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제25장 세이어의 눈
1
대륙 중서부에 위치한 신성 바슈탈론 제국.
북으로 그라임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남으로 할라인 왕국과 인접하며 동으로 라스틸 공국, 테이칸 왕국과도 연결되어 있는 신성 바슈탈론 제국은 천 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지닌 강대국이었다.
영토 자체는 그라임 왕국이나 할라인 왕국에 비해 나을 것이 없으나 인구와 국력 면에서는 대륙 최강을 자부하는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별칭은 ‘주신 세이어께서 축복하신 땅’.
세이어 교단의 총본산인 교황청 판테온이 위치한 곳이며 교황청으로부터 인류의 지도자로 선택되어 황제를 칭할 권위를 가진 유일한 국가였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 동부 영지, 요드 백작령에 있는 세이어의 신전.
고해 성사실에서 한 젊은이가 나무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해를 하고 있었다.
“신관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가림막 건너편에서 온화한 대답이 들려왔다.
“세이어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죄를 고하고 죄 사함을 받으세요.”
젊은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제 가문에서 부리는 엘프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비록 엘프지만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우며 마치 꾀꼬리처럼 노래를 부릅니다.”
대수롭지 않은 죄였다. 귀족 젊은이가 노예로 부리는 엘프와 관계하는 것은 물론 떳떳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죄의 경중으로 치면, 수간보다는 조금 덜하고 창녀를 안은 것보다는 좀 심한 정도다. 그래서 신관도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엘프를 탐하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나, 젊을 때의 욕망 역시 억누르기엔 힘든 법이지요. 그대가 그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하였으니, 세이어의 이름으로 모든 죄는 사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이가 신관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이었다.
“아니요, 나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저는 그녀와 함께 가문을 나갈 생각입니다. 그녀와 떳떳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으로 향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남은 부모님들이 걱정하실 걸 생각하면 그 죄를 어찌 감당할지…….”
신관이 표정을 심각하게 굳히며 대답했다.
“으음, 잘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그대는 아직 젊소. 정욕에 눈이 멀어 그런 기분이 들 법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때일 뿐.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보시오.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저는 이미 진정한 사랑을 찾았습니다.”
단호한 태도였다. 신관이 안타까워하며 차근차근 설득했다.
“세이어께서 말씀하시길 그들을 인간의 노예로 운명 지었다 하셨습니다. 한때의 즐거움을 찾는 것은 몰라도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고해 내용을 바꾸시겠습니까? 세이어께서는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고해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완강한 태도로 젊은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받으리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단지, 남겨진 부모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곳을 찾았지요. 부모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 그것에 대해 속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출이라니…… 어디로 갈 생각이오? 어디 간들 엘프는 노예일 뿐이오. 그렇다면 굳이 가출을 할 필요가 없지 않소? 일단 하녀로 곁에 두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안타레스 백국으로 갈 것입니다.”
신관의 말을 가로막으며 젊은이가 말했다. 신관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 뜬소문을 믿는단 말이오?”
“저에겐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 후로도 신관은 계속 젊은이를 설득하려 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헛된 미몽에 빠져 인생을 망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요지부동이었다. 결코 태도를 바꾸려하지 않았다. 신관이 한탄을 흘렸다.
“안타깝도다…… 그저 그대가 어서 미혹에서 벗어나기를 세이어께 기도드리는 수밖에.”
젊은이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해 성사실을 나가려다 말고 문득 그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혹시 저희 부모님께 말씀드리거나 하는 건…….”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신관은 이미 이 젊은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 일대에서 엘프 노예를 부릴 정도로 권세 높은 이들이 누가 있겠는가? 요드 백작가의 후계자, 루웬 공자밖에 없는 것이다.
신관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오. 고해실에서 일어난 것은 설사 일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알아낼 수 없지. 하지만 잊지 마시오. 세이어께선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는 걸.”
굳은 얼굴로 젊은이, 루웬 공자는 신전을 떠났다. 신관에게 고해성사를 했어도 전혀 가슴은 홀가분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뭔가에 걸린 듯 콱 막힌 기분일 뿐이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하지만 저는 제 마음을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베레티는 단순히 주인의 명령으로 동침하는 그런 엘프들과 달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도 진정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엘프와 인간이라는 것은 진정한 사랑 앞에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루웬과 베레티가 사랑을 이룰 방법은 없었다. 아무리 루웬이 베레티를 아끼고 사랑한다 해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성노였고 애완용 엘프에 불과했다. 사랑하는 이가 저런 취급을 당해도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안타레스 백국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뜬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들려왔고, 또 신빙성이 있었다. 그리고 루웬은 저런 뜬소문이라도 잡고 싶을 만큼 간절했다.
‘이제 그녀와 함께 떠나야지. 떳떳하게 함께 살 수 있는 곳으로…….’
루웬은 슬쩍 품속을 더듬어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가문에서 몰래 훔친 금화와 보석이 담긴 주머니였다. 이 정도 금액이면 안타레스 백국으로 향할 경비와, 그곳에서 자리 잡을 충분한 자금이 될 터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루웬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지금쯤 베레티도 저택을 몰래 빠져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벅찬 가슴과 흥분,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을 담은 채 그는 계속 걸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연인과 약속했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그곳에 베레티는 없었다. 루웬이 멍하니 고개를 들어 느티나무 위쪽을 바라보았다.
느티나무 가지 아래, 아름다운 흑발의 엘프가 목을 맨 채 길게 혀를 빼물고 매달려 있었다.
“아…….”
바람이 불어온다. 시체가 바람에 흔들린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루웬이 바들바들 떨며 시체로 다가갔다.
“베, 베레티?”
시체 밑에 종이가 있었다. 루웬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죄송해요, 루웬 님.
저는 엘프,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미천한 몸.
감히 루웬님과 함께 하는 죄악을 저지를 수 없어요. 그것은 신의 분노를 사는 일, 우리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져 유황불에 고통받게 될 거예요.
좋은 여인을 만나세요. 저 같은 천한 엘프가 아닌, 진정 당신의 짝이 될 고귀한 인간의 여인을.
그녀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 저희 같은 미천한 이들을 위한 올바른 길이랍니다.
그동안 주제넘게 당신을 유혹한 저를 용서하세요.
루웬은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돼!”
베레티가 이런 유서를 남겼다고?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어제까지만 해도 희망에 부풀어 있던 그녀였다. 안타레스 백국의 소문, 그리고 대륙 여기저기서 은밀히 들려오는 엘프들의 탈주 소식을 듣고 나서 흥분한 루웬을 응원한 것도 그녀였다.
“그런 베레티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태도를 바꿀 리가 없어!”
이를 갈며 루웬은 유서를 살펴보았다. 혹시 자신의 계획을 알아챈 부모님이 남긴 가짜 유서인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분명 베레티의 필적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몇 번이고 되살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녀의 습관, 버릇, 흔적과 자취가 필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아아악!”
루웬은 절규했다.
“왜!”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니다. 그녀와 함께 살며, 그녀를 당당히 내 아내라고 소개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옆에서 남들처럼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대체 왜!”
눈물이 터졌다.
“으아아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시체 아래, 흔들리는 그녀의 유서를 든 채 루웬은 울고 또 울었다.
☆ ☆ ☆
할라인 왕국과 테이칸 왕국의 경계를 형성하는 쥬란 강.
강가에 위치한 오두막에서 한 40대 초반의 여인이 집필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 옆에는 수많은 원고들이 잔뜩 쌓여 있는 상태였다. 신들린 듯이 펜을 휘갈기다 말고 문득 여인이 화색을 하며 마침표를 찍었다.
“아, 끝났다.”
여인, 트루디는 뿌듯한 눈으로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수백 장이 넘게 쌓인 두꺼운 원고, 그 표지에는 ‘과수원의 오크 아저씨’라는 가제가 붙어 있었다.
트루디는 주신 세이어를 섬기는 여신관으로 쥬란 교구 내 지역 신전에 파견된 성직자였다.
쥬란 강 중부 유역에 자리 잡은 이곳은 전통적으로 포도나 복숭아 농사가 흥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영지 대부분은 과수 농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밀이나 보리, 수수 같은 곡식은 규모에 비해 사실 손이 그렇게 많이 가지는 않는다. 바쁜 시기에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농한기에 접어들면 또 한가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과수 농사는 사시사철 쉴 틈이 없다. 곡식처럼 일제히 베어서 탈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손으로 과실을 일일이 따야 하고, 농한기에도 쉴 새 없이 벌레를 잡아 주어야 하며 겨우내 나무가 얼어 죽지 않게 보살피기도 해야 한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이 일대 과수 농원들은 전부 수백의 오크 노예들을 부리는 대규모 농장들뿐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노예들을 부려서 얻는 이득도 컸다. 개인이 경작하는 과수원으로는 도저히 이들과 생산성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교구 내 거주민들 대부분이 농장 주인들이니 트루디도 자연스럽게 오크 노예들을 접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접하며 간혹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아무리 노예라지만, 오크들의 생활은 너무 비참했다. 하루 세 끼 적은 양의 식사만을 하며 쉴 틈 없이 일만 하는 삶이었다.
농장주들은 오크들이 워낙 멍청해서 힘든 줄도 모른다고 하지만, 트루디가 본 오크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이어 교단의 가르침은 저들이 사람이 아니라 가축일 뿐이라 했지만, 트루디가 보기엔 오크들 역시 사람 같아 보였다.
하지만 트루디는 딱히 이 현실에 대해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설 속의 성자가 아니라 일개 지방의 하급 신관일 뿐이었다. 감히 교단의 가르침에 반박할 만큼의 용기도, 신념도 없었다. 그저 인간으로 태어나 다행일 뿐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트루디의 생각이 변한 이유는 크로방스 내전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그녀만이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처럼 생각하는 이가 세상에 또 있었다.
그 사실은 소심한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글을 썼다. 평소 언제나 보아 왔던 오크들의 삶을 조금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냥 사실적으로 적었다. 그것이 이 ‘과수원의 오크 아저씨’였다.
“이걸로…… 조금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꿔 줄까?”
원고를 정리하며 트루디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딱히 세이어의 가르침을 거역하려는 생각은 없다. 오크들의 삶을 세상에 알려 조금이라도 저들의 처우를 개선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출간인에게 보이기 위해 트루디는 원고를 자루 안에 넣었다. 그리고 무릎 꿇고 기도를 올렸다.
“세이어시여, 비록 교단의 가르침과는 다르지만, 저는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믿습니다…….”
양손을 곱게 가슴에 포개고 약간의 긴장과 흥분 속에서 트루디가 기도를 이어 가던 때였다.
갑자기 오두막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트루디는 놀라며 눈을 뜨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구신지요?”
검은 재킷을 입은 평범한 인상의 사내였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여행자인가 싶어 트루디가 재차 입을 열었다. 신관다운 정중한 태도로 그녀가 물었다.
“저는 세이어를 섬기는 종, 트루디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이곳을 찾으셨는지?”
대답은 없었다. 사내는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트루디와 그녀가 쓴 원고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원고 위에 적힌 제목을 보더니 사내가 중얼거렸다.
“틀림없군.”
갑자기 사내가 오른손을 들었다. 트루디가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내가 낀 금속 장갑, 그곳에서 전격이 튀어 트루디를 강타했다.
번쩍!
섬광이 번뜩였다. 비록 지위는 낮지만 트루디도 엄연한 세이어의 성직자, 어느 정도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편이다. 그런데 전격은 조금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녀를 직격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트루디는 그대로 절명해 버렸다. 너무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라 죽은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조차 없었다. 그저 약간의 당혹감만이 표정의 전부였다.
트루디의 심장이 멈춘 걸 확인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리되었군.”
사내가 책상 위로 걸어가 트루디의 원고 중 한 장을 들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30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금속 막대를 꺼냈다.
막대를 횡으로 뉘이고 원고에 갖다 댄 뒤 사내가 중얼거렸다.
“스캐닝.”
막대로부터 빛의 장막이 뿜어져 원고 위를 훑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내가 원고를 놓고 빈 종이를 들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 잉크를 몇 방울 뿌린 뒤 그 위에 막대를 가져간 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프린팅.”
잉크가 춤추듯 움직이며 빈종이 위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벽하게 원고의 글씨, 트루디의 필체를 재현하며 새로운 글을 적고 있었다. 불현듯 세이어의 뜻을 느끼고 순례자로서 여행을 떠나니 찾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완벽하게 가짜 편지를 만든 뒤 사내는 원고가 든 자루를 챙겼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 혹시나 원고 내용을 따로 적은 종이가 있는지도 철저히 확인했다.
모든 흔적을 없앤 뒤 사내는 트루디의 시체를 어깨에 짊어졌다. 그리고 말없이 오두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원형으로 된 거대한 회장, 그곳에서 수많은 마법사들이 자리에 앉아 회장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앙에서는 50대 초반의 중년 사내가 거대한 도표를 옆에 띄워 놓고 마법사들을 향해 말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던전 피에타 속에서 여러 아티팩트를 찾고 또 연구했소. 그리고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소.”
이곳은 그라임 왕국의 유서 깊은 마법학회, 마라그랑드 타워였다. 할라인 왕국의 신비의회,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태양탑과 함께 대륙의 3대 마법 학회 중 한 곳이다. 새로운 마법 이론이나 새로운 은의 시대 유물의 발굴 소식 등이 모두 저 마법 학회들을 통해 세상에 공표되곤 한다.
현재 단상에 올라 연설 중인 중년 사내의 이름은 아트레스, 현 대륙에서도 열 명이 채 안 된다는 9서클의 종사자였다.
세인들은 보통 8서클의 경지를 넘어선 마법사들은 대마법사라 칭하며 높여 부르곤 한다. 대마법사로 이름 높은 아트레스는 특이한 성품으로도 유명했다. 대부분의 대마법사들은 그 경지에 오르게 되면 마탑을 세우고 제자를 키우거나 궁정 마법사로 지내며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법이다. 하지만 유독 방랑벽이 심한 아트레스는 9서클의 경지에 들어서도 던전 탐구자로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지내며 이렇듯 대륙 각지의 던전을 탐사하고 연구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던전 피에타에서 본인이 발견한 것들은…….”
아트레스가 던전 피에타의 성과를 발표할 때마다 회장에 모인 마법사들이 질시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자는 이번에도 큰 성과를 거두었군…….”
“역시 9서클의 대마법사, 단신으로 저런 위업을 이루다니…….”
사실 던전 탐사는 설사 오러 유저라 할지라도 소규모로 덤비다간 목숨을 잃고 마는 위험한 일이었다. (바실리 왕국의 어리석은 오러 유저, 알티온 경의 이야기는 제법 유명하다.) 하지만 아트레스는 9서클에 들어선 후 다른 던전 탐사자들처럼 대규모 탐사대를 꾸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전사도 신관도 없이 제자 두어 명만 데리고 던전 탐사를 행하는 그의 행보는 괴팍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지만 그만큼 이득이 엄청나게 컸다. 밑천은 들지 않고, 모든 유물을 홀로 독식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아트레스는 강력한 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그라임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갑부인 것이다.
“이 유물들의 성능과 마력 흐름에서, 기존의 마법 몇 개를 개조하여 보다 빠르고 마력 소모가 적으며 위력을 높일 수 있는 운용법의 개념을 조금 떠올릴 수 있었소.”
아트레스가 오만한 웃음을 지으며 도표를 넘겼다. 도표 위로 신 개념의 마학 이론이 포괄적으로 적혀 있었다.
천여 년 전만 해도 마법사는 절대 자신의 지식을 남에게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해 이렇게 새로운 이론을 학회를 통해 발표할 정도가 된 것이다.
서로의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마법학의 수준 역시 크게 높아져 마법사들의 숫자도 엄청나게 늘었다. 인간이 대륙의 패권을 쥐게 된 가장 큰 공로자 중 하나가 바로 저 3대 마법 학회였다.
물론 그렇다 해도 폐쇄적인 것은 여전해서, 이 발표회장에 참석할 수 있는 마법사들은 6서클 이상의 종사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또한 협회에 소속되기 위해 매년 막대한 회비를 지불해야 했다. 발표되는 마학 이론 역시 대략적인 것일 뿐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감춰진 상태였다.
지식은 곧 힘이니, 자격 있는 자만이 그것을 가질 수 있다는 마법사들의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아트레스가 목청을 높여 신 마법 이론을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이론이 기존과 다른 점은…….”
수많은 마법사들이 발표에 집중하고 있는 회장 2층 발코니, 그곳에 귀빈들만이 자리할 수 있는 로열석이 있었다. 비록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라그랑드 학회에 많은 공헌을―정확히는 기부를― 한 고위 귀족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마법사도 아닌 이상 어려운 마법 이론 따위, 들어 봤자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이 로열석은 보통 비워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두 남자가 로열석을 차지하고 진지한 얼굴로 단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청년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때는 마라그랑드도 제법 성세가 흥했었군.”
옆에 앉은 중년 귀족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무슨 소리인가, 테스론 군? 언제는 마라그랑드 학회가 망하기라도 했었나?”
“아,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이라나드 공작님.”
테스론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의 전생에서 마라그랑드 학회는 3대 학회의 명성을 잃고 꽤나 세력을 잃은 처지였다. 마라그랑드 휘하의 마탑, 델피아에서 역사상 최악의 마법사가 배출된 탓이다.
암흑제국 황제, 레펜하르트.
저 인세에 강림한 마왕을 배출한 마라그랑드 학회는 그 후 대륙의 다른 국가로부터 항시 견제를 받게 되었다. 누리고 있던 권한 대부분을 신비의회와 태양탑에 빼앗기고 학회 고위층 역시 죄인이나 다름없는 감시를 받았다. 또다시 저런 괴물이 탄생할까 두려워한 이들의 짓이었다.
‘솔직히 마라그랑드 입장에선 억울하겠지만 말이지.’
전생의 정보를 떠올리며 테스론은 피식 웃었다.
마왕 레펜하르트가 전설적인 경지에 오른 건, 순수하게 본인이 잘난 덕이지 마라그랑드 학회랑은 무관하다.
‘까놓고 말해서 그 작자는 어디에 데려다 놓았어도 결국 그 경지에 올랐을걸?’
레펜하르트가 스물일곱에 마탑에서 나올 때 6서클 후반의 마법사였던 것은, 그의 재능에 비하면 오히려 굉장히 낮은 경지라고 봐야 했다. 그의 재능을 두려워한 델피아의 마법사들이 4서클 이후로는 거의 가르침을 주지 않고 지식을 제한했었으니까.
이후 세상에 나와 제대로 마법의 지식을 접한 레펜하르트의 성장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매년 기록을 갱신하며 7서클, 8서클을 연달아 돌파하더니 결국 서른 살에 9서클 대마법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마 지식을 제한받지 않았다면 20대 초반에 마법의 극에 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가지?’
문득 테스론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마왕의 두뇌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6서클 후반에 머무르고 있었다. 은의 현자 덕분에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마법 지식을 접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이렇다. 뭔가 조금만 더 하면 7서클에 입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조금’ 나아가는 것이 영 힘들다.
‘에잉, 똑같은 두뇌를 지니고 있는데 누구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척척 경지를 올렸고, 누구는 답안지 펴 놓고도 이해를 못해 낑낑대다니…….’
따지고 보면 마왕 역시 그의 육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으니 억울할 것이야 없다만, 그래도 입맛이 썼다.
그렇게 테스론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막 아트레스가 발표를 마쳤다.
“……이걸로 새로운 마법 이론에 대한 발표를 끝마치겠소.”
마법사들이 박수를 보냈다. 새로운 마법 이론은 ‘아트레스식 마력 운용법’이라 명명하고 공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기록에 남겼다.
마법학의 역사에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은 마법사들에게 지극히 명예로운 일이다. 모두들 모두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아트레스를 바라보았다.
다음 발표를 준비하던 아트레스가 문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가 오늘의 본론이었다.
“이 대부분의 아티팩트들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 제가 성과를 보았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오.”
그가 품속에서 작은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고대어를 해독해 이름을 알아낸 고대의 아티팩트, 온기의 목걸이였다.
“이것은 온기의 목걸이, 착용자를 어떤 추운 환경에서도 최적의 체온으로 유지시켜 주는 아티팩트입니다.”
마법사들이 의아해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제껏 했던 발표에 비해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아티팩트인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트레스가 말을 이었다.
“이 온기의 목걸이는 단순히 착용자를 추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도표를 넘겼다.
“보시다시피…….”
도표에는 목걸이를 착용한 여러 샘플들의 신체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착용 전, 착용 상태, 그리고 착용 후.
목걸이를 자주 착용할수록 착용자의 신체 수치가 눈에 보이게 변화하는 것이 숫자로 명확히 적혀 있다.
“온기의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은 이라도 이렇게 체질 개선이 되어 추위에 강한 체질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법사들이 그제야 눈을 빛냈다. 착용자의 상태, 조건을 변화시키는 마법이나 마도구는 많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인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마법은, 마력이 사라지면 육체 역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육체 자체를 영구히 변화시키는 방법은 오로지 성직자의 신성 주문뿐이다.
“이 아티팩트는 착용자의 신체를 영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발동 원리는 아직 알 수 없으나…….”
테스론이 인상을 쓰며 아트레스의 손에 들린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꽤나 익숙한 물건이었다. 프리즈랜드에서 그가 직접 사용했던 그 유물이다.
“저거, 금기 물품 아니었습니까?”
“맞지, 금기 물품.”
“그런데 저렇게 발표하게 놔둬도 되나요?”
“어쩌겠나? 미리 알았다면 손을 썼겠지만, 이미 발표해 버렸는데.”
“그럼 저대로 놔둘 겁니까?”
“저자는 9서클의 마법사다. 저 정도 되는 이가 갑작스럽게 죽는 건 너무 부자연스럽지. 잘못하면 은의 현자의 존재가 드러날 위험성이 있다.”
발표 내용을 유심히 듣고 있던 이라나드 공작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품속을 매만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저 정도 지식이라면 허용 범위 내로군. 다행히 이 자리에서 저자를 암살해야 할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게 되었어.”
이라나드 공작이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발코니에 가려진 그곳에는 커다란 수정판이 있어, 회장의 모든 마법사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도 다른 온기의 목걸이는 회수해 둬야지.”
테스론도 그 수정판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진실의 창窓’이라 불리는 은의 시대 유물이었다. 미세 표정과 동공 변화 등의 생체 반응을 통해 비친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기능을 지닌 아티팩트였다.
수정 표면에 비친 마법사들 중 몇몇이 붉은 빛으로 지적되어 있었다.
“이들을 기억해 두게. 또 다른 온기의 목걸이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니.”
그들은 모두 아트레스의 발표 시 특정 반응을 보인 마법사들이었다. 쉽게 말해 ‘아, 저 유물, 나도 가지고 있는데? 저게 저런 것이었어?’라는 생각을 한 자들을 표정 변화를 통해 분류한 것이다.
마인드 리딩 등의 정신계 마법으로 강제로 기억을 읽으려 한다면 마법사들인 이상 뭔가 눈치채겠지만, 이렇게 원거리에서 모습만을 비추고 표정을 읽는 것이면 알아챌 도리가 없다.
테스론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혀를 찼다.
“은의 현자들은 참 귀찮게 일을 처리하는군요.”
이자들을 일일이 감시해 은밀하게 온기의 목걸이를 빼돌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차라리 싹 죽여 버리거나 하면 안 되나?
이라나드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기억해 두게. 모두를 잠시 속이거나, 소수를 영원히 속이는 건 쉬워도 모두를 영원히 속이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기에 아직도 세상이 은의 현자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라네.”
수정판, 진실의 창을 챙기며 이라나드 공작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류는 은의 현자의 존재를 몰라야 한다. 사실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보살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인류는 제대로 된 발전을 이룰 수 없을 테니까. 은의 현자는 어디까지나 음지에서 수호하는 존재, 인류를 이끌고 지배하는 이들이 아니다.”
아트레스의 발표가 끝나자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이 없었다. 회장 밖으로 향하며 문득 테스론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왜 온기의 목걸이가 금기 물품인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별로 대단한 성능도 아닌 것 같은데…….”
체질 개선이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 놀랍지만 그래 봤자 추위에 약하던 이가 추위에 좀 강해지는 것뿐이다. 온기의 목걸이를 평생 걸고 있다 한들, 냉기 자체에 면역이 된다거나 하는 초월적인 신체로 바꿔 주진 않는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사안인가 싶다.
이라나드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 자체로는 그리 대단하지 않지. 하지만 인간의 육체를 직접적으로 개조하는 마법은 결코 인류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순간 이라나드 공작의 눈빛이 무섭도록 가라앉았다.
“그것은 궁극으로 가면 불로불사의 길과 연결이 되니까.”
테스론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것이 가능한 거였습니까? 혹시 은의 현자 중에서도?”
“글쎄, 은의 현자들 중에서도 제한적인 불로의 힘을 지닌 자는 제법 있지. 불멸성immortality이나 영원성eternity은 무리겠지만. 자네도 운이 좋다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누구이기에?’
호기심 가득한 테스론을 바라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잠시 경계의 표정을 지었다. 그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그 이상은 알려 하지 말게. 자네의 권한 밖의 일이니.”
테스론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라나드 공작이 앞으로의 일을 당부한 뒤 앞서서 먼저 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테스론이 뺨을 긁었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건 하나 더 있었지만 아무래도 가르쳐 줄 눈치가 아니군.”
그동안 은의 현자의 명령에 따라 여러 일을 처리해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의아하게 여긴 점이 있다.
‘도대체 은의 현자들은 어떤 식으로 정보망을 운용하는 거지?’
처음에는 각국의 정보망이나 마탑의 연락을 통한다고 생각했다. 뭐, 은의 현자들이 사실은 대륙 각국의 고위층이니 저런 정보망 역시 분명 운용하고는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정보망인 것이 사실이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해명이 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프리즈랜드에서 마법사 할을 죽일 때였다.
‘분명히 그 할이란 마법사가 도중에 마탑과 연락을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미리 살카나 던전에 뭐가 있는지 알고 간 것도 아니야. 그런데 대체 아무 접점이 없는 이들의 동태를 어떻게 파악한 거지?’
은의 현자가 전지全知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만약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었다면 아트레스가 온기의 목걸이에 대해 발표하는 것을 사전에 막지 못했을 리 없다.
‘전지적일 정도로 엄청난 정보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렇게 허술한 부분이 있다. 대체 어떤 식인지 모르겠군.’
팔짱을 낀 채 테스론은 안색을 굳혔다.
은의 현자가 그에게 숨기는 비밀은 비단 이것뿐이 아니다. 비록 현자의 칭호를 받았다지만 테스론은 여전히 외부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진짜 중요한 비의는 알려 주는 일이 없고, 시키는 일 역시 자질구레한 뒤치다꺼리가 전부다.
‘이대로는 곤란해. 뭔가 상황을 바꾸어야 하는데…….’
저들의 인원이 되었음에도, 은의 현자는 겹겹이 비밀을 둘러싸고 결코 그에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은의 현자의 속살? 뭔가 미묘한 표현이 되어 버렸군.’
잠시 킥킥거린 뒤, 테스론도 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순백의 거대한 홀 아래, 수만 개의 수정이 사방의 벽을 뒤덮고 있었다. 체스 판처럼 촘촘히 연결된 수정들 위로 온갖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영상이 되어 비친다. 홀 한가운데엔 커다란 은색 기둥이 자리하고 그 밑에 데스크가 놓여 있어 십여 명의 남녀가 열심히 콘솔을 조작하는 중이었다.
수정 위에 띠워진 수만 개의 영상들, 그중 몇몇 영상들이 계속 은색 기둥 쪽으로 옮겨져 점멸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30대 외모의 금발 청년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권왕의 영향을 받고 움직이려는 이들이 많아. 당분간 바쁘겠군.”
데스크에 앉아 있던 사내 하나가 청년을 향해 말했다.
“처리된 안건들을 분류하겠습니다, 수호자 아크라이트.”
“그렇게 하시오.”
청년이 승낙을 하자 바로 점멸하는 영상들 중 수십여 개가 기둥 아래로 이동해 사라졌다. 그중에는 고해성사를 하는 한 청년의 모습과, 무엇인가를 열심히 집필 중인 여신관의 모습도 있었다.
금발의 청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희생된 저들에겐 좀 미안하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일, 그것을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다. 수호자 아크라이트는 이내 찜찜한 감정을 떨치고 다시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영상을 비추는 거대한 순백의 홀, 이것은 은의 현자가 가진 가장 강력한 아티팩트 중 하나인 ‘세이어의 눈’이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세이어의 신관들, 세이어의 이름으로 신성력을 구사하는 이들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이 아티팩트를 통해 은의 현자에게 전해진다. 신관이 아닌 평범한 신자라 할지라도 세이어에게 기도를 올리는 동안만은 ‘세이어의 눈’과 연결되어, 그들의 눈과 귀가 곧 은의 현자의 정보망이 된다.
이 ‘세이어의 눈’이 바로 은의 현자가 세상을 암중에 지배할 수 있는 가장 큰 힘 중 하나였다.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세이어의 신관과 신자들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정보원이 되어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제공하니 실로 신의 권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권왕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단 말이지. 주위에 영 세이어를 믿는 자들이 없으니…… 이 친구, 세이어 교단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나?’
금발의 청년, 수호자 아크라이트는 은빛 기둥에 비친 영상들을 살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세이어의 눈’이 기적에 가까운 권능을 지닌 아티팩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제약도 있었다. 오직 세이어의 신관과 신자들에게만 그 영향력을 발휘하니, 세이어의 교세 밖에 있는 자들은 완벽하게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긴, 노예 종족에 대해 저런 사상을 지니고 있으니 제대로 된 세이어의 신관이라면 그를 가까이 할 리가 없겠지.’
잠깐 투덜거렸지만 청년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어차피 ‘세이어의 눈’만이 은의 현자가 가진 모든 정보력은 아니다. 은의 현자에 소속되어 있는 각국의 고위층, 그들이 자체적으로 가진 정보망도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면 될 문제였다.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내 임무는 그자로부터 비롯된 영향을 사전에 방지하는 일뿐이니까.’
레펜하르트에 대해 신경을 끈 뒤, 청년은 계속 은빛 기둥의 영상들을 검토했다.
‘세이어의 눈’이 파악하는 정보의 양은 막대하다. 도저히 몇몇 인간의 힘으로 모든 정보를 검토할 수 있을 리 없다. 그 수많은 정보들을 자동으로 분류해 주는 것이 바로 중앙의 은색 기둥, ‘세이어의 율법’이었다.
기둥의 표면 위로 계속 영상들이 비친다. ‘세이어의 율법’이 걸러 준, 인류의 수호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된 정보들이었다. 영상을 살피며 금발의 청년은 몇몇은 기각시키고 몇몇은 처리 안건에 올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청년의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호자 아크라이트.”
금발의 청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1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은발의 소녀가 순백의 로브를 걸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호자 세렐라인, 그대가 어쩐 일로 여기에?”
“그냥 잠시 들렀을 뿐이야.”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한 뒤 소녀가 은색 기둥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른 볼일이 있는 김에 잠깐 상황을 살피러 온 모양이었다.
청년이 어깨를 으쓱이며 소녀에게 물었다.
“권왕 레펜하르트에 대한 일은 잘 처리하고 있나?”
기둥 위 영상에서 눈을 떼며 소녀가 별것 아니란 어조로 대꾸했다.
“그대의 동생을 보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권왕은 오러 유저일 뿐, 고대의 마법으로 무장한 그의 상대는 되지 못할 테지.”
차가운 표정으로 소녀가 다시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갔다. 완전히 모습을 감춘 상대를 보며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오러 유저일 뿐이라고?”
청년이 기둥 앞 데스크로 다가가 콘솔을 매만졌다. 잠시 후, 기둥 위로 전투를 담은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세이어의 성기사, 크리스틴의 시야에 비친 두 남자의 전투 영상이었다.
그걸 보며 청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친구, 마법 쓰는데?”
2
높이가 10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석실, 그 중앙에 아치 형태의 문이 놓여 있었다.
무릇 문이라는 것은 가로막힌 벽 사이를 오가기 위한 통로로써의 역할을 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치형 문은 좀 이상한 구조였다. 좌우로 어떤 벽도 없이 덜렁 문만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틀림없는 ‘문’이었다. 이 아치는 단순한 문이 아니라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위대한 은의 시대 유물, 클로이 다이만 포털이었으니까.
웅웅웅!
조용하던 아치 형태의 문 안쪽에서 희미한 소음이 일어나며 이내 눈부신 빛을 뿜었다.
잠시 후, 그 빛 속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걸어 나왔다. 녹색 피부의 건장한 오크와 귀엽게 생긴 적발의 소년,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흉터투성이의 오크들이었다.
오크들이 석실을 살펴보더니, 놀란 얼굴로 웅성거렸다.
“여, 여긴 대체?”
“이럴 수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장소였는데?”
이들은 그라임 왕국 서부에서 탈출한 오크 검투사들이었다. 타시드와 실란의 인도에 따라 인간들의 도시를 탈주, 세텔라드 산맥까지 도망친 뒤 다이만 터미널의 공간 포털을 통해 이곳, 글로텐 산맥의 클로이 던전까지 온 것이다.
오크들을 문에서 떨어지게 한 뒤 적발의 소년이 품에서 작은 돌을 하나 꺼냈다. 포털의 빛을 향해 돌을 가져가며 소년이 중얼거렸다.
“사용자, 실란 필 마르시스. 인증번호 352525. 락다운lockdown.”
돌 표면에서 룬 문자가 떠올라 공간 포털에 빛을 뿜었다. 소용돌이치는 빛 무리가 이내 사그라지며 다시 평범한 아치형 문으로 바뀌었다. 키 스톤을 다시 품에 넣은 뒤 실란이 힐끔 오크 검투사들을 바라보았다.
실란이 녹색의 오크, 타시드에게 살며시 속삭였다.
“이 공간 포털, 비밀로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아는 사람이 늘어나도 되려나?”
타시드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공간 포털을 쓰지 않으면 저들을 이리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가 없지 않은가?”
지난 두 달간, 레펜하르트와 그의 동료들은 수많은 이종족 노예들을 구출해 안타레스 백국으로 데려왔다. 물론 소중한 재산을 잃은 인간들이 가만있을 리 없으니 당연히 그때마다 추적대가 조직되어 도망친 노예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도망친 노예들을 붙잡은 인간들은 아무도 없었다. 달아난 노예들의 흔적이 죄다 몬스터가 들끓는 오지 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추적대들은 당황했다.
오지는 사람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오지인 법이다. 아무리 인간이 두렵다 한들, 몬스터가 들끓는 험지로 향하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전에도 가끔 탈주 노예들이 있었지만 감히 오지 쪽으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인적 드문 산속에 숨어 지내며 지나가는 행인을 털어 연명하다가, 결국 군대에 토벌당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지 저런 식으로 도망가 버린 것이다.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추적대들은 달아난 노예들을 포기했다. 오지 너머까지 저들을 쫓기엔 너무 위험 요소가 많았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놈들, 모두 죽은 셈 치고 포기했다. 공간 포털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저들이 저런 판단을 내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만큼, 외부에 포털의 존재가 알려지면 곤란할 텐데…… 비밀로 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포털의 존재를 알고 있고…… 하지만 비밀을 지키겠다고 소수만 저 포털을 사용하게 해서는 좋은 이동 방식을 제대로 활용 못 하는 격이고…….”
중얼거리는 실란을 보며 타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실란의 등을 툭 치며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은인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나는 그분을 믿네.”
“아니, 나도 안 믿는다는 건 아닌데…… 레펜 씨가 꼼꼼해 보이면서도 은근 허술한 데가 많아서…….”
연신 구시렁대는 실란의 모습에 타시드가 피식거렸다.
“뭐, 그런 걱정은 내가 할 몫이 아니지. 나는 그저 그분을 믿고 따를 뿐.”
그리고 오크 검투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자! 다들 따라오시오!”
타시드와 실란이 앞장서 석실 밖으로 나섰다. 오크들이 긴장 반, 흥분 반의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 ☆
한때 온갖 마물과 악마들이 들끓었던 던전 클로이.
하지만 지금 클로이 던전은 말끔히 청소된 후였다. 안타레스 백국이 외부와 소통하는 중요한 거점인 만큼 계속 몬스터들이 들끓게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다.
던전 입구를 구성하는 허물어진 건물은 드워프들에 의해 보수되어 멀쩡한 외관으로 변했고, 공간 포털까지 이어지는 통로 역시 더없이 안전한 상태였다. 주위 몬스터들을 모두 소탕해 백왕성까지의 통행로 역시 확보했다. 지상으로 통하는 입구 건물 주위로 병영과 막사를 세우고 주위를 높은 담으로 둘렀으니, 이제 이곳은 더 이상 던전이 아닌 훌륭한 요새였다.
클로이 가드라 명명된 이 투박한 요새 속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크아아!”
“카오오오!”
넓은 연병장 위에서 수백 명의 오크들이 땀범벅이 되어 무기를 휘두른다. 하나같이 다루기도 벅찰 만큼 거대한 거검이나 도끼, 해머들뿐이다. 힘겹게 손에 든 무기를 휘두른 오크들이 숨을 헐떡이며 두 팔을 벌벌 떨었다. 평생을 전투와 단련만으로 보낸 그들에게도 이 무기들은 너무도 크고 무거웠다.
힘겨워하는 오크들의 머리 위로 추상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이 정도로 우는 소리 해서야 진정한 전사가 될 수 있겠는가!”
호통을 터트린 단상 위의 흉터투성이 오크, 탈카타를 바라보며 오크들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탈카타가 등에 찬 대검을 번쩍 들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도 그대들과 다르지 않다.”
대검을 허공으로 던진다. 검풍이 불며 웅웅거리는 소음과 함께 대검이 연병장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폭음이 울리며 대검이 저만치 떨어진 땅바닥에 강렬하게 꽂혔다. 탈카타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와라! 스칸달!”
대검, 스칸달이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며 탈카타에게로 날아가 그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자신의 맹우, 영혼이 소통하는 자신만의 무기를 번쩍 들어 보이며 탈카타가 모두를 독려했다.
“보라! 이것이 진정한 오크의 힘이다! 그대들도 할 수 있다!”
오크들의 눈빛이 변했다. 기합을 터트리며 다시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아아!”
“크아아아!”
이들은 대륙 각지에서 도망친 오크 검투사들이었다.
레펜하르트는 구출한 오크 검투사들을 한 부대로 편성한 뒤 탈카타로 하여금 이들을 이끌게 했다. 처음부터 푸른 곰 부족의 휘하로 오크 검투사들을 집어넣어 버리면 불화가 생길 위험이 있다. 하지만 탈카타는 이들과 같은 검투사 출신, 80전 이상의 승리를 거두고 무사히 은퇴한 존경할 만한 선배인 것이다. 오크 검투사들도 탈카타의 권위를 존중해 순순히 그의 명령을 따랐다.
땀 흘리는 오크들의 머리 위로 탈카타의 외침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손에 쥔 무기가 어색하고 다루기 힘들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지금 손에 들린 그것이야말로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벗이다! 이제까지 휘둘렀던 모든 무기는 잊어라!”
“네!”
“알겠습니다, 탈카타 대장!”
오크 검투사들이 이곳에 합류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푸른 곰 부족으로부터 그들만의 무기를 부여받는 것이었다.
오크들의 비전, 스피리츠 웨폰은 아무 무기로나 구현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무기아비의 집중된 사념이 깃들어야 비로소 영혼이 소통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 이들이 휘두르는 모든 검과 도끼, 망치들은 그랄타를 비롯한 푸른 곰 부족의 무기아비들이 심혈을 기울여 벼려 낸, 오크만의 무기였다.
지나치게 거대하고 육중한 무기에, 이제껏 익힌 것과는 전혀 다른 무기술.
인간의 무기에 익숙해진 오크 검투사들이기에 처음에는 어색해했다. 하지만 반발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다들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그들과 같은 검투사 출신인 탈카타가 직접 그 위력을 보이는 것을. 자신도 저 위대한 조상들의 비전을 익히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더더욱 구슬땀을 흘릴 뿐이다.
탈카타 곁으로 쌍검을 찬 오크 전사 한 명이 다가왔다. 연병장을 훑어보며 그가 감탄을 흘렸다.
“다들 노력이 대단하군요. 이 수련 강도라면 우리 부족의 전사들에게도 쉽지 않을 터인데.”
탈카타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투기장에서도 다들 이 정도 단련은 언제나 해 왔다오, 잘카토 형제. 무엇보다 지금은 희망이 있지 않소? 자유라는 희망이.”
잘카토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정도로 열정적이니 우리도 가르치는 맛이 납니다, 하하.”
잘카토는 몇몇 푸른 곰 부족의 다른 전사들과 함께 이곳에 파견 나와 있었다. 오크 검투사들에게 스피리츠 웨폰을 가르치기 위한 교관 역할이었다. 탈카타가 비록 스피리츠 웨폰을 터득하긴 했지만, 역시 수련 시간이 너무 짧아 아직 경지가 낮았다. 제대로 가르치려면 역시 숙련된 이들이 필요했다.
연병장 여기저기서 교관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선택한 영혼의 벗을 믿어라!”
“영혼의 울림을 들어라!”
“깨달아라! 손에 든 검이 바로 네 자신임을!”
연병장을 가득 메우는 오크들의 열기를 느끼며 탈카타가 감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우리들은 강해질 것이오.”
죽을 것 같은 수련 시간 사이에 잠깐의 휴식이 주어졌다. 오크들이 연병장 여기저기 퍼진 채 가쁜 숨을 헐떡였다. 그들 사이로 걸어가며 탈카타가 물었다.
“힘드냐?”
무기를 쥔 채, 젊은 오크 하나가 대꾸했다.
“솔직히, 힘들긴 하군요.”
투기장에서도 온갖 단련을 해 온 그였지만, 이곳의 수련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진정한 전사가 되겠다는 꿈이 없었다면 예전에 쓰러져 버렸을 것 같았다.
탈카타가 실소를 흘렸다.
“이 정도는 약과야. 대모님 손에 걸렸으면 네놈들 전부 피똥 쌌다.”
불현듯 스탈라 밑에서 행했던 ‘고행’이 떠올라 탈카타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젊은 오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대모란 오크가 무슨 짓을 했기에 저 용맹한 노검투사의 표정에 저리도 공포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으, 그건 진짜 지옥이었지. 암, 지옥이지.”
심지어 잘카토와 다른 교관들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그 덕에 이렇게 빨리 맹우와 영혼을 통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 음.”
질린 표정을 짓던 탈카타가 문득 다른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게으름 피울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대모님께서 말씀하시길, 진도 느린 놈들은 자신께서 친히 보살핀다고 하셨으니까.”
오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잘은 모르겠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절대 저 ‘대모님’ 선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도 하나 둘 다시 무기를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클로이 던전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입구를 통해 타시드와 실란, 그리고 한 무리의 오크 검투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구려, 카루가 타시드!”
반색을 하며 탈카타가 달려가 그들을 맞이했다. 비록 나이는 자신보다 한참 어리지만, 탈카타는 투혼의 축복을 받은 이 젊은 오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타시드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등 뒤를 손짓했다.
“자, 신참 받으쇼.”
수많은 동족들을 바라보며 뒤따르는 오크 검투사들이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주저앉아 있던 연병장의 오크들이 하나둘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
“오! 이 친구들이 이번 신병들인가?”
“자유의 땅에 잘 왔다, 형제들.”
어색해하면서도 오크 검투사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말로만 듣던 자유로운 오크들을 보니 절로 흥분된 것이다. 잘카토가 그들을 손짓해 불렀다.
“이리 오시오, 형제들이여. 그대들이 알아야 할 사항이 있으니.”
그렇게 잘카토가 오크 검투사들을 이끌고 연병장 너머로 향했다. 남은 탈카타에게 실란이 물었다.
“레펜 씨는 백왕성에 있나요? 아니면 또 시리스랑 엘프 구출하러 갔으려나?”
“아니오, 백왕님께선 지금 전장에 계십니다.”
“엥? 전장? 안타레스 백국 어디랑 싸움 났어요?”
“그건 아니고…….”
머리를 벅벅 긁은 뒤, 탈카타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한 손 거들러 가셨다던데요?”
☆ ☆ ☆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메마른 대지, 작은 시골 마을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가옥을 뒤로한 채 촌민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 다니고 중무장을 한 백여 명의 용병들이 그 뒤를 쫓는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악!”
“신이시여!”
절규를 터트리는 노인의 등 뒤로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깊숙이 박혔다. 절명한 마을 노인으로부터 검을 거둔 뒤 거친 인상의 중년 용병이 고함을 질렀다.
“체타스 남작님의 명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지도에서 지워라!”
“맡겨 주쇼, 레콜트 단장!”
“이런 거야 우리 전공 아니겠소? 으히히히!”
용병들이 희희낙락하며 마을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시골 마을을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만든 이들은 크로방스 왕국 남부와 바실리 왕국 북부에서 악명을 떨치는 로커스트 용병단이었다.
지나치게 흉폭하고 잔인하여 같은 용병들조차 기피하는 이들, 지나간 자리에 풀뿌리 하나 남지 않아 마치 메뚜기 떼locust가 쓸고 지나간 것 같다 하여 저런 이름이 붙었다. 경멸이 담긴 칭호인데도 오히려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 부대명으로 삼은 자들이다.
“크하하하!”
“사내놈은 모두 죽여라!”
“계집은 범하고 죽여라!”
“애새끼 따윈 쓸모없다! 다 죽여 버려!”
험악한 용병들이 살의로 눈을 번들거리며 마을 주민들을 쫓아간다. 그중에는 딸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부부의 모습도 있었다. 도주로가 막히자 남편이 용병들을 향해 목숨을 구걸했다.
“제, 제발 살려 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날이 남자의 가슴을 깊게 베어 갔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남편의 모습에 아낙이 눈물을 쏟았다.
“여보!”
“아빠아아아!”
“어차피 죽을 놈들이 시끄럽다!”
용병이 아낙을 후려갈겨 쓰러트린다. 다른 용병 사내가 쓰러진 아낙을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허리춤을 풀며 그가 눈을 번득였다.
“시골 촌년치고 제법 얼굴이 반반한데?”
“운이 좋군.”
“흐흐흐…….”
사내는 죽이고 여인은 범하는 것, 이는 로커스트 용병단이 언제나 해 오던 짓이었다. 당연히 죄책감 따위 느끼는 자들도 없었다. 음욕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며 여인이 벌벌 떨었다.
“아아…… 제발 자비를…….”
“내 사전에 자비란 단어는 없다!”
용병 사내가 비웃음을 던지며 장난스럽게 외쳤다.
“어이, 계집. 맞고 벗을래, 벗고 맞을래?”
“저 변태 새끼, 또 성격 나왔군.”
“킬킬킬…….”
곧 다가올 지옥을 떠올리며 여인이 모든 희망을 버렸을 때였다.
휘잉…….
부드러운 미풍이 불었다.
여인은 눈을 깜빡였다. 잠깐 불어온 바람이 눈을 간질여 무심코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다. 그런데 그사이 눈앞의 광경이 변해 있었다.
“……아?”
눈을 부릅뜬 채, 모든 용병들의 목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아니, 잘 보니 뒤틀린 것이 아니었다. 전원 목이 반쯤 잘려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푸아아악!
곧이어 피분수와 함께 용병들이 뒤로 넘어졌다. 당황한 여인의 등 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를 데리고 피하세요.”
여인은 고개를