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 제27장 눈의 여왕 (28/84)

제27장 눈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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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싹트는 봄, 황량하던 페틀랜드에도 혹독한 추위를 이겨 낸 새싹들이 푸름을 과시하며 여기저기 돋아나고 있었다.

글로텐 산맥으로부터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이 광활한 초원은 농경을 하기엔 지나치게 척박한 곳이어서 국가적 규모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인접한 크로방스나 바실리 왕국도 이 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페틀랜드와 두 나라 사이엔 글로텐 산맥과 라키드 산맥이라는 험준한 지형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차지해 봐야 크게 득 될 것도 없는 땅인데 관리하는 데 드는 수고는 몇십 배, 데스트란드 정도는 아니지만 몬스터의 출몰 역시 잦은 편이니 욕심부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대대로 유목 민족들의 영역이었다.

말과 양을 키우며 초원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이들은 소규모 부족 단위로 페틀랜드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가끔 유목 민족들을 통일시켜 비옥한 땅으로 쳐들어가겠다는 야심찬 이들이 나오긴 했지만, 전부 중간에 가로막힌 글로텐, 라키드 산맥에 의해 좌절해야 했다. 저 두 산맥은 페틀랜드의 유목민들을 지켜 주는 방패인 동시에, 그들을 이곳에 가두어 두는 담장이었다.

쳐들어올 놈들도 없고, 쳐들어갈 일도 없으니 당연히 뭉쳐야 할 필요성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페틀랜드는 부족 간의 작은 분쟁은 있을지언정 거대한 전쟁은 벌어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페틀랜드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페틀랜드 중부, 엎드린 늑대를 닮았다 해 울프마운틴이라 불리는 거대한 돌산을 뒤로한 채 일만의 군세가 집결해 있었다. 페틀랜드 전역에서 모인 유목 민족들로 이루어진 인간의 군세였다.

병력 선두에 선 장수, 유목 민족의 임시 수장으로 선출된 랑고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말머리를 함께 하고 있는 중년 전사, 랑고트와 함께 페틀랜드에서 손꼽히는 대부족의 족장인 펠리페도 굳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과연 우리가 저 괴물들을 이길 수 있을지…….”

랑고트도 펠리페도, 용맹하기로 이름 높은 페틀랜드의 전사들이었다. 아니, 원래 페틀랜드의 유목민치고 용맹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거친 자연 속에서 삶을 이어 가는 유목 민족들은 농경민족에 비해 전투에 능하고 용맹하며 난폭하다.

하지만 지금 모인 이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눈앞에 있는 저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전투에 능하고 용맹하며 난폭한 자들이었으니까.

지금 페틀랜드의 유목민들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은 들판 저편에 도열한, 수천의 오크로 이루어진 거대한 군대의 모습이었다.

☆ ☆ ☆

다이어울프에 탄 채 칼켄은 등 뒤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사천 명 정도의 무장한 오크들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푸른 곰 부족을 비롯, 대륙의 오지에서 모여든 오크 부족들의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탈카타가 이끄는 검투사 출신의 오크 천여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레이 오크 하나가 다이어울프를 몰아 칼켄에게 다가왔다. 회색빛 피부에 건장한 육체를 지닌 중년 오크였다.

중년 오크가 오크 군대를 보며 감격의 목소리를 냈다.

“이 정도로 많은 형제들과 함께 전투에 임하는 건 처음이오, 카루가 칼켄.”

“나 역시 마찬가지라오, 카루가 하다툼.”

회색 솔개 부족의 족장, 하다툼을 바라보며 칼켄이 동감이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많은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다니, 언제나 오지에서 숨어 살던 그에겐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과연 레펜하르트 형제는 약속을 지켰소.”

맞은편에서 녹색 피부의 거대한 오크 하나가 거대한 배틀보어battle boar를 타고 다가왔다. 일반 멧돼지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마물을 수족처럼 부리는 그는 그린 오크 계열인 흙 멧돼지 일족의 족장, 킨지르였다.

킨지르가 오크 군대를 보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마법 같은 일이군. 산 너머 인간의 군대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니…….”

예전에는 감히 이렇게 많은 오크들이 모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크들이 모이려 할 때마다 산맥 너머에서 몇 배나 되는 인간의 대군이 몰려와 그들을 노예로 잡아갔으니까. 아무리 강맹한 오크 전사들이라도 마법사를 앞세운 인간들의 공격에는 힘없이 쓰러져야만 했다.

“음, 레펜하르트 형제가 마법사인 것은 사실이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칼켄이 말을 이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라 외교라는 것이오, 카루가 킨지르.”

킨지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요?”

“인간들끼리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방식이오.”

하다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럼 호투의 의식을 하면 되잖소?”

“호투의 의식과는 다른 것 같소. 인간은 칼의 노래를 듣지 못하기에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더군. 오크들도 나중에는 저걸 해야 할 거라던데…… 마누라는 좀 이해하는 모양인데 난 영 뭔 소린지 모르겠더만.”

현재 스탈라는 참전하지 않고 안타레스 백국에 남아 있었다. 킨지르와 하다툼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필요하다, 이거지.”

“그런데 그거 배우면 훌륭한 전사가 못 된다던데?”

“그럼 우리도 무기아비처럼 외교아비란 걸 따로 키울 필요가 있겠군.”

칼켄이 오크 군세 저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저들에게 배우면 될 것이오. 우리의 인간 형제들에게.”

사천의 오크들, 그 옆에는 천 명 정도의 인간 군대도 함께 있었다. 사이러스와 아스레일 경이 이끄는 안타레스 백국의 인간 병사들이었다.

아스레일이 대열 선두에 서서 페틀랜드 군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초원의 하늘 위를 쩌렁쩌렁 울린다.

“안타레스의 깃발 아래 항복하라!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은 좋은 대우를 약속하겠다!”

☆ ☆ ☆

안타레스 백국에 자리를 잡은 푸른 곰 부족은 글로텐 산맥 동쪽으로 계속 세력을 넓혀 갔다. 또한 데스트란드에서 함께 삶을 이어 가던 다른 오크 부족들에게도 전령을 보내 합류를 권했다.

칼켄은 오크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투사였기에 그의 전언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린 오크 계열이었던 흙 멧돼지 일족과 그레이 오크 계열의 회색 솔개 부족이 제일 먼저 응답을 하고 글로텐 산맥으로 모였다. 그 뒤로도 하얀 이리 부족이며 검은 코요테 부족 등 데스트란드에 살던 대부분의 오크들이 새로운 대지, 살기 좋은 땅을 찾아 글로텐 산맥으로 모여들었다.

오크들이 대거 준동하자 페틀랜드의 인간들도 바로 반응했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대했다. 원래 데스트란드의 오크들이 대규모로 페틀랜드까지 나타나는 일은 제법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장 인접한 크로방스와 바실리 왕국의 귀족들에게 연락했다.

-오크 노예들 잔뜩 모여 있음. 와서 수거해 가세요.

이러면 항상 왕국의 귀족들이 기사와 마법사를 잔뜩 끌고 나타나 오크들을 해치우고 노예로 잡아가곤 했다. 그 와중에 페틀랜드의 유목 민족도 짭짤한 부수입을 얻을 수 있었으니 심지어 돈벌이 잔뜩 나타났다며 좋아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째 상황이 달랐다. 모든 귀족들이 하나같이 유목 민족들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다.

-그것들 노예 아님. 깃발 못 봤냐, 깃발?

귀족답게 우아하고 화려한 필체로 써진 답변이긴 했지만, 어쨌건 요약하면 저런 내용이었다. 그제야 페틀랜드의 인간들은 현 상황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저 오크들은 하나의 문장을 새긴 깃발을 들고 있었다.

보통 사자나 용 같은 걸 문장으로 삼는 반면 저 깃발의 문장은 좀 특이했다. 네 귀퉁이를 녹색, 회색, 적색, 청색으로 나누고 가운데 황금빛 주먹(!)이 덜렁 박혀 있는 것이다. 실로 촌스러움의 극에 달한 문장이라 하겠다.

뭐, 덕분에 알아보기 쉽기는 했다. 소문에 둔한 페틀랜드인들이라도 권왕 레펜하르트가 안타레스 백국을 세웠다는 이야기 정도는 들었으니까.

이제까지와 다르게 저 오크들의 준동은 명백히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 전쟁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크로방스 왕국의 귀족 입장에서 개입할 수 없었다.

현 크로방스 국왕 유벨 2세가 레펜하르트를 얼마나 총애하는지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그리고 내전을 통해 안타레스 백국에 얼마나 오러 유저가 많은지도 똑똑히 확인했다. 감히 일개 영주 한둘이 덤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바실리 왕국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처럼 오크들이 준동하는 것이면 인간의 위협이 되니 처리하겠다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이번엔 엄연히 영토 확장 전쟁 아닌가? 위험은 큰 반면 이득도 명분도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크들은 착실히 세력을 넓혔다. 이미 글로텐 산맥의 산악 민족들은 전부 안타레스 백국의 세력하에 들어가고, 페틀랜드까지 그들의 손길이 뻗쳐 왔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페틀랜드의 유목 민족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회의가 열렸다. 초원 전역에 흩어져 있던 각 부족의 족장들이 한데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글로텐 산맥에 인접한 이들, 즉 권왕에 대한 소문에 밝은 자들은 항복하자는 의견을 냈다. 거리가 먼 이들은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결국 주전파가 승리해 모든 유목 민족들이 한데 뭉쳤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일만, 페틀랜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군이었다.

☆ ☆ ☆

“안타레스의 깃발 아래 항복하라!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은 좋은 대우를 약속하겠다!”

아스레일 경의 음성에 랑고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라! 우리는 초원의 자유민들! 결코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랑고트가 고개를 돌렸다. 페틀랜드의 병사들에게 고함을 터트렸다.

“싸우자! 초원의 아들들이여! 우리의 자유를 위해!”

병사들도 사기를 드높이며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우렁찬 외침이 초원을 뒤흔든다. 그 모습을 말 위에서 지켜보던 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숭고한 외침이군.”

자유를 부르짖는 저들은 확실히 압제자에 대항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숭고하긴 한데…… 이제까지 계속 남의 자유 억압해 노예로 팔아먹은 놈들이 외칠 소리는 아니지.”

말하다 말고 러스는 문득 실소를 흘렸다. 이제는 이종족들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변한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다.

오크들 앞에 선 칼켄이 자신의 대검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질렀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준비되었는가?”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가 돌아왔다.

“준비되었습니다! 카루가 칼켄!”

수많은 오크들이 한마음이 되어 소리쳤다. 울부짖는 오크들의 외침 속에서 칼켄이 목청을 돋웠다.

“오랜 굴욕의 세월이었다! 이제 그 세월을 돌이킬 때가 왔다!”

부우웅!

선명한 녹색의 오러가 대검을 타고 흐르며 사방을 밝힌다. 뒤이어 선두 여기저기서 또 다른 블레이드 오러가 솟구쳤다.

흙 멧돼지 부족의 족장, 킨지르.

회색 솔개 부족의 족장, 하다툼.

투혼의 축복을 받은 오크의 족장들이었다.

러스도 검을 뽑았다. 창공처럼 푸른 오러가 롱 소드를 타고 선명하게 흘러내렸다.

초원의 하늘을 찌르며 칼켄이 전투 개시를 선언했다.

“전원 돌격!”

전투의 외침을 터트리며 오크 전사들이 용맹스레 전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이어울프를 탄 오백여 명의 오크 전사들은 천지를 쓸어버릴 듯한 기세로 페틀랜드군에 돌진해 갔다. 그 뒤를 수천의 오크 보병들이 뒤따랐다. 아직 스피리츠 웨폰을 터득하지 못해 전사로는 인정받지 못한 이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인간 기사 수준의 힘을 지닌 이들이다.

선두에 선 것은 세 명의 오크 투사, 칼켄과 킨지르 그리고 하다툼이었다. 저마다 형형색색의 블레이드 오러를 내세우며 무자비한 기세로 적진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섬뜩한 파괴의 빛을 보며 랑고트는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제길…… 안타레스 백국에는 오러를 쓰는 오크들이 있다더니 정말이었군.”

용병들처럼, 거칠기는 해도 체계적인 무술을 갖지 못한 페틀랜드인들에게는 오러 유저가 없었다.

랑고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법사들을 모시게! 어서!”

이내 페틀랜드군 전면에 열 명의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마법사들이 저마다 수인을 맺으며 캐스팅을 시작했다.

“워 라가스 에프레 아페인…….”

“잠의 모래, 허공을 흘러…….”

“내 손길에 이끌려 이곳에 떨어지노라…….”

이들은 모두 페틀랜드군이 고용한 마법사들이었다. 왕국 귀족들의 협조를 받지 못하니 자체적으로 마탑에 거액을 주고 초빙한 것이다. 산 너머 왕국민들과 달리 오크와 비교적 자주 부딪치는 페틀랜드인들은 오크가 얼마나 마법에 취약한지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오크는 오크일 뿐, 마법 앞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기대감 어린 눈으로 랑고트는 전황을 지켜보았다. 마법사들이 전원 동시에 마법을 발동했다.

“매스 슬립!”

광역 수면 주문이 선두에 선 세 오크 투사들을 덮치며 광범위하게 퍼져 갔다. 그때, 전장 속에서 우렁찬 기도문이 들려왔다.

“알 포트여, 당신의 종이 기원하노니 이들의 정신을 지켜 주소서!”

군세 곳곳에서 희미한 은빛이 번쩍이며 보이지 않는 항마의 힘이 군대 전체로 스며들었다. 발동된 마법이 항마의 힘에 가로막혀 사그라졌다.

랑고트가 기겁하며 외쳤다.

“뭐, 뭐야?”

그제야 랑고트의 눈에 오크들 사이에 있는 또 다른 종족의 모습이 보였다.

드워프였다.

알 포트를 섬기는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 신관 십여 명이 군대 사이사이에 껴서 저들을 가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워프 신관들이 연달아 기도문을 이으며 항마의 장벽을 넓게 펼쳐가기 시작했다.

“알 포트여, 당신의 베일이 허공을 감으시어 사이한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시니…….”

알 포트의 축복이 삼천 명의 오크들 전체에게 천천히 퍼져 나갔다.

드워프 신관의 숫자는 고작 십여 명 정도였지만, 이게 무슨 엄청난 마법 면역력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인간 수준의 마법 저항력만 깃들게 하는 것이다. 십여 명만으로도 충분히 오크 군세 전부를 감당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당황해 소리쳤다.

“이봐! 말이 틀리잖소!”

“매스 슬립만 날려도 간단히 침몰한다더니!”

랑고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런!”

대규모 전쟁을 해 본 적이 없어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들은 단순한 오크 무리가 아니라 엄연히 안타레스 백국군이다. 오크들의 저 약점을 레펜하르트가 모를 리 없으니, 당연히 대비책을 세우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으히히힉!”

“사람 살려!”

공포에 질린 마법사들이 이내 등을 돌리고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싼 돈 주고 초빙하긴 했지만 이들은 고작해야 4, 5서클의 정규 마법사에 불과했다. 애초에 고위 마법사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이런 오지까지 오지 않는다.

“크아아아아!”

전투의 포효를 외치며 오크들이 순식간에 해일처럼 페틀랜드군을 덮쳤다. 곳곳에서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두에 서서 적진으로 뛰어들며 칼켄이 외쳤다.

“가라! 용맹한 전사의 후예여! 위대한 조상들께서 우리를 가호한다!”

오크들이 저마다 자신의 조상의 이름을 외치며 무기를 휘둘러 댔다.

“마우툼이 나를 지켜보신다!”

“발루트여! 그대에게 저들의 피를 바칩니다!”

원래 오크들은 믿는 신이 없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것은 위대한 조상들의 가르침, 선조의 영혼이 하늘에서 자신들을 가호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오크들에게는 신관이 없었다. 또 체질상 마법사도 있을 수 없었다. 항마력이 전혀 없으니 당연히 마력을 다룰 수도 없는 것이다. 뭐, 설사 항마력이 있다 해도 오크 머리로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하겠지만.

“바탈라! 당신의 아들을 지키소서!”

조상들의 가호를 외치며 오크들은 페틀랜드군을 유린해 갔다. 아스레일 경이 이끄는 안타레스의 인간 병사들도 화살로 원호했다. 수백 자루의 스피리츠 웨폰이 허공을 누비고 화살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페틀랜드군 역시 용맹한 전사들답게 목숨을 내건 채 싸웠지만 승기는 점점 안타레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시작한 전투는, 해가 지기도 전에 끝이 났다.

점점 시체가 늘어가고 도망자가 폭등해 대열이 붕괴되며 결국 랑고트를 비롯한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자 페틀랜드군은 백기를 내걸었다.

랑고트의 목을 든 채 칼켄이 전장 전체에 선언했다.

“함성을 외쳐라! 우리가 승리하였다!”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던졌다. 스피리츠 웨폰에 의해 또 하나의 자신처럼 움직이는 수백 개의 무기들이 하늘에 떠올라 허공에 고정됐다.

오크들이 가슴을 활짝 폈다.

“으아아아아!”

펼쳐진 찬란한 검의 하늘 아래, 끝없는 승리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페틀랜드의 초원, 그 위에 수백 개의 군막이 세워져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전부 몬스터의 가죽을 무두질해 만든, 오크들 특유의 가죽 군막들이었다.

각 부족의 문양이 그려진 그 군막들은 임시로 설치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 군막들은 오크들이 평소 거하는 집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유목 생활을 주로 하는 오크들은 평소에도 이런 이동형 가옥에서 거한다. 이들에게 집은 언제나 들고 다닐 수 있는 가구의 하나일 뿐, 애초에 임시 가옥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가죽으로 만든 막사라지만 그 강도나 편이성은 어지간한 인간의 가옥 못지않았다.

부드럽게 무두질된 가죽은 초원의 한기를 효과적으로 막아 주고 내부의 열기를 효율적으로 보존한다. 내구성 역시 뛰어나 대부분의 가죽 막사가 대대로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정도다. 그 기술력은 인간 무두장이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드워프들이 돌과 금속을 다루는데 뛰어나듯이, 오크들은 가죽을 다루는 데 그 어떤 종족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가죽 막사뿐 아니라 다른 가죽 세공 용품 역시 대단한 성능을 자랑한다. 강철 갑옷과 무기는 당연히 드워프제가 최고겠지만, 가죽 갑옷이나 다른 가죽 제품들은 오크들의 기술을 따라갈 이들이 없다.

이미 하나의 마을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병영, 그 속에서 오크와 안타레스의 인간 병사들이 술과 노래로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으하하하!”

“오오! 로버트! 한 잔 들게!”

“자네도 들지, 우투눈!”

술 좋아하기로는 드워프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족, 신관들도 그 속에 껴서 신 나게 술을 들이키는 중이었다.

“달로스 신관님! 술 드십쇼!”

“좋지! 얼마든지 주시게!”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진 이들은 종족을 막론하고 화통하게 전우애를 나누며 승리의 기분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흥분한 칼켄과 킨지루, 하다툼, 그리고 러스과 아스레일의 모습도 보였다.

회색빛 피부가 붉어지도록 마신 하다툼이 러스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카루가 러스! 그대 세다! 존경한다! 내 술 받아라!”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하다툼은 어색한 공용어를 쓰고 있었다. 칼켄과 달리 아직 그나 킨지르는 의사 번역의 목걸이를 받지 못한 것이다.

러스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의 뜻을 밝혔다.

“으음, 이미 많이 마셨소.”

하다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 싫어하나?”

“싫소.”

실제로 술을 즐기지 않는 러스이기에 그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만약 인간이 이런 식의 답변을 받았다면 바로 안색이 굳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다툼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안됐다. 이 좋은 걸 모르다니. 하지만 강하니까 됐다.”

러스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크들은 단순해서 싫다면 그냥 싫은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긴다거나 하는 그런 ‘넘겨짚기’는 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대하기 쉬운 족속들이란 말인가?

이번엔 킨지르가 커다란 고깃덩이를 든 채 물었다.

“고기는 좋나?”

“많이 먹었소.”

“그럼 내가 먹는다.”

우걱우걱!

고기를 씹고 호탕하게 다시 술을 마신다. 아스레일이 잔을 내밀었다.

“난 술 좋아하오.”

하다툼이 좋다며 술을 따라 준다. 술잔을 들이키며 아스레일은 빙그레 웃었다.

그도 처음엔 이런 오크들의 태도에 꽤 놀랐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적응이 되었다. 이들은 인간처럼 체면이나 가식을 차리지 않는 것이다.

아스레일이 웃자 다른 오크들도 따라 웃었다. 킨지르가 주먹을 들며 말했다.

“전사 아스레일. 그대 좀 약하지만 술 세다. 좋다!”

그리고 장난치듯 아스레일의 얼굴에 펀치를 날렸다. 순간 아스레일이 움찔하는 찰나, 러스가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그의 주먹을 가로막았다.

“인간에겐 이러면 안 되오, 킨지르 경.”

“응? 왜?”

순간 대답이 궁해져 러스는 고민했다. 당연한 걸 당연치 않게 여기는 이들에게 대체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하나?

그때 아스레일이 먼저 답을 줬다.

“인간은 콧대가 높아서 이러면 모욕으로 여기오.”

붙임성 없는 러스와 달리 아스레일은 오크들과도 친분을 쌓으려 꽤 애를 쓰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의 수하 기사로서의 당연한 의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런 일도 제법 당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그랬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

역시나, 킨지르는 순순히 납득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전사 아스레일. 내가 실수했다.”

한 부족의 족장이지만 실수했다고 생각하면 바로 사과한다. 잘못을 인정할 경우 상대가 자신을 업신여길까 걱정한다거나 하는 ‘복잡한’ 사고 따윈 오크에겐 없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포로들 상태도 봐야 하니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아스레일이 손을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페틀랜드군 포로 관리는 전적으로 그가 맡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인간인데 오크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굳이 도망치는 이들은 붙잡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현재 안타레스 백국군이 사로잡은 포로의 숫자는 이천여 명에 육박했다. 이들은 당분간 강제 노역으로 대가를 치른 뒤 자유로운 백국의 국민으로 살게 될 것이다.

아스레일이 자리를 비우고도 나머지는 계속 승전 분위기를 즐겼다. 한참 즐겁게 술잔을 주고받던 중이었다.

“으잉?”

갑자기 칼켄이 오른쪽 눈을 치켜떴다.

“어라?”

“뭐지, 이 기운은?”

킨지르와 하다툼, 러스도 동시에 안색을 굳혔다. 전원이 병영 저편의 어둠 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숙영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초원 너머에서 희미한 기운이 와 닿고 있었다. 말이 희미한 기운이지, 이 정도로 떨어진 거리에서도 느껴질 정도면 보통 강렬한 기운이 아니다.

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단히 알아보기 쉬운 기운이었다.

‘오러 능력자? 이 근처에 우리 말고도 오러 능력자가 있었나?’

게다가 강렬하기는 한데 적의는 전혀 없다. 그냥 자신들을 부르는 듯한 느낌?

딱히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오러 유저인 러스는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칼켄이며 킨지르, 하다툼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누구지?”

“우리 부르는데?”

킨지르와 하다툼이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어둠 저편을 응시했다. 칼켄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봅시다.”

다른 오크 투사들도 히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럽시다.”

“투혼의 축복을 받은 전사라면 만날 가치가 있지.”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강한 전사일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대뜸 병영을 이탈하려는 것이다. 참으로 단순한 작자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러스도 그동안 꽤나 이들에게 물든 상태, 그가 실소를 흘리며 검을 들고 일어났다.

“저도 궁금하긴 하군요. 갑시다.”

2

네 사람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숙영지를 떠났다. 우두머리들이 갑자기 병영을 떠나는데도 오크들은 아무도 궁금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저 강력한 투사들이 넷이나 몰려다니는데 그 무슨 위험이 있어 저들을 해하겠는가?

기운은 숙영지로부터 1킬로미터쯤 떨어진 돌산, 울프마운틴에서 흘러오고 있었다. 늑대의 앞발에 해당하는 울프 마운틴 초입부에 서서 칼켄이 고개를 들었다.

돌산 사이로 좁게 드러난 협곡, 그 가운데에서 확연한 존재감이 감지된다. 칼켄이 대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나오라! 우리를 부른 이, 투혼의 축복을 받은 자여!”

선명한 녹색의 오러가 대검을 타고 흘러 허공을 찔렀다. 광채가 어둠을 사르며 사방을 밝혔다.

협곡 사이의 어둠, 그 속에서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들이 안타레스 백국의 오크들인가요?”

“그렇다!”

칼켄의 대답에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의 정체는 눈처럼 흰 피부에 청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미녀였다. 몸에는 광택이 도는, 재질을 알 수 없는 새하얀 천 옷을 걸치고 있고 팔다리에는 짐승 털가죽으로 만든 토시와 부츠를 착용하고 있다. 달리 갑옷 같은 것은 입지 않아 부드러운 육체의 곡선이 여실히 보인다.

날씬한 팔다리에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 그리고 차갑고 요염한 인상.

여색에 별 관심이 없던 러스조차도 순간 두근거릴 정도로 매력적인 미모였다.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놀랍군요. 오크가 이토록 공용어 발음에 능통하다니.”

머리 뒤로 질끈 묶은 여인의 보랏빛 머리칼, 그 사이로 드러난 길고 뾰족한 귀를 보며 러스가 놀라 중얼거렸다.

“에, 엘프?”

엘프가 오러 유저란 사실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무심코 러스는 미녀의 가슴으로 시선을 옮겼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뭔 엘프가 저리 가슴이 풍만하단 말인가? 분명 엘프인데 가슴만 드워프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원래 엘프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몸매가 날씬해 저렇게 가슴이 큰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이다.

칼켄과 킨지르, 하다툼도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러스와 놀라는 관점은 좀 달랐지만.

“어? 엘프다.”

“호오? 엘프에게도 투사가 있었나?”

“엘프들은 겁이 많아 전사가 별로 없다던데?”

말없이 여인이 네 사람에게 다가오며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별 다른 장식이 없는 날카로운 세검, 그 칼날 위로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가 서늘한 기운을 뿜으며 흘러내렸다.

우우웅!

“하앗!”

갑자기 엘프 여인이 날카로운 기합을 터트리며 칼켄을 습격했다!

“헙!”

기다렸다는 듯이 칼켄도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반격에 나섰다. 상대가 당연히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당황하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은색 오러와 녹색 오러가 마주치며 전광이 튀어 올랐다.

콰아아앙!

부딪힌 오러가 파문을 일으키며 협곡의 절벽을 뒤흔들었다. 칼켄이 상대의 검을 밀치며 호쾌하게 소리쳤다.

“이 정도로는 내 검을 꺾을 수 없다, 엘프 투사여!”

오러와 오러의 대결은 칼켄의 우세였다. 단숨에 녹색 오러가 여인의 오러를 파고들며 깊숙이 베어 간다. 여인이 공중제비를 넘어 피하며 연달아 검을 찔렀다. 은빛 블레이드 오러가 화살처럼 쏟아져 칼켄의 전진을 막았다. 아쉬워하며 칼켄이 검을 거두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제야 러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롱 소드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적이었나?”

그때 여인이 그를 돌아보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둘의 싸움입니다! 끼어들지 마세요!”

“뭐, 뭐가 어째?”

순간 러스는 기가 막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기가 먼저 덤벼놓고 끼어들지 말라니?

그런데 정작 킨지르와 하다툼은 납득하는 얼굴이었다.

“암, 끼어들면 안 되지.”

“둘의 싸움인데.”

“……아니,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상대의 정체도 모르고 통성명조차 없었는데 이상하단 생각도 안 하나?

러스의 의문에 하다툼과 킨지르가 뭐가 그리 신기하냔 듯 말했다.

“그냥 지나가던 엘프 투사인가 보지.”

“오러 유저가 그냥 오다 가다 만날 만큼 흔한 직업은 아니오만…….”

“여자, 살기 없다. 그냥 한바탕 싸우고 싶은 듯.”

“아니, 댁들이야 그럴지 몰라도 엘프는 그렇게 호전적인 성격이 아닐 텐데…….”

대꾸하다 말고 러스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 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애당초 호전적이지도 않은데 오러 유저씩이나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엘프야 호전적이지 않겠지만 저 엘프 미녀도 그렇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 와중에도 칼켄과 엘프 여인은 신나게 검을 주고받고 있었다.

“껍질 벗기기!”

고함을 터트리며 칼켄이 여인의 좌우로 대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드레이크나 히드라의 껍질을 벗길 때 주로 쓰는, 한 호흡에 좌우 사연격을 날리는 연속 참격이 여인의 사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흡!”

순간 숨을 멈추며 여인이 세검으로 연달아 원을 그렸다. 검광이 원형으로 흘러내리며 칼켄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 버렸다. 상대의 힘을 이용해 공격의 궤도를 바꾼 것이다.

보고 있던 러스가 감탄사를 흘렸다.

“대단한 검술이다!”

오러가 실린 칼켄의 대검을, 그것도 연속 참격을 저리도 깔끔하게 흘릴 수 있다니?

저 여인의 검술이 보통이 아니란 증거였다. 러스도 칼켄의 공격을 저렇게 오직 검술만으로 흘릴 자신은 없었다. 그였다면 오러를 운용해 공격력 자체를 흩는 수법을 썼을 것이다. 효과야 같겠지만 훨씬 체력, 오러 소모가 큰 수법이다.

여인이 세검을 교묘히 찔러가며 반격에 나섰다. 은빛 블레이드 오러가 춤을 추며 허공 가득 빛의 궤적을 그렸다. 세검이 칼켄의 전후좌우를 어지러이 누비며 그를 압박해 갔다.

“하아아앗!”

수십 개의 은빛 검광의 꽃이 초원 위로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다. 칼켄이 강맹한 일격을 날려 꽃봉오리를 떨어트릴 때마다 또 다른 검화劍花가 피어나 공격을 가로막는다.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칼날을 타고 검을 흘리며 급소만을 노려 대는 엘프 여인의 기술은 오크들의 그것과 확실히 달랐다. 훨씬 기교적이고 세련되고 복잡한 검술이다.

저 엘프 여인은 검술만 놓고 보면 칼켄은 물론, 스탈라보다도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기대에 차 러스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안 그래도 슬슬 검술 자체에 대해 고민하던 차다.

‘오! 오늘도 한 건 건지나?’

날도둑 하나가 자신의 검술 야금야금 빼먹고 있다는 사실은 추호도 모른 채, 여인은 계속 검격을 날렸다. 뒤로 밀리던 칼켄이 문득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대검을 발치로 뻗었다.

“으랏차! 어금니 막기!”

칼켄의 대검이 그를 중심으로 땅 위에 크게 원을 그린다. 파인 선을 따라 녹색 오러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오러의 장벽이 위로 솟구쳤다. 솟구치는 오러의 흐름이 세검의 연격을 모조리 튕겨 버렸다.

타타탕!

“하하핫!”

호통하게 웃으며 칼켄이 대검을 휘둘러 오러의 칼날을 연달아 뿜어냈다. 녹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대지를 파헤치며 날아들었다. 상대의 복잡한 검술에 끌려 다니던 칼켄이 그냥 속편하게 대규모 파괴로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의 공격은 날카롭지만 두껍지 않구나!”

상황이 일변했다.

오러의 칼날을 계속 흘리며 여인은 계속 뒤로 물러났다. 검술은 그녀가 분명 우위에 있었지만, 오러 운용 능력은 별 차이가 없고 오러양은 아무래도 칼켄이 월등했다. 막대한 오러양으로 밀어붙이니 도저히 반격의 틈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인은 세밀한 검의 흐름으로 녹색 오러를 죄다 흘리며 상처 없이 물러서고 있었다. 도저히 이대로라면 쉽사리 승부가 가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칼켄이 감탄하며 뻐드렁니를 드러내 웃었다.

“강하군, 엘프 투사!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의 찬사에도 여인은 그저 싸늘한 표정만을 고수할 뿐이었다. 칼켄이 자신의 대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더니 곧게 세웠다.

“좀 더 놀아 보자!”

대검을 허공으로 던지며 칼켄이 표효를 터트렸다.

“가라! 나의 맹우, 마그눔!”

☆ ☆ ☆

2미터가 넘는 대검이 녹색 오러를 머금은 채 허공을 갈랐다. 날아든 대검이 허공에서 선회하며 녹색 오러탄을 쏘아 댔다. 머리 위 공격에 당황하며 여인이 손을 뻗었다.

부우웅!

은빛의 방패가 생성되며 오러탄을 일제히 막아 냈다. 그 틈에 칼켄이 돌진했다. 땅을 파헤치며 달려가 두 주먹을 연거푸 뻗어 낸다.

“맨주먹 비늘 깨기!”

허공으로 내뻗은 두 주먹에서 녹색 오러가 포탄처럼 쏘아졌다. 여인이 몸을 뒤틀어 피하자 빗나간 오러탄이 협곡 내 절벽에 적중했다. 굉음이 울리며 절벽 일부가 무너져 바윗덩어리가 굴러떨어졌다.

우르르릉!

머리 위로 파편이 떨어지는데도 킨지르며 하다툼, 러스 등 세 오러 유저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오러의 장막을 펼친다.

퉁, 퉁, 투퉁!

비 오는 날 우산이라도 쓰듯, 대수롭잖게 파편들을 막아 내며 하다툼이 중얼거렸다.

“저 양반 신 났네.”

킨지르도 눈을 빛내며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오. 나중에 나도 한판 붙을 수 있을까? 재밌어 보이는데.”

과연 호전적인 오크의 수장들다운 태도였다. 뭐, 러스라고 딱히 심정이 다른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은 나도 붙어 보고 싶은데…… 건질 것 되게 많을 것 같은데…….’

그러는 동안, 엘프 여인에게 접근한 칼켄이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넘실거리는 녹색 오러를 가득 머금은 주먹이 연거푸 내질러졌다.

“가죽 다지기!”

좌우 훅에 뻗어 치는 스트레이트가 여인의 전신을 노리고 쇄도해 온다.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여인은 허리를 틀고 머리를 숙이며 계속 공격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세검은 계속 칼켄의 급소를 예리하게 찔러 갔다.

쿠우우웅!

주먹에 깃든 녹색 오러와 세검에 깃든 은빛 오러가 뒤섞이며 폭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흩어진 오러의 파문이 절벽 좌우를 연이어 부수며 가공할 파괴의 흔적을 남긴다. 두 오러 유저가 맞붙은 탓에 슬슬 이 주변은 이미 더 이상 협곡도 아니었다. 좁은 골짜기 사이로 뻥 뚫린 공터가 생겨 버렸다.

기합을 토하며 칼켄이 왼팔을 크게 휘둘렀다.

“허업!”

웅장한 레프트 훅이 여인의 턱을 노리고 날아든다. 간신히 공격을 피하는 여인의 등 뒤로 칼켄의 애검, 마그눔이 찔러 온다. 상대가 둘이 되어 버리니 완전히 상황이 기울어 버렸다. 스스로 허공을 날면서 오러를 쏘아 대고 칼날을 휘두르는 마그눔의 움직임에 여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오크들의 전승 기술이군, 역시 까다롭네.”

갑자기 여인이 공중제비를 넘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상태로 세검에 손을 댄 체 나직이 중얼거린다.

“로시아, 샤이드. 내 검에 깃들렴.”

사아아아…….

순간 칼켄은 당황했다. 여인의 세검,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를 통해 싸늘한 한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어? 이거 정령술?”

물의 정령 로시아와 어둠의 정령 샤이드가 은빛 오러에 깃든다.

두 정령력이 섞이며 강렬한 냉기로 화한다.

은빛의 오러가 냉기를 띤 입자로 변하며 눈보라가 되어 칼켄에게 몰아쳤다. 갑작스러운 냉기에 칼켄의 사지가 얼어붙으며 돌진 속도가 늦추어졌다.

구경하던 러스가 혀를 내둘렀다.

‘오러에 원소력을 깃들일 수 있다니!’

원래 오러란 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기운, 그 근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형태를 변화하고 파괴나 치유 등의 속성을 띨 수는 있어도 원소력까지는 불가능하다. 시리스가 검에 정령력을 깃들여 구사하는 것은 자주 보았지만, 설마 오러에도 가능했을 줄이야.

‘어? 그럼 저건 나는 못 쓰는 거잖아? 쳇.’

감탄하던 러스가 대놓고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하도 베껴 댔더니 슬슬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신기한 기술! 하지만 이 정도라면…… 하아압!”

얼어붙은 칼켄이 오러를 전신에 두르며 냉기를 떨쳐 냈다.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되며 반짝거렸다.

이 틈에 여인이 세검을 칼켄의 대검, 마그눔에게 던졌다.

“얼어붙어라!”

싸늘한 외침과 함께 세검이 마그눔과 충돌했다. 녹색 오러가 냉기의 오러와 충돌하며 서로 상쇄된다. 반투명한 얼음이 세검을 타고 솟아나 마그눔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퉁!

엉겨 붙어 얼음덩어리가 된 두 검이 땅으로 뚝 떨어졌다. 서로의 무기가 무효화된 걸 보며 칼켄이 히죽 웃었다.

“이러면 둘 다 맨손인가? 실수했구나, 엘프 투사!”

스피리츠 웨폰을 봉인한 그 기술은 분명 대단하다. 하지만 양쪽 다 맨손이면 신장 2.3미터에 두꺼운 근육으로 뒤덮인 칼켄과, 가녀린 저 엘프 여인의 승부는 뻔할 뻔 자다.

“타아아앗!”

승리를 확신하며 칼켄이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하아아앗!”

엘프 여인도 마주 보며 은빛 오러를 전신에 휘감았다.

두 오러 유저가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칼켄이 두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터트렸다.

“가죽 다지기!”

수십 발의 펀치가 여인의 전방을 모조리 점유한다. 여인이 버들가지처럼 한들거리며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사뿐히 스텝을 밟으며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은빛 오러를 머금은 수도로 예리한 반격에 나선다.

“호오?”

칼켄은 잠시 놀랐다. 맨손임에도 불구하고 저 여인의 기량은 그에 뒤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러스가 눈을 반짝였다.

‘이야, 검술을 저런 식으로 하면 바로 맨손 체술이 돼 버리는구나. 저 발놀림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칼켄이 강의 극치라면 엘프 여인의 움직임은 유의 극치.

연달아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쉽사리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녹색 섬광과 은빛 궤적이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으며 흐르고 꺾이고 막히며 맹렬히 부딪친다.

콰콰콰쾅!

오러가 허공에서 충돌하며 파공음을 울렸다.

“후후, 이 정도로 재미있는 싸움은 정말 오랜만이군.”

칼켄이 목을 매만지며 전의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잔뜩 흥분한 그를 향해 갑자기 여인이 손을 내저었다.

“그만 싸우죠.”

막 몸을 날리려던 칼켄이 실망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왜? 재미있는데 더 싸우지?”

엘프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협곡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검에 깃든 두 정령이 떠나며 얼음이 녹아내렸다. 손짓을 하자 세검이 허공을 날아 다시금 그녀의 손에 잡혔다.

검을 허리에 차며 그녀가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 정도면 저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나요?”

☆ ☆ ☆

이미 여인에게는 조금의 전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김이 샌 칼켄도 자신의 대검을 거두었다. 회수한 마그눔을 등 뒤에 차는 칼켄을 향해 문득 여인이 물었다.

“저는 전사인가요?”

어째 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눈을 껌벅거리다 칼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대는 훌륭한 전사, 아니 투사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 엘프 여인은 충분히 강력한 투사였다. 인정치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여인이 다시 물었다. 이번엔 칼켄뿐 아니라 킨지르와 하다툼까지 시선에 둔 질문이었다.

“오크들의 신뢰를 받으려면 한바탕 싸워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저는 당신들에게 신뢰를 보였습니까?”

오크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저 엘프 여인은 칼켄과 검과 주먹을 맞대며 자신을 증명했다. 전사의 긍지와 영혼을 가졌음도 확인했다.

합창이라도 하듯 세 오크 투사들이 일제히 말했다.

“당연히 그러하다!”

“그대는 이제 우리 자매다!”

“강한 자매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오크들의 얼굴에 호의의 표정이 가득 떠올랐다. 엘프 여인이 안도한 듯 중얼거렸다.

“오랜 이야기 속이라 조금 미심쩍었는데, 다행히 맞는 것 같군.”

그제야 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지금 설마 호투의 의식 한 거였습니까?”

여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러스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뜸 왜 싸우나 했더니…….’

엘프란 종족이 합리적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들이댈 줄은 몰랐다. 보통 통성명 정도는 먼저 하잖아?

오크들도 그 생각은 한 모양이었다. 칼켄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푸른 곰 부족의 칼켄이오.”

다른 이들도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나 흙 멧돼지 부족 킨지르.”

“회색 솔개 부족 하다툼이다.”

여인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이니야.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입니다.”

그리고 협곡 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저의 일족들.”

협곡 위에서 사람 그림자가 하나 둘 나타났다. 순간 칼켄이며 러스 등, 이 자리의 모든 오러 유저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저기 저렇게 사람들이 많았었어?”

협곡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하나같이 이니야처럼 새하얀 피부에 푸른 눈동자, 보랏빛 머리칼을 지닌 엘프들이었다. 복장 역시 비슷해 털가죽과 흰 천을 섞어 입고 있다.

저렇게 많은 인원이 숨어 있었는데 오러 유저인 자신들이 눈치채지 못하다니?

러스가 살짝 눈을 찡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깊은 밤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희미하게 그들의 주위로 미묘한 어둠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 시리스의 그것과 왠지 비슷한 느낌이다.

‘정령술로 기척을 감춘 것인가?’

시선을 돌린 이니야가 다시 말했다.

“우리 일족은 세계수의 부활자를 만나기 위해 북쪽의 동토에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안타레스의 투사들이여, 우리를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3

페틀랜드 북부의 이름 없는 동토.

오랜 세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그곳에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었다. 우뚝 솟은 얼음 기둥 사이로 눈 벽돌을 쌓아 만든 수십 채의 가옥들, 동토의 햇살이 반짝여 마치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유리 공예품처럼 보인다. 인간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엘프들, 스티리아 일족의 보금자리였다.

마을 곳곳에서는 보라색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엘프들이 저마다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집을 수선하고 채취한 생선과 해초를 말리거나 가죽을 무두질하는 등, 바쁜 모습이었다.

그 풍경 속을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매끈한 검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드리운 굉장한 미남자였다.

남자가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마을 여기저기를 살폈다. 해초를 다듬던 엘프 여인 하나가 그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어머나! 레펜하르트 님!”

그는 대륙 역사상 최연소로 9서클을 마스터한, 대마법사 레펜하르트였다.

서른 살에 9서클에 입문해 세상을 놀라게 한 레펜하르트는 결국 서른다섯에 마법의 극에 다다르는 데 성공했다. 근 100년 이래 대륙에 9서클의 종사자가 아닌 ‘마스터’가 나타났던 건 몇 년 전 천수를 누리고 죽은 라스틸 공국의 대마법사 드레자뿐이었다. 그조차도 9서클을 마스터한 것은 나이 일흔이 넘어서였으니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이 이 엄청난 위업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이들이 레펜하르트의 행보에 주목했다.

이미 20대 후반에 대마법사가 되었을 때부터 그를 초빙하려는 나라는 많았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법의 경지를 올리고 싶다는 이유로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던전 탐사자로 남았었다.

이제 더 이상 오를 경지가 없는 9서클 마스터가 되었으니, 과연 그가 어느 나라로 향할지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레펜하르트는 9서클 마스터가 되자마자 홀연히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온갖 억측이 나돌았다. 세상에 무심해져 은거했다는 설, 너무 젊은 나이에 마스터가 되어 그 부작용으로 사망했다는 설, 그를 두려워한 마법 학파에서 몰래 암살했다는 설 등등.

하지만 사실 레펜하르트는 시리스, 타시드와 함께 오지에 사는 이종족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9서클을 마스터하고도 레펜하르트의 마법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보다 높은 경지가 있을 거라 믿으며 계속 세상을 떠돌았다.

그 와중에 그는 한 던전에서 각 이종족들의 전통 문화가 담긴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록 단순한 묘사에 불구했지만, 그 개념만은 레펜하르트가 상상하던 것과 일치했다.

예전 같았으면 학파에 발표하고 명성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명성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귀찮은 중간 과정 생략하고 바로 오지에서 살아가는 이종족들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세인들의 인식 속에서 사라진 지 3년, 그는 현재 새로운 정령술 이론을 배우기 위해 스티리아 일족의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를 본 다른 엘프 여인들도 눈을 빛내며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머?”

“레펜하르트 님이다.”

“추우실 텐데 어쩐 일로 밖에 나오셨어요?”

비록 시기는 여름이라지만 여전히 밤만 되면 얼음이 어는 곳이다. 털가죽 옷을 두툼히 껴입어도 모자랄 판이건만, 그는 간단한 붉은 로브만을 걸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 저는 마법의 힘이 있어 이 정도 추위에는 끄떡없답니다.”

9서클의 생존 주문, 서바이벌을 항시 전신에 걸어 놓고 있는 그는 사막이나 설원에서도 추위나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아예 불구덩이 안으로 들어가거나 매서운 눈보라가 직접 불어닥치지 않는 한 저 주문이 깨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펜하르트가 웃음을 짓자 엘프 여인들의 새하얀 얼굴 위로 홍조가 역력히 떠올랐다. 잘 말린 생선을 내밀며 한 엘프 소녀가 수줍은 듯 몸을 꼬았다.

“저기, 이것 좀 들어 보시겠어요?”

그러자 다른 여인들이 소녀에게 눈을 흘겼다. 자신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것도 드세요, 레펜하르트 님!”

“이건 추우실까 봐 제가 만든 팔 토시인데…….”

말린 생선이며 고기, 털가죽 토시 등을 내밀며 여인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두 팔에 이런저런 물품들이 자꾸 쌓인다. 하지만 여기서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큰 모욕, 레펜하르트가 쩔쩔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아, 토시는 감사히 쓰겠습니다.”

물건을 받아 들고 허둥대는 그를 보며 엘프 여인들이 까르르 웃었다. 몇몇 여인들은 팔짱을 끼거나 목을 껴안기까지 했다. 다들 상대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호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실제로 레펜하르트는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매끄러운 흑발에 매서우면서도 세련된 눈매, 실제 나이는 30대 후반이지만 겉보기엔 10년은 젊어 보인다. 그의 미모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할 만해서, 미모로 먹고산다는 엘프들이 보기에도 굉장한 것이다.

엘프를 대하는 태도 역시 들어 왔던 인간과는 전혀 달랐다. 저 인간 마법사는 같은 엘프 남성과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이지적이고 우아했다.

“그럼 고맙게 쓰겠습니다, 여러분.”

감사를 표한 뒤 레펜하르트가 받아 든 물건들을 무한의 주머니로 담았다. 순식간에 그 많은 물건들이 부피도 얼마 안 되는 작은 주머니 안에 모조리 들어갔다.

“그럼 이만…….”

신기해하는 엘프 여인들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레펜하르트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며 여인들이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레펜하르트 님…….”

“인간인데도 어쩜 저리 멋질까?”

“게다가 그 강한 마법의 힘은 또 어떻고?”

걸음을 옮기는 레펜하르트 곁으로 한 엘프 여인이 다가왔다. 허리까지 드리운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스티리아 일족과 확연히 다른 외모를 지닌 차분한 인상의 미녀였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인기 좋으시네요, 레펜하르트 님?”

고개를 돌아보며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응? 왜? 질투해, 시리스?”

“흥! 질투는 무슨…….”

하지만 표정이 아주 질투가 철철 넘치는 것이, 레펜하르트를 힐긋거리는 다른 여인들을 볼 때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다.

레펜하르트가 실소를 흘리며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알잖아? 나한테는 너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가볍게 뺨에 키스.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시리스의 표정이 눈에 띠게 누그러졌다.

“우웅…….”

애써 양 뺨을 부풀리는 것이 귀엽기 그지없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타시드는 지금 뭐 한대?”

“오늘도 대련이죠, 뭐. 타시드야 오러 유저만 보면 못 붙어 봐서 안달이잖아요?”

“하긴…… 부지런하네.”

레펜하르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산책 적당히 했으니 다시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등 뒤에서 그를 불렀다.

“마법사 레펜하르트.”

상대를 확인한 레펜하르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니야?”

스티리아 엘프들의 수장인 이니야가 직접 그를 찾아온 것이다. 타시드와의 대련을 끝낸 모양이었다.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소?”

이니야가 손에 든 서류를 들어 보이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와 약속한 것을 끝마쳤어요.”

“그럼 그냥 날 불러도 되었을 것을…….”

“볼일이 있는 자가 상대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고수한 채 이니야가 주변의 엘프 여인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닿자 한창 몽롱한 표정을 짓던 여인들이 화들짝 놀라 다시 생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니야가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인기 좋네요?”

그녀는 일족 여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담고 있는 이 눈앞의 인간 마법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인간 마법사가 나타난 것은 2주일 전의 일이었다.

불쑥 나타나 엘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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