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라이벌
1
트롤 구루, 아틸카는 대륙 각지에서 동족을 구해 내는 한편 숨어 사는 일족들을 찾아 백국으로 이주하기를 권했다.
물론 설득이 쉽지는 않았다. 인간이 트롤을 얼마나 가치 있는 몬스터로 보고 있는지는 트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땅으로 일족을 모두 옮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일 리 없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트롤들을 구해 내며 대륙을 떠돌았던 아틸카의 발언에는 그만큼의 무게가 있었다. 안타레스 백국의 소문 역시 결단을 내리는 데 한몫했다.
결국 소규모로 인간의 눈을 피해 살아가던 수백 명의 트롤 부락이 글로텐 산맥으로 이주해 왔다.
엘븐 포레스트로부터 남쪽으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또 다른 수림.
그곳에서 백여 명의 트롤들이 열심히 거주지를 짓고 있었다. 이미 세 개의 마을이 완성되었고, 지금 또 하나의 마을이 차근차근 형태를 갖추는 중이다.
트롤들의 숲, 그 한가운데 생긴 거대한 공터에는 이미 수십 채의 움막집이 완성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트롤의 가옥답게 땅을 1미터가량 깊숙이 판 뒤 낮은 벽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쌓은 반지하 형태의 움막이었다.
마을을 거닐던 시리스가 트롤들의 가옥을 살펴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아, 집들이 굉장히 예쁘네요?”
움막이라고 해서 결코 초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흙을 개어 벽을 쌓고 구운 기와를 얹은 지붕, 온갖 형형색색의 도자기들로 내부를 장식하고 외벽이며 바닥에는 아름다운 문양의 타일이 붙어 있다. 마을 전체가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색채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놀라운 것은 모든 창문에 유리가 끼워져 있다는 점이었다.
유리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라, 보통은 대영주나 왕족만이 쓰는 물건이다. 오죽하면 스테인드글라스라는 형식이 탄생했겠는가? 저 스테인드글라스라는 게 겉보기엔 아름답지만, 사실은 투명한 판유리나 색유리를 쓰기에는 너무 단가가 비싸다 보니 자잘한 유리 조각을 붙여 창문으로 만들다 생겨난 기법인 것이다.
“……백국에서도 유리를 쓰는 건물은 기껏해야 백왕성이나 신전 정도인데 여기는 누구나 유리를 쓰다니…….”
시리스의 감탄에 함께 걷던 레펜하르트가 별것 아니란 듯 대답했다.
“전통적으로 흙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고, 주술력으로 지질 성분을 변환시킬 수 있는 트롤들에게는 유리 제조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거든.”
현 시대엔 잊혔지만, 드워프의 문화가 돌과 철로 대변되듯 다른 종족들에게도 각자 특별한 문화가 있다.
엘프들은 실을 자아 천을 짜고 나무를 깎아 공예품을 만드는 데 대단히 뛰어나다.
오크들의 무두질과 가죽 세공 솜씨는 어느 종족보다도 월등하다.
그리고 트롤들은 전통적으로 흙을 다루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자연의 흐름을 숭상하는 트롤들의 주술 문화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엘프들이 숲의 아이들, 숲의 정령으로 불린다면 트롤은 그야말로 숲 자체였다. 엘프들도 숲의 성장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만 나무를 베어 사용하지만,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트롤들은 아예 한낱 나무 한 그루조차도 베지 않는다. 엘프들이 자연 친화적이라면 트롤들은 자연 동화적 성격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트롤들은 흙으로 집을 지으며, 대부분의 가재도구 역시 도자기를 구워 마련한다. 트롤들의 옹기며 도자기, 유리 공예품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우수해 감히 인간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원시적인 감각을 그대로 살려 자연을 품어 내는 트롤들의 도자기는 일개 식기라 할지라도 다른 종족이 보기엔 놀라운 예술품이다. 심지어는 트롤들이 요강으로 썼던 도자기가 인간 세상에 흘러 나가 보물로 취급받으며 귀족의 식기로 사용된 적도 있을 정도다.
“인간은 그저 자신들이 가장 문명적이라 믿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못 보는 세상 속에 얼마나 뛰어난 예술이 숨어 있는지…….”
한탄하듯 중얼거리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를 본 몇몇 트롤들이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레펜하르트가 이종족 마을을 시찰하는 일은 종종 이루어졌기에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트롤―특히 여인들―은 꽤나 흥미로운 눈으로 레펜하르트 일행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시찰이지만, 오늘의 그에겐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다.
“백왕님 오셨네?”
“어머나, 오늘은 옆에 아가씨가 한 명 더 붙어 있잖아?”
“백왕님도 꽤 하시네?”
자고로 남의 연애사는 종족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네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법.
트롤 여인들이 깔깔대며 레펜하르트의 좌우, 시리스의 반대편에 선 보랏빛 머리의 엘프 미녀를 바라보았다.
그 엘프 미녀는, 레펜하르트가 설명을 할 때마다 손을 모으고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고 있었다.
“정말 지식이 대단하세요. 감탄했어요.”
“아, 예…….”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자신의 왼편에 선 엘프 여인,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시리스를 대동하고 이종족 마을 시찰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니야가 나타나 자신도 동행시켜 달라며 졸랐던 것이다. 이 땅에 정착하게 된 이로서, 이웃에 사는 이들과 친분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별로 이상한 이유도 아니어서 레펜하르트도 흔쾌히 동행을 허락했다. 그리고 이렇게 트롤들의 마을로 오게 된 것인데…….
“어머나, 저건 또 뭔가요?”
이니야가 트롤 마을 한편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레펜하르트의 오른팔에 팔짱을 낀다. 팔뚝을 통해 풍만한 그녀의 가슴이 여실히 느껴진다.
얼굴을 붉히며 레펜하르트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 저건…….”
그곳에서는 십여 명의 트롤 주술사들이 커다란 웅덩이에 진흙을 가득 담고 발로 밟고 있었다.
흙만짐이라 불리는 트롤 구루들이 연신 흙을 개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주술의 노래를 부른다. 흙의 성분이 변화하며 점점 회색빛으로 변해 간다.
슬그머니 팔을 빼며 레펜하르트가 대답했다.
“저건 오푸스 세멘테리움이라 하는 겁니다. 트롤들만이 만들 수 있는 저들의 전통 건축 재료지요. 주술력으로 성분이 변해 만들어지는 세멘테리움은 빠른 시간 안에 돌처럼 단단히 굳기 때문에 가옥의 기둥이나 제단을 만들 때 쓰곤 한답니다. 유리처럼 주술사들만이 만들 수 있어서 트롤들에게도 제법 귀한 물건입니다.”
설명을 마치며 레펜하르트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흙의 성분을 변환하는 트롤의 저 주술은 일견 별것 아니어 보이지만 현 시대의 마학으로는 있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
3대 금기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
그중 물질 그 자체를 변환시키는 엄청난 기술인 것이다. 그가 10서클의 경지에 오르게 된 큰 공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저 트롤들의 주술 기법이랑 지저 태양 마그림을 연구해서 만든 주문이 바로 뉴클리어 버스트였으니까. 원소 변환을 저리 간단히 해 버리다니,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뭐, 트롤들이야 이론도 모른 채 그냥 저지르고 있는 거지만.
원래 주술이란 것은 마법처럼 체계화되어 원인과 과정을 규명하는 것이 아닌, 그저 행위와 결과만을 중시하기에 주술사 본인도 왜 저렇게 되는지는 모른다.
“그렇군요. 다른 종족에 대해 이런 깊은 이해를 가시고 계시다니, 대단하세요, 레펜하르트 님.”
이니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찬사를 흘린다. 그리고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를 바라본다. 정말이지 예전과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냥 레펜하르트라 부르십시오, 이니야.”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제가 부르고 싶어 부르는 것이니까요.”
아무래도 꿋꿋이 저 호칭을 고집할 생각인 것 같았다. 전생엔 제국 황제까지 올랐을 때도 절대 경칭 안 붙이던 아가씨가 왜 이러냐, 갑자기?
아무래도 그가 시공 회귀를 한 탓에 성격이 꽤나 변한 모양이라 생각하며 레펜하르트는 뺨을 긁었다.
‘거참, 적응 안 되네.’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쯤에서 ‘이 아가씨가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나?’라는 생각도 할 법했겠다. 하지만 감히 그런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하는 레펜하르트였다. 워낙 전생 때의 냉대가 기억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티리아 일족은 원래 스킨십이 잦았다. 워낙 추운 곳에서 살다 보니 자연스레 스킨십이 흔한 문화로 발전한 것이다. 실제로 전생 때에도 이니야를 제외한 다른 엘프 여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레펜하르트를 껴안거나 하는 일이 흔했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흐음, 이번 시간대의 이니야는 상당히 성격이 활발해진 것 같군.’
반면, 워낙 더운 곳에서 살다 보니 부부가 아니면 부모 자식 간에도 거의 스킨십이 없었던 단하임 일족의 소녀는 계속 눈을 흘기고 있었다.
‘뭐야, 저 여자?’
시리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이니야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 ☆ ☆
엘프 중에서도 오러 유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경지가 칼켄과 맞상대할 정도란 소리를 들은 시리스는 바로 이니야를 찾았다. 검사로서 그런 위대한 동족을 만나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니야와 첫 대면을 했을 때.
“아, 당신이 그 유명한 신월의 검사?”
“단하임 일족의 시리스 발렌시아입니다.”
선배에 대한 예우로 시리스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이니야도 어깨에 손을 얹으며 통성명을 했다.
“스티리아 일족의 이니야라고 해요.”
그리고 시리스를 보며 눈웃음을 친다.
“당신이 레펜하르트 님께서 ‘딸처럼’ 아끼신다는 그 소녀로군요.”
기분 탓인지 특정 단어가 강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리스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묘하게 이니야의 태도가 거슬렸다.
이니야가 눈을 내리깔며 시리스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미소를 띠웠다.
“흐응…….”
그리고 시리스의 가슴을 힐끔 보더니 미묘하게 웃는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무지하게 기분이 나쁘다.
“그럼 이만.”
승리자의 표정을 지은 채 이니야는 사뿐사뿐 방을 나갔다. 뒤에 남은 시리스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이유도 모르게 패배한 기분이었다.
‘뭐야! 저 여자!’
……참고로, 시리스는 은근히 승부욕이 강하다.
“레펜하르트 님, 저건 뭔가요?”
“아, 저건…….”
트롤 마을을 거닐며 이니야는 계속 레펜하르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착실하게 슬쩍 옆으로 붙거나 팔짱을 끼거나 한다. 저 ‘작태’를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뭔가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흥!”
콧방귀를 뀌며 시리스는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상관없잖아? 뭐, 내가 레펜하르트 님과 연인 관계도 아니고.’
그런데 왜 이리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
그렇게 시리스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깡마른 트롤 한 명이 그들에게 달려왔다. 아틸카처럼 푸른 피부 전신에 기묘한 문양을 그린, 트롤 구루였다. 그가 트롤어로 말을 건넸다.
“탄생의 의식이 곧 시작합니다, 인간의 왕이여. 참석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모든 트롤 마을들이 그렇듯, 이곳의 중심에도 커다란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세멘테리움만으로 만든 거대한 벽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높이 10미터 정도의, 지구라트라 불리는 이 제단은 트롤의 문화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대부분의 전통 의식이 바로 이 지구라트에서 행해졌다.
횃불이 촘촘하게 켜진 지구라트 주위, 거기에 백여 명의 트롤들이 열을 맞춰 모여 있었다. 구루의 인도에 따라 제단 밑에 도착한 레펜하르트와 시리스, 이니야가 주위를 둘러보며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신비롭기까지 한 기운이 제단을 둘러싼 채 은은히 흘러나온다. 두 엘프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작게 속삭였다.
“이제부턴 경건한 자세를 지켜야 합니다. 탄생의 의식을 참관하는 것은 트롤들에게 있어 크나큰 호의, 진정한 친구로 인정받았다는 증표니까요.”
시리스와 이니야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가득한 그들의 눈에 제단을 오르는 한 트롤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상아 같은 어금니가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전신에 새긴 문양에서도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다. 아틸카가 제단 위를 오르자 트롤들이 손을 들고 기괴한 노래를 불러 댔다.
“아…….”
시리스도 이니야도, 자기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모았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왠지 가슴 속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둥, 둥, 둥, 둥.
달밤 가득 북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트롤들의 노래가 점점 커져 갔다.
제단 위에 오른 아틸카가 손을 들었다.
노래가 멈췄다.
아틸카가 트롤어로 외쳤다.
“미래를 담은 일족의 여인들, 우리의 희망이여. 이 자리에 나와 위대한 축복을 받으소서!”
제단 밑에서 젊은 트롤 여인 십여 명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살짝 배가 나온 임산부들이었다. 배가 부푼 정도를 보아선 아직 10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듯했다. 트롤은 인간과 달리 스무 달 동안 태내에 아이를 갖기에 저 정도면 만삭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트롤 임산부들이 차례로 제단 아래 도열한다. 무섭도록 진지한 분위기라 시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아틸카가 지구라트 위쪽에 설치된 돌 제단 위에 몸을 뉘었다.
다른 트롤 구루 한 명이 나타나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짐승의 뼈를 깎아 만든 날카로운 골제 검이었다.
트롤들의 노래가 재개되었다. 북소리가 점점 더 높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둥둥둥둥둥둥!
심장 박동처럼 요란한 북소리가 대기를 뒤흔든다.
트롤 구루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틸카 틸카타 라티라!”
단검이 누운 아틸카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앗!”
시리스가 기겁하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아틸카의 가슴으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달려가려는 그녀를 레펜하르트가 제지했다.
“기다려!”
“네?”
손목을 잡힌 시리스가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녀처럼 경거망동하진 않았지만 이니야 역시 안색이 창백해진 후였다. 두 엘프를 번갈아 보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죽은 게 아니야.”
두 사람이 다시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아틸카의 가슴으로부터 솟구친 선혈, 그것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맴돌며 거대한 피의 구를 형성한다. 그 아래, 트롤 구루가 천천히 손을 뻗어 아틸카의 심장을 꺼냈다.
두근! 두근! 두근!
뽑힌 심장이 여전히 요동치며 강렬한 생명력을 보인다.
둥! 둥! 둥!
심장 박동에 맞춰 북소리가 우렁차게 울린다.
뽑힌 심장을 조심스레, 보물처럼 양손에 들고 트롤 구루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과 사가 혼재하니 그 속에 희망이 있어
희망이 미래가 되어 어두운 앞길을 밝히네.
트롤 구루가 뽑힌 심장을 임산부들에게 들고 갔다.
임산부들 앞에 서서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니, 심장이 터지며 핏물이 임산부들의 부푼 배를 차례로 적셨다. 피의 축복을 받은 임산부들이 저마다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
이것이 트롤들의 ‘탄생의 의식’이었다.
트롤은 너무도 강력한 재생력 때문에 정상적으로 잉태를 할 수가 없다. 그들의 재생력은 성인이 되고서야 생겨나는 것, 그래서 어미의 재생력을 태아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강력한 트롤 주술사가 자신의 심장을 바쳐 태아에 축복을 내리면 그의 주술력이 열 달간 아이를 보호해 무사히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다.
고대의 원시적인 트롤들은 마치 사마귀처럼, 잉태한 어미가 아비를 잡아먹으며 그 힘으로 태아를 보호했다. 그러나 주술의 힘을 얻은 후로는 이렇게 아비의 희생 없이도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신 고대에는 한 배에 일고여덟씩 임신하던 것이 지금은 인간처럼 한둘씩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차이점도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주술사가 죽으면 곤란하지 않나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시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레펜하르트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쉿, 계속 지켜봐.”
잠시 후, 허공에 솟구친 혈액이 다시 아틸카의 구멍 난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심장이 뽑힌 아틸카의 가슴에서 피와 살이 솟아 나왔다. 솟은 피와 살이 서로 엉키며 심장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시리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뇌까렸다.
“맙소사, 트롤의 재생력이 저 정도일 줄이야…….”
“진정한 구루만이 가능한 일이지.”
강력한 재생력을 가져 팔다리가 잘려도 재생하는 트롤이라지만 섬세한 내장 기관의 재생은 아무래도 힘들다. 하지만 주술의 힘을 이용하면 손상된 내장 기관까지도 어느 정도 재생이 가능하며, 진정한 구루의 경지에 오른 트롤은 심장이 뽑혀도 이렇듯 살아날 수 있었다.
아틸카 정도 경지라면 설사 목이 베이고 뇌가 파괴되어도 재생이 가능했다. 그 정도 되는 구루의 생명을 앗는 방법은 모든 주술력을 소진시키거나, 아니면 전신을 불살라 재로 만드는 법뿐이다. 전설에 따르면 주술의 극에 달한 구루는 자연으로 회귀해서도 자아를 잃지 않는 위대한 영이 되어 재 속에서 부활할 수 있다지만 그런 경지는 아틸카로서도 아득한 수준이다.
‘그래서 전생의 테스론은 아예 스파이럴 가드로 아틸카를 산산이 갈아 버렸었지.’
아픈 기억이 떠올라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애써 상념을 접으며 그는 계속 의식을 지켜보았다.
이니야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까, 깜짝 놀랐어요…….”
“그럴 겁니다. 꼭 인신 공양처럼 보여서, 다른 종족들은 상당히 트롤에 대해 오해를 하기도 하지요.”
이윽고 아틸카가 눈을 떴다.
그가 제단에서 일어나 오른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건재함을 과시하는 아틸카를 보며 트롤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아틸카! 아틸카! 아틸카!”
아틸카가 양손을 펼치며 유리 팔찌를 서로 부딪쳤다. 맑은 소리를 내며 그가 선언했다.
“탄생의 의식이 무사히 거해졌도다! 이로써 또다시 미래가 펼쳐졌으니 모두 축복하도록 하라!”
☆ ☆ ☆
의식이 끝나자 모인 트롤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제단을 걸어 내려오며 아틸카가 레펜하르트에게 살짝 목례를 했다.
“와 주셨군요, 권왕이여.”
“탄생의 의식을 참관하는 영광을 어찌 놓치겠는가?”
진심 어린 레펜하르트의 대답에 아틸카가 혀를 내둘렀다.
“정말 권왕께선 진정으로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군요. 처음 보는 인간이라면 기겁하며 야만적이라 소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터인데.”
레펜하르트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전생 때 한번 그랬었다. 기껏 친구로 삼은 아틸카가 심장이 뽑히는 걸 보고 얼마나 기겁했던가? 당장 양손에 뇌격과 불꽃을 머금고 다 죽여 버리겠다고 설쳐 대기도 했다.
다행히 금방 아틸카가 되살아나 오해를 풀었지만, 그때 놀랐던 기분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하하, 뭐, 이래저래 들은 것이 있어서…….”
시리스가 아틸카를 보며 핀잔을 던졌다.
“아유, 깜짝 놀랐잖아요.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든가.”
“어? 미리 설명 안 해 주셨습니까?”
아틸카가 눈을 껌뻑이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길 바랐지.”
하지만 어째 눈치를 보니, 자기도 기겁했으니 남들도 당해 봐야 한다는 심보 같기도 했다.
아틸카는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레펜하르트가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그때 이니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아틸카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 이니야라고 합니다.”
“아, 이번에 새로 이주해 오셨다는…….”
이니야가 엘프의 예법으로 인사를 건넸다. 아틸카도 트롤의 예법대로, 양손을 모아 합장하며 답했다.
“대자연의 뜻을 따르는 자, 구루 아틸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눈 뒤 이니야가 품을 뒤적거려 뭔가를 꺼냈다. 제법 커다란 상자였다. 그것을 내밀며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이웃이 되었으니 친하게 지내야겠지요. 그래서 가벼운 선물을 준비해 왔답니다.”
아틸카가 살짝 놀란 얼굴로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제껏 많은 엘프와 오크, 드워프들이 안타레스 백국에 모였지만 인사는 해도 딱히 서로 간에 선물을 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는 인간의 풍습이지 그들의 풍습이 아닌 것이다. 이종족들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는 대단히 큰 호의를 보이는 경우에나 있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선물받아 기분 나쁠 이유는 절대 없다.
아틸카가 상자를 열어 보았다. 광택이 도는 새하얀 천이 상자 가득 들어 있었다. 현재 이니야가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재질, 바로 스티리아 일족이 자랑하는 스노우 엘븐 실크였다.
아틸카가 감탄을 터트렸다.
“허어, 이런 귀한 것을…….”
흙을 빚어 대부분의 물품을 마련하는 트롤들에겐 천이 제일 귀한 물건이었다. 뭐, 워낙 재생력이 높다 보니 의복이라 봤자 비부만 가리는 정도로 충분해 크게 천 쓸 일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쓸 일이 있긴 한 것이다. 가죽이야 짐승을 죽여 얻는 치 떨리는 야만적인 물품일 뿐이고.
그냥 천도 아닌, 귀한 엘븐 실크를 받은 아틸카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눈에 띠게 호감을 보이는 아틸카를 보며 이니야는 속으로 씩 웃었다.
‘됐다!’
이 트롤이 레펜하르트와 친분이 깊다는 소리는 이미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 자고로 장수를 잡으려면 말부터 노리라 하지 않았던가? 벌써부터 착실히 주변 인물 공략에 들어가고 있는 이니야였다.
아틸카와 이니야가 사이좋아 보이니 레펜하르트도 흐뭇해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리스만 홀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저 여자, 점점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 참, 내가 왜 이러지?’
아틸카도 10년 넘게 세상을 떠돈 자, 결코 눈치가 없지 않다.
‘호오?’
바로 레펜하르트와 시리스, 이니야 사이에 떠도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정확히는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있고, 그냥 두 여자 사이에서만 감돌고 있었지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틸카가 슬쩍 레펜하르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틸카도 2미터의 장신이라 충분히 어깨동무가 되었다.
그 상태로 아틸카가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권왕이여.”
“왜 그러나, 아틸카?”
“제가 트롤들 사이에 전해지는 노래를 하나 들려 드리지요.”
어리둥절해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아틸카가 조용히 곡조를 뽑았다.
해와 달은 함께 뜰 수 없으니
낮이 가야 밤이 오는도다.
얼음과 불이 함께하면 재앙이 닥치니
현명한 자여
상생과 상극은 한 끗 차이임을 알라.
“아시겠습니까, 권왕이시여?”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뻑였다.
‘미안, 뭔 소린지 전혀 모르겠어…….’
하긴 이 양반, 예전부터 뭐 좀 물어볼라치면 만날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곤 했다. 괜히 레펜하르트가 마켈린하고만 주로 상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아틸카도 현명하긴 한데, 좀 현명함이 지나치다 보니 일반인(?)인 레펜하르트로서는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는 대답이 많았던 것이다.
하여튼, 뭔가 충고를 한 것 같기는 하다. 뭔 소리냐고 되물어 봐야 또 뜬구름 대답만 돌아올 것이 빤한지라 레펜하르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유념하도록 하지.”
시찰도 끝났고 의식도 보았으니 레펜하르트는 백왕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시리스와 이니야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마을 밖에 묶어 둔 말들에게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틸카가 히죽 웃었다.
“좋을 때다~.”
2
안타레스 백왕성의 집무실.
오늘도 레펜하르트는 업무에 열심이었다. 한창 그가 이종족들의 생활에 대한 보고서들을 처리하고 최종 결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계신가요, 레펜하르트 님?”
곧이어 문이 열리며 커다란 쟁반을 든 엘프 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니야.”
안타레스 백국에 합류한 이래, 이니야는 틈만 나면 레펜하르트를 찾아오곤 했다. 그나마 스티리아 일족이 엘븐 포레스트에 정착하는 초반엔 그래도 사흘에 한 번 정도였는데, 요새는 아예 거의 백왕성에 거주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도 자주 찾아오다 보니 이젠 레펜하르트도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또 어쩐 일로?”
방실방실 웃으며 이니야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응접실의 테이블 위에 그녀가 요리를 차렸다. 향긋한 소스를 뿌려 구운, 스티리아 엘프들의 특제 요리법으로 만든 농어구이였다.
살아왔던 환경 덕분에 단하임 일족이 고기 요리에 능하듯, 스티리아 일족은 생선 요리에 능했다. 신선한 과실과 맑은 이슬만 먹고 살았다는 엘프 조상들이 보았다면 땅을 치고 통곡했을 일이겠지만, 오지에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엘프의 식습관도 상당히 변화를 겪은 것이다.
“너무 일만 하시면 몸 축난답니다. 식사라도 거르실까 싶어 조촐하나마 음식을 좀 들고 왔어요.”
요리를 차린 뒤 이니야가 레펜하르트의 팔을 잡아끌며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레펜하르트가 어색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 예…….”
사실은 식사 같은 거 거른 적 없다. 밥때 되면 시리스가 세 끼 꼬박꼬박 챙겨 주는데 굶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물론 전생 때야 정신없이 바쁘다 보면 식욕을 잃어 가끔 끼니를 거르거나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이 무식한 육체는 언제 어디서 무슨 상황에 닥친다 해도 결코 식욕을 잃는 일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업무 보면서 같이 먹음 먹었지, 식욕 없다고 상 물리는 일 따윈 지금의 그에겐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어쨌거나 기껏 가져온 요리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마침 식사 때가 다 되기도 해서 레펜하르트도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농어구이를 입에 넣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이니야가 은근히 물었다.
“입에 맞으시나요?”
레펜하르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훌륭합니다. 특히 소스의 배합이 절묘하군요.”
이니야는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호감도 올려 보려고 일부러 요리 들고 왔는데, 아무래도 표정을 보니 꽤 먹힌 것 같았다.
이 농어구이, 사실 이니야가 만든 것은 아니었다. 평생 검만 휘둘러 온 그녀가 요리 따위 할 일이 언제 있었겠는가? 당연히 일족의 여인 시켜서 요리한 걸 자기가 만든 것인 양 들고 왔을 뿐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지. 그녀가 슬쩍 곁에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간들 속담에, 예쁜 여자와는 3년 동안 행복하지만 요리 잘하는 여자와는 30년 동안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있다더군요.”
은근슬쩍 노골적인 화제를 꺼내 드는 이니야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속담도 있긴 하지요.”
딱히 그가 둔해서라기보다는, 눈치채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계속 포크질을 하며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아, 참. 타리야 양에게도 잘 먹었다고 좀 전해 주십시오.”
‘헉!’
그렇다. 레펜하르트는 이미 전생 때에도 스티리아 일족에게 음식 많이 얻어먹어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이 소스 맛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저들 중 제일가는 요리사 엘프, 타리야의 솜씨임이 틀림없다.
무심코 나온 레펜하르트의 발언에 이니야가 뜨끔해하며 딴청을 피웠다.
‘……어떻게 알았지?’
새삼 그녀는 감탄했다.
‘역시 현명한 지혜의 소유자!’
과연 자신이 선택한 남자다운 놀라운 혜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 이쯤 되면 슬슬 지혜의 범주도 아닌 것 같지만 한번 씌워진 콩깍지는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네…….”
총총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가는 이니야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꼭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이 자리에서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뭐지?”
의아해하다가, 레펜하르트는 그냥 신경 끄고 식사에 열중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며 이번엔 평소처럼 시리스가 식사를 들고 왔다.
“어서 와, 시리스.”
입가에 소스를 묻힌 채 레펜하르트가 손을 들었다. 시리스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조용히 물었다.
“어머나? 벌써 식사 중이시네요?”
“응, 이니야가 갖다 준 거야. 그것도 내려놔. 같이 먹자.”
별생각 없이 레펜하르트가 테이블에 손짓을 했다. 제라드에게서 수련을 받을 시절엔 오크 일개 중대 단위의 솥단지도 싹싹 비웠던 몸이다. 까짓것 2인분쯤이야 얼마든지 먹어 치울 수 있었다.
그런데…….
“오호? 이니야 씨가 왔다 갔었군요?”
테이블 위에 식사를 내려놓으며 시리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움찔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시리스의 표정이 대단히 살벌했다.
분명 입가는 웃고 있는데 눈이…… 눈이…….
‘왜 저러지?’
“그럼 맛있게 드세요.”
차분하게 요리를 내려놓은 뒤 시리스가 사뿐사뿐 방을 나섰다.
“어? 같이 안 먹어?”
“배 안 고파요.”
쾅!
문이 대단히 거칠게 닫혔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왠지 시리스가 화가 난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화낼 만한 짓을 저지른 기억이 없었다.
“음…….”
레펜하르트는 진지하게 전후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마법사답게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바람이 좀 세게 불었나 보군.”
☆ ☆ ☆
집무실을 빠져나온 이니야는 흐느적흐느적 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연신 화끈거렸다.
‘하아, 들킨 걸까? 눈치채고도 모른 척해 준 걸까? 부끄러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리호리한 엘프 남자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이니야 님, 표정을 보니 일이 잘 안 풀린 것 같군요?”
그는 이니야의 부관, 세르펠이었다. 이니야의 심복으로 그녀가 수장이 된 이래 50년 넘게 곁에 머무른 충성스러운 수하다.
“그렇게 저 인간 남자가 좋으십니까?”
회랑 저편을 보며 세르펠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이니야가 싸늘한 눈으로 세르펠을 바라보았다.
“흐음.”
호리호리하면서도 날렵한 체구에 여인처럼 우아한 미모를 지닌 세르펠은 스티리아 일족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은 편이다.
이니야가 갑자기 세르펠을 등 뒤에서 껴안았다. 등 뒤로 풍만한 가슴이 와 닿는데도 세르펠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이니야가 혀를 차며 몸을 뗐다.
“넌 이렇게 껴안아도 전혀 흥분이 되지 않아.”
세르펠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만약 흥분하셨으면 울면서 반항했을 겁니다.”
이니야는 아련한 눈으로 회랑 저편, 레펜하르트의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그의 우람한 가슴팍을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역시 달라.’
역시 일족의 남자들은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전혀 흥분이 되지 않는다. 이니야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그분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남의 요리로 사기 치는 것보다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차분하게 대꾸하는 세르펠을 향해 이니야는 눈을 흘겼다. 이 충성스러운 수하는 다 좋은데 너무 말을 고르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강력한 전사입니다. 이니야 님의 장점을 충분히 알아봐 줄 거라 봅니다만.”
“그럴까?”
물론 입은 좀 험해도 세르펠은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당연히 수장인 이니야의 행복을 마음 깊이 빌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여기저기 정보를 모아 두기도 했다.
“이건 들은 이야기인데…….”
세르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레펜하르트 님은 완벽한 권사이지만, 한 분야는 유독 취약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특별히 그 분야를 신경 쓰고 계시다고…….”
이니야가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옹?”
☆ ☆ ☆
백왕성 중턱의 레펜하르트 전용 연무장.
그곳에 지금 두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읍!”
숨을 멈추며 러스가 낮은 자세로 태클을 들어간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두 다리를 뒤로하며 러스의 등을 눌러 태클을 막았다. 러스가 이내 레펜하르트의 허리를 잡고 다리를 노리자 바로 손을 밀어 다리를 빼며 재차 자세를 잡는다.
교착 상태가 되자 러스가 칭찬을 건넸다.
“많이 좋아지셨군요, 형님.”
몸을 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그래? 확실히 이젠 좀 개념을 알 것 같아.”
테스론에게 호되게 당한 후, 레펜하르트는 틈만 나면 러스를 상대로 그라운드 기술에 대해 배워 왔다. 지금도 업무 중간에 짬을 내어 대련 중이었다.
러스가 어깨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제 슬슬 저는 형님 상대하기가 힘에 부치네요. 역시 육체적 차이가 너무 커서…….”
예전에야 워낙 문외한이라 그 좋은 육체 가지고도 테스론에게 농락당했지만, 어느 정도 그라운드 레슬링에 조예가 있으면 근력 자체도 훌륭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테스론과 맞붙을 수 있을까?”
“글쎄요, 제가 아는 그라운드 기술도 그냥 기사들이 기초적으로 배우는 것에 불과해서, 제대로 된 카르지안 유술가를 상대로라면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으음, 전문가를 초빙해야 하려나?”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고민하던 때였다. 연무장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아, 이니야 씨.”
러스가 이니야를 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요새 이니야는 아예 백왕성에 방 하나 잡고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고 있어, 이렇게 갑자기 연무장에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오러 유저다 보니 이미 이니야의 존재 자체는 아까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며 이니야가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저도 그라운드 기술은 조금 알고 있는데, 한번 대련해 보시지 않겠어요?”
“에, 그게…….”
레펜하르트는 당황하며 이니야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녀는 평소처럼 털토시를 착용하지 않은 간단한 옷가지만을 걸친 단순한 차림이었다. 슬슬 날씨가 더워져 그런지 날씬한 팔다리도 시원하게 내놓고 있다.
저런 차림의 여인과 엉겨 붙어 그라운드 레슬링을 하라고? 맨살이 그대로 닿을 텐데?
레펜하르트가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무인에게 남녀 구별이 어디 있나요?”
진지한 그녀의 반문에 레펜하르트는 말을 더듬었다. 확실히 이건 상대를 전사로 인정치 않는 무례한 발언이다.
“그, 그렇지요, 죄송합니다.”
러스가 눈을 빛내며 뒤로 물러났다. 안 그래도 이니야와 칼켄이 싸울 때 옆에서 구경하며 참 건진 게 많았다. 이번에도 한 건 올리나 싶어 러스가 대련을 부추겼다.
“해 보시죠, 형님. 그녀의 실력은 대단합니다. 칼켄 공과 맨손 체술로도 밀리지 않았으니까요.”
레펜하르트가 새삼 놀란 눈으로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니야가 연무장 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전사다운 자세로 탈바꿈한 이니야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진지하게 대련에 임해 주세요.”
화르륵!
은빛 오러가 불길처럼 타올라 이니야의 전신을 감쌌다. 그 강렬한 기세에 레펜하르트도 감히 경시할 수 없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건넨 뒤 레펜하르트도 오러를 끌어 올렸다. 연무장 좌우로 금빛과 은빛의 오러가 소용돌이친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헙!”
대지를 밟으며 그가 펀치를 길게 찔러 넣었다. 파워와 스피드를 평소의 절반 정도로 줄인 일격이 이니야의 어깨를 노리며 뻗어 갔다.
펀치가 막 이니야에게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빙긋 웃으며 그녀가 몸을 뒤로 뉘였다. 동시에 레펜하르트를 향해 양다리를 활짝 벌린다.
“어?”
대단히 야한 자세라 레펜하르트가 순간 얼굴을 붉힐 때였다.
“흡!”
숨을 멈춘 채 이니야가 양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라라?”
돌진하던 레펜하르트가 기세를 멈추지 못하고 바로 앞으로 엎어져 버린다. 이니야가 허리를 감은 양다리를 그의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종아리와 허벅지를 이용해 레펜하르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삼각 조르기가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구경하던 러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거, 카르지안 유술이잖아? 엘프가 어디서 저런 인간의 기술을 배운 거지?’
게다가 기술의 정확성과 스피드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정통 카르지안 유술가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으음!”
단숨에 목이 죄이자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반격에 나섰다.
이젠 그도 예전처럼 그라운드 기술에 전혀 문외한인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기술이 들어올 줄 몰라 잠시 허를 찔렸지만, 바로 상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경동맥을 보호했다.
하지만 그 동작마저도 이니야에게는 다음 기술을 걸기 좋은 자세일 뿐이었다.
경동맥으로 옮겨진 레펜하르트의 왼손을 도리어 밀어내더니 바로 몸을 뒤틀며 반동을 이용해 자세를 바꿨다. 그러자 이번엔 레펜하르트가 자기 팔뚝으로 자기 목을 조르는 꼴이 되어 버렸다.
“캑캑!”
숨이 막힌 레펜하르트가 억지로 힘을 써서 이니야를 떼어 냈다. 그러자 그 힘을 이용해 몸을 빙글 돌렸다. 단숨에 두 남녀의 자리가 뒤바뀌며, 이니야가 레펜하르트의 배를 깔고 올라탔다.
마운트 자세를 취한 채 이니야가 레펜하르트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소감이 어떠냐는 표정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진심으로 감탄을 건넸다.
“대단한 실력이군요!”
“감사합니다.”
인정받은 것이 기뻤는지 이니야가 활짝 웃었다.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밑으로 깔려 버렸네.’
그렇다고 이니야가 레펜하르트보다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이 상태로도 레펜하르트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빠져나갈 방법이 있었다. 굳이 마법이나 스파이럴 가드가 아니더라도, 근력 자체가 월등한 이상 힘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것이다.
예전에야 어느 방향으로 힘을 써야 할지 몰라서 당했지만, 이제 그도 관절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기술을 배우기 위한 대련이다.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합니까?”
“몸을 옆으로 뒤틀면서 오른 무릎을 드세요. 그리고 제 무릎을 밀면서…….”
이니야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방법대로 몸을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몸이 빠져나간다. 안 그래도 고민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이런 달인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그대를 만나 다행이군요, 이니야.”
저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이니야의 표정이 순간 새빨개졌다.
“카르지안 유술은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예전에 엘프인 걸 숨기고 대륙의 강자를 찾아 떠돌아다녔던 적이 있지요. 그때 연이 닿았답니다.”
엘프 여성은 가슴이 작다는 것이 대륙 전체에 퍼진 정설이다. 그렇다 보니 긴 귀를 가리고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보랏빛 머리칼만 염색하면,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인 이니야를 엘프라고 알아보는 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니야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계속해 볼까요?”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엉겨 붙은 채 계속 기술을 교환했다. 그 와중에 오러를 이용, 상대의 흐름을 제어하려는 시도도 꾸준히 이어졌다.
참으로 값진 경험이었다. 그라운드 기술뿐 아니라 오러의 운용법 역시 배울 점이 컸다. 땀을 흘리며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계속 이니야의 가르침대로 몸을 움직였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이것이 카르지안 유술입니까?”
“네, 이것이 카르지안 유술이랍니다.”
레펜하르트의 가슴에 안긴 채 이니야가 나긋나긋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레펜하르트가 살짝 의아해하며 질문을 이었다.
“카르지안 유술에 이렇게 가슴을 더듬는 기술도 있습니까?”
어째 기술 공방을 계속하며 이상하게 자꾸 이니야가 그의 가슴팍이며 복부, 팔뚝을 더듬었던 것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저 손짓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니야가 배시시 웃었다.
“이건 레펜하르트 님의 육체 포텐셜을 측정하는 거랍니다.”
“아, 그렇군요.”
과연, 카르지안 유술과는 관계없는 것이었구나.
납득하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아하던 부분이 싹 날아가며 다시 머리가 맑아진다. 정신을 집중하며 그는 다시 대련에 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니야.”
“네?”
“포텐셜을 좀 자주 측정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보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랍니다.”
“그렇군요…….”
뭔가 살짝 수상하긴 한데, 딱히 또 흠잡을 부분은 없는 대답이었다. 가르침을 받는 성실한 제자의 자세로, 레펜하르트는 그냥 납득하고 계속 대련에 임했다.
레펜하르트는 열심히 이니야와 대련을 했다. 물론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 거의 바닥에 깔려 나뒹굴 뿐이다.
그리고 이니야는 실실 웃고 있었다.
‘아, 복근도 정말 강철처럼 탄탄해!’
“이, 이니야. 왠지 웃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레펜하르트 님이 빨리 배우시니 기뻐서요.”
“…….”
☆ ☆ ☆
시리스는 씩씩대며 회랑을 걷고 있었다.
‘이니야라는 저 여자 뭐야? 레펜하르트 님은 또 뭐고?’
걸음을 옮기다보니 항시 마법을 수련하던 앞뜰이 나온다. 시리스는 투덜대며 나무 아래 설치된 의자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저만치서 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작은 소녀가 다가왔다. 외모는 어린 주제에 가슴만은 풍만한, 드워프 처녀 틸라였다.
틸라가 시리스를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어머나, 시리스? 왜 그리 화가 났어요?”
“화 안 났어요.”
틸라가 놀리는 목소리로 시리스의 뺨을 쿡 찔렀다.
“양 뺨을 그렇게 부풀리고 씩씩대면서 대답해 봤자 설득력 없어요.”
“……우웅.”
곁에 앉아 틸라가 슬쩍 물었다.
“역시, 그 이니야라는 분 때문에 그런 거죠?”
안색이 확 바뀌는 시리스를 보며 틸라는 속으로 웃었다.
질투다. 역시 질투하는 거다.
‘귀엽네.’
아직 사춘기 소녀인 시리스에 비해 틸라는 어엿한 성인 드워프, 실제로 살아온 세월도 30년 이상 차이 난다. 이 어린 엘프 소녀를 보며 틸라가 달래듯 말을 건넸다.
“거봐요. 레펜하르트 님 정도면 정말 멋있는 남자라니까요?”
“……레펜하르트 님이 멋있어요?”
시리스가 뜨악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녀는 엘프였고, 엘프다운 심미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좋은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이긴 하지만 멋있냐고 하면 그건 좀…….
‘만날 웃통 벗고 가슴 씰룩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대체 무슨 멋?’
틸라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레펜하르트 님? 무지 멋있잖아요? 우리 일족 여자들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수염만 기르셨으면 완벽한데 아쉽게 면도를 하셔서…….”
드워프에게 남자다움이란 넓은 어깨와 두꺼운 가슴팍, 레펜하르트는 드워프 기준에도 훌륭하게 멋진 남성이었다.
“으음…….”
기가 막혀 고개를 젓는 시리스를 향해 틸라가 은근히 말을 이었다.
“오크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레펜하르트 님이 인기가 좋은데요? 오크 여자들이 만날 이런 말 한다잖아요? 우리 남편이 레펜하르트 님 반만 되었어도 얼마나 좋을까~라며.”
“……아니, 그건…….”
시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오크들이야 원래 근육 충만하면 장땡인 종자들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실란 씨 목표도 레펜하르트 님 같은 멋진 남자가 되는 거잖아요?”
실란이야 예전부터 근육 예찬론자였으니 그렇고.
“인간 하녀들 사이에서도 인기 좋아요, 레펜하르트 님. 플로라나 다른 엘프 분들도 은근 노리는 눈치던데…….”
다른 이종족들은 그렇다 치고 인간 하녀와 엘프들에게도 인기 좋단 소릴 듣고 나니 슬슬 시리스의 표정도 변했다.
“그, 그래요?”
생각해 보니 확실히 플로라나 다른 엘프 여인들처럼 레펜하르트와 오래 함께 지낸 이들은 호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 백왕성 내의 하녀들이나 엘프 여인들에게 레펜하르트는 인기가 많았다. 겉보기와 달리 레펜하르트는 굉장히 점잖아서, 절대 일개 하녀에게도 손을 뻗거나 하질 않는다. 일단 초반의 인상만 넘기고 나면 듬직하고 성실하며 능력 좋은 남자인 것이다. (사실 레펜하르트만큼 능력 좋은 남자도 세상에 흔치 않다.)
레펜하르트가 워낙 대놓고 시리스를 아끼는 것이 보여서 다들 멀리서만 바라볼 뿐이지, 인기 자체는 상당한 편이다.
‘어, 사실은 레펜하르트 님 되게 멋있는 건가?’
뭔가 주위에서 다 멋있다고 하니 막 혼돈이 온다. 틸라가 실소를 흘리며 시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리스…….”
그리고 은근히 그녀를 부추겼다.
“이대로 있다가는 후회할걸요?”
“후, 후회는 무슨…….”
당황하는 시리스를 보며 틸라가 고개를 저었다.
“저 이니야라는 아가씨, 대시가 심상치 않아요. 남자는 저러다가 앗 하는 순간 넘어가 버린다고요.”
“넘어가든 말든 저랑은 아무 상관이…….”
“게다가 그 아가씨, 가슴도 크던데. 남자는 특히 저런 취향에 약하거든요?”
정확히는 드워프 남자들이 저런 취향에 약한 것이지만, 어쨌건 인간 남자도 딱히 다르진 않다. 정곡을 찌른 틸라의 말에 시리스의 안색이 더더욱 굳었다.
시리스는 무심코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뭐, 봉긋하고 귀여운 가슴이었다. 하지만 이니야와 비교하면 상당히 부실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끄응…….”
낑낑대는 시리스를 귀엽다는 듯 지켜보다가 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카를과 데이트가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카를 씨 오늘 업무 다 끝내셨나 봐요? 아까 레펜하르트 님이랑 운동하시던데.”
틸라가 문득 양손으로 뺨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네, 안 그래도 레펜하르트 님이랑 운동하게 된 이후 점점 듬직해져서 어찌나 멋있는지!”
시리스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확실히 요 근래 카를의 덩치가 상당히 커지긴 했다. 수염도 더 덥수룩해졌다.
‘……그게 듬직?’
시리스가 보기엔 슬슬 원숭이에서 고릴라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외모만 보면 재상이 아니라 무슨 전장을 누비는 장수, 그것도 돌진밖에 모르는 무식한 맹장으로밖에 안 보인다.
덕분에 안타레스 백국은 본의 아니게 전투 국가로 이름이 높았다.
지배자는 권왕이요, 재상은 고릴라에, 명성을 떨친 계기도 전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좋다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자리를 뜨며 틸라가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자! 시리스! 저런 굴러온 돌에 지지 말아요! 파이팅!”
그렇게 응원을 보낸 뒤 틸라는 앞뜰을 떴다. 멍하니 시리스는 떠나는 틸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지 말라고?’
혼란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점차 그녀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누차 말하지만, 시리스는 은근히 승부욕이 강하다…….
3
레펜하르트는 자기 방 카펫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후우우…….”
가부좌를 튼 채 레펜하르트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호흡을 하며 내면을 관조, 체내의 마력을 움직여 안정화시킨다.
그는 지금 매일같이 행하는 마법사의 일과, 명상meditation을 통해 마력의 그릇을 높이는 중이었다. 음식도 과하게 먹으면 체하듯 마력을 높이는 것도 한꺼번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마력이 올라가는 수준에 맞춰 그릇, 즉 허용량 역시 따라 넓혀야만 했다.
마나 드레인을 통해 마력은 언제든지 흡수할 수 있지만 그릇을 넓히는 것은 역시 시간이 드는 문제인 것이다. 이미 지저 태양 마그림을 통해 체질을 바꾸는 편법까지 써 버렸으니, 남은 것은 그저 정석대로 차분히 명상에 임하는 길뿐이었다.
잠시 후 레펜하르트가 눈을 떴다. 체내의 마력을 감지하며 그가 한숨을 쉬었다.
“꽤 마력이 모이긴 했지만 그래도 8서클의 경지는 요원하군, 아직.”
고위 서클로 갈수록 필요로 하는 마력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5서클까지는 금방 금방 되더니 6서클쯤에는 마나 드레인까지 시도해서야 겨우 필요한 마력을 채웠고, 7서클이 되니 이젠 흡수하는 마력을 체내 허용량이 따라와 주지 않는 수준까지 되었다.
레펜하르트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에이, 서두를 필요는 없지. 지금 나이에 이 정도만 해도 사실은 엄청난 건데.”
자꾸 전생의 자신과 비교해서 그렇지 현재 레펜하르트는 오러 빼고 단순히 마법사로만 봐도 엄청난 수준이다. 그와 비슷한 나이의, 천재라 불리며 마법사들의 칭송을 받는 제이드조차도 아직 7서클의 경지가 아닌가?
애초에 마나 드레인으로 마력을 쑥쑥 올릴 수 있다는 것부터가 사기다. 외부의 마력을 흡수해 영구적으로 자신의 마력으로 변환하는 경지는 9서클 대마법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마력 키우는 시간은 대폭 줄이고 오직 그릇을 키우는 데만 주력하고 있으니, 지금도 이미 레펜하르트는 다른 마법사들보다 두 배 가까이 빠르게 마력이 오르고 있었다.
‘뭐 이 정도면, 전생 때 진짜 내 육체의 절반 정도 효율은 나와 주니까.’
역시 아쉽긴 아쉽다. 테스론의 육체로도 이 경지까지 왔는데, 진짜 그의 육체였다면 지금쯤 얼마나 빨리 전생의 경지를 회복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내 레펜하르트는 미련을 버렸다.
‘됐다. 지난 것에 미련 가져 봐야 뭐하나? 솔직히 이 육체도 좋은 점 많은데, 뭘.’
확실히 그가 마왕 대신 권왕으로 나선 덕에 얻은 것들은 적지 않다. 특히 평판 부분은 결코 전생의 육체였다면 얻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