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권 제30장 자유의 신호탄 (31/84)

제30장 자유의 신호탄

1

인구 이십만의 대륙 최대 상업 도시 제플린.

온갖 행상과 상단이 오가는 제플린의 북문을 세 사람이 지나고 있었다. 후드를 머리까지 드리운 거구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린 두 명의 크고 작은 이들이었다.

자고로 벌건 대낮에 얼굴 가리고 다니는 놈들은 반드시 뒤가 구린 놈인 법이다. 하지만 제플린 북문의 경비대는 굳이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신분증 검사조차 없었다. 돈이면 장땡인 나라의 수도 경비대답게, 1인당 은화 다섯 닢으로 깔끔하게 통과가 되었던 것이다.

북문을 통과한 뒤 힐끔 뒤를 보며 러스가 혀를 찼다.

“아니, 이래도 되나? 아무리 그래도 수도의 경비를 책임지는 자들일 텐데…….”

그러자 뒤를 따르는 작은 체구의 소년, 실란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이 나라는 돈이면 다 된다고.”

앞장 선 거구의 남자,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안 들키고 잘 통과했으니 된 것 아냐?”

슬슬 레펜하르트는 물론이고, 실란과 러스도 상당히 유명해졌다. 혹여나 그들을 알아볼 이가 있을까 싶어 다들 얼굴을 가린 것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신분을 감추는 것은 필수 중의 필수였다.

물론 남들 다 얼굴 드러내는데 그들만 감추고 있으면 오히려 더 눈에 뜨이겠지만…….

“……저는 더 수상해 보일 거라 생각해서 반대한 것인데, 별로 수상할 것도 없었군요…….”

인파 속에서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바라보던 러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후드로 머리를 덮은 레펜하르트 일행은 이 인파 속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뒤 구린 놈들이 많은 건지, 어차피 인파의 절반은 후드나 덥수룩한 수염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신분증 대신 뇌물로 북문을 통과했음은 물론이다.

“아니, 저러고도 경비대에서 안 잘리나?”

실란이 대수롭잖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게 원래 이런 나라라니까요?”

레펜하르트도 실란도, 저번 제플린 방문 때 워낙 못 볼 꼴 많이 봐서 그런지 이 정도는 이제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차탄 공국을 처음 방문한 러스만 컬처 쇼크를 못 이기고 여전히 기막혀하고 있을 뿐이다.

거리를 걸어가며 레펜하르트가 차분히 러스에게 말을 건넸다.

“어차피 저들 대부분은 범죄자 출신 용병들이거나 밀수꾼들이다. 진짜 중요한 상업 지구 쪽은 이렇게 얼굴 가리고 못 들어가지.”

빈부 격차가 심한 곳답게, 제플린은 같은 성내에서도 치안이 심각하게 차이 나는 것이다. 현재 레펜하르트 일행이 들어온 북문 지구는 제플린에서도 슬럼으로 취급되어 싸구려 창녀촌이나 술집, 가난한 행상들이 들락거리는 지역이었다. 반면 서문 쪽의 상업 지구는 돈 많은 상인들의 저택이나 상회가 위치한 곳.

“거긴 오히려 다른 나라의 성문보다도 더 엄중하게 경계를 하지. 당연히 뇌물 따윈 통하지도 않고.”

부유한 자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지켜 주지만, 가난한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이것이 대륙 최대의 상업 도시로서 흥하는 제플린의 실태였다.

“어차피 우리는 그쪽은 갈 일이 없으니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후드를 살짝 걷어 올려 해의 위치를 본 뒤,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하여튼 잘 잠입했으니 이제 해가 지길 기다리면 되겠군.”

세 사람은 그렇게 거리를 가로질렀다. 목적지인 북문 지구의 여관, ‘샌드 더스트’로 향하는 것이었다. 북문 지구의 여관 대부분이 그렇듯 샌드 더스트도 허름하고 숙박비 싸며 신분 따위 조사 안 하는, 범죄자를 위한 완벽한 숙박 장소였다. 신분을 숨겨야 하는 레펜하르트 일행에게 대단히 적합한 곳이다.

걸음을 옮기며 실란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잠입해 있다고 했죠? 다들 무사할까요?”

인간인 실란과 러스, 레펜하르트는 지금 제플린에 들어왔지만, 이종족들은 이미 카를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제플린 곳곳에 침투한 후다.

실란 뒤를 따르던 러스가 실소하며 대꾸했다.

“아직까지 제플린이 불바다가 되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다들 무사한 것 같지?”

☆ ☆ ☆

제플린에서도 유서 깊고 대륙 전역에서도 가장 융성한 엘프 전문 노예 경매장 엘븐하임, 그곳에서 지금 새까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연기 사이로 앙칼진 외침이 터져 나왔다.

“또! 또 태웠어! 도대체 네년은 할 줄 아는 게 뭐니!”

흑연의 근원지는 엘븐하임의 드넓은 주방, 그중에서도 빵 굽는 오븐이었다. 그곳에서 한때 밀가루 반죽이었던 것이 새까만 숯이 되어 ‘나는 더 이상 사람 먹을 물건이 아니오.’라고 강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븐 앞에서 한 엘프 여인이 굴욕으로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인다. 보랏빛 머리칼에 순백의 피부, 날씬한 몸매에 풍만한 가슴을 지닌 여인이었다.

엘븐하임의 교관이자 엘프 노예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중년의 인간 여인, 클라라가 혀를 찼다.

“젠장, 엘프치고 특이하게 가슴이 커서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년인데, 도대체 왜 저리 실수가 잦은 거야?”

저 가슴 큰 엘프 계집이 엘븐하임에 들어온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지나가는 행상에게 거의 후려치다시피 해 사들였다는데, 특유의 몸매 덕에 희소가치가 있어 경매주 라르크도 꽤나 흐뭇해했던 계집이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상품으로 팔기 위해 노예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도대체가 이 엘프 계집은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요리를 시키면 숯으로 만들고 빨래를 시키면 걸레로 만들고 바느질을 시키면 바늘을 부러뜨리고 마사지를 시키면 멍을 만드는 것이다. 기본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소화를 못 하니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한 밤일 교육은 아직 입문도 못 시켰다.

“네년 팔에 달린 건 손이 아니라 앞발이냐? 정말 정신 안 차릴래?”

“…….”

버럭버럭 화를 내는 클라라를 보며 새끼 교관이 슬그머니 물었다.

“징벌방으로 넣을까요?”

징벌방은 말을 듣지 않는 엘프들을 ‘정신교육’시키기 위한 곳이다. 참고로 저 ‘정신교육’의 골자는 바로 ‘매에는 장사 없다.’였다.

“으음…….”

클라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징벌방은 반항적인 엘프들을 순종적으로 만드는 곳이다. 하지만 엘프 교관으로 뼈가 굵은 그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보랓빛 머리의 엘프는 절대 반항해서 저렇게 실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정말 살림 쪽에 눈곱만큼도 재능이 없는 것이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 아닌 이상, 징벌방으로 넣어 봐야 별로 나아질 것도 없다. 괜히 재수 없으면 흉터 생겨서 상품 가치만 떨어지지.

“흥, 그냥 밥이나 굶겨. 배 곯아 보면 정신 좀 차리겠지.”

씩씩대며 클라라가 발길을 돌렸다. 새끼 교관이 엘프 여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따라와라, 323번!”

323번이라 불린 보랏빛 머리의 엘프 여인이 힘없이 뒤를 따른다. 엘프 여인을 숙소에 집어넣고 철창을 잠갔다. 323번이 말없이 자신의 침상으로 향했다. 마주한 침상, 그곳에서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비슷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 역시, 323번 못지않게 손재주가 서툴러 며칠째 혼이 나는 처지인 것이다.

새끼 교관이 혀를 찼다.

“저년도 그렇고 324번도 그렇고, 그날 팔려 온 것들은 이상하게 서툴단 말이야.”

툴툴대며 교관은 다시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보는 눈이 사라지자 쪼그려 앉아 있던 324번,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의 시무룩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싸늘하고 강인한 눈빛이 은색 눈동자 위를 맴돈다.

그녀가 맞은편을 향해 차갑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오늘 교육도 훌륭히 실패했네요, 이니야 씨.”

이니야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네요, 시리스 양.”

시리스와 이니야가 이곳, 엘븐하임에 잠입한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다른 엘프 노예들을 안쪽에서 이끌기 위해 노예인 척 팔려 들어온 것이다. 물론 여성의 몸으로 노예로 팔리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꽤 위험한 일이긴 하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도 초반엔 결사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오러 유저인 이니야와 시리스의 정령술이라면, 맨손으로도 자기 몸 건사하기엔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레펜하르트도 결국 시리스의 굳은 의지 앞에 계획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문제였던 것은 엘프 여성 노예라면 당연히 밤일에 대한 교육도 받게 될 것이라는 건데, 이건 시리스가 해결했다.

그녀는 엘븐하임에서 유년기를 보낸 바가 있다. 엘븐하임의 노예 교육 시스템에 대해 빠삭하단 소리다. 처음부터 기초적인 노예 교육을 계속 서툴게 일관한다면, 밤일을 가르치거나 하기 전에 충분히 시간을 맞출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걱정했던 건, 이니야 씨가 과연 안 들키고 ‘서툰 척’을 할 수 있을까 였는데…… 생각보다 잘하시는군요.”

단순히 서툰 척으로 교육을 미룰 수 있을 만큼 엘븐하임 교관들의 눈썰미는 만만치 않다. 저들은 몇십 년을 엘프 노예를 교육시켜 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것이다. 반항기를 보이는지 아닌지쯤은 바로 알아채 버린다.

“저야 이미 이곳에서 같은 교육을 받아 보았으니 어떻게 하면 안 들키는지를 알지만…… 이니야 씨가 해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시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때마다 이니야의 안색이 조금씩 창백해진다. 문득 시리스가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음, 정말 ‘서툰 척’한 것 맞죠? 이니야 씨? 정말 ‘서툰’ 게 아니라?”

이니야의 안색이 점점 더 굳었다. 시리스가 침상에 몸을 기대더니 설마 하는 어조로 말했다.

“음, 그럴 리가 없지. 그런 멋진 요리도 한 분인데 설마 그럴 리가…….”

이니야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확신했다.

‘저년, 눈치 깠어!’

잽싸게 이니야가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 슬슬 날짜가 되었네요. 오늘이죠?”

시리스도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뒤 창살이 쳐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조용히 뇌까렸다.

“네, 오늘이에요.”

그러자 숙소의 다른 엘프 여인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엘프 여인들이 시리스와 이니야에게 다가오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건가요?”

“정말 안타레스 백국에서 우리를 구해 주는 건가요?”

“이렇게 노예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이니야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곧 구원받을 겁니다.”

비록 요 근래 많이 망가지긴 했지만, 어쨌건 이니야는 몇십 년간 스티리아 일족을 이끈 수장이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엔 확실히 수장다운 권위가 있다.

엘프 여인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다들 기쁜 기색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기대감 부푼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며 시리스는 새삼 감탄했다.

이제껏 그녀가 구했던 동족들과는 전혀 다르다. 안타레스 백국에 도착해서도 노예가 아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들과는 전혀 다르다.

똑같이 노예로 살아가는 처지였지만, 이들은 이미 자유를 꿈꾸고 있었다.

‘대단하네. 정말 카를 씨 말대로잖아?’

☆ ☆ ☆

카를은 설명했다.

“현재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은 너무도 체제에 적응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그들의 의식을 각성시킬 필요가 있어요.”

그동안의 경험으로 레펜하르트 일행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경매장을 무너트리고 족쇄를 부순 뒤 ‘자, 이제 그대들은 자유다!’라고 외친다 해서 노예들이 바로 호응해 주지는 않는다는 걸.

내부로 잠입해 노예들을 봉기시키기 위해선, 일단 그들이 현재 삶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자유에 대해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드워프들 경우에는 내부 호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부락 단위여야 노예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드워프의 특성상, 저들은 비교적 문화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 역시 많이 남아 있지요. 드워프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원래 자유민이어야 하며, 비록 현재 노예의 처지이긴 하지만 언젠가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자각이 있습니다.”

연금술사 길드에 잡혀 있는 트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유롭게 살다가 사로잡힌 상태이니 당연히 노예라는 자각이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역시 오크와 엘프입니다.”

차탄 공국의 노예상들은 노예 매매의 스페셜리스트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노예가 아닌 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 도가 튼 작자들이란 소리다. 그들의 조교 방식과 정신교육은, 설사 이종족이 아닌 자유롭게 살던 인간이라도 자신이 원래 노예였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충분할 만큼 가혹하다.

“오크 검투사들은 그래도 전사의 긍지가 있어 타시드 경의 말에 따랐지요. 그리고 야성이 보존된 만큼 분노할 줄도 압니다. 하지만 농업용 오크나 엘프들은 많이 달라요.”

그들은 스스로가 노예임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람은 무릇 환경에 지배되는 법이다. 그들을 둘러싼 모든 세상이, 그들이 노예라 주장하고 있으니 감히 노예가 아닌 자신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사전 작업을 좀 해 뒀습니다.”

그 방식은, 레펜하르트나 시리스 입장에서는 조금 어이없는 것이었다. 시리스가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동화책요?”

“그래요, 시리스 양. 동화책입니다.”

“아이들이 읽는, 그 동화책?”

카를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냥 동화책은 아니지요. 현재 변질되어 버린 옛 설화나 이야기들, 그것들을 이종족들에게 들은 대로 원본화하여 배포했습니다.”

현존하는 설화나 동화가 인간 위주로 변했다는 것은 이미 시리스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원본으로 바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의아해하는 시리스를 보며 카를이 말을 이었다.

“별 상관없어 보이겠지만, 사실 이게 영향력이 꽤 됩니다.”

카를이 배포한 것은 모든 동화들의 원전, 제대로 이종족들이 활약하는 원래의 이야기였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지만, 사실 그동안의 동화책들은 뭔가 어색한 점이 컸죠. 저도 어릴 적 이야기 들으면서 의문을 느꼈을 정도니까.”

잠든 공주를 지키는 일곱 명의 어린아이는 제대로 드워프가 되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광산에서 돌을 캐고 저희들끼리 살아가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인간 어른으로 만들면 공주가 침대 일곱 개를 붙여서 자는 것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드워프라면 모든 스토리가 납득이 가게 변한다. 미녀 정령사도 엘프가 되면 납득이 간다. 팔다리가 잘리는 부상을 입고도 하룻밤만 자면 나아 버리는 용맹한 전사의 이야기도 트롤이 주인공이라면 어색할 것이 없다. 근육만 숭상하는 야만인들의 이야기는 오크가 되면 훨씬 쉽게 이해가 간다.

“어느 누구도 동화책에는 신경 쓰지 않지요. 실제로 여러분도 신경 쓰지 않았잖습니까? 동화는 고작해야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효과가 있나요?”

“엘프들에게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들려주는 것은 어른들이거든요.”

대부분의 엘프들은 하녀나 성노로 쓰인다. 그리고 아이들을 보는 유모로도 쓰인다.

그렇기 때문에 엘프들은 아이들에게 들려줄 동화책 역시 열심히 외워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을 달래고 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제플린의 엘프 노예 경매장 전 곳에 이 동화책들을 흘려 넣었지요. 물론 혹시나 수상하게 여길까 봐 소가 노래하고 당나귀가 바이올린 켜는 그런 식의 동화책들 사이에 끼워 넣었습니다.”

가축을 의인화하나 노예를 의인화하나 별 차이를 못 느낀다. 역시 아이들 보는 동화책답게 유치하다고 여길 뿐이다. 이것이 현 시대 인간의 사고방식.

“당연히 인간들은 읽어 봐야 별 느낌 못 받겠지만…….”

카를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사자들에겐 꽤 느낌이 다를 겁니다.”

2

불야성不夜城이라고까지 불리는 대륙 최대의 상업 도시, 제플린.

하지만 그 제플린이라 할지라도 정말 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가 짐과 동시에 도시의 기능이 멈추는 다른 도시와 달리 제플린은 분명 밤새도록 온갖 상인들과 유동 인구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정이 넘어가면 확실히 어둠이 제플린 이곳저곳을 뒤덮기 마련이다.

특히 건물 사이사이의 좁은 골목은 횃불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대로의 가로등이나 달빛 정도로는 이 복잡한 도시의 건물 사이를 누빌 수는 없는 것이다.

복잡한 건물 그림자 사이는 그야말로 완벽한 사각지대, 단 몇 걸음만 들어가도 그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짙은 어둠이다.

깊은 새벽, 레펜하르트와 러스, 실란은 그 골목의 어둠을 따라 빠르게 제플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대로를 따라 야경대가 오가고 채 잠들지 않은 몇몇 행상들이 숙소를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이동하는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들은 어떤 광원의 도움 없이 어둠을 누비고 있었으니까.

레펜하르트와 러스야 오러 유저의 기감이 있으니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실란조차도 마치 대낮인 양 자연스럽게 어두운 골목을 달리며 발 한번 헛디디지 않고 있었다.

실란이 문득 자신의 눈가를 매만지며 혀를 내둘렀다.

“이 마법, 정말 신기하네요. 불을 밝히지도 않고 사물을 이리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다니.”

밤눈이 어두운-이라기보다는 그냥 정상적인 인간의 밤눈을 지닌 실란을 위해 레펜하르트가 특별히 마법을 걸어 준 것이다. 보통 어둠을 밝히기 위한 마법은 라이팅 계열 정도가 전부인데, 특이하게도 레펜하르트가 걸어 준 마법은 어둠 그 자체를 꿰뚫어 보게 해 준다.

“마법사들도 제법 알고 지냈는데, 이런 마법은 들어 본 적도 없어요.”

“인프라 비전은 원래 엘프들의 것이라 인간 마법사들에겐 그 개념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앞장서 달리며 레펜하르트가 작게 대꾸했다. 실란이 주위를 힐끔거렸다.

“확실히 은밀한 행동을 하기에 최고의 마법인 것 같아요. 하지만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이는 건 좀 불편하네요.”

“적외선 시야가 원래 그렇지, 뭐. 그래서 전투 시에는 되도록 안 써, 나도.”

“……적외선?”

“그냥 사물의 온도를 본다고 이해해. 또 고대어를 써 버렸네.”

“……온도를 봐요?”

“아, 그냥 좋은 마법이거니 해, 그럼.”

살짝 실소하며 레펜하르트는 말을 끊었다. 지금 느긋하게 마법 강론이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니까.

한참을 그렇게 어둠에 몸을 숨기며 달리던 레펜하르트 일행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구획을 지나며 제플린 중심 거리까지 도착한 것이다.

골목의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러스가 대로를 살펴보았다.

“몰래 이동하는 것은 슬슬 한계군요, 형님.”

대로 저편에 흐릿하게 보이는 커다란 궁성, 바로 차탄 왕궁이었다. 북문 거리를 벗어나 상업 거리를 횡단해 귀족 거리까지 도착한 것이다.

복잡한 건물들이 어지럽게 세워져 있던 북문이나 상업 거리와 달리, 왕궁 근처는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크고 화려한 저택 거리에 좁은 골목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길목이 대로 수준으로 훤하게 뚫려 있다. 몸을 숨길 어둠 자체가 없는 것이다. 모든 시야가 확실하게 드러나 사각 지대 따윈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레펜하르트는 조심스레 왕궁 거리를 살펴보았다.

“역시 여기서부터는 경계가 철저한데.”

일국의 왕성이 위치한 곳이니만큼 치안이나 경계는 그들이 통과했던 북문 거리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도로마다 중무장한 병사들이 세 명씩 짝지어 경계를 돌고 있고 사거리마다 고정된 장소에서 경비들이 혹여나 있을지 모를 불량배들의 발호를 확실히 막겠다는 듯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하나같이 중장비에 차탄 기사단만은 못해도 마법기 역시 어느 정도 착용하고 있는 듯했다. 왕성 근처를 경비하는 만큼 정예만을 배치한 것이다.

개판 5분 전인 북문 경비대와 비교하니 참 심각할 정도의 격차가 느껴진다.

실란이 문득 혀를 찼다.

“저 병력 10분의 1만 빼내서 다른 지역에 배치했으면 제플린 치안이 두 배는 좋아졌을 텐데.”

“대신 이 지역 보안이 조금 위태로워졌겠지. 없는 놈 치안 두 배로 챙겨 주느니 자기 집 보안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게 가진 놈들이 당연히 취할 행동 아니겠냐?”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하며 레펜하르트가 러스에게 눈짓했다.

몰래 접근하는 건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무력행사가 필요하다.

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풀었다.

“바로 갈까요, 형님?”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어 만류했다.

“아직. 저놈들은 쓰러지면 자동으로 신호가 가게 되어 있다.”

저들이 착용하고 있는 마도구 중에는 경비가 미처 연락을 취하기도 전에 쓰러지는 것을 대비, 경비의 의식과 연동해 이상이 생길 경우 신호를 보내는 방식의 기물도 있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의 왕성에서도 비슷한 경비 체제를 갖추고 있기에 러스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변형된 알람 마법이군요. 그럼 어떻게?”

“내가 처리한다.”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실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마법을 쓰려고요? 일국의 왕성이라면 마법 사용에 따른 검색 결계도 설치되어 있을 텐데요? 걸리지 않을까요?”

마법에 의한 암살을 막기 위해, 모든 왕성에는 마법 사용을 감지하는 결계 설치가 필수다. 고위 성직자인 실란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차탄 왕궁 역시 예외는 아닐 터.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난 안 걸려.”

수인 맺기를 끝마친 뒤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언령을 준비했다. 실란이 입술을 삐죽였다.

“자신만만하네요.”

레펜하르트가 오러만큼이나 마법에 대한 조예 역시 깊다는 것은 이제 실란도 잘 알고 있으니 딱히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잘난 척하다가 또 사고 치는 것 아녜요?”

저 인간이 잘난 척하다가 일 터진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미덥잖다는 눈빛을 보내는 실란의 모습에 레펜하르트는 잠시 울컥했다.

‘이래 봬도 내가 한때는 대륙을 떨쳐 울렸던 10서클 대마법사였는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상황을 검토해본다.

‘……라지만 그런 것치곤 사실 그동안 실수가 많긴 했지? 음,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자.’

잠시 후 레펜하르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확실해. 안 걸려.”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보이지 않는 마력장이 안개처럼 은밀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력에 의한 흐름을 훼방 놓는 간섭 마력장이었다.

대놓고 흐름을 가로막는 방식이라면 연락이 차단된 시점에서 뭔가 눈치를 채겠지. 하지만 지금 레펜하르트가 사용하는 방식은 철저히 차탄 왕궁의 마법 스타일에 맞춰 중간에 정크 신호를 끼워 넣는 방식이었다. 이 일대에 설치된 마법 결계를 속속들이 알아야 가능한 수법이라 어지간한 대마법사라도 불가능하겠지만…….

‘대륙의 왕성치고 내가 모르는 방식의 마법 결계는 없으니까.’

이미 그는 전생에 모든 왕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바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전생에서도 한번 해 봤던 짓이다.

‘물론 그때는 아예 간섭 마력장으로 제플린 전역을 뒤덮어 버렸지만 지금 마력으로는 택도 없는 소리고.’

그래도 반경 10여 미터 정도를 뒤덮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마력장이 왕성 앞의 대로를 서서히 잠식해 간다.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굳건한 얼굴로 자신의 경비 지역을 살펴볼 뿐이었다. 이들은 분명 정예병이었고 군기 역시 확실했지만, 마법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도구를 사용할 뿐이다. 간섭 마력장을 감지할 수는 없다.

레펜하르트가 눈짓을 했다.

“가자, 러스.”

“네, 형님!”

두 사내가 표범처럼 골목을 뛰쳐나갔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두 사내가 단숨에 대로를 가로지른다. 한 걸음에 10여 미터씩 죽죽 거리를 좁히는 그들을 보며 경비와 보초들이 안색이 굳어 창을 겨누었다.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놀란 와중에도 3인으로 구성된 경비들은 빠르게 대응했다. 둘은 바로 습격자를 향해 공세를 취했으며 연습한 대로 남은 한 명이 연락용 폭죽을 터트리기 위해 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그보다 두 사람이 훨씬 빨랐다.

“흡!”

짧은 호흡과 함께 어느새 경비의 코앞까지 도달한 러스가 가벼운 펀치를 날렸다. 단순한 잽에 가까운 펀치였지만 그것이 오러 유저의 정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일격에 경비의 의식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끄어어…….’

뒤이어 러스는 팔꿈치 돌려 찍기와 끊어 차기의 이연타로 나머지 경비들도 침묵시켰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니 이미 레펜하르트도 혼절한 보초들을 정중히 초소 벽에 눕혀 주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 여섯 명의 경비와 보초들이 모조리 쓰러진 것이다.

분명 이 경비병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경계도 똑바로 했고 방심하지도 않았으며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빠르게 대처했다. 허구한 날 창 들고 조는 동네 경비들에 비하면 실로 프로페셔널한 이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절대적인 실력 차 앞에선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오러 유저와 일반 병사에게는 그 정도의 벽이 존재하니까.

그렇게 감시를 무력화시키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왕성을 향해 전진했다. 두어 번 정도 비슷한 짓거리를 되풀이하고 나니, 커다란 차탄 왕궁의 성벽 아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높은 성벽을 올려다보며 러스가 중얼거렸다.

“용케 작전대로 여기까지는 도착했군요.”

실란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든 채 대꾸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죠.”

여기서부터는 차탄 왕성 본역.

이곳부터는 경계의 강도가 차원이 달라진다. 강력한 마법 방호망에 오러 유저를 대비한 여러 마도구들이 설치되어 있을뿐더러, 차탄 공국의 이름 높은 오러 유저, 왕성 기사단장 클라트 경 역시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러스가 굳은 얼굴로 뇌까렸다.

“아무리 저나 형님이라도, 오러를 쓰지 않고 이 안까지 진입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러스와 실란이 동시에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들었던 작전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여기까지 진행하면 그다음은 자신이 알아서 한다고만 들었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들을 직시하며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진입할 생각도 없어. 어차피 내가 원하는 것은 혼란뿐이니까.”

레펜하르트가 품에서 주먹만 한 석상 세 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들기 좋게 손에 쥐며 싱긋 웃는다.

“아무리 강력한 결계나 오러 유저의 기감이 있다 해도 그냥 짱돌 던지는 걸 막을 방법은 없거든?”

성벽 너머를 겨냥한 뒤 레펜하르트가 석상을 던졌다.

휘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석상이 저 높은 성벽을 가뿐히 넘어갔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공할 육체로 이 정도 투척은 일도 아닌 것이다.

“잘 날아가는구먼.”

히죽거리며 레펜하르트가 남은 석상 두 개를 마저 던졌다. 역시나 바람을 가르며 석상이 성벽을 넘어 어둠 저편으로 모습을 감춘다.

실란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대체 저게 뭐예요?”

대답은 레펜하르트가 해 줄 필요가 없었다. 금세 대답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레펜하르트가 아닌, 성벽 너머 왕궁의 대정원에서.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우렁찬 외침이 들려온다.

“크라라라라!”

그동안의 경험으로 러스도, 실란도 바로 알아들었다. 던전 같은 곳에서 익숙하게 들었던 외침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저것은 분노한 악마의 외침이었다.

☆ ☆ ☆

고요에 휩싸여 있던 차탄 왕궁은 발칵 뒤집어졌다.

드넓게 조성되어 있던 아름다운 왕궁 정원, 그곳에서 끔찍한 포효가 터져 나온다.

“크라라라!”

포효의 주인공은 흑사자에 거인의 상체를 달아 놓은 듯한 외모의 대악마, 세피아탄이었다. 거대한 칼날을 좌우로 휘두르며 세피아탄이 분노에 차 불길을 토해 낸다. 불길의 강이 정원을 가로지르며 자욱한 연기의 벽을 드리운다.

한참 잠에 빠져 있던 왕실 근위대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아, 악마다!”

아무리 훈련이 잘된 병사들이라 해도 인간인 이상 이런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겁지겁 지휘관들이 병력을 지휘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런 지휘관들 본인조차도 제대로 무장조차 갖추지 못했을 정도이니 오죽할까.

게다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진짜 날벼락도 떨어지고 있었다.

우르르릉!

세피아탄이 나타난 정원 근처, 그곳에서 또 다른 악마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거대한 푸른 도마뱀의 형상을 한 이계의 악마, 제타렐이 뇌전을 사방에 뿌리며 파괴의 향연을 즐기는 중이었다.

“크아아!”

우르르릉!

포효가 터질 때마다 뇌성이 울린다. 그리고 그때마다 푸른 전격이 허공을 가로질러 왕성 여기저기를 때려댄다.

번뜩이는 섬광 사이로는 박쥐 같은 날개를 단 붉은 체구의 악마, 피엔드가 대검을 들고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붉은 핏물이 튀어 올랐다.

“크하하하하!”

통쾌한 듯 웃음을 터트리며 세 악마들은 마음껏 차탄 왕궁을 유린했다.

이계의 악마로서 작은 석상 안에 봉인당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던 이들이었다. 너무도 오랜 세월 갇혀 산 탓에 고위 악마로서의 지성이나 이성은 사라진 지 오래. 그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분노만이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들을 노리며 가차 없이 파괴의 힘을 휘둘러 댄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왕성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고 그 사이로 병사들의 절규가 아우성쳤다. 불길이 치솟고 대지가 흔들린다.

뒤늦게 무장을 갖추고 나타난 차탄 왕궁 기사단, 저들의 단장인 클라트 경이 세 악마를 바라보며 치를 떨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악마들이!”

클라트 경은 검을 뽑아 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저히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악마를 소환하는 수법은 최소 7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만이 가능하다. 특히나 저 정도의 대악마라면 대마법사쯤은 되어야 소환할 수 있다.

‘그런데 심지어 세 개체나?’

게다가 강력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는 이곳에서 악마를 소환할 정도의 마법진이 구성되었다면 알람이 울리지 않을 리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어쨌거나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다. 클라트 경이 검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부우우웅!

눈부신 붉은 오러가 밤의 어둠을 찢어발긴다.

클라트 경이 몸을 날렸다.

“꺼져라! 무엄한 악마 놈!”

오러의 잔광이 밤하늘 위를 길게 수놓는다. 클라트 경의 전신이 공간을 좁히며 붉은 거구의 악마, 피엔드의 정면으로 쇄도해 갔다.

막 좌우로 검격을 뿌리던 피엔드가 경각심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크라라!”

피엔드가 외침을 터트렸다. 악마의 대검이 불길을 머금은 채 클라트를 향해 길게 뻗어 나갔다.

허공에서 손을 뻗어 클라트는 충격파를 날렸다. 오러를 응축했다 터트려 그 파문을 내뿜은 것이다.

퍼펑!

폭음과 함께 대검에 휩싸인 불길이 모조리 날려 가 버렸다. 동시에 클라트가 충격파의 반동으로 허공에서 몸을 뒤틀었다. 악마의 대검이 클라트를 빗맞히고 허공으로 비껴나간다.

순간 클라트가 검을 고쳐 쥐며 비기를 날렸다.

“블러드 레인!”

수십 줄기의 참격이 피엔드의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피의 비라는 명칭 그대로, 붉은 오러가 소나기가 되어 강타한다. 거친 붉은 피부가 찢기며 악마의 그것임을 증명하는 푸른 피가 튀어 올랐다.

“크아아악!”

고통을 느끼며 피엔드가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피엔드의 비명에 다른 두 악마도 놀란 듯 잠시 살육을 멈추고 클라트 쪽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잠시 소강상태가 된 틈을 타 클라트가 고함을 질렀다.

“왕실 근위대! 대열을 갖춰라! 1대대는 왕족들을 피신시키고 2대대는 병사들을 이끈다! 3대대는 나를 따라라!”

클라트 경의 굳건한 외침에 흔들리던 기사며 병사들의 움직임이 안정화되었다. 다들 정신없는 와중에도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레펜하르트 일행은 성벽 위에 몸을 숨긴 채 정원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란이 날뛰는 악마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건 또 어디서 구했어요?”

가끔 고대의 기물 중에 이계의 악마가 봉인된 아티팩트가 있다는 소문 정도는 실란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나게 희귀해서 전문적인 던전 탐사가라 할지라도 평생 한 번 보기 힘들 정도인 것이다.

“어디긴? 우리가 턴 던전이 한두 개냐?”

“아, 하긴…….”

실란은 바로 납득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레펜하르트와 함께 털어 댄 던전 숫자는 족히 수십이었다. 전문적인 던전 탐사가 십여 명이 평생 턴 던전 숫자보다도 오히려 많은 것이다. 그만큼 무식하게 털어 댔으니 없는 것이 도리어 이상했다.

“제어도 안 되고 너무 위험해서 팔지도 못할 물건이었는데, 잘 써먹는 거지, 뭐.”

작게 중얼거리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상황을 지켜보았다.

초반에는 정신없이 유린당하던 왕궁 기사단이었지만 클라트 경이 참전한 이후로는 빠르게 대열을 정비, 착실하게 악마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휴우, 그래도 클라트 경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군.’

레펜하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일군 참상이라지만, 불필요한 희생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저들을 잠시 왕궁에 묶어 두는 것뿐.

그런 의미에서 클라트 경은 레펜하르트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해 주고 있었다.

‘역시 차탄의 유일한 기사.’

제대로 된 기사는 차탄 공국에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차탄 공국의 기사들이 엉망이라는 소리다.

기사다운 긍지나 명예보다는 실리를 우선하고, 본신의 실력보다는 더 좋은 마검이나 마갑만 찾아 대는 것이 차탄의 기사들이라는 편견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데, 사실 이것은 편견이 아니라 100퍼센트 사실이었다. 애초에 차탄 공국의 국민성 자체가 저 모양인데 기사라고 뭐 다를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클라트 경은 달랐다.

그는 기사다운 명예와 긍지를 알며, 마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한 실력으로 오러 유저의 경지에 다다른 자였다. 아무리 썩어 빠진 나라라도 인물은 나게 되어 있다는 살아 있는 증거랄까?

마도구를 거부한 탓에 마법기사단 제플린 나이츠에 속하지 못하고 차탄 기사단장을 맡고 있을 뿐, 클라트 경은 누구나 인정하는 공국 최강의 기사였다.

어쨌거나 그 클라트 경의 지휘 덕에 차탄 기사단들은 차분하게 악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세 악마들의 무력 역시 만만치 않아 전투가 쉽게 마무리될 기색은 아니었다.

장기전, 그야말로 레펜하르트가 기대했던 대로다.

‘좋아, 이걸로 당분간 정신이 없겠지.’

차탄 기사단을 상대하던 피엔드가 분노로 몸을 떨며 전신의 마력을 개방했다.

“크라라라!”

개방된 마력이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 차탄 왕궁의 상공을 붉게 물들였다. 제플린 시내 어디에 있든지 눈뜬 이라면 보지 않을 수 없을 거대한 불기둥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러스와 실란에게 눈짓을 했다.

“신호탄이 올라갔다. 빨리 움직이자고.”

러스가 실소를 흘렸다.

“신호탄 한번 화려하기도 하군요.”

성벽에서 뛰어내리며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좋잖아. 설마하니 저렇게 거창한 걸 신호탄이라 생각할 사람은 없을 테니.”

3

무릇 노예라는 것은 상당한 가치를 지닌 재화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적이나 강도들에게 가장 기피되는 탈취 대상이 노예인 것도 사실이다.

금이나 보석처럼 부피가 작지도 않으며, 발이 달려 있어 언제 도망갈지 모르니 운반 및 보관에 있어서도 훨씬 까다로울뿐더러, 혹여나 제대로 탈취해 제값 받고 판다 해도 입이 달려 있으니 바로 자신들의 정보를 유출해 버릴 수 있다.

예를 들면 ‘저 원래 어디어디 노예였는데 그 사람들이 훔쳤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왕 위험부담 안고 도둑질을 할 거라면 보다 편한 대상이 널려 있는데 굳이 노예 경매장에서 노예를 훔치겠다는 발상을 하는 이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덕분에 제플린 서부지구에 위치한 오크 전문 노예 경매장 ‘오드란’의 경비 태세는 그야말로 간략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사실 오드란의 경비 태세는 철통같았다. 오드란의 금고와 주인 가족의 거처는.

하지만 오드란의 경매장주는 오크 노예들을 보관해 놓은 숙소의 경비까지 인건비를 투자하진 않았던 것이다. 사나운 오크 검투사도 아닌 농업용 오크들이 감히 도망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디노드, 오크 노예 숙소의 경비를 맡고 있는 이 20대 청년은 눈앞에서 숙소 문이 열릴 때까지도 아무런 경각심을 느끼지 못했다.

“응?”

분명 두꺼운 자물쇠로 잠겨 있던 나무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오크 노예 몇 명이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디노드는 혀를 차며 손짓을 했다.

“이런, 자물쇠가 고장 났나? 이놈들아! 들어가서 잠이나 처자지 왜 밖을 기웃거려? 무슨 구경났냐?”

생각해 보니 구경이 나긴 났다. 짙은 어둠이 깔렸어야 할 제플린 시가지의 하늘, 그 위로 화광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으니까.

‘저기면 왕궁 근처인데…… 무슨 일이지?’

그렇게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크들이 들어가긴커녕 오히려 디노드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슬그머니 접근해 오는 오크들을 바라보며 디노드가 인상을 썼다.

“아, 이 멍청한 놈들. 말귀도 못 알아듣나? 나니까 눈감아 주는 거지 다른 사람이 보면 큰일 나! 어서 들어가라고!”

손까지 휘저으며 디노드는 노예들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던 중 문득 디노드는 어색함을 느꼈다.

‘어라?’

앞장선 오크 노예 하나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니, 웃는 것뿐 아니라 태연스럽게 입까지 연다.

“이 친구, 그래도 마음씨는 착하군.”

뒤에 선 다른 오크 장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친구였습니다. 정도 많았고.”

오크어로 나눈 대화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노예들이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그제야 디노드가 경각심을 느끼고 창을 고쳐 잡았다.

“어? 뭐, 뭐야?”

순간 디노드는 눈앞 가득 뭔가가 뒤덮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앞장선 오크의 두꺼운 주먹이었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경비병을 앞장선 오크, 잘카토가 잽싸게 부축했다.

“영차! 이 친구는 심성이 괜찮으니 그냥 이대로 기절만 시켜 놓아도 되겠지.”

뒤에 선 또 다른 오크가 손짓을 했다.

“모두들 나와!”

숙소에서 한 무리의 오크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겁먹은 표정이 역력한 오크들이었다.

이들뿐 아니라 다른 숙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숙소 안쪽에서 문을 부수고, 어설픈 경비를 쓰러뜨리며 수많은 오크들이 두리번거리며 숙소 밖으로 조심스레 걸어 나온다.

“나, 나가도 되는 건가…….”

“이러다가 혼날 텐데…….”

“혼나는 거 아프다…….”

“아픈 거 싫다…….”

대부분 겁먹고 움츠린 이들, 별로 탈출에 대한 열망이 보이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오크들은 달랐다. 사나운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며 선두에 선 오크들이 호통을 쳐 댔다.

“따라와라!”

“무엇을 겁내는가!”

“이곳에서 계속 이렇게 살 것이냐!”

선두의 오크들이 호통을 치자 그제야 오크들의 표정에 공포 대신 분노가 떠오른다. 그동안 그들이 당해 온 학대와 고통, 그것을 떠올리며 순박하기만 하던 얼굴에 굳건한 의지의 빛이 드러난다.

“나, 난 가겠다!”

“나도 간다!”

“이렇게는 못 산다!”

다른 무리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차분히 인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잘카토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카를 공 말대로군.’

☆ ☆ ☆

카를은 설명했다.

“동화책 등으로 사전 작업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노예들이 전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나 오크들은 말이죠.”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영리하다. 게다가 노예로서의 용도상 농업용 오크들에 비해 머리가 트인 편이다.

엘프는 주로 하녀나 시종으로 쓰이는 법, 인간과 직접적으로 접하며 인간의 수발을 드는 용도로 쓰인다. 부족 단위로 모여 있는 드워프만은 못하겠지만 그저 단순하게 반복 작업만 시키는 오크들에 비하면 이래저래 기본적인 교육은 받은 것이다.

“그래서 다른 작업도 해 놓았습니다.”

카를이 서류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안타레스 백국의 소문 때문에 차탄 공국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습니다. 노예들이 헛바람 들까 싶어서겠지요. 그래서 더더욱 매섭게 노예들을 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럼 오히려 반감만 높아질 것 아닌가?”

“그렇죠. 하지만 그렇다 해서 노예 주인 입장에서 노예들을 온화하게 대할 수도 없습니다. 온화하게 대한다고 해서 노예들의 충성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온화하게 대하고, 노예들의 복지를 좀 더 신경 써서 살기 좋게 해 주면 과연 노예들의 충성심이 높아질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물론 몇몇 노예들은 감격해서 충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노예들이 그럴 것이라는 판단은 지나치게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다.

“그랬다면 차탄 공국이 여태껏 노예 매매 시장의 메카로 군림하지도 못했겠지요.”

노예는 어찌 되었건 불합리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아무리 온화하고 자비롭게 대한다 한들 노예가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고 주인에게 충성할 수는 없다. 오히려 노예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에 의문을 품으면 품었지.

“잘해 주면 더더욱 기어오른다는 사고방식과는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애당초 노예의 삶 자체가 불합리한 이상 족쇄를 완화해 보아야 소용없지요. 그리고 그 사실은 차탄 공국도 잘 알고 있습니다.”

차탄 공국이라고 호되게 구는 것이 반감을 산다는 것을 몰라서 저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노예제 자체가 모순이 있는 이상, 저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생명의 본성, 그렇다면 그보다 더 큰 본성인 ‘생존’에 위협을 주어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만이 노예 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덕분에, 현재 차탄 공국의 노예들은 꽤나 반감이 올라간 상태지요.”

사람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다.

그리고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인간이건 이종족이건 그리 다르지 않다.

“현재 노예들은 이미 자신들의 삶에 적응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가혹하기 그지없는 삶이라지만 그들에겐 평범한 하루일 뿐. 하지만 그 평범한 하루가 더더욱 가혹해진다면? 우리가 보기엔 똑같이 가혹한 삶이겠지만 노예들이 느끼기엔 삶에서 느끼는 고통이 완연히 달라진다는 겁니다.”

딱딱한 빵 세 덩이로 하루를 연명하는 것은 일반인이 보기엔 너무도 가혹한 삶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순하게 생각한다. 딱딱한 빵 세 덩이가 두 덩이로 준다 한들 어차피 가혹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다르다.

그들에게 딱딱한 빵 한 덩이가 줄어드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 침범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한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면 결국 노예들은 또다시 변한 일상에 적응하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이라 생각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지금이라면 보통 노예들이라도 자신의 삶에 충분히 불만을 품고 있을 겁니다.”

씨익 웃는 카를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자네가 일부러 제플린의 노예들을 가혹하게 대하도록 조종했다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노예 주인들에겐 선택지가 저것뿐이니까요. 저는 그저 사람을 부려 노예 주인들의 불안감을 살짝 부추겼을 뿐입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그 시기가 이쪽에 유리할 때 일어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즉, 저 카를의 짓거리 덕에 제플린의 노예들은 평소보다 더욱 가혹하게 학대받게 되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뭐,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함이니 딱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안 그렇게 봤는데 카를 자네, 은근 악랄하군…….”

기가 찬다는 레펜하르트의 말에 카를이 슥슥 뒷머리를 긁었다.

“이 정도는 그냥 왕족 교양 수준인지라…….”

그렇다. 분명 카를은 선하고 정의로운 성품의 소유자이지만 동시에 왕족으로 태어나 제왕학을 익힌 자이기도 한 것이다. 딱히 카를이 나쁜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저 정도의 뒷공작은 카를 입장에선 그다지 권모술수랄 것도 없다.

“하여튼, 지금 시기라면 야성을 잃은 오크 노예들이라도 이쪽의 움직임에 어느 정도 호응을 해 줄 겁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잠깐 뭔가를 계산하더니 카를이 수치를 내놓았다.

“적어도 한 10퍼센트 정도는 적극적으로 봉기에 가담할 것이라 예상됩니다.”

“저렇게 하고도 고작 10퍼센트?”

실망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카를이 피식 웃었다.

“평생을 세뇌당한 이들이 고작 몇 달 삶이 힘들어졌다고 다 때려치우겠다는 각오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리고 제가 말한 10퍼센트는 어디까지나 적극적 호응입니다. 소극적 호응, 앞으로 나서지는 않아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는 경우라면 충분히 대다수를 차지할 겁니다. 애초에 노예의 삶이, 적극적이 될 수가 없을 테니까.”

“적어도 대세를 따르는 분위기는 만들 수 있다 이거군.”

“네, 중요한 것은 결국 리더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로 나뉘는 법. 이제까지는 이끄는 자가 노예 주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좀 다르겠지요.”

카를이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소극적 호응을 하는 90퍼센트라면, 반드시 나머지 10퍼센트를 따르게 될 테니까요.”

☆ ☆ ☆

숙소 앞 광장을 수백의 오크들이 달리고 있었다. 대부분 노예로 살아가던 힘없는 오크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이들은 달랐다.

“진정한 오크가 되고 싶으냐!”

“진정한 전사가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뛰어라!”

마치 양떼를 모는 목동처럼 격려와 호통을 치는 이 오크들은 모두 노예가 아니었다. 카를의 책략에 따라 미리 경매장 안에 잠입한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지만 이 정도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는데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다른 곳에서 경비를 서던 경매장 내부 병력들이 화들짝 놀라 중무장을 한 채 이들에게 달려왔다.

“뭐냐?”

“이놈들이 단체로 미쳤나? 왜들 저러지?”

“돌림병이라도 돌았나?”

칼과 방패, 갑옷으로 중무장한 삼십여 명의 병사들은 앞마당 저편에서 달려오는 오크들을 발견하고 당황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소리를 쳤다.

“이놈들! 당장 그 자리에 서지 못할까!”

아무리 수적으로 열세라지만 저 오크들은 언제나 하찮게 여기던 노예 무리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신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을 한 반면, 저쪽은 낡은 천으로 간신히 비부나 가린 처지가 아닌가? 그래서 대장은 저들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째 오크들의 진군이 멈추질 않았다.

맨손, 맨발에 무기는 고사하고 이쑤시개 하나 들지 않은 놈들이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계속해 자신에게 달려온다.

“당장 멈추지 않으면 내 검 맛을 보게 될 것이다!”

겁을 주기 위해 대장이 롱 소드를 길게 뽑았다. 순간 선두의 오크, 잘카토가 양손을 허공에 뻗으며 고함을 질렀다.

“와라, 나의 맹우여!”

쌔애액!

차가운 파공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눈부신 은빛의 원이 호선을 그리며 경매장의 높은 담장 위로 날아오른다. 은빛 섬광이 순식간에 잘카토의 손아귀에 잡힌다.

그것은 두 자루, 찬란하게 빛나는 백색의 검이었다. 병사들이 아연실색해 소리쳤다.

“뭐야?”

“무기가 제멋대로 날아왔어?”

“막 빛도 나는데?”

저 기이한 현상은 더 이상 대륙의 인간들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다. 비록 직접 보진 못했지만 풍문으로는 충분히 들은 바가 있다.

대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저 사술은? 안타레스 오크다!”

크로방스 내전과 안타레스 백국에 대해서는 이제 이종족 노예들 사이에서조차 그 소문이 퍼질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으아아…….”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안타레스 오크라 명명된 저 새로운 품종(?)의 오크들은 한 놈이 이름난 기사 대여섯을 가뿐히 상대할 정도의 가공할 몬스터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오크와는 전혀 다른 존재. 제플린 시내에서 건달이나 상대하던 그들의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지휘관답게, 대장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진정해라! 아무리 안타레스 오크라도 고작 한 놈이다! 별것 없어!”

그때였다.

잘카토의 뒤를 따르던 십여 명의 오크들이 일제히 손을 쳐든 것은.

“오라!”

“나의 맹우여!”

“나의 검, 나의 친우여!”

담장 위로 십여 개의 섬광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밤하늘을 밝히는 은은한 섬광의 물결, 그 속에서 잘카토가 검을 치켜세우며 호탕하게 외쳤다.

“모두 베어라!”

“크아아아아!”

선두에 선 푸른 곰 부족의 오크들이 맹수처럼 병력을 덮쳐갔다.

검과 방패가 맞부딪치고 불꽃이 튀었다. 요란한 금속음 사이로 연달아 피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기만 들었을 뿐, 여전히 갑옷 하나 걸치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감히 병사들이 따라갈 수준이 아니었다. 푸른 곰 일족의 최정예, 검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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