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은의 암살자
1
체타스 남작령 중부의 요새 성, 훈다르가드.
풍채 좋은 중년 사내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결국 놈들이 네다스 협곡마저 통과했단 말인가!”
앞에 부복한 가란드 경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체타스 남작님. 저희 힘이 부족하여…….”
분을 못 이겨 체타스 남작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치를 떨며 욕설을 내뱉었다.
“레펜하르트! 그 빌어먹을 작자! 애초에 이게 단골 수법이었군!”
생각해 보면 크로방스 내전 때도 이런 식이었다. 밀릴 대로 밀리던 유벨군에 갑자기 나타나,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고 강압적인 조건을 걸어 결국 자신의 나라를 세워 버렸다. 이번에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의 불행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꾀하다니, 권왕이란 자는 기사의 도리도 모르는가?”
그 불행의 ‘원인’인 체타스 남작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어쨌거나 이긴 거나 다름없던 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안타레스 백국의 참전으로 인해 형세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승승장구하던 체타스 남작군은 궤멸당했고 대부분의 영지를 침략당해 이곳, 훈다르가드까지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믿었던 오러 유저 그란디아드 경 역시 소용이 없었다. 상대가 레펜하르트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몸을 사려 버린 것이다.
인척 관계라고는 하지만 체타스 남작과 그란디아드 경은 끽해야 육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권왕을 상대한다면 그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할 터, 그렇게까지 해 가며 체타스 남작을 도울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급하게 협상을 시도하기도 해 보았지만, 먼저 협상을 거절한 것은 체타스 남작 쪽이었다. 당연히 씨도 먹히지 않았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그자뿐인가…….”
체타스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훈다르가드 내에 위치한 화려한 침실.
잘생긴 금발의 청년이 한 여인을 희롱하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목덜미에 코를 파묻으며 청년이 음탕한 목소리를 흘렸다.
“살결이 부드럽군, 후후후.”
“이, 이러지 마세요.”
여인이 울상을 지으며 청년의 손을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손짓을 멈췄다.
“후훗, 내 기분을 거슬리면 그대의 가문이 무사하지 못할 텐데, 기유레트 남작 영애?”
여인의 반항이 잠잠해졌다. 치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청년의 손길이 점점 더 여인의 은밀한 부위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흐흑…….”
비참한 기분이 되어 기유레트는 눈을 감았다. 귀족가의 영애로 태어나 정숙함을 지켜 온 그녀였다. 소중히 지켜온 정조를 이런 불한당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흘렀다.
이 금발의 청년이 체타스 남작가에 나타난 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태양탑의 마법사라 자신을 소개하며 청년은 놀랍게도, 금화 일만 닢을 지불한다면 권왕 레펜하르트를 해치워 주겠다며 호언장담했다.
당연히 체타스 남작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갑자기 나타나 저 이름 높은 권왕을 잡졸 취급하며 거액을 요구하는데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체불명의 청년은 실로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간단한 손짓만으로 체타스의 기사 서른 명이 동시에 나가떨어졌고, 뒤이은 마법의 힘은 훈다르가드의 거대한 석탑을 치즈처럼 잘라 내 버렸다.
그 어마어마한 위력을 본 체타스 남작은 바로 안면을 바꾸었다. 정중히 청년을 맞이하며 최고의 귀빈으로 모셨다.
하지만 이 청년은 그야말로 개망나니였다.
막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체타스 남작가에 눌러앉은 그는 하녀들을 희롱하고 시종들을 마구 부리며 멋대로 굴었다. 시종들은 말대꾸만 해도 죽도록 두들겨 맞았고 얼굴 좀 반반한 하녀들은 바로 침대로 끌려들어 갔다.
가문의 안위가 걸려 있으니 안하무인으로 설치는 그를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남작 영애인 기유레트까지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큭큭큭, 역시 곱게 자란 년들은 천한 것들과 냄새부터가 다르단 말이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청년이 기유레트의 옷을 풀어 헤치려던 참이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뒤이어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드 님, 체타스 남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쳇, 한창 분위기 좋은데 초를 치다니…….”
곧이어 문이 열리고 체타스 남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기유레트가 가슴을 가리며 허겁지겁 방을 빠져나갔다. 흐느끼며 도망치는 딸을 본 남작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저자가 감히 내 딸에게까지?’
하지만 지금 아쉬운 건 남작 쪽이다. 튀어나오려는 호통을 꾹 참으며 그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법사 제이드! 권왕이 결국 이곳까지 오고 있다 하오!”
손가락으로 금색 머리칼을 꼬며 제이드가 딴청을 피웠다.
“그런가? 그럼 어서 금화 삼만 닢을 모으셔야겠구려?”
유들유들한 그의 태도에 체타스 남작이 이를 갈며 등 뒤로 손짓을 했다. 시종 두 명이 낑낑대며 나무 궤짝 두 개를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궤짝을 가리키며 남작이 외쳤다.
“자, 원하던 황금이오!”
궤짝에는 누런 금화가 잔득 담겨 있었다. 제이드가 눈을 빛냈다.
“호오? 벌써 모았네? 체타스 남작가가 부호라더니…….”
남작이 다짐을 받겠다는 듯 물었다.
“정말 권왕 레펜하르트를 해치울 수 있는 것이겠지?”
금화 삼만 닢이면 부호로 유명한 체타스 남작에게도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몇 년 치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액인 것이다. 현금을 모두 동원하고 지닌 예술품이며 보석까지 팔아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정말 권왕을 해치울 수 있다면 결코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전쟁에서 지면 모든 것을 잃을 처지가 아닌가?
“물론.”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이드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자는 위대한 마법의 힘 앞에 아무것도 아니오.”
시종 두 명이 궤짝을 제이드 곁에 놓고 뒤로 물러섰다. 방을 나서며 체타스 남작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적들은 내일쯤 훈다르가드에 도달할 것이오. 권왕과 신월의 검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 반드시 처리해 주길 바라오!”
“맡겨 두시오.”
그제야 안도한 듯 체타스 남작이 방을 떠났다. 남작의 모습이 사라지자 제이드는 작은 엠블렘 하나를 꺼내 들었다. 거대한 나무 사이로 각종 신수들이 정교하게 세공된 은빛 엠블렘, 그것을 매만지며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명령 때문에 해치워야 할 작자지만…….”
엠블렘을 도로 품에 넣고 이번엔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낸다. 은의 시대 유물, 무한의 주머니였다. 궤짝 속 금화를 모조리 그 속에 옮겨 담으며 제이드는 피식 웃었다.
“이왕 약점 잡은 것, 즐길 건 즐기고 챙길 건 챙겨야지. 후후후.”
☆ ☆ ☆
네다스 협곡을 넘은 안타레스-갈린 연합군은 하루 만에 체타스 남작의 본성, 훈다르가드에 도달했다. 진지를 구축한 연합군이 바로 성을 포위하고 총공세를 가했다. 궁병들이 성을 향해 잇달아 화살을 날리고 투석기가 연달아 성벽에 바위를 쏘아 냈다.
“1차, 발사!”
휘이이잉…….
콰아앙!
거대한 바윗덩이가 훈다르가드의 성벽을 강타하며 지축을 흔들었다. 지휘관인 갈린의 기사, 그로스텐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2차, 발사!”
이번엔 각도가 좀 높았는지, 투석된 바위가 성벽 위쪽의 병력을 덮쳤다. 바위에 깔린 병사들이 비명을 터트리며 죽어갔다.
그 틈에 사다리며 갈고리 밧줄을 든 병사들이 성벽 아래로 달려가 타고 오를 준비를 했다. 훈다르가드의 병사들도 밧줄을 끊고 끓는 기름을 붓는 등 열심히 반격에 나섰다.
이미 영지전의 수준을 넘어선, 그야말로 본격적인 공성전이었다.
원래 영지전이라는 것은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잘 가지 않는 법이다. 어느 정도 승패가 갈렸을 때 국왕이나 고위 귀족이 중재에 나서게 되고, 그럼 진 쪽에서 적당히 배상금을 지불하고 전투를 끝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처음부터 국왕의 중재마저 무시하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괘씸죄가 있는데 이제 와서 유벨 2세가 중재를 해 줄 리 만무한 것이다.
그리고 체타스 남작은 갈린 남작가를 아예 몰살시키려는 생각으로 총력전을 벌였다. 기사뿐 아니라 갈린의 영지민들까지 잔혹하게 짓밟았다. 이미 중재를 할 단계는 한참 지나 버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양 가문 중 하나가 지도에서 사라지기 전에 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로스텐 경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고함을 질렀다.
“공격! 공격하라!”
“와아아아!”
화살 비가 연달아 훈다르가드의 하늘을 뒤덮었다. 투석기들이 쉴 새 없이 바윗덩이를 성벽으로 던져 댔다.
투석기 옆에 서서 전장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다들 잘하고 있군.”
항상 선두에 서던 평소와 달리, 그는 지금 후방에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동맹이라지만 이 전쟁의 주체는 엄연히 갈린 남작가다. 적어도 마지막 쐐기는 저들이 박아야 한다. 여기에서까지 레펜하르트가 선두에 서 버리면 그야말로 주객전도, 갈린 남작가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리스와 안타레스 기사단만 출전시키고 이렇듯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어차피 승리는 결정된 거나 다름없으니, 느긋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가자! 안타레스의 기사들이여!”
저 멀리 아스레일 경이 수하를 독려하며 밧줄을 타고 성벽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기사들도 눈에 불을 켜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번에야말로 주군께 우리의 용맹을 보이자!”
안 그래도 그동안 계속 레펜하르트가 선두에서 설친 탓에 뒤처리밖에 못 맡은 안타레스 기사단이었다. 다들 잔뜩 흥분해 사다리며 밧줄을 타고 성벽을 공략하고 있었다.
밧줄을 연달아 당기며 성벽을 타오르는 아스레일의 머리 위에 거무튀튀한 물체 하나가 나타났다. 끓는 기름을 담은 솥이었다.
때마침 성벽 밑으로 도달한 시리스가 다급히 경고를 던졌다.
“조심해요, 아스레일 경!”
고개를 든 아스레일의 안색이 굳었다. 끓는 기름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아스레일이 재빨리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며 화상을 각오할 때였다.
시리스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 친구, 님피아! 나를 위해 흘러 줘요!”
물방울이 응집되며 푸른 여인의 형상으로 변했다. 물의 정령, 님피아가 손짓을 하자 쏟아지던 끓는 기름이 허공으로 역류하며 도로 성벽 위를 덮쳤다.
기름을 뒤집어쓴 병사들이 악을 써 댔다.
“으악!”
“이거 왜 이래?”
“앗 뜨거어어어!”
공세가 뜸해진 틈을 타 기사들이 맹렬히 성벽 위로 올라갔다.
님피아를 거둔 뒤 시리스도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공격이 집중적으로 가해졌지만 사라나를 소환해 허공으로 몸을 피하며 앞장서 성벽을 주파한다. 백금발의 엘프 소녀가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이 공포에 찬 외침을 터트렸다.
“신월의 검사다!”
성벽 위에 오른 시리스가 두 자루 시미터를 뽑아 맹렬히 휘두른다. 은색 검광이 병사들 사이를 휩쓸며 소용돌이가 되어 불어닥친다.
창칼을 수수깡처럼 베어 버리는 그 검광 앞에 사기를 잃지 않는 이는 없었다.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후우우…….”
성벽 위를 장악한 뒤 시리스가 잠시 숨을 고를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뎀 피르 아스타르나, 광휘여, 내 손에 임해 적을 치는 징벌자가 될지니! 루미너스 퍼니쉬먼트!”
굵은 섬광이 대기를 찢으며 그녀를 덮쳐 갔다. 화들짝 놀라며 시리스가 허공으로 공중제비를 넘었다.
“윽!”
섬광이 성벽 위를 파헤치며 길게 파괴의 흔적을 남겼다. 성벽 일부가 통째로 무너질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연달아 세 번이나 몸을 날려 간신히 공격을 피한 시리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루미너스 퍼니쉬먼트라면 7서클의 광계 주문이다.
‘7서클의 고위 마법사? 체타스 남작 휘하에 이 정도 실력자가 있었나?’
성벽 저편에서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금발의 청년이 그녀를 향해 실소를 흘렸다.
“신월의 검사라…… 엘프 암컷 주제에 이름 하나는 그럴싸하게도 붙었군.”
시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청년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불쾌한 기분이 들면서 소름이 돋는다.
“계약은 레펜하르트, 그자뿐이지만…….”
청년이 오른손을 들며 중얼거렸다.
“덤으로 저것도 처리해 주지.”
☆ ☆ ☆
들어 올린 오른손을 내리치며 청년, 제이드가 시동어를 외쳤다.
“매스 포톤 레이!”
수십 줄기의 황색 섬광이 시리스의 사방을 점유하며 비처럼 쏟아졌다. 도저히 피할 곳이 없다. 뒤로 몸을 날리며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테라투스! 나를 위해 일어서 줘요!”
박살 난 성벽 속에서 거대한 흙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소환된 테라투스가 시리스를 감싸며 모든 섬광을 대신 맞았다. 포톤 레이가 흙거인의 전신을 사정없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제이드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쭈? 이걸 막아? 저게 정령술이란 건가?”
결국 흙거인은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전신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마법에 실린 파괴력이 보통이 아니란 증거다. 힘을 잃은 테라투스가 결국 무너져 내리며 흙으로 되돌아갔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시리스가 혀를 내둘렀다.
‘아슬아슬했어. 설마 저런 고위 마법사가 있었다니…….’
시리스는 경각심을 높이며 땅을 박찼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아예 마법을 외울 시간을 주지 않는 것!
“하앗!”
맑은 기합을 터트리며 상대에게 돌진한다. 질풍처럼 달려오는 그녀를 보며 제이드가 인상을 썼다.
“건방진!”
그의 양손이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에어 봄! 웨이트 디스토션!”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강렬하게 폭발하며 돌풍을 일으킨다. 돌풍이 돌진하는 시리스를 밀어붙였다.
풍압에 밀린 시리스가 자세를 가다듬으려는 찰나, 뒤이은 웨이트 디스토션이 그녀의 무게 감각을 일그러뜨렸다.
“윽!”
신음을 흘리며 시리스가 무릎을 꿇었다. 보이지 않는 거인이 양어깨를 강하게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를 가리키며 제이드가 시동어를 이었다.
“레이 바인드!”
빛의 밧줄이 생성되어 시리스의 사지를 꽁꽁 얽맨다. 제이드가 입가에 살벌한 미소를 띠었다.
“자고로 날뛰는 년은 족쇄를 채워 두어야 하는 법이지.”
느긋하게 수인을 맺으며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만물이여, 재가 되어라…….”
그때였다. 순간 시리스가 무릎을 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팔을 떨쳐 빛의 밧줄을 끊어 냈다.
“하아압!”
전신을 대지의 정령력으로 감싸 감각을 되돌린 뒤 실프를 불러 마력의 밧줄을 끊은 것이다. 마법을 깬 시리스가 자세를 잡고 재차 제이드에게 달려들었다.
‘윽?’
당황한 제이드가 허겁지겁 마법을 완성시켰다.
“인시너레이트incinerate!”
붉은 불길이 작열하며 시리스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어찌나 화력이 강력한지 시야가 일그러져 보일 정도였다.
시미터를 앞으로 교차하며 그녀도 마주 외쳤다.
“이그나시스!”
불의 거인이 불꽃의 숨결을 받아치며 열기를 흩뿌렸다. 불기둥이 성벽 위쪽으로 높게 솟구쳤다. 고온의 열기로 인해 주위의 석재가 버터처럼 녹아내리며 기묘한 형상으로 화했다.
콰아아앙!
열풍이 사방으로 불었다. 얼굴을 가리며 시리스가 뒷걸음질을 쳤다. 배리어를 쳐 여파를 막아 내며 제이드가 이를 갈았다.
“이것까지 막아?”
고작 엘프 따위에게 연달아 마법이 막히다니? 자존심이 상한 제이드가 마력을 끌어 올리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북풍의 바람이여! 검풍이 되어 내 적을 쳐라! 프리즌 블레이드 스톰!”
제이드 주위로 눈보라가 일어나며 수십 개의 얼음의 칼날이 나타났다. 섬뜩한 냉기의 칼날이 회전하며 소용돌이친다. 주위의 성벽이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시리스도 정령술로 반격에 들어갔다.
“가라! 샐러맨더!”
십여 개체의 불도마뱀이 허공을 날아 얼음의 칼날 회오리를 강타한다.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순간 시리스의 안색이 굳었다.
‘안 통해?’
샐러맨더들은 칼날에 다가가는 족족 갈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얼음의 칼날에 깃든 냉기가 너무 강해 샐러맨더 정도의 화력으로는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리스는 뒤로 물러났다.
‘제길…….’
이그나시스 정도라면 통할 것도 같지만, 이그나시스는 저자의 마법을 막느라 힘을 소진해 버려 당장은 재소환할 수가 없다.
위이이잉!
섬뜩한 절삭음을 내며 칼날의 소용돌이가 그녀의 전신을 노리고 쇄도해 온다. 급한 김에 시리스는 양손의 시미터를 휘둘러 칼날을 쳐 냈다.
타타탕!
그때마다 시미터 위로 얼음이 엉겨 붙었다. 시미터의 예기가 사라지며 급격히 무거워진다. 당황하는 시리스를 보며 제이드가 이죽거렸다.
“후후, 칼잡이들에겐 이 수법이 참 잘 통하지.”
“윽!”
묵직해진 시미터를 든 채 시리스는 인상을 썼다. 하도 얼음이 달라붙어, 이제는 더 이상 검의 형상조차 아니었다.
‘어쩌지?’
다급해하며 그녀는 머리를 굴렸다. 언제나 써 오던 실프를 검에 깃들이는 술수, 절삭력을 높이는 그 수법은 현 상황에서 소용이 없었다.
불의 정령력을 검에 깃들여야 한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정령 제어술은 실프를 깃들게 하는 것 정도가 한계다.
고민하던 시리스가 갑자기 빠드득 이를 갈았다.
“에라! 어차피 결과만 같으면 되는 거잖아!”
그녀가 고함을 질렀다.
“나와! 샐러맨더!”
또다시 불도마뱀이 화르륵 허공에 생성되었다. 정령의 친구, 엘프의 부름에 따라 소환된 두 마리 샐러맨더가 명령을 기다리며 그녀 곁에 머문다. 샐러맨더를 향해 갑자기 시리스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
눈을 껌뻑이며 불도마뱀들이 어리둥절해할 때였다. 고개를 든 시리스가 양손의 시미터를 그대로 샐러맨더의 꼬리를 푸욱 찔러 버렸다!
꾸엑!
불도마뱀들이 눈을 크게 떴다. 뭐, 실제로 소리를 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표정이 대단히 강렬하다. 두 샐러맨더 모두 ‘뭐임? 이게 뭐임?’ 하는 얼굴로 시미터에 꿰여 바동대기 시작했다.
미안해하면서도 시리스가 활짝 웃었다.
“됐다!”
시미터로 샐러맨더를 꼬치처럼 꿰어 강제로 화염검화시킨 것이다. 불꽃의 시미터를 양손에 쥔 채 그녀는 다가오는 냉기의 칼날을 후려갈겼다.
쾅! 쾅! 콰앙!
폭음이 연달아 울리며 냉기의 칼날이 여지없이 부서져 녹아내린다. 기대했던 대로 샐러맨더의 화력이 시미터에 더해지니 저 가공할 냉기 앞에서도 충분한 위력이 나와 주었다.
시리스는 잇달아 검을 휘두르며 얼음의 폭풍을 부숴 갔다. 물론 그 와중에 시미터에 꽂혀 버둥대는 샐러맨더의 애처로운 몸부림은 애써 무시했다. 제이드가 입을 쩍 벌렸다.
“……엘프는 정령의 친구라며? 그래서 정령술을 쓴다며?”
정령술에 대해 잘 모르긴 해도 저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저러고도 정령과 친구라고? 설사 노예라도 저렇게까지 막 대하진 않을 것 같았다.
“저러고도 정령술이 돼?”
사실은 세계수의 총애를 받는―좀 사기성이 짙지만― 시리스이기에 가능한 짓이었다. 평범한 엘프가 저런 짓 했다간 당장 정령 친화력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제이드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시리스는 모든 얼음의 칼날을 분쇄해 버렸다. 불꽃의 시미터를 양손에 쥔 채 그녀가 다시 앞으로 뛰쳐나갔다. 제이드도 연달아 마법을 구사해 접근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불의 정령력이 깃든 쌍검이 마법을 모조리 파훼해 버린다.
‘이, 이거 생각보다 더 까다롭잖아?’
그렇게 계속 뒤로 물러서며 마법을 구사하던 중이었다. 제이드의 등 뒤로 무엇인가가 닿았다. 성벽의 축대였다.
물러설 자리가 없어진 제이드를 향해 시리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날렸다. 시미터를 높이 쳐들고 강렬한 검격을 흩뿌린다.
“하앗!”
불길이 일렁이며 두 줄기 참격이 머리 위로 쇄도해 온다. 제이드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리스가 승리를 확신하며 눈을 빛낼 때였다.
“블링크!”
펑!
갑자기 눈앞에서 제이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두 줄기 참격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헉?”
놀라며 시리스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코앞에 있던 상대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고작 엘프 따위에게 블링크 부츠까지 써 버리다니…….”
☆ ☆ ☆
시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제이드가 인상을 구긴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신고 있는 부츠, 그 표면에 빛의 문양이 떠올라 희미하게 점멸하는 것이 보였다.
‘저거 설마…… 공간을 이동하는 아티팩트?’
정말 공간을 뛰어넘는 권능을 지닌 기물이라면 마갑 엘드라드처럼 대륙 전체에 명성이 자자한 아티팩트일 터였다.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시미터를 내리쳤다.
“가라! 샐러맨더!”
검에 꽂혀 있던 샐러맨더가 쏙 빠지며 날아갔다. 샐러맨더가 저만치 떨어진 제이드를 향해 몸을 던졌다. 막 샐러맨더가 적중하려는 순간…….
펑!
또다시 제이드가 사라지며 샐러맨더가 바닥에 충돌해 폭발했다. 그는 어느새 좌측에 나타나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용없다, 엘프 계집.”
틀림없었다.
공간 이동, 그것도 개체 공간 이동이 가능한 은의 시대 아티팩트였다.
시리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음껏 공간을 이동하며 강력한 마법을 쏘아 대는 고위 마법사를 대체 무슨 수로 막으란 말인가?
게다가 제이드가 가진 아티팩트는 저 블링크 부츠뿐이 아니었다.
“엘프 따위에게 쓰기엔 아까운 것이지만…….”
제이드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아낄 이유가 없지.”
손에 낀 장갑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섬뜩한 예감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여, 시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펄쩍 뛰었다.
사악!
섬뜩한 음향과 함께 날카로운 빛의 원반이 날아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두꺼운 성벽 상단이 절단되며 스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경악한 얼굴로 시리스는 잘린 성벽을 바라보았다. 절단면이 어찌나 매끄러운지,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이 정도로 엄청난 절삭력이라니?
‘마법? 오러?’
어느 쪽이건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오른손에 낀 장갑을 들어 보이며 제이드가 자랑스레 중얼거렸다.
“단절의 검.”
부우웅!
장갑으로부터 섬광이 솟구치며 검의 형상으로 변했다. 시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한 검 형태의 빛, 하지만 속에 깃든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보고만 있어도 절로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재주껏 막아 봐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또다시 제이드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간을 뛰어넘어 시리스의 등 뒤로 돌아간 뒤 바로 빛의 검을 휘두른다. 시리스도 잽싸게 몸을 틀어 피했지만 조금 늦었다. 옷자락이 찢어지며 핏물이 튀었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그녀는 참격을 날려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 자리에 이미 제이드는 없었다. 어느새 옆으로 돌아가 검을 휘둘러 후속타를 날린다. 또다시 핏물이 튀어 오른다.
연속으로 공간을 뛰어넘으며 제이드는 사정없이 시리스를 압박해 갔다. 정신없이 밀리는 그녀의 전신에 점점 상처가 늘어났다.
“이이익!”
고통과 굴욕감으로 시리스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상대의 검술이나 움직임 자체는 별것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체술을 익힌 마법사 정도 수준일 뿐이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공간 이동이 곁들여지니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간신히 치명타를 피하는 것만이 현재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쳇, 잘도 피하네.”
갈대처럼 휘청대면서도 용케 급소를 지키는 시리스를 보며 제이드는 혀를 찼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닥여 마법을 발동시켰다.
“홀드 슬로우!”
하위 서클 주문이지만 잠깐이나마 움직임을 억제하기엔 충분했다. 순간적으로 시리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제법 설쳤다만, 이젠 끝이다.”
꼼짝도 못하는 시리스를 향해 제이드가 빛의 원반을 쏘아 냈다. 조금 전 성벽을 갈랐던 그 절삭의 빛이었다.
위이이잉!
빛의 원반이 괴상한 소음을 흘리며 날아온다. 다급해진 시리스가 시미터를 교차해 앞을 막았다.
타탕!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두 자루 시미터가 박살이 나 버렸다. 흩어진 섬광의 파편이 그녀의 전신을 뚫고 지나갔다. 전신을 덮쳐 오는 고통에 시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가녀린 육체가 피투성이가 되어 비참하게 나가떨어진다. 쓰러진 시리스는 바닥을 기며 신음을 흘렸다.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에서 흐르는 피가 성벽을 붉게 물들였다.
“으, 으윽…….”
“하하핫! 개처럼 기는 걸 보니 이제 좀 엘프년답구나!”
통쾌한 듯 웃으며 제이드가 손을 들어 마법을 준비했다. 최후의 일격만큼은 자신의 마법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 불길이 일렁이며 이내 거대한 화구로 변해 갔다.
“건방지게 내 마법을 막아 냈겠다?”
화구가 점점 커지며 마력의 열기를 내뿜는다. 압축되고 압축된 폭염의 힘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일렁인다.
시리스의 눈동자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레펜하르트 님!’
2
“시리스!”
성벽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눈을 부릅떴다. 시리스가 웬 정체불명의 마법사에게 사정없이 밀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괜찮게 상대하는 것 같더니, 마법사가 빛의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곧바로 몰려 패색이 짙어진다.
‘별 위험 없을 줄 알았는데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온 거야!’
초조해하며 레펜하르트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리스를 홀로 전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곳으로 달려가 그녀를 돕고 싶지만…….
‘젠장! 거리가 너무 멀어!’
예전의 레펜하르트, 10서클의 대마도사였던 그라면 그냥 허공을 날아 단숨에 성벽까지 주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속으로 하늘을 나는 비행 마법, 플라이는 8서클의 고위 주문이었다. 지금 레펜하르트가 쓸 수 있는 것은 5서클의 단순 부유 주문, 레비테이션뿐이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열심히 달려가 봤자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이 뻔하고.
“그, 급하다…….”
레펜하르트는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해서였다.
그때 그의 눈에 거대한 투석기가 들어왔다.
“저거다!”
눈을 빛내며 레펜하르트는 투석기로 달려갔다. 막 바위를 장전하고 있던 기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권왕님?”
“잠시 빌리겠다!”
고함을 지르며 레펜하르트가 투석기 위로 뛰어올랐다. 가볍게 걷어차는 것만으로 장전되어 있던 바위가 붕 떠올라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바위가 있던 자리에 착지하는 그를 보며 병사들이 당황해 물었다.
“에엑?”
“권왕님, 지금 뭐 하시는 거…….”
“서, 설마?”
아무런 대꾸도 없이 레펜하르트가 팽팽히 당겨진 밧줄을 향해 수도를 뻗었다. 황금빛 오러의 칼날이 쏘아져 밧줄에 깊이 파고들었다.
타아아앙!
밧줄이 끊기며 투석기가 강렬한 힘으로 장전한 탄환을 허공에 쏘아 냈다. 물론 여기서 그 탄환은 바로 레펜하르트 자신이다.
슈우우웅!
바람을 가르며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단숨에 훈다르가드의 성벽까지 날아가기 시작했다. 적도 아군도, 그 순간 모두 기겁하며 고함을 질렀다.
“저, 저거!”
“뭐 하는 짓이야!”
“저런 미친!”
☆ ☆ ☆
“마그마 플레어!”
제이드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쏘아진 화염구가 폭염을 일렁이며 격류가 되어 거칠게 밀어닥쳤다. 흐릿해진 시리스의 눈동자 위로 이글거리는 불길의 강이 선명히 비쳤다.
끔찍한 열기가 전신을 찌른다. 이미 사지는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다. 정령을 부를 힘조차 남지 않았다.
시리스는 죽음을 각오하며 눈을 감았다.
“…….”
불길의 강이 성벽을 타고 흐르며 그녀를 덮치기 바로 직전…….
휘이이익!
파공음이 울리며 하늘에서 황금빛 유성이 떨어졌다.
쿠우웅!
유성이 성벽을 강타하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놀란 시리스가 눈을 번쩍 떴다. 철탑 같은 거한이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레, 레펜하르트 님?”
잠시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할 그가 어떻게 이 자리에? 죽음에 임박해 환각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동시에 불길의 강이 두 사람을 덮쳤다.
콰아아아아!
“이리 와, 시리스!”
허겁지겁 시리스를 품에 껴안고 레펜하르트는 몸을 돌렸다.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리며 등으로 모든 열기를 막아 낸다.
화르르륵!
작열하는 불길이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를 휘감으며 성벽 위를 가득 메웠다. 지독한 열기가 성벽 위를 벌겋게 달구었다.
잠시 후 화염이 사그라지며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저 강력한 불길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를 뚫지는 못했던 것이다.
오러를 운용해 시리스의 전신을 지혈하며 그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멍하니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줄만 알았으니 아직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아직도 심장이 미칠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안겨 있는지를 깨달았다. 순간 시리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
노예 시절 이런저런 치욕을 당하긴 했지만, 항상 초반에 반품당한 덕에 실제로 남자를 접한 적은 없는 시리스였다. 이렇게 남자 품 안에 깊숙이 안겨 보긴 처음인 것이다.
그것도 그냥 남자 품인가? 오늘도 변함없이 레펜하르트는 웃통을 까고 있었다. 쉽게 말해 맨살, 근육의 열기가 고스란히 닿는다는 소리다. 사춘기 소녀에겐 참으로 부담스러운 포옹이 아닐 수 없다.
“내, 내려주세요……!”
“응? 어, 그래.”
바동대며 시리스는 레펜하르트 품에서 빠져나왔다. 오러의 치유력 덕인지 그럭저럭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그녀가 눈을 흘겼다.
‘또 벗고 왔어! 또!’
“……?”
갑자기 째려보는 시리스의 태도에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부끄러워서 잠시 저런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어쨌건 위기의 순간 바람같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 주지 않았는가? 솔직히 감동스럽긴 했다.
“고마워요, 레펜하르트 님…….”
“당연한 걸 가지고 뭘…….”
멋쩍어하며 레펜하르트는 성벽 안쪽에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아까부터 합공할 기회를 노리던- 그러나 워낙 제이드와 시리스가 살벌하게 싸워 대는 탓에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만 있던 아스레일을 불렀다.
“아스레일 경! 시리스를 부탁하네!”
“네! 백왕님!”
달려오자마자 아스레일이 힐링 포션을 꺼내 시리스에게 건넸다. 상처를 치료하는 그녀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럼 잠깐만 쉬고 있어, 금방 처리하고 올 테니까.”
레펜하르트의 시선이 금발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청년이 그를 노려보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권왕 레펜하르트!”
☆ ☆ ☆
“등장 한번 요란하기도 하군. 역대 권왕들이 무식하단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눈앞의 청년 마법사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왠지 얼굴이 익숙했다.
‘어라? 묘하게 낯이 익은데?’
겉보기엔 더없이 선량해 보이는 반반한 외모, 하지만 표정을 지으면 인상이 확 바뀌어 냉철하고 음흉해 보이기까지 한다. 저 이중적인 인상의 소유자를 그는 전생에서 본 적이 있다.
새파랗게 젊은 모습이라 미처 몰랐는데 막상 인식하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틀림없는 그 자다.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는 빛의 마도사.
레펜하르트를 제외하고는 대륙 최강의 마법사였던 자.
대륙의 모든 마법병단을 이끌며 지긋지긋하게 그를 괴롭힌 전생의 숙적 중 하나.
‘제이드 아크라이트?’
순간 레펜하르트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맴돌았다.
‘저자가 어째서 여기에?’
보아하니 체타스 남작에게 고용된 것 같은데, 어째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가 아는 제이드라면 굳이 이 먼 크로방스 왕국까지 와서 용병 노릇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태양탑을 거의 떠나질 않아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 시대의 제이드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 인사였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명문가, 대대로 대마법사를 배출한 아크라이트 가문의 차남으로 어릴 적부터 영재 교육을 받은 엘리트, 20대 중반에 이미 7서클의 경지에 올라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의 부러움을 산 천재 마법사가 바로 그였다.
하필 동시대에 레펜하르트라는 희대의 괴수가 있어 서른 살 이후에는 완전히 묻혀 버렸지만, 이때만 해도 제이드는 그 뛰어난 재능으로 태양탑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가문도 빵빵하고 재능도 출중하니 고작 돈 때문에 전장을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여행이라도 다니다가 잠시 몸을 의탁한 건가?’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상념을 거두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건 지금 눈앞에 제이드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저놈이 시리스를 죽이려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참으로 기묘한 우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 시리스를 죽인 자가 또다시 그녀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이드를 노려보는 싸늘한 눈빛 속에 섬뜩한 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이드가 싸늘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적인 원한은 없지만 계약은 계약, 죽어 줘야겠다! 권왕!”
그리고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돌풍이 화염을 동반하며 피어올랐다.
“파이어 캐논!”
십여 개의 화염 탄환이 불꽃의 궤적을 남기며 날아들었다. 레펜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파이어 캐논은 고작 4서클의 폭염 주문, 이 정도라면 굳이 스파이럴 가드를 쓸 필요도 없었다.
“헙!”
간단한 기합과 함께 황금빛 오러가 전신을 감싸며 화염 탄환을 모조리 튕겨 내 버렸다. 비웃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제이드를 노려보았다.
“어이가 없군. 이 정도로 오러 능력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8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만이 오러 유저와 견줄 수 있다는 것이 대륙의 상식이다. 전생에서야 레펜하르트 다음가는 최강의 마법사였겠지만 지금의 제이드는 7서클의 고위 마법사일 뿐이다. 나이에 비해 월등한 경지이긴 하지만 오러 유저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권왕을 상대하기엔 미흡하다.
물론, 제이드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단절의 검!”
제이드가 곧바로 오른손을 뻗어 빛의 원반을 날렸다. 파이어 캐논은 처음부터 거리를 벌리기 위한 눈속임이었던 것이다.
새애애액!
빛의 원반이 섬광의 궤적을 남기며 레펜하르트를 직격한다. 그 속에 깃든 가공할 기운에 레펜하르트는 순간 기겁했다. 좌측으로 몸을 비틀며 황금빛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 올려 회전시킨다.
“스파이럴 가드!”
파지지직!
금색의 소용돌이와 빛의 원반이 서로 갈리며 핏물이 튀었다. 빛의 원반이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성벽을 치즈처럼 절단해 버렸다.
‘헉? 스파이럴 가드가 깨졌어?’
놀란 눈으로 레펜하르트는 어깨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하산한 이래 이렇게 쉽게 상처를 입어 보긴 처음이었다. 오러로 상처를 지혈하며 레펜하르트가 제이드의 손을 바라보았다.
‘……은의 시대 아티팩트? 시리스가 당했던 그 빛의 검인가?’
그것도 유서스가 쓰는 마검 엘드란의 최강 기술, 엘드릴의 빛에 필적할 위력이다. 심지어 발동 시간은 거의 찰나, 저 단순해 보이는 디자인의 장갑은 엘드란보다도 더 고위의 아티팩트였던 것이다.
“맙소사, 어디서 저런 걸?”
놀란 레펜하르트의 표정에 제이드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제 아무리 권왕이라도 위대한 고대의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이드가 빛의 원반을 연달아 쏘아 냈다.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레펜하르트는 정신없이 몸을 날리며 공격을 피했다. 당혹해하며 레펜하르트가 표정을 구겼다.
‘제이드가 이런 엄청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단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마냥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반격에 나선다. 원반의 공격을 피해 몸을 날리며 주먹을 강하게 뻗어 낸다.
“연환 기격탄!”
오러의 탄환이 연달아 날아가 제이드를 노렸다. 제이드가 왼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시동어를 외쳤다.
“힘의 장막, 나를 지키는 방패가 되라! 안티악 배리어!”
검푸른 빛의 장막이 제이드를 감싸며 기격탄을 모조리 막아 냈다. 폭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역시 오러 유저는 마법사에 비해 원거리 공격이 약한 편이라, 기격탄이 배리어를 뚫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덕분에 공격이 좀 늦춰지긴 했다. 이 틈에 레펜하르트가 거리를 좁혔다.
“먹어라! 가스트리젠!”
살기를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바로 제이드를 향해 오른발을 길게 뻗었다. 황금빛 오러가 포탄처럼 쏘아져 가공할 충격파를 낳았다.
콰앙!
단숨에 배리어가 깨지며 오러가 제이드를 직격하려는 찰나였다.
“블링크!”
펑!
연기와 함께 제이드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등 뒤에서 인기척이 감지됐다. 레펜하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제이드는 10여 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신발이 희미한 빛을 내는 걸 보며 레펜하르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단절의 검은 몰라도, 저 신발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아티팩트였다.
“……블링크 부츠?”
전생의 일이었다. 시리스, 타시드와 함께 한창 대륙의 오지에서 살아가는 이종족들과 조우하며 10서클의 경지를 개척하던 레펜하르트에게 어느 날, 정체불명의 암살자가 나타났다.
그 암살자의 실력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리스도 타시드도 그 암살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가 지닌 은의 시대 유물이 하나같이 듣도 보도 못했던 엄청난 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암살자가 쓰던 아티팩트 중 하나가 바로 저 단거리 공간 이동의 권능을 지닌 블링크 부츠다.
‘저걸 어떻게 제이드가 신고 있는 거지?’
당황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포탄처럼 쏘아져 제이드의 코앞까지 쇄도, 강렬한 수도를 내리친다.
하지만 또 헛손질이었다. 다시 제이드가 공간 이동으로 멀리 도망친 것이다. 멀어진 그를 향해 바로 기격탄을 날려 보았지만, 이내 배리어에 막혀 버린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아까는 거리가 멀어서 미처 몰랐는데…….
‘시리스가 당한 이유가 이거였군.’
지금 그녀의 실력이라면 상대가 7서클 마법사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밀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후후, 일단 거리를 벌리면 전사 따위 마법사의 상대가 될 수 없지…….”
거리를 벌린 제이드가 느긋하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캐스팅을 마치며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프리즌 블레이드 스톰!”
얼음 칼날의 폭풍이 눈보라를 뿌리며 레펜하르트를 뒤덮었다. 오러를 전신에 휘감은 채 레펜하르트가 연달아 주먹을 날려 칼날을 부숴 갔다.
하지만 그의 오러로는 칼날은 막아도 냉기는 막지 못했다. 얼음 파편이 전신에 달라붙으며 조금씩 온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점점 레펜하르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새애액!
또다시 빛의 원반이 연거푸 날아왔다. 몸을 비틀며 레펜하르트는 간신히 공격을 피해 냈다. 피하는 것이 고작, 도저히 반격은 불가능했다. 제이드가 조롱을 던졌다.
“그런 얼어붙은 몸으로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블링크 부츠로 거리를 벌린 뒤 마법으로 움직임을 봉쇄하고 단절의 검으로 숨통을 끊는 것. 그가 오러 유저를 상대하는 필승법이었다. 이걸로 암살했던 오러 유저의 숫자만 무려 셋, 제이드는 승리를 확신했다.
‘저 엘프 계집은 정령술 때문에 마법이 막혔지만 오러 유저인 권왕이라면 이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때였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쳇, 웬만하면 안 쓰려고 했는데…….”
두 손을 가슴으로 모으더니 나직하게 읊조린다.
“이곳은 나의 영역, 그 어떤 흐름도 허락하지 않으리. 디스펠 에리어.”
보이지 않는 마력장이 펼쳐지며 제이드의 마법에 간섭해 들어갔다. 이내 눈보라가 사그라지며 냉기가 눈에 띠게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레펜하르트의 전신이 이내 자유로워졌다.
제이드가 경악해 입을 쩍 벌렸다.
“마, 마법?”
☆ ☆ ☆
제이드는 눈을 껌뻑거렸다.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무식하기로 대륙 제일이라는 저 짐 언브레이커블 정통 계승자의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마력장이 짙게 피어오르고 있다. 아무리 봐도 7서클인 자신과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아 보인다.
‘말도 안 돼! 권왕이 마법도 쓴다고?’
혹여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은의 시대 유물의 힘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제이드도 촉망받는 천재 마법사, 상대가 마법사인지 아티팩트 사용자인지도 구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분명 방금의 디스펠 에리어는 저자, 레펜하르트가 직접 구현한 것이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드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웃었다. 권왕으로 행세하고 있으니 대놓고 마법을 쓸 생각은 물론 없었다. 하지만…….
“뭐, 티만 안 나면 되지.”
대놓고 불꽃이며 전격 펑펑 날리는 요란한 마법은 쓰지 않는다. 적당히 상대의 마법을 방해할 정도면 충분하다. 그럼 멀리서 보았을 때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쓰는지 오러를 쓰는지 무슨 수로 구별하겠는가?
“타앗!”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려 제이드에게 돌진했다. 그제야 화들짝 정신이 든 제이드가 재차 마법을 준비했다.
“서, 서먼 웹!”
마법의 거미줄이 머리 위로 펼쳐진다. 레펜하르트가 거미줄을 가리키며 마주 외쳤다.
“캔슬레이션!”
마법의 거미줄이 단숨에 허공에서 소멸했다. 기겁한 제이드가 마법을 이었다.
“라이트 바인드! 리퀴드 위드 비스코시티liquid with viscosity!”
빛의 밧줄이 뻗어 나가고 강한 점성을 지닌 액체가 레펜하르트의 발치로 던져졌다. 하지만 그것도 발동되기가 무섭게 이내 취소되어 버렸다. 다급해진 제이드가 단절의 검을 휘둘렀다.
“타앗!”
네 개의 빛의 원반이 허공을 갈랐다. 날아오는 빛의 원반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양손을 크게 펼쳤다.
“리플렉트 미러!”
마법의 거울이 생겨나며 빛의 원반들이 모조리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레펜하르트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위력이야 엄청나지만 어쨌건 속성은 빛이잖아? 그렇다면 반사시킬 수 있지.”
처음 본 아티팩트지만 명색이 마왕이었던 레펜하르트다. 단절의 검의 발동 원리는 보자마자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엄청난 고열의 섬광을 발생시켜서 표적을 가르는 수법, 하지만 파괴력을 전달하는 매개는 어디까지나 빛이다. 즉, 빛을 흩어 버리거나 반사시키는 식으로 대응하면 이렇듯 저렴한(?) 마법으로도 방어가 가능한 것이다.
“…….”
기가 막혀 제이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절의 검조차 막아 내다니? 7서클의 마법사인 자신보다도 저 우락부락한 권사가 더 세련된 마법 운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미친 거냐, 아니면 세상이 미친 거냐…….’
레펜하르트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제이드에게 돌진해 갔다. 연속으로 블링크 부츠를 발동해 거리를 벌리며 제이드는 계속 마법을 쏘고 단절의 검을 휘둘렀다. 불꽃과 전격, 냉기, 그리고 빛의 원반들이 잇달아 쏘아졌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법은 봉쇄하고 단절의 검은 리플렉트 미러로 반사시키며 끈질기게 제이드를 추적했다. 나중에는 일일이 파훼하기 귀찮아졌는지 괴상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에라이, 디스펠 펀치!”
무슨 수를 쓴 건지, 주먹에 디스펠 매직을 걸고 그걸로 발동된 마법을 일일이 후려갈기기 시작한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이었다.
‘아니, 저런 건 대체 어디서 가르치는 거야?’
사실은 한창 마법을 쓰다 흥이 오른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새로운 주문을 개발한 것이지만 제이드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어쨌거나 제이드는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마법도, 단절의 검도 통하지 않으니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계속 블링크 부츠만 죽어라 발동했다.
펑! 펑! 펑!
잡힐 만하면 바로 몸을 빼 버리는 제이드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구겼다.
‘아, 저 블링크 부츠 골치 아프네. 예전에는 별것 아니었는데.’
전생에서 저 블링크 부츠를 상대할 때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때 블링크 부츠를 사용하던 암살자는 지금의 제이드보다도 더 많은 아티팩트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미 10서클의 마법사였던 레펜하르트에겐 전혀 힘든 상대가 아니었다.
‘AMP 쇼크웨이브 한 방이면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데, 쓰지를 못하니…… 쩝.’
10서클 궁극 주문, AMP 쇼크웨이브(Arcane Magic Pulse Shockwave).
레펜하르트 본인이 직접 창안한 이 주문은 세계의 마나, 그 근원의 흐름에 간섭해 정해진 반경 내의 모든 마도기를 정지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적아를 구별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평범한 마도구건 은의 시대 유물이건 초고도의 아티팩트건 이 주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심지어는 저 지저 태양 마그림조차도 일시 정지시킬 정도로 위력적인 마법이었다. 그 후 기겁한 레펜하르트가 바로 재가동시키긴 했지만.
아무리 어마어마한 은의 시대 아티팩트로 무장하고 있어 봤자 저 마법 한 방이면 그냥 침몰인 것이다. 그래서 당시엔 진짜 간단히 암살자를 처리할 수 있었다. 붙잡힌 암살자가 자살하는 통에 배후를 캐묻지는 못했지만, 그자가 가지고 있던 아티팩트는 즐겁게 회수해 시리스며 타시드에게 나누어 준 기억이 있다.
‘거참, 시리스가 쓸 때는 참 약점 많다며 투덜거린 물건인데 정작 내가 상대하니 엄청 짜증…… 응?’
구시렁대던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문득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저 블링크 부츠, 분명 약점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흐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제이드의 머리를 노리고 길게 킥을 뻗는다. 이번에도 블링크 부츠를 이용, 제이드가 20미터 후방으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그 순간 레펜하르트가 발을 뻗은 자세 그대로 대지를 깊게 찔렀다.
“아발란시 킥!”
콰아아앙!
반파된 성벽이며 흙더미들이 일제히 진동하며 원형으로 크게 퍼져 나갔다. 높이만 족히 3미터는 되는 무자비한 대지의 파도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훈다르가드의 남쪽 성벽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막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제이드가 눈을 부릅떴다.
“컥!”
시야 가득 거대한 흙의 해일이 밀려온다. 다시 블링크를 쓸 틈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흙더미가 제이드를 휩쓸고 지나갔다.
콰콰콰콰!
파문의 중심에 서서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여기 깔짝, 저기 깔짝 나타나 봐야 통째로 쓸어버리면 장땡이잖아?”
3
“으으으…….”
흙더미에 파묻힌 제이드가 꿈틀대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참으로 비참한 몰골이었다. 전신 의복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인 것이, 실로 문자 그대로 거지꼴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동정심 따위는 들지 않는다. 잽싸게 다가가 레펜하르트가 대뜸 수도를 휘둘렀다.
황금빛 오러의 칼날이 제이드의 두 발목을 뎅겅 잘라 버렸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피를 흘리며 제이드가 바닥을 뒹굴었다. 실로 잔혹한 손속,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태연했다.
“이 귀찮은 부츠부터 못 쓰게 해야지.”
고통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크, 크윽! 이런 수법을 쓸 줄이야…….”
몇 번이나 블링크 부츠를 써 왔지만 이런 약점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제까지 오러 유저를 상대할 땐 일단 거리를 벌리고 마법을 날리는 시점에서 거의 승패가 결정 났었으니까.
위력은 강해도 오러 유저는 마법사에 비해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여러 마법이 복합적으로 적용되면 오러만으로는 빠져나오기가 힘든 것이다. 실제로 레펜하르트도 마법을 쓰기 전까지는 어찌할 방도를 못 찾고 있지 않았는가?
물론 그것뿐이면 시간이 지나면서 오러 유저도 어떻게든 반격의 기회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발이 묶인 상대에게 날아가는 것이 바로 방어 불가능의 섬광, 단절의 검이다.
딜레이 없이 이동과 공격이 가능한 두 아티팩트의 사기적인 성능 앞에 제이드가 상대했던 모든 오러 유저들은 맥없이 쓰러져야만 했다. 그렇다 보니 블링크 부츠의 약점을 깨달을 만큼 오래 싸운 상대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거 사실은 댁이 시리스에게 자주 쓰던 방법인데…….’
전생의 제이드는 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