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권왕대전拳王對戰
1
탈주 노예 무리를 이끌고 카다마이트는 계속 제플린 서부로 향했다.
그는 운이 좋게도 다른 이들처럼 중간에 제플린 나이츠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 원래 그쪽을 담당해야 할 제플린 나이츠가 자기 뇌물 주던 상단으로 쪼르르 달려간 덕이었다. 카를의 사전 작업은 공국 최정예라는 제플린 나이츠에게도 통용이 되었던 것이다.
하다툼이나 러스, 말로이드를 가로막은 이들은 그래도 제플린 나이츠 중 비교적 청렴한 이들이라 뇌물 무시하고 주어진 임무에 임했다. 뭐, 정확히는 뇌물은 받았는데 상황이 예사롭지 않아 그냥 무시했다는 쪽이 옳지만.
그러나 모든 제플린 나이츠들이 전부 제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시간 맞춘 것은 한 절반 정도? 그나마 명색이 최정예인지라 반이라도 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차탄 공국 내에서 이 정도면 상당히 깨끗한 부대에 속한다.
하여튼, 그 덕에 카다마이트 쪽은 다른 이들과 달리 별 어려움 없이 작전대로 움직였다. 가로막은 차탄의 기사들 몇몇만 가뿐히 베어 넘기고 계속 달려가니 제 시간에 합류 장소인 제플린 서부 관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문 앞으로 향하니 거리 반대편에서 또 한 무리의 탈주 노예들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선두에 선 두 엘프 여인들을 보며 카다마이트가 손을 흔들었다.
“오! 시리스! 이니야! 무사히 도착했구려!”
이니야가 나는 듯이 도로를 미끄러지며 카다마이트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중간에 몇몇 방해가 있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라오.”
카다마이트의 대꾸에 이니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참 희한한 놈들이었어요. 지원군이 온다고 큰소리쳐서 처음에는 좀 긴장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던데요?”
“이쪽도 마찬가지요. 오러 유저가 나타날 줄 알았다는 듯 말하더니 그냥 별거 없더만.”
고개를 끄덕이며 카다마이트는 이니야의 말에 동조했다. 무사히 이곳까지 오긴 했지만, 그래도 그놈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눈치 보니까 어느 정도 알아채고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러게요. 전 꼼짝없이 함정에 빠진 줄 알았어요.”
이니야와 카다마이트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하는 눈빛을 교차했다.
멀쩡히 자신들의 계획 미리 다 눈치채 놓고도 저렇게 허술하게 대비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카를의 사전 작업에 대해 듣지 못한 그들로서는 그야말로 괴이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어서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그래요!”
카다마이트와 이니야는 사이좋게 제플린 서부 성문으로 달려갔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두 오러 유저의 힘이라면 저 정도 성문을 부수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물론 일국의 수도답게 성문에 온갖 강력한 방어 마법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마법은 어디까지나 전시에 마법사들이 발동을 시켜야 위력을 발휘하는 법. 비활성 상태인 성문은 그저 두꺼운 나무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성문을 바라보며 카다마이트가 애병의 이름을 외쳤다.
“할트론!”
이니야도 품에서 날렵한 검신의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성문을 향해 참격을 뿌렸다.
“하아앗!”
“터업!”
은색과 적갈색, 두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대기를 진동시키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뿜어져 나간다. 강렬한 파괴의 힘을 담은 섬광이 성문을 직격하려는 찰나였다.
퍼엉!
폭음과 함께 싯누런 섬광이 날아와 공격을 가로막았다.
누런 섬광이 회오리가 되어 이니야와 카다마이트의 블레이드 오러를 튕겨 낸다. 오러의 흐름이 빗나가며 궤적이 어긋났다. 두 블레이드 오러가 각자 좌우로 비껴 나가 성벽에 충돌하며 폭발했다.
“응?”
“이건?”
이니야와 카다마이트가 긴장하며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녹아내린 성벽에서 검은 연기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이니야가 인상을 썼다. 조금 전까진 전혀 감지되지 않았던 기운이다.
레이피어를 들어 가슴께로 올리며 이니야가 입맛을 다셨다.
“오러 능력자네요, 기운을 감추고 있었나 보군요…….”
도끼 창을 고쳐 쥐며 카다마이트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쩝,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다.”
연기 사이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놀랍도록 잘생긴 외모의 청년이었다. 손에 든 검에는 싯누런 블레이드 오러가 넘실거리며 맺혀 있다.
청년이 성문 앞을 가로막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도대체 이놈의 나라는…… 작전을 세워 봤자 말을 안 들으면 무슨 소용이야? 덕분에 일이 단단히 꼬여 버렸잖아?”
청년의 얼굴을 보고 시리스가 놀라 중얼거렸다.
“앗, 저자는…….”
갑자기 청년이 고개를 들어 성벽 위로 소리를 질렀다.
“필레나! 저들을 포위해!”
성벽 위에서 낭랑한 대꾸가 돌아왔다.
“알았어, 테스론!”
나직한 주문 영창이 뒤를 이었다. 사방의 마력이 흔들리며 고정된 마나가 뒤틀려 새로운 조합으로 짜 맞춘다.
“하스트 펜 그레이드 판테라, 하늘을 붉게, 땅은 검게, 천지를 차단하는 홍염의 장막을 여노라…….”
마법을 외우며 필레나가 손에 쥔 붉은 지팡이를 땅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입에서 언령이 토해졌다.
“파이어 월!”
불꽃의 장벽이 화르륵 일어나 탈주 노예들의 좌우를 둥글게 포위해 갔다. 열기를 피하며 노예들이 기겁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으, 으악!”
“뜨겁다!”
“피하세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노예들이 이리저리 날뛰어 댔다. 아무리 자유를 추구하며 일어나 봤자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오합지졸인 것이다.
시리스며 안타레스 백국의 이종족 전사들이 허겁지겁 좌중을 진정시키려 소리를 질렀다.
“다들 진정해요! 질서를 잃으면 더욱 피해가 클 뿐입니다!”
“대열을 흩지 마시오!”
“정령술로 열기를 막아요!”
그러는 동안에도 불꽃의 벽은 계속해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거대한 불의 벽이 자꾸 옆으로 넓어지며 거의 천 명에 달하는 탈주 노예 무리를 완전히 감싸 버린다.
물의 정령을 소환해 열기를 차단하며 시리스가 놀라 중얼거렸다.
“맙소사, 뭔 파이어 월이 이렇게 길지?”
원래 파이어 월은 5서클의 화염 결계 마법, 전방에 높이 5미터, 길이 20미터 정도의 화염벽을 설치하는 주문이다.
그런데 지금 시전된 파이어 월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150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길이로 좌우며 후방을 완전히 에워싼 것이다. 이 정도로 광범위한 화염 결계라면 대체 얼마나 방대한 마력이 필요할 것인가?
성벽 위에 서 있는 여마법사, 필레나를 바라보며 시리스는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여자가 이렇게까지 엄청난 마법사였어?’
☆ ☆ ☆
테스론은 차갑게 웃으며 눈앞의 탈주 노예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노예들은 다들 한 곳에 모인 채 공포에 떨고 있었다. 앞에는 제플린의 성벽, 좌우와 뒤는 불꽃의 벽, 도망칠 곳이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성벽 위에서 메시지 마법을 통해 필레나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시키는 대로 저들을 포위했어, 테스론.”
이제는 테스론도 단순한 권사가 아니라 고위 마법사, 같은 메시지 마법을 발동해 답문을 보냈다.
“잘했어, 필레나. 대단하네, 그 다중 복제의 지팡이.”
“응, 정말 굉장한 아티팩트야, 이거.”
필레나가 나이에 비해 뛰어난 마법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런 어마어마한 위력의 마법을 선보일 정도는 아니다. 이 놀라운 위업은 전적으로 그녀가 은의 현자로부터 받은 아티팩트의 힘이었다.
은의 현자 내부에서도 유출이 금지된 고대의 아티팩트, 다중 복제의 지팡이.
이 기물은 시전자의 마법을 최대 일곱 배까지 복제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은 술식을 통해 마나를 재배열하여 현실을 뒤틀어 위력을 보이는 것, 그렇다 보니 설사 외부에서 방대한 마력이 주어진다 해도 마법 자체만으로는 원래 술식 이상의 힘은 낼 수가 없다. 마력량이 세 배 차이가 나는 마법사라고 같은 파이어 볼이 세 배의 위력이 나오는 것은 아니란 의미다. 상대가 한 방 쏘고 지칠 때 세 방까지 쏠 수는 있을지언정.
하지만 다중 복제의 지팡이를 이용하면, 한 가지 마법을 ‘동시에’ 일곱 번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필레나가 차탄 왕궁 전역을 뒤덮는 어마어마한 마력의 안개를 생성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정확히는 필레나의 파이어 월을 저 지팡이가 그대로 복제해 일곱 번 시전할 뿐이지만.’
물론 이런 엄청난 권능답게 그에 걸맞은 페널티도 있다.
“두 번 썼으니 이제 남은 횟수는 세 번인가, 필레나?”
테스론의 확인에 필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고 나면 지팡이가 자체적으로 마력 차징을 끝낼 때까진 못 써.”
“세 번이라, 그 정도면 이번 전투에서 쓰기엔 충분하겠군.”
문득 필레나가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그나저나 대체 다른 병사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원래대로라면 이미 저 노예들을 포위하고 있어야 하지 않아?”
테스론이 혀를 찼다.
“원래대로라면 그렇지.”
은의 수호자, 세렐라인으로부터 각종 아티팩트를 얻은 테스론 일행은 그 이후 바로 안타레스 백국의 동태를 염탐했다. 사실은 세렐라인이 예의 그 ‘알 수 없는 정보 수집 능력’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테스론 일행은 그저 얻어 들었을 뿐이지만, 하여튼 테스론 일행은 레펜하르트가 차탄 공국, 그것도 제플린의 노예 무리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레펜하르트 쪽도 최대한 기밀을 유지하는 사항이었으니 자세한 계획까지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큰 규모로 일을 일으키려면 아무래도 움직임이 새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략적인 날짜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미리 제플린에 도착해 대비를 해 두었다.
주둔군 전체에 비상경계를 내릴 수는 없다. 낌새가 이상할 경우 레펜하르트 측이 눈치채고 거사를 중단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래서 모든 대비는 평시 상태를 유지하되, 일이 터질 경우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노예 선동에 대한 것은 극히 일부의 지휘관들에게만 알려 놓고 나머지는 명령 체계를 정비해 난이 터질 경우 정해진 장소로 군대를 움직이는 데 중점을 뒀다.
미리 알고 대비해 계획을 짰으니 원래대로라면 제플린 전역에서 군대가 모든 탈주 노예들을 체포해야 정상일 터, 그런데 정작 일이 터지니 제플린의 병력이 그들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 빌어먹을 차탄 군대, 미리 시켜 놓은 짓도 제대로 못 한단 말이야?”
테스론은 이를 갈았다. 대륙에서 군기 빠진 병사들을 조롱할 때 ‘이런 차탄 나라 군대 같은 놈들!’이란 관용구가 있는데,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실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모든 병사들이 이렇게 엉망으로 움직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나마 밑에 놈들만 엉망이면 모르겠는데…….
‘어떻게 기사란 놈들조차 죄다 늦장을 부리는 거야? 수뇌부라는 제플린 나이츠도 제대로 움직이는 건 반밖에 안 되고.’
심지어는 명색이 궁정 마법사라는 하질 공조차도 감감무소식이다. 이제는 단순한 권사가 아니라 고위 마법사이기도 한 테스론이기에 잘 알 수 있었다.
대마법사인 하질 공이 마법을 구사한다면 제플린 어디에 있건 그 여파가 느껴지지 않을 리 없을 터, 그런데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 봐도 마법이 감지되지 않는다.
필레나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하지만 테스론,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최고 기사나 궁정 마법사 정도 되는 사람들까지 그냥 게을러서 늦장 부린다고는 볼 수 없지 않아? 혹시 저쪽에서 무슨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대체 뭔 수작을 부려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데?”
“하긴, 그것도 그러네.”
결국 필레나도 그냥, 현 상황을 차탄 공국의 높은 발효도 탓으로 돌렸다. 카를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그 정도가 이들이 유추할 수 있는 한계였다.
“뭐,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놈들은 포기해야지.”
한숨을 쉬던 테스론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어차피 진짜 중요한 건 마왕 한 놈뿐이다. 저 엘프 암컷만 잡아 놓아도 미끼로는 충분해!”
차갑게 빛나는 테스론의 검은 눈동자가 저 멀리, 열심히 정령술로 열기를 막고 있는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에게로 향했다.
☆ ☆ ☆
사아아…….
새하얀 냉기가 사방으로 퍼진다. 이니야는 계속 레이피어를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오러 스킬, 북해의 숨결이 필레나가 발동시킨 파이어 월을 가로막고 불길을 살라먹기 시작했다.
조금씩 열기가 낮아지며 탈주 노예들이 한층 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악, 하악…….”
“이젠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살 거 같다. 안 뜨겁다.”
하지만 이니야는 별로 편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오, 그냥 제자리에 가만히 좀 있으란 말이야! 그럼 어련히 지켜 줄 것을.’
냉기의 안개를 조율하는 데 있어 그녀는 이미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마음먹은 대로 범위 내의 모든 사물을 원하는 것만 얼리고, 필요 없는 부분에는 전혀 냉기가 닿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지켜야 할 ‘사물’이 자꾸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기껏 냉기의 안개로 불길을 잡으려고 하면 자꾸 중간에 노예들이 웅성대며 끼어들어 제어를 방해한다. 그때마다 다시 오러 입자를 재조정해서 움직여야 하니 아무리 이니야라도 집중력이 크게 소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니야뿐 아니라 시리스며 다른 이종족 전사들도 열심히 움직인 덕에 파이어 월의 열기는 상당히 감소했다. 달구어진 땅에서 계속 열기가 올라오고 있어 포위된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탈주 노예들이 열기로 인해 피해를 입을 일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니야는 적당히 열기가 수그러지자 바로 오러를 거두고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곳을 벗어나려면 성문 쪽으로 향해야 한다. 딱히 저 필레나라는 여마법사가 포위망을 구축하지 않았다 해도, 지금 그들은 뒤로 물러설 상황인 아닌 것이다.
‘이 정도면 뭐, 대충 급한 불은 껐으니까.’
관용구가 이토록 현실과 밀접하게 적용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이니야와 카다마이트는 차분한 눈으로 성문 앞을 가로막은 인간 청년, 테스론을 바라보았다. 둘은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성문을 부수려면 저자부터 해치워야 한다.
“허업!”
카다마이트가 먼저 몸을 날렸다. 도끼 창을 높이 치켜드니 블레이드 오러가 도끼날에 맺히며 거대한 빛의 형상으로 화했다.
“흐읍!”
이니야도 자세를 낮추며 미끄러지듯 돌격했다. 레이피어가 은색의 블레이드 오러를 휘감고 창처럼 길게 뻗어 갔다.
테스론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어깨를 회전시키고 팔꿈치를 회전시키며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전신의 오러를 한 점에 집중한다. 싯누런 오러가 회오리치며 드릴처럼 요란한 굉음을 울린다.
“스파이럴 블레이드!”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에서 격돌했다. 폭발과 함께 형형색색의 오러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갔다. 파동으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고 성벽에 금이 가며 파괴의 여파를 날린다.
문제는 그 파괴의 범위 속에 탈주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시리스가 허겁지겁 양손을 교차하며 외쳤다.
“나와 줘요! 나의 맹우! 테라투스!”
광장의 벽돌을 파헤치며 신장 3미터의 거대한 돌 거인이 나타나 파문 앞을 가로막았다. 세 오러 유저의 힘이 집중되었으니 단순한 충돌의 여파조차도 그 파괴력이 장난이 아니다. 파문을 가로막은 테라투스가 전신이 쩍쩍 갈라지며 이내 소환이 해제되어 무너져 내렸다.
시리스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둘 다 좀 조심해서 싸워요! 기껏 구해 내고 자기 손으로 죽일 셈이에요?”
허공에서 격돌한 이니야와 카다마이트, 테스론이 동시에 다시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착지해 자세를 가다듬으며 카다마이트가 쓴웃음을 흘렸다.
“아, 그거 미안하군. 미처 생각을 못 했어.”
이니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뭔가 위화감을 느낀 채 계속 테스론을 바라볼 뿐이었다.
‘강해, 하지만 감당치 못할 정도로 강하진 않아.’
일격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오러 유저끼리는 대충 상대의 강함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니야가 파악한 테스론의 경지는 대단하긴 하지만 그녀와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상대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경지라 하겠지만, 어차피 안타레스 백국에는 20대 오러 유저가 둘이나 있는지라 별로 신기할 일도 아니다.
그래서 이니야는 당혹스러웠다.
‘저 정도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쉽게 해치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싸우면 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그녀 곁에는 드워프 오러 유저 카다마이트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높게 쳐줘도 저 테스론이란 청년은 두 오러 유저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눈빛이 전혀 초조해하는 기색이 아니다. 여전히 자신들을 깔보고 무시하는 눈빛!
그때였다. 테스론이 갑자기 손에 든 검을 버렸다.
“생각보다 실력이 제법이군. 하찮은 노예 종족 주제에…….”
열세인 주제에 무기마저 버리다니? 카다마이트가 눈을 껌뻑거렸다.
“뭐지? 항복하는 건가?”
이니야가 피식 웃었다.
“저렇게 오만하게 항복하는 사람은 내 평생 본 적이 없는데요.”
테스론이 허공에 손짓을 했다.
“필레나!”
“응! 테스론!”
성벽 위에서 대꾸와 함께 네모난 상자 하나가 뚝 떨어진다. 떨어지자마자 상자가 열리며 찬란한 빛이 흘러나왔다. 무슨 수작인지 몰라 이니야와 카다마이트가 긴장하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테스론이 뚜벅뚜벅 상자를 향해 걸어갔다. 걸음을 옮기며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어차피 이 저질 몸뚱이만으로 네놈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하지 않도록 하지.”
상자에서 솟아 나오는 찬란한 빛, 그 속으로 테스론은 한 발을 내디뎠다. 그의 전신이 빛 속에 휘감긴다. 그 상태로 테스론이 외쳤다.
“장착! 아다만드릴 슈트!”
기이한 기계음과 함께 상자 속에서 산산이 분해된 강철 거인의 잔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순간 시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작은 상자 안에 어떻게 저런 거대한 물건이?
‘무한의 주머니 같은 건가? 저렇게까지 공간 압축 비율이 높은 무한의 주머니가 있었어?’
떠오른 각 파츠를 향해 테스론이 팔다리를 내밀었다.
위이이잉!
나사 돌아가는 소리를 동반하며 강철 거인의 각 부위가 테스론의 전신을 착착 뒤덮는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더 이상 인간 청년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신장이 카다마이트의 두 배가 넘는 거구의 강철 거인이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번들거리는 금속 주먹을 들어 올리며 그가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주제를 알게 해 주마, 타락한 마왕의 종들아.”
☆ ☆ ☆
테스론은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그때마다 육중한 쇳소리가 바닥을 통해 들려온다. 카다마이트가 도끼를 겨누며 중얼거렸다.
“해괴한 갑옷일세, 저런 걸 입고 어떻게 움직이겠다는 거야?”
아무리 큰 게 좋다지만 저 갑옷은 너무 크다. 아니, 원래의 팔다리보다도 갑옷의 팔다리가 훨씬 길면 어쩌라는 건가? 저래서야 손이 건틀렛 안에 들어가지도 않겠다.
어쨌거나 저대로 놔둘 수는 없다. 이니야가 먼저 선공을 날렸다.
“합!”
짧은 기합을 터트리며 이니야의 신형이 섬광처럼 거리를 가로질렀다. 은빛 궤적이 되어 그녀가 레이피어와 혼연일체가 된 채 단숨에 강철 거인, 테스론의 코앞까지 다다른다. 몸을 날리며 이니야는 문득 의아해했다.
‘방어를 안 해?’
블레이드 오러가 코앞까지 닥치는데도 상대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인 것이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이니야는 더더욱 오러를 끌어 올렸다. 한 자루 오러의 창이 테스론의 금속 가슴을 직격하는 순간이었다.
“스파이럴 가드!”
우렁찬 외침과 함께 테스론의 전신에서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이니야의 공격을 튕겨 내 버렸다.
“윽!”
신음을 토하며 이니야가 뒤로 날려 간다. 시리스가 눈을 번쩍 떴다.
“어? 저거?”
경악한 것은 시리스뿐이 아니었다. 카다마이트도, 다른 안타레스 백국의 전사들도 모두 같은 표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저 강철 거인이 구사한 기술은 그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 아닌가?
“레펜하르트 님의 기술이잖아?”
경악한 와중에도 카다마이트가 바로 공격에 나섰다.
“큭! 가라, 할트론!”
전신의 탄력을 실어 오러와 합일시키며 도끼 창, 할트론을 던진다. 오러가 맺힌 배틀 액스가 굉음을 울리며 테스론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흥!”
코웃음을 치며 테스론이 주먹을 내뻗었다.
“기격탄!”
눈부신 오러의 탄환이 공중에서 배틀 액스를 요격했다. 대기가 진동하며 배틀 액스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손을 뻗어 무기를 회수하며 카다마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색채는 살짝 달랐지만 틀림없는 레펜하르트의 기술, 기격탄이었다.
도끼를 재차 쥐며 카다마이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구원자랑 동기 동창인가?”
두 오러 유저의 공격을 간단히 튕겨 낸 테스론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보여 주마, 진정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힘을!”
테스론이 땅을 박찼다. 육중한 거구에도 불구,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카다마이트를 향해 날아든다.
카다마이트도 몸을 날리며 맞섰다. 배틀 액스가 횡으로 휘둘러져 테스론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타앙!
요란한 금속음이 울렸다. 카다마이트는 인상을 썼다. 손맛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타점이 빗나갔다. 상대가 공격이 적중하는 바로 그 순간, 절묘한 타이밍으로 몸을 비틀어 타격을 감소시킨 것이다.
말로야 쉽지만, 그 타이밍을 잡는 것은 오러 유저에게도 힘든 일이다. 더구나 공격자 역시 오러 유저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 짓이 가능하다니?”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카다마이트의 귀에 이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펜하르트 님의 방어 수법이랑 완전히 똑같군요.”
“진짜 동기 동창인가 본데?”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한 세대에 한 명뿐이라 하지 않았나요? 혹시 저자가 그 스승이란 양반?”
“그건 아닌 것 같소. 그 영감은 맨몸으로 저만하다던데.”
두 사람은 다시 몸을 날렸다. 저 정체불명의 청년이 레펜하르트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현재 그들의 적임은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 맞설 뿐!
“동토의 칼날!”
냉기의 오러를 최대한 응축한 채 이니야가 테스론의 좌측을 노리고 들어갔다. 카다마이트도 정면으로 도끼를 내리친다. 두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현란한 빛무리가 되어 폭풍처럼 불어닥쳤다.
하지만 테스론은 태연하게 가슴을 활짝 펼 뿐이었다.
“스파이럴 가드!”
탕! 타탕!
반발력으로 밀려나며 이니야와 카다마이트는 치를 떨었다. 온갖 페인트와 전력을 다한 연격이 저 오러의 소용돌이에 가로막혀 죄다 튕겨져 버리는 것이다.
“크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군!”
광소를 터트리며 테스론은 연달아 주먹을 내뻗었다. 공성추를 연상케 하는 가공할 권격이 카다마이트를 도끼째로 후려갈겼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카다마이트가 뒤로 주욱 밀려난다. 얼마나 강렬한 일격이었는지, 도끼를 통해 전해진 충격파가 양팔을 마비시켜 움직여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카다마이트는 경악의 눈빛을 테스론에게 보냈다. 오러 유저인 자신이 직격타도 아니고 간접적으로 타격을 입었는데도 이 정도 충격을 받은 것이다.
‘대체 저 괴물은 뭐냐?’
그 틈에 테스론이 이번엔 이니야에게 공세를 가했다. 2.4미터의 강철 거인이 가냘픈 체구의 여인을 향해 펀치와 킥을 소나기처럼 퍼부어 댔다.
정신없이 공격을 피하며 이니야가 인상을 구겼다.
‘아까랑은 위력이 완전히 달라…….’
테스론의 오러양 자체는 아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힘으로 휘두르더라도 솜방망이와 망치의 위력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주먹 자체의 강도도 올라갔을 뿐 아니라, 육체 자체의 강도가 높아진 덕에 부하가 걸려 그동안 사용치 못했던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술을 100퍼센트 구사하니 파워도 스피드도 맨몸이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타아아앗!”
기합을 길게 늘어트리며 테스론은 계속 펀치와 킥을 퍼부었다. 감히 맞받아칠 엄두가 나지 않아 이니야는 계속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블레이드 오러를 유연하게 운용해 모든 공격을 비껴 내는 묘기를 보이고 있었다. 날아오는 펀치의 옆면을 오러로 툭툭 건드려 펀치며 킥의 궤도를 빗나가게 하는 것이다.
수법 자체야 그리 신기할 것이 없지만 그 타이밍과 정밀함이 실로 놀랍다. 테스론이나 다른 오러 유저들처럼 살짝 타점을 흘려 공세를 줄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든 힘을 옆으로 비껴 나가게 할 정도라니? 게다가 평범한 상대도 아니고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술을 제대로 구사하는 지금의 테스론을 상대로 저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신기라 부를 만한 기술이었다. 저 정도로 정밀한 검술이라면 아마, 날아오는 발리스타도 툭 건드려서 비껴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지, 이 엘프 계집은? 단순히 검술만 보면 거의 왕년의 사이러스 수준인데?’
이종족을 무시하는 테스론조차도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고작 엘프 주제에 놀라운 기술이군…….”
이니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흥! 이상한 갑옷 입고 설치는 주제에 고작 엘프란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입을 열고 있는데도 공격을 흘리는 손 속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녀가 확실히 카다마이트보다 윗줄의 경지에 든 오러 유저란 증거였다. 계속 주먹을 내지르며 테스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쳇, 이거 쉽게는 안 되겠는데?’
이 엘프 여인의 기량을 보니 앞으로 한참을 더 주먹을 휘둘러 봐야 치명타를 먹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테스론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겐 오러 말고도 또 다른 무기가 있었으니까.
문득 테스론의 입에서 작은 영창이 흘러나왔다.
“사지를 얽매는 빛의 족쇄, 홀드!”
순간 이니야의 주위에 빛의 고리가 생겨나 그녀를 옭아맸다. 갑자기 움직임이 봉쇄되자 이니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러 유저의 대결에서 마법을 쓰는 경우는 절대 없는지라, 심적으로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윽?”
물론 홀드는 그리 고위 서클의 마법이 아닌지라 오러 방어를 시도하는 것만으로 금방 풀려 버렸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아주 잠깐,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테스론에겐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파앗!
결국 이니야의 어깨로 테스론의 돌려차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통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스쳤을 뿐인데 지독한 통증과 함께 자세가 흩어져 버렸다. 그 허점을 테스론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먹어라! 건방진 엘프 계집!”
외침과 함께 섬광 같은 레프트 훅이 반원을 그리며 이니야의 복부를 강타했다. 다급한 가운데서도 그녀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타격을 흘렸다. 하지만…….
“커어…….”
그녀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힘을 상당수 흘렸는데도 몸통이 통째로 도려내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하긴, 힘의 대부분을 흘렸으니까 그냥 ‘듯한 충격’으로 끝났지, 아니면 정말로 몸통이 도려내졌을지도 모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이니야를 향해 연격이 이어졌다. 레프트 훅의 반동을 이용한 강렬한 어퍼컷이 그녀의 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이니야의 두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아, 안 돼!’
말이 좋아 어퍼컷이지, 현재 테스론의 주먹은 그녀의 머리통보다도 더 크다. 저런 걸 정통으로 맞을 경우 머리가 통째로 뽑힌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설사 운 좋게 버틴다 해도 이빨 수 개쯤은 박살 날 것이 뻔한 것이다.
아무리 미녀라도 합죽이가 되어 버리면 더 이상 미녀라 할 수 없을 터.
‘아직 레펜님 다 꾀지도 못했단 말이야!’
실력이라기보다는 얼굴에 대한 여인의 무한한 집착 덕분에, 이니야는 간신히 어퍼컷과 턱 사이에 왼팔을 끼워 넣었다. 동시에 테스론의 주먹이 그녀를 가차 없이 후려갈겼다.
터엉!
육중한 금속성과 함께 이니야는 피를 흘리며 저만치 날려 가 버렸다. 그녀를 보며 카다마이트가 격정 어린 외침을 터트렸다.
“이니야!”
쓰러진 이니야가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잡아 바닥에 착지했다. 볼품없이 나가떨어지진 않았지만 한쪽 팔이 축 늘어져 있었다. 운 좋게 턱은 보호했지만 그 대가로 왼팔이 부러진 것이다.
테스론이 정말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맙소사, 그 상황에서도 타격을 흘렸어?”
솔직히 테스론 자신도 저런 상황이었다면 아무 대책 없이 모든 공격을 허용했을 것 같았다. 뭐, 짐 언브레이커블의 특성상 허용한다 해도 큰 피해는 없겠지만.
하여튼 대단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새삼 테스론이 감탄의 눈으로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그때 카다마이트의 외침이 그의 시선을 돌렸다.
“이 잔인한 놈!”
분노하며 카다마이트는 테스론을 향해 미친 듯이 돌격해갔다.
모든 힘을 한 점에 모아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도끼날 형태의 적갈색 오러가 테스론의 강철 육체를 연달아 두들겨 댔다.
타타타탕!
하지만 테스론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찮은 도끼질을 무시하는 천년 거목처럼, 모든 공격을 태연하게 스파이럴 가드로 받아 낼 뿐이다.
“크윽!”
이를 악물며 카다마이트는 도끼를 옆구리 뒤로 길게 뺐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저 무식한 방어를 꿰뚫을 보다 큰 파괴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저놈은 공격을 피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
짐 언브레이커블에 회피는 없다더니, 과연 테스론은 모든 공격을 갑옷 자체로 받아 내거나 스파이럴 가드로 튕길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방법이 있다. 카다마이트가 눈을 반짝였다.
화아악!
카다마이트의 발밑으로부터 오러의 기류가 휘감아 올랐다.
육체를 방어하는 최소한의 오러마저도 모두 한 점에 실으며, 동시에 대지 공명의 힘을 끌어 올린다. 그리고 전신의 탄력을 실어 도끼를 찍는다.
이미 더 이상 기술도 아니다. 그저 나무를 베는 나뭇꾼의 도끼질처럼, 몇 배로 증폭된 힘을 가장 단순한 동작으로 휘두른다!
“타아앗!”
150년 넘게 무술을 매진해 온 드워프 전사의 모든 힘이 한 점에 집중되어 테스론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이제껏 모든 공격을 몸으로 때우던 테스론이 갑자기 몸을 크게 틀며 공격을 피했다. 카다마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설마 하필 이 타이밍에서 피해 버릴 줄이야!
아다만드릴 슈트의 투구 사이로 짧은 조소가 흘러나왔다.
“이럴 줄 알았다. 우리 무문을 상대하는 놈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분명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법에 회피가 없다는 말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다. 그리고 역대 권왕들 모두, 거의 대부분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때우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회피 없이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며 돌진하는 역대 권왕들을 상대로 오러 유저들은 대부분 같은 판단을 내려 버린다.
-어차피 피하지도 않을 것, 방어 따위 신경 끄고 모든 힘을 파괴력에 싣는다!
그것이 바로 짐 언브레이커블이 깔아 놓은 함정인 것이다.
평소 영혼에 각인되도록 익힌 기술을 버리고 단순 무식한 일격을 노리니 당연히 공격도 단순하고 사방에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바로 그 틈을 노린다. 굳이 자주 피할 필요도 없다. 딱 한 번이면 족하다.
절대 상대가 피할 거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마음의 틈새를 노리기만 하면 충분하다!
“데스 카운터!”
서로의 몸이 교차하며 테스론의 주먹이 카다마이트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육중한 굉음과 함께 테스론의 주먹이 카다마이트의 가슴 깊숙이 처박혔다.
“……!”
젊은 드워프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눈과 코, 입과 귀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오로지 파괴력만을 바라고 아무런 대비조차 하지 않은 일격이다. 그 돌진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 그것이 몇 배의 파괴력이 되어 돌아왔으니 아무리 오러 유저인들 감당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끄르르…….”
피거품을 토하며 카다마이트의 눈동자가 점점 빛을 잃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서 생기가 사라져 갔다.
이니야가 경악해 소리쳤다.
“카, 카다마이트!”
2
금속 거인이 가볍게 손을 털었다. 카다마이트의 시체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군다. 시리스는 시선을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카다마이트는 죽었다.
탈주 노예 무리들 사이에서 경악과 공포의 감정이 흘러나왔다. 노예뿐 아니라 안타레스 백국의 이종족 전사들 역시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맙소사…….”
“이럴 수가…….”
“카다마이트 님이…….”
그랜드 포지 최강의 전사, 카다마이트.
오러 유저이며 테츠발트 경을 베어 그 무위를 이미 증명한 그는 명실공이 드워프 최강의 전사라 할 법했다. 그런 그가 너무도 맥없이 죽어 버린 것이다.
카다마이트를 내팽개친 후 테스론은 얼굴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모여 있는 탈주 노예 무리로 향한다. 안타레스 백국의 전사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무기를 쥐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테스론은 그들 따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이는 단 한 명뿐.
육중한 거체를 이끌며 테스론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계획이 상당히 어긋나긴 했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계획은 이미 실패했다. 빌어먹을 차탄 군대의 훌륭한 군기 덕에 안타레스 백국을 뿌리 뽑을 기회는 날아가 버렸다. 아마도 다른 곳으로 향한 이종족들은 다들 별문제 없이 제플린을 탈출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마왕 레펜하르트! 그자만 해치운다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된다. 구심점이 없는 무리 따윈 조금만 건드려도 바로 흩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갈색 피부의 백금발 엘프 소녀, 시리스를 보며 테스론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마왕을 낚을 미끼를 준비해 볼까.”
자신을 향한 테스론의 시선에 시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차갑고 무심한 눈빛, 마치 뱀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싸늘한 냉기가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공포가 가슴을 치고 올라와 목구멍 밖으로 치고 나올 것 같았다.
도망칠 곳도, 도망칠 수도 없다.
시리스는 침을 삼키며 쌍검을 뽑아 들었다. 제이드에 의해 박살 난 것들 대신 그랜드 포지에서 새로 맞춰 준 시미터였다.
검을 들어 자세를 취하며 문득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칼 맞춘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분질러 먹게 생겼네. 그랜드 포지에서 엄청 잔소리 하겠다…… 아니, 그때쯤이면 잔소리 들을 내가 세상에 없으려나?”
공포 속에서도 애써 호승심을 일으키며 전투 자세를 취하는 시리스의 모습에 테스론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저 마녀와 맞붙는 것도 오랜만이군. 마왕의 애첩, 광기의 발렌시아.’
레펜하르트의 사천왕과 테스론을 비롯한 일명 ‘용사 일행’은 수차례나 서로 맞붙은 바가 있었다. 비록 오러 유저는 아니었지만 기이한 정령술로 오러 유저 이상의 위력을 보이며 8서클의 마법까지 구사하는 당시의 시리스는 권왕 테스론에게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저 엘프 마녀가 광기를 흩뿌릴 때마다 얼마나 많은 인간 병사들이 대지에 피를 뿌리며 죽어 가야 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모든 면에서 병아리일 뿐.”
테스론이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싸늘하게 말을 걸었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순순히 무릎 꿇으면 그 비천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 터.”
“웃기지 마, 이 고철남!”
야멸차게 대꾸하며 시리스는 전신으로 정령력을 돌렸다. 각종 정령들을 운용해 신체 능력을 포괄적으로 상승시키며 그녀가 두 자루 시미터를 허공에 교차시켰다.
“나와 줘요, 이그나시스! 우다르 묠니르!”
전기와 불의 거인이 시리스의 좌우에서 나타나며 두 팔을 휘둘러 댔다. 푸른 뇌전과 붉은 화염을 토하며 두 정령 거인이 금속 거인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 간다. 스치는 대지마다 전격이 방전하고 화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 여파만 봐도 지금 시리스의 정령술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다다랐는지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단순히 정령술의 경지로만 치면 렐하드나 이니야도 시리스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테스론은 오히려 실망하는 눈빛이었다.
“고작 이거냐? 내 기억 속의 정령 거인들은 훨씬 더 가공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우다르 묠니르가 우레 망치를 던졌다. 이그나시스가 두 팔을 뻗으며 화염 폭풍을 쏘아 냈다. 번개와 화염이 테스론의 전신을 뒤덮으며 밤하늘을 밝혔다.
하지만 테스론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저 가공할 공격 속에서도 그가 걸친 아다만드릴 슈트에는 조금의 흠집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흡!”
공격을 태연히 받아 낸 테스론이 전신의 탄력을 실어 두 팔을 뻗었다. 반질거리는 금속팔의 표면으로 뇌기와 화기가 반사되어 번뜩였다. 그대로 테스론은 이그나시스와 우다르 묠니르을 향해 양 주먹을 꽂아 넣었다.
“제로 임팩트!”
짐 언브레이커블의 초근접 타격기, 제로 임팩트가 두 정령 거인의 가슴에 작열했다. 충격파가 뇌격과 불꽃을 꿰뚫으며 두 개의 파문을 낳았다. 불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수십 줄기의 전격이 방전한다.
시리스가 경악해 입을 벌렸다.
‘마, 말도 안 돼! 저렇게 쉽게?’
이그나시스와 우다르 묠니르는 그녀가 구사할 수 있는 최강의 정령들, 비록 먹힐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타격은 줄 줄 알았는데!
화염과 번개의 폭풍을 뚫고 나오며 테스론이 시리스에게로 돌진했다. 거대한 금속 거인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달려온다. 주먹을 쥔 채 테스론이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산 채로 잡아야 하니 적당히 힘 조절을 해야겠지?”
“이익!”
신경질적인 기합을 터트리며 시리스도 마주 몸을 날렸다. 테스론이 거리를 격한 채 주먹을 빠르게 내질렀다.
“기격파!”
파아아앙!
황금빛 충격파가 시리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충격파가 시리스를 통째로 휘감으며 전신의 정령력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옷가지가 찢어지고 두 자루 시미터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가냘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 ☆ ☆
시리스의 가녀린 몸이 비참하게 날려 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입가에도 붉은 피가 맺혀 있고 전신이 찢겨 여기저기 피부가 터진 것이 보였다. 그래도 가슴께가 희미하게 들락날락하는 걸 보니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테스론은 태연하게 쓰러진 시리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숨통을 끊으려는 걸까? 아니, 저 자의 기량을 생각하면 아직까지 시리스가 살아 있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일부러 힘 조절을 한 듯하다.
‘인질로 잡을 생각인가? 어쨌거나 저대로 둘 수는 없지…….’
이니야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전신의 통증이 뇌를 태워 혼절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애써 이를 악물었다.
“크윽…….”
지금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다. 단순한 육체의 부상뿐이 아니었다. 체내 오러 흐름이 심각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솔직히 스스로 생각해도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다.
남은 한 팔로 이니야는 힘겹게 레이피어를 들어 올렸다. 테스론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호오? 아직도 움직일 힘이 남아 있었던가?”
이니야가 애써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대꾸했다.
“아아, 생각보다 주먹이 물렁하던데? 고철남?”
무릎을 살짝 굽히며 전신의 체중을 분배한다. 한 팔을 축 늘어트린 채 이니야가 전투태세를 취했다. 테스론이 흥미로워하며 말했다.
“그 몸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상대의 기량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하수로는 보이지 않는데?”
이니야가 발끈했다.
“방심하지 않았으면 나도 이렇게 밀리진 않았어! 오러 유저 주제에 치사하게 마법을 쓰다니!”
“하지만 방심했고, 치명타를 허용했지.”
“흥, 전사는 검을 쥐고 있는 이상 패배한 게 아니야. 그것도 모르나, 고철남?”
음, 시리스가 붙인 별명인데 이거 은근 마음에 든다. 어차피 죽을 거, 맘껏 갖다 써야지.
검은 든 채 이니야는 천천히 쓰러진 시리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의외로 테스론은 그런 이니야를 제지하지 않았다. 역시 무인답게, 비록 엘프라지만 경지에 다다른 검사인 그녀를 어느 정도 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테스론이 입을 열었다
“얌전히 항복하면 죽이진 않겠다, 엘프 계집. 아무리 엘프라지만 그대의 기량은 꽤 아깝거든. 날 주인으로 섬긴다면 아껴 주마.”
빙그레 웃으며 이니야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나? 고마우신 말씀. 하지만 얼굴이 재수 없어서 기각이야.”
“……엥?”
테스론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육체로 전생하고 그가 가진 불만을 모두 적으면 족히 책자 서너 권은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런 테스론조차도 이 얼굴만큼은 불만이 없었던 것이다. 여자가 부대 단위로 줄줄 따라오는 놀라운 미모! 전생 때 증오를 불태우던 그의 동료들도 ‘그놈의 마왕, 생긴 거 하난 참 미끈하게 잘생겼다.’며 인정할 정도였으니까.
이니야의 취향을 알 길 없으니, 테스론 입장에선 그저 이해 못 할 소리일 뿐이었다.
‘얼굴도 계집애 같고 몸도 부실한 게 어디서 추파를 던져?’
뭐, 지금의 테스론이라면 사실 단련될 대로 단련된 남자다운 육체를 지니고 있으니 부실하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겠다. 하지만 이미 현재의 레펜하르트를 남자의 기준으로 삼아 버린 이니야에겐 똑같은 멸치였던 것이다. 그냥 좀 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멸치 정도?
어쨌거나,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니야는 계속 움직여 테스론과 쓰러진 시리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시리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니야 씨?”
저런 중상을 입고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건가? 왠지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감동한 듯한 이 작은 엘프 소녀를 힐끔 보며 이니야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에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딱히 너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라고.’
솔직히 말해서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는 아이였다. 레펜하르트와 분위기 좀 잡으려고 하면 칼같이 나타나 초를 쳐 대니 내심 짜증도 꽤 냈었다.
‘하지만 저 아이를 잃으면 레펜하르트 님은 슬퍼하시겠지…….’
문득 이니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런데…… 레펜하르트 님은 내가 죽어도 슬퍼하시려나?’
어째 생각해 보니 아쉬워하기야 하겠지만 딱히 슬퍼할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소중한 동료가 죽었으니 눈물 정도야 흘려 주겠지. 그래, 딱 저기 죽은 카다마이트를 위해 흘려 줄 눈물 정도?
‘어? 떠올리고 나니 뭔가 되게 서럽다?’
하지만 이니야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아직 뭘 제대로 시작해 본 것도 아닌데.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그녀는 아직 흔한 동료 중 하나일 뿐일 테니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겠지.
‘이왕 죽을 거면 진도나 좀 뽑고 죽었음 싶었는데, 쳇.’
“후우우…….”
이니야는 낮게 심호흡을 했다. 그것만으로 흔들리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어깨 위로 한기 섞인 투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그녀는 평생 검에 매진한 무인, 이 정도로 평상심이 흔들릴 만큼 경지가 얕지 않다.
“상대가 되지 않을 줄은 알지만…….”
검을 겨누며 이니야가 차갑게 소리쳤다.
“그래도 팔 하나 정도는 가져가야겠어!”
레이피어를 수평으로 든 채 이니야가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테스론의 안색이 변했다. 단순한 찌르기로 보였지만 그 속에 깃든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과연, 그녀의 주위로 냉기가 응집되며 은빛 오러가 피어오른다. 피어오른 오러가 레이피어를 뒤덮으며 거대한 얼음 창의 형상으로 화했다. 날카로운 창날의 끝에 냉기를 띤 입자가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으음…….”
감히 방심할 수가 없어 테스론도 자세를 잡았다.
안개가 점점 더 창끝으로 모여들었다. 검극에 맺힌 기운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냉기의 입자가 모여들며 서로 뒤엉켜 융합과 분리를 계속하며 빛을 발했다.
얼음창 끝에 맺히며 거대해지는 저 빛의 구체, 그 속에 담긴 가공할 파괴력을 읽어 내며 테스론은 혀를 내둘렀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명색이 권왕이라고까지 불렸던 테스론인 만큼, 상대의 기술이 어떤 식으로 운용되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융합과 분리 속에서 서로의 미세 오러 입자가 충돌을 반복하며 수십, 수백, 수천의 오러 파동을 낳는다. 그 파동의 파괴력이 밖으로 흐르지 않고 계속 안으로 뭉치며 더더욱 거대한 힘으로 화한다.
정교함과 세밀함이 극에 달해, 가공할 파괴력을 낳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읽어 낼 수는 있어도, 감히 따라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어마어마한 오러 제어력이다.
이것이 눈의 여왕이라 칭송받으며 엘프 중 최강의 전사로 군림하던 그녀의 궁극기.
“앱솔루트 스피어…….”
차가운 뇌까림을 흘리는 이니야를 보며 테스론은 주먹을 허리 뒤로 뽑았다.
카다마이트 때와는 달랐다. 저건 감히 데스 카운터를 노릴 만한 기술이 아니었다. 상대에 맞게 그 역시 최강의 기술로 응해야 했다.
웅웅웅웅!
테스론의 오른팔로 오러 파문이 연달아 일어났다. 다섯 개의 오러 파동이 고리가 되어 금속 팔뚝 위로 연신 휘감긴다. 저 정도 위력이라면 그 역시 최강의 기술로 응해야 할 터!
“캘러미티 혼…….”
두 오러 유저가 서로를 노려보며 힘을 끌어 올렸다. 은색과 적황색의 오러가 서로의 어깨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허공에서 얽혀 시야를 일그러트리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친 채 테스론이 혀를 찼다.
“아쉽군, 그대의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 것을.”
“흥! 치사하게 마법 써 놓고 뭘 이제 와서 무인인 척 굴어?”
콧방귀를 뀌며 이니야가 무릎을 더더욱 굽혔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던 바로 그 찰나.
“타아앗!”
우렁찬 외침이 성벽 위에서 울려 퍼졌다. 동시에 황금색 빛의 기둥이 허공을 꿰뚫었다. 대기를 찢고 뇌성을 울리며 빛의 기둥이 두 사람 사이를 작열했다.
우르르릉!
폭발이 일어나며 먼지와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뒤로 물러서며 테스론이 고개를 돌려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이건…… 기격포?”
거의 대부분 근접전만을 추구하는 짐 언브레이커블에도 원거리 기술은 있다.
오러를 뭉쳐 탄환 형태로 쏘아 내는 기격탄과 충격파 형태로 넓게 퍼지는 기격파, 그리고 한 점에 집중해 대포처럼 길게 쏘아 내는 기격포가 그것이다. 뭐, 캘러미티 혼 같은 경우는 사실 근접 타격기였는데 워낙 위력이 무식하다 보니 원거리까지 닿아 버리는 경우지만.
어쨌거나 이 기술이 이 장소에 작열했다는 의미는…….
“나타났구나, 마왕 레펜하르트!”
테스론의 입에서 희열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 ☆ ☆
기격포를 날리자마자 레펜하르트는 바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몸을 날리는 그의 표정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맙소사, 이니야가 저렇게까지 당할 줄이야!’
레펜하르트가 나타난 걸 보고 힘이 빠졌는지 이니야가 휘청거리며 몸을 늘어트린다. 레펜하르트는 허겁지겁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쌌다.
“괜찮습니까, 이니야?”
이니야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레펜하르트 님…….”
창백하던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이니야가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아잉! 날 먼저 부축해 주셨어!’
레펜하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부축해 편히 앉혔다. 힐끔 쓰러진 시리스를 흘겨보며 이니야가 씨익 웃었다. 물론 레펜하르트에겐 안 보이게.
‘이겼지롱, 호호호!’
그리고 시리스는 멍한 얼굴로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었다.
“…….”
조금 전까지는 진짜 존경해 마지않을 위대한 검사의 모습이더니, 레펜하르트가 나타나자마자 불여우처럼 돌변해 버린 것이다. 뭔가, 아까 감동한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우와, 무서워.’
레펜하르트가 이번엔 시리스를 향해 소리쳤다.
“시리스? 괜찮니?”
“네, 뭐…….”
어째 표정이 미묘하다. 뾰로통해 보인달까?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아픈가? 하지만 어째 그런 문제가 아닌 것도 같고…….’
어쨌건 이니야를 뒤로 물린 뒤 레펜하르트는 상황을 살폈다.
방금 날린 기격포로 인해 밀려난 거대한 금속 거인은 조금의 흠집조차 보이지 않은 채 굳건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저 시체는…….
“카다마이트?”
레펜하르트는 눈을 의심했다. 강인한 드워프 전사, 그랜드 포지 최강의 오러 유저인 카다마이트가 지금 숨이 끊어진 채 쓰러져 있는 것이다.
사인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카다마이트의 가슴에 움푹 파인 저 함몰 흔적, 그것은 저 금속 거인의 주먹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으니까!
이니야가 고개를 저으며 숙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이 카다마이트를…….”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금속 거인을 바라보았다.
‘오러 유저인 카다마이트가 저런 메탈 골렘 따위에게 당했단 말이야?’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한 레펜하르트를 향해 금속 거인이 음성을 흘렸다.
“흐흐흐, 다시 만났구나. 레펜하르트!”
레펜하르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골렘이 말도 하네?”
순간 벌컥 화를 내며 금속 거인이 투구의 안갑을 들어 올렸다.
“나다!”
안갑 속에서 대단히 익숙한 얼굴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