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공국의 역습
1
“게트란 필 라타!”
우렁찬 악마어를 토하며 세피아탄이 입을 벌린다. 거대한 불기둥이 열기를 뿌려 대며 대지 위로 길게 파괴의 흔적을 남긴다. 불기둥이 스치고 갈 때마다 땅이 파헤쳐지고 수목이 불타오르며 돌이 녹아 흘러내린다.
화르르륵!
붉게 달구어진 차탄 왕성 곳곳은 붉은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휘날리는 재와 검은 연기, 이글거리는 불길이 자아내는 열기 속에서 클라트 경은 정신없이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2대대, 황금궁을 지켜라! 4대대는 내궁의 왕족들을 보호하도록!”
차탄의 유일한 기사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게 이미 클라트 경은 출현한 악마 중 하나, 붉은 피부의 피엔드를 다시 이계로 되돌린 후였다. 하지만 악마의 숫자는 셋이고 그의 몸은 하나, 그가 피엔드를 상대하는 틈에 다른 두 악마는 이미 왕궁 곳곳으로 흩어져 광포하게 날뛰는 중이었다.
“크아아아!”
“크라라!”
악마들이 포효를 터트릴 때마다 검은 마력이 분출되어 건물을 부수고 피의 강을 자아낸다. 악마 자체의 파괴력도 어마어마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악마들이 소환하는 또 다른 소형 악마들이었다. 소형 악마들이 몇백 개체나 출몰해 왕궁 여기저기를 미친개처럼 치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소환이 아니라 악마의 신체 일부나 권능을 분리해 창조하는 분신이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별 의미 없는 구별이다.
‘제길, 제플린 나이츠가 왕궁을 비우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현재 제플린 나이츠는 모종의 임무를 받아 전원 왕궁을 비운 상태, 아쉬워하며 클라트는 소형 악마들을 상대하는 근위 기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차탄 기사단! 홀로 상대할 생각은 버려라! 왕실 근위대와 함께 3인이 조를 짜 하나를 상대하라!”
말이 소형이지, 저 소환된 악마들의 덩치도 어지간한 성인 장정을 능가한다. 아무리 마법기로 전신을 무장한 차탄의 마법 기사라도 홀로 상대하기에는 벅찬 괴물들인 것이다. 여럿이 하나를 상대하는 것은 기사의 명예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네, 단장님!”
“알겠습니다!”
클라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차탄 기사들이 바로 왕실 근위대와 힘을 합쳐 소형 악마들의 진군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클라트는 혀를 찼다.
“……명예 안 따지는 우리나라 기사들 습성이 이럴 땐 또 도움이 되는군.”
다른 나라의 기사라면 여럿이서 하나를 핍박하라는 이런 명령을 내릴 경우, 수치를 느끼며 움직임이 둔해졌을 것이다. 일대일 결투는 기사도의 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하지만 평소에도 기사답지 않게 살아온 차탄 기사단은 이렇듯 조 짜서 한꺼번에 덤비라는 명령도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니, 눈치를 보니까 ‘진작 이렇게 하시지.’라는 표정도 간혹 보였다.
지금 상황에선 참 바람직한 광경이지만, 그래도 뼛속까지 기사인 클라트 경이 보기엔 참 입맛이 쓰다.
‘으이그, 저 기사 같지도 않은 놈들…… 그래도 다행히 더 이상 밀리지는 않겠군.’
주변 상황을 파악한 뒤 클라트는 다시 눈앞의 악마, 세피아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으으…….”
자신이 소환해 낸 시종마들의 진군이 가로막히자 세피아탄이 분노의 울음을 흘리며 재차 불기둥을 토해 냈다. 잽싸게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한 클라트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하압!”
검을 머리 위로 길게 들어 올린 뒤 오러를 실어 길게 내리친다.
“블러디 레인!”
수십 줄기의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비처럼 쏟아져 세피아탄의 전신을 두들겨댔다. 세피아탄도 대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 보았지만, 워낙 공세의 숫자가 많다보니 여기저기 작은 찰과상이 연달아 생겨났다.
하지만 제대로 공격을 먹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라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크으, 역시 저 악마의 육체가 너무 단단해. 좀 더 강력한 일격이 필요한데…….’
블러디 레인은 분명 뛰어난 필살기지만 세피아탄 같이 강력한 하나의 개체보다는 다수의 병력에 보다 유용한 기술이었다. 파괴력이 모자란 것이다.
아까 해치운 피엔드는 스피드 타입의 악마인지라 광범위 공격이 가능한 블러디 레인으로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피아탄은 거구의 파워 타입 악마, 블러디 레인을 아무 갈겨 봤자 피륙의 상처만 줄 뿐 치명타를 먹일 수가 없다.
‘하지만 블러디 레인 말고 더 강력한 기술도 없고…….’
같은 오러 유저라도 익힌 검술에 따라 오러 운용법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는 법, 클라트가 익힌 검술은 단순 무식한 일격보다는 정밀하고 세련된 연격을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이 스타일도 좀 더 경지에 오르면 연격을 일점에 집중해 파괴력을 보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아직 그 정도 수준에는 오르지 못했다.
“델 카라타 마카!”
전신에서 푸른 마혈을 흘리면서 세피아탄이 다시 공세를 가해 왔다. 거대한 대검이 불길을 머금고 허공을 갈랐다. 열기가 파도처럼 밀려와 사방을 달구어 댔다.
공격을 피하며 클라트는 연달아 블러디 레인을 날렸다. 붉은 오러가 화살처럼 계속 세피아탄의 사지를 두들겨 댔다.
그때마다 세피아탄이 신음과 함께 피를 흘렸지만, 그럼에도 움직임이나 파괴력은 전혀 줄지 않는다.
세피아탄을 상대하며 클라트는 힐끔 등 뒤의 상황을 살폈다. 절로 이가 갈렸다.
“한 놈은 어떻게 막는다 쳐도 다른 한 놈이 문제군.”
클라트가 세피아탄의 움직임을 막는 동안에도 나머지 한 악마, 푸른 뇌전의 젠타렐은 마음껏 왕궁을 유린하고 있었다. 여전히 왕궁 여기저기서 푸른 전격이 번뜩이며 불길이 치솟고 비명이 아우성친다.
‘환장하겠군. 어서 저쪽도 처리해야 하는데…….’
하지만 세피아탄을 해치우지 않는 한, 이 자리를 뜰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클라트가 초조함으로 입술을 깨물 때였다.
갑자기 새하얀 안개가 왕궁 전역을 뒤덮기 시작했다.
“음?”
안개가 화염 가득한 차탄 왕궁 전체를 휘감아 간다. 동시에 이글거리던 불길의 위세가 눈에 띠게 줄어든다. 오러 유저의 감각으로 클라트는 이 안개가 강력한 마력을 담은 마법의 안개임을 눈치챘다.
‘마법사 하질 공인가? 아니, 그 양반도 자리 비웠댔는데?’
차탄 왕궁 마법사 하질은 8서클 초입의 대마법사로 많은 제자들을 부리며 차탄 왕실의 마법 전력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실 평소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출현한 세 악마가 강력하다 한들 차탄 왕궁이 이토록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계의 상위 악마에게는 오러 유저보다 고위 마법사가 더욱 잘 상대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지금, 하질 역시 제플린 나이츠처럼 모종의 일로 자신의 수제자들을 대동하고 왕실을 비웠다는 점이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왕궁 마법사와 제플린 나이츠가 모두 자리를 비우다니, 대체 뭔 일이기에…….’
혹시나 하질이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 클라트 경은 마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순 놀랐다.
‘응? 하질 공이 아니잖아?’
안개가 피어오르는 마력의 중심지, 백양궁의 석탑에 서 있는 것은 클라트가 알고 있는 꼬장꼬장한 인상의 늙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놀라울 정도로 젊은, 아직 앳되어 보이기까지 한 어린 여인이었다.
“흘러라, 뒤덮어라, 나는 힘의 사역자, 그릇된 것을 누르는 권능의 그릇을 부어 평온을 부르는 자…….”
아무리 높게 쳐줘도 20대 중반을 넘어 보이지 않는 여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마법 영창을 잇고 있었다. 동시에 여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안개가 되어 불붙은 건물들을 휘감아 가며 화기를 억누른다.
“허어!”
클라트는 감탄하며 입을 쩍 벌렸다.
마법 자체는 6서클 후반 수준이었지만 범위가 엄청났다. 저 마력의 안개는 차탄 왕궁 전역을 거의 대부분 뒤덮고 있었다. 저 정도의 광범위 주문은 마법사 하질이라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저렇게 어린 여인이 저런 어마어마한 주문을? 설마 대마법사인가?”
하지만 아직 그가 놀랄 일은 더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탁! 탁! 탁!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안개 저편에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거리가 놀라운 속도로 좁아진다. 안개 탓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기감만으로도 상대의 움직임이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러 유저였다.
“크르?”
또 다른 강자의 기척을 느끼며 세피아탄이 고개를 돌렸다. 클라트와 세피아탄의 시선이 똑같이 한 점을 응시했다.
이윽고 안개 속에서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싯누런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든, 젊디젊은 청년이었다.
“흐읍!”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나타난 청년이 짧은 기합을 터트리며 그대로 세피아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세피아탄도 아까부터 경각심을 끌어 올린 터, 바로 대검을 휘두르며 반격에 나섰다. 대검이 청년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스파이럴 블레이드!”
청년의 오러가 눈부시게 빛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숫제 거대한 드릴처럼 변한 청년이 검이 그대로 세피아탄의 대검을 부수며 악마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비늘이 깨지고 파편이 튀며 푸른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세피아탄이 비명을 터트렸다.
“크아아악!”
놀라운 위력이었다. 클라트가 그동안 죽어라 후려갈겼던 수십 번의 공격, 그보다 저 이름 모를 청년의 일격이 더욱 큰 상처를 주었다.
“누, 누구지? 저자는? 저런 젊은 나이에 오러를 각성한 자가 있었나?”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최근 크로방스 내전으로 명성을 떨친 안타레스 백국의 오러 유저, 사이러스였다.
하지만 저 흑발의 청년은 사이러스와 인상착의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단 머리색도 그렇고, 그냥저냥 잘생긴 편에 속하는 사이러스에 비해 저 청년의 미모는 실로 경국지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보통은 미녀나 독점하는 저 호칭이 남자에게 붙으려면 어지간한 미모로는 힘들다. 사이러스의 외모가 저 수준이었다면 소문 속에 그 얼굴에 대한 부분이 없을 리가 없지.
“타앗!”
흑발의 청년이 연달아 블레이드 오러를 회전시켜 휘두르며 세피아탄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너무 당혹스러운 상황이라 클라트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막 정신을 차리고 협력하기 위해 몸을 날리려던 때였다.
“차탄의 왕궁 기사단장, 클라트 경이시지요?”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조금 전 마법의 안개를 펼쳤던 그 여마법사가 어느새 그의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클라트의 감각으로 못 알아차릴 리 없거늘, 지금 눈앞의 광경이 너무 놀라워 잠시 정신을 놓은 모양이다.
“그, 그대는?”
“델피아 마탑 출신의 필레나라고 합니다. 공왕님의 초청에 따라 여기 왔습니다.”
“아…… 도움에 감사하오. 차탄 기사단장 클라트라 하오.”
더듬거리며 클라트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이 아군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으니까.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 정식으로 인사치 못하는 결례를 용서해 주시오, 마법사 필레나.”
인사를 건네자마자 클라트는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려 했다. 그때 필레나가 그를 만류했다.
“저 악마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클라트 경은 내궁의 악마를 처리해 주세요. 제가 비록 급한 불은 껐다지만 아직도 피해가 크니까요.”
“아, 하지만…….”
잠시 클라트는 세피아탄과 내궁 안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기사답게, 그는 자신의 상대를 남에게 미루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단장답게, 그는 지금 상황이 기사의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님을 인정했다.
“미안하게 됐군, 그럼 부탁하겠소.”
굳은 얼굴로 목례한 뒤 클라트는 검을 들고 내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과연 오러 유저답게 일단 땅을 박차자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뛰어넘어 안개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필레나가 클라트의 뒷모습을 보며 뺨을 긁었다.
‘사실, 이 경우에는 두 오러 유저가 힘을 합쳐 악마 하나를 해치운 다음 바로 다음 놈을 해치우는 것이 더 상황을 빨리 종료시킬 수 있는 길이겠지만…….’
그럼에도 굳이 필레나가 그를 내궁으로 보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당신이 보아서는 안 될 부분이니까요.”
필레나는 안개 속, 흐릿하게 비쳐지는 거대한 악마의 실루엣을 보았다. 거대한 그림자를 상대로 광검을 쥔 채 빠르게 움직이는 인간의 실루엣이 안개 너머로 비친다.
필레나가 소리를 질렀다.
“테스론! 가방 던질까?”
안개 속에서 느긋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이대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하지만 이왕이면 예행연습은 될 거 아냐?”
이어진 필레나의 질문에 청년이 웃음을 흘렸다.
“하핫, 그건 그렇군. 좋아! 던져!”
“응! 테스론!”
필레나가 로브 안쪽을 뒤지더니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겉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네모난 가죽 가방, 그것에 들더니 필레나가 마법을 이용해 안개 속으로 멀리 던졌다.
“받아! 테스론!”
짙은 안개 속으로 네모난 케이스가 휘익 날아가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후, 기괴한 금속음이 안개 속에서 흘러나왔다.
우웅, 위잉, 철컹철컹!
세피아탄의 그림자를 비추는 백색 안개, 그 위로 우람한 거인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나타난다. 거인을 앞에 두고 당황한 악마의 목소리가 안개 너머로 들려왔다.
“크, 크렐?”
거인의 그림자를 통해, 느긋한 청년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역시 뭐든지 연습을 해둬야 몸에 익는 법이지.”
거인의 그림자가 세피아탄의 그림자와 겹쳐졌다. 그림자가 겹쳐질 때마다 안개가 붉게 물들며 악마의 형태가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신음과 포효가 연달아 들리며 수풀이 흔들리고 굉음이 흐른다.
쾅! 쾅! 우직! 우지직!
잠시 후 세피아탄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 ☆ ☆
차탄 왕실의 중심부, 화려한 금박과 우아한 가구로 장식된 집무실에서 50대의 사내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화려한 복색에 금으로 수놓은 외부가 사내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증명한다. 밖을 내다보던 사내가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은의 현자여, 이제 원하는 바대로 되었소?”
사내 곁에 서 있는 작은 은발의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차탄의 왕. 그대의 협력에 감사하는 바이다.”
사내, 차탄 공국의 왕, 나틴 2세는 떨떠름한 얼굴로 은발의 소녀를 응시했다. 나틴 2세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탓에 제플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소. 미리 알고 있었으니 좀 더 대비할 수도 있었을 것을.”
은발의 소녀, 세렐라인이 나틴 2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심하게 질문을 던졌다.
“차탄의 피를 이은 자여. 은의 현자에게 협력한 것을 후회하는가?”
사내가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의미는 아니오. 오랜 전통에 따라 당연히 협력해야겠지. 그것이 우리 가문에 주어진 의무이니.”
일국의 왕이 보이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한 모습이다. 하지만 나틴 2세는 잘 알고 있었다. 은의 현자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차탄 공국은 국가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애초에 그라임 왕국의 일부였던 이 나라를 차탄 공국으로 만들게 된 것이 바로 저들의 조력 덕분이었으니까.
“단지, 저들의 계획을 알면서도 왜 사태를 여기까지 끌어왔는지가 궁금할 뿐이오, 수호자 세렐라인. 적어도 은의 협력자로서 그 정도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만.”
세렐라인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제플린에 잠입한 자들은 모두 권왕을 따르는 최고위층, 안타레스 백국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강자들이다. 평소엔 안타레스 백국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놈들이라 전면전이라도 일으키기 전에는 처리하기가 불가능하지.”
세렐라인이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광이 충천한 제플린 시내를 바라보며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런 자들이 보금자리를 떠나 스스로 이곳에 모여 주었다. 일망타진할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2
제플린 남부 지구의 한 거리.
원래라면 야경꾼을 제외하곤 인적이 없어야 할 깊은 밤이지만 지금은 요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난무하고 있었다. 탈출한 수백의 오크와 엘프, 드워프들이 저마다 무장을 갖춘 채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으니까.
“헉, 헉, 헉…….”
“숨이 차서…….”
“더 뛰기 힘들…….”
아무리 자유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해도, 전문적인 단련을 받지 않은 노예들에게 이 야밤의 질주는 꽤나 힘든 일이다. 특히 긴장한 상태에서 두려움에 떨며 뛰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육체노동이 익숙한 오크들도 간간히 지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체력이 약한 엘프들 중에는 퍼져 버린 이들도 제법 있다.
잘카토며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은 그런 이들을 열심히 격려하는 중이었다.
“기운을 내시오!”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소!”
각지에서 탈출한 노예들은 미리 계획한 대로 제플린 여기저기서 합류해 거대한 무리를 이루었다. 덕분에 소수일 때와 달리 통솔에 장애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십여 명의 무리 중 한둘이 쓰러진다면 어떻게든 부축해 데려갈 수 있지만, 무리의 숫자가 수백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노예들을 바라보며 무리의 선두에 선 오크 오러 유저, 카루가 하다툼은 달의 위치를 확인했다.
“시간이 아슬아슬하군. 제 시간에 성문에 도착하려면 좀 더 서둘러야 해.”
현재 제플린에 투입된 안타레스 백국의 오러 유저는 총 열 명, 레펜하르트와 러스를 제외하고 여덞 명은 각 지역에 분산되어 탈주 노예 무리들을 이끄는 중이었다. 하다툼 역시 그 축 중 하나를 담당, 오크들을 탈출시킨 잘카토 일행이며 엘프들을 탈출시킨 스티리아 일족과 합류해 이동하고 있었다.
잘카토가 하다툼에게 다가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낙오자가 생길 겁니다, 카루가 하다툼.”
하다툼이 혀를 찼다.
“늦장 부리다가 군대가 출동하면 골치 아파질 걸세.”
현재 이 무리를 이끄는 이들은 하다툼과 오크 전사들, 그리고 단하임과 스티리아 일족의 엘프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들은 가로막는 모든 병력을 간단히 해치우며 이곳까지 달려왔다. 거리에 상주하는 제플린의 치안대 정도는 오러 유저인 하다툼과 안타레스 백국의 최정예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군대가 출동한다면 아무리 오러 유저인 하다툼이라도 저 수백의 탈주 노예들을 모두 지킬 수가 없다. 아무리 무장을 시켰다 한들 저들은 군대가 아니다. 일단 교전이 일어나면 그 와중에 무수한 피가 흐르리라.
스티리아 일족의 엘프 한 명이 하다툼에게 다가왔다.
“카를 공의 계획대로라면 아직 저들이 대응하기엔 좀 더 여유가 있을 겁니다. 조금 휴식을 주는 것이 어떨는지…….”
비교적 체력이 좋은 오크들에 비해 엘프들 쪽이 훨씬 지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하다툼이 혀를 찼다. 확실히 스티리아 엘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주저앉아 쉴 여유는 없소. 하지만 이동 속도를 좀 줄이긴 해야겠군.”
밤거리를 울리던 뜀박질 소리가 조금 잦아들고, 차분한 발걸음 소리로 바뀐다. 그렇게 속도를 좀 늦춘 채 하다툼은 무리를 이끌고 계속 거리를 걸었다.
한창 사방을 경계하며 두 블록을 지나 막 성문이 보이는 커다란 광장에 돌입했을 때였다.
“……!”
하다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감을 통해 광장 저편에서 백여 명이 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확실하게 훈련된 정규군의 기척이었다.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탈주 노예 무리의 앞길을 막았다. 하다툼이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광장에서 성문으로 통하는 길이 가로막혔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광장을 둘러싼 건물 여기저기서 궁수들이 나타나 탈주 노예 무리들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어 댄다. 잘카토며 다른 오크 전사들의 안색도 굳었다.
병력 사이로 지휘관이 나타나 광소를 터트렸다.
“여기까지다, 이 비천한 것들! 하하하핫!”
“으음…….”
신음을 흘리며 하다툼은 광장 좌우를 바라보았다. 저 건물에서 인기척이 있다는 것쯤은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투혼의 축복을 받은 오러 유저였고, 기감으로 그 정도쯤은 충분히 파악할 능력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아무리 기감이 있다 한들, 저 건물 안의 인간이 병사인지, 아니면 일반 시민인지를 구별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곳은 깊은 산속이 아니라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 제플린이다. 이제까지도 지나쳐 온 모든 건물마다 제플린 시민들이 살고 있었으니, 당연히 광장 주변의 인기척도 원래 거주민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지휘관, 전신을 마갑으로 뒤덮은 차탄의 마검사가 통쾌하다는 듯 외침을 이었다.
“노예들 따위가 부린 잔꾀를 설마 우리들이 몰랐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탈주 노예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노예들 사이로 퍼져 간다. 하다툼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확실히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만…….
‘정면에 백여 명, 그리고 건물 사이에 궁사 스무 명 정도인가?’
아직 밀린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그와 비견할 만한 강자의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 정도면 솔직히 포위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부우웅!
하다툼의 전신에서 투기가 피어올랐다. 투혼의 축복, 그 강렬한 오러의 기운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하다툼이 비아냥을 던졌다.
“용케 우리 움직임을 파악한 것은 좋은데, 이 정도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런데, 상대는 오러의 힘을 보고도 별로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과연, 오러를 쓰는 오크가 있을 것이라더니 사실이었군.”
“응?”
당황하는 하다툼의 눈에 다섯 명의 기사가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화려한 마갑과 마검으로 단단히 무장한 이들이었다. 마법에 문외한인 하다툼조차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도구, 상대의 정체가 바로 짐작이 갔다.
“제플린 나이츠…….”
다섯 명의 제플린 나이츠라면 오러 유저인 하다툼에게도 벅찬 상대다. 게다가 제플린 나이츠는 마검사라는 특성상, 기사도에 그리 구애받지도 않는다. 부담 없이 합공을 해 버리는 작자들인 것이다.
긴장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하다툼과 오크 전사들을 바라보며 차탄의 마검사가 쐐기를 박듯 외침을 이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다른 제플린 기사 분들도 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구축 중이다! 지금 네놈들의 등 뒤로 천 명이 넘는 군세가 몰려오고 있단 말이다! 으하하핫!”
☆ ☆ ☆
‘……젠장, 포위되었단 말인가…….’
레펜하르트는 굳은 얼굴로 눈앞의 병력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러스, 실란과 함께 제플린 남서부 쪽의 탈주 노예 무리와 합류한 후였다.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것은 드워프 오러 유저 말로이드와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 그들은 현재 모두 당황한 얼굴로 무리 외곽으로 달려가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 역시 하다툼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정예 중의 정예에 오러 유저라 한들 고작 십여 명의 인원으로 다섯 명의 제플린 나이츠와 수많은 병사들로부터 모든 노예들을 지킬 수는 없다.
불안해하는 노예들을 바라보며 길을 가로막은 제플린 나이츠가 위엄 있게 외쳤다.
“아무리 강자라 한들 저들을 모두 구할 수는 없을 터! 저들의 목숨이 아깝다면 당장 항복하라!”
눈앞에 도열한 병력들을 보며 러스가 레펜하르트에게 귓속말을 날렸다.
‘어떡합니까, 형님? 피해를 무릅쓰고 뚫고 나가야 할까요?’
‘그 방법밖에 없긴 하겠지만…… 그럴 경우 노예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게 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붙잡혀 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결국 레펜하르트는 결심했다.
“힘으로 뚫고 나간다!”
러스가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레펜하르트도 양 주먹을 불끈 쥐며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제플린 나이츠가 코웃음을 쳤다.
“반항할 셈이냐? 이미 포위되었는데? 이제 곧 천 명의 병력이 네놈들을 덮칠 것이다! 네놈들에게 더 이상 살 길은 없다!”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천 명의 지원군은 대체 언제 오는 건데요?”
확실히, 아까부터 저 차탄의 기사가 큰소리 뻥뻥 치고 있는 걸 제외하면 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러스와 레펜하르트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기감을 끌어 올려 사방을 살핀다.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뒤를 보고 하늘 위를 바라본다.
어째 등 뒤가 조용하다.
천이라는 숫자가 이동하는데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러스가 제플린 나이츠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치켜떴다.
“……안 오는데?”
☆ ☆ ☆
안타레스 백국. 백왕성 내부의 재상실.
밤이 깊은 시간이지만 재상실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멍하니 테이블에 앉아 카를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재상실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 자요, 카를?”
카를의 연인, 틸라가 간단한 속옷 차림으로 그의 곁에 다가와 앉는다. 어린 소녀처럼 보이지만 풍만한 가슴이 속옷 사이로 내비치니 꽤나 야해 보인다.
“티, 틸라…….”
카를이 머쓱해하며 틸라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틸라가 배시시 웃었다. 이미 한 침대를 같이 한 사이임에도 이런 모습을 보는 건 부끄러운 걸까?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속으로 혀를 날름 내민 뒤 틸라가 카를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잠이 오지 않나요?”
카를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제플린에서는 다른 이들이 목숨을 걸고 있을 텐데, 내가 잠이 올 리가 있겠소?”
“그건 그렇군요…….”
틸라도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시각, 제플린의 밤하늘 아래서는 그녀의 가족, 친구들이 동족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을 터였다. 아무리 그들의 강함을 믿고, 카를의 전략을 믿는다 한들 걱정이 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들 무사하겠죠?”
“계획대로만 된다면.”
“계획대로 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카를이 짠 계획은 완벽하잖아요?”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완벽한 계획이란 없소. 인간인 이상, 어디 한 군데라도 반드시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지.”
“하지만 카를, 당신은 제가 본 사람들 중 가장 영리한 분인 걸요.”
“날 높게 봐 주니 고맙긴 하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카를은 틸라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는 법, 내가 세운 작전이 확실한 강자들을 동원해 확실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확률 높은 작전인 것은 분명하지.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오. 만약 우리의 작전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안타레스 백국은 그 자리에서 멸망하게 되겠지.”
그러자 틸라의 안색이 굳었다. 확실히 카를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백왕인 레펜하르트를 비롯, 현재 제플린에는 안타레스 백국의 지도층 전원이 나가 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신생 국가인 안타레스 백국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간신히 자리를 잡은 이종족들의 보금자리 역시.
“틸라…….”
사랑하는 연인이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며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소. 나 역시 그런 경우를 상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거든.”
“네?”
의아해하며 틸라가 카를을 올려다보았다. 카를이 피식 웃었다.
“세상 일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뼈저리게 느낀 바 있소.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갔다면 난 지금 크로방스의 국왕 자리에 있었겠지? 난 내 자신을 그렇게 과신하지 않는다오.”
문득 카를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미리 작업을 좀 해 뒀지. 제플린의 군세, 그들의 중추인 중간 장교들 전원에게 뇌물을 먹여 놓았거든. 혹시나 계획이 들통 나 중앙에서 명령이 떨어진다 해도 저들은 제때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 ☆ ☆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제플린 나이츠는 경악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왜 지원군이 오지 않는 것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기사단 본부에서는 제플린 각지의 주둔군에 제대로 명령을 하달했다. 그것도 이런 사태가 터지기 전, 어제저녁 때 보내 놓은 명령이었다. 명령이 누락되거나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명령이 누락되었다 해도 한두 부대에 한해서이지 전원이 이렇게 명령을 받지 못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글쎄, 또 카를이 뭔가 한 모양이긴 한데…….”
러스와 대화를 나누며 레펜하르트는 절로 혀를 내둘렀다.
만일을 대비해 제플린의 주둔군의 움직임을 억제해 놓겠다는 소리는 들었었지만,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이렇게 한 건지는 짐작이 가질 않는다.
“혹시 모르니 뇌물을 좀 풀어 놓겠다는 소린 들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차탄 공국이 분명 돈이면 장땡인 나라이긴 하다. 그리고 제플린 주둔군 대부분이 푹 썩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다른 나라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차탄 공국의 경우엔 뇌물을 이용해 군대의 움직임을 막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한두 부대의 이야기다.
아무리 차탄 공국의 군기가 썩다 못해 발효되어 치즈처럼 물렁한 상태라 한들, 그래도 명색이 정예병이다. 타국의 뇌물 때문에 자국의 위기를 도외시할 정도는 아니라는 의미다.
뇌물도 다 자기 잘되자고 먹는 법. 아무리 썩었다 해도 그렇지, 생판 모르는 타국인이 나타나서 ‘이 돈 줄 테니 출동 명령 무시하고 제 자리 지키고 있어 주시오.’라는 요구를 군대 전원이 들어줄 정도면 차탄 공국이 여태껏 유지되지도 않았을 터다.
‘진짜 신기하네, 카를 이 친구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 ☆
“그런데 카를, 아무리 뇌물을 먹었다 해도 자기 임무가 있는데 제플린의 병사들이 그렇게 눈앞의 명령을 도외시할까요? 게다가 모르는 사람이 슬쩍 돈 찔러 준다고 의심도 하지 않을 만큼 중간 장교 전부가 멍청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틸라의 의문에 카를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대 말이 옳아요, 내 사랑. 아무리 차탄 공국이 썩었다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지.”
“그럼 쓸데없이 돈만 날린 것 아닌가요?”
의아해하는 틸라를 보며 카를이 자신 있게 웃었다.
“뇌물을 준 것이 내가 아니거든.”
“네?”
“그들이 받은 뇌물은 어디까지나 평소의 연장선상에 있다오.”
카를은 분명 제플린 주둔군에 광범위하게 뇌물을 먹였다. 덕분에 안타레스 백국의 재정이 한차례 휘청거릴 정도로. (이게 카를이 돈 없다며 레펜하르트에게 징징댄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레스 백국의 이름으로 뇌물을 건네지는 않았던 것이다.
“제플린 주둔군의 대다수는 원래부터 이런저런 상단에 각종 명목으로 뇌물을 받고 있었소.”
온갖 상단이 오가는 제플린이다. 그리고 상인에게 있어 가장 골치 아픈 것 중 하나는 바로 규제인 법, 당연히 그 규제를 펼치는 관리와 군대에게 뇌물을 먹여 사업을 좀 더 편하게 하는 것이 제플린 상인의 철칙이었다.
쉽게 말해서, 제플린 주둔군은 원래부터 꾸준히 뇌물을 받아 오던 기존 루트가 있다는 의미다.
“내가 건넨 뇌물은 전부, 그들이 원래부터 뇌물을 받아 오던 기존 상단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이지.”
제플린에서 카를의 수하들이 뇌물을 건네며 요구한 것은, 제플린이 불바다가 되어도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금액이 크다 한들 자신의 목이 위태로운데 시키는 대로 할 바보는 세상에 없으니까.
그들이 받은 요구는 이것이었다.
-요 근래, 제플린에 큰 난리가 생길 거란 정보를 입수했다네. 물론 국가가 하는 일이니 일개 상인인 내가 어쩔 수야 없겠지만, 난리통 속에 우리 가족이 어떻게 될지 영 걱정이 되더군. 그래서 말인데, 정말 난리가 나면 일단 우리 가문의 안전을 좀 확인해 주지 않겠나? 잠깐 우리 가문으로 와서 좀 지켜 주다가 명령에 따른다면 딱히 명령 불복종이라 할 수도 없을 테고. 만약 그로 인해 피해를 본다면 아무 탈 없도록 뒤처리는 확실하게 해 주겠네.
평소부터 지갑 잘 챙겨 주던 이가 저런 요구를 한다면―그것도 짭짤한 금액을 동반하며― 거절하기 힘든 법이다.
그리고 아예 출동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잠시 지연되는 정도로는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적어도 차탄 공국의 법에 따르면 간단한 벌금으로 무마가 된다. 그리고 그 벌금은 그들이 받은 뇌물에 비하면 대단히 사소한 액수다.
다른 상단의 이름으로 뇌물을 건네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뇌물이란 떳떳치 못한 돈이다. 당연히 얼굴 숨기고 남몰래 돈이 오가는 법, 이름을 사칭하며 건넨다 해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물론 그 요구가 이상하다 싶으면 당연히 의심을 하겠지만, 요구 자체는 전혀 어색할 것이 없지 않은가?
당연히 주둔군들의 반응은 ‘우리 지갑 풍족하게 해 주고 우리 뒤를 열심히 봐준 XX상단을 잠깐 들렀다 가야겠다!’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카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과도 같은 단어 역시 끼워 넣었다.
-제플린의 병력이 일만이나 되는데 거기서 ‘자네들 하나쯤’ 빠진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나 하나쯤이야~라는 말이야 말로 사람을 부패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라오.”
모든 주둔군이 죄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사상으로 무장했다면, 제플린 전역의 군대를 일시간 마비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단지…… 주둔군 거의 대다수가 뇌물을 먹고 있었다는 건 나도 상상치 못했지. 난 잘해 봐야 절반 정도만이라도 먹히면 다행이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막상 조사해 보니 이건 뭐, 막장도 이런 막장 국가가 없더군.”
어깨를 으쓱이는 카를의 모습에 틸라는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용케 이런 사람을 상대로 전쟁에서 이겼구나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머나먼 제플린의 하늘 아래 있을 레펜하르트를 떠올리며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와, 레펜하르트 님. 정말 이 사람 살려 두길 잘하신 것 같아요…….’
새삼 안타레스 백국과 드워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카를을 꽉 잡아 둬야겠다고 다짐하는 틸라였다.
☆ ☆ ☆
같은 시각, 제플린 시내.
패닉에 빠진 차탄의 병사들을 보며 러스는 빙그레 웃었다.
“어쨌거나 우린 그럼 계획대로 계속 움직이면 되겠군요?”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원군이 오지 않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부우웅!
러스의 검에서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솟구쳤다. 말로이드 역시 오러를 뿜어내 자신의 대검을 감쌌다.
“으윽…….”
느긋해 보이던 제플린 나이츠의 안색이 변했다. 분명 듣기론 오러 유저 한 놈일 거라 했는데, 어디서 한 놈이 더 튀어나왔다. 두 명의 오러 유저라면 다섯의 제플린 나이츠로는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아니,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지원군은?’
안색이 바뀐 제플린 나이츠를 향해 러스와 말로이드가 앞으로 나섰다. 말로이드가 차갑게 웃으며 뇌까렸다.
“그러니까, 저놈들만 처리하면 우리 앞길을 막는 이들은 없다 이거지?”
그때였다.
“하여튼 이놈의 나라는…… 도대체가 제대로 돌아가는 꼴을 못 보겠군!”
굵은 목소리와 함께 광장 저편에서 누군가가 밤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새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사뿐히 레펜하르트와 러스 앞에 착지하니, 그 순간 찬란한 빛이 어둠을 사르며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눈부신 황금빛으로 전신을 뒤덮은 두꺼운 갑주의 기사, 그를 보며 차탄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 오셨다!”
“테네스의 검!”
“그라임의 황금기사!”
제플린 나이츠들의 표정 역시 활짝 밝아졌다. 마법 기사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존경스러운 무인은 명성 높은 당대의 검성 바나텔이나 권왕, 이제는 권황이 된 제라드가 아니었다. 바로 같은 마검사로 오러 유저와 맞상대가 가능한 황금기사인 것이다.
상대를 바라보는 러스의 안색이 굳었다.
“……유서스 형님?”
유서스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탈주한 노예 무리 전부를 천천히 오갔다. 차가운 안광이 닿을 때마다 노예들이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그라임의 황금기사, 그 드높은 명성은 제플린의 노예들에게조차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잠시 후 유서스는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와 흡사한 외모의 젊은 청년,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향해 유서스가 싸늘한 목소리를 토했다.
“오랜만이구나, 러스…….”
러스도 굳은 얼굴로 유서스를 바라보았다. 두 형제의 눈빛이 허공을 교차했다.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자가 어떻게 이 자리에?”
이 자리에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 나타났으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유서스가 나타났다는 것은 테스론도 이곳, 제플린에 왔다는 의미…….
레펜하르트를 보며 유서스가 빙그레 웃었다.
“탈주 노예 무리 중 어디에 있을 지 통 짐작할 수 없었는데…….”
그리고 다시 러스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권왕뿐 아니라 저 비천한 놈까지 이 자리에 있다니! 그야말로 세이어의 가호가 있음이로다, 크크큭!”
웃음을 터트리는 유서스의 태도에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뭐지? 저 자신만만한 모습은?’
분명 유서스의 등장이 당혹스럽긴 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현재 유서스는 홑몸이었다. 뭐, 뒤에 다섯의 제플린 나이츠와 백여 명의 병사들이 도열해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혼자라고 할 순 없지만, 어쨌거나 평소 함께하던 다른 동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레펜하르트 측에는 레펜하르트 본인은 물론 오러 유저인 러스에 원래 이 무리를 이끌던 드워프 오러 유저, 말로이드까지 있다. 몇 달 전만 해도 러스 한 명에게 처참하게 당하던 유서스가 저렇게 오만한 모습을 보일 처지는 결코 아닐 텐데?
‘뭔가 믿는 것이 있는 건가?’
평소라면 대뜸 두들겨 쓰러뜨리고 갈 길 갔겠다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니 어째 몸을 날릴 마음이 들지 않는다.
레펜하르트가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유서스에게 물었다.
“……그대가 여기 있다는 건 테스론도 이곳에 왔다는 소리겠군?”
은근슬쩍 떠보려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유서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론 경이라면 그대를 찾아 제플린 서부로 향하고 있겠지.”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당연히 그대가 그 ‘엘프 암컷’ 곁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
순간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시리스?”
레펜하르트가 제플린 시가지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스론이 이곳에 있다고? 그리고 시리스 쪽으로 향했단 말인가?’
현재 시리스는 이니야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 정령술이 경지에 오른 시리스와 최강의 엘프 오러 유저 이니야, 두 사람의 실력을 생각하면 사실 현재의 테스론이라도 감히 무시할 처지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차분히 따져 보면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태연한 유서스의 모습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건 절대 허풍이 아니다.
뭔가 믿는 것이 있는 표정이다.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굳게 쥐었다. 그리고 등 뒤로 소리쳤다.
“러스! 말로이드! 이 자리를 부탁하네! 난 시리스 쪽으로 가 봐야겠어!”
유서스가 믿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이곳에도 말로이드와 러스, 두 명의 오러 유저가 있다. 특히 러스는 지금도 계속 성장을 하고 있는 상황, 몇 달 전 유서스와 맞붙었을 때보다도 더욱 오러 유저로서 경지가 높아진 상태.
‘함정이 있다 해도 저 두 사람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
러스가 자신 있게 대꾸했다.
“맡겨 주시죠, 형님!”
말로이드도 걱정 말라는 듯 손짓을 했다.
“걱정 말고 먼저 가 계시오, 구원자 양반!”
“이 자리를 부탁하네!”
짧은 외침을 남긴 채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황금빛 오러의 잔상을 밤하늘 가득 남기며 그의 거구가 시가지 지붕을 연달아 밟으며 제플린 시내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예상 외로 유서스는 굳이 레펜하르트의 뒤를 쫓지 않았다. 그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 채 흐릿한 잔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권왕은 테스론 경에게 양보해야겠군.”
애초에 유서스가 테스론과 합류하게 된 이유는 바로 레펜하르트와의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유서스는 그에 대한 원한이 상당히 희박해진 상태였다.
그날 이후, 레펜하르트는 전장을 오가며 계속 명성을 높여 갔다. 당대의 권왕 레펜하르트의 이름이 대륙 전역에 자자하게 울린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 보니 이젠 레펜하르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큰 수치가 아니게 된 것이다. 여전히 원한이야 품고 있긴 하지만, 지금의 유서스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증오의 대상이 존재한다.
러스를 향해 유서스가 마검 엘드란을 겨누었다. 살기를 흘리며 그가 안광을 흘렸다.
“지금은 더 중요한 용무가 있으니까 말이야.”
유서스의 살기를 받아 흘리며 러스도 마주 자세를 취했다. 양손을 모아 검을 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테네스 가문 특유의 내려치기 자세였다.
휘이이잉!
두 형제 사이로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황금의 검, 엘드란을 들어 올리며 유서스가 살기 어린 외침을 터트렸다.
“목을 내놓아라, 더러운 사생아 놈! 이번에야말로 네놈을 단죄하겠다!”
살기를 정면으로 받으며 러스도 걸음을 옮겼다.
“단죄라…… 대체 내가 무슨 죄가 있고 당신이 무슨 자격이 있어 나를 단죄하겠다는 건지는 굳이 따지지 않겠어. 어차피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블레이드 오러를 유서스에게 겨누며 러스가 입가를 비틀었다.
“그냥 여기서 끝내 버리겠어, 유서스. 이젠 더 이상 당신 얼굴 보는 것도 지겨워.”
3
레펜하르트는 연달아 제플린 시내의 지붕들을 건너뛰며 달렸다.
몸을 날리는 내내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가슴 언저리를 떠나질 않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별문제는 없을 텐데.’
이미 레펜하르트는 현생의 테스론과 한번 맞붙어 보았다. 테스론의 강함에 대해서 대충 파악해 놓은 상태다.
분명 현재의 테스론은 강했다. 하지만 그 실력은 결코 이니야의 윗줄은 아니었다.
어째 다시 만난 이니야가 워낙 멍하게 굴어서 별로 실감은 못 하고 있지만, 사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는 엘프족 최강의 전사이자 오러 유저다. 칼켄이나 스탈라, 아틸카 혹은 오크 대전사 시절의 타시드와 맞먹는 강자인 것이다.
실전이라면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몸뚱이 탓에 레펜하르트가 유리하겠지만, 대련이라면 그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이니야의 실력이었다..
거기에 정령술이 월등히 강해진 시리스도 함께 있으니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테스론이 그들을 습격한다 해도 충분히 대처할 힘이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유서스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뭔가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유서스가 세 명의 오러 유저를 상대로 그리 태연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유서스가 수작을 부렸다면 테스론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지…….’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지붕 하나를 뛰어넘던 중이었다.
갑자기 건물 아래쪽 거리에서 증오를 가득 담은 음성이 길게 늘어지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레~펜~하~르~트!”
증오와 환희가 동시에 담긴, 마치 미치광이의 포효를 연상케 하는 섬뜩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검은 빛무리가 몸을 날린 레펜하르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건?”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허공에서 몸을 뒤틀었다. 저 검은 섬광에 담긴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등 언저리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가공할 힘이 그를 덮쳐 왔다!
“하압!”
반쯤 무의식적으로 레펜하르트가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황금빛 오러가 그의 전신을 비호하며 섬광과 맞부딪쳤다. 폭음이 울리며 레펜하르트의 전신이 뒤로 튕겨 나갔다.
콰앙!
육중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한다. 뻐근한 통증이 가슴께를 타고 올라 뇌를 두들겨 댄다.
자세를 바로잡아 착지하며 레펜하르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윽?”
스파이럴 가드를 구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황금 오러는 그 자체로 금강석 같은 방어력을 자랑한다. 그 오러를 정확히 펼쳐 대부분의 힘을 해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검은 섬광은 여력을 채 잃지 않고 그의 가슴을 정확히 강타한 것이다.
‘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자가 제플린에 남아 있었던가?’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섬광이 날아온 곳에서 한 청년이 칠흑같이 새까만 검을 든 채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다! 크하하하하!”
칠흑의 검을 든 채 청년이 발을 굴렸다. 가벼운 발놀림만으로 3층 높이의 지붕 위를 가볍게 뛰어올랐다. 레펜하르트는 눈가를 찌푸렸다.
‘으음…….’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적어도 상식적인 인간의 한계는 가볍게 뛰어넘은 능력이었다.
지붕으로 올라온 청년이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미친놈처럼 낄낄대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 젠장! 만났어! 만나 버렸어! 좋아! 아주 좋아!”
아니, 말하는 걸 보면 그냥 미친 게 맞는 것 같다.
청년을 빤히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낯이 익기는 한데…….
“……누구더라?”
그러자 청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악귀처럼 안면 근육을 뒤틀면서 청년이 고함을 질렀다.
“레펜하르트! 레펜하르트! 네놈이 나를 못 알아봐? 네가? 네놈이! 으아아아!”
처절한 절규가 청년의 목구멍을 통해 사방을 울렸다. 어찌나 처절한지 일순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상관없지! 네놈을 베고 나면 싫어도 기억하게 될 테니까!”
청년이 칠흑의 검을 지붕에 꽂았다.
“오라! 나의 분신이여!”
칠흑의 검에서 암흑이 쏟아져 나왔다. 터져 버린 둑처럼 암흑이 밀려와 청년을 머리부터 집어삼켰다.
그 속에 담긴 어둠의 기운에 레펜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흑마법, 그것도 상당히 지독한 계열의 흑마법이다.
암흑을 움켜쥔 채 청년이 처절한 외침을 터트렸다.
“광기의 영혼으로 내 몸을 감싸라!”
어둠이 물질이 되어 현세에 구현되기 시작했다. 암흑이 투구가 되고 건틀렛이 되며 플레이트 아머가 되어 청년의 사지를 뒤덮어 간다.
잠시 후, 그 자리에 더 이상 청년의 모습은 없었다. 전신에서 불길한 검은 투기를 풀풀 풍기는 흑기사의 모습만 남아 있을 뿐.
그 모습을 보고서야 레펜하르트가 손바닥을 쳤다.
“아, 저 갑옷.”
뭔가 했더니 저거, 예전 테스론과 조우했을 때 보았던 그 버서커 아머인가 하는 마갑이 아닌가?
“스테반인가 하던 그 친구였구먼.”
얼굴 보곤 모르다가 갑옷 보고서야 겨우 알아채다니, 레펜하르트에게 저 스테반이란 존재가 얼마나 희미한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였다.
스테반 역시 그 사실을 바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살기가 더더욱 짙어졌으니까.
“으아아! 레펜하르트으으으!”
☆ ☆ ☆
레펜하르트는 생각했다.
‘하긴, 유서스가 여기 있으면 저놈도 있을 수 있겠군. 저놈도 테스론을 따라다니는 듯했으니.’
이것이 스테반과 조우한 감상의 전부였다. 애당초 레펜하르트에게 스테반이란 존재는 그냥 테스론을 따라다니는 졸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기억나는 부분은 실란 만났을 때 옆에서 재수 없게 굴던 놈, 그리고 타시드가 오러 유저로 각성하기 위한 좋은 밑거름이었다 정도?
“갓 오러를 각성했던 타시드에게도 졌던 놈이 뭘 믿고 이렇게 자신감 과잉이 돼서 설치지?”
어이없어하며 레펜하르트가 펀치를 날렸다.
“스트레이트 캐논!”
황금빛 오러의 정권이 스테반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거대한 황금의 장막이 스테반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스트레이트 캐논이 막 스테반을 직격하려는 찰나, 스테반이 칠흑의 검을 휘두르며 괴성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아!”
칠흑의 검, 그 새까만 칼날에서 검은 섬광이 솟구쳤다. 묵빛의 광채가 검날을 휘감고 황금빛 장막을 가른다. 가로로, 세로로, 사선으로, 섬광이 장막을 찢어발기며 사방으로 파괴의 여파를 날려 댔다.
콰아아아앙!
폭풍이 불며 지붕 일부가 사정없이 날려 갔다.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라?”
깨졌다. 스트레이트 캐논에 실린 그의 황금빛 오러, 그것이 너무도 간단히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단순히 가로막혔다거나 흘린 게 아니라 분명히 파쇄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러?”
스테반이 이글거리는 어둠의 검을 치켜들고 자랑스레 소리쳤다.
“보아라! 이것이 나의 오러다! 나도 이제 오러 능력자란 말이다!”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였다. 도무지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자는 분명 오러 유저가 아닌데?”
기감으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러 유저 특유의 존재감, 그리고 발산된 오러의 흐름과 기세는 같은 오러 유저라면 결코 못 알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오러 유저로서 레펜하르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스테반은 절대 오러 유저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건 분명 블레이드 오러…….”
스테반이 광소를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크하하하하!”
칠흑의 검이 레펜하르트의 요혈을 노리고 연달아 찔러 왔다. 단순한 찌르기라면 피할 필요도 없겠지만…….
“스파이럴 가드!”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오러를 회전시켜 전신을 휘감으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펑! 펑펑!
검은 오러와 회전하는 황금의 오러가 스쳐 지나가며 연이어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오러와 오러가 반발하며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