순 없어! 뭔가 방법이 없나? 아무나 좀 이 근처 안 지나가 주나?’
그렇게 막 크리스틴이 골목 하나를 돌 때였다.
건물 위쪽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어린 성자님?”
크리스틴과 실란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달을 뒤로한 채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치고 있었다.
170센티미터 정도 되는 신장에 안쓰러워 보일 만큼 깡마른 몸, 짧은 치마와 헝겊으로 가슴과 하체만을 간신히 가린 야성적인 차림이다. 전신은 푸른 피부로 덮여 있고 그 위로 온갖 다양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방울처럼 커다란 눈망울에 오똑한 콧날, 도톰한 입술 사이로 작은 어금니가 살짝 드러난다.
트롤 여성, 그것도 아직 성숙이 채 끝나지 않은 소녀였다.
수십 가닥으로 땋은 머리채를 흔들며 트롤 소녀가 몸을 던졌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며 소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얼마나 눈치가 없는 건지, 입까지 막혀 붙잡혀 있는 실란을 보고도 트롤 소녀는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바바밥!”
기도 막히고 입도 막혀, 실란은 다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척 봐도 납치되는 것처럼 안 보이냐? 응?’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트롤인 만큼 분명 적은 아닐 터다. 실란이 계속 읍읍거리며 눈빛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빨리 도망가서 아무나 좀 불러와!’
다급한 표정으로 크리스틴을 바라보고, 인상을 쓰고, 최대한 불쌍한 눈동자로 트롤 소녀를 응시한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눈빛에 담아 계속 보낸다.
실란의 표정이 어찌나 절실했는지, 이 둔한 트롤 소녀도 눈빛이 바뀌었다.
“아? 적이군요!”
아니, 그럼 당연히 제플린에서 이종족이랑 안타레스 백국 인간들 빼면 다 적이지, 그걸 이제 깨달았나?
등 뒤에서 뼈로 만든 두 자루 단검을 꺼내 들며 소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어린 성자님을 내려놓아라! 인간!”
실란의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크리스틴이 비록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실력만큼은 어디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성기사다. 일개 트롤, 그것도 저런 작은 소녀가 홀로 감당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신장 170센티미터면 트롤 기준으로는 충분히 작다.)
당장 도망가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덤비려 하다니? 게코도마뱀 드래곤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다.
‘야! 네가 왜 싸워? 빨리 지원군을 불러오라니까!’
슬프게도 실란의 소리 없는 외침은 저 트롤 소녀에게 닿지 않았다.
주제 파악도 못 하고 트롤 소녀가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자세를 낮춘다. 크리스틴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트롤 암놈이네? 저런 게 왜 도시 안에 있지?”
몬스터로 이름 높은 트롤을 눈앞에 두면서도 크리스틴은 전혀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 개인이 트롤 한둘쯤은 충분히 해치울 수 있는 강력한 성기사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눈앞의 트롤이 여성이었다는 부분이 더 컸다.
대부분의 자연계 생물들이 그렇듯, 트롤 역시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화려하다. 트롤 특유의 특징인 거친 피부라던가 매부리코, 광대뼈며 주걱턱 등 모든 점이 남성 쪽이 훨씬 잘 발달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트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그리 무섭게 생기지 않은 것이다.
야밤에 만나면 레펜하르트도 가끔 흠칫거리는 트롤 남자들에 비해 트롤 여인들은 대부분이 온건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나 이 트롤 소녀는 피부도 매끈하고 광대뼈나 주걱턱 등의 특징도 거의 없어,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 봐도 꽤나 예쁘장한 외모였다.
아무리 상대가 트롤이라지만, 가냘파 보이는 어린 소녀가 단검 들고 설쳐 봤자 긴장할 리가 있나?
크리스틴이 헛웃음을 흘리며 실란의 입에서 손을 떼어 검을 뽑았다.
“하? 이젠 별 쓸데없는 것도 날뛰네?”
덕분에 입이 자유로워진 실란이 고함을 쳤다.
“도망가! 도망가라고!”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 크리스틴의 검이 발도하며 쏜살같이 트롤 소녀를 향해 날아갔다. 일격에 목을 날리고 다시 제 갈 길 갈 셈이다. 이어질 참상을 떠올리며 실란이 욕설을 뱉었다.
“젠장!”
갑자기 트롤 소녀가 머리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낭랑한 가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내 몸이 크게 자라, 노간주나무 푸름을 띤 삼림을 발로 찬단다!”
타앙!
트롤 소녀의 단검이 십자로 교차하며 크리스틴의 찌르기를 가로막았다. 놀랍게도 트롤 소녀는 저 날씬한 체구로도 크리스틴의 일격을 무리 없이 감당하고 있었다. 실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잉?”
그뿐 아니라 바로 역공에 들어간다!
“아아아아!”
기이한 허밍을 날리며 트롤 소녀가 크리스틴을 찔러 갔다. 두 자루 단검이 춤을 추며 크리스틴의 몸통을 노린다. 정신이 번쩍 든 크리스틴이 진지하게 마주 검을 휘둘렀다.
챙챙챙!
순식간에 수십 차례의 검격이 오간다. 춤을 추는 듯한 기묘한 움직임으로 계속 크리스틴의 시야를 희롱하며, 허리와 손목을 튕겨 기이한 각도에서 단검을 찔러 간다.
처음 보는 움직임에 크리스틴도 미처 반격을 못하고 수세에 밀렸다.
“윽! 뭐, 뭐야, 이건?”
뒷걸음질 치는 크리스틴을 향해 트롤 소녀가 손가락질을 했다.
“드러난 핏줄 펄떡이니 그 짐 무거워 뒤뚱거리리!”
갑자기 크리스틴의 팔이 멋대로 움직여 실란을 놓쳐 버렸다. 풀려난 실란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바닥을 구르는 실란의 모습에 크리스틴이 걱정 가득한 비명을 질렀다.
“꺅! 실란! 혹시 다쳤어요?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물론 실란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바로 빠져나왔다. 일어날 겨를도 없이 네 발로 후다닥 기어 최대한 몸을 뺐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재차 실란을 줍지(?) 못했다. 트롤 소녀가 그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공세를 퍼부은 것이다.
“아라라라라!”
낭랑한 허밍과 함께 두 자루 단검이 어지럽게 시야를 희롱한다. 크리스틴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진지하게 공세를 맞받아쳤다. 역시 명색이 성기사라, 그러고 나니 다시 트롤 소녀가 뒤로 밀린다.
“이 괴물이 감히!”
고함을 지르며 크리스틴이 횡 베기를 날렸다. 검격을 피해 트롤 소녀가 허공으로 점프했다. 공중제비를 넘으며 사뿐히 착지하는 모습이 고양이도 울고 갈 정도로 날렵해 보인다. 멀어진 트롤 소녀를 향해 크리스틴이 비통한 외침을 터트렸다.
“감히 실란을 다치게 하다니!”
“……?”
트롤 소녀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어찌나 진심이 함뿍 담겨 있는지, 순간 ‘내가 잘못했나?’란 생각마저 들었다.
실란을 돌아보며 소녀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쳤어요? 혹시 적이 아니라든가…….”
정색을 하며 실란이 손을 저었다.
“완전 멀쩡하거든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거든요! 저 여자는 틀림없는 적이거든요!”
트롤 소녀가 해실거리며 웃었다.
“아, 다행이다. 실수한 줄 알았네. 제가 워낙 눈치가 없어서요, 에헤헤.”
본인조차 자각할 정도면 진짜 눈치가 없긴 없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실란이 트롤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방금 그녀가 쓴 술수는 실란도 알아볼 수 있었다.
트롤 주술이다.
저렇게 어린 소녀가 주술사일 거라곤 미처 생각을 못해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잘 보니 트롤 구루의 특징인 긴 어금니도 입술 사이로 삐죽 나와 있었다.
‘혹시 저 애도 트롤 주술사인가?’
“아, 어린 성자님은 날 모르시겠구나.”
트롤 소녀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린 성자님. 아틸카님의 파구루, 티티마라고 합니다.”
파구루라면 후계자를 뜻하는 트롤어.
실란은 놀랐다.
‘저렇게 어린 소녀가 아틸카의 후계자?’
☆ ☆ ☆
오크들은 조상을 섬기기에 믿고 따르는 신이 없다.
그리고 트롤들은 다른 의미로 믿고 따르는 종족신이 없었다.
트롤들은 자연 그 자체를 숭배하며 세상의 흐름 자체를 숭상하는 이들. 그들은 다른 종족처럼 신이라는 하나의 ‘인격적’ 존재를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 그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 속에 낮과 밤, 빛과 어둠, 평온과 혼돈, 불꽃과 폭포가 함께한다.
구별하지 않고,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인식해 근본을 추구하는 것이 트롤의 정신문화.
그래서 트롤에게는 전사나 신관, 마법사 등의 지위를 나누는 의미가 없다. 오로지 한없이 자연에 가까워지려는 주술사, 구루가 있을 뿐.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이니, 가장 자연에 가까운 구루의 가르침이 곧 삶의 방식이자 목표다. 구루의 가르침대로 따르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
트롤들의 모든 삶이 트롤 구루의 주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집을 짓고 번식을 하고 양식을 얻는 모든 행위에 주술의 힘이 필요하다. 트롤 주술사는 부족을 지키는 전사요, 병든 아이를 고치는 의사이며 부족의 정신을 책임지는 신관이며 제사장이었고 부족의 운명을 이끄는 왕이다.
그만큼 트롤 구루들은 막중한 책임과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후계자 역시 보통 신중히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통 구루도 아닌 아틸카, 트롤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대구루의 후계자라고?
“헤에…….”
실란은 티티마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트롤답게 키는 늘씬하니 크지만, 말라 보이는 팔다리며 가냘픈 허리가 전혀 강해 보이지 않았다. 하긴, 트롤들 대부분이 저런 체형이긴 하다. 아틸카가 특이하게 몸이 두꺼운 것이지.
‘그래도 아틸카의 뒤를 이을 정도면 엄청 우락부락하고 강인한 거구의 트롤일 줄 알았는데…….’
“왜 그러세요, 어린 성자님?”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실란의 눈빛에 티티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란이 아차 하며 손을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냥 실란이라고 불러 주세요. 어린 성자라니, 원…….”
성자라니, 참으로 부담스러운 칭호인 것이다. 뭐, 진짜 부담스러운 부분은 ‘성자’ 쪽이 아니라 ‘어린’ 쪽이지만.
‘내 나이가 이제 스물인데 아직도 어리단 소리나 듣고 있어야겠냐!’
티티마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실란!”
‘아니, 반말하라곤 안 했는데…….’
상대가 말 놓았는데 이쪽만 존대하긴 억울하다. 실란도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하여튼 저 여자는 적이야, 적. 알았지?”
혹시 착각이라도 할까 봐, 손가락질까지 해 가며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실란이었다.
“응! 저 여자, 적!”
한편, 크리스틴은 검을 쥔 채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달아난 실란이 갑자기 저 트롤 계집을 보더니 정신 못 차리고 마냥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남자는 한눈 못 팔게 꽉 잡고 있어야 한다는 거구나!’
크리스틴은 납득했다. 과연, 꽉 잡고 있다가 놓치니 바로 저렇게 딴눈을 팔지 않는가? 뭔가 물리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을 대단히 혼동하고 있는 것 같지만, 원래 크리스틴은 그런 여자였다.
“네년이 감히 우리 실란을 홀리는구나!”
노성을 터트리며 크리스틴이 티티마에게 달려들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크리스틴의 뚱딴지같은 말에 어리둥절할 법도 했겠지만, 티티마 역시 어지간히 눈치 없는 타입이다 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실란이 적이라고 했으면 적이겠지, 뭐.
“오로로로…….”
주술적인 가락을 흘리며 티티마도 마주 덤볐다. 크리스틴의 검과 티티마의 단검이 허공에서 몇 번이나 교차했다.
둘의 자세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강맹하고 절도 있는 크리스틴의 참격이 빛을 뿌리면, 기묘한 주술력을 몸에 담아 티티마가 공세를 흘린다. 크리스틴이 검 한 자루로 모든 변화와 힘을 끌어내면 티티마는 단검조차 신체의 일부로 삼아 전신을 이용해 반격한다. 단검뿐 아니라 팔꿈치며 발차기, 가끔은 박치기까지 써 가며 공격을 퍼붓는다.
크리스틴과 호각으로 싸우는 티티마를 보며 실란은 감탄했다.
“우와…….”
세이어의 성기사라면 대륙의 각 교단에서도 알아주는 정예 중 정예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그들 중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강자, 그런데 티티마는 저 어린 나이로도 조금도 밀리지 않고 오히려 가끔은 몰아붙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아틸카의 후계자라더니 과연…….’
공방을 주고받던 크리스틴의 표정이 점점 더 구겨졌다.
“이익, 내가 이따위 괴물에게!”
이름난 검사도 아니고,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트롤 잡년이 나타나서 감히 앞을 막다니? 극도로 분노하며 크리스틴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흐읍!”
그리고 순간적으로 전신의 힘을 몇 배나 증폭시켜 쏟아 낸다!
“타아아앗!”
단검을 교차해 공격을 막는 순간 티티마가 신음을 흘렸다.
“크윽?”
갑자기 검력이 몇 배나 늘었다?
당황하며 티티마는 최대한 몸을 날려 검압을 흘렸다. 자세를 가다듬으며 그녀는 경각심을 높였다. 얼마나 강한 검력이었는지 풍압만으로도 피부 여기저기가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물론 트롤다운 재생력으로 금방 아물긴 했지만, 충격을 받은 두 팔은 여전히 저려 온다.
“우와! 저 인간! 세네?”
크리스틴의 인상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자신의 일격을 맞고도 나가떨어지긴커녕 감탄까지 내뱉어? 그녀가 숨을 거칠게 쉬며 흥분해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손에 든 검을 도로 허리에 찼다.
“고작 트롤 따위를 베기엔 아까운 검이지만…….”
그리고 다른 검을 뽑아 들었다.
“이걸로 상대해 주마!”
스르릉!
검을 뽑는 순간 섬뜩한 쇳소리가 울렸다. 실란이 눈을 번쩍 떴다. 검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건?”
눈부신 은색의 검신, 자루는 평범하지만 검막 부분이 고도로 세공되어 화려함을 뽐낸다. 검을 쥔 순간 검신에서 문양이 빛을 발하며 크리스틴을 감쌌다.
그녀가 소리쳤다.
“세이어시여, 제게 당신의 축복을!”
검을 통해 그녀의 전신으로 강력한 신성력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마치 최고위 프리스트에게서 축복을 받은 것처럼, 크리스틴의 모든 신체 능력이 한계까지 올라간다!
그녀가 검을 떨치며 외침을 이었다.
“세이어시여, 당신의 검을 빛나게 하소서!”
순백의 빛이 검신을 따라 흐르며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세이어의 성기사들이 쓰는 소드 스킬, 신성검이었다. 그것도 예전의 신성검과는 느껴지는 기운이 차원이 다르다. 오러 유저의 블레이드 오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다.
웅웅웅!
굉음을 떨치는 신성검을 들어 올리며 크리스틴이 티티마에게 소리쳤다.
“갈가리 찢어 죽여 주마! 더러운 트롤 새끼!”
검신에 새겨진 문양을 보며 실란은 저 검의 정체를 깨달았다.
“성광검 메사이어?”
2
성광검 메사이어.
이 이름난 명검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30년 전의 유명한 성자, 창공의 여신 에어리어스의 프리스트였던 노디스의 손에서였다.
검사도 아닌 프리스트가 아무리 명검을 쥐어 봤자 강해질 리가 없다. 하지만 노디스는 하급 프리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검의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 명성을 떨쳤는데, 이는 메사이어의 특이한 성질 덕분이었다.
성광검 메사이어는 주인의 능력을 강화시킨다.
이렇게만 적어 놓으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이는 놀라운 효능이었다.
검사가 사용하면 신체 능력이 상승하고 마법사가 사용하면 마력이 높아지며 성직자가 사용하면 신성력이 강화된다. 사용자가 어떤 종류의 힘을 쓰건 간에, 메사이어는 그에 맞춰서 힘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범용성이랄까?
첫 주인인 노디스가 프리스트이기도 했고, 또 그가 사심 없이 검의 힘으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기에 이 검은 성광검 메사이어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성광검 메사이어는 점점 잊혔다.
메사이어의 강화 능력, 그 한계 탓이었다.
분명 메사이어는 사용자의 능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한계도 분명했다.
쓰는 사람의 기량이 받쳐 준다면 오러 유저급 힘도 부여해 주지만, 그렇다고 오러 유저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하급 마법사에게 강대한 마력을 줄 수는 있지만, 그래 봤자 대마법사의 마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즉 오러 유저나 대마법사, 주교급 신관쯤 되는 진짜 강자에게는 그 증폭력이 효과가 없다.
진짜 강자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지만, 어중간한 이에게는 강자의 힘을 부여해 준다. 이 특성 탓에 메사이어는 온갖 이류 무인들의 표적이 되었고, 수없이 주인을 바꾸고 또 바꿨다. 그리고 이 아귀다툼 속에서 결국 종적을 감춰 버렸다.
100여 년 이상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검, 비록 한계가 있다지만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와 동급인 초특급 아티팩트가 바로 저 성광검 메사이어다.
실란이 놀라 중얼거렸다.
“크리스틴이 어디서 저걸 구한 거지?”
☆ ☆ ☆
테스론이나 유서스, 스테반처럼 세렐라인은 크리스틴에게도 적당한 아티팩트를 챙겨 주려 했다. 하지만 정작 목록을 살펴보니 문제가 있었다.
신성력은 마력과 반발하는 법이다. 그런데 은의 현자가 가진 기물 대부분은 강력한 마법으로 발동하는 아티팩트들이었다. 성기사인 크리스틴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다 문득 세렐라인이 발견한 것이 바로 일반 창고 구석에서 썩고 있던 성광검 메사이어였다.
역사 속에선 엄청난 물건 취급받고 있지만, 사실 은의 현자 입장에서 메사이어는 별로 높은 등급의 기물이 아니었다. 위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 증폭 특성이 현 인류에게 알려져도 별문제가 없기 때문이었다.
성광검 메사이어의 높은 범용성은 인간의 신체에 개입해 개조함으로써 능력을 증폭시키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냥, 메사이어 안에 온갖 종류의 기운이 다 들어가 있어 쓰는 사람에 맞게 그때그때 걸맞은 힘을 더해 주는 방식이었다.
누구든 사용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다목적 증폭용으로 만든 검, 구동 원리만 놓고 보면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애초에 금지 물품이었으면 역사에 이름을 알리지도 못했겠지. 은의 현자도 우연히 손에 들어와 보관하고 있을 뿐이었지, 딱히 외부 유출을 막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뭐, 그렇다 해도 성광검 메사이어의 위력 자체는 웬만한 금단의 아티팩트 못지않다. 전신을 강화한 크리스틴이 기합을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타아앗!”
티티마도 주술을 발동시키며 공격을 막았다.
타아앙!
순백의 신성검이 교차한 단검과 마주하는 순간, 티티마의 가느다란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어어?”
티티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 일격이었는데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단검이 절반 가까이 파여 있었다.
화들짝 놀라는 티티마를 노리고 연격이 이어졌다. 순백의 섬광이 연거푸 예기를 뿌리며 트롤 소녀의 전신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윽! 으윽!”
아까와는 힘도 스피드도 비교가 되질 않는다. 애써 피하는 티티마의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갔다. 애써 피하곤 있었지만 너무 공세가 빨라 계속 어깨며 허벅지가 근육째 베어진다. 그녀가 트롤이라 재생력이 있어 망정이지, 다른 종족 같았으면 벌써 쓰러질 중상이었다.
정신없이 몰리며 티티마가 눈을 연신 깜빡였다.
‘에? 이 인간 갑자기 너무 세졌다? 뭐가 이래?’
메사이어를 티티마에게 겨누며 크리스틴이 오만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호호홋! 이는 위대한 은의 현자께서 우리의 사랑을 위해 내려 준 검! 이 검에 의해 죽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트롤!”
역시 크리스틴은 개념이 없었다. 흥분하고 나니 절대 발설해선 안 된다는 은의 현자의 존재도 막 입에 담아 버린 것이다.
과연, 그 순간 실란이 눈을 반짝였다.
‘응? 은의 현자?’
처음 들어 보는 칭호였다. 하지만 성광검 메사이어를 줄 정도면 보통 인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여하튼, 일단은 눈앞의 위기부터 처리해야 할 터.
실란은 차분히 크리스틴과 티티마의 전투를 살펴보았다. 과연 성광검 메사이어의 힘은 듣던 대로 굉장했다. 아까까지는 박빙의 승부를 결하던 티티마가 삽시간에 패색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러 유저급은 아닌데?’
쓰는 사람의 기량에 따라 다르다더니, 확실히 그 정도는 아니다. 저 정도면 그냥 교황급 성직자가 축복을 내린 정도? 오러의 신체 강화력과 비교하면 손색이 좀 많아 보인다.
‘저 정도라면!’
실란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손을 모으며 신성 주문을 외운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사자의 용맹을 허락하소서! 검 든 두 팔에 거인의 힘이 깃들고 그 눈이 매처럼 매서워지며 두 다리가 굳센 수소가 되어 적을 치게 하소서!”
온갖 강화 주문이 실란의 막강한 신성력을 바탕으로 티티마에게 쏟아졌다. 아틸카쯤 되면 주술에 의한 신체 능력 증폭도가 신성 주문을 월등하게 뛰어넘으니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오잉?”
역시 티티마에겐 꽤나 먹혀 든 모양이었다.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몸이 가볍네?”
만면에 화색을 띠며 티티마가 크리스틴의 공격을 피해 냈다. 월등히 스피드가 빨라져, 크리스틴의 움직임을 따라잡으며 반격까지 한다. 티티마의 단검이 크리스틴의 신성검을 후려갈겼다.
타앙!
되려 크리스틴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티티마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힘도 세졌네?”
“이, 더러운 트롤 주제에!”
크리스틴이 욕설을 외치며 메사이어를 내리쳤다. 검에 맺힌 순백의 기운, 신성검이 티티마의 단검을 통째로 자를 듯 날아들었다.
실란이 신성 주문을 외쳤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강철의 검을!”
두 자루 단검에 분홍빛 성광이 번쩍였다. 티티마가 단검을 교차해 신성검을 막았다. 그리고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검도 단단해졌네?”
분명 아까는 절반 가까이 박히던 신성검을 단검이 무난히 막아 낸다. 분명 현재 크리스틴의 신성검은 블레이드 오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티티마의 주술력에 실란의 신성력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역시! 내 신성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신기해하는 티티마를 향해 실란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보조해 줄 테니 해치워, 티티마!”
“응!”
목소리에 활기를 띠며 티티마가 신이 난 듯 크리스틴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신성력을 계속 끌어내며 실란이 눈을 빛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프리스트 전투력 없다고 물로 보는데…….”
양손에 신성력을 모아 티티마를 가리키며 실란이 이를 갈았다.
“어디, 몸빵 생긴 프리스트가 얼마나 무서운지 한번 맛보라고!”
☆ ☆ ☆
“아라라라…….”
주술적인 허밍을 날리며 티티마는 연신 크리스틴을 몰아붙였다.
정신없이 좌우로 몸을 날리며 복잡한 풋워크를 발휘해 상대를 현혹시킨 뒤,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검을 뿌린다. 그야말로 고양이과 맹수를 연상케 하는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이이익!”
신경질을 내며 크리스틴이 연거푸 참격을 뿌렸다. 연속 사선 베기로 거리를 벌린 뒤 머리 치기! 티티마가 막 머리 위로 단검을 교차해 막으려던 찰나였다.
크리스틴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페인트다!’
손목을 꺾어 검의 궤적을 바꾼다. 메사이어가 춤을 추며 단숨에 티티마의 옆구리로 향했다.
그때였다. 티티마가 어리둥절해하며 몸을 틀어 옆구리를 방어했다. 검이 서로 부딪히며 튕겼다.
“쳇, 알아차렸나?”
하지만 티티마의 표정을 보니, 자신도 어떻게 막은 건지 모르는 눈치다.
“엥? 이거 뭐임?”
멀리서 보조하던 실란이 씨익 웃었다.
“좋아, 먹혔어! 다음 간다!”
온갖 다양한 전투를 경험해 본 실란이다. 크리스틴의 검의 흐름만 보고도 그녀가 페인트를 건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실란이 검사도 아니니 실제로 노리는 부분이 어디인지까지는 알아챌 수 없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크리스틴이 다시 페인트를 걸며 티티마를 노렸다. 타이밍을 맞춰 실란도 신성 주문을 걸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섬광의 축복을!”
페인트에 티티마가 막 속아 넘어가려는 순간, 전신 감각이 예리해지며 상대의 검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육체가 알아챈다. 미처 티티마가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진짜 공격을 막아 낸다.
타앙!
적절하게 실란이 그 순간만 티티마의 전신 감각을 고도로 증폭시킨 것이다. 물론 그 상태로를 계속 유지하면 그녀의 신경이 감당할 수 없으니 잠깐, 아주 잠깐 페인트가 걸리는 그 순간만을 노린다!
“진짜 프리스트라면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보조해 주는 법!”
티티마가 감탄한 얼굴로 실란을 힐끔거렸다.
“오왕…….”
진짜 신기했다. 자신의 몸이 이토록 날렵하게 움직이다니? 이토록 강인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니? 심지어 상대의 속임수조차도 꿰뚫어 보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거 굉장해!’
트롤 주술은 철저히 개인적이기 때문에 이처럼 남을 강화시켜 주는 경우는 티티마도 처음 겪어 본 것이다. 실란이 고함을 질렀다.
“신성력 아낌없이 퍼 줄 테니까 마음껏 싸워!”
“응! 이거 좋아!”
반쯤 희열에 차 티티마는 계속 크리스틴을 공격했다.
아틸카에게 배웠던, 하지만 기량이 모자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던 온갖 체술이 자연스레 풀려나온다. 게다가 아무리 움직여도 지치지도 않는다!
‘굉장해! 굉장해! 굉장해!’
티티마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토록 이해가 가지 않았던 아틸카의 가르침들이 쏙쏙 머리에 박혀 들고 있었다.
전신이 고무로 된 것처럼 탄력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공세에 크리스틴이 결국 어깨를 허용했다. 티티마의 단검이 그녀의 어깨 근육을 깊숙이 베어 갔다.
“크으윽!”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 크리스틴이 이를 갈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진다. 과연 실란의 신성력은 엄청나다.
‘성광검 메사이어를 쓰고도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라니…….’
크리스틴이 실란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쳤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바람을 피우고 싶나요, 실란?”
그녀의 헛소리는 주야장천 들어 왔지만, 그래도 들을 때마다 새롭다. 실란이 기가 막혀 입을 뻐끔거렸다.
‘바람? 뭔 바람?’
갑자기 크리스틴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이 정도는 이겨 낼 수 있어야 당신 곁에 설 자격이 있다는 거군요!”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더니 두 눈 가득 각오를 담아 소리친다.
“강해질게요! 당신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곤 뒤를 돌더니, 그대로 제플린 거리 저편으로 달려가 버렸다.
“…….”
너무 상황이 황당해서 티티마는 후속타도 안 날리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순간, 상대가 도망간다는 느낌조차 안 들었던 것이다.
“……뭐라는 거야?”
“신경 꺼, 원래 저래…….”
한숨을 푹 쉬며 실란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번 위기는 간신히 넘겼지만, 나중에 또 이런 일이 터질 걸 생각하니 암담했다. 아, 언제쯤 밤잠 편히 자 볼 수 있으려나?
‘어쨌거나, 구해 준 것에 대한 감사는 해야지.’
단검을 도로 허리에 차는 티티마를 보며 실란이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티티마. 덕분에 살았어.”
티티마가 실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푸른 얼굴 위로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묘하게 동공이 가늘어지더니 그녀가 실란에게 몸을 날렸다.
“실란! 너 좋아!”
고양이처럼 폴짝 뛰더니, 대뜸 실란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간다.
“에엑?”
이건 또 뭔 소리야? 실란이 당황하며 티티마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굽힌 채 정말 고양이처럼 계속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너 좋아! 굉장해!”
‘얘, 왜 이래?’
실란은 몰랐지만, 원래 트롤 소녀들에게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을 경우 이렇게 냄새를 묻혀 자신의 소유라 주장하는 습성이 있었다.
‘얘 옆에 있으면 왠지 주술이 잘돼! 이거 좋아!’
실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지만 티티마는 엄연히 여자아이였다. 그것도 작은 천 조각으로 가슴과 하체만 간신히 가린.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또래 소녀가 계속 몸을 비벼 오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저기…….”
하지만 티티마는 실란이 당황하건 말건 여기 비비적, 저기 비비적.
그렇게 열심히 실란을 자신의 ‘사유물’이라 주장한 뒤에야 티티마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됐다! 이제 이거 내 거!’
간신히 당황을 가라앉히며 실란이 그녀를 재촉했다.
“빨리 빠져나가자.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들 제플린 떠났겠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티티마가 훌쩍 뛰어올랐다. 한걸음에 건물 옥상까지 올라간 그녀가 아래를 향해 손짓했다.
“자, 실란도 올라와.”
기가 막혀 실란이 입술을 내밀었다.
지금 티티마가 올라간 건물의 높이는 무려 3층.
“……야, 내가 무슨 수로 거길 올라가?”
“엥? 못해?”
“사다리의 존재를 무시하지 마! 보통 사람은 자기 허리 높이까지도 못 뛰는 게 원래 정상이야!”
주위에 워낙 제자리 뛰기 10여 미터쯤 우습게 하는 괴수들이 득실거려서 그렇지, 사실은 날개도 없는 것들이 집이며 성벽 폴짝폴짝 뛰어넘는 게 비정상이다.
“그건 알지만, 실란 넌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티티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그녀의 능력을 몇 배나 오르게 해 준 실란이 보통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은 좀 이상하다.
실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원래 프리스트란 게 남 좋은 일만 해 주는 직종이거든.”
성직자의 고귀한 자기희생 정신을 쉽게도 평가 절하하며 실란은 한숨을 쉬었다.
의아해하며 티티마는 다시 땅 위로 내려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못한다니 못하는 거겠지, 뭐.
“그럼 들릴래, 업힐래?”
순간 실란은 감동했다.
이 자상한 배려라니! 이제까지 그를 들고 다닌 것들치고 이런 거 묻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입 달린 보따리 취급하며 대뜸 들고 날랐을 뿐이다.
“아, 왠지 눈물 날 것 같다.”
“……?”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눈알만 굴리고 있는 티티마를 향해 실란이 손을 벌렸다.
“업어 주라.”
보통 소년이라면 자기 또래 소녀에게 업혀 가는 것에 수치를 느낄 법도 했겠다. 하지만 실란은 그 정도로 수치를 느끼기엔 너무 잦은 ‘들림’을 당한 것이다. 이제 와서 업혀 가는 것 정도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응!”
티티마가 실란을 업고 다시 몸을 날렸다.
과연 아틸카의 수제자, 실란을 업고도 움직임이 전혀 둔해진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업혀 가는 주제에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지라 실란이 다시 신성 주문을 준비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을 보살피사 산양처럼 끝없이 뛰게 하소서!”
분홍빛 성광이 티티마의 전신을 감싸며 놀라운 활력을 가져다준다. 티티마가 환하게 웃었다.
“와아, 역시 이거 신기해.”
폴짝! 폴짝! 폴짝!
실란을 업은 티티마가 개구리처럼 건물을 뛰어넘으며 제플린의 새벽하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3
차탄 공국 북부의 콜른 협곡.
제플린으로부터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곳은, 수백 미터 높이의 좌우 절벽이 100킬로미터 넘게 이어져 있는 거대한 규모의 협곡이었다. 차탄 공국 북부부터 크로방스 왕국 동부의 가란 평야까지 연결되며 한때는 크로방스로 향하는 주요 교역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차탄 공국이 생기고 따로 정규 도로를 설치하게 되자, 현재는 인적이 완전히 끊겨 가끔 밀수꾼들만이 몰래 드나들 뿐인 불모지가 되어 있었다.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커다란 어금니를 지닌 근육질의 트롤이 아래를 바라보며 감탄을 흘렸다.
“이렇게 모여 있으니 실로 장관이로군.”
인적 없는 거친 황야만이 펼쳐져 있던 협곡 어귀에 지금 수천이 넘는 대규모 인파가 모여 있었다. 제플린에서 탈주한 이종족 노예들과 그들을 구출한 안타레스 백국의 정예들이었다.
비록 계절은 한여름이었지만 차탄 공국이 워낙 대륙 북부에 위치해 있다 보니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다. 수많은 엘프와 오크, 드워프들이 수백 개의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몸을 녹이며 밤새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를 달랜다. 허름하나마 천막을 치고 임시 거처를 꾸며 체력이 약한 아이들을 돌보는 이들도 있다. 나눠 준 비상식량을 불에 올려놓고 간단히 요기를 하는 자들도 보인다.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얼굴은 하나같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들뜬 표정들이었다.
어금니를 매만지며 아틸카가 눈을 빛냈다.
‘얼추 셈해 보니, 다들 합류한 듯하군.’
이 콜른 협곡 입구가 바로 ‘안타레스 백국 동족 해방군’이 제플린 탈주 후 합류하기로 정한 지점이었다. 이곳에서 일단 진열을 정비한 뒤 협곡을 통해 크로방스 왕국으로 탈출, 거기서 안타레스 백국으로 향하는 것이 카를이 세운 도주 경로였다.
소규모로 이종족들을 구출할 때야 다이만 던전의 공간 포털 터미널을 이용했지만, 구해야 할 숫자가 수천 단위가 되면 그쪽 경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온갖 몬스터들이 대거 출몰하는 세텔라드 산맥, 그중에서도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을 정도의 험지 중 험지가 바로 다이만 던전이다. 수천 명을 이끌고 갈 수 있을 장소면 그게 험지냐? 관광지지. 당연히 정상적인 경로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틸카가 등 뒤로 손짓을 했다.
“갑시다, 형제들이여.”
백여 명 정도 되는 트롤들이 그의 인도에 따라 절벽 틈새의 소로小路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두 제플린의 연금술사 길드에 붙잡혀 있던 이들이었다.
높이가 수백 미터에 달하는 절벽, 어지간한 성벽 대여섯 배에 달하는 장대한 지형이다 보니 내려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진 트롤들조차도 한참 후에야 아래쪽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아틸카와 트롤들을 보며 노예 출신 이종족들이 신기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 트롤이다.”
“아, 저들도 있다고 했지, 참.”
인간 밑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겐 트롤의 모습이 영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개중에는 몬스터가 나타났다며 화들짝 놀라는 이들도 있었다.
“트, 트롤은 몬스터인데!”
“정신 차려요. 인간이 한 말을 아직까지 믿고 있으면 어째요? 트롤이 몬스터면 우리도 여전히 노예게요?”
“어, 그런가…….”
엘프 여인의 타박에 오크 사내가 머리를 긁었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지나가며 아틸카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많이 변하긴 했군. 예전 같았으면 저렇게 편들어 주는 이들조차 없었을 텐데.’
아틸카는 구출한 트롤들을 데리고 협곡 한쪽 귀퉁이로 향했다.
다른 종족과 달리 트롤은 워낙 몸이 튼튼해, 굳이 모닥불을 피우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적당한 공터에 모여 주저앉는 것으로 충분했다.
트롤들을 쉬게 한 뒤 아틸카가 함께 온 트롤을 불렀다.
“이들을 부탁하네, 구루 마다가.”
“알겠습니다, 구루 아틸카.”
상대적으로 작은 어금니를 지닌 깡마른 트롤 사내가 정중히 고개를 끄덕인다. 구출 작전을 함께했던 트롤 구루, 마다가였다. 트롤 구루의 주술력은 그 어금니의 크기에 비례하는 바, 아틸카에 비하면 상당히 격이 낮은 구루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난 백왕님을 만나 보러 가겠네.”
마다가에게 뒤처리를 맡긴 뒤 아틸카는 자리를 떴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며 아틸카는 무리 외곽에 설치된 커다란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앞에서, 녹색 피부의 오크 전사 한 명이 아틸카를 향해 반갑게 손짓을 했다.
“오, 무사했구려, 구루 아틸카!”
흙 멧돼지 일족의 족장이자, 오크의 일곱 오러 유저 중 하나인 킨지르였다. 아틸카가 어금니를 드러내 웃으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무사했군요, 카루가 킨지르.”
킨지르는 두 명의 드워프 전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랜드 포지의 오러 유저, 말로이드와 슬로이틀이었다.
사이좋게 앉아 있는 오크와 드워프를 바라보며 아틸카가 물었다.
“무사했군요, 말로이드, 슬로이틀. 다들 별일 없었습니까?”
말로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안쪽의 인파를 바라보았다.
“그럭저럭 계획대로 된 것 같더구려. 다행스러운 일이지.”
이번 제플린 동족 해방 작전을 위해 안타레스 백국은 모든 전력을 총동원했다. 각 일족의 정예들은 물론, 오러 유저만도 무려 열 명이나 동원되었다.
인간 중에서는 레펜하르트와 러스.
엘프 오러 유저인 이니야는 물론이요, 드워프들은 그들이 보유한 세 오러 유저 모두를 이 작전에 투입했다. 오크들 역시 하다툼과 타시드, 킨지르, 칼켄 등 네 오러 유저가 참가했고 트롤 쪽도 아틸카며 티티마 등, 강력한 트롤 구루들을 대거 동원했다.
그야말로 안타레스 백국의 사활을 건 대작전이었던 것이다.
슬로이틀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지. 만약 잘못되었으면, 기껏 간판 단 우리나라 그대로 말아먹을 뻔했잖소?”
수천에 달하는 이종족들을 보며 아틸카가 혀를 내둘렀다.
“다들 참으로 고생하셨소. 저 많은 인원을 용케도 다 데리고 나왔군.”
킨지르가 턱을 매만지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카를 재상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뭘. 그 친구 용하더만.”
트롤을 구출해야 하는 아틸카 쪽은 운신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구해야 할 숫자가 백여 명 정도라, 혼란을 틈타 그냥 아무데로나 탈출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엘프와 오크, 드워프들은 그렇지 않다.
구해야 할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그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카를은 세밀하게 탈출 경로와 노예들의 숫자, 그들의 이동 속도까지 계산하며 저 병력들을 분산 배치했다.
제플린 동쪽 지구에서는 오러 유저 하다툼과 슬로이틀이 노예들을 이끌었다. 잘카토며 이니야의 부관, 세르펠 등의 도움을 받아 그 일대의 노예 경매장을 모조리 털어 동쪽 성문으로 탈주했다.
서쪽은 이니야와 카다마이트가 시리스며 탈카타의 도움을 받아 서쪽 성문으로 탈주했다.
남쪽은 말로이드와 칼켄, 렐하드가.
북쪽은 타시드와 킨지르, 마켈린 등이 맡았다.
각 종족을 구해야 하는 만큼 구출대에 엘프와 드워프, 오크가 골고루 섞여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손발이 잘 맞아야 하고 지휘력도 있어야 하며 구출된 이종족들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적절히 나뉘어야 한다. 단순히 전투력 순서대로 나누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말로야 쉽지만 각 종족의 구성원들 전부의 능력과 성격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카를이 얼마나 사람들을 잘 다루는지 보여 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무식한 오크인 킨지르는 카를이 피 말리게 고민한 저 작전 배치를 한마디로 일축시켜 버렸지만.
“음, 역시 그 친구 용해.”
단순하면서도 진실을 꿰뚫는 그의 표현에 아틸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문득 의아해했다.
말하다 보니 어째 말로이드와 슬로이틀의 표정이 어두웠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한편에 그늘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카다마이트는 어디 가셨소?”
그러자 세 사람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킨지르가 술 부대를 들어 올렸다.
“카루가 카다마이트가 대지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 이 술은 그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오.”
“카다마이트가 자연의 흐름 속으로 들어갔습니까?”
피해가 없을 것이란 생각은 물론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설마 오러 유저를 잃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말로이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알 포트의 신관들이 그의 시체를 수습했소. 시기가 시기이니, 그의 장례는 백국으로 돌아간 후에 치러지게 되겠지.”
“……귀한 사람을 잃었군요.”
생사는 모두 자연의 흐름을 따름이니, 죽음 앞에서 슬퍼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구루의 가르침.
하지만 상실의 아픔은 트롤에게나 드워프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주술의 기운을 음성에 실어 아틸카가 애도의 말을 건넸다.
“카다마이트는 동족을 위해 명예롭게 싸웠고,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분명 위대한 자연 속에서 평온을 찾을 것입니다.”
담담하면서도 힘이 실린 아틸카의 목소리에 드워프 전사들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아틸카의 말을 듣고 있으니, 조금씩 슬픔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친우를 잃은 그대들의 상실에 애도를 표합니다.”
슬로이틀이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구루 아틸카. 그나저나, 구원자를 뵈러 온 것 아니오? 지금 안에 계시오만.”
아틸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킨지르가 막사 쪽을 손가락질했다.
“아까부터 종이 붙잡고 뭔가 하고 계시던데. 들어가 보시구려.”
☆ ☆ ☆
레펜하르트는 막사 안에서 한창 인근 지도며 각종 서류를 보며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왔군. 작전은 어떻게 되었나, 아틸카?”
목례한 뒤 아틸카가 보고를 올렸다.
“제플린에 억류되어 있던 저희 동족 백일곱 명, 전원 구출에 성공했습니다. 낙오자도 없고, 이쪽의 피해 역시 전무합니다.”
“그나마 트롤들은 피해가 없어 다행이군.”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며 아틸카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왜 레펜하르트가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카다마이트에 대한 이야기는 밖에서 들었습니다. 역시 피해가 큽니까?”
레펜하르트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잃은 것은 카다마이트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작전대로 완벽하게 움직였다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피해가 없을 수는 없다.
트롤이야 워낙 구해야 할 숫자도 적고 소수 정예로 움직여 별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종족은 그렇지 않았다. 탈출 과정에서 낙오된 이들도 상당했고, 제플린의 병력 탓에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노예 숫자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각 종족의 정예 중에서도 죽은 이가 꽤 되었다. 탈출 과정에서 제플린의 병력을 가로막다 장렬히 산화한 이들의 숫자가 수백에 달한다.
자유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 가운데, 상실의 아픔 속에서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이들 역시 분명 있는 것이다.
각 종족에서 올라온 보고를 훑어보며 레펜하르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전체 숫자로 보면 결코 흘린 피의 양이 많다 할 수 없겠지만…….”
아틸카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적게 흘렀어도 피는 피, 그 피를 흘린 자의 아픔은 숫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렇지…….”
비록 이니야에게 한 소리 듣긴 했지만, 레펜하르트는 원래 몰인정한 이가 아니다. 비록 서류상이라지만 이토록 많은 피해를 보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울해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아틸카가 곁으로 다가갔다.
“백왕이여, 우리들 가운데 전해지는 노래를 하나 들려 드리지요.”
흉악한 어금니 사이로 온화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하늘이 뿌린 눈물은 대지의 씨앗을 깨우고
싹 트지 못한 씨앗은 거름 되어 땅을 일깨우네.
개미는 베짱이를 먹고 매미는 땅속에서 일생을 보내니
그 삶은 고단하나 또 아름답도다.
삶으로 생명을 증명하나 또한 죽음으로 삶을 이끎이니
그 흐름 속에 무슨 귀천이 있으리
피고 지고 살고 죽는 모든 것이
뜻대로 행하며 또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이 비로소 한 점으로 향하게 되리라.
“아시겠습니까? 인간의 왕이자, 우리의 왕이여.”
노래를 마친 아틸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막사 밖으로 향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가 버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레펜하르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네, 저 양반.”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건 기운 내라는 소리인 것 같긴 하다.
쓴웃음을 지은 뒤 레펜하르트는 어깨를 폈다.
“그래, 기운 내야지. 지금 여기서 풀 죽어 있을 팔자는 아니니까.”
☆ ☆ ☆
중앙 막사로부터 몇십 미터쯤 떨어진 어느 곳.
러스가 예쁘장한 붉은 머리 소년의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고 있었다.
“야, 이 자식아! 대체 어디 갔던 거냐?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켁켁, 이것 좀 놔요, 러스 경!”
실란이 사라진 후, 러스는 말로이드와 일단 헤어진 뒤 실란을 찾아 제플린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제플린은 너무도 넓고, 게다가 대난리가 난 덕에 온갖 병력들이 난무하던 터라―그제야 뇌물 먹은 병사들이 아차 싶어 출동한 것이었다― 수색이 영 쉽지가 않았다.
결국 해가 떠 버려, 더 이상 제플린에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콜른 협곡으로 향했다. 일단 레펜하르트에게 보고한 뒤 혼자서라도 다시 실란을 찾아 제플린에 잠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협곡으로 와 보니…….
“어, 러스 경! 늦었네요?”
라면서 실란이 태연한 얼굴로 손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