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제33장 승자와 패자
1
제플린 서부를 크게 가로지르는 두꺼운 성벽 위.
그곳에서 두 여인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보랏빛 머리의 엘프 여검사, 이니야와 적갈색 로브 차림의 마법사, 필레나였다.
“바람이여! 내 손에 임해 나의 인도를 따르라! 윈드 커터!”
윈드 워크 마법으로 빠르게 뒤로 이동하며 필레나가 주문을 영창했다. 다섯 바람의 칼날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흡!”
짧은 기합을 터트리며 이니야가 검을 연속으로 찔러 갔다. 은빛의 오러를 머금은 찌르기가 날아드는 바람의 칼날을 일일이 허공에서 분쇄시켰다.
필레나가 바로 마법을 연계했다.
“윈드 봄버!”
강렬한 풍압을 유도하는 윈드 봄버는 그 자체로는 그렇게 살상력이 높은 마법이 아니다. 하지만 필레나는 절묘한 타이밍으로 분쇄된 윈드 커터를 촉매 삼아 윈드 봄버를 시전했다. 덕분에 풍압 속에 수많은 윈드 커터의 파편이 실려 이니야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큭! 제법인데…….”
거리를 좁히려던 이니야가 혀를 찼다. 그냥 평범한 윈드 봄버라면 돌진력을 높여 통과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안에 파편이 섞여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돌진을 멈춘 뒤 그녀가 화려한 손놀림으로 검을 휘둘렀다. 찬란한 검화劍花가 피어오르며 검에 맺힌 은빛 오러가 허공에 얽히며 빛의 방패를 자아냈다.
그렇게 파편을 모조리 막은 뒤 이니야가 다시 몸을 날렸다. 성벽을 박차며 날아드는 이니야를 향해 필레나가 마법을 이었다.
“다중 화계, 매스 파이어 애로우!”
십여 줄기의 불꽃의 화살이 이니야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니야가 손을 내밀어 오러 방어막을 펼쳤다. 파이어 애로우는 화염계 중에서도 꽤 저급 주문이라 이런 단순한 방법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공격을 튕겨 낼 수 있었다.
간단히 상대의 마법을 분쇄하며 이니야는 무서운 속도로 필레나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필레나도 애초에 공격을 위해 파이어 애로우를 날린 것이 아니었다.
“화염의 눈이여! 플레임 볼트!”
허공을 움켜쥐며 필레나가 다음 시동어를 외쳤다. 튕겨나간 파이어 애로우가 허공에서 폭발하며 다음 마법 주문의 촉매가 되었다. 폭발 속에서 화염 광선이 이니야의 등 뒤를 노리며 쏘아졌다.
물론 이니야는 오러 유저, 뒤돌아보지 않아도 기감만으로 연계 공격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바로 그녀의 주위로 은색의 막이 펼쳐져 화염 광선을 튕겨 냈다. 튕겨 난 화염 광선이 주위의 성벽 위에 적중해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단순한 플레임 볼트의 위력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폭발이었다. 이니야의 오러 방어에 의해 튕겨 난 화염 광선들이 정확하게 한 점으로 모이며 폭발력을 가중시킨 것이다. 필레나가 자신의 마법이 튕겨지는 반사 각도까지 절묘하게 조절했다는 의미다.
필레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테라 브레이크! 에어 봄!”
굉음이 울리며 이니야의 발치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사실 테라 브레이크는 원래 3서클 주문으로, 끽해야 얇은 벽에 구멍을 뚫는 정도의 위력밖에 없다. 하지만 폭발로 인해 성벽이 약해진 데다가 테라 브레이크를 시전한 지점이 성벽의 하중을 지탱하는 부분이었던 탓에 고위 마법 정도의 위력이 나와 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공기 폭발, 풍계 주문 에어 봄.
오러 유저에게는 산들바람처럼 느껴질 단순한 1서클 주문이다. 그러나 필레나는 이니야를 노리고 에어 봄을 시전하지 않았다.
그녀가 책정한 에어 봄의 유효 좌표는 무너지는 성벽 외곽의 허공. 무너지는 성벽의 파편들이 무수한 에어 봄의 풍압에 의해 낙하 궤도가 변경되며 정확히 이니야의 머리 위를 노렸다.
말이 좋아 파편이지, 부서진 성벽의 일부라면 그야말로 바윗덩어리다. 쏟아지는 바위들을 올려다보며 이니야가 절로 혀를 내둘렀다.
‘하위 마법만 가지고 잘도 이런 짓을 해 대네.’
엄청난 범위의 파이어 월을 선보일 때 이미 예사롭지 않은 마법사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현재 필레나의 역량은 이니야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높은 수준의 마법도 대단하지만…….’
그보다는 저 전투 센스가 더 놀랍다.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해 적절한 마법을 구사하는 것이 바로 마법사의 임무다. 진정 강력한 마법은 높은 서클이 아니라 가장 상황에 걸맞은 마법이라는 것이 바로 마법사들 사이의 속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레나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아예 마법으로 상황 자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가로막힌 마법마저도 다음 공격을 위한 밑거름, 주문의 강약을 조절해 딜레이를 없애고 영창 시간을 확보한다. 상대의 움직임을 통찰하고 지형지물을 이용함으로써 하위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공격을 이어 간다.
인간 세상을 떠돌며 수많은 마법사를 만나 본 이니야조차도 이 정도로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마법을 구사하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뭐, 감탄은 감탄이고 피하긴 해야겠지.’
이니야가 허공에 검을 찔러댔다.
절묘하게 낙하하는 바위의 궤적을 읽어 힘을 옆으로 흘린다. 쏟아지는 바윗덩어리에 비하면 너무도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레이피어가 허공을 찌를 때마다 바위들이 마치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이니야의 주위를 벗어나 밖으로 떨어졌다.
이쑤시개로 칼날을 쳐 내는 수준의 신기에 필레나가 기겁했다.
‘테스론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거야? 무슨 마법인가?’
놀라는 와중에도 필레나는 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델 피아 라스텔 로운, 나 부르노라, 내 적을 가로막는 마의 장벽.”
쏟아지는 바위들을 튕겨 낸 이니야가 눈을 빛내며 바로 검의 궤적을 바꿨다. 찌르기가 베기로 변화되며 은빛의 오러가 허공을 격해 뻗어 나갔다.
“동토의 칼날!”
은빛의 창이 섬광처럼 필레나에게 쇄도했다. 동시에 그녀가 시동어를 외쳤다.
“아케인 포스 실드!”
강렬한 마력의 장벽이 은빛의 창과 맞부딪쳐 충돌을 일으켰다. 공기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오러와 마법이 동시에 상쇄되었다. 이니야가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쳇, 잘도 저런 짓을…….”
지금 필레나는 이니야가 원거리 공격을 날릴 줄 미리 예상하고 방어 마법을 먼저 외운 것이다.
‘감이 좋은 건지, 통찰력이 뛰어난 건지…….’
어느 쪽이건 보통 실력이 아니다. 이니야는 경각심을 드높이며 저 냉정한 표정의 여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한편, 필레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 살았다…….’
겉으로는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 필레나는 지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역시 오러 유저는 무서워…….’
오러 유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8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뿐. 이것은 대륙의 상식이고 또 사실이기도 하다. 다중 복제의 지팡이가 있다 한들 아직 7서클 초반인 필레나에게 저 엘프 오러 유저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다. 아무리 지금 이니야의 몸 상태가 엉망이라지만, 그래도 필레나가 평범한 7서클 고위 마법사였다면 벌써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껏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릴 적에 배웠던 가르침, ‘마법적 상황 제어 이론’ 덕분이었다.
‘고마워, 레펜하르트. 아니, 지금은 테스론이지, 참.’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자신의 소꿉친구를 떠올리며 필레나는 새삼 감사했다.
☆ ☆ ☆
아직 테스론이 기억을 잃기 전, 레펜하르트라 불리던 때의 일이었다.
필레나와 레펜하르트는 둘 다 비천한 고아 출신으로 델피아의 마탑에 거두어져 마법을 배우고 있었다.
원래 마법사들은 쉽게 제자들에게 마법을 전해 주지 않는다. 단순한 1서클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만도 최소 3년은 노예처럼 허드렛일만 해야 하는 것이 마탑의 상식, 아홉 살 때 마탑에 거두어진 필레나가 제대로 마법을 입문하게 된 것은 열두 살이 넘어서였다.
이후 그녀는 또래에 비해 상당히 두각을 드러냈다. 마법에 입문한지 반년 만에 1서클을 모두 마스터하고 2서클에 들어설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필레나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천재라는 실감을 하지를 못했다.
당시 열한 살이었던 레펜하르트는 마법을 배운 지 사흘 만에 1서클까지의 모든 주문을 마스터해 버렸으니까.
너무나 빠른 레펜하르트의 진도에 델피아의 마법사들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소동이 일어났다.
지나치게 뛰어난 재능은 위험을 부른다는 의견도 있었고, 이야말로 델피아의 마탑을 부흥시킬 인재이니 본격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델피아의 마탑 전체가 둘로 갈라져 싸워 댔다.
그때 어린 레펜하르트는 영특하게도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이면 위험하다는 걸 고작 열한 살의 나이에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이후 레펜하르트는 적당히 진도를 나갔다. 바로 옆에 있던 필레나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으로.
‘필레나 넌 바보니까, 너를 기준으로 하면 어른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 아냐?’
당시 레펜하르트의 말을 떠올리며 필레나는 살짝 인상을 썼다. 다시 생각해 보니 참 싸가지 없는 꼬마였다.
‘두 살이나 어린 주제에!’
뭐, 그렇게 재능을 감추고도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위협적이어서 상당히 가르침에 제한을 받기는 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그냥 경계해야 한다 수준이라, 어린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탑에 머물 수 있었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레펜하르트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남들은 주어진 지식 소화하느라 벅차하는 반면, 레펜하르트는 언제나 한가했다. 마법사의 도제라면 온갖 허드렛일이 많았으니 육체적으로야 한가했다고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레펜하르트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마학 이론이 바로 이 ‘마법적 상황 제어 이론’이었다.
단순히 마법을 상황에 맞춰 구사하거나 연계하는 수준을 떠나, 아예 전장 전체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시뮬레이션해 원인과 결과를 통째로 제어함으로써 상황 자체를 이끌어 가는 마학 인과론.
그것은 열다섯 살짜리가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고도의 이론이었다. 당장 학회에 발표해도 불멸의 명성을 얻기에 충분한 굉장한 기법이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바보도 아닌데, 이거 발표했다가 또다시 경계를 받을 거란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론을 만들어 놓고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저, 소꿉친구였던 필레나에게만 심심풀이로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과거를 상기하며 필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 그때 그거 이해하느라 죽는 줄 알았지.’
레펜하르트는 장난 삼아 만들었다는데, 듣는 필레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뜬구름 같은 소리였다.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그렇다고 두 살이나 어린 꼬맹이가 ‘너 바보 아냐? 이게 뭐가 어려워?’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자존심 때문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자는 시간까지 줄여 가며 죽어라 익혔다.
그 외에도 어린 레펜하르트는 틈틈이 마력 응집법이며 서클 구현법, 명상법 등의 기존 이론을 새롭게 창안했고, 심심할 때마다 필레나에게 가르쳐 주곤 했다.
두 살이나 어린 이 검은 머리의 꼬맹이가 가르쳐 주는 내용은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워 마탑의 가르침에 비할 데가 아니었지만, 이해하고 나면 확실하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만큼 하나같이 기존의 마법학에 비해 뛰어나기 그지없는 방식이었다. 비록 마법의 경지 자체는 3서클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던 레펜하르트였지만, 그 깊이만큼은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 못지않았다.
이것이 필레나가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토록 높은 경지에 다다른 이유였다. 어린 시절 레펜하르트로 인해 워낙 탄탄하게 기본을 닦아 놓으니 이후, 각종 마법의 지식을 습득할 때 시간 낭비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필레나의 재능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레펜하르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시점에서 이미 그녀 역시 천재는 천재였으니까. (실제로, 당시 마탑에 같이 거하던 정규 마법사 토드는 그들의 수다를 듣고도 그게 마법 이론인 줄도 못 알아챘다.)
하여튼, 당시 그녀의 소꿉친구는 진짜 괴물 같은 천재였다. 비록 기억을 잃으며 그 천재성도 함께 잃었지만…….
‘대신 오러 유저가 되어 버렸지. 그것도 고작 스무 살에. 진짜 천재란 건 정체를 모르겠어.’
세상은 사이러스인가 하는 자를 최연소 오러 능력자라며 추앙하고 있지만 필레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저 마탑에서 마법만 배우던 애가 어느 날 갑자기 기억을 잃더니 자신의 이름을 테스론이라 개명하고는 무술을 혼자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 대뜸 오러를 내뿜으며 초인 중의 초인이라는 오러 유저가 되어 버렸다.
가르쳐 준 이도 없는데 오러 유저가 되었다? 충분히 의심해 볼 일이지만 필레나는 그리하지 않았다.
원래 그녀의 소꿉친구는 그런 아이였다.
하늘이 내린 정도가 아니라, 하늘조차도 못 내려 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재능의 소유자. 뭘 해도 이상하고 뭘 해도 이상하지 않은 아이.
중요한 것은 그녀가 너무도 많은 은혜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레펜하르트라 불리던 시절에는 마법사로서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테스론이라 불리게 된 후로는 여인으로서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초경을 시작한 이래, 필레나는 언제나 성性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녀의 육체가 무르익을수록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 마법사들의 눈빛 역시 뱀처럼 변해 갔다.
그나마 그라임 왕국에서는 소아 성애자를 혐오하기에 열여덟 살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마탑의 남자 마법사들에게 몸이 더렵혀질 운명이었다.
그것을 막아 준 것이 바로 테스론이었다.
레펜하르트라 불리던 시절엔 전혀 눈치채지도 못했던 주제에, 기억을 잃고 난 후로는 귀신같이 그런 분위기를 알아채고 사전에 강간 시도를 차단했다. 열여섯 살의 소년임에도, 마법의 기억을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테스론은 쉽사리 그들을 제압하고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가볍게 손발을 놀리기만 해도 3, 4서클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마법 한번 외워 보지 못하고 두들겨 맞아 쓰러졌다.
-그런 빈약한 육체로 여자를 안으려 하다니? 남자라면 부끄러운 줄 알아라!
뭔가, 하는 말은 좀 이상했지만 어쨌건 지켜 준 것만은 틀림없었다.
오러를 각성해 마탑에서 빠져나갈 때 그녀를 데리고 가 주기도 했다. 덕분에 필레나는 여자로선 이례적으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도 정규 마법사가 되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토록 많은 것을 받은 그녀가 테스론의 충실한 숭배자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뜬금없이 대륙을 불태울 사악한 자를 막아야 한다고 했을 때에도, 그것을 위해 은의 현자라는 정체불명의 비밀결사에 몸을 담았을 때도 그녀는 아무 의문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필요 없었다.
왜 저러는지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소꿉친구가 이해 불가의 존재라는 건 이미 열네 살 이후부터 절실히 실감하고 또 실감했다.
중요한 진실은 하나뿐.
기억을 잃기 전에도, 잃은 후에도 변함없이 그녀를 아껴 주고 모든 것을 베풀어 준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테스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필레나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떨어진, 반파된 성벽 위에서 보랏빛 머리칼의 엘프가 블레이드 오러를 전개한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랑하고 숭배하는 ‘그이’를 위해, 필레나는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나락의 폭우여, 북풍과 빙설의 혀를 놀려라!”
그녀의 양손이 빠르게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블리자드 스톰!”
☆ ☆ ☆
마법사와 전사의 전투는 일종의 술래잡기와 같다.
거리를 좁혀 위력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을 만큼 마법사에게 접근할 수 있으면 전사의 승리.
이동 주문으로 계속 도망 다니며 각종 마법으로 접근을 제지해 멀리 있는 전사를 쓰러뜨리면 마법사의 승리다.
이는 대마법사와 오러 유저의 전투에도 그대로 통용이 되는 이야기였다.
오러 유저쯤 되면 일반 전사와 달리 원거리에서도 충분히 강력한 공격을 날릴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직접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는 것에 비하면 현저히 위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대마법사쯤 되면 원거리에서 날아드는 블레이드 오러 정도는 충분히 마법 장벽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온갖 마법이 필레나의 손끝을 통해 이니야에게 작열했다. 일부는 직접적으로 날아가고, 일부는 간접적으로 피해를 주며 어떻게든 원거리에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이니야도 계속 몸을 날렸다. 덮쳐 오는 각종 파괴적인 마법을 정교한 검술로 비껴 흘리고 때로는 쳐 내며 계속 거리를 좁히려 노력한다.
“하압!”
이니야가 블레이드 오러를 날려 필레나에게 쏘아 보냈다. 필레나가 재빨리 마법의 장벽을 펼쳐 공격을 막았다.
“엠브레스 실드!”
아직 8서클에 다다르지 못했다 보니, 필레나가 바로 반응해 시전할 수 있는 마법 장벽은 4서클의 엠브레스 실드 정도가 한계였다. 고작 4서클의 방어 마력장, 원래대로라면 이니야의 블레이드 오러가 꿰뚫어야 정상이겠지만…….
콰앙!
폭음과 함께 오러와 마력장이 부딪쳐 동시에 소멸했다. 이니야가 혀를 찼다.
“끙, 이젠 저런 거 하나 뚫을 힘도 안 남았나…….”
그녀의 부상이 너무 심한 것이 문제였다.
원래 이니야의 기량은 오러 유저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 본격적으로 붙는다면 안타레스 백국에서도 칼켄이나 아틸카, 레펜하르트 정도만이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검술과 오러 제어 능력은 달인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하지만 이니야는 어쩔 수 없는 엘프였다.
지상의 모든 종족 중에서도 가장 육체가 허약한 것이 바로 엘프.
엘프치고는 강건한 육체의 소유자인 이니야였지만, 그렇다 해도 다른 오러 유저에 비하면 손색이 많았다. 기껏해야 평범한 성인 인간 남자나 오크 소년 정도 수준이랄까? 근력도 지구력도 내구도도 다른 종족에 비하면 심각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테스론에게 정통으로 맞은 두 방만으로도 현재 이니야의 육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직까지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극에 다다른 오러 제어력 덕분이었다. 현재 이니야는 근육 대신 오러 구동력으로 육체를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엉망인 몸 상태, 체내 오러의 대부분을 헝클어진 기혈을 다스리고 육체를 움직이는 데 쓰고 있다 보니 위력도 움직임도 평소의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오러양이 너무 부족해 북해의 숨결도 못 쓰겠고…… 그거면 저 여자 붙잡아 두는 것쯤은 일도 아닌데, 쳇…….’
정말이지 한심할 정도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투덜대는 이니야를 향해 필레나가 반격을 날렸다.
불꽃과 얼음이 동시에 피어나며 이니야에게 쏟아졌다. 발치가 얼어붙고 곧바로 폭발하니 자잘한 얼음 파편이 전신을 노리고 날아든다. 그렇게 시야를 희롱하며 곧바로 아케인 볼트, 응축된 마력 화살이 강렬한 관통력을 동반해 쏘아졌다.
하지만 지친 와중에도 이니야는 바로 방어 태세로 들어가며 모든 공격을 흘려 냈다.
굵직한 공격은 검으로 쳐 내고 자잘한 공격은 오러 방어막을 비스듬히 기울여 비껴 흘린다.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굳이 오러 방어막도 필요 없었겠지만, 오러만으로 육체를 움직이다 보니 평소의 정교한 검술을 쓰기가 힘들었다.
필레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저런 짓을 하는 거지?’
이니야 기준에선 한심할 정도로 수준 떨어지는 방어술이었지만, 남이 보기엔 그것도 충분히 굉장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목을 노린 채, 두 여인은 생명을 건 술래잡기를 계속했다.
심각한 부상을 당했지만 그래도 최상위 오러 유저인 이니야, 그리고 아직 7서클이지만 어린 레펜하르트의 가르침 덕분에 전투 센스는 대마법사 못지않은 필레나.
상황이 겹치다 보니 쉽사리 결판이 나질 않았다. 각자 날린 필살의 공격이 계속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비껴간다.
그렇게 정신없이 전투를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쿠우우웅!
갑자기 황금빛 기둥이 허공을 꿰뚫었다. 그야말로 신이 강림한 게 아닌가 싶은 엄청난 크기의 빛무리, 지진이라도 난 듯 대지가 흔들리고 꿰뚫린 허공을 통해 폭풍이 불어닥칠 정도로 엄청난 파괴의 힘이었다.
사방을 대낮처럼 밝히는 그 가공할 빛 속에서 두 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를 크게 뜨며 필레나와 이니야가 놀란 외침을 터트렸다.
“테스론?”
“레펜하르트 님?”
2
하늘을 꿰뚫는 빛의 기둥, 그 속에서 근육질 거구의 사내가 오른 주먹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빛의 기둥이 점점 가늘어지며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황금빛이 사라지고 제플린의 밤하늘 위로 여명이 아스라이 푸른빛을 뿌리며 새벽하늘을 물들인다.
하늘을 꿰뚫은 사내, 권왕 레펜하르트는 조용히 주먹을 거두었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흥분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권마합신…… 이론은 대충 세워 놓았었지만 이렇게까지 잘 먹힐 줄은 몰랐는데…….”
죽어라 연습해도 다다르지 못했던 경지, 5중첩 캘러미티 혼.
이걸 어떻게든 편법으로라도 구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얼마나 연구했던가?
이리저리 분석하며 마법과 오러를 융합시키는 연구를 계속했다. 그 와중에 태어난 것이 오러를 융합하는 마법 술식, 저가형(?) 캘러미티 혼인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이었다.
권사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마법사의 술식이기도 한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 이는 오러와 마법의 융합 술식, 권마합신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 확실히 권마합신을 이용하면 원래의 캘러미티 혼에 중첩을 더하는 것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뭐가 부족한지 계속 시도만 하면 기존의 캘러미티 혼이 깨져 버리는 탓에 그동안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5중첩을 깨달으며 이 문제까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 것이다.
‘과연, 오러의 흐름과 안정이 균형적으로 파괴력으로 화하는 것은 5중첩부터군. 4중첩까지는 기반이 되는 오러 파문이 흐르는 기세에 비해 위치 고정이 불안정해서 그동안 되지 않는 거였어.’
문득 레펜하르트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진짜 6중첩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 이거.”
참으로 크고 아름다운 빛의 기둥이 솟구쳐 주기는 했다. 그러나 기술을 시전한 레펜하르트 본인은 저게 불완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빛의 기둥이 굵다는 것부터가 틀렸다. 제대로 힘이 집중되었다면 저렇게까지 어마어마한 빛의 기둥을 보일 리가 없다.
‘진짜 6중첩 캘러미티 혼이라면 보다 가늘고 관통력이 강한 형태로 구현되었겠지?’
비유하자면, 레펜하르트가 한 짓은 활로 화살을 쏠 때 화살촉에 철을 더 부어 중량을 늘인 것과 비슷했다.
무게가 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파괴력은 물론 높아진다. 하지만 제대로 6중첩을 구사한다는 것은, 철을 덧붙일 뿐 아니라 그것을 날카롭게 갈아 관통력을 높여 완전한 화살촉으로 만드는 것까지 이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완벽한 6중첩 캘러미티 혼이라 할 수 있다.
레펜하르트가 구사한 것은, 굳이 말하자면 5.5중첩 정도?
“그래도 5중첩에 비하면 월등한 위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렸다.
10여 미터쯤 떨어진 성벽 아래의 폐허, 그곳에 테스론이 쓰러져 있었다.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고 눈과 코, 귀에서도 핏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시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토록 가공할 위력을 보였던 고대의 아티팩트, 아다만드릴 슈트의 상태는 더 처참했다. 상체 부분은 아예 산산이 박살 나 가루가 되어 흩어져 있었다. 하체 쪽도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을 뿐,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스론은 아직 살아 있었다.
“크, 크으윽…….”
신음을 흘리며 테스론이 힘겹게 눈을 떴다. 부들부들 손가락을 떨며 그가 악을 썼다.
“이, 이 빌어먹을 마왕…….”
메마른 목소리로 테스론이 외쳤다.
“그, 그게 무슨 6중첩이야? 감히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기를 마법으로 땜빵해? 이 새끼가 어디서 멋대로 짝퉁을 만들어!”
레펜하르트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중얼거렸다.
“역시 살아 있었군, 테스론.”
아무리 제대로 된 6중첩이 아니었다지만, 권마합신을 통한 레펜하르트의 캘러미티 혼은 분명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테스론의 5중첩 캘러미티 혼을 간단히 압도하고 아다만드릴 슈트까지 가루로 만들 정도로.
즉, 상식적으로는 테스론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시체도 못 남기고 사라져야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테스론이 살아 있고, 심지어 소리까지 지를 수 있는 이유를 레펜하르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공격이 테스론을 적중했던 그 순간이었다.
테스론의 5중첩 캘러미티 혼이 모조리 상쇄되며 가공할 파괴의 힘이 그를 덮쳐 가는 그때, 레펜하르트는 똑똑히 보았다.
“삼중의 포스 실드에 더블 아케인 실드, 그리고 일곱 속성의 프리스매틱 배리어였나?”
레펜하르트가 살아남았을 때처럼, 테스론 역시 그 위기의 순간 온갖 마법 장벽을 전개해 공격을 막아 냈던 것이다.
심지어 테스론은 레펜하르트와 달리 고위 서클을 구사하면서 수인을 맺지도 않았다. 오로지 가공할 마법 연산력, 그것만으로 저 모든 마법을 즉시 시전해 발동시켰다!
이건 테스론이 그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그냥 그만큼 레펜하르트의 원래 두뇌가 괴물 같았기 때문인 쪽이 컸다.
왜, 가끔 머릿속에 노랫가락이 저절로 떠올라 흥얼거리게 되는 일이 있지 않은가? 이유도 없이, 게다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뇌리를 맴돌아 신경이 쓰이는데도 그만둘 수 없는 그런 경험.
지금 테스론이 한 짓이 그것과 비슷했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그의 두뇌 일부가 멋대로 가장 적절한 마법 장벽을 강제 구동해 테스론의 의사와 상관없이 마법을 발동시킨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내 머리지만 정말 괴물 같군…….”
자기 것일 때는 몰랐는데, 막상 타인의 시선으로 보니 진짜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 복잡하고 골치 아픈 마법 술식이 저 두뇌에게는 그냥 일반인 노랫가락 흥얼거리는 수준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거기에, 프리스매틱 배리어는 7서클이잖아? 그 와중에 7서클도 뚫었어?”
기가 차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주먹패답게 주먹질이나 잘 할 것이지, 주제에 무슨 마법사처럼 전투 중에 정신 고양을…….”
말하다가 레펜하르트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자기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여하튼, 막판에 굉장한 짓을 해 즉사는 면했다만 그래도 현재 테스론이 죽어 간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사지는 근골이 뒤틀려 흉측한 모습이고 과도한 두뇌 연산 때문에 칠공에서 피를 쏟고 있다. 굳이 레펜하르트가 마무리를 짓지 않아도, 이미 반쯤 저승의 강에 몸을 담근 상태다.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을 향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테스론…….”
테스론이 힘겹게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크윽…… 레펜하르트…….”
죽음을 각오한 테스론이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아쉽구나…… 네놈의 팔 하나쯤은 가져갔어야 했는데…….”
주먹을 겨눈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원래는 최후의 일격을 날려 숨통을 끊을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후환을 없애 버릴 셈이었지만…….
“으으음…….”
막상 자신의 얼굴을 한 상대방을 보고 있으니 쉽사리 손이 나가질 않았다.
물론 더 이상 예전의 육체에 미련은 없다.
이미 이 육체에 적응할 대로 적응했고, 마왕이 아닌 권왕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자신의 이상을 펴는 데 도움이 되는지도 깨달았다. 이제 와서 굳이 예전의 육체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 자신의 육체였고, 자신의 얼굴이었다. 쉽사리 손이 나갈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레펜하르트가 망설이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기 몸이 아니라 해도, 제3자의 시선으로 본다 해도 저 재능, 저 두뇌는 너무나 탐이 난다.
테스론이라는 영혼을 담은 상태로도 저런 짓이 가능할 정도인, 마법이란 측면에 있어선 실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고의 두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말이지.’
단순한 타인으로 인식한다 해도, 그냥 죽여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재능인 것이다.
레펜하르트의 망설임을 느꼈는지 테스론이 다시 눈을 떴다.
그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무슨 수작이냐, 마왕?”
레펜하르트는 안색을 굳힌 채 테스론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고민하다, 레펜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살아볼 생각은 없는가? 테스론?”
☆ ☆ ☆
테스론의 눈매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그가 대꾸했다.
“무슨 헛소리냐, 마왕! 내가 목숨이 아까워 인류를 배신할 것 같은가!”
“예전의 그대였다면 그럴 리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도 그리 생각하나? 남의 좋은 머리 가져갔으면 생각도 좀 바뀌지 않았을까 싶은데?”
레펜하르트가 차분히 질문을 이었다.
“아직도 그대는 내가 저들을 마법으로 조종했다고 생각하나? 아직도 저들이 마성에 물들어 저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나?”
테스론이 입을 다물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그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마왕이라 불릴 정도의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그대는 고위 마법사이기도 하다, 테스론. 아직도 저들이 인간의 노예로 지음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단순한 머리로 그 수준까지 마법을 익히지도 못했을 터다. 그러니 묻겠다. 아직도 저들이 노예로 타고난 이들이라고 생각하나?”
테스론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종족들은 그저 단순하게 마왕의 지배를 받아 타락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마왕에게 그런 짓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테스론 본인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종족들은 자유를 꿈꾸며 행동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점점 더 구겨지는 테스론의 얼굴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쐐기를 박듯 질문을 맺었다.
“그 머리로 잘 생각해 봐라, 테스론. 아직도 저들이 내 마법에 의해 마성에 물든 자들로 보이는지.”
테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빛났다. 드디어 테스론이 자신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막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밝아지려던 찰나였다. 차가운 테스론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서 더더욱, 저들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응?”
테스론의 두 눈동자가 검은 불꽃을 안고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렇기에 더더욱 저들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지 않은가? 저들이 단순히 마성에 젖은 것이 아니라면, 사실은 그 모습이 그들의 본질이라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테스론이 소리쳤다.
“더더욱 인류가 저들을 제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있었다. 안타레스 제국 휘하의 이종족들, 그들이 어떤 습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전생에서 레펜하르트와 대적하며 수차례나 그것을 몸소 경험했다.
“인간의 몇 배나 장수하는 엘프와 드워프들, 그야말로 전투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오크들, 인간의 몇 배나 되는 힘과 재생력을 가진 트롤들!”
그때는 별생각 없이 흘려 넘겼지만 지금은 다르다. 만약 그것이 마왕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이종족들 본연의 힘이었다면!
“반드시 저놈들을 무찔러 후환을 없앰이 옳지 않은가?”
강한 의지를 담은 그 말에 레펜하르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아무리 머리가 좋아진다 한들 세상을 보는 관점마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약육강식, 강자가 약자를 먹어 치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저것이 진리일 테지.
답답해진 레펜하르트가 혼잣말을 흘렸다.
“……어째서 저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을까? 서로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을…….”
그러자 테스론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 어째서 공존을 꾀해야 하지? 지금 인간은 충분히 대륙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런데 저놈들이 다시 힘을 키운다면 그만큼 인류의 영역이 침범당할 터. 세계는 유한하고 그 자리는 이미 인류가 차지하고 있으니 저놈들이 힘이 생긴다면 인간의 세상은 5분의 1로 축소되어 버릴 것이 아닌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테스론은 레펜하르트를 마주 바라보았다.
굳건한 테스론의 태도에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세계는 유한하니, 이종족들이 일어서면 인간의 영역이 5분의 1로 줄어들 것이라고?
“이종족의 새로운 문화, 새로운 생각을 인류가 접한다는 것은 세상이 5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다섯 배로 늘어나는 것이란 걸 모르는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마왕?”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테스론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딱히 테스론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테스론뿐 아니라 이 시대 대부분의 인간들은, 세상을 오로지 영토로만 재단하는 근시안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설득은 무리인가…….”
조금이라도 생각을 바꿀 기미가 보이면 카르사스 공자의 경우처럼 일단 포로로 끌고 가서 회유하거나 하겠는데, 저토록 강경하니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카르사스 공자와 달리 테스론은 오러 유저이면서 동시에 7서클 마법사이기도 했다. 저 정도의 강자는 붙잡아 두는 것도 쉽지 않다. 혹여 힘을 되찾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아쉽군, 테스론.”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가 다시 살기를 피워 올렸다.
“역시 그대와 난 양립할 수 없는 사이인 것 같군.”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테스론이 애써 미소를 떠올렸다.
“난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 편을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그리고 도리어 어이없다는 듯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네놈이 더 이상하다, 레펜하르트. 그대 역시 인간이지 않나? 어째서 인간이 인간을 적대하는 거냐?”
레펜하르트는 허하게 웃었다.
‘내가 정말 인간을 적대했다면 전생에 그런 꼴이 되었을 것 같냐?’
애당초 인류 다 없애고 이종족들만의 세상을 만들 생각이었으면 그토록 밀리지도 않았다. 그 전에 각국 수도며 인류 밀집 지대에 10서클 마법 펑펑 터트려서 깡그리 몰살시켰겠지. 어떻게든 인류와 공존해 보려고 쳐들어오는 적만 해치우다가 그 꼴 난 것 아닌가?
“난 사람이다. 당연히 사람 편을 들 뿐이다.”
우우웅!
레펜하르트의 주먹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테스론이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강렬한 파괴의 오러가 주먹 가득 넘실거렸다. 마음을 굳히고 레펜하르트는 한때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깝지만, 아까운 만큼 내버려 두었다간 더욱 큰 위협이 되어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포기할 때는 포기해야지. 전생의 실수를 돌이키지 않으려면.’
결심을 내린 레펜하르트가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저 멀리 들려왔다.
“안 돼!”
동시에 강력한 마력이 레펜하르트의 등 뒤로 느껴진다.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이니야와 싸우던 그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이니야가 미처 해치우지 못했나? 하긴, 부상이 워낙 심했으니…….’
별생각 없이 레펜하르트는 준비한 기격탄의 방향을 돌렸다. 마법사부터 먼저 해치울 셈이었다. 어차피 테스론은 다 죽어 가고 있었으니, 순서를 좀 바꾼다고 별문제가 생길 리는 없었다.
그렇게 날아오는 마법사를 바라본 순간.
“어?”
기격탄을 날리려던 레펜하르트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마법사의 얼굴이 지나치게 낯이 익었다.
‘필레나?’
☆ ☆ ☆
20대 후반의 여인이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을 가르고 날아오고 있었다.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게 해 주는 마법, 플라이는 8서클의 고위 주문이다. 하지만 지금 저 여마법사는 하급 마법만으로 플라이와 맞먹는 스피드를 보여 주고 있었다.
5서클 부유 주문 레비테이션으로 신체를 띄운 뒤 윈드 워크와 에어 봄을 병행해 방향을 잡고 추진력을 부여하는 저 마법 연계 방식은 레펜하르트에게 대단히 익숙한 것이었다. 전생의 그가 아직 낮은 서클의 마법사였을 때 창안했던 ‘마법적 상황 제어 이론’이었다.
이 시대에 저 이론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뿐.
‘이니야가 말한 마법사가 필레나였어?’
예전에 테스론을 따라다니는 걸 잠깐 보긴 했지만, 설마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무엇보다 제플린 서문 주변에 펼쳐진 저 어마어마한 파이어 월의 흔적은, 결코 그가 아는 필레나가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일 줄 알았는데…….’
당황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일단 기격탄을 거두었다. 추억 속의 소꿉친구를 죽여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 틈에 필레나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내려치는 뇌신의 철퇴! 라이트닝 블래스터!”
강렬한 뇌격이 레펜하르트의 정수리를 노리고 번뜩였다.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오러를 펼쳐 마법을 방어하려 할 때였다.
필레나가 손에 든 지팡이를 휘두르며 외침을 이었다.
“다중 복제!”
떨어지는 뇌격이 허공에서 연속으로 복제되며 총 여덟 줄기의 뇌전이 되어 연달아 레펜하르트를 강타했다. 다중복제의 지팡이로 라이트닝 블래스터를 연속 일곱 번 더 복제한 것이다.
“으엑? 뭐야, 이거?”
화들짝 놀라 레펜하르트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마법이 동시에 중첩되니 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단순한 오러 가드로는 도저히 방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스파이럴 가드!”
황금빛 오러가 용솟음치며 여덟 줄기 뇌전을 모조리 튕겨 낸다. 워낙 전격이 강렬하다 보니 방어한 상태로도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뒤로 몇 미터나 밀려 나갔다.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콰콰콰쾅!
그 틈에 필레나가 쓰러진 테스론 곁에 착지했다. 착지하자마자 바로 레펜하르트를 경계하며 테스론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 상태로 그녀가 외쳤다.
“테스론! 괜찮아?”
대답은 없었다. 간신히 대답을 이어 가던 테스론이 결국 부상으로 인해 혼절해 버린 것이다. 필레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스파이럴 가드를 풀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뭐야, 저 엄청난 아티팩트는?’
마법의 극에 달했던 자답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방금 필레나가 선보인 다중 연계 마법이 저 작은 지팡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단순한 마력 증폭용 탈리스만 같은 마도구가 아니야. 주문 하나 외웠더니 그게 일곱 개가 더 불어나? 저런 말도 안 되는 아티팩트가 세상에 있었나?’
레펜하르트를 향해 다중 복제의 지팡이를 겨눈 채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 물러서라, 권왕!”
상대를 노려보며 필레나는 후들거리는 양다리를 애써 가누었다. 비록 다중복제의 지팡이를 겨누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건 허세였다.
이미 그녀는 이니야와 싸우며 다중 복제의 지팡이를 두 번이나 사용했다. 방금 레펜하르트에게 날린 전격이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그걸 맞고도 긁힌 상처 하나 없다니……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지.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필레나는 차가운 눈으로 눈앞의 거한, 권왕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이 사람에게 더 이상 손 끝 하나 댈 수 없어!”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혹스러웠다.
그리운 추억 속의 소꿉친구가 강렬한 적의를 피우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지독한 증오의 표정이었다.
“필레나…….”
필레나의 표정에 당황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저자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생각해 보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쪽도 레펜하르트 수하의 강자 명단을 모두 알고 있으니, 저쪽도 테스론 쪽 인물들의 이름과 얼굴 정도야 충분히 알아두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치부하기엔 상대의 표정이 너무 이상했다.
분명 적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그리움과 당혹만이 섞인 얼굴. 그 속에 적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당황한 얼굴로 제 자리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 할 뿐.
‘뭐지? 왜 저러는 거지?’
하지만 필레나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지금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상대에게 공격 의사가 보이지 않는다.
‘잘 하면 도망칠 기회가 생길지도…….’
눈치를 보며 필레나는 살며시 테스론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때까지도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달래며 그녀는 왼손을 기절한 테스론의 가슴께에 올렸다. 그리고 로브를 뒤져 작은 깃털 하나를 꺼냈다.
필레나의 표정에 화색이 떠올랐다.
‘됐어!’
깃털에서 풍겨 오는 마력 흐름을 느낀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그제야 일변했다. 이미 그는 제이드와 조우했을 때 저 아티팩트를 본 바가 있었다.
“어, 저건?”
이대로라면 다 잡아 놓은 적을 또 놓치게 생겼다!
정신이 번쩍 든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굳이 필레나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팔을 잡아끌기만 해도…….
하지만 필레나가 귀환의 깃털을 발동하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파아앗!
눈부신 빛이 레펜하르트의 망막을 뒤덮었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허우적댔다.
“윽!”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자리에 더 이상 필레나와 테스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부서진 아다만드릴 슈트의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 ☆ ☆
레펜하르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이 터오는 제플린의 하늘, 그 어디에도 테스론과 필레나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이드 때와 똑같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 원 참, 닭 쫓던 개꼴이 되어 버렸군.”
딱히 그가 실수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필레나가 쓴 귀환의 깃털은 레펜하르트조차도 전생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물이다. 현생에서 제이드가 쓰는 걸 딱 한 번 보았을 뿐이다.
그가 예언자도 아닌데 필레나가 저런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예상했다면 오히려 그쪽이 비현실적이겠지.
당연히 다 잡아 놓았다고 확신했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래서 굳이 마저 손을 쓰지 않았다.
이미 제압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대, 게다가 추억 속의 소꿉친구이기도 하다. 레펜하르트가 무슨 살의의 파동에 눈을 뜬 엽기 살인마도 아닌데, 굳이 불필요한 살인을 더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딱히 레펜하르트가 물렁하거나 우유부단해서가 아니라, 그의 입장에서는 저것이 당연한 태도였다.
레펜하르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니, 어떻게 필레나 쟤가 저걸 가지고 있는 거지? 저거 사실은 되게 흔한 건가?”
물론 귀환의 깃털은 은의 현자 내에서도 굉장히 귀한 물건이다. 일회용 소모품인 데다가 다시 만들 수도 없으니, 어지간해서는 은의 현자 내에서도 함부로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세렐라인도 저 귀환의 깃털은 남들 몰래 테스론과 필레나에게만 건네주었다.
딱히 저 두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테스론에게 내준 아다만드릴 슈트는 절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금단의 기물, 그러니 만약 패할 경우 어떻게든 회수해야 하는 것이다. 필레나야 언제나 테스론 곁에 찰싹 붙어있으니 보험 삼아 내준 것이고.
뭐, 레펜하르트야 저런 제반 사정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직면한 사실만으로도 몇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필레나가 저 깃털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드도 똑같은 걸 가지고 있었지? 그렇다는 건 양쪽이 뭔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린데…….’
턱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는 상념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제이드 놈이나 테스론 쪽이나, 죄다 듣도 보도 못한 아티팩트들을 잘도 들고 나타났단 말이야?’
테스론의 아다만드릴 슈트는 실로 어마어마한 성능의 기물이었다.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 따위는 싸구려로 치부해도 좋을 정도의 규격 외 품, 스테반의 버서커 아머나 필레나의 지팡이 역시 인세에 보기 드문 아티팩트다.
‘그래, 제이드 놈이 쓰던 장갑이나 부츠처럼 말이지…….’
그런데 그는 저 아티팩트 중 어느 것 하나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알고 있던 것은 기껏해야 제이드의 블링크 부츠 정도? 이것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지 세상에 알려져 있던 것은 아니다.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 정도만 되어도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일반인조차 그 존재를 알고 있는데…….
‘저 정도 위력을 지닌 아티팩트들이 이렇게까지 안 알려질 수가 있나?’
예전에 테스론을 만났을 때는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스테반의 버서커 아머 말고는 다들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지 않았었으니까. (유서스의 엘드라드야 원래 갖고 있던 것이고.)
그래서 그냥 알려지지 않은 던전 같은 데서 운 좋게 구했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스테반의 버서커 아머도 이상하게 개조된 데다가 테스론이나 필레나도 새로운 아티팩트들을 들고 나타났다.
자고로 아티팩트란 것은 어마어마하게 귀하기 때문에 아티팩트라 불리는 법. 돈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냥 고급 마도구다. 아무리 신나게 던전을 털어 낸들 저 정도의 기물이 막 쏟아지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음…….”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10서클의 대마법사였던 그조차도 감탄할 만큼 엄청난 성능의 아티팩트들.
그런 엄청난 기물임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테스론 일당이나 제이드는 저런 걸 자꾸 들고 나타난다?
심지어는 출처도 비슷해 보인다?
‘이래서야 어딘가에 아티팩트 쟁여 두고 있다가 펑펑 대 주는 놈들이라도 있는 것 같잖아? 아니, 그런데 이것도 이상한데? 저 정도의 위력을 지닌 기물들을 잔뜩 보유하고 있을 정도면 최소 3대 학회 이상, 그런데 그런 기물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리지도 않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저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필레나 실력도 영 납득이 안 가…….’
사실 레펜하르트의 기억 속에서 필레나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이야 나이 먹고 철들었다지만, 당시의 레펜하르트는 젊은 천재답게 오만하기 그지없어 자신을 친동생처럼 아껴 주는 필레나를 보고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가끔 심심할 때마다 자랑 삼아 자신이 창안한 이론을 가르쳐 주며 잘난 척했었다 정도가 기억의 전부다.
‘으, 다시 생각해 보니 참으로 재수 없는 놈이었구나, 나.’
하여튼, 그 기억 속의 필레나는 분명 대단한 마법사는 아니었다. 나름 재능은 있었지만 결국 마탑을 나온 뒤로는 소식이 끊긴, 그냥 어릴 적의 추억 속 인물일 뿐이었다.
‘그 이후 전혀 이름을 듣지 못한 걸 보면 분명 평범한 마법사로 살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저 나이에 저 정도였다면 절대 무명일 리가 없단 말이지?’
마지막 뇌전 중첩 마법이야 아티팩트를 이용한 것이라지만, 그걸 차치해도 현재 필레나의 솜씨는 레펜하르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하위 마법을 연계해 고위 비행 마법의 효과를 낸다. 말로야 간단하지만 이건 마법의 경지와는 별개로, 굉장히 복잡한 계산을 요구하는 기법이었다.
세 종류의 마력 충돌을 동시에 억제하면서 변화하는 공기 흐름을 세밀하게 계산해 수시로 출력을 변화시킨다. 유체 역학에 기반한 각종 수식들을 전부 순간적으로 처리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저런 곡예비행이 가능한 것이다.
창안한 레펜하르트 본인조차도 지금의 두뇌로는 연산력이 달려 시행하지 못할 정도로 고도의 계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마법적 상황 제어 이론.
“필레나, 쟤 머리가 분명 저렇게까지 좋지는 않았거든?”
이론이야 레펜하르트 본인이 가르쳐 주었으니 당연히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 이론을 5서클에까지 적용시킬 정도로 필레나의 술식 연산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물론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마법 연산력도 어느 정도 오르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결코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노력해서 해결될 문제였다면 왜 현생의 레펜하르트가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구하려 그리 난리를 쳤겠는가?
‘그런데 다시 만난 필레나는 엘류시온의 목소리라도 쓴 양, 연산력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가 있단 말이지.’
그가 아는 한 마법사의 연산력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 아티팩트는 현재 자신이 지니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머릿속이 복잡해 정리가 되질 않았다.
필레나의 일도 그렇고 저 정체불명의 아티팩트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이 시대로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 생겨 버린 것이다.
“테스론이 무슨 짓을 했나? 하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저런 일이 생기는 거지?”
☆ ☆ ☆
이니야는 한참 뒤에야 레펜하르트에게로 돌아왔다.
필레나야 테스론이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있는 마력 없는 마력 다 동원하며 허겁지겁 날아왔지만, 이니야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승리했음이 명백했으니까.
그래서 뒤를 쫓지 않고 일단 그 자리에서 오러를 운용해 상처 회복에 열중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육체가 회복되고 나서야 다시 합류한 것이다.
다가오는 이니야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안부를 물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이니야?”
“예,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돼요.”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그 여자 마법사를 해치우지 못했어요.”
“부상이 심하셨잖습니까? 괜찮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펜하르트는 이니야를 달랬다. 그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