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제29장 뿌리 깊은 나무는 뿌리부터 말려 죽여라
1
그라임 왕국과 차탄 공국을 잇는 세텔라드 북부 교역로.
세텔라드 산맥을 관통하는 이 산길을 십여 대의 마차가 지나고 있었다. 마차 위로 온갖 물품들이 가득 실려 있고 그 주위를 백여 명이 넘는 기마병과 보병들이 호위한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목과 손이 묶인 오크와 엘프, 드워프 들의 행렬이었다. 저마다 허름한 옷가지만을 걸친 채 생기 잃은 눈으로 힘없이 마차 뒤를 따른다.
대열 앞의 가장 화려한 마차, 그곳에서 보석으로 치장한 통통한 중년 사내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호위에게 소리쳤다.
“이보게! 좀 더 속도를 높일 수 없겠나?”
무장을 갖춘 사내가 말을 몰고 다가와 정중히 말을 건넸다.
“노예들의 체력을 고려하면 이 이상은 무리입니다. 값이 떨어지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드라그 님?”
마차에 탄 중년 사내, 마울 상단 소속의 상인인 드라그는 인상을 쓰며 입을 닫았다. 그라임 왕국과 차탄 공국 사이의 교역을 주로 하는 마울 상단은 온갖 귀중품이며 특산품도 물론 다루지만, 가장 큰 교역품은 역시 이종족 노예들이었다.
드라그가 초조해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으음, 그건 그렇지만…… 이 근처에서 습격을 받은 이들이 한둘이 아닌지라…….”
호위 임무를 맡은 용병대 대장, 룸다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스트라샌드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프리지안 도적단이라도 이 정도 병력을 상대로는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군, 에잉!”
혀를 차며 드라그가 마차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도적단은 무슨 도적단인가? 그저 야생화된 노예들, 몬스터나 다름없는 것들이거늘!”
룸다드는 고개를 저으며 마차에서 조금 떨어졌다. 용병대의 다른 사내 하나가 룸다드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야생화된 노예라며 하찮게 볼 수 없습니다, 룸다드 님. 소문에 따르면 그놈들은 정말 인간 도적단처럼 영리하게 움직이고 있는 듯하니까요.”
룸다드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나도 알고 있다네. 스스로 프리지안 해방단이라 이름까지 붙이는 놈들인데 몬스터 취급이 가당키나 한가?”
프리지안 도적단.
이것은 서너 달 전부터 세텔라드 산맥 전역에 출몰하는 유명한 도적단의 이름이었다.
전원 오크나 엘프, 드워프 등의 이종족 노예들로만 이루어진 이들이 스스로를 프리지안 해방단이라 칭하며 상행 중인 노예 거래 상단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종족 입장에서야 동포들을 구하고 불의한 재물을 되찾는 것이겠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사유 재산을 탈취당하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도적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용병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윗분들이야 그냥 몬스터 취급을 하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보통 놈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이름난 그란 용병대도 놈들에게 당했다잖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노예로 살던 놈들이 대체 무슨 수를 써서 그리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건지…….”
저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리 의문점이 없었다. 원래 어쩌다 탈출한 노예들이 먹고살 길이 없어 인근 산속에 숨어 살며 행인들을 습격하는 일은 제법 있었으니까.
그리고 서너 달쯤 전부터 무슨 유행이 불었는지 대륙 전역에서 이종족 노예들의 대탈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노예들은 전부 오지로 도망쳐 행방을 감추었으니, 몬스터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것들이 도적단을 꾸리고 인간을 습격했을 거라는 추측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저 프리지안 도적단의 행보였다.
저들은 이종족 노예들로 이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철저히 전략적으로 움직여 가장 방어가 취약한 장소를 노린 뒤, 엄중한 호위를 받는 상단의 용병대를 너무도 쉽게 와해시키고 노예와 물품을 털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데 그 움직임이 실로 제대로 훈련받은 군대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교했다.
“심지어 왕국의 추적조차도 그놈들을 잡지 못했다는데, 이건 뭐 몬스터 정도가 아니라 유명한 산적이나 도적단 못지않잖습니까?”
프로지안 도적단의 피해가 속출하니 당연히 차탄 공국이나 그라임 왕국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군대를 동원해 세텔라드 산맥 외곽을 훑으며 소탕 작전을 몇 번이나 펼쳤다.
하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다.
무슨 수를 쓰는 것인지, 놈들은 기괴할 정도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흔적은 남겼다. 하지만 아무리 추적해 봐도 항상 오지 안쪽에서 모든 자취가 뚝 끊겨 버리는 것이다.
상식 밖의 일이었다. 몬스터들이 들끓는 저 세텔라드 산맥의 험지에서 노예들이 살아남았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거니와, 설사 그렇다 해도 거기 서식하는 이상은 분명 자취를 남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바운티 헌터를 고용해 추적하고 마법사를 동원해 아무리 탐지를 해 봐도 놈들의 근거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찾는 것은 언제나 잠깐 머물고 간 야영지의 흔적뿐이었다.
오죽하면 이름난 바운티 헌터, 다운트가 이런 발언마저 하며 포기 선언을 했을 정도였다.
-말도 안 돼! 이놈들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져 산맥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다가 다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지 않은가?
룸다드가 경계 어린 눈으로 대열 뒤의 노예들을 바라보았다.
“이해하기 힘들단 말이지. 오크 검투사 놈들이 있으니 전투에 익숙한 것이야 이해한다손 쳐도 대체 뭔 수로 군대의 탐색마저 피하는 건지…….”
용병대에서 뼈가 굵은 룸다드도 군대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자신은 전혀 없었다. 뒤따르던 용병 사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놈들도 나름대로 필사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저 같아도 제 형제나 가족이 저런 꼴을 당하고 있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하려 할 것 같습니다만.”
룸다드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용병 사내를 바라보며 그가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꼭 놈들이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군.”
“으음, 하지만 몬스터가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않잖아요, 절대? 짐승도 제 새끼 정도야 챙깁니다만 동족까지 챙기진 않습니다.”
용병 사내가 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대꾸했다. 룸다드는 빤히 사내를 바라보다가 그냥 말 머리를 돌렸다.
지위상 일단 한 소리 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도 용병 사내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칼 밥 먹는 이가 상대해야 할 적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면 그 대가는 자신의 목숨으로 지불하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룸다드가 파악한 프리지안 도적단의 행보는 결코 흉폭한 몬스터 무리가 아니었다. 보통 몬스터 대하듯 대하다간 분명 황야에 뼈를 묻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속내를 남들 앞에서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상인들 앞에선 그런 티는 내지 말게나. 불쾌하게 여길 게야.”
슬쩍 핀잔을 던지며 룸다드는 앞쪽 마차를 손가락질했다. 안에 탄 드라그와 다른 노예 상인들의 성난 목소리가 밖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 권왕이란 작자는 노예 따위를 사람 취급하질 않나, 가축이나 다름없는 것들이 뭘 안다고 동포를 해방한다고 설쳐 대?”
“그러게 말이오. 뭣도 모르는 것들이 쓸데없이 선동되어서 질서나 어지럽히고 말이야, 에잉!”
“얌전히 말만 잘 들으면 어련히 잘 키워 주고 먹여 줄 건데 뭐가 그리 나쁘다고…….”
시끄러운 상인들의 마차 뒤를 따라 상단 행렬은 계속 길을 갔다. 산속의 해는 짧은 법, 세텔라드 산맥을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점 해가 뉘엿뉘엿하게 저물어 간다.
그렇게 막 행렬의 선두가 고갯길을 넘어갈 때였다.
휘이이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귓가를 찢었다. 동시에 수십 대의 화살이 일제히 날아와 말을 탄 호위들에게 향했다.
“커억!”
“으악!”
“컥!”
순식간에 호위 세 명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헉!’
룸다드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쓰러진 이들 대부분은 체인 메일과 방패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다. 어떤 습격이건 선공은 화살로 하는 것이 정석인 바, 그래서 미리 충분히 대비를 했다. 그런데 이 화살들은 무장한 용병의 갑옷 틈새를 정확히 관통해 있었다.
‘이 정도면 정규 궁사 훈련을 받은 수준인데?’
투기장에서 활 쏘는 검투사 봤나? 오크 검투사들은 결코 궁술은 훈련받지 않는 것이다. 이종족 노예들로 이루어진 프리지안 도적단에게 이런 활솜씨가 있을 리 없었다.
‘설마 그놈들이 아닌가?’
혼란 속에서도 룸다드가 고함을 질렀다.
“적습이다! 모두 대열을 갖춰라!”
미리 훈련한 대로 용병대와 호위대가 발맞춰 빠르게 대열을 짰다. 방패를 들어 마차를 호위하며 노예들을 둘러싼 채 원진을 구축한다. 이렇게 하면 노예들의 이탈도 막을뿐더러, 만약 저들이 프리지안 도적단일 경우 화살 공세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용병들을 노리다 동족에게 화살을 꽂을 수는 없을 테니까.
과연 용병들이 대열을 갖추자 화살 비가 뚝 끊겼다. 대신 나무 여기저기서 활을 든 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분노한 기색이 역력한 남녀, 특히 여성 비율이 높은 그들을 보며 룸다드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전원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뾰족하게 나온 양쪽의 긴 귀는 저들의 정체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에, 엘프? 엘프가 어떻게 활을 다루는 거야?’
동시에 나무 등치 아래에 숨어 있던 한 무리의 병력이 요란한 외침과 함께 일어났다.
“우리는 프리지안 해방단!”
“억압받는 동포들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일어섰다!”
이들 역시 나무 위 엘프들처럼 복면으로 눈 아래쪽을 가리고 있었다. 덮고 있던 수풀을 밀어 던지며 수십 명의 중무장한 오크와 드워프 무리가 상단 행렬을 덮쳐 갔다.
“형제들이여! 고통받는 동포를 구하자!”
“와아아아아!”
상인들과 용병들이 동시에 외쳤다.
“몬스터다!”
“프리지안 도적단이다!”
☆ ☆ ☆
산길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거대한 도끼며 대검을 휘두르며 흉폭한 인상의 오크들이 용병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빈다. 외곽에선 할버드와 배틀 해머 등으로 무장한 드워프들이 대열을 짠 채 압박을 가한다. 머리 위로는 연거푸 화살이 날아온다. 나무 위에 오른 엘프들이 연달아 사위를 튕길 때마다 비명이 아우성친다.
“으악!”
“크아악!”
수하들의 비명 속에서 룸다드가 절규하듯 외쳤다.
“세이어시여! 저 흉폭한 놈들로부터 우리를 가호하소서!”
인간들끼리 싸울 때는 보통 투신 아레스의 이름을 부르곤 하지만, 상대가 인간이 아닌 이종족이나 몬스터일 땐 인류의 신, 세이어의 가호를 찾는 것이 기사나 용병들의 입에 밴 습관이었다.
세이어의 가호를 외치며 룸다드가 검을 뽑았다. 할버드를 든 드워프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룸다드가 이를 갈며 검을 내리쳤다.
“죽어라!”
“죽지 마라!”
상반된 대꾸를 돌려주며 드워프가 할버드를 휘둘렀다. 섬광이 눈앞에 번쩍이며 룸다드의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쳤다. 고통 속에서 정신이 아득해지며 룸다드는 의식을 잃었다.
“크어어…….”
쓰러지는 룸다드를 보며 드워프, 카다마이트는 힐끔 상대의 안위를 살폈다. 절묘하게 급소를 피한 덕에 중상이지만 생명은 끊어지지 않았다. 굉장히 고도의 기법이지만 오러 유저인 그에겐 별로 힘든 것도 아니다.
또 다른 용병 하나를 베며 회색 피부의 오크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어이, 카다…….”
“으익! 본명 부르지 마쇼!”
카다마이트가 펄쩍 뛰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그레이 오크, 회색 솔개 부족의 족장 하다툼이 뜨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여하튼 이놈들 안 죽이는 것 맞지?”
“맞소.”
현재 이종족 군세, 프리지안 해방단은 용병들을 상대로 살기를 뿌리지 않았다.
이미 며칠간이나 몰래 상단의 뒤를 따르며 상황을 정탐한 후다. 마울 상단 놈들은 살려 둘 가치도 없는 말종이었지만 룸다드가 이끄는 이 룸 용병단은 좀 달랐다.
‘오면서 보니까 애들이 인성이 꽤 괜찮더라고.’
룸 용병대는 딱히 노예들에게 가혹하게 굴지도 않았고, 간간히 식사에도 신경 써 체력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상인들이 노예를 막 굴리려 할 때 말려 주기도 했다. 대륙 전체에 퍼진 이종족에 대한 인식 변화, 그것의 영향으로 예전처럼 막 대하기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들이 조금씩 생겨난 것이다.
‘이런 인간들은 살려 둬야 그만큼 돌아오는 법이지.’
노예들에게 가혹하게 대한 이들은 모두 참살당하지만, 온화하게 대한 이들은 모두 살아남는다. 이런 사실이 퍼져 나가면 그만큼 다른 노예들에 대한 대우도 완화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채찍질을 하려 해도 한 번은 더 생각하게 될 테니까.
물론 그래 봤자 절대 다수는 여전히 예전처럼 행동하겠지만, 원래 변혁이라는 것은 이런 사소한 데서부터 출발하는 법이다.
“크억!”
“으악!”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용병들의 숫자가 점점 늘었다. 하지만 부상자는 있을지언정 사망자는 없었다. 이 이종족 전사들과 용병들의 실력 차는 그야말로 극심해서, 생명에 지장 없이 쓰러뜨리고도 상황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프리지안 해방단은 사실 도망친 노예들로 이루어진 이들이 아니었다.
드워프 오러 유저 카다마이트와 말로이드, 오크 오러 유저 하다툼에 단하임 일족의 족장 렐하드,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각 종족의 최정예들로 모인 이들인 것이다.
이것이 그라임 왕국과 차탄 공국이 이들을 찾지 못하는 이유였다. 노예 상단 털 때마다 다이만 터미널의 공간 포털을 이용, 그랜드 포지나 안타레스 백국으로 날라 버리는데 무슨 수로 흔적을 찾겠는가?
나무 위에서 렐하드가 소리쳤다.
“제3열, 사격 개시!”
엘프들이 순차적으로 계속 화살을 쏘아 댔다. 그때마다 화살이 정확히 용병들의 갑옷 틈을 노리고 허벅지며 어깨를 관통한다.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전투 불능에 빠지기엔 충분한 부상이다.
실로 놀라운 솜씨였다. 화살 자체야 누구나 쏠 수 있겠지만, 그게 과녁을 맞히게 되기까진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자리의 엘프들은 누구나 일류 궁사와 같은 활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화살을 당기며 렐하드가 속으로 웃었다.
‘정령력이 늘어서 그런가, 이제 이 정도 거리에서 맞히는 건 일도 아니군.’
바람의 정령과 소통하며 바람의 결을 읽을 수 있는 엘프들은 전통적으로 타고난 궁사였다. 왜곡되기 전의 옛이야기 속에선 항상 엘프 하면 활이란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잊힌 진실, 하지만 세계수가 부활하며 엘프들의 궁술에 대한 감각 역시 다시 부활한 것이다.
그렇게 전투가 한창 이어질 때였다. 대열 저편에서 오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라악!”
“응?”
말로이드와 하다툼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별 볼 일 없는 줄 알았던 용병대에 오크 전사를 쓰러트릴 기량을 갖춘 이가 있었던가?
뒤이어 드워프 전사의 비명도 들렸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오크와 드워프 전사들, 그들 뒤로 십여 명의 기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용병들과 달리 갑옷부터가 번들번들 윤기가 돌고 있었다.
“역시 나타났구나! 도망 노예 놈들!”
기사들은 하나같이 불길이며 뇌전이 일렁이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오러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말로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검사로군!”
이들은 마울 상단이 특별히 초빙한 차탄 공국의 기사들이었다. 상업을 국가의 근원으로 삼는 차탄 공국은 적절한 대가만 지불하면 이렇게 기사들도 상단의 업무에 참가시키곤 하는 것이다.
원래 기사라 하면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 아무리 명령이라도 고작 일개 상단 호위에 나설 리 없다. 하지만 차탄 공국의 기사들은 그 국민성상 명예라든가 긍지라든가 하는 개념이 상당히 약해서 이런 일이 꽤 잦았다.
마차 속에서 그라드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흐흐, 언제까지고 네놈들이 설치게 내버려 둘 줄 알았느냐!”
마검사들이 검을 뽑고 자신만만하게 이종족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진 건 돈 밖에 없는 나라답게 다들 값비싼 마갑으로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마검사들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얌전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말로이드가 자신의 대검을 매만지며 비릿하게 웃었다.
“우리가 왜 투항을 해야 하지?”
“노예들답게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당장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이거늘!”
마검사 중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걸친 갑주는 평범한 기사는 상대도 되지 않는 강력한 근력과 반사 신경, 그리고 방어력을 제공해 주는 뛰어난 마갑이었다. 이런 마갑을 걸친 차탄 공국의 기사들이라면 일개 병사 수십 명을 일거에 참살할 수 있는 것이다.
“네깟 놈들이 우리 상대가 될 것 같으냐?”
마검사들이 마갑의 마법을 발동시키며 육체 능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막 매운 맛을 보여 주겠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였다.
말로이드 옆에 서 있던 카다마이트가 할버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안 될 건 또 뭔데?”
우우웅!
선명한 적갈색 오러가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허억?”
마검사의 눈동자에 당혹과 경악이 사이좋게 스쳐 지나갔다. 뿐만이 아니었다. 하다툼도 말로이드도 각자 블레이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이건 대체!”
투구 속 마검사의 눈동자 위로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선명히 비친다. 마검사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뭐, 뭐야!”
“뭐긴.”
실소를 흘리며 카다마이트가 몸을 날렸다.
“네 죽음이다.”
서걱!
단 일격에 마검사의 몸이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길게 갈라졌다. 강력한 마법의 보호가 깃든, 아다만티움을 섞어 만든 그 튼튼한 갑옷이 일격에 쪼개진 것이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마검사가 좌우로 갈라져 바닥을 나뒹군다.
“으, 으히히힉!”
뒤에 서 있던 마검사 하나가 공포로 인해 괴이한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 말로이드와 하다툼도 몸을 날렸다. 블레이드 오러를 흩뿌리며 세 오러 유저가 마검사들을 향해 잔혹한 참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차탄 공국의 기사들, 이들의 장비는 분명 수준 높고 값비싼 것이었다.
얼마나 값비싸냐면…… 유서스가 쓰는 마갑 엘드라드의 장신구 하나 정도 가격?
애초에 마검사가 날고 기어 봤자 마검사일 뿐이다. 대륙 최강의 마검사로 위명이 자자한 황금기사가 오러 유저 수준인데 이들의 수준은 그 황금기사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반면 이 자리엔 제대로 된 오러 유저만 무려 세 명이나 있다.
상대도 되지 않았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차탄의 마검사들은 모조리 피 웅덩이에 몸을 뉘였다. 용병들과 달리 이놈들은 딱히 노예들에게 잘해 주지도 않았고, 또한 동료를 죽이기까지 했다.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마검사들이 맥없이 쓰러지자 용병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으어어…….”
“기사님들마저 당하다니…….”
용병들이 하나 둘 뒷걸음질 쳤다. 드워프나 오크가 오러를 쓰는 것은 이제 별로 신기하지 않았다. 안타레스 백국에 그런 놈들 많다는 소리는 들었으니까.
하지만 하필이면 자신이 그런 놈들을 만나게 될 건 또 뭔가? 용병들 모두가 자신의 재수 없는 팔자를 저주할 때였다.
나무 위에서 렐하드가 고함을 질렀다.
“항복하라!”
용병들이 주저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렐하드가 다시금 소리쳤다.
“아니면 도망가고 싶은 자, 도망쳐라! 쫓지 않는다!”
그러자 용병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기사야 도망이 항복보다 더한 수치겠지만, 용병 입장에서 항복과 도주는 꽤 의미가 다르다. 항복은 일거리에서 손 떼는 무책임한 짓, 하지만 도망은 최선을 다했지만 힘이 달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걸 아는 렐하드가 적절한 타이밍에 소리를 질렀고, 기다렸다는 듯 용병들이 하나 둘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 자리엔 상인들과 이종족 노예들 외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마차 속에서 그라드와 다른 노예 상인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이놈들! 내가 네놈들에게 얼마를 주었는데?”
“무책임한 놈들!”
“당장 돌아오지 못할까!”
고함치는 상인들의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덮어 간다. 차가운 불길을 눈에 담은 오크 전사들의 그림자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오크들을 보며 상인들이 사시나무처럼 떨어 댔다.
“으으으…….”
잠시 후, 마차 안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 ☆ ☆
엘프들을 이끌고 렐하드가 나무에서 내려왔다. 세계수에서 생활하는 이들답게 나무 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평지를 걷듯 수월하게 바닥에 착지하며 렐하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상당한 용병들을 제외하고, 더 이상 그 자리에 살아 있는 인간들은 없었다. 평소 해 온 대로 몇몇 오크와 드워프들이 잽싸게 마차에 올랐다. 이 상단 행렬이 운송하고 있는 것은 이종족 노예뿐만이 아니었다. 값비싼 귀중품과 특산품의 물량도 상당했다.
말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식량만 빼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그렇소. 평소대로.”
렐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그동안 습격해 빼앗은 상단의 물품 중, 식량을 제외한 다른 귀중품들은 전부 인근의 가난한 인간 마을에 뿌리고 있었다.
물론 가난하게 사는 인간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우러나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같은 동포도 아니고, 아무리 상관없는 이들이라지만 노예 취급하던 인간과 같은 종족인데 밥 좀 굶고 산다고 불쌍하게 여기진 않는다. 저쯤 되면 자비로운 게 아니라 배알이 없는 쪽에 가깝다.
그저, 그 많은 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이만 터미널을 통과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다이만 터미널의 위치는 오지 한복판이다. 오러 유저와 일족의 최정예들이 호위한다 하더라도 이동 도중 심심찮게 몬스터에 의한 피해가 발생하는 험지 중의 험지다. 느긋하게 짐마차 끌고 갈 만큼 만만한 곳이 절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비밀 유지를 해야 하니 주변 몬스터를 토벌한다든가 해서 길을 닦아 놓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들고 가지도 못할 거, 이렇게 환심이라도 사 두는 게 낫지.”
짐을 풀어 재포장하는 이들을 보며 카다마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프리지안 해방단은 세탈라드 산맥 인근의 가난한 이들에겐 엄청나게 인기가 좋았다.
황금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 차탄 공국답게, 부의 격차 역시 대륙에서 제일가는 수준이었다. 다른 나라도 귀족과 평민, 농노의 생활수준은 엄청나기 마련이지만 차탄 공국은 특히나 심했다. 차탄 공국의 빈민이 되느니 차라리 오크 노예가 되는 것이 낫다는 농담마저 돌 정도였다.
귀중품을 아낌없이 뿌린 덕에 세텔라드 인근의 평민들에겐 더 이상 오크나 드워프, 엘프는 노예 종족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보살펴 주는 성자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다른 지역에도 소리 없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말로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살짝 양심이 찔리긴 하지만 말이지…… 성자는 무슨?”
“뭐, 상관없잖소? 어쨌거나 결과는 좋으니까.”
렐하드가 빙그레 웃었다. 하다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지도 못할 것 갖다 주니 저리도 좋아한단 말이지? 참 인간들은 신기해.”
그러는 동안 마차 위의 짐들이 대부분 재포장을 마쳤다. 프리지안 해방단이 활동한 지도 어언 석 달째, 중간에 하다툼이 전쟁으로 잠깐 빠지는 일을 제외하곤 항상 손발 맞춰 움직이던 이들이었다. 다들 익숙한 손놀림으로 인근의 인간 마을에 나누어 줄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문득 렐하드가 카다마이트에게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카다마이트, 오러 쓰는 거 들키면 안 되는 것 아니었소?”
안타레스 백국의 이종족들이 오러를 구사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나 카다마이트는 유명한 오러 유저, 테츠발트 경을 해치운 데다가 그 장면을 영상 크리스탈로 많은 귀족에게 보인 바 있다. 오러의 색상이나 외모가 꽤 알려져 있는 것이다.
괜히 이들이 복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안타레스 백국과의 관계가 들통 나게 된다.
하지만 카다마이트는 태연한 태도였다.
“구원자께서 말씀하시길, 급하다 싶으면 그냥 쓰라 하셨소. 우기면 장땡이라나?”
“그래도 되는 거요?”
“조금 더 지나면 오러 안 써도 어차피 못 우기니까 상관없댔소.”
“그렇구만.”
렐하드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다툼은 여전히 ‘뭔 소리여?’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마차 위의 짐을 재포장하는 한편 다른 이들은 묶여 있는 이종족 노예들의 줄을 끊어 주고 있었다. 목과 손에 굳건히 묶인 오랏줄에서 풀려날 때마다 묶여 있던 오크와 엘프, 드워프 들은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모두의 구속이 풀리자 탈카타가 우렁차게 외쳤다.
“자! 동포들이여! 자유의 땅으로 갑시다!”
하지만 반응은 기대하지 않았다.
이제껏 몇 번이나 동족들을 구해 냈지만, 그때마다 이종족 노예들의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그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노예 생활에 젖어 있던 이들.
그들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 대부터 노예였던 이들.
‘그런 이들이 바로 자유를 깨닫기가 무리지. 나 역시 그러하지 않았는가?’
푸른 곰 부족에서 오크의 전통을 접한 탈카타는 더 이상 자신이 레펜하르트의 노예라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물론 레펜하르트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그는 자신을 구해 주었고, 노예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노예의 충성이 아닌, 멘토를 향한 자유로운 오크로서의 충성이었다. 탈카타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충성이었다. 이 차이는 겉보기엔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자, 어서 백국으로 돌아가야지.’
그렇게 탈카타가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뒤늦게 등 뒤에서 환호가 터졌다.
“와아아아!”
“자유다!”
“이젠 더 이상 노예가 아니야!”
풀려난 노예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크들도 엘프들도 드워프들도, 모두가 자유로워진 손발을 매만지며 마음껏 해방을 만끽한다. 이들은 그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반응이 늦었을 뿐이었다.
“어어…….”
탈카타는 당황하며 저들을 바라보았다. 그뿐 아니라 카다마이트도 말로이드도, 렐하드와 하다툼 역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행했던 모든 일들, 모든 소문들, 그것들이 드디어 대륙의 다른 동족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삶만이 최선이라 생각하며, 모든 것이 운명이라 여기며 순종하던 동족들이 드디어 변화하기 시작했다.
탈카타는 눈을 껌벅였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졌다.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쁨 속에서 흘리는 저들의 눈물은…….
“에이 씨, 왜 주책맞게 나까지 눈물이 나려고 하지…….”
분명, 자유를 아는 자들의 눈물이었다.
2
초여름의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안타레스 백왕성의 앞뜰.
뜰 한가운데 선 푸른 곰 부족의 세 번째 투사, 타시드가 소리 높여 외쳤다.
“러스! 자네는 틀림없는 내 친우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난 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터질 듯한 녹색의 근육질 어깨 위로 투기가 피어오른다. 투기 속에서 타시드가 참마도, 다카르를 뽑아 들었다. 야수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햇살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하지만!”
타시드의 전신에서 숨길 수 없는 살기가 터져 나왔다.
“지금은 우정을 잊겠다!”
분노와 증오가 담긴 타시드의 눈빛이 눈앞의 인간 사내, 러스에게 향했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우우웅!
굉음과 함께 청록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다카르의 검신을 타고 올라 창공을 꿰뚫을 듯 솟구쳤다.
흔들림 없는 빛을 발하는 찬란한 타시드의 블레이드 오러를 바라보며 러스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타시드…….”
처연한 어조로 러스는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양손을 들었다. 러스 역시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화르륵!
푸른 오러가 불길처럼 피어올라 손가락 마디마디를 휘감고 양손을 가득 감쌌다.
“나 역시 그대에게 우정을 가지고 있지만…….”
오러의 불길을 일렁이며 러스가 자세를 낮췄다.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한 야수처럼 전신이 팽팽히 당겨진다. 눈빛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러스가 신념 가득한 눈빛을 빛냈다.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타시드의 살기가 더더욱 짙어졌다.
살기! 실로 엄청난 살기!
하지만 그 살기는 러스를 묘하게 비껴가고 있었다. 분명 러스 쪽으로 흘러가고는 있지만, 정확한 목표는 러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러스의 왼손에 들린 희고 둥근 물체, 그것을 향해 맹렬한 살기를 퍼부으며 타시드가 악을 써 댔다.
“우정의 이름으로 말한다! 러스! 당장 그 저주받은 물건을 치워라!”
그것은 비누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좀 씻어라, 이 오크야! 도대체 1년이나 목욕 안 했다는 게 말이 되냐!”
오러를 더더욱 끌어 올리며 러스도 악을 써 댔다.
조금 전의 일이었다.
평소처럼 러스와 타시드는 신 나게 대련을 하며 실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대련을 마친 뒤 수건으로 땀을 닦을 때였다.
문득 러스가 인상을 썼다. 타시드가 쓰고 난 수건, 그것이 무슨 걸레처럼 새까매져 있었던 것이다.
기가 차 러스가 물었다.
“……타시드, 언짢아하지 말고 대답해 주게. 대체 언제 목욕했나?”
타시드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작년 여름!”
러스가 발작했다.
“크악!”
기가 막혔다. 둘은 단순히 검술만을 겨룬 것이 아니라 맨손 체술이며 그라운드 기술 등, 거의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해 왔다.
‘내가 지금 1년 넘게 목욕 안 한 놈이랑 뒹굴었었단 말이냐!’
당장 러스는 부엌으로 달려가 비누를 들고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사태가 일어났다.
유목 생활을 주로 하는 오크들은 언제나 물이 귀하며, 그렇다 보니 목욕을 잘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드물게 보이는 샘은 일족의 목을 축일 귀중한 수원水原, 감히 거기에 몸을 담그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오크들은 물에 몸을 담그는 행위를 질색하곤 했다. 타시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타시드가 버럭 성을 내며 소리쳤다.
“대초원의 아들을 모욕할 셈인가!”
“아니, 목욕시킬 셈이다. 야! 너 그러다 병 생겨!”
건조한 초원 지대에서야 1년에 한 번씩만 목욕해도 별문제 없었겠지만, 기후가 달라졌으니 여기서는 자주 몸을 씻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타시드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린 성자님께 치료받으면 된다!”
“……적어도 목욕이 필요하다는 자각은 있구먼.”
말하는 걸 보니, 목욕 안 하면 병 생길지도 모른다는 건 아는 것 같다.
“그걸 알면서도 싫다고 버티고 있냐? 네가 애냐?”
“가끔은 현자도 아이에게 배우는 바가 있는 법이다!”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는 꼴이, 슬슬 제정신도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물러설 수는 없다. 친구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여기선 강압적으로 나가는 것이 진정한 우정인 법!
흥분한 타시드를 차분히 바라보며 러스가 힐끔 등 뒤로 질문을 던졌다.
“물 다 끓었습니까, 아틸카?”
오러를 끌어낸 채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거대한 목욕통이 놓여 있었다. 목욕통 밑에선 주술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올라 통에 담긴 물들을 데우는 중이었다.
목욕통 안에 손을 집어넣은 아틸카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화답했다.
“적절하게 따듯하군. 묵은 때를 벗기기에 최적의 온도야.”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베지 않는 트롤들은 나무를 때어 불을 피우는 일이 거의 없다. 죽은 가지들을 모아 식사를 준비하거나 어둠을 밝히기 위해 화톳불을 피우는 정도다. 도자기나 유리 등을 구울 때처럼 많은 화력이 필요한 일은 전부 이처럼 주술의 불꽃으로 해결하곤 했다.
아틸카의 답변에 러스가 눈을 빛냈다.
“자, 포기해라, 친구!”
타시드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목욕통을 바라보았다. 오크 장정 두어 명은 충분히 들어갈 듯한 커다란 통, 그곳에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지금 타시드의 눈에 그 모습은, 지옥의 뚜껑이 열려 유황불 연기를 피우는 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검자루를 힘차게 쥐며 타시드가 고개를 저었다.
“푸른 곰 일족의 전사에게 포기라는 단어는 없다!”
뭔가 말은 그럴듯한데, 그래 봤자 목욕하기 싫다는 소리다. 러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에휴…….”
생사대적을 만난 듯 투지를 끌어 올리는 타시드를 보며 러스는 머리를 긁었다. 그와 타시드의 기량은 큰 차이가 없었다. 저렇게 싫다고 난동을 부리면 러스의 힘으로 제압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물론, 러스에겐 해결법이 있었다.
“아틸카.”
물 끓여 놓고 재밌다는 듯 지켜보고 있는 장신의 트롤을 향해 러스가 협조 요청을 건넸다.
“도와줘요.”
“기꺼이!”
안 그래도 아틸카 역시 슬슬 저놈 좀 씻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틸카가 팔뚝을 걷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걸음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주술을 써 전신을 강화하기까지 했다.
“내 몸이 크게 자라 노간주나무 푸름을 띤 삼림을 발로 찼네…….”
주술적인 가락을 흥얼거리며 다가오는 흉악한 인상의 트롤을 보며 타시드가 절망 어린 외침을 토해 냈다.
“아틸카! 당신마저도!”
“무슨 사람을 배신자 취급하고 그러나. 처음엔 좀 겁나겠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자네도 즐기게 될걸세.”
긴 팔을 좌우로 풀며 능글맞게 대꾸하던 아틸카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다보니 뭔가 뉘앙스가 미묘하구먼.”
우측의 러스와 좌측의 아틸카가 먹이를 사냥하듯 포위망을 좁혀 온다. 타시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을 흘렸다.
“아아, 아버지 라트여, 나를 가호하소서!”
타시드가 기합을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크어어어!”
쓴웃음을 흘리며 러스와 아틸카도 마주 몸을 날렸다. 요란뻑적한 타격음이 백왕성의 앞뜰을 가득 메웠다.
딱! 딱! 우당탕탕!
물론 상황은 대단히 쉽게 끝났다. 현재 아틸카는 러스와 타시드가 합공을 해야 겨우 감당할 만한 강자였다. 물론 둘의 재능이 워낙 출중하니 몇 년 내에 따라잡히겠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아틸카의 기량이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런 아틸카가 러스와 손잡고 타시드를 몰아붙이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러스의 관절기가 타시드의 양팔을 제압했다. 아틸카의 주술이 스피리츠 웨폰이 걸린 참마도, 다카르를 타시드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무장 해제된 타시드를 바라보며 러스가 히죽 웃었다.
“자, 씻자, 친구.”
“으어어어…….”
용맹한 오크 투사의 눈빛에 두려움이 감돌았다.
3
시리스와 함께 백왕성의 회랑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앞뜰을 바라본 레펜하르트의 눈에 괴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응?”
짧은 반바지만 걸친 차림으로 타시드가 앞뜰의 기둥 하나를 붙잡고 있었다. 표정이 대단히 절박한 것이, 마치 절벽에 매달려 있는 실족자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아틸카와 러스가 그런 타시드의 허리와 다리를 붙잡고 열심히 당기는 중이었다.
“싫어! 싫어! 싫어!”
“네가 무슨 고양이냐! 기둥에 손톱 좀 세우지 마!”
호통을 지르며 러스가 억지로 타시드의 두 팔을 기둥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소리쳤다.
“이빨로 기둥 물지도 말고! 재주도 좋다, 뭔 수로 이빨로 오러를 끌어 올린 거야?”
버둥대는 타시드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커다란 철제 통을 번갈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우뚱 숙였다.
“뭐야? 오늘 저녁 메뉴는 타시드탕인가?”
실소를 흘리며 시리스가 대답했다.
“타시드 목욕시킨대요.”
“오!”
안 그래도 저놈의 오크들, 어떻게 목욕시키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화색이 되어 레펜하르트가 러스와 아틸카, 두 사람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힘차게 세웠다.
‘잘했어!’
주걱턱을 움직이며 아틸카가 빙그레 웃었다.
‘별말씀을!’
자신의 멘토이자 은인, 레펜하르트에게마저 배반당한 타시드가 괴이쩍은 신음을 흘려 댔다.
“으갸으갸으아아!”
둘은 열심히 타시드를 통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타시드가 속절없이 지옥의 입구(?)로 끌려갈 때였다. 회랑 반대편에서 오크 여인 한 명이 앞뜰로 걸어 나왔다. 날렵하면서도 탄탄한 체구에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 푸른 곰 부족의 대모 스탈라였다.
“응? 이 양반들 뭐해?”
스탈라를 본 타시드가 화색이 되어 소리쳤다.
“대모님! 도와주…….”
순간 타시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왠지 대모님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묘하게 피부가 뽀샤시한 데다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투사라곤 하지만 스탈라 역시 여성,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녀가 뺨을 매만지며 생글생글 웃었다.
“어머? 티가 나나? 아유, 인간들의 비누란 거, 정말 좋더라. 거봐, 남편. 남편도 목욕하니까 참 좋잖수?”
타시드의 시선이 스탈라의 등 뒤로 향했다. 그곳에 웅장한 체구의 오크 투사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허허허…….”
타시드와 칼켄이 눈을 마주쳤다. 절망 속에서 타시드가 물었다.
“족장님…… 이제…… 끝인 겁니까?”
“아들아, 영원한 더러움은 없는 법이지.”
그 비장한 목소리는 러스와 아틸카조차 잠시 숙연케 할 정도였다. 물론 그 비장미는 이어진 스탈라의 말 때문에 바로 깨져 버렸지만.
“뭐 하니? 어서 안 씻기고?”
“러스! 우정의 이름으로 간청한다! 제발 이 손을 풀어 다오!”
“우정의 이름으로 답하노니, 타시드. 자넨 슬슬 씻을 때가 되었다네.”
풍덩!
요란한 물장구 소리와 함께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 남은 것은 뜨끈한 통 안에 앉아 하염없이 허망한 표정을 짓는 오크 청년뿐이었다.
“야, 그렇게 더럽혀졌다는 표정 좀 그만 지을래? 사실은 깨끗해진 거거든?”
소리치는 러스와 마냥 고개를 돌리는 타시드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평화롭구먼.”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평화롭네요. 오늘은 그 이상한 여자도 엘븐 포레스트 가 있으니까.”
“응?”
“아, 아녜요. 아무것도.”
☆ ☆ ☆
시리스와 함께 레펜하르트는 백왕성 3층으로 향했다. 3층 외곽에 위치한 커다란 방, 그곳은 알 포트를 위해 마련해 놓은 성내의 신전이었다.
그곳에 들어서며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보게, 마켈린.”
알 포트의 성물이 걸린 단상, 그 위에서 백발이 성성한 드워프 하나가 기척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으, 으엑?”
민둥민둥한 턱을 드러낸 드워프 노인이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를 보더니 가슴을 쓸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놀랬잖습니까, 구원자시여.”
드워프 노인, 마켈린의 손에 들린 북실북실한 털뭉치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수염 손질 중이었나? 이거, 미안하게 됐군.”
바로 사과하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시리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니, 마켈린 님. 그 수염, 드워프들은 알 포트께서 내려 준 거란 걸 다 알고 있다면서요? 그런데 왜 그리 놀라세요?”
드워프들이 마켈린의 수염에 경의를 보이는 것은 그들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신께서 내리신 성물이라서이지, 그게 진짜 마켈린의 수염이 아니란 걸 몰라서가 아니다.
신성한 수염을 잽싸게 붙인 뒤 마켈린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시리스 양. 그대의 옷은 태어날 때부터 입고 나온 것이 아니지만 벗고 있을 때 누군가가 보면 당연히 놀라지 않겠소?”
레펜하르트나 시리스는 드워프가 아니니 괜찮지만, 같은 드워프끼리 민둥턱을 보이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그런 문제예요?”
묘한 데서 종족 간의 문화 차이를 느끼며 시리스는 혀를 찼다. 나름 드워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의관을 단정히 한―그러니까 붙인 수염을 자연스럽게 다듬었단 소리다― 마켈린이 레펜하르트에게 자리를 권했다. 신전 안쪽 테이블에 둘러앉은 뒤 마켈린이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상의할 일이 있네, 마켈린.”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차탄 공국을 공격해야 할 때가 됐어.”
대륙에서 제일가는 상업 국가, 차탄 공국.
그라임 왕국과 크로방스 왕국, 바실리 왕국, 라스틸 공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쥬란 강을 통해 신성 바슈탈론 제국과 할라인 왕국, 테이칸 왕국과도 교역하는 차탄 공국은 그야말로 대륙의 모든 물산이 오가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런 만큼 노예 매매 역시 대부분 차탄 공국 수도, 제플린을 통해 거래되고 있었다.
엘프는 워낙 수명이 길어 제플린에서 밖에 생산되지 않는 주요 특산품이다. 드워프 역시 부락 단위여야 노예로서 쓸모가 있는 특성상, 제플린의 중개가 있어야 제대로 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드워프 노예는 보통 마을이나 일족 단위로 단체 구매를 해야 하는 만큼 오가는 액수도 컸다. 믿을 만한 중개 상인이 있어야 안심하고 거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크들 역시 제플린을 통하는 숫자가 상당하며, 워낙 유동 인구가 많다 보니 연금술사 길드 역시 규모가 컸다. 힐링 포션의 구매자가 많은 만큼, 제플린에 붙잡혀 있는 트롤들의 숫자도 대륙에서 가장 많았다.
“그동안 손 닿는 대로 많은 이들을 구해 냈지. 슬슬 자리를 잡기도 했고.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제플린을 공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네.”
차탄 공국, 특히 수도 제플린에 묶여 있는 이종족 노예의 숫자는 엄청나다. 그곳의 동포들만 해방해도 백국의 이종족 숫자가 단숨에 두 배 이상 치솟을 것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엘프들을 대량으로 구해 낼 수가 있다.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플린의 상인들이 몰락하면 대륙 전체의 노예 매매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니까. 전생 때도 제국을 세우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이 이거였지.”
선공을 거의 하지 않았던 레펜하르트가 유일하게 먼저 공격한 나라가 바로 차탄 공국이었다. 다른 나라는 대화를 통해 어떻게든 그의 뜻을 이해해 주길 기다렸지만, 차탄 공국만큼은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구원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곳만큼은 결코 좌시할 수 없지요.”
마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제플린의 수도 방위 능력이나 병력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겠군요.”
“대충은 알고 있다네. 시기가 다르니 조금 오차가 있긴 하겠지만.”
어차피 전생에서 한번 털어 본 곳이니만큼, 레펜하르트도 제플린에 대한 꽤나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사육 시설까지 갖춘 대규모 엘프 경매장이 둘, 엘븐하임과 엘로인. 유통을 맡은 엘프 경매장이 넷, 대규모 오크 경매장이 열둘이고 드워프 경매장이 일곱 곳이지. 연금술사 길드는 한 곳이지만 규모가 커서 잡혀 있는 트롤의 숫자도 쉰 명 정도는 될 걸세. 아틸카가 예전에 조사해 뒀더군. 너무 위험해 여태껏 손을 못 댔다고 하던데.”
마켈린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제플린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륙 제일의 상업 도시이며 인구만 이십만에 가까운 대도시, 유동 인구도 십만이 넘으며 수많은 용병대와 상단 호위대가 오가는 제플린은 그 인구 자체로도 강력한 철옹성이다.
“일만의 정예병에 마검사만 천 명이 넘는다. 역시 돈 많은 나라라 비싼 마도구를 막 뿌린다니까.”
왕실 근위대 역시 마검 정도는 전원 착용하고 있으며, 마갑과 마검으로 중무장한 왕실 직속 차탄 기사단의 경우라면 타국의 이름난 기사단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무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차탄 공국 최강의 전력, 넷이 모이면 오러 유저 하나를 감당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제플린 나이츠쯤 되면 감히 마검사라 폄하할 수 없는 수준이다.
수도 방비 수준으로만 보면 신성 바슈탈론 제국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워낙 값비싼 물건이 대량으로 오가는 요충지인 만큼 제플린은 군사력에도 어마어마한 액수를 투자하고 있었다.
“단지 군사 편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아 제국 수도에 비해 통제력은 약한 편이지. 하지만 까다롭다는 건 틀림없다네.”
레펜하르트가 설명을 마치자 마켈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랜드 포지의 수장으로서, 그 역시 동족들이 가장 많이 붙잡혀 있는 차탄 공국에 대해 언제나 신경은 쓰고 있었다. 하지만 힘에서 상대가 안 되기에 이제껏 어떻게 손을 못 썼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현재의 안타레스 백국으로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문득 마켈린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생 때엔 어떻게 공략하셨습니까?”
“그땐 별로 안 어려웠지.”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단 제플린 왕궁에 미티어 하나 떨어트려서 수뇌부 전멸시켜 통제력을 빼앗고…… 그다음에 환영술로 도시 내에 언데드가 창궐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혼란을 끌어냈지. 대부분 마검사로 이루어진 차탄 기사단은 그냥 AMP 쇼크웨이브 터트려서 처리했고…… 수도 방위군은 헬 오브 더 월드로 그냥 악마 좀 불러서 해치웠다. 그 틈에 다른 이들이 동포들 구출했고. 우리 편 피해가 전무한 깔끔한 공략이었지.”
마켈린과 시리스가 입을 쩍 벌렸다. 시리스가 물었다.
“레펜하르트 님.”
“응?”
“그 헬 오브 더 월드란 거, 악마 일만 개체 소환하는 거죠?”
“응.”
마켈린도 물었다.
“그 미티어라는 거, 대체 범위가 어느 정도입니까?”
“그때그때 다른데? 제플린에 떨어트렸던 건 왕궁 소멸시키고 근처 거리 두어 개 정도 같이 휘말린 정도였던 것 같아.”
“…….”
일만의 악마를 부르고 하늘의 별로 떨어트려 왕궁을 통째로 소멸시키고 도시 안을 좀비로 가득 채워?
마켈린과 시리스는 둘 다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듣고 있자니 참, 상대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제플린 시민들이 불쌍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시리스가 더듬거리며 질문했다.
“대체 인명 피해가 얼마나…….”
“한 일만 명쯤?”
“어, 생각보다는 적네요? 인구 이십만의 대도시에서 일만이면 저지른 짓에 비해 그리…….”
시리스가 표정을 좀 풀려 할 때, 레펜하르트가 딴청을 피우며 작게 말을 덧붙였다.
“……살아남았던 것 같은데.”
“…….”
마켈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훌륭한 마왕이셨군요.”
“아니, 그게 우리 편 피해를 최소화하려다 보니…….”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레펜하르트를 향해 맹렬히 눈을 흘기고 있었다. 저런 짓을 해 놓고 뭐? 마왕으로 불리긴 억울해?
“아니, 그게…….”
레펜하르트가 뺨을 긁었다.
사실 저때도 저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생 때는 지금처럼 정보를 미리 알고 있어 오지에 사는 강력한 이종족 전사들을 모두 합류시킬 수가 없었다. 칼켄이나 스탈라가 이끄는 오크 전사들이라든가 이니야의 스티리아 일족처럼 오지의 강력한 엘프들, 그리고 아틸카의 트롤들도 없던 시절이었다. (저들은 모두 안타레스 제국이 세력을 넓힌 다음에야 합류한 이들이다.)
믿을 만한 전력은 그랜드 포지와 단하임 일족, 그리고 시리스와 타시드뿐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이종족들은 노예로 살아가다 간신히 구출된 약한 이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레펜하르트가 본격적으로 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억울한 부분은…….
“어이, 마켈린. 저 작전, 자네가 세운 거였거든?”
“엑? 그랬습니까? 거참, 내 성격이 그렇게까지 변했었나?”
마켈린이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당시라면 자신도 저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 이쪽 힘은 모자라고, 상대는 강력하니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 피를 볼 각오를 했을 법도 하다.
“하여튼, 지금은 그때만큼 마력이 높지 않으니까 저렇게는 못하고…… 또 할 수 있어도 저랬다가는 엄청나게 반감을 살 테니 다른 방법을 찾고 싶네.”
“그렇군요…….”
마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수염을 쓰다듬었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떠오르는 거야 있습니다만…….”
“어떤?”
레펜하르트의 물음에 마켈린이 말을 이었다.
“지금 제 생각에는 구원자께서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의아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마켈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요. 저보다 더 전문가가 있지 않습니까? 인간을 상대하는 법은 인간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 ☆ ☆
카를은 오늘도 집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서재에 앉아 온갖 서류를 빠르게 처리하는 그 모습은 과연 일국의 재상에 걸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어색한 광경도 있었으니, 그는 한 손으론 사인을 하며 반대 손으로는 열심히 묵직한 아령을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로 몸 만들 시간이 영 나질 않아서요.”
주군을 맞이하며 카를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감탄을 흘렸다.
“자네, 몸이 상당히 좋아졌군.”
안 그래도 신장 185센티미터에 기사다운 탄탄한 몸을 지녔던 카를이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로부터 맨투맨으로 강습을 받아 온 지금, 카를은 떡 벌어진 어깨에 두꺼운 팔뚝, 풍성한 수염을 지닌 우락부락한 외모로 변해 있었다.
일하는 것만 보면 일국의 재상이 아니라 산적 두목이 하루의 수입을 셈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일단 앉으시지요. 차라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찾아온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를 향해 카를이 자리를 권했다. 과연 좋은 혈통의 귀족답게 단순한 동작 하나하나에도 귀족다운 우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